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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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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posted by 작은책
2020. 3. 25. 15:49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코로나19 확산 속도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지난 314, ‘신규 확진자가 107, 완치된 사람들이 204이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완치자가 확진자 수를 넘어서 조금 안정이 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 정부의 감염병 대처 방식은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잘 하는 편입니다. 신천지 신도 일부를 제외한 성숙한 시민들도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구 언론은 코로나19 때문에 대구나 인천 송도가 유령도시가 돼 가고 있다는 등 과장된 뉴스를 쏟아내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작은책> 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에는 김용심 작가가 조선 시대에 돌던 갖가지 전염병, 역병에 관련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흉년과 역병이 한참이던 때 연산군은 구휼미를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고 하는 등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역질에 걸려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 역사를 보면서 수구보수당 황교안 대표나 심재철 원내대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코로나19 대책 긴급 추경 예산을 가지고 현금 살포 포퓰리즘이라는 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딴죽을 걸고 있기 때문일까요?

4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코로나19 소식에 묻혀 후보가 누군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어떻게 되는지,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못된 정치가들은 코로나19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누가 정말 나라를 위하고, 서민을 위하는 국회의원인지 잘 뽑아야 합니다.

 

2020317

발행인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김용심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18 예약 말고 즉시콜? 최숙하

22 누가 쪼잔한 건지 모르겠다 이근제

26 인도 델리 버스의 커튼 신혜정

31 부억때기 송필경

34 뱃살의 원흉 이동수와 최해옥

40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코로나19 집밥 윤혜신

46 살아온 이야기

4, 누구나 상처는 있다 김수련

52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53 시 읽고 감상하기 박영수

56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61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덕분입니다 권해진

 

일터 이야기

65 일터 탐방_ 서울대병원

병원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법 명숙

71 일터에서 온 소식

번드르르한 방송사, 속은 썩었다 김기영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실업급여, 나도 받을 수 있다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문지영

81 분리수거하면 세상이 바뀌나? 지금은유지향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이토록 장엄한 아름다움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거리두기, 최선입니까?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올려 보아 주시오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올해 4월은 잔인할까?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성과 장치는 죽음조차 개인화한다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조선의 타임캡슐, 백자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가정사에 스며 있는 베트남전쟁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2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습니다

김훈규 / 거창 농부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다

몇 년을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할매 수십 년 농민 데모판을 따라나섰던 할매다

여성 농민들 행사나 데모하러 가도 착실히 참석했던 할매다

농민회 하는 자식 도와주는 거는 이것밖에 없다며 자식보다 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닌 할매다

자식이 데모 못 가면 자식 대신 해서라도 참석하신 할매다

예비군 훈련 대신 참석했다는 노모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어도 자식 대신 데모하러 가는 할매는 처음 봤다

그 할매가 북상댁 할매다

 

한칠레 FTA 싸울 때 1년에 서울을 100번도 더 오르락거릴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단식 농성 제일 많을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농민회 제일 살판나게 잘 돌아갈 때 제일 신명나게 싸울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북상댁 할매는 그럴 때마다 회원들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많이 도와주소. 우리 아들.

단디 하소. 단디 하소. 자식 같은 농민회 회원들아, 단디 하소.”

야무치게도 당부를 하셨다

회원도 간부도 아닌 할매는 세상 돌아가는 처지를 더 빤히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 포기하고 자꾸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북상댁 할매 앓아눕고 나서 그 농민회장도 바깥출입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누워 계시려니 했는데

어제 세상을 버렸다 연락이 왔다

 

문상객도 파하고 상주도 한잔 술에 노곤한 야심한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 총각 때부터 자식 도와주는 짓이라고 데모하는 데 다 따라나서 준 우리 엄마. 도와주는 것보단 자식 걱정이 앞서 내보다 데모 더 많이 다닌 우리 엄마. 한미 FTA 싸움도 내보다 더 할 말이 많았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는 없소.”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옛날 농민회장이 지금 농민회장 앞에서 반술 취한 넋두리를 한다

지금 농민회장은 옛날 농민회장 앞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버스 타고 지독히도 서울을 오르락거리던 할매 할배들이

문디 같은 세상!”

외마디 부르짖고는 그냥… 자… 세상을 버린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농사일이 없어서

꿈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냥 방 안에서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만 켜고 자다가

세상을 버리는 할배 할매들이 너무 많다

기껏해야 대통령하고 비슷한 나이인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마스크 쓰시고 하이 파이브도 하면 안 돼요.”

개학을 앞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 때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떠올리며 마스크 쓰고 아침맞이하러 나섰어. 답답하지만 어쩌겠어. 어제로 확진자 15, 하루 새 3명이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하루에 수십 명 나오는 판인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이러스 숙주 노릇을 한다면 어째.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방역하느라 이 난리잖아.

마스크를 쓰고 아침맞이를 하니 숨 쉬기 불편한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 표정을 못 보니 답답해. 마스크로 가려도 어느 정도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늘 이 순간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답답한 거지. 마치 아이와 나 사이를 콘크리트 벽이 막고 있는 것 같아.



아침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모든 게 내겐 자극이야. 표정, 몸짓, 가방, 온갖 준비물, 옷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온몸이 자극이지. 그리고 혼자 오는지 누구랑 함께 오는지도. 아침맞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자극이 짧은 5초 안팎의 순간에 날 건드리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극 안에 담긴 많은 이야깃거리가 내 생각과 상상력을 흔들거든.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 살면서 특히 교직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이 스멀스멀, 불쑥 솟아오르도록 건드리거든.

그런데 아이들과 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오늘은 이 자극이 달라. 미세먼지가 안 좋을 때도 마스크를 쓰지만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온 적은 없지. 그동안의 아침맞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질 않아. 멀리서 걸어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벌써 아이도 나도 표정이 달라지고 마음에 물결이 이는데 코앞에 와도 그 느낌이 없다니. 어색할 정도로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웃고 말도 거는데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안 와. 나도 말만 요란하지 울림이 없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것과 안 가린 게 이렇게 다르다니.

거기다 손으로 바이러스 옮길까 봐 하이 파이브를 안 하니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인사 자세만은 하이 파이브 할 때보다 더 깍듯해.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거든. 하지만 단지 인사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별다른 느낌이 없어. 무덤덤하고 답답해.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면 좋은 교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나 모두의 마음에 물결이라고 할까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 재미가 없어. 이런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아침맞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드네. 시간은 안 가고 지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이틀 새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 표정 못 읽는다고 푸념 늘어놔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맞췄어. 좀 어색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뚫어져라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 표정은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그 말도 마스크 없을 때 이야기지 헛말이더라고. 아무리 눈을 맞춰도 느낌이 예전과 달라. 예전 같으면 아이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힘이 넘치네.’, ‘즐겁고 밝구나.’, ‘어쩌면 저렇게 생동생동할까?’, ‘따스하고 푸근하구나.’, ‘저 어두움을 어째.’, ‘의욕이 없네.’ 이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한 방에 내게 와.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뿌연 안갯속이라 안 보여.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내 기운을 못 느낄 거고.

안 되겠어. 아이들 상태를 읽어 내려 매달릴 게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확실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기로 했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짝살짝 눈을 맞추면서 모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지. 표정이나 눈빛 대신에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야깃거리가 걸리면 목이 아프더라도 크게 말을 걸었어.

! 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어울린다.”

개학한다고 머리 깔끔하게 다듬었구나. 좋아 보인다.”

머리 누가 묶어 주셨어? 와우! 정성이 느껴져.”

운동화 새로 했네.”

오빠 동생 오누이가 패딩을 샀구나.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다. 좋겠다.”

목도리가 눈에 띈다. 따스해 보여.”

오빠는 왜 안 보여?”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엄마랑 안 오고 동생 손잡고 오네. ! 이제 엄마 없이 너희 둘이 등교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와우!”

이것도 안 되겠어. 마스크가 가로막아 목만 아프지 내 말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아. 설령 내 말이 전해져도 말하는 순간 표정을 서로 읽지 못 하니 차라리 그냥 인사나 정성껏 하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던지기만 하지 주고받을 수도 없는 데다가 누구에겐 말 걸고 누구는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더구나 날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 오래 할 일은 아니야. 아이들과 학부모가 겉치장에 신경 쓰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라. 한두 번은 몰라도 오래 쓸 방법은 아니네.

마스크 쓰고도 겉이 아니라 속을 읽고 느낄 방법을 얼른 찾아야겠어. 그래야 마음을 주고받지. 느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아침맞이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순식간에 서로를 느끼고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얼른 마스크를 걷어 내야 하는데. 이놈의 마스크를 어쩌나. 안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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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 14:42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3월호를 만드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영남대의료원 본관 옥상 70미터 높이에서 227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대구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 씨가 사측과 합의해서 내려왔습니다. 건강이 악화돼 107일 만에 내려왔던 송영숙 씨와 함께 해고 13년만에 원직 복직하고, 노조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됐습니다. 정년을 1년 남겨둔 박문진 씨는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위로금을 받고 곧바로 퇴직하기로 했습니다.

노조 활동을 보장받는데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사회는 언제나 바뀔까요. 그보다 더 오래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 내려올 수 있을까요? 강남역 사거리 CCTV철탑에서 253일째 (217일 현재) 고공농성 중인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도 지상으로 내려와서 복직하는 날이 올까요? 현재 파기환송심 재판을 받고 있는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정당한 죗값을 받아야 내려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달에 ‘<작은책>이 만난 사람은 삼표레미콘 운전사 최만선 씨입니다. 노동자이면서 차주라는 이유로 노동자가 되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 장애등급 4급인 최만선 씨는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을까요. ‘부자 되기 포기를 좌우명으로 삼으니 간땡이가 부어 겁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꼴값은 하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반어법으로 한, 그이의 말은 뜬구름 잡는 어떤 철학보다도 사유가 깊은 심오한 철학처럼 들립니다.

 

2020217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의 영원한 역적 천재 허균 이동수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19 몸은 달라도 사랑은최숙하

23 돈 얘기가 먼저부끄러웠다 최성희

27 그림일기를 시작했다 최해옥과 이동수

33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오곡밥과 나물 윤혜신

39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40 살아온 이야기

파리 근교에서 동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수련

47 시 읽고 감상하기 신경현

50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55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효도하는 법 권해진

59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코레일 고객상담센터

동일 유사 업무가 대체 뭐래? 명숙

68 일터에서 온 소식

현장 노동자는 감염 예방 방법을 알고 있다 이향춘

73 작은책 법률 상담소

창작자를 보호하라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최만선

77 꼴값은 하고 산다 안건모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이별의 순간, 한 남자와 두 여자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상상하는 자와 팔로우하는 자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이날 약속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살인 기업의 노동 시간은?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분청사기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영화로 소망을 이루는 방법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왜 정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키는가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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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자회사만 고집하는 한국가스공사

박인국/ 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 인천기지 지회장

 

  

한국가스공사 인천기지에 미화원으로 근무한 지 9년차가 되어 갑니다. 20175월 문재인 정권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발표가 있은 후 지금까지 한국가스공사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바른 정규직 전환을 위해 20179월에 노동조합을 만들 당시만 해도, 희망이 보였습니다. 미화원이라고 하여 단순 미화가 아니고, 청소와 예초, 제초 작업, 집기류 이동 등 관리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였습니다. 급여가 삭감되어도 말을 못했고, 소장의 갑질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흐름에 따라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은 전국에 본사를 포함하여 15군데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만 1400여 명에 달합니다. 그래서 지부를 두고 지회를 만들고 지회장, 대의원을 선출하였습니다. 대구 본사에 지회장들이 모여 비정규직 직종을 비서, 기사, 캐드 업무를 하는 파견직과 시설, 미화, 소방, 특경, 전산, 홍보 7개 직종으로 구분하고 직종 대표인 지부장을 선출하였습니다. 공공운수노조 각 지역 국장님이나 본부장님을 통하여 교육을 받고, 공공운수노조의 도움을 받아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201711월에 1차 회의를 하기 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을 상대로 노동조합 설립 취지와 노동조합이 앞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별도 직군, 별도 임금, 별도 예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한국가스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였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시험을 치르고, 호봉을 받고, 성과금을 받는 정규직분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사전에 논의를 하고 합의를 하여 공사에 요구했지만, 공사는 자회사만을 고집하였습니다.

한국가스공사 앞 천막 농성장에 걸린 현수막.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전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파견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계약이 만료되어, 정규직 전환 대상자라는 종이 한 장 받고 퇴사하여 전환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고, 전산 직종에 근무하시는 분들 중 일부는 전환 제외 대상이라고 해서 노동청 중앙컨설팅에 의뢰를 했더니 전환 대상자이며, 직접고용해야 된다는 답도 받았습니다. 공사 사장이 공석일 때는 사장이 없다는 핑계로, 인사이동 철에는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핑계로 지루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20189월 처음으로 3일간 파업을 진행했지만 얻은 것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12차 노사전 회의를 기점으로 공사와 전환 회의를 중지하고, 각 직종별 처우 개선을 위한 실무 협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경우 급여 삭감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저희는 단순 미화가 아닌 시설 미화이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임금 설계를 요청하며, 정규직 전환 발표 후 정년퇴직 등으로 나가신 자리에 인력 충원이 안 되고 있어 충원을 요청했습니다.

공사는 순환 보직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동안 담당을 하는 관계로 전 담당자의 설계 취지를 확인 안 하는 것인지, 노동조합이 있음에도 아무런 개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기존 용역업체와 계약이 만료되어 신규 입찰 과정에서 임금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력 충원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관리소가 늘고, 정규직이 늘어서 더 충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간 자리에 충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 사측은 타 공공기관보다 많은 인력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미화 인력에 대한 조사를 하니, 단순 청소만 하는 미화고 공사와 같이 청소 업무와 조경 관리를 같이 하는 곳이 없었으며, 건물 청소의 경우도 건물관리위생협회의 기준보다 적은 인원으로 미화 작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20195월에 다시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임금체계가 바뀌어 남녀 간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지고, 남자의 경우 실적급 정산이라는 수당이 생기면서 조합원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노조에서 남녀 기본급이 상이하니 같이 맞춰 달라는 요구에는 남자의 임금이 총액으로는 많으니 문제없다고 하고, 최저임금은 통상임금으로 따지니 상여금 300퍼센트를 12개로 나누어 지급한다는 것을 월 25퍼센트 지급으로 바꾸어 통상임금에 산입되게 하는 등 사측의 만행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부에 건의를 하여, 2019129일 대구 본사 앞에 미화 조합원의 설움을 알리는 투쟁 천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투쟁 천막 설치와 동시에 총무부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이름만 없다뿐이지 자기를 욕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못하고 투쟁 천막을 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저희는 담당자 분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말하고, 총무부장의 빠른 결론 촉구를 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문제는 새로운 임금 설계와 인력 충원이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비정규직 전환 요구에 대해서 사측은 아직도 답이 없습니다. 우리 비정규직 노조는 일방적인 직고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회사안도 하나의 조건만 성립이 되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회사의 경우 모회사와 교섭을 할 수 있는 교섭권을 보장한다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으며, 설립과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산업통상자원부의 자회사 운영 평가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 등을 사측에 요구하였지만 제대로 된 자료를 안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물며 직접고용시 정부의 전환 가이드라인에 나오는 권고 사항도 무시한다는 발언을 하여 15차 노사전 회의와 2번의 실무 협의를 마지막으로 중단을 하였으며, 사측의 성의 있는 자료가 나올 때까지 우리 나름의 투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 지난 12일 한국가스공사 시무식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구 본사에서 게릴라 파업을 벌였다.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이에 지난 12일 본사 조합원만으로 게릴라 파업을 진행하여 2020년 시무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0110일 기준 투쟁 천막 33일차, 정규직 전환 요구 선전전 634일차를 보내면서 한국가스공사의 성의 있는 자세를 요청하며, 한 명의 조합원으로서 정규직 전환이 희망 고문이 안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지난 2월 10일부터 가스공자 비정규지부는 전면 파업 중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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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세상 보기

옛 그림 속 여성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종수/ 미술사학자, 조선회화실록저자

 

  

이 무덤은 특별합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수많은 벽화고분 가운데 묘 주인이 확실한 유일한 무덤입니다. 연대까지도 확실하죠. 408. 앞서 보았던 안악3호분의 경우, 많은 정보를 주긴 했지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묵서명에 이름을 남긴 동수가 무덤의 주인인지 등등,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까닭에 여주인의 신분 또한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지요.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런데 안악3호분으로부터 약 반세기 후,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품고 있는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무덤 안 벽화 사이에 남겨진 명문을 보자면, 그 내용인즉, 영락(永樂) 18, 즉 광개토대왕 시대인 408년에, 유주 자사 등등을 역임했던 진()이라는 남자가 77세까지 잘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주 자사라면 지방 태수에 해당하는 지위이니 진의 무덤은 5세기, 고구려가 한창 잘나가던 시대의 지배층 무덤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무덤 안 가득 벽화로 장식되었으니 당연히 무덤 주인 부부의 초상화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앞 시대의 안악3호분과는 달리, 무덤 주인 부부가 한 장면에 나란히 앉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덤 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었죠. 묘주 부부 초상화를 측실에 그렸던 안악3호분과는 묘실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인데요. 측실이 사라진 5세기에 이르면 묘 주인의 초상화는 현실(玄室, 무덤방)의 북쪽 벽면에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을 상석(上席)에 모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덕흥리 벽화고분의 현실 북벽에는 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없었던 것일까 싶지만,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 남성이 미혼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만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명문 기록을 보면 자손들의 영달을 기원하는 내용이 더해져 있습니다. 진은 여느 고구려의 상류층 남성들처럼 자손을 둔, 다시 말해 기혼자였던 것입니다.

벽화의 원래 계획이 단독 초상일 리도 없습니다. 남주 혼자 벽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명백히 그 옆자리가 비어있지요. (선으로 모사한 그림을 보면 이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진의 옆으로는 그를 위해 대기 중인 말 한 마리, 그리고 시중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진과 나란해야 할 배우자의 자리는 비어 있고, 장방 바깥쪽으로 여주를 위해 준비해 둔 수레 하나와 시녀들이 대기 중일 뿐입니다. 진의 아내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선 모사도).


궁금합니다. 진이 홀로 그려져야 했던 이유. 저 영원의 세상에서도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배층 남성이 무덤에 홀로묻힌 경우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저 그런 관직도 아닌 국왕의 신분이었죠. 물론 그는 결혼을 했습니다. 다만 왕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요. 문제될 것 없지요. 대부분의 부부처럼, 후일 왕비가 죽은 뒤에 합장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왕비는 남편 곁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죠. 두 번째 남편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쪽도 국왕의 신분이었는데 두 남자는 형제 사이였답니다.

고구려의 9대 임금인 고국천왕이 승하한 것은 197. 아들은 없이, 동생들만 여럿 있는 왕이었습니다. 왕비 우씨는 고민이 깊었지요. 어떻게 왕비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까. 고국천왕은 첫째 동생인 발기를 후계로 골라 두었지만, 그 유지의 시행 여부는 살아 있는 왕비의 몫이었죠. 결국 왕비는 자신을 박대한 첫째 시동생 발기를 제치고, 둘째 시동생인 연우를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 10대 임금인 산상왕인데요.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는 다시 산상왕의 비가 되어 왕비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지요.

흥미로운 것은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별다른 비난이나 저항 없이 왕비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녀와 새 임금 산상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권력에서 밀려난 발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신민들 모두 왕과 왕비를 승인했다는 얘기지요. 오히려 왕위를 차지하려 분란을 일으킨 발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왕비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출신인 연나부, 즉 고구려의 왕비를 배출했던 부족의 힘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안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왕비 자리를 유지할 방법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출신 부족이 세력을 겨루어야 했던 것이 2세기 말, 고구려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여인이 출가를 했다 할지라도, 딱 잘라서 출가외인으로 금을 긋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지요.

물론 그렇다 해서 산상왕비의 경우가 고구려 여성의 평균적인 삶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뭐 그런 식의 일반화로 이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후 조선의 여성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나마 조금 숨을 쉴 만한 시대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해 줍니다. 산상왕비 개인의 선택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별개로 말입니다.

묘실 벽화 이야기를 하던 중이니만큼 죽음 후 이 왕비의 안식처가 궁금해집니다. 그녀는 죽은 뒤 어느 남편 곁에 묻혔을까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산상왕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뜻을 어기고 왕위 계승을 흔들었으니 고국천왕과 함께 영원의 시간을 나눈다는 건, 아무래도 낯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홀로 무덤을 지키는 신세가 된 고국천왕. 저승에서도 마음이 썩 좋지 못했나 봅니다. 왕비 우씨가 산상왕 곁에 묻히게 되자, 무녀의 꿈에 나타나 큰 분노를 토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두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심어 서로 보이지 않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하네요. 재혼이야 고구려가 허락한 제도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을 무덤 안에 홀로 남겨 둔 왕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왕비 없이 혼자 묻힌 고국천왕의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면, 몹시도 외로운 묘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여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째서 이토록 장엄하게 장식된 영원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요. 고국천왕의 왕비가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을 따라 묻혔듯이 의 아내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묻혀 버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어 있는 여주인의 자리. 고구려 여성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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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구자숙/ 인천부개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이 엄마 키만큼 크는 6년 동안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챙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학교 공간에서 애달아하며 고생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급식실을 찾아갔다. 점심 급식 준비로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영양사 선생님과 급식실 조리원님들에게 딱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모두 모시고 인사를 드렸다.

“6년 동안 여러분이 이만큼 키와 몸과 마음을 크게 하는데 가장 많이 기여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맛있는 밥 하루도 빠짐없이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할게요. 자세 바로. 인사.”

19명의 아이들과 함께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얼굴을 드는데 눈앞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계셨다.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 맞춰 몇백 명의 밥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얼마나 많이 담길지. 작은 실수 하나도 큰 사건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에 얼마나 노심초사할지. 맛있는 건 얘기 안 하면서 맛없는 건 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해 낸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인지. 그 모든 긴장감과 고단함을 졸업하는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한마디에 위로받고 계셨다.

밥 맛있게 먹고 쑥쑥 커 줘서 고맙다고, 중학교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여기서 20년 일했는데 이렇게 인사하러 와 준 아이들은 너희들이 처음이라고, 너무 고맙다는 급식 조리원님 인사말을 마음에 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은 청소 노동자! 건물이 세 채가 연결된 3층짜리 학교를 단 2명이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 청소를 하신다. 여름에는 땀을 뚝뚝 흘리며, 겨울에는 추운 날도 편하게 움직이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수많은 화장실과 길고 긴 복도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현관을 돌본다. 구역이 달라 함께 계시는 일이 잘 없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2층 화장실 앞에 함께 계셨다. 너무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며 종종 달려가 내일 졸업식인데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러분이 쾌적한 공간에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늘 깨끗하게 관리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 덕에 더 행복하게 학교생활 했습니다. 인사드릴게요. 자세 바로. 인사.”

두 분에게 졸업 축하 인사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졸업을 축하해. 너희들이 학교를 깨끗하게 써 주어서 청소하는 게 한결 수월했어. 그리고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이들 19명과 나는 이렇게 학교를 샅샅이 돌면서 그간 감사했던 많은 이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물론 아이들은 인사하는 와중에도 앞 친구를 밀거나 뒤 친구를 밀치면서 몸 장난을 치고 그분들이 축하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옆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딴짓을 했다. 하지만 고개 숙여 다함께 감사합니다 인사하던 순간 울려 퍼지던 아이들 목소리가 아름다웠고 그 인사를 받던 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앞으로 6학년을 맡으면 이 활동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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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29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오늘은 내캉 밭 가는 데 따라가자. 우짜마 오늘이 내캉 밭 갈러 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안 갈끼가. 니가 서울 가기 전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아직 창호문 너머로 어스름 새벽빛만 희미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동네 어귀 당산나무 근처로 밭 갈러 나갈 준비를 다 하신 모양이다. 밭을 가는 건 어쩌면 핑계고, 다음 달 서울로 일하러 떠날 나와 얘기를 나눌 구실을 만드신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온갖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지만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겨울 추위 끝자락이 매서운 2월이었지만, 그날 난 정말 기꺼이 창호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19902,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중학교를 고향 동네 면 소재지에서 보낸 뒤 밀양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철든 뒤 부모님 곁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그해 2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알았다.

2월의 시골은 농한기라 외견상 한가하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는 1년 농사가 이때 판가름 난다 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논과 밭을 돌아보면서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어떤 농사를 지을지를 결정하고, 심을 작물에 따라 거름을 얼마나 낼지, 비료는 뭘 쓸지, 밭이나 논을 빌려 소작을 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날이 풀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동네 아재들은 너도나도 들로 밭으로 쟁기질을 하러 나간다. 당시에도 경운기가 있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논과 밭에는 기계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부리는 일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질이 훨씬 더 손쉽기도 했다. 우리 집 어미 소는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충분히 길이 들지 않아 아버지의 호령 소리를 아직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앞에서 소를 몰면서 길잡이를 해 주어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외양간의 어미 소를 깨워 물과 여물을 먹인 후, 아버지는 쟁기를 짊어지고 나는 소를 몰고 대문을 나섰다.

아침때 늦지 않게 후딱 댕기 오이소~.”

새벽부터 빈속에 오래 일하다 자칫 부녀가 기운이라도 빠질까, 걱정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를 뒤로 하고 들로 향했다.

암만 힘들어도, 니는 잘할 끼다.”

이려, 이려!”

아버지의 호령 소리에 맞춰 나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셨다. 밭에는 오늘 내가 뿌려야 할 거름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쟁기로 밭을 가는 동안, 거름을 뿌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틈틈히 말 안 듣는 어미 소를 몰기도 하며 거름을 온 밭에 뿌리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쟁기질과 거름 내는 일은 아침때를 한참 넘겨 해가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동쪽 산 위로 훌쩍 솟은 햇살을 받아 쟁기질로 갈아진 흙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서늘한 아침 공기엔 싱싱한 거름 냄새가 가득했다.

힘들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몇 시간째 일을 한 후 밭두렁에 앉으니, 헉헉대는 숨결에서 쇠를 달군 듯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고르게 잘 갈린 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 가신다.

니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러 간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취업 결정이 나자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만, 아버지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항공사에서 일한다니, 그기 어떤 긴지 나는 감히 상상도 안 된다. 테레비에 나오데? 비행기 타마 하와이라는 데도 가고 할 낀데, 와이키키라 카더나? 해변가가 좋더라. 언젠가 그런 데 가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잊지 말아라. 나는 니가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옷을 걸치고 그래 산다 캐도, 니가 살았던 이 고향 동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젊었을 땐 큰 데 나가 살고 싶었는데, 느거 할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하셔서 고향을 지키고 살았다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젠 농사지으며 고향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니가 일손 부족한 시골서 자라면서, 지독히도 농사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거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안 하고 잘 따라 주는 너그들을 보미, 안타까운 마음이 와 없었겠노? 서울 가서 살아 보면 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끼다. 니한테 분명 값진 경험이 될 끼라 생각한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얼마나 많겠노? 그럴 때면 오늘 내랑 같이 밭 갈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 봐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얼마나 더 있겠노? 니는 잘 견뎌 낼 끼라 믿는다. 고향에서 살았던 이 시절이 너의 뿌리며 너의 근본 아니겠나. 니는 서울서도 잘 살 꺼라고 믿는다. 뭘 해도 잘 할 끼다.”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듣고 있자니, 나를 키워 주고 품어 준 고향 들과 산이 새삼 달라 보였다. 소 먹이느라 헤매 다녔던 뒷산과 앞산, 부모님 따라 농사짓던 들과 밭, 동무들하고 물장구치며 놀던 작은 개울, 봄의 산딸기부터 가을의 머루까지 내가 모르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고향 마을이었다.

막 일을 끝낸 후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 입에선 하얀 입김이 꽃처럼 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소의 등과 입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곧 고향을 떠날 나를 위한 축포의 연기 같구나, 싶었다.

그림_ 최정규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도 그리 쉽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랐던지라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니는 일은 지독히도 고된 노동이었다.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 덕분에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낯선 나라의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 때, 모진 승객에게 무시당하며 눈물을 삼킬 때, 무섭고 호된 선배들의 질책에 속수무책일 때, 산골 소녀로서는 차마 상상조차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아버지가 얘기한 하와이 비행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와이키키 백사장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휴양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를 걸었다. 잠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으며 어쩌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힘들제? 그래도 안 잊어버렸제? 니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그 순간, 그날의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얼어붙은 땅에 박힌 쟁기를 끌던 어미 소의 거친 숨소리, 갈아엎은 흙에서 나던 신선한 땅 내음, 아침 햇살 받으며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이랴~이랴~ 어띠이~ ~~” 소를 부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고단한 아침 일을 마친 후 아버지와 나누던 긴 이야기.

그후, 그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차를 넘나들며 타국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 무서운 선배에게 혼이 나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모진 말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괴로울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위로했다. 어미 소의 등어리처럼 판판하고 포근한 고향 뒷산과 굽이굽이 어여뻤던 논과 밭은 지금도 나를 어루만져 준다. 해마다 입사철의 그 봄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그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언 밭을 갈아엎으며 봄 농사를 시작했듯, 나의 긴긴 비행 생활도 그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닐까.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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