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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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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짓밟고 뜯어내도 뽑히지 않을 겁니다

박지숙/ 지평막걸리 노동자

 

 저는 방송 프리랜서 작가였습니다. 전통주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이 있어 취재차 지평양조장을 방문하면서 지평주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된 양조장 안에서 술 빚는 풍경에 매료되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업인 방송작가를 그만두고는 201341일에 입사해 양조장 생산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술을 빚는 모든 과정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는 아주 힘든 작업이어서 저 빼고 모두 남자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술 빚는 과정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신세계였고, 일원이라는 자부심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2017년에 품질관리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었던 차별, 무시, 끗발 있는 부서장에 줄서기하는 직원들 사이의 알력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성실, 진심, 정직 이 세 가지만 갖고 일한 결과라고 자부합니다.

지평주조에서 생산하는 제품들. 사진_ 지평주조 홈페이지 갈무리

 

술이 알려지면서 춘천의 산업단지에 공장을 만들어 대량 생산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평에서처럼 우물물로 술을 빚는 게 아니라 산업단지에 공급되는 상수도를 이용해 기계 설비로 대량 생산을 하면서 본연의 술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지평에서 근무했던 생산 현장 직원들과 관리직원들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사 대표와 영업 담당 임원은 오직 매출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됐고, 간언과 직언을 마다 않는 저를 전공자가 아니라 능력 부족이라며, 저도 모르는 클레임 건을 제 책임으로 몰아 보직 해임시키고 지평공장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지평공장은 모든 기계 설비를 철거한 폐공장이 되어 있었고, 독사가 출몰하는 흉가 같은 옛날 양조장터를 청소하고 순찰하는 경비원으로 일했습니다.

 

회사는 저에게 전공하지도 않은 건축 리모델링 업무에, 폐수 허가 업무에, 양조장을 리모델링하는 데 필요한 11억 원을 양평군에서 투자받아 오라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아무런 직함도 명함도 없이 경비처럼 일하는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하지 못하면 능력 부족으로 저를 자르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씩 영업담당 임원으로부터 겁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포털사이트 맘카페에서 지평막걸리의 맛이 예전과 다르다며 어디서 생산하는지 묻는 글에 익명으로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 저의 댓글을 캡처해서 영업담당 임원에게 보고했고, 그 댓글을 쓴 사람이 저라는 걸 알자 저를 해임시키고 대기 발령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춘천공장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 발령을 받았는데, 공장장 자리 옆 벽과 파티션의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 작은 의자 하나를 두고 앉게 했습니다. 2018년까지만 해도 저에게 팀장님이라고 하던 후배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는 면벽수행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모욕과 참담함과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버텼습니다. 그래도 제가 나가지 않자 이번에는 대표와 임원이 있는 서울사무소로 대기 발령을 내서 불 꺼진 빈 회의실에 일주일 동안을 앉혔습니다. 회의가 있으면 저를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 가운데 빈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저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조차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더군요.

대기발령 당시 의자에 앉아서 면벽수행한 춘천공장 사무실. 사진_ 박지숙

그래도 제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자,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발령을 냈습니다. 대형마트에 진열되는 술을 관리하고 채워 놓는 일을 하는데, 숙소도 자비로 구하라고 하고, 차량 유지비 지원도 없다는 겁니다. 발령 나고 3일 안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걸로 알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저 말고도 연구소장으로 있던 아이 셋 가장은 업무상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표와 영업직원들의 운전기사까지 하면서도 나가지 않자 회사는 그를 전라도 전주로 발령을 냈고, 그제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그런 방식으로 내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회사가 저에게 자행한 일련의 비인간적인 작태의 근거를 모아 노무사를 선임하여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부당전보 및 부당해고 구제 신청으로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답변서에 무연고인 대구로 발령을 내도 되는 줄 알았다며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후 저는 춘천공장으로 발령을 받아 생산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여직원들은 현장에서 근무하는데 저에게는 공장 내 화장실 청소, 식당 청소, 심지어 남자 직원들 담배 피우는 곳 청소, 공장 주변의 풀 뽑기를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 제가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쌓인 기본급을 깎아 생산직원의 급여 수준으로 낮추려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업무와 관련 없는 춘천공장 주변 풀뽑기도 했다. 사진_ 박지숙

저의 업무와 관련 없는, 전혀 다른 현장 파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까지 저와 절대로 대화하지 말라고 업무 지시서에 기재까지 해서 회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 용역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폐비닐을 프레스기로 압축하는 업무를 주었습니다. 그 업무를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부터 겨울까지 했습니다. 압축한 비닐을 기계에서 꺼내어 자키(핸드 팰릿)로 옮겨 공터에 쌓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결국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이 생기고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더니 인대가 부분적으로 파열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저는 업무상 재해로 산재 신청을 했고, 지평 폐공장으로 좌천과 대기 발령 때 면벽수행하던 괴롭힘으로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이 역시 산재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회사는 산재 신청을 한 것을 알고는 압축 업무에서 제외시켰지만 망가진 손가락과 팔꿈치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생산 현장에서 다른 남자 직원들이 한가하게 뒷짐 지며 일할 때 저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손과 팔을 이용해서 반복 작업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팔꿈치 손상이 업무상 재해로 일부 기간 산재 승인을 받았고, 저는 정년 때까지 계속 이 회사를 다닐 계획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손과 팔목, 팔꿈치를 치료받으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남자 직원들만 하는 폐비닐 압축 업무를 여성인 박지숙 씨에게도 시켰다. 사진_ 박지숙

회사를 위해 헌신했더니 헌신짝처럼 취급한 회사 대표와 임원을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정신적·육체적으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그만두게 하라고 직접적으로 지시한 회사 대표, 임원, 그리고 저를 잔인하게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문을 한 것과 다름없는 춘천공장의 공장장, 생산팀장, 지시받은 대로 했다는 현장의 반장 그리고 무언의 가담자들인 일부 현장 직원들은 지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저를 아무리 짓밟고 찢고 뜯어내어도 저는 저의 진실, 정직한 정신적 뿌리가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절대로 그들의 위력과 겁박과 야만적인 작태에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질경이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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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5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 응원해 주세요!

전영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사무장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조합원 동지들이 출·퇴근하는 노동자들, 지나는 시민들에게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 피켓을 들고 변함없이 현대호텔 옥상을 가리키고 있다. 밑에서 지키고 있는 동지들에게 더 많은 과제를 주고 온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함께 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해고자 이병락 동지는 여전히 강건하다. 이렇게 오늘도 동지들과의 하루를 시작한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이 피켓을 들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현대호텔 옥상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제공_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저는 용접 부위를 고속 회전체로 갈아 내서 표면을 다듬고 결함 등을 확인하는 그라인더(사상) 일을 16년째 하고 있는 사상공입니다. 울산에서 생활한 지 10년째로 현재는 사내하청업체 본공(하청업체 상용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조선소 일은 물량팀(하청업체의 재하청)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헷갈릴 수도 있지만,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본공과 물량팀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 복지 등 차별은 늘 존재했습니다. 명절 연휴, 여름휴가 기간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로 짧았고, 일이 없을 땐 무급으로 쉬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휴가비, 성과금도 근속(6개월, 1년 이상, 2년 이상, 3년 이상)에 따라 차등 지급받았습니다. 학자금도 근속 3~5년 이상이 돼야 정규직의 절반 정도 지원받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임금 체불, 4대 보험 체납, 업체 폐업 등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고, 폐업 시 하청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체당금으로 넘기는 게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어 하청 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점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노동조합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와 업체 폐업, 해고로 두 번 다시 현대 계열사의 사내하청에 입사하지 못하게 원청에서 관리를 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가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2017년 고공농성으로 원청의 블랙리스트 관리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하청 노동자들은 아직도 두려워하며 노동조합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척박한 현장에서 2019년 7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조합원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함께 투쟁하고 있습니다. 한 업체 과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9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습니다. 쟁의권을 확보한 후에는 현대중공업지부(정규직 노조)와 함께 파업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청인 현대건설기계는 이를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서진이엔지의 물량 일부를 정규직으로 넘기고, 1년에 900억으로 추정되는 물류비용을 감수하면서 사외로 설비와 물량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진 조합원이 일하던 자리에 현대중공업의 정규직을 전환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청은 더 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진이엔지를 위장폐업했고, 관행처럼 이어지던 고용승계도 끝내 거부하면서 서진 조합원들은 집단해고되었습니다.

그동안 불법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고,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조합 활동은 결국 위장폐업과 해고로 돌아왔습니다. 원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고, 결국 직접고용 시정 지시 명령을 받아냈습니다.

현대건설기계에 과태료 4억 6천만 원이 부과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버티고만 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해고된 뒤 8개월 동안 현대건설기계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시를 받을 뿐 책임과 권한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들과 단 한 차례의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행정기관인 노동부의 시정 지시 명령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현대중공업그룹 재벌의 무소불위 양아치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은 현대중공업의 전체 하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청업체와 동반성장하겠다고 공언했던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직접 지원(하청업체 사장들의 중간 착복을 막기 위해 에스크로 계좌로 직접 지급하거나 별로도 지원)했던 조식·석식 식비, 명절 귀향비, 여름휴가비, 혹서기 연장수당, 피복비 등을 올해 2월부터 기성금(원청이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공사대금)에 포함시켜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겼습니다. 업체 사장들은 임금과 4대 보험 내기도 부족하다며 하청 노동자들에게 그 부담을 다시 떠넘겼습니다. 그동안 1000원을 내고 먹던 아침·저녁이 바로 5500원으로 올랐습니다. 심지어, 재활용하는 정규직 노동자 작업복을 하청 노동자들에게만 입으라고 합니다. 밥값, 작업복 차별까지 치가 떨립니다.

매년 총수 일가는 900억 원대의 배당금을 챙기는데 노동자들은 죽고, 잘리고, 빚만 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재벌의 횡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3월 19일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인 서진 조합원 4명이 ‘하청 차별, 복지 후퇴 철회,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현대중공업 기숙사인 율전재 옥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폭력 경비대가 경찰, 119구조대를 대동해서 오함마(큰 망치)와 쇠지렛대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왔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4명의 서진 노동자들은 간신히 옥탑 기계실 위로 몸을 피했습니다. 경비대들은 난간에 부착한 현수막을 뜯고 농성 물품을 강탈해 갔습니다. 최소한의 물품 공급도 막혔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강풍, 다음 날 비 예보 등으로 고공농성 유지가 힘든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올라갔던 조합원 동지들과 하청지회는 많은 고민 끝에 12시간 만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던 동지들, 내려왔을 때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양 고개를 떨구던 그 날의 동지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뒤에서 비웃으며 박수 치던 현대중공업 경비대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지난 3월 22일부터 서진이엔지 해고자 이병락 씨(왼쪽)과 글쓴이 전영수 씨(오른쪽)이 현대중공업 본관 바로 앞 현대호텔 꼭대기에서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진의 이병락 대의원과 저는 너무나 정당한 그날의 요구를 다시 내걸고 3월 22일 월요일 아침, 보란 듯이 현대중공업 본관 바로 앞 현대호텔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그날 비웃던 경비대와 현대중공업에 보기 좋게 한 방 날리고 싶었습니다. 서진 동지들의 승리가 곧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제대로 투쟁해 보려고 합니다. 차별과 빼앗기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하청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으로 뭉쳐 저 착취의 공장을 멈춰 세우는 그날을 꿈꾸고 현실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정기선 3대 세습을 위해 몸집만 키우고 민주노조 파괴, 하청 노동자 노조할 권리 탄압하는 현대중공업 자본에게 요구한다.

당사자 포함 협의 테이블 구성하고 문제 해결 교섭에 나서라!

현대중공업은 건설기계 불법파견 인정하고 직접고용 이행하라!

하청 노동자 복지 후퇴, 밥값·피복·도시락 차별 철회하라!

 

4월 23일 전영수 씨와 이병락 씨는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현장 투쟁으로 전환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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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4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40년 동안 사라진 회사들

김정숙/ 금속노조 남부지회 신영프레시젼분회

 

내 나이 겨우 15살, 어린 나이에 공장엘 다니게 되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거대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전업주부이셨던 엄마는 우리 5남매와 살아갈 길이 아득했을 것이다.

옆집 사는 친구의 소개로 무작정 집 근처에 있는 온도계 공장에 나갔다. 어렸지만, 같이 일하는 언니, 오빠, 아저씨, 아줌마들이 봤을 때, 일을 야무지게 했던지 다들 예뻐해 주셨다.

그렇게 첫 직장을 10년을 다녔다. 그 당시는 근로기준법이라든지, 최저임금이라든지, 생각도 못했고, 아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었다. 7~8년 다녔을 때쯤, 그래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어 야학에 나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때가 1983년도였는데, 야학 교사로 있던 그들은 나와 동갑이거나 어리거나 그랬다. 중등 과정을 2년 동안 배워 검정고시를 치렀고, 합격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몇 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저것 부업도 해 봤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무렵, 부업하던 곳의 공장에 와서 일 좀 해 달라는 청이 있었다. 오후에만 알바를 하다가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공장과도 가까워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침부터 종일반 일을 하게 됐는데, 사장님은 내가 일하는 걸 인정했는지 최고참 동료와 동급으로 급여를 챙겨 주셨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과장이 납품을 가면 같이 일하는 분들이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도록 과장이 하는 선작업을 처리해 줬다. 3년 넘게 다니다 퇴사를 했는데, 후에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안타까웠다.

얼마 있다가 서울로 이사를 해서 조그만 장사를 시작했는데, 대형마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자동차를 굴리다 보니, 사람들은 동네 구멍가게는 아주 급하지 않으면 찾지 않았다. 3년 정도 버티다 결국 접게 됐다.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독산동까지 오게 됐다. 2002년 겨울 휴대폰 케이스 관련 공장에 들어갔다. 3년 정도 됐을 무렵 군포에 새 건물을 짓는다고 했다. 건물이 완공돼서 군포로 출근했다. 환경은 훨씬 좋아졌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부도가 났다며 난리가 났다. 무리해서 확장한 것이 화근이 되었단다. 잔금을 못 받은 설비업체에서 컨베이어벨트를 뜯어 가고, 또 다른 업체에서는 탑차가 와서 사출이며 도료며 실어 나가고, 이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공장에서 밤을 새고 관리자들과 싸우고, 결국은 노무사를 지정해서 체당금 설정으로 받기는 했지만 씁쓸했다.

글쓴이가 손글씨로 쓴 공장 이직 경력. ⓒ김정숙

바로 다른 공장엘 갔지만 내 겉모습만 보고 퇴짜를 놓았다. 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친구만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시작하는 곳이라 인원이 필요했고, 며칠 후 나도 출근을 하게 됐다. 대표는 내가 일하는 걸 보더니 내게 반장 자리를 줬다. 정말 내 일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3년이 넘어갈 즈음 원래 사장이 욕심을 내서 또 일자리를 잃게 됐다. 마지막 날 대표님이 그동안 맘고생 많았다며 퇴직금 이외에 얼마를 더 챙겨 주셨다.

벼룩시장을 뒤져 바로 정규직 자리를 찾아 출근을 하게 됐는데, 일한 지 1년이 되어 갈 때쯤, 회사가 또 문을 닫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속상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작은 조립업체엘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신영프레시젼’에서 검사 경력자를 찾는다고 해 소개를 받고 출근을 하게 됐다. 출근해서 한 달 반 정도만 바빴고,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다른 부서로 지원을 다니면서 몇 년이 지났는데, 잘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노조를 만들게 됐다.

2019년 폐업한 신영프레시젼 사옥. ⓒ작은책(정인열)

사측에서는 권고사직을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해고를 해 버렸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고 싸웠고, 회사로부터 현장이 아닌 관리부로 복직하라는 통보를 문자로 받았다. 회사는 얼마 후 권고사직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청산 해고를 통보해 버렸다. 알고 보니 생산에서 얻은 수익으로 골프장 건설에 투자를 했고, 회장과 임원들끼리 8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이익 배당금이라며 나눠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더랬다. 이윤이 날 때만 노동자가 필요했던 그들은 필요 없으면 휙 하고 내팽개치고,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곳이 신영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신영프레시젼 사옥에서 청산 반대 투쟁을 할 당시 이희태,김정숙,이순영,최진숙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회사가 사라진다는 게 이렇게 쉬웠단 말인가! 40년을 넘게 일해 오는 동안 몇 개의 회사가 문을 닫았는지…. 먹고살아야 했기에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근속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보란 듯이 잘 살아 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맘이 아리다. 정년이 60세로 늘어났다면서 좋아라 했었는데, 청산 해고로 정년도 되기 전에 일터를 떠나야 하니 참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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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3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유령도시에서 사라지는 직원들

김금주/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롯데면세점노동조합 위원장

 

사라지는 직원들. 코로나19 이후 대한민국 인천공항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나는 2019년 1월 28일부로 인천공항 2터미널 롯데면세점 매장으로 발령받아 현재까지 근무하고 있다. 영업시간은 오전 6시 30분부터 오후 9시 30분까지이고, 보통 하루 2교대로 근무한다. 인천 영종도에 6시 30분까지 도착하려면 적어도 새벽 4시쯤에 일어나 준비하고 나와야 한다. 그동안 나는 공항리무진을 이용하여 출근했다. 그런데 코로나 이후 공항 이용자가 없으니 자연스럽게 리무진도 멈추게 되었다. 리무진을 운전하던 기사분들은 어찌 되었을까. 코로나 이후 주변에서 직원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후 나는 회사에서 제공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다닌다. 리무진을 타면 출퇴근 시간이 50분밖에(리무진 이용 시간만) 걸리지 않았는데 셔틀버스를 타면 거의 두 배의 시간이 걸리니 출퇴근은 더 힘들었다.

인적이 거의 없는 인천공항 출국장 면세점 모습. ⓒ김금주

공항에는 식당, 카페, 서점, 편의점 등 다양한 편의시설들이 있는데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했다. 문을 연 식당은 점심시간이면 공항공사 직원들을 비롯하여 보안직원 등 그나마 아직 출근하는 직원들이 꽉 들어차 방역 차원의 거리두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 직원 식당을 이용하거나 베이커리에서 빵이나 샐러드를 사서 휴게실에서 간단한 식사를 하게 된 지도 벌써 1년이 넘었다. 아직 휴점하지 않은 매장 역시 매우 소수의 직원들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직원 혼자 계산하랴, 커피 내리랴 바쁘다. 커피 한 잔 사려 해도 시간이 꽤 걸리는 등 모든 것이 불편해졌다. 특히 매장들이 휴업을 하고 직원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은 매우 불안하다.

텅빈 인천공항 지하 1층 공항리무진 정류장 모습. ⓒ김금주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직원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공항을 청소하시는 청소노동자, 면세점에서 판매하던 판매노동자들이 그렇다. 그래도 면세점 판매노동자들 중 노동조합이 있는 곳은 고용유지지원금도 받으면서 쉬고 있고, 특히 나같이 운 좋은 대규모 사업장의 정규직은 영업시간은 그대로 둔 채 노동자 개인이 주 3일, 주 4일로 근로시간만 단축하여 근무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구조조정과 같은 인위적인 인원 감축은 없다.

그러나 올해 들어 모두 고용불안에 떨고 있다. 코로나 이전에 내가 일하던 매장의 직원은 입점 브랜드 직원을 포함하여 하루 출근 인원이 대략 60~70여 명이었는데 지금은 20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거의 노동조합이 없는 영세 사업장의 직원들이다. 작년 여름을 기점으로 절반의 직원이 사라졌고 현재의 20여 명이 일터를 지키는 최소의 마지노선이 된 것이다.

직원을 해고하는 업체를 비난할 수도 없다. 출국객이 없어 판매되는 상품이 없으니 매출 관리, 재고 관리 할 일이 없으니 직원이 필요 없는 것이다. 판매 상품 중 건강식품, 초콜릿, 김치 등 유통기한이 있는 제품들은 전부 없애야 하는데, 그 손해도 업체에서 감수해야 한다. 상품 재고는 남아 있는데 직원을 다 해고해서 무인 매대가 존재하는 곳도 있다.

한 직원에게 물어봤다.

“몇 분이 그만둔 거예요?”

“나 혼자 남았어요. 한 달에 일주일만 출근해요. 그래도 감사한 일이죠. 그만둔 직원들은 회사에서 상황이 나아지면 다시 채용한다고 했어요.”

‘문서로 받아 두셨어요?’ 하고 물으려다 말았다. 올해 백신 접종을 하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는 있으나 여전히 국가 간 이동은 요원할 것 같고, 그 업체가 부도나지 않고 버티고 있어야 직원들이 다시 돌아오지 싶어, 내 질문이 부질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 3층 출국장 여행사 카운터가 텅비어 있다. ⓒ김금주

뜨지 못하는 비행기들이 계류장에 빼곡히 서 있는 것도 매우 기괴한 모습이다. 공항에 가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비행 전광판이 수시로 몇 페이지씩 넘어가는데 이제는 한눈에 볼 수 있다. 하루에 출항하는 비행 편은 스무 편 정도니까… 내가 근무하는 2터미널의 상황이 이 정도니 훨씬 더 많은 직원이 근무하던 1터미널의 직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인천공항 상황만 봐도 이 지경인데 국회나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지급과 관련하여 선별이니 어쩌니 하고 싸우는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코로나 이전 이맘때 겨울이면 검정 패딩을 입은 저승사자 같은 모습의 직원들 수백 명이 인천공항 3층 셔틀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던 모습을 기억한다. 겨울 찬바람이 부는 고요한 인천공항은 참으로 기괴한 느낌이다. 오히려 북적대는 저승사자들을 보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한 것을…

나는 오늘도 아무도 없는 유령도시로 끌려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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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3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벨이 울리면 1초 안에 받아라

강혜경/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공단고객센터지부 조합원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생소한 용어로 가득한 책들로 교육을 받고, 이해 안 되는 교육임에도 매일 시험을 치고, 긴장 가득한 첫 전화를 받은 지가 벌써 9년이 되어 간다. 선배 상담사와 동석을 하며 모르는 내용이 들어올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뮤트 키(고객에게 내 목소리가 안 들리게 하는 전화기 조작 버튼)를 누르던 신입이 이제는 동석 시 신입 상담사를 케어하는 코칭 선배가 되었고, 고객이 부과 제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언성을 높이면 긴장하고 울먹이던 신입이 이제는 고객을 진정시키고 고객에게 조정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는 능숙한 상담사가 되었다. 이 두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과 노력이 있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벨 울림 2초입니다. 1초로 관리하세요.’라는 채팅이 걸려 오면 손가락을 잠시도 전화기 버튼에서 뗄 수 없고, 통화 종료 후 후처리 1분이 넘었다는 메시지에는 지사 이관 건을 점심시간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통화가 5분을 넘어가면 초조해지고 7분을 넘어가면 팀장의 채팅이 들어올까 불안하다.

3개월에 한 번 분기별로 공단에서 시행하는 만족도 조사 기간은 상담사에게 더욱더 힘든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추후 만족도 설문조사 시 5점 매우 만족 부탁드립니다.”로 종료 인사를 통일해야 한다. 인사를 누락할 경우 감점이 되며 상담사의 등급에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음 날 출근하면 자리에 옐로카드가 붙어 있다. 옐로카드를 받고도 누락하면 ‘친절’이라는 완장을 차고서 출근 시간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교육을 받았다. 5분 이상 대기한 고객들이 우리에게 겨우 연결되면 평균 2~3분 안에 만족을 시키고 바로 상담 종료를 해야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연결 대기 시간이 7~8분인 고객이 어찌 2~3분 상담에 만족할까. 그런 고객들에게는 “추후 만족도 설문조사 시 5점 매우 만족 부탁드립니다.”라는 필수 멘트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불만은 곧 상담사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며, 10~20분씩 욕을 듣고 멘탈이 너덜너덜하게 뜯겨도 이어지는 다음 전화는 벨소리 1초 안에 바로 받아 밝은 목소리로 “함께하는 건강보험 상담사”를 외쳐야 나의 등급은 유지된다.

납부 마감일이나 호주기(납부 마감일이 다가오는 주간)로 분류되는 기간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팀장에게 보고하길 강요받고, 고객이 요청한 아웃바운드(전화를 거는 것)도 팀장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하다. 분기별로 한 번 있는 공단 시험에는 도급 업체의 실적과 자존심이 걸린 터라 한 달에 다섯 번, 여섯 번 예비시험을 치르고 만점이 아닌 경우 재시험이 반복되며, 최종 공단 시험에서는 만점이 아닌 경우 소위 ‘역적’ 취급을 당한다. 콜이 미어터지는 현실과 코로나라는 상황까지 겹쳐 교육은 꿈도 꿀 수 없다. 중요한 제도 변경도 미어터지는 콜을 받는 도중 전체 쪽지로 받게 되고, 고객과의 상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그 쪽지는 나의 머릿속에서 잊히기 일쑤다. 해당 공지를 숙지하지 못해 틀린 안내는 결국 민원으로 이어지고 관리자들은 쪽지를 숙지하지 못한 상담사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1월 27일 총파업 투쟁 선포 기자회견을 여는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지부. 사진 제공_ 노동과세계

흔히 콜센터 직원을 감정노동자로 일컫는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게, 혹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일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건강보험공단 콜센터에 다년간 근무하면서 내가 느낀 바는 다르다.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기계이다. 감정을 느끼면 버틸 수 없다. 슬퍼도 안 되고 화가 나도 안 된다. 고객의 고성과 욕지거리를 들어도 “네~ 고객님 말씀 이해합니다.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멘트가 자동응답처럼 튀어나와야 버틸 수 있다. 고객들의 불만에도, 도급 업체의 비인간적인 대우에도, 공단의 무시에도 아파하면 버틸 수 없다. 9년 가까운 근무 기간에도 내가 아는 동료가 몇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신입 동석을 하면 다음 날 그만두고, 팀 배정을 받으면 다음 날 그만두고, 부과 변동 시즌이 되면 그만둔다. 공단의 전산 오류나 문자 오발송으로, 잘못된 안내문으로 노발대발하는 고객들의 ‘총알받이’가 반복되면 그만두기도 한다.

얼마 전 받은 민원 중에 공단의 전산 오류로 인해 몇 년 전 이혼한 전남편의 피부양자로 등재된 고객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남편의 폭력과 집착을 피해 개명까지 하고 겨우 숨어 사는데 공단의 실수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과 정신적 피해를 겪었다며 법적 고소를 예고하는 전화였다. 순간 늘 기계같이 전화를 받던 나도 등줄기에 땀이 나고 공단의 실수가 한 고객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공포나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절감했다. 이러한 심각한 민원에도 콜 타임이 길어지면 최대한 빨리 종료하라고 압박을 받는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이런 우리에게도 노동조합이라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계라고 생각한 나에게 노동자 혹은 동지라 불러 주었고 우리의 노동이 가치 있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차별 없는 삶의 가치를 교육받았고 투쟁의 가치도 알게 되었다. 그 가치 있는 교육으로 인해 이뤄 낸 것은 벨소리 1초가 아닌 2초, 휴식 없는 노동이 아닌 오전 10분과 오후 10분의 휴식이다. 또 공단의 형식적인 업무 시험에서 벗어났으며 팀장의 허락 없이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자유와 정해진 업무 시간 외 추가 업무 시 연장근로수당을 받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기계였던 우리에겐 노동자가 된 후 이뤄 낸 투쟁의 결과이다.

2월 5일 세종시 보건복지부 앞에서 직영화 쟁취 결의 대회에 참가한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지부 조합원들.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오늘은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창립 후 처음 갖게 된 총파업 첫째 날이다. 처음 가 본 건강보험공단 원주본부에서 투쟁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의 목소리가 정말 불공정을 야기하는 것인가? 지금과 같은 업무를 하되, 도급 업체의 실적 제일주의와 비인간적 관리에서 벗어나 공단에서 직접적으로 책임지고, 고용을 보장하고, 관리 감독과 교육을 해 달라는 것이다.

1577-1000번에 전화하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이니 욕설과 언어폭력은 지양해 달라는 멘트가 나온다는 고객들의 말을 들었다. 대기 시간 동안 화가 났지만 그 멘트를 들으니 상담사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고객도 있었다. 누군가의 엄마, 딸, 동생…. 이런 인간적인 환경에서 근무하고 싶지만 지금의 업체 간 경쟁 구도 속에서는 요원한 현실이기도 하다. 싫으면 때려치워”라는 말도 듣지만 그렇게 해서 도망치면 변화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자리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다. 적어도 지금껏 건강보험공단을 대표해 고객 최접점에서 “함께하는 건강보험 상담사”라고 외쳐 온 나의 상담이 헛된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2월 5일 결의 대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이 현수막에 결의 문구를 쓰고 중앙 무대로 전달하고 있다.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 국민건강보험공단고객센터지부는 지난 2월 25일부터 파업을 중단하고 업무 복귀해 현장에서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_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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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3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연대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이순예/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엘지트윈타워분회 소속 청소노동자

 

저는 청소일을 늦게 시작했어요. 다른 일은 안 하다가 오십이 넘어 엘지트윈타워에서 처음으로 청소일을 시작했으니까요. 사십이 넘은 나이에 늦둥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야간에 일을 시작했어요. 낮에는 아이를 봐야 하기에 주간에 하는 일은 좀 힘들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청소일이 올해로 13년이 되었어요.

제가 하는 주된 업무는 사무실 카펫 바닥의 먼지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일이었어요. 2층에서 20층까지 매일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했어요. 쉬는 시간은 중간에 2시간 30분 있었고요. 다 힘들지만 특히 청소기가 상당히 무거웠어요. 사무실 전체를 해야 하기에 전깃줄은 30미터가 넘고요, 한 층을 청소하고 나면 전깃줄을 접는 일을 스무 번 반복해야 했기에 일이 끝나면 팔에 마비가 오고, 겨드랑이에 멍울이 생길 정도였어요. 아침에 일 마치고 집에 가면 아이 밥을 못 해 줄 정도로 힘든 일이었어요. 청소기로 직원들 책상 아래 공간 사이사이까지 청소를 해야 했기에, 고개를 숙이는 동작을 반복해서 목이 아파 병원을 많이 갔어요. 병원에 가면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고 계속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도 했어요.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먹고살아야 해서 그만두지 못하고 십 년이 넘도록 했어요. 이번에 농성하면서 길벗한의사회에서 한의 진료 나오신 한의사 선생님이 침이 안 들어갈 정도라고 걱정했을 정도였어요.

엘지트윈타워 로비에서 선전전하는 이순예 씨. 사진 제공_ 엘지트윈타워분회

또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 시간씩 더 일찍 나와서 추가로 회장실 청소를 했어요. 이걸 대기라고 부르는데, 1시간 더 벌기 위해 실제로 1시간 30분 이상 일찍 나왔어요. 회장실 청소 시작은 1분이라도 늦으면 안 되었거든요. 대기를 하면 저녁을 못 먹고 나오기 때문에 식대를 4000원씩 줬는데, 3년 전부터는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식대도 주지 않았어요. 소장, 감독에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없었고, 나 몰라라 했어요. 그래서 간식을 싸 와서 먹었죠. 싸 온 간식을 쉬는 시간인 밤 12시에 대기실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스무 살이나 어린 젊은 여성 감독은 본인이 자는 데 방해된다며 못 먹게 했어요.

이런 갑질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감독은 수시로 1~2만 원씩 거출하여 과일이나 간식을 사서 전체 노동자들이 나눠 먹고 남은 돈은 본인이 챙겼어요. 그러던 중 2019년 7월에는 야간 노동자 24명에게 2만 원씩 걷어 총 48만 원을 저에게 맡겼어요. 그 돈으로 매일같이 저녁 출근길에 간식을 사 와서 씻고 깎아서 24명에게 나눠 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 달 보름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수박같이 무거운 과일을 사 오라고 해서 남편과 아들이 차로 실어 주기도 했어요. 그러다 감독이 간식비를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그 돈은 본인이 챙겨 버리더군요. 너무 힘들고 비참해서 감독에게 대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재계약이 안 될까 봐 참고 견뎠어요. 막내가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8년 정도 조장을 했는데, 전체가 모인 출근 미팅 때 갑자기 조장 수당 5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지금 돈이 없으니 내일 주겠다고 했으나, 당장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에 동료들에게 빌려서 줬어요. 아무리 감독이지만 동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이런 수모를 겪으니 너무 비참했어요. 용역,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의 갑질이 있어도 고용불안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부당한 처우를 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2019년 12월 야간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감독의 갑질과 타 건물로 전환 배치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트윈타워 동관은 2020년부터 다른 업체로 용역 계약이 되어 동관 노동자들 중 7명은 엘지 다른 건물로 보내지기도 했어요. 이들은 일 년도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야간조보다 조금 빠른 10월 말에 가입한 주간조 노동자들과 함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엘지트윈타워분회 조합원이 되었어요.

엘지트윈타워 로비에서 파업 집회 중인 청소 노동자들. 사진 제공_ 엘지트윈타워분회

우리는 트윈타워에서 있는 9시간 중 쉬는 시간을 많이 잡아 실제 돈을 받는 시간은 6시간 30분밖에 안 되었는데, 노조 만들고는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고 돈 받는 시간은 7시간이 되었어요. 주간조는 점심시간을 많이 줘서 하루 7시간 30분밖에 돈을 못 받고, 토요일에 격주로 나와 무급으로 일했는데, 노조 만들고는 하루 8시간 돈을 받고, 토요일에는 안 나가게 되었어요.

조금씩 좋아지고 갑질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있는데 교섭에는 회사가 불성실했어요. 청소노동자들을 함부로 부려 먹지 못하니까 그게 싫었나 봐요. 그러다가 갑자기 용역업체를 계약 해지하고 전원을 해고했어요. 우리는 작년 12월 한 달 동안 고용승계하라고 외쳤지만 엘지는 결국 외면했어요. 새해 첫날에는 밥과 전기도 끊고,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죠.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고 여론이 나빠지자 다음 날 밥과 전기가 들어왔어요. 파업 전부터도 그랬지만 연대의 힘을 절감한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회사는 위로금으로 회유하고, 다른 사업장에 취업시켜 준다고 사탕발림하지만 우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요. 해고되고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한 명도 흔들리지 않고 있어요. 청소노동자 무시하는 엘지의 버릇을 고치고, 우리의 일자리 트윈타워로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파업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사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현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 가진 자들이 약자들끼리 싸우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이번에 연대의 중요성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응원이, 물품과 메시지가 오는데 우리도 앞으로 갚으며 살자고 다짐했어요. 우리가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많이 배웠어요. 가족들도 처음에는 걱정하다가 이제는 응원하고 있고요. 반드시 이겨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노동조합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거예요.

(구술 정리_ 손승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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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1월호

일터 이야기

작은책 노동 상담소

 

 

복귀하니 회사가 사라졌다

박공식/ 이팝 노동법률사무소, 작은책 자문 노무사

  

 

박미래 씨(가명, 40)는 올해 초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경력이 있었기에 일을 시작하고 담당 업무인 회계 경리 업무를 거침없이 해 나갔습니다. 회사는 규모가 상당히 큰 ○○클럽입니다. 박미래 씨는 근로계약서를 요구하고 4대보험 가입을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박미래 씨가 입사한 지 한 달 뒤에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사유는 사업주 명령 불이행이었습니다.

해고통지서를 들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뛰고 그저 두려웠습니다. 둘레에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법대로 해 보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동위원회라는 곳에 가서 직접 부당해고구제신청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부당해고구제신청이 접수된 것을 알고서는 바로 업무 복귀를 명령했습니다.

회사는 첫 번째 복귀한 날부터 본격적으로 감시와 견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중 개인 휴대폰 사용 금지, 화장실도 최소 시간으로 다녀올 것, 잡담 금지를 지시하고, 모든 업무에서 배제하고 그날그날 업무만 지시했습니다. 뭐만 하면 꼬투리부터 잡고서 경위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당당하게 업무 지시에 따라 일을 했는데 경위서를 작성하라고 하여 작성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면 회사는 경위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경위서 작성으로 하루를 다 보낸 적도 여러 날입니다.

경위서가 여러 장 쌓이자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박미래 씨를 해고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다시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직접 접수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꼼꼼하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회사도 어디서 법률 자문을 받는지 반박 서류를 치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박미래 씨는 그보다 더 꼼꼼하고 치밀하게 부당해고 이유서를 노동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노동위원회는 회사의 징계 해고는 부당해고라고 판단했습니다. 회사는 이번에도 복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복귀하는 날 출근하니 회사가 그 사이에 이사를 갔습니다. 문 닫힌 회사 건물 앞에서 대표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대표님, 어디로 갈까요?’ 회사는 그제야 박미래 씨에게 문자로 옮겨 간 주소를 보내왔습니다.


박미래 씨가 두 번째 복귀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회사는 코로나로 경영상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로 일방적 휴직 명령을 내렸습니다. 박미래 씨는 3개월 뒤에 다시 출근했습니다. 회사는 인력 재배치를 한다는 이유로 다시 출근한 박미래 씨에게 회계 업무와는 전혀 다른 재고 업무를 시켰습니다. 박미래 씨는 꿋꿋하게 출근을 하며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고 파악 업무를 했습니다.

회사는 다시금 박미래 씨만 콕 집어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세 번째 해고 사유는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해고였습니다. 박미래 씨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동안 노동위원회를 세 번째 찾아갔습니다. 문래동에 있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를 찾아가는 길이 익숙해질 정도였습니다. 세 번째 판정에서도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라고 했습니다. 회사의 해고 사유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부당해고 인정을 받은 날 회사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세 번째 복귀 명령입니다. 박미래 씨는 다시 출근했습니다.

회사는 박미래 씨에게 야간 업소 입구에서 체온 측정 등의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일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회사 건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유 없이 거부당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주변 건물의 화장실을 찾아 어두운 길목을 뛰어갔다 와야 했습니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 이런 것이 직장 내 괴롭힘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지금도 회사의 괴롭힘에 맞서 힘쓰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감시, 이유 없는 업무 배제, 알 수 없는 업무 배치, 업무 시설 사용의 제한, 부당해고와 싸우는 동시에 직장 내 괴롭힘에 둘러싸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괴롭힘인 줄 알면서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외면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20197월에 시행되었습니다. 그 인정 요건은 첫째, 가해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할 것’, ‘둘째, 그 행태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을 것’, ‘셋째,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일 것등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률(근로기준법 제76조의2, 76조의3, 109조 제1)에는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는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반쪽짜리 규정이라고 합니다. 다만 사업주에게 괴롭힘 신고를 한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이익 처우를 한 경우에는 회사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였음에도 별도의 조치가 없는 경우 고용노동청에 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청은 이 경우에도 사업장 지도 개선 방식에 머물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 싸울 때 동료 근로자들의 외면 그리고 입증 책임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동료를 외면하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사람 곁에 열려 있는 <작은책> 노동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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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재난 지원금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김유진/ 대한민국 9급 공무원

 

 

주민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2년차 9급 공무원이다. 내가 일하는 주민센터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 민원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거다. 어떤 때는 정말 다들 손에 손을 잡고 사이좋게 함께 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꺼번에 몰리기도 한다. 그 시간 동안에는 정말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진다. 점심시간 중에도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민원을 봐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요즘, 잘릴 염려 없고, 어쨌든 입에 풀칠은 하고 사니 나는 운이 좋구나 싶다가도, 한 번씩 인터넷상에서 공무원들을 놀고먹는 철밥통에 세금이나 축내는 한심한 존재로 싸잡아서 얘기하는 댓글들을 보면 좀 억울하기도 하다.

내 경우만 해도 몇 년에 한 번 주민센터에 가서 민원을 볼까 말까 하기 때문에, 뭐 사람들이 그리 있을까 생각들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정적의 시간 동안 주민센터에서 민원을 봤던 사람들에게는 주민센터가 참으로 평화롭고 한가롭게 일하는 곳으로 비치기도 할 테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화된 지금도 단골 민원인들은 있다. 어떤 민원인들은 마실 삼아 주민센터에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주 온다. 아침에 번호 대기표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서 오늘은 좀 사람들이 덜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치 보름달을 보며 소원 빌듯이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야 화장실도 제때 갈 수 있고, 점심도 체하지 않게 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악성 민원에 시달릴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일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화가 참 많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어질라치면 화를 내고, 규정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 달라고 떼를 쓰는데 안 된다고 하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고, 직원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존감 뭉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그야말로, 던진다. 과연 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공무원을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 일을, 먹고살기 위해 직업으로 택한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저 위에 계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말단 공무원들은 말이다. 비록 '노동자의 날'에 노동자로 대접받지 못하기는 하지만, 월급을 일하는 시간으로 나누어 보면 거의 최저시급이고, 민원인들이 갑질을 하더라도 내 생각이나 주장을 얘기하면 더 힘든 상황에 놓이기도 하는, 그래서 억울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 맘속에 꾹꾹 눌러 담아야만 하는, 감정 노동자이기도 하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욕도 배부를 정도로 참 많이 먹은 것 같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경우였다. 먼저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정부에서 1차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하고 기사가 난 이후 주민센터로 그와 관련된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지침도 안 내려오고, 우리도 아는 거라고는 기사로 난 정보가 다였는데 말이다. '지침이 안 내려와서 안내를 드릴 수가 없다'는 답변을 하면 알겠다며 전화를 끊는 사람도 있지만, 주민을 위해야 하는 주민센터에서 그것도 모르고 그 정도의 답밖에 못 해 주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재난 지원금 지급이 시작되면서, 야근에, 주말 출근에,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흘러갔지만,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해외 체류 등으로 지원금 수급의 자격이 안 된다거나, 가족이라 세대 분리가 안 되는 등의 사유로 본인들이 원하는 만큼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비난의 화살들이었다. 우리도 돈 더 드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럴 땐 진짜 내 월급이라도 까서 드리고 이제 그만 하시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보게 된 경우가 많아, 사람에 대한 회의감과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는 것 또한 괴로웠다. 물론 좋은 민원인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한 상처와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나약한 인간인 걸까?

나는, 아니 대부분의 말단 공무원들은, 하루하루 성실히,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길 원한다면, ‘내가 내는 세금으로 너 먹여 살리고 있는데 이러느냐?’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우리도 세금 누구보다 꼬박꼬박 성실히 납부하고 있고, 돈이라는 건 원래 돌고 도는 존재라, 그 사람들이 말한 세금이 우리 월급에서 차지하는 지분만큼 나도 그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각종 부문에서 성실히 소비하고 있는 돈이 흐르고 흘러 그들에게 눈꼽만큼이라도 가는 것이니 말이다.

서류 한 장에도 수고하셨다고 감사하다고 미소 지으며 말씀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 그런 분들 덕분에 힘을 얻고 열심히 일하게 된다. 작은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더욱더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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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것

김계월/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부지부장

 

저는 항공기 기내 청소를 하는 노동자입니다. 20146월 아시아나항공 하청의 재하청 업체인 케이오()에 입사해서, 코로나19로 인하여 2020511일자로 정리해고가 되었습니다. 거리에 천막을 치고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그 해고 판결문을 받기까지 100일 하고도 15일이 지났습니다.

저희 청소 노동자들은 승객들의 쾌적한 비행을 위해 사용했던 모포와 베개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좁은 기내를 오가고, 의자 벨트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포켓에서 오물을 빼내며 허리를 잠시 펼 시간도 없이 반복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항공기 한 대라도 더 일 시키려고 밥시간을 지켜 주지 않아 저희는 승객들이 버리고 간 과자, 초콜릿 등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한여름 더위에 에어컨조차 틀어 주지 않아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작업복이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며 일했고 캄캄한 항공기에서 손전등을 켜고 일하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퇴근 시간도 지켜 주지 않아서 감독(중간 관리자)하고 자주 언쟁도 해 가며 퇴근 시간 지키기(퇴근 15분 전에는 비행기 청소 안 받기), 밥시간 지키기, 파워(전원) 안 들어온 비행기 청소 안 하기 등 기본적 권리 찾기를 하며 근무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일해 온 저에게 회사는 코로나19를 핑계로 희망퇴직을 하거나 무기한 무급휴직에 동의서를 쓰라고 했지만, 서명을 하지 않았고 민주노조 조합원 8명과 함께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하기 전 4월부터 9월까지 70퍼센트의 유급휴직을 주겠다고 3161노조(한국노총 소속)와 합의한 내용을 공지했지만, 3일 만에 합의한 내용을 뒤집었습니다. 선택의 시간은 일주일뿐이었고 그 시간 동안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회사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민주노조의 간부로서 이 부당한 결정에 팀장과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항의와 설득도 했지만, 고민하던 동료들은 하나둘씩 희망퇴직을 하고 무기한 무급휴직 동의서를 썼습니다. 한 동료는 아끼던 작업복을 깨끗이 세탁해 "다음에 저를 불러 주면 제 작업복을 주세요" 하고 울면서 회사를 떠났고, 또 다른 동료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살이 빠진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인천공항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모든 책임을 케이오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고, 위로 한마디나 대책의 말도 없었습니다. 선종록 대표라는 사람은 정말 악덕 사장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코로나19 시국을 이용해 민주노조 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지경에 이른 것도 민주노조를 말살하려는 속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종각역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그것도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기념일에 농성 천막이 종로구청과 공권력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습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두 번, 세 번 농성 천막을 설치했지만 그마저 강제 철거당해 1톤 트럭과 1인용 텐트로 농성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713일 인천지방노동위원회, 716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 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아직도 복직 이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재벌의 횡포는 법도 무시하며 이렇듯 해고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 지난 6월 세 번째로 천막이 강제 철거된 날 1인용 텐트를 치고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노숙하는 김계월 부지부장.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코로나19로 원청 아시아나항공은 17천억 원이라는 고용유지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아냈지만 하청 또 그 하청 케이오는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수백 명이 희망퇴직으로 무기한 무급휴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선종록 대표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민주노조 탄압과 말살로 일관하면서 인간의 기본권과 노동자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아시아나 하청 노동자들이 하루빨리 복직할 수 있도록 사측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거리에서 농성한 지도 어느덧 봄을 지나 긴 장마를 견디고 9월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살갗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 새삼 고맙기까지 한 건 여름 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에 땀띠로 고생한 일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뜨거운 땡볕 아래에 구슬땀을 흘리며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피켓 선전을 함께해 주신 연대 동지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동지애로 남아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낍니다. 절대로 포기하지는 말자, 뼛속 깊이 다짐 또 다짐하며 저는 오늘도 해고자란 딱지를 떼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그리고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해고자 없는 세상을 위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재촉하겠습니다.

▲ 해고 통보 내용증명을 피켓으로 만들어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 김계월 부지부장.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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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9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우리는 어떤 내일에 닿을까

이창근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전 기획실장

  

복직하지 못한 사람 가운데는 이름을 바꾼 경우가 더러 있었다그 사정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개명까지 할 정도라니어떤 절박함이 느껴졌다한둘이 아니라서 조금 놀랐다해고자도 있고 희망 퇴직한 사람도 있었으니 굳이 해고자에게만 국한시킬 일은 아니었다아들과 함께 개명한 형(동료)도 있다살면서 이름 바꾸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개명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가 처한 저간의 사정이다몸부림을 쳐 봐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였다 싶을 때그 시간이 개명의 때가 아닐까 싶다쌍용차에도 이름 바꾼 힘까지 보태졌던지 개명한 형들 또한 이번에 모두 복직을 이뤄 냈다지난 5월 4일 쌍용차 마지막 해고자들이 복직했다자그마치 10년 하고도 11개월 만이다. 2009년 쌍용차 파업 이후 줄곧 공장 밖에서의 삶이 공장 담벼락을 넘어서도 시작된 것이다. 11년 동안 직원들 상대로 피켓 들고 섰던 정문 앞에서 시업 종소리 들으며 공장이 아닌 노조 사무실로 향하던 씁쓸한 어제는 없다출근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하는 동료들의 등을 보며 하루를 마감했던 지긋지긋하던 그 일상도 이제는 안녕이다.

▲ 지난 5월 4일 가진 마지막 복직자들의 기자회견. 사진_ 이창근

입사 동기인 정민이도 11년 만에 복직자 명단에 있었다그 사이 펄펄 끓던 서른두 살 청춘의 꿈틀거림은 지렁이처럼 마른 눈물 자국만 남긴 채 온데간데없이 휘발했다세월의 바코드라도 찍힌 듯 마른 근육과 까만 피부가 특별히 더 애달팠다이제는 40톤 트레일러를 몰지 않아도 되고 4대강 사업 끝물에 올라탔던 육중한 덤프에도 오르지 않아도 된다처가댁에 해고자 신분을 속이기 위해 명절 때마다 일 있다는 핑계 들어 더 이상 걸음 끊지 않아도 된다정민이는 11년 동안 해고자 신분을 처가와 친인척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누구 하나 묻지 않았던 것일까질문 가능한 공간을 피해 왔던 것일까이해되지 않지만 해고자 생활 11년은 통상적인 이해 범위를 벗어날 때가 많다정민이뿐만 아니라 몇몇 동료들 또한 해고 사실을 용케 숨기며 11년을 살아 냈으니까적어도 개명은 사회생활을 전제로 한다지만 있는 이름조차 쓰지 않고 스스로 사회에서 유폐시키는 삶 또한 그 속내가 얼마나 복잡했던가.

복직한 이들은 요즘 빚 갚는 데 여념이 없다월세 살던 후배 한 명이 적은 돈 모으고 은행 대출 껴 전셋집으로 들어갔다왜 그렇게 기분이 좋던지내 일처럼 기뻤다장마철만 되면 빗물이 새고 장판은 뜨고 벽지가 곰팡이로 변하는 집에그것도 얹혀 살던 또 다른 후배 또한 깨끗한 새 아파트로 전세 이사를 했다는 소식도 무척 기뻤다아이가 다섯인데 그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복직의 참 의미가 아닐까도 싶었다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이혼 위기였던 형들의 어두컴컴한 집에 환한 LED 전등이 다시 하나둘 켜지고 있다오십 넘어서도 용돈 타 써야 했던 부모님께 이제는 매달 용돈을 드릴 수 있는 생활이 얼마나 축복인가생각만 해도 짜릿하다피켓 들고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이들의 냉대와 작은 기사에도 여지없이 달리는 그 악다구니 댓글에도 11년 동안 견뎠다비닐 천막 밑으로 흐르던 빗물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꼭 쥐었던 그 사소하고 소소한 작고 숱한 다짐들을 하나둘 이뤄 낼 수 있는 이 생활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출퇴근길에서 보는 형들의 웃는 얼굴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는 요즘이다.

함께했던 동료들끼리 복직해서는 자주 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생각이 바뀌었거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찾아 봐야 할 곳도 늘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훌쩍 커 버린 아이들과 부쩍 야윈 부모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을 더는 미뤄 두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나중으로 무작정 미뤘던 일들이 하나둘 내 일로 몰려들고 애써 외면했던 경조사에도 이제는 꼬박꼬박 찾아가야 한다해고자라서 열외로 살았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대열에 합류도 해야 하고 끼어도 봐야 한다이것저것 핑계 대기에는 사회가 허용하는 나이로부터도 한참을 벗어났고 통용되는 상식도 외면할 염치가 더 이상 없다늦게나마 추스를 수 있는 염치가 생겨서 다행이다그렇다고 그저 일상이라는 이불을 덮고 아늑하게 드러눕고만 있기에는 바닥이 무척 차갑다해결되지 않은 쌍용차 손배 가압류 법정 이자만도 초 단위로 불어나 어느새 40억이 넘었다정권이 바뀌고 경찰청장이 바뀌어도 감감무소식인 쌍용차 손배 가압류 문제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밥 먹을 때마다 따끔거린다.

▲ 지난 2월 복직 연기 발표에 쌍용자동차 정문에서 항의하는 복직 대기자들. 사진_ 이창근

가해자와 피해자는 기억의 순간이 다르다가해자는 가해의 순간이 아닌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은 자기 행동의 근거와 알리바이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피해자는 피해의 과정이 아닌 피해 그 순간과 그 이후를 기억한다그런 면에서 둘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그저 조정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다쌍용차 해고 사태는 그런 점에서 공장 안에서는 회피되고 있다직면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기회조차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세월의 유속만 믿고 아픔이든 슬픔이든 그저 그 시간 속에서 씻겨 나가기만 바라는 것 같다피해자라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그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것이 우선이다가해자 또한 마찬가지다. 4년 먼저 복직한 나로서는 이 내재하는 갈등이 가끔 두렵다표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입 닫고 있는 그 마음 안에 어떤 분노가 자리 잡고 있는지 자주 두렵다이것은 우리 모두의 손해로 때론 낭패로 다가올 것이고 결국에는 회사 스스로 무너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복직한 이들의 생의 가장 따뜻한 날들이 길어지길 바라는 마음까지 무너지면 안 되지 않는가.

내 노트북 바탕 화면은 파업 당시 공장 옥상에 걸터앉은 동료들의 사진이다모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2009년 7월 말의 맑은 여름날이다옥상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작게 잡혔다지난 해고 기간 동안 나는 이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 다짐도 했다우리는 반드시 내일에 가 닿겠노라고그러나 어떤 내일인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영글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다만 함께 살자는 구호가 자음과 모음이 되어 만들어 내는 어떤 말이었으면 했다모두가 복직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쌍용차 복직 노동자들의 내일은 어떤 날이어야 할까아니 어떤 내일이면 기쁘고 즐거울까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개인으로 친절과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면 좋겠다우리가 복직 과정에서 축복처럼 받았던 수많은 연대와 사랑과 기쁨이 드디어 우리를 통해 흘러 나갔으면 좋겠다장영은 작가의 말처럼 나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의 품위를 가진 사람이었으면 더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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