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노동절은 <작은책>이 스물여섯 살이 되는 날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창간 뜻을 품고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왔어요. 좋은 글 주시는 필자님들과 다달이 구독과 후원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달부터 송주홍 님이 ‘노가다꾼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노가다’라는 낱말에 거부감이 드는 분들은 송주홍 님의 글을 읽어 보세요. 생각이 유쾌하고, 글도 재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한 분입니다. (깨알 같은 필자 자랑. ㅋㅋ)
지난 4월 7일, 2021년 보궐 선거가 끝난 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성하는 목소리를 내는 한편 세상을 향해 비난하는 글들을 쏟아 냈습니다. 타임라인에 뜨는 글들을 읽다가 쌓이는 피로감에 며칠 동안 계정을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SNS를 그만둬야 하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요. 마침 <작은책> 이번 호 ‘법률 상담소’에 실린 글을 읽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은 서비스를 통해 수집한 대량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정보를 도널드 트럼프 후보 선거캠프에 넘겨 선거운동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사를 한 결과 페이스북 이용자의 개인정보 침해 행위를 확인했답니다. 저처럼 SNS에 피로도가 쌓이는 독자님들이 계시면 이 글을 꼭 읽어 봐 주세요. 우리는 정말로 SNS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강화도에 사는 <작은책> 독자 몇 분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중에 17년 동안 <작은책>을 꾸준히 보고 있는 조영보 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귀농한 분이라는데 어떻게 귀농에 성공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강화에 있는 또 다른 독자 함경숙 씨도 만나 보고 싶었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1002번길, 알려 준 주소로 가 보니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가 나왔다. 둘레는 온통 논과 밭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곳에서 조영보 씨가 나온다. 키가 크고 무뚝뚝해 보였다. 조영보 씨는 지금 집 안이 엉망이라 치우는 중이라며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큰아들이 잠깐 집에 왔는데 짐 정리가 안 돼 있어서 엉망이라는 것이다. 스물여섯 살인 작은아들은 농사꾼이라고 했다. 요즘 젊은이가 농사꾼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그것부터 물었다. "청년이 어떻게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까요?" 조영보 씨는 집 뒤에 있는 낮은 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이 산마을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저게 산마을고등학교예요. 군대는 안 갔어요. 농수산대 나온 친구들은 병역 대체가 돼요. 방위산업체 요원처럼. 농사짓는 걸로. 자기 농사만 지으면 돼요."
조영보 씨 말소리가 워낙 조용한 데다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아, 그런 제도가 있군요. 젊은 친구들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진로인데요? 병역 대체복무로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낫겠네요." "청년들은 가능해요. 농사로 병역을 필하겠다고 원서 제출만 하면 가능해요. 여기 졸업하면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제도. 원래 한시적 제도로 폐지하려고 했는데 폐지를 못했지요. 농업 인원도 적어요. 4주 논산 교육이 끝나면 논농사, 포도 농사, 다 조금씩 하는 거죠. 안 대표님은 제가 전에 뵌 적이 있어요. 예전에 대보름 놀이할 때, 오셨을 때 봤어요." "아, 3년 전 대보름 놀이할 때요?" "그 행사를 제가 총괄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2년째 못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2년 전 대보름 때 볏짚 태우기와 쥐불놀이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작은책> 독자라고 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사람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영보 씨 부인 이은순 씨가 방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말한다. "추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 잔뜩 쌓여 있는 걸 상상했는데 의외로 깨끗했다. 이은순 씨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책>을 어떻게 보기 시작했어요?" "2005년에 귀농학교 갔다가…. 서정홍 씨 강좌 때였죠. 이진천 씨가 사무처장 할 때였는데 자기도 <작은책>에 글을 쓴다고 하면서 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봤을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귀농통문>하고 <작은책>은 꼭 봐요." '귀농학교'란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는 강좌다. 귀농운동본부는 1996년 1기 생태귀농학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연과 마을에 뿌리내리는 귀농'을 실현할 수 있도록 생태귀농학교를 열어 오고 있다. 벌써 86기인데 귀농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들어야 할 강좌다. 귀농 강연뿐만 아니라 전통술 빚기, 시골집 고쳐 살기, 발효빵 만들기, 생활기술학교 등 분야가 다양하다. 나는 생태귀농학교 58기 때 수강을 했는데 아직 귀농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농사는 재밌어요?" "재미있으니까 하겠죠. 하하. 그때는 특별히 귀농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 나도 개인의 삶도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40대 초에 귀농을 하자고 생각하고 귀농 교육을 듣고, 처음에는 준비하고 갈까 생각했는데, 준비해서 갈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가자, 생각 없이 온 거죠." 생각이 너무 많고 계획을 세워 귀농하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조영보 씨는 운동권이었다. 잘난 체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고 감정 없이 아주 건조하게 살아온 경력을 큰 줄기만 이야기한다. "학생운동 하고 대학 졸업 못 하고, 노동운동 하고…. 인천에서 하다가 나중에 권인숙 씨가 노동인권회관 세울 때 같이 활동했어요. 그다음 결혼하고 고민했죠. 권인숙 씨는 미국 가고 저는 결혼하고 근처 살면서 운동하긴 했는데 먹고사는 데 애쓰고. 1991년에 결혼했어요. 93년, 95년에 낳은 아들만 둘이고. 아이 엄마는 구로공단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어요. 나우정밀 부위원장까지 지냈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처음에 위장취업으로 들어갔다가 잡혀서 집행유예로 나왔는데 집행유예 기간에 또 들어가서 2년형을 받았어요. 89년쯤인가?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몰아서…. 집행유예 기간이라고 실형을 산 거죠." 조영보 씨는 학생운동 하고 결혼할 때까지, 단 세 줄로 자기 이력을 말한다. 자신은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내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한다. 성함은 이은순 씨. 나중에 검색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영보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조영보 씨는 인천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는 주물 공장에 다녔어요. 87년부터." "왜 노동운동에 투신했어요.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더 끌어내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 그때는 나처럼 대학을 못 들어가고 공장을 다녔던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사회의식에 눈을 뜬 학생이나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조영보 씨 또한 그런 사례였다. "그때는 독재정권 때였으니까 다들 노조 만들고 징역 가고 그랬죠. 저도 한 번 잡혔지만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그것 때문에 군대 안 가고. 그때 대부분 친구들이 그랬어요." 조영보 씨는 노동운동 할 때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까 봐 그런지 거기서 끊고, 갑자기 강화도 들어온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강화도 들어온 거는 특별한 이유 없고, 연고도 없었죠. 부모님과 아내가 귀농을 반대했어요. 애들 어린데 벌어 놓은 것도 없이 귀농한다고 반대가 심해서…. 일산에 살 때였는데 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생태 귀농 교육을 받고 어느 날 귀농운동본부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강화도 양도면에 하우스 짓고 하는 노가다 일이 나왔어요. 사람 하나 쓴다고. 그때 가진 돈도 없었고 전세금 뺄 수도 없어서 800만 원 들고 가려고 했더니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가라고 해요. 그때 큰애가 중학교 2학년, 작은애가 초등학교 6학년. 애들 데리고 가겠다고 했죠. 큰애는 중학생이니까 졸업하면 데려가기로 하고, 작은애만 먼저 데리고 왔죠. 월세방 하나 구해서." 말하는 도중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말을 끊지 않으려고 맞장구만 치면서 들었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온 거니까, 의식적으로 다른 활동을 피했죠. 도시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있었거든요. 마을 생협 상근하거나. 그런데 그런 거는 일체 안 맡은 거죠.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 되겠다. 와서 쭉 하다 보니까 다행히 몸 안 아파서."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어요?" "불편하죠. 모든 것이 불안정하죠. 집도 없고. 내가 이 집에서 계약이 끝나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나 걱정이 되고. 농지도 없으니까. 또 불리한 농지를 얻게 되니까 힘들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농지를 왜 외지에서 온 사람한테 주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사람들을 잘 만났던 거 같아요. 여러 사람 도움을 받은 거죠. 저 나름 열심히 살긴 살았지만 과정마다 도움을 받았던 거 같아요." "처음 농사지을 때 어땠어요?" "처음에 농토가 없으니까 2, 3백 평 농사를 지었죠. 수입이 1년에 30만 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 도장리로 귀촌한 동네 누님이 동네 아줌마한테 포도밭을 얻은 거예요. 그 누님이 같이 포도 농사 하자고 해서 그 누님하고 친구하고 셋이서 포도 농사를 했죠. 귀농 3년차였을 거예요.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주변에서 말들 많았죠.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포도 농사는 괜찮았어요. 처음엔 모르고 잘됐고요. 남들 안 하는 유기농으로 했죠. 여기 양도리가 포도로 유명한 데예요. 유기농으로 지었는데 첫해는 잘됐어요. 맛있고 가격도 비싸고. 양이 많지 않아서. 동네에서 그랬을 거예요. 저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잘하네. 우리는 뭘 모르고 한 건데. 둘째 해는 망했죠. 바로 실력을 검증받았죠. 정성만 갖고 안 되는 게 있어요. 다 헤어지는 걸로 됐어요. 저는 그 포도밭이 딸린 집으로 이사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참으면 살아남는 것일까. 조영보 씨는 행운이 따랐다고 한다. "당시 외지 사람들이 농지를 많이 샀어요. 투기하려고 사니까 대부분 그런 논들은 농사를 안 짓죠. 농사는 안 짓고 이장에게 빌려줘요. 그런데 제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거예요. 시골에서 저는 젊은 축에 속하는 거죠. 젊은 사람이니까, 나를 보더니 '당신이 맡아서 해라' 하더니 '또 딴 데도 할 수 있나요?' 해서 '네.' 했죠. 저는 고맙죠. 그렇게 논을 빌렸어요." 귀농이 성공하려면 농사꾼이 돼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농촌에서 농사꾼이 될 수 있는 길은 일단 자기 농토가 있어야 한다. 임대차 계약서로는 농지 원부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조영보 씨는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받아 대신 경영을 해 주는 계약을 맺고 농지 원부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임대차로 농지 원부 만들기가 어렵거든요. 농어촌공사에서 받은 서류는 관에서 증명하는 서류라 된 거죠. 운이 좋았어요. 농지 원부가 되니까 애들 학자금이 나오고, 서류상 농부가 되니까, 그 당시 등록금 있었는데 그걸 안 낼 수 있게 된 거죠. 임대료 몇 배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농협도 가입할 수 있었고. 조금씩 농업 소득만으로 살 수 있게 됐죠. 5년 정도 하니까 조금 농사 경험도 쌓이고…. 그렇다고 농사로 돈을 버는 건 아니죠. 전 덜 쓰면서 살자는 주의라서 버틸 수 있었죠. 둘째가 산마을고등학교 갈 때 아내와 합류했어요. 아내는 일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애들 초등학교 방과후 실험 선생님. 그거 하다가 나이 먹으니까 초등학생 상대하는 것도 힘들고 맨날 보따리 들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1년 계약이잖아요. 여기서도 수업 계속 할 수 있으니까 강화로 왔죠. 그런데 강화엔 학생들이 별로 없어요. 한두 해 하다가 그만뒀죠. 아내가 와서 집은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빌려서 살고 있는 그 집이 너무 추웠거든요. 창틀이 벌어져 찬바람이 들어오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죠. 전 제가 농사짓는 논밭이 있는 도장리 쪽에 구하려고 했어요. 근데 아내는 싼 데 있으면 빨리 지어야 한다고 했지요. 더 버티기엔 힘들었죠. 그래, 내가 논으로 출퇴근한다고 생각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이 집을 지었어요."
"아들이 농사를 같이 지으니까 이제는 좀 안정이 됐죠?" "저는 논을 임대해서 만 평 정도 짓고 있고요, 아들은 논을 샀어요. 융자를 받아서. 요즘 2억까지 융자해 줘요. 지금 청년 농부들은 괜찮아요." 아,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면 유리한 점이 있겠다. 조영보 씨는 자리를 잡아 가면서 강화라디오에도 나가서 방송도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운영하는 꿈틀리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농사도 가르친다. "농사를 하나의 중요한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에서 한 건 아니고 논에서 했어요. 300평 논 하나가 있어서 이건 니네가 해라. 내 성격은 막 다그치는 게 아니고…. 농사를 잘 못 지으면, 안 먹으면 되지, 뭐. 근데 잘돼요. 손 모내기할 때는 어설픈데 기계보다 잘 자라요. 매년 본인들이 수확해서 말리는 것까지. 도정해서 나오는 쌀을 다 가져가요. 전 도지와 비용도 있으니까 좀 받죠. 많이 나올 때는 보통 여섯 가마 정도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100평에 두 가마가 평균이에요. 대여섯 가마는 나와요. 부모들이 대견해하죠. 계속 하고 있어요." 다시 <작은책> 이야기를 꺼냈다. 17년 동안 <작은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른 책도 많이 봤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과 사상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가가 무척 중요하다. 조영보 씨는 어떤 책을 읽고 지금의 세계관이 형성됐을까 궁금했다. "<작은책>을 봤을 때 주로 어떤 내용을 재미있게 봤어요?" "그 당시 농민이 쓴 꼭지를 주로 봤고요. 책은 전체를 죽 보는 편이에요." <작은책>은 2003년 11월호부터 '농촌 들녘에서 만난 사람'을 연재했다. 처음엔 서정홍 씨가 연재했고 그 뒤를 이어 받아 2006년 4월호부터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처장인 이진천 씨가 2007년 12월까지 연재했다. 주로 귀농한 사람들의 사례를 실었는데, 그 꼭지를 보고 귀농한 분들도 있고 독자끼리 인연이 맺어져 결혼한 분들도 있다. "요즘 <작은책>에선 기억나는 게 있나요?" "요즘엔 주로 서평을 재미있게 보고. 얼마 전에 미술사? 그걸 재미있게 보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보고…. 재밌게 본 거는 만화가 이동수 부부가 쓴 글. 남편과 부인이 다른 관점으로 쓴 글을 재미있게 봤어요." 또 어떤 책을 봤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다시 강화 이야기로 돌아간다. "도장리는 젊은 친구, 시민 운동하시는 분들도 많고, 문화적인 그런 것들이 많아요. 넓벌이라는 풍물패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10년 돼 갈라나? 그 전엔 모여서 술만 엄청 먹었죠. 술만 먹지 말고 풍물이나 하자. 풍물 잘하는 사람 한 명 초청해서 한 번 배우고, 그 뒤에 일체 관의 도움 없이 대보름날 행사를 만들었죠. 그런 모임이 활력이 됐고, 책 좋아하니까 강화독서회 모임 하면서 강화에서 하는 책방에서 책을 사자. 읍에 청운서림, 도장리에 있는 책방 국자와주걱 두 군데서 책을 샀어요." "혹시 그 책방 국자와주걱 대표 김현숙 씨가 포도밭을 빌려준 사람인가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는 분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일 거라 짐작하고 물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네, 그 누님이 포도밭을 빌려줬어요. 인천에서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 분들 도움받은 거죠. 그 형님도 같은 풍물패고…. 지금은 4, 50대가 모여 교류를 많이 해요. 강화라디오도 1년 했죠. 강화라디오를 만드신 분들이 제가 살아온 이야기와 농사일 이야기 해 달라고 해서 1년 했어요. 20분 동안 대본 없이 떠들었죠. '조 아저씨의 농사 이야기' 2주에 한 번, 20회 정도 했을 거예요. 그때는 초보 농사꾼 이야기를 했지요." 조영보 씨는 자기 삶에 만족해했지만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다고 한다. "너무 자기 위주로 산 것 같고, 다른 사람이 보면 남을 위해서 산 것 같은데 가족들이 보면…. 저는 형편에 맞춰서 살아야 된다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주의였어요. 애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엄마 아빠는 능력 없으니까. 제가 귀농할 무렵엔 많이 싸웠죠. 우리가 너무 싸우니까 아이들이 눈치를 많이 봤던 거 같아요." "그래도 보람이 있지 않았나요?" "그때그때마다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 그때 만족도가 높았고, 두려울 것도 없었고." 나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갔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어떤 책이 자기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태일 평전》. 나중엔 《토지》, 《아리랑》. 요즘도 매달 한 권씩 보려고 하죠. 겨울엔 일체 일 안 해요. 4개월은 알바도 안 해요. 그래서 겨울엔 책 많이 보죠." 조영보 씨는 다시 집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서둘러 집을 빨리 지으려고 이쪽 양도면 삼흥리에 있는 산마을고등학교 쪽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논과 밭이 있는 곳은 현재 집하고 8.5킬로미터 떨어진 양도면 도장리에 있다. "전에 살던 도장리에서는 지도자 일도 해 봤지만 이쪽에선 또 새로 시작해야죠. 다락논인데 그걸 싸게 산 거죠. 여기서 귀농해서 정착한 경우가 없어요. 토박이들이 귀농하는 사람들 진정성을 잘 안 믿는 거죠. 그걸 극복하는 데 좀 걸리죠. 농사꾼이라는 평판을 얻는 게 시간이 좀 걸려요. 보통 10년이면 다 된다고 하잖아요. 그 정도 되면 다 자리 잡을 수 있어요." 10년 버티면 농사꾼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다. 조영보 씨 아내 이은순 씨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들 때문에 바쁜 듯해서 말을 건네지 못했다. 두 시간 넘게 조영보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을 나왔다. 다음에 만날 분은 강화도 독자 함경숙 씨였다. 함경숙 씨는 2013년에 내가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글쓰기 강좌를 한 뒤 독자가 된 분이다. 직함이 많다. 페이스북에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사무국장, 넉살좋은 강화도여행, 평화어머니회 공동대표, 인천광역시 평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 등이 올라와 있다. 함경숙 씨 집은 강화군 송해면 강화대로 송해파출소 뒤쪽 언덕 위에 있었다.
함경숙 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2016년에 귀향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방 안에 남자 세 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눴다. 평화재향군인회 상임공동대표 김기준 씨. 햇빛나눔협동조합 이사 서영만 씨, 발달장애인 농업회사 법인을 만들고 있는 이광구 씨였다. 그중 김기준 대표는 여든 살이 넘었다는데 엄청 건강하셨다. 집이 양양인데 인제에 있는 허준약초학교에서 무보수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는 서울 가는 버스가 끊어진다고 훌쩍 떠나셨다. 이광구 씨는 이력이 다양했다. 용접공, 노동 상담, 자동차 정비 공장, 대리운전, 재무 설계 회사 등, 그동안 가진 직업만 스물세 가지 정도라고 한다. 책도 많이 냈다. 《희망교육 분투기》, 《희망통장 콘서트》, 《인생 2라운드 50년》 등이 있다. 구로동맹파업 동지 또 다른 여성분 두 사람은 나중에 자리에 참석했다. 임선화, 여윤구 씨다. 이분들은 함경숙 씨네 집 포도나무 가지치기도 도울 겸 놀러왔다고 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임선화 씨가 대답한다. "아, 우리는 초중고 동창이에요. 둘 다 성신여고를 다녔고요. 저는 '한국빠이롯드' 노조 결성하고 성남에서 연투(연대 투쟁)했었어요. 우리 1984년도 구로동맹파업 동지예요. 심상정 안 불어 가지고 얼마나 맞았는지. 나는 그냥 강화에 한번 가 보자, 놀러가듯 왔는데. 친구는 강화로 내려오고 싶어 해요." 두 분도 역시 평범한 분들이 아니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4일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이 연대하여 벌인 파업이다. 위키백과는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라고 설명한다. 구로동맹파업 뒤 국회의원이 된 심상정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수배를 당하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생을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두 분도 그런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두 분은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임선화 씨는 원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평화행동에서 활동하는 분이었다. 이번에 함경숙 씨와 같이 강화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여윤구 씨와 같이 왔단다.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렇게 생태운동이나 평화운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여윤구 씨는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노동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웠다. 특이하게 지금은 무속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저는 지금은 단청 탱화문화제 일을 하고 있어요, 저 친구랑 오래된 인연이 있어요. 인천, 부천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강화에 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해서, 그때 집 보러 다녔어요. 이광구 선생이 가이드 해 주고. 그리고 20년 못 만나다가 어제 만난 거예요. 교동아일랜드라고, 교동도 안에 있는 체험 농장인데 거기서 고사리를 해 볼까 하고 갔었거든요."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 다음 날 아침에 가지치기를 한다는 포도밭으로 가 봤다. 모두 4백 그루 정도라고 했다. 서영만, 임선화, 여윤구 씨가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큰 가위가 없어서 조그만 가위로 자르는데 힘겨워 보인다. 구경만 하기에는 좀 미안해 나도 가위를 빌려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9시 40분에 가지치기 일이 끝났다. 이광구 씨가 발달장애인 청년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모두 원불교 평화행동에서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다시 함경숙 씨 집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윤구, 임선화 씨 두 분이 모두 <작은책>을 구독해 주셨다. 함경숙 씨 덕분에 좋은 사람들끼리 인연이 이어지는 듯했다. 함경숙 씨는 너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평화 활동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교동도를 가 보고 싶었다. 전에 가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문소에서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적고 방문증을 받았다. 교동대교를 건넜다. 한 10분쯤 가니까 대룡시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을 해서 이북이 가까이 보인다는 망향대로 향했다. 망향대는 높이가 50미터밖에 안 되는 언덕이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조그만 공터가 있고 '망향카페'라고 간판을 단 봉고차 가게가 한 대 서 있다. 이 망향대는 6.25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황해도 연백이면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이다. 바로 저 강 건너가 아버지 고향이다. 이북 쪽을 바라볼 수 있게 망원경 두 대가 설치돼 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망원경으로 이북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할아버지가 "아, 보인다, 보여. 자전거 타는 사람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네. 그런데 아파트는 가짜네, 가짜. 그냥 전시물이야." 그 뒤를 이어 어떤 아주머니가 망원경을 보면서 또 한마디 한다. "자전거 타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네. 저 사람들 하루 종일 자전거 타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냐?"
어처구니가 없어 슬그머니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다. 반공 교육이 무섭긴 무섭다. 나도 '이북이 우리한테 잘사는 걸 보여 주려고 그런 쇼를 한다'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반항했다가 입이 찢겨서 죽었다던 '이승복 어린이' 교육도 받았다. 이젠 거짓과 진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세뇌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날씨가 뿌예 아파트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북에 있는 사람도 이곳에 있는 사람처럼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파트가 가짜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북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통일이 될 리가 있나. 독재정권 때 받은 교육이 이렇게나 무섭다니. 그동안 강화에서 만났던 <작은책> 독자들과 비교해 보면 이 사람들은 깜깜한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향대에서 내려와 대룡시장으로 갔다. 황해도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이라고 한다. 슬레이트 지붕과 나무 문짝으로 된 가게가 많은 좁은 골목 시장이다. 방앗간, 90세 할아버지가 운영한다는 동산약방, 커피에 달걀을 띄워 준다는 교동다방 등이 있다. 앗!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성공회대 노동대학 역사 기행 때 들렀던 시장이다. 세상에 이렇게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나. 나, 치매 초기인가? 실내에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는 가게에서 감자전 하나를 주문해서 먹었다.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어느새 2월을 맞습니다. 1월호가 나가고 독자님들이 연락을 많이 주셨습니다. 새 꼭지와 필진이 기대가 된다는 얘기, 연재가 끝난 꼭지에 대한 아쉬운 마음 등을 전해 주셨습니다. 독자님들 마음 받아 글 한 편 한 편 정성을 다해 싣도록 하겠습니다.
독자님들, ‘희망버스’를 기억하시나요? 2011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씨를 응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였지요. 고공농성 309일 만에 땅으로 내려왔으나 복직은 되지 않았어요. 배 만드는 노동자였던 김진숙 씨가 해고된 지 35년째입니다. 암 투병 중인 그녀는 ‘복직 없이 정년 없다’는 각오로 부산에서 서울까지 걷고 있습니다. 이번 달 ‘안건모의 사람여행’ 주인공은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입니다. 김진숙 씨가 왜 걸을 수밖에 없는지, 누가 왜 그 길을 따라나섰는지 ‘희망뚜벅이’들을 본문에서 만나 보세요.
청와대사랑채 앞에는 ‘김진숙 복직’을 염원하는 분들이 오늘로 25일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고, 김진숙 씨와 ‘희망뚜벅이’들은 15일째 걷고 있어요. 오늘은 김천역을 지났고, 독자님들이 2월호를 받게 되는 2월 초에는 천안, 평택, 인덕원 근방을 지나게 될 겁니다. 서울이 가까워지면서 ‘희망뚜벅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 같아요.
독자님들, 근처에서 줄지어 뚜벅뚜벅 걷는 사람들을 보시거들랑 손 한번 흔들어 주세요. 걷는 걸음걸음에 희망을 보내 주세요. 김진숙 씨가 외칩니다. “끝까지 함께 웃으며 투쟁!”
2021년 새해를 맞습니다. 지난 1년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을 참 많이 바꿔 놓았습니다. 날마다 코로나 확진자가 몇 명인지 검색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느라 작은책도 연말연시 모임이나 행사는 아예 계획하지 않았고요, 다달이 독자분들과 유일한 소통 창구인 글쓰기 모임도 화상회의 플랫폼 줌(Zoom)으로 하고 있습니다. 직접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인터넷으로 접속을 하니 멀리 지방에 계신 독자분들도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더군요. 시절에 맞게 독자님들께 다가갈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새해부터 ‘안건모의 사람여행’ 연재를 시작합니다. <작은책>과 인연이 있는 분들을 만나 그분들의 삶을 여행하고자 합니다. 1월호 사람여행의 첫 주인공은 제주도에서 집 없이 사는 최성희·최상천 부부입니다. 맘 편히 여행 다니기 어려운 시절이니 <작은책>을 읽으며 함께 사람여행을 떠나기로 해요.
올해도 <작은책>은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비중 있게 다룹니다. 새로 시작한 꼭지의 필자님들과 함께 다달이 웃고 우는, 사람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요. <작은책> 자문위원인 정태인 님의 ‘희망의 경제학’과 홍세화 님의 ‘낮은 곳, 나의 자리로’도 연재됩니다.
올해도 변함없이 <작은책>은 작고 낮은 곳에서 독자님들과 함께하겠습니다. 독자님들, 늘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코로나19가 인간들의 일상을 멈춰 세우거나 말거나 자연은 흘러갑니다. 장마도 태풍도 끝나고 가을이 왔습니다. 어릴 때 보던 따가운 햇살과 뭉게구름도 보입니다. 기후변화 때문에 특히 농부와 어부들의 피해가 많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달에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지요. 좋은 소식은 대법원이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단함으로써 전교조가 다시 노동조합 지위를 회복할 수 있게 된 소식이었습니다. 대법원 결과가 나오기 전에, 언제든지 정부가 전교조 법외노조 처분을 직권 취소할 수 있었지만 외면해 왔습니다. 7년 사이에 무려 서른 명이 넘는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나 거리에서 떠돌았습니다. 지연된 정의는 정의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제라도 빨리 이들을 복직시키고 해직 기간 동안의 임금을 지급해야 합니다.
나쁜 소식은 전공의들의 집단 진료 거부였죠. 의사 수를 늘리자는 정부 방침에 자기들 수익이 떨어질까 봐 온갖 해괴한 논리로 진료를 거부하며 집단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의대생은 ‘의사 수, 정말 부족하냐’, ‘아픈 데도 진료 받지 못하신 분이 정말 있냐’고 어이없는 팻말을 들고서 1인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정말 몰라서 묻냐?”고 되묻고 싶었습니다. ‘전교 1등’ 수준이 그것뿐인가 반문하고 싶었습니다. 10월호 특집에서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독자님들, 그런 후안무치한 자들한테 치료받지 않도록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재인 촛불 정권이 탄생하면서 금방 바뀔 줄 알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진상도 금방 규명될 줄 알았고, 전교조, 공무원노조가 합법화되고, 해고된 노동자들이 복직되고, 비정규직이 감축되고, 양심수들도 석방되고, 정당한 파업을 한 노동자들에게 회사가 청구한 손해배상도 취하가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것 한 가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습니다.
국민들은, 국회에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고 국회를 마비시키는 미통당 때문이라고 판단해 여당에게 180석 정도, 압도적으로 표를 몰아줬습니다. 여당 의석만으로 법을 뜯어 고칠 정도로 몰아준 것입니다. 이제는 나라가 정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요? 정기 국회가 열리면, 건국 이래로 사상을 검증하고,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을 탄압하는 데 써 먹던 국가보안법은 폐지되는 걸까요?
수구 세력들이 발악을 합니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 나라를 찾은 기쁨을 나눠야 할 뜻 깊은 날에 전광훈 같은 극우 세력들이 광화문을 점령했습니다. 민족이 해방된 날에 제국주의의 상징 성조기를 흔들고, 우리나라를 짓밟았던 일장기, 욱일기까지 등장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도 확산시켰습니다. 대체 어쩌자는 걸까요.
독자님들, 이달 특집은 지난 7월 30일 국회에서 속전속결로 통과된 주택임대차보호법입니다. 서민을 위한 법인데, 왜 수구 미통당과 찌라시 언론에서는 이제 전세는 씨가 마를 것이고, 집값은 더 올라갈 것이라고 협박을 하는 걸까요? ‘여러분, 이거 다아 거짓말인 거 아시죠?’
영웅이냐, 악랄한 친일파냐? 미래통합당과 수구 언론이 고 백선엽 씨를 ‘영웅’이라고 호칭하며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광복회와 민족문제연구소 등 시민단체는 백선엽 씨를 친일파 중 악랄한 친일파로 분류해 대전현충원에도 안장하는 걸 반대하고 있습니다.
친일인명사전에는 백선엽 씨가 복무했던 간도특설대는 사병까지 전원 친일파로 분류돼 있습니다. 독립군 토벌에 가장 적극적이고 잔혹하고 악랄했기 때문이지요. 백선엽 씨는 6·25전쟁이 끝난 뒤, 동생 백인엽 씨와 사상 최악의 선인학원 비리를 저지르고, 부동산 투자로 현 시세로 2천억이 넘는 덕흥빌딩을 소유하고, 50억이 넘는 자택에서 아주 ‘청빈’(?)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친일파를 옹호하는 수구 정당은 촛불 이후로 조금씩 역사가 바로 잡혀가면서 점점 소수 정당이 돼 가고 있다는 걸 자신들만 모르고 있지요.
작은책 8월호 특집은 ‘작업중지권’입니다. 4년 전 구의역 사고, 2년 전 태안 화력발전소 사고 등 하루에 7명, 1년에 2400여 명이 산재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이들이 ‘작업중지권’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있었더라면 허망하게 사망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이 이른바 ‘한국판 뉴딜’을 포스트코로나 시대 새로운 성장 전략으로 내세웠습니다. 김경수 경남 지사는 ‘격차 해소’, 이재명 경기도 지사는 ‘기본소득’이 진짜 뉴딜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요, 저는 ‘작업중지권’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진짜 뉴딜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님들은 어떠신가요?
<작은책>이 2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1995년 5월 1일, 노동절에 맞춰 창간한 <작은책>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생활글쓰기를 선도해 왔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고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고 이 사회의 주류들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모임도 만들고 노동자들이 쓴 글을 찾아 실었습니다. 지금까지 <작은책>에 실렸던 생활글에는 서민들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달의 책이 이끄는 여행은 하명희 작가가 《어서오세요 베짱이도서관입니다》(박소영, 그물코)를 읽고 느낀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박소영 관장이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 낸 책입니다. 하명희 작가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천변을 산책합니다. 독자님들도 함께 산책하면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작은책> 25주년 특집은, 인물을 인터뷰하지 않고 <작은책> 독자 25분을 무작위로 선정해 “요즘 뭐 해 먹고삽니까?”라는 주제로 글을 받았습니다. 라이더유니온 위원장도 있고 농사꾼, 글 쓰는 주부, 정년퇴직하고 다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 버티면서 먹고살고는 있지만 요즘 모두 코로나19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로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독자님들, 어제 선거 결과는 잘 보셨나요? 민주당이 압승했습니다. 세월호 막말을 일삼던 몇몇 국회의원이 낙선했네요. 오늘은 세월호 참사 6주기, 올해는 진실이 밝혀질까요?
9시, 정문 닫을 시간이야.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 눈에 보이는 아이 놔두고 문 닫는 게 매정하다 싶어 기다렸지.
“문 닫는다.”
고개 들어 나를 잠깐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느릿느릿.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며 ‘지각인 거 모르냐. 얼른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오는 걸 꿀꺽 삼켰어. 잔소리한다고 지각 안 하면 맨날 잔소리하게.
“아침은 먹었니?”
“아뇨.”
“들어가면 우유라도 미리 먹어. 담임선생님께 아침 못 먹었다고 말씀드리고.”
“싫어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올라가. 넘어질라.”
고개 숙인 채 그 걸음걸이 그대로 걸으며 하는 말에는 귀찮음과 어두움과 건조함이 느껴져. 아침맞이 때마다 아무리 아는 척해도 눈길 주지 않고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고개 숙이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등교하는 녀석.
지각하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말을 안 하도록 만들어 준 아이가 있어. 아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할 때 만난 민선이. 민선이는 거의 날마다 지각을 했지. 수업 시작하는 9시에 오면 아주 훌륭한 거고, 1교시 중간이나 2교시, 가끔은 3, 4교시에 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결석은 안 해. 우울한 얼굴에 말수는 적고 아이들과 즐겁고 맛있게 어울리지도 않아.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많고.
녀석이 늦을 때마다 그저 누구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했어. “늦었구나.”, “조금 일찍 다녀라.”, “날마다 늦으면 어떻게 하니? 자리에 앉아서 얼른 수업 준비해.”,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오도록 해 봐.”내 표정과 말투가 좋을 리 없지. 가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민선이는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늦게 자서 그런다는 말을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 마음을 안 연 거야.
그렇게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하순. 2교시 수업을 하다 우연히 창문 밖을 보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민선이가 보여. 2학년 여동생 손을 잡고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꽤 오래.
그 순간 나는 민선이가 되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 멀리 교실에서는 수업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조용하고 차분하고 엄숙한 학교. 나와 동생만 뚝 떨어져 있어. 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둘과는 달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내게 관심도 마음도 없어. 나는 날마다 늦는 아이고 친구도 없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아이. 그래도 나는 교실에 가야 해. 따로 갈 데가 없고 집에 있는 건 더 싫고 무섭기까지 해.
언니 손을 앞뒤로 흔들며 까부는 동생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별 감정 없이 몇 마디 던지는 민선이. 축 처지고 지치고 무거운 저 발걸음에서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픔이고 슬픔이야. 집에는 어떤 사정이 있기에,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 어떤 분위기와 흐름이 있기에 저렇게 어두운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오게 될까. 지각할 때마다 저 지친 발걸음으로 등교했을 텐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선생을 하지? 내가 사람을 본 거야, 아니면 껍데기만 보고 매달려 사는 거야. 담임으로서 민선이의 저 삶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이나 욱여넣고 규칙 잘 지키는 사람 만들겠다고 잔소리나 하다니.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맞춰 남녀노소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습관적으로 할 수 있고 하는 잔소리나 하고.
그 뒤로 민선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민선이가 아침저녁으로 동생과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집안의 흐름과 사는 형편은 그냥 짐작만 했고. 민선이에게 말했어. 늦어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당당하게 들어와라.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는 큰 공부 하는 거다. 대신 수업 흐름만은 따라가자. 늦어서 못 한 건 친구들이나 내게 물어서 해 가자. 밥을 못 먹고 올 때는 미리 우유를 먹도록 하고.
난 아이들에게 말했지. 부모님이 일찍 일하러 가셔서 민선이가 아침밥 차려 먹고 동생까지 챙겨서 온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늦는 게 당연하다. 밥 먹고 동생 챙겨 학교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니 민선이가 늦는 거에 대해서 너무 마음들 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으로 늦는 사람은 말해 다오.
그러고는 민선이가 당당하게 늦도록 했어. 이상한 아이, 늦는 아이, 게으른 아이라는 어두움을 걷어 내고, 대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손이 야무진 아이 이미지를 만들어 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도록 자리 배치부터 모둠 구성, 현장 학습과 반에서의 역할 등도 신경 쓰고. 늦었다고 잔소리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늦게 오면 수업 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고 했고. 그런데 지각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었어. 나중에는 8시 40분 전에 오기 시작했고 6학년 올라갈 무렵인 2월 어느 날 아침엔 내게 와서 말하기도 했어.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왔어요.”
그렇게 6학년으로 올려 보냈고 그해 스승의 날에 민선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어.
“선생님, 오학년 때 지각해도 야단치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각하거나 공부 못 하는 게 삶의 목표인 아이는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사는 나를 깨우쳐 준 민선이! 난 지금도 늦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 해. 하더라도 아이에게 맞게 하려 노력하지. 민선이가 지금은 서른 살 되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