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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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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3. 16:27 기획 특집

<작은책> 11월호

특집_ 전태일 열사 50주기, 아동·청소년 노동

 

 

생계형 알바를 하는 학교 밖 청소년

이정현/ 일하는학교 사무국장

  

민주는 스물네 살 청년이다. 열세 살 때부터 알바를 시작했다. 돈 문제로 다투는 일이 많던 엄마 아빠가 그 무렵 완전히 이혼을 했고, 건강이 나빠진 엄마는 일을 하지 못했다. 민주는 학교 준비물도 사고 친구들과 간식도 사 먹으려고 떡볶이집에서 시급 2000원을 받고 일을 시작했다. 잠깐 일하고 용돈을 벌려는 생각이었지만, 이후 민주의 삶은 '끝없이, 쉼없이' 일해야 하는 알바 생활로 이어졌다. 엄마의 병이 깊어지고 이혼한 아빠가 몇 해째 생활비를 보내 주지 않아 민주는 고등학교 입학 두 달 만에 자퇴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주유소, 피시방, 호프집, 제빵 공장. 민주는 몇 달에 한 번씩 여러 가지 일을 오가며 일했다. 한동안 일하다가 몸이 지치면 잠시 그만두고 쉬었다가, 돈이 부족해지면 다시 일을 하러 나가는 패턴을 반복했다.

 

불성실하고 예의 없는 자퇴생

일하는 곳을 계속 옮기게 되면서, 민주에게는 '불성실하다'거나 '끈기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따라붙었다. 10대 청소년이 긴 시간을 지속해 일하기는 힘들었다. 일이 어렵거나 정해진 시간을 지켜 출퇴근하는 것이 힘들기도 했지만 민주를 가장 지치고 힘들게 하는 것은 '일터의 사람들'이었다. 사장은 민주가 '당연한 것을 모른다'며 자주 혼을 냈고 민주가 스스로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근로계약서나 주휴수당에 대해서 말해 주지 않았다. 민주가 의지하고 싶었던, 그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매니저나 선임들은 나이 어린 민주를 무시하거나 텃세를 부리며 일터에서 존재감을 내세우려 했다. 사장이나 선배들이 던지는 수많은 거칠고 아픈 말들을 민주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마음이 지치면 몸이 지치고 아파 왔다. 하지만 병원에 가거나 쉴 수 없었다. 민주는 고등학교 졸업도 안 한 자신을 사회가 어떤 눈으로 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병원에 간다고 조퇴를 하거나 결석을 하면 불성실하고 무례한 아이로 낙인찍히기 쉬웠다. 민주는 아파도 참고 버티며 일했다. 그러다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지면, 아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연락을 끊고 일을 그만뒀다. 회사에서 연락이 올까 무서워 아예 연락처를 차단하거나 핸드폰 번호를 바꿨다. 민주가 '불성실하고 예의 없는 자퇴생'으로 평가되고 기억되는 악순환의 시간들은 그렇게 지나갔다.

 

알바가 직업인 청년들

우리 주변에는 '생계형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청년, 청소년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직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열악하고 불안정한 고용 환경에 놓여 있지만, '알바'라 부르기에는 주 5일 이상 하루 8시간 이상 일하고 그 월급으로 생계를 이어 가야 하는 사실상의 직업 노동자들이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경제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아무런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그들은, 의미없게 느껴지는 학교 생활을 중단하고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들은 평균적으로, 친구들이 고등학교 1학년을 다닐 무렵인 17세에 첫 알바를 시작한다. 하지만 절박한 생활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한곳에서 오래 일하지는 못한다. 이들 중 35퍼센트는 6개월 이내에, 70퍼센트가량은 1년 이내에 일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을 찾았다(생계형알바 실태조사 보고서’, 사회적협동조합 일하는학교, 2016).

 

'불성실'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과 싸우는 과정

오래 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어른들은 '인내심이 없다', '불성실하다'는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그들이 '그만둔다'는 결론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떤 마음의 과정을 거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학교'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할지 모르고 부당함을 느끼는 일에 대해서 의사소통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겪어 온 '비난과 공격'을 이겨 내는 방법도 아직 갖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처럼 어렵고 부당한 일이 있어도 아무 말 하지 않고 홀로 참고 마음의 고통과 싸우다가 단절이라는 최후의 방법을 택하게 되는 것뿐이다.

민주가 그랬던 것처럼, 10대에게 일터는 어렵고 두려운 곳이다. 너무나 일방적이고 불친절하고 윗사람이나 선배들 관계에 눈치껏 끼어들지 못하면 쉽게 왕따가 되는 힘든 곳이기도 하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지 않고, 내가 모르는 것을 '당연한 상식'이라며 되레 혼을 내는 막막한 곳이다.

그래도 그들에게 '''일터'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학교'라는 성장의 유예 기간, 친구를 만나 어울리는 시간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좌절과 은둔의 시간을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들은 '일과 일터'를 통해서 성취의 경험들을 채우고 싶어 한다. 그들에게는 일터가 '학교'이고 '삶의 터전'이다. 돈도 벌어야 하지만, 나의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서, 조금 더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서 그들은 일한다.

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일터가 변화하면 좋겠다고 꿈꾸고 싶지만, 사실 너무 허황되고 요원하다. 다만 내 곁에 이렇게 일하는 청소년이 있다면, 그가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고, 조금 더 이해하고 응원할 수는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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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1. 13. 15:57 기획 특집

<작은책> 202011월호

특집_ 전태일 열사 50주기, 아동·청소년 노동

 

 

열세 살 때 나는 7번 시다였다

신순애/ 열세 살 여공의 삶저자

 

 우리 아버지는 1919년 남원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죽지 않기 위해 산속에서 약 6개월을 살았다고 하셨다. 하지만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하셨다. 오빠들은 한국전쟁 때문에 생긴 장애로 모두가 불편한 몸으로 생을 마감하셨다. 어머니는 삯바느질 혹은 품팔이 등으로 겨우겨우 먹고살아야 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나는 너무 일찍 철이 들어서 하고 싶은 공부 다 포기하고 살았다.

우리 가족은 1965년에 서울로 상경하였고 중랑교 무허가촌에서 살았다. 나는 당시 중랑교 휘경동에 있는 PAT 공장을 찾아갔다. 공장장은 면접에서 "꼬마야, 몇 살이야?" 하고 물었다. 나는 "열두 살이요." 했더니 공장장은 "집에 가서 엄마 젖 더 먹고 오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에 계신 엄마를 돕고 싶었다. 주인집 언니는 평화시장의 미싱사였다. 나에게 평화시장에서 재봉틀 기술을 배워 보라고 권유했다.

1966년 봄, 나는 평화시장 3층 삼양사 아동복 블라우스 만드는 공장에서 7번 시다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시다들은 다락방 마룻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일을 해야 했다. 그곳에선 옷 라벨 뒤에 번호를 꼭 써야 했다. 왜냐하면 혹시 잘못된 옷이 만들어지면 수선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7번 시다였다. 내 옆에는 1번 미싱사와 1번 시다가 있었고, 3, 5, 2번 미싱사와 시다가 함께 있었다. 당시에 S, M, L, XL, XXL, 이렇게 다섯 가지 사이즈가 있었다. 시다들은 일감을 받으려면 다락방에서 내려가서 받아 와야 했다. 여름에는 하루에 9~10번 정도 오르락내리락해야 했고, 겨울철에는 두꺼운 잠바를 만들기 때문에 서너 번으로 줄어들었다.

1960~70년대 당시 여공들은 열세 살 아동이었다.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출근 시간은 아침 8시였는데 퇴근 시간은 각자 조금씩 달랐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성남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밤 1030분 퇴근, 창동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11시 퇴근, 나는 1120분에 퇴근을 하는데 통금에 걸리지 않으려고 평화시장에서 동대문까지 달려가야 했다. 당시 사장들은 창신동, 신당동 주변에서 다니는 노동자들은 제일 좋아했다. 집이 가까우니까 밤 1130분까지 일을 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다들은 점심을 먹고 바로 또 일을 해야만 했다. 나는 아침에 출근하면 점심때 도시락 먹고 또다시 일을 했고,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밤 1120분까지 일을 했었다. 그 때문에 나는 척추가 바로 서지 못해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삼양사에서 약 4년 일을 했지만 이름을 아무도 모른다. 7번 미싱사 언니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얼굴은 계란형이었고, 오뚝한 코에 눈이 아주 빛이 났고, 머리는 양쪽으로 늘 따고, 앉아서 미싱을 했다. 약간 여드름도 있었다. 하지만 이름을 모른다. 한 번도 이름을 불러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유일하게 이름을 알게 된 1번 시다는 윤자이다. 윤자는 옷을 만들기 위해서 다락방에서 내려가 일감을 받아 온다. 시다들은 쭉 붙어 있는 라벨을 하나하나 쪽가위로 잘라서 미싱사에게 줘야 한다. 1번 시다 윤자는 M자를 자르는데 잘못 잘라 W로 나올 때가 많았다. 1번 시다는 다시 다락방에서 사다리로 내려가서 받아 오는데 미싱사들은 절대 그냥 주지 않고 혼을 냈다. 1번 시다는 혼이 났고 울면서 일을 했었다. 이런 일은 반복되었다. 하루는 내가 "1번 시다, 왜 매번 혼이 나야?" 물었더니 1번 시다가 ", 내가 한글도 모르는데 영어를 어떻게 알아?" 했다. 영어 M자와 W자를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1번 시다는 아침에 출근하면서 하느님, 부처님, 오늘 M자 일감을 받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면서 출근을 한다고 했다. 그날 이후 나는 M자 사이즈 라벨을 잘라 주는 것을 도와주었다. 라벨 10개 자르는 시간은 약 10초면 충분했기에 나는 그 일을 도와주면서 윤자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삼양사에서 나와 진선미공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윤자는 정전되면 나를 꼭 찾아와 나를 보고 싶어 했다. 윤자와 나는 그 인연으로 1978년에 노조에서 한글반 공부를 조합원들과 함께 배우기도 하였다.

나는 하루 14~15시간 일을 하면서도 기술자만 되면 당시 가장 높은 삼일 빌딩을 살 수 있을 거라는 꿈을 꾸면서 열심히 배웠다. 첫 월급으로 700원 받았는데, 미싱사는 1만 원~12천 원 정도 받았다. 나는 1만 원만 받으면 우리 가족 생활비를 하고도 저축할 수 있을 거라고 계산을 하였다. 공장에서는 물 한 모금 마음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물 먹고 싶은 것, 배고픈 것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화장실 참는 것은 미치도록 힘들었다. 화장실 한 번 가면 20~30명이 줄을 서 있어 기다려야 했다.

당시에는 한 달에 두 번, 첫째 셋째 일요일이 쉬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일이 바쁘면 토요일 아침에 출근해서 일요일 아침까지 24시간 꼬박 밤을 지새웠다. 하지만 시다들은 월급을 더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추석과 설 명절에 설탕 3킬로그램, 혹은 식용류 1.8리터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미싱사가 되어서도 열심히 일을 하였다. 한 달 동안 지각이나 결근을 하지 않아서 가끔 사장님이 가게로 내려오라고 해서 500원을 특별히 받기도 했다.

사춘기가 되면서 생리를 하게 되었다. 생리를 하면 생리대를 자주 갈아 줘야 했다. 재단사는 하루에 한두 번 가는 화장실을 자주 가면 생리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은 하지 않고 화장실만 갔다고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현대판 성희롱이다. 나는 도시락 가방에 천연 생리대를 챙겨 갔지만 장시간 일을 하다 보니 늘 부족했고,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속으로 삭이면서 일을 했었다.

1960년대는 밀가루, 우유 가루를 외국에서 지원받았다. 그 밀가루 자루는 잠바 주머니 속으로 재활되었다. 당시에는 약국에서 생리대를 팔았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내 주머니에는 교통비 10원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2018년 어느 방송에서 형편이 어려운 청소년이 생리대 구입할 돈이 없어서 운동화 깔창으로 생리대를 대신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지난날 밀가루 자루로 생리대를 대신했던 과거로 돌아가니, 내 몸에 진동이 오는 느낌을 받으면서 허탈하기도 했고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다.

19701113일 전태일 열사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하며 분신자살을 하였고, 분신 이후 청계노조가 탄생하였다. 하지만 평화시장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잘 알지 못했다.

당시에 나는 진선미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공장장은 "평화시장 구름다리 밑에 깡패가 죽어서 가마니로 덮어 놨으니 그곳에 가지 말라"고 하였다. 나 역시 알지 못했다. 훗날 노조를 알게 되면서 나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었다.

▲ 오열하는 사람들과 전태일의 운구를 운반하는 모습. 사진_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우리나라는 2020년 현재 GDP 세계 10위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곤에 허덕이는 청소년이 있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지 50년이 지났지만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1960년대 열심히 일을 하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2020년의 청소년들은 희망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빈부 격차 때문이다.

1998IMF 사태가 터졌을 때 정부는 공적 자금을 기업에 한없이 지원을 했다. 이제 공적 자금을 사람에게 투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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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8. 7. 16:45 기획 특집

<작은책> 20208월호

특집_ 작업중지권

 

오늘은 배달 불가능합니다.” 이럴 때 당신은?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귀가한 당신. 때마침 종일 내리던 비가 폭우로 바뀐 창밖을 바라보며 신속하게 배달 앱을 켭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신중하게 고심하여 메뉴를 고른 당신은 배달 전송 버튼을 누릅니다. 그러나 잠시 후 곧 도착할 저녁 식사를 기대한 당신에게 반갑지 않은, 문자가 돌아옵니다.

오늘은 비가 많이 와 배달이 불가능합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문자를 받아 든 당신은 이성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문자를 받은 즉시 배달업체에 전화를 하여 불같이 화를 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다행히(!) 이런 일은 현실에선 좀체 벌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배달 요청을 거부하는 일은, 날씨가 어떻든 간에 건당 수수료를 받아 삶을 유지하는 배달 노동자에게 생계가 달린 문제이니까요. 그가 스스로의 안전을 지키고자 단행한 배달 거부(작업중지)는 곧바로 배달 음식점과의 계약 해지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몇 년간 배달 노동자들이 폭염과 폭우 등 악천후 상황에서 배달을 거부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안전운임료를 요구하며 다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잠시 얘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 보겠습니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이 한국 사회뿐 아니라 전 세계를 휩쓸고 있습니다. 모두들 아시겠지만, 한동안 정부는 코로나19 예방 대책으로 고강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정부의 전염병 예방 대책이 통용되지 않는 공간이 있습니다. 급격히 증가한 택배 물량으로 하루 2천만 배송 건이 쏟아지는 물류센터입니다.

최근 사회적(물리적) 거리두기가 보장되지 않는 일터에서 발생한 집단 감염으로, 택배업체나 물류센터가 또 다른 전염병의 진앙지가 되었다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유례없는 폭염이 예상되고 있는 올해, 더 빨리 찾아온 더위 속에서 바삐 물류를 옮기는 일은 그 자체로 고역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로 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턱턱 막히는 공간에서 마스크를 쓰며 바삐 몸을 놀리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아찔합니다. 게다가 휴식 시간이나 휴게 공간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염병보다 무서운 고용이라는 밥줄을 선택해야 했습니다. 이곳에서도 일을 멈춘다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상황에서 일을 멈추는 것이 불온한 상상인가, 우리는 이 사회에 묻고 함께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업안전보건법(이하 산안법)은 모든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인의 이름을 앞세워 김용균법이라고 더 많이 불리게 된 산안법이 개정되었고, 그에 따라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이 보다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산안법은 일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유해·위험에서 노동자를 보호·예방해야 할 사업주의 다양한 의무를 담고 있어, 노동자의 권리를 명시하고 있는 법 조항은 좀체 찾아볼 수 없지만 유일하게 이 노동자의 작업중지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는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

▲ 안전보건공단의 작업중지권 카드뉴스 갈무리 화면.

이처럼 산안법은 급박한 위험이라는 제한된 상황을 설정하고 있지만, 작업을 중지하고 대피할 수 있다고 적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추가 조항을 통해 노동자의 믿을 만한 합리적 근거가 있으면, 작업중지나 대피로 인한 해고 등 불이익 처우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쏟아지거나, 눈이 내려서 빙판이 생긴 날,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과 강한 태양열로 인해 정신이 아찔한 상황에서 급박한 위험을 이유로 잠시 배달을 멈추는 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고객의 요청에 따른 빠른 배송을 철칙으로 생각하는 택배회사라고 하지만, 전염병이라는 위험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부당한 업무 지시는 급박한 위험이므로 업무를 거부하는 게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정부의 산재 사망 통계만으로도 OECD 1위를 달리며, 하루에도 6~7명의 노동자가 일터에 출근했다가 퇴근하지 못하는 위험 사회에서, 안전 조치나 보건 조치가 미흡한 상황에서 방어적 차원에서라도 노동자가 스스로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작업중지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뿐 아니라 동료의 목숨을 지킬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행사되고 권장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위험하면 일단 멈추고, 이를 감수하라고 요구하는 부당한 업무 지시를 거부·거절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일터에서 불온한 행동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의 상식이 되려면, 지금보다 훨씬 권장되어 일상의 행위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실시한 작업중지, 업무 거부와 거절을 근거로 해고나 계약 해지를 들먹이며 겁박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함께 이를 방어하고 지켜 내야 할 것입니다.

법 제도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암묵적인 제약이 되고 있는, 노동자의 작업중지의 경계를 허무는 것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행동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도 이를 응원하고, 함께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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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2. 15:16 기획 특집

<작은책> 20206월호

300호 특집

 

먹물출신의 노동자 홍보물 도전기

하종강/ 성공회대학교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

 

 

1981년에 노동운동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 만난 사람들이 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과 같은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들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하늘이 내려 주신 천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동일방직 해고 노동자 124명 중에 절반 정도가 나하고 동갑내기였다. 그 노동자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말이 넌 배운 놈이니까.”, “넌 지식인이니까.”, “먹물이니까.” 등이었다. 대화나 토론을 하다가 그런 지적을 당하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더 이상 진전이 안 되곤 했다.

알짜배기 노동자 출신이 아닌 사람이 계급성을 극복하고 노동자 정서에 충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고민 끝에 생각해 낸 훈련 방법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 무렵 비바람 속에 피어난 꽃, 서울로 간 허수아비, 어느 돌멩이의 외침등 노동자 수기와 노동 야학의 졸업 작품집 등에 노동자들이 쓴 글이 많이 나올 때였는데, 그런 글들을 있는 대로 모아서 같은 단어에 대해 노동자들의 정서가 표현된 문장들을 칼로 오려 대학 노트에 붙여 보는 것이었다.

고향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새벽에 고향에서 기차 타고 떠나오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한국 농업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는 활동가도 있다. ‘노동조합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노동조합이 뭘까? 나한테 도움이 되는 걸까?’ 이런 의문을 품는 노동자도 있지만 노동운동에 일생을 걸고 활동하는 노동자도 있다.

구름, , 어머니, 고향이런 수많은 단어들에 대해서 노동자 생각이 담긴 글을 주제별, 단계별로 오려서 대학 노트에 가지런히 붙여 정리하는 작업을 일 년쯤 했다. 그렇게 해 보니까 먹물출신으로서는 노동자 정서에 상당히 친숙해진 편이었고, 그 경험이 지금까지도 나에게는 큰 재산이 됐다고 생각한다.

먹물이 노동자들과 함께 2년쯤 부대낀 뒤에 만든 첫 번째 홍보물이 바로 <일꾼>이다. 하종강


편집 책임자였던 내가 글자 폰트의 크기와 종류를 적어 놓은 흔적이 보인다. ‘노동자도 한자어니까 일꾼이 우리말이다, 그런 호기로운 생각으로 이름을 <일꾼>으로 정했고, 어떻게든 노동자들에게 글을 쓰게 해 보자는 뜻으로 노동자가 쓴 글을 모집하는 광고도 실었다.

이 작업이 점점 발전해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꾼 노동문제 자료연구실을 설립하고 내가 실장을 맡았다. 노동자들에게 노동문제를 작은 주제로 나누어 정말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교재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노동자 교육의 교재로 사용될 뿐 아니라 노동자가 한번 손에 잡으면 너무 재미있어서 끝까지 다 읽을 수 있도록 해 보자는 취지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일꾼노동문제자료> 시리즈다.

▲ <일꾼노동문제자료> 시리즈. ⓒ하종강


<나는 바르게 계산된 월급봉투를 받고 있나?> 세 번째로 만든 일꾼 노동문제 자료이다.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민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글은 지배 세력의 또 다른 도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글은 길거리를 청소하는 청소부나 밭을 매는 노인들도 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원칙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그림을 많이 사용해 설명했고 관심을 유발하려고 노동문제 상식 퀴즈도 만들어 넣었다. 그때 무보수로 삽화를 담당해 주었던 대학생 후배가 바로 요즘 투쟁 현장마다 따라다니며 사람들 초상화 그려 주고 <작은책>에 만화도 연재하는 이동수 화백이다.

작업이 끝나면 사람들과 같이 식당에 가서 뒤풀이를 했다. 한번은 식당에서 틀어 놓은 텔레비전에 뉴스가 나오는데 부장검사가 나와서 이렇게 말했다. 마약의 위험성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제고시켜야 합니다.” 그 무렵 우리는 그런 거 절대로 그냥 못 넘어갔다. 일행 중 한 명이 내뱉었다. , 인마, 너 말 꼭 그렇게 해야 돼? ‘마약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야 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똑같은 뜻이야.”

TV 뉴스에 나와서 희생자가 더 나올 개연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라고 말하는 소방관이나 라이프 스타일을 컨트롤함으로써 건강을 유지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들이 우리들의 제삿밥이 되곤 했다.

노동자 정서에 충실하고 사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올바른 교육 교재 하나 만드는 것이 노벨문학상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무렵 내 모습이 최규석 작가의 만화 <송곳>에 잠깐 나온다.

▲ 《송곳》(최규석, 창비)


그 무렵에는 유인물 한 장을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불심검문에 걸려도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던 시대여서, 노동자들이 부담 없이 갖고 다닐 수 있는 노동교육 교재를 만드는 작업도 해 봤다. 현장에서 보다가 직·반장한테 걸리거나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도 의심받지 않을 수 있는, 그러나 속에는 나름 무서운 내용을 담고 있는. 그런 노동문제 자료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손바닥 크기쯤 되는 <일하며 산다> 시리즈다.

 

 ▲ <일하며 산다> 시리즈. ⓒ하종강

 

온갖 정성을 들여서 가능한 한 예쁘게 편집을 했다. 사람들이 쉽게 버리지 않도록 지하철 노선도도 넣었다. 나중에 100이라고 가격을 붙인 이유는 불법 유인물로 취급당하지 않도록 합법 출판물로 만들자는 취지였다. 그래서 정암사라는 출판 등록을 내기도 했다. 당시 가리봉 오거리에 있는 공단서점에서도 팔았는데 한 달에 한 번 수금을 하러 가면 이 100원짜리 책을 판 대금을 고스란히 필름 통에 모았다가 건네주던 사람이 지금 노동자교육센터대표를 맡고 있는 김진순 동지다.

이 책들도 삽화는 이동수 화백이 맡았다. 한번 붙잡히면 영원히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예나 이제나 이 바닥의 생리다.

 ▲ <일하며 산다> 시리즈. 삽화는 이동수 화백이 그렸다. ⓒ하종강


당시 이런 작업들을 할 때는 모두 건방지게도 이것이 한국에서는 최초의 시도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혁명의 시기에 이런 과정들이 있었다.’ 그런 자부심에 불탔다.

198812월 새로운 노동상담소 일을 시작했다. 그 상담소가 나중에 한울노동문제연구소로 발전했지만 처음에는 사무실 구석에 책상 하나 놓고 시작했다. 거기서도 똑같은 작업을 시도했다. 노동법을 노동자들에게 가능한 한 쉽게 설명하는 교재를 만들어 보자. 그런데 실패했다. 대중적 매체를 만들수록 그걸 만드는 사람은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경망스럽게 쉽게 풀어 쓴다고 해서 쉬운 문장이 되는 게 아니다. 대중 정서에 충실한 글을 쓰려면 정말 그 사람은 전문가여야 한다.

창간 준비호도 두 번이나 만들어 보면서 준비했는데, 쉽지 않았다. 결국 우리 비슷한 놈들끼리 볼 수 있는 걸 만들었다. 그렇게 나온 시리즈가 <한울노동법강좌>이다. 활동하는 노동자들보다는 사법시험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사법연수생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는 말을 나중에 두고두고 들었다. 20113월 연구소 문을 닫을 때까지 53호까지 만들었다.

▲ <한울노동법강좌> 시리즈. ⓒ하종강


이러한 노동문제와 관련된 홍보물을 만들고 글을 쓰는 작업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내가 1994년에 제6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지금 노동아카데미 주임교수로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그러한 작업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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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6. 12. 14:45 기획 특집

<작은책> 300호 특집 - 노동자 글쓰기와 선전 홍보

 

<작은책>300호를 맞이했다. <작은책>은 창간할 무렵 전국에 있는 노동조합 소식지를 모아 그곳에 실려 있는 노동자들의 생활글을 주로 실었다. <작은책> 300호는 19951호를 창간할 때 노동자가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고 이오덕 선생의 말씀을 잣대로 삼았던 정신을 돌아보고 노동자 글쓰기와 선전 홍보라는 주제로 특집을 만들었다. 핸드폰과 SNS, 그리고 유튜브로 시간을 빼앗겨 종이에 쓰여 있는 글을 읽을 시간이 없는 시민들, 이제 종이 매체는 사라질 것인가. 옛날에 나왔던 노동조합 소식지를 되돌아보고 현재는 어떤 방법으로 선전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변할 것인지 앞날을 예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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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3. 15:11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

이명옥/ 프리랜서 구직자

 

 

작은책과 처음 대면하던 시절 나는 백수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오락가락하는 여성 가장이었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보습학원 강사, 보험 판매원, 저소득층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인터넷 방송 진행자, 출판사, 서울시의회 의정보좌관, 장애인복지신문 총무 등이 내가 거쳐 온 일자리다. 그 사이 중학생이던 아들은 서른 살 청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한 달에 네 꼭지의 탐방 기사를 쓰고 뉴딜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IMF가 터지기 전 오전 보험회사와 오후 보습학원을 오가며 내가 받은 급여는 150여만 원이었다. 3년쯤 보험회사를 다니고 나니 영업 능력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보험을 들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나 자녀 이름으로 넣은 보험도 서너 개나 됐다.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식이었다. 나는 보습학원 강사만 하기로 했다. 보습학원은 장위동 시장 골목에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부모는 대부분 자영업자였다. IMF가 터지자 아이들은 학원부터 그만뒀다. 나는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를 맡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줄어들자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보험회사 다니며 넣었던 연금과 교육 보험 등 2천만 원을 차례로 해약해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 대출된 대출금 이자를 갚으며 악몽 같은 시절을 버텼다. 이후 2002년 여성신문사 마케팅 부서에 입사해 4대 보험을 제하고 8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급여를 제때에 못 받고 절반씩 받기도 했을 만큼 여성신문사의 재정은 열악했다.

2003628일 여성신문사에서 잘리고 71일부터 상계역에서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일을 3년 정도 했다. 처음엔 청소반장과 청소하는 분들의 텃세와 출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김밥을 싸 가지고 와 팔던 아주머니가 주신 김밥을 먹고 체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신문이 비에 젖을세라 비닐에 싸서 들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 신세가 처량하고 서글펐다. 팀장의 갑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장마철 날씨처럼 수시로 성정이 바뀌고 잔소리도 심했다. 겨울철 계단을 오르내리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난 끝까지 싸우며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했다.

무가지 신문 배달할 때 쓰던 카트. ⓒ이명옥.


무가지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나 구리시의 입시 학원에 일자리가 생겼지만 나는 무가지 신문 배포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2시간 정도 일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30만 원에서 45만 원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그만둔 것은 아침에 출근하는 일자리가 생긴 후였다.

2009년 삼양빈민연대에서 3년 사업으로 따낸 노동부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일자리는 최저 시급에 맞춰져 있었다. 일주일에 여섯 저소득층 가정을 한 가정당 두 번씩 찾아가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스폰서를 구하라는 요구가 덧붙여졌다. 형식상이긴 했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3년짜리 프로젝트를 2년 만에 해체시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당시 생긴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출판사를 다니기로 해서 지역아동센터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1인 출판사에 6개월 다니면서 보험 없이 150만 원을 받았다. 인터넷 방송 진행을 하면서는 첫 달은 150만 원, 이후는 4대 보험 떼고 130여만 원을 어렵게 받으며 2년 넘게 일했다. 서울시 의정 보조 3개월은 4대 보험 떼고 134만 원이었다. 장애인복지신문사는 하루에 4시간씩 주 5일을 나가기로 하고 50만 원씩 받았는데 워낙 재정이 열악해 그 돈마저 제때 못 받고 며칠이 지나서 받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19개월 정도 장애인복지신문사에서 알바로 일했고 이후 다시 실업자가 됐다.

선거철 선거 사무원, 학교도서관저널과 해피데이스에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등 닥치는 대로 살아오면서 주변에 수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때론 쌀을 보내 주는 이, 김치나 마늘, 고춧가루 등을 보내 준 지인도 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상차림에 보태라며 몇 년째 통장에 슬며시 돈을 넣어 주는 교수님도 계시다.

2020년엔 인청시청 객원기자로 한 달에 네 꼭지의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공공 일자리도 찾아보고 요즘 올라오는 뉴딜일자리에 부지런히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유엔이 정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아직 청년이다. 하지만 일자리센터 구직난을 보면 나는 고령자다. 고령자에, 여성에, 장애인인 내게 적합한 일자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 각자 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서류를 넣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 실업이 넘쳐 나는 시대다. 당신의 일자리는 안전한가?

3년여 세월을 취준생으로 나의 가슴을 숯덩어리로 만들었던 아들은 올해 311일자로 중소기업 공채로 입사했다. 150명 지원에 2명을 뽑았다고 한다. 대기업에 비해 연봉은 적지만 출근 자율제, 중소기업 세제 혜택, 청년키움 적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팀의 분위기가 자율적이라고 만족해한다. 수천만 원의 빚이 아들의 몫으로 남아 있지만 취직 대란 시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아들이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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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3. 14:1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안미선/ 작가

  


내일이면 이사를 한다. 묵은 살림을 정리하니 쓸데없는 것을 많이도 끼고 살았구나 싶다. 버릴 건 버려 널찍해진 베란다를 보며, 화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비우지 못해 새것이 들어갈 수 없는 건 집이나 마음이나 같다. 이사 갈 집은 지금 집보다 좁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도 많이 처분했다. 하지만 몇 장 끄적이다 만 일기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오래된 노동자협회 소식지를 넘겨 보기도 한다. 망설이다가 그건 가져가기로 한다.

앨범은 들춰 보다가 괜히 보았다 싶다. 헤어진 사람들과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때는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결혼식 때 내 얼굴을 보니 곱다는 생각이 들면서 왜 더 즐겁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피부염을 앓은 아이의 얼굴에 새삼 안타까워하고, 갓 목욕한 아기의 맨살에서 살 냄새를 떠올리기도 한다. 오래전에 쓴 글을 읽을 때처럼 기쁨과 슬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묵은 상처만 들쑤신 것 같다.

나는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그동안 이사를 여덟 번 했다. 학교를 다닌다고, 취업을 했다고, 결혼을 했다고 다른 동네를 전전했다. 보통 몇 년씩만 살다 이사를 했는데 지금 집에서는 8년째 살았다. 가장 오래 산 집이다. 그래서 셋집인데도 정이 들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 아이는 취학 전이었다. 이 집에서 초등학교 6년 시간을 보냈고,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작은책아기 낳는 날이라는 제목을 시작으로 글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 아기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엄마로서 절반의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아이가 좀 더 자랐으니, 이제 내 일도 찾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글을 쓰고 살고 싶었다.

책꽂이가 둘러싼 작은방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글을 썼다. 강의가 있다면 달려갔고, 예술인 지원사업에도 참여했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젠 책도 몇 권 펴냈고 글을 써서 산다는 이름을 그런대로 달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 물론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나는 집에서 주로 일한다. 식사를 차리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전화며 택배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다른 많은 여성들도 그렇겠지. 떠맡겨진 가사와 육아일을 해내고, 일도 척척 해치우기 위해 피나게 발버둥을 칠 것이다. 때로 엄마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었다가,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순간순간 역할을 바꾸게 되지만, 나를 지켜 내고, 아이를 지켜 내고, 내 일을 지켜 내었다.

내가 글을 쓸 때, 아이는 심심하다고 소리쳐 나를 불렀다. 엄마 없다고 느닷없이 울기도 했다. 저녁에 강의를 할 땐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이웃집을 전전했다. 연말이면 몰려오는 피로와 압박에 소리를 꽥 지를 때도 있었다. 생일날, 약속 하나 없다고 내가 징징대자, 보다 못한 아이가 용돈으로 케이크를 사 와서 같이 즐겁게 박수쳤다.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밥을 먹었다. 모든 악다구니와 웃음과 부대낌이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분주한 손을 놓고 집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 기억은 이렇게 생생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리는 상상이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아이의 방학은 길어졌다. 내 인생에 이런 때가 또 있을까?” 학교에 안 가는 게 마냥 좋은 아이는 알사탕을 문 것처럼 즐거워한다.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내가 쏘아붙이자 아이가 놀란 표정이다. 난 입을 꾹 다문다. 집에 있어도 엄마가 일을 해야 하고 들어오는 수입이 줄고 지출은 많아져 골치를 앓는다는 걸 아이는 모른다. 그래, 몰라도 된다. 그냥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집안의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까, 일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노동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배경처럼 취급되는 게 불편하다. 이러니까 앞으로도 여성의 목소리를 계속 써 내야 할 것 같다.

작은책이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무얼 했던가 생각해 봤다. 글을 쓰고 살겠다고 결심했고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은책은 그때 운 좋게 만난 친구였다. 글쓰기 모임에도 갔다. ‘정직하고 소박한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의 길을 따라갔다. 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문학을 꿈꾸었는데, 그건 다른 길이었다. 난 그 샛길로 들어가 지금까지 쭉 걸어왔다. 내 이야기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들을 쓰면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고 쓸 수 있다작은책의 가르침을 잊은 적 없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라는 책을 최근에 냈는데, 작은책은 나에게 말을 들려준 또 다른 당신이기도 했다.

처음 글쓰기 모임에 가서 글을 꾸며 쓰면 안 된다고 구박을 듣던 사회 초년생이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작은 결심을 지켰다. 작은책은 아프고 억압받는 목소리에 주목하며, 글을 쓰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힘을 믿었다. 글 쓰는 노동자들을 키워 내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이나 그 약속을 지켰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어렵고 애썼을 것이다. 축하한다, 좀 더 이 길을 가 달라고 친구로서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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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13. 14:0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일자리는 너무 많은데

제희덕/ 정년퇴직 문화재 관리자

 

 

나는 2012년 초 정년퇴직 후 과거 일하던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로 했다. 상가건물 관리인, 수제품 생산업체, 김치 배달 및 방문 소독업체, 사설 미술관 주택 경비, 왕릉 안전관리원, 방문요양보호사, 장례지도사, 전통결혼예식장, 문화재 관리인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30개 점포의 상가건물 관리인을 3년여 할 때는 4대 보험도 없고 연월차도 없고 월급 인상도 없었다. 퇴직금도 없기에 매 1년 경과 시 1개월 봉급이 없는 경우가 발생했다. 상가관리인을 하며 신문 광고를 보고 야간에 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3개월 이론 교육과 장례예식장 현장 실습을 하고 장례지도사 자격을 취득했다.

5인 이상이면 장례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학원 측의 권유로, 학원의 무상임대 계약서를 지원받고 관련 기관에서 수차례 협동조합 설립 교육을 받았다. 조합원 가입신청서, 이사들의 인감증명서, 총회 회의록, 서류 등을 준비하여 변호사 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았다. 공증 비용, 등기 비용, 구청 등록 비용, 등기상 변동 사항 발생마다 상당한 등록 비용들을 부담하고 세무서에서 법인 사업자등록증을 받았다.

조합의 복식 회계 사용에 따라 전산 회계 프로그램 사용료, 법인 세무 신고에 따른 세무사 위탁 비용 등이 발생했다. 과정마다 부담스러운 비용 발생에 대해서는 협동조합 교육 시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강사들도 직접 조합을 설립한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협동조합도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회사와 같다. 조합원과 임원들은 명칭만 있을 뿐 소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련 지방자치단체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지원금을 받더라도 회계 절차와 사용 규정을 지키지 못하면 지원 기관 감사 후 지원 비용을 반납하여야 한다. 조합이 부실해지는 경우 폐업을 위한 청산과 해산 절차가 법인 설립 때만큼 까다롭다. 장례 행사 수입이 입금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장례 행사 수요 부족, 운영비와 전담 인력 인건비 부족 등으로 총회에서 후임자를 선출한 뒤 인계했다.

김치공장에서도 일했다. 하나로마트나 동네 큰 마트에 가서 배추, , 당근, 고춧가루, 젓갈 등의 원료들을 원산지와 구입 가격이 김치 매출 가격에 적절하게 맞도록 구입했다. 김치는 주문에 따라 서울 시내 어린이집, 요양 시설, 복지관 등에 차로 배달했다. 소독 업무도 했다. 장애인 친구들과 어린이집, 초등학교, 사회복지 시설들을 방문하여 소독 장비를 메고 작업을 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으로 방문요양보호사 일도 했다. 뇌졸중 환자, 루게릭 환자 등 1~3등급 중환자들을 보호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환자를 휠체어 의자에 태우고 인근 개천으로 1시간씩 산책도 했다. 환자와 동네 병원을 가거나 외출할 때 난간이 없는 통행로에 오가는 자전거와 충돌 우려 등 안전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방문요양보호사 일은 환자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하다. 노인 세대가 증가하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요양센터에서 소개하는 일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왕릉 안전관리원으로 야간에 손전등을 켜고 혼자 숲길을 순찰할 때는 멧돼지도 만나고 고라니도 만났다. 멧돼지를 만나 방어 자세로 한참 바라보다 헤어지기도 했다. 야간에 폭우가 쏟아질 때는 왕릉 봉분 잔디가 무너질까 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대형 비닐 커버를 덮어 보호했다.

문화재 관리 야간 순환 근무도 했다. 주간과 휴무일에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부근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 부설 서울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장년 취업 기본교육, 스마트폰 교육, 지하철 택배 교육, 환경관리자 교육, 가사관리원 교육, 일반경비원 신임 교육, 반려동물 돌보미 교육, 무인주유소관리원 교육, 도슨트 교육, 치매 예방 운동 및 관리 교육 등을 수강했다. 이러한 교육들은 기간제 계약을 마치고 일자리 취업 때 도움이 됐다.

현재는 2019년 초 소방관리자 자격으로 문화재 관리인으로 1년간 기간제 근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근무 기간이 1개월씩 연장되고 있다. 월수입은 정부에서 정해 주는 시간급으로 결정되는 최하위 임금 수준이다.

과거 부모님들이 가족들 부양과 교육을 걱정하던 때를 생각하면 건강을 유지하고 현재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하고 일할 의지가 있으면 일자리 소개 기관에 인터넷이나 직접 방문 시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최대한 소개해 준다.

군 복무 후 직장을 다니는 두 아들은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직장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이 된 자식들은 자립과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자식 세대들도 어려움이 많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극복하고 우리 세대보다 좋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것으로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치아와 신체 여러 곳에 신호가 온다. 동네 병원과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할 곳이 많아지고 있다. 진료비도 증가하고 있다. 건강 조심하고 몸에 무리가지 않도록 일을 조절하라는 신호로 생각한다.

인생 후반 일터에서 일하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일하면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어려운 일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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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9. 16:55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먹는 거 하나는 제대로 먹자주의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IMF의 영향을 받지 않은 두 부류가 있다. 엄청난 부자. 그리고 엄청나게 가난한 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경기가 좋든 안 좋든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는 양극단의 사람들이다. 단칸방과 재래식 화장실, 바퀴벌레, 연탄으로 불을 때고, 가스레인지로 물을 데워서 겨울을 견뎠던 나에게 IMF는 먼 세상 이야기였다. 좋은 게 있다면 더 이상 나빠질 게 없기에 걱정도 불행도 없었다. 보통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돈을 열심히 버는 게 꿈이 되지만, 이왕 뭔가 바꿔 보려면 내 삶보다는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다. 덕분에 나의 물질적 욕망은 똥물이 튀지 않는 화장실과 보일러와 베란다가 있는 임대아파트다. 가난이 익숙한 탓에 가난한 활동가의 삶도 딱히 대단하다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덕분에 코로나19로 인한 타격도 종종 하던 강연이 취소된 거 외에는 별 타격이 없다.

주말에 배달해서 받는 월급 70만 원과 한겨레21,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세 군데의 기고로 얻는 소득 35만 원이 내가 버는 정기적 소득이다. 105만 원으로는 조금 빠듯해, 강연과 방송 출연으로 얻는 출연료로 130~140만 원 정도를 번다. 불만이 있다면 오르지 않는 원고료지만, 길바닥에서 배달해서 얻는 하루 일당이 원고료보다 적기 때문에 글 쓰는 것만큼 가성비 좋은 알바도 없다.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마감을 만나면 끄적이면 그만이다. 세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주목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글감은 내 삶 주변에 널려 있다. 가성비를 생각해 되도록 2시간을 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해서, 편집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글쓴이 박정훈 씨. 사진_ 라이더유니온 페이스북.


생계비를 벌기 위한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나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노조 활동에 쓰는데 이렇게 살다 보면 사람 성격이 안 좋아지기도 한다. 특히 배달 산업에 대한 인터뷰나 자문을 요청할 때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주로 내게 묻는 사람들은 월급 받고 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공짜로 알려 주기 때문이다. 라이더유니온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1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잡고 배달 산업 구조 전체를 물어 놓고는 라이더유니온한마디 안 넣었던 기자도 있었다. 이런 무료 노동이 쌓여서 라이더유니온이 알려지고 그 덕분에 나 역시 사회적으로 알려져 강연도 하고 기고도 하게 되니 완전히 공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돈인 조합원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면서 한 푼도 주지 않는 몇몇 언론사의 행태는 묵과하기 힘들었다. 취재원을 사서 공적인 뉴스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저널리즘적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언론사가 어차피 기업의 광고로 돌아가고 발행 부수와 조회 수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한 시간 인터뷰에 100만 원을 주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최소한 최저임금과 교통비를 주는 건 정보를 왜곡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돈 한 푼 안 나오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기쁜 맘으로 을 같이할 수 있다.

라이더유니온 로고. 이미지 출처_ 이더유니온 페이스북.


이렇게 쓰고 보면 참 불행하게 산다고 걱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일 쓸 돈을 모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늘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 먹는 거 하나는 제대로 먹자주의자8천 원, 1만 원짜리 밥도 아깝지 않게 먹는다. 날 아는 사람은 그렇게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가성비가 떨어질 거라 여길지도 모르지만(나도 속상하다) 맛있는 밥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요즘 고기를 끊었더니 직접 해 먹지 않으면 식비로 더 써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곤란하긴 하지만 적어도 밥 먹는 데 돈 아끼지 말자는 주의다. 김치와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어린 시절의 한풀이일 수도 있겠다. 먹는 것 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돈은 월세, 그 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돈이 후원금이다. 12개 단체에 매달 CMS 회비를 낸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운동에 월 1만 원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건 큰 기쁨이다. 매달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면, 안 보내 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걸 빼는 것도 시민단체 상근자들에게는 일이라 그냥 놓아둔다.

욕심을 버리고 유유자적 살자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살려면 공동체에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집 전세금의 절반은 SH공사의 무이자 대출로 해결했다. 나머지 절반의 전세금은 청년희망통장으로 마련했다. 베란다도 없고, 10평에 불과하지만 전세금 떼일 염려 없는 임대아파트에도 당첨됐다. 임대아파트에 필요한 보증금은 공익활동가협동조합 동행에 대출 신청으로 해결할 예정이다. 근로장려세제를 비롯한 각종 복지 정책들도 프리패스다. 국민들이 내는 소중한 세금과 연대로 생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정보를 가진 사람이 복지 혜택도 받는 현실이다. 각 기관의 홈페이지에 매번 접속하고 긴 안내문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공인인증서를 깔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각종 서류를 떼서 제출해야 한다. 컴퓨터도 있고 프린터도 있고 팩스도 있고 스캐너도 있고 이걸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쉬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복지 신청을 하다가 좌절하고 포기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지 왜 나랏돈을 받아먹으려고 하냐, 나라가 해 준 게 뭐냐고 따져 묻는다. 여기다 대고 나라가 해 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라고 해 봐야 소용없다. 공동체의 힘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그만큼 기여하게 되어 있다. 가난한 이들이 타인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소망한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7. 16:53 기획 특집

<작은책> 2018년 3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미안해요 베트남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혹시나 한국인 여행자가, 베트남어를 잘 아는 한국 여행자가 저녁 무렵에 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는 빈호아 마을을 지날 때면 이런 자장가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넌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가 그랬다. 빈호아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런 자장가를 들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한에 받쳤으면 이런 자장가를 불러 딸, 아들,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있을까.

1993년에 무작정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난 구수정은 1999년에, 베트남전쟁 기간에 일어났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99년부터 <한겨레21>에 연재를 했다. 그 때문에 한국 참전군인들로부터 압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유학 1세대, 구수정 씨는 어떤 사람일까. 파란만장한 그이의 삶과 더불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를 되돌아본다.

 

노동자로 살려고 했다

구수정은 1985년에 한신대에 입학했다. 당시 한신대는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았다. 전국의 수배자들이 이곳에 있었고 전국의 해고 교수들도 와 있었다. 정운영 교수, 김수행 교수, 조희연 교수 등이 있는 한신대에서 공부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했던 구수정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를 바로 보게 됐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 3학년 때 노동 현장으로 갔다.

나는 납땜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브라운관이 떠내려오면 인두로 납땜을 하는 일이다. 내가 손이 느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서 못했다. 그걸 못하면 선반에 올려야 된다. 근데 금방 선반에 쌓인다. 그럼 조장이 와서 엄청 혼을 낸다.”

그래도 잘 버티면서 납땜 일만 2년 넘게 했다. 어느 날 학생 출신이라는 게 들통이 났다. 회사는 구수정을 해고했다. 시대가 그랬다. 위장 취업 하면 감옥에도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구수정은 노조를 만들 생각도 못했고 그저 오로지 노동자로 살겠다는 마음이었다. 복직 투쟁을 며칠 하다가 포기했다.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그 무렵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된 강민호라는 친구가 감옥에서 나왔다. 강민호는 1986년 건국대 애학투(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2년으로 석방돼 학교로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정 투표함으로 문제가 되었던 구로구청 점거 투쟁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실형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다음 해 10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되어 1년 만에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구수정과 강민호는 건국대와 구로구청 사건 때 함께 있었고 같이 붙잡혀 각기 징역을 살았다.

구수정은 다시 강민호와 만나 같이 들어갈 공장을 찾았다.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수원은 안 될 것 같아 안양공단으로 갔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안양공단을 다녔지만 계속 거절을 당했다. 큰 공장에 취업 공고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도 면접을 하면 퇴짜당했다. 구수정은 걱정이 들었다. ‘쟤가 먼저 취직되고 나 혼자 남으면 어떻게 하지?’ 구수정은 강민호한테 신신당부했다. ‘절대 너 먼저 취직하면 안 된다. 알았지?’ 하고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1990328일 강민호가 반월공단 내 대붕전선에 먼저 취직이 됐다. 강민호는 어렵게 된 취직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너도 곧 될 거야.” 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구수정은 낙담했다. 혼자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암담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구수정은 집으로 들어갔다. 3년 만이었다.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스스로 공장 가겠다고, 평생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우습게 되더라. 그 비장한 각오가 너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튿날 강민호가 집을 찾아왔다. 집 앞에서 전화로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하고 말했다. 화가 난 구수정은 나가지 않았다. 강민호는 그냥 돌아갔다. 구수정은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강민호가 공장을 들어간 지 8일 만에 전선을 감는 커다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죄책감과 회한이 밀려왔다. 자기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로웠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을걸.’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집 안에 처박혀 폐인처럼 살았다. 거의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살던 구수정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선배가 어느 날 술을 사 주겠다고 나오라고 했다. 그 선배는 돌베개 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 광화문 사무실 근처로 나갔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알딸딸했다. 그런데 술을 먹다가 선배가 말했다.

, 수정아. 이 근처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사가 있는데 기자를 모집하더라. 같이 한번 가 볼래? 너 글 잘 쓰잖아.”

그래? 가 보지. .”

구수정은 술 취한 김에 객기를 부렸다. 당시 <사회평론>은 꽤 신망이 있던 월간지였다. 마침 그날이 기자 면접 보는 날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마지막 면접자를 내보낸 면접위원들이 밖이 시끌시끌하니까 나와 봤다. 그런데 구수정이라는 사람이 면접을 보겠다는 것이다.

입사 서류는 냈어요?”

그런 서류를 낼 턱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면접위원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면접이나 보고 가라고 했다. 구수정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서강대 박호성 교수 등이 면접위원이었다.

아마 내가 굉장히 꼬장을 부렸을 거다. 교수들이 앉아 있는데 젊은 애가 와서 당신들이 내 절망을 알아? 당신들이 노동을 알아?’ 하고 소리 질렀으니.”

저런 배짱이라면하는 마음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구수정이 합격했다. 3개월 수습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는데 오래지 않아 <사회평론> 잡지가 폐간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구수정은 <사회평론> 덕에 피폐했던 삶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다.

때는 1992년 선거철. 구수정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글을 잘 썼던 구수정은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구수정은 김대중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엔 차선책으로 김대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 구수정은 차선도 허락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가 너무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구수정은 소비에트연방과 동구권이 연달아 무너지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절망했다. 구수정은 사회주의를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남들처럼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챤딘반, 도서출판 친구, 1988)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사이공 괴뢰정권에게 총살을 당한 우옌 반 쵸이 이야기다. 우옌 반 쵸이의 처형 이후 해방구로 들어간 그의 젊은 부인 판 티 쿠옌이 그와 함께 보냈던 최후의 나날들을 진술했고, 남베트남의 작가 챤딘반이 글로 썼다. 하노이의 베트남 외문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도서출판 친구1988년에 번역해 출간했다. 구수정은 사형을 당할 때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우옌 반 쵸이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책 한 권. 사이공의 흰옷(도서출판 친구, 1986)을 봤다. 이 책은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한 베트남 고등학생들을 다룬 소설이다. 구수정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결심했다.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은 8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당하다가 1945년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베트남을 재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54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프랑스를 몰아내는가 했더니 이후 독선과 오만에 찬 미국이 침략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결국 미국을 몰아내고 19767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한국의 박정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쟁에 보내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구수정이 베트남을 간 때는 199312월이었다. 한국과 다시 수교를 한 지 겨우 1년 만이라 베트남에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구수정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무조건 베트남을 가서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그동안 벌어 놨던 돈을 몽땅 찾았다. 계획도 없이 비자를 받고 호치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인상, 택시가 없다. 마중 나온 사람도 없고, 연락할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낮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아, 정말 덥구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공항은 한산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린 다른 외국인들도 별로 없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가자고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돌아보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외계어 같은 베트남어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떠나갔다. 그런데 자가용으로 보이는 차 몇 대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유리창 위 조그만 종이에 택시라고 써 있었다. 무조건 탔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호텔, 호텔 했더니 운전사가 무슨 호텔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그 당시 호치민에서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렉스호텔 하나였다. 모든 요금이 외국인 차등제였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인가? 생각했다. 구수정은 호텔 밖을 나갈 염도 내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고 지리도 몰랐다.

호텔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데 카운터에서 올라왔다. 오늘이 음력 보름인데 절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가이드도 붙여 주겠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구수정은 용기를 내서 밖으로 한번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문제였다. 그 돈을 호텔방에 두고 나가기가 겁이 났다. 5성급 호텔이라는 데가 문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주말이라 금고 담당자가 없어 맡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낭에 담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데를 갔다. 절에 들어가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채만 한 향을 태우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향들이 달려 있는데 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다.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계속 나오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은 북적댔다. 옆에 가이드 팔을 잡고서 도저히 숨도 못 쉬겠으니까 빨리 나가자고 해 다시 돌아서 겨우 나왔다. 목도 아프고 눈도 아파 길거리 카페를 가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돈을 내려고 보니까 가방이 찢어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모든 걸 정리해서 왔는데.

집에서도 베트남 간다는 걸 너무너무 반대했고 둘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슨 유학을 베트남으로 가려고 하냐, 미쳤나, 여자 혼자서 거길 어떻게 가냐고 말리는 걸 뿌리치고 왔는데.”

구수정은 무작정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영사가 구수정의 손에 100달러를 쥐어 주며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지켜본 렉스호텔에서는 호텔비를 독촉하지 않고 숙소를 하나 소개해 줬다. 출장을 온 정부 관료들이 묶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에 35달러였다. 수중에 100달러밖에 없는 구수정은 그것도 부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 숙박비를 채근하지 않았다.

처음에 거길 갔는데 문을 못 열었다. 도마뱀이 문 전체를 덮고 있었다. ‘까약!’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누가 와서 문을 열어 주더라. 그런데 도마뱀은 재앙도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쥐들이 막 튀어나왔다. 베트남 쥐는 고양이만 한 것도 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집에 연락을 해서 돈을 좀 받아야 했다. 해외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중앙우체국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너무 비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전달할 수 있을까 연습까지 했는데도 86달러가 나왔다. 우체국까지 걷고 차비도 안 쓰고 밥도 물도 안 사 먹었다. 집에서 부치는 돈이 언제 올지 몰라 암담했다.

어떻게든 한국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청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한국 사람이 갈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도 가 봤다. 영사관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고 버텼지만 결국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수중에 1달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사흘 정도 굶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 되나 보다. 내일은 가야겠다. 처음으로 짐을 풀어 봤다. 내가 가지고 온 게 영어사전 한 권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 하나 가지고 왔더라. 그걸 왜 가져갔는지 잘 모르겠더라.”

처음으로 그 테이프를 들었는데 갑자기 통곡이 터졌다. 한국에서 부르던 운동가요를 들으니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울음소리가 이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공명이 되면서 내 울음소리가 울음을 자극해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아래층 수위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 수위도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챈 듯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숙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에 먹을 걸 들고 왔다. 과일은 물론 심지어는 물, , 음식 같은 것도 가져왔다.

이 사람들은 4시면 일어나니까. 미리 오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무나 와서 벨을 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과일을 가져오고 뭘 가져오고. 한 달은 먹을 게 쌓였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와서 안아 주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끊임없이 베트남어로 위로하는 거 같았다. 그때 내가 더 있어 봐야겠다. 일주일만 더 버텨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정 상무님, 정 상무님!”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어떤 한국 사람이 구수정 옆 방문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소리였다. 꿈에 그리던 한국 사람이었다.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몸이 굳어 발이 안 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갔는데 그 한국인은 이미 계단으로 내려간 뒤였다. 얼른 밖을 내다보니 차를 타려고 했다. 절박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선생님! 아저씨! 기다려요!” 하고 소리친 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온통 뿌옜다. 염치도 없이 그 차를 타고는 눈물 콧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려 보였을 거다.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얼굴은 동글동글 몸은 너무 말랐고 키도 작았다. 거기서 엉엉 울고 말도 못하고. 그분이 괜찮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한국인이 구수정을 렉스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베트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그 한국인한테 구수정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한국인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거냐, 여기에 남을 거냐고. 구수정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 한국인이 봉투를 놓고 갔다. 봉투에는 2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구수정은 나중에 그분을 만나면 드리려고,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호치민에서 옷 속에다 주머니를 만들어 늘 2천 달러를 품고 다녔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그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연말 영사관 한인의 밤행사에서 그분을 만났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구수정은 인사를 하고 돈을 건넸지만 그분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진짜 열심히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분의 모든 통역이며 계약이며 내가 다 발 벗고 나섰다. 생명의 은인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분은 사업이 망해 몇 년 뒤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두 달 만에 한국에서 소포가 왔다. 상자에 나주 배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한글을 보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울었다. 나는 문자 중독이었는데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어를 빨리 배우려고 일부러 한글로 된 책 한 권도 안 가져왔다.”

대학원을 들어가는 데 수많은 벽을 만났다. 먼저 베트남어를 배워야 했다. 호치민시 국립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어서 절차를 아는 이도 없었다. 모두들 자기가 아는 대답만 했다.

“‘너는 역사학과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 보충 학습을 해야 할 거야.’ ‘그건 어떻게 해?’ ‘역사학과에서 보충 학습을 들어.’ 보충 학습을 들었다. 끝난 뒤 시험을 보려면 어떻게 해?’ 그럼 누가 과외를 해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또 과외를 했다.”

베트남에 간 지 3년째. 19956월 입학시험이 있었다. 입학 허가 구비 서류로 한국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범죄경력조회서에서 한국 공관의 신원보증서는 물론 호치민시 외무청, ··동 인민위원회 및 공안을 돌며 신원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장 추천서, 어학당 수학 능력 인정서, 교수 2명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그래도 베트남 중앙인 하노이 교육부의 입학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구수정에게 우선 입시를 치르도록 허락해 줬다. 지원자 30명과 함께 역사학과 석사 과정 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전공이 베트남 역사 세 과목(현대사·당사·통사)이었다. 구수정은 평점 10점 만점에 9.2를 받아 수석 합격했다. 베트남어는 평점 9.9로 발군이었다. 구수정은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교육부 회신을 기다렸다. 2년 과정을 모두 수료했는데 하노이 교육부 회신은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였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구수정은 끈질겼다. 하노이 교육부를 여덟 번 찾아가 책임자를 면담했다. 결국 대학원 2년 과정을 끝내고 8개월 지난 뒤에야 입학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1997년 학기말 고사의 민속학 과목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역사학과 개설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일부 교수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었다. 담당 교수인 탄 판 교수는 위원회에서 진술했다. 구수정은 철자에 한 글자도 오자가 없었다. 구수정이 갖는 불리와 한계를 생각컨대 답안이 9.9라면 0.1을 가산해야 한다.”

구수정의 논문 주제도 벽을 만났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를 학교 당국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신청한 지 2년 만인 19999월에야 허가되었다. 논문 쓸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국립문서보관소, 국방부, 외무부 등의 자료에 접근하려면 재학증명서,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공안 서류부터 영사관, 베트남 외무부 허가서 등 구비 서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에 보내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서류도 있었다. 또다시 하노이를 여덟 번이나 다녀왔다. 쓰뜨 하동(베트남에서 가장 무섭다는 하동 사자)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러나 쓰뜨 하동도 안 되는 건 있었다. 여덟 번째 하노이 방문에서 자료 접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외무부 산하에 있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안 올 거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하고 돌아나오는데 그 직원이 슬쩍 나를 잡았다. ‘자료를 사는 건 어때?’ 하고 묻더라.”

그런 방법이 다 있냐고 물었더니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20여 쪽 되는 복사물을 400달러 정도를 주고 매수했다.

자료를 받았는데 판독이 안 되는 거다. 무슨 학살이니 하는 낱말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자료가 만들어진 게 1980년대 중후반으로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이걸 파는 사람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다 지워 버렸다."

친하게 지내던 베트남 친구한테 필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뒤 나타난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필사본을 던져 주고는 가 버렸다.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구수정은 자료를 펼쳐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그 자료는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세상에 이토록 잔인한 짓들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이! 카이! 외치는 피해자들

구수정은 학살 현장을 찾아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나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인삼차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인삼차는 고급이었다. 한국으로 넘어와 경동시장을 가서 트럭 한 대 분량의 인삼차를 산 뒤 배편으로 베트남으로 보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구수정은 뭐에 홀린 듯이 마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엔 도로도 변변찮아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마을도 많았는데 사진기에다 노트, 인삼차 등등 앞에도 배낭, 뒤에도 배낭을 메고 그 땡볕을 걸었다.

하루에 세 마을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외국인은 마을에서 못 자니까 마음이 급했다. 대도시에 숙소를 잡고 마을을 가려면 아침 4시에 호텔 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세 마을을 취재하고 마지막 마을을 나올 때쯤 되면 밤 열 시, 열한 시, 호텔 도착하면 새벽 한 시가 된다.”

구수정이 찾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30년 만에 처음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인이었다. 구수정이 마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카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고 외친다. 베트남어로 카이는 진술하겠다라는 뜻이다. 중부 지방의 사투리는 제주 방언만큼이나 어려워서 베트남 사람들끼리도 잘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수정은 그 말이 다 들렸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이, 손짓, 발짓, 몸짓이 다 말하고 있었다.

차마 믿기 어려운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불교가 국민 종교인 이 나라에서 승려 4명이 학살당한 린선사 사건을 목격했던 노스님도 그랬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 오시길래 손을 씻으라고 하는 절 의식인가 했는데 그 다음부터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손을 씻으니 새하얀 손수건을 내주고 음식을 먹으면 또 입을 닦으라고 물수건을 주시고 다 먹고 나니까 또 손을 닦으라고 새 물을 갖다주셨다. 한국군 학살 이야기를 하면서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을 이리 살뜰히 대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했다.”

가끔 술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구수정은 그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술이 눈물인 양 가슴에 슬픔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서로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내가 울면 안 되지 하고, 나도 이분들 앞에서 어떻게 울어? 하며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다. 그런데 꼭 어느 대목에선가,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죽었어하고는 왈칵, 울음이 터진다. 근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울면서 했던 얘기가 울어서 미안해였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면 할머니들이 또 아가, 아가,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피해자들은 너무 많고 구수정은 혼자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을 아주 빨리, 최대한 짧게 한다.한국군이 들어왔어. 우리를 잡았어. 총 쏘고 수류탄 던졌어, 죽었어.” 그런 이야기를 수백 명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말을 축약할수록 눈빛이나 표정은 더 강렬해진다.

어느 순간 귀가 들리지 않았다. 마을을 돌아다닌 지 스무 날이 지났을 때였다. 이젠 더 이상 못 듣겠다, 정말로 못 듣겠다 구수정은 속으로만 고함을 쳐 대고 있던 차였다.

아마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귀가 안 들렸던 것 같다. 처음으로 쉬었다. 그 참에 빈딘성박물관에 갔는데 거기서 상세히 정리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자료를 만났다.”

그러고 나니 꾀가 났다.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빈딘성의 성도 뀌년에서 가장 큰 학교 옆 문방구를 가서 노트를 수백 권 샀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 이번엔 노트를 나눠 주며 말하지 말고 적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입을 달싹일 때마다 구수정은 겁이 났다.

연필심에 혀로 침을 묻혀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꼭꼭 눌러쓰는 모습이 무슨 초등학생 시험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글눈이 밝은 사람 앞에는 까막눈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나 좀 써 줘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혹여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고 절박한 모습이었다.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 노인네들이 엉덩이를 하늘까지 올리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보는데 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지더라, 그래도 그때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사람의 이야기는 직접 들어야 했다. 구수정은 대표로 딱 두 분의 이야기만 듣겠다고 했다. 다시 또 모든 사람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었다. 그중에 누군가 우리 집은 일곱이 죽었어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린 열 명, 우리 집은 열셋, 우린 열입곱이에요 하고 아우성을 쳐 댔다. 열일곱이요?” 열셋과 열일곱의 가족을 잃었다는 피해자를 지목해 이야기를 듣는데 한 할머니가 손도 못 들고 구수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구수정은 애써 할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입을 삐죽삐죽하며 서성대고 있었다.

따라오시는 거 알았다. 봉고차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 할머니가 그 먼 거리를 계속 따라오셨다. 나는 모른 척하고 걸음도 일부러 빨리 해서 막 갔는데 마음이 오죽했겠냐. 내가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할머니도 빠르게 따라오다가 뒤돌아보면 할머니도 딱 멈춰. 이제 어떡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아, 몰라 그러고 막 가면 할머니가 또 막 쫓아와, 그러다가 봉고차까지 쫓아왔는데 아, 저 할머니 어떻게 돌아가시나 걱정이 됐다.”

봉고차에 올라탄 구수정은 빨리 출발하라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차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데 할머니가 사력을 다해 뛰면서 차를 따라왔다. 기사한테 멈추라고 했다. 창문만 내리고 할머니 왜요?” 했더니 할머니가 홱, 뒤를 돌아서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 말씀 안 하면 갈 거예요.” 하면서 또 출발했다. 그런데 차가 움직이면 할머니가 또 따라 뛰었다. 이렇게 서너 번 하다가 화가 난 구수정은 차에서 내려서 할머니한테 따졌다.

“‘할머니 말을 하라고요. 뭐하는 거냐고요.’ 왜 그렇게 머리꼭지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 땡볕을 한정 없이 걷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 이 마을들을 돌고 돌아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미안해 해야 하는 거지? 가슴 한편에 이런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삭이고 삭였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 나 죽겠다고요. 돌겠다고요.’ 이러면서 막 터진 거다. ‘말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이러면서 엄청 다그쳤는데 할머니가 난 한 명만 죽었잖아.’ 이러는 거다. 근데 그 아이가 외아들이었어, 독자였어하는데 너무 기가 막혀 되레 소리를 질러 댔다. ‘한 명만 죽었다고 왜 말을 못해? 할머니한테는 그 한 명이 전부잖아!’”

구수정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막 치면서 엉엉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할머니는 어디 가셨지? 싶어 옆을 봤더니 할머니도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는 땅을 내리치면서 울고 있었다.

저 할머니 뭐 하나 했더니 나를 따라서, 할머니도 갑자기 신발 한 짝을 벗어서 울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 마주보고서 웃음이 터졌다. 할머니 미안해, 너무 미안해.” 구수정은 웃다가 또 울음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가 따뜻하게 구수정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다 알아 내가 다 알아.’ 그 할머니 지금 살아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마 돌아가셨을 거다. 그때 연세가 많았는데.”

구수정은 그날이 가장 슬펐던 날이라고 했다.

 

학살 현장

구수정이 밝힌 한국 군인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여간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총 312853명의 따이한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중 4687명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간 중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6천 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 작전을 수행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414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된 적이 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양민의 수를 대략 5천 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수정에 따르면 정작 학살 현장의 주민들은 이 수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부가 정확한 진상 조사에 소극적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가 어떤 지역에서는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공인한 수치의 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믿기 어려운 증언이 이어졌다. 구수정이 그 당시 <한겨레21>에 전했던 한국군의 학살 만행 일부만 보면 이렇다.

“19651222, 한국군 작전 병력 2개 대대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들, 즉 민간인 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 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를 따로 나눴다.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는 군인들 노리갯감으로 썼다. 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들의 양민 학살 행위 유형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 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 넣,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최루 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는 것 등이었다."

 

창자는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렸고, 불에 타 누렇게 녹아내린 지방층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녔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1A국도를 따라 채반을 들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구수정, <한겨레21> 273)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민간인은 모두 9천여 명으로 추정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런 사건은 멀리는 1947년 제주4·3항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때 이승만 군대의 보도연맹원 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되풀이됐다. 이 모든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였다. 빨갱이면 간난아이도, 임신한 여성도, 노인도, 그렇게 죽여도 되나? 아무나 죽인 뒤 빨갱이라고 한 건 아닌가? 아니 빨갱이면 그렇게 죽여도 되나?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구수정은 19995<한겨레21>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처음 폭로했고 <한겨레21> 베트남 종단 특별 르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등으로 한국군 학살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20006272,400명의 베트남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해서 신문사의 윤전기, 사무 집기, 16만 장에 이르는 서류를 불태우고, 간부들도 감금하고, 송전을 차단해 업무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구수정은 베트남에 있었는데, 그녀의 집 골목 담벼락마다 빨갱이라는 등 욕설을 스프레이로 뿌려놓고 집 앞에 염산 통을 갖다 놓기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한국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 준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임종 전에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을 감행했다. 한겨레에서 신변 보호 요청을 했다. 공항에서는 가장 먼저 대통령이 나가는 출구로 빠져나갔고 집 입구에서부터 경찰 차벽 사이로 집에 들어갔다. 5분만 보고 나오라고 재촉해서 30분 정도 뵙고 나왔다.”

장례가 끝나고 한국 정부는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 공관은 여기 너무 위험하다고 오는 걸 꺼렸다. 국제 미아가 되는 듯했다. 그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수도원에 와 계시라고 했다. 구수정은 그곳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그 뒤 한국에서는 열네 개 시민단체가 모인다. 유시민, 한홍구, 차미경 등이 모여 베트남전진실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구수정은 베트남에 사회적 기업 아맙을 만들었고 한국에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생겼지만 베트남 문제를 구수정 혼자 붙들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모든 이들이 베트남 문제를 껴안고 10, 20년 계속 갈 수 없었다. 구수정은 버거웠다. 앞으로 혼자서 이 문제를 지고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이 문제에 손을 놔 버리면 2030년 묻혔다가 또 누군가가 다시 시작해야 될 거 같아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재단을 만들 때 맨손이었다. 구수정 자신도 재단이 쉽게 만들어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하니까 부닥쳐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100명을 적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은 분들 얼굴도 본 적 없었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전화 드리고 만날 준비도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그동안 참 많이 미안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이라도 걸어 달라고 했다. 감동이었다.”

누군가 시작하기만 바랐던 것일까. 대부분이 부채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한테는 일단 메일을 보냈다.

내가 정말 딱 할 얘기만 썼다. 왜냐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저는 한베평화재단을 만들고 있고하는 정말 몇 줄 안 되는 딱 할 말만 요약한 아주 건조한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너무너무 부드러운 답장이 왔더라. 그때 그분은 외국에 나가 계셨는데 여기는 단풍이 지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시려면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그것도 안 되면 이렇게 하시면 되고.’ 나중에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추진위원으로 동의를 해 주셨다.”

아맙,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을 만들 때 구수정 둘레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아맙을 만들 때는 어쩌겠냐 니가 하겠다는데 하면서 천만 원을 바로 낸 사람도 있다. 일주일 만에 일 억을 만들었다. 아맙은 조금 쉽게 만들었다. 그런데 공정무역을 하려면 한국에 기업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을 만들 때 또다시 7억을 모금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공동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가난한 분인데 2000만 원을 낸 분도 있다. 아시아공동네트워크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 동원해서 돈을 만든 거다. 그런데 또 한베평화재단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는 너무 부담이 됐다. 근데 어떻게 해? 돈 낸 사람한테 또 내라고 한 거지. 그분들이 또 내 주셨다.”

재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이번에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을 직접 답사해, 한국군 학살 희생자 추모 위령비, 위령관, 묘지, 학살 현장들을 안내하는 구글 지도를 만들었다. 한국 군인이 민간인을 가장 많이 학살한 중부 지역 다낭, 호이안, 하미 마을, 퐁니 퐁넛 마을은 모두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꽝남순례길 1코스는 19681~2월 호이안 인근 마을에서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청룡부대가 민간인들을 학살한 3개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다. 베트남 중부 5개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약 9천 명 이상이며 이중 꽝남성에서만 약 4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년이면 천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다낭을 간다는데 그들 중에서 몇 명이 30분 거리에 학살 지역이 있다는 걸 알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학살 현장에 있는 꽃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꽃을 산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이렇게 찾아왔던 분들이 고맙다고, 우리가 이런 곳을 한번은 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너무 쉽게 잘 다녀왔다고 인사한다. 재단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뒷이야기

한베평화재단은 옥수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건물 4층에 있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작년에 만들었는데 워낙 활발하게 활동해서 그런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구수정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만나면서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한때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다. 베트남에서 6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거두고 한국인 방문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지원도 하고 그랬는데 민간인 학살 문제가 터지자 일자리가 뚝 끊겼다. 임대료를 못 내다가 결국 전기, 수도가 다 끊어지고 집에서 쫓겨나는 경험도 했다. 한 달에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한평생 살면서 올바른 일로 인생을 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구수정 이사는 요즘 너무 바쁘다. 올해는 베트남에서 하미학살 50주기 위령제를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위령제 참배단을 모집하고 있다. 38일부터 13일까지 56일 일정이다. 하미에서만 한국군에 희생당한 민간인이 135명이나 된다. 하미학살, 빈안학살 등 해마다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내는 곳들이 있다.(따이한한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합동 제사를 지내고 마을 주민 전체가 음복을 하는 전통이 있지만 그동안 제사 비용과 음복연 비용이 없어 제사를 거르는 해가 많았다고 한다. 2018년에는 50주기 위령제를 맞는 지역들에 100만 원씩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올해 421일부터 22일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학살 피해자인 베트남인이 원고가 돼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다. 현재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만만만캠페인을 하고 있다. ‘만만만이란 만 일의 전쟁, 만 인의 희생, 만 인의 연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한테 전쟁 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한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모든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과오부터 돌아보고 베트남전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한국 참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박정희가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 범죄는, 아니 앞으로 영원히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씨. 사진_안건모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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