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해고 모른 척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2억 8천 손해배상 청구냐!”
“3억 손해배상 청구소송? 차라리 우리 노동자를 죽이시지요.”
홍익대학교 정문 오른쪽에 이런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을 길러 낸다는 대학교에서 월급 89만 원 받는 청소 노동자들에게 3억을 손해배상 청구했다는 내용이다. 지난 1월에 청소 노동자 170명이 하루아침에 해고된 뒤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49일 동안 농성을 했는데 거기에 대한 손해배상 금액이란다.
거기에서 일하던 40대 후반에서 60대 여성 노동자들 사연을 들어 보면 하나같이 기가 막힌다. 그중에 한 분 김금옥 씨를 청소 노동자 대기실에서 만났다.
“비만 오면 여기 저기 새요.”
청소 노동자 대기실 천장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겉에서 보면 번듯한 이 홍익대 건물 안에 비가 새는 곳, 그곳이 청소 노동자 대기실 겸, 휴게실이다.
김금옥 씨는 1953년 생. 고향은 전라남도 순창이다.
“순창에서 20리 길 둑을 타고 나가면 우리 마을이었어요. 4녀 1남에 제가 둘짼데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죠. 저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왔죠. 언니가 결혼한 뒤 상월곡동에 살았는데 형부가 요꼬(편직 기계) 짜는 분이라 종업원 몇 분 두고 공장을 운영했어요.”
그 당시 옷은 그나마 잘 나가는 직종이었다. 하지만 수출이 막히면서 점점 어려워졌고, 설상가상으로 언니가 당시 20만 원 되는 계를 들었는데 계주가 도망가는 바람에 공장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논밭이었던 창동에 하꼬방(판잣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
거기서 몇 개월 살다가 도저히 버티지 못하고 언니와 형부는 남원으로 내려갔다. 김금옥 씨는 메리야스 공장에 취직을 하고 친구들하고 기숙사에 살았다. 당숙이 중매를 해 줘서 공무원 직업을 갖고 있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말단 공무원 월급으로 살기가 어려워 김금옥 씨는 한 달에 10만 원을 버는 부업을 했다. 막내아들이 다섯 살 때부터 피죤, 물비누, 퐁퐁을 리어카에 싣고 다니면서 방문 판매하는 일을 했다.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집을 방문하면, 새댁들이, 배추에 소금을 담가 놓는 분이 있어요. 그럼 내가 씻어서 담가주기도 하고, 뭐 좀 도와주고 하니까 그 분이 다른 손님을 소개해 주고 해서 영업을 잘했죠.”
김금옥 씨는 그 뒤 라피네 화장품 판매, 보험 영업으로 생활을 꾸려갔다. 그 당시 보험 영업은 지금과 달랐다. 한 달에 한 번씩 보험료를 내는 게 아니라 일수 찍듯이 하루에 나눠서 받는 형식이었다. 용산전자상가 건물에서 남자만 상대하는 보험 영업이 쉬울 리 없었다.
“처음에는 용기가 안 나서, 말도 못 했다니깐요. 오래된 언니 이틀 따라다니면서 보고 배웠죠. 90도 각도로 인사하면서 ‘안녕하십니까?’ 하는 거 배우고 껌 하나, 볼펜 하나 주면서 가게마다 다 돌았어요.”
날이 갈수록 보험 영업도 점점 힘들어졌다. 무엇보다 사람을 끌어오라는 ‘증원’ 압박에 시달렸다. 김금옥 씨는 힘든 보험 영업 일을 남한테 이 일이 힘들어 남한테 권유하지 못해 사람을 끌어오지 못했다. 결국 그 일도 그만두게 됐다.
김금옥 씨가 처음 홍익대 청소 노동자로 온 것은 1999년이었다.
“그땐 제가 힘이 장사였어요. 쓰레기 봉투가 100리터짜리 스물네 개에서 서른 몇 개가 나왔어요. 엘리베이터도 없었는데 7, 8층에서 그걸 힘든 줄 모르고 계단으로 내렸어요.”
월급이 40만 원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음에 맞는 동료 언니들이 있어 그런 대로 재미가 있었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했는데 마음에 맞지 않는 다른 청소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게 되면서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간 곳이 영등포에 있는 스크린 경마장이었다. 그곳도 청소하는 일이었다.
“거긴 홍익대보다 월급은 많은데 손님들이 있는 데서 청소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담배 냄새가 심했어요.”
그곳에서 6년을 일하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버스에 치어 머리와 어깨, 다리를 다치고 병원에 입원을 하면서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두 달 동안 치료를 한 뒤 쉬고 있었는데 홍익대에서 정직원으로 청소일을 하는 친구한테 전화가 왔다. 일할 자리가 났으니 다시 올 수 있냐는 거였다. 사실 김금옥 씨는 노동조합(노조)이 있는 서강대에 이력서를 보내고 자리가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조가 있는 곳은 처우가 좀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강대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또 홍익대로 일을 하러 갔다. 6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월급 때문에 체육관 수영장 야간 일도 같이 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월급이 80만 원은 됐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야간에 수영장 물일을 하니까. 락스 풀고 닦는데 공기 탁하고, 지하라. 하루에 몸무게가 1킬로씩 점점 빠졌어요.”
자꾸 몸무게가 빠져 병원을 가니 갑상선에 종양이 생겼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난 뒤 금방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8개월을 쉬고 홍익대에서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이 일하는 동료 언니들이 불만들이 많았다. 노조가 있는 서강대, 연세대에 견줘, 똑같이 일하는데 홍익대는 월급이 더 적은 데다 일은 더 많이 해야 했다. 노조를 만들고 싶었지만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학생들이 와서 월급이 얼마인가, 하루 몇 시간 일하는지 설문 조사를 했다.
“우리는 한 달에 75만 원 받고, 아침 8시 출근, 6시 퇴근 토요일도 한 달 두 번 정도 일한다고 얘기했죠. 우리가 있는 대기실을 두세 명이 세 번씩 방문했어요. 처음엔 노조 얘기 안 하고 설문 조사만 하다 두 번째 왔을 때 노조 얘기하는데 귀가 솔깃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도와주면 노조를 만들겠다 했죠.”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다. 학교 밖 커피숍에서 처음 아홉 명이 모였다. 하지만 모두들 겁이 나 조합원 가입서를 쓰지 못했다. 김금옥 씨가 처음으로 가입원서를 쓰면서, 여덟 명이 가입서를 썼다.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청소노동자들 가운데 반 이상이 조합에 가입했다. 드디어 2010년 12월 2일에 노동조합이 출범했다.
그리고 2011년 1월 3일, 설날 휴가를 끝내고 출근했다. 출근 도장 찍으려는데 경비실에 모르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 우리 경비 아저씨 휴가예요?’ 하고 물었더니 아니래요. 그래서 ‘출근도장이 없네요. 출근카드 주셔야죠’ 했더니 ‘몰랐어요? 아줌마들 이제 직원 아녜요 용역회사가 계약 만료되었다고 가 버렸어요.’”
얼마나 황당했을까. 아무런 설명 없이 그저 용역회사와 계약이 만료됐다고 그날로 회사를 그만두라는 말이 도대체 말이 되는 소리인가. 김금옥 씨와 청소노동자들은 모두 본관으로 모였다. 그것이 49일 동안 투쟁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싸움을 어찌 몇 마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으랴. 김금옥 씨는 추운 시멘트 바닥에서 자느라 교통사고 났을 때 다친 어깨 통증이 재발했다.
그렇게 49일 동안 투쟁한 결과 홍익대 청소노동자들 170여 명은 그대로 고용승계가 됐다. 그 싸움에서 ‘청소하는 아줌마’들은 당당한 노동자로 거듭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노예가 아니라 정당한 노동을 하고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였다. 김금옥 씨는 부분회장을 맡으면서 생각도 변하고 성격까지 달라졌다.
“나이가 60이 넘은 분들이 많아요. 49일 농성하다 안 아픈 데가 없고, 중간에 언니들이 다 쓰러질 것 같고 더 이상 못하겠다고 할 때 용역업체와 교섭을 하고 타결됐어요. 그때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죠. 노조 가입하기 전에는 텔레비전에서 노동자들이 데모를 하는 거 보면 이해가 안 가고 왜 싸움만 하느냐고 했어요. 근데 우리가 당하고 나니까 이해가 가는 거야. 오죽하면 싸우겠어요. 김진숙, 고공 농성 같은 거, 그것도 이젠 우리 다 이해해요. 몰랐을 땐 왜 저러나 했는데 지금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금옥 씨는 둘레에 고마운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인터뷰 마지막에 이 말만은 꼭 써 달라고 했다.
“김여진 씨와 ‘날라리 외부 세력’의 도움과 도와주는 단체들이 없었다면 우린 이기지 못했을 거예요. 좌절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당신들이 정당하다. 이길 거니까 힘내라’고 말해 주는 사람들 때문에 힘이 나서 싸울 힘이 생겼죠. ‘이길 거니까 힘내’라는 말이 너무 고맙고……. 평생 이 은혜 잊지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