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20년 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년,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와 ‘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 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