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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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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마스크 쓰시고 하이 파이브도 하면 안 돼요.”

개학을 앞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 때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떠올리며 마스크 쓰고 아침맞이하러 나섰어. 답답하지만 어쩌겠어. 어제로 확진자 15, 하루 새 3명이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하루에 수십 명 나오는 판인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이러스 숙주 노릇을 한다면 어째.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방역하느라 이 난리잖아.

마스크를 쓰고 아침맞이를 하니 숨 쉬기 불편한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 표정을 못 보니 답답해. 마스크로 가려도 어느 정도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늘 이 순간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답답한 거지. 마치 아이와 나 사이를 콘크리트 벽이 막고 있는 것 같아.



아침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모든 게 내겐 자극이야. 표정, 몸짓, 가방, 온갖 준비물, 옷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온몸이 자극이지. 그리고 혼자 오는지 누구랑 함께 오는지도. 아침맞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자극이 짧은 5초 안팎의 순간에 날 건드리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극 안에 담긴 많은 이야깃거리가 내 생각과 상상력을 흔들거든.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 살면서 특히 교직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이 스멀스멀, 불쑥 솟아오르도록 건드리거든.

그런데 아이들과 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오늘은 이 자극이 달라. 미세먼지가 안 좋을 때도 마스크를 쓰지만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온 적은 없지. 그동안의 아침맞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질 않아. 멀리서 걸어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벌써 아이도 나도 표정이 달라지고 마음에 물결이 이는데 코앞에 와도 그 느낌이 없다니. 어색할 정도로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웃고 말도 거는데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안 와. 나도 말만 요란하지 울림이 없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것과 안 가린 게 이렇게 다르다니.

거기다 손으로 바이러스 옮길까 봐 하이 파이브를 안 하니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인사 자세만은 하이 파이브 할 때보다 더 깍듯해.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거든. 하지만 단지 인사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별다른 느낌이 없어. 무덤덤하고 답답해.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면 좋은 교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나 모두의 마음에 물결이라고 할까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 재미가 없어. 이런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아침맞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드네. 시간은 안 가고 지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이틀 새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 표정 못 읽는다고 푸념 늘어놔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맞췄어. 좀 어색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뚫어져라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 표정은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그 말도 마스크 없을 때 이야기지 헛말이더라고. 아무리 눈을 맞춰도 느낌이 예전과 달라. 예전 같으면 아이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힘이 넘치네.’, ‘즐겁고 밝구나.’, ‘어쩌면 저렇게 생동생동할까?’, ‘따스하고 푸근하구나.’, ‘저 어두움을 어째.’, ‘의욕이 없네.’ 이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한 방에 내게 와.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뿌연 안갯속이라 안 보여.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내 기운을 못 느낄 거고.

안 되겠어. 아이들 상태를 읽어 내려 매달릴 게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확실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기로 했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짝살짝 눈을 맞추면서 모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지. 표정이나 눈빛 대신에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야깃거리가 걸리면 목이 아프더라도 크게 말을 걸었어.

! 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어울린다.”

개학한다고 머리 깔끔하게 다듬었구나. 좋아 보인다.”

머리 누가 묶어 주셨어? 와우! 정성이 느껴져.”

운동화 새로 했네.”

오빠 동생 오누이가 패딩을 샀구나.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다. 좋겠다.”

목도리가 눈에 띈다. 따스해 보여.”

오빠는 왜 안 보여?”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엄마랑 안 오고 동생 손잡고 오네. ! 이제 엄마 없이 너희 둘이 등교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와우!”

이것도 안 되겠어. 마스크가 가로막아 목만 아프지 내 말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아. 설령 내 말이 전해져도 말하는 순간 표정을 서로 읽지 못 하니 차라리 그냥 인사나 정성껏 하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던지기만 하지 주고받을 수도 없는 데다가 누구에겐 말 걸고 누구는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더구나 날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 오래 할 일은 아니야. 아이들과 학부모가 겉치장에 신경 쓰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라. 한두 번은 몰라도 오래 쓸 방법은 아니네.

마스크 쓰고도 겉이 아니라 속을 읽고 느낄 방법을 얼른 찾아야겠어. 그래야 마음을 주고받지. 느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아침맞이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순식간에 서로를 느끼고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얼른 마스크를 걷어 내야 하는데. 이놈의 마스크를 어쩌나. 안 할 수도 없고.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