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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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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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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버 씨의 시간들

 

금지되어야 할 표현 통상적

김영선/ 노동시간센터 연구위원, 누가 김부장을 죽였나저자

 

 

정신적 이상 상태의 양상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에서는 자해 행위로 인한 결과인 자살 자체를 원칙적으로는 업무상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를 인정하는데, 그 구체적인 경우로 세 가지를 들고 있다.

첫째, 업무상의 사유로 발생한 정신 질환으로 치료를 받았거나 받고 있는 사람이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한 경우. 둘째, 업무상의 재해로 요양 중인 사람이 그 업무상의 재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한 경우. 셋째, 그 밖에 업무상의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 행위를 하였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다(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 제36: 자해 행위에 따른 업무상 재해의 인정 기준).

그런데 세 사유 모두 정신적 이상 상태또는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발생한 것이어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정신적 이상 상태라는 전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차치하고라도, 정신적 이상 상태의 정도에 대한 내용들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호함은 판정 과정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판정 내용의 모호함으로 인해 판정 결과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업무상 자살 사유로 산재를 신청한 케이스 가운데 2017년 판정된 총 63(승인 23건과 불승인 40)을 대상으로 업무 스트레스 - 정신적 이상 상태 - 자살 간의 관련성을 판정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이상 상태에 대한 판정 내용의 불명확성이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는지를 구체화해 보자.

우선, 업무로 인한 자살이 산재로 승인 받으려면 업무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살이 발생했음을 밝혀야 하는데, 업무와 정신적 이상 상태 간의 관련성을 밝히는 과정에서 정신적 이상 상태를 유발할 만큼의 업무 스트레스가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23건의 승인 사례에서 발견되는 정신적 이상 상태의 내용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 기술된 대로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너무 억울하고 이번 일로 인해 직장과 당신 그리고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두려워 죽겠다.”

일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만두고 싶다. 아예 사라져 버리고 싶다.” 

손톱 옆살을 물어뜯는 등의 불안한 모습, 했던 말을 반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고 죽을 것 같다, 정신이 이상한 것 같다 등의 말을 수시로 함

걱정에 몹시 불안해하였고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흥분함, 평소와 다르게 입으로 손톱을 뜯으면서 땀을 흘리고 혼자 중얼거림.

재해 직전에 보인 행동들은 평소 때의 모습이 아니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였고 하지 않던 욕도 처음으로 했고 밤중에 소리를 지르기도 함.

주위의 시선이 너무나 따갑다. 인간적으로 나를 이렇게 매장당하게 할 줄 몰랐다. 억울하고 너무나 원망스럽다.”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면서 개와 함께 바다에 뛰어들고 싶었다는 말을 함.

회사에 출근하는 것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가 된 기분.”

위에 언급된 스트레스의 양상들은 자살에 이를 만큼의 정신적 이상 상태로 제시되고 산재 승인에 합당한 이유로 설명된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스트레스의 양상들이 발견되어도 승인되지 못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통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라니?

여러 불승인 사유들 가운데 눈에 띄는 지점은 정신적 이상 상태에 이를 만큼의 스트레스는 아닌 통상적인 수준의 스트레스라는 설명 방식이다. 통상적인 수준이란 이유로 자살을 업무상 사유로 판정할 수 없다는 사례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 기술된 대로 몇 가지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역할 변화에 따른 스트레스에도 불구하고) 업무 스트레스 및 직장 상사와의 갈등이 통상 업무에서 적응할 수 없을 만큼 과다한 부담으로 보이지 않고 20여 년간 해당 업무 근무 이력을 감안해 볼 때, 업무 스트레스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스트레스라고 볼 수 없다.”

(새로운 인사관리 업무 등의 업무 스트레스로 정신과 진료를 받고 있었지만) 고인이 그동안 수행하던 일상적인 조리 업무의 일부로 판단되고 자살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쳤을 직무 요인이나 업무상 스트레스가 없었다.”

업무 부담이 컸던 것으로 보이나, 통상적인 수준의 업무 수행으로 회사 사정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민감하게 책임감을 느끼는 개인적인 소양이 사망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

매출 압박에 대한 스트레스는 통상적인 수준(타 영업팀장들도 있는 부분)이다.”

환경상 업무 스트레스(조직 개편으로 부하 직원 1명 퇴사, 영업 관련 비용으로 추정되는 채무로 이에 대한 독촉 전화 수시로 받음)가 없지 않았으나, 통상적인 범위 내라고 보이고 업무 환경의 결정적 변화, 충격 사건, 인간관계 변화 등 없어 과도한 스트레스로 정신 이상 상태에서 자살하였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인사이동(재해 1주일 전 타 부서로 이동)이 업무상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나, 인사이동이 고인에게 특정하여 실시된 것은 아니고 고인의 업무적 스트레스는 일반적 기자 업무 환경에서의 스트레스다.”

관리자로서의 책임감과 업무 실적에 대한 부담감 등 평소 업무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더라도, 20여 년간 같은 업무를 수행해 해당 업무에 익숙했다.”

업무상 스트레스(자존감 상처, 의욕 저하, 우울감, 불면, 분노 감정 등의 증상으로 진료)가 어느 정도 있을 수 있어 보이나, 우울증 등 질병에 이를 만큼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스트레스 요인을 확인하기 어렵다.” 

업무 질이나 강도가 정황상 문제적인 것으로 추정되더라도 많은 경우 통상적인 수준’, ‘자살을 유발할 정도의 업무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보기 어려움’, ‘○○년 차에 극복할 수 없을 정도의 과중한 업무는 아님’, ‘업무에 있어 큰 변화라고 볼 수 없는 수준등의 이유로 불승인되는 경향이 높다. 그런데 불승인 사례의 업무 스트레스들을 왜 통상적인 수준이라고 보는지에 대한 근거들을 <재해조사서><업무상질병판정서>에서는 찾기 어렵다. 판정 내용의 불명확성에 대한 문제 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대목이다.

국어사전에서 통상은 특별하지 않고 늘 예사로 있는 일이나 상태를 뜻한다. 그 일이나 상태가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것이고 또한 관행적으로 오래전부터 해 오던 것들이란 의미들을 포함한다. 그렇기에 어느 정도 감내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전제가 깔린다. ‘너만 힘드냐, 다들 힘들다. 그 정도는 문제라고 볼 수 없다식이다. 이러한 통상적인 수준이나 ○○년 차 정도의 업무라는 설명 방식은 업무 스트레스를 재해 당사자의 입장에서 고려한 것도 아니요, 당시 업무 맥락에 기초해 고려한 것이라고도 보기 어렵다.

심히 주관적일 수 있는 통상적이란 표현 그 자체는 금지되어야 할 것이다. 판정의 언어들은 더욱 타당하고 객관적 자료에 기초한 판정 내용을 담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 우리가 통상적인 업무 스트레스라고 말하는 그 수준이란 것이 이미 문제의 정도를 넘어선 상태라는 점을 먼저 인지하고 공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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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30. 14:31 태복빌딩 꼭대기

<작은책> 20199월호

 

지난 호를 읽고

 

 

교장 일기를 읽는 재미로 <작은책>을 기다리는 까닭이 하나 더 늘었다. “준비물을 아이가 들고 가야 아이에게서 배움과 깨달음이 더 많이 일어난다라고 한 대목을 읽으면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부모들이 이 글을 읽어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 진해졌다. “훌륭한 교사는 학부모나 교육 당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아이들이 적절한 난이도의 모험을 하도록 만드는 사람이라는 말처럼, 대한민국에 훌륭한 교사가 넘쳐났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았다.

- 이영균

 

항상 잊지 않고 보내 주신 <작은책>을 보면서 많은 소식을 접하고 있고,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몇 달 남지 않은 수형생활 마지막까지 꼭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무더운 여름에 고생하시는 작은책 직원 모두의 건강과 행운을 빌어 봅니다.

- 곽동이

 

허지희 님 글로 세종호텔 상황을 겨우 알게 되었습니다. 일하는 나이는 지났지만, 아이들 키우는 지금 세대들 힘들게 한 세대 같아 미안한 마음 들어요. 명박이 등장부터는 국민 잘못이 더 큽니다. 어리석고, 탐욕스런 그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뽑았으니까요. 기득권들이 촘촘하게 지들만 잘살려고 끼리끼리 힘을 가지고 공정한 대가를 주지 않고 탐욕으로 운영했잖아요. 곳곳에 아픔을 주는 짓으로. 분명히 그네들은 대대로 다른 아픔으로 힘들 거예요. 공평한 건 돈뿐이 아닐 겁니다. 그런 경영자들 아래서 현재 견디느라 힘드시겠네요. 기운 내시고요. 아프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 인천 할머니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 자녀에게 죽으라는 말을 들음 너무나 절망스러울 거 같아요. 그러나 그 말은 돌려 들으면 나 힘드니깐 내 말에 관심 좀 가져 줘, 내 말도 좀 들어 줘이지 않을까요? 사실은 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아이에게 그런 말을 했답니다. 순간 너무나 화가 나고 나를 존중해 주지 않은 딸아이를 향한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해서는 안 될 말을 해 버리고 말았어요. 엄청 후회하고 딸아이에게 사과를 했지만 그 상처는 어쩌면 우리 딸이 사는동안 평생 갈지도 모르죠.

사춘기를 겪는 아이는 감정을 조절하거나 표현하는 데 있어 어려움이 있을 테니, 생각과 다른 말이 나올 수도 있을 거예요. 세상 전부인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한 딸의 마음도 편치 않을 거라 생각해요. 다만 시기가 그런 시기인 듯.

기회가 된다면 제가 술 한 잔 사 드릴테니 딸아이로 맘 상하심 연락 주세요. 그래도 글을 읽다 보면 송추향 님은 크게 절망하거나 좌절하신 게 없어 보여서 정말 다행이에요. 응원하겠습니다~!

- 정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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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

 

노조 가입해. 안 그럼 이혼할 거야

정인열/ <작은책> 기자

  

▲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6월 30일부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는 고공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약 1500명이 지난 6월 대량 해고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50대 여성과 장애인이다. 630, 이중 43명이 지붕 위로 올라갔고, 전국에서 모인 해고자들은 바로 옆 교통센터에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지난 726일 시사만화가 이동수 씨와 함께 농성장을 찾았다.(이동수 화백은 <작은책>에 생활 만화와 삽화를 그리고 있다.)

교통센터 주변은 크고 작은 텐트들로 가득 차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간밤에 비바람까지 몰아쳐 젖은 옷가지들과 비품들이 널려 있었다. 현재 해고자들은 민주노총 조합원 약 600, 한국노총 조합원 약 900명이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도로공사를 상대로 공동투쟁과 공동교섭을 하고 있다. 천막에서 민주노총 소속 박혜숙(순천영업소), 김원표(양평영업소), 이진희(청북영업소) 씨와 한국노총 소속 김병종(고창영업소), 이원종(대소영업소) 씨와 인터뷰를 했다.

▲ 경기도 성남시 서울톨게이트 옆 교통센터에 전국 톨게이트해고자들이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들은 부스 요금수납 말고도 화물차 과적 단속 및 통행료 미납 관리, 하이패스와 전자카드 관리 등의 민원 처리를 한다. 본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이었다(기간제로 입사한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 한국도로공사는 전국의 톨게이트 영업소를 직접 운영하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핵심 업무 외주화명목으로 외주화를 시작했고,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모든 영업소가 외주화됐다. 김병종 씨와 이진희 씨가 말한다.

그때 남자 수납원들은 정규직 되고 여성 수납원만 외주화됐어요.”

외주업체 사장들은 도로공사 본부·지사 임직원 출신으로, 희망퇴직 시 남은 정년 기간만큼(보통 5~6) 수의계약을 맺어 수익을 보장받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커지자 점차 공개입찰을 통해 법인 위탁업체와 계약을 맺기 시작했지만, 지난 5월만 해도 대부분 영업소는 전직 도로공사 임직원들이 운영했다.

외주업체는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2013~2014년 국정감사에서 신기남 의원실이 발표한 한국도로공사 희망퇴직자 수의계약 외주운영 실태한국도로공사 정책자료집에 따르면 임직원 출신 사장들이 서류까지 조작하며 임금을 착취하고 사업비를 부당 편취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써야 할 피복비, 식대, 교통비는 물론 상여금과 퇴직금 및 각종 수당(시간외, 야간, 휴일근로, 연차수당 등)을 떼어먹거나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근무하지도 않는 친인척 등을 직원으로 신고하고 근태기록 및 업무 일지를 조작해 인건비를 청구하기도 했다.

요금수납원들은 사장(업체)이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기 위해 기존 수납원들을 해고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면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이 나오는데, 업체 사장들은 고용지원 기간이 끝나면 해고하거나 괴롭혀서 스스로 나가도록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김병종 씨가 말한다.

중증은 60만 원까지 받는데 저는 경증이라 (고용지원금이) 30만 원 될 거예요. 저희(고창영업소)14명 중 12명이 장애인이었어요. 지방으로 갈수록 장애인 비율이 높아요.”

도로공사는 이런 불법행위들을 눈감아 주거나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 신기남 의원실은 불법행위로 가져가는 이익을 업체당 한 해 4억 원으로 추산했다. 반면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 허덕였다. 심야노동을 하며 43교대로 일했지만, 임금인상 체계가 없어 10, 20년을 일해도 신입 직원과 급여가 같았다. 많게는 하루 1천 대 차량의 수납 업무를 했고, 영업소 사무실에서 민원 등을 처리하는 주임들은 교대자가 없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특히 하이패스 차량 정보 인식 오류로 인한 미납요금을 처리하느라 초과근무를 하고도 일한 만큼 임금을 못 받았다. 고객들을 대면하거나 전화로 미납요금을 독촉하면 고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난 뒤에는 근무 부실을 인정하는 경위서를 써내고 부족분은 자비로 충당했다.

이렇게 외주화 때문에 생긴 폐해는 고스란히 전국 354개 영업소 7천여 명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2010년 한국노총 산하 전국톨게이트노동조합이 생기고 2015년에는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생겼다. 2013년 톨게이트 노동자들 800여 명이 먼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고 1, 2심 법원은 각각 2015년과 2017년 노동자들이 한국도로공사의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도로공사는 직접고용 방식이 아닌 자회사 채용을 추진했다. 박혜숙 씨와 김병종 씨가 말한다.

평소에도 티타임 때마다 자회사가 좋다고 세뇌시켰어요. 자회사로 안 가면 해고한다고 협박도 했고요.”

직접고용을 희망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도로공사는 자회사 전환을 강행하고 30퍼센트 임금 인상과 기타공공기관 지정 등을 제안했다. 톨게이트 노동자 약 6500명은 자회사 전환에 동의해 지난 71일부로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서비스()에 고용됐고 이를 거부한 약 1500명은 해고자로 남았다. 이들은 왜 자회사를 거부하는 걸까? 이원종 씨가 말한다.

용역업체나 자회사나 같은 거예요. 자회사도 낙찰률이 있어요. 그럼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낙찰률이 88퍼센트면 나머지는 누구를 주는 건가요? 결국 명예퇴직자들한테 가는 구조 아닌가요?”

임금 인상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로공사는 자회사로 전환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20퍼센트 인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건 사실 기존 법인 위탁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받던 금액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직접고용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입사 시험도 안 친 주제에 떼를 써서 정규직원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한다며 비난한다.

정규직에는 일반직과 실무직이 있어요. 실무직에 도로관리, 청소, 조리원, 사무원 등이 있고요. 실무직은 일반직처럼 공채 시험을 치르지 않아요. 저희 요구는 우리를 실무직에 넣어 달라는 거예요.”

▲ 한국도로공사 교통센터 풍경 스케치. 입구에 적힌 표어와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이동수


현재 투쟁하는 조합원들 대부분은 최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노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모두 집을 떠나 청와대와 서울톨게이트를 오가며 노숙을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은 지칠 때도 있지만 가족들의 지지와 격려가 큰 힘이 된다. 홀로 아이 셋을 키우는 이진희 씨는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녀는 스물두 살 첫째에게 동생들을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자녀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투쟁하는 게) 엄마로서 너희들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힘이 닿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애들에게 말했죠. 애들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래요.”

박혜숙 씨는 오히려 남편이 적극 지지한단다. 박 씨의 남편도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예전에 그이는 남편이 노조에 참여하는 게 싫어 집회 현장까지 가서 끌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자회사 전환 사태가 벌어지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 가입해서 직접고용 하고 와. 안 그럼 이혼할 거야.”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노조는 민주노총과 달리 상급단체로부터 아무런 지원 없이 투쟁하고 있다. 자회사에도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생겼다. 한국노총은 수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자회사를 선택했으므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톨게이트노조는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 김병종, 박혜숙, 김원표, 이진희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인터뷰 도중 소나기가 내렸다. 빗속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이원종 씨가 남자들만 있었으면 벌써 집에 갔을 거예요. 여성분들이 정말 대단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대답했다. 상급단체 연대도 없이 홀로 투쟁하는 톨게이트노조도 대단해요. 함께 투쟁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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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교실 이야기

 

똥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곽노근/ 고양 상탄초등학교 교사

 

 

아침을 거른 적은 없다. 어느 순간부터 내 장은 튼튼하고 건강해져 일을 열심히 잘한다. 아침을 거른다면, 속이 더부룩하고 너무 불편해 오전 중에 꼭 일을 치르게 된다. 쉬는 시간에, 틈을 봐서 허겁지겁 5분 정도 만에 끝내야 한다. 나는 진득하게 오래 누는 버릇이라 그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기는 너무 버겁다. 하지만 허겁지겁, 되는 만큼 후다닥, 마무리하고 나온다. 아무리 내 똥이 급해도, 수업은 해야 하지 않은가. 급한 불은 껐으니.

첫 문단과 제목만 봐도 알겠지만, 그래, 똥 얘기다. 나는 똥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사실 똥 얘기, 더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다. 어릴 때는 똥을 지금처럼 잘 누지 않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밖에 안 눴던 이야기, 술 먹고 난 다음 날은 하루에 다섯 번 넘게 누기도 했던 이야기 등등. 그러나 이 자리가 내 똥 눈 이야기를 풀어놓는 자리는 아니니까, 여기서 그치련다. 여하튼 나는 똥 얘기 하는 걸 좋아한다. 똥 얘기는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 주니까. 더러워하면서도, 사람들을 천진하게 웃게 해 주니까. 금기의 아슬아슬한 영역을 똥이 건드려, 시원하게 해 주니까.

그렇다고 무슨 내가 똥 얘기만 하고 사는 건 아니다. 똥 얘기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는 자리라고 여겨진다면, 당연히 애초에 꺼내지 않는다. 사람들과 어느 정도 친해지고 나서, 혹은 똥 얘기 꺼내면 감정의 벽이 확 무너질 것 같다고 판단되면 꺼낸다. 그마저도 수줍은 나의 성격 탓에 상황을 보고 또 본 후, 내 몸이 시킬 때 꺼낸다. 벌써 똥 얘기만 세 문단째다. 불편한 분이 계시다면 죄송하지만 그냥 넘기시길 권한다. 앞으로도 계속 똥 얘기만 할 것이므로.


학교에서도 물론 나는 아이들에게 똥 얘기를 한다. 어른들에게 똥 얘기는 조금 조심스럽지만 아이들에겐 상대적으로 덜하다. 아이들은 백이면 백 좋아한다. “단어만 나와도 아주 자지러지고 죽을려 그런다.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들을 두고 내 어찌 똥 얘길 안 할 수 있겠는가. 아이들과 똥 얘기는 일상이다.

선생님, 어디 가세요?”

, 똥 싸러.”

(까르르 웃으며) 또 똥 싸러 가세요?”

, 당연하지!”

(또 배시시 웃으며) 선생님, 즐똥하세요!”

그래, 고마워. 즐똥할게!”

급식실에서 급식을 마치고 나오면, 언제나 나를 맞아 주는 네 명 정도의 4학년 우리 반 여자 아이들이 있다. 나를 졸졸졸 따라온다. 그러면 나도 뒤돌아 그 아이들 뒤를 졸졸졸 따라가면서 서로 장난을 주고받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목적지에 다다른다. 교사용 화장실. 위 대화는 그 내가 화장실을 가기 전 이 아이들과 항상, 매일 주고받는 대화다. 물론 실제 점심시간에 교사용 화장실에서 똥을 누진 않는다. (물론 아주 가끔은.) 그저 소변보고, 손을 닦고 할 뿐이다. 그러나 저렇게 똥 얘기를 농담 삼아 섞으니 분위기가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즐겁고 유쾌한가.

그 유쾌함을 위해 다소 도발적으로 나가기도 한다. 이전 학교에서는 교실에서 급식을 했는데, 밥 먹는 동안 플래시 노래를 많이 틀어 줬다. 이번엔 어떤 노래를 틀까 목록을 컴퓨터로 보고 있는데, 아이들이 꽂힌 제목이 있었다. 바로 내 똥꼬’. 선생님, 저거 틀어요!라는 말을 나는 놓치지 않고 잡아챘다.

 

내 똥꼬 _ 박진하 시/ 백창우 곡

 

똥 누러 뒷간에 가면

똥은 뿌지직 잘도 나온다

끙 끙 끄 응

조금만 힘줘도 잘도 나온다

자랑스런 내 똥꼬

 

플래시 영상엔 똥 누는 장면, 똥 장면들이 그려져 있다. 또 틀자 해서 또 틀었다. 그래, 원하는 만큼 틀어 주마. 처음엔 재밌어 하던 아이들도 밥 먹으며 똥 노래를 계속 보고 들으니 거북했는지, 몇몇 아이들은 고만 보자 한다. 그렇지만 장난기 많은 친구들 몇몇은 또 보자 한다. 그래서 꿋꿋이 또 틀었다. 힘든 아이들이 늘어 갔다. 너무했나. 그러나 나는 간사하게 속으로 낄낄대며 웃었다.

그래서 벌을 받았나. 어떤 아이가 똥을 지렸다. 누군지는 모른다. 대변기가 있는 두 번째 칸. 똥은 대변기 뚜껑, 대변기 모서리, 양옆 벽, 벽 뒤 등등 산발적으로 묻어 있었다. 그 아이는 똥으로 그림을 그린 게 틀림없었다. 같은 학년 선생님들은 모두 고민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는데, 냄새는 심했고, 이 상태로 주말을 맞을 학교를 떠나기엔, 똥의 자태와 냄새가 너무 추악했다. 행정실에 전화해 보니 청소하시는 여사님(학교에서 이 직종에 일하시는 분의 호칭을 고작 여사님으로밖에 표현 못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땅히 더 나은 호칭을 찾지 못해 부끄럽게도 부득이 이 단어를 쓴다.)은 이미 퇴근하신 후였다. 어찌해야 하나, 어찌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 가기 전 발령받은, 그리고 군대를 전역하고 얼마 전 다시 발령받은, 그 당시 신규였던 승현(가명)샘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제가 치울게요.”

마지못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었다. 그게 뭐 그리 큰일이냐는 듯,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듯. 승현샘은 바로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으며 걸레를 찾아 나섰다. 나도 뒤따라가 양말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으며 걸레를 찾아 나섰다. 이내 화장실에서 호스를 꽂고 두 번째 칸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호스의 물과 걸레로 똥의 그악스러운 자태는 생각보다 금세 사라졌다. 승현샘이 주도적으로 했고, 나는 뒤처리만 살짝 했다. 승현샘 이전엔, 누구도 똥을 직접 닦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교사들은 그렇게 고상하지 않다. 아이들이 통으로 엎은 반찬 찌끄러기들을 치워야 하고, 속이 안 좋아 게워 낸 아이들의 토를 치워야 하고, 교실에 들어온 벌과 사투를 벌여야 한다. 그렇지만 똥은 아니었다. 똥을 치우지 않을 만큼은, 고상했다. 그리고 그 정도 고상함을 가진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교사들이 똥을 직접 닦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 욕먹을 일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왠지 부끄러웠다. 똥을 좋아한다던 내가, 결국 현실의 똥 앞에서 주저하다니. 똥에 대한 사랑이 부족함을 깨달았다. 글을 쓰면서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앞으로 똥 얘기를 부끄럼 없이 할 수 있을까. 똥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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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휴가 때 겪은 오싹한 경험

이남림/ 완주 글쓰기 모임 회원

 

 

드라이브하러 나가게 준비하고 있어요.”

친구 소개로 몇 번 만나던 남자한테서 온 전화였다. 나는 그가 매번 알아서 데이트 코스를 척척 짜내는 게 정말 맘에 들었다. 길을 잘 몰랐던 나는 그가 운전해 가는 대로 어디든 좋았다. 시간이 많이 걸려도 드라이브하면서 얘기 나누는 데이트는 꽤 짜릿하고 매력적이었다.

한 시간쯤 지나자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나오기 시작했고 경사는 점점 심해지는 듯했다.

~! 그만 올라가고 어서 다시 돌아가요. 지금 당장!”

그는 갑작스런 내 말에 당황해하며 말했다.

차선이 하나라 차를 돌릴 수도 없는데.”

심장이 뛰고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30여 분을 눈을 꼭 감고 두 손으로 손잡이를 꽉 부여잡은 채로 버텼다. 그리고 드디어 오르락내리락 구불구불한 길이 끝이 났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라고 당황했을 그에게 나는 3년 전의 끔찍한 기억을 되살려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사서 그 복잡한 도로를 기어 다니다시피 했다. 2년쯤 지나 운전에 점점 익숙해진 나는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여름휴가 때 나는 부모님과 언니, 조카 둘과 함께 더위를 피해 시원한 계곡으로 향했다. 휴가철이라 그런지 오가는 차들이 너무 많아 계속 브레이크를 밟으며 조금씩 움직여 갔다. 겨우 도착한 계곡에서 우리는 배부르고 시원한 시간을 보냈다.


돌아오는 길에도 차들이 밀려 거의 줄지어 서서 브레이크만 밟고 있기도 했다. 경사가 심한 길이라 차가 조금씩 움직일 때는 천천히 브레이크를 밟으며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햇살에 익어 버린 아스팔트인 데다가 경사가 심한 길을 계속 오르락내리락해서 그런지 타이어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났다.

내려오는 중간에 쉼터에서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 먹고 다시 출발했다. 차를 타고 몇 초쯤 지났을까? 내리막길에서 브레이크를 밟았는데 조금 전까지 잘 듣던 브레이크가 작동되질 않았다. 반대편 차선으로는 차들이 계속 올라오고 있었고, 내 앞에도 차들이 줄지어 가고 있었다. 또 도로 양옆은 경사가 심한 낭떠러지였다. 순간 머리가 하얘지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무섭고 막막하고 겁이 났다. 가족들 모두 이대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겠구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떡해! 어떡해! 큰일났어! 브레이크가 안 들어! 모두 벨트 잘 매고 손잡이 꽉 붙잡아요!”

몇 미터 앞 반대편 차선을 보니 작은 건물이 보였다. 그 순간 , 저 건물 쪽으로 핸들을 돌려 건물에 부딪치면 낭떠러지로는 떨어지지 않겠구나라는 판단이 섰다. 그쪽으로 급히 핸들을 틀었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많이 오가던 차들이 그 순간엔 보이질 않았다. 그래서 다행히 다른 차량과는 아무런 충돌 없이 건물에 바로 부딪칠 수 있었다.

사고 후 너무 놀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고만 있었다. 차 안에 가족들은 울고불고 더 난리였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지리산 국립공원 관리사무소였다. 직원들은 다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으니 안심하라며 119를 불러 주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고 정신이 없어서 어떻게 119에 실려 병원에 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천만다행으로 언니만 이마에 몇 바늘 꿰맸을 뿐, 다른 가족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나는 브레이크가 갑자기 밟히지 않은 순간부터 우리 가족 모두 낭떠러지로 떨어지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는 기적처럼 모두 다시 살아났다. 우리는 부둥켜안고 울었다.

나는 그 후로 한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나 다시 핸들을 잡기는 했으나 구불구불한 오르막, 내리막은 아무리 경치가 좋더라도 스스로 운전해서는 절대 가지 않는다.

여름휴가에 관한 오싹한 이야기를 듣고 난 남자 친구는 그 후로는 데이트 코스에 드라이브를 절대 넣지 않았다. 그 당시 난 이 사람이 참 배려가 많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15년 동안 같이 살아 보니 원래 드라이브 같은 거 전혀 좋아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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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8. 21. 16:05 알림 / 엮은이의 글


발행인의 글

 

한국의 극단적인 보수 우익들이 정체성의 혼란이 왔나 봅니다. 본래 극우들은 나치, 파시스트같이 인종주의, 국수주의, 맹목적 애국주의를 내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극우들이 갑자기 매국노로 변했습니다. 엄마부대·태극기부대 같은 극우들이 어느 날부터 일장기를 흔들면서, 한국에 경제 침략을 가해 제2의 식민지를 꿈꾸는 일본의 아베 수상을 응원하는 사태가 벌어진 겁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무조건 반대하려다 보니까 극우들이 헷갈린 거지요.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할 지점은 다른 데 있습니다. 이번 호에 학교 비정규직 노동자가 쓴 글에서 볼 수 있듯이 문재인 대통령이 공언한 공공기관 비정규직 제로시대는 아직 멉니다. 노동 공약 이행 수준은? 기대 이하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반대하려면 이런 내용으로 비판하면 되는데, , 그러면 극우가 아니겠지요?

<작은책> 이번호 책이 이끄는 여행, 이동수 화백이 김민섭 씨의 책 훈의 시대를 들고 강화도를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급훈, 교훈, 사훈 등 우리를 지배해 온 ’. 저자는 이런 훈들이 이 사회를 천박하게 만들었다고 개탄합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이제 그런 천박한 훈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강화여고 학생들은 교가에 나오는 여성다워라라는 성차별적인 구절을 지혜로워라로 바꾸고, 교정에 있던 돌에 여자다웁게라고 새겨져 있던 문구도 다른 내용으로 바꿨습니다. 이동수 화백은 강화에 살고 있는 류미례 감독을 만나 함께 강화여고를 둘러보고 통일전망대도 다녀왔습니다. 이동수 화백의 너스레를 들으며 강화도를 함께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

 

2019817

안건모 올림



2019. 9. 월간 제291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박제가 된 훈이 지배하는 사회 이동수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저는 오빠만 있음 됩니다. 그건 뻥이다! 최성희

17 여름휴가 때 겪은 오싹한 경험 이남림

20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밥 한번 먹자고! 윤혜신

26 이야기가 있는 사진 김재형

28 살아온 이야기(15)

온갖 우여곡절을 겪는 엄마 송추향

34 교장 일기

모험이 아이들을 키운다 최관의

38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과대광고와 희망 고문 권해진

41 교실 이야기

똥 앞에서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곽노근

46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모두가 설레는 한가위를 맞았으면! 조혜원

50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53 일터 탐방_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

노조 가입해. 안 그럼 이혼할 거야 정인열

59 전국학교비정규직 수기공모 당선작

입간판에 내 이름은 없었다 나현경

64 전국학교비정규직 수기공모 우수작

학교에서 나쁜 일이 왜 그렇게 많아요? 이재문

69 작은책 법률 상담소

반대할 자유 전다운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박진

73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 박진 안건모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98 존버 씨의 시간들

금지되어야 할 표현 통상적김영선

103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밀레니엄 좌파는 기다리는 데 지쳤다 고태경

108 어린이 해방과 평화

입을 꼭 다물고 몸을 바르게 합시다 이주영

113 여성으로 살아가기

내 사랑은 당신을 위협할 수 없다 홍승은

118 생태 이야기 질병은 창조 대상이 아니다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3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124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언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박찬희

128 책 읽고 딴 생각 우리는 스스로 선량하다고 믿는가 변정수

131 독립영화 이야기 대동강맥주가 맛있었다 류미례

137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청배와 띨배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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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지엠 비정규직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와?

정인열/ <작은책> 기자 

 

▲ 한국지엠 부평공장. 작은책(정인열)


한국지엠은 생산 물량 감소를 이유로 2014~2015년 군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약 1000명을 해고했다.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어 해고를 피했다. 인력 감축이 필요한 경우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정규직을 전환배치해 고용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이를 인소싱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일하던 공정에는 정규직원이 들어왔다. 정규직원들은 비정규직의 편성률(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회사는 해고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 2~3개월간 정규직원에게 현장 업무를 가르치게 했다.

이완규 씨(40)도 인소싱으로 인해 20158월 해고됐다. 그는 2006년 군산공장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도어 라인(자동차 문)에서 일했다. 그러다 2015430, 3개월 유급 휴직 통보를 받았다. 복직 날짜는 없었다. 곧 해고된다고 생각하자 억울해서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다.

모범사원 상도 세 번이나 받았어요. 성실하게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너는 비정규직이니까 나가라, 그러니까 억울한 거예요.”

2018213일 군산 및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법원은 이완규 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 45명이 한국지엠의 노동자라고 1심 선고를 내렸다. 해고 투쟁 3년 만에 들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같은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공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만으로 싸웠는데 갈 곳이 없어진다니까. 괜히 (투쟁)했나? 그때 많이 힘들었죠.”

인소싱은 2009년 부평공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시 금융위기로 미국의 지엠 본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비정규직 약 1000명이 해고됐다. 사실 비규정직이 해고된 자리에 정규직 인력을 1.5~2배 더 투입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게다가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 대비 50~70퍼센트 수준의 임금만 지급하고, 자녀의 학자금 같은 복리후생 하나 제공하지 않고, 골치 아픈 노사협상을 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손쉽게 해고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노동삼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부평공장 안에는 2, 3차 하청업체를 포함해 약 2500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이영수 씨(46)와 박현상 씨(45)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은 2006년 부평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차별을 묻자 이영수 씨가 말했다.

주말에 지게차 타는 라인 그리는 거를 한 적이 있어요. 정규직하고 똑같이 라인을 그리는데 거기는 이십몇만 원 받아가고 우리는 십만 원도 안 되는 거야. 그당시만 해도 3배 차이가 나는 거야. 야 이거는 심각하다 느꼈죠.”

▲ 출고 직전 차량에 스프레이 건으로 왁스를 도포하는 방청(녹 방지작업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2007년 한국지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던 라인을 분리하고 모듈화를 도입하면서 일부 공정을 납품업체로 돌리려 했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에 반대하며 200792일 비정규직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를 설립했다. 발기 조합원은 30여 명이었다. 설립 일주일 만에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부터 차례대로 해고되더니 조합원이 가장 많았던 하청업체 스피드월드파워도 폐업됐다. 해고자만 25. 선전전, 천막농성, 집회를 해도 복직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071227, 박현상 씨는 해고자 복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가지고 부평구청역 CCTV 탑에 올라갔다.

그날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았어. 비닐 쳐 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못 내려가게 밑에 천막이 쳐져 있는 거야.(웃음)

하루 이틀 예상하고 올라갔던 그는 65일 만에 내려왔다. 이대우 당시 지회장이 이어받아 70일을 고공농성했다. 2008117일에는 황호인 씨가 부평역 CCTV에 올라갔다. 며칠 후 또 다른 조합원 4명이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227일에는 이준삼 씨가 마포대교 외줄 농성을 했다. 정화조를 잘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밧줄을 달고 다리 아래에 매달렸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가 말한다.

정화조가 플라스틱이잖아요. 그라인더로 그 위를 잘랐어. 밧줄도 혹시 끊어질까 봐 최고급 밧줄로 했는데 (진압하려고 하니까) 뛰어내려 버렸어.”

다행히 이준삼 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수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방구조정에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 황호인, 이준삼 조합원은 지엠대우 정문 아치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두 달간 고공농성을 했다(2010년 12월 1일 ~ 2011년 2월 1일). 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부평구청역에서는 고공농성이 계속됐다. 135일째 되던 20085, 지회는 해고자 22명 중 7명만 선별 복직하기로 합의하고 이대우 지회장은 내려왔다. 하지만 지회장을 비롯해 박현상, 이영수 등 핵심 간부를 포함한 15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평공장 서문 천막 농성장에서 2년 반이 넘게 투쟁을 이어 갔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2010121일 부평공장 정문 아치 위로 황호인, 이준삼 해고자가 올라가 또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당시 지회장이었던 신현창 씨가 단식을 했다. 201121, 노사는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2년 후인 2013년에 복직한다는 조건이었다. 신 지회장 단식 45, 고공농성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만족할 만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일단락을 짓기로 했다. 이날 합의대로 20137월 해고자는 모두 복직됐다. 6년이 걸렸다이영수 씨가 당시 복직한 느낌을 회상했다.

돈을 버니까 좋더라.(웃음)

하지만 6년을 무임금으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박현상 씨가 또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영수 동지는 아직 혼자여서 버티는 거…. (웃음)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는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이라 버텼다며 웃는다. 겉으로는 가볍게 말하지만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군산공장 이완규 씨는 어린 자녀 둘이 있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 돈을 벌지만 4인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규직 해고자들은 2년치 임금을 받고 나오기라도 했지만 비정규직은 빈손이다. 해고 후 4년 동안 쌓인 빚이 3천만 원.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녀들 때문이다.

현재 비정규직이 1200만 명 정도 된다잖아요.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은 늘어날 거거든요. 앞으로 야네들이 살아갈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기자회견도 많이 하고 티비에도 나와요. 우리 와이프가 다른 건 다 좋은데 티비만 나오지마라, 전라도 말로 '거시기'하다는 거여요. 제가 와이프한테 그랬어요. 자기는 자기 '거시기'한 게 좋아 아니면 우리 자식들이 커서 비정규직으로 평생 살아가는 게 좋아? 그럼 당연히 아니래요. 그럼 자기도 좀 참아. 아빠의 투쟁으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어요. 잠깐은 불편하겠지만 계속 싸우다 보면 우리 애기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살 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완규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가 박수를 치며 말한다.

이런 조합원이 있어야 되는데.(웃음)

한국지엠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영수 씨는 지난 11일부로 또 해고자가 됐다. 한국지엠이 정규직에게는 임금의 70퍼센트를 지급하며 유급휴직을 제안했지만 비정규직에게는 무급 순환휴직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를 거부했고 이영수 씨는 해고됐다. 비정규직 노조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생산 물량이 없는데 무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 요구냐며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회의 요구는 수긍이 갈 만하다. 작년 1교대로 전환되었던 부평2공장이 조만간 다시 2교대제가 될 예정인데, 이때 정규직 600여 명, 비정규직 100여 명이 필요할 것으로 지회는 예상한다. 지회 해고자는 46(부평 38, 군산 8). 그리고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로 법원 판결도 이미 받은 상태다. 복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뿐만 아니라 한국지엠은 정부로부터 8100억 원을 지원받았다.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 이영수, 이완규, 박현상 씨(왼쪽부터). 지회는 해고자 복직 및 정규직 전환 요구를 하며 507일째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2019년 6월 27일). 작은책(정인열)


생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이완규 씨와 박현상 씨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싱글인 이영수 씨는 난 담배나 피워야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박현상 씨는 네 살 된 딸이 있다. 집은 충북 진천. 딸이 두 살 때 육아휴직을 쓰고 1년 전 공장에 복귀하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는 6월부터 상경 투쟁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가 아이들과 통화한 이야기를 한다. “‘아빠는 왜 회사 가면 (집에) 안 와?’ 이런다니까.” 이 말에 박현상 씨가 받아쳤다. 우리 애는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 와?’ 한다니까. ‘언제 와도 아니고. 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네 사정이 더 낫네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돌려서 표현했다. 싱글인 이영수 씨만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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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4)

 

자식을 두고 갈 때 알려 줄 것들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사랑하는 나의 딸이 엄마가 있어서 너무 불행하다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엄마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사냐고 묻습니다.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면 모멸감과 낭패감, 화살이 누구를 겨냥하는지 분명한 분노의 마음에 휩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진짜로 죽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미친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나는 평소에 딸아이한테 내가 죽으면 외딴 무덤이나 발걸음하기 어려운 곳에 두지 말고, 화장해서 곱게 빻아서 예쁜 병에 담아 부엌 찬장에 두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도 나의 부모님의 다음을 어떻게 챙길지 자신이 없는데, 우리 다음 세대들은 장례나 제사를 치러 낼 수 있을까요?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삶에서 저만치 비껴 나게 두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게 되어 있는데, 마치 죽음이 생과 전혀 다른 낯선 것인 양 외면하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지나간 사람들 사진을 보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언제든 닿을 곳에 있어서 죽음도 삶도 관계의 영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 죽음도 사라져 없음이 아니라 그저 삶의 일부로 있는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나의 백수 생활이 자꾸 길어지고 있을 때, 딸아이가, 엄마가 돈을 못 벌고 우리가 몹시 가난해져도 밥은 굶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친구들이 자기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더라고요. 죽고 나면, 잠시 나의 딸을 굶어 죽게 하지 않을 나의 벗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봅니다. (한참을 계속 떠올리는 중) , 좋아요. 내가 지금 당장 물려줄 재산은 하나 없어도, 내 딸아이 밥 한 끼씩 챙겨 줄 사람들은 좀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도 딸아이의 생존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요. 조만간 약정서를 돌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물론 자식을 두고 먼저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죽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최소한 도시 아파트에서 얼른 벗어나 적당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마당이 있고,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는 오이나 당근 같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며 살 수 있으면 걱정이 좀 덜 되겠네요. 그리고, 고기 말고 그나마 즐겨 먹는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들 몇 가지 요리법을 좀 정리해 놔야겠습니다.

그리고 시행착오투성이여서 실패하느라 정신없던 나의 삶보다는 조금 더 편히 살아가는 노하우를 알려 줘야겠습니다. 이를테면, 최악의 남자를 피하는 법 같은 게 있겠네요. 다음 체크리스트에서 항목을 체크해서 점수를 내 보게 하는 겁니다.

 

1. 남자 친구와 같이 밤길을 걷다가 휘파람을 부는데,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 나온다하며 못하게 한다.

2. 머리를 자르고 만났더니,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하며 아쉬워한다.

3.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하는 게 없다. 질문을 잘 안 한다.

4. 또 한편으로 나에 대해서 너무 다 알려고 한다.

5. ‘사전에 의논하지 않는다. 내 의사를 묻지 않는다.

6. 또 한편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다 내 눈치를 살핀다.

7. 심부름을 하고 왔는데 또 나갔다 오게 할 때, ‘아까 말하지!’ 하며 눈을 부라린다.

8. 어떤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를 물건값으로 말한다.

9. 장난치다 다쳤을 때 갑자기 정색하며 화를 낸다. 특히 나 때문에 다쳤을 때 나를 쩔쩔매게 만든다.

10. 왠지 내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선뜻 만들지 않게 된다.

11. 전 여친을 몹시 안 좋게 말한다.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한다.

12. 엄마, 아빠에게 원한이 깊다. 특히 어린 시절의 상처 이야기를 할 때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13. 화가 났을 때 주먹으로 문짝을 치는 일이 한 번이라도있다.

14. ‘도저히 답톡을 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 체크리스트는 체크할 때마다 1점씩 붙게 되는데, 그러면 점수 구간이 생기겠지요? 딸아이한테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정확하게 이 상황에서 이 말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고 저만 믿고 있)다고요. 이 체크리스트는 무척 견고하고 엄마의 온 생을 통해 검증되고 검증된 항목이라서 단 1점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남자는 무조건 아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으니, 연애는 개떡 같은 남자 찰떡 같은 남자 다 만나 보다가 이 체크리트스에서 1점이라도 나는 순간에 뻥 차 버리면 된다고. 나중에 누구랑 같이 살고 싶어지면 그게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온순하고 착하고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해 주어야겠네요.

(그나저나, 원래 체크리스트에 14개는 어쩐지 좀 어정쩡하니, 나머지 한 개는 여러분이 좀 채워 주시지요.)

그 밖에 일기를 쓸 때는 같은 크기의 일기장에 써 두는 게 좋다거나, 설거지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밥 먹고 난 직후라는 놀라운 사실, 나의 엄마한테서 전수받은 소울푸드, 톳두부무침의 비법 같은 것, 장을 보러 갈 때는 꼭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것, 양치질을 할 때는 위턱의 왼쪽 어금니, 윗니, 위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래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랫니, 아래턱의 왼쪽 어금니로 여섯 개 구역을 나눠서 한 구역씩 클리어하는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면 놓치는 치아 없이 말끔하게 닦을 수 있다든가 하는, 온 생애를 통해 연마해 온 비기 가운데 비기들을 한 번에 하나씩 써서 집 안 구석구석에 숨겨 두어야겠습니다. 찾으면 찾는 대로 참고가 될 테고,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자기 노하우가 생길 테니까 어떻게 되든 괜찮을 거 같네요.

그림_ 최정규


하도 엄마 때문에 불행하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도대체 그 마음이 얼만큼인지 물었습니다. 지금은 한 60퍼센트라고 하네요. 다른 엄마들이 그렇듯, 나도 딸아이가 원하면 그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100퍼센트가 되면 꼭 말해 달라, 그러면 반드시 죽어 주겠다고요.

가장 최근에 죽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딸아이가 기말고사를 망치고 걸어 온 전화 통화에서인데요. “괜찮아, 점수가 뭐가 중요해. 열심히 한 과정이 있으니까 됐지했더니, “과정이 뭐가 중요해, 시험은 다 점수로 말하는데! 내가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데 왜 자꾸 과정이 중요하대? 내 기분을 그렇게 못 맞춰 줘?” 하는 것이 그 사유였습니다.

빵점이면 어떠냐, 공부 같은 거 못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되레 욕을 먹으니, 100점 안 맞았다고 다그치다 욕먹은 엄마들보다 내가 더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딸아이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80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맑았다 개었다 날씨도 덩달아 바뀌는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가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서둘러 이 글을 남겨 봅니다. 자꾸 죽으라고 하니,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자꾸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모은 책은 제목을 죽으란다고 진짜 죽은 중2 엄마 이야기라고 지어 보고 싶습니다.

지난달에,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무척 진중한 목소리로 엄마는, 내가 중2 때 중2병이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랬는데 개뿔. “넌 아직도 중2병 투병 중이거든!” 하는 말을, (차마 그녀석 면전에다가는 입도 뻥긋 못 하고) <작은책> 대나무 숲에다가 목 놓아 외쳐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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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비정한 먹이사슬

이순이/ 벌농사꾼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새벽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하고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집 안이나 그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리고 해지기 전에 또 한바탕 벌통 내검을 한다.

, 벌통은 왜 이리 많고 또 여름 해는 왜 이리 긴 거냐. 온종일 일을 하다가 문득 노예 같다는 생각이 들면 일을 멈추고 집 안으로 들어가 캔 맥주를 마시거나 냉커피를 마시면서 일을 할지 안 할지는 내가 결정한다며 버텨 보기도 한다. 그러나 농사일이나 벌 일은 미룬다고 될 일이 아니기에 다시 작업에 돌입하곤 한다.

며칠 전 새벽일을 하다가 남편이 뭔가를 발로 차서 봉장 밖으로 치우는 것을 보았다. 차는 모습을 보니 꽤나 크고 잘 밀쳐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뭐냐고 물었더니 두꺼비란다. 두꺼비가 벌을 잡아먹기 때문에 이렇게 나타나면 곤란하다고 했다. 그러면 멀리 갖다 버리든지 죽이든지 해야지 거기에 그렇게 두면 또 돌아오지 않겠냐고 툴툴댔다. 양서류나 파충류에는 적응이 안 되어 그 두꺼비를 나는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며칠 지나서, 어둑어둑해질 무렵까지 저녁 작업을 하고 뒷정리를 하다가 투실투실한 두꺼비가 벌통 앞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청개구리를 귀엽게 볼 정도까지는 적응이 되었는데 두꺼비를 보고는 기겁을 했다. 그놈은 너무 크고 징그러웠다. 무엇보다 인기척을 느끼고도 도망가지를 않고 어정어정 벌통에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네가 인기척을 모르는 게냐? 하여간 벌통 앞에 앉아 저 큰 배가 부를 때까지 꿀벌을 한 마리 한 마리 혀로 말아 먹는 생각을 하니 보호본능에 전투력이 상승했다.


그놈을 골프공 날리듯 쳐내겠다는 생각으로 벌통을 눌러놓은 굵은 각목을 집어 들었지만 입은 이미 남편을 부르고 있다. 그놈을 쳐내며 느껴질 물컹함과 무게감에 몸서리를 치며 남편에게 각목을 건넸다. 성질 급한 남편은 내가 건네주는 각목을 본 체도 않고 지나쳐 가며 두꺼비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각목으로 두꺼비가 있는 쪽을 가리키자 근시안인 남편은 그곳을 들여다보느라 허리를 굽히고 고개까지 수그린다. 위험하다. 두꺼비 혀에 독이 있다고 들은 기억에서 두꺼비 혀가 1미터도 넘게 뻗어 나와 남편의 얼굴을 핥는 것까지 상상의 날개가 순식간에 펼쳐지니 소름이 돋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편은 발길질로 두꺼비를 걷어찼다. 그리고 어디로 날아갔는지 두리번거리며 찾는다. 덩치 큰 두꺼비는 축구공처럼 멀리 날아가지 않고 바로 옆에 떨어져 별일 없었다는 듯이 벌통 쪽으로 어정어정 기어가고 있었다. 흥분한 남편은 그제야 내 손에 있는 각목을 낚아채서 게이트볼 치듯 투욱 쳐냈다. 그러나 두꺼비가 꿈쩍도 않자 맘을 고쳐먹고 장타를 날리듯 힘껏 쳐냈다. 그 타격이 빗나갔는지 두꺼비는 굴러가지도 날아가지도 않고 50센티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벌러덩 나자빠져 있었다. 덩치 때문일까. 파리나 모기를 잡아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통에 버리던 것과는 다른 느낌 때문에 우리 부부는 말없이 뒷수습을 했다. , 꿀벌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두꺼비를 죽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미안함과 죄책감을 털어 내기 위해 둘이서 몇 마디 말을 더해야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남편이 말하고, 맞아 맞아, 저 놈이 날마다 와서 먹을 꿀벌을 생각해 봐. 우리도 먹고살자고 그런 거지 재미로 죽인 건 아니니까.그렇게 종알대며 걸어 나오다가 나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돌아섰다. 또 다른 두꺼비가 죽은 놈과 같은 자세로 벌통 앞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이번에야말로 남편은 골프 치듯 두꺼비를 단번에 봉장 바깥쪽으로 쳐냈다. 살생이란 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째는 이미 숙련이 되는가 보다. 마음이 무거워서 소주를 아니 마시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다음 날부터 밤마다 두꺼비 보초를 서러 나갔다. 아랫마을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주변의 풀을 더 베어 내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 그놈을 양파망에 넣어 꽉 묶어 두란다. 그놈이야 말라 죽을 테고 다른 두꺼비들이 오지 않을 거라고. ,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런데 3일이 지나도록 두꺼비가 나타나지 않는다. 적당히 서로 먹고살면서 눈에 안 띄니 다행이라 했더니, 남편이 말한다.

어제 아침에 보니 뱀이 두 마리 있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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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농성하고 애도 키우는 아줌마

 

 

명동역 10번 출구 세종호텔. 이 출근길을 25년째 다닙니다. 대표전화를 받는 전화교환원으로 20,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어텐던트로 5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객실을 정돈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세종대학교 재단에서 113억 회계 비리로 퇴출되었던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 회장에 복귀하면서 복수노조, 전환배치, 구조조정, 해고 등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화 통화량을 조사하는 회사의 행동으로 이미 교환실이 아웃소싱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예감에 2012년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파업과 로비 점거에 참가했습니다만, 내 일자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201412195, 타월을 개고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룸어텐던트로 발령이 났습니다. 호텔에서 장기 근속한 여직원을 청소 노동자로 발령 내는 것은 흔히 쓰는 퇴출 방법입니다.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이 남아 있어 고민도 했지만 사표는 내일 써도 되고 다음달에 써도 되니 함께 싸우자는, 지금은 해고된 세종호텔노조 김상진 전 위원장의 말씀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령이 나고 처음 한 일은 교환실 유니폼을 입은 내 마지막 모습을 셀카로 찍는 일이었습니다. ‘20년을 입어 왔지만 다시는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막상 룸어텐던트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었을 때는 서러워 눈물도 나고 타인이 사용한 변기를 닦으려니 장갑을 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청소 교육은 타월 개는 법부터 시작했고 단 한 번 욕실 청소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에 13, 둘째 날까지 26개의 변기와 욕조, 세면대를 닦았습니다. 청소 교육 이틀 만에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퇴근길에 만난 남편과 순댓국집에서 소주만 퍼붓고 가게가 떠나가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 객실 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흑흑. 울엄마는 이럴 줄 모르고 대학 보내고. 엉엉.”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은행 계좌에 월급이 입금된 걸 보는 순간, 돈이다. 난 돈 벌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혼자라면 오래 버틸 수 없었겠지만, 우리 팀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있어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청소 노하우도 공유하며 중고 신입 막내를 살뜰히 챙겨 주셔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도 힘드신 거 뻔히 아는데, 내게 배정된 층에 오셔서 나 몰래 베드도 갈아 놓고 가시고, 그분들이 내게는 엄마였고 천사였습니다.

초보 룸어텐던트는 객실 타입도 잘 모르고 린넨을 봐도 싱글인지 더블인지 구분을 못해 정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청소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 이전의 명동은 중국인 물결이었는데, 화장품을 사서 알맹이만 슈트 케이스에 담고 제품 케이스로 방마다 두세 곳의 쓰레기 언덕을 만들었고 쓰레기통을 제외한 모든 곳에 쓰레기를 버려 댔습니다. 바닥에 던져진 콘돔을 모르고 집었다가 장갑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얇은 와인 글라스와 8온스 컵을 씻다가 금이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전환배치된 날 어용노조 전화교환 직원도 함께 발령이 났는데 팀장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원인 내게만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경위서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동안 교환실에서 써 본 적 없는 경위서를 룸어텐던트가 된 후에는 매달 썼을 정도였습니다. 전 직원 성과연봉제가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 3명의 직권 조인으로 통과된 후 룸어텐던트 파트는 전에 없던 인스펙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펙터는 룸어텐던트가 청소한 객실을 점검하는 사람인데 원래 인스펙터 업무는 룸어텐던트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채워 주고 보완하는 일이지만 세종호텔 인스펙터의 업무는 사진과 채점입니다. 청소한 객실에서 흠을 찾아 증거로 사진을 찍어 팀장에게 매일 전송하고 객실 청소 상태를 등급으로 매겼고 팀장은 사진과 등급으로 성과연봉제 임금 삭감의 사유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생각했지만 인스펙터에게 지적당하거나 사진을 찍히고 나면 더 치밀하고 꼼꼼히 일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병들어 갔습니다. 테니스엘보와 손목터널증후군은 룸어텐던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명이고, 내 경우엔 디스크가 약해 2017년에는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허리디스크도 함께 왔으며 어깨회전근 미세 파열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채점된 성과연봉제 첫해 저의 임금은 9퍼센트 삭감. 오랫동안 임금이 동결되었기에 9퍼센트 삭감된 후 월급은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삭감 사유는 딥클리닝 개수 부족. 딥클리닝이란 욕실 천장 곰팡이부터 타일 줄눈까지 락스 작업을 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천장 먼지를 제거하고, 침대를 들거나 밀어 침대 아래 먼지도 제거하고, TV장과 걸레받이를 청소하는 일 등입니다. 타 호텔에서는 딥클리닝 전문 직원을 둔다는데 세종호텔에서는 룸어텐던트에게 시켰습니다.

그 딥클리닝을 하루에 한 방씩 점검받아야 하는데 내 경우는 대학 입학시험문제 출제 교수가 체크인 한 적이 4번이나 있었습니다. 대입 출제 교수가 묵는 방은 가벽을 만들어 직원조차 못 들어가는 출입금지 구역이 됩니다. 딥클리닝 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회사는 그걸 임금 삭감 사유라고 내밀었습니다.

반면 어용노조 조합원 중에는 단 한 명이 3퍼센트 삭감되고 나머지는 전원 동결되어 세종호텔 노동조합과 형평성도 없고 차이가 심하게 났습니다. 타 회사의 성과연봉제는 인상되는 연봉제지만 세종호텔의 성과연봉제는, 사원은 최대 10퍼센트까지 계장 이상은 30퍼센트까지 삭감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그 기준으로 세종노조 계장님 몇 분은 2년 연속 삭감당해 월급이 반토막 난 분도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사해 나가고 팀장들의 회유와 협박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빠져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이제 15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오전, 오후 선전전과 매주 목요일의 집회로 9년째 투쟁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회사의 부당함을 당당히 말하는 힘이 세종노조의 저력입니다. 그 힘으로 특별감독관이 나오기도 하고 작년에는 잠시나마 교섭이 이뤄지기도 해 일부 조합원이 전환배치에서 복직하는 성과도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적폐 임종헌과 사돈이며 친이명박 적폐 판사 박성준이 사위고, 전 외교부 장관 유명환을 재단 이사장에 세워 놓은 주명건 회장의 힘은 영원할 듯했습니다. 그러나 임종헌이 구속된 이후 교육부의 세종대 감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호텔 정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김상진 전 위원장의 해고자 복직과 나의 전환배치에 대한 원직 복직과 성과연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도 힘들고 농성도 힘들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뷔페 설거지와 고기 굽기도 했고, 전화교환이든 룸어텐던트든 내 일, 나 자신의 일이기에 나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종호텔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나 노조와 함께 회사에 할 말 하며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세종호텔과 서비스연맹 노동자들이 지난 5월 세종호텔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세종호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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