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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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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작은책>/작은책이 만난 사람'에 해당되는 글 1

  1. 2019.06.26 문화노동자 연영석

<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 - 연영석

 


문화노동자 연영석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문화노동자 연영석. 작은책(안건모)


 

50시간 60시간 70시간 80시간 뺑이 쳤지

때로는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하자기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몸 버리고 속 버리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 필요없다 이제 와서 나가라니 웬 말이냐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

박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당할 줄 아나

-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중에서

 

연영석. 이 사회의 아픈 현실을 드러내고 가진 자들에게 빅엿을 날리는 가사로 청중을 속 시원하게 만드는 인디가수다. 연영석의 아내 지민주도 집회 현장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유명한 노동가수다. 그이들의 삶이 궁금해 <작은책>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본래 두 사람의 삶을 다 다루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지면이 짧아 이번엔 주로 연영석의 삶을 다뤘다. 지민주가 가끔 동조하거나 초를 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여느 부부나 마찬가지였다.

연영석은 <작은책> 사무실에 있는 기타를 보고는 기타 치면서 할까요?” 하며 집어 들었다. 지민주는 인터뷰하러 온 사람이 뭔 기타야?” 했지만 연영석은 기타가 눈에 보이면 치고 싶은 법이라며 코드를 잡고 줄을 튕겼다.

<작은책>엔 나와 유이분 편집장과 정인열 기자가 있었다. 인터뷰는 나 혼자 했지만 각자 책상 앞에서 두 사람이 떠는 수다를 들었다. 인터뷰 내내 즐겁고 웃겼다. 두 사람은 만담을 하듯이 싸우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풀었다.

기타는 언제부터 배웠어요?”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기타를 가지고 놀다가 곡을 쓰다가 공연도 다니면서 조금씩 늘게된 거죠. 작곡을 하다가 다루는 악기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후배에게 배웠죠.”

연영석은 노래를 작곡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나라 말도 고저가 있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이렇게 가사를 써 놓고 약간 송창식 스타일로 부르면서 기타 치는 사람한테 물어봤죠. ‘아침에할 때 가 무슨 음인지. 그때는 기타를 못 칠 때였으니까. 그러면 기타 치는 사람이 내 손가락을 잡아서 ‘Am(에이 마이너)’를 알려 주고 여기에 형이 생각하는 음이 있어?’ 하면 ~ 아침에쳐 보면서 , 있어.’ 하고, 그 다음 가 음이 좀 다른데, ‘. 그럼 C() 코드로 가요.’ 아침에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이런 식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붙이면 돼요.”

문화노동자 연영석은 그렇게 작곡을 하면서 기타를 배웠단다. 사실 쉬운 거 같아도 아무나 그렇게 작곡하고 기타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 예술가 끼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하다. 연영석은 조각 미술을 하다가 음반을 냈고, 노래 으로 2006년에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태준식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필승 ver2.0 연영석>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제3회 구본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문당리 789

연영석 노래 중에 문당리 789’라는 노래가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문당리 789번지. 연영석이 태어난 고향 집 주소다. 연영석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야반도주하셨대요. 아버지가 장남인데, 결혼했는데도 할아버지가 모든 경제권을 갖고 계시니까. 아버지는 농촌에서 밭일 해 봐야 우리 학교도 못 보내겠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농촌에 계실 스타일이 아니야. 그때 사진 보면 가다마이라고 양복 쫙 빼 입고 구두 신고. 결국 송아지 팔아서 그 돈으로 몰래 야반도주하셨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쌀도 안 보내 주셨어요. 장남이 도망갔다고. 하하하!”

그렇게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연영석은 알 수가 없다. 연영석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신림동에서 세탁소를 했다. 신림동이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연영석은 그곳에서 놀던 기억보다 방학 때만 되면 태어난 괴산 문당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 놀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충북 괴산군 문당리 고향에서 육촌 동생들과 놀던 연영석 씨.(맨 오른쪽) 사진 제공_ 연영석


추울 때 썰매 타다가 나이롱 양말 태워 먹고, 하하하. 불 쬐다 보면 타잖아요. 저녁 때면 할머니가 영석아 밥 먹어라!’ 부르는데 노느라 신나서 안 가고 나중에 할머니가 화를 내야. 지금은 합쳐야 열 집 안 되는데 당시에는 70집이 있었어요. 집으로 들어갈 때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던 풍경이.”

서울에서 살았던 어릴 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쌀 심부름을 하던 기억, 어머니가 혼자서 국수를 먹던 장면이 떠오른다.

쌀을 사서 편지 봉투에 담아 온 기억이 나요. 서너 컵 될까? 그걸로 밥을 하면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 셋에 세탁 기술자까지. 아버지가 세탁 기술이 없어서 한 명 붙이셨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드실 게 없었나 봐요. 방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노란 냄비에 얇은 국수, 그걸 꼭 삶아 드셔요. 엄마 혼자 그냥 간장에다가. 저는 그걸 몇 젓가락 뺏어 먹었어요. 저도 면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커서 생각하니까, 적은 쌀로 밥을 해서 다 주고 나면 먹을 게 없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게 맺힌 거지. 할아버지가 쌀 안 주신 게.”

어머니가 시집을 잘못 가신 거야.” 지민주가 끼어든다.

연영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중학교 1학년 때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정확히 몰라요. 병원 의사 말로는 열이 많이 나서 그렇거나 다쳐서라는데 부모님이 모르고 지나가셨을지도 모르죠. 너무 늦어서 가망이 없는데 어머니가 하자고 하셔서 수술을 했어요. 휴학계 내라고 했는데 제가 안 낸다고 했죠. 4교시 하고 조퇴하고 치료받았어요. 꽤 길게.”

결국 그는 한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연영석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합창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을 받아도 미술과 음악은 를 받았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시골집에서 할아버지가 피우고 남은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려서 그림 그린 거 보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초, , 고등학교 때 내가 그린 노동자들 그림이 있더라고. 내가 왜 노동자들을 그렸지? 알고 보니 작은아버지 영향이었어요. 작은아버지가 일하는 걸 몇 번 봤어요. 포항제철 가족을 초빙해서 보여 줬는데 제가 그게 인상이 깊었나 봐요.”

연영석 씨는 10대 때, 모던 토킹(Modern Talking)과 스모키(Smokie) 등 유로댄스(Eurodance)류의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리봉동과 난곡동 등지의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운동하고 사람 됐죠 하고 말할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연영석 씨의 그 시절 꿈은 코미디언이었다.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뒤늦게 미술학원을 다니며 재수하던 시절 KBS 코미디언 공채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다. 대본을 외워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심사위원들 앞에 서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나와 버렸단다.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연 씨는 당시 신촌 크리스탈백화점 위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1990, 친구였던 조각가 고 구본주 씨의 작업을 도와주다가 찍은 사진. 사진 제공_연영석


연영석은 세 번 연거푸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4끝에 홍대 미대 조소과에 들어간다. 미대 재학 중 조각가 고 구본주 씨를 만나 친구가 됐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재학 중에 친구들과 학생미술인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졸업할 무렵엔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문화예술생산연합(생연)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이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면 작가를 할 텐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작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가들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게 진보 미술동인 현실감각이었죠. 그리고 졸업한 사람들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영상 하는 친구들이 모여 생연을 만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민예총에 견줄(?) 만한 젊은 문화예술인 단체를 만들 꿈을 꿨다.

 

가수가 된 사연

연영석은 생연 대표로 활동하면서 현장을 중심으로 전시 활동과 무대미술 제작 등 대중적인 미술운동을 펼쳐 나간다. 알바해서 번 돈을 생연에 다 투자했고, 가끔 하기 싫은 인테리어 일도 해서 보탰다. 그러나 결국 2년 만에 단체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해서 떠나더라고요. 그때는 잘 이해 못했어요. 막바지에 단체를 해산하고, 거기에 혼자 있다 보니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많이. 그전에는 고민하지 않았던 개인적인 고민들이. 뭘 해서 먹고살아야지? 다 내 탓처럼 느껴지고. 처음에는 그 친구들, 같이했던 동료들에 대한 원망, 실망이 크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자책이 되더라고.”

연영석은 절망감이 몰려와 한참 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때 제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게 기타였어요. ‘구르는 돌이라는 노래를 그때 만들었어요. 민중가요나 노동가요라고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하는 말, 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어요. 그런 식으로 몇 곡 만들었죠.”

 

구르는 돌

세상 모든 굴레를 딛고 구르자

더러운 것들 밟고 구르자

자유로운 세상 워 전혀 다른 세상에

우리 모두 함께 가보자 - ‘구르는 돌

 

그 다음 작사 작곡한 노래가 라면’, ‘칼국수와 박카스였다. ‘라면은 후배 연습실에 얹혀 살 때 냉장고는 비어 있고 먹을 건 라면뿐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당시 삼척에서 사살당한 무장 공비의 가방에서 나온 라면 봉지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다.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테레비젼을 틀어 보면 공비를 찾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냄비 위에 물을 넣고

라면을 쪼개 쪼개 넣고 젖가락을 빨아 댄다

살기 위해 먹는 건가 먹기 위해 사는 건가 라면

 

연영석은 몇 곡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음반을 내겠다며 큰소리쳤다. 친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때였죠. 여섯 곡 정도 만들었어요. 그걸로 그냥 음반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낼 때 생각은, 미술운동 할 때는 전시회 한 번 하려면 2.5톤 트럭에 싣고, 스티로폼 노동자 만들고, 크게 만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화물차로 몇 번 실어 날라야 전시회 할 수 있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조직이 안 되어 있으면 불가능한 거고. 그런데 기타는 들고 다닐 수 있고, 운동은 하고 싶고. 어디 취직할까 하다가, 먹고살 만큼 하면 운동이 다시 가능할까? 내가 변하지 않을까? 기타 들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현장 가면 밥은 주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음반을 냈어요.”

1996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회원이던 밴드 천지인의 콘서트에 오기로 했던 윤도현이 수해를 당해 오지 못하게 되자, ‘땜빵으로 무대에 올라 라면구르는 돌을 불렀다. 그것이 그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연영석의 노래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 등에서는 낯선 노래로 인식됐다. 흥얼흥얼거리는 창법에 멜로디도 노동가요 같지도 않고 내용도 투쟁이 아니라 그냥 삶을 표현한 내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음반을 냈는데 반응이 없었죠. 제가 그때 홍보를 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지민주가 에휴!” 하고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처음 전해투에서 섭외 온 거야. 그때 서울역에서 주로 집회를 했어요.”

전해투전국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의 준말이다. 아이엠에프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를 당해 투쟁하고 있었다. 노동가수 박준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때 준이 형 머리 짧게 깎고 수염 기르고. 거기서 처음 만났죠. 그 무렵 서울역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했어요. 주된 관객분들이 노숙인들이었지요. 실업극복국민재단인가 거기랑 같이. 매주 목요일 거리 공연, 꾸준히 했어요. 그러다 장투사업장(장기투쟁사업장)에서 (섭외하는) 전화가 오고 구로동, 하이텍, 이런 데 다니고. 보통 대공장, 큰 사업장은 섭외가 잘 안 왔어요.”

연영석 씨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를 하는 집회보다는 비정규직, 장애인, 이주노동자 같은 소수자들 집회에 더 많이 결합했다.

 

연영석과 지민주의 만남

원래 알던 후배였는데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후배였죠.”

어떻게 만났나 하는 질문에 연영석이 대답한다. 지민주도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

첫 만남이 안 좋았죠. 하하하.”

사연은 이렇다. 2000년 무렵 전국의 노동문화 일꾼들이 자본 문화에 대항하는 노동문화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들려고 했다. 연영석은 선배들과 함께 전국의 문화단체를 만나러 돌아다니면서 간담회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관심 있는 단체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 회의를 했다.

그때 지민주가 선배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런데 내 생각에는 여기 선배들이 그걸 모를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민주가 자세히 설명한다.

저는 대구에서 좋은친구들이라는 노래패 활동을 했어요. 당시 스물일곱 살? 우리 단체가 되게 가난했어요. 라면도 못 먹고 공연 가고, 공연비도 못 받고 활동했어요. 제가 비정규직으로 학교 방과후 교사로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 활동비로 썼어요. 내 친구가 대표였는데, 서울에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드는 데 각 조직당 1백만 원을 내기로 결의를 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애들(회원들) 밥도 못 먹는데 백만 원을? 바로 완납해야 하는 건데 나는 못 낸다, 그래서 간담회 때 저희 7명이 서울을 올라왔어요. 단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돈, 예산안을 봤어요. 그게 몇 억대더라고. 그리고 필요한 사무기기, 뭐 컴퓨터도 사야 하고. 아니 그게 필요하면 쓰던 거 쓰면 되지, 이걸 발기인들의 돈으로 하겠다니. 그래서 빡쳐서 선배들한테 쐈어요. 쐈는데, 저 대각선 끝에 연영석 씨가 앉아 있었어요. 선배들이 다 당황해서 달래는 분위기였는데 연영석 씨가 삐딱하게 앉아서 막 ! 그게 아니고소리치는 거야. ‘아 쟤는 뭐야?’ 첫인상이 안 좋았지.”

지금도 안 좋아요. 하하하.” 연영석이 복수한다.

그렇게 감정이 좋지 않게 시작했던 두 사람은 서서히 친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지민주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석이 형이랑은 연애도 그렇게 오래 안 했지? 명동 거리 공연.”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애. 자꾸 찾아온 거 보면.” 연영석이 약을 올린다.

내가 언제 자꾸 찾아가?” 지민주가 버럭 한다.

자꾸 명동에 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노란 옷 좋아한다니까 자꾸 노란 거 입고 오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명동 거리 공연은 민중가수 박준이 주도해 2002년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에 하는 공연이다. 본래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거리 모금 공연이었는데, 2001년에 부평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계기로 2002년부터 산재, 해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자녀들의 장학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으로 바뀌게 됐다. 박준, 권영주, 김대원, 김종환, 다름아름, 연영석, 이씬, 처절한기타맨 등 많은 문화 활동가들이 이 공연에 참여했다. 연영석은 박준 선배의 주선으로 2001년부터 공연을 했다.

그 무렵 지민주는 대구에서 노래패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다.

“‘좋은친구들을 정리하고 2003년에 서울로 오게 됐잖아요. 서울에 올라오니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잖아요. 갈 데도 없고 어떡하지? 이러다가 옛날부터 박준 선배를, 친하진 않지만 아니까, 명동에 선배들도 있으니까 노래도 하고 교류를 하자, 하고 갔더니 연영석 씨, 준이 형, 기상이 형, 미진이도 가끔 나오고, 그때는 가수들이 되게 많이 나왔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래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랬어요. 명동에 나가다 보니 친해진 거죠.”

언제부터 나한테 반했냐고 물어보는 거야.” 연영석이 집요하게 묻는다.

지민주가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영석이 형이 인천에 자주 오더라고요.” 하고 대답한다. 지민주는 인천에 방을 얻어 매니저인 박효선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연영석이 다시 농담을 던진다. 제가 인천에 가면 이상하게 버스가 끊어지더라고.”

지민주가 반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잤어. 그때 매니저 효선이랑 같이 있을 때니까. 버스 떨어지면 효선이랑 나랑 자고. 언젠가 형이 사는 데를 가 봤는데 어우,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돼. 주차장을 개조해서 밑에서는 정화조 냄새 올라오고. 그런 데서 사는 거야.”

연영석이 보충 설명을 한다. 홍대입구 쪽 카센터 옆에, 무슨 조형연구소라는 데.”

진짜 불쌍한 거야. 측은지심. 거기 화장실도 없거든. 화장실 가려면 홍대입구역까지 뛰어가야 하는 거예요. 효선이랑 나랑 너무 안됐다 하면서, 영석이 형 인천 오게 되면 옆방에서 재워도 되겠다,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그렇게 된 거지.”

연영석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첫 인상이 좋지 않은 때가 있었는데, 보면 에너지가 많아요, 당차고. 그런 면이 좋아 보였어요. 명동 와서 친해졌고. 그전에는 그냥 후배, 활동하는 후배. 명동 와서 노래하고 친해지고 하다 보니까. 무대에 올라가면 센 척하는데 귀엽더라고요.”

내가 좀 귀여운 데가 있어요.” 지민주 말에 작은책 일꾼들까지 모두들 웃음이 터진다.

 

4집 앨범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

연영석은 1999년에 1<돼지 다이어트>, 2001년에 2<공장>, 2005년에 <>, 이렇게 모두 세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돼지 다이어트>에 들어 있는 곡은 모두 여섯 곡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연영석은 그 앨범을 미니 앨범이라고 한다. 그다음 2집 앨범 <공장>은 라인이 있는 공장과 부가 세습되는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노래다.

1<돼지 다이어트>(1999) 앨범 표지.

2<공장>(2001) 앨범 표지.

3<>(2005) 앨범 표지.


우리 사회가 거대한 공장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태어나는 게 그냥 재수잖아요. 어쩌다 보니 재벌 집에서 태어난 거고, 어쩌다 보니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난 거고. 그래도 우리 사회가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공부하면 신분 상승 하니까 공부, 공부 한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거야. 신자유주의가 그만큼 공고화되면서 지금은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사회. 거기에 딱 맞춰서 너희는 노동자군, 너는 재벌군 등. 그런 생각에 <공장>이란 제목을 붙인 거예요.”

이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 중 간절히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가 주목을 끌었다. ‘간절히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받는 세상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하는 정말 간절한 노래인데 리듬은 경쾌하다.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실컷 부려먹고 돈 떼먹고 도망가는 자본가들을 비꼬는 노래다. 이 노래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에서 불러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데 한 몫 했다. 여기서 이 씨는 물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을 가리키는 가사였는데 나중에 이 씨라는 가사를 박 씨라고 바꿔 부르기도 했다. ‘박 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 또는 콜트콜텍 사장인 박영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마음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 사회에 균열을 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은 거예요. 어느 순간 투쟁사업장들이 15, 20년 싸워도 승리했다는 소식 듣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숨 쉬고 사는 게 힘든 거예요. 정말 질식해서 죽겠구나. 그래서 3집은 <>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2005년에.”

노래 은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받은 노래다. 하지만 상금은 없었다. 2017년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신의 놀이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수상한 이랑이 지난달 총수입이 42만 원, 2월이 96만 원이다. 상을 받지만 상금이 없더라. 혹시 이 메탈릭 디자인의 소품을 구입하실 분 있느냐며 즉석 경매에 부친 상패가 50만 원에 낙찰되는 씁쓸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국에서 문화로 먹고살기란 얼마나 척박한 실정인지 보여 주는 사례다.

그래도 문화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버릴 수 없다. 뭔가 생산해 내고 싶어 한다. 연영석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연영석은 늘 4집 낼 거다’, ‘내년쯤에 낼 거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번에는 계획을 단단히 세우고 작업 중이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노래가 담겨 있을까. 결혼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을 텐데.

지금은 좀 다르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14년 세월도 지나고, 예전만큼 운동 열정도 떨어지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욕을 먹더라도. 지금은 내가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내 삶을 가능한 한 스스로 존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존중하고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예전보다 물음표가 더 생긴 거죠. 음반에 제목을 굳이 넣을까? 넣는다면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하려고 했어요. 가끔 내 삶이 서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꿈 같아요. 그러면서 웃겨. 사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런 느낌을 담은 노래예요. 그걸 내 식대로. 가사가 비틀비틀거리다가 펄썩 주저앉았지. 아기가 울어서 깼더니 꿈 같고. 배고파서 밥 먹고 물 한잔 마시니 어, 웃기네.’ 그런 거예요."

지난 64일 작은책을 방문한 지민주 씨와 연영석 씨. 인터뷰 도중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힘내라 마음아>

지민주도 연영석과 비슷한 시기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6년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해 2003년에 1, 2006년에 2집을 냈고, 2010년에 연영석과 결혼한 뒤 2016년에 3<힘내라 마음아>를 냈다.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활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계를 굉장히 많이 느꼈죠.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할 수는 있지만, 저도 마흔에 결혼했는데 이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데 그걸 또 다른 관계로 부숴야 한다는 게. 사실 좋았던 건 아이 낳고, 시각이 넓어지는 거야. 그래서 노래에 변화들이 많아요. ‘지민주 동지 노래가 예전에는 되게 쎘는데 지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위로가 된다.’ 그런 말 들으면 울컥해요. 예전에는 힘이 됐다는 말 들었지만 위로가 됐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요. 예전에는 무기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위로를 받는. 그래서 3집에 말랑말랑한 곡들이 많아요. 좋은 쪽으로 변한 건 그거죠.”

지민주와 연영석은 서로 힘이 돼 주는 동지이자 부부다. 하지만 가끔 생활비 때문에 다툰다. 서로 씀씀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저는 돈이 남더라고요, 제가 관리하면. 그런데 민주는 항상 돈이 부족하대요. 다른 엄마들이 전부 다 그 돈으로 어떻게 생활하냬요. 사실 저는 예전에 혼자 살 때 한 달 15만 원으로. 저는 외식도 안 해요. 우리 부모님이 너무 검소하게 사시는 분들이라 쓰실 줄을 몰라요. 그것도 훈련인 거 같아.”

지민주는 반박한다. 남자들이 모르는, 돈이 들어갈 데가 많다.

한 달에 훨씬 많은 돈을 써요. 적금도 들고 아이한테 들어가는 거 등. 영석이 형이 생활비를 적게 내서 불만이 아니라 잘 모르는 거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그런데 그걸 자꾸 얘기하면 자존심도 상해하고. 얘기해서 풀리면 얘기하면 되는데 더 상처받고 안 좋아지는 거지.”

연영석의 칭찬 모드가 발동한다.

민주가 배려 많이 해 주는 편이고요. 생활비 관리하니까 공과금 등 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간다는 걸 알아요. 노력은 해요, 저도. 하지만 제가 살아온 나름의 철학, 비록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가는 사회가 이러해서 어쩔 수 없다지만, 내 철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저는 최대한 비우고 없애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하지만 정도가 다른 거지. 예전에 영석이 형이 나보고 인터넷 쇼핑중독자라고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아주 평범한 정도지만.”

지민주가 폭로하고 있다. 이래서 대질 심문이 중요한가 보다.

저는 옷을 사지 않아요.” 연영석이 말한다.

지민주는 연영석이 돈을 안 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를 낳고 기저귀, 우유, 이런 거 있어야 하니까. 공연도 다녀야 하고. 영석이 형이 다정하게 마트 가는 것도 싫어하고. 그런 부분에서 난 정말 평범한 부부들이 부러운 거야. 평범한 신랑들처럼 식당 섭외해서 아내랑 아이와 저녁 한 번 먹은 적도 없고. 형 들어올 때 아이 과자 같은 것도 한 번도 안 사 와서 돌멩이라도 갖고 들어오라고 했어. 하하.”

연영석이 아이와 같이 가다 생겼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합정역 살 때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키다리빵집이라고 있거든요. 아이가 처음으로 나한테 말을 한 거야. ‘아빠 빵 사 줘.’ 감정이 묘한 거야.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아빠 돈 없어.’ 하하하!” 작은책 일꾼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지민주가 그거 보라는 듯 내가 뭐 말하는지 알겠지?” 한다. 연영석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나의 마인드였다는 거야. 저는 산을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요. 고사리 같은 손 잡고 망원시장 지나서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망원시장부터 애가 힘들어해요. 껌 하나 사서 반 잘라! 아빠 반, 너 반.’ 나는 요즘 애들이 너무 풍족한 게 걱정인 거야. 그런데 이젠 나도 많이 놓았어.”

영석이 형이 너무 안 하니까 내가 채워 주기 시작한 거예요. 딴 애들은 아빠 엄마랑 놀이공원 가끔 가잖아. 아이가 이번에 처음 롯데월드 갔어요. 워터파크도 작년에 처음 갔고. 그래서 난 약간 불만이 평범한 행복, 저녁이 있는 삶, 저녁에 식구들하고 밥 먹으러 갈까 술 먹으러 갈까, 말만 해 놓고. 나는 그렇게 못하고 아이와 내가 어딜 검색해서 가고. 요즘 영석이 형이 집에서 일을 하니까, 집에 있으면 아이가 아빠한테 가서 놀아 달라고 하니까 데리고 나오는 게 편하잖아. 근데 집에 들어와서 애 씻기려고 하면 나도 힘든 거지.”

나는 (아이가) 혼자 할 줄 알아라, 하고 안 하는 거지.”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명절에 누구 집을 먼저 가는가 하는 문제도 서로 부딪친다. 이 문제는 어느 집에서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방법은 많아요. 이게 가부장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부모님한테 잘할 수 있으면 잘하고, 아니면 냉정하게 당신이 버는 만큼 서로 자기 집에 알아서 해라, 했잖아. 그런데 남자로서 느끼는 압박감이 있어요. 장모님은 나한테 인사가 연 서방 이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대화 내용의 핵심이야. 그리고 처갓집 가서 밥 먹으면 내가 사야잖아. 대구 사람들 내가 쏠게요, 그런 문화를 좋아한다며?”

그건 누구나 다 그래!”

아냐, 우리 집은 안 그래. 문화가 다른 거야.” 연영석이 말을 잇는다. “내가 망원시장 장 보러 가면서, 장모님에게 닭도리탕이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난 내 손으로 해 주는 게 최선이야. 어머니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제가 장 보러 가는데, 그러면 장모님이 됐네. 그런 걸 뭘.’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엄마는 계속 밥을 해 먹잖아요. 집에서 뭘 해 먹는 게 싫은 거야.”

문화가 다른 거야.”

도무지 대화 접점을 찾지 못한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다. 결론을 맺으려고 내가 다시 이번에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해 물었다. 연영석이 대답한다.

새로 나올 4집 앨범 표지 사진. 사진_ 전수현

제가 14년 만에 작업하게 된 이유가 단지 결혼, 애 낳고서만은 아닌 거 같아요. 음악이라는 것도 내가 뭔가 작업을 하려고 할 때 그 여건이 갖춰져 있으면 구현해 내는데, 걸리는 게 너무 많은 거야. 거기서 지치는 거죠. 그러다 한 해, 두 해, 14년 걸린 건데. 더는 안 되겠다,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져서. 더는 이렇게 있다가는.”

음반을 낸다는 것과 자존감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음반을 낸다는 것은 내 음악을 세상에 발표하는 거잖아요. 어떤 노래는 10, 15년 전에 만든 노래도 있어요. 그 노래는 나만 아는 거예요. 내가 정식으로 발표를 한 게 아니잖아요. 음반은 하나의 과정인 거죠. 그런데 자꾸 핑계 대는 것 같고. ‘내년쯤에 낼 거예요.’ 계속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예요.”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에 있는 톤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을 하고 있는 연영석 씨. 작은책(안건모)


지민주는 연영석과 다르다.

저는 현장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언제든지 제 노래가 아닌 노래도 현장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부르는 그런 스타일.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고, 또 팀을 만들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있거든요. 콘서트도 하고 나름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요. 잘하지는 못하지만요. 영석이 형은 저랑 다른 거 같아요. 결론은 영석이 형이 뮤지션은 맞아요. 음악을 해야 하고, 음악 할 때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이에요. 제가 조금 미안한 게, 형이 그동안 음반 못 냈던 게 나랑 연애하고 애 낳고 딱 그 시기더라고. 그때 음반이 나왔어야 하는데. 같은 동료, 음악하는 사람으로 봤을 때는 가장 치고 올라가는 시기에 작품들이 못 나왔다는 게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둘 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지민주는 노동가수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연영석은 문화노동자로 불리기를 원한다. 노동가수와 문화노동자는 비슷하지만 전혀 달랐다. 노동가수 지민주는 계속 현장에서 노래를 할 거라는 데 변함이 없다. 문화노동자 연영석도 늘 현장에서 노래를 하겠지만 마음가짐은 조금 달랐다.

저는 운동하면서 작업에 대한 욕망을 조금씩 억누르고 살았어요. 작가는 명확한 기준을 잡고 밀고 나가야 된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저에게는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뭔가 만들고, 표현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인 거예요. 공연 다닐 때, 예를 들면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려고 가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래서 준비해서 가요. 그런데 현장 가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에요. 모두들 검은 얼굴로 뜨거운 햇볕 아래 앉아 있는데 차마 준비한 노래를 부를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물론 강요된 건 아니에요. 저의 판단과 선택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저는 운동에 복무한다는 합리화된 자기 검열을 한다니까요. 결론은 제 욕망도 살리고 사회적 가치를 살리는 길을 찾고 싶어요. 결국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 가야 하겠죠. 저는 운동도 자기 성장과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거 희생이지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용기도 없었고 실천도 잘 못한 것 같아요.”

지민주가 격하게 맞장구친다. 그래, 살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

운동을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 학대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희생을 할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영석이 힘주어 말한다.

유이분 편집장이 물었다. 그래도 민주 씨는 행복하잖아요.”

나요? 나는 행복해요. 사람들 만나고 공연하는 거 좋아하고 행복해요.”

연영석이 강조한다. 그게 중요해요. 저는 공연 섭외가 오면 두려워요. 제일 무서운 말이 뭐냐면 분위기 띄워 주세요하는 거예요.”

연영석 노래는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노래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양한 예술가가 필요한 것이다. 분위기를 띄워 주는 건 노동가수 지민주 몫이고, 노동자의 삶과, 사회 현실을 시처럼 들려주는 음악을 음미하게 해 주는 건 문화노동자 연영석 몫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다 노래로 약자들이 포기하지 않게 힘을 주거나, 메마른 감성을 적셔 주거나 하는 예술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생활 걱정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지민주는 오늘도 공연하러 마로니에공원을 가고, 연영석은 음반 작업을 하러 작업실로 간다.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현장에 있을 것이다. (연영석은 다음 날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에 와서 콜텍 노동자들 강연에 찬조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문당리 789’, ‘윤식이 나간다’, ‘인터뷰세 곡을 불렀다. 모두 우리와 같은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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