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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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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작은책>/책이 이끄는 여행'에 해당되는 글 3

  1. 2020.09.28 평등 세상을 꿈꾸며 걷는 단양팔경1
  2. 2020.03.26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3. 2019.02.19 국회 앞 작은 집

<작은책> 202010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평등 세상을 꿈꾸며 걷는 단양팔경


_ 김용심, 사진_ 정인열

 

▲ 단양 남한강 잔도길. ⓒ작은책(정인열)


우리가 옳다!(이용덕, 숨쉬는책공장, 2020)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7개월간의 투쟁을 기록한 책이다. 직접고용 판결을 묵살한 채 노동자를 비정규직 자회사로 내모는 거대 공기업 한국도로공사의 횡포에 맞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처절하게 투쟁한다. 그 뜨거운 기록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아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고 일어서려는 강렬한 의지와 희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우리가 옳다!(이용덕 지음, 숨쉬는책공장 펴냄, 2020)


책과 함께 충청도 단양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함께한 <작은책일꾼 정인열 씨의 차는 하이패스 차량인지라 톨게이트를 거침없이 휭휭 지나간다. 그래서 여행길에 가끔 마주치곤 했던, 피곤하지만 선량해 보였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

도로공사 관리자가 저보고 선생님, 잠깐 자리에 앉으세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댁의 선생님입니까.’ 반박했습니다. 제가 장애인으로 2002년 입사했습니다. 그동안 언제 그렇게 대우해 줬다고 선생님, 선생님 합니까. 저는 나이가 많고 직접고용이 된다 해도 얼마 다니지 못합니다. 후배들을 위해, 비정규직을 줄이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장애인, 비정규직, 고연령, 여성···. 세상의 모든 약한 고리를 다 모은 듯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런데도 자신들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보다는 더 많은 비정규직, 더 많은 약자들을 위해 싸웠다. 그래야 더는 자신처럼 끔찍한 고용불안과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 그래야 좀 더 사람답게살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이제는 나로 한번 살아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도, 흩어지지도 않는다. 언제나 곧게 제 길을 간다. 마치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성스러운 어머니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본래 이름: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처럼.

단양에 도착해 양방산 꼭대기에 올랐다. 비록 초모랑마처럼 드높은 산은 아니지만 양방산은 그 우뚝한 정상에 서면 단양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오밀조밀 세워진 도시를 시원하게 휘감아 내려가는 남한강 모습에 속이 탁 트인다.

▲ 양방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단양 시내 전경. ⓒ작은책(정인열)

이때 보이는 단양은 신단양이다. 1985년 충주댐의 건설로 댐의 상류에 있던 옛 단양은 거의 물에 잠겼고 주민들은 새로 구획된 신단양으로 이주했다. 개발 논리에 밀려 졸지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은 고향이 그리울 때면 강둑에 내려가 하염없이 물속을 바라본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그 깊은 물속에서 언뜻 자신이 살던 집의 지붕이 보인다던가.

단성면 벽화마을은 그렇게 수몰된 구단양의 모습이 벽화로나마 남아 있는 곳이다. 붉은 꽃과 푸른 덩굴 사이로 간간이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 벽화마을 입구. 알록달록한 그림들 사이로 왼쪽에 있는 적성비가 눈에 띈다. ⓒ작은책(정인열)


벽화마을에서 조금 올라간 언덕에는 단양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문은 닫혀 있었지만 주위의 수려한 경치에 취해 잠시 기념관 앞뜰을 거닐어 본다.

뜰에는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석탑과 비석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우화교 돌다리 설명이 눈에 띈다. 마을에 꼭 필요한 다리라 모두가 호응하여 젊은이는 힘을 보태고 나이 든 사람은 곡식을 내어 돌다리를 놓았다는 사연. 그렇지. 꼭 필요한 일이라면 다 같이 호응하여 힘도 보태고 곡식도 내어 모두 함께 살길을 도모해야지. 그렇게 연대는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변화도 시작된다.

▲ 우화교 돌다리 기념비.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단양수몰이주기념관으로 옮겨 왔다. ⓒ작은책(정인열)

돈으로, 힘으로 억압하는데 우리는 연대의 힘으로 싸워야 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싸우는 동료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직도 저들은 우리가 자기들 시다바리인 줄 압니다.”

공부 잘하고 시험 잘 봐 정규직 되는 분들도 대단하지요.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은 일들, 꺼리는 일들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란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세상의 잣대에 제 생각이 길들여진 것이죠. 노동자는 평등한 겁니다.”

그랬다. 노동은 평등하며 모든 노동자, 혹은 모든 사람들은 다 평등하다. 그 평등함을 억누르는 것이 부당함이요, 부조리며, 진짜 불법이다. 결국 문제는 하나이다. 우리가 옳다!의 저자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결국, 근본적 질문은 삶이 먼저냐, 이윤이 먼저냐다. 이 가치관으로 싸워야만 노동자들은 더 인간답고 풍요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삶이 이윤보다 앞서는 세상. 노동이 자본보다 소중한 세상. 그런 세상은 정말 꿈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으며 단양 잔도길을 걸어 보았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이나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따라 낸 길을 뜻한다. 관광 목적으로 지었다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굽이치는 남한강 자락을 따라 만들어진 절벽길 잔도의 풍경은 아찔하고 황홀하다.

본디 단양은 아름다운 절경이 많은 곳이다. 그 유명한 단양팔경도 있지 않던가. 강줄기를 따라 제7경과 8경인 도담삼봉과 석문을 시작으로 제1, 2, 3경인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두루 돌아보았다. 발길 닿는 어디나 다 절경인지라 도시의 칙칙한 잿빛 풍경에 익숙한 눈이 마냥 행복해진다.

▲ 단양 제1경인 하선암. 널찍한 마당바위 위로 보이는 크고 둥글넓적한 바위가 하선암이다. ⓒ작은책(정인열)

마지막으로 제4경 사인암을 들렀다. 사인암은 고려 때 사인벼슬을 살았던 대학자 우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우탁은 역동(易東)선생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가 어찌나 역학에 밝았던지 역이 동으로 넘어왔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한 우탁은 임금 앞에서도 꼿꼿한 성정으로 유명한데 고려사에 그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거적을 깐 채 왕의 잘못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하들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는데, 우탁이 크게 소리를 질러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죄를 알고 있느냐!’ 하고 매섭게 꾸짖었다.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충선왕도 부끄러워했다.”(고려사109 <우탁 열전>)

▲ 단양 제4경인 사인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병풍인 양 힘차게 서 있다. ⓒ작은책(정인열)

권력에 굴하지 않는 꼿꼿한 기개가 돋보인다. 우탁이 옳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고, 부끄러움은 가르쳐야 한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저 비겁한 자본을 향해 우리가 옳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래야 자본가들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 뒤흔들 수 있는 진짜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깨닫지 않겠는가.

노동자 계급에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노동자들은 생산과 판매, 서비스의 주체로 마음먹으면 세상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단결과 협동, 연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톨게이트 투쟁은 그 힘의 아주 작은 일부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별의 이름은 노동자.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보리, 2012)와 《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보리, 2019) 등을 썼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0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_ 김용심, 사진_ 정인열

 

세상이 온통 코로나 이야기다. 치명적인 전염력을 지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신천지라는 희대의 종교 단체 활약으로 확진자가 수천 명을 넘어서며 나라를 심각상태로 만들었다. 몇백 원 하던 마스크는 몇십 배가 뛰었고 거리는 온통 마스크 쓴 사람들뿐이다.

옛날에도 전염병이 돌면 이렇게 난리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갖가지 전염병, 역병, 여역(癘疫, 전염성 열병)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5대 임금 문종은 나날이 번지는 전염병을 걱정하며 친히 악병을 구료하는 글을 써서 내리는데, 그 글이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병의 초기에는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타인에게 접촉만 하면 곧 전염이 확대되어 마치 불이 땔감을 얻은 것처럼 한없이 연소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병에 걸린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인적이 끊긴 섬에 몰아넣고 의복, 양곡, 약품들을 넉넉히 주어 타인에게 더 번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문종실록195)

그 뒤에 붙인 다만 (병자들을) 빠짐없이 찾아내기란 실로 어려워서, 필연코 다 찾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재미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을 숨기는 자들은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번 달은 4월인 만큼 4·3항쟁 책을 들고 제주도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항공권 예매를 하려던 날, 제주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절로 손이 멈칫거렸다. 갈까 말까 주저하다 대신 떠올린 섬이 강화 교동도였다.

강화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교동도는 오랫동안 왕족의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섬이라는 이점이 있어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이다. 멀게는 고려의 희종, 강종, 우왕이, 조선 시대에는 안평대군, 영창대군, 연산군 같은 이들이 이 섬으로 유배되어 거의 이 섬에서 죽었다.

▲ 연산군 유배지. ⓒ작은책(정인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연산군과 전염병 이야기가 흥미롭다. 흉년과 역병이 한창이던 때, 연산군이 낙정미를 왕실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낙정미란 도정 과정에서 누락된 쌀을 뜻한다. 이에 구휼미로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는 말에 간관들이 들고일어나자 연산군은 니들은 내 신하 아니냐?”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살피기를 청한다하는데, 전염병은 본디 수양하여 그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여 덕을 닦아 천재지변을 없애는 것은 다 옛날 성군들이나 했던 일이고··· 어진 임금이었던 요제와 탕왕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보고 어쩌라고?”(연산군일기9215)

그리고 열흘 뒤에는 아예 알이 굵은 밭벼쌀을 100석이나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연산군이 마지막에 머문 곳이 바로 교동도다.

예전에는 배로 가야 했던 교동도는 2014년 바다와 육지를 잇는 연륙교가 생기면서 차로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리를 지나는데 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뭐가 이리 예뻐. 드넓은 바다와 눈부신 햇살, 간드러지게 뻗어 나간 해안선이 그림처럼 눈에 박힌다.

▲ 교동도 봉소리 앞 바다. ⓒ작은책(정인열)

교동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동 제비집이었다. 진짜 제비집은 아니고 교동도 안내 센터를 일컫는 말인데, 문이 꽁꽁 닫혀 있었다. 예방 차원으로 일시 폐쇄한 것이다. 코로나의 여파는 이 작은 섬에도 여지없이 찾아와 있었다.

제비집 옆의 대룡시장을 구경한 뒤, 가까운 고구리 조선 시대 한증막을 가 보았다. 돌과 황토를 이용해 둥글게 쌓은 한증막은 치병과 탕욕을 위한 시설로, 70년대 초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약도, 치료도 받기 힘든 백성들은 정 아프면 이런 한증막에 와 뜨거운 열로 고달픈 몸을 달래지 않았을까.

▲ 교동도 고구리에 있는 조선시대 한증막. 돌과 황토를 쌓아 만들었다. ⓒ작은책(정인열)

중종 때에는 전염성 열병인 여역이 유행했는데, 중종 21년의 기록을 읽다 보면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보는 기분이다. 각 도의 관찰사들이 연일 임금에게 도의 상황을 보고한다.

도내에서 여역으로 죽은 사람이 460여 명입니다.”(충청도)

도내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총 560명입니다.”(전라도)

도내에 유행병으로 죽은 사람이 삼척 41, 양양 58, 간성 9, 고성 18명입니다.”(강원도)

그리고 뜨거운 여름 막바지에 반가운 소식이 올라온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그쳤다.”(중종실록2173)

코로나도 날씨가 더워지면 그렇게 그쳤으면 좋겠다. 새삼 바라면서 한증막을 떠나 교동읍성을 향했다. 한때는 번창했을 읍성은 지금은 남문 하나만 남아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가자 흔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니 밭둑 사이로 두 개의 돌기둥이 보인다. 이제는 허물어져 사라진 옛 교동 관아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연산군이 한때 머물렀다는, 볼품없는 연산군 적거지가 있었다.

▲ 교동읍성 남문. 오래전 폭풍우로 무너진 것을 2017년에 새로 세웠다. ⓒ작은책(정인열)

▲ 교동 관아 부지에 남아 있는 돌기둥. 다 무너지고 기둥만 남았다. ⓒ작은책(정인열)

▲ 연산군이 머물렀다는 적거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작은책(정인열)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병에 걸린다. 담당자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시지 못할뿐더러, 눈도 뜨지 못합니다하고 보고를 올리는데, 바로 그 이튿날인 118, 연산군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역병 걸린 백성의 구휼미를 빼돌린 죗값을 그렇게 받은 것일까.

연산과 달리 성군 세종은 역병이 돌자 먼저 나선다.

임금께서 전염병 걸린 자를 구호하지 못하고, 혹 생명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거리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때 소격전(昭格殿)의 종인 눈먼 여자 복덕이 아이를 안은 채 식량이 끊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놀라 즉시 소격전의 책임자를 추국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을 한 가마니씩 주었다.”(세종실록14423)

소격전은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 관청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은근히 눈치를 보던 곳. 거기에 소속된 눈먼 여종이라니, 복덕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희한하게도 병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찾아오는 듯하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고전 , , 에서 유럽인이 토착 원주민을 몰아내고 신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병균을 들었다.

인디언이 죽은 주된 이유는 구세계의 병원균이었다. ···만약 유럽이 다른 여러 대륙에 이 사악한 선물(전염병균)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병균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며 일찍부터 면역력을 키웠던 유럽인과 달리, 청정한 지역에서 자유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그 지독한 균을 이겨 내지 못했다. 유럽의 병원균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를 몰살시켰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 예전과 같은 집단 떼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병이 돌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언제나 힘없는 약자이다.

연산군 적거지 너머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마을을 지키듯 서 있는 나무는 우아하고도 웅장하다. 그 수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된다.

▲ 교동 읍성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작은책(정인열)

소격전의 노비 복덕이 생각났다. 먹을거리도, 약도, 한증막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을 눈먼 복덕은 더듬더듬 이런 수호목을 찾아 빌지 않았을까. 굶지 않기를, 병이 낫기를, 제발 아기가 건강하기를. 그 소원을 하늘과 별이 들었는지 인자한 임금 세종이 복덕을 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비단 전염병 걸린 사람뿐만 아니라, 유리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그들 또한 구하겠다는 의지. 정말이지 세종답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 또한 확진된 병자들만이 아니다. 자가격리된 가족들도, 전전긍긍하는 이웃들도, 무너진 경제에 우는 소시민과 자영업자들까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전염병은 언젠가는 잡힌다. 하지만 병이 지나간 뒤에 피폐해진 백성의 삶은 또 다른 얘기다. 그것마저 보듬는 것이 아마도 통치의 몫이리라. 어려운 상황에서 애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실록의 한 부분을 전한다. 백성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처럼 하라.”

불은 꺼지고 삶은 여전히 계속되리니, 모두 힘을 내자!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를 썼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2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 사진_ 하명희


 ▲ 국회 앞 작은 집  작은책(하명희)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열한 걸음을 걸으면 3인용 텐트만 한 작은 집이 있다. 이 집의 벽면은 천막이 아니라 조각 천으로 이어져 있다. 왼쪽에는 세 개의 산등에 동이 터 오고, 오른쪽에는 조각배가 떠 있는 바다가 출렁인다. 사면의 조각보 위로 삼각 지붕이 얹혀 있는데 국회의사당 정문 쪽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박음질되어 있다. 그 아래엔 바닷가 해당화일까,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 있다. 이 집의 삼각 지붕에는 다른 집에는 없는, 매일 숫자가 바뀌는 칠판이 있다. 정문에는 머리를 빡빡 민 아이가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글자가 박힌 붉은 티셔츠를 문패처럼 달고 있다. 그 옆에는 여름에도 이곳에 이 집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돌돌 말려 올라간 차양막이 있고 스티로폼으로 된 문이 있다. 문을 열면 방이다. 서너 명 앉을 수 있는 방. 그러니까 이 작은 집은 방이다. 이 방에 들어와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묘한 기운이 있는데, 그것은 방의 두 면에 있는 산과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산의 속, 지하철역 쪽으로는 지난가을에 입었을 법한 쑥색 점퍼가 걸려 있다. 바다의 속, 국회의사당 정면 쪽에는 형제복지원에는 3개의 병동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어느 날의 신문 기사가 벽면 가득 붙어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다른 이름 '살아남은 아이' 작은책(하명희)


앞머리가 눈을 덮고 찬기에 어깨를 웅크린 그가 허리를 구부려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덮고 있던 이불 속으로 발을 뻗었다. 그가 미리 덥혀 놓은 주전자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이거라도 들고 있으면 조금 나아요.”

이 방에서 캔 커피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온열기다. 이 이불 하나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도 길에서 살아서 이젠 뭐, 괜찮아요.”

그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누구나 들어오라는 듯 입김이 열린 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고개를 들이밀고 손님이 있었네, 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1인시위에서 했다던 몸에 익은 목례를 하며 내게 저기 민간인 학살 투쟁위원회의 어르신이에요 하고 말했다. 다른 농성장에서는 천막 안에 잠자는 텐트가 있던데 여긴 온열 기구도 없이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다.

천막 농성장이 커지면 더 추워요. 작은 게 좋아요. 여긴 사람들이 신발 벗고 들어와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든 얘기나 농담이나 그런 걸 나눌 수밖에 없죠. 방이니까. 사랑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그는 칠판에 날짜를 지우고 더하며 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고맙죠. 저쪽 한국에서 제일 큰 집(국회)에서는 아무도 안 와요. 매일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단 한 명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1인시위를 시작한 때가 2012년이니까 6년 지났고 올해 7년째인데, 작년 1226일에도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구요.”

그는 웅크린 어깨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말했다. 나는 책을 보았다고 했다. 내가 책을 꺼내자 그는 첫 페이지를 손으로 짚었다.

  ▲ "이게 나예요팔사일공삼육일팔!"  작은책(하명희)

이게 나예요. 팔사일공삼육일팔! 아홉 살 때. 어릴 때 사진은 이것뿐이에요. 팔사일공삼육일칠은 작은누나고.”

그는 이빨이 시린지 얼굴을 찡그렸다. 책을 보고 알고 있었다. 그에게 추위는 공포라는 걸. 잠깐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밥을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알아채는 법을 아홉 살 이후 몸에 익힌 듯 내게 먼저 밥 먹으러 가죠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그들 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이것이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고 있는가. 그는 밥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빨이 아파서요. 어릴 때니까 유치가 빠지고 어른 이빨이 나오는 때였어요, 형제복지원에 붙잡혀 들어갔을 때가. 그때 관리를 못한 것도 있고, 빨리 먹어야 하니까 급하게 삼키던 것이 버릇이 된 것도 있고, 또 어떻게든 거기서 나가야 사니까 이를 악물었던 게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내가 씹기에는 무른 밥이 그에게는 딱딱한 밥이었구나. 이 책에는 그가 왜 무른 밥을 씹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지, 왜 찬 바닥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면서도 그것이 공포인지, 왜 어깨를 움츠린 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인사를 하는지, 그의 몸에 새겨진 폭력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역사의 거대한 공백이 조각보의 박음질 글자처럼 새겨져 있다.

▲ 살아남은 아이-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전규찬, 박래군, 한종선/ 이리/ 2014)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 나는 지금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국가가 버렸고, 사회가 관심을 안 갖는데, 어찌 개인의 힘으로 쉽게 나올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길 원하는가?”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이리, 2012) 134135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옥을 경험한 그가 형제복지원을 나와 생존자로서 살아야 했던 세월을 사회가 몸으로 받아 적는 일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안영춘은 어째서 소년은 그동안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10)고 이 책의 발문에 적고 있다.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이 책의 소년이 던진 질문들은 그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을까. 이 책을 기획하고 생존자 한종선이 그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격려한 전규찬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에게는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의 의무,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증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경청의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책 속의 아이가 있고, 생존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423일째 폭력의 날짜를 새기고 지우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진심으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집인 국회 앞에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문패를 단 작은 집이 있다. 작은 집에는 울타리가 없어 집 밖이 다 마당이다. 주소가 없어 우편물을 들고 직접 가야 한다. 작은 집은 지나는 사람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거나 주변의 농성하는 사람들이 걱정을 풀어놓는 사랑방이 된다. 작은 집 마당의 큰 집에서는 작년에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1인 시위를 시작한 지 7, 국회 앞에 작은 집이 들어선 지 4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작은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않았다.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2014나무에게서 온 편지로 제2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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