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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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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2. 6. 11:13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모두들 명절 잘 쇠셨나요? 고향이 남쪽인 분들은 사는 게 팍팍해도 마음만 먹으면 명절엔 고향에 내려가서 회포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향이 북쪽인 실향민들은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습니다.

이번 호 책이 이끄는 여행은 글을 쓴 최규화 편집위원이 북녘땅이 보이는 경기 파주시 임진각을 다녀왔네요. 최규화 씨는 우리가 아는 북한은 없다라는 책을 보고 분단의 상징인 임진각을 둘러봤습니다. 책은 재미 통일운동가 신은미 작가가 모두 아홉 번이나 북조선을 다녀온 기록을 담고 있습니다. 신은미 작가는 2014년 한국에서 토크콘서트를 할 때 대동강맥주가 맛있다고 했다가 온갖 고초를 겪었지요. 박근혜 정권에게 강제 출국당하고 5년간 입국 금지까지 당합니다. 기가 막힌 세상이었지요.

이번 호에 장영식 사진작가가 사진과 함께 긴 글을 보내왔습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 해고자 복직과 노조 파괴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182일째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박문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만나기 위해, 암 투병 중인데도 부산에서 대구까지 130킬로미터를 걸어서 찾아갔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 2011년에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309일 동안 고공농성을 벌인 적이 있지요. 1931년 강주룡, 2011년 김진숙, 2020년 박문진의 고공농성은 닮아 있습니다. 노동문제는 촛불정부에서도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일까요?

 

2020115

안건모 올림

 

4 책이 이끄는 여행

적대평화가 공존하는 그리움의 공간 최규화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꿈꿀 자유, 나의 언어 최숙하

19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구자숙

22 친구의 집을 향한 여정 장영식

31 고양이 집사 일기 최해옥

34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하무스까지 만들었어? 윤혜신

40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41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47 일터에서 쓰는 시 이규동

50 교장 일기

교장선생님! 어디 아파요? 최관의

55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권해진

59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아파트 전담 집배원

신분이 바뀌니 차도 준다 명숙

68 일터에서 온 소식

자회사만 고집하는 공사 박인국

73 작은책 법률 상담소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의 시행 김예지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정창수

77 죽음의 시계를 멈춰라 안건모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존버 씨의 시간들

자살의 반복과 경쟁 장치의 폐해 김영선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무엇이 글의 상상력을 가능케 할까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동물을 사랑하기로 합시다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전기차는 대안이 아니다 박병상

122 옛 그림 속 여성들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종수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기억해야 할 청자들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영화가 드물게 은총을 보여 주는 순간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법을 왜 나만 선의로 이해해 줘야 하는 걸까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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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4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대법원장만을 섬겼던 법원

조석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장

 

 

양승태를 구속하라! 양승태를 구속하라!”

지난 111일 아침 8시 무렵부터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법원 안에서 정문을 막고 구호를 외쳤다. 이들 중 몇몇은 양승태 구속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대법원 담벼락에, 일부는 피의자 양승태는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는 현수막을 들고 대법원 정문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법원노조가 검찰 소환을 앞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저지하고 있다(2019111).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오전 9시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앞에 나타나자 양승태를 구속하라는 구호는 더욱 크게 울려 퍼졌으며, ‘피의자 양승태에게 경고합니다로 시작하는 규탄 방송은 기자회견을 하는 양승태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결국 현장 소식을 중계하던 방송국에서는 양승태의 발언을 자막으로 처리하였으며, 각종 언론사의 현장취재 사진에 나온 배경은 대법원 건물이 아니라 양승태 구속 현수막과 손피켓이 차지해 버렸다.

당일 전국으로 생중계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방해한 장본인은 바로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이다. 필자는 전국의 법원공무원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노동조합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이하 법원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다. 왜 법원공무원들은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구속을 목놓아 외쳤을까?

먼저 양승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리를 뒤흔들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사법농단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2월 이탄희 판사에 의해 법원행정처의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 법원본부는 이를 사법농단으로 규정하고 그 주범으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을 지목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법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양승태 대법원장의 지시나 보고 없이 하급자들이 재판 거래와 같은 어마어마한 일을 알아서 진행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그가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던 사실을 알고 있다.

재판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야 하는 가장 막중한 사명을 지닌 대법원장이라는 인물이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 청와대와 재판 결과를 거래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반헌법적인 범죄행위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재판 결과가 일부 적폐 법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극도의 사법 불신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피해는 민원현장의 최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법원공무원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실례로 형식이 잘못된 재판 서류의 보완을 요구하는 담당 직원에게 법원이 상대편 당사자와 한통속이 되어 나를 해코지하려는 것 아니냐며 폭언을 일삼는 일이 급증하였으며, 작년 11월에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민원인을 제지하던 법원공무원이 폭행을 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법원본부가 사법농단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공개된 사법농단 관련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행동이 우려된다는 식으로 노조 집행부의 성향을 파악하고, 각종 회의, 내부게시판 글 게시, 집회 참석 등 노조활동을 지속적으로 사찰했으며, 이를 통해 신규 직원 조합 가입 위축 등 노조 와해 공작을 벌였다.

또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반민주적이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독선적인 사법 정책이 법원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이라는 모토를 걸고 출발한 양승태 대법원은 실제로는 대법원장 1인만을 섬기는 법원이 되었고, 대법원장 치적 쌓기를 위한 각종 전시성 행사와 사법 정책이 물적, 인적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졸속으로 집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기간 6년 동안 판사를 포함한 법원 구성원 7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그중에 약 20명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법원본부는 2014년 당시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와 공동으로 외부 전문기관에 법원공무원 근무 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근무 인원을 대폭 증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1~2년 이상을 가지 못하고 다시 직원들이 쓰러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던 것이다.

법원본부는 20173월부터 사법부 적폐청산을 위한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끝장내고 사법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124일 새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돌이켜 보면 2017년 대법원 앞 촛불문화제 개최, 민주적 대법원장 선출 투쟁, 2018년 양승태 대법원장 처벌을 위한 전 조합원 서명운동 및 형사 고발, 전 지부 1인 시위 및 현수막 게시 투쟁, 각종 기자회견, 대법원 앞 단식농성 투쟁, 119일 대법원 앞 연가투쟁, 1119일 적폐법관 업무배제 및 특별재판부 설치 촉구 법원본부장 삭발투쟁, 128일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청와대 앞 결의대회, 2019111일 양승태 대법원 앞 기자회견 저지 투쟁, 양승태 구속 촉구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및 123일 영장실질심사 담당 재판부에 의견서 제출을 위한 기자회견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투쟁들을 전개해 왔다.

글쓴이 조석제 씨를 비롯한 법원본부 지부장들은 법원 청사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2018.6.15.)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법원본부가 흔들림 없이 양승태 구속 및 사법적폐 청산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법원 구성원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도록 인권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과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이 존중받는 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태는 구속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이 여전히 법복을 입고 재판업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임종헌 등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70년 역사 이래 단 한번도 교체되지 않고 법원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법적폐 세력들은 호시탐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1만여 법원본부 조합원들은 사법개혁을 완수하고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사법적폐 세력들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민의 공무원이니까.

양승태 구속 촉구 기자회견 중인 법원노동자들(2019.1.23). 가운데가 조석제 씨.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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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파업 투쟁의 기술

이철의/ 정년을 앞둔 철도노조 조합원

 

 

1125, 철도노조의 파업이 6일 만에 끝났다. 이전의 경고 파업까지 더하면 올해 9일간 파업한 셈이다. 올해 파업은 유난히 여론이 좋지 않았다. 수험생을 볼모로 파업을 하냐?” “다 잘라 버려라. 일할 사람 많다.” 파업 기사에 달린 댓글이 한심했다. 수서발 고속철도 통합이나 안전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처우 개선 등 조합의 요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MB나 박근혜 정부 때는 파업을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도노조 힘내라. 불편해도 괜찮아.” 응원을 하고 10만 명이 모이는 연대 집회까지 열릴 정도였다. 박근혜 정부 말기 촛불 시위 때는 무려 74일이나 파업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봉제에 반대해서 파업에 나섰는데 나중에 촛불 선봉대가 되었다. 조합원들은 신이 나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파업이 끝나고 보니 후유증도 컸다. 파업 조합원들은 두 달 넘는 기간 무노동 무임금 신세가 되었다. 필수유지 업무 조합원들은 17개월이나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고통 분담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지? 착한 정권에 반항해서 그런가? 우리는 시민들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20191122일 철도노조 파업 집회. 우리는 비정규직과 함께 철도 공공성과 사회성 강화, 임금인상을 걸고 당당히 파업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철도노조는 조합원 2만 명이 넘는 큰 노조이다. 파업도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복귀 후 징계 대응이나 법정다툼도 침착하기 이를 데 없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초기, 철도노조는 24일간 파업을 벌였는데 사장이 정말로 화가 났다. 사장보다 대통령이 더 화가 났겠지, 노조 위원장이 숨어 있는 경향신문사에 경찰이 쳐들어간 것을 보면 대통령의 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부의 태도가 그러니 회사도 강경 일변도였다. 파업 참여자 12천 명을 전원 징계에 회부한 것이다.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징계에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 관리자 7명 정도가 위원이 되어 나름 그럴듯한 심문 절차도 밟는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징계하려니 시간과 인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는 삼십 분에 한 명씩 속전속결로 해치우려고 하였다. 철도노조 단체협약에 따르면 노동조합 측 인사가 진술인이나 의견 대리인으로 참석한다. 반론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징계위원을 기피할 수도 있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징계에 노동조합은 지연 전술로 맞섰다. 절차나 태도를 시비 걸어 징계위원을 기피하거나 진술을 한없이 길게 하여 질질 끌었다. 조합원들은 겁도 없이 징계장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관리자들을 골리기도 하였다. 회사는 징계를 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나중에 조합원들 수백 명이 집단 삭발하며 재파업 분위기가 무르익자 탄압이 수그러들었다.

처음 파업했을 때가 생각난다. 1988726, 올림픽을 50여 일 앞둔 때였다. 그때 한 달 300시간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참다못한 철도 기관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기관사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쉬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기관사 부인들 수백 명이 철도청 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내 남편을 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조합은 지독한 어용노조여서 조합원들의 권리는 관심 밖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농성에 쓴 장구와 북을 모두 찢고 농성 주동자들을 경찰에 제보했다고 한다. 위원장은 텔레비전에 나와 불법 파업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업은 열네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백골단이 쳐들어와 농성하던 기관사들을 몽땅 잡아갔던 것이다. 기관사들은 경찰, 노동부, 안기부 조사를 차례로 받고 개전의 정을 보인 끝에 석방되었다. 가슴에는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쓴 깃을 달고 기관차에 올랐다.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연대파업 전 결의대회 사진. 사진제공_ 이철의.


1994년 철도 지하철 연대 파업은 말 그대로 교통대란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주동자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늘 오후에 면회를 왔다. 왜 하필 운동할 때 오냐? 오전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차가 막혀 면회 오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강경 탄압으로 패배했지만 우리는 원없이 싸웠다. 조합원들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경찰을 피해 흩어졌다. 노장들은 지금도 계곡에 숨어 밥해 먹던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2006KTX 승무원과 함께 철도공사 사옥에서 농성하다 연행되는 모습. 사진제공_이철의.


2002, 2003, 2006, 2009, 2013, 2016. 숨가쁜 파업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구속자와 해고자가 탄생하고 징계와 손해배상 등 탄압이 뒤따랐지만 노동자들은 싸움의 고수가 되어 갔다. 회사 쪽 관리자들은 때가 되면 보직을 바꾼다. 하지만 노동조합 투사들은 파업 때마다 싸움의 기술을 익힌다. 갓 입사한 신입들은 선배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잔뼈가 굵어 간다. 정의감이 유달리 강하거나 인간성이 좋은 후배들은 파업 끝에 자연스럽게 노조 간부의 길로 들어섰다. 그 결과 민영화 법안을 철회시키고 외주 위탁을 멈추게 하였다. 노동시간도 점점 단축되었으며 직장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관리자들을 반드시 혼내 주니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갑질이 사라져 갔다. 민주노조 20년에 철도 현장은 몰라보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번 파업은 마지막이자 송별 파업이 되었다. 파업으로 송별회를 대신해 주니 후배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번 파업은 특히 자회사 조합원들 수천 명이 함께하였다. KTX 승무원, SRT 승무원, 고객 센터 조합원, 그리고 역무 위탁 조합원들은 파업 기간 동안 대전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농성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비정규직과 함께하려는 노동조합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앞으로도 철도노조는 철도 공공성과 사람다운 삶을 위한 분투를 계속해 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한국 사회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에도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 2019년 1230일 마지막 근무날왼쪽 붉은 게시판에 ‘0’ 표시는 정지 위치를 10센티미터도 안 틀리게 딱 맞췄다는 뜻이다. 철도공사는 이런 나를 평생 징계만 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글쓴이는 2019년 12월 30일 근무를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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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나는 스물아홉 살,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어머니는 임신 7개월에 나를 낳았다.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분만이 시작되었고, 배 속 태아는 거꾸로 있는 둔위 상태였다. 산모도 태아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의지 때문이었는지, 나는 1.25키로그램의 미숙아로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첫돌이 될 때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내가 비장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아무도 나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돌이 지나도 나는 제대로 서지도, 걸음마를 떼지도 못했다. 병원에서 내려진 진단은 뇌성마비였다. 지적 발달은 6세쯤에서 멈출 것이고, 걷지 못할 것이고, 전형적인 강직 증상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나의 지적인 능력은 정상 범위에 가깝게 성장했지만, 몸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서거나 걷는 것은 물론이고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조차 없었다. 몸의 강직 때문에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고 말도 어눌했다. 아홉 살이 되어 겨우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은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와 동화 테이프가 전부였다.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나를 맡겨 놓고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입학할 학교의 교장은 나의 장애 상태를 본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도 몸이 불편한 나의 등하교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지적인 능력은 비장애인과 비슷한 수준이고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읽고 쓸 수는 있었지만, 결국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재활 과정을 거쳐 장애아동 주간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록 시설 안에서뿐이었지만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고 현장학습을 통해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홉 살의 나는 점심과 간식을 먹거나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거나 억지로 낮잠을 자야 하는 유치원생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애의 정도도 나이도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나에게 맞는 교육도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열 살이 되어서야, 한 초등학교와 협약을 맺은 장애인 재택학급이 생겼고, 나는 비로소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소속의 특수교사 한 명이 시설로 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는데, 몸 상태와 지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을 선생님 한 명이 일대일 개인 지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과목을 다 배우지도 못했다. 수학과 국어가 수업의 전부였고,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역시 한쪽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야 했다. 보조교사가 한두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나는 초등학교 과정 6년을 결핍과 무기력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열여섯 살이 돼서야 시설과 재택학급을 떠나 지체부자유 학생들이 다니는 장애인 특수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등하교가 어려운 장애 학생들은 그곳 기숙사에서 고등부 과정까지 6년을 지냈다.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생활해야 했다. 목욕, 청소, 옷 갈아입기, 휠체어 타기. 내 몸 상태로는 무엇 하나 쉽게 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수업에 지각하고 꾸중을 듣고 함께 생활하는 방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생리대를 갈지 못한 날에는 수업이 끝날 때쯤 교실로 들어가기도 했고, 휠체어를 잘 움직이지 못해 이동수업 때마다 헤매 다녀야 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면서 어린 시절의 갸름하고 제법 예쁘장했던 내 모습은 사라졌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려 대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마침내 중·고등 과정 6년이 지나고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칭찬을 받은 것은 글쓰기였다. 그것은 몸이 불편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뻤다.

나는 국문과에 진학하여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학교생활이었다. 그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초··고 시절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전공 과목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똑같이 주어진 시험 시간 동안 불편한 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리였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성적도 과락을 겨우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학교 안에는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도 있어서 가장 맛있는 학식은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은 청소 도구로 가득 차 종종 다른 화장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장애학생회와 함께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장애인의 세상도 비장애인의 세상도 바깥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헌법 제311항을 알게 되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고, 갈 수 없는 곳은 더 늘어만 간다.

 

특수반에서 수업이라고 할 만한 시간도 없어요. 사운드북 몇 번 눌러 주는데 사운드북은 집에도 많아요. 원반(일반학급에서의 통합교육)도 마찬가지예요. 교사가 성은이는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큰 교육이 된다는데, 이게 공부인가요? 성은이는 손만 빨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손만 얼마나 빨며 침 흘렸는지, 바지까지 젖어 있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성은이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심심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는 뜻입니다.” (<비마이너>, ‘휠체어 타는 우리 아이는요?’(2019313) 인터뷰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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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은수미 시장님, 약속을 지키세요

유미라/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성남시의료원 지부장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기 전 21년 동안 종합 병원에서 3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로 일했고 노동조합 활동도 꽤나 열심히 했었다. 탈퇴하면 승진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몇 차례 받긴 했지만 탈퇴를 해서 부끄러운 관리자가 되는 것보다 당당한 조합원으로 남는 것이 더 좋았고,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내가 일하는 시간에는 안심이 된다며 출근하기를 기다려 주는 환자들이 있어 행복했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병원을 그만두었고 4년 전부터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성남시의료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부터이다. 인하병원과 같은 산별 노조인 보건의료노조의 조합원이었던 나는 2003년 인하병원이 폐업한 후 그 조합원들이 퇴직금을 모아 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의료원이 건립되기까지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켜보며 함께 해 왔다. 오랜 기간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고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인하병원 조합원들과, 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남시의료원은 없었을 것이다. 주민 발의로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해 골목길들을 누비며 가가호호 방문 서명을 받으러 다녔는데 시립병원을 만들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낯선 사람에게 선뜻 문을 열어 주며 서명에 동참해 준 시민들이 성남시의료원의 진정한 주인이다.

성남시의료원은 2004년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사진 제공_ 공공의료성남시민행동


오늘은 2019116, 국내 최초로 주민 발의에 의해 세워지는 공공 병원인 성남시의료원의 개원 준비 일을 시작한 지 4년째가 되는 날이다. 이제 개원 준비가 아닌, 개원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 일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성남시청 앞 파란 천막에서 78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농성을 시작하면서 나의 일상은 천막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출근 전에는 시청 앞에서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은 피케팅을 하고 병원으로 출근해서 병동 분야의 개원 준비를 하고 있다. 병원에서 일이 끝나면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는 날이 많고 일주일에 하루는 천막에서 숙박을 한다. 당연히 주말도 천막에서 지낸다.

성남시의료원에 노동조합이 생기면 첫 번째로 가입하겠지만 내가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조합 집행부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10년 남짓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고 자랑스럽지만 개인적인 일상을 많이 내려놓아야 하는 일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고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는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성남시의료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부장이 되었다.

법인이 설립되고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인사 보수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직원들의 임금이 천차만별이었다. 의료원에 입사해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전에 다니던 직장의 연봉을 기준으로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에 천만 원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병원장은 80퍼센트 이상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칙도 기준도 없는 무늬만 직무급인 임금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차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임금 체계였다. 논란이 되자 외부에서 의료원의 임금 체계에 대한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다양한 단체와 참가자들이 의료원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정작 노동조합의 설립 주체이고 임금 체계 합의 당사자인 직원으로서 외부의 결정에만 의지한 채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개원도 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개원을 하려면 직원을 뽑아야 하고 직원을 뽑으려면 인사 보수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2년이 넘도록 만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 제대로 된 인사 보수 체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원을 앞둔 성남시의료원 조감도. (성남시의료원 홈페이지 갈무리)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시민들이 16년을 기다려 온 의료원의 정상적인 개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개원 준비를 최우선에 두고 활동하겠다고 조합원들과도 다짐했었다. 그래서 단체협약 요구안도 일반적인 신규 지부 요구안의 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요구했다. 직원들의 복지 혜택에 대한 요구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빨리 마무리하고 개원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첫 교섭 상견례를 시작한 후 사측의 교섭 대표가 4번 교체되었고 교섭 대표가 바뀔 때마다 기존의 합의 사항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의료원장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섭도 장기화되었다. 현 의료원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교섭 대표들은 합의서를 쓰지 않았어도 교섭 내용이 녹음되고 있으니 합의서와 다름없다고 기존의 합의 내용들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성남시의료원에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이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약속이고 노사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의 경영진은 약속도 합의 사항도 모두 뒤집었다. 교섭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개원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조합원들에게 불리한 경력 산정 기준도 수용했고 개원 준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부 분야에 한시적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하되 기간 만료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했었다. 그러한 잠정 합의안을 사측이 하루 만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더니 급식, 청소 미화, 보안, 진료 보조, 환자 이송, 약무 보조, 콜센터, 운전원 등 9개 분야 238명에 대한 비정규직 채용 계획을 노동조합과 협의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238명이면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

글쓴이 유미라 지부장이 성남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성남시의료원지부.


잠정 합의안도 파기하고 국가 기관인 노동위원회의 조정 권고안까지 거부하면서 그동안 합의했던 노동조합 가입 범위, 인사 보수 체계도 모두 뒤집었다. 비정규직 문제는 경영권이고 인사 보수 체계는 인사권이라며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도 했다. 1년에 걸쳐 노사가 합의한 내용들을 파기하고 사측이 일방적으로 만든 인사 보수 체계를 취업 규칙에 담아 개별 직원들에게 강제 동의나 다름없는 공개 서명을 받았다. 이로 인해 3년 동안 개원 준비를 위해 고생해 온 직원들이 입사 당시 인정받았던 경력을 삭감당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노조 가입 범위에 대해 법대로 하자는데 그것도 합의 못하겠다며 조합 가입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시장 임기 내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하겠다고 하면서도 합의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은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비정규직 없는 병원을 만들겠다던 시민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뒤집어 버리는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 경영진의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성남시청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이유이다.

무더운 여름에 시작해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고 이제 곧 겨울이 되겠지만 오늘도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세상에 비정규직으로 채용해도 괜찮은 일자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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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남해화학 비정규직

 

표적 해고당한 민주노총 조합원들

정인열/ <작은책> 기자

 

 

거북선표 비료로 농민들에게 잘 알려진 남해화학()1974년 설립된 비료 생산 기업이다. 농협 계열사로 연 매출 1조 원이 넘으며(2017~2018년 사업 보고서), 시장 점유율 50퍼센트에 달하는 업계 1위 업체다. 정규직 평균 급여도 1억 원에 이르고(2018년 사업 보고서, 평균 근속 17) 우수한 복지 제도도 많다.

남해화학 여수공장. 작은책(정인열)


하지만 이런 남해화학의 위상 뒤에는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업무를 맡아 최저시급을 받으며 밤새워 일하는 사내 하청 노동자들이 있다. 게다가 이들은 2015년부터 2년마다 고용 불안에 떨고 있다. 남해화학이 하청업체와 2년마다 신규 계약할 때 기존 노동자들의 고용 승계 조건을 없애고, 사실상 최저가 낙찰제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낙찰한 신규 업체 새한이 한국노총(하이팩노조·여수종합항운노조) 조합원만 고용 승계 하고 민주노총 조합원은 거부한 일이 발생했다. 더군다나 이를 원청인 남해화학이 배후에서 지시한 정황도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이에 지난 10월 1일부터 해고 노동자 29명이 고용 및 단체 협약 승계를 요구하며 여수 공장 안에서 옥쇄 투쟁을 시작했다이들은 모두 민주노총 화학섬유식품노조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이하 지회) 조합원으로길게는 30년 넘게 제품팀에서 비료 포장과 설비 정비를 해 왔다.

공장 내 직원 대기실에서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가를 부르며 옥쇄투쟁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지난 1031, 장비팀 조합원 김중민 씨의 안내로 여수 공장 접견실에서 해고자 구성길, 이완규, 김만수 씨를 만났다. 제품팀과 장비팀은 모두 하이팩 소속이었으나 최근 입찰에서 제품팀은 새한과, 장비팀은 기존 업체인 하이팩과 계약했다. 장비팀 조합원들은 연차 휴가를 내고 공장 밖에서 함께 투쟁하고 있다.

남해화학 접견실에서 이인규, 구성길, 김만수, 김중만 씨(왼쪽부터)를 만났다. 작은책(이동수)


남해화학이 새한, 한국노총 간부들하고 모여서 민주노총 조합원은 완전히 들어내고, 나머지는 단기 계약직으로 채워서 최대한 이윤을 가져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완규 씨의 말이다. 지난 1017남해화학 비정규직 집단 해고 저지와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한 전남대책위원회(이하 전남대책위)는 기자 회견을 열어 이를 뒷받침하는 녹취록을 공개했다. 이 녹취록은 지난 105일 한국노총 고용과 단협 승계를 합의하는 자리에서 남해화학 제품팀장과 차장, 새한 총괄부사장, 한국노총 하이팩노조 위원장이 나눈 대화로, 남해화학 측이 민주노총 고용 승계 거부를 지시하고 인사 개입까지 한 정황이 담겨 있다. 공장 안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헌신하던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이 내친 것이다. 구성길 씨와 이완규 씨의 말이다.

남해화학에서 잡일은 다 하는 잡부죠. 주 업무가 성수기 때는 포장, 비수기 때는 설비 청소하고 쓰레기 치우고. 남해화학에서 제일로 더럽고, 힘들고, 위험한 일을 최고 장시간 합니다.”

비료 원료들은 해외에서 수입해 대형 선박에 실어 부두에 하역한다. 김중민 씨 같은 장비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중장비로 원료를 운반하고 컨베이어 벨트 등 생산 라인에 투입하는 일을 한다.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공장 내로 운반된 원료들은 화학 가공 되어 비료로 만들어지고 다시 포장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을 거쳐 완제품이 된다.

정량보다 적거나 많거나 포장이 불량한 것은 파대(포장을 터트림) 작업을 해요. 20킬로그램짜리를 깡통에다 붓고 들었다 놨다 하루에도 수백 번씩. 제품에 하자가 생기면 전부 다 사람 손으로 골라내고 까대기질(제품을 분류하고 적재) 합니다.”

24시간 가동되는 공정에서 이들은 43교대로 근무한다. 성수기에는 16시간 연속 근무하는 경우도 잦다. 비수기인 7~12월에는 사고 위험이 높은 작업에 투입된다. 이들은 컨베이어 벨트에 직접 올라가 투입구 밖으로 떨어진 비료를 치우거나 유해 물질이 저장된 창고나 대형 선박의 탱크 안에 들어가 청소를 한다. 주로 다루는 물질은 비료 제조에 쓰이는 질소, 인산, 칼륨, , 석고 등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비료 공급 시설로 직접 들어가 공급 라인 밖으로 넘친 비료를 청소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사다리를 타고 몇만 톤짜리 배 밑바닥으로 10미터 넘게 내려가서 삽 하나 들고 방진 마스크 쓰고 청소하고요, 황산 탱크에 들어가서 굳은 황산을 손 드릴로 파기도 하고요.”

산업의학 전문의 공유정옥 씨는 남해화학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작업 환경에 대해 모두 매우 위험한 유독 물질이다. 특히 탱크 청소할 때 산소 농도가 너무 낮거나 독성 물질 농도가 너무 높으면 질식이나 중독으로 갑자기 사망에 이를 위험이 크다. 피부에 노출되면 화상이나 피부염을 입게 되고, 만성적으로 분진을 마시면 특정 장기가 손상될 수 있다고 경고하며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소 농도를 체크한 후 작업 여부를 결정하고 투입 시에는 산소가 공급되는 송기 마스크와 작업복을 착용하고 작업복 품질 관리도 철저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현장은 산업 안전 기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김만수 씨의 증언이다.

주로 방진 마스크를 많이 사용했고 사전 산소 농도 측정 여부는 저희가 알 길이 없습니다. 안전 교육은 전무하고요. 원청은 우리가 작업 허가서에 서명을 했는지만 확인합니다.”

현장에는 냉방 장치도 없어 여름이면 땀범벅이 되어 일한다. 야간 노동으로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고, 30년을 일해도 신입 직원과 똑같이 최저 시급을 받는다. 이들을 더 힘들게 하는 건 희망이 없다는 점이다. 이완규 씨의 말이다.

한 달에 100~150시간 잔업을 하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애들 뒷바라지하고 나면 남는 게 없어요. 제 나이도 50대 중반이 넘어서 노후 자금도 준비해야 하는데.”

100시간 이상 잔업 및 야간 노동에 상여금 600퍼센트를 합쳐도 정규직 임금의 30~4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복지도 크게 차이가 나는데, 대표적으로 정규직은 모든 자녀의 대학 학자금 전액을 지원받지만 비정규직은 1년에 60만 원이 고작이다. 이런 현상은 자연스레 여수 지역 계층 간 격차로 이어진다. 구성길 씨가 말한다.

공단 정규직 자녀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이렇게 따로 다녀요. 회사 버스가 등하교 시켜 줘요. 어릴 때부터 분리되죠.”

이완규 씨는 자녀들에게까지 빈곤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솔직히 공부를 좀 못해서, 빽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고생하는 건 숙명으로 알랍니다. 그런데 집에 있는 가족들은 무슨 죄가 있냐는 말이에요. 가족들만 생각하면 정말 피눈물이 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2년마다 하청 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었지만 고용 불안에 대한 걱정은 크게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남해화학이 입찰 조건으로 고용 조건 저하 없는 고용 승계를 내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5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고용 승계 조건을 없앴고 최저가 입찰로 유진피엘에스와 계약을 맺었다. 유진피엘에스는 교섭 해태, 임금 체불, 부당 노동 행위를 일삼고 어용 노조인 제2노조를 설립해 기존 비정규직 노조를 탄압했다. 정규직 노조와 당시 상급 단체였던 한국노총에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없었다.

남해화학 생산 라인 현장에 피켓이 걸려있다. 사진 제공_ 남해화학비정규직지회


지회는 한국노총의 한계를 느끼고 2016년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했다. 2017년 여름, 지회는 농협 본사와 청와대를 오가며 53일간 파업했고 결국 유진피엘에스를 입찰에서 탈락시켰다. 그런데 2년이 지나 이번에는 민주노총 조합원만 표적 해고됐다. 지회는 2년마다 고용 불안이 재발하지 않도록 이번 투쟁에서 확실하게 매듭짓고 싶다. 전국농민회총연맹도 남해화학의 행태를 규탄하며 불매 운동도 불사하겠다는 성명서를 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 등 관련 정부 부처는 팔짱만 끼고 있다. 김만수 씨가 말한다.우리한테 양보하라고만 해요. 최저 시급 받는 사람이 양보할 게 어디 있습니까?”

연 매출 1조 원이 넘고 이익 잉여금 33백억 원을 보유한 남해화학이 양보해야 할까, 아니면 최저 시급 노동자가 양보해야 할까. 상시적이고 꼭 필요한 업무인데 왜 비정규직을 쓰는 걸까. 근본적인 물음들이 떠오른다.

* 12월호 인쇄 직전, 지회는 해고자 전원 고용 및 단협 승계 타결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1119, 옥쇄투쟁 51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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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8)

 

이만큼 했으면 다 한 거지 뭐!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오늘 딸아이 고등학교 입학을 위한 면접을 다녀왔습니다. 고등학교라니! 써 놓고 보니 더 낯섭니다. 아이가 가고 싶은 학교는 본인뿐 아니라 학부모도 자기소개서를 쓰고, 면접도 봐야 하는 곳입니다. 면접에 임한 선생님들이 어찌나 푸근한지 하마터면 퍼질러 앉아서 푸념을 늘어놓을 뻔했습니다. 들어갈 때 사교육 포기 각서를 쓰게 하는 고마운 학교라서 꼭 붙었으면 좋겠다 싶습니다.

자소서에 면접까지 마치고 나니, 할 일을 다한 기분입니다. 붙으면 너무 좋겠지만, 떨어져도 이제부터는 뭐 자기 인생이지요. 좀 더 건강한 환경에서 입시 준비 따위 말고 정말 배움이 있는 공부 시키고 싶어서 부린 욕심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혼자 키우는 동안 아이는 내게 늘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갓난쟁이일 때는 젖 물리고 똥오줌 닦아 주며 생존시키는 그 자체가 하루하루 도전이었지요. 제 발로 걷고 밥 먹고 할 때부터는 먹고사는 일, 집안 살림, 육아를 동시에 해내야 하는 것이 도전 과제였습니다.

미션클리어해 가면서 레벨 업되었던 시간을 가만 돌아봅니다.

한 사람이 이 모든 걸 다 하려면 다른 사람하고 연결될 여력이 없어지는 게 당연한데요. 내 경우엔,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 그리고 방학이라는, 어쩔 수 없는 엄마 부재의 시간을 메우기 위해 늘 누군가한테 도움을 요청해야 했습니다. 딸아이 말마따나, 엄마가 없으면 아무도 없는 거니까, 민폐를 끼치고 은혜를 갚고 하는 수밖에 없었지요. 어떤 때는 끼친 폐가 많아 약소한 은혜 갚음으로는 갚아지지 않기도 했고, 어떤 때는 작은 민폐에 너무 많은 죄책감으로 자폐에 이르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그 균형이 잘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마는, 덕분에 혼자 고립되지 않을 수 있었고, 뜨겁고 진한 관계망들이 도처에 생긴 것 같습니다.

딸아이 레벨도 많이 높아졌는데요. 첫째로, 아기 때는 어린이집에 가장 먼저 가서 가장 늦게 나오는 신세다 보니 감기며 중이염이며 병을 달고 살았습니다. 지금은 감기 한번 심하게 앓지 않으니 몸이 많이 좋아졌지요. 둘째로, 터진 입으로 못하는 말이 없고, 튀어 오르기가 하늘 높은 줄을 모르다가 말도 제법 가려 하게 되고, 문도 살살 닫고, 화도 덜 내고, 급기야 좋은 마음이 들 때는 좋은 이야기를 꺼내 놓기도 합니다. 이 녀석이 한번 구기면 너덜너덜해지는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생긴 모습 그대로 다시 튀어 오르는 용수철이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레벨 업 되는 과정을 쓰다 보니 어느새 이번이 마지막 연재 글입니다.

내 살아온 이야기를 하자면 몇 날 며칠은 떠들 수 있지, 책이 몇 권은 나오지 싶었는데, 실은 <작은책>에 한두 번 말하고 나니 당장 밑천이 바닥이 났더랬습니다. 이 앙상한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송추향 씨는 우리 나이로 마흔두 살이다. 부산에서 태어났고, 동생이 둘 있고, 집이 너무 못살았다. 송추향 씨 어머니는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역시 못살았지만 자기 아버지 몫으로만 올랐던 쌀밥을 받아먹을 수 있을 만큼 귀하게 자랐다. 그러다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임신했을 때 밀감이 먹고 싶었는데 살 돈이 없어서 밀감 껍데기를 씹어 먹었다고 했다.

송추향 씨 아버지 또한 남해라는 섬에서 태어났고 집이 못살았다. 장남이지만 공부가 싫어서 집을 뛰쳐나가 부산에서 노가다를 하며 살다가 결혼해서 송추향 씨를 가졌다. 여전히 너무 못살아서 그 고단함을 하나도 거르지 않고 아내와 자식에게 풀고 살았다. 그러다 2002년 암에 걸려 비로소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었다.

송추향 씨 아버지의 노동 해방은 어머니의 노동 굴레로 넘겨졌다. 새벽에는 신문을 돌리고 건물 청소를 하고, 낮에는 아이나 어르신을 돌보고, 보육 교사를 하고, 간간이 이삿짐 나르는 일을 했다. 그러다 콩팥에 병을 얻어 일주일에 이틀 투석하는 동안, 비로소 쉰다. 아직 노동에서 해방되지는 못하고 여전히 새벽에는 건물 청소를 하고, 주말에는 아이 돌봄을 한다.

송추향 씨는 부모가 아직 젊을 때에 독립을 해서 식구들하고 크게 상관없이 살다가 18년 전에 아이를 가져 이듬해에 낳았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법을 몰라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가 대학생은 육아에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길로 송추향 씨의 수정란에서 정자의 지분을 갖고 있는 한 남자를 불러다가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결혼 생활을 시작하자마자 그 남자가 아팠다. 몸이 아프자 정신도 황폐해져 폭언과 폭력을 일삼았다. 송추향 씨는 어느 날 1년 남짓한 결혼 생활을 접고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그동안 안중에 없었던 부모님 집에 아이를 맡기고 날마다 서울로 출근하고 부산으로 퇴근하며 살았다. 송추향 씨 전남편이 불쑥 부산 집에 나타나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했을 때, 송추향 씨 부모님은 군말 없이 손녀를 보내 주었다.

송추향 씨가 다시 아이를 되찾아올 때까지는 5년 반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싸우고 어르고, 법정 다툼까지 한 뒤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송추향 씨 딸은 아빠한테 많이 시달리며 살았다. 다시 돌아온 딸은 욕도 잘하고 화도 잘 내고 무엇보다 슬픔이 컸다. 그 쏟아 내는 것들 앞에서 쩔쩔매면서 송추향 씨는 다 받아 줄 거야라고 허풍을 떨었다. 그것이 허풍이었다는 것은 급격히 하얗게 센 머리칼 때문에 다들 눈치챌 수 있었다. 송추향 씨는 딸이 불행에서 행복으로 건너온 표식을 달아 주고 싶었다. 딸의 성을 송추향 씨 성으로 바꾸었다.

송추향 씨가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한 적은 없다. 하지만 스무 살이면 사람은 자기 밥벌이하며 스스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자기 몸에 아기가 생겼을 때, 그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것은 온전히 자기 혼자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했다. 아니, 다시. 아이는 생긴 이상 누구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그저 잘 태어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다. 생물학적 지식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송추향 씨가 여자니, 아이는 당연히 딸이라고 생각했다. 생리 기간에 수영장에 오지도 말라고 하고, 돈도 환불해 주지 않는다고 해서, 남녀 차별이라고 인권위에 제소했다. 엄마가 키우면 자식은 엄마 성을 붙이는 것이 맞다고 믿고, 나중에 그 자식이 크면 자기 스스로 이름을 붙여 살기를 바란다.

그 딸이 지금까지는 엄마가 자기 눈치를 200만큼 보다가 이제는 자기 눈치를 100밖에 안 본다며 불만을 표시할 때, 송추향 씨는 자기가 딸 눈치를 200만큼 보는 줄을 알아줘서 고마워했다. 또 자기가 딸 눈치 보는 일이 100으로 줄었을 때, 나머지 100은 딸이 자기 눈치를 보아 주는 거라고 여겨서 고마워했다.

혼자 날아다니며 살 것 같았던 송추향 씨는, 상태가 좀 괜찮아진 사춘기 딸과 이제는 늙고 병든 부모님이 안중에 들어왔다. 그래서 더는 날아다니지 못하고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엊그제 딸한테서 엄마는 혼자 아이 키우는 엄마로서의 정체성은 상실한 사람이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때는 날씨가 흐린 것 같다고 하더니, 오늘 고등학교 면접 자리에서 면접관이 딸아이한테 너에게 엄마란?’ 하고 물었는데 고마운 존재라고 답했다는 소식을 건너건너 듣고, 날씨가 참 좋다고 했다.

 

A4 용지 달랑 한 장이면 끝날 이 얄팍한 삶을 열여덟 번에 걸쳐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은, 하찮은 이야기에도 두 눈을 반짝, 두 귀를 활짝 해 주는 <작은책> 독자님들 덕분이었습니다. 맨날 마감이 늦어 이쁜 이분 언니, 분이 나게 만들어서 미안했어요. 의식에 흐름에 따라 늘어놓는 구멍 숭숭 난 이야기에 늘 안성맞춤의 그림으로 단단히 메꾸어 주신 최정규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림_ 최정규


내가 열여덟 번에 걸쳐서 쓴 것들은, 모두 그냥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작은책> 독자님들과 같이 나누고 싶은 이야기였습니다. 이제 쓰는 일의 무거움이 사라졌으니, 듣고 나누러 다니겠습니다. 특히 나에게 힘껏 말을 걸어 주신 해옥님, 대구여자님, 채민님, 정희님, 은숙님, 서해님. 아직도 괜찮다면, 늦더라도 꼭 갈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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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독서 모임과 페미니즘

김병수/ 회사원

 

 

아니 왜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항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해?

아내가 못마땅해하며 소리 질렀다.

나 락스 세제로 청소하라는 말 못 들었어. 언제 그런 말 했어?”

나도 아내에게 화를 냈다.

내가 세 번씩이나 락스 세제를 묻혀 수세미로 닦으라고 했잖아.”

아내는 쏘아붙였다. 생각해 보니 아내가 한 번쯤 이야기 한 것 같았다. 아내는 매사에 내가 허술하고 자기 말에 전혀 집중을 하지 않는다고 누누이 지적해 왔다. 결혼 후 줄곧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도 직장을 다니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고등학생 아들과 딸에게 밥 챙겨 주고 부랴부랴 출근한다. 저녁때는 급히 퇴근하자마자 음식 장만을 한다. 자기 시간이 없다. 내가 늦게 퇴근하고 집에 오면 아내는 지친 몸을 소파에 의지하고 있거나 피곤에 지쳐 자고 있다. 반복이다. 왜 나만 밥을 하고 반찬을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하냐고 아내는 투덜투덜한다. 반면 나는 설거지, 빨래 개기, 화분에 물 주기 등 집안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내는 책 읽기, 독서 모임, 영화 모임 등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애써 찾아 하는 내가 밉다고 했다. 그럴 때는 내가 너무 하나, 아내를 도와줘야 되는데후회를 하곤 한다. 그때 뿐이다. 계속 이 생활은 반복이 되고 있다. 왜 여자만 일하고 남자는 시간이 남으면 집안일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며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 참석한다. 일상에서 나타나는 남성 중심 생각과 행동에 대해 책 내용과 견주어 토론을 하는 모임이다. 그동안 대여섯 권의 책을 읽었다. 여자라는 그 자체만으로도 차별을 받고 있고, 사회가 여자를 낮게 보는 현상이 난무하다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당연한 것이라고 여긴 것들이 여자의 시각으로 보면 차별로 인식된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졌다.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다면 남자의 시각에 사로잡혀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을 것이다. 집에서 일어나는 아내의 짜증은 남자의 가부장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페미니즘 모임에서 지적한 것들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것이다. 공부 따로 생활 따로다.


토론한 책 중에 양성평등에 반대한다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맞벌이 남편은 청소를 하고 아내는 요리를 하는 것으로 평등하게 가사 분담을 한다. 문제는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청소를 하지만, 매일 아침밥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빨래, 화장실 청소, 설거지를 한다. 그런데 아내가 더 많이 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책 당신이 계속 불편하면 좋겠습니다 일정한 폭력의 감각은 내 일상을 채운다. (중략) 가장 빈번한 폭력과 착취는 일상 속에 존재한다.”라고 강조한다. 일상에서 내가 은연 중 내뱉은 말과 행동이 성적 학대인지 모르고 살아왔다. 끔찍하다.

페미니즘 모임은 고정 참석자가 세 명이다. 모임을 주관하는 리더()와 나머지 둘(남과 여)이다. 한 번은 태풍이 온다는 뉴스에 모임을 다음으로 미루자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토론할 내용을 많이 준비해서 다음으로 미루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리더와 나는 다음에 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리더의 권한으로 다음에 하자고 카톡에 선언을 했다. 그 이후에 그녀는 모임에 탈퇴했다. 남성의 힘으로 여성의 의견을 묵살한 형태가 되었다. 그 이후 결국 모임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리 이론적인 페미니즘을 외쳐 봤자, 생활에서 내 행동이 변하지 않았다. 페미니즘에 대해 모르는 대부분의 남자는 오죽할까? 지금도 탈퇴한 그분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일상에서 실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실감했다.

양성 평등에 반대한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성별 이데올로그는 남녀 모두 깊이 내면화되어 있어서 여성주의자조차 반박하기 쉽지 않다.” 이는 너무 내면화되어 있어서 아무리 바꾸려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이다.내면화되어 있는 육체와 정신을 깨는 작업은 어렵다. 그러나 어렵기 때문에 지금부터라도 의도적으로 일상에서 실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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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1. 28. 14:28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고창수

발행인의 글

 

독자님들, 벌써 2019년 마지막 달이네요. 모두들 새해 첫날에 마음먹은 대로, 계획한 대로 올해 잘 보내셨나요? 지난 2019년 새해 첫날에 계획했던 것들이 과연 몇 가지나 이루어졌을까 점검하는 달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년 계획을 세워야겠지요.

<작은책>은 올해 24살이었습니다. ‘작은책 올해의 인물은 김용균재단 대표인 김미숙 씨입니다. 김미숙 대표는, 지난해 12월 한국서부발전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을 하다가 석탄 운송 설비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진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입니다. 고 김용균 씨는 우연히도 <작은책> 나이와 같은 24살이었습니다. 왜 이런 젊은이들이 비정규직으로 세상을 허망하게 마감해야 하나요. 그렇게 산재로 사망하는 노동자들이 1년에 2천여 명이 넘습니다. 그런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김미숙 대표는 사랑하는 아들을 잃고 용균이와 똑같이 산재사고로 죽는 노동자는 없어야 한다며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작은책> 25주년인 내년에는 몇 가지 꼭지가 달라집니다. <작은책> 창간호를 만들 때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정신으로 돌아가 일하는 사람들이 쓴 생활글 비중을 더 늘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동안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했던 송추향 씨 글이 끝나고 대한항공 승무 노동자인 김수련 씨가 1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또 어떤 삶이 펼쳐질까요? 새로 꾸리는 <작은책> 1월호를 기대하십시오.

 

20191118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세상을 밝히는 잿빛 노동자들 이동수

10 발행인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독서 모임과 페미니즘 김병수

15 공산주의자? 굳이 부정 않겠다 정인권

18 부부 30년 맞짱일기

7천 원 때문에 헤맨 사연 최해옥과 이동수

23 청년으로 살아가기

전세 1! 방 구했다 유지향

27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연밥 만들려면 먼저 장화를 사세요 윤혜신

32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인기

34 살아온 이야기(18)

이만큼 했으면 다 한 거지 뭐! 송추향

40 교장 일기

믿고 의지하는 학부모와 담임의 관계 최관의

44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은 가능성을 가진 존재 권해진

48 교실 이야기 난이도가 높은 아이들 관계 구자숙

53 산골부부의 시골살이

농산물 연대의 행복은 이런 맛! 조혜원

57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0 일터 탐방_ 남해화학 비정규직

표적 해고당한 민주노총 조합원들 정인열

66 일터에서 온 소식

은수미 시장님, 약속을 지키세요 유미라

71 작은책 법률 상담소

몰래 한 녹음, 불법 아니야? 박시진

 

작은책 올해의 인물_ 김미숙

75 네 손을 놓쳐 버린 게 가장 아프다 안건모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이동수

 

세상 보기

98 존버 씨의 시간들 야간 노동 하는 태그팀 커플 김영선

103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세월호와 아직 죽지 아니한 자고태경

108 어린이 해방과 평화

뒷간에 글씨를 쓰지 말기로 합시다 이주영

113 여성으로 살아가기 어둠 속에서 춤을 출래 홍승은

118 생태 이야기 자연 잃은 사과나무와 우리의 고통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3 오앵의 일상의 온도 오앵

124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아리송한 유물, 이건 어떻게 썼지? 박찬희

128 책 읽고 딴 생각 너의 상처는 너에게나 성역 변정수

131 독립영화 이야기 내 안의 금기가 선명해지는 시간 류미례

136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삽 이름들을 찾아서 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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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강사법 적용 이후에 생긴 일

김어진/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서울경기인천강원지역 분회장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맘 때쯤이면 한 학기 강의 줄거리의 서론이 지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굴도 조금씩 익어 가고 학생들의 표정도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는 늦은 결혼에, 아이까지 낳고 나서였다. 8년 동안 다섯 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일명 보따리 장사를 전전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호흡했던 그 순간은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학생들의 밝아지는 표정과 함께 느낌표가 공중에서 떠다니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강의 준비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조교에게 연락이 올까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하면서도 연구와 강의를 안정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었다. 연구실은커녕 휴게실조차 없어서 창고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얘기, 대형 강의의 경우 채점하느라 졸도 직전까지 갔다는 얘기, 부당한 것 따지면 곧바로 강의 못 받을 것이 뻔해 숨죽여 왔던 대학 시간강사들의 얘기들은 12권 전집으로도 모자라다.


강사법 적용 이후로 1년마다 계약을 하고 3년 보장이라 하니 이번 학기부터야 이런 불안감은 좀 덜해질지 모른다. ‘교원지위 보장이 대학 시간강사 신분의 안정성을 보장해 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공개채용 과정에서 많은 대학 시간강사들이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전임 수준의 연구 경력을 요구하는 학교가 적지 않았다. 생계형 시간강사들은 제대로 논문 쓸 시간도 여유도 없다. 대학에서 부교수가 된 친구는 최근 학기당 18학점 이상을 강의해야 했는데 그조차 논문은 방학에야 겨우 한 편 쓸까 말까 할 정도라고 한다. 자기 연구실도 있고 연구비도 쓸 수 있는 전임교원조차도 논문 쓰는 시간과 여유가 팍팍한데 생계형 대학 시간강사들은 오죽할까. 교육부가 해고 강사들을 지원하겠다며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연구 지원 사업에 얼마나 많은 해고 강사들이 지원했을지도 걱정이다(교육부 통계로 해고 강사가 7500명이라는데 지원 대상은 2000명에 불과). 그런데 한 대학은 최근 3년간 등재지 논문 3편을 요구했다!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었다.

4대 보험이 되는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어 대학들이 좋아라 하는 겸임초빙 교수를 미리 왕창 뽑아 놓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겸임초빙을 빙자하라며 여전히 건강보험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 공정성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말이 공채지 내정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대학이 물갈이를 하려 했는지 반백 살 넘어간 선생님들은, 특히 인문 사회 쪽에서는 낙방(공채 탈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힘든 여름이었다.

강의를 잡은 선생님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3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대학 시간강사들이 모이면 다들 하는 얘기지만, 10년 가까이 대학 강의를 하면 강의 기술이나 경험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강의실에서 학생들 눈빛을 보면 우리는 대번에 안다. ‘, 내 말이 좀 어려웠구나!’ ‘! 이제는 알아들었다는 얘기구나!’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의 강점과 약점, 그들의 고민,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야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연구 동향, 국제 비교 사례, 서점에서 20대들이 많이 보는 책 동향, 심지어는 청춘 개그감 등을 익히면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다. 박봉에, 그것도 1회용 휴지 취급해 왔던 대학이 이제는 우리에게 높은 진입 장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지난여름에 똑똑히 목도했다. 예순이 다 된 한 대학 시간강사 대선배님은 면접까지 보라는 말에 깊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고 토로했다.

낙방한 선생님들은 왜 낙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시에 탈락한 수험생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을 정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됐다는 시간강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들이 빼곡이 적어 놓은, 우리들의 노하우가 담긴 강의계획서들을 만끽한 대학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내쳐 놓았어도 제대로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치며 교육기관으로서 본분을 다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개강 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한 대학 시간강사 선생님은 너무 놀랐다며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 동안 오랫동안 그 대학에서 강의해 온 50대 선생님들은 다 잘리셨다’(나이 많은 강사들에게 적은 강사료 주고 부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전공선택 과목이었고 정원이 20명인데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교양 과목이 대폭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 ‘한 교양 과목은 수강 인원이 300명이라고 한다’(그래서 학생들은 학기 초에 방트-방귀 터도 되냐- 인사를 한다).

나는 지난 3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잉여인간이 아니다’. 이런 외침은 2학기에도 유효하다. 맞다. 우리는 쓸모없는 퇴물이 아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었던 그 느낌표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대학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필요한 대한민국의 대학 시간강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이고 분노의 강사들이기를 원한다. 지금 돈벌이가 우선인 대학을 초4인 내 딸이,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도 괜찮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망과 낙담보다 분노와 투쟁에 동그라미를 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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