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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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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작은책>/안건모의 사람여행'에 해당되는 글 2

  1. 2021.04.09 10년 버티니 농사꾼 소리 듣더라
  2. 2021.02.02 복직 없이 정년 없다

강화도에 사는 <작은책> 독자 몇 분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중에 17년 동안 <작은책>을 꾸준히 보고 있는 조영보 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귀농한 분이라는데 어떻게 귀농에 성공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강화에 있는 또 다른 독자 함경숙 씨도 만나 보고 싶었다.
 
 

▲   조영보 씨가 트랙터 앞에서 포즈를 잡았다  ⓒ 안건모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1002번길, 알려 준 주소로 가 보니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가 나왔다. 둘레는 온통 논과 밭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곳에서 조영보 씨가 나온다. 키가 크고 무뚝뚝해 보였다. 조영보 씨는 지금 집 안이 엉망이라 치우는 중이라며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큰아들이 잠깐 집에 왔는데 짐 정리가 안 돼 있어서 엉망이라는 것이다. 스물여섯 살인 작은아들은 농사꾼이라고 했다. 요즘 젊은이가 농사꾼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그것부터 물었다.
 
"청년이 어떻게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까요?"
 
조영보 씨는 집 뒤에 있는 낮은 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이 산마을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저게 산마을고등학교예요. 군대는 안 갔어요. 농수산대 나온 친구들은 병역 대체가 돼요. 방위산업체 요원처럼. 농사짓는 걸로. 자기 농사만 지으면 돼요."
 
 

▲   오른쪽 끝이 조영보 씨의 집. 왼쪽 끝이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다.  ⓒ 안건모
▲   집에 들어가기 전, 조영보 씨 집 앞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 안건모

 
조영보 씨 말소리가 워낙 조용한 데다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아, 그런 제도가 있군요. 젊은 친구들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진로인데요? 병역 대체복무로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낫겠네요."
 
"청년들은 가능해요. 농사로 병역을 필하겠다고 원서 제출만 하면 가능해요. 여기 졸업하면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제도. 원래 한시적 제도로 폐지하려고 했는데 폐지를 못했지요. 농업 인원도 적어요. 4주 논산 교육이 끝나면 논농사, 포도 농사, 다 조금씩 하는 거죠. 안 대표님은 제가 전에 뵌 적이 있어요. 예전에 대보름 놀이할 때, 오셨을 때 봤어요."
 
"아, 3년 전 대보름 놀이할 때요?"
 
"그 행사를 제가 총괄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2년째 못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2년 전 대보름 때 볏짚 태우기와 쥐불놀이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작은책> 독자라고 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사람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영보 씨 부인 이은순 씨가 방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말한다.
 
"추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 잔뜩 쌓여 있는 걸 상상했는데 의외로 깨끗했다. 이은순 씨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조영보 씨 집 거실에 있는 책장 중 한 귀퉁이 모습.  ⓒ 안건모

 
"<작은책>을 어떻게 보기 시작했어요?"
 
"2005년에 귀농학교 갔다가…. 서정홍 씨 강좌 때였죠. 이진천 씨가 사무처장 할 때였는데 자기도 <작은책>에 글을 쓴다고 하면서 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봤을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귀농통문>하고 <작은책>은 꼭 봐요."
 
'귀농학교'란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는 강좌다. 귀농운동본부는 1996년 1기 생태귀농학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연과 마을에 뿌리내리는 귀농'을 실현할 수 있도록 생태귀농학교를 열어 오고 있다. 벌써 86기인데 귀농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들어야 할 강좌다. 귀농 강연뿐만 아니라 전통술 빚기, 시골집 고쳐 살기, 발효빵 만들기, 생활기술학교 등 분야가 다양하다. 나는 생태귀농학교 58기 때 수강을 했는데 아직 귀농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농사는 재밌어요?"
 
"재미있으니까 하겠죠. 하하. 그때는 특별히 귀농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 나도 개인의 삶도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40대 초에 귀농을 하자고 생각하고 귀농 교육을 듣고, 처음에는 준비하고 갈까 생각했는데, 준비해서 갈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가자, 생각 없이 온 거죠."
생각이 너무 많고 계획을 세워 귀농하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조영보 씨는 운동권이었다. 잘난 체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고 감정 없이 아주 건조하게 살아온 경력을 큰 줄기만 이야기한다.
 
"학생운동 하고 대학 졸업 못 하고, 노동운동 하고…. 인천에서 하다가 나중에 권인숙 씨가 노동인권회관 세울 때 같이 활동했어요. 그다음 결혼하고 고민했죠. 권인숙 씨는 미국 가고 저는 결혼하고 근처 살면서 운동하긴 했는데 먹고사는 데 애쓰고. 1991년에 결혼했어요. 93년, 95년에 낳은 아들만 둘이고. 아이 엄마는 구로공단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어요. 나우정밀 부위원장까지 지냈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처음에 위장취업으로 들어갔다가 잡혀서 집행유예로 나왔는데 집행유예 기간에 또 들어가서 2년형을 받았어요. 89년쯤인가?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몰아서…. 집행유예 기간이라고 실형을 산 거죠."
 
조영보 씨는 학생운동 하고 결혼할 때까지, 단 세 줄로 자기 이력을 말한다. 자신은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내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한다. 성함은 이은순 씨. 나중에 검색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영보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조영보 씨는 인천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는 주물 공장에 다녔어요. 87년부터."
 
"왜 노동운동에 투신했어요.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더 끌어내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 그때는 나처럼 대학을 못 들어가고 공장을 다녔던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사회의식에 눈을 뜬 학생이나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조영보 씨 또한 그런 사례였다.
 
"그때는 독재정권 때였으니까 다들 노조 만들고 징역 가고 그랬죠. 저도 한 번 잡혔지만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그것 때문에 군대 안 가고. 그때 대부분 친구들이 그랬어요."
 
조영보 씨는 노동운동 할 때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까 봐 그런지 거기서 끊고, 갑자기 강화도 들어온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강화도 들어온 거는 특별한 이유 없고, 연고도 없었죠. 부모님과 아내가 귀농을 반대했어요. 애들 어린데 벌어 놓은 것도 없이 귀농한다고 반대가 심해서…. 일산에 살 때였는데 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생태 귀농 교육을 받고 어느 날 귀농운동본부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강화도 양도면에 하우스 짓고 하는 노가다 일이 나왔어요. 사람 하나 쓴다고. 그때 가진 돈도 없었고 전세금 뺄 수도 없어서 800만 원 들고 가려고 했더니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가라고 해요. 그때 큰애가 중학교 2학년, 작은애가 초등학교 6학년. 애들 데리고 가겠다고 했죠. 큰애는 중학생이니까 졸업하면 데려가기로 하고, 작은애만 먼저 데리고 왔죠. 월세방 하나 구해서."
 
말하는 도중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말을 끊지 않으려고 맞장구만 치면서 들었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온 거니까, 의식적으로 다른 활동을 피했죠. 도시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있었거든요. 마을 생협 상근하거나. 그런데 그런 거는 일체 안 맡은 거죠.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 되겠다. 와서 쭉 하다 보니까 다행히 몸 안 아파서."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어요?"
 
"불편하죠. 모든 것이 불안정하죠. 집도 없고. 내가 이 집에서 계약이 끝나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나 걱정이 되고. 농지도 없으니까. 또 불리한 농지를 얻게 되니까 힘들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농지를 왜 외지에서 온 사람한테 주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사람들을 잘 만났던 거 같아요. 여러 사람 도움을 받은 거죠. 저 나름 열심히 살긴 살았지만 과정마다 도움을 받았던 거 같아요."
 
"처음 농사지을 때 어땠어요?"
 
"처음에 농토가 없으니까 2, 3백 평 농사를 지었죠. 수입이 1년에 30만 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 도장리로 귀촌한 동네 누님이 동네 아줌마한테 포도밭을 얻은 거예요. 그 누님이 같이 포도 농사 하자고 해서 그 누님하고 친구하고 셋이서 포도 농사를 했죠. 귀농 3년차였을 거예요.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주변에서 말들 많았죠.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포도 농사는 괜찮았어요. 처음엔 모르고 잘됐고요. 남들 안 하는 유기농으로 했죠. 여기 양도리가 포도로 유명한 데예요. 유기농으로 지었는데 첫해는 잘됐어요. 맛있고 가격도 비싸고. 양이 많지 않아서. 동네에서 그랬을 거예요. 저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잘하네. 우리는 뭘 모르고 한 건데. 둘째 해는 망했죠. 바로 실력을 검증받았죠. 정성만 갖고 안 되는 게 있어요. 다 헤어지는 걸로 됐어요. 저는 그 포도밭이 딸린 집으로 이사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참으면 살아남는 것일까. 조영보 씨는 행운이 따랐다고 한다.
 
"당시 외지 사람들이 농지를 많이 샀어요. 투기하려고 사니까 대부분 그런 논들은 농사를 안 짓죠. 농사는 안 짓고 이장에게 빌려줘요. 그런데 제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거예요. 시골에서 저는 젊은 축에 속하는 거죠. 젊은 사람이니까, 나를 보더니 '당신이 맡아서 해라' 하더니 '또 딴 데도 할 수 있나요?' 해서 '네.' 했죠. 저는 고맙죠. 그렇게 논을 빌렸어요."
 
귀농이 성공하려면 농사꾼이 돼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농촌에서 농사꾼이 될 수 있는 길은 일단 자기 농토가 있어야 한다. 임대차 계약서로는 농지 원부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조영보 씨는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받아 대신 경영을 해 주는 계약을 맺고 농지 원부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임대차로 농지 원부 만들기가 어렵거든요. 농어촌공사에서 받은 서류는 관에서 증명하는 서류라 된 거죠. 운이 좋았어요. 농지 원부가 되니까 애들 학자금이 나오고, 서류상 농부가 되니까, 그 당시 등록금 있었는데 그걸 안 낼 수 있게 된 거죠. 임대료 몇 배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농협도 가입할 수 있었고. 조금씩 농업 소득만으로 살 수 있게 됐죠. 5년 정도 하니까 조금 농사 경험도 쌓이고…. 그렇다고 농사로 돈을 버는 건 아니죠. 전 덜 쓰면서 살자는 주의라서 버틸 수 있었죠. 둘째가 산마을고등학교 갈 때 아내와 합류했어요. 아내는 일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애들 초등학교 방과후 실험 선생님. 그거 하다가 나이 먹으니까 초등학생 상대하는 것도 힘들고 맨날 보따리 들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1년 계약이잖아요. 여기서도 수업 계속 할 수 있으니까 강화로 왔죠. 그런데 강화엔 학생들이 별로 없어요. 한두 해 하다가 그만뒀죠. 아내가 와서 집은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빌려서 살고 있는 그 집이 너무 추웠거든요. 창틀이 벌어져 찬바람이 들어오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죠. 전 제가 농사짓는 논밭이 있는 도장리 쪽에 구하려고 했어요. 근데 아내는 싼 데 있으면 빨리 지어야 한다고 했지요. 더 버티기엔 힘들었죠. 그래, 내가 논으로 출퇴근한다고 생각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이 집을 지었어요."
 

▲   조영보 씨가 토양시료 봉투에 흙을 담고 있다. 이 토양시료는 유기농 인증을 하는 데 필요하다.  ⓒ 안건모
▲   토양시료를 담는 봉투.  ⓒ 안건모

 
"아들이 농사를 같이 지으니까 이제는 좀 안정이 됐죠?"
 
"저는 논을 임대해서 만 평 정도 짓고 있고요, 아들은 논을 샀어요. 융자를 받아서. 요즘 2억까지 융자해 줘요. 지금 청년 농부들은 괜찮아요."
 
아,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면 유리한 점이 있겠다.
조영보 씨는 자리를 잡아 가면서 강화라디오에도 나가서 방송도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운영하는 꿈틀리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농사도 가르친다.
 
"농사를 하나의 중요한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에서 한 건 아니고 논에서 했어요. 300평 논 하나가 있어서 이건 니네가 해라. 내 성격은 막 다그치는 게 아니고…. 농사를 잘 못 지으면, 안 먹으면 되지, 뭐. 근데 잘돼요. 손 모내기할 때는 어설픈데 기계보다 잘 자라요. 매년 본인들이 수확해서 말리는 것까지. 도정해서 나오는 쌀을 다 가져가요. 전 도지와 비용도 있으니까 좀 받죠. 많이 나올 때는 보통 여섯 가마 정도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100평에 두 가마가 평균이에요. 대여섯 가마는 나와요. 부모들이 대견해하죠. 계속 하고 있어요."
 
다시 <작은책> 이야기를 꺼냈다. 17년 동안 <작은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른 책도 많이 봤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과 사상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가가 무척 중요하다. 조영보 씨는 어떤 책을 읽고 지금의 세계관이 형성됐을까 궁금했다.
 
"<작은책>을 봤을 때 주로 어떤 내용을 재미있게 봤어요?"
 
"그 당시 농민이 쓴 꼭지를 주로 봤고요. 책은 전체를 죽 보는 편이에요."
 
<작은책>은 2003년 11월호부터 '농촌 들녘에서 만난 사람'을 연재했다. 처음엔 서정홍 씨가 연재했고 그 뒤를 이어 받아 2006년 4월호부터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처장인 이진천 씨가 2007년 12월까지 연재했다. 주로 귀농한 사람들의 사례를 실었는데, 그 꼭지를 보고 귀농한 분들도 있고 독자끼리 인연이 맺어져 결혼한 분들도 있다.
 
"요즘 <작은책>에선 기억나는 게 있나요?"
 
"요즘엔 주로 서평을 재미있게 보고. 얼마 전에 미술사? 그걸 재미있게 보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보고…. 재밌게 본 거는 만화가 이동수 부부가 쓴 글. 남편과 부인이 다른 관점으로 쓴 글을 재미있게 봤어요."
 
또 어떤 책을 봤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다시 강화 이야기로 돌아간다.
 
"도장리는 젊은 친구, 시민 운동하시는 분들도 많고, 문화적인 그런 것들이 많아요. 넓벌이라는 풍물패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10년 돼 갈라나? 그 전엔 모여서 술만 엄청 먹었죠. 술만 먹지 말고 풍물이나 하자. 풍물 잘하는 사람 한 명 초청해서 한 번 배우고, 그 뒤에 일체 관의 도움 없이 대보름날 행사를 만들었죠. 그런 모임이 활력이 됐고, 책 좋아하니까 강화독서회 모임 하면서 강화에서 하는 책방에서 책을 사자. 읍에 청운서림, 도장리에 있는 책방 국자와주걱 두 군데서 책을 샀어요."
 
"혹시 그 책방 국자와주걱 대표 김현숙 씨가 포도밭을 빌려준 사람인가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는 분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일 거라 짐작하고 물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   강화도에 있는 책방, 국자와주걱.   ⓒ 안건모
▲   책방 국자와주걱 안의 모습. 이곳에서는 숙박도 할 수 있다.   ⓒ 안건모

 
"네, 그 누님이 포도밭을 빌려줬어요. 인천에서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 분들 도움받은 거죠. 그 형님도 같은 풍물패고…. 지금은 4, 50대가 모여 교류를 많이 해요. 강화라디오도 1년 했죠. 강화라디오를 만드신 분들이 제가 살아온 이야기와 농사일 이야기 해 달라고 해서 1년 했어요. 20분 동안 대본 없이 떠들었죠. '조 아저씨의 농사 이야기' 2주에 한 번, 20회 정도 했을 거예요. 그때는 초보 농사꾼 이야기를 했지요."
 
조영보 씨는 자기 삶에 만족해했지만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다고 한다.
 
"너무 자기 위주로 산 것 같고, 다른 사람이 보면 남을 위해서 산 것 같은데 가족들이 보면…. 저는 형편에 맞춰서 살아야 된다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주의였어요. 애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엄마 아빠는 능력 없으니까. 제가 귀농할 무렵엔 많이 싸웠죠. 우리가 너무 싸우니까 아이들이 눈치를 많이 봤던 거 같아요."
 
"그래도 보람이 있지 않았나요?"
 
"그때그때마다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 그때 만족도가 높았고, 두려울 것도 없었고."
 
나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갔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어떤 책이 자기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태일 평전》. 나중엔 《토지》, 《아리랑》. 요즘도 매달 한 권씩 보려고 하죠. 겨울엔 일체 일 안 해요. 4개월은 알바도 안 해요. 그래서 겨울엔 책 많이 보죠."
 
조영보 씨는 다시 집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서둘러 집을 빨리 지으려고 이쪽 양도면 삼흥리에 있는 산마을고등학교 쪽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논과 밭이 있는 곳은 현재 집하고 8.5킬로미터 떨어진 양도면 도장리에 있다.
 
"전에 살던 도장리에서는 지도자 일도 해 봤지만 이쪽에선 또 새로 시작해야죠. 다락논인데 그걸 싸게 산 거죠. 여기서 귀농해서 정착한 경우가 없어요. 토박이들이 귀농하는 사람들 진정성을 잘 안 믿는 거죠. 그걸 극복하는 데 좀 걸리죠. 농사꾼이라는 평판을 얻는 게 시간이 좀 걸려요. 보통 10년이면 다 된다고 하잖아요. 그 정도 되면 다 자리 잡을 수 있어요."
 
10년 버티면 농사꾼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다. 조영보 씨 아내 이은순 씨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들 때문에 바쁜 듯해서 말을 건네지 못했다. 두 시간 넘게 조영보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을 나왔다.
 
다음에 만날 분은 강화도 독자 함경숙 씨였다. 함경숙 씨는 2013년에 내가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글쓰기 강좌를 한 뒤 독자가 된 분이다. 직함이 많다. 페이스북에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사무국장, 넉살좋은 강화도여행, 평화어머니회 공동대표, 인천광역시 평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 등이 올라와 있다. 함경숙 씨 집은 강화군 송해면 강화대로 송해파출소 뒤쪽 언덕 위에 있었다.
 
 

▲   함경숙 씨 포도밭. 가지치기를 한 뒤, 원불교 평화행동에서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맨 오른쪽이 함경숙 씨.  ⓒ 안건모

 
함경숙 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2016년에 귀향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방 안에 남자 세 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눴다. 평화재향군인회 상임공동대표 김기준 씨. 햇빛나눔협동조합 이사 서영만 씨, 발달장애인 농업회사 법인을 만들고 있는 이광구 씨였다. 그중 김기준 대표는 여든 살이 넘었다는데 엄청 건강하셨다. 집이 양양인데 인제에 있는 허준약초학교에서 무보수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는 서울 가는 버스가 끊어진다고 훌쩍 떠나셨다. 이광구 씨는 이력이 다양했다. 용접공, 노동 상담, 자동차 정비 공장, 대리운전, 재무 설계 회사 등, 그동안 가진 직업만 스물세 가지 정도라고 한다. 책도 많이 냈다. 《희망교육 분투기》, 《희망통장 콘서트》, 《인생 2라운드 50년》 등이 있다.
 
 
구로동맹파업 동지
 
또 다른 여성분 두 사람은 나중에 자리에 참석했다. 임선화, 여윤구 씨다. 이분들은 함경숙 씨네 집 포도나무 가지치기도 도울 겸 놀러왔다고 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임선화 씨가 대답한다.
 
"아, 우리는 초중고 동창이에요. 둘 다 성신여고를 다녔고요. 저는 '한국빠이롯드' 노조 결성하고 성남에서 연투(연대 투쟁)했었어요. 우리 1984년도 구로동맹파업 동지예요. 심상정 안 불어 가지고 얼마나 맞았는지. 나는 그냥 강화에 한번 가 보자, 놀러가듯 왔는데. 친구는 강화로 내려오고 싶어 해요."
 
두 분도 역시 평범한 분들이 아니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4일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이 연대하여 벌인 파업이다. 위키백과는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라고 설명한다. 구로동맹파업 뒤 국회의원이 된 심상정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수배를 당하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생을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두 분도 그런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두 분은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임선화 씨는 원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평화행동에서 활동하는 분이었다. 이번에 함경숙 씨와 같이 강화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여윤구 씨와 같이 왔단다.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렇게 생태운동이나 평화운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여윤구 씨는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노동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웠다. 특이하게 지금은 무속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저는 지금은 단청 탱화문화제 일을 하고 있어요, 저 친구랑 오래된 인연이 있어요. 인천, 부천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강화에 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해서, 그때 집 보러 다녔어요. 이광구 선생이 가이드 해 주고. 그리고 20년 못 만나다가 어제 만난 거예요. 교동아일랜드라고, 교동도 안에 있는 체험 농장인데 거기서 고사리를 해 볼까 하고 갔었거든요."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
 
다음 날 아침에 가지치기를 한다는 포도밭으로 가 봤다. 모두 4백 그루 정도라고 했다. 서영만, 임선화, 여윤구 씨가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큰 가위가 없어서 조그만 가위로 자르는데 힘겨워 보인다. 구경만 하기에는 좀 미안해 나도 가위를 빌려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9시 40분에 가지치기 일이 끝났다. 이광구 씨가 발달장애인 청년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모두 원불교 평화행동에서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다시 함경숙 씨 집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윤구, 임선화 씨 두 분이 모두 <작은책>을 구독해 주셨다. 함경숙 씨 덕분에 좋은 사람들끼리 인연이 이어지는 듯했다. 함경숙 씨는 너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평화 활동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교동도를 가 보고 싶었다. 전에 가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문소에서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적고 방문증을 받았다. 교동대교를 건넜다. 한 10분쯤 가니까 대룡시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을 해서 이북이 가까이 보인다는 망향대로 향했다.
 
망향대는 높이가 50미터밖에 안 되는 언덕이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조그만 공터가 있고 '망향카페'라고 간판을 단 봉고차 가게가 한 대 서 있다. 이 망향대는 6.25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황해도 연백이면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이다. 바로 저 강 건너가 아버지 고향이다. 이북 쪽을 바라볼 수 있게 망원경 두 대가 설치돼 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망원경으로 이북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할아버지가 "아, 보인다, 보여. 자전거 타는 사람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네. 그런데 아파트는 가짜네, 가짜. 그냥 전시물이야." 그 뒤를 이어 어떤 아주머니가 망원경을 보면서 또 한마디 한다. "자전거 타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네. 저 사람들 하루 종일 자전거 타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냐?"
 
 

▲   교동도 망향대에서 관광객들이 강건너 황해도 연백을 바라보고 있다. 아파트가 가짜라는 둥, 지나가는 자전거도 괜히 왔다갔다 하는 거 아니냐는 둥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  ⓒ 안건모

 
어처구니가 없어 슬그머니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다. 반공 교육이 무섭긴 무섭다. 나도 '이북이 우리한테 잘사는 걸 보여 주려고 그런 쇼를 한다'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반항했다가 입이 찢겨서 죽었다던 '이승복 어린이' 교육도 받았다. 이젠 거짓과 진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세뇌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날씨가 뿌예 아파트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북에 있는 사람도 이곳에 있는 사람처럼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파트가 가짜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북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통일이 될 리가 있나. 독재정권 때 받은 교육이 이렇게나 무섭다니. 그동안 강화에서 만났던 <작은책> 독자들과 비교해 보면 이 사람들은 깜깜한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대룡시장 한쪽 귀퉁이에서 캐온 나물을 팔고 있는 할머니들과 구경하는 관광객.  ⓒ 안건모

망향대에서 내려와 대룡시장으로 갔다. 황해도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이라고 한다. 슬레이트 지붕과 나무 문짝으로 된 가게가 많은 좁은 골목 시장이다. 방앗간, 90세 할아버지가 운영한다는 동산약방, 커피에 달걀을 띄워 준다는 교동다방 등이 있다. 앗!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성공회대 노동대학 역사 기행 때 들렀던 시장이다. 세상에 이렇게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나. 나, 치매 초기인가? 실내에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는 가게에서 감자전 하나를 주문해서 먹었다.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사진_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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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2월호

안건모의 사람여행

 

복직 없이 정년 없다

 

사진_ 안건모

 

한진중공업 35년째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하 김진숙 지도로 지칭)이 새해부터 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희망뚜벅이’. 4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다. 날마다 15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청와대사랑채까지 간단다. 암이 재발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서울까지 걷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진중공업 고용안정 없는 매각 반대!’라는 글귀가 적힌 부채를 들었다. 그리고 트위터에 연말까지 기다렸지만 답이 없어 청와대까지 가 보려고요. 복직 없이 정년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복직이 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뜻이다.

▲ 김진숙과 '희망뚜벅이'. ⓒ작은책(안건모)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내가 김진숙 지도를 처음 만난 것은 2008 3 <작은책> 강좌 때였다. <작은책>에서는 2007 11월부터 2013 11월까지 6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김진숙 지도는 2008 3 20, 2013 1 24, 두 번 강연을 했다. 2008, 3월에 강연한 제목은 자본 천국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였다.

김진숙 지도는 그날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저는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이라고 배 만드는 조선소에 용접공 출신입니다. 땜쟁이였어요. 그래서 그때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그게 접니다. 그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게 하여튼 지금도 쪽팔립니다.”

▲ 2008년 3월 20일 김진숙 지도가 <작은책> 사무실이 있는 2층 강당에서 '자본 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가 살아온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날 한 수강생이 쓴 소감이다. 슬픈 이야기에 속에서 눈물이 울컥하는데 겉으로는 자꾸 웃음이 난다.  강의 내내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가 깔깔대며 자지러지다가도 어느새 나온 슬픈 이야기의 무게에 눌리고, 그렇게 여러 번 요동치니 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있다.”

김진숙 지도 역시 어릴 때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제가 고향이 경기도 강화인데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하고 토요일 날 시내를 놀러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에다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웬 아줌마들 네 명이 뭐, 상치, 쑥갓, 다 합쳐 봐야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그것도 다 시들어 빠진 걸 더 시들어 빠진 아지매들이 팔겠다고 오고 가는 사람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전 속으로 그 아줌마들을 막 경멸했어요. , 오죽 못났으면 저 나이에 길바닥에서 저러고들 사나? 그러다가 그중에 한 아줌마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 순간 막 도망을 가는데, 친구들이 자꾸 부르는겨. 그래서 그 아줌마가 저를 못 봤기를 빌고 또 빌면서 뛰는데, 재수 없게 꼭 본 것 같애. 짐작하셨겠지만 그 아줌마는 저희 엄마였드랬습니다. 저는 울엄마가 길바닥에서 그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팔겠다고 오가는 사람들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진숙 지도는 그때 일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저는 그 일이 30년이 넘도록 상처입니다. 나는 왜 엄마를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

▲ 2008년 3월 20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현장에서 배 만들면서 산재로 끔찍하게 죽어 갔던 노동자들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했다.

김진숙 지도는 2007년에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냈다. 어떤 이들은 지하철에서 그 책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했다. 나도 그 책을 보고, 또 언론에 숱하게 오르내리는 김진숙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2007)

 

김진숙 지도는 1981 7 1일 스물한 살 나이로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최초의 처녀 용접사였다. 어릴 때 그는 옷 만드는 공장, 가방 만드는 공장도 다녔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 신문 배달도 했고, 시내버스 안내양도 했다. 그러다가 월급이 조금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물한 살에 한진중공업 용접공이 됐다. 하지만 용접 일은 쉽지 않았다. 천장 용접도 해야 하고, 수그리고 처박고 용접해야 되는 일이었다. 불똥이 옷 속으로 튀어 타 들어가도 참아야 했다. 월급이 많지도 않았다. 거의 12시간씩 일하고 연달아 철야를 할 때도 많았다.

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고 추운 겨울에 지리산을 올라갔지만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면서 1년만 더 살아 보자, 생각했다. 그럴 때 노동조합이 뭔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진중공업 집행부는 어용노조였다. 조합 간부들은 회사보다 더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김진숙 지도의 사원증.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희망버스 기획단이 단식투쟁하는 자리에 전시해 놓았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공장 아저씨들이 권유해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 2 ‘23차 대의원대회를 다녀온 뒤 당시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홍보물 150여 장을 배포했다. 얼마 뒤, 5 20, 김진숙은 얼굴에 보자기에 씐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김진숙 지도 옷을 홀딱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칠성판에 눕혀 놓고 매질을 했고 고문하며 빨갱이로 몰았다.

한 조직만 불면, 한 사람만 불어 주면, 이 죽을 고생이 끝난다는데, 살려 준다는데! 아무리 머릿속 구석구석을 후후 불어 봐도 조직도 선도 없는 거다.”(소금꽃나무, 24)

대공분실은 간첩을 잡는 부서가 아니라 간첩을 만드는 부서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벌건 밧줄을 발목에 매달고 거꾸로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풀려나고 보니까 제가 묶여 있던 자리 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어요. 피가 어디로 흘렀는 줄 아세요. 눈으로 흐른 거예요.”(2013 1 <작은책> 강연 ‘309일의 싸움에서.)

김진숙 지도는 7 2일까지 세 차례 조사를 받았고 한진중공업은 7 14일 김진숙 지도를 해고했다. 그때부터 해고자가 된 김진숙 지도는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한진중공업에는 1989년과 1991년까지 총 18명의 해고자가 있었다. 2003 11월 김주익·곽재규 사망 사건 이후 노사 합의로 1986년 같은 해 해고됐던 박영제, 이정식 씨도 복직하는 등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사람들이 모두 복직됐다. 하지만 유독 김진숙 지도만 복직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0 12 15, 한진중공업은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정리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12 20일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김진숙 지도는 2011 1 6일에 한진중공업 안에 있는 35미터 높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 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째 고공농성을 하다가 목숨을 끊었던 곳이다.

김진숙 지도가 올라가 농성했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2011년 2월 8일.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여섯 달이 지났을 때 노동단체, 시민단체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만들어 부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밖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현재 <작은책> 편집장 유이분 씨는 그때 <작은책> 일꾼이 아니었는데 희망버스 때마다 내려갔다. 우리 <작은책> 독자, 글쓰기 모임 회장과 회원들도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글쓰기 모임 회장이었던 강정민 씨는 경찰에 사진이 찍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200만 원 벌금으로 약식기소를 당했다. 정식 재판을 청구해서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검사가 또 항고를 해서 대법원까지 갔다. 결국 무죄로 확정됐지만 빼앗긴 시간과 정신적인 고통은 보상받지 못했다. 무고한 시민을 그렇게 기소하고 항고하면서 괴롭히는 그런 경찰, 검찰은 나중에 징계 먹고, 해임당하는 법은 없나? 정말 속이 터진다.

고공농성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2011년 2월 8일. ⓒ작은책(안건모)

 

2011 7 30 3차 희망버스 때는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고 골목골목을 다 막았지만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희망버스에 참가했고, 김진숙이 요구하는 문제가 개별 노사 문제를 넘어 일자리, 고용, 해고 등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절박한 문제라는 것을 체험하고 공감했다. 김진숙 지도는 그해 11 11일 오후 조합원 총회 찬반 투표가 가결된 후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고공농성 309일 만이었고 유례가 없는 승리였다. 하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지 않았고 400명의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2018 10월 김진숙 지도에게 유방암이 발병했다. 나도 이제 복직 투쟁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노조에 알린 뒤였다. 복직 투쟁을 미루고 그해 항암 치료를 받았다. 후유증으로 관절염, 골다공증, 우울증을 겪으며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이가 갑자기 2019 12 23, 부산에서 대구까지 110킬로미터 도보 행진에 나섰다. 대구 영남대의료원에서 해고를 당해 13년째 복직 투쟁하며 영남대의료원 70미터 높이 병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김진숙 지도는 그 친구의 절박함에 비해서 세상이 무관심한 것 같다 알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론에 굴복했는지 결국 영남대의료원은 그해 2, 박문진 전 지도위원의 복직에 합의했다. 해고된 지 13, 고공농성 170일이 넘은 뒤였다.

그리고 그 뒤 2020 6 23일 김진숙 지도는 다시, 이제야말로 자신의 복직 투쟁을 시작한다며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2 22일에는 서울 청와대 앞에서 희망버스 기획단 7명이 노숙 단식투쟁을 들어갔다. 한진중공업 법정관리사인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대통령과 정부가 사측이나 다름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정년 내 복직 약속을 투명하게 이행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정홍형 희망버스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서영섭 신부, 송경동 시인,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 씨 등 노동·시민·사회·종교단체 관계자 7명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와 쌍용차지부에서도 연대 단식에 나섰다.

하지만 2020 12 30일까지 한진중공업은 답이 없었다. 12 31, 김진숙 지도는 앓는 것도 사치라며 항암 치료도 미루고, 서울까지 걷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같이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을까. 어떤 분들이 함께 걸을까. 나도 몇 구간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일차 1 5, 청도역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이틀 동안 걷기로 했다.

청도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니 KBS 기자들이 김진숙 지도를 찍고 있다. 김진숙 지도는 나를 보더니 인연이 참 기네요.” 하고 말했다. 나는 건강이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물어 대답하기도 귀찮은 질문일 것이다.

청도역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장영식 사진작가도 만났다. 장영식 작가는 사회적인 약자나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등을 카메라에 담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번 김진숙 지도가 박문진 복직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대구까지 걸어갈 때도 함께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대구에서 한티재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변홍철 선생도 왔다. 한티재 출판사는 한국 탈핵(김익중, 2003),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박경미, 2020) 등 환경 도서와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책들을 출판해 왔다. 왜 오셨나고 물으니 세상이 어지러워 걸어 보려고요.” 하고 웃으면서 답했다. 달빛노동찾기(오월의봄, 2019) 책에 사진 작업을 한 윤성희 작가도 왔다.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모였는데 대충 세어 보니 마흔 명가량이다. 11시에 출발했다. 머리가 하얀 분이 교통 정리할 때 쓰는 신호봉으로 지휘를 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다. 금방 읍내를 지나 허허벌판 길로 들어선다. 서상교차로 표지판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는다. 청도천을 가로지르는 유등교를 건넌 뒤 잠깐 쉰다고 멈췄다. 12 20분이다. 김진숙 지도는 차에 들어가서 쉬고 있다. 청도역에서 팔조령휴게소까지는 12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세 시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김진숙 지도는 몸이 아파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속노조 한국게이츠지회 노동자들은 오늘 네 분이 참석했다. 현대·기아차 1차 협력업체인 한국게이츠() 30여 년 동안 해마다 이익을 냈던 기업인데 지난해 6 26일 코로나19를 핑계로 일방적으로 폐업하고, 철수 결정 통보를 했다. 알고 보니 폐업이 아니라 국내 생산 공장은 폐쇄하고,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가지고 와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업체에 판매하면서 돈벌이를 계속한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의 정부를 우습게 본 건 그럴 만한데 한국의 노동자들까지 너무 만만하게 본 건 아닐까. 대부분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지만 한국게이츠지회 스물네 명은 그런 불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청와대와 서울 현대차 양재동 본사 그리고 해외 자본의 횡포로 규정하고 서울 미 대사관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게이츠 해고노동자들. ⓒ작은책(안건모)

대우조선해양에서 해고된 청원경찰도 참석했다. 박대근 분회장, 김희진 조직부장, 지춘근 사무국장과 조합원 3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지금 646일째(1 5일 현재) 싸우고 있다.

“2020 4 1일 해고됐죠. 대우조선 정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어요. 거제도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와 함께 걸어야겠다 싶어서 나왔어요.”

대우조선해양 청원경찰 해고 노동자들. ⓒ작은책(안건모)

오늘 행진 지휘를 하는 이와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 지회장 차해도 씨였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했는데 왜 김진숙 지도 복직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냐고 물었다.

마음의 빚이 있어요. 해고되면 힘든 거 알거든요. 해고 투쟁 6년 했는데도 힘들던데. 전 원래 선박 배관하던 사람이에요. 열여덟 살에 회사를 들어갔어요. 그때는 타코마라고, 89년도에 합병되면서 90년도 해고돼서 96년도에 복직했어요. 복직 투쟁을 하는 도중에 애들 둘 낳고. 집사람이 벌어먹고 살았죠. 복직하니까 다시는 노조하지 말라고. 하하하. 15일 만에 사무국장 일을 맡았죠. 노조 상근만 20년 했어요. 단위사업 위원장도 해 보고 지회장 세 번 하고, 파견도 나가고. 2018 12 31, 42년째 되는 해에 만 60세에 퇴직하고 나오고, 여행도 다니려고 하는데 김 지도가 이번 달부터 본격 투쟁을 한다고 해요. 사실 내가 지회장할 때 김 지도 복직 교섭을 네 차례나 했어요. 2003년에도 교섭했는데 결국은 다른 사람은 다 되는데 김 지도는 안 된다는 거야. 경총, 전경련에서 김 지도는 안 된다, 이거요. 그래서 내가 퇴직했지만 김 지도 복직까지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말까지 (복직 투쟁) 열심히 하면 안 되겠나 했는데.”

씩씩한 걸음걸이로 금방 청도 읍내를 벗어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이 차해도 전 지회장. ⓒ작은책(안건모)

 

오래전에 풍산에서 해고당한 오홍재 선생도 걷는다. 오홍재 선생은 전국민주화운동경남동지회 운영위원장이다. 2008년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도 옆에서 같이 걸었다. 옛날 신발 만드는 노동자일 때 해고된 경력이 있다니 김진숙 지도와 비슷한 시기였나 보다. 현재 김진숙 지도와 교대로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이서로 부근에 있는 마을을 지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폐쇄된 팔조령휴게소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2 20,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했다. 팔조령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도적떼가 많아 8명이 조를 짜서 넘어야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다. 휴게소는 폐쇄된 휴게소인지 화장실 문도 잠가 놓았다. 기념사진을 찍고는 차 몇 대에 나눠 타고 헤어졌다. 나는 KBS 취재 차를 얻어 타고 청도역으로 왔다. 같이 탄 사람들이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심재문, 이경필, 임재환 씨라고 했다. <작은책> 한 권을 드렸더니 한 분이 , 안건모 님이세요?” 하고 반가워한다. 정기 구독자는 아니지만 작은책을 몇 번 읽었단다. 이분들에게 김진숙 지도와 같이 걷게 된 까닭을 물었다.

철도노조 차원에서 온 건 아니고요,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KTX 여승무원 투쟁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을 한 번 온 적이 있어요. 그때 강연이 너무 좋았죠. 그걸 듣고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인연으로 오게 됐어요.”

청도역에 도착해 그이들과 같이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차를 타고 온 일행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의당 대구시당 여성위원장 황선희 씨였다. 그 자리에서 작은책 독자가 되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 열차 시간이 다 돼 헤어졌다. 나는 청도역 근처를 구경하다가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갔다.

 

짐터교차로에서 물놀이장 스파밸리까지

다음 날 1 6, 10시 반에 다시 청도역으로 갔다. 차해도 전 지회장이 운전하는 차에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국장, 정혜금 부장, 장영식 작가가 타고 왔다. 어제 갔던 팔조령까지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차해도 씨한테 전화가 왔다. 운전하는 중이라 스피커폰을 켰다.

청도서 정보과 ○○○입니다. 오늘 팔조령휴게소에서 출발 안 하십니까?”

팔조령 넘었어요. 터널 지나서 짐터교차로에서 출발할 겁니다.”

, , 알겠습니다.”

형사가 바로 전화를 끊는다. 황이라 국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목소리가 밝아진 거 같은데?” 모두들 웃음보가 터진다. 차해도 씨가 대답한다. , 우리 구역 아니구나, 하는 거지. 터널 안 지났으면 나와서 사진 찍고 이래야 돼.”

팔조령 터널을 지나가니 벌써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1월 6일 11시 28분에 팔조령 터널을 지난 짐터교차로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

오늘 김진숙 지도와 함께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어제 왔던 한국게이츠 노동자들이 또 왔고, 파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눈에 띈다. 앞가슴에 대우버스 355명 부당해고철회라고 써 있다. 어떤 사연인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그 밖에는 정의당원들이 몇 분 있고, 우리밥연대 활동가 김주휘 씨,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참석했다. 정의당 수영구 지역위원장과 당원들 두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대우버스 해고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왜 함께하려고 나왔어요?”

마음의 빚이 있죠. 이런 데 참여 안 하면 좀 그렇잖아요.”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차해도 전 지회장도 똑같은 말을 했다. 서로에게 미안해 떠나지 못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2006년에 박영제, 이정식 씨가 20년 만에 복직할 때 김진숙 지도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쓴 글에도 부채감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미조직 국장이 잠깐 쉬는 사이에 몸을 풀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한진중 해고자로 만 20년을 견뎠던 박영제 형, 이정식 형이 새해 1 1일 복직을 합니다. 그 형들이 단지 저 때문에 해고됐다고 말하면 그분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제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의 빚’, ‘부채감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2011년 희망버스 때 나도, 시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나 싶다. ‘김진숙 같은 이가 저렇게 정리해고 반대를 하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차비 들여 내려가서, 하루 이틀 밤새는 게 대순가?’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번 김진숙 지도가 걷는 길에 동참하는 이들도 다들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옆에서 걷던 학교비정규직 대구지부 부지부장 정지혜 씨는 해고자로서 끝나면 부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꼭 복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고 말했다. ‘부채감에 이어 부당이라는 말도 참 많이 나온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사진을 찍기 위해 언제나 맨 앞에서 걸어가는 장영식 작가와 함께 걸었다. 김진숙 지도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질문을 했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장영식 작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년은 의미 없어요. 지난해 6월 복직 투쟁 시작할 때 기자회견 첫날부터 복직 없이 정년 없다고 했어요. 복직 투쟁 시작하니까 한진중에서 찌라시를 돌렸어요. 위로금 2천만 원에, 임원들 성금 모아서 6천만 원을 제안했대요.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도 국민 성금을 제안하고, 청와대도 국민 성금을 받아 준다면 동참하겠다고 했대요. 아주 비열한 제안이죠. 김진숙 지도위원의 해고는 국가의 책임이자 회사의 책임입니다. 2 3일간 대공분실에 끌고 가서 모진 고문을 하고, 그 이유로 해고까지 한 것은 분명한 국가 책임이죠.”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국장, 장영식 사진작가가 나란히 걷고 있다. 황이라 국장은 김진숙 지도가 309일 동안 크레인에 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뒷바라지를 했던 노조 간부이자 조직 활동가이다. ⓒ작은책(안건모)

 

장영식 작가는, 김 지도가 정년이 지났어도 끝까지 복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 ‘복직은 정의를 바로잡는 일이다. 전두환 정권이 평범한 노동자를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하고, 회사는 해고하고, 이런 부당했던 짓을 바로잡는 일이다. 빨갱이로 몰려 죽도록 고문당하고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이들이 왜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누명을 벗으려고 하는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김진숙 지도도 누명을 벗고 명예를 벗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라도 복직을 해야 한다.

게다가 민주화보상위원회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실제로 명예 회복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명예 회복은 당연히 회사로 복직돼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긴 세월 동안 못 받았던 임금과 퇴직금과 고통받았던 세월에 대한 배상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직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면 무려 35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싸우는 사람도 있으니 절대로 해고하면 안 되겠다고 자본가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복직해야 한다.

김진숙 지도의 꿈은 소박하고 현실적이다. 지난해 9 18 YTN 라디오에서 인터뷰할 때 복직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서 제가 일할 땐 없었던 화장실, 제가 일했을 때는 없었던 식당 그런 데 가 보고 싶어요. 저는 밖에서 싸웠었는데. 현장 안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이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쟁취될 때 그 울렸던 함성을 저는 밖에서 들었거든요. 근데 막상 저는 그런 걸 못 보고 같이 함성을 지르지도 못했고, 그냥 그런 데 들어가 보고 가 보면서 아, 이렇게 됐었구나, 그러고 그냥 박창수가 일했던 공장에도 한번 가 보고. 주익 씨 일했던 데도 한번 들어가 보고. 사실은 조선소의 근로조건이라는 게, 작업환경 개선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때는 그 높은 데 작업을 하면서 사다리를 놓는데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을 하게 되니까 그냥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사다리를 안고 떨어져서 사람이 깔려 죽는 어이없는 일들이 생기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정돈이 됐는지. 그냥 그런 것들을 눈으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싸워서 쟁취했던 식당과 화장실 등 작업환경이 개선된 걸 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것 때문에 평생을 싸워 온 것이다.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있는 김진숙 지도에게 우리 모두 부채감을 갖고 모든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를 응원해야 하는 이유다.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를 지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어느새 목적지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아이들 물놀이장 워터파크 스파밸리에 도착했다. 지난해 2월 코로나19 때문에 한때 문을 닫았다가 다섯 달 만에 문을 열었다는데 놀러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약 15킬로미터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속노조 대구지부에서 떡과 우유를 가지고 나와 하나씩 나눠 준다. 모두들 끼리끼리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진숙 지도가 인사를 한다. 나는 김진숙 지도에게 끝내 복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못했다. ‘복직할 수 없는데 제가 이렇게 투쟁할까요?’ 하는 대답이 나올 건 너무 뻔하니까.

오후 1시 20분에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에 있는 스파밸리에 도착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와 헤어지고 나는 대구 쪽으로 가는 차를 찾았다. 대구지역본부 이길우 본부장이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전에 새로 노조에 들어와 일을 한다는 장혜진 조직차장과 또 한 분과 함께 차를 탔다. 이길우 본부장은 자기들 두 사람은 대구에서 가장 못된 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자본가와 수구세력들한테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길우 본부장은 두세 번 구속돼 감옥에 갔다 온 투사다. 순진한 장혜진 차장은 그런 농담을 이해 못하고 왜요? 두 분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하고 반문한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김 지도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은 언제인가? 청와대 앞에서는 일곱 분이 김 지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단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갔던 날이 벌써 18일째다(1 4일 현재). 헤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한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분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김 지도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굶어야죠, .”

세상을 달관한 듯한 대답이다. 김진숙 지도가 서울에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안 된다. 그전에 김진숙 복직!”이라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

 

서울에서 김진숙 지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서울로 올라온 뒤 1 11일 편집장 유이분 씨와 다시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을 갔다. 입구에서 안계섭 민중가수와 최헌국 목사를 경찰이 막고 있다. 기타를 메고 간다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기타가 무기인가?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기도회를 하면서 노래 한두 곡 한다는데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난 1월 12일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모습.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송경동 시인, 서영섭 신부,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활동가, 정홍형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 등이 단식투쟁을 21일째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극한미술관'에 참여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고, 박문진 지도위원이 김진숙 복직을 바라며 절을 하고 있다. 이들의 단식을 빨리 멈추게 하려면 김진숙 지도가 복직이 돼야 한다. ⓒ작은책(안건모)

공원을 들어갔더니 21일째 단식 투쟁을 하는 정홍형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과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보인다. 박승렬 목사와 한경아 새세상을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공동대표는 건강이 나빠져 단식을 중단했다. 다른 분들의 건강도 걱정이 된다.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단식 투쟁하는 이들이 스티로폼도 못 깔게 하고, 비닐도 못 치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하면서 방해만 하고 있다.

해고된 지 13년 만에 복직이 됐던 박문진 지도위원은 이제 김진숙 지도의 복직을 바라며 삼천배를 하고 있다. 절을 너무 열심히 해 인사도 못 하고 우리는 서울역 코레일네트웍스 단식 농성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posted by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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