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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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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짓밟고 뜯어내도 뽑히지 않을 겁니다

박지숙/ 지평막걸리 노동자

 

 저는 방송 프리랜서 작가였습니다. 전통주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이 있어 취재차 지평양조장을 방문하면서 지평주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된 양조장 안에서 술 빚는 풍경에 매료되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업인 방송작가를 그만두고는 201341일에 입사해 양조장 생산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술을 빚는 모든 과정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는 아주 힘든 작업이어서 저 빼고 모두 남자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술 빚는 과정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신세계였고, 일원이라는 자부심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2017년에 품질관리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었던 차별, 무시, 끗발 있는 부서장에 줄서기하는 직원들 사이의 알력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성실, 진심, 정직 이 세 가지만 갖고 일한 결과라고 자부합니다.

지평주조에서 생산하는 제품들. 사진_ 지평주조 홈페이지 갈무리

 

술이 알려지면서 춘천의 산업단지에 공장을 만들어 대량 생산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평에서처럼 우물물로 술을 빚는 게 아니라 산업단지에 공급되는 상수도를 이용해 기계 설비로 대량 생산을 하면서 본연의 술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지평에서 근무했던 생산 현장 직원들과 관리직원들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사 대표와 영업 담당 임원은 오직 매출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됐고, 간언과 직언을 마다 않는 저를 전공자가 아니라 능력 부족이라며, 저도 모르는 클레임 건을 제 책임으로 몰아 보직 해임시키고 지평공장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지평공장은 모든 기계 설비를 철거한 폐공장이 되어 있었고, 독사가 출몰하는 흉가 같은 옛날 양조장터를 청소하고 순찰하는 경비원으로 일했습니다.

 

회사는 저에게 전공하지도 않은 건축 리모델링 업무에, 폐수 허가 업무에, 양조장을 리모델링하는 데 필요한 11억 원을 양평군에서 투자받아 오라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아무런 직함도 명함도 없이 경비처럼 일하는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하지 못하면 능력 부족으로 저를 자르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씩 영업담당 임원으로부터 겁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포털사이트 맘카페에서 지평막걸리의 맛이 예전과 다르다며 어디서 생산하는지 묻는 글에 익명으로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 저의 댓글을 캡처해서 영업담당 임원에게 보고했고, 그 댓글을 쓴 사람이 저라는 걸 알자 저를 해임시키고 대기 발령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춘천공장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 발령을 받았는데, 공장장 자리 옆 벽과 파티션의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 작은 의자 하나를 두고 앉게 했습니다. 2018년까지만 해도 저에게 팀장님이라고 하던 후배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는 면벽수행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모욕과 참담함과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버텼습니다. 그래도 제가 나가지 않자 이번에는 대표와 임원이 있는 서울사무소로 대기 발령을 내서 불 꺼진 빈 회의실에 일주일 동안을 앉혔습니다. 회의가 있으면 저를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 가운데 빈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저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조차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더군요.

대기발령 당시 의자에 앉아서 면벽수행한 춘천공장 사무실. 사진_ 박지숙

그래도 제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자,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발령을 냈습니다. 대형마트에 진열되는 술을 관리하고 채워 놓는 일을 하는데, 숙소도 자비로 구하라고 하고, 차량 유지비 지원도 없다는 겁니다. 발령 나고 3일 안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걸로 알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저 말고도 연구소장으로 있던 아이 셋 가장은 업무상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표와 영업직원들의 운전기사까지 하면서도 나가지 않자 회사는 그를 전라도 전주로 발령을 냈고, 그제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그런 방식으로 내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회사가 저에게 자행한 일련의 비인간적인 작태의 근거를 모아 노무사를 선임하여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부당전보 및 부당해고 구제 신청으로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답변서에 무연고인 대구로 발령을 내도 되는 줄 알았다며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후 저는 춘천공장으로 발령을 받아 생산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여직원들은 현장에서 근무하는데 저에게는 공장 내 화장실 청소, 식당 청소, 심지어 남자 직원들 담배 피우는 곳 청소, 공장 주변의 풀 뽑기를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 제가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쌓인 기본급을 깎아 생산직원의 급여 수준으로 낮추려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업무와 관련 없는 춘천공장 주변 풀뽑기도 했다. 사진_ 박지숙

저의 업무와 관련 없는, 전혀 다른 현장 파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까지 저와 절대로 대화하지 말라고 업무 지시서에 기재까지 해서 회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 용역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폐비닐을 프레스기로 압축하는 업무를 주었습니다. 그 업무를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부터 겨울까지 했습니다. 압축한 비닐을 기계에서 꺼내어 자키(핸드 팰릿)로 옮겨 공터에 쌓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결국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이 생기고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더니 인대가 부분적으로 파열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저는 업무상 재해로 산재 신청을 했고, 지평 폐공장으로 좌천과 대기 발령 때 면벽수행하던 괴롭힘으로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이 역시 산재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회사는 산재 신청을 한 것을 알고는 압축 업무에서 제외시켰지만 망가진 손가락과 팔꿈치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생산 현장에서 다른 남자 직원들이 한가하게 뒷짐 지며 일할 때 저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손과 팔을 이용해서 반복 작업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팔꿈치 손상이 업무상 재해로 일부 기간 산재 승인을 받았고, 저는 정년 때까지 계속 이 회사를 다닐 계획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손과 팔목, 팔꿈치를 치료받으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는 남자 직원들만 하는 폐비닐 압축 업무를 여성인 박지숙 씨에게도 시켰다. 사진_ 박지숙

회사를 위해 헌신했더니 헌신짝처럼 취급한 회사 대표와 임원을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정신적·육체적으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그만두게 하라고 직접적으로 지시한 회사 대표, 임원, 그리고 저를 잔인하게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문을 한 것과 다름없는 춘천공장의 공장장, 생산팀장, 지시받은 대로 했다는 현장의 반장 그리고 무언의 가담자들인 일부 현장 직원들은 지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저를 아무리 짓밟고 찢고 뜯어내어도 저는 저의 진실, 정직한 정신적 뿌리가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절대로 그들의 위력과 겁박과 야만적인 작태에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질경이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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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5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 응원해 주세요!

전영수/ 금속노조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사무장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조합원 동지들이 출·퇴근하는 노동자들, 지나는 시민들에게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 피켓을 들고 변함없이 현대호텔 옥상을 가리키고 있다. 밑에서 지키고 있는 동지들에게 더 많은 과제를 주고 온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함께 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해고자 이병락 동지는 여전히 강건하다. 이렇게 오늘도 동지들과의 하루를 시작한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조합원들이 피켓을 들고 출·퇴근하는 노동자들과 시민들에게 현대호텔 옥상을 가리키고 있다. 사진 제공_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저는 용접 부위를 고속 회전체로 갈아 내서 표면을 다듬고 결함 등을 확인하는 그라인더(사상) 일을 16년째 하고 있는 사상공입니다. 울산에서 생활한 지 10년째로 현재는 사내하청업체 본공(하청업체 상용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조선소 일은 물량팀(하청업체의 재하청)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헷갈릴 수도 있지만,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본공과 물량팀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 복지 등 차별은 늘 존재했습니다. 명절 연휴, 여름휴가 기간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로 짧았고, 일이 없을 땐 무급으로 쉬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휴가비, 성과금도 근속(6개월, 1년 이상, 2년 이상, 3년 이상)에 따라 차등 지급받았습니다. 학자금도 근속 3~5년 이상이 돼야 정규직의 절반 정도 지원받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임금 체불, 4대 보험 체납, 업체 폐업 등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고, 폐업 시 하청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체당금으로 넘기는 게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어 하청 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점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노동조합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와 업체 폐업, 해고로 두 번 다시 현대 계열사의 사내하청에 입사하지 못하게 원청에서 관리를 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가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2017년 고공농성으로 원청의 블랙리스트 관리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하청 노동자들은 아직도 두려워하며 노동조합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척박한 현장에서 2019년 7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조합원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함께 투쟁하고 있습니다. 한 업체 과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9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습니다. 쟁의권을 확보한 후에는 현대중공업지부(정규직 노조)와 함께 파업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청인 현대건설기계는 이를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서진이엔지의 물량 일부를 정규직으로 넘기고, 1년에 900억으로 추정되는 물류비용을 감수하면서 사외로 설비와 물량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진 조합원이 일하던 자리에 현대중공업의 정규직을 전환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청은 더 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진이엔지를 위장폐업했고, 관행처럼 이어지던 고용승계도 끝내 거부하면서 서진 조합원들은 집단해고되었습니다.

그동안 불법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고,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조합 활동은 결국 위장폐업과 해고로 돌아왔습니다. 원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고, 결국 직접고용 시정 지시 명령을 받아냈습니다.

현대건설기계에 과태료 4억 6천만 원이 부과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버티고만 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해고된 뒤 8개월 동안 현대건설기계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시를 받을 뿐 책임과 권한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들과 단 한 차례의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행정기관인 노동부의 시정 지시 명령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현대중공업그룹 재벌의 무소불위 양아치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은 현대중공업의 전체 하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청업체와 동반성장하겠다고 공언했던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직접 지원(하청업체 사장들의 중간 착복을 막기 위해 에스크로 계좌로 직접 지급하거나 별로도 지원)했던 조식·석식 식비, 명절 귀향비, 여름휴가비, 혹서기 연장수당, 피복비 등을 올해 2월부터 기성금(원청이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공사대금)에 포함시켜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겼습니다. 업체 사장들은 임금과 4대 보험 내기도 부족하다며 하청 노동자들에게 그 부담을 다시 떠넘겼습니다. 그동안 1000원을 내고 먹던 아침·저녁이 바로 5500원으로 올랐습니다. 심지어, 재활용하는 정규직 노동자 작업복을 하청 노동자들에게만 입으라고 합니다. 밥값, 작업복 차별까지 치가 떨립니다.

매년 총수 일가는 900억 원대의 배당금을 챙기는데 노동자들은 죽고, 잘리고, 빚만 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재벌의 횡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3월 19일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인 서진 조합원 4명이 ‘하청 차별, 복지 후퇴 철회,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현대중공업 기숙사인 율전재 옥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폭력 경비대가 경찰, 119구조대를 대동해서 오함마(큰 망치)와 쇠지렛대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왔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4명의 서진 노동자들은 간신히 옥탑 기계실 위로 몸을 피했습니다. 경비대들은 난간에 부착한 현수막을 뜯고 농성 물품을 강탈해 갔습니다. 최소한의 물품 공급도 막혔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강풍, 다음 날 비 예보 등으로 고공농성 유지가 힘든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올라갔던 조합원 동지들과 하청지회는 많은 고민 끝에 12시간 만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던 동지들, 내려왔을 때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양 고개를 떨구던 그 날의 동지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뒤에서 비웃으며 박수 치던 현대중공업 경비대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지난 3월 22일부터 서진이엔지 해고자 이병락 씨(왼쪽)과 글쓴이 전영수 씨(오른쪽)이 현대중공업 본관 바로 앞 현대호텔 꼭대기에서 고공 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현대중공업지부 사내하청지회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진의 이병락 대의원과 저는 너무나 정당한 그날의 요구를 다시 내걸고 3월 22일 월요일 아침, 보란 듯이 현대중공업 본관 바로 앞 현대호텔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그날 비웃던 경비대와 현대중공업에 보기 좋게 한 방 날리고 싶었습니다. 서진 동지들의 승리가 곧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제대로 투쟁해 보려고 합니다. 차별과 빼앗기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하청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으로 뭉쳐 저 착취의 공장을 멈춰 세우는 그날을 꿈꾸고 현실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정기선 3대 세습을 위해 몸집만 키우고 민주노조 파괴, 하청 노동자 노조할 권리 탄압하는 현대중공업 자본에게 요구한다.

당사자 포함 협의 테이블 구성하고 문제 해결 교섭에 나서라!

현대중공업은 건설기계 불법파견 인정하고 직접고용 이행하라!

하청 노동자 복지 후퇴, 밥값·피복·도시락 차별 철회하라!

 

4월 23일 전영수 씨와 이병락 씨는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현장 투쟁으로 전환했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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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5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그래, 우리 아들 퀴어

강향숙/ 홈리스 야학 글쓰기 교실 자원 교사

 

우리 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MTF, 즉 트랜스젠더이다. 쉽게 말해, 하리수를 떠올리면 된다. 아들이 커밍아웃을 한 것은 내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1년쯤 투병 중이던 때였다.

“엄마, 나 딸이에요.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멍해지며 깊은 충격에 빠졌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아이가 어릴 적 굉장히 여성적이었던 취향들, 남자답지 않은 행동거지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를 했던 모습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유는 알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신앙, 구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관점으로, 성경에서는 분명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는 빨리 이 아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다. 목사님 세 분과 아이와 나 이렇게 면담을 했고,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예약했다.

‘어떻게 시한부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이럴 수 있나. 불효막심하고 이기적인 놈...’ 계속해서 아이와 충돌했고 새벽에 1시간 넘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제발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이후 아이는 정신이 나간 듯 보였고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매일 아이에게 카톡으로 성경 구절들을 보내고, 때로는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이런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와 입장이 같은 성소수자 부모들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공감이 되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했고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께서 그런 모임에 가면 나쁘게 세뇌된다며 만류했지만 난 가야만 했다. 난 절대 세뇌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모임에 나갔다. 거기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 내고 그 아이들과 내 아이를 정죄했다. 다른 부모와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우리 아이 같은 MTF의 어머니께서 내게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책을 주셨다. 나는 《커밍아웃 스토리》 등 몇 권의 책을 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신앙과의 갈등이었다. 나는 20여 권이 넘는 동성애와 관련된 기독 서적들을 납득이 될 때까지 읽었다. 또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게이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그린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았다. 어쩜 바비 엄마는 나의 모습 그대로 복사판이었다. 영화에서 바비는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는데, 그 이후 바비 엄마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바뀌어 간다. 감동적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금은 하느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실수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만드셨음을 믿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많은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고 있고, AIDS로 죽는 수보다 견뎌 내지 못한 사회의 시선과 고통 속에 자살해 사망하는 수가 훨씬 많다.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태어났고 감수하며 살아갈 뿐이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동성 결합법’을 천명하셨다. WTO에서는 몇 년 전 동성애는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대단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며, 그들을 정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사랑해서 그런단다. 개가 웃을 일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아닌 광기만이 느껴질 뿐이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시다. 그분이시라면 온전히 그들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선물 같은 딸을 얻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편견에 당당하게 맞설 것이고 투쟁할 것이다. 나는 내 딸을 매우 사랑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엄마는 누가 뭐라고 하든 죽을 때까지 네 편이야. 사랑해, 내 딸.”

 

<작은책> 정기구독 신청

posted by 작은책
2021. 4. 27. 11:43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51일 노동절은 <작은책>이 스물여섯 살이 되는 날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창간 뜻을 품고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왔어요. 좋은 글 주시는 필자님들과 다달이 구독과 후원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달부터 송주홍 님이 노가다꾼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노가다라는 낱말에 거부감이 드는 분들은 송주홍 님의 글을 읽어 보세요. 생각이 유쾌하고, 글도 재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한 분입니다. (깨알 같은 필자 자랑. ㅋㅋ)

지난 47, 2021년 보궐 선거가 끝난 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성하는 목소리를 내는 한편 세상을 향해 비난하는 글들을 쏟아 냈습니다. 타임라인에 뜨는 글들을 읽다가 쌓이는 피로감에 며칠 동안 계정을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SNS를 그만둬야 하나그런 생각마저 들었지요. 마침 <작은책> 이번 호 법률 상담소에 실린 글을 읽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은 서비스를 통해 수집한 대량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정보를 도널드 트럼프 후보 선거캠프에 넘겨 선거운동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사를 한 결과 페이스북 이용자의 개인정보 침해 행위를 확인했답니다. 저처럼 SNS에 피로도가 쌓이는 독자님들이 계시면 이 글을 꼭 읽어 봐 주세요. 우리는 정말로 SNS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2021418

유이분 올림

 

목차

 

4 안건모의 사람여행

꿀벌과 함께 사는 벌꿀 같은 인생 안건모

26 엮은이의 글

 

살아가는 이야기

28 집 짓기는 밥심보다 술의 힘 조광복

32 설거지, 피할 수 있는 숙명 심영수

36 중학교 2학년, 처음 하는 오티 이율현

38 홈리스 야학을 만나다 김수현

44 그래, 우리 아들 퀴어 강향숙

48 최상을 양보한 의료복지 구본희

54 코로나 시대, 성평등 결혼식 해내기 진솔아

59 노가다꾼으로 살아가기

조선일보 대신 <작은책>에 연재합니다 송주홍

63 살아온 이야기(5)

타인의 시선과의 싸움에서 졌다 최현숙

69 나는야 뉴욕의 무료 변호사

변호사님, 코로나에 걸렸어요 남수경

73 우리 동네 주치의

왕진 가방 속의 친구들 1 추혜인

77 요즘 중딩 교실 이야기

남자 청소년 성의식 교육을 해 보고 싶다 안정선

82 남해 바다 어촌 일기

바다의 맛을 알아 가는 재미 황은주

86 제소라의 아는 여자

아는 여자의 존재 증명 제소라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90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응원해 주세요! 전영수

96 열심히 일해서 부자 될 거라던 꿈 남기웅

101 직장 내 괴롭힘의 끝판왕 김호정

106 작은책 노동 상담소

포괄임금제라는 몬스터 박공식

110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112 낮은 곳, 나의 자리로

운전할 줄 아세요? 홍세화

116 공공의료 이야기

가정의와 전문의가 협력하는 의료 문정주

122 생태 이야기

있는 공항도 없애야 마땅한 이유 박병상

128 작은책 법률 상담소

페이스북을 고소합니다 전다운

 

쉬엄쉬엄 가요

134 이야기가 있는 사진 최인기

136 독립영화 이야기 아름다운 존재들을 담은 아름다운 영화 류미례

140 조재도의 시 읽기

142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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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요즘 중딩 교실 이야기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한다

안정선/ 서울 경희중학교 교사

 

작년 이맘때에는 기약 없는 등교 중지로 인해 학교가 4월 중순에나 열렸기에 밀린 수업 채우기 바빠 ‘중2 국어 첫 수업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논하며 이름 조곤조곤 불러 보는 마음 데우기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드디어 ‘3월 2일 첫 수업’을 했다.

나의 첫 수업은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부터 시작한다. 국어가 도구 과목이라서 실생활에도 유용할 뿐 아니라 다른 교과목을 공부할 때 꼭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국어를 통해 사회, 문화, 철학, 역사, 과학 등 인생 전반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한다’에 힘을 꼭꼭 주어 이 연사 외쳐 본다. 나만 열심히 외치는가? 아니다. 너무 긴장해서 웃지도 못하다가 점점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가던 아이들도 이 대목에서는 두 팔꿈치를 책상 맨 앞 모서리까지 당기고 숨겨 놓은 키 3센티미터를 꼿꼿이 끌어 올리며 선생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한다’, 이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분, 부처핸썸(put your hands up)? 누구 국어를 잘하면 연애를 잘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말해 볼 사람? 국어를 잘하면…, 아, 말빨이 좋아진다? 말 된다. 초등학교 때 반에 이런 친구 없었어요? 뭐 엄청 잘생겼거나 멋지거나 그런 친구도 아니에요. 근데 이상하게 여자아이들한테 인기가 좋아. 그런 애 없었니? 뭐, 너라구? 헐~ 그런 친구들 공통점이 뭐게요? 바로 이 OO 능력이 좋아요. OO에 들어갈 정답은? 그렇지, ‘공감’입니다, 공감 능력.

‘공감(共感)’이 뭡니까? 함께 공, 느낄 감.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거죠. 여러분이 여자 친구랑…. 뭐? 모태 솔로라고? 저런…, 없지만 있다고 치고, 여자 친구랑 만났는데 친구가 이러는 거야, “나 배고파. 떡볶이 먹으러 가자.” 그럴 때 네가 “나 방금 라면에 밥 말아 먹고 왔는데, 뭔 떡볶이?” 그런다? 그럼 넌 걔랑 100일을 못 채운다에 500원 건다.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배가 아무리 빵빵해도 어떻게? “오, 떡볶이 먹고 시포요? 그럼 먹으러 가야지!” 이렇게.

나는 30여 년 동안 남자 중학생만 가르쳐 왔는데 우리 남자 친구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좀 이따가 날씨가 풀리면 여러분은 운동장 가서 친구랑 공 차면서 신나게 놀겠죠. 친구랑 둘이 바람을 가르며 막 달리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옆에서 뛰던 친구가 없네? “야, 너 어디 갔냐?” 보니까 바닥에 엎어져 있어. 친구가 피 나는 무릎을 움켜잡고 “아우쒸, 졸라 아파” 이래. 그럼 넌 어떻게 해? 다친 친구를 일으켜 세우고, “어휴, 피 나네. 많이 아프겠다. 자, 내 어깨에 기대. 보건실 가자.” 이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꼭 “야, 너 뭐 하냐, 찐따새꺄? 얼른 일어나라?” 이러는 친구들 있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누군가 “슨생님, 저는 넘어져 무르팍 까져 본 적이 없어서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물론 공감에는 ‘같은 경험’이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15년 동안 단 한 번도 넘어져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저렇게 넘어지고 다치면 무척 쪽팔리고 아플 것이다, 라고 짐작할 수 있잖아요. 그 사람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이런 공감 능력은 마치 운동을 통해 근육을 키우듯 기를 수 있어요. 공감은 마음이 하는 일이지만 이 역시 훈련과 공부를 통해 기를 수 있답니다. 어떻게? 문학작품을 많이 읽음으로써. 국어 시간에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문법 이런 영역도 배우지만 특히 우린 ‘문학’을 배우잖아요. 여러분도 작년에 윤동주의 ‘햇비’라는 시도 배웠고 ‘보리방구 조수택’ 이런 소설, 할머니 이야기 나오는 수필도 배웠어요. 우리가 모든 삶을 경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면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요.

여러분 전쟁을 겪어 봤나요? 우리는 전쟁을 겪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경험해서는 안 되지만 <몽실언니>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쟁의 고통과 아픔, 슬픔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아, 전쟁이란 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 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와 같은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겁니다. 공감 능력이 있어야만 연애도, 친구와의 사귐도,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겠죠?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보다도 이 공감 능력을 길러 주고 싶어요. 마음이 따뜻하고 넓은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국어는 외우는 것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읽는 것들이 더 많아요.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국어 지식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지만, 심지어 국어 시험을 잘 못 본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친구를 배려하고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최고의 보람으로 여길 겁니다. 그런 수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가르칠게요.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믿고 재미있게 수업에 참여해 줄 수 있죠?

새봄의 아이들은 늘 예쁘다. 왜냐하면 작년 11월부터 ‘늦가을 3차 사춘기 도래’를 영접하며 좀 삐딱해지던 아이들마저도 새 학기엔 다 잘해 보고 싶은 마음에 눈을 반짝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그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럴 때 교사가 ‘너와 내가 힘을 합쳐서 열심히 공부해 보자’라고 말해 주는 거다. 물론 새 학기의 약발은 두 달 정도밖에 안 간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친구들이랑 친해지고, 선생님들은 만만해지고, 교생 선생님이 오고 그러면 마음은 늦은 봄날 지는 꽃처럼 흐드러져 버린다. 그럼 그때는 또 다른 희망과 다양한 동기 유발을, 또 다른 마음잡을 이야기를 준비해 수업에 들어가야 할 거다. 다시 힘을 내 여름방학까지 잘 버틸 수 있도록 말이다. 부디 올해는 순조롭게 그 단계들을 다 겪으며 제대로 성장하는 ‘대한민국 중2 남중딩’들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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