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방송 프리랜서 작가였습니다. 전통주 관련 다큐멘터리 작업이 있어 취재차 지평양조장을 방문하면서 지평주조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허물어질 것 같은 오래된 양조장 안에서 술 빚는 풍경에 매료되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본업인 방송작가를 그만두고는 2013년 4월 1일에 입사해 양조장 생산 현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술을 빚는 모든 과정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것이 없는 아주 힘든 작업이어서 저 빼고 모두 남자 직원들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술 빚는 과정 하나하나가 저에게는 신세계였고, 일원이라는 자부심에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결과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2017년에 품질관리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여자이기 때문에 겪었던 차별, 무시, 끗발 있는 부서장에 줄서기하는 직원들 사이의 알력까지 많은 일들을 겪었지만 성실, 진심, 정직 이 세 가지만 갖고 일한 결과라고 자부합니다.
술이 알려지면서 춘천의 산업단지에 공장을 만들어 대량 생산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지평에서처럼 우물물로 술을 빚는 게 아니라 산업단지에 공급되는 상수도를 이용해 기계 설비로 대량 생산을 하면서 본연의 술맛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지평에서 근무했던 생산 현장 직원들과 관리직원들 간에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회사 대표와 영업 담당 임원은 오직 매출을 올리는 데 혈안이 됐고, 간언과 직언을 마다 않는 저를 전공자가 아니라 능력 부족이라며, 저도 모르는 클레임 건을 제 책임으로 몰아 보직 해임시키고 지평공장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지평공장은 모든 기계 설비를 철거한 폐공장이 되어 있었고, 독사가 출몰하는 흉가 같은 옛날 양조장터를 청소하고 순찰하는 경비원으로 일했습니다.
회사는 저에게 전공하지도 않은 건축 리모델링 업무에, 폐수 허가 업무에, 양조장을 리모델링하는 데 필요한 11억 원을 양평군에서 투자받아 오라는 업무를 맡겼습니다. 아무런 직함도 명함도 없이 경비처럼 일하는 저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건, 하지 못하면 능력 부족으로 저를 자르기 위한 명분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몇 번씩 영업담당 임원으로부터 겁박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포털사이트 맘카페에서 지평막걸리의 맛이 예전과 다르다며 어디서 생산하는지 묻는 글에 익명으로 답글을 달았습니다. 그런데 회사와 관련된 사람이 저의 댓글을 캡처해서 영업담당 임원에게 보고했고, 그 댓글을 쓴 사람이 저라는 걸 알자 저를 해임시키고 대기 발령을 냈습니다. 한마디로 그만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습니다.
춘천공장에서 일주일 동안 대기 발령을 받았는데, 공장장 자리 옆 벽과 파티션의 폭이 1미터도 되지 않는 협소한 공간에 작은 의자 하나를 두고 앉게 했습니다. 2018년까지만 해도 저에게 “팀장님”이라고 하던 후배 직원들이 보는 앞에서 저는 면벽수행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 모욕과 참담함과 정신적 충격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버텼습니다. 그래도 제가 나가지 않자 이번에는 대표와 임원이 있는 서울사무소로 대기 발령을 내서 불 꺼진 빈 회의실에 일주일 동안을 앉혔습니다. 회의가 있으면 저를 직원들이 있는 사무실 가운데 빈자리에 앉혀 놓았는데, 저보다 한참 어린 후배들조차 저를 투명 인간 취급하더군요.
그래도 제가 회사를 그만두지 않자, 아무 연고도 없는 대구로 발령을 냈습니다. 대형마트에 진열되는 술을 관리하고 채워 놓는 일을 하는데, 숙소도 자비로 구하라고 하고, 차량 유지비 지원도 없다는 겁니다. 발령 나고 3일 안에 내려가지 않으면 그만두는 걸로 알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저 말고도 연구소장으로 있던 아이 셋 가장은 업무상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대표와 영업직원들의 운전기사까지 하면서도 나가지 않자 회사는 그를 전라도 전주로 발령을 냈고, 그제서야 그만두었습니다. 저도 그런 방식으로 내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회사가 저에게 자행한 일련의 비인간적인 작태의 근거를 모아 노무사를 선임하여 고용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 부당전보 및 부당해고 구제 신청으로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회사 측에서는 답변서에 무연고인 대구로 발령을 내도 되는 줄 알았다며 핑계와 변명으로 일관했습니다.
이후 저는 춘천공장으로 발령을 받아 생산 현장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직장 내 괴롭힘이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다른 여직원들은 현장에서 근무하는데 저에게는 공장 내 화장실 청소, 식당 청소, 심지어 남자 직원들 담배 피우는 곳 청소, 공장 주변의 풀 뽑기를 시키는 겁니다. 그것도 모자라 제가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쌓인 기본급을 깎아 생산직원의 급여 수준으로 낮추려 새로운 계약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저의 업무와 관련 없는, 전혀 다른 현장 파트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까지 저와 절대로 대화하지 말라고 업무 지시서에 기재까지 해서 회람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자 용역들도 하기 힘들어하는 폐비닐을 프레스기로 압축하는 업무를 주었습니다. 그 업무를 폭염이 내리쬐는 한여름부터 겨울까지 했습니다. 압축한 비닐을 기계에서 꺼내어 자키(핸드 팰릿)로 옮겨 공터에 쌓는데, 얼마나 힘들던지 결국 손가락 마디마디에 관절염이 생기고 오른쪽 팔꿈치에 통증이 너무 심해 병원에서 진단을 받았더니 인대가 부분적으로 파열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저는 업무상 재해로 산재 신청을 했고, 지평 폐공장으로 좌천과 대기 발령 때 면벽수행하던 괴롭힘으로 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아 이 역시 산재 신청을 한 상태입니다.
회사는 산재 신청을 한 것을 알고는 압축 업무에서 제외시켰지만 망가진 손가락과 팔꿈치는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생산 현장에서 다른 남자 직원들이 한가하게 뒷짐 지며 일할 때 저는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을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손과 팔을 이용해서 반복 작업하는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팔꿈치 손상이 업무상 재해로 일부 기간 산재 승인을 받았고, 저는 정년 때까지 계속 이 회사를 다닐 계획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손과 팔목, 팔꿈치를 치료받으며 근무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위해 헌신했더니 헌신짝처럼 취급한 회사 대표와 임원을 저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저를 정신적·육체적으로 만신창이로 만들어 놓고도 그만두게 하라고 직접적으로 지시한 회사 대표, 임원, 그리고 저를 잔인하게 정신적·육체적으로 고문을 한 것과 다름없는 춘천공장의 공장장, 생산팀장, 지시받은 대로 했다는 현장의 반장 그리고 무언의 가담자들인 일부 현장 직원들은 지금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고 있습니다. 저의 싸움은 아직도 진행 중입니다. 저를 아무리 짓밟고 찢고 뜯어내어도 저는 저의 진실, 정직한 정신적 뿌리가 마음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한 절대로 그들의 위력과 겁박과 야만적인 작태에 뽑히지 않을 것입니다. 질경이처럼 말입니다.
현대중공업 정문 앞에서 조합원 동지들이 출·퇴근하는 노동자들, 지나는 시민들에게 “경적 한 번, 손짓 세 번” 피켓을 들고 변함없이 현대호텔 옥상을 가리키고 있다. 밑에서 지키고 있는 동지들에게 더 많은 과제를 주고 온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함께 하고 있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해고자 이병락 동지는 여전히 강건하다. 이렇게 오늘도 동지들과의 하루를 시작한다.
저는 용접 부위를 고속 회전체로 갈아 내서 표면을 다듬고 결함 등을 확인하는 그라인더(사상) 일을 16년째 하고 있는 사상공입니다. 울산에서 생활한 지 10년째로 현재는 사내하청업체 본공(하청업체 상용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조선소 일은 물량팀(하청업체의 재하청)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헷갈릴 수도 있지만, 하청업체 노동자들은 본공과 물량팀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임금, 복지 등 차별은 늘 존재했습니다. 명절 연휴, 여름휴가 기간은 정규직의 절반 정도로 짧았고, 일이 없을 땐 무급으로 쉬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휴가비, 성과금도 근속(6개월, 1년 이상, 2년 이상, 3년 이상)에 따라 차등 지급받았습니다. 학자금도 근속 3~5년 이상이 돼야 정규직의 절반 정도 지원받습니다.
더 큰 문제는 임금 체불, 4대 보험 체납, 업체 폐업 등이 수시로 일어나고 있고, 폐업 시 하청 노동자들의 체불임금을 체당금으로 넘기는 게 관행처럼 여겨지고 있어 하청 노동자들의 피해가 크다는 점입니다.
하청 노동자들은 이것을 깰 수 있는 방법이 노동조합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블랙리스트와 업체 폐업, 해고로 두 번 다시 현대 계열사의 사내하청에 입사하지 못하게 원청에서 관리를 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가입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2017년 고공농성으로 원청의 블랙리스트 관리는 없어졌다고 하지만, 대다수의 하청 노동자들은 아직도 두려워하며 노동조합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척박한 현장에서 2019년 7월 현대건설기계 서진이엔지 조합원들을 만났고, 지금까지 함께 투쟁하고 있습니다. 한 업체 과반 이상의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9차례 단체교섭을 진행했습니다. 쟁의권을 확보한 후에는 현대중공업지부(정규직 노조)와 함께 파업도 했습니다. 그러나 원청인 현대건설기계는 이를 두고 보지 않았습니다. 서진이엔지의 물량 일부를 정규직으로 넘기고, 1년에 900억으로 추정되는 물류비용을 감수하면서 사외로 설비와 물량을 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서진 조합원이 일하던 자리에 현대중공업의 정규직을 전환 배치하기까지 했습니다. 원청은 더 많은 하청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서진이엔지를 위장폐업했고, 관행처럼 이어지던 고용승계도 끝내 거부하면서 서진 조합원들은 집단해고되었습니다.
그동안 불법으로 빼앗긴 것을 되찾고, 노조할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조합 활동은 결국 위장폐업과 해고로 돌아왔습니다. 원청의 책임을 묻기 위해 노동부에 불법파견 진정을 냈고, 결국 직접고용 시정 지시 명령을 받아냈습니다.
현대건설기계에 과태료 4억 6천만 원이 부과되었지만, 사측은 여전히 묵묵부답으로 버티고만 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해고된 뒤 8개월 동안 현대건설기계는 현대중공업그룹의 지시를 받을 뿐 책임과 권한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며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들과 단 한 차례의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행정기관인 노동부의 시정 지시 명령도 무시하고, 법 위에 군림하는 현대중공업그룹 재벌의 무소불위 양아치 습관은 여전했습니다.
서진 노동자들이 당하고 있는 일은 현대중공업의 전체 하청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청업체와 동반성장하겠다고 공언했던 현대중공업은 그동안 직접 지원(하청업체 사장들의 중간 착복을 막기 위해 에스크로 계좌로 직접 지급하거나 별로도 지원)했던 조식·석식 식비, 명절 귀향비, 여름휴가비, 혹서기 연장수당, 피복비 등을 올해 2월부터 기성금(원청이 하청업체에 지급하는 공사대금)에 포함시켜 책임을 하청업체에 떠넘겼습니다. 업체 사장들은 임금과 4대 보험 내기도 부족하다며 하청 노동자들에게 그 부담을 다시 떠넘겼습니다. 그동안 1000원을 내고 먹던 아침·저녁이 바로 5500원으로 올랐습니다. 심지어, 재활용하는 정규직 노동자 작업복을 하청 노동자들에게만 입으라고 합니다. 밥값, 작업복 차별까지 치가 떨립니다.
매년 총수 일가는 900억 원대의 배당금을 챙기는데 노동자들은 죽고, 잘리고, 빚만 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재벌의 횡포를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3월 19일 직접고용 대상 당사자인 서진 조합원 4명이 ‘하청 차별, 복지 후퇴 철회, 불법파견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현대중공업 기숙사인 율전재 옥상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현대중공업 폭력 경비대가 경찰, 119구조대를 대동해서 오함마(큰 망치)와 쇠지렛대로 철문을 부수고 들어왔고, 고공농성에 돌입한 4명의 서진 노동자들은 간신히 옥탑 기계실 위로 몸을 피했습니다. 경비대들은 난간에 부착한 현수막을 뜯고 농성 물품을 강탈해 갔습니다. 최소한의 물품 공급도 막혔고, 갑자기 추워진 날씨와 강풍, 다음 날 비 예보 등으로 고공농성 유지가 힘든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내려오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올라갔던 조합원 동지들과 하청지회는 많은 고민 끝에 12시간 만에 내려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울먹이던 동지들, 내려왔을 때 마치 자신들의 잘못인 양 고개를 떨구던 그 날의 동지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떠날 때 뒤에서 비웃으며 박수 치던 현대중공업 경비대가 아직도 뇌리에 박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서진의 이병락 대의원과 저는 너무나 정당한 그날의 요구를 다시 내걸고 3월 22일 월요일 아침, 보란 듯이 현대중공업 본관 바로 앞 현대호텔 꼭대기에 올랐습니다. 그날 비웃던 경비대와 현대중공업에 보기 좋게 한 방 날리고 싶었습니다. 서진 동지들의 승리가 곧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들의 신뢰와 마음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제대로 투쟁해 보려고 합니다. 차별과 빼앗기는 것에 익숙해져 버린 하청 노동자들과 노동조합으로 뭉쳐 저 착취의 공장을 멈춰 세우는 그날을 꿈꾸고 현실로 만들어 가겠습니다.
정기선 3대 세습을 위해 몸집만 키우고 민주노조 파괴, 하청 노동자 노조할 권리 탄압하는 현대중공업 자본에게 요구한다.
당사자 포함 협의 테이블 구성하고 문제 해결 교섭에 나서라!
현대중공업은 건설기계 불법파견 인정하고 직접고용 이행하라!
하청 노동자 복지 후퇴, 밥값·피복·도시락 차별 철회하라!
4월 23일 전영수 씨와 이병락 씨는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는 현장 투쟁으로 전환했습니다. - 편집자 주
우리 아이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여자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MTF, 즉 트랜스젠더이다. 쉽게 말해, 하리수를 떠올리면 된다. 아들이 커밍아웃을 한 것은 내가 말기 암 선고를 받고 1년쯤 투병 중이던 때였다.
“엄마, 나 딸이에요. 이제 어쩔 수 없어요.”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순간 멍해지며 깊은 충격에 빠졌다.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이 아이가 어릴 적 굉장히 여성적이었던 취향들, 남자답지 않은 행동거지들, 군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의가사 제대를 했던 모습들이 마치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며 의문이 풀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그런 거였구나.’ 이유는 알았지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가진 신앙, 구원의 문제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기독교적 관점으로, 성경에서는 분명 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나는 빨리 이 아이를 되돌려야 한다는 생각에 급해졌다. 목사님 세 분과 아이와 나 이렇게 면담을 했고, 심리 치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예약했다.
‘어떻게 시한부 암 투병 중인 엄마에게 이럴 수 있나. 불효막심하고 이기적인 놈...’ 계속해서 아이와 충돌했고 새벽에 1시간 넘게 하느님께 기도했다. 제발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이후 아이는 정신이 나간 듯 보였고 두 번 자살을 시도했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고통스런 나날이었다. 매일 아이에게 카톡으로 성경 구절들을 보내고, 때로는 비하 발언을 서슴지 않고 내뱉으며 무자비하게 상처를 주고받았다.
이런 시간이 1년 가까이 지났을 무렵 우연히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거리의 만찬’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나와 입장이 같은 성소수자 부모들이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풀어내고 있었다. 공감이 되어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인터넷을 검색했고 ‘성소수자 부모 모임’을 알게 되었다.
목사님께서 그런 모임에 가면 나쁘게 세뇌된다며 만류했지만 난 가야만 했다. 난 절대 세뇌당하지 않으리라 확신하며 모임에 나갔다. 거기에서 거침없이 독설을 쏟아 내고 그 아이들과 내 아이를 정죄했다. 다른 부모와 성소수자 당사자의 이야기는 귓등으로 들었다.
모임을 마치고 뒤풀이에서 우리 아이 같은 MTF의 어머니께서 내게 《동성애와 기독교》라는 책을 주셨다. 나는 《커밍아웃 스토리》 등 몇 권의 책을 샀다. 내가 가장 힘들었던 건 신앙과의 갈등이었다. 나는 20여 권이 넘는 동성애와 관련된 기독 서적들을 납득이 될 때까지 읽었다. 또 <바비를 위한 기도>라는, 게이 아들과 엄마의 모습을 그린 영화를 되풀이해서 보았다. 어쩜 바비 엄마는 나의 모습 그대로 복사판이었다. 영화에서 바비는 결국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했는데, 그 이후 바비 엄마가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바뀌어 간다. 감동적이고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다.
지금은 하느님께서는 정말 다양한 모습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의 사랑은 그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것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는 것임을 깨달았다. 하느님의 실수가 아닌, 온전한 모습으로 만드셨음을 믿게 되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고 단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도 많은 차별과 편견에 고통받고 있고, AIDS로 죽는 수보다 견뎌 내지 못한 사회의 시선과 고통 속에 자살해 사망하는 수가 훨씬 많다. 지금처럼 어마어마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그것을 일부러 선택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태어났고 감수하며 살아갈 뿐이다.
얼마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동성애자들이 법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며 ‘동성 결합법’을 천명하셨다. WTO에서는 몇 년 전 동성애는 정신질환이 아니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대단한 보수 기독교 단체들이 차별 금지법을 반대하며, 그들을 정죄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고도 그들은 사랑해서 그런단다. 개가 웃을 일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사랑이 아닌 광기만이 느껴질 뿐이다. 항상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서 답을 찾는다. 예수님은 사랑이시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의 편이시다. 그분이시라면 온전히 그들을 감싸 안아 줄 것이다.
나는 내 아이를 진심으로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하느님의 선물 같은 딸을 얻었다. 나는 내 딸을 위해, 이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편견에 당당하게 맞설 것이고 투쟁할 것이다. 나는 내 딸을 매우 사랑하고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한다.
5월 1일 노동절은 <작은책>이 스물여섯 살이 되는 날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창간 뜻을 품고 지금까지 뚜벅뚜벅 걸어왔어요. 좋은 글 주시는 필자님들과 다달이 구독과 후원해 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고맙습니다!
이번 달부터 송주홍 님이 ‘노가다꾼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노가다’라는 낱말에 거부감이 드는 분들은 송주홍 님의 글을 읽어 보세요. 생각이 유쾌하고, 글도 재밌고, 세상을 보는 눈이 따뜻한 분입니다. (깨알 같은 필자 자랑. ㅋㅋ)
지난 4월 7일, 2021년 보궐 선거가 끝난 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성하는 목소리를 내는 한편 세상을 향해 비난하는 글들을 쏟아 냈습니다. 타임라인에 뜨는 글들을 읽다가 쌓이는 피로감에 며칠 동안 계정을 열어 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SNS를 그만둬야 하나’ 그런 생각마저 들었지요. 마침 <작은책> 이번 호 ‘법률 상담소’에 실린 글을 읽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습니다.
2016년 미국 대선 때, 페이스북은 서비스를 통해 수집한 대량의 페이스북 사용자들의 정보를 도널드 트럼프 후보 선거캠프에 넘겨 선거운동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우리나라도 이 사건을 계기로 조사를 한 결과 페이스북 이용자의 개인정보 침해 행위를 확인했답니다. 저처럼 SNS에 피로도가 쌓이는 독자님들이 계시면 이 글을 꼭 읽어 봐 주세요. 우리는 정말로 SNS를 무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일까요?
작년 이맘때에는 기약 없는 등교 중지로 인해 학교가 4월 중순에나 열렸기에 밀린 수업 채우기 바빠 ‘중2 국어 첫 수업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논하며 이름 조곤조곤 불러 보는 마음 데우기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드디어 ‘3월 2일 첫 수업’을 했다.
나의 첫 수업은 ‘국어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부터 시작한다. 국어가 도구 과목이라서 실생활에도 유용할 뿐 아니라 다른 교과목을 공부할 때 꼭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국어를 통해 사회, 문화, 철학, 역사, 과학 등 인생 전반에 필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한다’에 힘을 꼭꼭 주어 이 연사 외쳐 본다. 나만 열심히 외치는가? 아니다. 너무 긴장해서 웃지도 못하다가 점점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가던 아이들도 이 대목에서는 두 팔꿈치를 책상 맨 앞 모서리까지 당기고 숨겨 놓은 키 3센티미터를 꼿꼿이 끌어 올리며 선생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국어를 잘해야 연애를 잘한다’, 이 명제에 동의하십니까? 동의하는 분, 부처핸썸(put your hands up)? 누구 국어를 잘하면 연애를 잘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말해 볼 사람? 국어를 잘하면…, 아, 말빨이 좋아진다? 말 된다. 초등학교 때 반에 이런 친구 없었어요? 뭐 엄청 잘생겼거나 멋지거나 그런 친구도 아니에요. 근데 이상하게 여자아이들한테 인기가 좋아. 그런 애 없었니? 뭐, 너라구? 헐~ 그런 친구들 공통점이 뭐게요? 바로 이 OO 능력이 좋아요. OO에 들어갈 정답은? 그렇지, ‘공감’입니다, 공감 능력.
‘공감(共感)’이 뭡니까? 함께 공, 느낄 감. 다른 사람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거죠. 여러분이 여자 친구랑…. 뭐? 모태 솔로라고? 저런…, 없지만 있다고 치고, 여자 친구랑 만났는데 친구가 이러는 거야, “나 배고파. 떡볶이 먹으러 가자.” 그럴 때 네가 “나 방금 라면에 밥 말아 먹고 왔는데, 뭔 떡볶이?” 그런다? 그럼 넌 걔랑 100일을 못 채운다에 500원 건다.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내 배가 아무리 빵빵해도 어떻게? “오, 떡볶이 먹고 시포요? 그럼 먹으러 가야지!” 이렇게.
나는 30여 년 동안 남자 중학생만 가르쳐 왔는데 우리 남자 친구들은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때가 많아서 안타까워요. 좀 이따가 날씨가 풀리면 여러분은 운동장 가서 친구랑 공 차면서 신나게 놀겠죠. 친구랑 둘이 바람을 가르며 막 달리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옆에서 뛰던 친구가 없네? “야, 너 어디 갔냐?” 보니까 바닥에 엎어져 있어. 친구가 피 나는 무릎을 움켜잡고 “아우쒸, 졸라 아파” 이래. 그럼 넌 어떻게 해? 다친 친구를 일으켜 세우고, “어휴, 피 나네. 많이 아프겠다. 자, 내 어깨에 기대. 보건실 가자.” 이래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꼭 “야, 너 뭐 하냐, 찐따새꺄? 얼른 일어나라?” 이러는 친구들 있다? 그러지 마세요, 제발.
누군가 “슨생님, 저는 넘어져 무르팍 까져 본 적이 없어서 그 고통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물론 공감에는 ‘같은 경험’이 중요하긴 해요. 하지만 세상에 태어나 15년 동안 단 한 번도 넘어져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저렇게 넘어지고 다치면 무척 쪽팔리고 아플 것이다, 라고 짐작할 수 있잖아요. 그 사람 입장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으로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고 감정을 느끼는 겁니다.
이런 공감 능력은 마치 운동을 통해 근육을 키우듯 기를 수 있어요. 공감은 마음이 하는 일이지만 이 역시 훈련과 공부를 통해 기를 수 있답니다. 어떻게? 문학작품을 많이 읽음으로써. 국어 시간에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 문법 이런 영역도 배우지만 특히 우린 ‘문학’을 배우잖아요. 여러분도 작년에 윤동주의 ‘햇비’라는 시도 배웠고 ‘보리방구 조수택’ 이런 소설, 할머니 이야기 나오는 수필도 배웠어요. 우리가 모든 삶을 경험할 수 없다 하더라도 문학작품을 많이 읽으면 내가 살아 보지 못한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어요.
여러분 전쟁을 겪어 봤나요? 우리는 전쟁을 겪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절대로 경험해서는 안 되지만 <몽실언니> 같은 문학작품을 통해서 전쟁의 고통과 아픔, 슬픔을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아, 전쟁이란 건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구나,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 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면 여러분은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서 이와 같은 ‘공감 능력’을 기를 수 있다, 이겁니다. 공감 능력이 있어야만 연애도, 친구와의 사귐도, 사회생활도 잘할 수 있겠죠?
나는 여러분에게 무엇보다도 이 공감 능력을 길러 주고 싶어요. 마음이 따뜻하고 넓은 사람으로 자라도록 도와주고 싶어요. 국어는 외우는 것보다 마음으로 이해하고 읽는 것들이 더 많아요.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국어 지식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지만, 심지어 국어 시험을 잘 못 본다 하더라도 여러분이 친구를 배려하고 친구의 마음에 공감하고, 다른 사람의 아픔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면 최고의 보람으로 여길 겁니다. 그런 수업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가르칠게요. 그러니 여러분도 나를 믿고 재미있게 수업에 참여해 줄 수 있죠?
새봄의 아이들은 늘 예쁘다. 왜냐하면 작년 11월부터 ‘늦가을 3차 사춘기 도래’를 영접하며 좀 삐딱해지던 아이들마저도 새 학기엔 다 잘해 보고 싶은 마음에 눈을 반짝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생님과 친구들 앞에서 그들은 모두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럴 때 교사가 ‘너와 내가 힘을 합쳐서 열심히 공부해 보자’라고 말해 주는 거다. 물론 새 학기의 약발은 두 달 정도밖에 안 간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친구들이랑 친해지고, 선생님들은 만만해지고, 교생 선생님이 오고 그러면 마음은 늦은 봄날 지는 꽃처럼 흐드러져 버린다. 그럼 그때는 또 다른 희망과 다양한 동기 유발을, 또 다른 마음잡을 이야기를 준비해 수업에 들어가야 할 거다. 다시 힘을 내 여름방학까지 잘 버틸 수 있도록 말이다. 부디 올해는 순조롭게 그 단계들을 다 겪으며 제대로 성장하는 ‘대한민국 중2 남중딩’들을 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은퇴한 지 십 년이 지났어. 나 스스로 언제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는지 깜짝 놀랄 때가 있어. 이런 말이 있지. 20대에 좌파(또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면 바보인데, 40대에 여전히 좌파(또는 마르크스주의자)로 남아 있어도 바보라는 말. 나이가 들면 그동안 축적한 재산이 있으니까 그만큼 보수적이 된다는 뜻이라고 해. 하지만 난 이 따위 말을 신뢰하지 않아. 나이 들면 보수화된다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말이라고 보기 때문이야. 나이 들면 보수화되는 걸 나는 ‘돈 공부’만 하고 ‘세상 공부’를 하지 않는 탓으로 보는 편이야.
요즘 ‘하루 만 보 걷기’를 실행하고 있어. 매일 만 보를 걷는 거야. 스스로 ‘은퇴한 산책자’라고 부르는데, 온건한 사람이 되긴 틀렸다는 걸 최근 트랜스젠더 성소수자들의 죽음을 만나면서 다시금 확인했어. 며칠 사이를 두고 김기홍 씨와 변희수 씨가 세상을 등졌어. 무척 우울했는데, 그게 코로나 블루 때문만이 아니었어.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잖아. 사회적 존재로서 두 사람은 한국 사회를 반영해. 그 일원인 나에게도 그들의 죽음에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뜻이기도 해.
세상에는 왼손잡이가 9분의 1정도 있다고 해. 아홉 명 중 한 명이 왼손잡이라는 거야. 한국은 왼손잡이 비율이 더 적을 것 같기도 해. 오른손잡이가 절대다수를 차지하지. 나도 오른손잡이야. 근데 내가 오른손잡이를 선택했나? 물론 아냐. 내가 선택하지 않은 채 남자로 태어났듯이 그냥 오른손잡이가 된 것뿐이지. 높은 담을 넘어갈 때에도 오른발을 먼저 짚는 사람이 있고 왼발을 먼저 짚는 사람이 있어. 평소에 왼발을 먼저 짚는 사람에게 오른발을 먼저 짚으라고 하면 잘 넘어갈 수 있을까? 어려울 거야.
오른손은 ‘옳은 손’에서 온 게 분명해.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도 하는데, 바른손은 ‘바른 손’에서 왔지. 그럼 왼손은 ‘틀린 손’인가? 좌우동형으로 똑같은데 한쪽을 ‘옳다’, ‘바르다’고 말하게 된 근거나 배경은 뭘까? 절대다수가 오른손잡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 “언어가 곧 사유이고 사유가 곧 언어”라면, 오른손 또는 바른손이라는 말에서 다수의 횡포를 읽어 낼 줄 알아야 해. 이 다수의 횡포가 한국어에만 있는 게 아냐. “언어는 곧 사유이고 사유는 곧 언어”라는 언어학의 명제가 한국어에만 적용될 리 없기 때문이지. “right hand(영어로 ‘오른손’)”의 right도 “main droite(프랑스말로 ‘오른손’)”의 droite도 모두 ‘옳다’의 뜻을 갖고 있어. 이건 순전히 가정인데, 어떤 사회에 왼손잡이가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면, 그 사회의 언어는 우리와 정반대로 왼손잡이를 ‘오른손(옳은 손)잡이’라고 쓰고 오른손잡이를 ‘왼손잡이’라고 쓸 거야.
이처럼 좌우동형으로 똑같은 오른손과 왼손임에도 오른손잡이가 절대다수라는 이유로 ‘옳은 손’이라고 주장해 온 게 인간의 사유였는데, 그런 인간사에서 성소수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었을지 쉽게 가늠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건대, 좌우동형인 왼손잡이/오른손잡이를 그렇게 갈라치기했는데, 성소수자/이성애자는 왼손잡이/오른손잡이의 차이 정도가 아니잖아! 역사상 거의 모든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국책이 부국강병인데 여기에 아무 보탬이 되지 않는 성소수자들은 그야말로 배제와 차별, 혐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어. 실로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 노예해방이나 여성참정권보다 한두 세기를 더 기다려야 했을 만큼. 성(별)정체성이 사람의 의지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과학의 기여가 필수적이었지. 그리하여 마침내 21세기 초에 네덜란드에서 동성결혼권이 처음 법제화되고(정확히 2001년의 일이야) 다른 유럽 나라들이 뒤를 이어 가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오게 됐어.
파리와 암스테르담 등의 유치학교에는 ‘엄마’가 둘인 동무를 가진 어린이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어제 동무를 찾으러 온 엄마와 오늘 찾으러 온 엄마가 다른 거야. 맞아! 레즈비언 커플인 거지. 양육권을 가진 그들은 정자은행을 통해 생물학적 자식도 가질 권리가 있어. 남성 커플일 경우에는 대리모 관련법이 나라마다 다른데 여성 커플보다는 어려운 편이야. 이런 게 한국의 헌법에도 있는 행복추구권이 살아 있는 사회의 모습이야. 그 아이들은 ‘정상 가족’이라는 고루한 개념에서도 해방되겠지.
이런 시기인데 김기홍 씨와 변희수 씨의 죽음을 만난 거야.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의 “나중에!”에서 4년이 지난 오늘까지 반걸음도 움직이지 않은 채이고 서울시장 후보로 나선 안철수 씨는 “퀴어 퍼레이드를 안 볼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그의 평소 지론이었던 ‘새 정치’의 실체를 알려 주었어.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국회에서 14년째 표류 중이고.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미국의 진보적인 여성 대법관은 ‘시대의 기후’라는 말을 인용했어. 내일의 날씨를 알아야 하듯이 시대의 기후를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얘기였어. 누구보다 정치인들이 들어야 할 말이야. 아무리 한국의 현실 정치인들이 공부하지 않고 구닥다리로 남아 있어도 시대의 기후는 이미 성소수자들의 해방을 분명히 말하고 있어. 그 시기를 조금이라도 당기기 위한 우리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야!
강화도에 사는 <작은책> 독자 몇 분을 만나 보기로 했다. 그중에 17년 동안 <작은책>을 꾸준히 보고 있는 조영보 씨가 어떤 분인지 궁금했다. 귀농한 분이라는데 어떻게 귀농에 성공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강화에 있는 또 다른 독자 함경숙 씨도 만나 보고 싶었다.
강화군 양도면 강화남로 1002번길, 알려 준 주소로 가 보니 대안학교인 산마을고등학교가 나왔다. 둘레는 온통 논과 밭인데 조금 떨어진 곳에 지은 지 얼마 안 돼 보이는 집이 한 채 있었다. 그곳에서 조영보 씨가 나온다. 키가 크고 무뚝뚝해 보였다. 조영보 씨는 지금 집 안이 엉망이라 치우는 중이라며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큰아들이 잠깐 집에 왔는데 짐 정리가 안 돼 있어서 엉망이라는 것이다. 스물여섯 살인 작은아들은 농사꾼이라고 했다. 요즘 젊은이가 농사꾼이 된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그것부터 물었다. "청년이 어떻게 농사를 지으려고 마음을 먹었을까요?" 조영보 씨는 집 뒤에 있는 낮은 건물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들이 산마을고등학교를 나왔어요. 저게 산마을고등학교예요. 군대는 안 갔어요. 농수산대 나온 친구들은 병역 대체가 돼요. 방위산업체 요원처럼. 농사짓는 걸로. 자기 농사만 지으면 돼요."
조영보 씨 말소리가 워낙 조용한 데다 바람 소리 때문에 잘 들리지 않았다. "아, 그런 제도가 있군요. 젊은 친구들 마음만 먹으면 괜찮은 진로인데요? 병역 대체복무로 공장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조금 낫겠네요." "청년들은 가능해요. 농사로 병역을 필하겠다고 원서 제출만 하면 가능해요. 여기 졸업하면 군대를 안 가도 되는 제도. 원래 한시적 제도로 폐지하려고 했는데 폐지를 못했지요. 농업 인원도 적어요. 4주 논산 교육이 끝나면 논농사, 포도 농사, 다 조금씩 하는 거죠. 안 대표님은 제가 전에 뵌 적이 있어요. 예전에 대보름 놀이할 때, 오셨을 때 봤어요." "아, 3년 전 대보름 놀이할 때요?" "그 행사를 제가 총괄했었죠. 코로나 때문에 2년째 못하고 있어요." 아, 그렇구나. 2년 전 대보름 때 볏짚 태우기와 쥐불놀이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작은책> 독자라고 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던 사람인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조영보 씨 부인 이은순 씨가 방에서 창문으로 내다보면서 말한다. "추워요. 안으로 들어오세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짐이 잔뜩 쌓여 있는 걸 상상했는데 의외로 깨끗했다. 이은순 씨와 인사를 했다. 우리는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작은책>을 어떻게 보기 시작했어요?" "2005년에 귀농학교 갔다가…. 서정홍 씨 강좌 때였죠. 이진천 씨가 사무처장 할 때였는데 자기도 <작은책>에 글을 쓴다고 하면서 보라고 권유하더라고요. 그때부터 봤을 거예요. 제가 지금까지 <귀농통문>하고 <작은책>은 꼭 봐요." '귀농학교'란 사단법인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귀농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여는 강좌다. 귀농운동본부는 1996년 1기 생태귀농학교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자연과 마을에 뿌리내리는 귀농'을 실현할 수 있도록 생태귀농학교를 열어 오고 있다. 벌써 86기인데 귀농을 하고 싶은 사람들은 꼭 들어야 할 강좌다. 귀농 강연뿐만 아니라 전통술 빚기, 시골집 고쳐 살기, 발효빵 만들기, 생활기술학교 등 분야가 다양하다. 나는 생태귀농학교 58기 때 수강을 했는데 아직 귀농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농사는 재밌어요?" "재미있으니까 하겠죠. 하하. 그때는 특별히 귀농 생각은 없었는데. 이제 나도 개인의 삶도 조금 생각을 해 봐야겠다, 40대 초에 귀농을 하자고 생각하고 귀농 교육을 듣고, 처음에는 준비하고 갈까 생각했는데, 준비해서 갈 수 있는 건 불가능하다, 그냥 가자, 생각 없이 온 거죠." 생각이 너무 많고 계획을 세워 귀농하려면 안 된다는 말이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조영보 씨는 운동권이었다. 잘난 체도 하지 않고, 그렇다고 숨기지도 않고 감정 없이 아주 건조하게 살아온 경력을 큰 줄기만 이야기한다. "학생운동 하고 대학 졸업 못 하고, 노동운동 하고…. 인천에서 하다가 나중에 권인숙 씨가 노동인권회관 세울 때 같이 활동했어요. 그다음 결혼하고 고민했죠. 권인숙 씨는 미국 가고 저는 결혼하고 근처 살면서 운동하긴 했는데 먹고사는 데 애쓰고. 1991년에 결혼했어요. 93년, 95년에 낳은 아들만 둘이고. 아이 엄마는 구로공단에서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했어요. 나우정밀 부위원장까지 지냈고. 징역 두 번 갔다 오고. 처음에 위장취업으로 들어갔다가 잡혀서 집행유예로 나왔는데 집행유예 기간에 또 들어가서 2년형을 받았어요. 89년쯤인가? '이적표현물'을 소지했다고 국가보안법으로 몰아서…. 집행유예 기간이라고 실형을 산 거죠." 조영보 씨는 학생운동 하고 결혼할 때까지, 단 세 줄로 자기 이력을 말한다. 자신은 잘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아내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한다. 성함은 이은순 씨. 나중에 검색을 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영보 씨가 살아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조영보 씨는 인천에서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는 주물 공장에 다녔어요. 87년부터." "왜 노동운동에 투신했어요. 무슨 계기가 있었나요?" 이야기를 더 끌어내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 그때는 나처럼 대학을 못 들어가고 공장을 다녔던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사회의식에 눈을 뜬 학생이나 시민들은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조영보 씨 또한 그런 사례였다. "그때는 독재정권 때였으니까 다들 노조 만들고 징역 가고 그랬죠. 저도 한 번 잡혔지만 집행유예로 나왔어요. 그것 때문에 군대 안 가고. 그때 대부분 친구들이 그랬어요." 조영보 씨는 노동운동 할 때 이야기를 하면 길어질까 봐 그런지 거기서 끊고, 갑자기 강화도 들어온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강화도 들어온 거는 특별한 이유 없고, 연고도 없었죠. 부모님과 아내가 귀농을 반대했어요. 애들 어린데 벌어 놓은 것도 없이 귀농한다고 반대가 심해서…. 일산에 살 때였는데 귀농운동본부에서 하는 생태 귀농 교육을 받고 어느 날 귀농운동본부 게시판에 들어갔더니, 강화도 양도면에 하우스 짓고 하는 노가다 일이 나왔어요. 사람 하나 쓴다고. 그때 가진 돈도 없었고 전세금 뺄 수도 없어서 800만 원 들고 가려고 했더니 아내가 아이들 데리고 가라고 해요. 그때 큰애가 중학교 2학년, 작은애가 초등학교 6학년. 애들 데리고 가겠다고 했죠. 큰애는 중학생이니까 졸업하면 데려가기로 하고, 작은애만 먼저 데리고 왔죠. 월세방 하나 구해서." 말하는 도중에 물어보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말을 끊지 않으려고 맞장구만 치면서 들었다. "나는 농사를 지으려고 온 거니까, 의식적으로 다른 활동을 피했죠. 도시에서 활동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자리는 있었거든요. 마을 생협 상근하거나. 그런데 그런 거는 일체 안 맡은 거죠. 나는 농사짓는 사람이 되겠다. 와서 쭉 하다 보니까 다행히 몸 안 아파서." "사는 데 불편한 건 없었어요?" "불편하죠. 모든 것이 불안정하죠. 집도 없고. 내가 이 집에서 계약이 끝나서 쫓겨나면 어디로 가나 걱정이 되고. 농지도 없으니까. 또 불리한 농지를 얻게 되니까 힘들고. 편하게 할 수 있는 농지를 왜 외지에서 온 사람한테 주겠어요. 그런데 돌아보면 사람들을 잘 만났던 거 같아요. 여러 사람 도움을 받은 거죠. 저 나름 열심히 살긴 살았지만 과정마다 도움을 받았던 거 같아요." "처음 농사지을 때 어땠어요?" "처음에 농토가 없으니까 2, 3백 평 농사를 지었죠. 수입이 1년에 30만 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여기 도장리로 귀촌한 동네 누님이 동네 아줌마한테 포도밭을 얻은 거예요. 그 누님이 같이 포도 농사 하자고 해서 그 누님하고 친구하고 셋이서 포도 농사를 했죠. 귀농 3년차였을 거예요. 하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주변에서 말들 많았죠.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포도 농사는 괜찮았어요. 처음엔 모르고 잘됐고요. 남들 안 하는 유기농으로 했죠. 여기 양도리가 포도로 유명한 데예요. 유기농으로 지었는데 첫해는 잘됐어요. 맛있고 가격도 비싸고. 양이 많지 않아서. 동네에서 그랬을 거예요. 저것들이 아무것도 모르는 놈들이 잘하네. 우리는 뭘 모르고 한 건데. 둘째 해는 망했죠. 바로 실력을 검증받았죠. 정성만 갖고 안 되는 게 있어요. 다 헤어지는 걸로 됐어요. 저는 그 포도밭이 딸린 집으로 이사했어요."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도 참으면 살아남는 것일까. 조영보 씨는 행운이 따랐다고 한다. "당시 외지 사람들이 농지를 많이 샀어요. 투기하려고 사니까 대부분 그런 논들은 농사를 안 짓죠. 농사는 안 짓고 이장에게 빌려줘요. 그런데 제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만난 거예요. 시골에서 저는 젊은 축에 속하는 거죠. 젊은 사람이니까, 나를 보더니 '당신이 맡아서 해라' 하더니 '또 딴 데도 할 수 있나요?' 해서 '네.' 했죠. 저는 고맙죠. 그렇게 논을 빌렸어요." 귀농이 성공하려면 농사꾼이 돼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농촌에서 농사꾼이 될 수 있는 길은 일단 자기 농토가 있어야 한다. 임대차 계약서로는 농지 원부를 만들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 다행히 조영보 씨는 농어촌공사에서 땅을 받아 대신 경영을 해 주는 계약을 맺고 농지 원부를 만들 수가 있었다고 한다. "임대차로 농지 원부 만들기가 어렵거든요. 농어촌공사에서 받은 서류는 관에서 증명하는 서류라 된 거죠. 운이 좋았어요. 농지 원부가 되니까 애들 학자금이 나오고, 서류상 농부가 되니까, 그 당시 등록금 있었는데 그걸 안 낼 수 있게 된 거죠. 임대료 몇 배를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거죠. 농협도 가입할 수 있었고. 조금씩 농업 소득만으로 살 수 있게 됐죠. 5년 정도 하니까 조금 농사 경험도 쌓이고…. 그렇다고 농사로 돈을 버는 건 아니죠. 전 덜 쓰면서 살자는 주의라서 버틸 수 있었죠. 둘째가 산마을고등학교 갈 때 아내와 합류했어요. 아내는 일산에서 일하고 있었어요. 애들 초등학교 방과후 실험 선생님. 그거 하다가 나이 먹으니까 초등학생 상대하는 것도 힘들고 맨날 보따리 들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1년 계약이잖아요. 여기서도 수업 계속 할 수 있으니까 강화로 왔죠. 그런데 강화엔 학생들이 별로 없어요. 한두 해 하다가 그만뒀죠. 아내가 와서 집은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빌려서 살고 있는 그 집이 너무 추웠거든요. 창틀이 벌어져 찬바람이 들어오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죠. 전 제가 농사짓는 논밭이 있는 도장리 쪽에 구하려고 했어요. 근데 아내는 싼 데 있으면 빨리 지어야 한다고 했지요. 더 버티기엔 힘들었죠. 그래, 내가 논으로 출퇴근한다고 생각하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이 집을 지었어요."
"아들이 농사를 같이 지으니까 이제는 좀 안정이 됐죠?" "저는 논을 임대해서 만 평 정도 짓고 있고요, 아들은 논을 샀어요. 융자를 받아서. 요즘 2억까지 융자해 줘요. 지금 청년 농부들은 괜찮아요." 아, 청년들이 농촌으로 가면 유리한 점이 있겠다. 조영보 씨는 자리를 잡아 가면서 강화라디오에도 나가서 방송도 하고, 오마이뉴스에서 운영하는 꿈틀리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농사도 가르친다. "농사를 하나의 중요한 수업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학교에서 한 건 아니고 논에서 했어요. 300평 논 하나가 있어서 이건 니네가 해라. 내 성격은 막 다그치는 게 아니고…. 농사를 잘 못 지으면, 안 먹으면 되지, 뭐. 근데 잘돼요. 손 모내기할 때는 어설픈데 기계보다 잘 자라요. 매년 본인들이 수확해서 말리는 것까지. 도정해서 나오는 쌀을 다 가져가요. 전 도지와 비용도 있으니까 좀 받죠. 많이 나올 때는 보통 여섯 가마 정도 나오는 것 같더라고요. 100평에 두 가마가 평균이에요. 대여섯 가마는 나와요. 부모들이 대견해하죠. 계속 하고 있어요." 다시 <작은책> 이야기를 꺼냈다. 17년 동안 <작은책>을 읽은 독자라면 다른 책도 많이 봤을 것이다. 한 사람의 성격과 사상과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어떤 책을 읽었는가가 무척 중요하다. 조영보 씨는 어떤 책을 읽고 지금의 세계관이 형성됐을까 궁금했다. "<작은책>을 봤을 때 주로 어떤 내용을 재미있게 봤어요?" "그 당시 농민이 쓴 꼭지를 주로 봤고요. 책은 전체를 죽 보는 편이에요." <작은책>은 2003년 11월호부터 '농촌 들녘에서 만난 사람'을 연재했다. 처음엔 서정홍 씨가 연재했고 그 뒤를 이어 받아 2006년 4월호부터 전국귀농운동본부 사무처장인 이진천 씨가 2007년 12월까지 연재했다. 주로 귀농한 사람들의 사례를 실었는데, 그 꼭지를 보고 귀농한 분들도 있고 독자끼리 인연이 맺어져 결혼한 분들도 있다. "요즘 <작은책>에선 기억나는 게 있나요?" "요즘엔 주로 서평을 재미있게 보고. 얼마 전에 미술사? 그걸 재미있게 보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보고…. 재밌게 본 거는 만화가 이동수 부부가 쓴 글. 남편과 부인이 다른 관점으로 쓴 글을 재미있게 봤어요." 또 어떤 책을 봤는지 물으려고 했는데 다시 강화 이야기로 돌아간다. "도장리는 젊은 친구, 시민 운동하시는 분들도 많고, 문화적인 그런 것들이 많아요. 넓벌이라는 풍물패를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10년 돼 갈라나? 그 전엔 모여서 술만 엄청 먹었죠. 술만 먹지 말고 풍물이나 하자. 풍물 잘하는 사람 한 명 초청해서 한 번 배우고, 그 뒤에 일체 관의 도움 없이 대보름날 행사를 만들었죠. 그런 모임이 활력이 됐고, 책 좋아하니까 강화독서회 모임 하면서 강화에서 하는 책방에서 책을 사자. 읍에 청운서림, 도장리에 있는 책방 국자와주걱 두 군데서 책을 샀어요." "혹시 그 책방 국자와주걱 대표 김현숙 씨가 포도밭을 빌려준 사람인가요?"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는 분들은 서로서로 다 아는 사이일 거라 짐작하고 물었다. 역시 짐작이 맞았다.
"네, 그 누님이 포도밭을 빌려줬어요. 인천에서부터 알고는 있었어요. 그런 분들 도움받은 거죠. 그 형님도 같은 풍물패고…. 지금은 4, 50대가 모여 교류를 많이 해요. 강화라디오도 1년 했죠. 강화라디오를 만드신 분들이 제가 살아온 이야기와 농사일 이야기 해 달라고 해서 1년 했어요. 20분 동안 대본 없이 떠들었죠. '조 아저씨의 농사 이야기' 2주에 한 번, 20회 정도 했을 거예요. 그때는 초보 농사꾼 이야기를 했지요." 조영보 씨는 자기 삶에 만족해했지만 되돌아보면 아쉬운 점도 많았다고 한다. "너무 자기 위주로 산 것 같고, 다른 사람이 보면 남을 위해서 산 것 같은데 가족들이 보면…. 저는 형편에 맞춰서 살아야 된다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는 주의였어요. 애들한테도 그렇게 가르쳤어요. 엄마 아빠는 능력 없으니까. 제가 귀농할 무렵엔 많이 싸웠죠. 우리가 너무 싸우니까 아이들이 눈치를 많이 봤던 거 같아요." "그래도 보람이 있지 않았나요?" "그때그때마다 만족하면서 살았던 거 같아요. 학생운동, 노동운동 할 때, 그때 만족도가 높았고, 두려울 것도 없었고." 나는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갔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있나요? 어떤 책이 자기 인생의 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두 번 이상 읽은 책은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전태일 평전》. 나중엔 《토지》, 《아리랑》. 요즘도 매달 한 권씩 보려고 하죠. 겨울엔 일체 일 안 해요. 4개월은 알바도 안 해요. 그래서 겨울엔 책 많이 보죠." 조영보 씨는 다시 집 이야기를 한다. 아내가 서둘러 집을 빨리 지으려고 이쪽 양도면 삼흥리에 있는 산마을고등학교 쪽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논과 밭이 있는 곳은 현재 집하고 8.5킬로미터 떨어진 양도면 도장리에 있다. "전에 살던 도장리에서는 지도자 일도 해 봤지만 이쪽에선 또 새로 시작해야죠. 다락논인데 그걸 싸게 산 거죠. 여기서 귀농해서 정착한 경우가 없어요. 토박이들이 귀농하는 사람들 진정성을 잘 안 믿는 거죠. 그걸 극복하는 데 좀 걸리죠. 농사꾼이라는 평판을 얻는 게 시간이 좀 걸려요. 보통 10년이면 다 된다고 하잖아요. 그 정도 되면 다 자리 잡을 수 있어요." 10년 버티면 농사꾼 소리를 듣는다는 말이다. 조영보 씨 아내 이은순 씨와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아들 때문에 바쁜 듯해서 말을 건네지 못했다. 두 시간 넘게 조영보 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집을 나왔다. 다음에 만날 분은 강화도 독자 함경숙 씨였다. 함경숙 씨는 2013년에 내가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글쓰기 강좌를 한 뒤 독자가 된 분이다. 직함이 많다. 페이스북에 동학혁명정신선양사업단 사무국장, 넉살좋은 강화도여행, 평화어머니회 공동대표, 인천광역시 평화도시조성위원회 위원 등이 올라와 있다. 함경숙 씨 집은 강화군 송해면 강화대로 송해파출소 뒤쪽 언덕 위에 있었다.
함경숙 씨는 서울에서 살다가 2016년에 귀향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방 안에 남자 세 분이 있었다. 인사를 나눴다. 평화재향군인회 상임공동대표 김기준 씨. 햇빛나눔협동조합 이사 서영만 씨, 발달장애인 농업회사 법인을 만들고 있는 이광구 씨였다. 그중 김기준 대표는 여든 살이 넘었다는데 엄청 건강하셨다. 집이 양양인데 인제에 있는 허준약초학교에서 무보수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만나자마자 인사를 하고는 서울 가는 버스가 끊어진다고 훌쩍 떠나셨다. 이광구 씨는 이력이 다양했다. 용접공, 노동 상담, 자동차 정비 공장, 대리운전, 재무 설계 회사 등, 그동안 가진 직업만 스물세 가지 정도라고 한다. 책도 많이 냈다. 《희망교육 분투기》, 《희망통장 콘서트》, 《인생 2라운드 50년》 등이 있다. 구로동맹파업 동지 또 다른 여성분 두 사람은 나중에 자리에 참석했다. 임선화, 여윤구 씨다. 이분들은 함경숙 씨네 집 포도나무 가지치기도 도울 겸 놀러왔다고 했다. "두 분은 어떤 사이예요?" 임선화 씨가 대답한다. "아, 우리는 초중고 동창이에요. 둘 다 성신여고를 다녔고요. 저는 '한국빠이롯드' 노조 결성하고 성남에서 연투(연대 투쟁)했었어요. 우리 1984년도 구로동맹파업 동지예요. 심상정 안 불어 가지고 얼마나 맞았는지. 나는 그냥 강화에 한번 가 보자, 놀러가듯 왔는데. 친구는 강화로 내려오고 싶어 해요." 두 분도 역시 평범한 분들이 아니었다. 구로동맹파업은 1985년 6월 24일 구로공단의 노동조합들이 연대하여 벌인 파업이다. 위키백과는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최초의 동맹파업'이라고 설명한다. 구로동맹파업 뒤 국회의원이 된 심상정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수배를 당하기도 하고, 생활고에 시달려 고생을 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두 분도 그런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 두 분은 사회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임선화 씨는 원불교환경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평화행동에서 활동하는 분이었다. 이번에 함경숙 씨와 같이 강화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싶어서 여윤구 씨와 같이 왔단다. 노동운동을 했던 분들이 이렇게 생태운동이나 평화운동을 이어 가고 있다. 여윤구 씨는 학생운동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사람이다. 노동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지만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웠다. 특이하게 지금은 무속화를 그리고 있다고 했다.
"저는 지금은 단청 탱화문화제 일을 하고 있어요, 저 친구랑 오래된 인연이 있어요. 인천, 부천에서 활동했던 분들이 강화에 와서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해서, 그때 집 보러 다녔어요. 이광구 선생이 가이드 해 주고. 그리고 20년 못 만나다가 어제 만난 거예요. 교동아일랜드라고, 교동도 안에 있는 체험 농장인데 거기서 고사리를 해 볼까 하고 갔었거든요."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 다음 날 아침에 가지치기를 한다는 포도밭으로 가 봤다. 모두 4백 그루 정도라고 했다. 서영만, 임선화, 여윤구 씨가 포도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었다. 큰 가위가 없어서 조그만 가위로 자르는데 힘겨워 보인다. 구경만 하기에는 좀 미안해 나도 가위를 빌려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9시 40분에 가지치기 일이 끝났다. 이광구 씨가 발달장애인 청년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모두 원불교 평화행동에서 만든 플래카드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 "백년의 사대 굴욕! 민족 자주로 평화 심자!"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다시 함경숙 씨 집으로 가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여윤구, 임선화 씨 두 분이 모두 <작은책>을 구독해 주셨다. 함경숙 씨 덕분에 좋은 사람들끼리 인연이 이어지는 듯했다. 함경숙 씨는 너무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한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평화 활동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교동도를 가 보고 싶었다. 전에 가 본 적이 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검문소에서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적고 방문증을 받았다. 교동대교를 건넜다. 한 10분쯤 가니까 대룡시장으로 가는 갈림길이 나온다. 직진을 해서 이북이 가까이 보인다는 망향대로 향했다. 망향대는 높이가 50미터밖에 안 되는 언덕이었다. 계단을 몇 개 오르니 조그만 공터가 있고 '망향카페'라고 간판을 단 봉고차 가게가 한 대 서 있다. 이 망향대는 6.25전쟁 때 황해도 연백군 연안읍에서 피난 온 주민들이 고향 땅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낸 곳이라고 한다. 황해도 연백이면 돌아가신 아버지 고향이다. 바로 저 강 건너가 아버지 고향이다. 이북 쪽을 바라볼 수 있게 망원경 두 대가 설치돼 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망원경으로 이북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할아버지가 "아, 보인다, 보여. 자전거 타는 사람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네. 그런데 아파트는 가짜네, 가짜. 그냥 전시물이야." 그 뒤를 이어 어떤 아주머니가 망원경을 보면서 또 한마디 한다. "자전거 타고 사람이 왔다 갔다 하네. 저 사람들 하루 종일 자전거 타고 그냥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냐?"
어처구니가 없어 슬그머니 웃음이 터졌다. 어이가 없다. 반공 교육이 무섭긴 무섭다. 나도 '이북이 우리한테 잘사는 걸 보여 주려고 그런 쇼를 한다'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하고 반항했다가 입이 찢겨서 죽었다던 '이승복 어린이' 교육도 받았다. 이젠 거짓과 진실을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그런 세뇌 교육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망원경을 들여다봤다. 날씨가 뿌예 아파트가 정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북에 있는 사람도 이곳에 있는 사람처럼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아파트가 가짜인지,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하루 종일 왔다 갔다 하는지 알 수 없는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북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통일이 될 리가 있나. 독재정권 때 받은 교육이 이렇게나 무섭다니. 그동안 강화에서 만났던 <작은책> 독자들과 비교해 보면 이 사람들은 깜깜한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망향대에서 내려와 대룡시장으로 갔다. 황해도 연백시장을 본떠 만든 골목시장이라고 한다. 슬레이트 지붕과 나무 문짝으로 된 가게가 많은 좁은 골목 시장이다. 방앗간, 90세 할아버지가 운영한다는 동산약방, 커피에 달걀을 띄워 준다는 교동다방 등이 있다. 앗! 어디서 많이 봤는데? 아, 성공회대 노동대학 역사 기행 때 들렀던 시장이다. 세상에 이렇게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나. 나, 치매 초기인가? 실내에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 있는 가게에서 감자전 하나를 주문해서 먹었다. 막걸리 생각이 간절했지만 참았다.
내 나이 겨우 15살, 어린 나이에 공장엘 다니게 되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거대한 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는 꼭 가야 한다는 생각은 할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겨울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전업주부이셨던 엄마는 우리 5남매와 살아갈 길이 아득했을 것이다.
옆집 사는 친구의 소개로 무작정 집 근처에 있는 온도계 공장에 나갔다. 어렸지만, 같이 일하는 언니, 오빠, 아저씨, 아줌마들이 봤을 때, 일을 야무지게 했던지 다들 예뻐해 주셨다.
그렇게 첫 직장을 10년을 다녔다. 그 당시는 근로기준법이라든지, 최저임금이라든지, 생각도 못했고, 아니 그런 건 듣도 보도 못했었다. 7~8년 다녔을 때쯤, 그래도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어 야학에 나가면서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때가 1983년도였는데, 야학 교사로 있던 그들은 나와 동갑이거나 어리거나 그랬다. 중등 과정을 2년 동안 배워 검정고시를 치렀고, 합격했다. 그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이를 먹어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몇 년 동안 아이를 키우면서 이것저것 부업도 해 봤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무렵, 부업하던 곳의 공장에 와서 일 좀 해 달라는 청이 있었다. 오후에만 알바를 하다가 학교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어 공장과도 가까워졌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아침부터 종일반 일을 하게 됐는데, 사장님은 내가 일하는 걸 인정했는지 최고참 동료와 동급으로 급여를 챙겨 주셨다. 그러니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과장이 납품을 가면 같이 일하는 분들이 불편함 없이 일할 수 있도록 과장이 하는 선작업을 처리해 줬다. 3년 넘게 다니다 퇴사를 했는데, 후에 문을 닫았다는 소식에 안타까웠다.
얼마 있다가 서울로 이사를 해서 조그만 장사를 시작했는데, 대형마트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집집마다 자동차를 굴리다 보니, 사람들은 동네 구멍가게는 아주 급하지 않으면 찾지 않았다. 3년 정도 버티다 결국 접게 됐다.
또다시 일자리를 찾아 독산동까지 오게 됐다. 2002년 겨울 휴대폰 케이스 관련 공장에 들어갔다. 3년 정도 됐을 무렵 군포에 새 건물을 짓는다고 했다. 건물이 완공돼서 군포로 출근했다. 환경은 훨씬 좋아졌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부도가 났다며 난리가 났다. 무리해서 확장한 것이 화근이 되었단다. 잔금을 못 받은 설비업체에서 컨베이어벨트를 뜯어 가고, 또 다른 업체에서는 탑차가 와서 사출이며 도료며 실어 나가고, 이런 아수라장이 없었다. 공장에서 밤을 새고 관리자들과 싸우고, 결국은 노무사를 지정해서 체당금 설정으로 받기는 했지만 씁쓸했다.
바로 다른 공장엘 갔지만 내 겉모습만 보고 퇴짜를 놓았다. 친구랑 같이 갔었는데, 친구만 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막 시작하는 곳이라 인원이 필요했고, 며칠 후 나도 출근을 하게 됐다. 대표는 내가 일하는 걸 보더니 내게 반장 자리를 줬다. 정말 내 일처럼 열심히 일했지만, 3년이 넘어갈 즈음 원래 사장이 욕심을 내서 또 일자리를 잃게 됐다. 마지막 날 대표님이 그동안 맘고생 많았다며 퇴직금 이외에 얼마를 더 챙겨 주셨다.
벼룩시장을 뒤져 바로 정규직 자리를 찾아 출근을 하게 됐는데, 일한 지 1년이 되어 갈 때쯤, 회사가 또 문을 닫았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속상했다.
이후 지인의 소개로 작은 조립업체엘 들어가 일을 하고 있는데, ‘신영프레시젼’에서 검사 경력자를 찾는다고 해 소개를 받고 출근을 하게 됐다. 출근해서 한 달 반 정도만 바빴고, 일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다 다른 부서로 지원을 다니면서 몇 년이 지났는데, 잘되는 것처럼 보였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노조를 만들게 됐다.
사측에서는 권고사직을 받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해고를 해 버렸다.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고 싸웠고, 회사로부터 현장이 아닌 관리부로 복직하라는 통보를 문자로 받았다. 회사는 얼마 후 권고사직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청산 해고를 통보해 버렸다. 알고 보니 생산에서 얻은 수익으로 골프장 건설에 투자를 했고, 회장과 임원들끼리 800억 원이 넘는 금액을 이익 배당금이라며 나눠 가졌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었더랬다. 이윤이 날 때만 노동자가 필요했던 그들은 필요 없으면 휙 하고 내팽개치고, 이런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너무도 쉽게 일어나는 곳이 신영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이 더 놀라울 따름이다.
회사가 사라진다는 게 이렇게 쉬웠단 말인가! 40년을 넘게 일해 오는 동안 몇 개의 회사가 문을 닫았는지…. 먹고살아야 했기에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근속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이다. 보란 듯이 잘 살아 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맘이 아리다. 정년이 60세로 늘어났다면서 좋아라 했었는데, 청산 해고로 정년도 되기 전에 일터를 떠나야 하니 참 씁쓸하다.
덴마크는 주차 달력을 쓴다. 이를테면 ‘3월 말 부활절’이 아니라 ‘13번째 주 부활절’, ‘7월 둘째 주 여름휴가’가 아니라 ‘23째 주 여름휴가’ 같은 식이다. 올해 여섯째 주에 작년 12월부터 시행된 락다운이 부분적으로 풀리면서 초등학교 4학년까지 등교가 가능해졌다.
“내일 학교에 가면 섹스(SEX)에 대해서 배우겠네. 내일부터 여섯째 주 맞지?”
다시 학교로 돌아갈 생각에 들뜬 딸이 가방을 챙기면서 물었다. 나도 예사롭게 대답했다.
“그러네, 학교 가면 SEX 배우겠네.”
작년 이맘때쯤 학교에 다녀온 딸이 큰 소리로 “우 섹스(UGE SEKS)에는 SEX를 배워.” 하고 말했을 때 나는 놀라 되물었다. “학교에서 뭘 배운다고?”
“SEX 있잖아. 남자랑 여자가 왜 다른지,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애기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그런 것들. 이번 주가 여섯째 주잖아. 그러니까 UGE SEKS(우 섹스)인데, SEKS랑 SEX랑 소리가 똑같으니까, 여섯째 주에는 학교에서 다 같이 SEX를 배운대.”
200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여섯째 주, 성의 주’ 운동은 이제 덴마크 대다수의 초중등학교가 참여하는 교육과정으로 자리 잡았다. 캠페인을 주도하는 ‘성과 공동체(SEX & SAMFUND)’라는 단체는 매년 학년별 성교육 프로그램을 학교에 배포하고, 각 학교의 선생님들이 적절한 교육을 하도록 강연 등을 기획한다. ‘성의 주’ 교육 프로그램은 해마다 변경되는 대표 주제에 맞추어 연령에 따라 성별, 건강, 몸, 관계, 권리, 행복, 사춘기, 성병, 피임, 성관계 등을 교육한다.
‘성의 주’에 실행되는 교육 내용은 상당히 사실적이고 세심하다. 예를 들면, 음경과 음순이 자세히 드러나는 시각 자료를 활용하기도 하고, 나체의 남녀가 등장하는 영상을 통해 신체 각 부분의 차이를 설명하고, 생식을 설명할 때는 ‘성기 삽입’을 구체화하고, 다양한 성적 지향과 가족의 형태를 다루는 책과 영상을 보여 준다. 학교에서 신기한 성을 배운 딸은 매년 여섯째 주에 질문을 쏟아내고, 우리 부부는 당혹감을 감내하고 있다.
“엄마랑 아빠도 SEX 해 봤어? 지금도 하는 거야? 그런데 왜 나는 동생이 없어?”
얼마 전 한국 국회를 달구었던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라는 책도 덴마크 작가의 책이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덴마크 역사를 대표하는 100개의 물건 중 하나로 선정될 만큼 국민적 호응을 얻었지만, 한국에서는 김병욱 미래통합당 의원에 의해 조기 성애화, 동성애, 동성혼을 조장하는 책으로 규정되었고 급기야 책을 회수해야 한다는 국민 청원이 등장해, 여성가족부가 초등학교에서 회수해야만 했던 바로 그 책이다.
하지만 성은 이토록 진취적인 덴마크에서도 여전히 뜨겁고 어려운 문제이다. 덴마크 국영방송인 DR의 ‘RAMASJANG(라마샹)’이라는 어린이 채널은 2021년 새해를 맞아 4~8세 아동을 대상으로 ‘John Dillermand(존 딜러맨)’이라는 새로운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다. John Dillermand은 한국말로 ‘존 고추 씨’로 번역될 수 있겠다. 존 고추 씨는 놀랄 만큼 긴 고추를 가진 성인 남성이다. 성인이지만, 어린이처럼 천진하고 어린이들도 하지 않을 법한 실수를 하는 사고뭉치이다. 그가 사고를 치는 데는 그의 긴 고추가 한몫을 하는데, 그의 고추는 마치 독립적인 등장인물인 듯 존 고추 씨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 길어져 옆집 아저씨 머리 위로 사과를 떨어뜨리거나, 신호등 위로 아이스크림을 던져 신호등을 멈추어 버리기도 하지만, 고장 난 신호등 때문에 위험에 처한 시민을 돕고, 아이들이 놓친 풍선을 잡아 주기도 하며 실수를 바로잡기 위해 앞장서기도 한다. 어른의 언어로 표현하니 어딘지 더 음란한 느낌이지만, 실제 애니메이션은 귀엽고 천진하다.
‘존 고추 씨’는 방송 전부터 언론과 SNS 등에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이러려고 수신료를 내는 것이 아니다’, ‘내 아이에게 이런 방송을 보게 할 생각은 없다. 국영방송 DR은 도대체 생각이 있느냐’와 같은 분노에 찬 반응과, 남성의 성기가 남성의 이성을 벗어나 자발적으로 행동한다는 발상은 성범죄자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발상이라는 의견, 남성의 긴 성기가 등장했다면 여성의 큰 성기도 함께 등장해서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등의 입장들도 있었다. 반면, ‘고추라는 이름만으로도 즐거워하는 아이들에게 딱 맞는 만화이다’, ‘자신의 신체를 궁금해하는 연령의 아이들에게 신체를 즐겁게 표현한 것은 신선한 시도이다’, ‘아이들과 함께 시청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와 같은 긍정적인 의견들도 있었다.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에 참여한 소아정신과 전문의 마그리트 브룬 핸슨은 다음과 같이 프로그램의 취지를 설명한다.
“어른의 안경을 통해서가 아닌 어린이의 관점에서 존 고추 씨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마법의 음경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는 것은 성인인 우리들의 삶과 경험 때문일 뿐 아이들은 전혀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은 발가벗고, 자신의 신체를 탐색하고 들여다보는 것을 즐긴다. 아이들은 의사 놀이를 하고, 서로의 몸을 들여다보며 못된 말들을 하는 것을 즐기고 방귀, 고추 같은 말을 하며 크게 웃는다. 존 고추 씨는 바로 이러한 세상의 화자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 아이들은 존 고추 씨를 통해 배우기도 하고 웃기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영향을 줄 부모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확신이 어렵다. 얼마나 많은 부모들이 존 고추 씨를 재미있다고 생각할지 의문이다.”
‘고추 씨’ 못지않게 뜨거운 관심을 받은 ‘Ultra smider tøjet(울트라 스밀러 토이: 옷을 벗어던진 울트라; 울트라는 취학기 아동을 위한 국영방송국의 채널이다)’는 7세 이상의 아동을 위한 프로그램이다. ‘옷을 벗어던진 울트라’는 직설적으로 신체를 다룬다. 4, 5명의 성인들이 나체로 등장해 청중석에 앉은 아이들의 질문에 답을 하는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어떤 음경이 보통 음경인가?’, ‘여기 다섯 개의 벗은 엉덩이가 있다’, ‘다섯 개의 음소를 스튜디오에 초대합니다’, ‘모발과 피부’, ‘(신체의) 크기’와 같은 소제목으로 보여 주는 각각의 에피소드는 15분 내외로 방영되고, 처음부터 나체로 등장한 어른들은 방송이 끝날 때까지 나체인 채로 어린이 방청객들과 소통한다.
시즌 2의 에피소드 ‘(신체의) 크기’ 편에는 키 큰 백인 남성, 키 작은 백인 남성, 과체중의 백인 여성, 마른 체형의 백인 여성, 키 큰 흑인 남성이 출연했다. 출연자들은 키가 크거나 작거나 마른 자신의 신체 조건에 대한 마음을 털어놓았다. 조금 키가 컸으면 좋겠다고 하는 출연자도 있고, 질병으로 인해 깡마른 자신의 몸이지만 아주 만족한다고 하는 출연자도 있다. 방청객으로 초대된 11살 어린이들은 출연자들을 향해 “선택할 수 있었다면 어떤 몸을 갖고 싶은가요?”, “뒤로 돌아 보세요”, “자신의 몸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적이 있나요?”와 같은 질문을 한다. 질문 순서가 끝난 후 ‘뚱뚱한 사람들은 게으르다, 많이 먹으면 반드시 뚱뚱해지고, 조금 먹으면 무조건 날씬하다’와 같은 선입견에 대해서 대화하고, 선입견 리스트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프로그램의 PD인 모텐 스코우 한슨은 방송의 취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덴마크 어린이들에게 생활 속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현실적이고 다양한 신체의 모습을 설명하고자 한다.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신체의 모습이 아닌 자연스럽고 다양한 신체의 모습을 접하면서 어린이들이 자신과 타인의 신체에 대해 보다 현명해지도록 도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어린이 시청자들은 프로그램에 대해 별다른 저항이 없을 뿐 아니라 지대한 호기심과 흥미를 보인다. 아이들은 프로그램을 통해 신체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고, 영화배우나 텔레비전 스타의 몸이 아닌 우리 모두의 몸에 익숙해지는 특별하고 긍정적인 경험을 하는 듯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여섯째 주, 성의 주의 주제는 ‘평등한 성은 더 재미있게 놀 수 있다’이다. 딸이 다니는 학교에서도 성평등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평등에 대해 학습했고 함께 울트라도 시청했다고 한다. 다양한 피부색과 모발, 문신과 피어싱으로 신체를 꾸미는 사람들, 사고와 수술 등으로 몸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방송을 시청했다는 아이는 ‘다름’에 대해 이야기했고, 취향에 대한 그간의 선입견을 돌아보았을 뿐 외설적이라거나 성관계와의 연관성에 대한 소감은 없었다. 다양한 피부색, 다양한 환경의 사람들의 다양한 신체를 숨기지 않고 성인인 선생님의 지도 아래 친구들과 함께 시청했다는 경험은 분명 아이의 삶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그 흔적이 자유이고, 자신의 신체를 긍정하는 지혜이고, 타인의 몸을 존중하는 배려이길 바란다.
2021년 덴마크에 살고 있지만 마음을 70~80년대 대한민국에 두고 있는 나는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에는 환호하지만, 아직 ‘존 고추 씨’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했고, 벌거벗은 어른들은 어색하기만 하다. 제 마음대로 늘어나 온 동네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고 돕기도 하는 음경은 나에게 경계 너머의 것이고, 내 몸을 닮은 정직한 몸을 직시하는 것은 난처하다. 그렇지만 존 고추 씨를 통한 네 살의 즐거움과, 벗은 어른들의 신체에 대한 열 살의 호기심을 인정하는 교육은 필요하다고 본다. 핸드폰, 태블릿, 컴퓨터를 끼고 사는 아이들은 ‘라떼’보다는 훨씬 이른 시기에 성을 접할 것이다. 교육이 선제적으로 흥미롭고 솔직하게 성을 소개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성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성에 대한 공식적이고 발칙한 시도가 더 많은 세상을 기대한다.
월간지를 만드는 일이 그래요. 남들보다 한 달 앞서 사느라 아직 겨울인데 봄을 얘기하고, 봄을 느끼고 싶은데 어느새 여름 이야기를 꺼내야 하고요. 시간을 앞당겨 가며 일하느라 여념이 없는 4월호 마감 중, 제주에 사는 <작은책> 독자님이 봄소식 전한다며 유채꽃 가득한 풍경을 사진에 담아 보내 주셨어요. 아, 봄이네요!
해마다 이렇게 예쁜 봄을 아픈 봄으로 맞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들 곁에는 연대의 손길을 내어 주는 따뜻한 이들이 있습니다. 성미산공동체에서 마을살이를 하며 ‘느리’라는 별칭으로 살아오던 김우 씨는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마을 밖으로 걸어 나옵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그런 사회를 만들었다는 반성을 하고 밀린 숙제라도 하듯 밀양에도 가고 강정에도 가고”, 그러다 끝내 상근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을 합니다. 지난겨울 48일 동안 청와대 앞 광장에서 단식 농성에 참여한 김우 씨의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봄소식처럼 마음이 따뜻해질 겁니다.
독자님들~. 저희가 독자님들께 드린 새해 약속 중 하나가 전국에 계신 <작은책> 독자님들을 두루 찾아뵙기로 한 거였지요. 제주, 남해에 이어 이달에는 강화도에 사는 독자님들을 만났습니다. 이 이야기는 ‘안건모의 사람여행’ 꼭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지면이 부족해서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은 나중에 다시 나눌 기회가 있겠지요. 다달이 어느 지역에 계신 독자님들을 찾아가서 얘기를 나눌까 고민을 합니다. 먼저 불러 주시면 쌩하고 달려가겠습니다. 소식 주셔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