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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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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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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마스크 쓰시고 하이 파이브도 하면 안 돼요.”

개학을 앞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 때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떠올리며 마스크 쓰고 아침맞이하러 나섰어. 답답하지만 어쩌겠어. 어제로 확진자 15, 하루 새 3명이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하루에 수십 명 나오는 판인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이러스 숙주 노릇을 한다면 어째.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방역하느라 이 난리잖아.

마스크를 쓰고 아침맞이를 하니 숨 쉬기 불편한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 표정을 못 보니 답답해. 마스크로 가려도 어느 정도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늘 이 순간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답답한 거지. 마치 아이와 나 사이를 콘크리트 벽이 막고 있는 것 같아.



아침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모든 게 내겐 자극이야. 표정, 몸짓, 가방, 온갖 준비물, 옷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온몸이 자극이지. 그리고 혼자 오는지 누구랑 함께 오는지도. 아침맞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자극이 짧은 5초 안팎의 순간에 날 건드리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극 안에 담긴 많은 이야깃거리가 내 생각과 상상력을 흔들거든.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 살면서 특히 교직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이 스멀스멀, 불쑥 솟아오르도록 건드리거든.

그런데 아이들과 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오늘은 이 자극이 달라. 미세먼지가 안 좋을 때도 마스크를 쓰지만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온 적은 없지. 그동안의 아침맞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질 않아. 멀리서 걸어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벌써 아이도 나도 표정이 달라지고 마음에 물결이 이는데 코앞에 와도 그 느낌이 없다니. 어색할 정도로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웃고 말도 거는데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안 와. 나도 말만 요란하지 울림이 없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것과 안 가린 게 이렇게 다르다니.

거기다 손으로 바이러스 옮길까 봐 하이 파이브를 안 하니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인사 자세만은 하이 파이브 할 때보다 더 깍듯해.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거든. 하지만 단지 인사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별다른 느낌이 없어. 무덤덤하고 답답해.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면 좋은 교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나 모두의 마음에 물결이라고 할까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 재미가 없어. 이런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아침맞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드네. 시간은 안 가고 지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이틀 새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 표정 못 읽는다고 푸념 늘어놔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맞췄어. 좀 어색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뚫어져라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 표정은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그 말도 마스크 없을 때 이야기지 헛말이더라고. 아무리 눈을 맞춰도 느낌이 예전과 달라. 예전 같으면 아이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힘이 넘치네.’, ‘즐겁고 밝구나.’, ‘어쩌면 저렇게 생동생동할까?’, ‘따스하고 푸근하구나.’, ‘저 어두움을 어째.’, ‘의욕이 없네.’ 이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한 방에 내게 와.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뿌연 안갯속이라 안 보여.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내 기운을 못 느낄 거고.

안 되겠어. 아이들 상태를 읽어 내려 매달릴 게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확실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기로 했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짝살짝 눈을 맞추면서 모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지. 표정이나 눈빛 대신에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야깃거리가 걸리면 목이 아프더라도 크게 말을 걸었어.

! 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어울린다.”

개학한다고 머리 깔끔하게 다듬었구나. 좋아 보인다.”

머리 누가 묶어 주셨어? 와우! 정성이 느껴져.”

운동화 새로 했네.”

오빠 동생 오누이가 패딩을 샀구나.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다. 좋겠다.”

목도리가 눈에 띈다. 따스해 보여.”

오빠는 왜 안 보여?”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엄마랑 안 오고 동생 손잡고 오네. ! 이제 엄마 없이 너희 둘이 등교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와우!”

이것도 안 되겠어. 마스크가 가로막아 목만 아프지 내 말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아. 설령 내 말이 전해져도 말하는 순간 표정을 서로 읽지 못 하니 차라리 그냥 인사나 정성껏 하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던지기만 하지 주고받을 수도 없는 데다가 누구에겐 말 걸고 누구는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더구나 날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 오래 할 일은 아니야. 아이들과 학부모가 겉치장에 신경 쓰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라. 한두 번은 몰라도 오래 쓸 방법은 아니네.

마스크 쓰고도 겉이 아니라 속을 읽고 느낄 방법을 얼른 찾아야겠어. 그래야 마음을 주고받지. 느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아침맞이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순식간에 서로를 느끼고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얼른 마스크를 걷어 내야 하는데. 이놈의 마스크를 어쩌나. 안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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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자회사만 고집하는 한국가스공사

박인국/ 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 인천기지 지회장

 

  

한국가스공사 인천기지에 미화원으로 근무한 지 9년차가 되어 갑니다. 20175월 문재인 정권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발표가 있은 후 지금까지 한국가스공사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바른 정규직 전환을 위해 20179월에 노동조합을 만들 당시만 해도, 희망이 보였습니다. 미화원이라고 하여 단순 미화가 아니고, 청소와 예초, 제초 작업, 집기류 이동 등 관리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였습니다. 급여가 삭감되어도 말을 못했고, 소장의 갑질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흐름에 따라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은 전국에 본사를 포함하여 15군데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만 1400여 명에 달합니다. 그래서 지부를 두고 지회를 만들고 지회장, 대의원을 선출하였습니다. 대구 본사에 지회장들이 모여 비정규직 직종을 비서, 기사, 캐드 업무를 하는 파견직과 시설, 미화, 소방, 특경, 전산, 홍보 7개 직종으로 구분하고 직종 대표인 지부장을 선출하였습니다. 공공운수노조 각 지역 국장님이나 본부장님을 통하여 교육을 받고, 공공운수노조의 도움을 받아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201711월에 1차 회의를 하기 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을 상대로 노동조합 설립 취지와 노동조합이 앞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별도 직군, 별도 임금, 별도 예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한국가스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였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시험을 치르고, 호봉을 받고, 성과금을 받는 정규직분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사전에 논의를 하고 합의를 하여 공사에 요구했지만, 공사는 자회사만을 고집하였습니다.

한국가스공사 앞 천막 농성장에 걸린 현수막.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전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파견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계약이 만료되어, 정규직 전환 대상자라는 종이 한 장 받고 퇴사하여 전환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고, 전산 직종에 근무하시는 분들 중 일부는 전환 제외 대상이라고 해서 노동청 중앙컨설팅에 의뢰를 했더니 전환 대상자이며, 직접고용해야 된다는 답도 받았습니다. 공사 사장이 공석일 때는 사장이 없다는 핑계로, 인사이동 철에는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핑계로 지루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20189월 처음으로 3일간 파업을 진행했지만 얻은 것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12차 노사전 회의를 기점으로 공사와 전환 회의를 중지하고, 각 직종별 처우 개선을 위한 실무 협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경우 급여 삭감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저희는 단순 미화가 아닌 시설 미화이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임금 설계를 요청하며, 정규직 전환 발표 후 정년퇴직 등으로 나가신 자리에 인력 충원이 안 되고 있어 충원을 요청했습니다.

공사는 순환 보직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동안 담당을 하는 관계로 전 담당자의 설계 취지를 확인 안 하는 것인지, 노동조합이 있음에도 아무런 개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기존 용역업체와 계약이 만료되어 신규 입찰 과정에서 임금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력 충원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관리소가 늘고, 정규직이 늘어서 더 충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간 자리에 충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 사측은 타 공공기관보다 많은 인력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미화 인력에 대한 조사를 하니, 단순 청소만 하는 미화고 공사와 같이 청소 업무와 조경 관리를 같이 하는 곳이 없었으며, 건물 청소의 경우도 건물관리위생협회의 기준보다 적은 인원으로 미화 작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20195월에 다시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임금체계가 바뀌어 남녀 간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지고, 남자의 경우 실적급 정산이라는 수당이 생기면서 조합원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노조에서 남녀 기본급이 상이하니 같이 맞춰 달라는 요구에는 남자의 임금이 총액으로는 많으니 문제없다고 하고, 최저임금은 통상임금으로 따지니 상여금 300퍼센트를 12개로 나누어 지급한다는 것을 월 25퍼센트 지급으로 바꾸어 통상임금에 산입되게 하는 등 사측의 만행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부에 건의를 하여, 2019129일 대구 본사 앞에 미화 조합원의 설움을 알리는 투쟁 천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투쟁 천막 설치와 동시에 총무부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이름만 없다뿐이지 자기를 욕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못하고 투쟁 천막을 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저희는 담당자 분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말하고, 총무부장의 빠른 결론 촉구를 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문제는 새로운 임금 설계와 인력 충원이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비정규직 전환 요구에 대해서 사측은 아직도 답이 없습니다. 우리 비정규직 노조는 일방적인 직고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회사안도 하나의 조건만 성립이 되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회사의 경우 모회사와 교섭을 할 수 있는 교섭권을 보장한다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으며, 설립과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산업통상자원부의 자회사 운영 평가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 등을 사측에 요구하였지만 제대로 된 자료를 안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물며 직접고용시 정부의 전환 가이드라인에 나오는 권고 사항도 무시한다는 발언을 하여 15차 노사전 회의와 2번의 실무 협의를 마지막으로 중단을 하였으며, 사측의 성의 있는 자료가 나올 때까지 우리 나름의 투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 지난 12일 한국가스공사 시무식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구 본사에서 게릴라 파업을 벌였다.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이에 지난 12일 본사 조합원만으로 게릴라 파업을 진행하여 2020년 시무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0110일 기준 투쟁 천막 33일차, 정규직 전환 요구 선전전 634일차를 보내면서 한국가스공사의 성의 있는 자세를 요청하며, 한 명의 조합원으로서 정규직 전환이 희망 고문이 안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지난 2월 10일부터 가스공자 비정규지부는 전면 파업 중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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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세상 보기

옛 그림 속 여성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종수/ 미술사학자, 조선회화실록저자

 

  

이 무덤은 특별합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수많은 벽화고분 가운데 묘 주인이 확실한 유일한 무덤입니다. 연대까지도 확실하죠. 408. 앞서 보았던 안악3호분의 경우, 많은 정보를 주긴 했지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묵서명에 이름을 남긴 동수가 무덤의 주인인지 등등,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까닭에 여주인의 신분 또한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지요.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런데 안악3호분으로부터 약 반세기 후,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품고 있는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무덤 안 벽화 사이에 남겨진 명문을 보자면, 그 내용인즉, 영락(永樂) 18, 즉 광개토대왕 시대인 408년에, 유주 자사 등등을 역임했던 진()이라는 남자가 77세까지 잘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주 자사라면 지방 태수에 해당하는 지위이니 진의 무덤은 5세기, 고구려가 한창 잘나가던 시대의 지배층 무덤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무덤 안 가득 벽화로 장식되었으니 당연히 무덤 주인 부부의 초상화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앞 시대의 안악3호분과는 달리, 무덤 주인 부부가 한 장면에 나란히 앉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덤 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었죠. 묘주 부부 초상화를 측실에 그렸던 안악3호분과는 묘실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인데요. 측실이 사라진 5세기에 이르면 묘 주인의 초상화는 현실(玄室, 무덤방)의 북쪽 벽면에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을 상석(上席)에 모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덕흥리 벽화고분의 현실 북벽에는 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없었던 것일까 싶지만,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 남성이 미혼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만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명문 기록을 보면 자손들의 영달을 기원하는 내용이 더해져 있습니다. 진은 여느 고구려의 상류층 남성들처럼 자손을 둔, 다시 말해 기혼자였던 것입니다.

벽화의 원래 계획이 단독 초상일 리도 없습니다. 남주 혼자 벽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명백히 그 옆자리가 비어있지요. (선으로 모사한 그림을 보면 이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진의 옆으로는 그를 위해 대기 중인 말 한 마리, 그리고 시중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진과 나란해야 할 배우자의 자리는 비어 있고, 장방 바깥쪽으로 여주를 위해 준비해 둔 수레 하나와 시녀들이 대기 중일 뿐입니다. 진의 아내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선 모사도).


궁금합니다. 진이 홀로 그려져야 했던 이유. 저 영원의 세상에서도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배층 남성이 무덤에 홀로묻힌 경우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저 그런 관직도 아닌 국왕의 신분이었죠. 물론 그는 결혼을 했습니다. 다만 왕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요. 문제될 것 없지요. 대부분의 부부처럼, 후일 왕비가 죽은 뒤에 합장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왕비는 남편 곁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죠. 두 번째 남편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쪽도 국왕의 신분이었는데 두 남자는 형제 사이였답니다.

고구려의 9대 임금인 고국천왕이 승하한 것은 197. 아들은 없이, 동생들만 여럿 있는 왕이었습니다. 왕비 우씨는 고민이 깊었지요. 어떻게 왕비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까. 고국천왕은 첫째 동생인 발기를 후계로 골라 두었지만, 그 유지의 시행 여부는 살아 있는 왕비의 몫이었죠. 결국 왕비는 자신을 박대한 첫째 시동생 발기를 제치고, 둘째 시동생인 연우를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 10대 임금인 산상왕인데요.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는 다시 산상왕의 비가 되어 왕비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지요.

흥미로운 것은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별다른 비난이나 저항 없이 왕비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녀와 새 임금 산상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권력에서 밀려난 발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신민들 모두 왕과 왕비를 승인했다는 얘기지요. 오히려 왕위를 차지하려 분란을 일으킨 발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왕비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출신인 연나부, 즉 고구려의 왕비를 배출했던 부족의 힘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안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왕비 자리를 유지할 방법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출신 부족이 세력을 겨루어야 했던 것이 2세기 말, 고구려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여인이 출가를 했다 할지라도, 딱 잘라서 출가외인으로 금을 긋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지요.

물론 그렇다 해서 산상왕비의 경우가 고구려 여성의 평균적인 삶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뭐 그런 식의 일반화로 이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후 조선의 여성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나마 조금 숨을 쉴 만한 시대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해 줍니다. 산상왕비 개인의 선택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별개로 말입니다.

묘실 벽화 이야기를 하던 중이니만큼 죽음 후 이 왕비의 안식처가 궁금해집니다. 그녀는 죽은 뒤 어느 남편 곁에 묻혔을까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산상왕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뜻을 어기고 왕위 계승을 흔들었으니 고국천왕과 함께 영원의 시간을 나눈다는 건, 아무래도 낯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홀로 무덤을 지키는 신세가 된 고국천왕. 저승에서도 마음이 썩 좋지 못했나 봅니다. 왕비 우씨가 산상왕 곁에 묻히게 되자, 무녀의 꿈에 나타나 큰 분노를 토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두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심어 서로 보이지 않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하네요. 재혼이야 고구려가 허락한 제도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을 무덤 안에 홀로 남겨 둔 왕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왕비 없이 혼자 묻힌 고국천왕의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면, 몹시도 외로운 묘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여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째서 이토록 장엄하게 장식된 영원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요. 고국천왕의 왕비가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을 따라 묻혔듯이 의 아내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묻혀 버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어 있는 여주인의 자리. 고구려 여성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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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구자숙/ 인천부개초등학교 교사

 

 

아이들이 엄마 키만큼 크는 6년 동안 곁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챙겼던 수많은 사람들이 있을 테지만, 나는 학교 공간에서 애달아하며 고생한 사람은 누구일까 생각하면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래서 우리는 급식실을 찾아갔다. 점심 급식 준비로 정신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영양사 선생님과 급식실 조리원님들에게 딱 1분만 시간을 달라고 해서 모두 모시고 인사를 드렸다.

“6년 동안 여러분이 이만큼 키와 몸과 마음을 크게 하는데 가장 많이 기여해 주신 분들입니다. 그동안 맛있는 밥 하루도 빠짐없이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할게요. 자세 바로. 인사.”

19명의 아이들과 함께 고개 숙이며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고 얼굴을 드는데 눈앞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물을 뚝뚝 떨구고 계셨다. 잠시 당황스러웠으나 나도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간 맞춰 몇백 명의 밥을 짓는다는 게 얼마나 힘들지.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얼마나 많이 담길지. 작은 실수 하나도 큰 사건인 양 떠들어 대는 사람들 덕에 얼마나 노심초사할지. 맛있는 건 얘기 안 하면서 맛없는 건 품평하기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밥을 해 낸다는 게 얼마나 마음을 많이 써야 하는 일인지. 그 모든 긴장감과 고단함을 졸업하는 아이들의 감사합니다 한마디에 위로받고 계셨다.

밥 맛있게 먹고 쑥쑥 커 줘서 고맙다고, 중학교 가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라고, 여기서 20년 일했는데 이렇게 인사하러 와 준 아이들은 너희들이 처음이라고, 너무 고맙다는 급식 조리원님 인사말을 마음에 담고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다음은 청소 노동자! 건물이 세 채가 연결된 3층짜리 학교를 단 2명이 어떤 기계의 도움 없이 청소를 하신다. 여름에는 땀을 뚝뚝 흘리며, 겨울에는 추운 날도 편하게 움직이려고 가벼운 옷차림으로, 수많은 화장실과 길고 긴 복도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현관을 돌본다. 구역이 달라 함께 계시는 일이 잘 없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2층 화장실 앞에 함께 계셨다. 너무 반가워서 호들갑을 떨며 종종 달려가 내일 졸업식인데 인사드리러 왔다고 했다.

여러분이 쾌적한 공간에서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학교를 늘 깨끗하게 관리해 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 덕에 더 행복하게 학교생활 했습니다. 인사드릴게요. 자세 바로. 인사.”

두 분에게 졸업 축하 인사를 부탁드렸는데 이런 말씀을 해 주셨다.

졸업을 축하해. 너희들이 학교를 깨끗하게 써 주어서 청소하는 게 한결 수월했어. 그리고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해 주어서 정말 고맙다.”

고맙다고 인사드리러 갔는데 되레 고맙다는 인사를 받았다. 우리는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아이들 19명과 나는 이렇게 학교를 샅샅이 돌면서 그간 감사했던 많은 이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물론 아이들은 인사하는 와중에도 앞 친구를 밀거나 뒤 친구를 밀치면서 몸 장난을 치고 그분들이 축하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옆 아이들과 수다를 떨면서 딴짓을 했다. 하지만 고개 숙여 다함께 감사합니다 인사하던 순간 울려 퍼지던 아이들 목소리가 아름다웠고 그 인사를 받던 이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났다. 앞으로 6학년을 맡으면 이 활동은 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이들이 졸업했고 나는 또 조금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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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2)

 

살다가 길을 잃었을 때

김수련/ 29년차 항공사 객실 승무원

 

 

  오늘은 내캉 밭 가는 데 따라가자. 우짜마 오늘이 내캉 밭 갈러 가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같이 안 갈끼가. 니가 서울 가기 전에 할 이야기도 좀 있고.”

아직 창호문 너머로 어스름 새벽빛만 희미하다. 날이 채 밝기도 전부터 아버지는 동네 어귀 당산나무 근처로 밭 갈러 나갈 준비를 다 하신 모양이다. 밭을 가는 건 어쩌면 핑계고, 다음 달 서울로 일하러 떠날 나와 얘기를 나눌 구실을 만드신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 온갖 농사일을 거들며 살았지만 어둠도 가시지 않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는 게 좋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아직 겨울 추위 끝자락이 매서운 2월이었지만, 그날 난 정말 기꺼이 창호문을 열고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19902, 나는 대학을 막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초중학교를 고향 동네 면 소재지에서 보낸 뒤 밀양 읍내의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니 철든 뒤 부모님 곁에서 보내는 긴 시간은 그해 2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으며,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임을 알았다.

2월의 시골은 농한기라 외견상 한가하다. 하지만 한 해 농사를 준비하는 농부들에게는 1년 농사가 이때 판가름 난다 할 만큼 귀중한 시간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논과 밭을 돌아보면서 한 해 농사를 계획한다. 어떤 농사를 지을지를 결정하고, 심을 작물에 따라 거름을 얼마나 낼지, 비료는 뭘 쓸지, 밭이나 논을 빌려 소작을 내야 할지를 결정하기도 한다.

날이 풀려 언 땅이 녹기 시작하면 동네 아재들은 너도나도 들로 밭으로 쟁기질을 하러 나간다. 당시에도 경운기가 있었지만 경지 정리가 되지 않아 대부분의 논과 밭에는 기계가 들어가기 힘들었다. 기계를 조립하고 부리는 일보다는 소가 끄는 쟁기질이 훨씬 더 손쉽기도 했다. 우리 집 어미 소는 몇 해 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이후 충분히 길이 들지 않아 아버지의 호령 소리를 아직 잘 알아듣지를 못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앞에서 소를 몰면서 길잡이를 해 주어야 했다.

아직 잠이 덜 깬 외양간의 어미 소를 깨워 물과 여물을 먹인 후, 아버지는 쟁기를 짊어지고 나는 소를 몰고 대문을 나섰다.

아침때 늦지 않게 후딱 댕기 오이소~.”

새벽부터 빈속에 오래 일하다 자칫 부녀가 기운이라도 빠질까, 걱정하시는 어머니 목소리를 뒤로 하고 들로 향했다.

암만 힘들어도, 니는 잘할 끼다.”

이려, 이려!”

아버지의 호령 소리에 맞춰 나는 앞에서 소를 끌고, 아버지는 쟁기질을 하셨다. 밭에는 오늘 내가 뿌려야 할 거름이 가득했다. 아버지가 쟁기로 밭을 가는 동안, 거름을 뿌리는 일은 내 몫이었다. 틈틈히 말 안 듣는 어미 소를 몰기도 하며 거름을 온 밭에 뿌리는 일은 무척 고단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한 쟁기질과 거름 내는 일은 아침때를 한참 넘겨 해가 중천에 가서야 끝이 났다. 동쪽 산 위로 훌쩍 솟은 햇살을 받아 쟁기질로 갈아진 흙에선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서늘한 아침 공기엔 싱싱한 거름 냄새가 가득했다.

힘들제?”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몇 시간째 일을 한 후 밭두렁에 앉으니, 헉헉대는 숨결에서 쇠를 달군 듯한 단내가 피어오른다. 고르게 잘 갈린 밭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말씀을 이어 가신다.

니가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러 간다니,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취업 결정이 나자 엄마는 정말 기뻐하시며 여기저기 인사하러 나를 데리고 다니셨지만, 아버지에게서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항공사에서 일한다니, 그기 어떤 긴지 나는 감히 상상도 안 된다. 테레비에 나오데? 비행기 타마 하와이라는 데도 가고 할 낀데, 와이키키라 카더나? 해변가가 좋더라. 언젠가 그런 데 가더라도, 오늘 이 시간을 잊지 말아라. 나는 니가 좋은 곳을 가고 멋진 옷을 걸치고 그래 산다 캐도, 니가 살았던 이 고향 동네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도 젊었을 땐 큰 데 나가 살고 싶었는데, 느거 할아버지가 절대 허락 안 하셔서 고향을 지키고 살았다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이젠 농사지으며 고향서 사는 것이 내 운명이라 생각한 지 오래다. 니가 일손 부족한 시골서 자라면서, 지독히도 농사일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거 미안하기도 하고 많이 고맙게 생각한다. 고되고 힘들었을 텐데 큰 불평 안 하고 잘 따라 주는 너그들을 보미, 안타까운 마음이 와 없었겠노? 서울 가서 살아 보면 니 같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을 찾아보기는 힘들 끼다. 니한테 분명 값진 경험이 될 끼라 생각한다. 살면서 어렵고 힘든 순간들이 얼마나 많겠노? 그럴 때면 오늘 내랑 같이 밭 갈면서 우리가 지금 하는 이 이야기를 떠올리 봐라. 지금보다 더 힘든 날이 얼마나 더 있겠노? 니는 잘 견뎌 낼 끼라 믿는다. 고향에서 살았던 이 시절이 너의 뿌리며 너의 근본 아니겠나. 니는 서울서도 잘 살 꺼라고 믿는다. 뭘 해도 잘 할 끼다.”

아버지의 그런 당부를 듣고 있자니, 나를 키워 주고 품어 준 고향 들과 산이 새삼 달라 보였다. 소 먹이느라 헤매 다녔던 뒷산과 앞산, 부모님 따라 농사짓던 들과 밭, 동무들하고 물장구치며 놀던 작은 개울, 봄의 산딸기부터 가을의 머루까지 내가 모르는 곳은 하나도 없을 정도로 속속들이 알고 기억하는 고향 마을이었다.

막 일을 끝낸 후라 이야기를 나누는 우리 두 사람 입에선 하얀 입김이 꽃처럼 피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쉬는 어미 소의 등과 입에서도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마치 곧 고향을 떠날 나를 위한 축포의 연기 같구나, 싶었다.

그림_ 최정규

항공사에서 객실 승무원으로 일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서울 생활도 그리 쉽지 않았다.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자랐던지라 체력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다니는 일은 지독히도 고된 노동이었다. 태평양을 걸어서 건너다닌다고 말할 정도로 힘든 일 덕분에 퉁퉁 붓고 아픈 다리를 주무르며 낯선 나라의 차가운 침대에서 잠들 때, 모진 승객에게 무시당하며 눈물을 삼킬 때, 무섭고 호된 선배들의 질책에 속수무책일 때, 산골 소녀로서는 차마 상상조차도 못한 일을 겪으면서, 나는 서서히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 아버지가 얘기한 하와이 비행을 드디어 가게 되었다. 와이키키 백사장 바로 앞 호텔에 짐을 풀고 당장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휴양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그 아름다운 해변가를 걸었다. 잠시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멍하니 앉았다. 일에 지치고 사람에 지쳤으며 상상하지도 못했던 상황을 겪으며 어쩌면 길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다. 힘들제? 그래도 안 잊어버렸제? 니가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해라.”

그 순간, 그날의 고향 풍경과 아버지와 나눴던 이야기들이 마치 영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났다. 얼어붙은 땅에 박힌 쟁기를 끌던 어미 소의 거친 숨소리, 갈아엎은 흙에서 나던 신선한 땅 내음, 아침 햇살 받으며 피어오르던 아지랭이, 이랴~이랴~ 어띠이~ ~~” 소를 부리던 아버지의 목소리. 그리고 고단한 아침 일을 마친 후 아버지와 나누던 긴 이야기.

그후, 그날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시차를 넘나들며 타국에서 고단한 잠을 청할 때, 무서운 선배에게 혼이 나 혼자 눈물을 삼킬 때, 모진 말을 함부로 퍼붓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괴로울 때마다 되살아나, 나를 위로했다. 어미 소의 등어리처럼 판판하고 포근한 고향 뒷산과 굽이굽이 어여뻤던 논과 밭은 지금도 나를 어루만져 준다. 해마다 입사철의 그 봄날 즈음이면 나는 언제나 그 시간을 떠올린다. 그날 아버지와 내가 언 밭을 갈아엎으며 봄 농사를 시작했듯, 나의 긴긴 비행 생활도 그날 그렇게 시작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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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4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대법원장만을 섬겼던 법원

조석제/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장

 

 

양승태를 구속하라! 양승태를 구속하라!”

지난 111일 아침 8시 무렵부터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법원 안에서 정문을 막고 구호를 외쳤다. 이들 중 몇몇은 양승태 구속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대법원 담벼락에, 일부는 피의자 양승태는 검찰 포토라인에 서라는 현수막을 들고 대법원 정문 지붕 위로 올라가기도 하였다.

법원노조가 검찰 소환을 앞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저지하고 있다(2019111).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오전 9시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대법원 앞에 나타나자 양승태를 구속하라는 구호는 더욱 크게 울려 퍼졌으며, ‘피의자 양승태에게 경고합니다로 시작하는 규탄 방송은 기자회견을 하는 양승태의 목소리를 덮어 버렸다. 결국 현장 소식을 중계하던 방송국에서는 양승태의 발언을 자막으로 처리하였으며, 각종 언론사의 현장취재 사진에 나온 배경은 대법원 건물이 아니라 양승태 구속 현수막과 손피켓이 차지해 버렸다.

당일 전국으로 생중계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기자회견을 방해한 장본인은 바로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이다. 필자는 전국의 법원공무원들이 자주적으로 조직한 노동조합인 전국공무원노동조합 법원본부(이하 법원본부)의 본부장을 맡고 있다. 왜 법원공무원들은 대법원 앞에서 양승태 구속을 목놓아 외쳤을까?

먼저 양승태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삼권분리를 뒤흔들고 사법부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 사법농단의 주범이기 때문이다.

재작년 2월 이탄희 판사에 의해 법원행정처의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 불거지면서부터 법원본부는 이를 사법농단으로 규정하고 그 주범으로 양승태 당시 대법원장을 지목하며 투쟁을 전개하였다. 법원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양승태 대법원장의 지시나 보고 없이 하급자들이 재판 거래와 같은 어마어마한 일을 알아서 진행했다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만큼, 그가 제왕적 권력을 휘둘렀던 사실을 알고 있다.

재판과 사법부의 독립을 지켜야 하는 가장 막중한 사명을 지닌 대법원장이라는 인물이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서 청와대와 재판 결과를 거래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를 대더라도 용납할 수 없는 반헌법적인 범죄행위이다.

국민들은 자신들의 재판 결과가 일부 적폐 법관들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극도의 사법 불신에 빠지게 되었으며, 그 피해는 민원현장의 최일선에서 근무하고 있는 법원공무원들이 고스란히 감당하게 되었다. 실례로 형식이 잘못된 재판 서류의 보완을 요구하는 담당 직원에게 법원이 상대편 당사자와 한통속이 되어 나를 해코지하려는 것 아니냐며 폭언을 일삼는 일이 급증하였으며, 작년 11월에는 재판 결과에 불만을 품고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민원인을 제지하던 법원공무원이 폭행을 당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법원본부가 사법농단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공개된 사법농단 관련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시절 법원행정처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예측하기 어려운 돌발 행동이 우려된다는 식으로 노조 집행부의 성향을 파악하고, 각종 회의, 내부게시판 글 게시, 집회 참석 등 노조활동을 지속적으로 사찰했으며, 이를 통해 신규 직원 조합 가입 위축 등 노조 와해 공작을 벌였다.

또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반민주적이고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독선적인 사법 정책이 법원 구성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다. ‘국민을 섬기는 법원이라는 모토를 걸고 출발한 양승태 대법원은 실제로는 대법원장 1인만을 섬기는 법원이 되었고, 대법원장 치적 쌓기를 위한 각종 전시성 행사와 사법 정책이 물적, 인적 준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졸속으로 집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양승태 대법원장 재임 기간 6년 동안 판사를 포함한 법원 구성원 70여 명이 사망하였으며, 그중에 약 20명은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

법원본부는 2014년 당시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법원행정처와 공동으로 외부 전문기관에 법원공무원 근무 환경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근무 인원을 대폭 증원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 효과는 1~2년 이상을 가지 못하고 다시 직원들이 쓰러지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법원 구성원들의 죽음은 양승태 대법원장 체제가 만들어 낸 비극이었던 것이다.

법원본부는 20173월부터 사법부 적폐청산을 위한 투쟁본부를 구성하고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끝장내고 사법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투쟁을 본격적으로 진행해 왔다.

그리고 드디어 124일 새벽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서울구치소에 구속되었다.

돌이켜 보면 2017년 대법원 앞 촛불문화제 개최, 민주적 대법원장 선출 투쟁, 2018년 양승태 대법원장 처벌을 위한 전 조합원 서명운동 및 형사 고발, 전 지부 1인 시위 및 현수막 게시 투쟁, 각종 기자회견, 대법원 앞 단식농성 투쟁, 119일 대법원 앞 연가투쟁, 1119일 적폐법관 업무배제 및 특별재판부 설치 촉구 법원본부장 삭발투쟁, 128일 사법적폐 청산을 위한 청와대 앞 결의대회, 2019111일 양승태 대법원 앞 기자회견 저지 투쟁, 양승태 구속 촉구를 위한 범국민 서명운동 및 123일 영장실질심사 담당 재판부에 의견서 제출을 위한 기자회견 등, 일일이 나열하기도 힘들 정도의 많은 투쟁들을 전개해 왔다.

글쓴이 조석제 씨를 비롯한 법원본부 지부장들은 법원 청사 앞에서 단식 농성을 하기도 했다(2018.6.15.)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법원본부가 흔들림 없이 양승태 구속 및 사법적폐 청산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법원 구성원들이 자긍심을 가지고 근무할 수 있도록 인권수호의 최후 보루로서 사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과 법원공무원노동자들의 노동이 존중받는 일터로 만들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양승태는 구속되었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사법농단 관련 판사들이 여전히 법복을 입고 재판업무를 수행하고 있기에 사법농단으로 기소된 양승태, 임종헌 등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 결과도 장담할 수 없다. 해방 이후 70년 역사 이래 단 한번도 교체되지 않고 법원 구석구석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법적폐 세력들은 호시탐탐 권토중래를 노리고 있다.

1만여 법원본부 조합원들은 사법개혁을 완수하고 사법부가 국민의 법원으로 자리매김할 때까지 사법적폐 세력들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국민의 공무원이니까.

양승태 구속 촉구 기자회견 중인 법원노동자들(2019.1.23). 가운데가 조석제 씨. 사진 제공_ 공무원노조 법원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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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파업 투쟁의 기술

이철의/ 정년을 앞둔 철도노조 조합원

 

 

1125, 철도노조의 파업이 6일 만에 끝났다. 이전의 경고 파업까지 더하면 올해 9일간 파업한 셈이다. 올해 파업은 유난히 여론이 좋지 않았다. 수험생을 볼모로 파업을 하냐?” “다 잘라 버려라. 일할 사람 많다.” 파업 기사에 달린 댓글이 한심했다. 수서발 고속철도 통합이나 안전 인력 충원, 비정규직 정규직화와 처우 개선 등 조합의 요구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MB나 박근혜 정부 때는 파업을 응원하는 이들이 많았다. 철도노조 힘내라. 불편해도 괜찮아.” 응원을 하고 10만 명이 모이는 연대 집회까지 열릴 정도였다. 박근혜 정부 말기 촛불 시위 때는 무려 74일이나 파업을 벌였다. 처음에는 연봉제에 반대해서 파업에 나섰는데 나중에 촛불 선봉대가 되었다. 조합원들은 신이 나서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하지만 파업이 끝나고 보니 후유증도 컸다. 파업 조합원들은 두 달 넘는 기간 무노동 무임금 신세가 되었다. 필수유지 업무 조합원들은 17개월이나 무노동 무임금에 대한 고통 분담금을 내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지? 착한 정권에 반항해서 그런가? 우리는 시민들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20191122일 철도노조 파업 집회. 우리는 비정규직과 함께 철도 공공성과 사회성 강화, 임금인상을 걸고 당당히 파업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철도노조는 조합원 2만 명이 넘는 큰 노조이다. 파업도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진행한다. 복귀 후 징계 대응이나 법정다툼도 침착하기 이를 데 없다. 2013년 박근혜 정부 초기, 철도노조는 24일간 파업을 벌였는데 사장이 정말로 화가 났다. 사장보다 대통령이 더 화가 났겠지, 노조 위원장이 숨어 있는 경향신문사에 경찰이 쳐들어간 것을 보면 대통령의 화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정부의 태도가 그러니 회사도 강경 일변도였다. 파업 참여자 12천 명을 전원 징계에 회부한 것이다.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징계에는 최소한의 절차가 필요하다. 관리자 7명 정도가 위원이 되어 나름 그럴듯한 심문 절차도 밟는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징계하려니 시간과 인력이 허락하지 않았다. 회사는 삼십 분에 한 명씩 속전속결로 해치우려고 하였다. 철도노조 단체협약에 따르면 노동조합 측 인사가 진술인이나 의견 대리인으로 참석한다. 반론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징계위원을 기피할 수도 있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징계에 노동조합은 지연 전술로 맞섰다. 절차나 태도를 시비 걸어 징계위원을 기피하거나 진술을 한없이 길게 하여 질질 끌었다. 조합원들은 겁도 없이 징계장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관리자들을 골리기도 하였다. 회사는 징계를 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나중에 조합원들 수백 명이 집단 삭발하며 재파업 분위기가 무르익자 탄압이 수그러들었다.

처음 파업했을 때가 생각난다. 1988726, 올림픽을 50여 일 앞둔 때였다. 그때 한 달 300시간에 가까운 장시간 노동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참다못한 철도 기관사들이 파업을 벌였다. 기관사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쉬자.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쳤다. 기관사 부인들 수백 명이 철도청 청사 앞에서 농성을 벌이며 내 남편을 돌려 달라고 호소했다. 조합은 지독한 어용노조여서 조합원들의 권리는 관심 밖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농성에 쓴 장구와 북을 모두 찢고 농성 주동자들을 경찰에 제보했다고 한다. 위원장은 텔레비전에 나와 불법 파업이므로 용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파업은 열네 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백골단이 쳐들어와 농성하던 기관사들을 몽땅 잡아갔던 것이다. 기관사들은 경찰, 노동부, 안기부 조사를 차례로 받고 개전의 정을 보인 끝에 석방되었다. 가슴에는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라고 쓴 깃을 달고 기관차에 올랐다.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1994년 전국지하철노조협의회 연대파업 전 결의대회 사진. 사진제공_ 이철의.


1994년 철도 지하철 연대 파업은 말 그대로 교통대란을 만들었다. 그때 나는 주동자로 구속되어 있었는데 아내가 늘 오후에 면회를 왔다. 왜 하필 운동할 때 오냐? 오전에 오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차가 막혀 면회 오기가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비록 강경 탄압으로 패배했지만 우리는 원없이 싸웠다. 조합원들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경찰을 피해 흩어졌다. 노장들은 지금도 계곡에 숨어 밥해 먹던 이야기들을 하곤 한다.

2006KTX 승무원과 함께 철도공사 사옥에서 농성하다 연행되는 모습. 사진제공_이철의.


2002, 2003, 2006, 2009, 2013, 2016. 숨가쁜 파업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구속자와 해고자가 탄생하고 징계와 손해배상 등 탄압이 뒤따랐지만 노동자들은 싸움의 고수가 되어 갔다. 회사 쪽 관리자들은 때가 되면 보직을 바꾼다. 하지만 노동조합 투사들은 파업 때마다 싸움의 기술을 익힌다. 갓 입사한 신입들은 선배들이 싸우는 것을 보며 잔뼈가 굵어 간다. 정의감이 유달리 강하거나 인간성이 좋은 후배들은 파업 끝에 자연스럽게 노조 간부의 길로 들어섰다. 그 결과 민영화 법안을 철회시키고 외주 위탁을 멈추게 하였다. 노동시간도 점점 단축되었으며 직장 민주주의가 진전되었다. 문제를 일으킨 관리자들을 반드시 혼내 주니 성희롱이나 폭언·폭행, 갑질이 사라져 갔다. 민주노조 20년에 철도 현장은 몰라보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러는 가운데 나는 정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번 파업은 마지막이자 송별 파업이 되었다. 파업으로 송별회를 대신해 주니 후배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번 파업은 특히 자회사 조합원들 수천 명이 함께하였다. KTX 승무원, SRT 승무원, 고객 센터 조합원, 그리고 역무 위탁 조합원들은 파업 기간 동안 대전 철도공사 본사 앞에서 농성을 하는 등 치열하게 싸웠다. 비정규직과 함께하려는 노동조합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앞으로도 철도노조는 철도 공공성과 사람다운 삶을 위한 분투를 계속해 갈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한국 사회 모든 노동자들과 연대에도 앞장서기를 기대한다.

▲ 2019년 1230일 마지막 근무날왼쪽 붉은 게시판에 ‘0’ 표시는 정지 위치를 10센티미터도 안 틀리게 딱 맞췄다는 뜻이다. 철도공사는 이런 나를 평생 징계만 했다. 사진제공_ 이철의


*글쓴이는 2019년 12월 30일 근무를 끝으로 정년퇴직을 하였습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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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나는 스물아홉 살,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여성이다. 어머니는 임신 7개월에 나를 낳았다. 갑작스러운 진통으로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분만이 시작되었고, 배 속 태아는 거꾸로 있는 둔위 상태였다. 산모도 태아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어머니의 사랑과 의지 때문이었는지, 나는 1.25키로그램의 미숙아로 무사히 세상의 빛을 보았다.

첫돌이 될 때까지 1년여의 시간이 내가 비장애인으로 살 수 있었던 전부였다. 아무도 나의 장애를 발견하지 못한 시간이기도 했다. 돌이 지나도 나는 제대로 서지도, 걸음마를 떼지도 못했다. 병원에서 내려진 진단은 뇌성마비였다. 지적 발달은 6세쯤에서 멈출 것이고, 걷지 못할 것이고, 전형적인 강직 증상으로 활동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 나의 지적인 능력은 정상 범위에 가깝게 성장했지만, 몸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정도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서거나 걷는 것은 물론이고 벽에 기대지 않으면 앉을 수조차 없었다. 몸의 강직 때문에 두 손을 자유롭게 쓸 수도 없었고 말도 어눌했다. 아홉 살이 되어 겨우 장애아동 보호시설에 들어갈 때까지 내가 만날 수 있는 세상은 텔레비전과 비디오테이프와 동화 테이프가 전부였다. 부모님은 할머니에게 나를 맡겨 놓고 일을 하러 나갔다. 나는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일곱 살이 되던 해 취학통지서가 나왔지만, 입학할 학교의 교장은 나의 장애 상태를 본 후 결정하겠다고 했다.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어도 몸이 불편한 나의 등하교를 도와줄 사람은 없을 것이었다. 지적인 능력은 비장애인과 비슷한 수준이고 능숙하지는 못하더라도 읽고 쓸 수는 있었지만, 결국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 후, 재활 과정을 거쳐 장애아동 주간보호시설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비록 시설 안에서뿐이었지만 처음으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수 있었고 현장학습을 통해 바깥세상을 구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홉 살의 나는 점심과 간식을 먹거나 애니메이션 비디오를 보거나 억지로 낮잠을 자야 하는 유치원생 수준의 생활을 해야 했다. 장애의 정도도 나이도 다른 아이들이 모여 있는 그곳에는 나에게 맞는 교육도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일 년이 지나고 열 살이 되어서야, 한 초등학교와 협약을 맺은 장애인 재택학급이 생겼고, 나는 비로소 초등학생이 되었다. 학교 소속의 특수교사 한 명이 시설로 와서 수업을 진행하는 식이었는데, 몸 상태와 지적 수준이 다른 학생들을 선생님 한 명이 일대일 개인 지도를 해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배워야 할 과목을 다 배우지도 못했다. 수학과 국어가 수업의 전부였고, 다른 학생들이 수업을 받는 동안에는 역시 한쪽에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어야 했다. 보조교사가 한두 명이라도 더 있었더라면. 나는 초등학교 과정 6년을 결핍과 무기력 속에서 보내야만 했다.

열여섯 살이 돼서야 시설과 재택학급을 떠나 지체부자유 학생들이 다니는 장애인 특수학교 중학부에 입학했다. 등하교가 어려운 장애 학생들은 그곳 기숙사에서 고등부 과정까지 6년을 지냈다. 나는 처음으로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스스로 생활해야 했다. 목욕, 청소, 옷 갈아입기, 휠체어 타기. 내 몸 상태로는 무엇 하나 쉽게 할 수 없었다. 우왕좌왕하다가 수업에 지각하고 꾸중을 듣고 함께 생활하는 방 친구들에게 피해를 주기 일쑤였다. 생리대를 갈지 못한 날에는 수업이 끝날 때쯤 교실로 들어가기도 했고, 휠체어를 잘 움직이지 못해 이동수업 때마다 헤매 다녀야 했다.


스트레스와 운동 부족으로 살이 찌면서 어린 시절의 갸름하고 제법 예쁘장했던 내 모습은 사라졌고 친구들은 그런 나를 놀려 대기도 했다. 나는 거의 매일 밤 울며 잠들었다.

마침내 중·고등 과정 6년이 지나고 장애인 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과정에서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고 칭찬을 받은 것은 글쓰기였다. 그것은 몸이 불편한 나도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누군가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뻤다.

나는 국문과에 진학하여 기숙사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장애를 가지지 않은 비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는 학교생활이었다. 그들과 같은 수업을 들었고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다.

하지만 초··고 시절 정상적인 수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지 전공 과목을 따라가기도 어려웠고 똑같이 주어진 시험 시간 동안 불편한 손으로 답안을 작성하는 것도 나에게는 무리였다. 글씨는 엉망이었고 성적도 과락을 겨우 면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학교 안에는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곳도 있어서 가장 맛있는 학식은 한 번도 먹을 수 없었다. 장애인 화장실은 청소 도구로 가득 차 종종 다른 화장실을 찾아다녀야 했다.

장애학생회와 함께 장애 인식 개선 활동 등 처음으로 내 목소리를 내 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장애인의 세상도 비장애인의 세상도 바깥일 뿐이었다.

그때 나는 헌법 제311항을 알게 되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배울 권리, 살아갈 권리!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인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배움에 목마르고, 갈 수 없는 곳은 더 늘어만 간다.

 

특수반에서 수업이라고 할 만한 시간도 없어요. 사운드북 몇 번 눌러 주는데 사운드북은 집에도 많아요. 원반(일반학급에서의 통합교육)도 마찬가지예요. 교사가 성은이는 아이들 노는 것만 봐도 큰 교육이 된다는데, 이게 공부인가요? 성은이는 손만 빨고 있었어요. 쉬는 시간에 들어갔더니 손만 얼마나 빨며 침 흘렸는지, 바지까지 젖어 있었어요.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세요? 성은이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다는 거예요.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심심하고 지겨워서 죽을 것 같았다는 뜻입니다.” (<비마이너>, ‘휠체어 타는 우리 아이는요?’(2019313) 인터뷰 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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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1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화성시 학교 청소년 상담사

 

책임 회피만 하는 경기도교육청과 화성시

정인열/ <작은책> 기자

 

2016년부터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 정신 건강 책임져왔지만

고용은 늘 불안정, 급여는 최저임금 수준

경기도교육청과 화성시는 서로 고용주체가 아니라며 떠넘기기

한시적 고용 책임지기로 한 화성시, 겨울 학사일정 동안 고용계약에서 배제

상담사들은 두 달간 당장 수입 없고 상담 연속성이 깨져 피해는 학생들에게

 

학교 청소년상담사 김화민 씨. 그는 20178월부터 비정규직으로 경기도 화성의 한 고등학교에서 학생, 학부모, 교사들을 상담해 왔다. 그런데 최근 근로계약 갱신을 앞두고 고용 주체인 화성시로부터 계약기간을 20203~202012월로 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학교 측과 학사일정이 남았음에도 새해 첫날부터 두 달간 일을 할 수 없어 임금도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게 됐다. 방학 중 상담 프로그램 부재로 학생들도 피해를 보게 된다.

  ▲ 경기도 화성시의 한 고등학교. 작은책(정인열)

 

김화민 씨와 같은 처지에 놓인 청소년상담사는 모두 15이들은 화성시에 올 겨울만이라도 상담 업무가 중단되지 않도록 계약기간 조정을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상담사 김화민 씨와 김선희 씨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었다.

2012년 경기도교육청(이하 도교육청)은 화성시와 창의지성교육도시(2012~20162) MOU(업무 협약)를 맺고 도내 초··고등학교에 전문 상담사를 배치하도록 인력을 지원했다. 2012년부터 투입된 상담사들은 1년마다 학교장과 계약을 하는 학교 비정규직이었다.

이들은 하루 8시간 이상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 학부모의 심리 검사 및 심리 상담, 교사 자문, 상담 프로그램 등을 도맡았다. 한국은 OECD 가입국 중 자살률 1(2011~2017년 통계 평균), 청소년 주관적 행복지수는 OECD 가입국 중 최하위 수준이다(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국제비교 연구 보고서,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염유식 교수팀, 2016~2017년 발표). 학교 상담실은 접근성이 좋아 위기 상황에서 더 큰 효과를 발휘했다.

외부 상담소에 있을 때보다 학교에서 훨씬 병리 증상(조현병, 공황 장애, 우울 장애 등)이 많아 깜짝 놀랐습니다. 눈앞에서 조현병이 발병한 아이를 병원에 즉시 인계한 경우도 있고요. 특히 초등학생들은 안전 문제도 있기 때문에 학부모, 교사와 협의해서 행동 교정에 들어가죠. 또 교사들이 담당하기 힘든 학생들은 대안 교실이라고 해서 저희가 자체 프로그램으로 돌봅니다. 학부모들이 화가 나서 학교에 올 때는 상담으로 진정 시켜 드리고요.”


김선희 씨는 상담 경력 11년으로 학교 청소년상담은 20183월부터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김선희 씨와 김화민 씨의 말이다. 이들은 모두 대학원을 졸업하고 청소년상담사와 임상심리사 자격, 한국상담심리학회 및 상담학회 1, 2급 자격을 보유한 전문 상담사들이다. 하지만 전문성에 비해 임금은 턱없이 낮다.

실수령액이 수당, 출장비 등 다 합쳐도 197만 원 정도예요. 최저임금 수준이죠.”

20163, 계약 기간이 2년 초과된 상담사들 약 20(공공운수노조 추산)은 교육청의 정규직(무기계약 교육공무직)이 됐다. 반대로 계약 기간 하루가 부족해 해고된 상담사도 있었다. 해고된 상담사는 모두 20. 이들을 단계적으로라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도입했다면 좋았겠지만 도교육청은 하지 않았다. 이어 도교육청은 화성시와 20162월 혁신교육지구 시즌2(20163~20212) MOU를 맺었다. 도교육청은 인력 지원을 없애고 지역사회 교육 기부를 활용하겠다고 사업 기조를 밝혔는데, 이는 학교 청소년 상담 사업을 포함한 기존 사업들을 진행하되 인력 채용은 안 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방침은 후에 화성시와 교육청이 청소년상담사 정규직 전환 책임을 서로 떠넘기는 빌미가 됐다.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화성시는 인력 예산을 투입해 청소년상담사를 민간위탁하고 학교로 파견시켰다. 2016년 새 학기부터 기존 해고됐던 상담사 일부와 김선희, 김화민 씨 같은 신규 상담 인력이 채용되며 청소년상담사 수는 약 40명이 됐다. 이듬해인 20177,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면서 화성 청소년상담사들은 3단계에 해당하는 정규직 전환 심사 대상이 되는 듯했다. 김선희 씨가 당시 분위기를 말한다.

시청 공무원들도 우리한테 무기직 전환 대상이라고 얘기하면서 기대감을 줬어요.”

정부 지침에 따라 청소년상담사들을 지자체 공무직으로 채용한 의정부시와 오산시의 사례도 있지만 화성시는 달랐다. 학교 청소년 상담은 본래 교육청 소관 사업이므로 시가 정규직 전환을 책임질 의무는 없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정규직 전환 지침과 반대로 201810, 시는 청소년상담사들에게 난데없는 제안을 했다. 김화민 씨의 말이다.

“10개월씩 받아들이면 2020년까지 두 번 계약을 해 주겠대요. 실업급여도 못 받고 상담 계획도 남아 있으니까 12개월로 해 달라고 했죠. 그럼 고용에 대해 (정규직 전환) 요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라고.”

길게는 47개월, 짧게는 27개월 동안 상담 업무를 해 온 청소년상담사들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이들은 노동조합(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전국교육공무직본부 경기지부, 이하 지부)에 가입하고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서철모 현 화성시장과 면담했다. 하지만 서 시장은 상담사 외에 노동조합 관계자가 동석했다는 이유로 불쾌감을 표했고 그 자리에서 사업 종료를 선언했다. 졸지에 해고된 상담사들은 화성시청과 도교육청, 화성오산교육지원청을 다니며 20191월부터 3월까지 피켓 시위, 천막 농성, 두 차례 오체투지 등을 하며 고용안정을 요구했다. 이들에겐 누구보다 추운 겨울이었다. 김선희 씨가 말한다.

해고된 화성시 청소년상담사들이 단식 4일째 되는 날 수원 화성행궁에서 경기도교육청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2019221) 사진제공_ 공공운수노조 화성청소년상담사분과.


임용고시에 통과한 교사하고 똑같은 대접을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학교 업무니까 저희는 교육청 공무직으로 안정되게 일하고 싶어요. 그런데 인터넷 댓글에선 저희 보고 거저 교사가 되려 한다 하고.”

화성시와 도교육청은 서로 핑퐁 게임만 할 뿐 책임을 회피했다. 결국 김선희, 김화민, 박호진 상담사와 성지현 경기지부장이 단식에 돌입했다. 단식 20일 만인 20193, 단식을 포함한 모든 쟁의행위를 중단하는 조건으로 경기지부, 도교육청, 화성시가 3자 협의를 시작했다. 화성시와 도교육청은 MOU1년 단축해 2020년까지로 하고, 종료 후에는 도교육청 인력풀 등재 여부를 협의하기로 했다. 김선희 씨가 당시 결정을 회상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단식 멈추지 않을 거예요. 3자 협의도 너무 힘들었거든요.”

시의회의 추경 예산 승인을 거쳐 이들이 학교로 복귀한 건 20198. 7개월 동안 임금이 없어 실업급여, 상담 아르바이트 등을 하며 기다렸지만 상담사 대부분이 떠나고 현재 15명만 남았다. 생계도 곤란하지만 투쟁 후에도 여전히 고용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201911월 공감직업환경의학센터가 화성 청소년상담사 15명을 대상으로 직무 스트레스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직무 불안정 항목에서 매우 불안정함으로 일반 직군보다 훨씬 높은 수치가 나왔다.

김화민 씨는 화성청소년상담사분과(노조) 대표로 유일한 남성 상담사로 20178월부터 학교 상담을 시작했다. 작은책(정인열)


그럼에도 이들이 학교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유는 학생들 때문이다. 김화민 씨의 말이다.

취약계층이 많은 한 학교는 아동학대도 많고 아이들도 굉장히 거칠었어요. 이상심리는 경제적인 소득, 학력과 반비례하거든요. 학교 선생님들도 정말 힘들어하는 곳이었는데 그런 곳에서 상담이 빛을 발하는 경험을 했어요.”

학교와 지역사회가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협력하는 지역교육공동체 구축이라는 경기도교육청의 목표 아래 청소년상담사들은 현장에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두 기관이 고용안정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청소년상담사들만 고통스럽게 지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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