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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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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6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회사가 보낸 가정통신문, 그게 호소문이라고?

신재성/ 금속노조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조합원

 

 

저는 20175창진에프티라는 보전업체에 입사를 하였고 201871일 업체가 고용승계되면서 현재 마스타씨스템에서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보전업체는 주로 자동차 자동화 설비 시스템 구축과 유지 보수 등의 업무를 하는 곳입니다. 저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1공장) 도장에서 오버헤드 컨베이어(천장에서 매달린 레일 중 체인을 주행시켜, 운반물을 순환 운반하는 것)와 플로어 대차(하부의 체인을 주행시켜 운반하는 역할) 공정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자동차에는 1, 2, 3차 업체라는 이상한 구분이 지어져 있습니다. 제가 노동하고 있는 이곳도 1차 업체에서 외주업체로 바뀌어 간 케이스이며 상여금, 성과금, 각종 수당 등이 폐지되었고, 기존 관리자 수가 2명에서 8명 정도로 늘어났습니다. 또한 업무는 바로 원청인 현대자동차에서 주는 것이고, 1차 업체 때와 동일한 업무를 하는데 최저임금밖에 없기에 주 평균 65시간을 해 가며 장시간 노동을 할 수밖에 없었고 갈수록 처우가 나빠지는 상황 등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원청의 지시로 이루어지는 업무들, 비정규직이라는, 외주화라는 딱지로 갈수록 안 좋아지는 처우들. 참을 수 없어 201711월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로 문을 두드렸습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순간 현대자동차 보전 정규직들과 보전업체(마스타씨스템, 성진) 관리자들은 긴장을 많이 한 거 같았습니다. 노조 가입만 한 것인지, 근로자지위확인소송(불법파견)도 걸었는지 파악해 나갔으며, 불법파견을 피하기 위하여 현대자동차는 보전업체를 진성 도급화 하기 위해 더욱 더 우리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존에 있던 근무시간 등을 변경했고, 현대자동차 출입 시 출입증만 제시하면 되었는데, 공장 밖 사무실 앞에서 알밤(이중 출입 시스템)이라는 모바일 앱을 깔게 만들어 출퇴근 등을 강제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부당함을 느끼며 아침 일찍부터 현대차 공장 앞에서 출근하는 원·하청 동지들에게 선전전으로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 현대자동차 본관 앞 출퇴근 선전전을 하는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들(2020년 4월 13일). 사진 제공_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사측은 알밤을 안 찍는다는 이유로 경고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공동 투쟁을 하고 있는 성진 조합원들은 정직까지 주며 탄압했습니다. 지노위, 중노위까지 진행된 이중 출입 시스템 문제는 결국 보전 하청 조합원들의 손을 들어 주었습니다. 굴복하지 않고 계속 선전전을 했고 결국 알밤은 철회되었습니다. 보전 하청 조합원 공동 투쟁으로 이루어 낸 첫 성과였고, 뭉치면 강하다라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힘을 얻어 사측에 임금 인상,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지만 여전히 돌아오는 답은 없었습니다.

저희 작업장은 2.5층 높이에 설치되어 있고, 급배기 팬만 존재하여 여름날이면 40도를 웃돌며, 바로 옆에 세척장이 있어 귀마개를 착용해야만 합니다. 급배기 팬조차 없는 공정은 너무 더워서 여름날은 피해서 작업을 하도록 되어 있더라고요. 하지만 실상은 원청이 시키면 해야만 하는 상황이지요. 울산차 현대공장에서 가장 노후된 작업장이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같은 층 문만 열면 현대차 정규직분들이 일하는 공간은 환경도 깨끗하고 에어컨이 나오고 소음 또한 벗어나 있습니다. 불평등하다 생각하여 20192월경 간이 휴게실과 에어컨 설치 등을 원한다고 요구를 했지만 현대차 공장 안에 2층 높이 이상인 곳엔 간이 휴게실을 지을 수 없다는 답변과 환경 및 소음에서 기준치 미달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2층 높이 이상에 정규직 간이 휴게실은 분명 존재하고 있기에 지어 달라는 것이었는데 지을 수 없다니요. 누가 봐도 덥고 시끄럽고 먼지가 많다는 걸 알 텐데, 분명 안전 환경을 받고 개선이 돼야 하는 곳인데. 이것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이점이라는 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의 벽을 느꼈고 체념한 채 일을 하였습니다.

최저임금만을 받으며 장시간 노동을 계속하는 동안 52시간 근무제라는 정부의 시행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장시간 노동을 끊고 드디어 주말이 있는 삶,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와는 달리 주 52시간 시행은 대재앙으로 다가왔습니다. 52시간 시행에 관하여 사측에 문의했습니다. 보전 업무는 근무 형태가 어떻게 되는 것이며 임금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사측의 답은, 정부가 시행하는 것이고 근무시간이 주 52시간으로 줄어드는 것이니 임금이 삭감되는 것이 당연한 거 아니냐며. 웃긴 건, 사측은 기존과 동일한 물량과 기성금을 원청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줄어든 시간에도 노동자는 물량을 똑같이 완수해야 하는 반면, 사측은 기성금을 동일하게 받았으니 이윤을 더 챙기는 것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우리는 임금 보전을 요구하였지만 사측은 임금 삭감은 피할 수가 없다는 답을 내놓았습니다.

52시간 근무제 계도 기간 연장으로 올해까지 노사간 합의로 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공동 투쟁을 일으킬 때가 되었습니다. 마스터씨스템과 성진 보전 하청 조합원들은 52시간 임금 보전 확실하게 보장하라고 선전전을 통하여 투쟁했지만, 사측은 주 52시간을 핑계로 더 큰 탄압을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서 현대차가 조종하고 있다는 것 또한.

사측은 임금 보전 제시안을 내놓지 않은 채 말도 안 되는 사항만을 더 늘어놓았습니다. 주말 근무 의무화 및 성과 연봉제, 출퇴근 시스템 도입. 기가 찼습니다. 이러한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보전 하청 조합원 동지들은 생계도 뒷전으로 미룬 채 각자 호소문을 적으며 지난 46일 공동 전면파업에 나섰습니다. ·석식·출근·퇴근 선전전, 공장 현장 순회 등 가열찬 투쟁을 계속하고 있지만 사측은 묵묵부답입니다. 결국 장기화되는 파업과 진전 없는 교섭을 고용노동부 울산지청에서 중재하겠다고 요청을 해 왔고 429일 노사는 이에 응하였습니다.

▲ 현대자동차 1공장 의장 식당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들(2020년4월22일). 사진 제공_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노동부에 올라가기 전 아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회사에서 우편이 날아왔다고. 뭔가 불안한 느낌이 생겨 내가 확인할 테니 열지 말라고 했고, 이에 다른 동지들의 소식이 전해 들어왔습니다. 바로 사측에서 일괄적으로 직원들에게 파업으로 회사가 손실을 받고 있으며 즉시 중단해야 한다, 장기 파업으로 고용은 더욱 불안하다는 내용의 가정통신문을 보낸 것입니다. 참으로 황당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이따위 내용을 가정에서 본다면 뭐라고 생각할까? 노동부 중재 자리에서 물었습니다. 사측은 직원들이 호소문으로 사람들에게 알렸으니 자기네들도 가정통신문으로 호소문식으로 표현했다고 했습니다. 항상 이따위 식으로 응답하는 사측이 싫었고 생계를 위협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가정 파탄에 불씨를 주는 행위 등이 너무나도 화가 납니다. 하는 일은 똑같은데 시간은 줄이고 노동 강도는 높이고 임금은 삭감하겠다면, 하는 일이 같으면 임금을 보전받아야 한다는 최소한의 주장이 전면파업까지 하게 만들 사항인가요? 현대차는 비용 절감, 불법파견 은폐 외주화도 부족하여 바지 사장들을 내세워 주 52시간을 꼼수로 하청 노동자의 임금을 더 강탈하려고 합니다. 1차 하청2차 하청외주화52시간 임금 삭감으로 노동자를 쥐어짠 돈은 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원청 주머니에? 여전히 곳곳에서 노동자들이 고통받고 있습니다. 노동자 모두 고통받지 않게 우리 모두 단결된 투쟁으로 이겨 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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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지원품, 고맙지만 작은 배려를 해 주면 좋겠다

 

정미영(가명)/ 보험설계 상담

 

보험대리점에서 설계와 상담을 담당하고 있는 나는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가정의 가장이다. 업무 특정상 매달 마지막 주가 되면 몰려드는 설계 건으로 각 보험사의 전산과 사투 아닌 사투를 벌인다. 특히 거절된 심사 건이 발생하면 예민해진 신경을 부여잡고 고객에게 필요한 자료를 설명하고 요구하여 재심사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몸과 마음이 더 지치게 된다. 그래서 어렵게 승인 나면 다행인데 그럼에도 인수 거절 나면 고객에게 좋지 않은 소리까지 듣게 되기 때문에 마음이 무겁고 솔직히 화도 난다.

어느 날, 여러 보험사에서 거절 난 심사 건으로 팀장님과 한창 대화 중일 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민센터다. 우리 가족 앞으로 쌀이 기증되었으니 신분증을 가지고 방문하란다. 너무 바빠서 당장 가기가 어렵다는 말로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짜증이 몰려왔다. 그 짜증은 나와 같은 기초생활수급자를 위한 정책에 대한 아쉬움으로 변해 갔다.

남편과의 사별로 갑자기 한 부모가 된 나는 세 자녀를 키우면서 경제적으로 많은 부분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나라에서 나와 같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선별해서 여러 가지 혜택을 주는 건 너무나 감사할 일이다. 월급에 비해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임대료를 지원해 주거나, 의료비·교육비 등의 지원은 소득이 많지 않은 나에겐 너무나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문화누리카드 같은 것은 작게라도 우리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구입하는 등 다른 사람들과 구분 없이 문화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너무나 잘 사용하고 있다. 또한 정해진 시간 안에 사용하면 일정 기간 후 다시 충전되기에(물론 그 기간 안에 신분증을 가지고 주민센터에 가야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이다.)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지원이 항상 감사한 건 아니다. 나는 회사에 고용된 상황이기에 정해진 업무 시간을 지켜야 월급을 받는다. 그렇기에 마음대로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쌀과 같이 무게가 있고 부피가 큰 지원품은 그다지 반갑지 않다. 나처럼 허리와 팔꿈치가 좋지 않은 사람은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수령할 수 있기에 매번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 또한 수급자나 차상위계층 등은 저렴한 가격에 쌀을 살 수 있고 구입한 쌀은 주민센터 직원이 배달해 주기 때문에 따로 지원된 쌀을 시간 내어 힘들게 가져가고 싶은 마음은 없다. 가끔 크리스마스 같은 때 각 단체(교회와 같은)에서 주는 과일 상자나 복지관에서 주는 라면상자 위에는 불우이웃돕기란 글귀까지 쓰여 있어서 부끄럽고 자존심도 상해 받기를 거부한 적도 있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향해 배가 불렀군하며 비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내가 불우이웃인 것을 타인에게 알리면서까지 지원품을 받아야 하는지는 의문이 든다. 그리고 요즘 쌀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쌀과 라면이 아닌 누구나 평범하게 누리는 문화적인 혜택을 더 받았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여느 가정의 아이들이라면 기본으로 한다는 피아노나 태권도 등을 무료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준다거나, 아이가 배우고 싶은 것 중 하나 정도 선택하여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거나, 지금 이용하고 있는 문화누리카드의 한도액을 올려 주고 이용 기관을 늘려 아이들과 여가 생활을 지금보다는 풍요롭게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주말 외엔 시간 내기가 어렵고 대중교통으로만 이동 가능한 내가 그나마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영화관을 이용한다거나 책을 구입하고, 공연을 관람할 수 있는 여유를 조금이라도 누릴 수 있는 건 문화누리카드가 있어서이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 하는 가정이라면 한 부모가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양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전문 인력을 배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주변에서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데 아이가 아프다는 연락이 오면 제일 난감하다.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 주지 못한 아쉬움과 아픈 아이를 집에 혼자 두고 출근해야만 하는 형편이 속상해서 남몰래 눈물을 훔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가끔 아이들이 지원받고 있는 드림 스타트에서 우리 가정과 같은 상황에 있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가족 여행을 진행하는데, 이 시스템은 초등학생 때만 이용 가능하고 횟수도 일 년에 한 번 정도이며 모든 비용은 시에서 제공한다. 여러 여건으로 아이들과 여행가기가 어려운 나와 아이에게는 너무나 좋은 프로그램이다. 작년에 작은아이와 23일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는데 참여한 아이들이 우리 아이와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아이들이고 함께한 보호자도 같은 상황이다 보니 위축되지 않고 즐겁게 여행할 수 있었다. 이러한 기회를 한 번이 아닌 두세 번으로 늘려 줘서 여느 가정들처럼 여행의 기쁨을 아이와 함께 많이 누리고 싶다.


▲저소득층 양곡 할인 안내 화면. 복지로 홈페이지 갈무리


쌀이나 라면과 같은 지원품을 주는 단체를 비난할 생각은 전혀 없다. 솔직히 준다는데 싫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이러한 지원은 매달 일정 금액을 주고 사 먹는 양곡미를 배달해 줄 때 같이 배달해 주는 작은 배려를 해 주면 어떨까 하는 것이다. 지원품에 배려까지 더해진다면 그것을 받은 나와 같은 사람들이 감사함을 느끼며 좀 더 행복하게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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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작은책 엮음, 작은책 펴냄, 2020)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서영란(가명)/ 서울 글쓰기 모임 회원

 

 

 

네가 지금 세금 받아 처먹고 앉아서 하는 일이 대체 뭐야! ?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동장님이 안 계셔서요. 일단 여기 좀 앉으시고 고정하세요.”

, 됐어! 넌 됐고 동장 나오라 그래! 동장!”

내 일터인 주민센터 민원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속사정은 이렇다. 신분증 없이 서류를 발급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통사정을 하면 본인 확인을 철저히 한 후에 서류를 떼어 준다. 그런데 인감은 얘기가 다르다. 인감이라는 서류 자체가 워낙 재산 문제와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함부로 발급했다가 사고 터져서 구상권 청구(다른 이의 빚을 갚게 된 사람이 그이에게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연대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도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가 들어오면 공무원은 그야말로 인생 조지는 거다. 보험에 들었다 한들 보상 금액이 얼마 안 되니 나머지는 월급에서 까 나가야 한다. 퇴직할 때까지 갚아도 못 갚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도 그렇지만 민원인은 민원인대로 다른 사람이 인감 도용을 해서 사고가 터지면 그거 해결하느라고 생난리가 난다. 있는 사람이야 덜하겠지만 가뜩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돈 몇백, 몇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다.

상황이 이러니 인감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발급한다. 본인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해도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고 남의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위임자 신분증이 필요하다. 이건 뭐 예외고 뭐고 없다. 간혹 가다가 도장만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래저래 해서 안 된다고 안내를 한다. 그러면 알았다고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생짜로 우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기는 공식이 있다. 처음엔 웃으면서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슬슬 언성을 높인다. 그것도 안 되면 회유를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고 내가 어떤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해 달라. 참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지금 지가 누구인지가 왜 나오고 지가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또 왜 갖다 붙여.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이제는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다.

! 민원인 편의를 봐주는 게 공무원이지 네가 거기 앉아 있다고 공무원인 줄 알아?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는 주제에! 여기 책임자 누구야! !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도저히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럴까 싶다. 속이 터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알 것도 같다. 소리 지르고 높은 사람을 찾고 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인 거다. 처음엔 안 된다고 해도 누구 이름 대면 다 되더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통하니까 그러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앞뒤 가려서 융통성 있게 해도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엄격히 지켜야 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 이런 사회적 합의가 없으니 저 지랄 아닌가 말이다. 올바른 사회라면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 그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각자 손해를 좀 볼지라도 말이다.

머릿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고 있는데 이놈의 인간이 아주 끝까지 간다. 때마침 등장하신 동장님한테 가서 직원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아주 큰소리다. 그러면서 또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으이구… ….

동장님이 부르신다. 인감을 다른 사람이 발급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신분증하고 도장 지참하고 위임장 쓰시면 발급 가능하다고 수십 번도 더한 안내를 또다시 한다.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냐고 하신다. 당연히 안 되지. 될 거 같았으면 이 난리 피우기 전에 얼른 발급해 줘 버리지 뭐하러 이러고 있었을까. 관련 법을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얼른 가지고 갔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동장님도 나랑 한통속이라 생각했는지, 길길이 날뛰던 민원인은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법이 꼭 그렇게 하라고 있는 거냐고 한다. 참 나 무슨 소리냐. 법이 그럼 지키라고 있는 거지 어기라고 있는 것인감? 물론 거지 같은 법도 많지만 인감제도는 인감 관련 사기가 하도 많아서 선량한 시민들 재산 지켜 주려고 점점 더 보호되고 강화되는 쪽으로 개정되고 있다. 사실 인감 제도가 없어져도 좋으련만 없어질 때까지는 인감 사고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대체 당신은 어찌하여 이러시는 게요. 이보시오. 제발 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오!

결국 그 민원인은 화를 내 봤자 본인 목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끝까지 협박하며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싸잡아 성토한 후 쿵쾅쿵쾅거리면서 주민센터를 떠났다.

워메, 정신없는 거. 맞아 본 적도 없는 폭격을 맞은 거 같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저런 사람들은 평소 복식 호흡에 발성 연습을 하나 보다. 무슨 연극배우 같다. 귀가 왕왕 울린다. 둘레에선 그래도 위로랍시고 저 정도 민원은 아무것도 아니야. 몇 날 며칠을 찾아오는 민원인도 있고 앞으로 공무원 생활하다 보면 더 심한 사람도 많이 만나니까 잊어버려 하고 한 술 더 뜬다. 저 정도는 애교라 이거지. 으이구, 내 팔자야. 아무래도 도를 닦든지 해야 쓰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민원인들은 하나둘 찾아오고 주민센터는 다시 북적댄다.

우라질 놈의 인감. 없어진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냐고.’

괜히 애꿎은 인감한테 구시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하려고 하는데 뉴스에서 공무원들이 저지른 비리 소식이 흘러나온다. 자기네끼리 몇 년 간 뇌물을 얼마를 받아먹었고 그 대가로 누구를 봐주고 관련 사업은 부실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줄줄 푸념과 욕지거리가 새어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인간들은 뭐하는 인간들이냐. 확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돼. 삼대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니깐. 나라가 어찌 되려고 공무원들이 저 모냥인지. 아주 내가 낯 뜨거워서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하고 다니지를 못하겠다. 몽땅 감옥에 처넣고 재산 환수를 해야 돼. 아니지, 먹은 돈의 세 배를 갚게 해야 된다니깐. 근데 뭐가 어쩌고저째? 고작 구속 수사? 씨발, 대통령 나오라 그래!”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 본문 , 작은책 2011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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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세상 보기

책 읽고 딴 생각_ 혁명 노트(김규항, 알마, 2020)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출판 편집자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확연하게 구분하게 해 주는 단절적인 변화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을 꼽는다면, 그건 아마도 한국전쟁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전 삶의 모습과 전쟁을 겪고 난 뒤 삶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졌고, 지금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의 뿌리를 더듬어 가자면 어김없이 전쟁 체험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이제 막 사회에 나서려는 젊은이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오면서 이런 상식과 조금은 다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1997년의 구제금융 사태와 그로 인해 촉발된 사회 재편은 어쩌면 한국전쟁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낸 역사적 계기가 아닐까 싶달까. 그 실체가 뭔지는 아리송한 채로도,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히 감지됐던 것이다. 하나는 대체적인 경향성에서 그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 이전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성세대는 그들대로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까맣게 잊었으며 이미 중년에 접어든 후속 세대는 또 그들대로 그것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밀레니엄이 바뀌던 그때 한국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그 변화의 성격은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고, 단순한 개념 틀 하나로 손쉽게 환원시킬 수도 없다. 다만 그 모든 국면을 매개할 수 있는, 그 모든 계기의 가장 깊은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을 근본적인동인이 있다면 그 실체가 무엇일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명해 줄 무슨 만능열쇠(따위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를 찾으려는 건 아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을 수박 겉 핥듯 좇아 봤자 헬조선이라는 비명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개탄과 냉소 말고는 남는 것이 없을 게다. 다기한 현상 이면을 꿰뚫어 통찰하는 데 나침반이 돼 줄 만한 화두가 늘 목말랐다. 그리고 김규항의 신작 혁명 노트에서 유력한 실마리 하나를 얻는다. 지식인이란 바로 이런 사회적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렷다. 저자는 지난 20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물신주의의 전면화로 설명한다. 이렇게 시야가 환하게 열리는 느낌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혁명 노트(김규항알마, 2020)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지만 전근대적 농촌 공동체 습속이 많이 남아 있는, 삶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아직 상품이 아닌 사회자본주의 사회지만 사회주의 요소들이 도입되어 있는, 생활의 기본 요소들이 상품이 아니거나 상품의 속성이 덜한 사민주의 복지사회에서 물신성이 억지된다면서, 전근대 농촌 공동체에서 사람들에게 인심이나 정이 있었던 게 그들이 경제적 안정을 누렸기 때문이 아니듯 이런 사회들에서 사람들이 좀 더 인간적이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듯 경제적 안정때문이 아니라 물신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혹은 모든 아이가 대학 입시라는 한 경로에 줄 세워져 인생의 등급이 매겨지 교육 현실은 한국 민주화가 결국 물신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들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물신성을 극복한다는 뜻이고, 그런 통찰은 어느샌가 막연한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 혁명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전복해 낸다. 우리가 우리네 일상 구석구석을 파고든 데다가 심지어 내면까지 잠식해 버린 물신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혁명은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극복의 목적은 정의롭고 인간적인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경제 차원을 벗어나 더 고양된 삶을 구현하는 데 있다.” 거칠게 빗대자면,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인간다움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결코 혁명이 아니며 실은 혁명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대의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건설만이 아니라 실은 이행이기도 하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기 때문이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렇게 투쟁하는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데는,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자각과 노예가 존재하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성찰이라는 두 경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해방의 두 경로는 투쟁으로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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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_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9, 정문 닫을 시간이야.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 눈에 보이는 아이 놔두고 문 닫는 게 매정하다 싶어 기다렸지.

문 닫는다.”

고개 들어 나를 잠깐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느릿느릿.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며 지각인 거 모르냐. 얼른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오는 걸 꿀꺽 삼켰어. 잔소리한다고 지각 안 하면 맨날 잔소리하게.

아침은 먹었니?”

아뇨.”

들어가면 우유라도 미리 먹어. 담임선생님께 아침 못 먹었다고 말씀드리고.”

싫어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올라가. 넘어질라.”

고개 숙인 채 그 걸음걸이 그대로 걸으며 하는 말에는 귀찮음과 어두움과 건조함이 느껴져. 아침맞이 때마다 아무리 아는 척해도 눈길 주지 않고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고개 숙이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등교하는 녀석.

지각하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말을 안 하도록 만들어 준 아이가 있어. 아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할 때 만난 민선이. 민선이는 거의 날마다 지각을 했지. 수업 시작하는 9시에 오면 아주 훌륭한 거고, 1교시 중간이나 2교시, 가끔은 3, 4교시에 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결석은 안 해. 우울한 얼굴에 말수는 적고 아이들과 즐겁고 맛있게 어울리지도 않아.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많고.


녀석이 늦을 때마다 그저 누구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했어. 늦었구나.”, 조금 일찍 다녀라.”, 날마다 늦으면 어떻게 하니? 자리에 앉아서 얼른 수업 준비해.”,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오도록 해 봐.” 내 표정과 말투가 좋을 리 없지. 가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민선이는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늦게 자서 그런다는 말을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 마음을 안 연 거야.

그렇게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하순. 2교시 수업을 하다 우연히 창문 밖을 보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민선이가 보여. 2학년 여동생 손을 잡고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꽤 오래.

그 순간 나는 민선이가 되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 멀리 교실에서는 수업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조용하고 차분하고 엄숙한 학교. 나와 동생만 뚝 떨어져 있어. 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둘과는 달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내게 관심도 마음도 없어. 나는 날마다 늦는 아이고 친구도 없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아이. 그래도 나는 교실에 가야 해. 따로 갈 데가 없고 집에 있는 건 더 싫고 무섭기까지 해.

언니 손을 앞뒤로 흔들며 까부는 동생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별 감정 없이 몇 마디 던지는 민선이. 축 처지고 지치고 무거운 저 발걸음에서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픔이고 슬픔이야. 집에는 어떤 사정이 있기에,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 어떤 분위기와 흐름이 있기에 저렇게 어두운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오게 될까. 지각할 때마다 저 지친 발걸음으로 등교했을 텐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선생을 하지? 내가 사람을 본 거야, 아니면 껍데기만 보고 매달려 사는 거야. 담임으로서 민선이의 저 삶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이나 욱여넣고 규칙 잘 지키는 사람 만들겠다고 잔소리나 하다니.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맞춰 남녀노소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습관적으로 할 수 있고 하는 잔소리나 하고.

그 뒤로 민선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민선이가 아침저녁으로 동생과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집안의 흐름과 사는 형편은 그냥 짐작만 했고. 민선이에게 말했어. 늦어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당당하게 들어와라.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는 큰 공부 하는 거다. 대신 수업 흐름만은 따라가자. 늦어서 못 한 건 친구들이나 내게 물어서 해 가자. 밥을 못 먹고 올 때는 미리 우유를 먹도록 하고.

난 아이들에게 말했지. 부모님이 일찍 일하러 가셔서 민선이가 아침밥 차려 먹고 동생까지 챙겨서 온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늦는 게 당연하다. 밥 먹고 동생 챙겨 학교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니 민선이가 늦는 거에 대해서 너무 마음들 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으로 늦는 사람은 말해 다오.

그러고는 민선이가 당당하게 늦도록 했어. 이상한 아이, 늦는 아이, 게으른 아이라는 어두움을 걷어 내고, 대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손이 야무진 아이 이미지를 만들어 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도록 자리 배치부터 모둠 구성, 현장 학습과 반에서의 역할 등도 신경 쓰고. 늦었다고 잔소리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늦게 오면 수업 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고 했고. 그런데 지각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었어. 나중에는 840분 전에 오기 시작했고 6학년 올라갈 무렵인 2월 어느 날 아침엔 내게 와서 말하기도 했어.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왔어요.”

그렇게 6학년으로 올려 보냈고 그해 스승의 날에 민선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어.

선생님, 오학년 때 지각해도 야단치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각하거나 공부 못 하는 게 삶의 목표인 아이는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사는 나를 깨우쳐 준 민선이! 난 지금도 늦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 해. 하더라도 아이에게 맞게 하려 노력하지. 민선이가 지금은 서른 살 되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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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_ 김용심, 사진_ 정인열

 

세상이 온통 코로나 이야기다. 치명적인 전염력을 지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신천지라는 희대의 종교 단체 활약으로 확진자가 수천 명을 넘어서며 나라를 심각상태로 만들었다. 몇백 원 하던 마스크는 몇십 배가 뛰었고 거리는 온통 마스크 쓴 사람들뿐이다.

옛날에도 전염병이 돌면 이렇게 난리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갖가지 전염병, 역병, 여역(癘疫, 전염성 열병)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5대 임금 문종은 나날이 번지는 전염병을 걱정하며 친히 악병을 구료하는 글을 써서 내리는데, 그 글이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병의 초기에는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타인에게 접촉만 하면 곧 전염이 확대되어 마치 불이 땔감을 얻은 것처럼 한없이 연소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병에 걸린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인적이 끊긴 섬에 몰아넣고 의복, 양곡, 약품들을 넉넉히 주어 타인에게 더 번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문종실록195)

그 뒤에 붙인 다만 (병자들을) 빠짐없이 찾아내기란 실로 어려워서, 필연코 다 찾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재미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을 숨기는 자들은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번 달은 4월인 만큼 4·3항쟁 책을 들고 제주도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항공권 예매를 하려던 날, 제주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절로 손이 멈칫거렸다. 갈까 말까 주저하다 대신 떠올린 섬이 강화 교동도였다.

강화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교동도는 오랫동안 왕족의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섬이라는 이점이 있어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이다. 멀게는 고려의 희종, 강종, 우왕이, 조선 시대에는 안평대군, 영창대군, 연산군 같은 이들이 이 섬으로 유배되어 거의 이 섬에서 죽었다.

▲ 연산군 유배지. ⓒ작은책(정인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연산군과 전염병 이야기가 흥미롭다. 흉년과 역병이 한창이던 때, 연산군이 낙정미를 왕실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낙정미란 도정 과정에서 누락된 쌀을 뜻한다. 이에 구휼미로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는 말에 간관들이 들고일어나자 연산군은 니들은 내 신하 아니냐?”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살피기를 청한다하는데, 전염병은 본디 수양하여 그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여 덕을 닦아 천재지변을 없애는 것은 다 옛날 성군들이나 했던 일이고··· 어진 임금이었던 요제와 탕왕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보고 어쩌라고?”(연산군일기9215)

그리고 열흘 뒤에는 아예 알이 굵은 밭벼쌀을 100석이나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연산군이 마지막에 머문 곳이 바로 교동도다.

예전에는 배로 가야 했던 교동도는 2014년 바다와 육지를 잇는 연륙교가 생기면서 차로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리를 지나는데 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뭐가 이리 예뻐. 드넓은 바다와 눈부신 햇살, 간드러지게 뻗어 나간 해안선이 그림처럼 눈에 박힌다.

▲ 교동도 봉소리 앞 바다. ⓒ작은책(정인열)

교동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동 제비집이었다. 진짜 제비집은 아니고 교동도 안내 센터를 일컫는 말인데, 문이 꽁꽁 닫혀 있었다. 예방 차원으로 일시 폐쇄한 것이다. 코로나의 여파는 이 작은 섬에도 여지없이 찾아와 있었다.

제비집 옆의 대룡시장을 구경한 뒤, 가까운 고구리 조선 시대 한증막을 가 보았다. 돌과 황토를 이용해 둥글게 쌓은 한증막은 치병과 탕욕을 위한 시설로, 70년대 초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약도, 치료도 받기 힘든 백성들은 정 아프면 이런 한증막에 와 뜨거운 열로 고달픈 몸을 달래지 않았을까.

▲ 교동도 고구리에 있는 조선시대 한증막. 돌과 황토를 쌓아 만들었다. ⓒ작은책(정인열)

중종 때에는 전염성 열병인 여역이 유행했는데, 중종 21년의 기록을 읽다 보면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보는 기분이다. 각 도의 관찰사들이 연일 임금에게 도의 상황을 보고한다.

도내에서 여역으로 죽은 사람이 460여 명입니다.”(충청도)

도내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총 560명입니다.”(전라도)

도내에 유행병으로 죽은 사람이 삼척 41, 양양 58, 간성 9, 고성 18명입니다.”(강원도)

그리고 뜨거운 여름 막바지에 반가운 소식이 올라온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그쳤다.”(중종실록2173)

코로나도 날씨가 더워지면 그렇게 그쳤으면 좋겠다. 새삼 바라면서 한증막을 떠나 교동읍성을 향했다. 한때는 번창했을 읍성은 지금은 남문 하나만 남아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가자 흔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니 밭둑 사이로 두 개의 돌기둥이 보인다. 이제는 허물어져 사라진 옛 교동 관아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연산군이 한때 머물렀다는, 볼품없는 연산군 적거지가 있었다.

▲ 교동읍성 남문. 오래전 폭풍우로 무너진 것을 2017년에 새로 세웠다. ⓒ작은책(정인열)

▲ 교동 관아 부지에 남아 있는 돌기둥. 다 무너지고 기둥만 남았다. ⓒ작은책(정인열)

▲ 연산군이 머물렀다는 적거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작은책(정인열)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병에 걸린다. 담당자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시지 못할뿐더러, 눈도 뜨지 못합니다하고 보고를 올리는데, 바로 그 이튿날인 118, 연산군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역병 걸린 백성의 구휼미를 빼돌린 죗값을 그렇게 받은 것일까.

연산과 달리 성군 세종은 역병이 돌자 먼저 나선다.

임금께서 전염병 걸린 자를 구호하지 못하고, 혹 생명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거리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때 소격전(昭格殿)의 종인 눈먼 여자 복덕이 아이를 안은 채 식량이 끊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놀라 즉시 소격전의 책임자를 추국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을 한 가마니씩 주었다.”(세종실록14423)

소격전은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 관청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은근히 눈치를 보던 곳. 거기에 소속된 눈먼 여종이라니, 복덕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희한하게도 병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찾아오는 듯하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고전 , , 에서 유럽인이 토착 원주민을 몰아내고 신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병균을 들었다.

인디언이 죽은 주된 이유는 구세계의 병원균이었다. ···만약 유럽이 다른 여러 대륙에 이 사악한 선물(전염병균)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병균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며 일찍부터 면역력을 키웠던 유럽인과 달리, 청정한 지역에서 자유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그 지독한 균을 이겨 내지 못했다. 유럽의 병원균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를 몰살시켰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 예전과 같은 집단 떼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병이 돌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언제나 힘없는 약자이다.

연산군 적거지 너머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마을을 지키듯 서 있는 나무는 우아하고도 웅장하다. 그 수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된다.

▲ 교동 읍성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작은책(정인열)

소격전의 노비 복덕이 생각났다. 먹을거리도, 약도, 한증막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을 눈먼 복덕은 더듬더듬 이런 수호목을 찾아 빌지 않았을까. 굶지 않기를, 병이 낫기를, 제발 아기가 건강하기를. 그 소원을 하늘과 별이 들었는지 인자한 임금 세종이 복덕을 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비단 전염병 걸린 사람뿐만 아니라, 유리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그들 또한 구하겠다는 의지. 정말이지 세종답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 또한 확진된 병자들만이 아니다. 자가격리된 가족들도, 전전긍긍하는 이웃들도, 무너진 경제에 우는 소시민과 자영업자들까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전염병은 언젠가는 잡힌다. 하지만 병이 지나간 뒤에 피폐해진 백성의 삶은 또 다른 얘기다. 그것마저 보듬는 것이 아마도 통치의 몫이리라. 어려운 상황에서 애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실록의 한 부분을 전한다. 백성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처럼 하라.”

불은 꺼지고 삶은 여전히 계속되리니, 모두 힘을 내자!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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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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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1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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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누구인가

이이화/ 역사학자

 

 

 

올해 광복절 66주년을 맞이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새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한국전쟁 피해자 유족,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자들이 이 방송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방송공사 앞에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또는 정부 수립의 첫째 공로자로 추앙하면서, 독재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그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정 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혁명을 부정하면서 공영방송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의도가 어디에 있나?

그동안 이승만의 평가는 거의 부정적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일부 세력은 그를 옹호하면서 그를 국부(國父)로 받드는 의식을 보여 주었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주장도 펴 왔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승만의 행적을 간단하게 더듬어 보기로 하자. 이승만의 생애는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첫 시기는 청년 시절이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 사는 몰락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 후손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울로 와서 전주 이씨 문중을 기웃거리면서 낙백의 생활을 했고 이승만도 그런 연줄로 전주 이씨들이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이승만은 20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와 성경 공부를 하고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이상재, 서재필 등이 벌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해 열렬히 자주 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황제 폐위를 주동하는 세력과 결합한 탓으로 체포되어 종신형 또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 마침내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둘째 시기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외교운동을 벌이던 시절이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를 그는 별처럼 평생 달고 다녔다. 그 뒤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열렬한 미국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교 전문가라는 것, 영어를 잘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 언변이 좋고 미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따위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재정 압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자 안전지대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구미위원부 대표를 맡았다.

마지막으로는 해방이 된 뒤 고국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벌인 정치 활동기이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끝내 이를 실현시키고 반공정부를 수립한 뒤 불법으로 3선 개헌을 단행하고 이어 315부정선거를 하다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재자로 군림했고 반공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공산당 박멸을 외치고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친일파를 등장시켜 무수히 독립지사를 탄압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 나는 역사학자로서 위에서 밝힌 이승만의 삶과 행동을 평가해 보기로 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한학을 배운 소년이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고 급진적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일 것이다. 그는 충군(忠君)이라는 왕조 의식에서 벗어나 서구의 입헌군주제 또는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에 눈을 떴다. 그리해 청나라에 맞서 자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행동 의식을 보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미국에서 유럽 사조와 제도를 배우면서 장년 시절을 보내고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단적 인 이론을 냈다. 일본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한국을 미국의 위임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 무력 투쟁 노선을 비판하면서 박용만 등이 벌인 군사 양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독립 자금을 받으면서 외교관이란 이름으로 호텔에 거처하는 따위 호화 생활을 했으며, 전주 이씨 왕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하여 품위를 유지하려는 천박한 행동을 보였다. 상하이를 떠난 뒤 위험 지역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늘 손가락이 마비된 것은 일제의 고문 탓이라고 말했는데 한 번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신채호는 이승만을 두고 이완용이나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비난했는데 정작 신채호는 일제에 잡혀 감옥에서 옥사했던 것이다. 또 국제연합이 조직될 무렵 그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거부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그쪽의 협조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그의 행동 노선은 타협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반공을 표방한 단독 정부 수립에만 매달렸다. 그리해 미국의 환심을 사서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친일파 출신의 경찰 군인 판검사를 끌어들여 정권의 하수인으로 부려먹었다. 그런 과정에서 온갖 불법 탈법의 독재 수법을 쓰면서 반대파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따위로 민주주의 절차를 왜곡시켰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한강을 폭파하고 남쪽으로 몰래 도망치면서 군사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 자주 국가의 면모를 잃게 했으며, 휴전을 반대하면서 공허한 북진 통일만을 외쳐 냉전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 그리해 남북 관계는 극단적 대결로 치달았다.

419이후 이승만은 학생들이 반대하면…… 또는 국민이 반대하면……이라는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마치 민주주의 왜곡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듯이 말하고 하야했다. 그러고 나서 밤을 틈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다면 이화장에서 반성의 나날을 보내면서 참회의 회고록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의 인간성은 허위와 사술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음모꾼의 모습을 보였다. 또 그의 통치술은 철저하게 독선적이고 전제적인 수법을 구사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해 정부 수립 초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나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의 행적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충분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지만 그를 반공의 화신이란 이름으로 국부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공로자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인물로 앞으로 기억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승만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의도는 새 정권의 창출을 앞두고 반통일적 보수 세력이나 친일파 잔존 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지향의 민주 세력을 꺾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런 의도를 냉철하게 간파하면서 이승만 띄우기의 음모를 직시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아직도 이승만의 실체를 잘 몰라 휩쓸리기 쉬울 것이다. 바른 역사 인식은 냉철한 비판 의식이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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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094월호

쉬엄쉬엄 가요

추억따라 역사따라

 

짱돌의 역사

박준성/ 작은책 편집위원, 역사학자

 

 

 

나뭇가지에 잎눈 꽃눈이 터질 듯 커졌다. 빨리 자란 냉이는 벌써 하얀 꽃이 피었다. 둘째 아이 학교 가는 길가 밭 군데군데 퇴비 푸대가 늘어져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농사를 좀 거들어 보았다고 봄이 되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학부모들이 학교 학습장 귀퉁이를 얻어 텃밭 농사를 짓는 데 끼었다. 산자락을 일군 땅이라 잔돌이 많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산 쪽으로 집어 던져 보려고 서너 개를 집어 들었다. ‘도룡농이나 겨울잠에서 깨어 나오는 개구리 맞을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새싹이 맞을까 미안해서 밭둑으로 옮겼다.

지금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 시골 우리 집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있다. 뒷문을 열면 바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집 둘레 밭은 오랫 동안 농사를 지어온 땅이라고는 하지만 때마다 잔돌을 주어 내도 계속 나왔다. 아버지는 그 돌을 가지고 밭 건너편 산으로 멀리 던지기 시합을 시켰다. 돌팔매질 놀이와 돌 치우는 일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잔돌 던지며 배웠던 실력이 체력장 멀리 던지기를 할 때 제대로 드러났다.

체력장을 끝으로 돌팔매질을 써 먹을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시대가 짱돌을 들게 만들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은 19876월항쟁 이후 어떤 모임에서든 나를 소개할 때마다 퇴계로 거리에서 짱돌 들고 앞뒤로 오가던 내 모습을 이야기하셨다. 열심히 싸웠던 선수들 보기가 민망스러워 낯이 뜨거웠다.

1986년인가 1985년이었던가. 규장각에서 조교를 하고 있을 때다. 퇴근을 하는데 교문 쪽에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다. 앞에서 조그만 여학생 둘이 작은 손으로 보도블록을 열심히 깨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안쓰러웠다. 마침 농구선수처럼 키가 장대 같은 남학생들이 옆으로 지나가다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눈앞에 불이 확 붙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보다 그 남학생들이 더 미웠다. 땅바닥에다 패대기를 치고 싶었다. 국립대학 조교는 공무원 신분이라 화는 나도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정신없이 보도블록을 깨었다. 손이 얼얼해서 며칠 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서 앞으로 나르면 용감한 선수들이 앞에서 던졌다. 창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최루탄을 쏘아 대도 30미터 앞에까지 다가가 물러서지 않고 던지는 선수들이 있었지요 했다. 마침 <작은책>법보다 사람을 연재하던 박훈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30미터가 아니고 5미터요!”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짱돌을 던지다 보면 우리 편 뒤통수 맞히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싸우던 선수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정쩡하게라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여야 힘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6월항쟁 때 한편에서 지식인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이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전망을 모색하여 알리는 것이 우리 몫이니 어쩌고 할 때 거리에 나가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맞섰다. 목소리는 컸어도 뜻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될수록 현장 가까이 가서 구경해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촛불항쟁 때 밤을 새고 명박산성에 깃발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명박산성 가까이 있던 시위대 속에서 뒤를 보면서 놀러 왔나. 놀려면 놀이터에 가서 놀든지, 씨발 하는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앞쪽으로 다가오지 않고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영상물을 보고, 모여 앉아 토론하는 무리가 못마땅했나 보다. 앞쪽에 있다고 해도 깃발 들고 나서는 사람 있고, 전경차에 밧줄 걸고 당기는 사람 있고, 나처럼 사진 찍는다고 밧줄 한 번 당기지 않은 사람도 있고, 밧줄 당기는 사람 등 밀어 주는 사람도 있고, 목소리로 응원하는 사람도 있듯이, 뒤쪽에서 갖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참가하지 않는다면 앞에 있다고 힘이 날까? 강의도 버릇이 된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걸 참았다.

시간이 지나 6월항쟁 때 이이화 선생님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말을 짐작할 수 있겠다. 22년 전 일이니까 내가 30대 초반, 선생님이 50대 초반이었다. 이이화 선생님은 짱돌은 들지는 않았어도 빠짐없이 6월항쟁 거리에 나섰고, 깨진 보도블록 조각을 시위대 쪽으로 밀어 넣어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하면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 같으니까 나를 만났다는 말로 대신했던 것 아닐까. 제 말이 맞지 않으냐고 여쭤 보고 싶다가도 그냥 지나간다. 그런 것까지 확인하다 보면 세상사 재미가 떨어지지 않겠나.

6월항쟁 때는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만들어 썼고, 촛불항쟁 때는 짱돌 대신 촛불을 들었다면, 1960‘4월혁명시위대가 들었던 짱돌은 진짜 돌이었다. 4월혁명 때 경무대로 향하는 보도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짱돌에 총으로 대응하였다. 경무대 쪽에서만 21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4월혁명의 직접 계기가 된 315부정 선거 반대 시위를 공산당의 배후 조종에 의한 좌익 폭동으로 몰아갔고, 심지어는 시위대가 던진 돌을 북괴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기발한보고서를 작성했다.

짱돌은 오랫동안 민중의 무기였고 놀잇감이었다. 마을 어귀나 고개 마루에 있는 성황당가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그런 곳은 초기 부족국가 시대나 통일신라 하대 호족이 곳곳에서 세력을 떨칠 때 방어하기 요긴한 길목이었다. 그냥 걷고 넘기도 힘든데 돌 가져다 쌓아 두라고 하면 모두들 입이 댓 발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돌을 던지며 치성을 드리면 부귀다남하고 무병장수한다니까 오갈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던진 돌들이 쌓여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렇게 쌓은 돌멩이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무기가 되었다. 사람 손때를 타야 던지기도 좋다.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에 돌팔매질하는 재주가 귀신 같은 석전군(石戰軍) 배돌석이가 나온다. 돌멩이로 호랑이를 때려잡기 전 배돌석이가 며칠이나 돌멩이를 던져 가며 길을 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배돌석이는 소설 쓰느라 꾸며 낸 인물만은 아니었다. 돌팔매질 잘하는 고수들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석전놀이를 할 때 영웅이었다. ‘임진왜란때는 그런 평민들로 구성된 짱돌부대가 있었고, 1894년 농민전쟁 때도 돌팔매질 잘하는 농민들을 따로 모아 만든 부대가 있었다.

짱돌에 담긴 역사와 전통은 오래되었고 책으로 써도 될 만큼 푸짐하다. 지배층이 칼과 총으로 가로막아 온 역사보다는 민중이 짱돌로 만들어 온 길이 제대로 된 역사의 길이었다. 그 길을 일이관지하며 걷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비록 역사의 장면마다 이름 석 자 뚜렷하게 남기지 못했으나 제 길을 버리지 않고 걸어온 분들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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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2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습니다

김훈규 / 거창 농부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다

몇 년을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할매 수십 년 농민 데모판을 따라나섰던 할매다

여성 농민들 행사나 데모하러 가도 착실히 참석했던 할매다

농민회 하는 자식 도와주는 거는 이것밖에 없다며 자식보다 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닌 할매다

자식이 데모 못 가면 자식 대신 해서라도 참석하신 할매다

예비군 훈련 대신 참석했다는 노모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어도 자식 대신 데모하러 가는 할매는 처음 봤다

그 할매가 북상댁 할매다

 

한칠레 FTA 싸울 때 1년에 서울을 100번도 더 오르락거릴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단식 농성 제일 많을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농민회 제일 살판나게 잘 돌아갈 때 제일 신명나게 싸울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북상댁 할매는 그럴 때마다 회원들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많이 도와주소. 우리 아들.

단디 하소. 단디 하소. 자식 같은 농민회 회원들아, 단디 하소.”

야무치게도 당부를 하셨다

회원도 간부도 아닌 할매는 세상 돌아가는 처지를 더 빤히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 포기하고 자꾸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북상댁 할매 앓아눕고 나서 그 농민회장도 바깥출입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누워 계시려니 했는데

어제 세상을 버렸다 연락이 왔다

 

문상객도 파하고 상주도 한잔 술에 노곤한 야심한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 총각 때부터 자식 도와주는 짓이라고 데모하는 데 다 따라나서 준 우리 엄마. 도와주는 것보단 자식 걱정이 앞서 내보다 데모 더 많이 다닌 우리 엄마. 한미 FTA 싸움도 내보다 더 할 말이 많았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는 없소.”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옛날 농민회장이 지금 농민회장 앞에서 반술 취한 넋두리를 한다

지금 농민회장은 옛날 농민회장 앞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버스 타고 지독히도 서울을 오르락거리던 할매 할배들이

문디 같은 세상!”

외마디 부르짖고는 그냥… 자… 세상을 버린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농사일이 없어서

꿈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냥 방 안에서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만 켜고 자다가

세상을 버리는 할배 할매들이 너무 많다

기껏해야 대통령하고 비슷한 나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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