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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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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3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연대의 힘을 뼈저리게 느꼈어요

이순예/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엘지트윈타워분회 소속 청소노동자

 

저는 청소일을 늦게 시작했어요. 다른 일은 안 하다가 오십이 넘어 엘지트윈타워에서 처음으로 청소일을 시작했으니까요. 사십이 넘은 나이에 늦둥이를 낳아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야간에 일을 시작했어요. 낮에는 아이를 봐야 하기에 주간에 하는 일은 좀 힘들었어요. 그렇게 시작한 청소일이 올해로 13년이 되었어요.

제가 하는 주된 업무는 사무실 카펫 바닥의 먼지를 진공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일이었어요. 2층에서 20층까지 매일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했어요. 쉬는 시간은 중간에 2시간 30분 있었고요. 다 힘들지만 특히 청소기가 상당히 무거웠어요. 사무실 전체를 해야 하기에 전깃줄은 30미터가 넘고요, 한 층을 청소하고 나면 전깃줄을 접는 일을 스무 번 반복해야 했기에 일이 끝나면 팔에 마비가 오고, 겨드랑이에 멍울이 생길 정도였어요. 아침에 일 마치고 집에 가면 아이 밥을 못 해 줄 정도로 힘든 일이었어요. 청소기로 직원들 책상 아래 공간 사이사이까지 청소를 해야 했기에, 고개를 숙이는 동작을 반복해서 목이 아파 병원을 많이 갔어요. 병원에 가면 의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고 계속하면 큰 문제가 생긴다고도 했어요.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먹고살아야 해서 그만두지 못하고 십 년이 넘도록 했어요. 이번에 농성하면서 길벗한의사회에서 한의 진료 나오신 한의사 선생님이 침이 안 들어갈 정도라고 걱정했을 정도였어요.

엘지트윈타워 로비에서 선전전하는 이순예 씨. 사진 제공_ 엘지트윈타워분회

또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한 시간씩 더 일찍 나와서 추가로 회장실 청소를 했어요. 이걸 대기라고 부르는데, 1시간 더 벌기 위해 실제로 1시간 30분 이상 일찍 나왔어요. 회장실 청소 시작은 1분이라도 늦으면 안 되었거든요. 대기를 하면 저녁을 못 먹고 나오기 때문에 식대를 4000원씩 줬는데, 3년 전부터는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식대도 주지 않았어요. 소장, 감독에게 이야기했지만 아무런 해결책도 없었고, 나 몰라라 했어요. 그래서 간식을 싸 와서 먹었죠. 싸 온 간식을 쉬는 시간인 밤 12시에 대기실에서 먹으려고 했는데, 스무 살이나 어린 젊은 여성 감독은 본인이 자는 데 방해된다며 못 먹게 했어요.

이런 갑질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감독은 수시로 1~2만 원씩 거출하여 과일이나 간식을 사서 전체 노동자들이 나눠 먹고 남은 돈은 본인이 챙겼어요. 그러던 중 2019년 7월에는 야간 노동자 24명에게 2만 원씩 걷어 총 48만 원을 저에게 맡겼어요. 그 돈으로 매일같이 저녁 출근길에 간식을 사 와서 씻고 깎아서 24명에게 나눠 주라고 했어요. 그렇게 한 달 보름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수박같이 무거운 과일을 사 오라고 해서 남편과 아들이 차로 실어 주기도 했어요. 그러다 감독이 간식비를 달라고 하여 주었더니 그 돈은 본인이 챙겨 버리더군요. 너무 힘들고 비참해서 감독에게 대들고 항의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재계약이 안 될까 봐 참고 견뎠어요. 막내가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8년 정도 조장을 했는데, 전체가 모인 출근 미팅 때 갑자기 조장 수당 5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어요. 저는 영문도 모른 채 지금 돈이 없으니 내일 주겠다고 했으나, 당장 내놓으라고 윽박지르기에 동료들에게 빌려서 줬어요. 아무리 감독이지만 동료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이런 수모를 겪으니 너무 비참했어요. 용역,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관리자들의 갑질이 있어도 고용불안 때문에,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부당한 처우를 참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그래서 2019년 12월 야간조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했어요. 감독의 갑질과 타 건물로 전환 배치를 한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실제로 트윈타워 동관은 2020년부터 다른 업체로 용역 계약이 되어 동관 노동자들 중 7명은 엘지 다른 건물로 보내지기도 했어요. 이들은 일 년도 못 버티고 그만두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야간조보다 조금 빠른 10월 말에 가입한 주간조 노동자들과 함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엘지트윈타워분회 조합원이 되었어요.

엘지트윈타워 로비에서 파업 집회 중인 청소 노동자들. 사진 제공_ 엘지트윈타워분회

우리는 트윈타워에서 있는 9시간 중 쉬는 시간을 많이 잡아 실제 돈을 받는 시간은 6시간 30분밖에 안 되었는데, 노조 만들고는 9시에 출근해서 5시에 퇴근하고 돈 받는 시간은 7시간이 되었어요. 주간조는 점심시간을 많이 줘서 하루 7시간 30분밖에 돈을 못 받고, 토요일에 격주로 나와 무급으로 일했는데, 노조 만들고는 하루 8시간 돈을 받고, 토요일에는 안 나가게 되었어요.

조금씩 좋아지고 갑질에 대해 문제 제기하고 있는데 교섭에는 회사가 불성실했어요. 청소노동자들을 함부로 부려 먹지 못하니까 그게 싫었나 봐요. 그러다가 갑자기 용역업체를 계약 해지하고 전원을 해고했어요. 우리는 작년 12월 한 달 동안 고용승계하라고 외쳤지만 엘지는 결국 외면했어요. 새해 첫날에는 밥과 전기도 끊고,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했죠. 그런데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고 여론이 나빠지자 다음 날 밥과 전기가 들어왔어요. 파업 전부터도 그랬지만 연대의 힘을 절감한 순간이었어요. 우리는 절대 지지 않겠다는 자신감이 생겼어요. 회사는 위로금으로 회유하고, 다른 사업장에 취업시켜 준다고 사탕발림하지만 우리는 절대 흔들리지 않아요. 해고되고 한 달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한 명도 흔들리지 않고 있어요. 청소노동자 무시하는 엘지의 버릇을 고치고, 우리의 일자리 트윈타워로 반드시 돌아갈 거예요.

파업하기 전에는 몰랐는데 사회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어요. 간접고용, 비정규직의 현실, 정규직과 비정규직 갈등, 가진 자들이 약자들끼리 싸우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웠어요. 이번에 연대의 중요성을 너무 뼈저리게 느꼈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서 온갖 응원이, 물품과 메시지가 오는데 우리도 앞으로 갚으며 살자고 다짐했어요. 우리가 사회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많이 배웠어요. 가족들도 처음에는 걱정하다가 이제는 응원하고 있고요. 반드시 이겨서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노동조합으로 찾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줄 거예요.

(구술 정리_ 손승환/ 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 조직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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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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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료 이야기

구금시설에서 의료제도의 진면목을 본다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2000명 넘는 사람이 건물 안에 있다가 그중 절반이 코로나19에 걸렸다.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일어난 일이다. 수용자 2292명 중 1133명이 확진되었다.

수용자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스스로 알렸다. 지난해 말, 창살 틈새로 손을 내밀어 “살려 주세요/ 확진자 한 방에 8명씩 수용/ 편지 외부 발송 금지”라 적힌 종이를 바깥세상이 보게 한 것이다. 도움이 절실하다는 판단에서 찾아낸 비상 대책이었고, 처벌을 각오한 시위였다. 뒤이어 <한겨레>에 실린 기사는 바깥세상을 경악하게 했다. 수용자 8명이 누워 자는 좁은 방, 마스크를 지급받기는커녕 돈 내고 사기도 힘든 구매 통제, ‘열이 나고 아파 죽을 것 같은데 아무런 조처를 안 해 주고 무시해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는 수용자의 편지, 확진자와 같은 방을 쓴 밀접 접촉자 180명을 다른 방으로 옮기기에 앞서 강당에 한꺼번에 모아 놓고 4시간이나 머물게 했다는 어설픈 행정은 하나같이 코로나19 방역의 기본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라 차마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2020년 12월 29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 수용자들이 창문 틈으로 요구 사항이 적힌 종이를 든 손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이동수

유엔의 ‘수용자 처우에 관한 최저 기준 규칙’에 따르면 구금 기간은 수용자가 사회로 돌아가 통합되고 준법과 재활의 삶을 살게 하는 데 이용되어야 한다. 그렇게 될 때라야 자유를 박탈하는 처분의 주된 목적인, 사회를 범죄로부터 보호하고 재범을 줄이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수용자에게 의료를 제공할 의무가 있으며 수용자는 지역 주민과 같은 수준의 의료를 차별 없이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구금시설 의료는 유엔의 최저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 구금시설당 수용 인원이 평균 1000명이고 대다수가 30~50대 남성인데 전체 인원의 절반이 ‘환자’이며 그중 38퍼센트가 고혈압을, 20퍼센트가 당뇨병을, 15퍼센트가 정신질환을 갖고 있다(2019 교정통계연보). 이 많은 환자를 진료할 인력은 의사가 두세 명, 간호사가 한두 명, 약사와 의료기사가 한 명 정도다. 간단한 의료 장비를 갖춘 ‘의료과’에서 진료하는데 의사 1인이 하루에 보는 환자가 보통 200여 명으로, 진찰과 상담을 제대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다. 외부 의료기관 진료를 수용자가 요청할 수 있으나 허가 받기 어렵다.

상황을 더 어렵게 하는 것은 구금시설에 의료인이 부족할 뿐 아니라 고용 또한 불안정하다는 데 있다. 의사는 2~3년 임기의 계약직이거나, 의과대학을 갓 졸업한 뒤 또는 전문의 과정을 이제 막 마친 뒤 군 복무 대신으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사다. 불안정하게 단기 근무하는 의사는 환자를 진료할 뿐, 행정적 권한을 갖지 못한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의사가 코로나19 집단감염 위험에 대비해 방역 조치를 시급히 강화해야 한다고 판단했어도 실제 무엇을 하기는 어렵다. 마스크를 수용자에게 일괄 지급하거나, 열이 나는 수용자를 즉시 격리하거나, 다수 인원의 집합을 금지하거나, 어떤 조치든 권한이 있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금시설 의료가 그 나라 의료제도를 보여 준다

보건소에서 10년, 보건복지부 산하기관에서 10년을 일했어도 나는 구금시설 현장에 가 본 적이 없다. 보건소나 지방 의료원에 관해서는 보건복지부가, 구금시설 의료에 관해서는 법무부가 관할해 서로 접점이 없었기 때문이다. 꼭 그렇게 나눌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건 외국 의료제도를 견학하면서였다.미국 뉴욕주 시립병원에서 만난 의사는 병원에서 진료하는 외에 순번에 따라 지역 의료 센터에 나가 진료하며 교도소에도 간다고 했다. “교도소(jail)?”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반사적으로 되물었는데 그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시립병원 의사는 공무원으로서 정기적으로 교도소를 방문해 수용자를 진료한다고 했다.

국영의료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서 본 것은 아예 금을 긋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의료에 관한 한, 교도소 담벼락은 분리와 배제의 경계가 아니었다. 일반 시민과 마찬가지로 동네 일차 의료 의사, 전문의, 정신 건강 센터 활동가가 구금시설을 오가며 수용자를 진료하고 돌본다. 건강에 위험 요소가 있는지, 만성질환이 있는지, 심각한 합병증을 앓는지 등을 고려해 수용자 본인의 동의 아래 개인별 계획을 세워 의료를 제공한다. 출소를 앞둔 이에게는 구역 간호사가 따로 배정돼 필요한 도움을 준다. 구금시설 밖이든 안이든 인간으로서 건강할 권리에는 다를 바 없도록 보장한다.

이처럼 국가마다 의료제도가 다르다. 차이가 시작되는 뿌리는, 헌법이다. 사회의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의료제도에 대해 헌법의 영향력이 크리라 생각된다. 헌법은 ‘국가의 형태 및 통치구조,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기본법’(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이고 건강과 의료가 바로 그 기본권의 필수 요소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국영의료 역시 그 나라 헌법에 뿌리를 박고 있다. 1948년에 제정된 헌법에 “공화국은 건강을 개인의 기본권이자 집단 공동의 관심사로 보호하며, 가난한 사람에게 무상의료를 보장한다”는 조항이 담겼다. 그 뒤 기득권층을 대표하는 우파가 장기 집권하면서 헌법 정신이 빛을 보지 못했지만, 30년이 지난 1978년에 좌우 거대 양당이 타협해 집권 연합을 이루면서 국영의료법이 제정되었다. 법의 첫머리가 이렇게 시작된다. “공화국이 국영의료를 통해 건강을 개인의 기본권이자 집단 공동의 관심사로 보호한다.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보호할 때 인간의 존엄과 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 헌법 정신을 그대로 받아안고 실현하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법으로 구금된 수용자의 건강도 보호한다.

그런데 어찌 된 걸까. 우리나라 헌법에는 건강과 의료에 관한 독립된 조문이 없다. 다만 분야별 권리를 밝히는 마지막 조문(제36조) 마지막 항에서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할 뿐이다. 이 짧고 애매한 글은 보건의 내용이 어떠한지, 이에 관해 국가가 무슨 의무를 지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대조적으로 교육(제31조), 근로(제32~33조), 사회복지(제34조), 환경(제35조)에는 하나하나 독립된 조문이 있고 국민이 누릴 권리와 국가의 의무가 자세히 적혀 있다. 우리 헌법이 유독 건강과 의료를 형식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헌법의 ‘짧고 애매함’이 현실에 투사되고 국가 행정에 반영된다. 대표적인 예가 정부 안에서 의료에 관련된 정책이나 관리·감독 업무가 여러 법률에 쪼개져 여러 부처로 나누어진 것이다. 물론 보건복지부가 주된 역할을 하지만 법무부, 국토부, 고용부, 교육부 등 다른 부처도 의료제도 일부를 관리한다.

법무부가 구금시설 의료를 관장하며 국립법무병원(공주치료감호소)을 운영한다. 국토부가 교통사고 환자의 자동차보험 진료를 관장해 연간 진료비 2조 원을 다루며 국립교통재활병원을 운영한다. 고용부가 근로자의 업무상 재해를 보상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을 관장해 연간 진료비 1조 원을 다루며 전국에 근로복지공단 병원 10개소를 운영한다. 교육부 또한 서울대학교병원을 포함한 10개 국립대학병원을 관리·감독한다. 중증질환의 최종 단계를 진료하는 이 병원들은 대규모 병상을 보유하고 우리나라 공공의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이에 대한 관리·감독이 교육부에 맡겨진 것은 의료 정책을 주관하는 보건복지부 업무에 상당한 제한이 된다. 실제 예는 이보다 많다.

쪼개진 체계에서는 부처 간 칸막이 너머 사정을 서로 알지 못한다. 부처마다 독자적으로 업무를 진행하니 행정의 일관성은 고사하고 제도 전반을 파악하기조차 어렵다. 쪼개진 제도로 국민의 건강권을 보장한다는 건 허상이다. 대학병원 의료가 눈부시게 발전해도 구금된 수용자에게 그림의 떡이고, 바깥세상 방역이 아무리 철저해도 구치소에서 집단감염이 일어난다. 누구나 건강하게 하려면 의료제도를 돌아봐야 한다. 전반을 책임질 총괄 체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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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년 2월호

안건모의 사람여행

 

복직 없이 정년 없다

 

사진_ 안건모

 

한진중공업 35년째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하 김진숙 지도로 지칭)이 새해부터 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희망뚜벅이’. 4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다. 날마다 15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청와대사랑채까지 간단다. 암이 재발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서울까지 걷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진중공업 고용안정 없는 매각 반대!’라는 글귀가 적힌 부채를 들었다. 그리고 트위터에 연말까지 기다렸지만 답이 없어 청와대까지 가 보려고요. 복직 없이 정년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복직이 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뜻이다.

▲ 김진숙과 '희망뚜벅이'. ⓒ작은책(안건모)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내가 김진숙 지도를 처음 만난 것은 2008 3 <작은책> 강좌 때였다. <작은책>에서는 2007 11월부터 2013 11월까지 6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김진숙 지도는 2008 3 20, 2013 1 24, 두 번 강연을 했다. 2008, 3월에 강연한 제목은 자본 천국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였다.

김진숙 지도는 그날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저는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이라고 배 만드는 조선소에 용접공 출신입니다. 땜쟁이였어요. 그래서 그때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그게 접니다. 그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게 하여튼 지금도 쪽팔립니다.”

▲ 2008년 3월 20일 김진숙 지도가 <작은책> 사무실이 있는 2층 강당에서 '자본 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가 살아온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날 한 수강생이 쓴 소감이다. 슬픈 이야기에 속에서 눈물이 울컥하는데 겉으로는 자꾸 웃음이 난다.  강의 내내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가 깔깔대며 자지러지다가도 어느새 나온 슬픈 이야기의 무게에 눌리고, 그렇게 여러 번 요동치니 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있다.”

김진숙 지도 역시 어릴 때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제가 고향이 경기도 강화인데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하고 토요일 날 시내를 놀러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에다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웬 아줌마들 네 명이 뭐, 상치, 쑥갓, 다 합쳐 봐야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그것도 다 시들어 빠진 걸 더 시들어 빠진 아지매들이 팔겠다고 오고 가는 사람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전 속으로 그 아줌마들을 막 경멸했어요. , 오죽 못났으면 저 나이에 길바닥에서 저러고들 사나? 그러다가 그중에 한 아줌마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 순간 막 도망을 가는데, 친구들이 자꾸 부르는겨. 그래서 그 아줌마가 저를 못 봤기를 빌고 또 빌면서 뛰는데, 재수 없게 꼭 본 것 같애. 짐작하셨겠지만 그 아줌마는 저희 엄마였드랬습니다. 저는 울엄마가 길바닥에서 그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팔겠다고 오가는 사람들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진숙 지도는 그때 일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저는 그 일이 30년이 넘도록 상처입니다. 나는 왜 엄마를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

▲ 2008년 3월 20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현장에서 배 만들면서 산재로 끔찍하게 죽어 갔던 노동자들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했다.

김진숙 지도는 2007년에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냈다. 어떤 이들은 지하철에서 그 책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했다. 나도 그 책을 보고, 또 언론에 숱하게 오르내리는 김진숙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2007)

 

김진숙 지도는 1981 7 1일 스물한 살 나이로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최초의 처녀 용접사였다. 어릴 때 그는 옷 만드는 공장, 가방 만드는 공장도 다녔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 신문 배달도 했고, 시내버스 안내양도 했다. 그러다가 월급이 조금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물한 살에 한진중공업 용접공이 됐다. 하지만 용접 일은 쉽지 않았다. 천장 용접도 해야 하고, 수그리고 처박고 용접해야 되는 일이었다. 불똥이 옷 속으로 튀어 타 들어가도 참아야 했다. 월급이 많지도 않았다. 거의 12시간씩 일하고 연달아 철야를 할 때도 많았다.

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고 추운 겨울에 지리산을 올라갔지만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면서 1년만 더 살아 보자, 생각했다. 그럴 때 노동조합이 뭔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진중공업 집행부는 어용노조였다. 조합 간부들은 회사보다 더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1981년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김진숙 지도의 사원증.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희망버스 기획단이 단식투쟁하는 자리에 전시해 놓았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공장 아저씨들이 권유해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 2 ‘23차 대의원대회를 다녀온 뒤 당시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홍보물 150여 장을 배포했다. 얼마 뒤, 5 20, 김진숙은 얼굴에 보자기에 씐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김진숙 지도 옷을 홀딱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칠성판에 눕혀 놓고 매질을 했고 고문하며 빨갱이로 몰았다.

한 조직만 불면, 한 사람만 불어 주면, 이 죽을 고생이 끝난다는데, 살려 준다는데! 아무리 머릿속 구석구석을 후후 불어 봐도 조직도 선도 없는 거다.”(소금꽃나무, 24)

대공분실은 간첩을 잡는 부서가 아니라 간첩을 만드는 부서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벌건 밧줄을 발목에 매달고 거꾸로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풀려나고 보니까 제가 묶여 있던 자리 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어요. 피가 어디로 흘렀는 줄 아세요. 눈으로 흐른 거예요.”(2013 1 <작은책> 강연 ‘309일의 싸움에서.)

김진숙 지도는 7 2일까지 세 차례 조사를 받았고 한진중공업은 7 14일 김진숙 지도를 해고했다. 그때부터 해고자가 된 김진숙 지도는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한진중공업에는 1989년과 1991년까지 총 18명의 해고자가 있었다. 2003 11월 김주익·곽재규 사망 사건 이후 노사 합의로 1986년 같은 해 해고됐던 박영제, 이정식 씨도 복직하는 등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사람들이 모두 복직됐다. 하지만 유독 김진숙 지도만 복직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2010 12 15, 한진중공업은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정리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12 20일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김진숙 지도는 2011 1 6일에 한진중공업 안에 있는 35미터 높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 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째 고공농성을 하다가 목숨을 끊었던 곳이다.

김진숙 지도가 올라가 농성했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2011년 2월 8일.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여섯 달이 지났을 때 노동단체, 시민단체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만들어 부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밖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현재 <작은책> 편집장 유이분 씨는 그때 <작은책> 일꾼이 아니었는데 희망버스 때마다 내려갔다. 우리 <작은책> 독자, 글쓰기 모임 회장과 회원들도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글쓰기 모임 회장이었던 강정민 씨는 경찰에 사진이 찍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200만 원 벌금으로 약식기소를 당했다. 정식 재판을 청구해서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검사가 또 항고를 해서 대법원까지 갔다. 결국 무죄로 확정됐지만 빼앗긴 시간과 정신적인 고통은 보상받지 못했다. 무고한 시민을 그렇게 기소하고 항고하면서 괴롭히는 그런 경찰, 검찰은 나중에 징계 먹고, 해임당하는 법은 없나? 정말 속이 터진다.

고공농성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에서 손을 흔들고 있다. 2011년 2월 8일. ⓒ작은책(안건모)

 

2011 7 30 3차 희망버스 때는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고 골목골목을 다 막았지만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희망버스에 참가했고, 김진숙이 요구하는 문제가 개별 노사 문제를 넘어 일자리, 고용, 해고 등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절박한 문제라는 것을 체험하고 공감했다. 김진숙 지도는 그해 11 11일 오후 조합원 총회 찬반 투표가 가결된 후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고공농성 309일 만이었고 유례가 없는 승리였다. 하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지 않았고 400명의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2018 10월 김진숙 지도에게 유방암이 발병했다. 나도 이제 복직 투쟁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노조에 알린 뒤였다. 복직 투쟁을 미루고 그해 항암 치료를 받았다. 후유증으로 관절염, 골다공증, 우울증을 겪으며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이가 갑자기 2019 12 23, 부산에서 대구까지 110킬로미터 도보 행진에 나섰다. 대구 영남대의료원에서 해고를 당해 13년째 복직 투쟁하며 영남대의료원 70미터 높이 병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김진숙 지도는 그 친구의 절박함에 비해서 세상이 무관심한 것 같다 알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론에 굴복했는지 결국 영남대의료원은 그해 2, 박문진 전 지도위원의 복직에 합의했다. 해고된 지 13, 고공농성 170일이 넘은 뒤였다.

그리고 그 뒤 2020 6 23일 김진숙 지도는 다시, 이제야말로 자신의 복직 투쟁을 시작한다며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2 22일에는 서울 청와대 앞에서 희망버스 기획단 7명이 노숙 단식투쟁을 들어갔다. 한진중공업 법정관리사인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대통령과 정부가 사측이나 다름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정년 내 복직 약속을 투명하게 이행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정홍형 희망버스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서영섭 신부, 송경동 시인,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 씨 등 노동·시민·사회·종교단체 관계자 7명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와 쌍용차지부에서도 연대 단식에 나섰다.

하지만 2020 12 30일까지 한진중공업은 답이 없었다. 12 31, 김진숙 지도는 앓는 것도 사치라며 항암 치료도 미루고, 서울까지 걷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같이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을까. 어떤 분들이 함께 걸을까. 나도 몇 구간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일차 1 5, 청도역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이틀 동안 걷기로 했다.

청도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니 KBS 기자들이 김진숙 지도를 찍고 있다. 김진숙 지도는 나를 보더니 인연이 참 기네요.” 하고 말했다. 나는 건강이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물어 대답하기도 귀찮은 질문일 것이다.

청도역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장영식 사진작가도 만났다. 장영식 작가는 사회적인 약자나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등을 카메라에 담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번 김진숙 지도가 박문진 복직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대구까지 걸어갈 때도 함께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대구에서 한티재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변홍철 선생도 왔다. 한티재 출판사는 한국 탈핵(김익중, 2003),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박경미, 2020) 등 환경 도서와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책들을 출판해 왔다. 왜 오셨나고 물으니 세상이 어지러워 걸어 보려고요.” 하고 웃으면서 답했다. 달빛노동찾기(오월의봄, 2019) 책에 사진 작업을 한 윤성희 작가도 왔다.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모였는데 대충 세어 보니 마흔 명가량이다. 11시에 출발했다. 머리가 하얀 분이 교통 정리할 때 쓰는 신호봉으로 지휘를 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다. 금방 읍내를 지나 허허벌판 길로 들어선다. 서상교차로 표지판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는다. 청도천을 가로지르는 유등교를 건넌 뒤 잠깐 쉰다고 멈췄다. 12 20분이다. 김진숙 지도는 차에 들어가서 쉬고 있다. 청도역에서 팔조령휴게소까지는 12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세 시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김진숙 지도는 몸이 아파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걸어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속노조 한국게이츠지회 노동자들은 오늘 네 분이 참석했다. 현대·기아차 1차 협력업체인 한국게이츠() 30여 년 동안 해마다 이익을 냈던 기업인데 지난해 6 26일 코로나19를 핑계로 일방적으로 폐업하고, 철수 결정 통보를 했다. 알고 보니 폐업이 아니라 국내 생산 공장은 폐쇄하고,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가지고 와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업체에 판매하면서 돈벌이를 계속한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의 정부를 우습게 본 건 그럴 만한데 한국의 노동자들까지 너무 만만하게 본 건 아닐까. 대부분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지만 한국게이츠지회 스물네 명은 그런 불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청와대와 서울 현대차 양재동 본사 그리고 해외 자본의 횡포로 규정하고 서울 미 대사관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게이츠 해고노동자들. ⓒ작은책(안건모)

대우조선해양에서 해고된 청원경찰도 참석했다. 박대근 분회장, 김희진 조직부장, 지춘근 사무국장과 조합원 3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지금 646일째(1 5일 현재) 싸우고 있다.

“2020 4 1일 해고됐죠. 대우조선 정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어요. 거제도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와 함께 걸어야겠다 싶어서 나왔어요.”

대우조선해양 청원경찰 해고 노동자들. ⓒ작은책(안건모)

오늘 행진 지휘를 하는 이와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 지회장 차해도 씨였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했는데 왜 김진숙 지도 복직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냐고 물었다.

마음의 빚이 있어요. 해고되면 힘든 거 알거든요. 해고 투쟁 6년 했는데도 힘들던데. 전 원래 선박 배관하던 사람이에요. 열여덟 살에 회사를 들어갔어요. 그때는 타코마라고, 89년도에 합병되면서 90년도 해고돼서 96년도에 복직했어요. 복직 투쟁을 하는 도중에 애들 둘 낳고. 집사람이 벌어먹고 살았죠. 복직하니까 다시는 노조하지 말라고. 하하하. 15일 만에 사무국장 일을 맡았죠. 노조 상근만 20년 했어요. 단위사업 위원장도 해 보고 지회장 세 번 하고, 파견도 나가고. 2018 12 31, 42년째 되는 해에 만 60세에 퇴직하고 나오고, 여행도 다니려고 하는데 김 지도가 이번 달부터 본격 투쟁을 한다고 해요. 사실 내가 지회장할 때 김 지도 복직 교섭을 네 차례나 했어요. 2003년에도 교섭했는데 결국은 다른 사람은 다 되는데 김 지도는 안 된다는 거야. 경총, 전경련에서 김 지도는 안 된다, 이거요. 그래서 내가 퇴직했지만 김 지도 복직까지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말까지 (복직 투쟁) 열심히 하면 안 되겠나 했는데.”

씩씩한 걸음걸이로 금방 청도 읍내를 벗어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이 차해도 전 지회장. ⓒ작은책(안건모)

 

오래전에 풍산에서 해고당한 오홍재 선생도 걷는다. 오홍재 선생은 전국민주화운동경남동지회 운영위원장이다. 2008년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도 옆에서 같이 걸었다. 옛날 신발 만드는 노동자일 때 해고된 경력이 있다니 김진숙 지도와 비슷한 시기였나 보다. 현재 김진숙 지도와 교대로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경북 청도군 각남면 이서로 부근에 있는 마을을 지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폐쇄된 팔조령휴게소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2 20,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했다. 팔조령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도적떼가 많아 8명이 조를 짜서 넘어야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다. 휴게소는 폐쇄된 휴게소인지 화장실 문도 잠가 놓았다. 기념사진을 찍고는 차 몇 대에 나눠 타고 헤어졌다. 나는 KBS 취재 차를 얻어 타고 청도역으로 왔다. 같이 탄 사람들이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심재문, 이경필, 임재환 씨라고 했다. <작은책> 한 권을 드렸더니 한 분이 , 안건모 님이세요?” 하고 반가워한다. 정기 구독자는 아니지만 작은책을 몇 번 읽었단다. 이분들에게 김진숙 지도와 같이 걷게 된 까닭을 물었다.

철도노조 차원에서 온 건 아니고요,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KTX 여승무원 투쟁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을 한 번 온 적이 있어요. 그때 강연이 너무 좋았죠. 그걸 듣고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인연으로 오게 됐어요.”

청도역에 도착해 그이들과 같이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차를 타고 온 일행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의당 대구시당 여성위원장 황선희 씨였다. 그 자리에서 작은책 독자가 되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 열차 시간이 다 돼 헤어졌다. 나는 청도역 근처를 구경하다가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갔다.

 

짐터교차로에서 물놀이장 스파밸리까지

다음 날 1 6, 10시 반에 다시 청도역으로 갔다. 차해도 전 지회장이 운전하는 차에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국장, 정혜금 부장, 장영식 작가가 타고 왔다. 어제 갔던 팔조령까지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차해도 씨한테 전화가 왔다. 운전하는 중이라 스피커폰을 켰다.

청도서 정보과 ○○○입니다. 오늘 팔조령휴게소에서 출발 안 하십니까?”

팔조령 넘었어요. 터널 지나서 짐터교차로에서 출발할 겁니다.”

, , 알겠습니다.”

형사가 바로 전화를 끊는다. 황이라 국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목소리가 밝아진 거 같은데?” 모두들 웃음보가 터진다. 차해도 씨가 대답한다. , 우리 구역 아니구나, 하는 거지. 터널 안 지났으면 나와서 사진 찍고 이래야 돼.”

팔조령 터널을 지나가니 벌써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1월 6일 11시 28분에 팔조령 터널을 지난 짐터교차로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

오늘 김진숙 지도와 함께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어제 왔던 한국게이츠 노동자들이 또 왔고, 파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눈에 띈다. 앞가슴에 대우버스 355명 부당해고철회라고 써 있다. 어떤 사연인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그 밖에는 정의당원들이 몇 분 있고, 우리밥연대 활동가 김주휘 씨,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참석했다. 정의당 수영구 지역위원장과 당원들 두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대우버스 해고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왜 함께하려고 나왔어요?”

마음의 빚이 있죠. 이런 데 참여 안 하면 좀 그렇잖아요.”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차해도 전 지회장도 똑같은 말을 했다. 서로에게 미안해 떠나지 못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2006년에 박영제, 이정식 씨가 20년 만에 복직할 때 김진숙 지도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쓴 글에도 부채감이라는 말이 나온다.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미조직 국장이 잠깐 쉬는 사이에 몸을 풀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한진중 해고자로 만 20년을 견뎠던 박영제 형, 이정식 형이 새해 1 1일 복직을 합니다. 그 형들이 단지 저 때문에 해고됐다고 말하면 그분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제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의 빚’, ‘부채감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2011년 희망버스 때 나도, 시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나 싶다. ‘김진숙 같은 이가 저렇게 정리해고 반대를 하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차비 들여 내려가서, 하루 이틀 밤새는 게 대순가?’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번 김진숙 지도가 걷는 길에 동참하는 이들도 다들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옆에서 걷던 학교비정규직 대구지부 부지부장 정지혜 씨는 해고자로서 끝나면 부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꼭 복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하고 말했다. ‘부채감에 이어 부당이라는 말도 참 많이 나온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사진을 찍기 위해 언제나 맨 앞에서 걸어가는 장영식 작가와 함께 걸었다. 김진숙 지도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질문을 했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장영식 작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년은 의미 없어요. 지난해 6월 복직 투쟁 시작할 때 기자회견 첫날부터 복직 없이 정년 없다고 했어요. 복직 투쟁 시작하니까 한진중에서 찌라시를 돌렸어요. 위로금 2천만 원에, 임원들 성금 모아서 6천만 원을 제안했대요.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도 국민 성금을 제안하고, 청와대도 국민 성금을 받아 준다면 동참하겠다고 했대요. 아주 비열한 제안이죠. 김진숙 지도위원의 해고는 국가의 책임이자 회사의 책임입니다. 2 3일간 대공분실에 끌고 가서 모진 고문을 하고, 그 이유로 해고까지 한 것은 분명한 국가 책임이죠.”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국장, 장영식 사진작가가 나란히 걷고 있다. 황이라 국장은 김진숙 지도가 309일 동안 크레인에 있을 때 처음부터 끝까지 뒷바라지를 했던 노조 간부이자 조직 활동가이다. ⓒ작은책(안건모)

 

장영식 작가는, 김 지도가 정년이 지났어도 끝까지 복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 ‘복직은 정의를 바로잡는 일이다. 전두환 정권이 평범한 노동자를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하고, 회사는 해고하고, 이런 부당했던 짓을 바로잡는 일이다. 빨갱이로 몰려 죽도록 고문당하고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이들이 왜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누명을 벗으려고 하는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김진숙 지도도 누명을 벗고 명예를 벗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라도 복직을 해야 한다.

게다가 민주화보상위원회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실제로 명예 회복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명예 회복은 당연히 회사로 복직돼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긴 세월 동안 못 받았던 임금과 퇴직금과 고통받았던 세월에 대한 배상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직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면 무려 35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싸우는 사람도 있으니 절대로 해고하면 안 되겠다고 자본가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복직해야 한다.

김진숙 지도의 꿈은 소박하고 현실적이다. 지난해 9 18 YTN 라디오에서 인터뷰할 때 복직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서 제가 일할 땐 없었던 화장실, 제가 일했을 때는 없었던 식당 그런 데 가 보고 싶어요. 저는 밖에서 싸웠었는데. 현장 안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이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쟁취될 때 그 울렸던 함성을 저는 밖에서 들었거든요. 근데 막상 저는 그런 걸 못 보고 같이 함성을 지르지도 못했고, 그냥 그런 데 들어가 보고 가 보면서 아, 이렇게 됐었구나, 그러고 그냥 박창수가 일했던 공장에도 한번 가 보고. 주익 씨 일했던 데도 한번 들어가 보고. 사실은 조선소의 근로조건이라는 게, 작업환경 개선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때는 그 높은 데 작업을 하면서 사다리를 놓는데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을 하게 되니까 그냥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사다리를 안고 떨어져서 사람이 깔려 죽는 어이없는 일들이 생기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정돈이 됐는지. 그냥 그런 것들을 눈으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싸워서 쟁취했던 식당과 화장실 등 작업환경이 개선된 걸 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것 때문에 평생을 싸워 온 것이다.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있는 김진숙 지도에게 우리 모두 부채감을 갖고 모든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를 응원해야 하는 이유다.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를 지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어느새 목적지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아이들 물놀이장 워터파크 스파밸리에 도착했다. 지난해 2월 코로나19 때문에 한때 문을 닫았다가 다섯 달 만에 문을 열었다는데 놀러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약 15킬로미터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속노조 대구지부에서 떡과 우유를 가지고 나와 하나씩 나눠 준다. 모두들 끼리끼리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진숙 지도가 인사를 한다. 나는 김진숙 지도에게 끝내 복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못했다. ‘복직할 수 없는데 제가 이렇게 투쟁할까요?’ 하는 대답이 나올 건 너무 뻔하니까.

오후 1시 20분에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에 있는 스파밸리에 도착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작은책(안건모)

김진숙 지도와 헤어지고 나는 대구 쪽으로 가는 차를 찾았다. 대구지역본부 이길우 본부장이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전에 새로 노조에 들어와 일을 한다는 장혜진 조직차장과 또 한 분과 함께 차를 탔다. 이길우 본부장은 자기들 두 사람은 대구에서 가장 못된 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자본가와 수구세력들한테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길우 본부장은 두세 번 구속돼 감옥에 갔다 온 투사다. 순진한 장혜진 차장은 그런 농담을 이해 못하고 왜요? 두 분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하고 반문한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김 지도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은 언제인가? 청와대 앞에서는 일곱 분이 김 지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단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갔던 날이 벌써 18일째다(1 4일 현재). 헤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한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분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김 지도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굶어야죠, .”

세상을 달관한 듯한 대답이다. 김진숙 지도가 서울에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안 된다. 그전에 김진숙 복직!”이라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

 

서울에서 김진숙 지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서울로 올라온 뒤 1 11일 편집장 유이분 씨와 다시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을 갔다. 입구에서 안계섭 민중가수와 최헌국 목사를 경찰이 막고 있다. 기타를 메고 간다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기타가 무기인가?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기도회를 하면서 노래 한두 곡 한다는데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난 1월 12일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모습.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송경동 시인, 서영섭 신부, 김우 권리찾기유니온 활동가, 정홍형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 등이 단식투쟁을 21일째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극한미술관'에 참여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돼 있고, 박문진 지도위원이 김진숙 복직을 바라며 절을 하고 있다. 이들의 단식을 빨리 멈추게 하려면 김진숙 지도가 복직이 돼야 한다. ⓒ작은책(안건모)

공원을 들어갔더니 21일째 단식 투쟁을 하는 정홍형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과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보인다. 박승렬 목사와 한경아 새세상을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공동대표는 건강이 나빠져 단식을 중단했다. 다른 분들의 건강도 걱정이 된다.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단식 투쟁하는 이들이 스티로폼도 못 깔게 하고, 비닐도 못 치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하면서 방해만 하고 있다.

해고된 지 13년 만에 복직이 됐던 박문진 지도위원은 이제 김진숙 지도의 복직을 바라며 삼천배를 하고 있다. 절을 너무 열심히 해 인사도 못 하고 우리는 서울역 코레일네트웍스 단식 농성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2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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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한 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이 되지만 어떤 풍경들은 변함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호의 영화들처럼요. 2021년의 1월의 영화는 특별히 두 편입니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23명이 출연하는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 한국도로공사의 톨게이트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투쟁을 기록한 <보라보라>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독자들에게는 특별히 더 반가울 것 같습니다. 2020년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되어 다양한 반응들을 이끌어 냈는데 소개가 좀 늦었네요. 연말에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온라인 상영회가 있었고 귀한 영화들을 보고 나니 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들을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제목들이 멋지면서도 알쏭달쏭하지요? 첫 번째 영화를 만든 김상패 감독의 말로 제목의 의미를 대신합니다.

아사히 동지들, 용균이 어머니, 1100만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거미다. 이들이 하나의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로 엮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됐으면 좋겠다.”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의 일상을 쫓아가는 영화는 직접고용 투쟁을 벌이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교육 공무직 등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납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평등하지 않은 노동 현실을 고발합니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도 자주 등장합니다. 김미숙 님은 비정규직이었던 아들의 사고로 투쟁에 나서면서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과 동지가 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김미숙 님은 고() 이한빛 씨 아버지 이용관 님, 그리고 정의당 의원들과 함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제발 그만 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김미숙 님의 절규에 불평등한 현장에서 위험한 노동을 전담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른거립니다. 엔딩 크레딧에 이르게 되면 감독의 의도는 더 확실히 드러납니다. 김용균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던 화면이 점점 확대되면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하며 만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 고 김용균 씨처럼 산재로 숨진 노동자들의 이름들로 화면이 가득 찹니다. 방금 만났던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세상에 그토록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목이 멥니다.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두 번째 영화 <보라보라>의 주인공들은 첫 번째 영화에도 잠깐 등장했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입니다. 한국도로공사의 자회사 전환 고용을 거부해 해고됐던 1500명의 요금 수납원들의 이야기를 김도준, 김승화, 김미영 세 명의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고공농성 중인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어라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는 것만 같아요. 등장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거리감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곧 밝혀집니다. 바로 동료가 동료를 찍고 있었던 겁니다. 세 명의 연출자 중 김도준 감독은 영화과 학생이고 김승화 감독, 김미영 감독은 민주연합노조 조합원입니다. 김도준 감독이 다른 사안으로 광화문 집회에 갔다가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캐노피 고공농성을 알고 밥을 올리는 도르래에 카메라를 올려서 촬영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캐노피 위 촬영을 맡은 김승화 감독이 촬영을 정말 잘했더라고요. 주인공들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 찍는 것이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고 그것을 담는 카메라는 무척이나 안정적이라서 그분들의 시간에 몰입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투쟁하는 일상에서 시작한 영화는 투쟁의 방향성을 둘러싼 토론과 갈등을 보여 주다가 투쟁을 평가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 영화 <보라보라> 한 장면.

개인적으로 참 좋았던 건 조합원들이 들려주는 인생 이력이었어요. 산업체 학교를 다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다가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저희 언니들이 떠올랐어요. 화장품이나 책의 외판 일로 시작해서 휴게소, 대리운전, 안마방 카운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쳐 현재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여성 노동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의 주인공들도 투쟁 기간 중에 인생 이력을 들려주는데요, 그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잘 모으면 불안정한 노동의 행로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좋았던 건 갈라치기를 하는 자본의 계략을 호쾌한 웃음으로 비웃으며 비정규직을 남용하지 못하게, 모두가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꿈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었어요.

▲ 영화 <보라보라> 한 장면.

물론 이 영화에도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조합원들이 서로를 이해하면서 토론하는 모습들이 참 좋았습니다. 영화과 학생으로서 편집을 전담했을 김도준 감독이 투쟁을 거치며 개개인의 의식이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첫 번째 영화가 73, 두 번째 영화가 180분이에요. 그런데 영화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답니다. 이 영화들이 극장 개봉할 것 같지는 않아요.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에서 자리를 만들어서 영화를 보고 그 투쟁의 시간들을 되짚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랜선 상영회 희망합니다. (문의: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010-4644-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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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12. 30. 15:54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211월호

세상 보기

공공의료 이야기

 

 

병상은 많은데 왜 부족하다는 걸까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코로나19 환자가 입원할 병상이 부족하다. 11월 중순부터 환자가 급속히 늘어 서울 등 수도권에서는 날마다 수백 명씩 감염이 확인된다. 무증상자는 생활치료센터에 입소하지만 열이 나고 아픈 데가 있는 환자, 전부터 앓던 병이 있거나 나이가 많은 환자는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12월 들어 환자가 많아지니 전담 병원 입원실에 빈자리가 없다. 지금 수도권에는 병상을 배정받지 못해 며칠씩 기다리는 사람이 수백 명이다. 대기하는 동안 증세가 나빠지기도 해 환자도 가족도 방역 당국도 불안하다.

 

병상이 많아도 코로나19 환자를 받지 않아

상황을 심각하게 하는 것은 중증 환자를 치료할 병상 부족이다. 코로나19에 감염돼 폐렴이 진행되는 환자는 갑작스레 호흡곤란에 빠질 수 있어 이런 경우 초기에 즉시 중환자실로 옮겨 인공호흡기로 치료해야 한다. 주로 고령층 환자에게 호흡곤란이 일어나며 제때 집중 치료를 받지 못하면 그대로 사망한다. 이에 대비해 정부가 전담 치료 중환자 병상200여 개 지정해 두었는데 1210일 아침에 남아 있는 병상이 서울에 3, 경기도와 인천을 합쳐도 6개밖에 되지 않았다. 그날 만약 호흡곤란 환자가 6명 넘게 발생하면 누군가는 치료받지 못한 채 억울하게 생을 마쳐야 할 테니 정부 대책으로는 중대한 허점이다. 준비된 병상이 적은 이유가 병원과 중환자실이 적어서가 아니다. 우리나라에 인구당 병상은 영국보다 다섯 배, 미국보다 네 배, 독일보다 1.5배로 과잉이라 할 만큼 많다. 중환자실 병상도 상급종합병원(고도의 전문적인 의료를 시행하는 대학병원) 등 큰 병원에 약 3천 개, 병원 전체에는 약 1만 개나 된다.


우리나라 병상의 95퍼센트가 사립 병원 소유다. ‘95퍼센트라는 숫자는 의료를 거의 전적으로 사립 병원에, 다시 말해 공공이 아닌 민간 사업체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여기서 생기는 문제가 환자 치료에 수익성을 따지는 것이다. 코로나19처럼 수익성이 낮고 위험한, 게다가 많은 의료진을 투입해야 하는 질병에 대해 사립 병원은 입원 문턱을 높이거나 아예 빗장을 건다. 크고 유명한 사립 병원에 병상이 수천 개 있어도 코로나19 환자는 손으로 꼽을 만큼 받을 뿐이다. 그러니 환자 대부분을 공공병원이 도맡는다. 주요 도시마다 겨우 하나씩 있는 지방 의료원이 감염병 전담 병원으로 지정돼 코로나19 입원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이 병원들은 지난 수십 년간 수익성이 부족하고 비효율적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존폐 위기 속에서 어렵사리 공공병원의 명맥을 이어온 터라, 병상 규모가 작고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도 적어 중증 치료에는 역부족이다. 그래서 정부는 우선 국립중앙의료원과 서울대병원을 비롯한 국립 대학병원에 음압격리 중환자실을 최대한 확대하게 하고 삼성, 아산 등 사립 대학병원에 협조를 구한다. 코로나19 중환자의 건강보험 진료비를 높게 정해 다른 중환자를 치료할 때보다 열 배 많은 금액을 지급하기로 하며 병상을 열어 주기를 요청한다.

 

경영 수익을 따지는 의료의 민낯

사립 대학병원은 몸을 사린다. 그 이유를 삼성의료원이 코로나19 중환자를 4명만 받겠다며 내놓은 설명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시설 부담이다. 음압 격리 병상 4개를 만드는 데 드는 면적이 기존 병상 18개를 폐쇄해야 할 만큼 넓다고 한다. 둘째, 인력 부담이다. 다른 중환자를 치료할 때 간호사 1명이 환자 2명을 돌볼 수 있지만 코로나19 치료에는 간호사 5명이라야 환자 2명을 돌볼 만큼 인력 소요가 크다고 한다. 일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려 주는 표현이라 하겠으나, 그런 이유로 입원 환자를 극소수로 제한하는 것은 경영 수익을 중시하는 사립 기관의 전형적인 논리일 뿐이다. 삼성의료원은 소유 병상이 2천 개가 넘고 의대 학생을 교육하며 전공의를 수련시키는 사회적으로 중요한 병원이다. 이와 같은 병원이 코로나19 감염증 유행의 재난 앞에서 비용을 계산하며 몸을 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나라 의료의 어두운 민낯이다. 최고의 인력·기술·자원을 보유한 병원이 국가적 위기 극복에 발을 뺀다. 국민건강보험 진료비를 받아 운영하는 병원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 치료를 남에게 떠넘긴다. 사립이라는 이유로 힘든 짐을 공공에 맡기고 자기 보호를 꾀한다.

사립 병원의 논리는 전문가 단체의 주장에도 반영된다. 대한중환자의학회가 127일에 낸 코로나19 급증에 따른 중환자 진료 체계 구축을 위한 성명서는 정부와 보건 당국에 상급종합병원 기반에서 벗어나 전담 병원 기반으로 대응하고 대형 임시 병원을 구축(체육관, 컨벤션 등 활용)하라고 촉구한다. 그 뜻을 되짚으면 정부가 더는 사립 대학병원에 코로나19 중환자 치료를 요구하지 말라는, 대신에 공공병원에 맡기고 그래도 부족하면 체육관 같은 곳을 임시 이용해 해결하라는 주장이다. 묻고 싶다. 의학회는 공공병원의 어려운 의료 여건을 과연 모르는지. 중증 호흡기 환자를 임시 시설에서 치료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하다고 보는지. 요구대로 대형 임시 병원을 짓는다면 새로 의료진이 필요한데 여기에 학회 전문의들이 참여할 건지.

공공병원이 더 큰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이미 수도권에서는 과부하가 걸려 있다. 지방 의료원의 입원 병상을 전부 또는 대부분 비워 코로나19 환자를 입원시키고 의료진이 모두 코로나19 치료에 투입된 상태다. 입원한 환자가 호흡곤란 징후를 보여도 중환자를 받아 줄 상급종합병원을 찾기 전까지 치료를 책임져야 하니 의료진의 스트레스가 크다. 환자가 급증하면서 지자체 당국이 응급실, 분만실 등 다른 기능은 줄이거나 정지하게 했는데 여기에도 부작용이 따른다. 의료원에 의지하던 저소득층 환자를 진료해 줄 다른 병원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환자가 집에서 방치되거나 상태가 나빠져 사망하기까지 한다. 코로나19에 감염된 산모, 코로나19에 감염된 혈액투석 환자를 받아 주는 곳도 찾기 어렵다. 사립병원에서는 자기 병원에 다니던 임신부라 해도 감염 확진자라고 하면 공공병원에서 분만하라며 문을 닫는다.

 

국민이 안심하는 의료가 되려면

코로나19 유행이 우리나라 의료 제도의 현주소를 드러낸다. 지금까지 정부는 건강보험을 통해 필수 의료가 공급되게 하고 국민에게 의료 이용을 보장했다. 그러나 보험의 주된 기능은 돈을 모아 비용을 해결하는 것이며 의료 내용과 성격에 깊게 개입하지는 못해, 그와 같은 정책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의료에 관한 국가적 관리 기능을 높여야 한다. 국민을 위한 의료, 국민이 안심하는 의료를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의료를 사립 병원이 주도하는 시장에 맡겨둔 채 공공의 관리 체계를 만드는 데는 소홀했다. 의료인과 의료기관이 자기 사업을 꾸리는 방식으로 의료 활동을 하게 했을 뿐, 공공의 이익을 높이는 의료 체계를 만들지는 못했다. 이는 일제 강점과 전쟁이 남긴 잿더미 위에서 짧은 기간에 의료 공급을 확대할 목적으로 손쉬운 방안인 민간 공급을 선택했던 과거가 남긴 결과다.

의료는 매우 넓은 범위의 학문, 기술, 활동을 포괄하는 사회적 영역이며 삶의 필수 요소다. 따라서 누구도 의료 전체를 소유하거나 장악할 수 없어 사회 공동의 힘으로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의료에서 공공성은 본질로서 공동체 구성원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한다. 이에 관련해 참고할 선례가 유럽이다. 지난 세기에 그곳 나라들은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의료제도를 세웠다. 나라마다 조금씩 모양이 다르지만, 국민 누구나 평등하게 의료를 이용하고 건강에 관한 한 안심할 수 있도록 설계한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코로나19 감염증의 유행에도, 비록 초기 방역에 실패해 유럽 모든 나라에서 환자가 엄청난 숫자로 발생하게 되었지만, 병원 대부분이 공공병원이고 의료진 대부분이 공직자인 제도 안에서 국가적 비상 체계를 작동해 상황을 통제한다. 방역의 실패를 의료가 수습하는 셈이니 우리와는 정반대라 할 만하다.

공공성을 높여 누구나 건강하게 하는 제도, 공공의료에 관한 짧은 글로 올 한 해 작은책독자와 만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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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1월호

일터 이야기

작은책 노동 상담소

 

 

복귀하니 회사가 사라졌다

박공식/ 이팝 노동법률사무소, 작은책 자문 노무사

  

 

박미래 씨(가명, 40)는 올해 초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경력이 있었기에 일을 시작하고 담당 업무인 회계 경리 업무를 거침없이 해 나갔습니다. 회사는 규모가 상당히 큰 ○○클럽입니다. 박미래 씨는 근로계약서를 요구하고 4대보험 가입을 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박미래 씨가 입사한 지 한 달 뒤에 일방적으로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사유는 사업주 명령 불이행이었습니다.

해고통지서를 들고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슴이 뛰고 그저 두려웠습니다. 둘레에 상담을 받으면서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습니다. ‘법대로 해 보자.’ 하고 의지를 다지며 노동위원회라는 곳에 가서 직접 부당해고구제신청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는 부당해고구제신청이 접수된 것을 알고서는 바로 업무 복귀를 명령했습니다.

회사는 첫 번째 복귀한 날부터 본격적으로 감시와 견제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업무 중 개인 휴대폰 사용 금지, 화장실도 최소 시간으로 다녀올 것, 잡담 금지를 지시하고, 모든 업무에서 배제하고 그날그날 업무만 지시했습니다. 뭐만 하면 꼬투리부터 잡고서 경위서를 쓰라고 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당당하게 업무 지시에 따라 일을 했는데 경위서를 작성하라고 하여 작성한다.’라고 썼습니다. 그러면 회사는 경위서를 다시 작성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게 경위서 작성으로 하루를 다 보낸 적도 여러 날입니다.

경위서가 여러 장 쌓이자 회사는 징계위원회를 열어 박미래 씨를 해고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다시 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구제신청을 직접 접수했습니다. 이번에는 더욱 꼼꼼하고 논리적으로 주장을 했습니다. 회사도 어디서 법률 자문을 받는지 반박 서류를 치밀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박미래 씨는 그보다 더 꼼꼼하고 치밀하게 부당해고 이유서를 노동위원회에 제출했습니다. 노동위원회는 회사의 징계 해고는 부당해고라고 판단했습니다. 회사는 이번에도 복귀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복귀하는 날 출근하니 회사가 그 사이에 이사를 갔습니다. 문 닫힌 회사 건물 앞에서 대표에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대표님, 어디로 갈까요?’ 회사는 그제야 박미래 씨에게 문자로 옮겨 간 주소를 보내왔습니다.


박미래 씨가 두 번째 복귀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회사는 코로나로 경영상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로 일방적 휴직 명령을 내렸습니다. 박미래 씨는 3개월 뒤에 다시 출근했습니다. 회사는 인력 재배치를 한다는 이유로 다시 출근한 박미래 씨에게 회계 업무와는 전혀 다른 재고 업무를 시켰습니다. 박미래 씨는 꿋꿋하게 출근을 하며 무거운 물건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고 파악 업무를 했습니다.

회사는 다시금 박미래 씨만 콕 집어 해고 통보를 했습니다. 세 번째 해고 사유는 경영상의 이유로 인한 해고였습니다. 박미래 씨는 계절이 두 번 바뀔 동안 노동위원회를 세 번째 찾아갔습니다. 문래동에 있는 서울지방노동위원회를 찾아가는 길이 익숙해질 정도였습니다. 세 번째 판정에서도 노동위원회는 부당해고라고 했습니다. 회사의 해고 사유가 정당하지 않다는 것이었지요. 부당해고 인정을 받은 날 회사로부터 문자가 왔습니다. 세 번째 복귀 명령입니다. 박미래 씨는 다시 출근했습니다.

회사는 박미래 씨에게 야간 업소 입구에서 체온 측정 등의 업무를 지시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일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회사 건물로 들어가려 했지만 이유 없이 거부당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주변 건물의 화장실을 찾아 어두운 길목을 뛰어갔다 와야 했습니다. 이를 악물었습니다. ‘아 이런 것이 직장 내 괴롭힘이구나라는 확신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박미래 씨는 지금도 회사의 괴롭힘에 맞서 힘쓰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감시, 이유 없는 업무 배제, 알 수 없는 업무 배치, 업무 시설 사용의 제한, 부당해고와 싸우는 동시에 직장 내 괴롭힘에 둘러싸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동료들은 괴롭힘인 줄 알면서도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외면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은 20197월에 시행되었습니다. 그 인정 요건은 첫째, 가해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할 것’, ‘둘째, 그 행태가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을 것’, ‘셋째,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일 것등입니다. 직장 내 괴롭힘 관련 법률(근로기준법 제76조의2, 76조의3, 109조 제1)에는 가해자를 직접 처벌하는 내용은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반쪽짜리 규정이라고 합니다. 다만 사업주에게 괴롭힘 신고를 한 이유로 피해자에게 불이익 처우를 한 경우에는 회사를 처벌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피해자가 회사에 직장 내 괴롭힘 신고를 하였음에도 별도의 조치가 없는 경우 고용노동청에 신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동청은 이 경우에도 사업장 지도 개선 방식에 머물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 싸울 때 동료 근로자들의 외면 그리고 입증 책임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마주하고 있습니다. 피해자인 동료를 외면하지 않고 응원하는 것이 직장 내 괴롭힘에 맞서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일하는 사람 곁에 열려 있는 <작은책> 노동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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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재난 지원금 때문에 견디기 힘들었다

김유진/ 대한민국 9급 공무원

 

 

주민센터에서 근무하고 있는 2년차 9급 공무원이다. 내가 일하는 주민센터에는 일종의 법칙(?)이 있다. 민원인들이 한꺼번에 몰려온다는 거다. 어떤 때는 정말 다들 손에 손을 잡고 사이좋게 함께 오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한꺼번에 몰리기도 한다. 그 시간 동안에는 정말 물 한 모금 마실 시간도 없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빠진다. 점심시간 중에도 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민원을 봐야 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 요즘, 잘릴 염려 없고, 어쨌든 입에 풀칠은 하고 사니 나는 운이 좋구나 싶다가도, 한 번씩 인터넷상에서 공무원들을 놀고먹는 철밥통에 세금이나 축내는 한심한 존재로 싸잡아서 얘기하는 댓글들을 보면 좀 억울하기도 하다.

내 경우만 해도 몇 년에 한 번 주민센터에 가서 민원을 볼까 말까 하기 때문에, 뭐 사람들이 그리 있을까 생각들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리고 위에서 얘기한 정적의 시간 동안 주민센터에서 민원을 봤던 사람들에게는 주민센터가 참으로 평화롭고 한가롭게 일하는 곳으로 비치기도 할 테다. 하지만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화된 지금도 단골 민원인들은 있다. 어떤 민원인들은 마실 삼아 주민센터에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주 온다. 아침에 번호 대기표의 전원 스위치를 올리면서 오늘은 좀 사람들이 덜 오면 좋겠다는 바람을 마치 보름달을 보며 소원 빌듯이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그래야 화장실도 제때 갈 수 있고, 점심도 체하지 않게 먹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악성 민원에 시달릴 가능성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요즘 일을 하다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화가 참 많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많아서 기다리는 시간이 조금 길어질라치면 화를 내고, 규정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 달라고 떼를 쓰는데 안 된다고 하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고, 직원이 사소한 실수라도 하면 벌레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존감 뭉개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마구, 그야말로, 던진다. 과연 이 세상에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는 공무원을 '국민에게 봉사해야 하는(!) 사람들'이라고 강조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도 이 일을, 먹고살기 위해 직업으로 택한 평범한 '노동자'일 뿐이다. 저 위에 계신 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말단 공무원들은 말이다. 비록 '노동자의 날'에 노동자로 대접받지 못하기는 하지만, 월급을 일하는 시간으로 나누어 보면 거의 최저시급이고, 민원인들이 갑질을 하더라도 내 생각이나 주장을 얘기하면 더 힘든 상황에 놓이기도 하는, 그래서 억울하더라도 하고 싶은 말 맘속에 꾹꾹 눌러 담아야만 하는, 감정 노동자이기도 하다.

코로나 상황을 겪으면서 욕도 배부를 정도로 참 많이 먹은 것 같다. 우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대부분의 경우는 재난 지원금과 관련된 경우였다. 먼저 전화로부터 시작됐다. 정부에서 1차 재난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발표하고 기사가 난 이후 주민센터로 그와 관련된 문의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지침도 안 내려오고, 우리도 아는 거라고는 기사로 난 정보가 다였는데 말이다. '지침이 안 내려와서 안내를 드릴 수가 없다'는 답변을 하면 알겠다며 전화를 끊는 사람도 있지만, 주민을 위해야 하는 주민센터에서 그것도 모르고 그 정도의 답밖에 못 해 주냐며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우도 꽤 있었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재난 지원금 지급이 시작되면서, 야근에, 주말 출근에, 정신없는 하루하루가 흘러갔지만, 무엇보다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건, 해외 체류 등으로 지원금 수급의 자격이 안 된다거나, 가족이라 세대 분리가 안 되는 등의 사유로 본인들이 원하는 만큼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에 우리에게로 돌아오는 비난의 화살들이었다. 우리도 돈 더 드리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럴 땐 진짜 내 월급이라도 까서 드리고 이제 그만 하시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보게 된 경우가 많아, 사람에 대한 회의감과 부정적 인식을 갖게 되는 것 또한 괴로웠다. 물론 좋은 민원인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인한 상처와 힘듦이 더 크게 느껴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고 하면 내가 너무 나약한 인간인 걸까?

나는, 아니 대부분의 말단 공무원들은, 하루하루 성실히, 평범한 직장인으로서 살아가고 있다. 주민들을 위해 열심히 일해 주길 원한다면, ‘내가 내는 세금으로 너 먹여 살리고 있는데 이러느냐?’와 같은 말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한다. 우리도 세금 누구보다 꼬박꼬박 성실히 납부하고 있고, 돈이라는 건 원래 돌고 도는 존재라, 그 사람들이 말한 세금이 우리 월급에서 차지하는 지분만큼 나도 그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각종 부문에서 성실히 소비하고 있는 돈이 흐르고 흘러 그들에게 눈꼽만큼이라도 가는 것이니 말이다.

서류 한 장에도 수고하셨다고 감사하다고 미소 지으며 말씀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는 정말 감사하다. 그런 분들 덕분에 힘을 얻고 열심히 일하게 된다. 작은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의 소중함을 더욱더 느끼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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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 투자와 투기는 어떻게 다른가?

강수돌/ 고려대 교수, 전 마을이장 

 

"그대들은 어떻게 저 하늘이나 땅의 온기를 사고팔 수 있는가? 우리에게는 이상한 생각이다. 공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이 땅의 모든 부분이 거룩하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는 신성한 것들이다."

유명한 1854'시애틀 추장의 편지'. 모든 생명의 바탕인 "신성한" 땅 자체를 상품화하여 부동산으로 부르는 것 자체가 "이상한 생각"이자, 법적·윤리적으로는 죄악이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봉건주의나 노예주의를 극복한 역사적 업적을 상쇄하고도 남을, 인간과 자연의 착취와 파괴라는 해악을 극도로 보여 준다. 그 한 측면이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 그리고 기후위기가 아니던가?

원래 땅은 뭇 생명의 어머니다. 사람들이 먹을거리를 얻는 토대이자 온갖 야생동물들도 먹여 살린다. 풀과 꽃, 나비와 벌, 채소와 열매 없인 살기 힘들다. 크게 보면 강이나 바다조차 땅이다. 수산물, 해산물도 모두 땅의 산물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땅이 있으니 집을 짓고 산다. 허공의 아파트조차 땅의 기초 없인 불가능하다. 그 땅에 길이 있어 사람들이 다닌다. 학교나 일터나 문화 등 그 모든 게 그래서 가능하다. 이렇게 살림살이 관점에서 보면 땅은 우리 삶의 가장 기본 토대이며, 따라서 고맙고도 고마운 존재다.

그런데 요즘은 땅이 돈인 세상이 되었다. 살림살이 관점이 아니라 돈벌이 관점으로 세상을 보니 모든 땅이 돈이다. 그래서 어느 부동산 중개소의 간판에는 "땅은 거짓말을 않는다"고 외친다. 땅에 투자하면 반드시 돈을 번다는 뜻. 그러나 살림살이 관점에서 보면 이 말 자체가 거짓말이다. 왜 그런가?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보자.

서울 강남 소재의 어느 기획 부동산이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철학을 강조하며 청년들을 고용한다. 연봉이 얼마며, 앞으로 전망이 어떠하다며 그럴듯하게 꼬드긴다. 전국의 시골 구석구석 골짜기까지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보여 준다. 요즘은 컴퓨터 내지 휴대폰으로 전국 곳곳을 들여다본다. 이들이 하는 일은 특히 세종시나 여타 혁신도시들처럼 새로이 건설되는 곳, '기회의 땅'이 열리는 곳과 그 외곽까지 마치 이를 잡듯 샅샅이 뒤져 미개발 농경지나 임야를 찾아낸다. 상대적으로 값싸지만, 머리를 잘 쓰면 금세 황금이 되는 곳들이다. 이제 투자와 투기는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 원래 자본의 투자 자체가 투기다. 수익에 대한 위험성이 크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시세 차익(지대)을 노린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만, 투자는 경제학적인 용어이고 투기는 사회학적인 용어일 뿐이다.

이제 돈을 벌려면 그런 땅을 팔아야 한다. 누구에게? 중산층 이상, 돈이 좀 있는 이들에게. 그래서 매주 요일마다 부동산 세미나를 연다. '누구는 어디에 투자해 1년 만에 몇억 벌었다.' 이 한마디면 모두 눈이 뒤집힌다. 그래서 15명 내외를 한 팀으로 꾸려 매주 세종시로 '부동산 투어'를 한다. 현장까지 소풍을 가는 셈이다. 나들이를 하며 맛집도 즐기고 돈벌이도 하고! 무슨 이런 환상적인 프로그램이 다 있나, 하며 너도나도 몰린다. 좋은 말로 투자, 나쁜 말로 투기가 바로 이것이다.


현장에 가 보면 농경지나 임야(야산)가 있다. "저기에 어떻게 집을 짓나요?" 누가 물으면, 회사는 멋진 설계도를 내민다. 잘 정리된 전원주택 단지 그림이다. 200평씩 되는 땅을 하나씩 분양한다. 원래 농경지나 산을 개발하려면, 특정 용도에 맞아야 하고 각종 허가 조건들이 맞아야 한다. 예컨대, 쌍방 통행이 가능한 진입로도 만들어야 하고, 행정 당국에 각종 인허가를 받아야 하며, 오폐수 시설 등 여러 가지 인프라(도로, 전기, 수도, 근린생활시설 등)를 만들어야 한다. 한 개인이 하긴 힘드니 회사가 다 알아서 한다며 예비 투자자들을 안심시킨다. 이제 투자자들은 전체 비용의 1/N씩만 부담하면 된다. 개인이면 엄두도 안 날 일인데, 부동산 회사가 다 알아서 한다니, 뭉칫돈 불리고 싶은 자들은 그냥 일정한 돈을 통장으로 쏴 주면 끝이다. 세상, 참 편리하다! 돈 놓고 돈 먹기가 정말 '식은 죽 먹기'. 어차피 남아도는 돈, 일정 액수의 돈만 투자하면 집 지을 땅이 저절로 생기고, 일단 산을 까부순 뒤에 몇 년 기다리면 산 위 경치 좋은 곳에 별장을 하나 지을 수도 있고, 정 안 되면 시세 차익을 남기고 팔아넘기면 된다. 이렇게 '땅은 거짓말을 않는다!'

그러나 '회사''사람'은 거짓말을 한다. ? 법이나 정책으로 규제되는 지역도 마치 규제가 없는 것처럼, 개발이 불가능한 보존 지역인데도 개발이 되는 것처럼 속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청 공무원들 역시 높은 사람의 부탁이나 뇌물 앞에 거짓을 행한다. 머리와 돈을 쓰면, 불법이 합법처럼 둔갑한다. 각종 조작과 편법을 쓴다. 예컨대, 거주자가 거의 없는 농경지 한복판에 '근린생활시설' 허가가 나고, 좁은 농로가 2차선 도로로 변한다. 산지 경사도 기준을 피하기 위해 의원들을 통해 조례를 바꾼다. 이런 식이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고, 규정을 우회한다. 지방의회 의원들은 각종 개발 정보를 남보다 우선 접하기에 땅 투기하기도 좋다. 개발업자들을 잘 도와야 미리 사 놓은 땅도 쉽게 황금으로 변한다. 일심동체다. 인생은 아름답고 땅은 황금이다!

그래서 '땅은 거짓말을 않는다'며 술잔치, 돈 잔치를 벌인다. 돈밖에 보이지 않는 자들이 '순진한'(?) 그러나 탐욕적인 중산층을 꼬드겨 투기꾼으로 만든다. 처음엔 투자자이지만 갈수록 투기꾼으로 변한다. 이런 식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이 '삼천리 투기강산'으로 변했다. 이런 분위기에 남북통일? 아이고, 무섭다. 북한도 투기 대상이 될까 봐 두렵다. 투기와 난개발, 기획 부동산을 잡지 않으면, 경제도 통일도 모두 헛일이다. 난개발과 투기를 확실히 잡을 장치(: 중국, 싱가포르, 에티오피아처럼 땅은 모두의 것이니 매매 금지, 건축물만 매매)를 마련하기 전에는 행정수도 세종시라든지 지방 분권 강화, 남북통일 등은 모두 헛일이다. 정치가나 행정가들, 그리고 시민들이여, 제발 정신 차리자! 시애틀 추장의 외침처럼, "우리는 땅의 한 부분이고 땅은 우리의 한 부분"임을 알기나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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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것

김계월/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부지부장

 

저는 항공기 기내 청소를 하는 노동자입니다. 20146월 아시아나항공 하청의 재하청 업체인 케이오()에 입사해서, 코로나19로 인하여 2020511일자로 정리해고가 되었습니다. 거리에 천막을 치고 부당한 해고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그 해고 판결문을 받기까지 100일 하고도 15일이 지났습니다.

저희 청소 노동자들은 승객들의 쾌적한 비행을 위해 사용했던 모포와 베개를 비닐봉지에 가득 담아 좁은 기내를 오가고, 의자 벨트를 가지런히 정리하고, 포켓에서 오물을 빼내며 허리를 잠시 펼 시간도 없이 반복적으로 일을 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항공기 한 대라도 더 일 시키려고 밥시간을 지켜 주지 않아 저희는 승객들이 버리고 간 과자, 초콜릿 등을 먹으며 허기진 배를 채웠습니다.

한여름 더위에 에어컨조차 틀어 주지 않아서 하루에도 서너 번씩 작업복이 젖었다 말랐다 반복하며 일했고 캄캄한 항공기에서 손전등을 켜고 일하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퇴근 시간도 지켜 주지 않아서 감독(중간 관리자)하고 자주 언쟁도 해 가며 퇴근 시간 지키기(퇴근 15분 전에는 비행기 청소 안 받기), 밥시간 지키기, 파워(전원) 안 들어온 비행기 청소 안 하기 등 기본적 권리 찾기를 하며 근무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일해 온 저에게 회사는 코로나19를 핑계로 희망퇴직을 하거나 무기한 무급휴직에 동의서를 쓰라고 했지만, 서명을 하지 않았고 민주노조 조합원 8명과 함께 정리해고 당했습니다. 회사는 정리해고를 하기 전 4월부터 9월까지 70퍼센트의 유급휴직을 주겠다고 3161노조(한국노총 소속)와 합의한 내용을 공지했지만, 3일 만에 합의한 내용을 뒤집었습니다. 선택의 시간은 일주일뿐이었고 그 시간 동안 정말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회사의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민주노조의 간부로서 이 부당한 결정에 팀장과 동료들이 모인 자리에서 항의와 설득도 했지만, 고민하던 동료들은 하나둘씩 희망퇴직을 하고 무기한 무급휴직 동의서를 썼습니다. 한 동료는 아끼던 작업복을 깨끗이 세탁해 "다음에 저를 불러 주면 제 작업복을 주세요" 하고 울면서 회사를 떠났고, 또 다른 동료는 머리가 너무 아프고 살이 빠진다며 하소연했습니다.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인천공항을 뒤덮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회사는 모든 책임을 케이오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태도를 보였고, 위로 한마디나 대책의 말도 없었습니다. 선종록 대표라는 사람은 정말 악덕 사장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코로나19 시국을 이용해 민주노조 간부들을 정리해고하는 지경에 이른 것도 민주노조를 말살하려는 속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당한 정리해고에 항의하며 종각역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한 지 3일 만에, 그것도 광주민중항쟁 40주년 기념일에 농성 천막이 종로구청과 공권력에 의해 강제 철거되었습니다. 우리는 물러서지 않고 두 번, 세 번 농성 천막을 설치했지만 그마저 강제 철거당해 1톤 트럭과 1인용 텐트로 농성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던 중 713일 인천지방노동위원회, 716일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서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결을 받아 냈습니다. 그러나 회사는 아직도 복직 이행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재벌의 횡포는 법도 무시하며 이렇듯 해고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습니다.

▲ 지난 6월 세 번째로 천막이 강제 철거된 날 1인용 텐트를 치고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노숙하는 김계월 부지부장.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코로나19로 원청 아시아나항공은 17천억 원이라는 고용유지 지원금을 정부로부터 받아냈지만 하청 또 그 하청 케이오는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채 수백 명이 희망퇴직으로 무기한 무급휴직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선종록 대표는 이런 사실을 외면한 채 민주노조 탄압과 말살로 일관하면서 인간의 기본권과 노동자의 노동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는 아시아나 하청 노동자들이 하루빨리 복직할 수 있도록 사측을 제대로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뿐입니다.

거리에서 농성한 지도 어느덧 봄을 지나 긴 장마를 견디고 9월입니다. 아침저녁으로 살갗을 스쳐 지나는 바람이 새삼 고맙기까지 한 건 여름 내내 습하고 더운 날씨에 땀띠로 고생한 일이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뜨거운 땡볕 아래에 구슬땀을 흘리며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피켓 선전을 함께해 주신 연대 동지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동지애로 남아 있다는 걸 피부로 느낍니다. 절대로 포기하지는 말자, 뼛속 깊이 다짐 또 다짐하며 저는 오늘도 해고자란 딱지를 떼고 현장으로 돌아가는 그날을 위해 투쟁할 것입니다. 그리고 코로나19보다 더 무서운 해고자 없는 세상을 위해 뚜벅뚜벅 발걸음을 재촉하겠습니다.

▲ 해고 통보 내용증명을 피켓으로 만들어 금호아시아나 본사 앞에서 선전전을 하는 김계월 부지부장. 사진 제공_ 공공운수노조 아시아나케이오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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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10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평등 세상을 꿈꾸며 걷는 단양팔경


_ 김용심, 사진_ 정인열

 

▲ 단양 남한강 잔도길. ⓒ작은책(정인열)


우리가 옳다!(이용덕, 숨쉬는책공장, 2020)는 고속도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7개월간의 투쟁을 기록한 책이다. 직접고용 판결을 묵살한 채 노동자를 비정규직 자회사로 내모는 거대 공기업 한국도로공사의 횡포에 맞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처절하게 투쟁한다. 그 뜨거운 기록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과 아픔,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고 일어서려는 강렬한 의지와 희망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우리가 옳다!(이용덕 지음, 숨쉬는책공장 펴냄, 2020)


책과 함께 충청도 단양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을 함께한 <작은책일꾼 정인열 씨의 차는 하이패스 차량인지라 톨게이트를 거침없이 휭휭 지나간다. 그래서 여행길에 가끔 마주치곤 했던, 피곤하지만 선량해 보였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만나지 못했다. 그들을 일으켜 세운 힘은 무엇이었을까.

도로공사 관리자가 저보고 선생님, 잠깐 자리에 앉으세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왜 댁의 선생님입니까.’ 반박했습니다. 제가 장애인으로 2002년 입사했습니다. 그동안 언제 그렇게 대우해 줬다고 선생님, 선생님 합니까. 저는 나이가 많고 직접고용이 된다 해도 얼마 다니지 못합니다. 후배들을 위해, 비정규직을 줄이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장애인, 비정규직, 고연령, 여성···. 세상의 모든 약한 고리를 다 모은 듯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그런데도 자신들만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 그보다는 더 많은 비정규직, 더 많은 약자들을 위해 싸웠다. 그래야 더는 자신처럼 끔찍한 고용불안과 차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없을 테니까. 그래야 좀 더 사람답게살 수 있는 세상이 될 테니까.

이제는 나로 한번 살아 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그들의 투쟁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도, 흩어지지도 않는다. 언제나 곧게 제 길을 간다. 마치 모든 이들을 품어 안는 성스러운 어머니 초모랑마(에베레스트의 본래 이름: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뜻)처럼.

단양에 도착해 양방산 꼭대기에 올랐다. 비록 초모랑마처럼 드높은 산은 아니지만 양방산은 그 우뚝한 정상에 서면 단양 시내가 한눈에 다 보인다. 오밀조밀 세워진 도시를 시원하게 휘감아 내려가는 남한강 모습에 속이 탁 트인다.

▲ 양방산 꼭대기에서 내려다보이는 단양 시내 전경. ⓒ작은책(정인열)

이때 보이는 단양은 신단양이다. 1985년 충주댐의 건설로 댐의 상류에 있던 옛 단양은 거의 물에 잠겼고 주민들은 새로 구획된 신단양으로 이주했다. 개발 논리에 밀려 졸지에 실향민이 된 사람들은 고향이 그리울 때면 강둑에 내려가 하염없이 물속을 바라본다고 한다. 맑은 날이면 그 깊은 물속에서 언뜻 자신이 살던 집의 지붕이 보인다던가.

단성면 벽화마을은 그렇게 수몰된 구단양의 모습이 벽화로나마 남아 있는 곳이다. 붉은 꽃과 푸른 덩굴 사이로 간간이 수몰된 지역의 문화재 그림들을 만날 수 있다.

▲ 벽화마을 입구. 알록달록한 그림들 사이로 왼쪽에 있는 적성비가 눈에 띈다. ⓒ작은책(정인열)


벽화마을에서 조금 올라간 언덕에는 단양수몰이주기념관이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문은 닫혀 있었지만 주위의 수려한 경치에 취해 잠시 기념관 앞뜰을 거닐어 본다.

뜰에는 수몰 지역에서 가져온 석탑과 비석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그중 우화교 돌다리 설명이 눈에 띈다. 마을에 꼭 필요한 다리라 모두가 호응하여 젊은이는 힘을 보태고 나이 든 사람은 곡식을 내어 돌다리를 놓았다는 사연. 그렇지. 꼭 필요한 일이라면 다 같이 호응하여 힘도 보태고 곡식도 내어 모두 함께 살길을 도모해야지. 그렇게 연대는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비로소 변화도 시작된다.

▲ 우화교 돌다리 기념비. 충주댐의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단양수몰이주기념관으로 옮겨 왔다. ⓒ작은책(정인열)

돈으로, 힘으로 억압하는데 우리는 연대의 힘으로 싸워야 합니다. 무서울 정도로 싸우는 동료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아직도 저들은 우리가 자기들 시다바리인 줄 압니다.”

공부 잘하고 시험 잘 봐 정규직 되는 분들도 대단하지요. 하지만 남들이 하기 싫은 일들, 꺼리는 일들을 하는 것도 대단한 거란 걸 새삼 느끼게 되더군요. 세상의 잣대에 제 생각이 길들여진 것이죠. 노동자는 평등한 겁니다.”

그랬다. 노동은 평등하며 모든 노동자, 혹은 모든 사람들은 다 평등하다. 그 평등함을 억누르는 것이 부당함이요, 부조리며, 진짜 불법이다. 결국 문제는 하나이다. 우리가 옳다!의 저자는 그 문제를 이렇게 정의한다.

결국, 근본적 질문은 삶이 먼저냐, 이윤이 먼저냐다. 이 가치관으로 싸워야만 노동자들은 더 인간답고 풍요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

삶이 이윤보다 앞서는 세상. 노동이 자본보다 소중한 세상. 그런 세상은 정말 꿈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곱씹으며 단양 잔도길을 걸어 보았다. 잔도(棧道)는 험한 벼랑이나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따라 낸 길을 뜻한다. 관광 목적으로 지었다지만 목적이야 어쨌든 굽이치는 남한강 자락을 따라 만들어진 절벽길 잔도의 풍경은 아찔하고 황홀하다.

본디 단양은 아름다운 절경이 많은 곳이다. 그 유명한 단양팔경도 있지 않던가. 강줄기를 따라 제7경과 8경인 도담삼봉과 석문을 시작으로 제1, 2, 3경인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을 두루 돌아보았다. 발길 닿는 어디나 다 절경인지라 도시의 칙칙한 잿빛 풍경에 익숙한 눈이 마냥 행복해진다.

▲ 단양 제1경인 하선암. 널찍한 마당바위 위로 보이는 크고 둥글넓적한 바위가 하선암이다. ⓒ작은책(정인열)

마지막으로 제4경 사인암을 들렀다. 사인암은 고려 때 사인벼슬을 살았던 대학자 우탁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우탁은 역동(易東)선생이라고도 불리는데 그가 어찌나 역학에 밝았던지 역이 동으로 넘어왔다는 뜻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다. 또한 우탁은 임금 앞에서도 꼿꼿한 성정으로 유명한데 고려사에 그 모습이 잘 나와 있다.

우탁이 흰옷에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거적을 깐 채 왕의 잘못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신하들이 상소문을 펴들고 감히 읽지 못하는데, 우탁이 크게 소리를 질러 신하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죄를 알고 있느냐!’ 하고 매섭게 꾸짖었다. 신하들이 모두 두려워하고 충선왕도 부끄러워했다.”(고려사109 <우탁 열전>)

▲ 단양 제4경인 사인암. 깎아지른 듯한 암벽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병풍인 양 힘차게 서 있다. ⓒ작은책(정인열)

권력에 굴하지 않는 꼿꼿한 기개가 돋보인다. 우탁이 옳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고, 부끄러움은 가르쳐야 한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저 비겁한 자본을 향해 우리가 옳다!”고 외쳤던 것처럼. 그래야 자본가들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세상을 바꾸고 뒤흔들 수 있는 진짜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깨닫지 않겠는가.

노동자 계급에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노동자들은 생산과 판매, 서비스의 주체로 마음먹으면 세상을 멈출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단결과 협동, 연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다. 톨게이트 투쟁은 그 힘의 아주 작은 일부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 별의 이름은 노동자.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보리, 2012)와 《백정, 나는 이렇게 본다》(보리, 2019)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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