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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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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9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우리는 어떤 내일에 닿을까

이창근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전 기획실장

  

복직하지 못한 사람 가운데는 이름을 바꾼 경우가 더러 있었다그 사정을 다 알지 못하더라도 개명까지 할 정도라니어떤 절박함이 느껴졌다한둘이 아니라서 조금 놀랐다해고자도 있고 희망 퇴직한 사람도 있었으니 굳이 해고자에게만 국한시킬 일은 아니었다아들과 함께 개명한 형(동료)도 있다살면서 이름 바꾸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개명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이름 자체가 아니라 그가 처한 저간의 사정이다몸부림을 쳐 봐도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놓였다 싶을 때그 시간이 개명의 때가 아닐까 싶다쌍용차에도 이름 바꾼 힘까지 보태졌던지 개명한 형들 또한 이번에 모두 복직을 이뤄 냈다지난 5월 4일 쌍용차 마지막 해고자들이 복직했다자그마치 10년 하고도 11개월 만이다. 2009년 쌍용차 파업 이후 줄곧 공장 밖에서의 삶이 공장 담벼락을 넘어서도 시작된 것이다. 11년 동안 직원들 상대로 피켓 들고 섰던 정문 앞에서 시업 종소리 들으며 공장이 아닌 노조 사무실로 향하던 씁쓸한 어제는 없다출근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고 퇴근하는 동료들의 등을 보며 하루를 마감했던 지긋지긋하던 그 일상도 이제는 안녕이다.

▲ 지난 5월 4일 가진 마지막 복직자들의 기자회견. 사진_ 이창근

입사 동기인 정민이도 11년 만에 복직자 명단에 있었다그 사이 펄펄 끓던 서른두 살 청춘의 꿈틀거림은 지렁이처럼 마른 눈물 자국만 남긴 채 온데간데없이 휘발했다세월의 바코드라도 찍힌 듯 마른 근육과 까만 피부가 특별히 더 애달팠다이제는 40톤 트레일러를 몰지 않아도 되고 4대강 사업 끝물에 올라탔던 육중한 덤프에도 오르지 않아도 된다처가댁에 해고자 신분을 속이기 위해 명절 때마다 일 있다는 핑계 들어 더 이상 걸음 끊지 않아도 된다정민이는 11년 동안 해고자 신분을 처가와 친인척들에게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누구 하나 묻지 않았던 것일까질문 가능한 공간을 피해 왔던 것일까이해되지 않지만 해고자 생활 11년은 통상적인 이해 범위를 벗어날 때가 많다정민이뿐만 아니라 몇몇 동료들 또한 해고 사실을 용케 숨기며 11년을 살아 냈으니까적어도 개명은 사회생활을 전제로 한다지만 있는 이름조차 쓰지 않고 스스로 사회에서 유폐시키는 삶 또한 그 속내가 얼마나 복잡했던가.

복직한 이들은 요즘 빚 갚는 데 여념이 없다월세 살던 후배 한 명이 적은 돈 모으고 은행 대출 껴 전셋집으로 들어갔다왜 그렇게 기분이 좋던지내 일처럼 기뻤다장마철만 되면 빗물이 새고 장판은 뜨고 벽지가 곰팡이로 변하는 집에그것도 얹혀 살던 또 다른 후배 또한 깨끗한 새 아파트로 전세 이사를 했다는 소식도 무척 기뻤다아이가 다섯인데 그 아이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복직의 참 의미가 아닐까도 싶었다진심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이혼 위기였던 형들의 어두컴컴한 집에 환한 LED 전등이 다시 하나둘 켜지고 있다오십 넘어서도 용돈 타 써야 했던 부모님께 이제는 매달 용돈을 드릴 수 있는 생활이 얼마나 축복인가생각만 해도 짜릿하다피켓 들고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이들의 냉대와 작은 기사에도 여지없이 달리는 그 악다구니 댓글에도 11년 동안 견뎠다비닐 천막 밑으로 흐르던 빗물을 보면서도 마음속에 꼭 쥐었던 그 사소하고 소소한 작고 숱한 다짐들을 하나둘 이뤄 낼 수 있는 이 생활이 얼마나 기쁘고 고마운 일인가출퇴근길에서 보는 형들의 웃는 얼굴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는 요즘이다.

함께했던 동료들끼리 복직해서는 자주 볼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생각이 바뀌었거나 관계가 소원해진 것이 아니라 어쩌면 정상적인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찾아 봐야 할 곳도 늘었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 또한 길어졌다훌쩍 커 버린 아이들과 부쩍 야윈 부모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을 더는 미뤄 두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나중으로 무작정 미뤘던 일들이 하나둘 내 일로 몰려들고 애써 외면했던 경조사에도 이제는 꼬박꼬박 찾아가야 한다해고자라서 열외로 살았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대열에 합류도 해야 하고 끼어도 봐야 한다이것저것 핑계 대기에는 사회가 허용하는 나이로부터도 한참을 벗어났고 통용되는 상식도 외면할 염치가 더 이상 없다늦게나마 추스를 수 있는 염치가 생겨서 다행이다그렇다고 그저 일상이라는 이불을 덮고 아늑하게 드러눕고만 있기에는 바닥이 무척 차갑다해결되지 않은 쌍용차 손배 가압류 법정 이자만도 초 단위로 불어나 어느새 40억이 넘었다정권이 바뀌고 경찰청장이 바뀌어도 감감무소식인 쌍용차 손배 가압류 문제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밥 먹을 때마다 따끔거린다.

▲ 지난 2월 복직 연기 발표에 쌍용자동차 정문에서 항의하는 복직 대기자들. 사진_ 이창근

가해자와 피해자는 기억의 순간이 다르다가해자는 가해의 순간이 아닌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은 자기 행동의 근거와 알리바이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피해자는 피해의 과정이 아닌 피해 그 순간과 그 이후를 기억한다그런 면에서 둘의 화해는 불가능하다그저 조정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다쌍용차 해고 사태는 그런 점에서 공장 안에서는 회피되고 있다직면하지도 않을뿐더러 그런 기회조차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세월의 유속만 믿고 아픔이든 슬픔이든 그저 그 시간 속에서 씻겨 나가기만 바라는 것 같다피해자라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그 위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돕는 것이 우선이다가해자 또한 마찬가지다. 4년 먼저 복직한 나로서는 이 내재하는 갈등이 가끔 두렵다표면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입 닫고 있는 그 마음 안에 어떤 분노가 자리 잡고 있는지 자주 두렵다이것은 우리 모두의 손해로 때론 낭패로 다가올 것이고 결국에는 회사 스스로 무너지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복직한 이들의 생의 가장 따뜻한 날들이 길어지길 바라는 마음까지 무너지면 안 되지 않는가.

내 노트북 바탕 화면은 파업 당시 공장 옥상에 걸터앉은 동료들의 사진이다모 기자가 찍은 이 사진은 2009년 7월 말의 맑은 여름날이다옥상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나고 비행기가 날아가는 모습이 작게 잡혔다지난 해고 기간 동안 나는 이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했고 다짐도 했다우리는 반드시 내일에 가 닿겠노라고그러나 어떤 내일인지는 생각하지 않았고 영글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았다다만 함께 살자는 구호가 자음과 모음이 되어 만들어 내는 어떤 말이었으면 했다모두가 복직하고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쌍용차 복직 노동자들의 내일은 어떤 날이어야 할까아니 어떤 내일이면 기쁘고 즐거울까무너지지 않는 단단한 개인으로 친절과 배려가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면 좋겠다우리가 복직 과정에서 축복처럼 받았던 수많은 연대와 사랑과 기쁨이 드디어 우리를 통해 흘러 나갔으면 좋겠다장영은 작가의 말처럼 나의 고통을 과장하지 않고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인간의 품위를 가진 사람이었으면 더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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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교장과 수다 떨 수 있는 학교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교장과 수다를 떨 수 있는 학교, 이런 학교에 근무하는 게 내 꿈이었다. 이제 내가 교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런 학교를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 마음 같지 않아. 수다는 아무하고나 떨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수다를 떨려면 많은 게 갖춰져야 하더라고. 수다가 가능한 문화가 만들어져야 가능하더라니까. 이게 안 되면 수다가 아니라 간담회, 좌담회 또는 잘해야 토론회 수준이나 될까. 설교나 다툼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교직원과 교장이 수다 떨 수 있는 학교를 만들까 생각해 봤어. 실제로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수다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며 찾아낸 핵심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고.

다른 것보다 먼저 직급을 내려놓아야겠어. 교장이 아무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말해 봐야 헛말이더라고. 시어머니가 아무리 친정 엄마처럼 생각하며 지내자고 말해 봐야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냥 교장이라는 건 인정하고, 우리 문화 속에서 교장이라는 낱말이 품고 있는 의미를 받아들이되 그 선에서 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버리고 떨쳐 내는 거야. 쓸데없는 권위,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목에 힘주는 권위만은 내려놓는 거지. 내가 교장으로 발령 날 때부터 내 친구가 농담처럼 하는 진담이 있어. 어디 가면 수저 먼저 놓고, 물 따르고, 차는 자기 손으로 타 먹고 그러라고. 교장 대접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이지. 특권을 누리려고도 하지 말고.

그러면서도 교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해. 권위를 얼마나 내려놓을 건지는 그 사회, 조직의 소통 문화, 의사 결정 구조 등을 살펴서 정해야 한다고 봐. 권위를 내려놓고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마저도 그 조직, 그 사회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는 있어.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이 있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내가 지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조직과 구성원의 특성 그리고 나의 특성을 함께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거지. 자칫하면 아이들 포함 1250명이 사는, 학부모 포함하면 3~4천 명의 조직이 무너지는 수가 있으니까 상황에 맞게 수다를 떨며 살아야지. 하지만 조금씩 수준을 높여서 수다의 편안함을 늘이는 게 내 목표야.

두 번째로 나이를 떠나야 수다가 가능하다고 믿어. 내 나이는 지금 학교에서 어느 정도냐고? 랭킹 1! 36개월 뒤 정년퇴직이지. 나이가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주고받는데 큰 장애가 돼. '젊은 놈이 말하는 뽄새 봐.' 하거나 '너 나이 몇이야?' 하면서 민증 까자고 덤비는 사람도 있어. 나이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장하거나 지혜의 총량을 결정하거나 인간성을 보증하지는 못하는데도 그래. 오죽하면 우리말에 존댓말이 있어서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도 있을까.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대접받겠다는 마음을 털어 내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 갈 수 있고 수다가 가능하단 말이지. 외국에 나가 지내다 온 분들 가운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직책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과 편안하게 이야기 나눈다고 하더라고. 마치 비슷한 나이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라나. 나이를 털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나이로 인한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젊은이의 총명함, 추진력, 모험심과 나이 든 이의 지혜로움, 멀리 넓게 보는 눈, 많은 사람을 겪은 경험이 버무려진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너무 크게 볼 것 없고 지금 당장 서로가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이를 털어 낼 용기가 젊은이와 나이 든 이 모두에게 필요해. 나이가 주는 혜택을 미련 없이 털어 낸 채 말하려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마음같이 쉽지 않아.

마지막으로 성의 구별을 떠나야 한다고 믿어. 난 초등 교사라 평생을 여성이 더 많은 환경에서 살아왔어. 대학교 가서는 우리 반 40명 가운데 남자가 셋이었고 발령받은 뒤에는 교사 60명 가운데 남자 교사는 나 혼자일 때도 있었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내 삶이야. 그런데 남녀라고 선을 긋고 말을 섞지 못한다면 남자와 여자로서 갖고 있는 장단점을 보완하고 보충해서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어려움이 생겨. 그냥 남녀를 떠나 사람으로, 교사로, 한계와 부족함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가슴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 세상에 유일한 특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볼 때 존중하면서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이야기하고 일을 풀어 갈 수 있다고 믿어. 어색하지만 남녀의 선을 지키면서 사람으로 만나려 노력하는 중이야.

직급, 나이, 남녀를 내려놓으면 뭐가 남을까? 사람, 인간. 그냥 사람으로 보는 거지. 직급, 나이, 남녀라는 낱말에는 어느 정도 편견이 담겨 있어. 물론 법에 정한 권한과 책임이 있는 직급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평적으로 관계를 풀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거야.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담장이지. 직급이라는 담장, 나이라는 담장, 남녀라는 담장. 어떤 담장은 담만 있는 게 아니라 고압선까지 쳐 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섬뜩할 때도 있어.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지.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등 모든 사이에는 선이 있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로서 갖고 있는 존엄성과 간직해야 할 자기만의 영역이 있어서 그것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넘어가면 안 되지만, 그것은 직급, 나이, 남녀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런 마음으로 만나는 걸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의 만남이라고 봐.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수다야.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선에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학교 문화 속에서 살고 싶어. 아이들, 교사, 직원, 학부모,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수다를 떨되 교장으로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교장. 수다를 떤다는 것은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존엄성을 지켜 주는 것이며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해. 조금 더 민주화된 사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교육에 충실한 학교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은 수다에서 시작된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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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소성리 부녀회장이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 혐의?

손소희/ 사드 반대하는 성주 주민

 

 지난 528일부터 29일까지 밤새도록 군대와 경찰이 합동으로 소성리에서 군사작전을 펼치듯 업그레이드된 사드 장비를 소성리로 추가 반입했다. 성주 주민, 김천 시민, 평화 지킴이들 100여 명은 사드 장비 추가 반입을 저지하기 위해 사드 기지로 오르는 진밭교를 막았는데, 8000명은 족히 돼 보이는 경찰은 통행을 차단하고 주민을 고립시켜 밤새도록 감금했다. 해가 밝아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길을 열어 주지 않아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밤새도록 갇혀 있던 사람들은 생리적인 현상도 억압당해, 급기야 한 여성은 도로 한복판에서 담요를 두르고 볼일을 보는 수치와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2016년 사드 배치가 소성리로 결정되고 난 이후부터 늘 그러했지만, 소성리의 연로한 할머니들이 치욕스럽게 밤을 지새워야 했고, 소성리는 월례 행사처럼 수모를 겪었다. 가슴에 불덩이를 안고 산 지가 벌써 4년이다.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다며 소성리 할머니들과 평화 지킴이들은 63일 성주경찰서를 찾아가 성주경찰서장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경찰들이 우르르르 달려나와서 우리의 앞길을 막았다. 할머니라고 봐주지 않았다. 경찰들이 막는 바람에 우리는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뙤약볕 아래서 한참 동안 연좌 농성을 해야 했고, 연로한 할머니들은 건물 현관 그늘진 자리로 모시자고 했지만, 경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 건물 현관 옆 경사로를 조금 비워서 할머니들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다.

성주경찰서 안에서 항의를 하고 있는 소성리 주민들. 사진 제공_ 소성리주민대책위


경찰 한 사람이 할머니들에게 다가와 괜히 실없는 말을 걸었다. "다른 성주 주민들은 가만히 있는데, 왜 소성리 주민들만 맨날천날 이 난리인지 모르겠다"며 깐죽거리고 비아냥거리는 뉘앙스를 풍기면서 말을 했다. 할머니들은 용케 그 말을 알아듣고는 노발대발 화를 냈다. 소성리 주민들을 마치 별난 사람 취급하는 데 화가 나고 무시당한 기분이었다. 경찰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강하게 항의했다.

소성리로 사드가 들어오는 바람에 마을은 경찰들의 군홧발에 엉망진창이 되고 주민들은 전쟁 위험을 안고 불안하게 살아갈 걱정이 태산인데, 그 경찰의 말은 소성리를 폄훼하는 말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항의에 경비과장이 그 경찰을 불러왔고, 그는 정중히 사과하기는커녕 소성리 주민들을 걱정해서 한 말이라고 둘러대어, 오히려 할머니들의 부아를 돋우었다. 그때 마침 소성리 부녀회장 순분 씨는 뙤약볕에서 오래 앉아 있어 현기증이 나고 혈색이 안 좋았다. 경찰도 걱정이 되었는지 119 구급대원을 불러서 혈압을 재고, 머리에 시원한 아이스팩을 올려 주었다.

아이스팩을 머리에 대고 있던 순분 씨는 사과 같지 않은 말로 부아만 돋우는 경찰에게 화가 나서 바닥을 향해 아이스팩을 내던졌는데, 하필 아이스팩이 바로 앞 건물 기둥을 맞고는 옆에 서 있던 여경의 얼굴로 튀어 버렸다. 의도치 않게 엉뚱한 사람이 맞았으니 순분 씨도 놀랐고, 미안한 마음에 여경을 향해 사과를 했다. 정보과 형사와 경비과장이 나와서 여경의 상태를 살피고는 괜찮다고 했지만 순분 씨는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에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정말 괜찮은 줄 알았다. 아이스팩은 녹아서 물컹한 상태였기에, 다른 이들도 여경의 얼굴을 살펴보고는 얼굴에 살짝 튄 정도라서 다친 데는 없어 보인다고 했다. 그 일은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우리는 성주경찰서 이정수 서장에게 소성리 주민들과 평화 지킴이들에 대한 인권 침해와 폭력 진압을 사과하라고 요구하면서 날마다 저녁 시간에 성주경찰서 앞에서 피켓팅과 집회를 이어 갔다. 그러나 서장은 사과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우리는 한 달 가까이 성주경찰서 앞에 진을 치고 항의하며 경찰들의 만행을 선전했다. 그러다 72일 오전에 성주경찰서 이정수 서장에게 사과를 받아냈다. 그렇게 작은 승리를 거두었다.

성주경찰서 앞에서 항의를 하고 있는 소성리 주민들. 경찰은 우산을 쓰고 주민들은 땡볕에 있다. 사진 제공_ 소성리주민대책위


그런데 승리의 기쁨을 맛보기도 전에, 지난 72일 오후 미군들의 똥오줌과 쓰레기를 수거할 쓰레기 수거 차량과 분뇨차를 사드 기지로 들여보내기 위해서 경찰 병력 500여 명이 소성리로 들어왔다. 또다시 10시간 넘게 진밭교에서 치열하게 싸워야 했다. 여성들이 바리케이트로 우르르 들어가 시간을 끌면서 막고 저항했다.

오전에는 사과하고 오후에는 소성리로 병력을 배치하느라, 경찰서장은 똥줄이 많이 탔었나 보다. 그래서 억지 춘향으로 사과를 했었나 보다. 우리는 10시간을 저항하면서 마음껏 성주경찰서장을 비웃었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갑자기 고령경찰서에서 소성리 부녀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조사받으러 오라는 연락이었다. 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이라고 했다. 성주경찰서에서 벌어진 사건이라 고령경찰서로 사건이 접수되었다고 했고, 정보과 형사는 아이스팩으로 맞았던 여경이 고소했다고 알렸다. 정보과 형사는 여경이 까칠하고 남의 말을 듣지 않는다며, 요즘은 상급자라도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다고, 자신들이 말려도 그 여경이 고소를 했다면서 개인의 탓으로 돌렸다.

728일 오후 2시 순분 씨는 고령경찰서로 조사를 받으러 갔다. '특수'가 붙은 사항이라 가볍지 않았다. 변호사의 입회하에 조사를 받았다. 부녀회장이 경찰 조사를 받으러 간다는 소식을 들은 할머니들도 봉고차를 타고 고령경찰서로 향했다. 부녀회장만 고소했다니까 더 괘씸하고 억울하고 속이 터졌다. 성주대책위 이종희 위원장도 참외를 따다가 고령경찰서로 쫓아오고, 박수규 대변인도 하우스 공사 하다가 고령경찰서로 달려왔다. 소성리에서 사드 반대 하는 동지 열댓 명이 소성리 부녀회장이 조사받는 동안 고령경찰서 마당에 설치된 흡연 구역 정자를 차지하고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담배 피우러 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지루한 시간을 여럿이 함께 모여 우스갯소리를 해 가면서 화기애애하게 보냈다.

순분 씨는 자신의 일로 여러 사람들이 일도 못하고 경찰서에 와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마음이 힘들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우리대로 그게 어디 당신의 일이냐고, 다 같이 했는데 우리도 같이 조사받아야지, 하면서 위로하며 서로 힘이 되려고 노력했다.

이제 첫 조사가 끝났다. 조사를 받으면서 확인한 건 여경의 고소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주경찰서가 이미 내사를 진행했던 거다. 소성리 주민들은 부녀회장을 홀로 싸우게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경찰 조사를 마치고 다함께 고령에서 제일 유명한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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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년 8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직위 해제 당하고 진짜 교사가 됐다

김석현/ 전교조 대구지부 정책실장

 

나는 올해 8년 차 교사이다. 교사가 되기 전에 나는 하지 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모범생에 가까웠고 세상일에 대해서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대구시교육청 현관 앞에 천막을 차리고 앉아 농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629일에 학교로부터 무단결근으로 인한 직위 해제 소식을 들었다. 내 인생 최대의 비행이다. 남들이 들으면 왜 그런 위험천만한, 어쩌면 교단에 더 이상 설 수 없을 수도 있는 길을 선택했냐고 물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길이 바로 진정한 교사가 되는 길이었고 내가 학생들에게 가르쳐 왔던 것들을 몸소 보여 주는 길이었다.

전교조가 2013, 박근혜 정부의 고용노동부로부터 노조 아님통보를 받은 이후 2016년부터 전교조 대구지부의 전임자들에 대해 탄압이 이어졌다. 2016년부터 2020년까지 해직되거나 직위 해제 된 전임자가 나까지 총 5명에 이른다. 13개 시·도가 전임자를 인정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볼 때 대구에서 교사 생활을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정권과 교육청의 탄압을 받으면서도 후회는 없다. 처음으로 교직에 들어왔을 때보다는 훨씬 살아 있음을, 그리고 자유로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 학교에 들어왔을 때 교사가 되었다는 기쁨은 3월에 잠깐 스쳐갈 뿐이었다. 그 이후 현실이 닥쳐왔는데, 학생들과는 잘 지냈지만 대부분 교장, 교감과의 갈등이나 이해할 수 없는 학교 내 관례들, 그리고 일부 교사들이 보이는 위선적인 행동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하고 매일매일 고민에 빠졌었다. 내가 지켜본 바로는 대부분의 신규 교사들이 여기서 굴복을 하고 만다. 그리고 기존의 교사들과 똑같은 행동 양식을 체득하는데, 학교가 몇십 년이 지나도 잘 변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기에 내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말해 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다.

전교조에 가입하고 활동하면서 학교가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공간이라는 나의 생각이 과연 틀리지 않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수천 명의 교사들이 참교육실천대회라는 곳에 모여서 학교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해서 치열한 토론을 하는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학교의 문제점들은 별종들만 느끼는 것인 줄 알았는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느낄 정도로 분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대구는 다른 지역보다도 더 심각한 형태로 드러난 것이 많았다.

대구에서 코로나19가 급속도로 퍼져 나가던 2월 이후로, 나는 매일같이 학교에서 사무실 전화기를 붙들고 전화를 받았다. 몇 달 동안 쏟아질 민원이 며칠 사이에 쏟아졌다. 민원을 들어 보면 대부분의 기존에 있던 문제들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더 증폭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면, 직업계고에서 매년 준비하던 기능경기대회라는 것이 있다. 학교마다 경쟁이 과열되어 있어서 그 대회를 위해 합숙까지 시켜 가면서 혹독한 훈련을 한다. 학생들은 합숙을 하면서 몸무게가 10킬로그램이 빠지기도 한다. 최근 경북의 한 S공고에서 일어난 기능경기대회 준비생의 자살은 이러한 과열 경쟁과 무관하지 않았다. 대구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코로나19 상황임에도 훈련을 중단하지 않고 이어 가는 학교들이 있었다. 말 그대로 경쟁은 준전시 상황에서도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진단평가(일제고사)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중단되지 않았다. 시험지는 이미 2월에 인쇄가 되어 3월에 학교에 모두 배달이 되었다. 하지만 개학이 연기되면서 시험을 치르지 못하다가 학생들의 등교가 시작된 5월과 6월에 진단평가를 치라고 공문이 내려왔다. 교육 관료들은 학생들의 실질적인 기초 학력을 길러 주기보다는 단순히 객관식 평가를 통해서 적당히 부진 학생을 걸러 내고(교육적으로 몇 점 이하가 부진 학생인지 근거가 없다) 제대로 시간도 확보되지 않은 상황 속에 남겨서 공부를 시키면 기초 학력이 길러진다고 주장한다. 탁상행정도 이런 탁상행정이 없다. 결국 학생들을 입시 경쟁으로 내몰고 SKY에 진학할 학생들을 많이 배출하여 교육 수도의 자랑으로 삼는 것(대구는 자칭 교육 수도이다), 그것이 코로나19 감염 위험 속에서도 진단평가를 실시하는 이유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대구의 한 중학교 앞에서 김석현 정책실장이 진단평가 반대 일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전교조 대구지부

학교에서는 이런 교육적이지 못하고 기만적인 일들이 넘쳐 난다. 그렇기에 학교 현장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교육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나는 노조 전임자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대구시교육청의 독선과 불통은 코로나19로 더 심해지고 있는데, 소통하지 않는 대구시교육청에 제동을 걸 조직은 전교조 대구지부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전교조 대구지부는 코로나19 상황에서 대화와 소통으로 위기를 극복해 보자며 조건 없는 대화를 요구했지만 대구시교육청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전임자들을 직위 해제 하는 것으로 답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강은희 교육감에게 대화와 전임자 인정을 요구하며 교육청 현관 앞에 천막을 치게 된 것이다.

▲ 지난 630일 대구시 교육청 마당에서 대구 교사 결의대회를 열었다. 사진 제공_ 전교조 대구지부

누군가는 길거리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를 보고 학교에서 수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 교사의 본분이 아니냐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교직에 들어오면서 깨닫게 된 것은, 교사는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서는 안 되고 세상 밖으로 나가서 학교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한 싸움을, 그리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싸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서로 무관해 보여도 나의 수업과 교육 활동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정의롭지 못한데 이를 외면하고 어떻게 수업에서 정의를 논할 수 있을까? 나는 직위 해제를 당했지만, 그리고 길거리의 교사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제야 진짜 교사가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든다. 어서 전교조 법외 노조 문제가 해결되고 학교로 돌아가 학생들에게 길거리에서 겪었던 우리 삶의 불편한 진실들을 나누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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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베테랑 월급이 50만 원 적다

한영미/ 마트 시식 코너 노동자

 

 

아무도 몰랐다. 코로나가 덮칠 줄은. 전염병 때문에 지형 구도가 이렇게 달라지는 걸 보는 건 내 평생 처음이다. 마트에서 시식 알바를 하던 나는 오늘 갑자기 실업 상태가 됐다. 서울시에서 코로나 때문에 시식을 금지하라는 공문이 내려와서란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데 난들 목숨 걸고 시식 일하고 싶었을까? 그렇지만 코로나는 걸릴지 안 걸릴지 모르고 밥은 안 먹으면 확실히 죽는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귀한 내 목숨을 최저임금에 걸었었다. 그런데 오늘 출근하자 시식을 금지한다고 내일부터 나오지 말란다.

사실 세상이 이럴 때 마트에서 시식하는 것도 웃기는 얘기다. 그러나 아무리 파리 목숨이라도, 내일 먹을 밥그릇은 빼앗더라도, 숟가락까지 빼앗지는 말아야 한다. 마트 담당자에게 걱정되어 물었더니 자기들은 서울시 공문을 이행할 뿐이라고 한다.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하니 너희들은 회사에서 알아서 하겠지하는 반응이 돌아왔다. 마트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사원들은 마트에 물건을 대는 각자의 회사에서 월급을 받는 파견직 사원이므로 이럴 때 마트는 간단하게 사람을 정리할 수 있다.



기분이 더러웠다. 나와 자매처럼 지낸 고정 사원에게 회사에서는 어떤 입장인가를 물었다. 고정 사원 역시 나와 같은 회사에서 파견된 최저임금자이지만 마트에 물건을 진열하는 사원이므로 마트 입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또 고정 사원은 회사와 나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그는 곧 나오게 되겠지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코로나가 기승인데 아무 대책 없이 무조건 기다리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렇다고 기다리는 동안 월급 주는 것도 아니고. 상황 변화 없이 일을 다시 하게 되기는 쉽지 않을 거 같았다. 나는 회사에서 파견된 고정 사원에게 나도 생활하는 사람이니 차라리 해고해서 고용보험을 타게 해 달라고 했다. 나와 친구처럼 자매처럼 지냈던 회사 고정 사원은 이상한 논리를 폈다. ‘회사에서 나오지 말라는 게 아니지 않느냐.’ 그러니까 회사는 관계없다는 이야기다. 나로선 하루아침에 일자리가 없어지고 생계 수단이 사라지는 것이 심각한 일인데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안함이 없었다. 즉 고용보험도 뭣도 없이 손가락 빨고 기다리면 자기들 필요할 때 부른다는 이야기다. 나는 마음이 많이 상했다. 오늘 아침 때려잡은 바퀴벌레랑 내가 뭐가 다른가 말이다. 그날 그의 아무렇지도 않은 말투와 표정이, 그리고 회사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듯한 태도가 서운했다. 나는 고정 사원에게 내 상한 심정을 퍼부었다.

마음대로 해. 회사가 월급 줄 돈이 없으면 내 4대 보험 내 주겠니? 그때 되면 해고가 되든 어떤 조치가 취해지겠지. 회사에서 일당 짜게 줘서 다른 사람과 돈 차이가 한 달에 몇십만 원 날 때도 난 바보같이 나 없으면 네가 꾸려 갈 이 살림 걱정해서 의리로 참았어. 어쩌면 너는 내가 백수가 될지 모를 이 마당에 회사 입장만 얘기하고 나에 대한 걱정은 없냐.”

우리 회사에서는 최저임금이 오를 때마다 내 근무 일수를 줄였고, 다음 해에는 시간을 줄였고, 또 다음 해에는 일급도 줄였다. 그래서 나는 삼 년째 같은 일당을 받고 있다. 일하는 날만 줄어 월급은 이십여만 원이 줄었다. 모든 회사들은 편법으로 돈을 줄여 나갔는데, 버젓이 내놓고 하는 일을 나라에서는 모르는 것일까? 나는 나름대로 이 바닥에서는 베테랑이다. 그러나 회사의 편법 때문에 최저임금이나마 대우해 주는 회사보다 월급이 50만 원 차이가 났다.

더러워진 기분으로 나는 계속 고정 사원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이어 갔다. ‘만일 네가 회사에 얘기해서 내가 고용보험을 타게 해 준다면 다시 나오는 날 내가 이곳으로 복귀할 것이고, 그러지 않는다면 나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봐야겠다.’라고.

고정 사원은 사과했지만 고용보험과 관련해서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그날부터 당장 백수가 되었다. 그깟 일 뭐를 하면 이보다 못하랴 싶었지만 내 의사와 관계없이 보장 없는 백수가 되고 나니 참으로 허탈하다. 이놈의 사회에서는 잘 조직되고 복지 혜택 많이 받는 제도권 국민에게만 주고 주고 또 준다.

오늘 오랜만에 집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수기 청소하러 온 아줌마와 이야기했다. 자기들도 복지의 사각지대에 내몰려 있다고 한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회사의 노예라면서. 그런데도 프리랜서로 등록돼 4대 보험 혜택도 못 받고 해고돼도 고용보험도 못 탄다고 했다. 이참에 복지의 사각지대에 몰린 직업군을 찾아내어 노동조합 결성하는 일에 동참해 볼까?

일주일 뒤, 시식 행사가 재개되고 나는 기약 없는 백수에서 다시 언제 잘릴지 모르는 행사 알바로 복귀했다.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회사 소속임을 잊고 있었다. 그저 내 일이려니 생각해서 참 우직하니 열심히 일했다. 다시 일하게 된 지금 별로 기쁘지가 않다. 그나마 일할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한 번씩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 존재에 대한 미미함을 깨닫게 되어 기가 죽는다. 일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회는 이루지 못할 정의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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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몽둥이로 때리면 맞고 있겠습니까?

 김영재/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인천공항지역지부 카트분회 조직부장

 

저는 중소기업만 다니다 노동조합 활동을 해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IT 관련 회사를 경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회사 경영자의 땀과 열정과 어려움도 어느 정도는 압니다. 첫 번째 회사는 IMF 시기를 못 넘기고 폐업하고, 다시 3년 뒤에 100퍼센트 해외 수출하는 회사를 창업했는데 세계 금융 위기 때 환율의 벽으로 폐업했습니다. 개인 파산도 하고요. 가족과도 단절돼 보았습니다. 사람 데리고 하는 사업을 하기가 겁이 나서 택배, 운전, 건설 현장도 나가고 했지만, 50대 중반이 넘자 체력도 달리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젊을 때는 해외 출장을 많이 다녀 공항이 친근하기도 해서 그곳에서 일자리를 알아 보다 인천공항에서 카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항공 관문인 인천국제공항은 여객이 이용하는 여객터미널과 화물이 세계로 유통되는 화물터미널로 구분되고, 여객터미널은 다시 각 항공사별로 제1여객터미널과 제2여객터미널로 나누어집니다. 또한 여객터미널에는 간단하게 랜드사이드(입국·출국 시 사용하는 구역)와 에어사이드(면세점 탑승동의 구역) 및 단기/장기 주차장이 있으며,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수십만 명의 일일 이용자가 각자의 사용 목적으로 소정의 장소에 비치된 카트를 이용합니다.

저희 카트 노동자들은 약 13000대의 비치된 카트를 24시간 수거하고 필요한 곳에 재배치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터미널별로 주간조/야간조가 있습니다. 주간조는 랜드조, 교통조, 면세조, 단기조, 유지보수조의 형태로 구분되며, 주간조는 조출/만출의 시간대로 운용됩니다. 단순한 카트 수거 업무에서 1층과 3층간의 수직 이동, 동편과 서편의 수평 이동, 청결 작업, 광고 교체 작업, 카트 수리 등을 담당하며 한 번에 많은 수량의 카트를 이동하기 위하여 카트를 밀어 주는 로보카라는 장비를 사용합니다.

인천공항 여객터미널에서 로보카를 이용해 카트를 운반하는 노동자. 사진 제공_ 인천공항지역지부 카트분회

인천국제공항공사로부터 카트에 광고를 하는 명목으로 ()전홍과 1차 계약을 하고 ()전홍은 ACS()에게 카트 관리를 전담하도록 2차 하청 계약을 하여 운영 중에 있습니다.

저는 제1여객터미널의 랜드사이드 업무를 담당하며 3일 근무 1일 휴무의 365일 근무 형태로 201811월에 입사하였습니다. 광범위한 면적을 커버하고 이용객의 수요에 따라 하루에 3만 보 이상의 많은 움직임이 필요하고 몸의 거의 모든 근골격을 사용해야 하는 높은 수준의 노동 강도를 감내해야 합니다.

거의 모든 노동자들이 어깨, 허리, 무릎, 발목의 관절과 발바닥의 통증을 갖고 있습니다. 이용객들이 기물과 접촉 사고가 많이 발생합니다. 카트와 로보카가 무거운 쇠붙이이라 접촉 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치면 기본적으로 회사에서 개인에게 변상을 시키고 있습니다.

최근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여름 휴가철에 로보카가 카트를 달지 않은 상태에서 회전 중에 초등학교 여아의 발목 아킬레스건에 접촉해 아이가 중상을 입은 사고가 있었습니다. 가족 여행이 취소되고, 집도 지방인지라 서울에서 수술하고 입원 치료를 받으려면 많은 보상이 필요했지요. 그 뒤 회사의 공식적인 지침은 개인 변상을 원칙으로 하고 해당 직원은 퇴직 처리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여행객이 두렵습니다. 넓은 공항에서 어린아이들이 마구 뛰어 다니기도 하고 시간에 늦은 여행객들도 뛰어다닙니다. 카트와 로보카가 정지 상태에서 접촉을 해도 무조건 저희가 책임져야 합니다.

점심시간이 40분입니다. 근무지에서 구내식당까지 멀어서 항상 허겁지겁 달려가야 합니다. 휴게 시간과 휴식 공간 물론 없었고요. 노조가 만들어지고 MBC 방송국에서 취재하여 알려지고 청와대에 민원 넣고 고용노동부에 진정한 결과 사무실 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평상을 놓을 수 있었습니다. 또 조출자들은 오전에 휴게 시간 20분을 보장받게 되는 등 조금 개선이 되었습니다.

화장실은 2분 안에 해결, 출퇴근 지문 누락 시 1시간 공제, 그것도 나중에 1일 공제하겠다더군요. 근무 시간 중 잠깐 쉰다고 앉아 있으면 사진 찍어 공개하고 얼마 전부터 근무 평가를 한다며 현장의 주임들은 노조를 말살하고자 열심입니다.

부당 노동 사례와 노조 말살에 대하여 적어 보겠습니다. 202042일 노조 집행위원들이 모두 참석해 회사와 교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서 사측 관리자들이 노조 측과 사전 협의도 없이 조합원들에게 위임장을 돌렸습니다. 유급 휴가에 대한 모든 것을 회사에 일임하고, 고용 유지 지원금을 타서 휴직할 것을 위임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위임장은 향후 회사의 입맛대로 가는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파업 참여 시 징계하겠다고 위협하고, 회사의 명예 실추, 유언비어 유포라며 경고장도 보내옵니다. 노조를 탈퇴해야 90퍼센트의 유급 휴직을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행한 적도 없는 근무 평가를 한다고 합니다. 예의, 언행, 모욕, 유언비어, 선동, 분위기 저해 같은 항목을 보면 근로 능력 평가가 아닌 복종해라는 뜻으로 보입니다.

작년 11월 노조를 설립할 당시 노조가 싫다, 노조가 도깨비 방망이냐, 그렇게 탄압하더니 한 달도 되지 않아서 대립 노조를 만들고 현재는 타 노조원이 되어 타 노조의 근무 평가를 한다니 코미디 극장도 아니고 말이 됩니까.

현재 위탁 계약 기간은 2018년부터 금년 말까지 3년입니다. 그전에는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의 근로 계약 때문에 저런 많은 부당 노동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음에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불안과 불평등을 호소하면서도 어떤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작년 여름부터 다른 조에서 노조 설립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미약하지만 힘을 합하자고 가입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5월 21일 카트 노동자 파업 결의 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서로 몸 벽보를 붙여주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처음 인천공항지역지부에서도 긴가민가했을 것으로 봅니다. 노조 상담하러 갔더니 카트 쪽에서 매년 와서 노조 만들려고 하다가 회사 때문에 깨지고, 20명까지도 모였었는데 회사가 압박해서 깨진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에 갔을 때 걱정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우리가 해 보렵니다, 믿어주세요 했습니다. 저희 회사의 평균 연령은 50대 중반이 넘습니다. 두려워하는 직원들을 설득하고 그 나이에 무슨 노동조합이냐 조용히 살다 퇴직하자, 몇 년만 더 근무하자고 반대하는 부인과 자식들을 설득하고, 많은 어려움에 부딪히며 극복하였습니다.

회사의 업종과 색깔에 따라 다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는 가족 같다 하면서 뒤에서는 신다 버린 헌신짝 취급을 한다면 어느 누가 애사심이 생기며 고객을 웃음으로 대하고 세계 제일의 공항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생기겠습니까. 스스로 우러나오게 해야 한다고 봅니다. 몽둥이로 때린다고 맞고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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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기는 싫었다

 정숙영/ 코웨이 정수기 관리 코디

 

막내가 여섯 살이던 20049, 임상병리사로 경력 단절 상태였던 나는 세 아이를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동생 집에 방문하던 코디가 자기가 하는 일이 일정 조정이 자유롭고, 열심히 하면 일정한 수입이 된다는 말을 듣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연체 고객 대면, 영업, 초보운전, 관리자들과의 관계 등이 쉽지는 않았지만, 비상금 털어 자동차까지 샀으니 버텨 보기로 했다. 이렇게 시작된 17년의 코디 생활.

아침 아홉 시 첫 고객 방문부터 늦는 날은 밤 아홉 시까지, 공휴일을 제외하고 거의 매일 일을 한다. 두 달이나 네 달에 한 번씩 정기 방문해서 정수기, 비데, 공기청정기, 연수기 등을 점검하는 코디는 깐깐한 점검 서비스는 기본이고 자차를 갖고 운전도 잘해야 하며 50페이지가 넘는 상품 안내서의 상품을 판매하고 때로는 홀로 사시는 어르신의 심부름꾼과 말동무가 되어 드리기도 한다. 그리고 지국 관리자의 영업 목표를 맞춰야 한다는 잔소리에 시달리기도 하고 회사가 만들어 놓은 점검 시간과 한 달 내에 마쳐야 하는 계정이 있어 매일 종종거리며 이 집 저 집 방문하는 일개미이자 멀티플레이어이다.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방문 점검이다 보니, 고객들의 상황이나 상태에 따라 욕설 등의 언어폭력은 물론이고 드물게는 신체 폭력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락까지 안 되는 고객들의 행동은 나를 더 힘들게 한다. 고객의 코디 교체 요구가 있을 경우, 상처받은 코디를 생각하는 관리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위로는커녕 질책하고 사유서까지 쓰게 하고 있다. 이처럼 정신적 육체적 고통으로 소모되는 코디의 감정을 회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언니, 동생, 회사 동료와 수다를 떨거나 혼자 삭인다. 게다가 요즘에는 판매 채널이 다양화되고 수수료 체계가 달라져서 제품 설명은 코디에게 듣고 상품 주문은 온라인이나 사업국의 고가 사은품과 현금 지원이 있는 곳에서 하는 고객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상실감이 크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일하다 보면 영업이 부진하거나 관리자들과 불화가 있을 때도 있다. 점검 계정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괴롭히는 경우도 있고, 지국의 영업 목표를 맞추기 위해 필요하지 않은 제품을 자가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 렌털 제도를 도입했던 전 회장의 경영 이야기에 나오는 내용 중 일부이다. ‘고객의 렌털 비용을 낮추기 위해 코디에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자동차를 보유하고 자가운전이 가능한이들을 코디로 채용했다. 1만 명이 넘는 코디들이 타고 다닐 자동차를 회사에서 구입하고 유지비용을 댔다면 그 비용은 엄청났을 것이다. 이렇게 렌털이라는 아이디어 덕분에 2008년 매출이 13000억 원에 달했다.’ 이처럼 회장 본인은 창조적 발상과 실천을 책으로 써서 코디들에게 한 권씩 나눠 주며 자랑했겠지만,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코디가 책임지게 하는 회사의 규정과 수천억의 영업 이익에도 노동환경에는 변화 없음에 울화가 치밀었다. 만약 권리 투쟁을 할 기회가 있다면 꼭 참여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그 중심에 서 있다.

17년 일한 지금도 신입 때랑 바뀐 게 거의 없다. 자차를 쓰는데도 유류비 지원은커녕 사고가 나면 모두가 코디의 책임이다. 점검 수수료도 오르지 않다가 노조가 생기면서 한 계정당 몇백 원 오른 게 전부이다. 고객의 단순 변심 반환 시 수당 되물림 제도가 지금은 일 년 내 반환 시 100퍼센트 되물림으로 바뀌었지만 MBK파트너스에서 관리할 당시에는 18개월 내 반환 시 100~150퍼센트까지 수당 되물림이었다. 영업을 하기 위해 썼던 시간과 판촉 비용은 코디가 손해 봐야 한다.

회사에서는 적정 계정을 200개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영업이 안 되면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수당 150만 원 정도만을 받아가야 한다. 일하며 드는 비용을 코디가 전부 부담하면서 말이다.

201711월 코웨이를 떠나야겠다는 마음으로 사회복지사,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다. 공부가 끝나갈 즈음 뜻하지 않은 사고로 무릎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 달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고용보험이 있었더라면 두 달 더 쉬면서 전업을 맘 편히 했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늘 무거운 가방을 메고 계단과 언덕을 오르내리며 손과 발을 많이 쓰는 반복 작업을 하는 코디는 근골격계 질환으로 한의원과 통증의학과를 제집 드나들듯 한다.

지난 3월 16일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노조 설립 필증 교부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하는 정숙영 씨. 사진 제공_ 민주노총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퇴사할 때 퇴직금 한푼 없이 쫓기듯 떠나던 선배 코디들이 생각난다. 밥 한 끼 나눌 시간도 없이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사라져 간다. 나는 그렇게 떠나는 게 싫었다. 그런 내게 들어온 한 장의 노동조합 웹자보. 당장 설명회를 요청했고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전국가전통신서비스 노조의 양윤석 국장님, 이흥수 코웨이지부 지부장님과 우리 지국 코디들의 만남이 있었다. 우리 지국 코디들이 보낸 내용을 바탕으로 코디·코닥 지부의 홍보 웹자보가 만들어지면서 전국적으로 설명회가 시작되고 코디·코닥 지부는 2019112일 설립 총회를 하게 되었다. 평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인 나는 큰 용기를 내어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며 상집위원이 되었다. 코디를 하면서 대의원대회, 간부수련회, 법률학교 등 조합 활동이 버거워 아프기도 했지만 집중했었던 시간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길이 열린 듯했지만 노동청에서는 특수고용 노동자라서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여 노조 설립 필증을 내주지 않았고 노조 설립 필증 투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상집간부들과 서비스가전 간부들의 릴레이 1인 시위가 시작된 지 103일째 되던 513일에 역사적인 특고직 최초의 설립 필증을 받게 되었고 우리의 권리 찾기는 시작되었다. 지금도 회사와 교섭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2019년 11월 26일 웅진코웨이 본사 17층 대표 이사실을 점거하고 대화를 요구하는 웅진코웨이지부. 사진 제공_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가전통신서비스노조

노조가 생기고 전국의 조합원들이 서로 소통하고 한길을 간다는 자체만으로도 벅찼던 순간,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함께할 동지들이 있어 좋았던 순간들을 늘 기억할 것이다. 코웨이가 없으면 코디도 없다. 회사와 대치가 아닌 상생하는 노조가 되었으면 좋겠다. 회사가 탄탄한 코디 조직을 믿고 지원해 준다면 정수기 업계 일등 기업으로 우뚝 설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본기 탄탄한 멀티플레이어인 코디들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힘든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일하면서 만난 고객들 대부분은 호의적이고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또또클럽(목표 실적을 달성하면 회사가 해당 코디·코닥 노동자들에게 식사나 여행을 보내주는 사업)을 통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도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성남 태평지국 가늘고 길게(장기 근속자 소모임) 팀 식구들이 있어 17년을 버틸 수 있었다. 나를 돌아볼 수 있게 귀한 지면을 내준 <작은책>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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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성주, 한반도의 최전선

나정(가명)/ 사드가 배치되어 있는 성주에 살고 있는 주민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 시계를 보니 540. 이미 남편은 거실에서 비염에 좋다는 작두콩차를 마시고 있다. 몸이 무겁다. 누운 채 손가락을 차례로 꼽아 본다. 묵직하고 뻣뻣한 게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오늘도 새벽에 두 차례 종아리에 쥐가 났다. 끙끙거리는 소리에 남편이 깨어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온몸이 아프다. 허리를 시작으로 팔꿈치, 발목, 그리고 이제는 무릎. 아무래도 오른쪽 무릎은 이미 탈이 난 듯하다. 남편 나가는 소리에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세수는 고사하고 거울조차 보지 않고 남편을 뒤따른다. 마스크 한 장이면 족한 세상이라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서 밭까지는 걸어서 30분 걸린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 10, 차로 가면 5. 대부분 차로 다니지만, 가을철에는 자전거를 타기도 한다. 얼마 전부터 허리와 무릎 근력을 위해 걸어서 간다. 걷다 보면 세상이 다가온다. 로드킬 당한 각종 동물의 사체, 물오른 배 롱나무, 겁 많은 이 집 저 집 개들. 어느 새 도착한 딸기밭. 오십 중반을 넘긴 나와 남편은 참외로 유명한 이곳 성주에서 5년 전 딸기 농사를 시작했다. 하필이면 왜 딸기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이곳은 모든 것이 '참외'로 적정화 내지 표준화되어 있다. 그 질문에 대한 나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라서. !

나는 경주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 둘을 낳아 길렀다. 경주에서 평생 살 거라 믿었다. 그러나 15킬로미터 인근에 핵발전소가 있다는 사실, 아니 그 핵발전소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주저하지 않고 그곳을 떠났다. 그다음 해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끔찍한 참사를 보며 우리의 결정이 옳았다 믿었다. 이런 우리의 귀농사를 들은 이들은 하나같이 웃었다. ‘경주나 성주나.’ 좁은 땅덩어리에서 피해 봐야 소용 없다는 말이지만, 그래도 성주는 100킬로미터 밖. 심리적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거리였고,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그렇게 핵발전소를 피해 온 성주에 2016년 사드(THAAD)가 들어왔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곳 성주가 한반도의 최전선이 되었다는 의미였다. ‘다시 성주를 떠날까?’

남편과 나는 500평 규모의 딸기 농사를 짓는다. 동수로 보면 세 동이지만, 면적으로 따지면 두 마지기 반의 크기. 수십 동씩 참외 농사, 상추 농사를 짓는 다른 농가들에게는 소꿉장난처럼 보일 것이다. 평생 농사라고는 구경도 하지 않은 우리는 심지어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 유기 재배를 선택했다. 시원하게 약 한번 뿌리면 되는 일을 우리는 밤마다 랜턴을 쓰고 민달팽이를 잡았다. 응애가 오면 천적인 칠레이리응애를 넣고 매일 개체수를 살폈고, 진딧물이 보이면 난황유를 만들어 쳤다. 몸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평화로웠고, 새롭게 만난 이웃들과의 풍성한 이야기로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무엇보다 가야산으로 넘어가는 노을과 마주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감사의 기도가 절로 터진다. 그런데 이곳 성주에 사드가 웬 말인가!

수확한 딸기들. ⓒ나정

30분 걸어 도착한 딸기밭 주변은 이미 한낮처럼 분주하다. 농사 이웃인 옆 하우스의 K 아저씨는 참외를 따고 있다. 낡은 트럭 위 빨간 바구니에 노란 참외가 그득하다.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하우스 문을 민다. 딸기는 거짓말처럼 밤새 빨갛게 익어 있다. 순간 젖은 솜처럼 무겁던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옆 동에서 남편의 라디오 소리가 들린다. 애청하는 채널의 사회자 목소리가 상기되어 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걱정이다. 집과 딸기밭만 오간 지 벌써 석 달. 사드를 코앞에 두고 있는 소성리 집회도 멈춘 지 두어 달이다. 오늘은 수요일. 남편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소성리로 올라간다. 사드가 임시 배치된 소성리 미군기지 앞에서 매일 평화행동이 열린다. 남편은 수요일마다 올라간다. 다른 주민들도 참외밭, 고추밭, 마늘밭을 뒤로하고 허겁지겁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미군기지 앞에서 외칠 것이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

2019년 10월 6일 성주 소성리 진밭교에 마련된 원불교 교당의 평화 기도가 1000일째 되는 날. 우리 모두 모여 서로에게 감사와 평화의 인사를 나누었다. 사진 제공_ 나정

다시 돌아가서, ‘성주를 떠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싱겁게 정리되었다. 핵발전소가 무서워 떠나왔던 경주가 이미 답을 주었기 때문이다.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난들 그곳에 제2의 핵발전소, 2의 사드 기지가 들어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특히 사람 적고 힘없는 시골은 더더욱.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하는 일이었다. 떠나고 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그곳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내야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와 남편은 사드가 임시배치되어 있는 이곳 성주에서 그냥 살기로 했다. 아니,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사드 배치로 하루아침에 한반도의 최전선이 된 성주 소성리에서, 평생 살아온 터전을 하루아 침에 미군에게 빼앗긴 소성리 어머니들과 함께, 온 힘을 다해 저항하며 살아 낼 것이다.

미군은 미국으로, 평화는 이 땅으로!”

사드 가고 평화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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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여름철 긴팔 남방을 입은 까닭

 

권해진/ 래소한의원 원장

 

80대 아버님이 환자로 오셨습니다. 당뇨가 심해서 인슐린을 주사제로 조절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팔에 상처가 나서 연고 바르고 반창고 붙이고 했는데, 자꾸만 상처가 커졌습니다. 당뇨합병증 중 하나가 상처 치유가 늦어지는 것이니 그러려니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여름이 되니 반창고 아래로 땀이 차고 농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때서야 피부과에 가셨다고 합니다. 이미 괴사가 진행되었고 의사가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았냐고 물었습니다.

따끔따끔이야 하지. 그래도 무릎이나 허리 아픈 것만 하겠어. 다른 데가 더 아프니 그러려니 했지.”

더 이상의 괴사를 막기 위해 한쪽 팔을 잘라야 했습니다. 처음 한의원에 오셨을 때는 이미 팔 수술을 하신 지 5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피부 상처 하나 잘못해서 이리 ○○이 되었지. 자식들이 팔 없이 옷만 덜렁거리고 다니면 사람들이 놀란다고 가짜 손을 만들어 주었는데, 그게 더 무섭게 생겼어. 원장 보기에는 어때요? 다른 환자 생각해서 가짜 손 달고 오라 하면 달고 올께.”

긴팔 남방 속 의수는 무섭지도 징그럽지도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 눈이 뭐가 중요합니까! 아버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던 때는 겨울이었고, 옷 안에 팔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을 때였습니다. 점점 더워지는데 아버님은 여전히 긴팔 남방을 입고 오십니다.

당뇨가 있으셔서 땀을 많이 흘리시는 것도 안 좋아요.”

남방 사이로 바람이 술술 들어와. 반팔 입으면 길 다닐 때 지켜보는 눈 때문에 내가 귀찮아서 그래.”

팔 하나가 없으면 치료받을 때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것을 도와야 할 것 같지만 시간만 드리면 됩니다. 그렇게 혼자서 천천히 입고 벗고 하시는 데는 남방이 티셔츠나 다른 옷보다는 편하다고 하시더군요. 이미 생활과 마음의 정리가 이루어진 분입니다. 치료를 끝낸 후 남방 단추를 한 손으로 차례차례 잠그시고 펄럭이는 남방의 빈 팔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오셨습니다.


6학년 때 만난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그녀는 느리지만 왼손으로 글씨를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의 오른손 글씨보다 예뻤습니다. 그림도 잘 그렸습니다. 오른팔의 화상 흔적.

손가락부터 팔꿈치까지 화상이 있었는데 글을 배우던 유치원 때 생긴 상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왼손으로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졸업 후로 같은 학교는 아니었지만 자주 볼일이 있었고 그녀의 여름옷은 항상 흰색 긴팔 남방이었습니다. 교복 세대였던 우리는 여름에는 반팔 교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여름 교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학교에서 허용해 준 유일한 학생이었습니다. 시원하면서도 얇지만 팔의 화상 흔적을 덮을 수 있는 옷은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제 옷을 사러 갈 때도 시원한 긴팔 남방이 보이면 그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괴사로 팔을 잃은 아버님과는 달리 회사 일을 하다가 손이 절단된 지 3년이 지난 여자분이 있었습니다. 항상 의수를 하고 오셨고 여름에도 긴팔 옷에 장갑까지 끼고 오셨습니다.

제가 장애인이지만 회사를 다녀요. 저희 회사에서 정상인보다 제가 일을 더 잘해요. 그래서 어깨랑 팔이 항상 아픕니다. 사장님이 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고 해서 휴가도 못 쉬어요.”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자신보다 일을 못 하는 비장애인을 타박하는 말투입니다. 어깨를 만져 보니 절단된 쪽 팔을 쓰지 않고 온전한 팔로만 일을 했다는 것이 보입니다. 어깨 등세모근의 크기가 다릅니다. 한쪽 팔뚝은 다른 쪽의 두 배 크기입니다. 당연히 아픈 쪽은 비정상적으로 일을 많이 한 정상 팔입니다. 2주 동안 매일 치료받으러 오셨습니다. 치료도 열심, 일도 열심인 분입니다. 그런데 치료 효과가 없습니다. 상담을 요청했습니다.

환자분! 치료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언지 아세요? 쉬는 것입니다. 일을 좀 줄이시면 안 되나요?”

장애 있는 나를 써 준 사장인데 일반인보다 더 열심히 해야지요.”

그런데 치료받고 가시면 덜 아프시다가 다시 일을 너무 심하게 하시니 제가 느끼기에는 팔 상태가 매일 똑같아요. 그러면 팔이 남아나질 않아요.”

더 나이 들면 다닐 직장도 없을 거예요. 올해는 몸이 부셔져라 해 보려고요.”

사장님을 욕하는 거는 아닌데요. 회사는 장애인 고용으로 국가 보조를 받을 겁니다. 그래서 환자분이 천천히 몸 생각하면서 하셔도 회사에 손해는 안 갑니다. 정년도 보장이 되고요. 환자분 잃어버린 왼쪽 팔 때문에 열심히 사시는 건 저도 압니다만, 그럼 오른쪽 팔은 누가 돌봐 주나요? 오른팔이 안쓰럽지 않으세요?”

갑자기 그녀가 웁니다.

내 인생이 안쓰럽지. 그래요. 내 오른팔도 안쓰럽지. 없어진 왼팔보다 버티고 있는 내 오른팔이.”

할 말도 해 드릴 수 있는 일도 없어서 같이 울었습니다.

여름철 긴팔 남방 안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많습니다. 느리지만 천천히 시간만 있으면 우리는 모든 사연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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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걸어 다닐 권리! 걸어 다닐 자유!

 

최숙하/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

 

코로나19 때문에 외출이 더 힘들어졌다. 외출해도 음식을 포장해서 오기 때문에 활동지원사 선생님과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을 여유롭게 먹은 게 언젠지 모르겠다. 올해 봄엔 놀이공원의 튤립 축제에도 가고 싶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내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다. 요즘은 마음 편하게 외출했을 때가 그립다.

내가 처음으로 외출하기 시작한 때는 지체 부자유 특수학교 중학교를 다니면서부터였다. 기숙사 생활도 했고 기숙사 학생들을 위한 지역사회 적응 프로그램에 참여해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분위기 좋은 인도 음식점에 가서 인도 카레도 먹어 보고, 방송국에서 장애인 가요제를 관람하기도 했었다. 그 이후로도 전동 휠체어를 타면서 조금이라도 자유로운 왼손으로 운전하며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래 봤자 고작 학교 근방에 있는 장소뿐이었다. 하지만 항상 몸에 힘이 들어가서였을까? 내 몸은 언제나 피곤했다.

스물두 살에야 국어국문학과의 학생이 된 나는 무엇이든 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나 그것도 잠 시뿐이었다. 수업 내용에 관한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학교 구석구석 다니고 싶어도 엘리베이터나 경사로가 없어 휠체어로는 갈 수 없는 강의실이나 학생식당도 있어서 이동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필수 과목으로 홈페이지 제작 수업 을 들었다. 시간이 지나 기말시험으로 홈페이지 제작 실기시 험을 봐야 했는데, 시험이 치러질 강의실은 2층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없고 장애인 경사로가 있었지만, 경사로의 시멘트 가 깨지고 갈라진 데다가 경사가 가팔라 도저히 올라갈 수 없어서 1층에 계신 경비원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경사가 가팔라 가지고, 2층으로 갈 수가 없어서요.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처음엔 경비원 아저씨의 표정이 얼떨떨해 보였지만 재빨리 나를 쫓아와 내 휠체어를 조금씩 밀어 주었다. 나는 전동 휠체어 컨트롤러로 운전하고 아저씨가 뒤에서 밀어 주며 앞 으로 가 보려 했지만, 경사로에 금이 가서인지 바퀴만 헛돌고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했다. 기말 시험이라 시험을 치지 않으면 F학점을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 다. 나는 걱정으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나를 보고, 경비원 아저씨가 난처한 듯 말했다.

학생, 조금만 더 속도를 빠르게 해 봐요. 이게 안 움직이네, 다른 학생 휠체어는 잘 가던데.”

나는 더듬거리며 말했다.

글쎄요,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시험 시간은 다가오고 움직이려고 한참 동안 노력해도 그대로였다. 그렇게, 시험을 보지 못하고 전동 휠체어를 운전하며 기숙사로 돌아와야 했다.

불편해서 많은 것들을 포기한 채 대학교 4학년이 되었다. 그 때문에 졸업 이후 사회에 나오면서 마음이 움츠러들었고 두려움만 앞섰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활동지원사 선생님께서 함께 외출을 자주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주셨다.

선생님과 함께 교통약자 차량을 이용해서 경전철을 타고 가까운 놀이공원에서 꽃도 보며 웃음을 되찾고 필요한 물건을 사러 대형 할인점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비장애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도 주어지는 듯했지만, 학교의 안이나 밖의 세상에서도 나에겐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가 없었다.

대형 할인점이나 놀이동산은 장애인 화장실로 들어가는 입구가 왜 그렇게 좁은지, 전동 휠체어를 운전해 억지로 욱여넣다시피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면 붙잡고 서는 안전 손잡이가 너무 낮게 설치되어 있거나 잡는 순간에 흔들려서 넘어질 뻔한 적도 많았다.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해 외출을 할 때면 콜택시에서 내려 휠체어를 운전해서 사람들이 다니는 보도블록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휠체어가 올라갈 수 있는 낮은 방지턱 앞에는 자동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나와 활동지원사 선생님은 낮은 방지 턱이 나올 때까지 멀리 둘러 가야 했다.

길에 시멘트가 깨져 있거나 갈라지고 떨어진 보도블록을 지날 때 전동 휠체어가 흔들리거나 크게 쿨렁댔다. 그 길을 가는 동안 다리와 온몸에 더 힘이 들어갔다. 옆에서 활동지 원사 선생님이 운전하는 것을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다음 날 몸살이 났을 것이었다.

그날 오후 선생님과의 외출을 끝낸 뒤 집으로 돌아가는 장애인 콜택시 안에서 전동 휠체어를 탄 사람이 보도블록으 로 가지 않고 자동차들이 달리는 차도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 사람이 걱정되었다. 알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언젠가의 내 모습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행자가 다니는 길이 전동 휠체어로 이동하는 장애인들 에게 편리했다면 그 사람이 도로로 가지 않았을 텐데.’

모두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듯 모두에게 걸어 다닐 권리가 있다. 그것이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당장은 아니 더라도 장애인의 이동의 안전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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