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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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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농성하고 애도 키우는 아줌마

 

 

명동역 10번 출구 세종호텔. 이 출근길을 25년째 다닙니다. 대표전화를 받는 전화교환원으로 20,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어텐던트로 5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객실을 정돈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세종대학교 재단에서 113억 회계 비리로 퇴출되었던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 회장에 복귀하면서 복수노조, 전환배치, 구조조정, 해고 등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화 통화량을 조사하는 회사의 행동으로 이미 교환실이 아웃소싱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예감에 2012년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파업과 로비 점거에 참가했습니다만, 내 일자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201412195, 타월을 개고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룸어텐던트로 발령이 났습니다. 호텔에서 장기 근속한 여직원을 청소 노동자로 발령 내는 것은 흔히 쓰는 퇴출 방법입니다.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이 남아 있어 고민도 했지만 사표는 내일 써도 되고 다음달에 써도 되니 함께 싸우자는, 지금은 해고된 세종호텔노조 김상진 전 위원장의 말씀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령이 나고 처음 한 일은 교환실 유니폼을 입은 내 마지막 모습을 셀카로 찍는 일이었습니다. ‘20년을 입어 왔지만 다시는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막상 룸어텐던트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었을 때는 서러워 눈물도 나고 타인이 사용한 변기를 닦으려니 장갑을 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청소 교육은 타월 개는 법부터 시작했고 단 한 번 욕실 청소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에 13, 둘째 날까지 26개의 변기와 욕조, 세면대를 닦았습니다. 청소 교육 이틀 만에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퇴근길에 만난 남편과 순댓국집에서 소주만 퍼붓고 가게가 떠나가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 객실 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흑흑. 울엄마는 이럴 줄 모르고 대학 보내고. 엉엉.”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은행 계좌에 월급이 입금된 걸 보는 순간, 돈이다. 난 돈 벌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혼자라면 오래 버틸 수 없었겠지만, 우리 팀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있어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청소 노하우도 공유하며 중고 신입 막내를 살뜰히 챙겨 주셔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도 힘드신 거 뻔히 아는데, 내게 배정된 층에 오셔서 나 몰래 베드도 갈아 놓고 가시고, 그분들이 내게는 엄마였고 천사였습니다.

초보 룸어텐던트는 객실 타입도 잘 모르고 린넨을 봐도 싱글인지 더블인지 구분을 못해 정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청소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 이전의 명동은 중국인 물결이었는데, 화장품을 사서 알맹이만 슈트 케이스에 담고 제품 케이스로 방마다 두세 곳의 쓰레기 언덕을 만들었고 쓰레기통을 제외한 모든 곳에 쓰레기를 버려 댔습니다. 바닥에 던져진 콘돔을 모르고 집었다가 장갑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얇은 와인 글라스와 8온스 컵을 씻다가 금이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전환배치된 날 어용노조 전화교환 직원도 함께 발령이 났는데 팀장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원인 내게만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경위서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동안 교환실에서 써 본 적 없는 경위서를 룸어텐던트가 된 후에는 매달 썼을 정도였습니다. 전 직원 성과연봉제가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 3명의 직권 조인으로 통과된 후 룸어텐던트 파트는 전에 없던 인스펙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펙터는 룸어텐던트가 청소한 객실을 점검하는 사람인데 원래 인스펙터 업무는 룸어텐던트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채워 주고 보완하는 일이지만 세종호텔 인스펙터의 업무는 사진과 채점입니다. 청소한 객실에서 흠을 찾아 증거로 사진을 찍어 팀장에게 매일 전송하고 객실 청소 상태를 등급으로 매겼고 팀장은 사진과 등급으로 성과연봉제 임금 삭감의 사유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생각했지만 인스펙터에게 지적당하거나 사진을 찍히고 나면 더 치밀하고 꼼꼼히 일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병들어 갔습니다. 테니스엘보와 손목터널증후군은 룸어텐던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명이고, 내 경우엔 디스크가 약해 2017년에는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허리디스크도 함께 왔으며 어깨회전근 미세 파열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채점된 성과연봉제 첫해 저의 임금은 9퍼센트 삭감. 오랫동안 임금이 동결되었기에 9퍼센트 삭감된 후 월급은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삭감 사유는 딥클리닝 개수 부족. 딥클리닝이란 욕실 천장 곰팡이부터 타일 줄눈까지 락스 작업을 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천장 먼지를 제거하고, 침대를 들거나 밀어 침대 아래 먼지도 제거하고, TV장과 걸레받이를 청소하는 일 등입니다. 타 호텔에서는 딥클리닝 전문 직원을 둔다는데 세종호텔에서는 룸어텐던트에게 시켰습니다.

그 딥클리닝을 하루에 한 방씩 점검받아야 하는데 내 경우는 대학 입학시험문제 출제 교수가 체크인 한 적이 4번이나 있었습니다. 대입 출제 교수가 묵는 방은 가벽을 만들어 직원조차 못 들어가는 출입금지 구역이 됩니다. 딥클리닝 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회사는 그걸 임금 삭감 사유라고 내밀었습니다.

반면 어용노조 조합원 중에는 단 한 명이 3퍼센트 삭감되고 나머지는 전원 동결되어 세종호텔 노동조합과 형평성도 없고 차이가 심하게 났습니다. 타 회사의 성과연봉제는 인상되는 연봉제지만 세종호텔의 성과연봉제는, 사원은 최대 10퍼센트까지 계장 이상은 30퍼센트까지 삭감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그 기준으로 세종노조 계장님 몇 분은 2년 연속 삭감당해 월급이 반토막 난 분도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사해 나가고 팀장들의 회유와 협박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빠져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이제 15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오전, 오후 선전전과 매주 목요일의 집회로 9년째 투쟁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회사의 부당함을 당당히 말하는 힘이 세종노조의 저력입니다. 그 힘으로 특별감독관이 나오기도 하고 작년에는 잠시나마 교섭이 이뤄지기도 해 일부 조합원이 전환배치에서 복직하는 성과도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적폐 임종헌과 사돈이며 친이명박 적폐 판사 박성준이 사위고, 전 외교부 장관 유명환을 재단 이사장에 세워 놓은 주명건 회장의 힘은 영원할 듯했습니다. 그러나 임종헌이 구속된 이후 교육부의 세종대 감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호텔 정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김상진 전 위원장의 해고자 복직과 나의 전환배치에 대한 원직 복직과 성과연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도 힘들고 농성도 힘들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뷔페 설거지와 고기 굽기도 했고, 전화교환이든 룸어텐던트든 내 일, 나 자신의 일이기에 나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종호텔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나 노조와 함께 회사에 할 말 하며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세종호텔과 서비스연맹 노동자들이 지난 5월 세종호텔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세종호텔노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 - 연영석

 


문화노동자 연영석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문화노동자 연영석. 작은책(안건모)


 

50시간 60시간 70시간 80시간 뺑이 쳤지

때로는 형님처럼 때로는 친구처럼 하자기에

아침부터 새벽까지 몸 버리고 속 버리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 필요없다 이제 와서 나가라니 웬 말이냐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할 줄 아나

박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당할 줄 아나

- ‘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중에서

 

연영석. 이 사회의 아픈 현실을 드러내고 가진 자들에게 빅엿을 날리는 가사로 청중을 속 시원하게 만드는 인디가수다. 연영석의 아내 지민주도 집회 현장에서 청중을 휘어잡는 유명한 노동가수다. 그이들의 삶이 궁금해 <작은책> 사무실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본래 두 사람의 삶을 다 다루려고 했지만 그러기에는 지면이 짧아 이번엔 주로 연영석의 삶을 다뤘다. 지민주가 가끔 동조하거나 초를 치면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은 알콩달콩 살아가는 여느 부부나 마찬가지였다.

연영석은 <작은책> 사무실에 있는 기타를 보고는 기타 치면서 할까요?” 하며 집어 들었다. 지민주는 인터뷰하러 온 사람이 뭔 기타야?” 했지만 연영석은 기타가 눈에 보이면 치고 싶은 법이라며 코드를 잡고 줄을 튕겼다.

<작은책>엔 나와 유이분 편집장과 정인열 기자가 있었다. 인터뷰는 나 혼자 했지만 각자 책상 앞에서 두 사람이 떠는 수다를 들었다. 인터뷰 내내 즐겁고 웃겼다. 두 사람은 만담을 하듯이 싸우기도 하고 칭찬하기도 하면서 살아온 이야기를 풀었다.

기타는 언제부터 배웠어요?”

따로 배운 적은 없어요. 기타를 가지고 놀다가 곡을 쓰다가 공연도 다니면서 조금씩 늘게된 거죠. 작곡을 하다가 다루는 악기가 하나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후배에게 배웠죠.”

연영석은 노래를 작곡하는 법을 자세히 설명한다.

우리나라 말도 고저가 있거든요.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이렇게 가사를 써 놓고 약간 송창식 스타일로 부르면서 기타 치는 사람한테 물어봤죠. ‘아침에할 때 가 무슨 음인지. 그때는 기타를 못 칠 때였으니까. 그러면 기타 치는 사람이 내 손가락을 잡아서 ‘Am(에이 마이너)’를 알려 주고 여기에 형이 생각하는 음이 있어?’ 하면 ~ 아침에쳐 보면서 , 있어.’ 하고, 그 다음 가 음이 좀 다른데, ‘. 그럼 C() 코드로 가요.’ 아침에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이런 식으로 흥얼흥얼 노래를 붙이면 돼요.”

문화노동자 연영석은 그렇게 작곡을 하면서 기타를 배웠단다. 사실 쉬운 거 같아도 아무나 그렇게 작곡하고 기타를 쉽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한마디로 ’, 예술가 끼가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듯하다. 연영석은 조각 미술을 하다가 음반을 냈고, 노래 으로 2006년에 제3회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2007년에는 태준식 감독이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 <필승 ver2.0 연영석>에서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2013년에는 제3회 구본주예술상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문당리 789

연영석 노래 중에 문당리 789’라는 노래가 있다.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문당리 789번지. 연영석이 태어난 고향 집 주소다. 연영석이 두 살 때 아버지가 식구들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왔다.

부모님이 야반도주하셨대요. 아버지가 장남인데, 결혼했는데도 할아버지가 모든 경제권을 갖고 계시니까. 아버지는 농촌에서 밭일 해 봐야 우리 학교도 못 보내겠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는데, 제가 보기에 농촌에 계실 스타일이 아니야. 그때 사진 보면 가다마이라고 양복 쫙 빼 입고 구두 신고. 결국 송아지 팔아서 그 돈으로 몰래 야반도주하셨대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쌀도 안 보내 주셨어요. 장남이 도망갔다고. 하하하!”

그렇게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아버지가 어떻게 자리를 잡았는지 연영석은 알 수가 없다. 연영석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신림동에서 세탁소를 했다. 신림동이 고향이나 다름없는데, 연영석은 그곳에서 놀던 기억보다 방학 때만 되면 태어난 괴산 문당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 가서 놀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오른다.

충북 괴산군 문당리 고향에서 육촌 동생들과 놀던 연영석 씨.(맨 오른쪽) 사진 제공_ 연영석


추울 때 썰매 타다가 나이롱 양말 태워 먹고, 하하하. 불 쬐다 보면 타잖아요. 저녁 때면 할머니가 영석아 밥 먹어라!’ 부르는데 노느라 신나서 안 가고 나중에 할머니가 화를 내야. 지금은 합쳐야 열 집 안 되는데 당시에는 70집이 있었어요. 집으로 들어갈 때 집집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가던 풍경이.”

서울에서 살았던 어릴 때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쌀 심부름을 하던 기억, 어머니가 혼자서 국수를 먹던 장면이 떠오른다.

쌀을 사서 편지 봉투에 담아 온 기억이 나요. 서너 컵 될까? 그걸로 밥을 하면 어머니, 아버지, 우리 형제 셋에 세탁 기술자까지. 아버지가 세탁 기술이 없어서 한 명 붙이셨어요. 그러면 어머니는 드실 게 없었나 봐요. 방에 연탄아궁이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노란 냄비에 얇은 국수, 그걸 꼭 삶아 드셔요. 엄마 혼자 그냥 간장에다가. 저는 그걸 몇 젓가락 뺏어 먹었어요. 저도 면을 좋아하거든요. 근데 커서 생각하니까, 적은 쌀로 밥을 해서 다 주고 나면 먹을 게 없었던 거예요. 어머니가 그런 게 맺힌 거지. 할아버지가 쌀 안 주신 게.”

어머니가 시집을 잘못 가신 거야.” 지민주가 끼어든다.

연영석은 초등학교 때부터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아 중학교 1학년 때 수술을 받았다.

어머니 아버지도 정확히 몰라요. 병원 의사 말로는 열이 많이 나서 그렇거나 다쳐서라는데 부모님이 모르고 지나가셨을지도 모르죠. 너무 늦어서 가망이 없는데 어머니가 하자고 하셔서 수술을 했어요. 휴학계 내라고 했는데 제가 안 낸다고 했죠. 4교시 하고 조퇴하고 치료받았어요. 꽤 길게.”

결국 그는 한쪽 눈 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연영석은 어릴 때부터 노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합창반 활동을 하면서 합창대회에 나가 대상을 받기도 했다. 다른 과목은 을 받아도 미술과 음악은 를 받았다. 노래뿐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했다. 시골집에서 할아버지가 피우고 남은 성냥개비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어려서 그림 그린 거 보면, 지금은 없어졌지만 초, , 고등학교 때 내가 그린 노동자들 그림이 있더라고. 내가 왜 노동자들을 그렸지? 알고 보니 작은아버지 영향이었어요. 작은아버지가 일하는 걸 몇 번 봤어요. 포항제철 가족을 초빙해서 보여 줬는데 제가 그게 인상이 깊었나 봐요.”

연영석 씨는 10대 때, 모던 토킹(Modern Talking)과 스모키(Smokie) 등 유로댄스(Eurodance)류의 음악을 들으며 춤추는 것을 좋아했다. 고등학교 때는 가리봉동과 난곡동 등지의 나이트클럽을 다니면서 춤을 추었다. 운동하고 사람 됐죠 하고 말할 정도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하다.

연영석 씨의 그 시절 꿈은 코미디언이었다.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뒤늦게 미술학원을 다니며 재수하던 시절 KBS 코미디언 공채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경험도 있다. 대본을 외워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하는데, 심사위원들 앞에 서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그냥 나와 버렸단다. 연기자의 꿈을 버리지 못한 연 씨는 당시 신촌 크리스탈백화점 위에 있는 모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1990, 친구였던 조각가 고 구본주 씨의 작업을 도와주다가 찍은 사진. 사진 제공_연영석


연영석은 세 번 연거푸 대학 시험에 떨어지고 ‘4끝에 홍대 미대 조소과에 들어간다. 미대 재학 중 조각가 고 구본주 씨를 만나 친구가 됐다.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함께 학생운동을 했다. 재학 중에 친구들과 학생미술인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졸업할 무렵엔 사회에 나가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마음에 맞는 친구들과 문화예술생산연합(생연)이라는 단체를 만든다.

이 사람들이 사회에 나가면 작가를 할 텐데, 사회에 도움이 되는 작가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작가들 모임을 만들었어요. 그게 진보 미술동인 현실감각이었죠. 그리고 졸업한 사람들 중심으로 문학, 음악, 미술, 영상 하는 친구들이 모여 생연을 만들었어요.”

당시만 해도 민예총에 견줄(?) 만한 젊은 문화예술인 단체를 만들 꿈을 꿨다.

 

가수가 된 사연

연영석은 생연 대표로 활동하면서 현장을 중심으로 전시 활동과 무대미술 제작 등 대중적인 미술운동을 펼쳐 나간다. 알바해서 번 돈을 생연에 다 투자했고, 가끔 하기 싫은 인테리어 일도 해서 보탰다. 그러나 결국 2년 만에 단체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친구들이 하나둘씩 결혼을 해서 떠나더라고요. 그때는 잘 이해 못했어요. 막바지에 단체를 해산하고, 거기에 혼자 있다 보니까. 그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많이. 그전에는 고민하지 않았던 개인적인 고민들이. 뭘 해서 먹고살아야지? 다 내 탓처럼 느껴지고. 처음에는 그 친구들, 같이했던 동료들에 대한 원망, 실망이 크다가 나중에는 스스로 자책이 되더라고.”

연영석은 절망감이 몰려와 한참 동안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그때 제게 가장 큰 위로가 된 게 기타였어요. ‘구르는 돌이라는 노래를 그때 만들었어요. 민중가요나 노동가요라고 생각하고 만든 게 아니라 그냥 나한테 하는 말, 저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노래였어요. 그런 식으로 몇 곡 만들었죠.”

 

구르는 돌

세상 모든 굴레를 딛고 구르자

더러운 것들 밟고 구르자

자유로운 세상 워 전혀 다른 세상에

우리 모두 함께 가보자 - ‘구르는 돌

 

그 다음 작사 작곡한 노래가 라면’, ‘칼국수와 박카스였다. ‘라면은 후배 연습실에 얹혀 살 때 냉장고는 비어 있고 먹을 건 라면뿐이던 자신의 모습, 그리고 당시 삼척에서 사살당한 무장 공비의 가방에서 나온 라면 봉지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을 더듬어 만든 노래다. 냉장고 안에 먹을 게 없는 우리의 현실을 빗댄 것이기도 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담배꽁초를 찾아 물고

테레비젼을 틀어 보면 공비를 찾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냄비 위에 물을 넣고

라면을 쪼개 쪼개 넣고 젖가락을 빨아 댄다

살기 위해 먹는 건가 먹기 위해 사는 건가 라면

 

연영석은 몇 곡을 만들고 친구들에게 음반을 내겠다며 큰소리쳤다. 친구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김영삼 정권 때였죠. 여섯 곡 정도 만들었어요. 그걸로 그냥 음반을 낸 거예요. 음반을 낼 때 생각은, 미술운동 할 때는 전시회 한 번 하려면 2.5톤 트럭에 싣고, 스티로폼 노동자 만들고, 크게 만들어야 돼요. 그러니까 화물차로 몇 번 실어 날라야 전시회 할 수 있는데 너무 힘든 거예요. 조직이 안 되어 있으면 불가능한 거고. 그런데 기타는 들고 다닐 수 있고, 운동은 하고 싶고. 어디 취직할까 하다가, 먹고살 만큼 하면 운동이 다시 가능할까? 내가 변하지 않을까? 기타 들고 다니면 되지 않을까? 현장 가면 밥은 주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음반을 냈어요.”

1996년 문화예술생산자연합 회원이던 밴드 천지인의 콘서트에 오기로 했던 윤도현이 수해를 당해 오지 못하게 되자, ‘땜빵으로 무대에 올라 라면구르는 돌을 불렀다. 그것이 그의 데뷔 무대가 되었다.

하지만 연영석의 노래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 등에서는 낯선 노래로 인식됐다. 흥얼흥얼거리는 창법에 멜로디도 노동가요 같지도 않고 내용도 투쟁이 아니라 그냥 삶을 표현한 내용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음반을 냈는데 반응이 없었죠. 제가 그때 홍보를 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그냥 하고 싶어서 한 거니까.”

지민주가 에휴!” 하고 안타까운 한숨을 쉰다.

그러다가 처음 전해투에서 섭외 온 거야. 그때 서울역에서 주로 집회를 했어요.”

전해투전국해고자원직복직투쟁위원회의 준말이다. 아이엠에프 무렵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를 당해 투쟁하고 있었다. 노동가수 박준을 만난 건 그 무렵이었다.

그때 준이 형 머리 짧게 깎고 수염 기르고. 거기서 처음 만났죠. 그 무렵 서울역에서 정기적으로 공연을 했어요. 주된 관객분들이 노숙인들이었지요. 실업극복국민재단인가 거기랑 같이. 매주 목요일 거리 공연, 꾸준히 했어요. 그러다 장투사업장(장기투쟁사업장)에서 (섭외하는) 전화가 오고 구로동, 하이텍, 이런 데 다니고. 보통 대공장, 큰 사업장은 섭외가 잘 안 왔어요.”

연영석 씨는 대규모 집회나 결의대회를 하는 집회보다는 비정규직, 장애인, 이주노동자 같은 소수자들 집회에 더 많이 결합했다.

 

연영석과 지민주의 만남

원래 알던 후배였는데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후배였죠.”

어떻게 만났나 하는 질문에 연영석이 대답한다. 지민주도 똑같은 대답이 나온다.

첫 만남이 안 좋았죠. 하하하.”

사연은 이렇다. 2000년 무렵 전국의 노동문화 일꾼들이 자본 문화에 대항하는 노동문화를 생산하고 유통할 수 있는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들려고 했다. 연영석은 선배들과 함께 전국의 문화단체를 만나러 돌아다니면서 간담회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관심 있는 단체들이 모두 서울에 모여 회의를 했다.

그때 지민주가 선배들한테 무슨 말을 한 거야. 그런데 내 생각에는 여기 선배들이 그걸 모를 사람들이 아니거든. 그런데 이 친구가 그런 말을 하니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민주가 자세히 설명한다.

저는 대구에서 좋은친구들이라는 노래패 활동을 했어요. 당시 스물일곱 살? 우리 단체가 되게 가난했어요. 라면도 못 먹고 공연 가고, 공연비도 못 받고 활동했어요. 제가 비정규직으로 학교 방과후 교사로 취직해서 월급을 받아 활동비로 썼어요. 내 친구가 대표였는데, 서울에서 노동문화정책정보센터를 만드는 데 각 조직당 1백만 원을 내기로 결의를 하고 온 거예요. 그래서 내가 애들(회원들) 밥도 못 먹는데 백만 원을? 바로 완납해야 하는 건데 나는 못 낸다, 그래서 간담회 때 저희 7명이 서울을 올라왔어요. 단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돈, 예산안을 봤어요. 그게 몇 억대더라고. 그리고 필요한 사무기기, 뭐 컴퓨터도 사야 하고. 아니 그게 필요하면 쓰던 거 쓰면 되지, 이걸 발기인들의 돈으로 하겠다니. 그래서 빡쳐서 선배들한테 쐈어요. 쐈는데, 저 대각선 끝에 연영석 씨가 앉아 있었어요. 선배들이 다 당황해서 달래는 분위기였는데 연영석 씨가 삐딱하게 앉아서 막 ! 그게 아니고소리치는 거야. ‘아 쟤는 뭐야?’ 첫인상이 안 좋았지.”

지금도 안 좋아요. 하하하.” 연영석이 복수한다.

그렇게 감정이 좋지 않게 시작했던 두 사람은 서서히 친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지민주가 기억을 더듬는다.

영석이 형이랑은 연애도 그렇게 오래 안 했지? 명동 거리 공연.”

나한테 마음이 있었던 거 같애. 자꾸 찾아온 거 보면.” 연영석이 약을 올린다.

내가 언제 자꾸 찾아가?” 지민주가 버럭 한다.

자꾸 명동에 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노란 옷 좋아한다니까 자꾸 노란 거 입고 오고.”

모두 웃음이 터졌다.

명동 거리 공연은 민중가수 박준이 주도해 2002년부터 매주 월요일 저녁에 하는 공연이다. 본래 심장병 어린이를 돕기 위한 거리 모금 공연이었는데, 2001년에 부평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사태를 계기로 2002년부터 산재, 해고, 이주노동자, 장애인 자녀들의 장학 기금 마련을 위한 공연으로 바뀌게 됐다. 박준, 권영주, 김대원, 김종환, 다름아름, 연영석, 이씬, 처절한기타맨 등 많은 문화 활동가들이 이 공연에 참여했다. 연영석은 박준 선배의 주선으로 2001년부터 공연을 했다.

그 무렵 지민주는 대구에서 노래패 활동을 접고 서울로 올라온다.

“‘좋은친구들을 정리하고 2003년에 서울로 오게 됐잖아요. 서울에 올라오니 학연, 지연 아무것도 없잖아요. 갈 데도 없고 어떡하지? 이러다가 옛날부터 박준 선배를, 친하진 않지만 아니까, 명동에 선배들도 있으니까 노래도 하고 교류를 하자, 하고 갔더니 연영석 씨, 준이 형, 기상이 형, 미진이도 가끔 나오고, 그때는 가수들이 되게 많이 나왔어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래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랬어요. 명동에 나가다 보니 친해진 거죠.”

언제부터 나한테 반했냐고 물어보는 거야.” 연영석이 집요하게 묻는다.

지민주가 그 말엔 대꾸하지 않고 영석이 형이 인천에 자주 오더라고요.” 하고 대답한다. 지민주는 인천에 방을 얻어 매니저인 박효선과 같이 살고 있었다.

연영석이 다시 농담을 던진다. 제가 인천에 가면 이상하게 버스가 끊어지더라고.”

지민주가 반박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에 와서 잤어. 그때 매니저 효선이랑 같이 있을 때니까. 버스 떨어지면 효선이랑 나랑 자고. 언젠가 형이 사는 데를 가 봤는데 어우, 정말 사람 살 곳이 못 돼. 주차장을 개조해서 밑에서는 정화조 냄새 올라오고. 그런 데서 사는 거야.”

연영석이 보충 설명을 한다. 홍대입구 쪽 카센터 옆에, 무슨 조형연구소라는 데.”

진짜 불쌍한 거야. 측은지심. 거기 화장실도 없거든. 화장실 가려면 홍대입구역까지 뛰어가야 하는 거예요. 효선이랑 나랑 너무 안됐다 하면서, 영석이 형 인천 오게 되면 옆방에서 재워도 되겠다, 따뜻한 밥 한 끼 먹이고. 그렇게 된 거지.”

연영석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첫 인상이 좋지 않은 때가 있었는데, 보면 에너지가 많아요, 당차고. 그런 면이 좋아 보였어요. 명동 와서 친해졌고. 그전에는 그냥 후배, 활동하는 후배. 명동 와서 노래하고 친해지고 하다 보니까. 무대에 올라가면 센 척하는데 귀엽더라고요.”

내가 좀 귀여운 데가 있어요.” 지민주 말에 작은책 일꾼들까지 모두들 웃음이 터진다.

 

4집 앨범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

연영석은 1999년에 1<돼지 다이어트>, 2001년에 2<공장>, 2005년에 <>, 이렇게 모두 세 장의 음반을 발표했다. <돼지 다이어트>에 들어 있는 곡은 모두 여섯 곡밖에 안 된다. 그래서 연영석은 그 앨범을 미니 앨범이라고 한다. 그다음 2집 앨범 <공장>은 라인이 있는 공장과 부가 세습되는 사회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노래다.

1<돼지 다이어트>(1999) 앨범 표지.

2<공장>(2001) 앨범 표지.

3<>(2005) 앨범 표지.


우리 사회가 거대한 공장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태어나는 게 그냥 재수잖아요. 어쩌다 보니 재벌 집에서 태어난 거고, 어쩌다 보니 가난한 집 아이로 태어난 거고. 그래도 우리 사회가 가능성이 있었잖아요. 공부하면 신분 상승 하니까 공부, 공부 한 거야. 그런데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닌 거야. 신자유주의가 그만큼 공고화되면서 지금은 개천에서 용 안 나는 사회. 거기에 딱 맞춰서 너희는 노동자군, 너는 재벌군 등. 그런 생각에 <공장>이란 제목을 붙인 거예요.”

이 음반에 들어 있는 노래 중 간절히이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가 주목을 끌었다. ‘간절히내 할 수 있을 때 일하는 세상, 내 일한 만큼만 받는 세상난 아직 오늘도 간절히 원하지하는 정말 간절한 노래인데 리듬은 경쾌하다. ‘이 씨 니가 시키는 대로 내가 다 할 줄 아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실컷 부려먹고 돈 떼먹고 도망가는 자본가들을 비꼬는 노래다. 이 노래는 콜트콜텍 해고자들이 만든 밴드에서 불러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는 데 한 몫 했다. 여기서 이 씨는 물론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을 가리키는 가사였는데 나중에 이 씨라는 가사를 박 씨라고 바꿔 부르기도 했다. ‘박 씨는 박근혜 전 대통령, 또는 콜트콜텍 사장인 박영호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마음대로 생각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이 사회에 균열을 내려고 해도 쉽지가 않은 거예요. 어느 순간 투쟁사업장들이 15, 20년 싸워도 승리했다는 소식 듣기가 너무 힘든 거예요. 숨 쉬고 사는 게 힘든 거예요. 정말 질식해서 죽겠구나. 그래서 3집은 <>이라는 제목을 붙였어요. 2005년에.”

노래 은 한국대중음악상 특별상을 받은 노래다. 하지만 상금은 없었다. 2017년 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는 신의 놀이로 최우수 포크 노래상을 수상한 이랑이 지난달 총수입이 42만 원, 2월이 96만 원이다. 상을 받지만 상금이 없더라. 혹시 이 메탈릭 디자인의 소품을 구입하실 분 있느냐며 즉석 경매에 부친 상패가 50만 원에 낙찰되는 씁쓸한 에피소드도 있었다. 한국에서 문화로 먹고살기란 얼마나 척박한 실정인지 보여 주는 사례다.

그래도 문화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버릴 수 없다. 뭔가 생산해 내고 싶어 한다. 연영석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연영석은 늘 4집 낼 거다’, ‘내년쯤에 낼 거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다. 이번에는 계획을 단단히 세우고 작업 중이다. 제목은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떤 노래가 담겨 있을까. 결혼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을 텐데.

지금은 좀 다르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14년 세월도 지나고, 예전만큼 운동 열정도 떨어지고. 인정할 수밖에 없어요. 욕을 먹더라도. 지금은 내가 살아가면서 얼마만큼 내 삶을 가능한 한 스스로 존중하고 타인과의 관계도 존중하고 어떤 가치를 찾을 수 있을까? 예전보다 물음표가 더 생긴 거죠. 음반에 제목을 굳이 넣을까? 넣는다면 서럽다, 꿈같다, 우습다하려고 했어요. 가끔 내 삶이 서럽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꿈 같아요. 그러면서 웃겨. 사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런 느낌을 담은 노래예요. 그걸 내 식대로. 가사가 비틀비틀거리다가 펄썩 주저앉았지. 아기가 울어서 깼더니 꿈 같고. 배고파서 밥 먹고 물 한잔 마시니 어, 웃기네.’ 그런 거예요."

지난 64일 작은책을 방문한 지민주 씨와 연영석 씨. 인터뷰 도중 기타 연주를 들려주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힘내라 마음아>

지민주도 연영석과 비슷한 시기에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6년에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노래를 만들기 시작해 2003년에 1, 2006년에 2집을 냈고, 2010년에 연영석과 결혼한 뒤 2016년에 3<힘내라 마음아>를 냈다. 결혼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활동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계를 굉장히 많이 느꼈죠.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할 수는 있지만, 저도 마흔에 결혼했는데 이미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는데 그걸 또 다른 관계로 부숴야 한다는 게. 사실 좋았던 건 아이 낳고, 시각이 넓어지는 거야. 그래서 노래에 변화들이 많아요. ‘지민주 동지 노래가 예전에는 되게 쎘는데 지금은 부드러워졌다, 그런데 위로가 된다.’ 그런 말 들으면 울컥해요. 예전에는 힘이 됐다는 말 들었지만 위로가 됐다는 말은 못 들어 봤어요. 예전에는 무기가 되기 위해서였지만 이제는 일상에서 위로를 받는. 그래서 3집에 말랑말랑한 곡들이 많아요. 좋은 쪽으로 변한 건 그거죠.”

지민주와 연영석은 서로 힘이 돼 주는 동지이자 부부다. 하지만 가끔 생활비 때문에 다툰다. 서로 씀씀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저는 돈이 남더라고요, 제가 관리하면. 그런데 민주는 항상 돈이 부족하대요. 다른 엄마들이 전부 다 그 돈으로 어떻게 생활하냬요. 사실 저는 예전에 혼자 살 때 한 달 15만 원으로. 저는 외식도 안 해요. 우리 부모님이 너무 검소하게 사시는 분들이라 쓰실 줄을 몰라요. 그것도 훈련인 거 같아.”

지민주는 반박한다. 남자들이 모르는, 돈이 들어갈 데가 많다.

한 달에 훨씬 많은 돈을 써요. 적금도 들고 아이한테 들어가는 거 등. 영석이 형이 생활비를 적게 내서 불만이 아니라 잘 모르는 거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가는데. 그런데 그걸 자꾸 얘기하면 자존심도 상해하고. 얘기해서 풀리면 얘기하면 되는데 더 상처받고 안 좋아지는 거지.”

연영석의 칭찬 모드가 발동한다.

민주가 배려 많이 해 주는 편이고요. 생활비 관리하니까 공과금 등 내 예상보다 많이 들어간다는 걸 알아요. 노력은 해요, 저도. 하지만 제가 살아온 나름의 철학, 비록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가는 사회가 이러해서 어쩔 수 없다지만, 내 철학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저는 최대한 비우고 없애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점에 동의하지만 정도가 다른 거지. 예전에 영석이 형이 나보고 인터넷 쇼핑중독자라고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아주 평범한 정도지만.”

지민주가 폭로하고 있다. 이래서 대질 심문이 중요한가 보다.

저는 옷을 사지 않아요.” 연영석이 말한다.

지민주는 연영석이 돈을 안 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애를 낳고 기저귀, 우유, 이런 거 있어야 하니까. 공연도 다녀야 하고. 영석이 형이 다정하게 마트 가는 것도 싫어하고. 그런 부분에서 난 정말 평범한 부부들이 부러운 거야. 평범한 신랑들처럼 식당 섭외해서 아내랑 아이와 저녁 한 번 먹은 적도 없고. 형 들어올 때 아이 과자 같은 것도 한 번도 안 사 와서 돌멩이라도 갖고 들어오라고 했어. 하하.”

연영석이 아이와 같이 가다 생겼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한다.

합정역 살 때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키다리빵집이라고 있거든요. 아이가 처음으로 나한테 말을 한 거야. ‘아빠 빵 사 줘.’ 감정이 묘한 거야. 그런데 제가 뭐라 그랬는지 알아요? ‘아빠 돈 없어.’ 하하하!” 작은책 일꾼들이 폭소를 터뜨린다.

지민주가 그거 보라는 듯 내가 뭐 말하는지 알겠지?” 한다. 연영석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나의 마인드였다는 거야. 저는 산을 걸어 다니는 걸 좋아해요. 고사리 같은 손 잡고 망원시장 지나서 걸어가면 한 시간 정도 걸리거든요. 망원시장부터 애가 힘들어해요. 껌 하나 사서 반 잘라! 아빠 반, 너 반.’ 나는 요즘 애들이 너무 풍족한 게 걱정인 거야. 그런데 이젠 나도 많이 놓았어.”

영석이 형이 너무 안 하니까 내가 채워 주기 시작한 거예요. 딴 애들은 아빠 엄마랑 놀이공원 가끔 가잖아. 아이가 이번에 처음 롯데월드 갔어요. 워터파크도 작년에 처음 갔고. 그래서 난 약간 불만이 평범한 행복, 저녁이 있는 삶, 저녁에 식구들하고 밥 먹으러 갈까 술 먹으러 갈까, 말만 해 놓고. 나는 그렇게 못하고 아이와 내가 어딜 검색해서 가고. 요즘 영석이 형이 집에서 일을 하니까, 집에 있으면 아이가 아빠한테 가서 놀아 달라고 하니까 데리고 나오는 게 편하잖아. 근데 집에 들어와서 애 씻기려고 하면 나도 힘든 거지.”

나는 (아이가) 혼자 할 줄 알아라, 하고 안 하는 거지.”

서로 평행선을 달린다. 명절에 누구 집을 먼저 가는가 하는 문제도 서로 부딪친다. 이 문제는 어느 집에서나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연영석이 말한다.

방법은 많아요. 이게 가부장적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부모님한테 잘할 수 있으면 잘하고, 아니면 냉정하게 당신이 버는 만큼 서로 자기 집에 알아서 해라, 했잖아. 그런데 남자로서 느끼는 압박감이 있어요. 장모님은 나한테 인사가 연 서방 이제 돈을 벌어야 하지 않겠어?’ 그게 대화 내용의 핵심이야. 그리고 처갓집 가서 밥 먹으면 내가 사야잖아. 대구 사람들 내가 쏠게요, 그런 문화를 좋아한다며?”

그건 누구나 다 그래!”

아냐, 우리 집은 안 그래. 문화가 다른 거야.” 연영석이 말을 잇는다. “내가 망원시장 장 보러 가면서, 장모님에게 닭도리탕이라도 해 드리고 싶어서, 난 내 손으로 해 주는 게 최선이야. 어머니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제가 장 보러 가는데, 그러면 장모님이 됐네. 그런 걸 뭘.’ 하는 거야.”

그게 아니라 엄마는 계속 밥을 해 먹잖아요. 집에서 뭘 해 먹는 게 싫은 거야.”

문화가 다른 거야.”

도무지 대화 접점을 찾지 못한다.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 것만 같다. 결론을 맺으려고 내가 다시 이번에 새로 나올 음반에 대해 물었다. 연영석이 대답한다.

새로 나올 4집 앨범 표지 사진. 사진_ 전수현

제가 14년 만에 작업하게 된 이유가 단지 결혼, 애 낳고서만은 아닌 거 같아요. 음악이라는 것도 내가 뭔가 작업을 하려고 할 때 그 여건이 갖춰져 있으면 구현해 내는데, 걸리는 게 너무 많은 거야. 거기서 지치는 거죠. 그러다 한 해, 두 해, 14년 걸린 건데. 더는 안 되겠다, 갈수록 자존감이 떨어져서. 더는 이렇게 있다가는.”

음반을 낸다는 것과 자존감은 무슨 연관이 있나요?”

음반을 낸다는 것은 내 음악을 세상에 발표하는 거잖아요. 어떤 노래는 10, 15년 전에 만든 노래도 있어요. 그 노래는 나만 아는 거예요. 내가 정식으로 발표를 한 게 아니잖아요. 음반은 하나의 과정인 거죠. 그런데 자꾸 핑계 대는 것 같고. ‘내년쯤에 낼 거예요.’ 계속 거짓말쟁이가 되는 거예요.”

서울시 마포구 성미산로에 있는 톤스튜디오에서 음반 작업을 하고 있는 연영석 씨. 작은책(안건모)


지민주는 연영석과 다르다.

저는 현장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언제든지 제 노래가 아닌 노래도 현장에서 필요하다 싶으면 부르는 그런 스타일. 거기서 만족감을 느끼고, 또 팀을 만들어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걸 하고 있거든요. 콘서트도 하고 나름 동시에 몇 가지 일을 할 수 있어요. 잘하지는 못하지만요. 영석이 형은 저랑 다른 거 같아요. 결론은 영석이 형이 뮤지션은 맞아요. 음악을 해야 하고, 음악 할 때 에너지가 생기는 사람이에요. 제가 조금 미안한 게, 형이 그동안 음반 못 냈던 게 나랑 연애하고 애 낳고 딱 그 시기더라고. 그때 음반이 나왔어야 하는데. 같은 동료, 음악하는 사람으로 봤을 때는 가장 치고 올라가는 시기에 작품들이 못 나왔다는 게 조금 아쉬운 게 있어요.”

둘 다 노래를 만들고 부르지만 지민주는 노동가수라고 불리기를 원하고 연영석은 문화노동자로 불리기를 원한다. 노동가수와 문화노동자는 비슷하지만 전혀 달랐다. 노동가수 지민주는 계속 현장에서 노래를 할 거라는 데 변함이 없다. 문화노동자 연영석도 늘 현장에서 노래를 하겠지만 마음가짐은 조금 달랐다.

저는 운동하면서 작업에 대한 욕망을 조금씩 억누르고 살았어요. 작가는 명확한 기준을 잡고 밀고 나가야 된다고들 하는데. 여전히 저에게는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고, 노래 부르고, 뭔가 만들고, 표현하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어요. 그런 사람!인 거예요. 공연 다닐 때, 예를 들면 나는 어떤 노래를 부르려고 가요.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요. 그래서 준비해서 가요. 그런데 현장 가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에요. 모두들 검은 얼굴로 뜨거운 햇볕 아래 앉아 있는데 차마 준비한 노래를 부를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물론 강요된 건 아니에요. 저의 판단과 선택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저는 운동에 복무한다는 합리화된 자기 검열을 한다니까요. 결론은 제 욕망도 살리고 사회적 가치를 살리는 길을 찾고 싶어요. 결국 스스로 느끼는 부족함을 채워 가야 하겠죠. 저는 운동도 자기 성장과 자기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그거 희생이지 운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늘 그런 생각을 했지만 솔직히 용기도 없었고 실천도 잘 못한 것 같아요.”

지민주가 격하게 맞장구친다. 그래, 살날이 얼마 안 남았잖아.”

운동을 행복하려고 하는 거지 학대하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희생을 할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영석이 힘주어 말한다.

유이분 편집장이 물었다. 그래도 민주 씨는 행복하잖아요.”

나요? 나는 행복해요. 사람들 만나고 공연하는 거 좋아하고 행복해요.”

연영석이 강조한다. 그게 중요해요. 저는 공연 섭외가 오면 두려워요. 제일 무서운 말이 뭐냐면 분위기 띄워 주세요하는 거예요.”

연영석 노래는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가 아니다. 노동자들의 삶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노래다. 그래서 이 세상은 다양한 예술가가 필요한 것이다. 분위기를 띄워 주는 건 노동가수 지민주 몫이고, 노동자의 삶과, 사회 현실을 시처럼 들려주는 음악을 음미하게 해 주는 건 문화노동자 연영석 몫이다. 분명한 것은 두 사람 다 노래로 약자들이 포기하지 않게 힘을 주거나, 메마른 감성을 적셔 주거나 하는 예술인들이라는 점이다. 이런 예술가들이 생활 걱정하지 않고 활동할 수 있는 사회가 돼야 하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긴 인터뷰가 끝났다. 지민주는 오늘도 공연하러 마로니에공원을 가고, 연영석은 음반 작업을 하러 작업실로 간다. 누가 뭐래도 두 사람은 여전히 현장에 있을 것이다. (연영석은 다음 날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에 와서 콜텍 노동자들 강연에 찬조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문당리 789’, ‘윤식이 나간다’, ‘인터뷰세 곡을 불렀다. 모두 우리와 같은 가난한 이웃들의 이야기였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여성가족부 아이돌보미

 

여성가족부의 기막힌 꼼수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이돌보미 고정래 씨(60)는 아침 일찍 돌봄을 요청한 이용자의 가정으로 출근했다. 네 살 아이가 있는 맞벌이 가정이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어린이집 등원 준비 및 등원을 시켜 주는 일이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는 시리얼을 먹고 있다가 고 씨를 보고 멀리 떨어졌다. 아이 아빠는 출근하러 나갔다. 고 씨는 아이가 먹는 것을 도와주려 했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아이 아빠한테 거실에 있는 전자기기를 꺼 달라는 문자가 왔다. CCTV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고 씨는 기분이 언짢았다. 거의 대부분 이용자 집에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용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10년 경력자인 고 씨는 아직도 위축된다. 일터에 있는 아이 엄마한테는 어린이집 위치를 알려주는 문자가 왔다. 문자를 확인하려고 고 씨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엄마는 그날 아이돌보미를 파견하는 건강가정지원센터(센터)에 아이돌보미 교체 민원을 넣었다. 고 씨가 아이 밥은 안 먹이고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는 이유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잘리는 인생이에요. 내가 감시당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고 씨를 비롯한 아이돌보미들은 요즘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한다. 이용자들의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강서구 한 카페에서 고 씨와 김경인(58), 배민주(54) 씨를 만나 속사정을 들어 보았다. 이들은 모두 서울 강서·양천구 건강가정지원센터 소속 돌보미들로, 노동조합(민주노총 공공연대노동조합 아이돌봄분과) 조합원이기도 하다.

▲ 서울 강서.양천 지역 아이돌보미 배민주, 김경인, 고정래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아이돌봄 서비스는 여성가족부가 가정의 아이돌봄을 지원하여 아이의 복지 증진과 보호자의 일·가정 양립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과 양육친화적인 사회 환경을 조성(아이돌봄 서비스 홈페이지 인용)할 목적으로 2007년부터 시작됐다. 3개월~12세 아동을 둔 가정에서 시간당 9650(2019년 기준)을 내면 이용이 가능한데, 소득 기준에 따라 최대 80퍼센트까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관련 법령 및 행정 지침 등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리면 단체장들은 돌봄서비스를 운영할 기관을 선정하고 지역 기관들은 돌보미를 채용해 이용자 가정에 보낸다. 아이돌보미를 연계해 주는 기관은 건강가정지원센터. 각 시군구마다 있는 센터는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다양한 가족지원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설치한 기관으로, 대부분 민간 위탁 운영되고 있다. 전국 아이돌보미 종사자는 2018년 기준 23천여 명이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예뻐서, 손주를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배민주 씨와 고정래 씨가 말했다. 고정래 씨는 2009년부터, 배민주 씨와 김경인 씨는 2013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은 이용자가 많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급격히 일감이 줄었다. 정부가 2022년까지 아이돌보미를 3만 명으로 증원하기로 계획하며 2018년부터 인력을 대폭 채용해 돌보미들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센터는 올 11일부터 주 52시간 노동시간 시행을 핑계로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에 2시간~3시간 30분씩 돌보미를 나누어 보내는, 일명 돌보미 쪼개기를 시행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정책이었다. 돌보미들은 주 15시간(60시간)도 채우지 못하게 되는 처지가 됐다.(60시간을 채워야 4대 보험 가입 및 주휴수당과 연차휴가가 생긴다.)

() 60시간 채울려고 이 집 저 집 땜빵을 다니고. 정말 아주 치사한 집까지 다 다녔거든요. 그래야 60시간이 채워져요.”

60시간을 채워봤자 이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504천 원. 직업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돌보미들은 여성가족부가 돌보미 쪼개기를 하는 이유가 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라고 본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회사는 노동자에게 4시간 근무하면 30, 8시간 근무하면 1시간 이상의 휴게 시간을 의무적으로 부여해야 하는데 휴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4시간이 되기 전에 다른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동안 업무 특성상 아이돌보미들은 쉴 수가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권리인 휴게 시간을 사실상 박탈 당해 하루에 1시간 이상을 무급으로 일해 왔다. 노조가 아이돌보미에 한해 법령 개정하고 임금으로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자 여성가족부는 돌보미 쪼개기로 휴게 시간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돌보미 쪼개기때문에 아이돌보미들은 물론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들도 큰 고충을 겪고 있다. 아이돌보미가 너무 자주 바뀌어 아이들이 돌보미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고정래 씨가 말한다.

기존 선생님하고는 잘 놀다가도 제가 들어가면 애가 울고불고 난리에요. 애한테도 정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안 하고 싶고, 힘들어요.”

배민주 씨는 애착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최소 한 달에서 석 달이 걸린다며 정부의 탁상 행정을 비판했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용자도 엄청 불만이고요.”

3~4시간을 일한 뒤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돌보미들의 이동 시간과 교통비도 배로 들었다. 입사할 당시에는 최저시급이 안 됐지만 교통비도 지급됐고 급여의 10퍼센트만큼 경력수당도 지급됐다. 하지만 20139월부터 교통비가 없어졌다.

거리가 좀 먼 가정은 1시간을 가야 돼요. 2시간 돌봄하고 왕복 2시간, 모두 4시간 투자해서 (2013년 당시) 1만 원을 벌려고 가는 거예요.”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에 맞춰졌지만 교통비뿐만 아니라 경력수당, 활동지원금 등 각종 수당마저 삭감되자 총급여는 갈수록 줄었다. CCTV 감시, 이용자의 갑질 및 갈등에 항상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지내다가 센터에 호소도 해 봤다.

여성가족부나 센터는 오로지 이용자 편이에요. 여성가족부에 이용자 민원이 들어가면 센터 점수가 깎이거든요. 시시비비를 가려서 이용자 갑질도 없애 줘야 하는데 무조건 이용자 편이에요.”

바뀌는 것이 없자 20179, 배민주 씨는 여성가족부에 처우 개선을 호소하는 민원을 넣었다.

“‘이 사업은 이용자를 위한 사업이지 선생님들을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희도 세금 내는 국민인데, 그리고 우리가 있어야 아이가 있는 거고 아이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냐따졌죠. 그랬더니 거기 사무관인가가 ~ . 이용자 민원 갖고도 우리 머리 폭발할 거 같으니까 전화하지 마세요한 거예요.”

배 씨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높은 기관인 국무총리실에 투서를 했다. 다시 여성가족부로부터 메일이 왔다.

“CCTV 있는 데는 안 가면 되고, 인권 논하지 말라는 메일을 받았어요. 생각해 보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자 배 씨는 인터넷으로 노동조합을 알아보았다. 광주와 울산에서 먼저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지회에 연락해 권현숙 지회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부터 아이돌보미들 100명 이상에게 무작위로 연락을 했다. 10시 넘어 돌보미들을 만나고 두 달 만에 80명 넘게 조합 가입서를 받았다. 2017123,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강서분회가 설립됐다. 현재 전국 조합원 수는 약 3500. 이들의 요구는 교통비 지급 및 급여 인상, 경조사 유급휴일 적용, 근무 연수에 따른 연차수당 반영 및 미사용 휴게 시간 보상 등이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앞에 천막을 치고 진선미 장관 면담을 요구했다. 노조는 여성가족부 담당 공무원들과 몇 차례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노조에 노력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입장을 밝힌 상태다.

▲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조합원들이 진선미 장관과 대화를 요구하며 천막에서 기다리고 있다(2019.6.3). 사진 제공_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열악한 처우에도 아이돌보미들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보람을 생각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와 이용자 가정의 신뢰를 받을 때가 가장 뿌듯하다. 배민주 씨가 말한다.

“3개월 아기 때 만나서 7년째 보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애들이 저하고 떨어지기 싫어해서 그 부모님이 저 믿고 주말마다 저희 집으로 보내요. 놀고 돌아가면 애들이 그렇게 밝대요. (웃음)”

고정래 씨도 마찬가지다.

저도 18개월부터 본 애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까지도 보고 있어요. 저 때문에 제가 있는 곳으로 이사올 정도로. 보람 있어요.”

민감한 CCTV 설치 문제도 신뢰 속에서 풀어 갈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CCTV 달지 마시고 한 달만 믿고 지켜봐 주세요. 아이가 선생님한테 애착을 갖는지 안 갖는지가 CCTV보다 더 정확합니다하고 설득해요. 그래서 3년을 안 달고 했어요.”

묻지마 살인 같은 게 늘어나는 건 우리 사회가 불행한 거예요. 그런 일 없으려면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정말 맑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이 되어야 해요. 저희는 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거든요. 아무리 좋은 마인드로 일을 해도 갈수록 처우가 안 좋아지고 내 급여도 없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들은 아이돌봄 사업이 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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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학교급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정명옥/ 경기 삼성초등학교 영양교사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에서 경기도교육청이 공채로 학교 영양사를 뽑는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터라, 시댁 아주버니가 그 밤중에 부리나케 달려와 얘기해 줘서 알게 됐다.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라 뉴스거리였던 모양이었다. 아기도 없는 신혼집을 한밤중에 들이닥치다니,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바로 다음 날이 접수 마감일이었고 나는 마감 시간을 채 한 시간도 남겨 두지 않고 겨우 접수했다. 19895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일을 올해로 30년째 하고 있다.

학교급식은 1953년에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후 유네스코의 부분적 구호로 빵 무료급식을 실시하였고, 19811월 학교급식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교육활동 지원을 위해 식품위생직 영양사가 운영하다가, 2003년 지금과 같은 영양교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애초에 지원 성격으로 출발했기에 급식과 교육의 연결고리는 약했다.

학교급식에서 사람들(학생이나 선생이나 모두들)을 함부로 버리는 모습을 보면 나는 지금까지도 무뎌지지 않고 실망을 넘어 거의 분노를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 한 톨이라도 흘리면 주워서 먹어야 했다. 더군다나 음식을 남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단체급식이 학교, 병원, 기업체 등에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음식 남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오호 통재라~!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라는 책도 있듯이 차라리 급식제도를 없애라~!’ 주장하고 싶을 정도이다.

학교급식은 보편성, 일회성, 주관성의 특성을 갖는다. 단체급식으로서의 보편성, 먹고 나면 서류밖에 남는 것이 없는 일회성 그리고 먹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느끼는 맛의 주관성이 그것이다. 사실 이란 레시피에 의한 과학적인 맛(절대성)이라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배가 고픈 정도(시장이 반찬)나 건강 상태(몸이 아프면 입맛이 없어진다) 등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른 상대성이 훨씬 크다. 나에게 제일 어려운 일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건강에 이로운 음식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먹기 좋은 학교급식, 몸에 좋은 학교급식, 약이 되는 학교급식을 추구한다.

초등학교는 1학년과 6학년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1학년은 학교 밥을 잘 먹는 편인데 점점 자라서 6학년 어르신이 되면 학교 밥이 맛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한다.

나는 일부러 6학년 1학기 영양 수업을 학교급식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로 진행한다. 내 수업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분단별 발표 주제(분단 구성원 모두 각자 발표)는 학교급식의 좋은 점 이야기하기, 학교급식의 문제점 이야기하기, 앞의 분단에서 발표한 문제점을 잘 듣고 개선 방안 제시하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양심선언을 하는 친구들이 제법 출현한다는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은 잘 먹지 않고, 몸에 이롭지 않은 음식은 엄청 먹어 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편식을 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 것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주변에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학교급식을 하려면 영양교사가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레시피, 이를테면 파스타나 고기 요리(고기 요리는 대충 만들어도 다 맛있다고 잘 먹는다.) 등 다양한 요리법을 연구하여 식단을 구성하고, 그 레시피와 식단을 조리사와 조리실무사들이 밥상에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재료비가 충분해야 하는데, 예산이란 늘 부족하거나 빠듯하다. 또 조리사와 조리실무사의 요리 솜씨도 좋아야 하고 조리기구도 잘 갖추어지면 훨씬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일하는 작업자들 간의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협력이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음식이 맛이 없게 만들어진다. 이건 진짜다. ‘음식은 정성이라는 옛말이 정말로 옳다. 거기에 무어라 해도 학교급식의 완성은 먹는 학생들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배가 고픈 상태에서 급식을 먹으러 오면 좋겠다. 그리고 애초에 건강하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가 적당히 고파야 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달게 먹을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건강 상태가 좋은 친 구일수록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얘길 하다 보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말이 생각난다. 건강한 학생을 기르기 위해 학교급식을 하고 있는데, 건강한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맛나게 먹는다니.

작은책(정인열)

나는 하얀 위생복을 입고 1, 2, 3(우리 학교는 식당이 3개 층으로 나뉘어 있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점심을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보러 다닌다. 우리가 마련한 음식을 얼마나 먹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본다. 잘 먹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들이 먹는 모습, 먹는 양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내가 정성을 쏟는 일이 있는데, 퇴식구에 지키고 서서 식판을 깨끗이 정리하도록 지도하는 일이다. 밥 한 톨도 식판에 붙은 채로 배출하지 않도록 호랑이 눈을 뜨고 지킨다. 식판을 깨끗이 배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구를 살리는 최소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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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아이 짐을 교실까지 들어다 줘, 말아?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 교장

 

 

첫날이라 짐이 많아서요.” “교실을 못 찾을까 봐 그러는데요.”

짐도 무겁고 아이가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몰라서 오늘만 들어가면 안 될까요?” “아이만 먼저 들여보내고 제가 뒤따라가서 잘하나 보면 안 될까요?”

이런 말을, 입학식 다음 날 교문에서 아침맞이하며 1학년 학부모들과 쉴 새 없이 주고받았어. ‘아이가 힘들다는데 잠깐 들어갔다 오는 게 문제요?’ 하는 당당한 민원인 표정부터 안 들어가는 게 원칙인 건 아는데 어쩔 수 없으니까 우리 아이만하는 애틋한 호소까지 상황에 맞게 대응하는 게 장난이 아니네.

다른 날보다 몇 배 힘든 아침맞이였어. 운동장과 학교 건물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걷는데 1학년 학부모와 아이들이 자꾸 떠올라. 학부모와 입학 초 학교 생활 적응 방법에 대해 하나하나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했는데 놓쳤다는 생각이 드네. 예비 소집 이후 몇 차례 신입생 학부모를 위한 소통의 자리가 마련되었다면 오늘 아침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아이 상황에 따라 부모가 교실까지 들어갈 수도 있어. 사전에 담임과 학부모가 아이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 나눈 뒤 나온 결론이라면 무엇은 못 하겠어? 하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학교가 정한 원칙을 무너뜨리는 건 교육적으로 큰 손실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늘 아침에 겪은 일을 가볍게 넘어가면 내년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될 거야. 그러지 않도록 내년 교육 과정 수립과 운영에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깊이 생각해 봤어.

유치원을 떠나 학교라고 하는 곳에 처음 등교하는 아침이야. 그런데 갖고 가야 할 준비물이 많아. 이걸 어떻게 들고 간다? 태어나 학교에 첫발을 내딛는 역사적인 날, 준비물을 들고 가는 방법에 따라 아이에게 심리적으로 어떤 움직임과 변화가 있고 그 교육적 의미는 뭘까? 아침맞이하며 만난 1학년 아이들과 부모를, 준비물을 들고 오는 방법에 따라 세 묶음으로 나눠 봤어. 그랬더니 부모와 아이들 표정, 몸짓, 눈빛,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다르더라고.

첫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실까지 가져다주는 거야. 부모 표정을 보면 밝고 뿌듯해. 그런데 온몸에 긴장감이 흐르고 양 볼이 불그레하게 상기되어 있어. 기운이 올라와 있다는 이야기지. 아이와 말을 하면서도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로 봐서 빠르게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 교실 위치가 어디인지, 준비물을 어디에 넣어야 하고 담임을 만나면 뭐라고 해야 할지 등 생각이 많아.

반면 아이는 발걸음이 가볍고 두 손바닥은 펼쳐져 있고 눈은 이리저리 편하고 자유롭게 움직여. 편안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느 하나를 깊이 바라보지는 않아. 여유롭고 편안하고 행복해. 눈길과 마음 모두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게 쏠려 있어.

두 번째는 부모가 짐을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고 거기서부터 아이가 들고 들어가는 거야. 부모 먼저 살펴보면 들여보내 주면 안 되나, 다른 사람도 들어가는데. 애 보는 앞에서 규칙을 어길 순 없고.’ 하며 교문 앞에서 아침맞이를 하고 있는 교장 눈치를 슬쩍 살피는데 갈등이라고 할까. 망설임, 머뭇거림이 느껴져. 애당초 집에서 떠날 때부터 교문까지만 들어다 주기로 아이와 약속하고 온 분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아이에게 짐을 넘겨주는데, 교실까지 들어다 주기로 해 놓고 교장이 버티고 서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아이에게 들려 보내는 경우에는 떼쓰고 울고 난리야.

이렇든 저렇든 대부분의 부모에게서 불안감, 걱정, 두려움, 노심초사 같은 감정이 느껴져.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한다. 혼자 갈 수 있지?”, “넌 잘할 수 있어.”, “이제 네 힘으로 하는 거야.”, “화이팅!”, “너 파일 박스 어디에 둬야 해? 크레파스는? 실내화는? 잘 보고 해라.”, “교실 찾을 수 있어? 모르면 내게 전화해.”

반면 대부분의 아이들 입이 댓 발은 나와 있어. 골이 난 거야. 왜 교실까지 들어다 주지 않냐는 거지. 울거나 드물게는 같이 들어가자고 우기기도 해. 기운은 가라앉아 있고 눈꼬리와 어깨도 처져 있어. 발은 끌리고 다리는 풀려 있다. 친구가 옆에서 말을 걸어도 쳐다보지도 않거나 더 말 붙이고 싶지 않은 생각이 들게 하는 표정으로 영혼 없이 건성으로 대답하고. 가끔은 웃으며 걱정 마라는 표정을 짓거나 엄마를 힘차게 부르는 아이도 있지만 아주 드물지.


마지막 세 번째 경우는 집에서부터 혼자 짐을 들고 오는 아이들이야. 이런 아이들은 교문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신호등을 건너오는 순간부터 아우라가 느껴져. 얼굴은 상기되어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두 손은 마치 절벽에 오르며 밧줄 붙잡듯 봉지와 손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발은 번쩍번쩍 들어 힘차게 앞으로 내딛어. 친구들이 부르면 대답은 하면서도 자기 생각에 빠져 있는 듯 길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아. 얼굴에는 긴장감이 넘치는데 짜증은 없고 눈동자는 앞만 보고 머릿 속에서는 뭔가 많은 생각이 솟구치고 있는 게 보여. 낯선 세상에 혼자 들어가는 두려움이 느껴지고 콧구멍은 벌렁거리고 콧등엔 땀이 솟아 있어. 주먹 하이파이브 하자고 말을 걸어도 귓등으로 흘리고 몇 녀석은 눈으로 자기 두 손을 가리켜. ‘보면 모르냐. 지금 내 손이 하이파이브 하게 생겼냐?’ 이런 뜻이지. 목에 힘 주고 당당하게 나를 쳐다보는데 가슴이 뭉클해.

이 세 종류의 아이들 가운데 삶에서 만나는 문제 상황을 풀어내고 해결해 삶의 주인으로 설 힘을 얻은 아이는 누구일까? 손발이 편안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기로 따지면 첫 번째 아이가 가장 큰 이익을 본 거고 세상살이라는 큰 바다와 산을 넘어갈 힘을 얻은 걸로 치면 세 번째 아이를 당할 수 없어. 사람들은 학교란 아늑하고 편안하고 행복한 곳이어야 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난 아니라고 믿어. 학교라는 곳, 배움이 일어나는 곳은 낯설고 두렵고 불안한 자극이 가득한 곳이야. 모험이 가득한 곳이라는 거지. 학교가 왜 모험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지는 다음 호에서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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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 법률 상담소

 

반지하에서 생기는 법률 분쟁

김묘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더욱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주인공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 집이 등장합니다. 반지하 집은 빛이 잘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지 않지만,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지하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화장실 하수구가 역류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반지하 집은 그런 단점을 현실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영화를 본 관객 중에는 자신이 살았던 반지하 집의 추억을 떠올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영 씨는 영화가 끝나면 현실의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화 속 리얼한 반지하 집을 보고 나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죠. 하영 씨가 반지하에서 겪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하영 씨는 독립 후 첫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본인 예산 안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집을 발견하고 바로 계약을 했습니다. 반지하라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도배·장판이 깨끗하고 월세도 싸니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장판 밑에 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옷장 속까지 곰팡이가 펴서 몇몇 옷은 버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주인은 하영 씨가 환기를 안 해서 생긴 문제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림_ 이동수

 

우리 법에는 집주인이 집을 빌려줄 때에는 세입자가 집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민법 제623)”.

반지하 건물의 특성상 세입자의 생활 습관보다는 채광과 통풍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곰팡이 때문에 집을 집처럼 이용할 수 없다면 임대인은 당연히 수선 의무를 부담하게 됩니다. 다만, 세입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집주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만약 세입자가 집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집주인에게 신속히 알리지 않아 피해가 발생한다면 피해 비용 일부를 세입자가 부담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영 씨의 경우, 새로 도배·장판을 하고 입주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기 때문에, 곰팡이가 생긴 곳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잘 기록해두었다면 집주인에게 곰팡이 제거 시공 등을 요청할 수 있었고, 수선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였다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_ 이동수

 

사실 하영 씨는 지난여름에는 더 큰 일을 겪었습니다. 큰비가 내려 하영 씨가 살고 있는 반지하 방으로 물이 넘쳐 들어왔습니다. 집주인이 장판과 창문 쪽 벽지를 교체해 주기는 했지만, 물에 잠겨 결국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가재도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법적으로 따져 보면 침수 피해로 인하여 집에 생긴 피해는 집주인이 복구해야 합니다. 민법에서는 집주인에게 수리 의무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의 의무는 임대 목적물인 집을 수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 보상 책임까지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집 구조적인 하자로 인하여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집주인에게 그러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재난지원금

국가에서 침수 피해로 인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서 정한 바에 따라 침수 피해를 본 당사자에게 지급됩니다. 이 때문에 집주인이 세입자가 받은 재난지원금을 돌려달라고 하여 종종 분쟁이 발생하는데, 침수 피해를 본 세입자가 이를 돌려줄 의무는 없지만 해당 지원금은 침수 피해 복구에 사용해야 합니다.

주택 침수 피해를 입고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가 호우 피해로 인한 장판과 벽지 상태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대로 지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해당 세입자가 재난지원금을 받고도 이를 침수 피해 복구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 이사를 나가려고 할 때 집주인이 침수 피해로 인하여 하자가 발생한 장판과 벽지를 교체하라고 한다면,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림_ 이동수

 

주택법에서는 국민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저주거기준을 설정·공고하도록 정하고 있고(5조의2), 2011년 마지막으로 공고된 최저주거기준에 의하면 주택은 적절한 방음, 환기, 채광 및 난방설비를 갖추어야 하고, 자연재해로 인한 위험이 현저한 지역에 위치해서는 안 됩니다. 하영 씨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최저주거기준이 지켜졌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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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6월호

세상 보기

생태 이야기

 

벌써 모기가 나타났다는데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입하(立夏). 고마운 계절이 어느새 여름 문턱에 다다랐다. 어린이날 미세먼지가 심했는데, 하루 지나자 쾌적해졌다. 세계보건기구 기준으로 매우 좋다. 초미세먼지가 나빠도 마스크 착용하고 걸었으니 이런 날 집 안에 머물면 예의에 벗어난 일이다. 급한 원고가 더 급해지더라도 밖에 나갔는데, 조금 쌀쌀해졌다. 벚꽃이 떨어지면서 한낮에 그늘을 찾았는데, 양지로 걸었다. 북풍이 멈추면 따뜻해질 거라 예보하는데, 이내 무더워지겠지.

요즘 날씨는 느닷없다. 어제오늘은 아닌데, 산들바람으로 가로수를 초록으로 물들이던 날씨가 어느새 여름이다. 기상이변이라는 말은 이제 식상하다. 우리의 언어와 달리 자연의 변화는 더디다. 여태 기상이변에 적응하지 못한다. 순서를 놓친 봄꽃이 뒤죽박죽이자 새들은 짝을 찾기 어려워한다. 개구리가 물가 찾는 순서를 놓치면 잡종이 생긴다. 잡종은 예외적이어야 한다. 일상화되면 생태계는 안정을 잃는다. 생식 능력이 없는 잡종이 늘어나면 먹이사슬이 무너지지 않는가.

요 며칠, 거리에서 폭염 냄새가 났다. 작년 여름은 참 유난했는데, 올여름은 견딜 만할까? 롱패딩이 씻은 듯 사라진 거리에 반팔 티셔츠가 갑자기 늘었는데, 가지치기로 앙상해진 플라타너스들은 새잎을 몇 가닥 펼치지 못했다. 넓은 가로수 그늘이 햇살을 막지 못할 올여름이 벌써 두렵다. 여름은 초미세먼지를 줄이니 다행인데, 경각심까지 무뎌질지 모른다. 아닐까? 폭염은 에어컨 가동을 부추기고 중국 동해안의 화력발전은 석탄 사용량을 늘릴 테니 미세먼지가 오히려 늘어나는 건 아닐까?

괭이갈매기 집단 번식지로 잘 알려진 홍도의 평균 기온이 40년 동안 섭씨 1도 상승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뿐 아니라, 2010년 제주도에서 발견돼 학자들 놀라게 한 아열대성 식물 고깔닭의장풀이 작년에는 홍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올해는 무성하려나? 거제도의 평균 수온이 1970년대보다 0.6도 정도 올랐다고 하니 홍도 해역도 비슷할 텐데, 우리에게 생소한 범돔과 아홉동가리 같은 아열대성 어종이 홍도 해역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언론은 덧붙였다. 아열대 어류가 고유 어류를 밀어낸 형국인데, 괭이갈매기는 번식에 이상이 없을까?

0.6도의 변화는 피부로 느끼기에 미미하다. 자판기에서 뽑아 든 믹스커피가 미지근해지는 온도보다 훨씬 작지만 해양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드넓은 바다의 생태계는 변화에 예민하고 우리는 그 변화 폭을 감내하며 물고기를 잡아 왔다. 잡는 종류와 양이 들쭉날쭉했어도 익숙한 범위 이내였으므로 견뎌 냈다. 하지만 이젠 모른다. 누적된 기상이변은 새로운 적응을 요구할지 모른다. 쥐치가 사라진 홍도 해역에서 잡아 올린 범돔과 아홉동가리의 요리법을 연구해야 한다.

수온 변화는 플랑크톤 변화로 이어지고 필히 어류 변화로 연결된다. 국립공원공단에서 홍도 괭이갈매기가 2003년보다 열흘 빨리 번식했다는 보도 자료를 돌린 모양이다. 괭이갈매기는 새끼들에게 범돔과 아홉동가리를 먹여야 할지 모르는데, 처음에 흔쾌하지 않았을 거 같다. 지금도 그리 흔쾌하지 않을 텐데, 쥐치는 어떨까? 남획으로 사라진 쥐치가 홍도 주변에 회복되더라도 아열대 어류를 능가하기 어려울 거 같다. 우리 눈에 띄지 않는 플랑크톤이 이미 아열대성으로 바뀐 상황이므로.

온난화는 태풍과 해일의 수와 힘을 키운다. 아시아, 그중 우리나라를 둘러싼 바다의 수온이 크게 상승했다. 태풍 피해가 전 같지 않다. 바다에서 비롯되는 자연재해 기록이 자주 바뀌다 보니 이제 눈에 띄는 뉴스거리가 아닌데, 그렇다고 피해자에게 위안이 되는 건 아니다. 온난화에 대한 대비는 충분한가? 태풍이 일으키는 홍수와 산사태, 해일과 폭풍만이 아니다. 평균 기온과 수온의 변화가 일으키는 생태계 변화에 대한 대책은 무엇이어야 하나?

곧 제주도 남쪽 해역부터 아열대성 해파리가 올라올 것이다. 해마다 반복되지만 종류와 양이 늘어나기만 한다. 쥐치가 흔전만전할 때, 해파리는 그물 올리는 어부와 해수욕장의 청춘 남녀를 괴롭히지 않았지만 지금은 민원의 대상이 되었다. 해파리들은 서해안에 밀집한 발전소에 적지 않은 비용을 청구한다. 터빈 돌린 수증기를 식히기 위해 끌어 올리는 바닷물에 감당하기 어렵게 섞이는 해파리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인데, 이런! 터빈을 식히고 나오는 온배수가 다시 해파리를 끌어들인다. 바다의 온도를 높이는 탓이다.

발전 용량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석탄화력발전소는 발전설비 1기마다 초당 50톤의 온배수를 내놓는다. 우리나라 화력발전 사업소마다 그런 설비가 적으면 서넛, 많으면 예닐곱 이상이고, 그로 인해 영흥도, 평택, 당진 주변 10킬로미터의 바다가 1도 정도 따뜻하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영광군에 막대한 온배수를 쏟아 내는 핵발전소가 6기 가동 중이다. 같은 용량인 화력발전소보다 2배의 온배수를 황해에 내놓은 핵발전소는 우리보다 중국에 훨씬 많다. 더 늘어날 태세인데, 중국의 화력발전소는 우리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대부분 황해에 온배수를 쏟아 내는 실정이니, 괭이갈매기의 식성 변화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백령도에서 북한 장산곶 사이의 인당수는 물살이 거세, 예전부터 고깃배의 접근이 어려웠나 보다. 중국 어선에 오른 심청이 몸을 던졌다는 걸 보면. 물고기가 많아도 남북 접경 수역이라 보전되었지만 그건 어부에게 안타까운 이야기이고, 점박이물범은 덕분에 식솔을 늘리고 몸집도 불렸다. 고마웠을까? 얼마 전 해양수산부는 백령도 물개바위 인근에 인공 쉼터를 만들었다. 경계심이 많아 처음엔 접근하기 꺼려했지만 차차 익숙해진다고 언론이 보도하던데, 물개바위가 비좁아진 이유는 무엇일까? 기자가 보도했듯 단순히 개체가 늘어났기 때문일까? 그 명확한 이유를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황해 점박이물범은 겨울이면 바다가 얼어붙는 발해만으로 이동해 안전한 해빙에 새끼를 낳는다. 황하의 강물이 닿았던 발해만은 오랜 황금 어장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공업용수로 전환된 뒤 폐수가 되어 발해만으로 빠져나가면서 바다 같았던 황하가 9개월 동안 건천으로 바뀌었다. 이후 점박이물범은 발해만을 포기해야 했다. 먹이가 마술처럼 사라졌을 뿐 아니라 바닷물도 얼지 않으니 새끼를 낳을 해빙도 찾기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점점 따뜻해지는 황해에서 멸종되는 걸까? 모른다.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도, 8000마리였지만 200여 마리로 줄었다고 걱정했다. 한데 늘었다니? 물고기가 남은 물개바위 주변에 모이는 개체가 늘었을 따름이 아닐까?

현재 황해의 점박이물범은 생태계 변화가 치명적이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쥐치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거라 믿고 싶은데 모기가? 입하가 막 지났는데 남녘에 모기가 나타났다고 한다. 입동 지나도 자취 감추지 않은 지 오래되었으니 입하에 모습 드러내는 게 이상하지 않은데, 가려워서 그런지 인간은 호들갑이다. 요즘 모기는 예전과 같은 종류일까? 여름철 모기장으로 피신시키던 모기는 아니겠지. 독성을 강화한 분무기로 퇴치되지 않는 요즘 모기는 초여름부터 존재를 과시한다. 이러다 사시사철 긁적여야 하나?

며칠 맑아지니 미세먼지 걱정이 무뎌진다. 정부 대책도 흐지부지되는 건 아니겠지? 홍도 괭이갈매기는 누적된 지구온난화의 결과다. 더우면 에어컨 켜고 추우면 보일러 온도 높이는 인간에 대한 강력한 경고다. 모기를 이기지 못하는 인간은 생태계의 변화에 예민하게 대처해야 생존이 가능한데, 몹시 굼뜨다. 온실가스를 줄이려 들지 못한다. 그럴 생각이 아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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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청년으로 살아가기

 

죽을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구나

유OO/ 촌스럽게 살고 싶은 스물일곱 살

 

 

아이를 만들었던 날, 아랫배가 아프고 피도 살짝 나왔다. 으레 달거리(월경)인 줄 알았다. 달거리할 때는 아이를 배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이때다싶었던 그와 콘돔을 끼지 않고 몸을 섞었다. 그 뒤로 두 달이 지났는데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 12주째였다. 의사 선생님이 그때 나왔던 피는 배란혈이라고 했다.

초음파로 배 속에 있는 덩어리를 어렴풋하게 봤다. 심장 뛰는 소리도 들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혼자 좋아하지 말자고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그새 모성애라는 게 생긴 것 같았다.

아이를 함께 만들었던 그에게 아이를 뱄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기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목숨 하나를 책임지기에는 갖춰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수술을 앞두고 그는 내 걱정을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한 척했다. 하지만 혼자 들어갔던 수술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세균을 없애려고 소독했을 수도 있고, 어린 목숨이 죽었던 곳이라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을 수도 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몸 안으로 들어오는 쇠꼬챙이는 차갑다 못해 시렸다.

수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침대에 누워 영양제 링거를 꽂은 채 병실로 왔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너 혼자만 아파야 하는 게 속상해.” 슬퍼하는 그를 다독이려고 괜찮아라며 웃었다. 수술비는 꽤 비쌌다. 영양제, 약값까지 더해지니 백만 원 가까이 되었다. 그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면서 모두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그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혼자 있으니 많이 힘들었다. 쿵쿵 아이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가 미안해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엄마라고 여길 자격이 있나 싶어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었다.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서 아이를 지우는 게 불법이라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힘도 없고 자주 피곤했다. 건널목을 걷다가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게 우울증이구나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친구를 만나면 웃었다. 내 걱정을 하는 그에게도 잘 지낸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살면서 겪은 가장 힘든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와 헤어졌다. 도시에서 살고 싶은 그와 달리 나는 시골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 내려와서 새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면서 지나간 사람은 잊혀 갔지만, 아이를 지운 일은 잊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애를 가졌다고 초음파 사진이나 영상을 SNS에 올릴 때, 영화에서 아기를 낳거나 임산부가 나오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듯 아팠다. 그때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수술하고 푹 쉬었어야 했는데 곧바로 괜찮은 척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날이 갈수록 몸은 안 좋아졌고 삼 년이 지나니 기력이 바닥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아토피도 생겼다. 기운을 북돋워 주는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았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는 잘 지낼 것만 같았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나만 죗값을 치르는 것 같아 억울했다. 수술비는 그가 냈지만, 한약값이 부담될 때는 조금 보태 달라고 해 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책임을 묻는 나에게 그가 뭐라 할 것 같았다. 그 말에 맞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좋게 넘어갈 일도 삐딱하게 보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공동체 식구들이나 친구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늪에 빠져 있던 내게 힘을 준 건 페미니즘 에세이 책이었다. 특히 다른 여자들이 아이를 지웠던 이야기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었구나.’ 그 솔직한 이야기들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더는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기력을 되찾으려고 국선도를 하고 명상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그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지운 게 아니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얼른 다음 생으로 가서 더 좋은 부모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네 번째 봄을 맞았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여성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자는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드디어 받아들여진 거다. 여태 길거리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했는데 목소리를 내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한 국회의원이 14주까지 임신중절을 할 수 있게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했다. 석 달 가까이 아이를 밴 적이 있는, 그 아이를 지우고 죄인으로 살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제는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고, 잠깐이나마 내게 와 준 그 아이에게 사랑을 보내려 한다.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떳떳해지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기 때문이다. 같이 살던 이모, 친한 친구, 지금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라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엄마에게도 말했다. 힘없는 나를 보면서 그 누구보다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많이 놀라면서도 언제, 누구랑 그랬는지’, ‘왜 이제껏 말 안 했는지다그치지 않았다. 고마운 이들을 위해서 얼른 튼튼해지고 싶었다.

올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물 뜯으러 다닐 만큼 힘도 나고 피부도 좋아졌다. 기운이 생기니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첫 번째가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었다. 혹시 나처럼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나를 보고 힘을 얻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우리는 살아있고, 삶은 소중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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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도대체 매력이 뭘까?

엄익복/ 직장인

  

내 나이 올해 마흔 아홉. 낼모레면 오십이다. 결혼을 한 지도 이십 년이 다 되어 간다. 그런데 아직도 아내와 티격태격 싸우는 날이 많다. 나는 가능하면 부닥치지 않고 피하려 하는데, 아내가 공격하듯 나올 때가 있다. 평소에도 무슨 불만이 있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어 눈치를 보기는 하는데, 유독 화가 난 얼굴로 심각한 분위기를 만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냥 살살 피해야 하는데, 괜히 웃어넘기려고 농담을 했다가 된통 당하곤 한다.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아마도 내가 마누라 등쌀에 못 살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나 보다. 그 말을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그 얘기를 꺼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런 말이 나와? 나한테 고마운 줄은 모르고, 사람이 참 매력이 없어.”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분위기가 싸해졌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는 싶었는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말 할 말이 없네하고 혼자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겼다.

거실 한쪽에 앉아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아내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매력이 없다고? 그럼 오십 다 된 남편한테 무슨 매력을 기대한 거지?’ 화가 났다. ‘그러는 지는 무슨 매력이 있나?’ 분풀이하고 싶은 생각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며 우울해졌다. 어쩌면 내가 생각해도 내 매력이 뭔지 알 수 없어서 그깟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에 대해 스스로 자신감이 떨어지기 시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사십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체력도 약해지고, 배도 나오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다. 거울 보기도 싫다. 가끔 머리 속이 허옇게 나온 사진이라도 있으면, 슬쩍 감추고 없애 버리기도 한다. 또 일을 할 때도 무슨 일이든 다 잘할 수 있을 것 같던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지고,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며 의기소침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새로운 프로그램이라도 배울 때는 젊은 친구들에게 물어보면서 같이 해 보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눈치만 보고 있을 때가 많다. 늘 하던 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내준 후로는 어떻게 하는 건지 잊어버려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이젠 사람들이 나를 피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젊은 직원들끼리 즐겁게 얘기하는 중에도 내가 끼어들면 뭔가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교육이나 연수를 받을 때도 내가 같은 모둠이 되면 부담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진다. 빈말로라도 익복님이 함께해서 너무 좋다고 말해 주던 사람들도 이젠 찾아볼 수 없다. 나와 같이 일하는 것을 왠지 싫어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올해 초 직장에서 부서를 옮기게 되었는데, 같은 팀원들도 새로 옮겨 온 동료가 십팔 년차 부장이라니, 은근히 꺼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정말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신세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다 보니 직장 생활이 가면 갈수록 재미가 없다. 정말 지금보다 돈을 적게 받더라도 뭐든 다른 할 일이 있으면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할 일도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직장을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해 봤자, 내가 참 무능력한 존재라는 걸 확인하는 것밖에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버티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참 지금까지 뭘 하고 살았는지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 물론 이건 직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요즘은 아이들이 다 커서 내 시간이 많아졌고, 밖에서는 그래도 반갑게 맞아 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취미 생활로 통기타 동호회도 나가고, 그림 그리는 모임도 나가는데, 이건 정말 재밌다. 사람들과 어울려 노래 부르고, 서로 그린 그림을 보며 이야기 나누는 게 너무 좋다. SNS나 인터넷 카페에 사진과 그림을 올리고, 서로 칭찬의 댓글을 달아 주며 공유하는 것도 정말 즐거운 일이다. 이렇게 사는 게 나름 보람도 있고, 이게 다 나만의 매력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매력이 없다니. 화가 난다. 나만 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공동육아에 대안학교 보내면서 아이들에게도 좋은 아빠고, 청소며 빨래며 온갖 집안일도 다 도맡아 하는데, 이 정도면 남편으로도 괜찮은 거 아냐? 그런데 매력이 없다니. 생각할수록 열받는다. 회사에서 느끼던 소외감이 가정에서도 똑같이 느껴지는 것에 치가 떨린다.

도대체 매력이 뭘까? 어떻게 하면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만의 매력이라는 게 있기는 한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다. 무슨 일이든 열정을 다해 열심히 하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은 드는데, 지겹고 힘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매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사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매력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당장 밥벌이 때려치우고 나와 굶어 죽을 각오라도 해야 하는 걸까? 외모가 멋진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을 다시 태어나야 하고, 돈 많은 사람, 돈 잘 쓰는 사람이 매력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태어날 때 부모까지 잘 만나야 하는데, 그건 하나 마나 한 소리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매력 있는 사람들이 참 많다. 하지만 나를 매력 있는 사람으로 봐 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은 보면 볼수록 매력이 넘쳐 부러움을 사기도 하던데, 나는 왠지 더 이상 볼 것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러니 아내에게까지 매력 없다는 소리나 듣겠지. 매력은 없지만, 매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은 있어서 괜히 마음만 무겁다. 그냥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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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쌍용양회공업

 


어릴 적 부르던 교가, 기가 막힌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시아의 으뜸가는 양회공장의 우렁찬 기계 소리 메아리치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삼화초등학교 옛 교가. 양회공장은 시멘트 생산 기업인 쌍용양회공업()(이하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말한다. 340만 평 부지의 단일 공장으로 그 규모는 세계 최대. 쌍용양회는 국내 시멘트 업계 1위 기업으로 동해공장에서만 연간 1150만 톤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박준철 씨(43)는 아직도 교가를 잊지 않고 부를 수 있다.

교가에도 나오고 교과서에도 실리고 그랬어요. 잊어 먹지도 않아요. 그 노래를 그리 부르고 당겼으니. 기가 막힌다.”

그가 기막혀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박준철 씨와 그의 동료 문홍석(42), 태윤호(39) 씨를 삼화동 사무실에서 만나 공장을 둘러본 후 가까운 무릉계곡 한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준철 씨와 문홍석 씨의 아버지 역시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였다. 해마다 망상 해수욕장에 쌍용양회가 직원 가족들을 위한 천막을 치면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가곤 했다. 성인이 되고 2002년 동해공장에 취직했지만 이들은 쌍용동해중기전문()(이하 동해중기) 소속 사내 하청 노동자다. 본래 쌍용양회의 중기 업무 부서였지만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하청업체로 분사됐기 때문이다. 동해중기를 포함한 하청업체는 모두 24.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불도저, 크레인, 로더 등 8가지 장비를 조종해 시멘트 제조공정에 맞는 원료 및 연료를 운반하고 투입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보유한 건설 기계 조종사 면허만도 8가지. 정규직원과 업무상 다른 점을 물었다.

▲ 쌍용동해중기전문 사무실 입구. 부지와 사무실 모두 쌍용양회가 무상 제공해 오다 노조가 생긴 후 임대료를 받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아까 정문에 정직원들 보셨죠? 우리하고 옷도 마크도 똑같아요. 정직원들은 현장 점검만 하고 나와서 우리한테 작업 지시를 하는 거죠. 여기 이래이래 해 주세요. 그게 다예요. 위험한 건 하청이 다 해요.”

이들은 소속 회사가 위장도급 업체라고 주장한다. 원청인 쌍용양회의 지휘·감독을 받아왔고 독자적으로 사업체를 경영할 만한 자금 조달 능력도, 전문기술도 없다는 것이다. 중장비와 사무실 및 부동산도 모두 쌍용양회 소유고, 대표이사도 쌍용양회 퇴직자다. ,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매출액은 약 38억 원인데, 노동자들은 도급비가 매출액이라고 주장한다.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영업이익도 약 2900만 원뿐이다. 노동자 36명이 검찰에 고소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등 위반자료에 따르면 (동해중기) 설립 당시 기본급과 상여 등 임금성 급여는 쌍용양회의 78퍼센트 수준으로 정하기로 하였으며, 기타 복지와 성과금은 쌍용양회와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처음 한동안은 쌍용양회에서 성과금 받으면 우리도 똑같이 나왔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더라고.”

성과금이 중단된 시기는 2011. 동해중기로 이직한 쌍용양회 전적자들이 쌍용양회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하고부터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잘해 주겠지, 회사에서 줄 건 주겠지 생각했어요.”

365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서 이들은 주야 3교대로 일했다. 이들의 안내로 둘러본 현장은 위험천만했다. 시멘트 원료를 섭씨 1450도로 가열하는 킬른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성로와 회전 분쇄기, 8킬로미터 길이의 클링커(시멘트 반제품) 운송 벨트가 눈에 띄었다. 박준철 씨가 말했다.

제가 입사하고 예닐곱 명 죽었어요. 보통 벨트에 끼거나 떨어지는 사고예요. 고 김용균 씨(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석탄운송설비 업무)랑 똑같아요.”

이들은 중장비로 연료를 호퍼에 밀어 넣다 빠진 적도 많다. 호퍼는 깔때기처럼 생긴 연료 투입구다.

호퍼가 되게 깊고 넓어요. 야간에는 시야 확보가 안 돼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탁 떨어지면 이마 박고 많이 다치죠. 혼자서 일하니까 꼭 무전기 갖고 타요.”

무전기로 다른 장비를 호출해 견인해서 겨우 나오지만 빠질 때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여름에는 에어컨 가동도 못 한다. 폭염 속 킬른에서 나오는 열이 더해져 엔진 과열로 장비가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작업장은 폐기물 저장고. 부연료로 폐기물이 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폐타이어 사용부터다. 2000년대부터는 농촌폐비닐, 플라스틱 등 생활 쓰레기와 산업폐기물도 공장에 반입됐다. 둘러본 저장고는 쓰레기 소각장과 똑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미세한 폐비닐 조각들이 둥둥 떠다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5분밖에 머물지 않았는데도 목이 쾨쾨했다. 동해중기 노동자들은 저장고 작업 중 토한 적도 많다. 또 거의 대부분이 피부질환, 안과 질환, 비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되게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피부가 너무 가려우니까. 비염도 다들 생겼어요. 어릴 때는 없던 거죠.”

쌍용양회는 이를 순환자원 재활용’, ‘에너지 절약 및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자발적 협약의 시범 사업장이라며 환경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최근 쌍용양회가 유기 슬러지(하수종말처리 최종 잔재물로 유해물질 함량이 높다)까지 반입해 연간 6만 톤 소각을 계획하자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진 것. MBC강원영동 보도에 따르면 쌍용양회가 슬러지 1톤당 받는 보조금은 10만 원. 6만 톤을 모두 소각할 경우 연간 60억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재는 주민들의 반발로 슬러지 반입이 유예됐다.

▲ 삼화동 주민들이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걸었따. 삼화동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작은책(정인열)

위험한 작업 환경과 오염물질에 노출되면서도 박준철 씨를 비롯한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아 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시급이 대폭 인상되었지만 임금인상 효과는 사실상 없다. 주휴수당 등 각종 수당이 기본급에 산입되고 임금 보전도 없이 특근 시간마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쌍용양회 원청은 매출액 164백억여 원, 영업이익 24백억여 원(2015~2017년 평균)으로 막대한 이익을 쌓았지만 동해중기 하청 노동자들의 성과금을 없애더니 2017년에는 임금마저 동결했다.

원청 노조가 임금인상을 하면 우리는 그다음 해에 인상분을 소급해서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끊어 버렸어요. (동해중기) 사장한테 물어보니 하는 얘기가 양회에서 안 준대. ’. 더 이상 묻지도 말라는 거예요.”

최저임금 지급에 임금동결까지 벌어지자 노동자들은 참을 수 없었다. 노동자 36명 전원이 20181월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에 가입하고 쌍용양회지회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상급단체를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으로 변경했다.) 하청업체 중 가장 먼저였다. 지회는 20186월 쌍용양회와 동해중기를 불법파견으로 검찰에 고소했다. 강릉고용노동지청은 불법파견으로 판단, 지난 322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그동안 지회는 1인시위부터 공장 앞 집회, 시내 집회까지 쉬지 않고 투쟁했다. 강원지역 타 사업장과 연대도 적극적으로 했다. 이들은 동해공장 앞에 모든 하청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펼침막을 걸었다.

우리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잘되면 다른 업체들도 노조할 권리는 사실상 보장되는 거고요. 제조업 자체가 사실상 정규직이거든요.”

쌍용양회지회의 영향으로 중장비 정비 업무를 하는 쌍용동해정비() 소속 하청 노동자들도 20187월 노동조합을 설립해 투쟁하고 있다.

▲ 쌍용양회 하청 노동자 태윤호, 문홍석, 박준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중기 업무 노동자들의 요구는 직접고용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이다. 원래 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원청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많은 쌍용양회지만 향토기업으로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겨울철에 쌍용양회 깃발을 꽂고 동해시 제설 작업을 다녔다. 여름철에는 해변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도 나갔고, 학교 운동장 골대도 옮겨 주었다. 이렇게 동해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역 주민인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직원들도 다 저희하고 불알친구들이고 동네 이웃이에요. 뒤에 와서 진짜 잘하고 있다 응원해 주고, 우리 입장 다 이해해 주죠. 동네 주민들도 고생한다고 응원 많이 해 줘요.”

박준철 씨가 부르던 삼화초등학교 교가는 세월이 흘러 양회공장(동해공장)’ 가사가 빠진 채 바뀌었다. 삼화동 주민들과 하청 노동자들은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박준철 씨가 어릴 적 선망하며 부르던 교가를 이제 와서 기가 막히다고 하는 이유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