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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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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삼성웰스토리


출퇴근 거리만 200킬로미터, 심장이 뛴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그날은 식품위생 교육이 있던 날이었다. 식음서비스 기업 삼성웰스토리()의 직원 김창오 씨(45)는 용인시청에서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던 중 고객사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려고 근처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려던 즈음, 불법 좌회전 차량이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는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즉시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치료를 위한 조치를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 발생 해인 2015년부터 그는 인사고과 최저등급인 ‘NI’ 등급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리고 보험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았다.


퇴사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일하다 다쳤는데 구해 주지는 않고 필요 없으니 죽으라고 밟는 꼴이죠. 저는 퇴사를 거부했고요.”


그는 회사에 병가를 요청했으나 연차휴가를 먼저 소진하라는 답변만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진통제로 버티며 출근했다. 성수기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수술 일정도 11월로 미뤘다. 보험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 발생 두 달여 만에 보험금 지급을 중단했다. 회사에 산재 협조를 요청했지만, 사고 발생 5개월이 다 되어서야 책임자로부터 산재 신청을 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114일 그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애초 간단한 수술로 예견되었지만 시기를 놓친 탓에 세균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왔고 그는 38일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갔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재해 사실 및 요양급여 신청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김 씨의 산재 승인을 거절했다. 다친 부위가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닌 기존 만성 변병’, 즉 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이었다. 2012년 경력직 입사 시 받았던 신체검사 때도 없던 질병이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보험사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삼성웰스토리는 위탁급식과 식자재 유통 등 식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급식 부문 업계 1위다. 전국 6개 물류센터를 통해 6천여 개 거래처에 식자재를 공급한다. 201312월 삼성에버랜드 FC사업부에서 분사된 후에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해마다 성장했다. 2016년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7260억 원, 1082억 원으로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영업이익은 오로지 인건비 및 경비 절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고 임원위 씨(37)는 말한다. 그는 2008년 삼성에버랜드 공채로 입사한 조리사다.


경쟁 업체 중 저희 삼성만 식품공장이 없습니다. 신규 사업을 벌이거나 설비 투자를 하지 않는데 어디서 이익을 내겠습니까?”


경영진은 수익 목표를 무조건 전년도보다 높게 잡았다. 그리고 해마다 오르는 물가와 인건비를 감당하며 이익을 내기 위해 저성과자를 일정 숫자 이상 보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예를 들어 전체 직원이 3천 명이라고 하면 해마다 그중 10퍼센트는 무조건 NI 등급을 받습니다.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정말 피땀 흘려 노력해도 NI를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NI는 임금도 동결된다. 퇴사시키기 위한 계획들도 실행된다.


한 사람을 타깃으로 정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그 사람 주변 동료들부터 포섭합니다.”


실제 영양사 A씨의 경우, 인사담당자가 동료들에게서 A 직원이 실수한 정보를 수집해 자료를 만든 후 고위직 상사가 해당 자료를 들고 A씨를 만나 퇴사를 종용했다.


“‘인사팀에서 널 자른다는 걸 내가 말렸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3개월 치 급여야. 서명해라고 말합니다.”


 ▲ 삼성웰스토리 김창오 씨와 임원위 씨 작은책(정인열)


이렇게 해서 인력을 줄이면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강도가 전가된다. 임 씨의 경우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했고 결국 허리디스크 수술까지 받았다. 그리고 맛이 조금 떨어지거나 서비스가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업을 하는 김 씨가 말했다.


고객들은 바로 알죠. 실제로 고객사와 재계약율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90퍼센트였지만 지금은 70퍼센트로 떨어졌습니다.”


회사는 반가공 제품이나 완제품 비율도 높였다. 조리 공정을 줄이기 위해서다. 임 씨는 전문 조리사의 입장에서 재료 본연의 맛이 사라지는 급식이 안타깝다.


옛날에 비하면 음식의 질이 많이 떨어졌죠. 혼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요즘은 바로 구울 수 있는 소포장 냉동 생선을 사용해 냉동-해동-재냉동-해동을 거치죠. 그러다 보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조미료로 맛을 채우게 돼요. 고객들은 조미료의 맛에 익숙해지고 그게 맛있다고 기억을 하죠. 조리사들도 예전에 했던 공정을 잊어버려요. ‘이게 더 편하네, 이 정도 맛에도 고객들이 불만 없는데 뭐.’ 하는 거죠.”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 회사는 일반 기업과 비교도 안 되게 인사과 조직이 방대합니다. 사수-부사수-그룹장-지원그룹-신문화그룹, 노사협의회까지. 현장으로 투입돼야 할 경비들이 다 간접비로 빠지는 겁니다.”


그 결과 업계 1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해졌다. 전체 12천여 명 직원 중 9천여 명의 파견, 무기계약 노동자들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 정규직 입사 10년 차 임 씨의 임금은 3300만 원, 경력 20년 차 김창오 씨의 임금도 4300만 원으로 경력에 비해 낮은 편이다. 에버랜드에서 삼성웰스토리로 분사하면서 경영진이 임금과 처우는 에버랜드 이상으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과는 너무 다른 결과였다. 에버랜드 우리사주 미배정 사건도 그랬다. 삼성웰스토리로 전적하면서 직원들이 보유했던 에버랜드 우리사주를 포기하게 됐는데, 임 씨 등 일부 직원들이 전적 동의를 거부하자 당시 지사장이 ‘5년 이내에 절대 주식 상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직원들 전적이 완료 되자 회사는 약속과 달리 약 1년 후에 주식 상장하였고, 그 차익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일가는 58999억 원의 차익을 보았다. 이와 관련해 임 씨를 비롯한 웰스토리 노동자 611명이 우리사주를 배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892천여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노사협의회는 꼭두각시 역할만 하고, 동료들이 억울하게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노동조합을 떠올린 것은 2016년 말 촛불항쟁 때였다.


우리한테는 주식도 안 주고 상여금도 안 주고 임금도 깎으면서 어떻게 정유라한테는 돈을 줄 수가 있지?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동료 조리사 몇 명을 설득해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 2017412일 삼성웰스토리지회를 설립했다. 그러자 임 씨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고 따돌림이 벌어졌다.


제가 소송비를 횡령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직원들이 익명으로 소통하는 앱이 있는데 거기에 누가 ‘1인당 30만 원 걷어 인지대, 송달비 하고 5만 원이 남았는데 그걸 횡령했다고 쓴 거죠.”


소송 대표단으로 연차와 시간을 쪼개 법원을 드나든 건 임 씨였다. 패소 후에 회사가 막대한 소송비용을 물겠다고 하자 항소 포기를 조건으로 협상한 것도 임 씨였다. 임 씨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치료 중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김 씨도 용인 골프장에서 대구로, 다시 경기도 성남 본사로 강제 발령을 받았다. 출퇴근 거리만 왕복 200킬로미터. 운전을 할 때면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지만 자신을 응원해 주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는 그의 말을 믿어 주는 동지가 생겨서 더욱 힘이 났다. 조합원 수는 이제 64명으로 늘었다. 한국노총 산하 노조보다 조합원 수가 많아 교섭 주도권에서 유리한 상황이다.

지난 4월 17일 삼성웰스토리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삼성웰스토리지회


임 씨와 김 씨는 매일 요리를 찾아 주는 고객들이 가장 고맙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파업 문화를 만들고 싶다.


그럼에도 만약 파업을 해야 한다면, 하루 8시간 파업 중 4시간은 장애인 시설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거죠.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잘하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쇼하는 거라고 우리를 손가락질하겠지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한다면, ‘삼성이 하니까 파업도 다르네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삼성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퇴사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회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우리가 퇴사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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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마지막 근무

박태찬교사


학교가 텅 빈 목요일 저녁 6, 자율학습 감독 교사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함께 급식으로 저녁을 먹고 왔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넓은 1층 교무실에, 형광등도 내 자리 위로 딱 한 칸만 켰다. 히터도 하나, 형광등도 하나, 드넓은 교무실에 나 혼자, 곧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러 4층 자습실에 올라가야 한다. 이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다.

선생님, 오늘 급식 순대 나온대요!”

순대를 좋아하는 한 녀석이 뒤늦게 급식을 먹으러 가면서 같이 가자고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나 먹었는데?”

! 그럼 저 재형이랑 먹을게요.”

핫바도 나오는데 하나 받을 수 있으면 내 거도 들고 와 주라.”

들고 오면서 제가 먹을 거 같은데요!”

급식실로 뛰어가는 녀석의 뜀박질 소리가 복도를 넘어 텅 빈 교무실에도 탕탕 울렸다.


월요일 아침에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교장선생님에게 통보를 받은 이후 묵직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자꾸만 명치 한가운데를 욱신욱신하게 만들었다. 내가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동기 교사 두 명이 더 교장실을 찾았고 우리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은 포장지만 다를 뿐 알맹이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내년에 우리는 이 학교에서 더 일할 수가 없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 기간제교사이다.


2018학년도부터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다.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신설, 변화되는 과목이 있는데 나는 교과 개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내가 맡고 있는 기술 교과는 1학년 과목이었는데 내년에는 1학년에 한국사와 통합 과학, 통합 사회가 새로 들어온다. 그럼 자연히 1학년 과목 중 일부 과목이 2학년이나 3학년 과목으로 올라가거나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1, 2학년들은 모두 나에게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배울 이유가 없다. 같은 경우로 내년에 미술 교과도 없어진다. 1년간, 기술과 미술이 없는 학교가 되었다. 대신 과학과 사회를 더 많이 가르친다.


어떤 교과를 희생시킬 것인가, 관리자들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고민을 몇 달 동안 하면서 내게 업무를 맡길 때 눈치만 가끔 줄 따름이었다. 나는 연구부와 홍보부의 중심 업무와 기타 잡무들을 알차게 해치워 왔다. 학교의 외부 강의가 있으면 전부 내가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도 있었고, 수당을 청구하지 않은 야간 추가 근무도 잦았다. 수업과 업무에서 결과물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나는 나 스스로 좋은 교사라는 자존감을 획득해 왔다. 교원평가의 전체적인 시스템에는 반대하지만 아이들이 서술해 놓은 평가들은 빠짐없이 읽고 반성하고, 성찰하며 더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김보경 그림_시사iN


지금 현재 1학년에 여덟 반, 2학년과 3학년에는 각각 열 개의 반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내년에는 지금의 1학년이 그대로 올라가면서 신입생도 여덟 반이 들어오기 때문에 학교 전체적으로 두 개 반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나가게 된 교사도 있다. 나와 같은 해에 들어온 영어 교과의 민 선생님이다. 업무 능력과 수업뿐만 아니라 담임으로서 학급 운영 능력을 검증해 온 훌륭한 교사이다. 민 선생님은 이미 2017년 초부터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민 선생님이 맡고 있는 반 교실에 수업하러 들어갈 때마다 학급의 자유롭고 건강하면서도 맑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같은 칭찬을 자주 하였다.


교육과정 개편이나 학급 수 감축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학교에서 나가게 되는 교사도 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해에 들어왔던 체육교사 최 선생님이다. 최 선생님은 지난 3년간 언제나 다른 교사들보다 40분 일찍 출근하여 교문 앞에 섰다. 등교지도를 도맡아 해 온 최 선생님은 지난해 예쁜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생활상담부에 있는 최 선생님 자리에는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늘 올려져 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매 순간 이 학교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불같은 생활지도 교사이자 누구보다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진짜 교사였다. 그는 학교가 4년 계약을 불편해하여 떠나게 되었다.


내년에도 체육교사는 올해와 동일한 숫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간제교사가 4년 일하게 되면 공고를 새로 내서 뽑아야 하는데 사립학교의 경우 같은 교사를 기간제로 다시 채용하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3년만 일하고 떠나는 선생님들이 많다. 얼마 전에 경기도에서 4년 일한 어느 기간제교사가 정교사가 될 욕심은 없으니 무기계약직으로라도 전환시켜 달라고 소송을 걸었고 이는 다른 학교 모두가 3년 계약 이후 계약해지를 해야 한다는 모범사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최근 영어회화 전문 강사 부당해고 관련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일 때에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이 대법원에 탄원서를 냈었다. 기간제강사 무기계약직화는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들은 노동이 아닌 교육의 관점에서공정한 교육 사회 구현에 힘을 보태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된 최 선생님에게 이 학교는 교육의 장일 뿐 아니라 교실, 운동장, 학교 구석구석이 모두 땀 흘려 일한 일터였다. 예비 교사들의 조바심과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될까 봐 겁을 내고 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하는 길에 1학년의 한 아이가 와락 나를 껴안는다.

선생님 오늘 왜 감독 안 들어오셨어요?”

2학년 감독이었어.”

왜 선생님이 2학년 감독해요? 저희 학년 수업하는 선생님 아니에요?”

맞아. 근데 원래 감독 안 하는 날인데 너희들이랑 더 있고 싶어서 야간 자율학습 바꿨어.”

우와, 밤 열 시까지 일하면 안 힘드세요?”

힘들었는데 오늘은 안 힘들 것 같았거든. 돈 벌어야지.”


그래, 몇 천 원이라도 더 벌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너희들 매점 한 번 더 데려가야지.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서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을 숨을 불어 녹인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7년 11월호

일터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1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 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 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 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전정훈 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작은책(정인열)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 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일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4대 보험에 가입된 적도 단 한 번뿐이었다. 늘 최저임금을 받았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현장에서 사용된 메탄올이 담긴 통. 노동건강연대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애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

 

"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도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메탄올을 사용한 휴대폰 부품 업체. 노동건강연대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것은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결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 다 소용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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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단 두 번의 기회

 

조숙현/ 28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작은 아들이 1997년 생입니다. 아이는 칸킨트(Kann kind)라고, 어리지만 충분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정을 받아 만6세가 되기 전에 입학을 했습니다. 독일은 보통 초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6년제인 주도 있긴 있어요. 독일은 4학년 1학기 때의 성적으로 아이의 다음 진로가 결정됩니다. 김나지움을 갈지 레알슐레를 갈지.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하우프트슐레를 갑니다. ! 지금은 하우프트슐레가 6개 주에만 있어요.

김나지움은 G8G9가 있어요. 816학기에 끝나고 918학기에 끝이 납니다. 전에는 모두 13학년까지 다니는 G9였는데 지금은 G8로 전환하는 김나지움이 꽤 생겼네요. 짧아진 학기를 마치려니 아이들은 성적표에 더 신경을 써야 해서 과외도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학원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주변에 점점 과외 학습원이 늘어나네요. 과외 비용은 시간당 8.50유로(한화11,000) 정도부터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비하면 저렴하지요?

우리 아이는 바덴 뷔텐베르크(baden wütenberg)주의 레알슐레(실과학교)를 다녔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레알슐레를 가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들어간 학교니까, 1년 정도 레알슐레를 다니고 성적이 유지된다면 김나지움으로 바꿔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지요. 아이는 학교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열심히 배워 곧잘 1점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1점이 한국의 에 해당하고 6점이 입니다.

10학년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김나지움으로 옮기려던 아이가 직업학교를 가겠다고 했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게 면담을 요청했고 아이와 저, 담임 이렇게 3자 면담을 했습니다. 독일 학교는 보통 이렇게 3자 면담을 합니다. 아이는 선생님과 제게 직업학교를 가는 게 왜 잘못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파서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대학을 가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때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직업학교에 갔습니다. 17살이 안 된 아이가 자신을 받아 줄 회사를 찾아다니며 자기소개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드디어 한 회사에 합격을 한 후에 계약서를 갖고 직업학교 등록을 했습니다.

(독일의 직업훈련 ©picture alliance / dpa)


직업학교는 3년제입니다. 직업훈련과 병행됩니다. 직업교육 첫해에는 주 4일을 학교를 가는데, 3일은 실습 교육을 받고 1일은 이론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도제 교육을 계약한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은 무보수입니다. 아이의 사장님은 열정 페이주의자였는지, 보통 다른 회사는 견습공에게 130유로 정도의 식비를 제공하는데, 그 사장님은 정말 1유로도 주지 않더군요. 더구나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주말에 도와 달라며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주말에 일을 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수영장에 가는데 아이는 땡볕에서 수영장 벽을 수리했습니다. 찬물 한 잔 안 주더라고 불평을 하더군요.

2년째는 반에서 학생들이 걸러졌습니다. 성적과 자질이 없는 학생들은 제적되고 20명이 남았습니다. 2년 차는 7일을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합니다. 그리고 3일 수업을 받습니다. 그중 1.5일은 실습, 1.5일은 이론 수업을 받습니다. 7일 계속 일, 3일 수업 이렇게 로테이션이 됩니다. 그리고 세후 520유로(한화 67만 원)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간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3년 차에도 7일 회사, 3일 수업, 7일 회사, 3일 수업입니다. 그리고 세후 570유로를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목수 견습생은 월급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이 적습니다. 하지만 3년의 도제 교육이 끝나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다른 직종보다 전망도 좋고 월급도 많이 받습니다. 견습 생활이 좀 많이 피곤한 직업입니다. 특히 제 아들처럼 1센트까지 다 따지는 사장을 만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는 중간에 회사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회사는 다른 회사에 없는 CNC 기계가 있었기에 끝까지 견뎌 냈습니다.

20세 목수 조슈아가 만든 가구. 그는 17세 전에 직업학교로 진학, 3년간 견습과 자격시험을 거쳐 목수가 되었다 (사진제공_조숙현)


2년 차에 아이는 학교 최연소로 CNC 기계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습니다. 3년 차에 목수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반에서 16명이 합격했습니다. 목수 자격증 시험은 졸업시험 같은 것입니다. 이론 시험을 본 후에 작품을 제출해서 심사위원들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작품 제작 시에 그동안 배운 기술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계 사용을 못하게 합니다. 도구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만들지 못하면 기계로도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도면 제출 이후에 승낙을 받으면 80시간 안에 그 도면 그대로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2주 정도의 시간을 받는 것이지요. 이때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옵니다. 자격증 시험은 두 번밖에 볼 수 없어요. 두 번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는 재시험 기회가 없기 때문에 3년의 시간이 허탕이 됩니다. 한 번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재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도면을 제출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1차에 제출한 것과 전혀 다른 작품이어야 합니다. 제 아이는 다행히 목수 자질이 있는지 순조롭게 모든 시험을 통과했고 지금은 당당한 목수가 됐습니다. 사장이 아이의 능력을 보고 정식 직원으로 일할 것을 권유했고 정직원 계약을 하자고 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아이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부모 때문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독일에서는 마이스터 학교를 다녀 마이스터 자격증을 받아야 자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자신처럼 마이스터가 되면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고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4대째 목수 마이스터. 저도 기대가 됩니다. 마이스터 시험도 두 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합격하겠지요? 독일 마이스터 시험은 두 번 떨어지면 동종의 시험 기회는 평생 다시 없습니다. 아직 학교도 안 갔는데 합격을 바라는 마음, 욕심만은 아니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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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작은 소설 

11월의 연극

하명희/ 소설가  나무에게서 온 편지(사회평론), 불편한 온도(2017 올해의 문제소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 기억나니?’

편지의 시작은 이랬다. 1년에 한 번 뜸금없이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편지는 매번 기억을 더듬는 문장으로 시작되곤 했다. 이번에는 어떤 소식을 담았을까. 나는 핸드폰도 없는 그녀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편지를 통해 짐작해야 했다. 치유연극? 편지와 함께 들어 있는 초청장에는 아주 특별한 생의 첫 번째 연극에 당신을 초대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의 첫연극과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이 묘하게 겹치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잊겠는가. 열여섯의 겨울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내 눈 앞에는 불타는 가구공장이 있었다.

눈이 자살하는 거야.”

불구경을 하는 사람들 속에 서 있던 그녀가 내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불쑥 말을 걸어왔다. 눈은 불을 향해 집요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송이 날리던 것이 불길이 거세질수록 더 세차게 사방에서 쏟아졌다.

눈이 자살한다고?”

내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아름다워.”

그녀의 입술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입김이 새나왔다. 아름다워가 동그랗다는 것을 그녀의 입술을 보며 알게 된 날이었다. 눈발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 떼처럼 빛나고 있었다. 곧 이어 소방차가 오고 불길은 가구공장의 물건들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뒤로 물러나고 입을 막고 켁켁거리면서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불 속에 무언가 소중한 것을 감춰놓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아름다워?”

뭐가 아름답다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그녀의 발등으로도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태우면서, 녹으면서 사라지는 거. 불을 끄기 위해 내리는 것 같지 않니? 온몸으로 불을 끄려고 사방에서 떨어지면서, 떨어지면서 사라지잖아.”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처럼 눈을 찡긋, 혹은 손을 슬쩍 들어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이라. 11월의 밤은 우리가 친구가 된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책을 하나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한 대목을 펼쳤다.

여기!”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눈이 자살하는 거야라는 문장이 있었다.

책에 있었던 문장이구나.”

그녀는 서울 곳곳에는 자기만 알 수 있는 증표가 심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을지로 3가 지하상가에는 1986년에 개업한 음반가게가 있다고도 했다.

아는 곳이니?”

그녀는 대답대신 책을 내밀었다.

읽어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그러면서 덧붙였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꼭 알려줘.”

나는 그녀가 준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당연히 세상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른 학교로 배정받아 그녀와의 연락은 뜸해졌지만 그녀는 매년 11월마다 편지를 보내왔다.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왜 그랬는지 그녀와는 만나지지 않았고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편지는 한동안 끊겼다가 몇 해 전부터는 발신지가 수녀원으로 찍혀 있었다. 편지와 같이 들어 있던 초청장을 펴보니 안양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예전에 소년원이었던 곳을 중고등학교로 인가받은 곳이라고 했다.

‘1년째 이곳에서 치유연극을 진행했어. 그런데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녀석을 발견했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처럼 불타버린, 사라지는 것처럼 거뭇한 그림자를 가슴 속에 품은 아이였어.’

그녀는 나도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1호선 전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학교는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예전 교도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신분증과 초대장을 보여주자 운동장이 보이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운동장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건물 옆으로 수건들이, 백 개는 넘어 보이는 같은 색의 수건들이 건조대마다 걸려 있었다. 운동장을 지나 강당이 있는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손에 피크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공개 만남의 자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강당 문이 열리고 입장해도 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강당에는 백 명은 넘는 소년들이 머리를 박박 밀고 갈색 체육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남자들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동물원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훅 끼쳤다. 뒤쪽에서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뒤에서 보니 소년은 초를 잰 듯 정확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신맛과 진한맛 중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내 차례가 되자 소년이 물었다.

진한맛이요.”

소년은 한 손은 테이블을 밀어내고 거품에 정확히 동심원을 그리며 커피를 내렸다. 저 아이일까? 보이는 소년들마다 그녀가 말한 아이로 보였다. 커피를 들고 관객석 끝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가 정리될 즈음 연극의 연출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그녀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치유연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지, 얘들아?”

연출가는 초대 받은 손님들이 아니라 줄지어 앉아 있는 소년들을 보며 말을 건넸다. 소년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뒤에서 보니 들어올 때 보았던 백 개의 수건이 일제히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었다. 관객들은 소년들의 수보다 많지 않았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무대에는 소년들 셋이 누워 있었다. 맨 끝 줄에 앉아 연극을 보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워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 자기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욕이 터져 나왔다. 소년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모른다는 듯 말끝마다 씨발, 좆같다로 대사를 채우고 있었다. 연출가가 이 욕들을 걸러내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연극이 중반부로 갈 때까지 소년들의 가정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 아이는 매 맞는 아이였고 한 아이는 도둑질을 했다고 했다. 또 한 아이는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같은 방에 있는 소년들의 사연이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처음에는 듣기 거슬렀던 욕들이 무척 절제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말하자면 소년들은 욕을 뱉으면서 그 상황들을 이기려고, 외면하려고, 극복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시 사이렌이 울리고, 조명이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거칠게 욕을 내뱉던 소년이 무대를 뛰어다니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지고 있었다. 소년이 던진 것을 받은 사람들이 소리쳤다.

불이야. 불이야.”

객석에 던져진 불덩이를 따라 조명이 붉게 비쳤다. 나는 저 소년이 아닐까 짐작했다. 소년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불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소년도 그 속에서 똑같이 외치고 있었다.

불이야, 불이야.”

붉은 조명과 사이렌이 꺼지고 무대는 정전된 듯 조용해졌다무대 아래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났다. 소년이 무대로 올라오고 뒤 이어 소년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연극은 거칠게 그 순간을 전달하고 있었고 소년은 무대에서 끌려 나가면서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어요. 이제는 좀 보라고. 불이 났다고. 저기 우리 집에 불이 났단 말이야. 이제 보이나요? 불이야.”

연극이 끝나고 연출가는 이 연극의 취지를 설명했다.

저희 연극은 치유연극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배우들은 전문 연극을 배운 친구들이 아니지만, 이것은 처음이에요. 생의 첫 연극이라고 불러야겠지요.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이 한 편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이곳의 친구들과 연극에 접근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대장놀이도 해보고 역할극도 해보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한 달 한 달을 채워나갔지요. 보신 것처럼 연결도 서투르고 여기저기 욕이 많이 들어가서 불편하셨죠?”

관객석에 있던 소년들이 뒤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내 옆에 있던 여자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친구들이 대본을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을 통해 토해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생의 첫 연극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훌륭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해낸 이 아이들이 대견하네요.”

박수가 터졌다.

고맙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반전입니다. 지금부터는 관객들이 직접 이 연극에 참여하는 겁니다. 지금 보신 장면 중에 내가 끼여들어서 역할을 해보겠다 하시는 분들은 누구든 손을 들어주세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얘기를 연극을 통해 전달해보는 겁니다. 누구부터 할까요?”

관객들은 교실에서 잠만 자는 아이를 꾸짖는 선생이 되기도 하고, 교도관이 되어 아이들의 순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갈색 체육복을 입은 아이 하나가 어설프게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연출가는 얼른 그 소년을 불러냈다.

그렇지, 연극에 참여한 친구들 말고 여기서도 이렇게 할 말이 있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너는 어느 장면으로 들어가고 싶니?”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던 소년은 불을 지른 아이가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장면은 다시 붉은 조명을 받는 무대로 바뀌었다. 소년은 라이터를 들고 망설이다 라이터를 켜고 자기 얼굴을 비췄다.

나예요. 아빠. 아빠 나는 불을 지르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불을 질렀어요. 아빠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어요. 아빠, 나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년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객석도 조용해졌다. 연출가가 음악을 낮게 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소년은 불탄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 역할을 했던 소년이 누워 있는 방에 붉은 조명이 비쳤다. 소년은 망설임없이 그 옆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나도 여기 있을래요.”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로 눈송이 같은 조각이 떨어졌다. 나는 뒤를 돌아 조명실을 바라보았다. 수녀복을 입은 그녀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던 여자가 무대를 향해 걸어가 꽃다발을 던졌다. 객석에 있던 소년들이 휘파람이 불었다. 씨발, 좆나 멋있다. 휘파람을 부는 입술들도 동그랗게 오므려졌다. 소년은 일어나지 않고 무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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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가 만든 '영전강', 사교육비 절감한다며 뽑더니…
[작은책] "사실혼 인정하고 무기 계약 보장하라!"



"같이 살림 차리고 8년을 살던 놈이 다시 4년 더 살자고 하면서 혼인 신고는 절대 안 해 준대. 당신 같으면 이 X새끼 어떻게 할 거야! 판사도 인정했잖아, 사실혼이라고. 왜 당신들만 쌩까냐고!" 

내가 처음부터 이렇게 말이 거칠었던 건 아니었다. 나는 친정에서 남부럽지 않은 교육을 받았고, 학창 시절 대단한 천재는 아니었지만 총명하다는 말을 듣던 모범생이었고, 성장해서는 교통 법규조차 함부로 어기지 않는 시민이 되었다. 

처음 몇 년 동안은 싹싹하게 웃으며 일했고, 어른들 명절 선물 챙기기에도 최선을 다했다. 친구들에게조차 소홀하게 되어 핀잔을 들어가면서까지 그 비겁한 놈에게 온 마음을 쏟았다. 누군가는 나에게 혹시 '착한 여자 콤플렉스' 아니냐고 말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걸 누구에게 말한다는 것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냥 참고 살았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상황을 면해 보려 했다. '부당하다'는 말은 입 밖에 꺼낼 처지가 못 되었고, 싸움을 일으키는 것은 나에게 큰 상처를 남길 것이 분명했다. 설마 했는데 나를 데리고 살던 이놈은 애초부터 나랑 가족이 될 생각이 없었는데, 나 혼자 헛꿈을 꾸었음을 알고 나니 분노가 치민다.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쫓겨날까 봐 조마조마하며 눈치 보고 살던 습관은 내 자존감에 커다란 상처를 남겨 놓았다.  

▲ 전국 영어회화전문강사들은 지난 7월 정부세종청사 교육부 앞에서 무기계약 전환을 요구하며 결의대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이것은 지금 학교 현장에서 4년마다 거듭 해고를 당하며 일하는 비정규직 교사인 영어회화 전문강사(이하 영전강)들이 겪고 있는 이야기다. 지난 8월 대전고등법원은 4년을 근무하고 해고된 영전강이 사실상 무기 계약이라고 판결하였으며, 학교장과 계약하더라도 실제 사용자는 교육감임을 확인해 주었다. 또한 2013년 국가인권위원회는 영전강의 업무가 상시 지속적임을 인정하여 무기 계약 전환과 고용 주체를 학교장에서 교육청으로 바꿀 것을 교육부 장관에게 권고하였다. 

2009년 이명박 정부는 사교육비 절감과 영어 말하기 교육의 문제점을 보강하기 위해 영전강 제도를 만들었다. 전국 시도교육청은 영어 지도안 작성과 영어 수업 시연, 영어 면접 등을 거쳐 6200여 명의 영전강을 선발하여 초중고교로 배치했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 42조에 영전강의 근무 기간이 4년 초과하지 않아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어 해고를 반복하는 꼼수를 썼다. 그동안 절반 정도가 일터를 떠나 현재는 3200여 명 남았다.

공개 채용을 거쳐 8년간의 실무를 통해 검증받은 영전강들에게 임용고시를 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법원이 자격을 인정했음에도 최상위의 기준을 다시 정해 무한 경쟁에 밀어 넣는 논리는 아이들이 경쟁 교육에서 마주하는 암담함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주장대로 영전강이 임용고시에 응시하여 모두가 합격한다 해도 교육부의 생각이 이렇다면 학교는 계속하여 해고하기 쉬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것이고 정규직에서 밀려난 청년들이 다시 이 비루한 일자리를 메울 것이다. 

머지않아 비정규직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이 마구 쏟아 내는 화풀이 식 댓글과 새 정부의 정규직 전환 공약이라는 희망 고문에 상처받고 주눅 들어 한없이 우울해졌다. '동일 노동·동일 임금'은 고사하고 8년간 15만 원 오른 월급에도 불평 없이 방학에도 아이들 가르쳤는데, 이제 와서 무자격자라고 흠을 잡으려 든다. 그들의 주장에서는 인간에 대한 도리도 필요 없고, 오로지 살자고 발버둥치는 생존 본능의 처절함마저 느껴진다. 가난한 비정규직이 넘쳐 나는 한 이런 진흙탕 싸움은 끝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겪고 지켜본 해고는 지위가 높고 낮음을 떠나 모두 살인이다. 왜냐하면 일자리는 그 사람의 존재를 다 걸기 때문이다. 한 영전강은 임신을 이유로 해고되는 것에 저항하여 학교와 말싸움을 벌이다 태아를 잃기도 했다. 교수나 박사님의 해고 또한 다르지 않다. 누구에게나 해고의 위협은 사람의 마음을 하릴없이 좀먹게 만든다. 

교원 임용 선발 인원을 깎아 먹는다고 영전강 제도를 폐지하라는 주장도 있다. 어느 잔인한 왕정의 노예들도 태어날 귀한 신분(정규직)의 앞길을 위해 먼저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다. 수년 전 영전강 제도 폐지 서명 용지가 내가 앉은 책상 옆에서 돌던 날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어느 집단이나 주장하고 싶은 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일터에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끼리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온 힘을 다해 굴려 내고 싶은 역사의 수레바퀴 같은 것이 있겠지만, 그 밑에 깔려 다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냈던 얼마 안 되는 후원금을 돌려주겠다던 모 의원님은 줏대가 약하신 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영전강을 반대하는 이들의 반발이 그만큼 거세었다는 말이 옳다. 수년 전 교육공무직 법안 발의 때 한 국회의원의 홈페이지는 영전강에 대한 댓글로 다운될 지경이었다. 합법적인 후원금조차 낼 수 없게 되자, 내가 어쩌다 이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어 버렸는지 어리둥절하기까지 했다.

8년의 학교생활에서 나는 비굴함과 겸손의 차이를 아직 모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겸손하기 위해 비굴함을 선택했다. 어른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지 않고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학교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풀 죽어 있던 한 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그 아이의 마음이 그냥 들여다보였다. 나는 아이들과 공감하는 방법을 교육학에서보다 한없이 내 몸을 낮추어야 했던 비정규직 생활에서 더 많이 배웠다.

나는 '교사'라는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 일하던 대로 일하도록 고용 안정만 바랄 뿐이다. 내가 만약 학교가 아닌 다른 공공 기관에서 2년을 근무했다면, 기간제법에 의해 무기 계약 대상이 된다. 공공 기관과 학교는 무엇이 얼마나 다른 곳인가. 가르치는 일이 노동법 적용 대상이 아닌 이유가 무엇인가. 가르치는 일에는 얼마나 혹독한 전문성이 요구되는가. 9년이 아니고 90년을 일하면 인정해 줄 것인가. 

추석 명절을 지내며 여성과 비정규직의 삶은 서로 많이도 닮았음을 느낀다. 함부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사람들, 언제나 남에게 해석 당하는 사람들. 그들은 '나는 착하지 않아, 능력이 부족해'라고 끝없이 죄책감을 강요받는다. "임용고시 합격하여 떳떳하게 일하라"라는 말은 영전강의 생각은 들어볼 것 없이 너희는 부정한 집단이라는 누군가의 일방적 해석이다. 짜장면집 주방장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반드시 세계적 요리사가 되라고 윽박지르는 꼰대의 모습이다. 어느 한 편의 희생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건강할 수 없고 이익을 누리는 쪽의 도덕적 해이로 이어질 수 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그리하여 직무유기가 될 수 있는 지점이다. 아무리 말단의 일이라도 해고될 걱정 없이 소신껏 할 수 있어야 그다음에 민주주의고 뭐고 꿈이라도 꿀 수 있지 않을까. 

계속하여 약자의 희생을 요구하는 강자들에게 이제 더 이상 나만 틀렸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비정규직의 눈물을 팔아 우리가 옳다고 누구를 설득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나를 지지하며 수고를 인정하고 내 노동의 법적 권리가 옳기 때문이다. 나는 일을 마치고 밤샘 농성을 하기도 하고 광화문 땡볕 아래서, 교육청에서 싸움을 이어간다. 거기엔 함께하는 친구도 있고 공감도 있어 견딜 만하다. 오늘은 교육부 높은 담장을 향해 소리친다.

"사실혼 인정하고 무기 계약 보장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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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1월호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노 파사란!

김형민/ 방송 프로듀서

 

몇 년 전 아베 일본 수상의 안보 법안에 반대하는 시위대 동영상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북을 두들기며 어깨를 들썩이며 랩같은 구호를 반복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흥겨운 시위였다. 그때 일본의 한 젊은 여성이 외치던 구호 가운데 일본어도 영어도 아닌 스페인어가 끼어 있었다. “노 파사란!”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뜻의 스페인어였다. 그 구호는 약 80년 전 스페인을 달뜨게 했던 역사적인 구호였다. 그 구호가 지구를 반 바퀴 돌고 80년의 세월을 가로질러 울려 퍼지는 모습에 감회가 젖었던 기억이 새롭다. 80년 전 이 구호를 외친 이도 그 또래의 젊은 여성이었다.

그 여성이 외친 구호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학생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시위대가 많이 부른 훌라송의 일부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 더 원한다 훌라훌라일어서서 저항하다가 죽을지언정 무릎을 꿇고 생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드러내는 이 가사의 저작권자 역시 같은 여성이었다. 이름은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그녀는 스페인의 바스크 지역 광산 노동자의 딸로 태어났다. 원래 다산(多産) 전통의 남유럽 국가답게 그녀의 형제들도 축구팀급이었다. 11남매. 그중에 그녀는 8번째였다. 여기서 바스크 지역의 역사를 잠깐만 훑고 지나가자.

바스크인들의 언어는 유럽 대륙의 인도·유럽 어족과 완전히 다른 고립어 계열이다. 즉 바스크인들은 언제 어디에서 왔고 왜 그곳에 살고 있는지부터가 미스터리인 민족이다. 로마 제국이 스페인을 지배하던 시절에도,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에 초승달 깃발을 꽂았을 때에도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던 깐깐한 사람들이었다.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대체로 바스크인들은 공화파 정부에 충성했다. 공화파 정부가 더 많은 자치를 허용할 것을 약속했기 때문이다. 프랑코를 돕는 독일 공군의 폭격으로 쑥밭이 됐고 피카소의 그림으로 영원히 역사에 남은 게르니카도 바스크의 도시였다. 이 바스크족 광부의 딸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당연히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고 소녀티를 벗자마자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여 열댓 명의 아이들을 낳고 그들을 건사하느라 여념이 없는 여느 스페인 시골 여자들과는 팔자가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그녀는 각종 사회과학 서적을 독학으로 읽으며 자신과 조국의 상황을 체득하고 사회운동가로 성장해 갔던 것이다. 1918<미네로 비스카이노> 신문에 처음으로 자신의 글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필명이 열정의 꽃이라는 뜻의 라 파시오나리아였다. 열정의 꽃1920년 이후 스페인 공산당에 입당했고 당 중앙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으며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3차 공산당 전체회의에 스페인 대표로 참석하는 등 좌파 진영의 주요한 지도자로 성장해 갔다. 19362월의 운명적인 선거에서 그녀는 목이 쉬어라 연설하며 좌파 연합 인민전선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고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스페인의 1936년 총선은 치열했다. 72퍼센트의 높은 투표율 속에 좌파와 우파의 표 차이가 1퍼센트도 나지 않는 초접전이었다. 어쨌든 다수의 의사가 관철되는 것이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 선거법에 따라 인민전선이 다수 의석을 가져갔고 공화파 정부를 수립했다. 돌로레스 이바루리도 국회의원이 됐다. 하지만 이미 프랑코 이하 군부나 지주 등 우익 세력은 정부에 복종할 마음이 없었다.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피비린내 나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다. 스페인 내전은 전 세계 모든 이념들이 모인전쟁이면서 동시에 양심의 시험대라고 불렸다. 전 세계의 양심들이 몰려와 국제여단을 구성하여 프랑코 군대와 싸웠다. 영국인 조지 오웰도, 미국인 헤밍웨이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 내전에서 돌로레스 이바루리 의원은 저항의 여신(女神)으로, 그리고 용기와 열정의 꽃으로 스페인 사람들과 공화파를 도우러 온 외국인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된다. 1936년 마드리드 방어전을 앞두고 그녀가 10만 군중 앞에서 한 연설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큰 울림으로 남았다.

파시즘은 무사히 통과하지 못할 것입니다. 노 파사란! (No pasaran!) 왜냐하면 파시즘의 진로를 막아 왔던 우리의 방어가 더욱 강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겁한 적은 우리처럼 전쟁터로 이끄는 이상이 없기에 용감하게 돌진해 오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프랑스로 가서 공화파 지지 연설을 하며 국제적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는데, 거기에서 바로 무릎 꿇고 살기보다 서서 죽기를 더 원한다는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노 파사란! 그들은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무릎 꿇고 살기보다를 절규하는 열정의 꽃이 어느 정도의 향기를 내뿜었는지는 헤밍웨이의 걸작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속 등장인물의 증언으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등장인물은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연설을 듣고 와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빛이 났고 음성만으로도 진실을 말하는 줄을 알겠더군. 그녀가 전하는 소식을 그 대단한 목소리로 들었을 때 그 순간은 이 전쟁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의 하나였네. 선과 진실이 마치 백성의 참된 사도에서 뿜어져 나오듯 그녀도 그랬어.”

그러나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 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녀는 수십 년 동안이나 고향을 떠나야 했다. 비참한 운명을 맞은 다른 동료들과는 달리 소련으로 망명해 큰 파란은 없었지만 아들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잃어야 했음에도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으로서 꿋꿋이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고수했다.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 사태, 즉 소련과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 침공 때 오랜 침묵을 깨고 소련 공산당을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던 그녀는 프랑코가 죽은 후 민주화의 바람이 불어오던 1976년 스페인으로 귀환한다. 그녀의 나이 여든한 살.

프랑코 사후 스페인은 카를로스 국왕의 균형 잡힌 리더쉽 아래 민주화의 발길을 내딛었고 공산당도 합법화돼 선거에 참여한다. 1977년 무려 41년 만에 치러진 총선에서 이바루리는 다시 한 번 국회의원이 된다. 역시 41년 만의 재선. 당시 그녀의 나이 여든둘이었다. 내전 시작 전의 스페인을 41년 살았고 독재 치하 스페인을 41년 떠나 있었던, 늙었으나 싱그러운 열정의 꽃라 파시오나리아의 귀환이었다.

재출발한 민주주의에도 위기는 있었다. 최대의 위기는 역시 1981223일의 쿠데타 기도였을 것이다. 헌병대 중령이 수상 선출을 위해 모든 국회의원이 모여 있던 국회의사당을 습격했다. 자동소총이 난사되고 모두 엎드리라는 호령이 떨어졌을 때 모든 의원들이 책상 밑에 납작 엎드렸지만 두 사람만은 자리를 지켰다. “내가 왜 당신들 명령을 들어야 하는가.” 수아레스 당시 수상과 돌로레스 이바루리의 후계자로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산티아고 카리조였다. 마치 쿠데타군에게 노 파사란! 여기는 민의의 전당 국회다를 외치듯 그들은 똑바로 자리에 앉아 쿠데타군을 노려보았다.

이후 카를로스 국왕이 군복을 입고 방송에 출연, 결연한 쿠데타 반대를 표명했고 1936년을 꿈꾼 군부의 반란자들이 체포되면서 쿠데타는 막을 내렸다. 아마 이 모습을 보면서 열정의 꽃 라 파시오나리아,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스페인의 민주주의는 다시 시작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돌로레스 이바루리 고메스, ‘라 파시오나리아19891112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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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독일에서 강아지 기르기


조숙현/ 28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11월이 되니 지난해 우리 곁을 떠난 개 니키가 더욱더 생각납니다. 니키는 20013월에 태어나 2016년에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6년 전, 어느 날 신문에 니키 입양 광고가 났어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독일인이었습니다. 당시 입양할 강아지를 찾던 우리 가족은 옳다구나 싶어 신문 광고를 보자마자 그 집으로 총 출동했답니다.


독일에서는 전문 브리더에게 강아지를 살 수도 있고,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보호소에서 입양을 하는 조건은 꽤 까다롭습니다. 보호소에 한 달 정도 가족들이 다 같이 가서 입양하고자 하는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식구가 될 수 있는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호소 직원이 집에 찾아와 강아지를 기를 수 있는지 집 상태를 보기도 해요. 집에 정원이 없다면 대형견을 기르는 데 탈락 사유겠지요. 출근하고 나면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강아지를 입양하는 데 탈락 사유라고 합니다. 아무튼 꽤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저희는 여러 보호소를 탐방하던 중이었습니다. 때마침 니키 입양 광고는 정말 저희에게 행운의 기회였습니다.


세 번째 방문하던 날 니키의 입양이 확정되어 니키는 우리 집 막둥이가 됐습니다. 독일에서 강아지를 기르려면 절차도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강아지는 세금도 내야 합니다. 훈데슈토이어(Hundesteuer)라고 하는데,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요. 견종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대형견, 맹견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맹견은 따로 자격 검증(?) 같은 것을 받아야 키울 수 있어요. 저는 일반 믹스견을 키웠기에 맹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맹견은 지역에 따라 세금이 1000유로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니키는 일 년에 120유로의 세금을 냈습니다. 그리고 훈트패스(Hundpass)도 만들었어요. 외국에 데리고 다니려면 강아지도 여권이 있어야 합니다. 여권에는 니키 사진과 그동안 맞은 각종 예방 주사 기록이 들어 있어요. 특히 광견병 예방 주사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니키는 목 옆에 마이크로 칩을 이식했어요. 마이크로 칩은 니키를 잃어버렸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귀에 번호를 문신하는 방법도 있지만 보통 칩을 이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독일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은 목줄에 훈데마르케(Hundemarke)라고 부르는 쇠로 만든 동그란 번호표를 달고 다닙니다. 그 지역에 등록한 세금 번호이자 일련번호입니다. 많은 지역에서 목줄과 번호표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를 잃어버릴 경우, 이 훈데마르케나 마이크로칩을 스캔해서 주인을 찾아 줍니다.


제가 사는 곳은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 목줄과 리드 줄을 하지 않으면 40유로의 벌금을 냅니다. 경우에 따라 5만 유로까지 벌금이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목줄에 세금 번호표가 없어도 벌금을 내고, 배변을 치우지 않고 가도 벌금을 내야 합니다. 강아지를 기르려면 나와 주변인을 위해서 그만큼 의무도 다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독일은 동물 보호법도 강력해요. 동물 보호법 제17조 제13항을 보면 제대로 먹이지 않고 돌보지 않은 경우 징역 3년에 벌금 내야 하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됩니다. 고의로 강아지를 해하려고 하면 25천 유로의 벌금을 물리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유기해도 마찬가지로 25천 유로의 벌금형입니다. 강아지를 훔치거나 사기로 팔거나 해도 징역형입니다. 강아지를 사랑하고 키웠던 사람으로서 동물 보호법 제17조는 정말 대찬성입니다. 더 강력해져도 좋을 법입니다.



강아지를 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저는 책임 보험을 들었습니다. 강아지가 남의 집 물건을 망가뜨렸거나 남에 집 개를 물었을 경우 등 강아지로 인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 주는 보험이죠. 니키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적용한 적 없는 보험입니다. 다행히도 니키는 정말 얌전한 강아지였습니다. 그리고 강아지 의료 보험도 있습니다. 의료 보험에 들면 응급실, 입원, 수술, 예방 주사. 약값이 처리됩니다. 견종의 나이와 체중에 따라 보험료 책정이 달라져요. 보통 한 달에 20~30유로 정도 하고 치료비가 3000유로 이상 나오면 자가 부담 비용이 30~40유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설마 니키가 뭐 그리 아프겠나 싶어서 안 들었는데,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니키는 새끼를 한 번 낳게 한 후에 중성화 수술을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서 했는데도 유선 종양이 생겨 한쪽 유선을 다 없애는 수술을 했는데, 나중에 다른 쪽도 문제가 생겨 또 수술했습니다. 벌레에 물린 후에 피부에 염증이 생기고 괴사한 일이 있어서 수술. 털이 긴 장모종인데 겨울이라 털을 깎아 주지 않아서 상처를 좀 늦게 봤어요. 다리를 다쳐서 엑스레이도 찍고 CT도 찍고, 16년을 길렀으니 별일이 다 있었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농담 삼아 너한테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 들어갔다!”라곤 했습니다. 지금은 지인들이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하면 의료 보험 꼭 들라고 말해 줍니다.


독일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일은 많은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니까요. 본인이 선택해서 데려온 생명이니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책임을 져 주는 게 견주의 도리입니다.


니키의 마지막은 참 힘들었습니다. 치매가 생겨 집도 잘 못 찾고, 배변도 아무데나 하고, 마지막 몇 주는 하반신에 마비가 와서 걷는 것도 불편해졌어요. 매일 아침 수의사가 첫 환견으로 니키를 돌봐 주었습니다. 니키가 더 이상 아픔이 없는 세상으로 떠난 날, 화장을 해서 분골구에 담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지금도 니키는 자신이 좋아하던 테이블 위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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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7월호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이발소 잔혹사


안재성/ 소설가, 경성트로이카저자



 

 

20년 전 이곳 이천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아직 젊어 염색을 안 하니 미장원 가서 커트만 하는 게 보통이었다. 염색이 필수가 되면서 염색비 싼 이발소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맨 처음 단골로 삼은 곳은 옆 동네인 우물실 마을의 작은 이발소였다.


겨우 60가구밖에 살지 않는 우물실 마을에서 혼자 이발소를 하던 아저씨는 성격 조용하고 정감 넘치는 토박이 이천 사람이었다. 논농사를 겸하고 있어 농번기면 밤에만 이발소를 열었는데, 그 집으로 포클레인 일을 가는 날이면 저녁까지 얻어먹고 머리를 깎곤 했다.


몇 년을 단골로 다니던 우물실 이발소가 문을 닫은 것은 아저씨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설성면 면소재지의 또 다른 토박이 아저씨가 하는 이발소 단골이 되었다. 아무래도 면소재지라 손님이 제법 있다 보니 그곳에 가면 경기 남부 사람들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 비슷하니 느리고 억양 없는, 편안한 대화들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시 이발소를 옮길 때가 된 것은 역시 그 아저씨마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자꾸 아저씨라고 말하다 보니 좀 그렇다. 내가 나이가 먹다 보니 아저씨라 호칭하는 것뿐, 젊은이들에게는 곧 돌아가실 할아버지들이다.


설성면 소재지에는 이발소가 두 개였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이발소는 경상도 출신의 오십대 노총각이 혼자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라곤 거의 없었다. 쓰레기통 수준으로 더럽고 어질러진 데다 이발사 차림부터가 노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없이 십여 킬로 떨어진 장호원 읍내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피시방 옆 컴컴하고 작은 공간에서, 이번에는 진짜 할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노인 혼자 일하는 이발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반년도 드나들지 못했다. 그 양반 역시 요양원에 갔는지 사망했는지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날이 미장원만 번창하니 한 번 문을 닫은 이발소는 후계자가 없이 그대로 업종 변경이다. 그런데 때마침 장호원 읍내에 새로 차린 이발소가 있기에 가 보니 내 또래 남자가 중국 동포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솜씨가 좋은 데다 붙임성과 입담이 좋아서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손님과 친구가 되었다. 부인이 중국 동포이다 보니 근방 농촌과 공장에 일하러 온 중국 동포들이 모두 몰려와 한가할 틈이 없이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 되었다. 주말이면 순서를 맡아 두고 밥을 먹고 와서도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나로서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중국동포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중국이 지하철이며 기차가 한국보다 훨씬 좋다던가, 중국 신도시는 한국보다 훨씬 크다던가 하는 이야기까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니 할 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미국 공격하지 못하게 사드를 왜 들이냐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중국인들이었다. 북한의 핵 생산을 걱정한다던가, 사드 설치해 봐야 아무 효과 없다고 걱정하면 모를까, 한 줌도 안 되는 약소민족께서 웬 대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


자기 존재의 기준이 중국인이란 점은 미세먼지 문제에서도 나온다. 중국 쪽에서 바람이 오지 않는 날이면 한국 하늘이 예전처럼 새파란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중국의 미세먼지보다 한국의 발전소 먼지가 더 문제라고, 중국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한국이나 잘하라는 식으로 떠드는데 은근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권들이야 미국을 미워하다 보니 사건마다 중국 편을 든다지만, 조선일보구독자에 이명박, 박근혜 광팬들에게 그네들의 모순은 해석 불가였다.


간간이 이런 일이 되풀이되니 유전자만 동포일 뿐 법적으로도 심정으로도, 경제적으로까지 중국인인 그네들이 싫어서 다른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갈 만한 이발소가 없어 견디던 내게 새로운 단골이 생긴 것은 작년 겨울 촛불시위 때였다.


염색만 하는 날이라 장호원까지 가기 싫어 면소재지의 총각 이발소에 꾹 참고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박근혜 탄핵등등의 포스터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발사는 자기가 며칠째 일찍 문 닫고 광화문에 시위하러 다니는 중이라며 박근혜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 것이었다. 더 물을 필요도 없이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총각 이발소에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간판인데 실내가 너무나 훤했다. 꼭 필요한 집기 외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데다, 낯선 중년 부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하는 게 아닌가. 물어보니 총각 이발사는 가게 팔고 집에 들어앉아 맨날 술만 마신단다. 새 주인 부부는 이발 솜씨도 좋고 친절하기도 했다. 촛불동지의 몰락이 안 됐지만 기분은 썩 좋았다. 이제 먼 장호원까지 갈 일은 없어졌다. 이발사 나이도 나보다는 젊어 보이니 더 이상 이발사가 바뀌는 잔혹사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손님이 바뀌겠지.


세월이 데려가는 것은 이발사만이 아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가 꼭 네 달을 채우고 돌아가셨다. 지난주 일이다. 사지마비 상태로 눈만 뜬 상태에서 더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다행이요, 호상이라고 다들 위로해 주었지만 겪어 보니 세상에 호상이란 건 없더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실에 들어가면 돌아 나올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 말을 하려고 우물거리던 그 간절한 표정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해져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꾸만 눈물이 돈다. 설사 백수를 채우고 편안히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해 준 부모님의 죽음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왜 삼년상을 치렀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또 한편, 한쪽에서는 가고 한쪽에서는 오는 게 인생인가 보다. 장례 치르고 사흘째 되던 날, 큰딸이 무사히 첫 아이를 낳았다. 유리창 너머로 입을 오물거리며 하품하는 갓난아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손자가 퇴원해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날인데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막판에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는데, 반가워하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어 마스크를 하지 않은 탓이다. 벌써 이 주일 넘게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이놈의 기침이 갓난아이에게 옮을까 봐 병원에 가질 못했다. 정말 안아 보고 싶었는데. 이래서 내리사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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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0월호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전두환보다는 나중에 죽고 싶다


 

안재성소설가경성 트로이카》 저자



  

건강한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젊은 시절부터 그랬다친구들과 멀리 놀러 갔다 와서 사진을 보면 즐거운 추억보다는 걸어 다닐 때의 전신의 고통혼자만 비 맞은 듯 쏟는 진땀목숨을 건 졸음운전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수년 전부터는 견딜 수가 없어 동네 앞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노인들도 나를 휙휙 지나쳐 올라간다그나마 절반만 오르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때가 대부분이다.


남의 몸 아픈 이야기 듣기 좋아할 사람도 없고가족들에게는 걱정 끼칠까 봐 입을 다물고 겉보기에 정상인처럼 살려 애썼지만몸 여기저기 끊임없는 통증이며 두통 때문에 술 한 잔 못하고 억지로 앉아 있는 게 싫어서 취재 이외의 만남은 회피하며 살아온 햇수가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다지인들의 부모형제 장례식에나 갈까즐거운 행사나 친목 술자리는 일체 응하지 않으니 친구들이 노는 자리에 나를 부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치료를 위해 애를 안 쓴 것이 아니다사십이 넘어서며 신경통이 급속히 심해지면서 다닌 병원이며 한방민간요법에 대해 책을 한 권 써도 될 정도다하지만 특정 진단명이 나오질 않았다생활에 전혀 지장 없는 미미한 당뇨와 원인을 알 수 없는 높은 간 수치가 전부요나머지 기능은 튼튼하기만 하단다여기저기 바늘을 꼽고 사는 듯한 근육통만이 문제였다.


그래도 잘 버텨 오던 몸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서너 달 전부터였다좀처럼 몸살이 낫지 않는다 싶더니 온몸의 근육이 심한 운동을 한 뒤처럼 딱딱하게 부풀어 올라 방바닥에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온몸을 비틀며 신음을 터뜨리게 되었다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는 데다 조금만 움직이면 심장과 폐가 조여와 지하철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런데도 의사들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동네 병원부터 서울 백병원까지 가 봤지만 처음 보는 병이라며 다른 과에 가 보라고 미루기만 했다예약이니 검사니 뭐니 해서 시간만 자꾸 흐르는 사이이젠 진짜 죽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무라이 흉내였다사무라이들이 칼싸움으로 죽을 때를 대비해 악취가 나지 않도록 아침엔 김밥만 먹었다던 믿거나 말거나 전설처럼잠자다 죽을 것에 대비해 매일 밤 깔끔히 청소하고 쓰레기통 비우고 속옷까지 새 걸로 갈아입었다소원이 있다면 아침에 깨지 않는 것뿐이었다.


결론은살아났다가정의학과 의사이자 노동당 부대표이기도 한 임석영 씨가 병명을 찾아내 바로 응급실로 보내 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난치병이긴 하지만 불치병은 아닌아주 오래된 다발성 근육염이었다그에게는 간단한 진단이었을지 몰라도여러 달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죽어 가던 내게는 임석영 씨가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위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 중 이렇게 빠른 회복세를 보인 경우는 처음이라는 주치의의 찬사까지 들으며 15일 만에 퇴원한 내 몸은 15킬로그램이나 빠져서 마치 늙은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얼굴 주름만 늘었을 뿐 탱탱하던 배가 쏙 들어가 삼십대 청년이 되었으니 말이다의사 왈, 15킬로그램은 근육이 아니라 염증이 빠져나간 거란다.


회복력이 대단하다는 말에 떠오른 것은 내가 본래는 아주 건강한 체질이었다는 사실이다고등학교 체력장 때 1천 미터 달리기는 1, 2등이었고 씨름턱걸이팔씨름 같은 것도 반에서 수위였다오늘날까지도 위장병이니 폐렴이니 장염 같은 속병은 아예 앓아 본 적이 없다진맥 본 한의사들마다 기가 엄청 센 체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외가에서 양젖을 먹고 커서 서양인처럼 튼튼하다고 자랑하던 몸이 조금만 육체노동을 해도 남들보다 몇 배 빨리 지쳐 버리고 땀범벅이 되어 기진해 버리는 현상이 시작된 것은 확실히 만 스무살 되던 1980년 광주 항쟁 이후다.


겨우 5일이었다시간만으로 치면 3박 4일 정도를 24시간 내내 잠 못 자고 매를 맞았다당시 만 명도 넘는 이들이 한두 달씩 보안대에서 고생했다지만 대개 한 방에 수십 명이 수용되어 차례로 돌아가며 매를 맞았기 때문에 실제로 맞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들었다그런데 나는 광주 항쟁이 끝난 후에 시위를 선동하다가 수배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다들 구속되거나 훈방되었을 때 혼자 보안대에 끌려가게 되었고그야말로 한시도 쉴 틈 없이 헌병과 보안대원들의 몽둥이주먹군홧발에 짓이겨져야 했다참 재수도 없지.


교통사고 한 번 당한 후유증도 평생을 간다는데깡패들이 누굴 집단 구타 한들 한 시간을 넘지 못할 텐데며칠 내내 발바닥부터 머리통까지 몽둥이와 주먹으로 얻어맞았으니 아래위 할 것 없이 옷에 피가 엉겨 붙어 떨어지질 않고식당에 데려갈 때는 헌병들이 들어 안아서 옮겨야 했다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다 못해 귀에서도 피가 나더니 청력을 상실해 난청이 되었지만 그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모욕을 이기게 한 것은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울지 않고 이 불의를 꼭 복수하리라고 수도 없이 다짐한 증오심이었다빌지도 않고 비명도 안 질러 더 지독스럽게 맞았는지 모르지만지금까지도 나를 지켜 온 힘일 것이다그 며칠을 잘 버텨 주었기 때문에 그해 5월이 내게는 정신적 후유증이 아닌 긍지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5월을 기점으로 내 몸이 망가진 것은 확실하다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온몸의 근육과 신경에 치명적인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된 것은 틀림없다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 해도생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보잘것없는 글재주에 비해 책도 실컷 썼고모험과 여행도 충분히 했고좋은 벗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고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도 넘치게 누렸으니 삶의 여한은 없다다만 전두환보다는 나중에 죽고 싶다. ‘전두환 찢어 죽이라는 구호를 지키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오늘 퇴원해 읍내 이발소에 가던 길에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다다리뿐 아니라 팔에도 힘이 없어 일어나지를 못하고 버둥대고 있으니 가게 앞에 모여 웃고 떠들던 노인들이 놀라서 일으켜 준다한동안은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나 맞을 생각에 머리칼을 바짝 깎고 거울을 보니 눈만 퀭하니 낯선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날 것이다오히려 그 지독했던 근육통에서 벗어나 날씬한 몸으로 건강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지루한 병실에서 올가을 단풍으로 물든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다는 꿈으로 시간을 보냈다북핵 관련 뉴스 좀 안 나오는 깊고 아름다운 산천을 걷고 싶었다저항의 돌멩이와 화염병이 있었기에타오르는 촛불이 있었기에 멋진 나라내 사랑하는 남도 땅을 마음껏 천천히 주유하고 싶었다북한 땅도 외세나 압박이 아닌우리나라와 같은 민중의 항쟁을 거쳐 스스로 아름다운 땅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가을의 사찰 기행매년 꿈꾸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던 일이다올해는 꼭 해 보리라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