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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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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12월호

일터 탐방_ 삼성화재 애니카 사고조사 노동자

 

매우만족이 아니면 우린 끝이에요

정인열/ <작은책> 기자

 

 

삼성화재 애니카는 국내 자동차 보험 시장 점유율 1위다. 애니카에는 자동차 사고가 나면 즉시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는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있다. 타 보험사는 위탁받은 정비 공업사 직원이 출동하지만 애니카만은 2009년부터 에이전트라 불리는 사고조사 전문 인력을 두고 출동시켰다. 사고조사 노동자들은 사고가 접수되면 고객과 통화 후 15분 내에 현장에 도착해 사건의 경위와 피해를 조사한다. 먼저 고객을 안심시키고 다친 곳이 있는지, 차량 상태는 어떤지, 사고는 어떻게 났는지, 차량 파손 부위, 고객의 요청, 고객 차와 상대 차의 주장, 블랙박스 확보 여부 등을 확인한다.

▲ 삼성화재 블로그에 소개 된 사고조사 에이전트 자료 화면.    사진_ 삼성화재 블로그 갈무리.


삼성화재의 자회사인 삼성화재애니카손해사정(이하 애니카손사)이 설립한 전국 8개 센터에는 약 140여 명의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이들은 각기 업무를 위탁받아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해 왔다. 애니카손사는 이들과 사고출동서비스 대행계약을 맺고 이들을 서비스 대행업체라 칭한다. 이들은 애니카 명함을 사용하고, 이들의 차량에는 애니카 로고가 새겨진 스티커가 부착되어 있으며, 명찰에도 애니카 로고가 있고, 사번도 부여받았다. 임금은 출동 1건당 받는 수수료 23천 원이다.

애니카지부 노동자들의 명찰과 끈에 삼성화재 로고가 새겨져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 노동자들 80여 명이 지난 1023일 노동조합(민주노총 사무금융연맹 전국사무연대노동조합 삼성화재애니카지부, 이하 애니카지부)을 설립했다. 사고조사 노동자 박경재, 박성진, 정창연, 조상근, 진경균 씨를 만나 사연을 들었다.

이들의 휴대전화에는 삼성화재가 제공하는 전용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 출동이 접수되면 알림음이 울린다. 15분 내 현장에 도착하기 위해 사고가 많이 나는 곳 근처에 주차를 하고 겨울에는 지하주차장에서, 여름에는 그늘에서 대기한다. 시동은 꺼둔다. 기름값을 본인이 부담하기 때문이다. 통신비, 차량 관리비, 식대, 차량 외관의 애니카 로고까지 자기 부담이다. 4대보험도 없다. 한 달 유지비만 최소 80만 원에서 100만 원.

당직인 날은 아침 7시부터 밤 12시까지 17시간을 근무한다. 14시간을 쉬고 나면 다시 아침 10시부터 밤 9시까지 근무하고 또 당직을 선다. 쉬는 시간에도 고객으로부터 문의 전화가 오면 응대를 해야 한다. 밤에 자다가도 사고가 나면 출동해야 하기 때문에 24시간 대기나 마찬가지다. 박경재 씨가 11월에 주말, 휴일 구분 없이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평균 12.7시간을 근무해서 번 돈은 250만 원. 여기서 유지비를 빼고 나면 150만 원가량 남는다. 다른 사람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제가 지난달에 100건을 했어요. 하루도 안 쉬고. 예전에는 20일 일하고 100건 해서 350~400만 원을 받았어요.”

이들의 수입이 악화된 것은 2015년경부터. 회사는 노동자들의 서비스를 종합 평가해 등급을 매겨서 수수료를 차등 지급하는 등급 수수료2015년부터 2017년까지 적용했다. ~마의 5개 등급으로 나누어 하위 등급은 수수료를 건당 2천 원~4천 원 차감하고 출동 우선권 배제 등의 불이익을 주었다. 우수 등급에는 2천 원~4천 원을 추가 지급했다. 등급을 매기기 위해 출동 대기 시간과 출동 소요 시간 외에 고객 만족도, 수용률(출동 수행률), 이관률(호출을 받았으나 출동을 못하는 경우 타 대행업체로 이관), 입고율(사고 차량을 협력 정비업체로 입고), 출동 후 2시간 내 전산 입력 여부 등도 평가했다. 하지만 등급이 하락하기는 아주 쉽고 상위 등급을 유지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웠다.

한 건이라도 늦게 도착하면 등급이 하락됐어요. 고객 만족 평가도 매우만족’(100)이 아닌 만족’(75)을 하나라도 받으면 끝입니다.”

폭우로 인한 침수 차량이 발생해도 등급이 하락했다. 대부분 사고조사 노동자들의 노력과 관계없는 일들이었지만 등급은 낮아졌고 1등급에게만 콜이 몰렸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3, 4등급 직원이 있어도 1등급한테 콜이 갑니다. 1등급 입장에선 멀어도 출동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늦게 도착하면 또 등급 떨어지죠, 그렇다고 다른 직원에게 이관해도 등급 떨어지죠. 고객도 손해를 보는 거예요.”

2016년부터는 대인 수수료가 없어져 수입이 더 줄었다. 대인 수수료는 가급적 고객을 병원에 안 가게 하고, 수리 차량은 협력 정비업체로 입고하고, 수리 기간 동안 렌트카를 사용하지 않도록 유도했을 때 주어지는 인센티브였다. 그러지 못하면 불이익을 받았다. 사고조사 노동자들은 심리적 갈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고객이 어우~ 뒤에서 받았어요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거야. 이거 또 대인 발생되겠구나. 가면 이거 또 디메리트(불이익) 있겠구나 걱정하면서 현장 나가는데 그런 게 스트레스였어요.”

고객들의 폭언과 폭행 또한 스트레스였다. 모두 고객으로부터 욕설과 멱살은 기본, 폭행도 수차례 당했다고 답했다. 박성진 씨는 스트레스로 공황장애가 생겨 지난 8월부터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 조상근 씨 역시 체중이 15킬로그램 감소했고 박경재 씨는 생체 리듬이 깨져 수면제를 복용해야 잠이 든다. 이들은 아파도 일을 쉴 수가 없다. 쉬는 날은 수입이 한 푼도 없기 때문이다. 다섯 명 모두 긴급 출동하거나 도로에서 사고조사를 하다가 다친 적이 있지만 회사로부터 병원비 한번 받아 본 적이 없다.

진경균 씨는 퇴직금 한 푼 못 받고 나가는 동료들이 안타까웠다. 뭔가 바꿔 보고 싶었다. 퇴직자들을 설득해 퇴직금 소송을 준비했다. 20177, 퇴직자 6명이 애니카손사를 상대로 법원에 퇴직금 소송을 제기했다. (이듬해 823일 서울중앙지법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맞다고 선고했다.)

퇴직금 소송이 시작되자 회사는 몇 가지 조치들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 그동안 사고조사 노동자들에게 약속했던 우선 출동권을 없앴다. 우선 출동권은 사고 발생 시 사고조사 노동자들이 타 공업사보다 우선적으로 출동할 수 있는 권리다. 이후 정창연 씨는 공업사와 비교해 공정하게 콜이 분배되지 않는 정황을 포착하고 20185월경 공업사 직원들과 전화기를 한자리에 모아 자체 테스트를 했다.

출동 건수가 너무 없으니 답답해서 테스트를 했어요. 출동 들어오는 순서를 봤더니 에이전트는 누락을 시키는 거죠. 공업사 먼저 다 나가고, 그 다음에 정 나갈 사람 없으면 에이전트한테 주는데, 만약 공업사 직원이 나갔다 들어오면 그 사람한테 다시 주는 거예요.”

조상근 씨도 가까운 위치에 있는 공업사 직원과 실적을 비교했다. 지난 10월을 기준으로 조 씨는 하루 평균 2.3개를 처리한 반면 공업사 직원은 하루 평균 6건이었다.

애니카지부는 에이전트의 노동자성 인정 및 직접고용 논란을 피할 목적으로 회사가 우선 출동권을 없앴다고 보고 있다. 사고조사 노동자의 수입을 줄여 스스로 그만두게 한 후 개인사업자로 등록하게 하거나 정비 공업사로 이직시키기 위한 계획이라는 것이다. 5단계로 매겼던 등급수수료도 2018년부터 사라졌는데, 수시로 업무 지휘·감독을 했던 점을 인지하고 없앤 것으로 지부는 해석한다.

, 쓸개 다 빼놓고 일했는데 이제 와서는 직원이 아니라고 하니까 배신감이 드는 거죠.”

노동자들은 열악한 현장을 바꾸고 애니카손사 직원으로도 인정받고 싶다. 그래서 노조를 만들어 회사에 직접고용과 출동 차량, 유류비, 보험료, 통신비 지급 및 장시간 노동 근절을 위한 3교대 근무 실시, 10년간 동결된 수수료 인상 및 노동조합 인정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과의 싸움은 특히 쉽지 않을 텐데 두려움은 없을까? 정창연 씨가 말한다.

주변에서 다들 말해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거라고. 그런데 저는요, 계란으로 바위가 더럽혀지는 거라도 봐야겠어요.”

삼성화재 애니카 사고조사 노동자 조상근, 진경균, 정창연, 박성진, 박경재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회사와 투쟁을 시작했지만 이들은 여전히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프로다.

지금도 사고 현장에 나가면 당연히 고객은 내 가족이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프로답게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속상하고. 어떻게든 잘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사고 현장에서 가장 먼저 고객을 안심시키고 고객의 보상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고조사 노동자들. 이제는 이들의 피땀이 보상받을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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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2월호

일터 탐방_ 손말이음센터

 

믹스커피 하나에 울음이 터졌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안녕하십니까.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OOO입니다. 청각장애인분의 요청으로 대신 전화드렸습니다.”

▲ 청각·언어장애인과 수어로 통역하고 있는 통신중계사.             사진제공_손말이음센터지회


번 없이 107을 누르면 연결되는 한국정보화진흥원 손말이음센터는 청각·언어장애인(농아인)과 비장애인이 중계사를 통해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수어(수화언어) 통역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전국 32만 농아인들이 음식 주문부터 금융기관, 관공서의 민원 상담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전화 통화를 할 수 있도록 36524시간 운영되고 있다. 하루 평균 이용 건수는 2066(20171~10월 기준, 한국정보화진흥원 보도자료), 중계사 한 사람당 하루 평균 55건을 처리하고 있다(민경욱 의원실, 2017년 기준).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김영수 씨(37)와 황소라 씨(31)를 문래동 사무실 인근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은 노동조합(민주노총 KT새노조 손말이음센터지회, 이하 지회) 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황 씨는 대학에서 수어통역학을 전공하고 20113월에 입사했다. 김영수 씨는 대학 졸업 후 200810월에 입사했다. 대다수 중계사들은 더 나은 통역을 위해 개인 시간을 할애해 농아인 교회를 다니거나 공부 모임을 하는 등 농아인들과 교류를 유지한다.

그러나 중계사들의 노력과 달리 이들의 처우는 너무나 열악하다.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센터 설립 직후 민간위탁을 했기 때문이다. 제니엘, 인포데이타를 거쳐 2009년부터는 KT계열사인 KTcs가 위탁받아 지금까지 운영하고 있다. 동종업계 대비 중계는 10배 이상 많이 하고 근무 조건은 훨씬 열악한데도 급여는 30퍼센트 이상 낮은 최저임금 수준이다. 하지만 이보다도 중계사들을 괴롭힌 문제는 서 아무개 전 센터장을 포함한 일부 팀장급 관리자들의 권력 남용과 부정 행위들이었다. 지회는 정부 기관들에 글을 올렸다. ‘서 전 센터장이 여성 중계사들 허벅지를 만지고 사적으로 접근하는 등 성추행을 했으며 시간외수당 조작 및 횡령, 연차휴가 및 병가 반려부터 화장실 이용 제재등 다양하고 사소한 방법으로 중계사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이었다.

계속 통화하면 입이 너무 써요. 그래서 오후에 양치를 한 번 더 할 때도 있는데 걸리면 여자 팀장이 자리 비운다고 면담하고.”

서 전 센터장은 중계사들의 연차휴가 신청을 반려했다. 사유는 바쁠지도 몰라서’. 반면 자신에게 잘 보이는 중계사들은 연차휴가 사용과 업무 편의를 봐주었다. 많은 중계사들이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지회에 따르면 센터 개소 이래 누적 퇴직자는 80퍼센트. 늘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데, 해마다 이용자는 늘어 중계사 36명이 근무할 때 응대율이 54.4퍼센트(20185월 기준, 지회 자료). 이용자의 절반은 통화 연결이 안 돼 피해를 보고 중계사들은 화장실도 못 가며 중계를 받아야 했다. 중계사들의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한 때는 20158월 무교동 청사로 이전한 뒤부터다. 100센티미터의 좁은 책상에 갇힌 채 쉼 없이 중계를 받았다. 창문도 블라인드도 냉·난방 시설에도 손댈 수 없었다. 김영수 씨가 말한다.

하루는 출근해서 커피를 타려고 봤더니 믹스커피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갑자기 눈물이 펑펑 나는 거예요. , 내가 100원짜리 믹스커피도 아까워할 만한 존재구나. 그분(서 전 센터장)이 평소에 프린트도 못하게 종이도 다 빼놓고 그랬거든요.”

스마트폰 보급이 늘어나자 한국정보보호진흥원은 201412월 전용 모바일 앱을 개발했다. 20141224, 성탄 전야로 거리가 떠들썩한 밤에 야간근무를 하던 황소라 씨는 한 중계 영상을 받았다. 한 남성 이용자가 자위 행위를 하는 음란 중계였다. 황 씨는 깜짝 놀라 울면서 책상 아래로 기어 들어갔다. 모바일 앱이나 PC 프로그램으로 접속할 때 실명 인증 절차나 휴대전화 번호 인증 절차가 없는 점을 악용한 성폭력이었다. 황 씨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말을 하는데 목소리를 떨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한다.

▲ 김영수 씨(왼쪽)와 황소라 씨(오른쪽)가 설명하고 있다.                                  사진_안건모


그런데 화면을 꺼야 하는데그런데 화면을 봐야 끌 수 있잖아요.”

김영수 씨가 황소라 씨의 말을 끊었다.

소라가 이 일로 산재 요양 중이라 제가 얘기하는 게 좋겠어요. 작년 국정감사 준비하다가 멀리서 그 자료 화면을 봤거든요. 정말 그 정도인 줄 몰라서 꺼이꺼이 울었어요. 그리고 얘(황소라)한테 너무 미안한 거예요. 소라가 인터뷰할 때 약 먹으면서 손 떨면서 얘기하는 거 저도 알았는데, 이 정도로 심한 장면인 줄은 몰랐어요.”

해당 음란 중계는 무려 6개월간 계속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성폭력이 계속됐다는 것은 KTcs와 서 전 센터장의 악의적인 방치로 볼 수밖에 없다. 서 전 센터장은 화면 캡쳐를 하라는 지시만 내렸다. 화면 캡쳐를 하려면 중계를 봐야 하는데 명백한 직무유기 및 2차 가해였다. (범인은 비장애인이었다.)

황소라 씨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노동조합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KT새노조와 연락이 닿았다. 중계사 대다수가 노조 가입에 흔쾌히 동의해 20176월 노조를 설립하고 KT새노조 산하 조직으로 들어갔다. 황소라 씨는 지회장을 맡았다. 곧바로 KT와 한국정보보호진흥원에 센터 운영에 관한 감사 요청서를 보냈으나 반응이 없었다. 조합원들은 센터 건물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국정감사를 준비했다. 음란 중계와 센터장 성희롱 문제가 환경노동위원회 의원들의 공감을 샀고 진흥원 이사장은 여야를 막론하고 질타를 받았다. 그러자 센터에 변화가 일어났다.

음란 중계 때 신고 기능 신설, 모바일 앱 및 PC프로그램 실명 인증 회원제 도입, 2배 넓은 문래동 부지로 센터 이전, 서 전 센터장 격리 및 퇴출, 보다 자유로운 연차 휴가 사용 등.

▲ 손말이음센터 모바일 앱 이용 화면.                                 사진_한국정보화진흥원


문래동으로 이전할 때 진흥원 직원분이 직접 나오셨어요. 그동안 못 해 줘서 미안하다고 하시고. 이제는 회사 가는 게 너무 좋아요.”

고용노동부 산재예방지도과에서는 근골격계 질환 운동법도 안내해 주었다. 직무 스트레스 지수가 높은 중계사는 상담사를 연결해 주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201911일부로 전 직원이 한국정보보호진흥원 정규 직원이 된다는 점이다.

런데 문제가 있다. 진흥원 본원이 대구에 있어 정규 직원이 되면 센터도 대구로 이전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대다수 중계사들은 퇴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지회는 수도권 잔류 기준 중 별도의 독립적인 업무’, ‘기타 지방 이전 시 업무수행이 사실상 불가능한 업무조항을 들어 지금의 서울 센터 유지를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대구 센터를 신설해 응대율을 100퍼센트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설득 중이다.

중계사들의 임금은 여전히 최저임금 수준이다. 그동안 열악한 상황에서 중계사로 버텨 온 이유는 무엇일까? 황소라 씨가 말한다.

저희 센터를 통해 이용자분이 주체적으로 전화를 할 수 있다는 점이죠. ‘중계사 님, 손말이음센터 있어서 너무 편해요, 고마워요할 때 너무 좋아요. 그 사람들의 권리를 우리를 통해서 표현할 수 있으니까.”

김영수 씨는 이용자의 구직 중계를 예를 들며 말했다.

기업 측에서는 청각장애인이요? 우리는 어려운데하고 농아인은 면접 원해라고 표현해요. 짧은 네 글자지만 저는 그분의 간절함을 담아 기업 측에 면접이라도 한번 볼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하고 전달할 때 자긍심을 느껴요.”

이렇게 말하는 그녀들의 얼굴이 무척 환하다. 황소라 씨가 말한 것처럼 중계사도 농아인에게 더 좋은 환경에서 도움을 주면서 잘 사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바란다

posted by 작은책
2018. 11. 28. 16:06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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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봅시다

 

서유럽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어요

문정주/ 의사, 공공의료 연구자

 

공공의료가 뭐냐는 질문에 답해야 할 때면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내가 속한 분야인 의료에 대한 비판을 담아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공의료는 말 그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라 할 수 있습니다. 공공성은 소수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사회에 두루 관계하고 유익하게 작용하는 특성이지요. 그러므로 공공성에 충실한 의료란 도시에 살든 농어촌에 살든, 부자든 가난하든, 누구나 건강을 지키고 증진하게 돕는 의료입니다. 이러한 의료를 제공하는 활동, 기관, 제도를 모두 합하여 공공의료라 합니다.

참 좋은 말이지요? 그런데 무슨 비판이 있느냐고요? , 우리나라 의료에 공공성이 허약하여 의료만으로는 공공성의 의미가 살지 않는다는 문제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공의료의 개념이 따로 세워졌으니 이 말은 문제점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우리나라 의료의 문제점을 살펴볼까요. 첫째, 병의원이 주로 대도시, 더 자세히는 수도권 대도시에 몰려 있습니다. 그래서 지방 소도시나 읍면에서는 의료를 이용하기 어려워요. 전국의 232개 시군 중 60곳에는 산모가 분만할 의료기관이 전혀 없을 정도입니다. 둘째, 건강보험제도가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덜어 주지만, 가난한 계층을 든든히 보호하지 못합니다. 돈이 없어 제때 치료하지 못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고, 심지어는 돈이 없어 건강보험료가 밀려 병의원 출입을 아예 할 수 없는 사람도 어림잡아 200만 명이나 됩니다. 셋째, 돈 되는 것과 돈 안 되는 것을 노골적으로 구분하는 의료기관이 많습니다. 척추와 관절 수술, 심장병 치료, 성형수술, 건강검진 등 돈 되는 데에는 설비 투자를 하여 확장하지만 돈 안 되는 응급, 분만, 신생아 진료, 감염병 진료, 재활, 질병 예방과 상담 등은 안 하거나 최소한만 하려 합니다. 공공성에 충실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도립 진주의료원을 없애 버린 어떤 정치인을 기억하시나요. 그런 분들은 공공성이 의료에서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핸드백이나 자동차처럼 의료도 시장에서 사고팔면 된다고요. 소비자는 자기 용도와 취향에 맞게 필요한 걸 고를 테고 공급자는 소비자를 의식하여 의료의 내용과 질을 관리하므로 시장에 맡겨두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의료가 공급된다고, 그래서 공공성을 강조하는 대신에 자유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 의료의 발전을 돕는 길이고 영리 병원 등 의료 민영화도 나쁠 것이 없다고 하죠. 그러나 이 견해는 의료의 핵심적 특징인 정보의 비대칭성을 너무 가볍게 다룹니다. 의료서비스에는 수많은 정보가 포함되는데 그중 소비자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인터넷으로 많은 정보가 오간다지만, 실제 의료는 전문적인 내용이 워낙 많고 일반인에게 공개되는 영역이 제한적이어서 소비자가 충분히 알고 고른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요. 그래서 공급자인 의료인이 지배적인 위치에 서 있는 비대칭성, 즉 기울어진 운동장이 의료의 특징입니다. 교환도 환불도 원상복귀도 불가능한 의료서비스를 기울어진 관계에서 이용해야 한다니, 으스스하지요? 그러니 의료인의 전문성, 책임감, 환자에 대한 신의가 더없이 중요할 수밖에요. 어쨌든 이러한 비대칭성을 가볍게 다룬다면, 글쎄요, 소비자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아닌 듯합니다.

그런데 자유로운 의료 시장이 최고라고 주장하는 그분들조차 농어촌 주민이나 가난한 사람의 건강을 보호하는 서비스, 돈이 되지 않아 시장이 외면하는 서비스에 관해서는 정부가 따로 방책을 세워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아요. 의료의 공공성을 아주 외면하지는 못하는 거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요? 그보다는 공공성이 의료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잠시, 서구의 공공의료를 알아보지요. 그곳에는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습니다. 놀랍죠? 영국에는 국영의료제도가 있어 국가가 의료 전반을 책임지고, 독일도 질병보험을 중심축으로 하여 국민 모두에게 의료를 든든하게 보장한다는 얘기를 들어 보셨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서유럽 국가 중 절반은 국영의료제도를, 절반은 보험 방식의 의료보장제도를 두고 있는데 국민 누구나 수준 높은 의료를 무료 또는 거의 무료로 이용하는 데에는 다를 바가 없어요. 그런데도 그곳에 공공의료라는 말이 없는 이유는 의료가 그대로 공공의료이기 때문이랍니다. 영어로 헬스케어(Healthcare)가 의료이자 곧 공공의료를 뜻해요. 또한 보건, 의료, 재활서비스를 다 아우르는 말이기도 하고요. 국가적 헬스케어란 국민 누구나 필요한 의료서비스를 폭넓게 이용하도록 보장하는 제도이며 예방과 치료와 재활을 통합하여 제공하는 제도이니까요. 이렇게 의료가 곧 공공의료인 나라, 새삼 부럽지 않습니까?

, 미국 말씀이군요. 그 나라는 참, 별종이에요. 국영의료도, 국가적인 의료보험도 없어 인구의 약 9퍼센트인 3천만 명이 의료보장 바깥에서 위태롭게 살아가는 나라가 미국이랍니다. 의료보험도 모두 영리적인 민간 회사가 운영하여 보험료가 매우 비싸고 보장 내용도 천차만별이라, 산모가 아이를 낳고 12일 만에 쫓기듯이 퇴원하면서 병원에 2천만 원을 냈다는 기막힌 얘기가 들려옵니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미국이 잘사는 나라의 표준이 아니라는 거예요. 오히려 예외적인 나라고, 특히 의료보장에 관해서는 안쓰러운 눈길을 받는 뒤처진 곳이지요.

다시, 우리나라 의료가 공공성에 충실하게 되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요? ·도립병원 같은 공공병원을 더 세우면 될까요? 그건 꼭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일차의료 제도가 필요합니다. 이는 국민 누구나 자신의 건강 전반을 돌봐줄 의사를 정하여 부담 없이 진료받고 상담하는 제도입니다. 서구 사람들이 마이 닥터라 부르는 그 의사는 환자와 꾸준히 교류하며 건강을 돌봅니다. 동네에 있으므로 환자가 언제든 찾아갈 수 있고, 질병의 초기 또는 발병 전 단계에서 진료하고 상담하며,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정밀검사나 입원치료를 받도록 환자를 종합병원에 의뢰합니다. 서구에서는 보편적인 제도로, 국민 누구나 의료를 적절히 이용하고 건강을 보호하는 데 큰 효과를 낸다고 인정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일차의료 제도가 없어, 공간적으로 가깝고 정서적으로 친밀한 의료가 자리 잡지 못하고 있어요. 환자는 값비싼 시설을 갖춘 종합병원으로 쏠려 동네 의사의 역할이 갈수록 줄어들고요. 2012OECD가 한국 의료 현황을 검토한 뒤에 이 제도를 도입하기를 강력하게 권고했습니다. 한국이 지금처럼 종합병원 중심으로 의료를 운영하다가는 고령화 시대에 중증 만성질환 환자가 급격히 늘어 개인과 국가 모두 엄청난 비용을 들이게 되리라는 우려와 함께 말이지요.

다음으로, 지방자치단체 및 시민사회가 의료와 건강에 관련하여 더 큰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지금은 중앙정부가 의료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관리해요. 지자체는 보건소를 운영하여 방역, 예방접종, 건강증진사업, 간단한 진료와 취약계층 방문서비스 정도를 할 뿐입니다. 의료제도에 관해 시민이 참여할 기회는 거의 없고요. 그러나 의료는 생활하는 장소 가까이에서 이용할수록 효과적이고, 건강은 생활에 밀착하여 관리할 때 증진됩니다. 이른바 생활 밀착형 의료가 필요한데 고령 인구가 많아질수록 이게 더욱 절실해요. 앞으로 자치분권이 강화되면 지방자치단체가 의료에 관련하여 상당한 책임을 지고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를, 일차의료 제도를 도입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한 변화가 일어날 때 우리나라에서도 의료가 곧 공공의료가 되어, 공공의료 개념을 굳이 따로 정할 필요가 없어질 테지요. 우리 함께 그런 날을 상상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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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요즘 텔레비전에서 양진호가 사람을 철썩철썩 때리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볼때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때리면 무척 아픕니다. 너무 아파서 더는 안 맞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요. 빌라면 빌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요. 보복은 엄두도 못 냅니다. 때리는 손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법보다, 정의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나처럼 겁이 날 만큼 맞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작은책>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로,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이들이, 할까말까 하는 망설임을 뚫고 기꺼이 기별을 넣어 볼 엄두를 내는 까닭 역시 불쌍한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지안이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불쌍하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너무 우뚝 서서 너무 빛나고 있으면, 아무리 반가워도 금세 기별 넣는 행동으로 이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차라리 불쌍한 처지여서, 내 좋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안심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할 말 다 하고, 뻘짓 다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해 두지 않으면, 내 전화통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결혼 생활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혼자 갓난쟁이를 돌볼 길이 없어 부산 본가에 아이를 맡겨 둔 채, 서울-부산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그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던 아이 아빠와의 전투(?)에서 당당히 이겨 내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사무실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물을 참 좋아합니다. 물 마시는 것도 좋고, 팔 할이 물인 술도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도 좋고, 나이 들면 물가로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신나게 수영을 다니다 생리 기간이 닥쳐왔습니다. 전화를 걸어 생리 기간이라,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닐게요.” 했더니 안 된답니다. 아무도 그런 까닭으로 수영장을 쉬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정히 오기 힘들면 진단서를 떼 오세요.” 나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생리가 어떻게 병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제가 건강해서 생리를 하는 거니까요. 생리 기간 일주일 동안 잠깐 쉴 수 있게 안 해 주시면, , 그냥 가지요. 수영장에 가면 물에다 사람들이 눈물에, 콧물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싸고 그러는데, 생리혈 하나 더 보태는 게 이상할 것도 없겠네요.”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준다나요? 이렇게 황당할 데가 또 있습니까?

내가 다닌 수영장은 현대 계동사옥 지하에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길이랑 브이아이피(VIP)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예 달랐습니다. 아마 여러 처우들도 많이 달랐겠지요. 이게 그러니까,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고 여자일 뿐이라서 당하는 일이다 싶으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그 기간이 엄연함에도, 남자들과 한 달 정기권 금액이 같은 건 옳지 않다, 쿠폰제로 운영하거나, 생리 기간에 수영을 잠시 쉬었다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같은 기간이라면 여자들 정기권 금액이 더 싸야 한다는 취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그 뒤로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이 내용이 반영되어서, 공공이 운영하는 수영장에 생리할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아시겠지요?

또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내몰고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어 냈을 즈음, 나도 ()적농단을 몰아내고 무혈혁명을 이뤄 냈더랬습니다. 딸아이 성을 엄마인 내 성으로 바꾸었거든요. 이게 무슨 혁명인가 싶겠지만, 진짜 피만 안 흘렸지, 성 하나 바꾸는 데 참 욕 많이 봤습니다.

딸아이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이름을 지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처음 우리 둘 다 흡족해한 이름이 이송이였습니다. 내 성이 씨니까, 성이랑 이름을 붙이면 송이송이’! 뭔가 좋은 기운이 송이송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또 하나 눈에 확 들어온 이름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가 만들던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느림 작가가 연재하는 덕분이와 장판이의 한뼘텃밭이라는 꼭지가 있었거든요. 딸아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은 일이니, ‘네가 좋은 건 내 덕분이고, 내가 좋은 건 네 덕분이다. 이 이름만 한 게 없다싶었지요. 물론 도시내기 딸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이름입니다.

내가 원래는 아이를 셋 갖고 싶었는데, 그 녀석들이 다 씨가 달랐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 지어 뒀거든요. 첫째가 마루.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밑바닥을 받쳐 주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둘째는 지붕이. ()을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집으로 치면 적잖이 떨어져 있으니, 셋째는 기둥이라고 지어서 마루와 지붕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하나 낳고도 내가 이토록 헤매는 꼴을 보고 얼른 주제파악이 돼서 마루라는 이름밖에 못 쓴 겁니다. 그래, 지붕이나 기둥이 가운데 하나는 어떠냐?”고 딸아이한테 물었지요. 하지만 이 녀석, 잠시 틈도 갖지 않고 싫어!” 합니다.

결국 녀석이 하자는 대로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한 지금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바꾸려고 보니,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의 성과 본 변경 허가 신청소송에서 이겨야 된다는데, 이게, 준비하는 서류부터 복잡합니다. 왜 성을 바꾸고 싶은지, 성을 바꿔 쓴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일상에서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이를 왜 재판부가 허가해 주어야 하는지 들에 대한 내용을 쓰고,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가까스로 서류를 꾸며서 판사 앞에 섰더니, 내게 묻는 첫마디가 재혼하려고 그러세요?”였습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아이 성을 새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게 보통인데, 재혼도 안 하면서 멀쩡한 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아이 생부 의사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하고, 가사 조사에, 심리에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는 겁니다.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성 문제는 자기 결정의 권리이지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생부 의사까지 물어야 하다니. 그 생부의 생사도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를 딸아이 친구들한테 하소연하니 이 녀석들도 같이 분개하면서, ‘내 친구 이름은 송OO입니다하는 피켓을 펼쳐듭니다. 이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탄원서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앨범에 OO’으로 표기해 주었고, 아이가 물건에 쓴 이름에, 일상생활에 엄마 성을 쓰고 있다는 증거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성 변경 허가 판결을 받은 것은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고도 석 달이 지나서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이 마흔 넘은 육중한 몸을 얼마나 폴짝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마시면 기운이 팡팡 나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잔뜩 사서 바까스로 바꿔 둘레에 돌리던 그날의 상큼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이 성 하나 바꾸는 데 일 년 넘게 싸웠으니, 촛불혁명보다 더 질기고 오랜 혁명이었지요.

▲ 그림_ 최정규


,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진 걸 함부로 쓰고, 나쁜 짓 하는 놈한테는,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이겨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럴 땐 상식 없는 게 진짜 큰 무기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거든요.

이렇게 힘자랑이 길어진 것은, <작은책> 보고 걸려 온 전화 몇 통에 마음이 속절없이 따땃해져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철벽을 거두게 되는 건, 갑질과 겁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측은해하는 마음, 다정히 헤아려 주는 마음들 때문이잖아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요.

물론 그러다 철벽이 홀라당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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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이선희 감독의 <얼굴, 그 맞은편>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제 아들은 아주 특별합니다. 엄마니까 당연히 그렇게 느끼는 거겠지만 제 아들을 떠올릴 때마다 제 마음속에는 따뜻한 물 같은 것이 차오릅니다. 글을 모르던 시절, 어린이집에서 선생님들이 받아 적은 아들의 자기소개에는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빠의 귀를 닮았습니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눈물 많고 걱정 많은 자기의 마음이 엄마로부터 온 것이라고 여기는 아들의 생각에 많이 놀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인지 아들은 아빠와 더 가까워지고 싶어 합니다. 제가 앉아서 소변보기를 주장했을 때 순순히 따르는 아빠와는 달리 아들은 반발했습니다. 가끔은 엄마를 닮은 자기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더 강력한 남성성을 갖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들은 중2가 되었고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아들의 세계가 궁금해서 가끔 아들의 방에 들어가면 아들은 무심한 눈을 들어 ?” 하고 짧게 묻습니다. 선배 엄마들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하지만 저는 그런 반응에 상처받습니다. 여리고 고왔던 내 아들이 어느 순간 무서운 남자로 변해 있을까 봐 겁이 납니다.

이제는 같이 다니는 것도 반기지 않는 아들과 함께 제10DMZ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갔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하는 일정이라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굴, 그 맞은편>을 보았습니다. 저희 가족에게, 그리고 이 시기에 너무나도 적절하고 필요한 영화라 11월의 영화로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가 이 시기라고 표현하고 있는 지금은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가 화제가 되고 있는 시기입니다. 추석이면 멋진 달리기 솜씨로 구사인볼트라는 애정 어린 별명까지 얻었던 씩씩한 여성 연예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비는 영상은 모든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렸습니다. 사회적 성취가 충분한 그 여성을 무릎 꿇게 한 것은 최종범이라는 이름의 미용사가 연인이었던 시절에 함께 찍은 영상 때문이었지요. ‘폭행 사건으로 신고되었다가 성관계 동영상 협박논란으로 번지면서, 이른바 리벤지 포르노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 달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의한 네티즌이 20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동시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또한 뜨거운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여성주의자들은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자체를 거부합니다. ‘리벤지를 한국어로 번역한 복수라는 단어는 억울한 피해자가 부당한 피해를 입힌 가해자에게 보복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흔히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를 달고 불법 사이트들을 떠도는 영상들은 남성이 헤어진 연인에게 앙심을 품고 유포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도 그 영상에 리벤지 포르노라는 말을 붙이게 되면 영상 속 주인공 여성들이 잘못을 했다는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알몸이 동의 없이 유포될 정도의 잘못을 하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성주의자들은 디지털 성범죄라고 부르자고 합니다.

▲ 영화 <얼굴, 그 맞은편> 포스터.


영화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 의해 찍혔는지 모른 채 사이버공간에 유출되어 사회로부터 라는 낙인과 함께 격리되는 여성들의 공포를 고스란히 체감하게 해 줍니다. 여성의 이미지를 착취해 수익을 얻는 시스템이 산업화되고 있지만 국가는 거의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국가가 비어 있는 이 자리에 서서 피해 여성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젊은 여성들. <얼굴, 그 맞은편>의 주인공들입니다.

여성혐오페미니즘이 뜨거운 이슈가 된 지는 꽤 되었습니다. 그리고 메갈리아워마드가 등장했습니다. ‘미러링이니 폭력의 반사와 같은 단어들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제게는 버겁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이 복잡한 지형을 페미니즘=폭력이라는 공식으로 단순화하고 페미니즘을 사회악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이 강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간간히 대화를 하던 시절, “네가 페미니스트가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제 바람을 들은 아들이 페미니스트가 뭔지 알아보겠다는 말을 했던 적이 있습니다. 동시대를 살고 있고 같은 부모와 한 지붕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삼 남매는 서로 다릅니다.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돈 많은 남자 만나서 결혼하는 거?”라고 물었던 선생에 대해 분노를 털어놓는 큰딸, 탈코르셋 운동에 관심이 생기기 시작한 막내딸, 그리고 속을 알 수 없는 아들. 이런 상황에서 온 가족이 함께 본 <얼굴, 그 맞은편>은 저희 가족에게 대화의 물꼬를 터 주었습니다.

주인공들은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이하 한사성)’의 젊은 여성 활동가들입니다. 그들의 시작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우연히 접하게 된 누군가의 사적인 동영상. 불법 유출된 것이 분명한데도 그 영상은 다양한 이름을 걸고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떠돕니다. 불법으로 다운로드를 한 사람이 제목을 바꿔서 다시 올립니다. 고작 몇백 원, 몇천 원에 누군가의 신체는 야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활동가들은 영상 속 약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고통을 지켜보며 흥분하고 희열하는 남성들에게 같은 인간으로서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입니다. 거리부스를 운영하기 위해 안내 배너를 세우는데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일이라서 실수를 연발하며 깔깔거리는 이들은 정말 사랑스럽습니다. 어딘가에서는 악마화된 단어로 사용되고 있는 페미니스트. 하지만 영화가 그려 내는 눈물 많고 공감 능력 풍부한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성장기를 따라가다 보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가 스르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수십 개의 이름으로 떠돌고 있는 불법 유출 동영상을 찾아서 신고하고 또 신고합니다. 같은 동영상이지만 다른 이름으로 올라와 있기에 일일이 다 확인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상처를 입지만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쉬지 않고 일을 합니다. 피해자들은 동영상 유포 사실을 확인하고 경찰에 신고를 해도 유포된 동영상을 다 막지 못해서 사비를 털어 디지털 장의사라는 곳을 찾는다고 합니다. 돈이 떨어질 때까지 지우고 또 지워도 막지 못한 피해자들 중의 일부는 죽음을 선택하기도 하는데, 더 절망스러운 것은 피해자의 불행이 알려지면 그 동영상은 더 인기를 끈다는 사실입니다. 영화는 그만큼 충격적입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불법 동영상 공유 사이트디지털 장의사라는 업체들의 협력관계가 의심된다는 사실입니다.

피해자들의 슬픔을 전시하는 다큐멘터리를 만들진 않을 것이다라고 다짐했던 이선희 감독은 활동가들이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해 활동가가 되어 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담아냈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일 자체가 투쟁이 되고 있습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성범죄 관련 기관이 법원에 영화상영금지가처분을 신청했기 때문입니다. 재판 기금 마련과 개봉을 위한 소셜펀딩이 진행 중입니다. 꼭 동참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문의: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cybersv.rc@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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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엄마가 소곡주를 마시지 않은 까닭

유내영/ 충남 청소년노동인권센터 지킴이

 

 

휴대폰을 줘 봐라.”

왜요?”

그것 좀 떼 버리게.”

휴우.”

당진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설날, 추석을 나의 친정인 성남에서 보낸다. 추석 전날 저녁상을 마주하고 부모님, 남동생 부부, 조카와 모여 앉았다. 얼마 전 단톡방에서 고종사촌 언니들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확인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내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내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들고 있던 내 휴대폰 뒷면이 나와 마주 앉아 있던 아빠의 눈에 자꾸만 거슬린 모양이었다.

휴대폰 뒤쪽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세월호 스티커. 사진_노란리본캠페인(네이버카페)


아니, 이건 왜 떼려고요? 아빠 휴대폰이 아니라 제 거예요.”

그거 보는 게 정말 지겹고 싫다. 좀 떼어 버려라.”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붙인 건데, 아빠가 떼라 마라 왜 참견인데요?”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붙이고 있냐?”

아직 사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시작도 안 됐는데 뭐가 끝나요?”

세월호 타고 놀러 가다가 난 사고인데 뭘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남동생이 나선다.

놀러 가다가 난 사고는 그냥 둬도 돼요? 그리고 세월호에 탄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일정에 함께한 거예요. 학생들도 있었지만 제주도로 살러 간 가족도 있었다고요. 화물기사 아저씨도 생업 때문에 타고 있었고요. 바다에서 사고 나면 국가가 나서서 구해야 되는데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말을 거드니 약간 주춤한다. 아빠는 단호함이 약간 수그러진 소리로 고집스럽게, 그래도 보기 싫으니 떼란다. “보상도 많이 받았구만.” 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직접 만난 이야기, 대통령이 탄핵되자 인양하기 어렵다던 세월호가 올라온 것, 세월호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뭍으로 데려온 잠수사의 이야기, 해경이 사람들을 구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했던 거짓말, 배의 진행 방향을 거짓으로 발표했던 국가, 없어진 닻, 세월호에서 나온 아이들의 손톱 이야기. 눈물을 참으면서 엄마와 남동생과 번갈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광주민주항쟁 이야기를 한다. 당시 광주에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와 다를 게 없다며, 세월호를 이용하는 세력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하이고이 널뛰기는 뭐지? 연결시킬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어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군사독재 철폐를 위해 시위를 한 건데, 전두환이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총으로 쏴 죽이고 때려죽이고 사진 혹시 봤어요? 직접 광주에 가 보기나 했어요?”

그들이 폭도들이었지. 폭도들 진압하려고 군대가 투입된 건데 무슨 영웅이라고 돈을 주고.”

광주에 가서 직접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 들었느냐, 왜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확신 하냐, 그런 거짓말만 듣지 말고 다른 사람 말도 들어 봐라, 휴대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봐라.

그래도 자존심 강한 아빠는 지고 싶지 않은 눈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우리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다. 왜 가족의 말보다 남의 말을 더 믿냐고 해도 꿈적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뭐라 말도 못하고 난감해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 집안 가장의 사위와 며느리, 손주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3의 대결이 수습할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빠는 내가 배 타고 놀러 가다 사고 나서 죽으면 그냥 수장시키세요. 놀러 가다 죽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었는데, 왜 사고가 났는지 원인을 알 필요가 뭐 있대요. 그리고 국가 돈 축내지 않게 말도 꺼내지 말고요. 아빠는 그렇게 하세요.”

쓸데없는.” 아빠는 말을 잊지 못한다.

가족 모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정치로 흐른다. 정치 성향에 있어서 아빠와 나는 완전 반대편에 서 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싸움으로 번진다.

몇 년 전의 나는 70대 중반의 아빠 생각을 바꾸기 위해 설득하려고 엄청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한고집 하는 내 성질이 꼭 아빠와 내가 닮았다는 것을 남편과 두 딸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남편과 딸들은 나와 아빠의 갈등 상황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면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아빠와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치기도 했다. 그 뒤로 아빠하고는 되도록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정치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입을 닫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아빠도 나의 태도 변화를 눈치챘는지 언제부터인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엄마와의 통화로 아빠는 여전히 꼴통보수임을 확인 하고 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광화문으로 집회를 가면 성남에서 하루 자고 내려가곤 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면서 별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꼴통보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짓뉴스에 노출된 아빠에게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좀 오래 이야기했다. 특히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별말 없었던 남동생이 거들어 주어서 고마웠다.

엄마는 판문점 남북회담 때 마셨다는 면천 두견주가 어떤 맛인지 궁금해하셨다. 면천과 가까운 당진에 살고 있는 나는 추석을 맞이해서 두견주를 사 갔다. 그리고 소곡주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한산에서 직배송된 소곡주도 가져갔다. 진달래꽃으로 만든 면천 두견주와 찹쌀과 누룩으로 만든 한산 소곡주를 맛보고, 평도 하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을 선택해서 마셨다. 아빠는 소곡주가 더 좋다면서 두견주를 한사코 마다했다. 두견주는 맛도 안 봤으면서!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시댁에서 올라온 동생네와 저녁을 먹으면서 두견주와 소곡주를 꺼냈다. 전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한잔 받으세요하면서 아빠에게 두견주를 권하니 잔을 받는다. 아무리 문재인 정권을 싫어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두견주의 맛이 궁금했을 것이다. 모른 척하긴 했지만 술을 받는 그 모습이 밉살맞으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아빠의 눈과 귀는 도대체 어디로만 향하고 열려 있는지. 안타까웠다.

엄마는 끝까지 소곡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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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세 번 해고 투쟁, 헛살지는 않았다

김양순/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그네틱스분회

 

 

시그네틱스는 1966년에 설립된 필립스 한국공장이었다. 시그네틱스는 반도체를 조립하는 회사다. 나는 1987년 시그네틱스 염창동 공장에 입사해서 생산3팀에서 테스트 업무를 했다. 생산3팀은 완성된 제품 중 정품과 불량품을 구분하는 작업과 출하하기 위한 포장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센츄리라는 기계를 4대 정도 작업했다. 센츄리 기계에서는 크기가 약간 큰 반도체 제품을 작업했다. 12대까지 동시에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일했던 것 같다. 센츄리에서 일하다 둘째 아들 출산 후에 몸도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부서장 지시로 로직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품이 10개씩 묶인 채로 메가진이라는 쇠에 담겨 오는 것이다. 1로트에 4~5천 개씩 한 제품으로 한 번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메가진의 무게는 3-4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수시로 이걸 들어서 작업하는 게 힘에 버거웠다. 더 쉬운 작업도 있는데 10년 이상 로직 작업한 사람과 똑같이 생산해야 한다면서 관리자가 매일 생산량을 체크해 힘들게 했다. 열심히 일했는데 비교당하는 게 힘들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테스트에서 일한 지 약 12년이 지난 상황. 테스트 기계가 파주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전할 때 함께 간다고 했는데 사람만 버림받았다. 1995년에 필립스 자본이 철수하며 국내 자본인 거평그룹에 팔았고, 거평은 부도가 났다. 워크아웃 사업장이 되었고, 산업은행이 관리하다 2000년에 영풍그룹에서 인수를 하게 됐다. 회사 주인이 바뀌는 걸 보며 사원들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상태였다. 이미 노동조합이 있었고, 단체협약도 있었다. 1999년도 단체협약을 갱신하면서는 임금인상이 조금 되더라도 공장 이전 문제와 고용안정 문제는 조합원들의 주된 관심사였고, 반드시 관철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평이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파주 탄현면에 16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도가 났다.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할 때 노조에서도 동의를 해 줬다. 왜냐면 파주 공장으로 갈 때 회사가 사람과 기계 모두 합의하에 데려간다고 했다고 노동조합에서 보고를 했다. 부도 이후 사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동결, 상여금 300만 원 반납, 호봉 승급 보류, 각종 복지 축소 등 함께 살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퇴직금 누진제 폐지이다. 1.3N(퇴직금을 근속년수×1.3만큼 지급)이던 누진제를 폐지한 것이다. 회사를 살려 고용을 보장받고자 머리를 짜내 궁리를 모색했건만, 영풍으로 인수된 이후 영풍은 안산 반월공단으로 공장 이전 일방 통보를 해 왔다. 대표이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공장 이전 문제를 노조와 함께 상의해서 잘 마무리하자고 했으나 회사는 더욱 몰아붙였다. 회사는 안산 공장 이전 이주 불가자를 모집하며 위로금 12개월분을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표를 냈다. 200여 명. 20011월부터 6월까지의 사직자다. 많은 사람들이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회사는 2001723일부로 안산 공장으로 일방적 인사 발령을 냈고,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장소는 염창동 공장이었다. 염창동 공장은 1600평 규모이다. 대형 천막이 10여 개가 쳐졌다. 파업 대오를 2개조로 나눠 12일 투쟁을 진행했다. 공장 안 기계 반출을 막기 위한 투쟁이 한 달을 넘어갈 때쯤, 89일 사측은 용역 200여 명을 고용해 우리를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기계를 빼 갔다. 그리고 해고 통보를 날려 왔다. 파업대오 160여 명 중 130명이 해고되었다. 그 전에 전 조합원 임금 가압류, 사직자 퇴직금 가압류, 전원 해고, 교섭위원 5명 전원 구속, 최초 여성 용역을 고용해 시그네틱스는 노조 탄압의 새로운 방법들을 내세우며 강하게 공격해 왔다. 그래도 부당 해고 철회시키고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투쟁이 이어졌다. 2003년에 조합원들을 생계 투쟁에 내보내며 대법원 판결 때까지 간부들이 투쟁 대오를 유지하며 투쟁을 했다. 2007년 대법원 판결이 났고, 간부들은 전원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남아 투쟁하는 간부들과 조합원이 있었다.

투쟁 이후 나는 변했다. 결혼해서도 직장을 다니고 싶었다. 시부모님과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될 때까지 함께 살다가, 지금은 두 분이 시골 가서 사신다. 1차 해고 후 염창동 공장에서 농성장 유지하며 천막 지키느라 밥도 해 먹고 공장에서 자고 들어가면, 시아버지는 바람을 핀다고 하시곤 했었다. 고집 센 시아버지라 본인이 모든 것을 다 관여하고 지시하고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콩나물값 150원이 안 맞는다고 시어머니를 쥐 잡듯 잡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그래서 집에서도 투쟁을 해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공장에서 잠을 자고 집에 들어간 날 일이 터졌다.

농성장이 없어지는 걸 막고 아침에 출근한 조합원들과 교대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시아버지가 바람 피웠다며 야단을 하시기에 그날은 참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했고 또 단 하루를 살아도 맘 편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피운 걸 보셨냐고, 왜 막말을 하시냐고, 노동조합일 동참하고 온 거라는 말을 왜 믿어 주시지 않느냐고, 억울하다고 했다. 결국은 내가 이겨서, 시아버지는 앞으로 영진이(큰아들) 엄마가 하는 일은 다 맞으니 믿고 사신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내가 하자는 대로 시부모님이 인정을 해서 의지를 많이 하고 사신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2001년 해고된 이후 6개월 동안 교리 공부를 해서 로사 (장미꽃)라는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앙이 있으면 세 번 해고를 당해도 이겨 낼 수 있도록 힘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하자면, 큰아이 영진이가 엄마가 세 번 해고되어도 계속 시그네틱스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힘들어도 끝까지 직장을 다니겠다고 한다. 2001년 복직 투쟁할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지금은 스물일곱 살로 은행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초기에는 일이 힘들어 엄청 풀 죽어 있더니 이제는 엄마가 투쟁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 보면서 첫 직장에서 힘들다고 관두지 않고 퇴직할 때까지 다니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새삼 시그네틱스 투쟁하면서 산 경험이 현재로 이어지는 인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느낀다.

시그네틱스 1차 투쟁 때 해고되어 복직 못한 29명의 징계 해고자가 있다. 18명의 간부들과 해고 이후 산업은행 규탄 투쟁에서 로비에 들어갔다고 해고된 11명의 조합원이다. 이들은 2007년 대법원에서 정당 해고라고 판결이 났다.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결을 받았지만, 2011년 안산 공장 영업 양도를 이유로 두 번째 전원 정리해고 됐다. 복직 투쟁과 소송에서 이기고 현장에 출근할 때 회사는 서울이 집인 우리에게 통근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왕복 4~5시간 걸려 출근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우린 노조 봉고차로 6시 출근과 2시 출근자를 실어 날랐다. 그때 조합원 출퇴근시키려고 1종 면허를 땄다. 다섯 명이 1종 면허로 갱신하거나 새로 면허를 따서 조합 봉고차로 출퇴근 투쟁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이 밖에도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회사의 괴롭힘은 모두 다 쓰기가 힘겹다. 그럼에도 사표를 내지 않고 버텼다. 밖에는 해고자가 복직을 바라며 투쟁하고 있었고, 복직한 우리는 사표 내고 싶을 때 사표 내고 그렇지 않으면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우리가 견디니 회사가 안산 공장을 매각하고 광명시 하안동 아파트형 공장을 얻어 출근을 시켰다. 출근하자마자 회사가 어렵다며 1년 가까이 휴업을 했다. 우린 또 불안했다. 세 번 해고되는 것 아닌가.

20169월 우려했던 대로 세 번째 정리해고를 통보받았다. 광명사업부 폐업으로 인한 전원 정리해고 통보 한 달 후 회사는 위로금을 대폭 인상했다. 조합원 13명이 사표를 냈다. 9명이 남아 투쟁하기로 했다. 사표 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했기에 두 번 해고 투쟁을 이길 수 있었으니 세 번째 복직 투쟁을 함께 안 한다고 누굴 원망할 수 있으랴. 밉고 원망스러운 건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동료들에게 기어코 위로금을 쥐어 주고 희망을 뺏어 간 시그네틱스와 영풍 자본이다. 본사인 파주 시그네틱스 공장은 1년 내내 우리가 현장에서 일하고 있든지, 해고되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든지 사람을 뽑고 있다. 파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얼마 전 914일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정을 받은 9명의 노동자들은 시그네틱스 정규직이다. 회사는 복직명령서만 보내고 휴업이라고 한다.

▲ 시그네틱스에서만 3번 해고 된 노동자들. 광화문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앞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양순 씨. 사진제공_시그네틱스분회


우린 여전히 광화문 청사 옆 천막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1차 해고자이며 그 당시에는 사무장이었고, 지금은 분회장인 윤민례 동지와 함께 시작했으니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사람들을 남기는 역사를 쓰고 싶다. 1차 해고자와 복직자의 끝을 연결하고 있는 분회장의 책임감은 모든 간부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시그네틱스 투쟁은 현재 진행형인 살아 있는 역사이다. 신규 노조가 볼 때도 끝까지 질기게 투쟁하는 모습은 동지들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투쟁이고 우리 자식들을 정리 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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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지난 호를 읽고

 

작은책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마는 굳이 이유를 들자면 쉽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수준(?)이 낮아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글이 마음에서 절절하게 우러나와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또 나의 일처럼 공감하게 됩니다. 마치 옛 동지를 만난 것처럼.

10월호에 실린 김수련 님의 글을 읽으면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배경으로 드러나는데 나는 늘 내 중심적인 사고로 바라보니 오해를 하게 되고 마침내 불신이라는 늪에 빠져 사고 자체가 딱딱하고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작은책은 나를 일깨워 주는 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함께 읽고 공감하고 때론 뉘우칠 수 있게 하는 작은책은 저에겐 오래된 경전입니다. 작은책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상록

 

작은책 10월호를 받았습니다. 젊은 우체부가 밝게 웃으며 당신 책이 왔어요! 하면서 건네주었습니다. 달마다 오는 작은 포장이 책이라고 어찌 알았는지. ^^

받자마자 앉아서 일사천리로 다 읽었습니다. 반 년 넘게 아프다는 이유로,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도태되고 있다는 자괴감까지 들던 저에게 읽어야만 한다고 죽비처럼 다가온 이야기들. 세상에 나만 아픈 것도 아닌데 저는 왜 이러고 있었는지. 냉장고를 열어 냄새를 맡고 행복한 아이처럼 다시 힘을 내겠습니다! 자신이 귀여워서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처럼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다시 알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작은책~

독일에서 조숙현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꼭 종이책이 아니어도 요즘은 인터넷매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좋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됐어요. 저도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어느새 종이책은 소홀히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잠시만 봐야지하고 펴 본 작은책에는 SNS에서 볼 수 없는 따뜻하고 귀중한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을 꼽아 보자면 어린이해방운동입니다. 그 글을 보고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르치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만 대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어요. 항공사 승무원 두 분의 글도 다 좋았습니다. 팍팍한 현장에서도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똑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에 제 마음도 벅차오름을 느꼈어요.

백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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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18. 23:05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10월호

세상 보기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

진장원/ 한국교통대학교 교통대학원 원장

 

길을 걷다 보면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 하나 있다.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오는 기색이 보이면 사람들은 얼른 구석으로 피해서 자동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것이다. 심지어 횡단보도 앞에서조차 보행자는 자동차를 먼저 보내 주고 나서야 길을 건넌다. 이렇게 자동차가 우선시되는 문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동차를 먼저 보내 줘야 하지?”라는 질문도 떠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령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우선이지!”라고 주장하며 먼저 길을 건너려 했다가는 당장 운전자로부터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라는 욕설을 듣게 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이나 유럽은 어떨까? 한번은 필자가 미국 여행을 가서 교통신호등이 없는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저만치에서 자동차가 다가오기에 한국에서 늘 하던 대로 자동차가 얼른 통과하기만을 기다리며 딴전 피우듯 길 건너편을 주시하고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자동차를 쳐다봤더니, 그 자동차 역시 횡단보도 앞에 정지한 채 내가 길을 건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 멍하게 있다가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운전자는 헤이! 당신 왜 빨리 길을 안 건너고 있는 거야? 당신 때문에 나도 못 가고 있잖아라는 의미로 팔을 뻗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는 미국인 특유의 몸짓을 하며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사태 파악이 돼서 손을 들고 무안하게 길을 건넜다. 그 후로도 횡단보도에서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기까지 의식적으로 자동차보다 내가 우선권이 있어!”라며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당초 길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원래부터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와 다른 선진국은 보행자를 대하는 태도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

사람이 우선인지 자동차가 우선인지에 대한 관념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단적인 예가 보행 중 사망사고율이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자 열 명 중 네 명 정도가 걷다가 죽은 사람이다. 반면 네덜란드와 미국은 약 한 명이다. , 우리나라가 네 배나 더 많이 보행 중에 죽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선진국이지만 일본도 3.5명이나 된다. 일본이 다른 교통사고 통계는 선진국 중 으뜸 수준이지만 보행자 사고에서만큼은 후진국 수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그다지 배려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절반 정도의 운전자들만 보행자를 위해 차를 세워주었다.

그럼 서구 선진국에서도 원래부터 사람이 자동차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듯 약자(보행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강자(자동차)들이 알아서 보호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약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보행권을 쟁취해 낸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도로교통법에는 본엘프라는 제도가 있다. 본엘프는 네덜란드말로 도로의 정원이라는 뜻인데, 이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동차는 보행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된다. 심지어 아이들이 이 거리에서 마음대로 뛰놀아도 괜찮다. 이렇게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살아가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고 이걸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다. 이 본엘프의 유래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힌다. 1970년대 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이라는 도시의 한 동네에 공사장 트럭이 통과하기 시작해서 아이들 등하교 길이 매우 위태롭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참다못한 어느 주민이 자기 집 앞을 지나는 트럭이 속도를 못 내도록 화분을 내놓았고, 이걸 본 다른 주민들도 하나둘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트럭들은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화분들 때문에 삭막하던 동네 길이 꽃으로 예쁘게 치장된 정원처럼 바뀌어 사람들이 도로의 정원’, 본엘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본엘프는 다름 아닌 주민(약자)들이 자동차(강자)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도한 시민운동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먼저 네덜란드 정부가 본엘프를 법제화했고, 이후 독일의 템포30, 영국의 홈존, 일본의 커뮤니티존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스쿨존, 실버존, 생활도로구역 등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는 보행자와 자동차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으나 사람들의 의식은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 같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길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설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 본엘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첫째는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보도가 없다. 골목길에서만큼은 사람이 자동차를 피해 길 가장자리로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차량 통행의 편의를 위해 중앙에 차선을 그려 놓지 않았고 길을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자동차의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셋째는 횡단보도가 없다. , 본엘프 안에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무 때나 길을 건널 권리가 있다는 것을 시설로 운전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당한 채찍이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동차 운전자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을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음주운전이다. 여러분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운전자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대부분 선진국은 음주운전을 형사사건 살인죄로 엄하게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시속 30킬로미터 이상 속도를 내면 안 되는 본엘프에서 이를 어기고 사고를 내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 미국 운전자들이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기다려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엄한 벌칙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한 규칙은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습관이 되면 곧 익숙해진다. 골목길에서 천천히 다녀 버릇하면 그 속도에 익숙해진다. 세 번째는 자동차에 대한 우리 마음이 바뀌어야 된다. 요즘 내 마음에 꼭 드는 교통안전 광고가 있다. “운전자! 당신도 차에서 내리면 보행자입니다.”라는 광고다. 맞는 말이다. 평생 운전자로서만 살아가는 사람이 지구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직업운전자들 외에는 하루 24시간 중 아무리 길어도 서너 시간만 운전자이고 나머지는 보행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영원한 강자라도 된 양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꼴불견 운전자를 꼽아 보라고 한다면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와서 길 건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횡단보도 신호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빨리 건너라는 식으로 차머리를 밀고 들어오며 위협하는 운전자, 또는 사람들이 지나가야 할 인도나 횡단보도 위에 떡하니 무단주차해 놓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아직도 지도자들의 책임감(노블리스 오블리주)이 부족한 천민자본주의 사회라고 한탄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강자의 책임의식과 관용이다. 강자인 운전자가 약자인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충만해진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문화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가 강자와 약자가 더불어 사는 진짜 사람 사는 맛 나는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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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일터 탐방_ 대경환경()

 

그가 팬티만 입고 운전한 사연

정인열/ <작은책> 기자

 

생활쓰레기(생활폐기물) 수거차량을 운전하는 배성훈 씨(38). 그의 업무는 남들이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 밤 930분에 시작된다. 서울 마포구의 각 가정과 상가 등에서 내놓는 생활폐기물(일반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폐기물)5톤 수거차량에 싣고 인근 소각장에 나른다. 운전기사 한 명과 쓰레기를 포집하는 미화원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손발을 맞춘다. 미화원은 운전기사보다 2~3시간 더 이른 저녁 7시경 각자 맡은 현장으로 출근해 골목의 쓰레기를 포집하고 수거차량이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에 내놓는다. 그러면 운전기사는 포집된 쓰레기를 트럭에 상차하고 쓰레기는 회전판에 밀려 트럭 안쪽으로 들어간다.

▲ 서울 마포지역에서 폐기물 수거차량을 운전하는 배성훈 씨. 작은책(정인열)


마포구에서만 하루 발생되는 생활폐기물의 양은 456.6(2016년 서울시 통계자료). 하루만 수거를 하지 않아도 악취가 나고 거리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이들은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하고 토요일만 쉰다. 법정공휴일은 물론 설, 추석에도 쓰레기를 치워야 하기 때문에 명절 중 하루는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관계가 다 작살났죠. 쉬는 날이 하루라 아무것도 못해요.”

그는 야간노동으로 파괴된 일상을 설명했다. 아침에 퇴근 후 잠을 자려고 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자주 깨기 때문에 항상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린다. 생활 패턴이 남들과 달라 지인들을 만날 수도 없어 사회적 인간관계는 단절된다. 배 씨는 작업을 하기에는 주간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한다.

수거차량 20대가 마포구 지역 교통체증을 유발할까요? 오히려 낮에는 도로에 불법주차 차량이 없어 작업도 원활하고 사고 위험도 낮죠.”

야간노동은 특히 가정에 어린아이가 있는 동료들을 힘들게 한다. 쉬는 토요일 낮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밤잠을 자게 되고, 일요일 낮에 다시 아이들과 놀아 주다 잠을 자지 못하고 바로 출근하는 일이 많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 출근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쉬는 게 아닌 쉬는 날을 보내고 현장으로 가면 치워야 할 쓰레기는 평소보다 2.

하루 쉬고 나온 날은 12~13시간을 작업해야 돼요. 평소보다 4시간씩은 오바가 된단 말이에요.”

▲ 대경환경(마포구 위탁 환경업체) 서복석 씨가 성산동 골목을 다니며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공공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마포구청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위탁업체 대경환경()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위탁업체로는 고려환경, 평화환경, 효성환경까지 4개 업체가 있다. 이들의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410원 많은 7940. 기본급과 야간수당, 연장수당을 더하면 월 330만 원이다. 업체는 연장수당을 월 52시간으로 고정해 지급하고 있으나 배 씨가 6월 한 달간 노동조합 조합원 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장근로시간은 80시간이 넘었다. 배 씨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의 한 달 노동시간은 240시간이 넘는다. 이는 2016OECD가 발표한 회원국 평균 147시간보다 많은 최고 수치다.

간접고용의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대두되자 20153개 관계부처(기획재정부, 행정자치부, 고용노동부)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이하 용역근로자보호지침)’을 마련하고 이들의 임금은 시중노임단가를 책정해 지급하도록 했다. 지침에 따르면 이들의 시급은 14766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중노임단가의 53퍼센트밖에 안 되는 최저임금 수준이다.

환경미화원이 이렇게 궁지에 내몰리는 것은 영리를 추구하는 위탁업체가 공공업무를 대행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용역근로자보호지침을 내놔도 법적 강제성이 없어 지키지 않는 업체가 대다수다. 게다가 관리·감독을 해야 할 마포구청 청소행정과가 오히려 지침을 어기고 시중노임단가의 70퍼센트로 입찰 공고를 냈다. 그리고 관련법을 어기고 입찰 공고문을 변경해 노임단가를 더 내려서 업체가 연간 8억 원의 임금을 착복하게끔 도와준 정황도 있다.

위탁업체는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인건비와 식비마저 중간 착복하고 인력 충원도 최소화한다. 늘 인력이 부족하여 노동자들은 시간에 쫓기며 일을 하니 안전 규정도 어기게 된다. 골절부터 사망사고까지 발생한 재해 건수는 연평균 613(2015~2017년 고용노동부 자료). 특히 사망자의 88퍼센트가 위탁업체 노동자였다. 배 씨 역시 지난 1월 쓰레기를 상차하다가 회전판 사이에 손이 끼어 오른쪽 손가락 3개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야간에 청소하는 사람들 다 발판에 매달려서 다니잖아요. 음주 차량이 뒤에서 받아 버리거나 발 잘못 디뎌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나도 매달려 다녀요. 발판 자체가 불법 부착물인데도요. ? 이걸 떼 버리고 걸어 다니면 작업시간이 당연히 늘어나겠죠. 그러니까 암묵적으로 놔두고 있는 거예요.”

배 씨는 미화원 작업복과 장갑을 지금보다 더 많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음식물 쓰레기와 분뇨 등 오물을 처리하다 보면 작업복과 장갑은 온갖 세균과 미생물에 오염되기 때문이다.

여름에 음식물 쓰레기 들면 구더기가 우두두둑 떨어져요. 그리고 술 취한 사람들이 꼭 쓰레기 더미 위에 토하고 오줌 싸고요. 그걸 수거차량에 넣으면 회전판이 돌면서 압축하거든요. 그런데 쓰레기가 가득 차면 터지면서 그 안에 있던 오폐수, 구더기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저도 한번은 다 튀어서 입고 있던 옷 다 벗어서 버리고 팬티만 입고 운전했어요. 하하.”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2009년 실태조사에서도, 환경미화원의 몸에서 검출된 미생물 수가 버스터미널 화장실 변기의 25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이 가까이서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은커녕 탈의실도 없어 주차장이나 상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작업 후에도 근처 화장실에서 손과 얼굴을 씻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오폐물이 묻은 옷은 그대로 가정 세탁기로 들어가 그 가족의 위생마저 위협한다.

▲ 한 위탁 환경미화원이 재활용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분리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종량제봉투에 담긴 쓰레기를 집다가 유리 같은 날카로운 물건에 손이 베이는 일도 부지기수다. 얇은 코팅 장갑 한 켤레로 3일을 써야 하니 금방 헤진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안전수칙 가이드에서 베임방지 장갑을 착용할 것을 권유하고 있지만 현장에는 지급되지 않고 있다.

대경환경 야간 반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미화원에게는 좋은 구역을, 그렇지 않은 미화원에게는 계속 험한 구역을 배치하며 인사권을 휘둘렀다. 때마침 4명 인력 충원으로 한 조가 더 생겨나 조금은 작업이 수월해질 거라 기대했지만 편한 사람만 더 편해질 뿐이었다. 201711월 배 씨를 비롯한 대경환경 소속 노동자 대부분은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노조를 만들었다. 배 씨는 지회장을 맡았다.

노조가 생기자 회사는 곧바로 같은 조의 노조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노조를 탈퇴하라고 회유했다. 노조에 가입한 수습 직원 4명은 3개월 수습 기간 후 모두 계약해지 하고 새 직원을 채용했다. 27명이던 노조원은 순식간에 22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8명이 버티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기업노조가 만들어져 22명이 그 노조에 가입했다.

배성훈 씨는 노조 활동을 하고부터 하루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다. 아침에 퇴근한 후 마포구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상급단체와 노무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담당부서인 청소행정과에는 민원을 넣는다. 지난 828일에는 유동균 마포구청장과 면담해 위탁 환경미화원 직접고용 TFT 구성을 제안했다.

▲ 배성훈 씨가 폐기물 수거 작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현재 서울시 직영미화원 1인당 책정된 인건비는 연 6300여만 원. 노조가 마포구청장에게 제안한 자료에 따르면 위탁 환경미화원 전원을 직영으로 전환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도 기존 위탁운영보다 연간 약 18억 원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절감된 예산으로 각 업체에 41조 인력을 충원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되면 배 씨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보다 안전하게 일하면서 주 5일 근무도 꿈꿀 수 있게 된다.

위탁업체가 그동안 우리 뜯어먹은 거 그만하라는 거죠. 발판에 매달리지 않고 작업을 해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저희 목표예요.” 그는 오늘도 잠 못 자고 뛰어다닌다. 보통 사람들처럼 밤에 잠자고, 가족과 일상을 함께하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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