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작은책
'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calendar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

Recent Post

Recent Comment

Recent Trackback

작은책 2018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죽비 같은 인연

김수련/ 항공사 객실승무원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는 하루하루는 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늘을 건너 온 세상 도시들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을 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지구라는 열린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객실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을 나라와 사람들, 그들에 대해 새로운 걸 깨닫고 이해하게 해 주는 내 일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교감과 공감 덕분에 길고 고된 하늘길에서의 노동을 견디며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밀폐와 제한이다. 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면, 그 부대낌의 피로 탓일까.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상황들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극성수기가 지나고 나면 항공요금이 조금 싸진다. 휴가를 가는 여행객들은 줄어들고, 사업이나 고향 방문 목적의 승객들이 많아진다. 성수기가 끝났음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승무원들 앞에 또 다른 종류의 일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오가는 승객들 중에는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특히 우리 항공사를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인도인이다.

인도처럼 식민지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이민이 많다. 인도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계급간의 갈등이 꽤나 심각하며,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름과 성만 보아도 그들끼리는 상대가 어떤 계급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국기인 인디안항공 이용을 꺼리고 신분 계급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외국 항공사들을 애용한다는 것.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도인 승객들을 만나면 무작정 연민의 마음부터 일곤 했다. 하지만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회에 오래 살았던 이들이라 그럴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나의 연민과 공감 능력으로는 그들을 다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인도인 승객의 특징 중 하나는 타국적의 승객들에 비해 휠체어 신청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인도인들이 한 비행기에서 주문한 휠체어가 무려 50개가 넘을 때도 있다. 휠체어 승객이 몇십 명이 넘어가면 승무원이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달리 보상이 없으면서 챙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지니, 일하는 승무원 입장에서는 불평이 쌓이기 십상이다.

휠체어로 탑승하는 인도인들은 물론 대부분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충분히 걸어 다닐 나이 같은데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날 인도 뭄바이에서 현지 직원에게 물었다. 유독 많은 뭄바이행 휠체어 승객들에 대한 불평은 그 질문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직원은 답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가난하여 자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간 그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실한 영양 공급 탓에 다리근육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그들. 휠체어에 의지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들. 어쩌면 미국 이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정.

그들을 그렇게 휠체어 안에 주저앉게 만든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고단한 업무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려 했던 내가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일이 늘어나는구나, 더 고단해지겠구나, 아 힘들어, 그런 푸념만 연발하며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불평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인도로 가는 모자 승객이 우리 비행기에 탔다. 어머니의 좌석은 비즈니스였고 아들은 이코노미였다. 아들은 탑승하며 내게 부탁했다.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으니 사정을 봐 달라고. 비행기는 클래스별로 좌석이 나눠져, 다른 칸의 승객이 상위 좌석으로 맘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탑승 과정 중 보았던 아들의 표정과 태도에 감동받아 그날 담당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잠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날도 승객이 많았던 날이라, 내 일이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모자 승객이 자꾸 눈에 밟혀, 아들이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화장실 방문을 돕는 모습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나도 부지런히 다른 칸으로 오가며 아들 승객을 불러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 승객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가 돌봐 드릴 테니, 아드님은 조금 쉬시라고. 할머니는 평소 잘 못 움직이신 탓에 몸이 불어 있었고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어서 부축하고 화장실로 모셔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릴 때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깊이 감사하는 맘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눈길. 비록 능숙한 영어는 아니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를 연발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식사 때면 식욕이 없으신지 거의 안 드셔서 마음이 아팠다. 더 드시라며, 다른 거라도 챙겨 드릴까 여쭈었더니, 맙소사! 자꾸 먹고서 화장실을 자주 가면 아들과 당신을 힘들게 해서 안 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풀썩 주저앉은 나는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모자 승객은 다른 일반 승객들이 다 내리길 기다린 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할머니가 허리춤의 쌈지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5달러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팁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난 괜찮다며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기세셨다. 옆에 있던 아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꼭 잡았다.

동료들은 그날, “왜 굳이 나서서 할머니를 돌보느라 더 힘들게 일했냐며 나를 책망하듯 칭찬했다.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서로를 살뜰히 돌보고 위하는 마음을 어찌 외면한단 말인가. 서로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은 고단함도 잊게 만든다.

나는 잘 몰랐다. 아니 안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사회, 오랜 영국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자신의 권리주장에만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편견만 쌓으며 내 업무의 어려움만 증폭시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만났던 모자 승객은 자꾸 편협해지려는 나를 번쩍 일깨워 준 죽비 같은 인연이었다.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책도 뒤적이고 영화도 찾아보곤 하면서, 정작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는 일엔 게을렀던 게 아닐까.

지난달 광화문에서 열린 갑질격파 시민행동집회에서 나는 조합원의 편지로 발언대에 섰다. 항공기가 날아올라 움직이는 원리를 항공역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난 항공기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항공기 안팎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에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뭄바이로 가는 모자 승객 같은 수많은 죽비 같은 인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의 사연을 나의 세상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다시 꺼내 읽고 감동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 사진제공_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 이야기

 

바다의 삼성뉴텍이 그러면 쓰나

정인열/ <작은책> 기자

 

 

해남지역 해안가부터 노화도, 청산도, 보길도, 신안의 이름 없는 섬까지. 이곳 어촌 지역에는 전복 양식장 같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다. 어민들이 소유한 작은 어선에는 집게가 달린 크레인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어민들은 이 크레인으로 전복 먹이인 다시마를 집어 양식장으로 투하하거나 무거운 가두리를 이동한다.

해남, 완도에 떠 있는 배에 달린 크레인들, 그거 다 뉴텍 거라 보시면 돼요.”

▲ 전복관리기 모형도. 사진제공_뉴텍분회

해남군청 앞 뉴텍 분회(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전남중소사업장연대노조 뉴텍분회) 천막농성장에서 김영식 씨가 말했다. 뉴텍 노동자들은 70일이 넘게 파업 중이다. 김 씨는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뉴텍 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 해남 옥천농공단에 있는 (주)뉴텍 전경. 작은책(정인열)

뉴텍은 1992년 광주정밀로 시작, 2004년 기업을 확장해 뉴텍을 설립하고 2005년 옥천농공단지에 입주했다. 수산물 양식장에 필요한 다목적 인양기와 전복 관리기를 개발해 관련 특허 기술들을 보유했고, 기술·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을 받아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는 유망 중소기업이다.

“‘바다의 삼성이라고 어떤 분들은 말해요.”

111년 만에 유례 없던 폭염이 찾아왔던 올여름, 노동자 7명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파업투쟁을 했다. 조합원은 12명이지만, 이중 병역특례 복무자 5명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체 직원 38명 중 실제 현장노동자는 23~24. 이 중 병역특례자와 외국인노동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표이사의 가족이거나 친인척이라 파업에서 빠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금속 자재를 가공, 조립, 용접하고 도색해 크레인을 완제품으로 만든 후 양식장 어선에 설치하고 A/S를 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왜 이 뜨거운 여름에 파업을 선택했을까. 노조는 노동강도에 비해 낮은 임금, 불합리한 임금체계, 일방적인 상여금 삭감을 이유로 들었다.

12년 차 조립 업무를 하는 김광진 씨(44)가 받는 월급은 식대를 포함해 213만 원. 여기에 매일 1시간씩 발생하는 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하면 244만 원인데, 각종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약 204만 원뿐이다. A/S 업무를 하는 입사 8년 차 김승규 씨(38)가 받는 월급도 실수령액 179만 원으로 적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하는데, 이들은 임금체계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입사 2년 차인 윤정균 씨(47)의 임금은 8년 차 김승규 씨와 10만 원도 차이 나지 않는다. 윤 씨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임금인데, 괜히 연차 높은 동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립식 건물에서 에어컨도 없이 폭염과 싸우며 일해 왔다. 절단, 용접 등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한다. 김광진 씨가 설명한다.

쇠가 녹잖아요. 그게 1600도예요. 앉아서 용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회사는 안전 장비가 없어요. 그냥 앞치마예요. 용접, 그라인더(조립) 해 보면 사람이 인이 배기잖아요. 그라인더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그 다음 날 손이 덜덜덜 떨려요. 육체적 노동이 사무직의 10배는 더 될걸요? 용접도 마찬가지고, 선반(금속 가공)은 엄청 정밀하게 쇠를 깎는데 100분의 1콤마까지 맞춰야 하는 작업을 해요. 집중력과 정밀함을 요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A/S 업무를 하는 김승규 씨는 아침 회의 후 830분에 고객이 있는 섬으로 출발한다. 그는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운전한다. 1건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다.

노화도에서만 하루 4, 5건이에요. 일주일에 4번은 점심밥을 못 먹어요. 1건이라도 더 하는 게 점심밥 먹는 것보다 나아요. 한여름에 기관방(엔진룸) 들어가서 허리도 못 펴고 작업을 하는데 쇳덩어리에 몸이 닿으면 살이 익는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거예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김승규 씨가 전무이사를 찾아가 업무량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고 호소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야근도 안 하면서 돈이 적다고 하면 쓰나?’면서 야근을 하라는 식이었어요. 땀 흘려 일하고 회사 들어왔는데 그 상태에서 야근을 어떻게 해요? 절대 못해요.”

사실상 임금이 동결되어 온 상황에서 2017년 추석부터 상여금이 줄었다. 노동자들은 사측으로부터 사전 고지나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상여금 200퍼센트를 설과 추석, 여름휴가 세 번에 나누어 받았는데, 추석에 70퍼센트 받던 상여금이 50퍼센트만 지급됐다. 경영상의 이유였다는 걸 안 것은 쟁의가 벌어지자 사측이 내놓은 자료를 접한 뒤였다. 뉴텍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출 213798만 원에서 709983만 원으로, 영업이익은 5262만 원에서 67281만 원으로 4년 연속 성장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201712, 노동자들은 일방적 상여금 삭감과 임금 문제에 대해 회사에 어떤 방식으로 요청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전에도 직원 대표로 일부 노동자들이 수차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 불만이 많이 쌓인 터였다.

“‘그냥 노조로 갑시다했어요.”

그리고 지난 124,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는 임금단체협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설 상여금을 20퍼센트만 지급했다. 실무 교섭에서 노조는 상여금 400퍼센트 지급을 제시했으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을 받아들여 임금인상도 보류하고 상여금도 4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기존 수준으로 양보했다. , 일방적 상여금 삭감을 막기 위해 상여금 200퍼센트 지급을 문서에 명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지금까지 준 것은 상여금이 아니라 성과급이었다고 주장하며 문서화를 거부했다. 성과급은 회사 임의대로 주는 비정기적인 돈이다. 뉴텍이 취업 사이트에 올린 입사 공고를 보면 성과급이 아닌 상여금 200퍼센트로 명시되어 있다.

▲ 온라인 구인구직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뉴텍 구인 공고.


봉투에 현금으로 받았어요. 우리는 입사할 때부터 10년을 200퍼센트로 받았는데. 노동청에 임금 체불 진정을 넣었지만 근거 자료가 없어서 하루아침에 성과급이라고 판단이 났죠.”

꿈쩍도 않는 사측의 태도에 교섭은 결렬됐고 결국 지난 64일 노조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이 있는 옥천농공단지에서 농성하다 사태가 길어지자 지자체가 나서서 중재할 것을 요구하며 지난 86일부터는 해남군청 앞에도 천막농성장을 설치했다.

▲ 해남군청 앞 뉴텍분회 천막 농성장. 작은책(정인열)

회사가 해남군수와의 면담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해남 지역사회는 뉴텍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뉴텍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대책위를 꾸렸고 뉴텍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응원에 나섰다. 해남 전복협회장을 비롯해 한국수산업경영인 화산지회, 송호리·갈두리·화산면·현산면·송지면 어촌계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이들은 직접 회사로 가서 항의도 했다.

고객분들이 너희들 대변해서 말할란다하시면서 회사로 가서 기계가 좋아서 쓴 게 아니라 직원들이 좋아서, 직원들이 잘해서 이 기계를 쓴 거다라고 해 주셨어요.”

응원해 주는 시민들을 보면서 뉴텍 노동자들은 크게 힘을 얻는다. 이번 파업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알았다. 상여금마저 성과급이라고 주장하고 삭감한 뉴텍을 상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파업뿐이었다

▲ 추성화,김영식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김승규,윤정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8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이마리오 감독의 <더블랙>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영화 <더블랙> 스틸컷. 


<더블랙>이 드디어 개봉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3월 말이었습니다. 영화에 반한 저는 <작은책>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내내 개봉일을 기다려 왔습니다. 영화 보던 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자 이마리오 감독이 영화가 곧 개봉할 거라고 했거든요. 그동안 저는 매달 마감 무렵이면 감독에게 개봉일을 묻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마냥 흐르고 기약없이 미뤄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긴 걱정을 하던 중에 8월말 개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소개글을 쓰게 되어서 기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즐겁게 볼 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영화는 흑백 재연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선한 눈매의 한 남자가 서울역 고가도로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손에서 켜지는 라이터. 라이터에 불이 켜지는 순간 빨간 불꽃이 켜지며 화면은 컬러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는 그 남자가 특검 수사를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 이남종 열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 활동을 접고 강릉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마리오 감독의 마음에 이 사건은 깊은 상흔을 남깁니다. 언론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이의 기억에서 그의 죽음은 지워져 갔지만 이마리오 감독은 끝내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우리는 이제 4년 만에 그의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마리오 감독에게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나이도 같고 데뷔년도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저야 생활고에 치여 아르바이트와 교육에 전념하느라 영화를 못 만들고 있지만 이마리오감독은 강릉에서 미디어 활동가로, 후배 감독들의 프로듀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제가 그의 행보에서 감동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상업적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독립영화는 공적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의 독립영화 제작 지원 면접 심사장에서 이마리오 감독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메멘토 모리라는 가제를 달고 제작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날 이마리오 감독은 자기 영화가 아닌 후배들 영화의 프로듀서로 면접을 보러 왔더군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가는, 갓 영화를 시작하는, 어쩌면 제자였다가 이제는 동료가 된 후배 감독들을 위해 이마리오 감독은 성심성의껏 면접을 보고 강릉으로 돌아갔습니다. 마흔에서 쉰이 되어 가는 나이. 원치 않아도 중견이라 분류되고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기에 후배들의 출발을 위해 자신에게 있는 가능성을 과감히 버리는 그 모습에서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그리고 2018, 동갑이자 데뷔 동기인 이마리오 감독의 이 신작을 저는 감격해 가며 만났습니다. 빼어난 영상미와 꽉 짜인 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다섯 개의 챕터, 그러니까 오피스텔 607’, ‘디지털포렌식’, ‘검찰특별수사팀’, ‘더블랙’, ‘이남종이라는 소제목 아래 국정원 댓글사건부터 촛불항쟁까지를 일목요연하게 펼쳐내는 유려한 이야기 솜씨에 또 반하게 됩니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화면, 자막 하나하나마다 공들인 흔적들을 보다 보면 그 꼼꼼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김 아무개 오피스텔 앞의 생생했던 현장 상황과 디지털포렌식이 진행되던 경찰서 내 CCTV 화면, 김 아무개의 휴대전화에 전송되던 국정원 심리전단 동료들의 문자 같은 것들은 이마리오 감독의 지난 4년간의 치열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개인적으로는 진실을 대면한 경찰들이 어떻게 할지를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선이 사흘밖에 안 남았기에 댓글사건의 수사 결과가 대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은 경찰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방금 찾아낸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결국 그렇게 사건은 무마되고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지요. 출구조사가 발표되던 순간, 광화문에 모여 있던 관중들은 퀭한 표정으로 침묵합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을 몸서리치며 떠올리게 해줍니다.

제목 더블랙은 블랙요원을 의미합니다. 블랙요원이란 정보기관 소속 요원 중 신분을 밝히거나 내세우지 않고 은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스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세계평화나 적국의 정보 수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더블랙>의 스파이들은 댓글 다는 것이 일입니다. 오피스텔 607호에 거주하던 블랙요원 김 아무개의 행보에서부터 경찰과 검찰 수뇌부의 은폐 노력까지를 치밀하게 담아 내던 영화는 갑자기 재연배우의 입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촛불이 그 이남종이라는 분하고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이마리오 감독이 고 이남종 님의 유서를 읽습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나 체감되는 공포와 결핍을 제가 가져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다큐멘터리 감독은 영매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의 주인공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나의 주인공이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이 죽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나는 나의 입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들려줍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음이 되어 그분의 말을 대신 전해 주는 감독의 목소리는 그래서 특별하고 깊습니다. 최근 기무사 쿠데타에 대한 문건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시간을 거쳐 왔는지를 새삼 압니다.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하지만 사실 134일의 촛불항쟁동안 우리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지막 유언은 약간의 시차를 두긴 했지만 뒤늦게 실현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두려움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촛불로 부패한 정권을 몰아냈기에 공포정치를 끝낼 수 있었고 비로소 우리들은 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블랙>8월말에 개봉합니다. 기억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세요. (문의: 이상욱PD 010-5364-9885) 

※ 이 글이 쓰여진 시점에는 8월말 개봉예정이었으나 이마리오 감독은 8월 28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개봉 시기를 9월 중순으로 밝혔습니다. (편집자 주)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9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

 

오늘만 사는 남자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이번 호에 준비한 영화는 광복절에 개봉한 <카운터스>입니다. 1년 전 DMZ 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반가운 개봉 소식에 이렇게 얼른 글을 씁니다. 영화제 영화는 소수만 즐길 수 있는데 개봉영화는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볼 수 있으니까요.

▲ 영화 <카운터스> 특별 포스터.


<카운터스>의 주인공 다카하시는 전직 야쿠자입니다. 단골 식당의 주인이 혐오시위 때문에 눈물 흘리는 것을 보고 혐오주의자들을 혼내 주기 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는데요, 혐오시위대와 폭력도 불사하며 맞장을 뜨는 다카하시와 그 일행들의 행동은 시민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지만 거리엔 예상치 못한 평화가 찾아옵니다.

<카운터스>에 등장하는 혐오세력은 일본의 대표적인 혐한 단체인 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이하 재특회)’입니다. <카운터스>의 개봉일을 광복절로 잡은 이유에는 재특회도 한몫 했을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만든 이일화 감독은 전작 <울보 권투부>에서도 도쿄 조선학교 권투부원들을 주인공으로 재일 한국인의 처지를 생생하게 다룬 적이 있습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재특회 시위대가 죽여라 조센징을 외치며 등장하는데 그 장면에서부터 일단 화가 나더군요. 관광객으로 보이는 중국 여성들을 밀어내고 노인을 길바닥에 쓰러뜨리는 모습에서도 화가 났지만 재일 한국인들에 대한 혐오행동에는 마음 더 깊은 곳에서 불이 올라오는 것 같더라구요. 민족주의가 유전자 안에 각인되어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래서 오사카 코리아타운 앞에 서서 춍코(한국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들이 너무 밉다며, 남경대학살이 아니라 코리아타운 대학살을 실행할 거다라고 외치는 여중생의 모습이 너무 밉습니다. 미운 마음이 너무 강해져서 만약 현장에 같이 있었다면 저도 욕해 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 영화 <카운터스> 스틸 이미지.


그래서 다카하시의 활동은 저 같은 관객에게는 일종의 대리만족을 줍니다. 영화 제목 카운터스SNS를 통해 자발적으로 모인 일본 시민들의 모임을 의미하는데 카운터스회원들은 혐한 시위 반대 서명운동부터 재특회와의 물리적 충돌까지 각자 자기만의 다양한 방식으로 반혐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서명 부대’, ‘낙서 지우기 부대’, ‘플래카드 부대카운터스의 여러 부대 중에서 다카하시가 속해 있는 부대는 혐한시위를 육체적으로 봉쇄하는 무력 제압 부대오토코구미입니다. 오토코구미 대원들은 재특회의 혐오발언들을 그대로 돌려주기 위해 진지한 자세로 욕설을 연마하고, 재특회 시위대 앞에 무작정 드러누워 도로를 점거합니다. 시위 허가증을 가지고 있는 재특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엉터리 할리우드 액션을 구사해서 경찰서로 끌고 가거나 혐한시위가 예정된 장소에 잠복했다가 시위 참가자를 발견하면 용 문신을 보여 주며 설득하기도 합니다.

카운터스의 창단 멤버인 노마 선생은 첫 만남에서 다카하시를 경계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다카하시 또한 자신은 나쁜 사람이었다고, 나쁜 일을 많이 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합니다. 영화 속에서 재일 한국인 3세 신순옥 님은 좌익 혹은 리버럴운동은 맑고, 정의롭고, 아름다운좋은 사람이어야만 했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게 일본만의 상황은 아니니 노마 선생의 경계심이 당연히 이해가 되지요. 그런데 이 좋은 사람들만 하는 운동에 전직 야쿠자였던 다카하시가 동참한 것입니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현장에서 항의한다는 것을 행동 원칙 삼아 더러운 일, 힘든 일은 우리들이 하겠다면서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서는 다카하시는 확실히 특별한 존재입니다. 야쿠자 대원에서 오토코구미 대원으로의 전환은 인생 대역전이라고 할 만큼 큰 변화이지만 다카하시가 내세우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남자로서 혐오는 할 짓이 아니라는 거죠. 재특회에 반대하며, 그러니까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혐오반대운동을 시작했지만 치열한 활동 속에서 다카하시가 지키려는 인권의 영역은 점점 넓어집니다. 아이누(홋카이도 원주민), 일본계 브라질인들과 같은 소수자들,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안심하고 사람들을 만나며 밥을 먹을 수 있는 쉼터를 함께 만들기도 하고, 어느 날은 LGBT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기도 합니다. 혐오시위의 리더 사쿠라이는 다카하시는 쓰레기라는 막말을 서슴지 않지만 이쯤 되면 누가 쓰레기인지는 명확해지지요.

▲ 영화 <카운터스> 스틸 이미지.


주먹만 한 자막이 쾅쾅 박히고, 펑키한 음악이 흥을 돋우며, 무엇보다 상남자 스타일을 고수하는 오토코구미 대원들의 대활약상이 펼쳐지는 <카운터스>는 오락영화로서도 손색이 없습니다. 특히 혐오발언 시위, 미투운동, 난민 문제 등 혐오로 인한 다양한 사회문제가 촉발되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 줄 것입니다.

▲ 영화 <카운터스> 언론 시사회 현장.


영화는 사쿠라이의 입장도 비중 있게 다룹니다. 혐오시위의 리더 사쿠라이는 차별이 인류를 발전시켰다, 타인에게 혐오라고 말한다면 당신도 혐오하고 있는 것이다와 같은 말들을 거침없이 던집니다. 그 어이없고 알쏭달송한 말들 사이에서도 단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각인되는데요,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해를 끼치면서까지 표현의 자유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혐오의 시대입니다. 그 시대를 오늘만 사는 남자로 존재한 다카하시를 만나 보세요. 특별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문의: 필앤플랜 070-4447-6368)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7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에서 온 소식


간호사는 천사로 인증받기 싫습니다

홍슬아/ 경희의료원 간호사

 

 

저는 경희의료원 호흡기, 신장내과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으며 최근에는 안과, 비뇨기과에서 근무한 13년차 간호사로 현재 노동조합에서 근무한 지 2개월이 되었습니다. 10년을 넘게 데이, 이브닝, 나이트라는 불규칙한 생활 패턴을 유지해 왔던지라 교대 근무를 벗어난 지 2개월이 된 지금도 잠이 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교대 근무를 하는 대부분의 간호사가 경미하게 혹은 수면제를 복용해야 할 정도로 심각하게 수면장애를 앓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직종들의 특수성을 제가 다 알지 못하지만 일주일 동안 데이, 이브닝, 나이트라는 3교대 스케줄을 모두 소화해야 하는 직종은 간호사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간호 업무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밤에 환자들이 자면 너네도 좀 잘 수 있지 않니? 밤에는 앉아서 일하니 좀 낫지 않니?”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간호사들은 나이트라는 야간 근무제 때문에 현장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간호사의 나이트 근무는 당직의 개념이 아닙니다. 주간에 이뤄지는 모든 업무가 간호사의 나이트에도 동일하게 이뤄집니다. 나이트 근무 때는 간호사 수를 줄여서 간호사 1인이 보는 환자의 수가 늘어납니다. 한 예로 일부 병동은 야간에 간호사 2명으로 근무를 돌립니다. 그렇게 되면 간호사 1명당 20명 이상의 환자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나이트 근무 동안 간호사들은 시간에 쫓기듯 일을 합니다. 의사 처방 확인, 잘못된 처방들을 걸러서 처방 낸 의사 및 당직의에게 재확인하기, 하루 동안 시행 예정인 검사 및 수술 준비하기, 하루 동안 사용할 수액 준비하기, 경구약 챙기기, 퇴원 예정인 환자 정리하기, 밤에 입원해야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않은 신환(새로운 환자) 받기, 이브닝 때 수술 갔다 리턴 오는 환자 수술 후 처치하기, 어두운 곳에서 작은 불빛만 비추고 수차례 다니는 라운딩, 의사가 병동에 상주하지 않는 야간에 발생하는 CPR(심폐소생술) 등등 대기하는 의미의 당직과는 완전히 다른 형태의 나이트 근무로 심지어 병실 물품 정리와 청소까지 해야 상황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인력을 뺀 채 근무하는 밤번 간호사에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신입 때 새벽 5시가 다가오는 게 두려웠습니다. 5시부터는 병실을 돌며 활력 징후 측정하기, 섭취량·배설량 체크하기, 가래 흡인하기, 무균적 소변검체 받기, 주사 처치, 모든 환자들이 깨면서 파도같이 몰려오는 컴플레인을 해결해야 하는데 5시에 처치를 나가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미처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간호사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저희 병원의 식대는 2500원입니다. 13년간 근무하면서 한 달 동안 식대가 25천 원을 넘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간호사들이 병동에서 나와서부터 밥 먹고 다시 병동에 올라가고 양치까지 걸리는 시간은 20분입니다. 어느 날은 밥을 먹고, 아니 마시고 있는 제게 조무사가 말하더군요. 밥을 씹지도 않고 삼키는 것 같다며 같이 식사를 하면 그 속도에 맞추려다 보니 본인이 체할 것 같다고요.

병동에 아직 해결 못해 밀려 있는 일들과 앞으로 쏟아져 올 신환과 수술 리턴 나올 환자들, 2차 식사 당번을 식사하러 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있는 우리 간호사들은 밥을 편하고 여유롭게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 간호사들은 직장에서 다른 직종에는 보장되어 있는 인간생활의 기본 요소 중 하나인 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이팅게일 선언을 시작으로 다니기 시작한 학교에서 희생정신과 소명 의식을 배우고 현장으로 나왔습니다. 간호사는 당연히 힘들 것이며 아프고 약한 환자들 앞에서는 참아 내라고 배웠습니다. 학교 때 해야 할 공부나 레포트가 남아 있으면 학교에 남아서 하듯이, 일을 다 끝내지 못하면 당연하게 병원에 남아서 일을 하는 거라고 알고, 공짜 노동인 줄도 모르고 공짜 노동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남들처럼 공부해서는 잘 못 따라가겠다 싶으면 예습하듯이, 당연히 일찍 출근해서 일을 미리 시작했습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와도 일을 할 수 있는 사무직과는 다르게 간호사 업무는 인계 전에 환자를 파악하고 오더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소 30~40분 전에서 2시간까지 일찍 와서 일을 합니다.

부서장들 또한 그건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일 못해서 하는 자율적인 업무니 시간 외 수당 신청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일찍 나와서 환자를 파악하는 경우 출근 펀치는 출근 시간 30분 전에 찍으라고까지 요청하는 실정입니다. 병원과 부서장들은 별 보고 출근하고 별 보고 퇴근하는 간호사들에게 공짜 노동을 시키는 것에 너무 익숙하고 당당합니다. 개인이 일을 못해 오버타임을 하는 것이라는 묵시적인 압력과 당연한 인식, 시간 외 근무를 신청하면 시간 내에 근무를 왜 못했는지 이해 못하는 부서장들의 공개적인 또는 비공개적인 압박, 근무 전에도 근무 후에도 이어지는 카톡 업무와 쉬는 날도 상관없이 이어지는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의 워크숍, 친절 교육, 병동 컨퍼런스 참여, 매년마다 QI(의료 질 향상, quality improvement), 논문, CS(고객서비스, customer service) 등을 간호사들에게 제출하도록 부서장과 병원은 강요합니다. QI, 논문, CS, 컨퍼런스는 근무시간에 이루어지는 것들이 아닙니다. 근무 외 시간인 오프 때 간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매년 빠지지 않고 하고 있는 공짜 노동의 결과물들입니다.

공짜 노동과 장시간 노동이 극에 달하는 시기는 바로 의료기관 평가인증 기간입니다. 간호사는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사직을 생각하고 실제로 많은 간호사들이 사직하고 있습니다. 데이 업무를 마친 간호사나 오프번 간호사는 본인의 병동에서 청소를 하는 미화원도 되어야 하고 2명씩 짝을 이룬 사람들끼리 수시로 만나서 인증 내용을 철자 하나 안 틀리고 대답할 있도록 외우거나 서로 질문을 던지고 인증내용을 외우지 않았으면 기한 내에 외우도록 하는 감시자가 되어야 합니다. 간호사가 대답을 못해서 인증 평가에 문제가 생기면 그 간호사는 병원의 대역 죄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의료기관 평가인증은 병원 현장의 간호사에게만 해당되는 인증이며 간호사만 죽이는 제도입니다. 간호사들만 괴롭혀 인증에 통과해서 병원이 득을 얻게 되는, 인증에 뒷짐만 지고 있던 타 직종들에게 그 공이 돌아가는 제도입니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는 간호사들은 일한 만큼 대우도 받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한 채 힘든 교대근무를 하면서 공짜 노동과 장시간의 노동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저는 간호사 업무를 할 때 제가 제일 힘든 줄 알았습니다. 노동조합에 와서 여러 현장의 목소리를 듣다 보니 전국에 있는 모든 간호사들이 얼마나 힘들게 일하고 있는지,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서 그게 열악한지도 모르고 묵묵히 본인들의 주어진 업무를 하느라 몸도 돌보지 않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고, 간호사들의 대변인이 되어 열악한 근무 환경과 처우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바뀌어야 합니다.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간호사들의 교대근무로 인한 업무 과중과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 시급하며, 이는 간호사의 인력 확충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모든 간호사들이 간호사가 된 것을 후회하지 않도록, 간호사가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도록, 간호사를 위한 좋은 제도와 정책이 마련되기를 바랍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8월호

어린이 해방과 평화

 

방정환과 어린이 해방운동

 

이주영/ 어린이문화연대 대표

 

어린이 해방이라는 말은 192351일 제1회 어린이날 선전문에서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어린이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밝혀 놓았다. 1회 때 선언문을 20만 장 만들어서 전국에 배포했고. 19242회 때는 35만 부를 만들어서 배포하였다고 한다. 이렇듯 어린이 해방운동은 1920년대 우리 사회 변혁운동을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 강력하게 등장하였다.

방정환이 어린이날을 만들고, ‘어린이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 널리 퍼지게 했다는 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어린이날어린이라는 말이 지향하고 있는 뜻이 어린이 해방이라는 건 잘 모른다. 1920년대 당시 어린이 해방 운동가들은 어린이라는 말을 젊은이’, ‘늙은이와 평등하게 독립된 인격과 인권을 가진 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만들었다. 곧 당시 어리석고 작은 어른의 물적 소유물이 아니라 당당한 한 사람으로 인권을 가진 민주공화국 시민으로 자리매김하였다.

1920년대 방정환과 김기전을 비롯한 그의 동지들이 지향했던 어린이 운동은 어린이 해방운동이었다. 어린이 해방운동을 펼치기 위해 192251일 오전에 천도교 청년회 중심으로 세계노동자의 날 기념식을 하고, 오후에 천도교 소년회 중심으로 제1회 천도교 어린이날 선언식을 했던 것이다. 19233월에는 천도교 개벽사에서 잡지 <어린이>를 발행하였다. <어린이>는 소년회 회원들은 물론 어린이 해방운동에 나선 어른들까지 함께 만들고 함께 읽는 잡지였다. 192351일에는 소년 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제1회 어린이날 선언을 했다. 곧 천도교 소년회에서 1922년에 제1회 어린이날 선언을 하고, 1년 뒤인 1923년에는 전국 소년회들이 모여서 다시 제1회 어린이날로 선언한 것이다. 이는 천도교에서 시작한 어린이 해방운동을 기독교와 불교 및 각 사회단체와 함께 손을 잡고 펼쳐 나가는 기점이 된다. 이를 기점으로 전국 곳곳에 소년회를 만들어 나가면서 어린이 해방운동을 넓혀 나갔다.


이렇듯 방정환과 그 동지들이 어린이 해방운동에 나선 까닭, 그리고 당시 사회에서 많은 호응을 얻은 까닭은 3·1대혁명, 3·1독립만세운동 때문이었다. 물론 동학과 동학을 잇는 천도교에서는 어린이도 어른과 평등한, 아니 더 소중한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강했다. 3·1독립만세운동 시작과 전개 과정에서 당시 보통학교와 중등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어린 사람들의 참여가 많았다. 우리 역사에서 어린 사람들이 사회변혁 운동에 집단으로 앞에 나선 첫걸음이다.

3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은 선언서 낭독 후에 일경에 자진해서 잡혀갔지만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를 이끈 주인공들은 어른이 아니라 나이 어린 학생들이었다. 유관순 사례에서 보듯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내려간 학생들이 앞장서서 준비한 곳이 많았고, 무엇보다 32일 인천의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주도한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서 보통학교 어린이들이 단체로 만세운동에 앞장섰다.

3·1독립만세운동에는 우리 민족 모든 연령과 계급과 지역을 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는데, 특히 소년소녀들이 앞장서 참여하고 이끌어 나가는 모습을 본 많은 어른들이 감동하였고, 어린이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은 3·1독립만세운동을 통해 민족 역사에서 최초로 민주공화국을 정치체제로 하는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수립하였고, 대한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이렇듯 대한제국이라는 군주제를 버리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제로 바꾼 시민혁명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독립운동가들은 3·1대혁명이라고 불렀다. 이를 기점으로 국외에서는 독립군을 만들어 독립전쟁을 시작했고, 국내에서는 각종 사회운동이 일어났다. 노동운동과 농민운동과 여성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방정환을 중심으로 어린이 해방운동이 크게 일어났던 것이다.

3·1대혁명을 계기로 천도교는 물론 각 종교 단체와 지역 활동가들 사이에서 어린이를 새롭게 보게 되었고, 어른보다 더 앞장 서 나가는 독립된 사람으로 존중하는 사회적 자각이 확장되었으며,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어린이 해방운동이 힘을 받으면서 확산되었다. 그 힘으로 192251일 천교도에서 제1회 어린이날 선언을 하였다. 나아가 어린이 해방운동이 천도교를 넘어서 사회 전체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결성되었고, 조선소년운동협회 이름으로 192351일에 다시 제1회 어린이날 선언을 하게 된 것이다.

어린이 해방운동은 소년회라는 단체를 통해서 전국으로 퍼져 나간다. 당시 소년회는 천도교 소년회, 기독교 소년회, 불교 소년회처럼 종교에 기반을 둔 소년회와 진주 소년회, 화성 소년회, 마산 소년회처럼 지역에 기반을 둔 소년회들이 있었다. 또는 무산자 소년회나 소년 척후군처럼 계급운동이나 무장독립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소년회도 있었다. 당시 신문이나 잡지에 출범이나 활동이 기사로 나온 소년회만도 500여 개에 이른다.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되지 못한 소년회들도 많았을 것이고, 기사로 소개되거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기사로 드러나지 않았던 소년회들이 요즘으로 견주어 보더라도 더 많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소년회 회원은 보통 30~40, 많은 곳은 200~300명까지 되었다. 마산 신화소년회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10세 전후 어린이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고, 지역 어린이 운동가들이 안내자나 후원자를 맡았다. 회는 어린이들이 앞장서 만들고, 자치적으로 운영하였다. 주로 놀이, 체육, 토론, 책 읽기와 글쓰기, 동화 구연과 연극 발표를 비롯한 문화예술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소년회 활동은 어린이들이 사회변혁에 앞장서는 힘으로 작용했다.

앞에서 살짝 짚었듯이 3·1독립만세운동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의미도 크지만 그에 못지않게 고종의 승하로 대한제국이라는 군주제가 끝나고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 독립을 선언한 의미가 더 크다. 이렇듯 군주제를 버리고 민주공화국을 탄생시킨 3·1대혁명에 18세 이하 어린이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어른들보다 앞에 섰다. 당시 어른들을 얼마나 부끄럽게 하고, 천지개벽하는 감동을 느끼게 한 일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이렇게 어린이 혁명으로 태어난 나라다. 그후 순종 장례를 계기로 일으킨 19266·10만세운동, 일본 학생들과 일본 경찰의 횡포에 맞서 시작한 광주학생의거를 일으킨 바탕이 되는 힘은 192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방정환과 그 동지들이 일으킨 어린이 해방운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어린이 해방운동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 겨레 역사가 갖고 있는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방정환의 어린이 해방운동은 좌우익 주도권 쟁탈과 일본제국의 끈질기고 악랄한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37년 제15회 어린이날 기념식을 마지막으로 지하운동으로 숨어들었다. 조선총독부는 소년회를 해체하면서 건아단을 만들어 체제 선전의 도구로 삼았다.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 해방군으로 진주하면서 분단되었고, 6·25전란을 통과하면서 어린이 해방운동가들이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학살당하거나 숙청되면서 거세당했다. 그럼에도 18세 이하 어린이들이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에 항거한 4·19혁명에 앞장선 것이다. 이렇듯 우리 겨레 역사에서 중요한 사회변혁의 분기점이 되는 3·1혁명과 4·19혁명은 18세 이하 어린이들이 앞장선 어린이 혁명이었다.

그런데 5·16군사반란 이후 어린이라는 말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덜 자라고 어리석어서 어른이 될 준비에만 매진해야 하는, 곧 어른이 되기 전에는 모든 인격과 인권을 유보해야 하는 어른들의 소유물로 다시 퇴화되었다. 이렇듯 1920년대 방정환과 어린이 해방운동 정신을 퇴화시키는 작업은 해방 후 독재자들이 우리 사회를 장악하면서 빠르게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단적인 사례가 어린이날 선언문이다. 1960년대 초까지 어린이날이면 이 선언문을 낭독하였는데, 이제는 어린이날 행사 때 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제 대한민국은 다시 어린이 해방운동을 불러내야 한다. 201610월부터 시작한 촛불혁명이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어린이들을 어른에 속한 미숙하고 어리석은 물적 자원으로 보고, 억압하고 착취하는 사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 길은 100여 년 전 방정환과 그 동지들이 밝혀 준 어린이 해방운동을 다시 이 시대에 불러내고, 어린이 그들이 한 사람의 온전한 민주시민으로 스스로 자라날 수 있는 사회를 창조하는 일이다.

인류 역사를 해방의 역사로 본다면 근현대사는 인류가 해방 범위와 수준을 높이기 위한 투쟁사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문예부흥은 인간 해방운동의 시작이고, 18세기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은 시민 해방의 시작이고, 19세기 노동자 투쟁은 계급해방의 시작이고, 20세기 성평등 운동은 여성해방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 해방, 시민 해방, 노동자 해방, 여성해방 다음으로 인류가 나갈 길은 세대 혁명, 곧 어린이 해방이다. 어린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8월호

살아온 이야기(2)


바닥을 쳤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얼떨결에 결혼이란 걸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나는 어떤 남자한테 머리채를 휘어잡혔습니다.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튼튼한 줄을 그때 처음 알았네요. 머리채만 붙들리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집 안에서 집 밖으로 하릴없이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발로 밟히고, 차이고, 주먹으로 얼골(‘얼굴의 방언(충북))이며 눈탱이며 얻어터졌습니다. 쌍년, 개 같은 년, 아니 소 같은 년, 죽일 년, 더러운 년, 아무한테나 다리를 쩍쩍 벌리는 년이라는 소리들을 같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년들이 있다니요! 그 모든 년이 그날 밤엔 오로지 나였습니다.

둘레에 있는 건 뭐든 집어서 내리찍는 통에 옆구리며 팔다리며 온몸이 널브러졌습니다. 맞은 자리가 너무 아프고, 골통이 흔들려서 눈앞이 흔들리고, 눈물 콧물 다 쏟는 가운데, 울고불고 하는 입이 다물어질 틈이 없어 침도 질질 흘립니다. 짐승처럼 완력을 쓰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같이 짐승처럼 생존본능이 입니다. 그래서 싹싹 빌게 되지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뭐를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싹싹 빕니다. 그러면 한 대쯤 덜 맞지 않을까?

그러다 이번엔 아예 문 밖에 내몰려서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그저 끙끙하며 벌러덩 누웠습니다. 한참을 버려져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갓난쟁이 애기가 집 안에 있으니 나만 혼자 어디 갈 수도 없습니다. 옆집 남자가 난닝구만 입고 담배를 피고 있다가 후다닥 들어가 버립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다시 머리채를 잡혀서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그 남자는 이번에는 내가 자기를 함정에 몰아넣었다고, 자기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부엌에서 칼을 찾아와 내 가슴팍에 들이대더니 죽여 버리겠다 하다가, 아니다, 네가 나를 죽여라, 내가 당한 거니까 네가 끝내라 합니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죽도록 얻어터진 뒤였는데도, 나는 어디서 무슨 힘이 났는지, 내 손에 억지로 쥐어진 칼자루를 뿌리치고 맨발로 도망쳤습니다. 그길로 근처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산발이 된 머리채와 울퉁불퉁 피멍이 든 얼골, 신발도 못 챙겨 신고 나온 내 행색을 보더니 경찰들이 무슨 일인지는 따져 묻지도 않고 그저 누가 이랬어요?” 합니다.

그런데 밤새 나를 패던 그 남자가 내 신발 두 짝을 들고서 경찰서에 들어섭니다. 그러고는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 왜 그래, 신발도 안 신고. 얼른 신발 신어.” 하고 바닥에 가지런히 신발을 내려놓습니다. 나도, 경찰들도 얼골이 하얘집니다. 저 사람이 밤새 나를 팬 그 남자라니. 짧은 침묵을 깨고 경찰이 묻습니다. “아저씨가 이랬어요? 아저씨가 이 아줌마 때렸네.” 그러고는 나더러 이 아저씨 누구예요? 남편이지요? 입건할 겁니까?” 합니다.

입건할 거냐고 묻는 소리에 나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내 상식 창고를 가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부실한 상식 창고에서는 좀처럼 뭐가 안 나옵니다. ‘입건이라는 말뜻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입건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가 없는 잠깐 사이에 애기를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더 큰일이니까 내가 여기서 입건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입건은 모르겠고, 그냥 이 사람이 더 못 날뛰도록 잠깐만 붙들어 주세요. 집에 애기가 있어요. 얼른 가서 괜찮은지 봐야 돼요.”

내가 가장 믿었던, 같이 살기로 결정한 그 남자가 죽도록 나를 패던 그 밤, 상식이 없는 나는 저 깊은 곳에서 속절없이 또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 정도면 바닥을 친 거겠지? 이게 인생 가장 밑바닥이겠지? 도대체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빠는 보일러 기술자였는데, 말이 기술자이지 보일러를 놓는 노가다꾼이었습니다. 맨몸으로 고향을 탈출한 아빠는 배운 것도, 변변한 기술도 없어서 데모도를 하며 공사판을 떠돌다 부산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엄마는 시골 깡촌 없는 살림에도 쌀밥 아니면 곡기 먹을 생각을 안 해서 외할아버지가 자기 몫으로 차려진 고봉밥을 부러 남겨 챙겨 준 귀한 딸이었습니다. 오로지 키와 피부만 보고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귤 하나를 못 살 형편이라서 길바닥에서 귤껍질을 주워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인생의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도 제대로 추스르기 전에 찾아온 다른 인생 때문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식으로 내몰리는 결혼이 바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이 아빠가 가장 좋은 육아 파트너가 돼 줄 거라 믿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그 남자가 역류성식도염에 걸렸을 때, 나는 이게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삭에 퉁퉁 부은 몸으로, 역류성식도염의 고통을 이겨 내느라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는 그 남자를 안마해 주다가, 저린 발을 번갈아 디디며 , 이건가 보다, 바닥했습니다.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밥을 끊고, 음식을 끊고, 의사가 처방한 약도 가려 먹느라 한없이 야위어 가는 그 남자에게 나는 시간을 칼같이 대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을 해 먹였습니다. 한 팔에는 혹시 울까 봐 아기를 안고, 한 팔로는 죽이 눌지 않게 저으면서 주걱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드러난 냄비 바닥을 보며 저 바닥이 내 바닥이구나했습니다.

애 낳고 몸 푸는 동안, 똥에 미역이 그대로 나온다고, 미역국도 못 먹겠다고 해서 나도 미역국을 접고 같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 식단에 동참했습니다. 엄마가 남해에서 공수해 온 짙고 토실토실한 미역이 베란다에 내몰려 바싹 졸아가고 있는 걸 보면서 , 저렇게 말라 가는 게 바닥인가 봐했습니다. 너무 예민해서 햇볕이 드리워지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고, 애기가 우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며 애기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14층 아파트에서 집어던지겠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보고 있느라 몸푼 지 한 달 남짓한 내 몸에서 살이 30킬로그램이나 폭삭 빠져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때가 바닥이었을까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눈앞이 뱅글뱅글 돌고 앉아도, 서도, 누워도 어지럽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돌발성난청. 정말 딱 하룻밤 만에 거짓말처럼 오른쪽 귀가 완전히 먹어 버렸던, 이 순간이 바닥이었을까요? 어느새 늙어 버린 엄마아빠의 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한없이 여린 아기와 한없이 아픈 내 몸을 추스르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때, 잘못했다며 빌던 그 남자의 말을 한 번 더 믿어 준 것이 바닥이었을까요?

결혼하고 몇 달 동안, 닥쳐오는 모든 순간은 늘 다음 순간에게 가장 깊은 인생 밑바닥 자리를 내주는 일이 거듭되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슬그머니 화가 났다가, 에이그 가엾다 불쌍하다 이해했다가, 또 하나도 이해 안 되고 슬퍼졌다가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 보냅니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어려운 시간들이 차곡차곡 흘러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인생 가장 밑바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토록 간절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닥을 쳐야, 그제야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추위와 깜깜한 어둠이 가장 길고 짙은 동지가 지나야 점점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 내 인생 저 밑바닥에 닿게 되는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걸 알아야 그 순간이 왔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닥을 힘껏 굴러 벌떡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요.

인생 밑바닥, 그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깊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습니다만, 그 순간은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나한테 기가 막힌 진단법이 있습니다.

밤새 얻어터진 그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나는 한 손에 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그 꼴을 하고 엄마한테 갈 수는 없어서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네 원룸에 기어 들어갔지요. 친구는 출근하고 빈집에 혼자 남아 있는데, 문득 기다란 전신거울 속에서 내 얼골이 보였습니다. 그 얼골은 눈에 핏줄이 서고,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올라 울퉁불퉁했습니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못생긴 얼골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 있을 때! 바로 그때가 바닥을 친 순간입니다. 나는 부어올라 앙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흐흐흐흐웃음이 새어 나가도록 한참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섰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넘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쭉쭉 위로만 뻗어 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더 나쁜 일로 만들지 않을 힘이 생겼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7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탐방_ 한국잡월드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다?


어린이·청소년 진로 길잡이 역할 할 한국잡월드,

상시·핵심업무 맡은 체험관 비정규직 강사 직접고용은 외면


정인열/ <작은책> 기자

 

 

죄송해요. 저희는 비정규직이라 명함도 없어요.”

지난 64일 청와대 앞. 이곳에서 피켓 시위 중이던 한국잡월드 직업 체험강사(이하 체험강사)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자 이재희 강사가 던진 말이었다.

한국잡월드(이하 잡월드)2012어린이와 청소년의 건전한 직업관 형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잡월드는 국내외 최대 규모의 종합직업체험관으로, 청소년체험관은 42개 체험실에 66개 직업을, 어린이체험관은 41개 체험실을 갖추고 54개 직업을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 관람객 500만 명을 돌파했는데 이 중 어린이체험관과 청소년체험관 관람객만 472만 명으로, 잡월드의 핵심은 바로 체험관이다.

▲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잡월드 내 어린이체험관 ⓒ작은책(정인열)


그런데 아이들의 체험을 이끄는 강사 275명은 모두 1년마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위탁업체 직원이다. 잡월드가 체험관 운영을 민간기업에 위탁했기 때문이다. 잡월드는 2년마다 업체를 바꾸었고, 이 때문에 체험관 노동자들은 업무는 그대로 하면서 소속 업체만 4차례 바뀌었다. 상시 지속 업무임에도 2년 이상 계약 시에는 해당 위탁업체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현재 이들의 소속은 서울랜드.

“2년 후면 떠날 회사니 명함 요구도 안 하게 됐죠. 진정한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어린이들이 체험강사의 안내에 따라 피자게게 체험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매일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상대로 수업을 하는 체험강사들은 수업 외에도 체험실 기기 점검청소비품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직접 체험관을 관람해 보니 이들이 없다면 체험관 운영은 전면 불가능할 정도로 체험강사에게 의존하는 업무는 95퍼센트 이상으로 보였다.

청소년체험관의 경우 1시간짜리 체험을 하루 5회 진행하는데수업 사이사이 20분간의 준비 및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하루 종일 서서 일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앉아서 쉬고 싶지만 화장실만 겨우 다녀오는 실정이다메이크업숍·화장품 연구소 안미경 강사가 말했다.

수업 마치고 나서 체험실 다시 세팅하고, 다음 수업 10분 전에 스탠바이하고 5분 전에는 학생들 입장을 받으니까 쉬는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니 하지정맥류나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피자가게 체험강사들이 다음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수업 전·후 뒷정리와 준비를 해야하므로 쉬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작은책(정인열)


대부분의 강사들은 한국잡월드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입사 지원을 했다청소년체험단 패션디자인실 이효진 강사는 해외 유명 화장품 브랜드 직원이었다안미경 강사 역시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하고 직업상담 자격을 취득했다각자 자신만의 전문성도 살리면서 공공기관에서 진로 교육을 하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일을 시작했다그런데 잡월드와는 업무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위탁업체가 있었고 업체도 2년마다 바뀌었다가장 크게 실망한 점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임금이었다.

월급명세서를 보고 기가 막혔어요금액이 어이가 없어서요.”

최저임금 수준이었다법정 최저시급보다 100원에서 200원 많았고 최저임금에 맞춰 임금이 올라갔다기본급에 식대 84,000원과 휴일 근무 시 발생하는 약간의 수당이 전부였다복리후생도 없었다체험강사들의 평균 월급은 식대와 휴일 근무(월 4회 기준수당을 포함해도 약 182만 원이마저도 입사 1년차나 6년차나 똑같다반면 잡월드 전체 인력 중 약 13퍼센트를 차지하는 정규직의 평균 월급은 약 456만 원(잡월드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에 보고한 자료).

이렇게 체험강사들이 최저임금에 고용불안 및 소속감도 없는 환경에 처하다 보니 회의감이 들고 의욕도 저하되는 것은 사실이다특히 청소년체험관 수술실 이재희 강사는 낮아지는 자존감을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처음에는 정말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의 좋은 미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했어요진로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도 많이 했고요그런데 직접고용돼서 일하는 형태도 아니고콘텐츠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꾸 자존감이 떨어졌어요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장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면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사라진다고 체험강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내가 왜 힘들게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학생들 보면 다시 잘해 주고 싶고반갑고요반복이죠하하하.”

▲ 어린이체험관 이진형 강사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2017년 7월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정부는 체험강사처럼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 전환을 하도록 했다이 소식을 들은 체험강사들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설립도 포함되어 있었다잡월드는 직접고용 방식을 제외한 채 자회사 설립을 결정했다이를 위해 가이드라인에 따라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의 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를 꾸리고 의결 절차를 밟았다그런데 체험강사들은 실제 내용면에서 당사자를 배제한 형식적인 협의와 의결 절차였다고 주장한다.

“10여 차례 정규직 전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1, 2, 3차 회의에 저희는 끼지도 못했고 자기들끼리 하다가 결정적으로 우리가 필요할 때만 끼워 준 거예요.”

협의회에는 전문가 컨설팅업체로 G경영컨설팅 회사가 들어왔다그리고 올 3월 초 체험강사 단체 교육에 G업체 관계자가 등장해 이런 말을 했다.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어요여러분들 말고도 밖에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정규직 들어오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때문에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 공감 얻으시겠어요?’ 하고 말하는데 굉장히 모멸감을 느꼈어요저 사람이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직접고용은 안 된다고 해우리를 무시하네?”

체험강사들은 직접고용이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잡월드 사측 인사와 전문가 컨설팅 인사들은 수적 우세로 또 다른 간접고용 형태인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기존 외주 용역인 미화주차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자회사 전환 동의서를 받았다이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체험강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되자 모여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서명을 거부하고 4월 1일 노조(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분회)를 설립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어요막다른 길에 몰려서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 해서.”

▲ 6월 4일 청와대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재희 강사와 강선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이후 전체 체험강사 257명 중 153명이 가입했고 강사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잡월드 앞에서 집회와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그리고 휴관하는 월요일에는 관계부처인 고용노동부청와대총리관저고용노동부 성남지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잡월드는 체험강사는 잡월드 직원이 아니라는 공문을 냈다청소년체험관 모터스포츠실 강선경 강사가 말한다.

최근에 노조 설명회 때문에 늦게까지 회사에 남은 적이 있었거든요체험실 입구 대기석에 모여 있었는데 잡월드에서 업무 끝나고 나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거예요이유를 물었더니 우리는 서울랜드 직원이지 잡월드 직원은 아니니까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어요기분 되게 나빴어요.”

2012년 설립부터 지금까지 잡월드의 핵심 업무는 직업체험관이다. 500만 관람객 중 체험강사의 지도를 받지 않은 어린이·청소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꿈한국잡월드에서 찾으세요’ 라며 홍보하는 잡월드는 체험강사들이 쌓아 온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 청소년체험관 이재희 강사와 안미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직접고용이 왜 필요하냐고요내 일이니까책임감과 애정을 갖게 되잖아요이게 잡월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좋은 세상 만들어 줘야죠.”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 줘야 할 건전한 직업관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그렇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잡월드의 일꾼으로 나무랄 데 없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6월호

교실 이야기


참깨반 아이들과 봄비쌤

조은영/ 김해 대진초등학교 교사


우리 학교는 김해시 외곽 진례면에 있습니다. 도시 외곽이라 하면 대개 개발이 되지 않은 한적하고 소박한 시골 마을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크고 작은 창고형 공장, 비닐하우스, 벼농사 논들이 무분별하게 섞여 있는 농공단지 안에 들어앉은 학교입니다. 전교생이 65명입니다. 학교 둘레 비닐하우스와 크고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엄마, 아빠가 많아서 학교에도 다문화가정 어린이가 40퍼센트가 넘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 만나던 첫날 봄비선생님은 아이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반 이름을 칠판에 ㅊㄲ반 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자 대뜸 아이들 입에서 참깨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참깨, 참깨, 참깨반소리 내어 부르고 보니 부르기 좋고, 고소한 맛이 좋고, 앞으로 텃밭 농사를 할 우리 반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반은 참깨반이 되었습니다.

아홉 살 남학생 열 둘, 여학생 다섯, 그리고 150살이라고 소개한 봄비쌤이 함께 만납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직 자기 생각과 하고픈 말이 많고, 친구 사이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날마다 친구랑 다툽니다. 아직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친구랑 다투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어젯밤 술 많이 마시고 들어온 아빠가 걱정되어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린 채 슬프다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가정과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은 아닌 듯합니다. 학교에서 날마다 다투고 울고,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고 용서하는 일을 놀이하듯 밥 먹듯 연습합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하시고, 엄마랑 이혼한 아빠는 평소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일 나가서 전화 통화가 안 되는 성이 문제는 마을 월드마트 아주머니께 전화해서 이것저것 여쭈어 보고 부탁도 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소리 내어 읽기는 대부분 잘하지만 쓰기는 아직 서툴거나 받침이 정확하지 않은 아이가 많습니다.

아홉 살 마음사전이란 책은 감격스럽다에서 흐뭇하다까지 80개 마음 표현을 가나다순으로 소개한 책입니다. ‘좋다, 싫다, 짜증난다란 단순한 말 표현에 머물기 쉬운 아이들에게 날마다 두 낱말씩 익히게 합니다. 그날 배운 낱말은 뜻과 글자를 꼭 익히도록 하는데 감격스럽다걱정스럽다를 익히고 표정, 몸짓 연기도 하고 받아쓰기를 했을 때 일입니다. 패자부활전을 거쳐 모두 200점을 받아 5교시 피구를 했습니다. 돌봄교실을 마치고 집에 가는 성이를 운동장에서 마주쳐 모래에 아까 배운 낱말을 써 보라 했더니 여전히 잘 써서 영원히 200점이다 했더니, 이가 손을 달라 했습니다. 손 내미니 작은 두 손으로 꽉 잡아서 다쳤던 팔이 무척 아플 정도였습니다. 영원히 200점이란 말이 응원이 되고 기쁨이 된 성이도 곧 한글을 뗄 듯합니다.

2 열일곱 명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듯 합니다. 친구들이 발표 지명해 주지 않는다고 슬프다며 뒤 탁자에 나가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 자기가 원하는 팀 이름이 아니라고 운동장 저쪽으로 가 버리는 아이, 화내고 싸우고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사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이, 아직은 아홉 살 인생 어린이들. 그런 아이들 속에서 선생님도 어떨 땐 같이 화내고, 큰 소리로 야단치고 돌아오는 날엔 교사로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읽어 주고 중재해 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교사 안의 에너지가 더 넉넉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2-겨울과 봄>에서 이치코는 말합니다. “뭔가에 실패해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아니 그것보다 인간은 나선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도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내가 그리는 원은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커지게 될 거야.”

선생님도 너덜너덜 지칠 땐 아이들에게 위로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집에 가며 한 명씩 인사 나눌 때 팔을 높이 뻗어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주말이면 어머니 나라 종교의식을 행하는 아이가 있어 그렇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니 베트남식 기도를 해 주고 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손을 부딪치고 맞잡는 힘은 대단합니다. 난개발이라고 불편스런 눈으로 바라본 간판들은 안정적이지 않은 농공단지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현실이고, 어쩌면 그렇게나마 어울려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민낯인지도 모릅니다. 이 속에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조금씩 나아가고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얼굴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 다문화가정 아이인지 크게 구별하기 힘들 만큼 외모도 언어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개 다문화가정의 경우 한국 아버지의 나이가 엄마보다 스무 살 넘게 많거나 장애를 가진 경우가 많고, 동남아 어머니는 주중에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 돌봄이 부족하여 한글을 아직 모르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여 엄마랑 둘이서 사는 아이도 많습니다. 이주여성노동자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삶이 무척 힘들 것임에도 학부모상담 기간에 전화상담 신청을 하고 아이의 친구 관계, 수업 시간 모습 등을 꼼꼼히 물어보고 부탁하는 말은 우리나라 학부모와 다름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종, 국적, 성별, 빈부, 학력 그 어떤 것에서도 차별받지 않지 않고 평등해야 함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삼사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 지내며 태어난 나라, 가정, 성별 등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갖가지 환경에서도 차별받지 않고 골고루 공공의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부풀어 큰 원을 그립니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