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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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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내 일당보다는 더 줘야지

이근제/ 건설노동자

 

○○건설 마트현장으로 일을 나갔다. 나는 일반공이다. 오전에 뿌레카라는 연장으로 콘크리트를 깨어 내고, 오후에는 콘크리트 타설을 하기 위해 거푸집() 작업을 했다. 거푸집 일은 목수들이 하는 일이다. 일을 끝내고 반장이 작업 확인서에 일당을 쓰면서 오늘 고생했다고 우리 소장님이 만 원 더 쓰라고 해서 더 썼어한다. 내 일당은 12~13만 원이다. ‘뿌레카 작업에 목수 일까지 했으니 당연히 내 일당보다는 더 줘야지.’

 거푸집 작업을 하는 건설현장 노동자들 작은책


목수는 기공이라고 해서 17~18만 원 받고, 뿌레카 작업은 힘든 일이라 14~15만 원은 받는다고 들었다. 인력사무소로 오면서 작업 확인서를 봤다. 만 원 더 썼다고 해서 14만 원인 줄 알았더니 13만 원이다. 12만 원을 쓰려고 했다는 말이 아닌가? 기분이 팍 상한다. 나는 관리자가 일일이 시키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다 알아서 척척 해낸다. 그래서 자기가 일을 편하게 하려고 인력사무소에 이근제 보내 주세요요구하기도 하고, 나한테 친구야 내일 우리 현장으로 와사전 예약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우를 해주기는커녕 덜 주려 하다니, 괘씸하기까지 하다.

하루가 지났다. 경운기 엔진을 얹어 만든 1톤 롤러로 땅을 다지는 다짐 일을 시켰다. 돌 머리에서는 사람 힘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기계를 잘 못 다루어 쑤셔 박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고 들었다.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싶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배워 둘 겸 일을 했다. 사고는 내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에는 팔이 아팠다. 반장이 일당을 적으면서 말한다.

“12만 원 쓸게.”

, 12만 원?’

오늘 15만 원짜리야. 그런데 처음 이곳 와이현장에 와서 일했던 사람이 일한 시간이 얼마 안 되었다고 14만 원을 받아가서 그것이 굳어졌지만.”

…….”

작업 확인서를 봤다. 15만 원짜리라는 말까지 했건만 13만 원이다. 어제도 기분 나쁘게 하더니 오늘도……. 내가 착각 속에 빠져 사는지 모르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만난 지 두어 달도 안 됐을 때부터 마트소장이 텍크와이현장에 가서 반장을 하라고 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맨날 우리 소장님을 입에 달고 사는 반장이 소장 돈 벌어 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설에서 반경 300미터가량 되는 곳에 텍크’, ‘’, ‘와이’, ‘에스’, ‘마트이렇게 공장 건물 다섯 동을 짓는데 마트현장은 건설사 이름만 빌려 하는 개인 사업자다.

 경기도 시내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 작은책


기분 나쁘게 한 것이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다. 힘들지 않은 일할 때는 가끔 12만 원으로 써 주었다. 같은 건설사인 텍크와이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13만 원을 받아 오는데 말이다. 이참에 일당 때문에 내 서운했던 감정을 내일은 말해야겠다. 같은 건설사에 일을 나오면서 나만 적게 받으면 기분이 무척 나쁘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게 말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이 깎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가 일을 너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당이 보통 12만 원이니까. 가장 서운하게 생각했던 뿌레카 작업을 하면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인력 소장한테 정확하게 알아봐야겠다. (일에 따라 일당이 대충 정해져 있다.)

아침에 현장을 배정받으면서 소장님한테 물었다.

소장님 뿌레카 작업을 하면 얼마를 받나요?”

큰 거로 하면 보통 14~15만 원 받고, 작은 거는 13~14만 원 받아요.”

나는 작은 것으로 했다. 그렇다면 내 욕심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마트반장이 관리하는 이라는 현장에 가서 바닥 버림 콘크리트를 쳤다. 일한 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 작업은 3시 조금 넘어 끝났다. 반장이 일당을 12만 원을 쓰겠다고 한다. 콘크리트 타설은 17만 원이다. 적어도 13만 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그러라고 하면서 말했다.

어저께 같은 경우 15만 원짜리야.”

, 나도 마음 같아선 맨날 13만 원 써 주고 싶어. 어저께 너 있을 때 소장님이 말했잖아. 사무실에서 잡부 일당을 많이 준다는 말이 나왔다고. 나도 이거(확인서 써 주는 것) 하고 싶지 않아. 소장님이 했으면 좋겠어. …….”

나는 내가 일을 해 주는 만큼 일당을 못 받고 있다는 마음이 자꾸 든다.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려고 하지만 말이다. 반장도 기분 나쁘지 않고, ‘텍크와이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도 깎아 먹지 않게 할 말을 며칠 동안 고민했다. ‘앞으로 나한테 사전 예약 하지도 말고, 인력에도 나를 찍어서 보내 달라는 말도 하지 말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거 같다. 그러면 텍크와이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고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반장도 알아먹을 테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내일은 말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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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통학 셔틀버스 기사 

 

도망치듯 운전하고 싶지 않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침 730, 어느 중학교 등교 시간. 15인승 셔틀버스를 운행하는 백용진 씨(가명)가 여느 때처럼 학생 십여 명을 학교 앞에 막 내려 주었을 때였다. 명찰을 단 사람이 백 씨의 차로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

서울시 교통지도과에서 나온 단속반입니다.”

20155월 서울시는 현행법(여객자동차운수사업법 제81-자가용 자동차의 유상운송 금지)을 근거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다. 백 씨는 잠복해 있던 단속반에 걸려 6개월 운행정지 처분을 받고 100만 원가량의 범칙금을 냈다. 왜 노란 셔틀버스는 불법인가? 또 왜 백 씨는 불법인 것을 알면서도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백 씨의 차량에 동승해 사정을 들어 보았다.

 서울의 한 학원 앞에 정차 중인 셔틀버스들 작은책(정인열)


2015년 도로교통법이 개정되기 이전에는 시설장이 소유한 26인승 이상 차량만 통학버스로 허용됐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영세한 학원이나 어린이집은 좁은 골목을 다닐 수 있는 소형 승합차를 소유한 지입 기사를 필요로 했고, 합법은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시장이 형성됐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2016년 발표한 셔틀버스 기사의 노동실태와 개선방안에 따르면 전국 통학버스가 약 30만 대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하고 있으며, 한국학원총연합회는 그중 약 70퍼센트가 지입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승용차 운전면허만 있으면 당장 시작할 수 있고 노동강도가 높지 않아 장년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셔틀버스 기사의 평균 연령은 60.8.

백 씨도 여기에 뛰어든 사람 중 하나다. 현재 백 씨의 고정 일감은 전국 지점까지 갖춘 A학원이다. 이 일감을 따내기 위해 백 씨는 2005년 차량값 1000만 원에 권리금 300만 원을 주고 중고 승합차를 구입했다. 오후 430분부터 1030분까지 일하고 받는 용역비는 월 170만 원. 여기서 연료비, 보험료, 수리비 등을 빼고 남는 돈은 100만 원 남짓이다.

한 가지 일 가지고는 도저히 생계가 안 돼요. 그래서 땜빵을 계속 찾아서 하는 거죠.”

비고정 일감을 현장에서는 땜빵또는 쪽탕이라고 부르는데, 다른 셔틀버스 기사 역시 사정은 비슷해 두세 가지 쪽탕을 뛴다. 백 씨는 중학교 등교 차량과 유치원, 수학학원 등 세 가지를 더 했다. 아침 7시에 시작해 마지막 운행을 마치고 집에 오면 밤 11시다. 비는 시간에는 주차 단속을 피해 차에서 대기한다.

 주차 단속을 피해 대기 중인 셔틀버스 작은책(정인열)


대기시간을 제외하고 백 씨가 일하는 시간만 계산하면 하루 10~11시간. 토요일 근무까지 해서 버는 돈이 290만 원, 차량 유지비 등으로 약 70만 원을 뺀 순수입은 220만 원이다. 이를 시급으로 계산하니 최저임금 수준인데, 개인사업자로 분류돼 근로기준법 등 노동관계법 적용도 받지 못한다.

우리는 고용보험, 산재보험도 안 돼요. 일 그만두면 퇴직금도 없이 빈손으로 나오는 거예요.”

기사들 중 절반은 불법 소개업체를 통해 일감을 구하는데, 업체는 소개비 명목으로 과다한 금액을 요구한다.

지금 하는 170만 원짜리도 첫 달은 50~60만 원 줬어요. 한 달 월급을 뜯기는 거예요.”

국토교통부는 2013년 청주에서 발생한 유아 통학차량 사망사고를 계기로 2015년 어린이 통학차량 운행 요건을 강화하는 도로교통법을 개정했다. 9인승 이상 소형 자가용 승합차 운행을 허가하되, 13세 미만의 어린이만 운송하고 경광등과 발판 등 안전요건을 갖추고 시설장과 기사가 차량을 공동명의로 소유한 후 관할 경찰서에 신고하는 조건 등이었다. 그러나 이는 현실에 맞지 않는 탁상행정이라고 백 씨는 비판한다.

중학생부터는 여전히 불법이에요. 그런데 학부모들은 셔틀을 요구하고 우리도 그 일을 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요.”

시설장과 차량 지분을 공동소유하게 하는 것도 문제다. 한군데 학원에 전속해 안전을 도모한다는 것인데, 책임은 99퍼센트 기사가 지면서 열 가지나 되는 서류를 준비해 신고해야 하는 등 절차가 복잡하다.

기사가 부담해야 하는 비용도 더 많아졌다. 유상운송 특약에 가입해야 해서 자동차 보험료가 30만 원가량 올랐고, 전체 도색 및 경광등, 발판 같은 안전장치를 설치하느라 200만 원을 썼다. 정부 지원금은 한 푼도 없다. 그러니 쪽탕을 많이 뛰어야 한다. 셔틀 기사들이 불법 통학버스를 계속 운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서울시는 학생들의 안전을 이유로 2015년 대대적인 중고생 셔틀버스 단속에 나섰고 백 씨를 포함해 많은 기사들이 범칙금과 운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제대로 된 정책도 없이 단속만 하니 사력을 다해 도망가다 사고가 나고.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는데 당장 그만두라고 하니 어떻게 살겠어요?”

백 씨는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하소연이라도 해 보려고 동료 기사들과 의논을 했다. 그 자리에는 1987년부터 버스 노동운동을 한 박사훈 씨도 있었다. 박 씨는 민주노총 민주버스본부장에서 물러나고 201210월부터 25인승 셔틀버스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찾아가려면 글귀라도 하나 만들어서 찾아가야 할 거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살 수 있을지를 박사훈 씨에게 써 달라고 부탁했죠.”

박 씨가 준비한 자료를 보고 동료 기사들은 감탄했다. 기사들의 현실을 속속들이 알고 있으면서 정책 대안까지 완벽했던 것이다. 박 씨가 버스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함께 노동조합 설립을 추진하여, 2015427전국셔틀버스노동자연대’(이하 셔틀연대) 결성을 언론에 알리고 행동에 나섰다. 박 씨는 노조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노조의 주요 요구 사항은 전용차량등록제도입과 서울시 통학버스지원센터설치다. ‘전용차량등록제는 어린이에 국한된 수송을 중고생까지 확대하되 등·하원과 통학 업무만 수행토록 하고, 차주 기사를 관할 지자체에 등록해 교통안전교육등을 이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면 차량 운행 및 안전 실태와 기사의 안전교육 이수 여부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어 통학생 교통안전이 강화되고 공동 소유제로 인한 불편도 해소된다고 노조는 밝히고 있다.

통학버스지원센터는 셔틀버스를 필요로 하는 학부모나 시설이 무상으로 이용하는 제도다. 통학버스 지원 조례를 제정해 셔틀버스 사업을 공적인 지자체 사업으로 가져오면 안정적인 일자리와 급여를 보장받게 된다. 또 소개업자들이 중간에서 착취하는 일도 사라지고 영세한 학원과 어린이집, 유치원 등도 안정적인 재정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 셔틀연대 결성 이후 셔틀버스 노동자들은 지속적으로 투쟁했다. 셔틀버스 50여 대가 국회 주변을 도는 시위도 하고, 지난해 121일부터 서울시청 앞에서 천막농성 및 삭발, 19일간 위원장 단식투쟁도 했다. 마침내 지난 321, 서울시와 노조는 관련 조례를 제정하고 올해 안에 통학버스지원센터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2016년 3월 셔틀버스 50여대가 전용차량등록제를 요구하며 국회 주변을 운행했다. ⓒ전국셔틀버스연대노조(홍정순)

 박사훈 전국셔틀버스노조 위원장은 통학버스지원센터 설치를 요구하며 삭발과 19일 동안 단식을 했다. ⓒ전국셔틀버스연대노조


백 씨의 차량에 동승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스름한 저녁이 되었다. 백 씨가 한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차를 멈추고 뒷좌석의 학생에게 주의를 주었다.

“OO, 여기서 내려서 저 앞에 차 지나가면 길 건너가, 알았지?”

백 씨는 아이가 길을 건너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다음 행선지로 출발했다. 단속반을 피해 도망치듯 운행하던 백 씨, 이제 떳떳하게 아이들 통학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자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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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청년으로 살아가기


강릉으로 힐링하러 온다는 당신에게

진솔아/ 강릉에 살고 있는 청년

 

 

, 힐링하고 싶어. 나 강릉 가도 돼?”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심심치 않게 받는 카톡이다. 인구 천 만이 넘는 메가시티에 살고 있는 친구의 입장에서 내가 살고 있는 강릉은 언제나 심신 치유가 가능한 시골 마을이다. 인구 21만의 도시(20185월 기준) 강릉은 주말이나 연휴엔 관광객들로 넘쳐 나는 곳이 되었다. 이젠 해송을 따라 걸어도 어릴 때 부모님과 한적하게 즐기던 바닷가의 망중한은 없다. 매주 금요일만 되면 도심 안에 자동차가 평소보다 훨씬 늘어나고 연휴라도 있는 달에는 사람에 치여 밖에 나갈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관광객이 늘어나면 지역의 경제적인 수입이 늘어나고, 따라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고용과 창출이 늘어난다? ‘관광을 달고 있는 도시의 위정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밥 먹듯 반복하는 소리이고 지역 소시민들이 의심 없이 믿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강릉에서 내가 사랑하는 곳 중에 하나가 경포호수이다(였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석호이자 바다와 닿아 있는 그곳에 서서 대관령의 준엄한 산맥들을 바라보면 강릉에서 나고 자란 최고의 시인 난설헌과 사임당의 한()이 느껴지는 쓸쓸함이 좋았다. 호수 어디를 걷다가도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해송을 넘어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도 다 지나간 감상이다. 정철이 <관동별곡>에 쓴 경포대가 있는 이곳은 오래도록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문화재와 해안지역의 생태·환경보존을 위한 각종 규제로 묶여 있었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명분하에 올림픽특구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사업자들에게 개발 권한이 쥐어졌다. 각종 인·허가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행정의 폭풍 지원하에 호텔들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결국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그 풍경은 하룻밤에 수십만 원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호수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시야는 주변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공룡 같은 규모의 흉측한 건물로 꽉 막혔다. 속상한 마음. 나는 내가 사랑했던 호수를 그렇게 잃었다.


서울-강릉 114! 강릉에 우후죽순 늘어나는 아파트 개발업자들의 광고에 꼭 들어가는 말이다. “강릉이 올려다보는 매직 스페이스라이프, 쾌속 교통망, 명당의 자연환경!” 어느 아파트 분양 홍보책자에 쓰여 있다. 요즘 강릉에 들어서는 아파트들이 과연 시민을 위한 안정되고 쾌적한 주거공간일까? 아니, 강릉에 지어지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아파트들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세컨드하우스다. 이런 아파트들이 4~5억을 호가해도 금방 계약이 완료된다. 업자들은 계약금 10퍼센트만 내고 가지고 있다가 가격이 올랐을 때 팔아 버려도 앉아서 수백, 수천은 벌 수 있다고 유혹한다. 투기. 말로만 듣던 그 부동산투기의 열풍을 거리의 광고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강릉에서 학자금대출의 빚을 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나와 같은 청년의 입장에서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는 개발이다. 지역 정치인들은 집이 없는 사람들의 안정적인 주거 공급에는 관심이 없고 개발업자들과 골프를 함께 치며 이런 사업들을 구상했을 것이다. 옆 동네 속초 역시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투쟁 산행에 갔다가 봤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파트들. 다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주민등록 인구가 겨우 8만 명 정도 되는 속초 시민들을 위한 행정일까? 속초는 지난겨울 단수까지 겪었다. 가뭄도 가뭄이었겠지만 갑자기 늘어난 객식구들을 감당하기에 벅찼기 때문이리라.

이런 일련의 변화로 나와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반 시민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집값이 오른다. 물가도 오른다. 자주 가는 사랑하는 가게들과 공간을 잃는다. 그래도 자꾸자꾸 개발이 된다. 어릴 때부터 품어 온 추억이 있는 장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탈바꿈한다. 돌아가신 아빠와의 추억이 많은 호수의 풍경을 잃었고 교통체증을 얻었다. 물론, 어떤 가게 자영업자들은 신이 날 것이다. 서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가게들도 자꾸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 새로운 사업을 위해 유입되는 외부 인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강릉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까?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에 가장 많은 것이 관광개발이다. 개발을 통해 가장 많은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정치인들과 민간사업자들이다. 나는 진심으로 강릉이 그만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개발 속에서 지역에서 생겨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기대하는 청년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생기는 일자리는 단기 아르바이트다. 아파트 분양 홍보관 같은 데서 일을 하거나 카페나 식당의 시간제 일자리 또는 리조트 청소 같은 계절적 업무들이 생겨난다. 나 역시 여름방학마다 바닷가의 고급 리조트에서 객실 청소를 했다. 물론, 모두 비정규직이다. 지역을 떠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며 살기엔 불안하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힐링하러 오겠다던 서울 친구들은 불편해한다. “그래도 관광객들이 가서 돈을 많이 쓰면 어쨌거나 지역에 좋은 거 아니야?” 나는 왜 이게 돈을 많이 내고 가니 그만 툴툴거리라는 말로 비꼬아 들릴까. 당신은 돈만 내고 가지 않는다. 쓰레기도 두고 가고, 교통체증도 두고 가고, 고성방가도 두고 간다. 관광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강릉은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경제 훈풍을 타 보겠다고 더 많은 개발 사업들을 구상 중이다. 정동진의 곤돌라 사업, 중국 자본을 유치하겠다는 계획, 강릉의 해안가를 따라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나와 친구들에게는 모두 끔찍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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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5월호

이야기가 있는 들녘


<리틀 포레스트>가 따로 없다

김진회/ 자연농 농부가 되고 싶은 일명 참참

 


홍천에서 맞이한 첫 겨울은 혹독했다. 날도 추웠거니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게다가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다 서울에 있어 얼굴 한번 보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추웠고, 더 외로웠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봄이 오니 거짓말처럼 많은 것이 좋아졌다. 날씨나 환경, 몸의 상태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그저 바깥 날씨가 따뜻해지고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니 몸도 마음도 녹은 느낌이다.

겨우내 집 밖에 나가려 할 때마다 그렇게도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집 앞 슈퍼에 나가는 것도 귀찮았는데, 짝꿍이 냉이 캐 와서 파스타 해 먹잔 얘길 하자 그 길로 저 먼 밭에까지 냉이를 캐러 갔다. 나가자마자 향긋한 봄내음이라는 뻔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냉이는 작았고 캐 본 적이 없어 서툴렀다. 심지어는 비슷하게 생긴 다른 풀은 아닌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소금쟁이 님이 냉이가 많다고 알려 주셨던 그 밭에서 신나게 캐 왔다.

작년 봄에도 난생 처음 먹어 본 것이 여럿이었는데, 올봄에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다. 냉이파스타가 그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머위된장이다. 이건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음식인데, 영화를 보면서도 저게 도대체 뭘까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다. 짝꿍은 그걸 잊지 않고 이미 작년부터 머위가 나는 곳을 잘 봐 두었다고 한다. 드디어 봄을 맞아 그곳을 찾아가 보니 역시나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머윗대와 잎만 먹지만 일본에서는 머위의 수꽃을 데쳐서 된장에다 넣고 볶아 머위된장이란 걸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영화에 보면 머위된장 하나로 밥 세 그릇을 뚝딱 비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쌉싸름한 뒷맛이 입맛을 돋워 줬다. 물론 짝꿍이 만든 머위된장은 영화에 나온 것과는 맛이 다를 거다. 일본의 된장과 우리 된장의 맛도 분명히 다를 것이고 정확한 비율이나 레시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든 것도 인터넷에서 어렵사리 찾은 레시피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머위꽃을 그냥 먹으면 쓴맛이 강한데, 일단 데친 뒤에 물에 오래 담가 두거나 잘 볶아야 쓴맛이 빠진다.

맛있는 머위된장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지난번 뜯은 냇가에는 그때 한 줌 뜯은 것이 전부였다. 머위에 비해 꽃은 별로 많이 피지 않는데, 우린 머위가 더 많은 곳을 몰랐다. 어쩌나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여쭤 보니 이웃 농부님 중 머위농사를 짓는 분이 계셨다. 농사를 워낙 크게 하시는 분이라 올해는 아직 머위밭에 신경을 쓰지 못하셨다는데 물론 머위꽃은 팔지 않으신단다. 위치를 알려 주셔서 찾아가 보니 밭 가득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제 혹여나 머위된장 맛이 궁금하다며 찾아오는 손님들한테도 맛을 보여 줄 수 있게 됐다. 머위꽃도 한철이라 4월 초가 지나면 찾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아쉽지만 딱 요 때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소중해진다.

지난해 맛나게 먹었던 풀들도 다시 만나 어찌나 반가운지 모른다. 노랑꽃 또는 꽃나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겹꽃삼잎국화와 이젠 재배하는 농가도 꽤 있는 눈개승마, 그 밖에도 파드득나물, 부추, 뱀밥, 새로 찾은 친구 원추리까지! 잊고 있던 봄나물 맛을 다시 보니 좋아하던 김치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렇게 온 들에 맛난 것들이 널려 있으니 맨날 봄만 계속되면 좋겠다.

이렇게 영화 같은 날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가을, 겨울에 먹을 것들을 위해 얼른 농사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작년에 물이 잔뜩 고였던 고랑을 정비하고 있는데 깊게 판 고랑들을 다시 메울 흙을 퍼 올 데가 마땅치 않다. 하도 잘못 만들어서 구배를 다시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밭 계획도 좀 바뀌어서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은데 삽자루를 들 때마다 이거 이러다간 올해도 다 못하겠다 싶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이미지


우선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해서 감자를 좀 심었다. 작년에 심어 두었던 마늘도 싹이 나왔다. 심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는데 파란 싹이 뚫고 나오니 참 예쁘기도 하다. 작년에 몇 개 못 따 먹었던 딸기도 절로 더 넓게 퍼졌다. 겨울에 죽은 듯 보이던 딸기 잎들이 저렇게 파릇파릇해 기세 좋게 살아난다는 게 신기하다. 딸기뿐 아니라 파드득나물, 부추 등은 다 매년 다시 심을 필요가 없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번 심어 놓으면 몇 년이나 심는 과정 없이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최대한 이런 풀들을 먹고 사는 쪽으로 삶을 바꾸고 싶다.

통장 잔고 고민이 깊어지던 때 개구리 님 덕에 자연농에도 관심이 있으신 읍내의 한 학원 원장님과 인연이 닿았다.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와 사교육에 문제의식이 있어 그동안 과외나 학원 알바도 하지 않았는데, 농사도 짓고 다른 일도 하면서 짬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이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게 됐는데, 어떻게 하면 비록 학원 수업이나마 단순히 시험에 나올 것들을 외우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이다. 실은 잊어버린 것도 많고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초짜라 학원에 폐나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지만 말이다.

새싹이 돋고 새로운 먹을거리도 먹고 일도 새로 시작하니 자연스레 마음가짐도 새로워진다. 이래서 예부터 그렇게 봄이 왔음을 노래했나 보다. 여기서도 다 피할 수 없는 황사와 미세먼지, 밭마다 잔뜩 쌓아 놓은 퇴비 냄새에 얼굴 찡그릴 때도 있지만 시골에 왔으니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봄을 만끽해야겠다.

▲ 김진회 ⓒ김진회(페이스북에서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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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태경산업


세 명이 조합원인 노조, 큰일합니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환갑을 바라보는 세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검버섯과 깊게 팬 주름, 고단함이 밴 표정으로 그들은 긴 장화와 안전화를 신고 대구 성서공단(성서산업단지)을 다닌다. 이들의 일터인 태경산업()2016년 기준 당기순이익 약 7억 원, 이익잉여금 약 80억 원을 보유한 중소기업으로, 포클레인과 지게차 등 중장비에 들어가는 고무호스를 제조한다.

▲ 대구 성서공단에 있는 고무호스 생산업체 태경산업(주) 작은책(정인열)


  ▲ 조재식 씨와 이병철 씨가 안전화와 고무장화를 신고 성서공단을 걷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젊은 친구들은 한 시간 일하고는 다 집에 가 버립니다. 우리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나 이주노동자들은 힘들어도 참아야 하는 형편이라.”

이병철 씨와 조재식 씨가 작업 내용을 묻는 질문에 이같이 말한다. 이들은 아침 8시부터 저녁 630분까지 종일 서서 일한다(작업 준비를 위해 아침 720분에 출근하지만 회사는 노동시간으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고무호스 제조는 먼저 금속 형틀에 호스를 끼우고 솥에 넣어 150고열로 30분간 가열해 성형을 한다. 이 과정에서 금속 형틀로부터 고무를 분리하기 위해 이형제를 사용하는데, 고무 탈형 후에는 기름기 있는 이형제를 없애기 위해 세척제를 섞은 뜨거운 물에 깨끗이 씻어 내고 건조시켜야 한다. 고무호스 모양도 다양한 데다 기계 한 대에 호스 60~70개를 꽂아서 넣고 빼는 작업이 반복되고, 커다란 플라스틱 박스에 세척한 고무를 넣었다 빼는 작업도 반복된다. 세척파트에서 일하는 이 씨의 말이다.

박스를 하루에 700번 정도 넣었다 뺐다 합니다. 3분 타이머를 맞춰 놔서 끄집어내면 다시 넣고. 그러니까 마디마디 전부 손목 터널증후군이 생겼어요.”

성형파트에서 일하는 조 씨는 오른쪽 손과 팔 전체에 3도와 2도 화상을 입었다.

▲ 고무 성형 작업 중 고온에 화상을 입은 조재식 씨의 손. 작은책(정인열)


고무가 쪄 가지고 단단하니 잘 안 빠집니다. 모양도 구불구불, 형태가 다양해요. 두 사람이 붙어서 와이어() 같은 걸로 빼다 뜨거운 솥에 팔이 다 닿으니 화상 입는 건 일상이에요.”

가장 버티기 힘든 때는 여름이다.

여름에는 실내 온도가 45~50됩니다. 솥을 찌고 뜨거운 물을 사용하니까. 3월 말부터 덥기 시작해서 10월까지는 지옥생활이라고 보면 됩니다. 작업복이 땀으로 젖어서 물이 줄줄줄 떨어지고 몰골은 완전히 쥐새끼가 됩니다.”

냉방기기도 없다. 대형 가마솥 6개에서 나오는 열기를 이겨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형제와 고무가 가열되면서 악취가 발생하고, 뜨거운 물에 세척제와 이형제가 섞일 때도 악취가 난다. 특히 이형제에는 1급 발암물질인 벤젠이 사용되는데, 노동자들은 이 증기를 그대로 들이마시기도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작업환경을 측정하러 왔을 때 노동자들에게 마스크 착용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마스크를 할 수가 없다.

사우나 들어가서 마스크 쓰라고 해 보세요. 숨쉬기가 힘들어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형제를 취급할 때는 실외에서 작업해야 하고 실내에서 작업할 경우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한 국소 배기장치가 필요하다.

냄새도 아주 지독합니다. 환기도 제대로 안 되는데 세척한 물을 한 달, 두 달, 석 달을 계속 쓰니 머리가 아파 죽겠는 거예요. 나 도저히 이거 못 하겠다 하고 고용노동부에 신고를 했습니다.”

회사는 폐수를 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아끼기 위해서 오염수를 재사용했다. 이 씨는 제품 불량도 양심에 걸렸지만 악취 때문에 더 죽을 것 같았다. 하루 10시간을 휴게 시간도 없이 종일 서서 토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해도 월급은 150만 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동료와 불만을 토로하다 사장실로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임금도 적고 이런 환경에서 일하기가 어렵다, 임금 좀 올려 주시오했더니 사장이 해 주겠다 카데요. 그런데 세월만 가고 안 해 주데요. 그래서 , 이거는 아이다생각하고 노동조합에 가입하게 됐습니다.”

조 씨는 2공장에서 일을 했다. 지금은 2공장이 폐쇄됐지만 당시 김동열 대표이사는 2공장 노동자들에게 욕설과 막말을 일삼았다. 김 대표는 설립자인 김동찬 사장의 동생으로 조 씨를 비롯한 장년층 노동자들보다 한참 나이도 어렸다.

“‘어이, 이래 하라켔자나? 뭐 이씨~’ 욕하고. 김 대표 사촌동생도 있었어요. 더 어리니까 저희 아들뻘 정도 됐겠죠. 그 사람도 아이씨, 니 뭐 하는데?’ 이카는 식으로 말을 하고.”

무시당하고 천대받았던 그때의 감정이 떠오르는지 말을 하는 조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리고 속상한 노동자들 5명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다 자연스럽게 노조를 추진하게 됐다.

노조 만들려면 우예되나 찾아봐라, 하는데 노조에 대해 아무도 몰라요. 그냥 하면 되겠지 싶어 가지고 인터넷 사이트 찾아보다 민주노총 성서공단노조로 안내받아 가입을 했어요.”

20142, 생산직 노동자 28명이 노조에 가입을 했고 성서공단노동조합 태경산업현장위원회를 만들어 투쟁 선포식도 했다. 그러나 며칠 뒤 대표이사를 비롯한 관리자들은 조합원들에게 탈퇴할 것을 회유하거나 강요했다. 거의 다 탈퇴하거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전체 노동자 50여 명 중 조재식, 이병철, 박동숙 세 사람만이 노조원으로 남았다. 대표이사와 사장은 노동자들에게 노조원들과는 같이 대화도 술도 하지 말라며 탄압을 했다. 그리고 2017년 생산직 노동자 대부분의 고용계약을 도급업체 두 곳으로 변경했다. 도급업체 소속 노동자들의 업무 내용과 처우는 기존과 같다. 노조는 이에 대해 노조 확산을 차단시키기 위해 도급업체를 들여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회사로부터 은밀한 제안도 받았다고 한다.

대표하고 사장이 그러데요. ‘직원들 돈 다 줄 필요 뭐 있노? 당신들이 힘들게 교섭해서 따 내는데. 그 돈 가지고 너희 서이 나눠 쓰면 안 되나?’ 노조 탈퇴한 사람들한테 섭섭한 마음에 그래 버릴까 하는 심정도 있었지만 또 사람이 막상 그렇게 몬 합니다.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아야지.”

3명밖에 안 되는 노조지만 이들이 이뤄 낸 성과는 결코 적지 않다. 첫째, 토요 근무를 폐기하고 유급 휴일로 바꾼 것, 둘째, 공장 내 설치된 감시용 CCTV 18대 중 6대 폐쇄, 셋째, 4회 상여금 규정 도입 및 임금 인상이다.

▲ 태경산업 및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2017년 9월 CCTV 철거를 요구하며 공장 안에서 시위를 했다. 이후 CCTV 18대 중 6대가 철거되었다. 사진제공_민주노총대구지역본부


명절 때 사장이 기분 좋으면 20만 원 주고, 기분 나쁘면 10만 원 주고. 그러니까 명절 전날 사람들이 사장 눈치만 보고 있었죠. 노조 생기고 나서는 정기 상여금 30만 원씩 4번으로 늘렸어요. 임금 협상해서 기본급도 올리고.”

현장이 개선되자 비조합원들은 노동조합에 우호적인 마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임금도 많이 오르고, CCTV도 그래 많이 있고 할 때 없애 주고 고맙다그리 말해 줄 때 정말 보람을 느낍니다.”

4년 넘게 투쟁해 조금씩 현장을 개선하고 있지만 이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인격적 대우다.

인간 대접은 받고 일해야죠. 전에는 우리 호칭이 !, 어이~!’ 카는 소리였어요. 지금은 ○○○ 씨 이름을 부르죠. 공단 식당 같은 데 가 보면 자기 혼자서 울분 토하는 사람들 꽤 보거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그런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참 안타깝죠.”

▲ 태경산업 노동자 이병철, 박동숙, 조재식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청년보다 육체는 늙었지만 정신은 더 끈질긴 사람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비굴해지지 않는 사람들. 최악의 환경에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야말로 진짜 사람다운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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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


수많은 밤을 지나 닿은 곳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인투 더 나잇> 포스터 갈재민, 2016


저희 동네 대보름 행사에 작은책 식구들이 놀러 오셨어요. 달집태우기가 끝나고 저희 집으로 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에 안건모 대표님이 독립영화에 대한 글쓰기는 할 만한가?” 물어오셨어요. ‘혹시나 필자를 교체할 생각인가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개봉 영화 구하기가 너무 힘이 듭니다라고 말씀드렸어요. 매번 꼴찌 아니면 끝에서 두 번째로 글을 보내는 것에 대한 변명이기도 했고 사실이기도 했어요. 유이분 편집장님이 그럼 콘셉트를 바꿀까요?”라는 의견을 냈지만 저는 힘들더라도 열심히 해 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2017년의 한국 영화산업에 대한 글을 보니 상업영화 제작과 유통에 필요한 자본 조달 상황은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독립·예술영화의 제작·유통은 여전히 어렵다는 문구가 있더라고요. 독립영화들은 극장 잡기도 힘들고 잡았다 하더라도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한 번 상영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개봉 첫 주 주말 관객 수에 따라서 상영 목록에서 금세 사라지기도 합니다. 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데도 독립영화 감독들은 꾸준히 극장 개봉을 추진하고 어렵게 극장을 잡았다가 스르르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관객과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저의 동료들이 있는데 어떻게든 이 소중한 지면에 그 소중한 영화들을 소개하는 것이 저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지면의 자취는 독립영화 감독들의 고군분투의 역사이자 제 동료들에 대한 저의 우정의 연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달 영화는 갈재민 감독의 <인투 더 나잇>입니다.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라 다른 영화가 있었으면 그 영화를 선택했을 겁니다. 하지만 4월호에 실을 수 있는 영화는 이 영화가 유일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는 시네마달 김일권 피디의 선택일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일권 피디가 그동안 푸른영상 작품을 포함해서 수많은 독립영화들을 배급해 왔고 덕분에 블랙리스트에도 올랐는데, 이번 한 번쯤은 나도 김일권 피디의 취향을 이해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도시에 밤이 내리고 로큰롤 밴드의 음악이 흐릅니다. 그렇게 영화 제목이 뜨고 나면 연습하고 술 마시고 연습하고 술 마시는 장면들이 반복됩니다. 솔직히 초반엔 걱정이 앞섰습니다. 나는 로큰롤 음악을 모르는데 이 영화가 로큰롤 마니아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면 나는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영화를 보는데 갑자기 아는 사람이 나왔습니다. 2013KBS 연기대상 남자 신인상을 받았던 배우 한주완이었습니다. 당시 한주완의 수상 소감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해 주었지요.


공공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요즘따라 애쓰고 있는 아버지들이 많이 계십니다. 노동자 최상남을 연기한 배우로서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힘내십시오.”


그가 아버지라고 칭한 사람들은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에 앞장섰던 철도 노동자들이었고 그 전날 저는 그분들을 지지하며 광화문 광장에 다녀왔었거든요. 그 한주완이 배우로 이름을 알리기 전에 음악을 했었다는 것, 그리고 이 영화가 참 오래전부터 촬영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주완은 등장하자마자 리더 차승우를 매료시키더니 5분 만에 퇴장하고 맙니다. 성공한 배우가 되어 바빠져 버렸거든요.


영화에는 수많은 보컬들이 등장합니다. 한주완 이전에 조영빈이 있었고 그 후에는 김세영, 그리고 마지막엔 훈조가 나옵니다. 김세영과 훈조 사이에는 오디션을 보러 오는 또 다른 많은 보컬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의 등장과 퇴장을 보다 보면 영화의 주인공이자 팀의 리더인 차승우의 지치지 않는 열정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장르는 다르지만 같은 창작자의 입장에서 차승우에게 깊이 몰입되더군요.


영화 <인투 더 나잇> 스틸이미지


아무리 친하고 좋은 사람이라도 밴드 같이하면 스트레스를 주고받고, 싫더라구요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니 취향, 니 세계관을 반영하라며 김세영을 다그치는 장면에서는 살짝 숨이 막혔습니다. 처음 차승우는 나랑 비슷한 온도의 사람이라며 김세영에게 환호했었거든요. 형의 페르소나를 하면 되는 거죠?”라는 말을 던지며 생기발랄하게 무대를 휘젓던 김세영은 내가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말을 남기고 갑작스럽게 퇴장해 버립니다. 형의 플로어를 침해하고 싶지 않다는 김세영에게는 침범이 아니라 부딪쳐야 하고 너만의 플로어를 내세워야 한다는 차승우의 요구가 버거웠던 것 같습니다. 보컬 김세영의 결합으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더 모노톤즈는 그렇게 5번의 공연을 끝으로 긴 공백기에 접어듭니다. 보컬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 후 어렵게 보컬을 구했지만 오랜 맏형이었던 베이시스트 박현준이 그만두는 등 더 많은 어려움들이 지나가고 결국 영화는 인투 더 나잇을 연주하는 더 모노톤즈의 모습과 2016년 한국대중음악상 시상 장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더 모노톤즈는 그해 최우수 록 음반 부문 상을 받게 되었거든요. 영화 덕분에 로큰롤에 익숙해져서인지 음악이 귀에 쏙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차승우의 수상 소감에 가슴이 뭉클해지더라구요.


수많은 밤들이 지나갔어요. 적절한 가사나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아서 머리를 쥐어뜯던 밤, 갑자기 멤버가 탈퇴 선언을 해서 속이 썩었던 밤, 녹음실에서 지루했던 수많은 밤들. 그런 밤들이 의미가 있었던 시간들이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아서 정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꿈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닿고 싶은 음악의 세계로 가는 일이 결코 쉽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고 있는 사람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인투 더 나잇>을 보며 성장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차승우는 초반에 보컬들에게 어떻게 발음하고 어떤 몸짓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를 조언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플로어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자라 온 것처럼요.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 기타리스트 차승우와 베이시스트 박현준은 노브레인과 삐삐밴드에서 일찍부터 자신의 기량을 뽐내왔던 유명 아티스트들이고 팬 층도 두껍더라구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검색해 보며 깜짝 놀랐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음악에 문외한인 저에게도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통찰을 던져 준 아주 뜻깊은 영화였습니다. <인투 더 나잇>은 개봉해서 현재 극장 상영중입니다. 독자 여러분들에게 추천합니다. (문의:시네마달 02-337-2135 http://cinemadal.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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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29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창문을 열면 강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립니다.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집 바로 정면에 학교가 있어요. 제 아이들이 나온 초등학교입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과정이고 2년 지나 반이 갈려요. 1, 2학년이 같은 아이들이고 3학년 때 다른 아이들과 다시 섞어 반을 조성합니다. 담임 선생님도 2번 바뀌는 거죠.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 아이였거든요.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들과 같은 학교로 입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씩씩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많이 울고 짜증도 내고 숫기도 없어지고. 어느 날 아이 노트를 보니 낙서를 했더라고요.

죽고 싶다. 엄마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 같다고 했는데, 왜 아이들이 아이처럼 다 같이 놀지 못하나.”

ⒸPixabay

여덟 살짜리 아이 낙서가 이랬어요. 그 낙서를 본 저는 가슴이 백만 근짜리 무게로 짓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 약속을 잡고 낙서를 보여 줬습니다. 선생님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몰랐다니. 참 쉬운 대답입니다. 한 학급이 20명에서 22명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같은 반 아이들이죠. 그런데 모를까요? 외면한 거겠지요. 그동안 아이들은 큰애의 가방을 빼앗고 안경을 빼앗아 냇물에 던지고 침을 뱉고 칭챙총(동양인 비하 용어)이라는 놀림말을 등 뒤에서 불렀는데 담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놀린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그러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부모들 반응도 그랬습니다. 아이가 그런 건데 뭘 그렇게 난리냐고.


하지만 낙서를 본 순간 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시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장은 제게 어머님은 너무 감정적이라며 진정하라고 하데요. 당한 사람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마을에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고 학부모 회의를 요구했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유치원 학부모 회의도 갔습니다. 제발 집에서 다양성에 대해서 교육해 달라고. 독일인도 해외여행을 가면 외국인이 되는 거고 동네에 독일인만 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유치원만 해도 여러 나라 아이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아이가 그런 건데라는 대답을 할 거냐고.

ⒸPixabay


한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아이들은 안경 낀 아이도 브릴레 슐랑에(안경뱀)라고 놀리고 주근깨도 놀리고 뚱뚱한 아이도 놀리지 않냐고. 그건 결코 답이 아닙니다. 안경은 렌즈로 교정이 되고 주근깨도 없앨 수 있고 살도 뺄 수 있지만 동양인 엄마한테서 자신의 선택 없이 태어난 아이를 어떤 방법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세상의 다양함을 배우고 느껴야 차별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제발 집에서 더러운 외국인이라든지 나쁜 외국인이라는 발언부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단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습득해 차별을 배운 거라고요.


시장님과도 면담을 했습니다. 시장은 자신이 그 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했었는데 몰랐다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동양인인 제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동양인이 학교에 입학했고 그제서야 생기기 시작한 문제인데 시장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그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하지만 울고 다니는 제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제 아들이, 저를 보고 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느낄 수도 없었어요. 어찌 됐든 내 아이를 다시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저희 집 가족 구성원은 다 외국인입니다. 보스니아 사람인 남편, 한국인인 저, 그리고 혼혈인 두 아이들. 독일 국적을 갖고 있어도 어차피 외모상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나부터 대항하고 문제 해결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처음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저보고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라고 말한 할머니께 ! 그래? 독일인은 몇 개가 사는데?”라고 대답했죠. 그리고 니 남편이 널 얼마 주고 샀냐?”고 묻는 어떤 남자에게 내가 내 남편을 샀다고, “체류 허가가 필요해서 내가 샀어. 넌 니 부인 얼마 주고 샀니?”라고 물었더니 자기 부인은 독일 여자라고 대답하더군요. 전 시치미를 뚝 떼고 ! 난 독일 남자는 다 부인을 돈 주고 사는 줄 알았네. 우리는 그냥 서로 좋으면 결혼 하는데!”라는 대답을 줬습니다.


그때는 독일에 매매혼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자국인과 결혼이 힘든 남자들이 매매혼을 참 많이 하던 시절이었어요. 카탈로그를 보고 여성을 고른 뒤에 돈을 지불하고 결혼하는 남자들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던 때였습니다. 덕분에 동양인 여성이나 피부색이 검은 여성들은 왠지 팔려 온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그러지는 않네요. 저부터 그런 모멸감을 느끼고 살았는데 아이들까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웠고, 드디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유치원에서 각 나라의 국기와 위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말로 인사말을 써서 벽에 붙이고 다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저는 인사하기를 가르쳤어요. 적어도 예의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서요. 길에서 사람을 보면 구텐 탁!”을 하게 하고 쓰레기가 있으면 줍게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선수범을 보여 주며 길렀습니다. 제가 집에서 제 부모님께 배운 것처럼요. 빈 병에 동전을 모아서 병이 꽉 차면 기부를 하는 습관도 들여 줬습니다. 그 습관은 아이들이 성년이 된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시켰어요. 절대로 타인을 먼저 때리면 안 되지만 공격받았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속에 담은 화도 스스로 풀어 갈 수 있고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우기 때문에 아주 잘한 결정 같습니다. 그렇게 2년을 마을에서 외국인 차별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군요. 이만하면 정말 큰일을 해 놨다! 싶었어요.


몇 년 후에 한국의 방송사에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에 관한 방송 문의가 왔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우리 동네와 주변 학교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와 함께 인터뷰하러 다녔습니다. 시장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우리 동네는 그런 차별 문제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 눈치를 엄청 보셨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맞은편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습니다. 항상 저렇게, 아이들이 아이라는 가장 큰 공통점 하나로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곳에 말간 얼굴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살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공통분모를 가진 나뉨의 단어가 아닌 모두를 어우르는 교집합이길 바랍니다. 옛 생각을 하면서 두드리는 자판이 많이 떨렸습니다. 오래된 일이고 지금은 엄청난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들인데도 어렸을 때 그 기억은 참 많이 아프네요. 글을 쓰는 엄마 손가락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데 아이들 가슴은 그때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도 모나지 않고 예의 바르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커 준 아이들에게 참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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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3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정인열/작은책 기자


▲ 소래역사관 전경 ⓒ작은책(정인열)

어시장으로 유명한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소래포구. 이곳에는 소래 지역 역사를 보존하기 위해 설립한 소래역사관이 있다. 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 이정희 씨(53)와 황운숙 씨(50)를 비롯한 역사관 노동자는 모두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이하 공단) 소속 정규직원이다. 공단은 남동구의 체육 시설, 공공 청사 시설 관리, 공원, 주차 관리, 문화 복지 사업 등을 관리·운영하는 지방 공기업으로 약 170여 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남동구도시관리공단은 비정규직 없는 보기 드문 사업장이다. 무기 계약직이나 하청회사 정규직 같은 가짜 정규직이 아니다. 환경미화원까지 공단 시설 관리직으로 호봉제 및 8급 주임에서 5급 대리까지 근속 승진도 가능한 진짜 정규직원이다.

▲ 소래역사관 안내 직원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다 우리가 파업하고 투쟁해서 일궈 낸 거예요.”

이정희 씨가 당당하게 웃으며 말한다. 이정희 씨는 2011, 황운숙 씨는 2008년부터 공단 노상공영주차장 주차 정산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1년마다 고용 계약을 갱신하는 일용직(비정규직)이었다. 황은숙 씨가 당시 환경을 떠올리며 말했다.

그때는 부스도 휴게실도 아무것도 없었어요. 점심을 그냥 길바닥에서 먹는데 너무 창피했어요. 그래서 아예 안 먹고 일주일을 굶었어요. 비오는 날은 그대로 비 맞고, 추울 때는 바람 맞고 일했죠. 소지품도 둘 곳도 없어서 구두 수선이나 노점상 하는 사람 사귀어서 소지품 맡기고.”

황 씨는 도로 중앙선을 넘어 다니며 목숨의 위험을 느끼면서 오전 10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일했다. 주말에는 특근수당도 지급한다는 말에 한 달에 하루만 쉬고 일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공단은 최저임금에 특근수당도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황 씨가 손에 쥐는 월급은 120만 원이 채 안 됐다.

이 씨는 공단에 들어오기 전 도시가스 검침을 했다. 그 일 역시 임금이 너무 적어서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공단에 입사했다.

소래포구 주차장은 꽃게철이면 주말에 차량 1000여 대가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었다. 횟집에서 술 한잔 걸치며 서너 시간 주차장을 이용하는 손님들도 많아서, 요금을 정산할 때면 반말을 하며 화를 내는 취객들도 상대해야 했다.

▲ 소래포구 노상공영주차장에서 한 노동자가 주차 정산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요금 7, 8천 원 나왔다고 사람을 팰 것처럼 행패 부려요. ‘왜 이렇게 비싸? 아줌마.’ 하고 따지고. 그런 일이 하루에 10건 이상이에요.”

뿐만 아니라 여자 혼자 사나? 그래서 길거리에 돈 벌러 나왔나 보네. 아줌마 시간 있어?’ 같은 성적인 농담을 듣는 것도 예사였다. 노동조합을 통해 환경이 개선된 것은 2012년 파업에서 승리해 정규직이 된 뒤였다. 이 씨가 말했다.

노조가 뭔지 민주노총이 뭔지 하나도 몰랐죠. 그런데 누가 회사에 노동조합이 있으니 가입해도 되고 안 해도 된다고 하더라고요. 막연하게 그냥 우리는 노동자니까, 조합에 가입하면 좋지않을까 해서 입사 동기들과 같이 가입을 했죠.”

노조 지부장 강동배 씨는 남동국민체육센터 소장이었다.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 6시에 출근하는 안내 데스크 여성 직원이 아침 식사를 굶어 안내 데스크에서 빵을 먹었다. 한 이용객이 민원을 넣자 관리부장이 사실 확인서를 서너 차례 쓸 것을 강요했다. 확인서는 징계 또는 인사이동의 근거가 된다. 책임자로서 후배 하나 못 지켜 주는 내 역할에 회의가 들었다며 노조 설립을 결심한 계기를 밝혔다.

그렇게 200910월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가 생겼다. 이듬해 취임한 김현익 당시 이사장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일용직 시설 관리, 환경미화 노동자들과 계약직 스포츠 강사를 해고하고 용역을 쓰려 했다.

김현익 이사장은 우리 필요 없다고, 용역 쓰면 된다고 무시했어요. 그리고 행정직들은 우리를 어이’, ‘아줌마라고 부르고 반말도 했고요. 무시하는 말투며, 태도며. 그런게 제일 속상하더라고요. 우리도 누군가의 딸이고 어머니인데.”

이에 반발해 환경미화, 시설 관리, 스포츠 강사 등 노동자 170여 명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셔틀버스 폐지 철회 등을 요구하며 2012216일 파업에 돌입했다.

전에는 파업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유, 저 빨갱이들 왜 저렇게 길거리에 나와서 난리야?’ 하고 비난했던 이정희 씨는 자신도 똑같이 겪어 보고 나서야 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이 씨는 동료 황운숙, 강명자 씨와 몸짓패 우아해(우리 노동자들의 아름다운 해방을 위하여)’를 결성해 다른 투쟁사업장에 연대도 다니며 노조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57일간의 파업 끝에 노조는 공단으로부터 요구 사항을 대부분 쟁취한다. 특히 비정규직 정규직화는 비노조원까지 포함됐고 내용적인 면에서도 큰 성과를 냈다. 일용직일 때는 일한 시간대로만 임금을 지급해서 경조사가 생겨 휴가를 가면 무급이었고 병가도 마찬가지였다. 황 씨가 말했다.

파업 전에 허리 수술을 했어요. 두 달은 쉬어야 하는데 한 달밖에 못 쉬었어요. 무급인 데다 팀장은 빨리 복귀하라니 잘릴까 봐서 다시 출근했죠.”

▲ 2012년 파업 집회에서 노동가를 부르는 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 사진 제공_남동구도시관리공단지부


정규직이 된 후에는 병가는 물론 경조사 휴가도 유급으로 바뀌고 성과급, 자녀 학자금, 급식비, 교통비 등 복리후생도 정규직과 똑같이 적용됐다. 노상공영주차장 부스도 인별로 생기고 선풍기와 난방기도 공급됐다. 가장 좋아진 점으로는 인격적 대우를 꼽았다.

행정직들이 저희한테 아줌마하며 반말했던 건 싹 들어가고 이제는 주임님하며 예의를 갖춰요. 손님들도 대우가 달라졌어요. ‘정규직 됐다면서요? 거기는 어떻게 하면 들어가요?’ 하고 부러워하기도 해요(웃음).”

공영주차장에서 일하던 이들은 201411월 구청이 안전상의 이유로 소래포구 일부 주차장을 폐쇄하면서 지금의 업무로 변경됐다. 비정규직이었다면 해고됐을 테지만 정규직이고 노조가 있어서 해고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것이 좋아졌지만 아직 이들의 마음을 속상하게 하는 일은 있다. 바로 이들의 투쟁으로 공단 전체 노동자들의 처우가 좋아졌는데도 여전히 공단이 잘해 줘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 가끔씩 속이 끓어오르지만, 이정희 씨와 황운숙 씨는 후회하지 않는다.

눈치 보지 않고 기죽지 않고 회사에 우리 권리 말할 수 있는 거. 그전에는 회사 눈 밖에 날까 봐 부당한 일 있어도 참고만 지냈죠. 살면서 제일 잘한 일이 노조 가입한 거예요.”

▲ 이정희, 황운숙, 강명자 씨는 몸짓패 우아해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사진은 2017년 여름 동광기연 집회 공연 모습. 사진 제공_이정희


관람 시간이 끝나는 오후 5시가 되자 역사관은 한산해졌다. 이들은 사무실 직원과 잠시 담소를 나눴다. 영화 ‘1987’에 관해, 그때는 데모하는 학생들을 빨갱이라고만 생각했다면서. 1987부터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이어진 투쟁이 없었다면 이런 일상이 가능했을까, 상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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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3월호

한일수의 유감천만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한일수/ 두리 한의원 원장,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1월에 임상 에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잡문집을 한 권 냈는데, 그 책은 세상에 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속 출판사 창고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원고가 매우 부족했구나! 자성 대신, 요즘 책 읽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따위 시건방진 탄식을 뱉고 있었다. 낙담은 스스로 증폭한다. 책 선전으로 도배하던 페이스북도 들여다보기 민망하여 문 닫아걸고 말았다. 그렇게 글 쓰는 일로 끈 떨어지고 날개 죽지 부러져 낙담 중인 한모(韓某)에게 작은책 편집장께서 무려 연재 칼럼을 부탁하실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한모의 글쓰기는 그럭저럭 40년을 헤아린다. 비루한 글이지만 스스로 글쟁이란 자각은 하고 있고, 이런저런 지면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다. 상업지도 있었고, 문예지도 있었으며, 종이 신문도 인터넷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할 때보다 <작은책>에 기고하는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다. 기왕에 이미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보여주신 선배 필진에게 필적할 만한 글이 나올까 걱정도 크고, 무엇보다 <작은책> 독자들의 선하고 맑은 얼굴이 두렵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숱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명치께가 뻐근하고 목덜미가 당겨온다.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런 글빚을 지고야 말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을 땐 이실직고가 제일이다. 이미 앞선 두 단락으로 눈치를 채셨겠지만, 한모 글에는 무슨 심오한 의학 이론도 없고, 졸깃한 글맛도 없고, 서권기 문자향 따위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지리 궁상 같은 유감(遺憾)과 살면서 편편이 쏟아지는 유감(有感)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꼭지는 지방에 사는 중늙은이 한의사가 진료실에서 겪고 느낀 다양한 불평불만과 신변잡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어지신 독자께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빌고 또 빈다.


 

2.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7년 현재 한의사 면허 소지자가 25천 명을 넘었음에도, 아직도 한의사라고 자기소개 하면 살짝 묘한 분위기가 있다. 호기심과 무례함이 넘치는 분들은 면전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진맥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맞춰보라는 분도 계시다. 어디가 아픈지 진맥만으로 맞추는 분이 어딘가 계시긴 할 게다. 하지만 우선 내겐 그런 실력이 없고, 맥진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장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환자가 아프다는 곳을 직접 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어떤 동작이 안 되는지 시켜 보고, 그 다음에 진맥을 하면서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 그건 진맥 실력이 형편없는 한모 이야기고, 다른 한의사들은 진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진맥에 대해 말하자면, 양쪽 요골동맥의 맥동으로 대체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큰비가 내린 뒤 강가에 나가보니 시뻘건 황토물이 콸콸 흐른다 치자. 그러면 , 옹백이골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돼지가 여러 마리 떠내려온다면 돼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싸리골에 큰일이 난 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토가 옹백이골에만 있는 건 아니겠고, 돼지 움막 한두 채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황상 아무래도 더 의심이 가는 고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말하는 증상과 진맥으로 짚어낸 장부의 이상이 들어맞으면(이것을 맥중합참 脈證合參이라고 한다. 맥과 증상이 서로 들어맞으면 순증이고 치료도 잘 되지만, 맥과 증상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역증이라 해서 난치인 경우가 많다. 임상에서는 맥을 버리고 증상을 따라야 하거나 그 반대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하기가 쉬워진다. 진맥은 한의학의 소중한 진단법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든 병을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앞에 앉는 초진 환자는 말 한마디 없이 손을 쑥 내민다. 그럼 한모는 열심히 점심 메뉴를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스트레스가 많고 피로가 쌓였군요. 회사 업무가 부담을 많이 주고 있나 봅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입맛도 별로 없으시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블라블라블라.”


진맥 중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환자 진료는 엄밀해야 한다. 의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진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환자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대체 어디가 아픈지 말씀도 하지 않고, 진맥만으로 그걸 맞히라고 하면,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진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다른 건 조금 하니까 말입니다.


 

3. 저도 잘 몰라요


말없이 팔만 쓱 내미는 진맥만큼 한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게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질 감별이다. 체질 의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사상 체질 의학은 동무 이제마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만 전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의사 권도원이 제창한 팔체질 의학도 주목받고 있다. 사상 의학은 한의대에서 가르치고 국가고시에도 출제되며 전문의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깊이 연구되고 있는 게 사실인데, 애석하지만 체질 감별은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쓱 쳐다보면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한의사에 따라 골도법(骨度法)으로 감별하기도 하고, 설문지를 분석하기도 하며, 성격이나 고유한 기운을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든 노력 끝에 체질을 파악하고도 체질별 한약을 써서 증상이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고서야 체질 판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처음 진찰하고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제 체질은 뭐냐고 물으시면 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대 의학이 기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단한 진단 장비와 정밀한 수술 요법이 도입되어 일반인에겐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교해 한의학은 침이나 뜸, 심지어 처방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마을에 한문 좀 읽는 분이 방약합편같은 처방집을 읽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침도 놓고 뜸을 뜨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에선 적각의(赤脚醫)라 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 중에 골라 3년 동안 의학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집중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Pixabay

사상 의학은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에 불과한 신생 의학이다. 10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강점과 남북 전쟁, 산업화 과정 등으로 우리가 이 신생 의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진단법과 처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한마디로 갈 길이 먼 학문이다. 불우하게도 한모는 사상 체질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공자가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의사면 내 체질도 쉽게 판정해 주겠지라는 믿음은 거두시는 게 좋다. 저도 젊어서는 소양인이라고 믿었는데, 나중에야 태음인인 걸 알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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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2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편집자 주 :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57일간의 파업 끝에 이 글을 쓴 송근영 님을 비롯한 비정규직은 완전한 정규직 전환(직접고용 및 직군 설립)을 이끌어 냈고 모두 현장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_^


수영 강사들의 요구

송근영/ 인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국민체육센터 수영 강사


여성 수영 강사로서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처음 수영 강습을 시작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증상들이 몸에 느껴진다. 몸이 자꾸 차가워져 생리통이 점점 심해지고 생리하는 날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지만 템포를 끼고 입수를 한다. 그러고도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짬짬이 화장실에 가서 확인을 한다. 한여름에도 추워서 강습을 끝내고 나가도 에어컨은 틀지 않아도 되고, 피부는 점점 건조해진다. 여름에는 수영장 내 유해 가스가 심해져 집에 가선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눈알이 튀어나오게 기침을 해 댄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장이 바뀌면서 강습 중에 입는 슈트(몸을 덮는 두터운 수영복)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강습할 때 수영복만 입으면 됐지 무슨 슈트까지 입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슈트는 수영 강사의 필수품이다. 우리는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하며 회원들의 자세를 잡아 주기 때문에 활동량이 적다. 수영장의 수온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27~28도 사이로 유지된다. 따라서 활동량이 적은 강사들은 저체온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온을 위해 슈트를 입는다. 슈트는 또한 회원들과의 신체 접촉을 어느 정도 막아 준다. 수영의 특성상 몸에 걸치는 것이 별로 없고, 팔을 휘저으며 하고, 물속에서 이뤄지는 일은 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가끔 불쾌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슈트 예산을 삭감해 버린 것이다.

오후 근무인 나는 어린이 수업을 두 시간 연속으로 하고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두 시간 동안 수업에 들어간다. 수업 중간에 한 시간의 저녁 식사 시간이 있지만 실질적인 휴식 시간을 한 시간으로 보긴 어렵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대충 털고 보면 어느덧 20분이 흘러 있다. 급하게 밥을 먹고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50분이 되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안전 근무를 한 시간 서고, 회원 상담에, 인포메이션 센터 지원에 각자 정해진 부수적인 업무와 수영장 청소 등을 한다. 그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는 이사장은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안전 근무 한 시간 늘어나는 것이 별일이냐 하지만 체감되는 타격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강사들에게는 1인당 일 년에 15일의 연차가 있어 매달 돌아가며 연차를 쓰고 있다. 남자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예비군 훈련 등에 참가해야 한다. 빠진 사람의 안전 근무에 대체해서 근무에 들어가야 하고 강습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미안해 연차를 못 쓰고 있다. 연말이 되면 3일만 연가 보상비가 나오고 나머지 남은 날에 대해서는 보상비가 안 나오니 빨리 연차를 쓰라고 압박이 들어온다.

대우가 좋지 않으니 강사들이 줄질이 퇴사했을 경우엔 어떠했는가. 공단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채용 공고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하는 기간 동안은 퇴직자가 담당했던 수업과 안전 근무를 들어가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다 지나간다. 대타를 많이 뛰는 선생님은 하루에 6시간까지도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안전 근무까지 서다 보면 꼬박 하루를 수영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원 관리와 상담을 위해 불가피하게 퇴근 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안전 근무 때는 단순히 수영장에서 한 시간을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응급 상황을 대처하고 수영장 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민원들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 센터에는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한번은 어르신이 가슴 정도의 높이의 물에서 빠져서 구하러 들어가기도 했다.

2012년부터 규정이 바뀌어 자유 수영 때 안전 근무자가 2명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인원 충원을 요구했으나 이사장은 기존 강사들이 한 시간씩 더 들어가면 되는 걸 쓸데없이 요구한다며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노동의 강도를 높일 수 없는 정당한 이유들을 대고 대직 근무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사장은 우리에게 노동 강도가 높아짐에 따른 건강원의 문제는 말도 안 된다며 입도 못 떼게 한다.

강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런 식이라면 최후통첩을 할 수밖에 없다며 센터로 직접 찾아왔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 줄 것인지 우리가 물어도 단칼에 무시하며 해고 통보를 한다. 실질적인 업무 파악과 실태도 모른 채 수익에 눈이 멀어 거짓말만 일삼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노동 강도를 높일 것을 강요하는 이사장의 경영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파업을 했다.

우리의 요구는, 수익성과 맞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폐지한 회원 셔틀버스를 다시 운영하는 것, 센터 내 환경미화 직원을 직접고용하는 것,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동구 구민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센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수익성과는 무슨 관련이 있으며 왜 그것을 수익성의 논리로 따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간접고용이라는 이유만으로 새해 첫날 출근하여 센터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환경미화원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분들을 직접고용해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떼어먹는 돈 없이 월급을 고스란히 주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라는 것은 임금을 올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대우받으며 일을 하고자 위함이다. 우리는 임금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이사장은 교섭 때마다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파업 전 오고 갔던 말들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하며, 직원들에게 강요하거나 몰래 카메라를 찍은 것도 발뺌한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하여 이사장을 찾아간 회원에게는 여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막말을 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제출한 성명은 진짜 본인 의지로 한 것이냐며 확인 전화를 했고, 노조원들의 집에는 우리가 불법 파업을 하고 있다며 등기 우편물을 보내 가정 내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다른 두 가지 합의 사항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혀 가는데 강사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우리 센터 소장님이 노조를 만들었고,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한 것이 괘씸하기 때문인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구청장이 직접 불러 합의를 보라고 했고, 우리의 요구가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도 우리가 결코 넘봐서는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을 침범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사장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 강사들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사장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점점 수위를 높여 우리의 의지와 요구를 알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승리는 우리의 편이 될 것이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