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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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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인지 집착인지
   김신애/ 가사 노동자


언젠가 어머님 일로 신랑과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시부모님이 서울에 오신 어느 날 저녁. 반찬으로 된장국을 끓여 놓았는데 외출하고 들어오신 시부모님이 동태찌개가 드시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벌써 6시가 가까워져 “내일 끓여 드릴게요” 했는데 싫다고 하시며 지금 끓이라고 하셨다.

주섬주섬 챙겨서 집을 나섰는데 눈물이 흘렀다. 동태를 사다가 다시 저녁을 지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신랑을 마중 나갔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다른 말은 필요없다. 그저 “수고했어” 한마디면 모든 것이 평화로우련만, 이 바보 같은 신랑은 여자 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해 드렸으면 된 거 아니야? 그 정도도 못해? ”

위로받고 싶은 나의 마음에 독침을 꽂는다.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

그렇게 몇마디 주고받는데 어느 순간 스스로 감정이 격해진 신랑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게 말했다.

“너한테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굶더라도 우리 부모님께는 제일 좋은걸루 해 드리고 싶어.”

여기서 너희들은 나와, 아이들 즉 처자식이다.

그 깊었던 절망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저렇게 절절한데, 저토록 눈물겨운데, 그곳에다 한마디 더 하면 한 대 칠 기세다. 단언하건대, 위의 언쟁에서 부모님에 대해 막말하고 큰소리치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그렇게 말싸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터. 남편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는 단, 한마디도.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분들께는 반쯤 닫아 버렸다.

낼모레면 40인 아들인데, 그 아들을 일곱 살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마스크 하고 다녀라, 찬물 절대 먹지 말고 미지근하게 해서 먹어라, 머리 스타일은 이렇게 해라, 옷 색깔 맘에 안 든다, 누가 고른 거냐, 라면은 절대 먹지 말아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해 먹였느냐… …. 이젠 나에게 맡겨도 될 일들을 수시로 체크하시는 어머님. 참 힘들다.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둘 사이의 묘한 감정. 그 사이에서 상처받고 아파했다가 마음을 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홀시어머니도 아니다. 버젓이 아버님도 곁에 계시는데, 왜 그토록 아들에게 집착하는지 그 까닭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제주도 토박이인 시부모님은 내가 결혼을 할 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단다. 첫째, 자신의 아들이 키가 작기 때문에 커야 하고 둘째, 반드시 제주도 여자이어야 하며 셋째, 예수쟁이는 죽 ,어 ,도 싫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쩜 그렇게 세 가지 조건에 딱 들어맞지 않는 며느리감을 구했는지 우리 신랑 재주도 참 용타. 하지만 어떻게 허락을 받아 왔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 어린 거 하나는 맘에 쏙 들었다는 어머님.

첫 대면은 종로의 어느 커피숍이었다고 기억한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어머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으셨다. 첫눈에 탐탁지 않음을 느꼈지만 난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건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허나 돌이켜 보니 철없던 마음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출산을 하고, 장손을 낳았다.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큰아들에게서 얻은 손자이기에 각별하셨으리라,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랬지만… ….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데 손주가 너무나 궁금하신 어머님은 15일 만에 불러들이셨다. 너무나 어렸던 24살의 초보엄마의 막막함을 다시 떠올리니 에효… ….

“찬물에 손 담그면 안 되니, 설거지는 고무장갑 꼭 끼고 해라.”

허걱! 여하튼 이런저런 모든 말씀에 군소리 없이 순종하고 밤에는 어머님 몰래 훌쩍이는 날이 잦아졌다. 그 끔찍한 신랑이 그때는 어린 아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어느 날 어머님이 잔소리하실 때 약간의 눈짓을 내게 보낸 적이 있다. 니가 이해하라는 듯한 눈빛. 어머님 상처받으실까 봐 아무 말 안 하고 보낸 살짝의 눈빛. 그 효자의 맘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 작은 눈짓에 배신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니들 눈에는 나는 보이지 않느냐”며 호통 치신 후 그 길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석 달 동안 우리의 전화도 받지 않으셨다. 결국 뚜렷한 영문도 모르고 나와 신랑은 빌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가 그 눈짓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짐작만 할 뿐 신랑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일까. 어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가 답답했다.

친정은 기독교 집안이다. 어릴 적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결혼 후에도 신랑은 흔쾌히 니가 원하는 것이니 다니라고 전혀 제지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다. 허나, 어머님이 오시면 갈 수가 없다. 신랑이 결혼 허락을 받을 때, 못 다니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미칠 것 같았다. 가고 가지 않고를 떠나서, 이런 조건이 말이 되는가? 일방적으로 어머님께 맞추고, 눈치 보고, 비밀스러워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 한마디도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 못하는 그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결국, 그렇게 깊게 집착하는 어머님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며느리에게 던지시는 인신 공격, ‘뚱뚱하다, 제주도 여자가 아니어서 알뜰하지 못하다, 좋은 대학이 아니다’ 등등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저 내 눈치만을 살피며 나보고만 참으라 했다. 그 깊은 상처는 아직 남아서 날 힘들게 한다. 어느 날, 그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서 내가 진지하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야,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자기한테 미안하지만 당신은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 그는 시인했다. 그리고 오히려 물었다. “그러는 너는 독립했냐?” 하하. 한국의 여자들은 내 부모의 품을 떠나, 호적을 파서, 그놈(?) 하나 믿고 시집을 온다. 과감히 내가 살던 환경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감히 그가 내게, 부모에게서 독립했느냐고 묻는다. 우습다. 우스워 죽겠다.

아들. 내게도 있다. 여덟 살. 그 꼬맹이었던 것이, 성장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 마음은 부쩍 자랐다. 대화를 해 보니 알겠다. 나는 아들과 많은 대화를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친구 문제, 학교 문제, 고민되는 것은 없는지, 학원은 힘들지 않은지. 그렇게 대화가 쌓이니 우리 아이는 생각보다 마음이 깊고 생각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느 날 길을 걸으며 “엄마가, 할머니를 싫어하는 것 같니?” 하고 물었다.

“싫어한다기보다 음… …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아. 외할머니한테는 잘 웃는데, 할머니한테는 잘 안 웃잖아.”

후후. 아이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물었던 것인데, 그랬는데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두렵다. 내가 위에서 열거한 집착. 그 과정을 나도 밟을까 두렵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내 모습에서, 믿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그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큰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나는 그래도 버젓한 직장을 갖고 있었다. 큰아이 때문에 공부도 더 할 수 없었다. 큰아이 때문에, 큰아이 때문에… …. 갑자기 섬뜩해진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기에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나니 허무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걸고 했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이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암담했을 수도 있겠다.

이쯤 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가장 큰 사랑은,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 정신적으로 놓아주는 것이라 한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그 사랑을 나는 베풀 수 있을까.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 할 듯싶다. 또한 자식만을 바라보며 시간 보내지 않도록 뭔가를 배워야 하겠다. 나 스스로를 위해 투자를 해야겠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내 아이들을 온전히 놓아주고, 그저 뒤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려놓는 준비를, 나를 위한 투자를 부지런히 해야 할 듯싶다.

비가 온다. 늦게까지 이불에서 부비대며 깔깔거리는 두 아이의 웃음 속에서, 오늘도 이쪽의 아들, 손주 소식이 궁금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실 시부모님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전화를 할까, 말까… ….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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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대표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지난 6월 10일 촛불 집회가 한창일 때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머리가 하얗고 양복을 반듯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었다. 그이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한겨레 구독, 조중동 박멸’이라고 씌어 있었다. 그이는 표명렬 씨였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본부정훈감을 역임한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군 개혁을 주장하는 별난 예비역 장군이다.

9월 4일 용산역 근처에 있는 평화재향군인회를 찾았다. 현 ‘재향군인회’에 반대해 2005년에 만든 단체인데 표명렬 씨는 이 단체 상임대표다. 현 재향군인회처럼 상투적인 한미동맹 강화와, 북녘을 불신하고 공격의 대상으로 보는 단체가 아닌 자주국방과 평화통일을 위하여 북녘과 대화와 협력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한 민주적인 군대 문화를 정착하는 데 주요 사업 계획을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 군대는 극우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해방 이후 친일파들이 정권을 잡게 된 것이 그 원인이다. 그런 군대에서 장군 출신인 표명렬 씨가 군 개혁을 외치고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또 작전통수권을 되돌려 받자고 주장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 6월 10일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표명렬 씨 고향은 전남 완도. 어릴 때는 정말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회상한다. 초등학교 1학년 때 광복을 맞았고 중학교 들어갈 무렵에 6.25전쟁이 터졌으니 얼마나 어려운 시기를 보냈는지 알 수 있다. 중학교를 겨우 나온 뒤 돈이 없어서 1년 쉬고 머슴살이와 가정교사를 하면서 광주고를 다녔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 18기로 입학했다. 학비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기도 했지만 그곳은 앞으로 우리나라를 이끌고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표명렬 씨는 간부 생도로서 원칙과 정의를 앞세워 한 치 어긋남이 없이 간부 교육을 받았다. 모두들 지독하다고 고개를 흔들 정도였다. 하지만 표명렬 씨는 육군사관학교가 이 나라를 이끄는 단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오히려 우리 국군이 해방 정국의 소용돌이를 거쳐 오면서 친일 세력들에게 장악당해 비뚤어진 군대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울분을 토한다.

“민족 교육을 일부러 안 시킨 거야. 민족의식 하면 빨갱이 소리를 들었으니까. 이승만이 권력 기반이 없으니까 물리적인 폭력의 힘을 가진 경찰과 군대를 자기 사람 만들어야 되겠는데 개처럼 말 잘 들을 놈들, 친일을 한 약점 있는 놈들 살려준 거야. 우리 군대를 일본 군대 출신들이 장악한 거야. 21대 육군참모총장까지 일본 육사 출신이었으니까 그 군대가 제대로 되겠어요?”

표명렬 씨는 맹호부대 소총 부중대장으로 월남전에 다녀온 뒤 뜻한 바가 있어 정훈병과로 옮겼다. 그이를 아끼는 사람들이 말렸지만 우리 군대의 가치관과 정통성을 찾고 군대를 개혁하려는 그이의 뜻을 꺾지는 못했다. 1973년에는 대만 정치심리전학교에 유학을 갔다. 그곳 대만 군대에 있던, 이른바 권력기관에서 파견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겸손하고 사려가 깊고 온유한 성품을 지닌 것을 보고 또 한번 크게 깨달았다.


△ 평화재향군인회 사무실에서 이야기 중인 표명렬 예비역 장군 ⓒ 안건모


군 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87년 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때 월권으로 부대원들에게 정훈 교육을 시키라는 육군본부 보안 부대장에게 “야, 이 새끼야! 육군의 정신교육 책임자는 정훈감인 나야! 너는 보안대 일이나 잘해!” 하면서 싸우기도 했다. 광주항쟁 당시에는 군대가 어떻게 무고한 시민들에게 총을 쏠 수 있느냐고 바른말을 한 죄로 강원도 홍천 골짜기에 있는 부대로 귀양 아닌 귀양살이까지 했다.
표명렬 씨는 1987년 군 생활을 마감했다. 그리고 군 개혁을 위해 평화재향군인회를 만들었다.

“우리가 지향하는 건 첫째, 민족ㆍ민주 군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대, 그래서 스스로 움직이는 군대, 리더쉽을 기르는 군대를 만드는 거예요. 일본은 침략을 위해서, 미국은 석유 때문에 이라크를 침략하는 전쟁을 일으켰지만 우리는 방어를 위한 전쟁이에요. 방어 전쟁 사상을 정립해 놓은 건 재향군인회밖에 없어요.”

이렇게 자신감을 드러내는 표명렬 예비역 장군은, 아직까지 냉전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수구 세력들이 안타깝다. 또 ‘우리 민족이 화해와 평화의 길에 들어서는데 사사건건 발목을 잡으려는 일부 언론들의 훼방이 이제는 제발 그쳤으면’ 하고 바란다.


△ 표명렬(오른쪽) 예비역 장군과 최사묵(왼쪽) 평화재향군인회 공동대표 ⓒ 안건모


표명렬 씨는 우리 국군의 시작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다”하고 잘라 말한다. 또한 육군사관학교의 전신도 ‘화랑의 후예’가 아니라 일제시대 때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라고 주장한다. 광복의 역사를 싸그리 부정하고 건국 60년이라고 우기는 이명박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 듯 표명렬 씨 열변은 끝이 없었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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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1. 26. 17:44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정권이 바뀌었다고 역사도 바꾸려 하나”

부산 부흥고, 역사교과서 교체 압력에 역사교사 등굣길 1인시위


지난 11월 25일 아침, 소식을 듣고 찾아간 곳은 부산 해운대구에 있는 부흥고등학교였다. 조금 일찍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해 기다렸지만 예정된 시각인 7시 30분이 지나도 선생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정문 말고 다른 문이 있나 해서 정문 안으로 들어서니 자그마한 체구에 다정한 미소를 지닌 여선생님 한 분이 ‘정부는 역사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라’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이 학교의 역사교사인 홍혜숙 선생님. 그녀는 근현대사 교과서를 교체하라는 교육청과 교장의 압력에 맞서 어제(24일)부터 학교 정문에서 등굣길 1인시위를 시작했다. 부흥고는 이른바 ‘좌편향’ 내용으로 교육과학기술부의 수정 권고를 받았던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지난 11월 14일 부산교육청 교장단 회의 이후, 그 날로 금성출판사의 근현대사 교과서를 사용하고 있는 부산의 49개 학교에 근현대사 교과서를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로 교체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고 한다. 이 학교에 있는 세 명의 역사 교사 가운데 나머지 두 명은 교장의 압력에 못 이겨 지시를 받아들였지만, 홍 선생님은 ‘정권의 지침에 따라 교육의 중립성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끝까지 거부하다 1인시위까지 마음먹게 됐다고 했다.

필자가 반갑게 알은 체를 하며 다가서니 홍 선생님은 잠시 부끄러운 듯 몸을 돌리다가, 등교하는 학생들이 곁으로 지나가자 다시 당당한 모습을 되찾았다. 필자가 들고 있던 카메라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홍 선생님 바로 앞에 팔짱을 끼고 자리 잡은 학생부장 선생님 때문이었는지, 학생들은 홍 선생님 쪽을 오래 쳐다보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 곁을 스쳐 지나가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홍 선생님은 종종걸음으로 학생들 앞으로 가서 “야들아, 이거 읽고 가라.” 하고 외치며 학생들의 눈길을 불러 세웠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몇 장 담고 있을 때, 이 학교 사회교사인 김동일 선생님과 국어교사인 안정옥 선생님이 어느새 홍 선생님의 양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8시를 지나자 교문으로 들어오는 학생들의 수도 훨씬 많아졌다. 낯선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있길래 누군가 싶어서 한 번 나와 봤다는 교무부장 선생님과의 짧은 대화가 끝나갈 무렵, 등교를 하던 한 여학생이 가방에서 보온병을 꺼내들고 홍 선생님 앞으로 다가왔다. “선생님, 추운데 이거 드시고 하세요. 유자차에요.” 하며 선생님들께 차를 한 잔씩 따라 드리고는, 보온병 채로 홍 선생님의 손에 쥐어 드리고 인사를 꾸벅 하고는 교실로 뛰어갔다.

1인시위를 마치고 인터뷰를 위해 진학지도실로 자리를 옮겼다. 홍 선생님은 아까 학생에게서 받은 유자차를 필자에게 한 잔 나누어 주면서, 이 귀한 것을 막 나눠 줘도 괜찮으냐는 필자의 물음에 “애들이 어제 준 초콜릿이며 음료수가 제 책상에 잔뜩 있어요. 애들은 저보고 애국자래요.”라고 대답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이어서 “고등학생의 상식으로 보기에도 교육청이나 학교에서 하는 얘기가 그만큼 어처구니없다는 거죠.” 하며 교육청과 학교를 향해 마음에 품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나한테도 ‘금성 말고 다른 책 쓰면 안 되겠냐’ 했던 걸 다 기억하는데, 이제 와서 교장 선생님은 그런 거 지시한 적도 없고 압력 넣은 적도 없대요. 그나마 있었던 교장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와르르 무너졌죠. 교사나 교장이나 공무원이기 이전에 교육자인데, 이건 교육자적 양심의 문제라고 봐요.”

김동일 선생님은 지금 부흥고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과 같은 마찰이 부산 시내 전역에서 동시에 진행 중이라고 말을 거들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학교에서 교육청의 지시대로 근현대사 교과서가 교체될 것으로 보이고, 이런저런 마찰이 부담스러운 일부 학교들에서는 선택과목인 근현대사 과목을 아예 포기하고 세계사 과목으로 전환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김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 스스로 ‘내 생각은 교육청과 다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래 가지고 어떻게 애들한테 아는 만큼 실천하라고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학교가 아이들한테 비겁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다.”라며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는 28일에 열리는 학교 운영위원회에 근현대사 교과서를 다른 출판사의 교과서로 교체하는 안이 상정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그 안은 홍혜숙 선생님을 제외한 나머지 두 교사들의 의견으로 만들어진 안이다. 나머지 교사들의 동의하에 운영위원회까지 상정된 이상 사실상 그 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지만, 홍 선생님은 운영위원회에 참석해 마지막으로 호소해 볼 생각이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두 선생님의 의견만으로 교과서 교체가 결정된 과정에 대해 법적인 문제 제기까지 준비할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정권이 바뀌면 역사도 바꿀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일단 절대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리고 다양성이 없는 사회는 민주주의가 아니잖아요. 외눈박이가 보는 시각으로 만든 교과서로는 애들한테 진짜 역사를 가르칠 수가 없어요.”라고 당차게 마지막 말을 맺고 1교시 수업이 있다며 교실로 들어가는 홍 선생님의 모습을 보니, 교과서 교체 지시를 받고 너무 속이 상해 남몰래 눈물을 쏟았다던 이야기는 꼭 다른 사람의 이야기 같았다.

‘좌편향’ 교과서와 보온병, 그리고 피켓까지 챙겨 들고 교실로 향하는 홍 선생님에게 김 선생님이 수업 가면서 피켓은 뭐 하려고 들고 가냐고 묻자, 홍 선생님은 밝은 웃음과 함께 돌아보며 대답했다. “수업 할 때 교탁 앞에 세워 놓으려고요. 애들은 다 내 편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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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0. 28. 10:06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판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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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진 / 민족문제연구소 사무국장

  9.11 테러 이후 오만과 독선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부시 대통령이 최근 방한했다. 부시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겸손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이명박 정부는 독재 시대를 방불케 한다. 독재 시대는 독재자만을 낳지는 않는다. 독재에 부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잉태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만 35년을 지속했는데, 이것은 일제의 힘이 조선 민중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같은 권력을 지탱하는 충실한 부역자 즉 친일파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방송국을 장악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KBS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검찰, 경찰,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정부 기구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니 군대 빼곤 모든 방법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거대 권력에 맞서 그나마 정의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켜 줄 마지막 보루를 교과서에서는 사법부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명예 훼손을 저지른 수구 단체 회원들에 대한 민사 2심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05년 8월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발표 후 사전 편찬의 의의를 왜곡하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윤경로 편찬위원장 등 임원들에 대해 악의적인 비방을 일삼아 온 수구 단체 회원들에 대해 연구소 등이 제기한 민사소송 2심 선고가 지난 7월 16일 있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재판관 조용구, 김성수, 은택)는 피고들에게 연대하여 모두 2천만 원을 연구소와 임원들에게 지급하도록 판결하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지난 2006년 11월 5일 1심에서 피고들에게 6천5백만 원의 연대 배상 책임을 물은 것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이며 오히려 피고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 수구 단체들의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인신 공격의 빌미마저 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판결문 일부를 살펴보면서 반론을 해 보자.

  1.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원고 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 친일 인사로 지명한 사람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로서 이들을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하게 되면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인되고, 이는 북한과 한국 내 친북 세력에 이로운 일로서 우리나라와 같이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현실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정치적 의견 내지 논평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를 ‘정부 수립’으로 이해하고 판결문을 읽더라도 정부 수립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의 친일 행적을 발표하는 것이 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현행 우리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다. 즉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친일파 청산이 왜 북한에 이로운 일인가. 오히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인데 대한민국에 이로운 일이 아닌가. 판사의 논리는 1948~9년 반민특위 활동 당시 반민특위 활동이 북한에 유리하다는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논리와 너무도 닮아 있어 전율마저 느껴진다.

  2. 원고 법인(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에 대하여 북한이 이를 적극 지지ㆍ옹호하면서 ‘친미사대 매국세력 척결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 정치적으로 특정 이념이나 사관에 편향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며, 그동안 원고들이 진보적 입장에서 정치적 주장과 활동을 해 온 여러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원칙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체제를 유지ㆍ수호하려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원고 법인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가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체제를 유지ㆍ수호하려는 국민들이 친일 인사 명단 발표가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은 판결문이라기보다는 마치 수준 낮은 정치인들의 논평쯤으로 보인다. 게다가 북한이 친일 인사 명단 발표에 대해 지지ㆍ옹호했으니 문제가 된다는 주장 역시 논리성을 상실한 한국판 매카시즘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북한이 지지하면 뭐든지 죄가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북한이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한국 태권도계 인사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도 힘을 보탰고, 최근에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한목소리로 규탄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한국 태권도계 인사들과 동계올림픽 유치단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독도 관련 단체들도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아야 할까. 

  3. 원고 법인(민족문제연구소)이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사를 한때 친일 행적을 보인 적이 있다거나 특정 분야에서 일정 직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친일 여부에 관한 학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시킴으로써 정치적 논평을 자초

  학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시킴으로써 정치적 논평을 자초했다는 말 또한 어불성설이다. 어느 학문 세계건 서로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정치 행위가 아닌 학술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술 행위를 진행하는 학술 단체를 찾아와 ‘친북 좌파’나 ‘김정일 하수인’이라는 표현을 동원해 공격하는 준정치 단체들의 준동을 오히려 법원이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막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2심 재판부 스스로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을 역사적ㆍ학문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익적 활동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으로 이해하고 내린 결론으로 대단히 실망스런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참여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한때 과거사 청산을 외치던 법조계가 이제는 현 정권의 입맛에 맞춰 언제 그랬냐는 듯 퇴행적인 역사 인식이 반영된 판결을 통해 다시 한번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사 청산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사례다.
  ‘정치인은 정책으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했기에 후세의 기록을 위해 다시 한번 해당 재판부 판사들의 이름을 적어 본다. 재판관 조용구, 김성수, 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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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트, 콜텍, 하이텍 노동자들 송전탑 위 고공농성
대법원 판결마저 무시한 정리해고와 위장폐업에 맞선 목숨을 건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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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만 볼트의 고압전류가 흐르는 송전탑 위, 그저 바라보기에도 아찔한 그 곳에서 두 지회장들은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 작은책


지난 10월 15일, 금속노조 대전충북지부의 콜텍지회와 서울지부 하이텍알씨디코리아지회의 두 지회장들이 서울 양화대교 옆 한강시민공원의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기타를 만드는 회사인 콜트악기와 그 자회사인 콜텍의 박영호 사장은 노동자들에게는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을 강요하고, 자신은 해마다 15~42억 원의 배당금을 챙겨왔다. 현재 확인된 그의 재산만 1,191억 원. 그는 우리나라 부자순위 120위까지 올라 있다. 콜트악기는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연속으로 흑자를 내서, 누적흑자가 191억 원에 달하는 회사다. 콜텍도 1996년부터 2007년까지 기록한 누적흑자가 878억 원에 이른다. 그런데도 회사는 1996년보다 세 배 이상 매출액이 증가한 2006년과 2007년, ‘주문량이 없어 정리해고를 해야 한다’며 노동자들을 협박했다. 결국 박영호 사장은 ‘날조된 경영상의 위기’를 빌미로 2007년 충남 계룡의 콜텍 공장을 폐업하였고, 이어 인천의 콜트 공장마저 위장폐업하여 국내의 생산물량을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해외 공장으로 빼돌리고 있다.




△ 노동자들이 만든 선전 현수막에 콜트-콜텍의 박영호 사장과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박천서 사장의 얼굴이 보인다. 노동자들의 눈물로 저들은 저 웃음을 샀겠지. ⓒ 작은책


무선조종기를 만드는 회사인 하이텍알씨디코리아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된 2002년부터 노동부와 법원 등으로부터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시정명령, 시정권고, 유죄판결, 해고자 복직판결 등을 받아왔다. 지난 2008년 1월, 2003년에 부당해고된 조합원 5인에 대한 대법원의 복직 판결이 나자, 회사는 법인분리를 통해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공장을 폐쇄하겠다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자본금 5천만 원짜리 분할회사로 옮기지 않으면 조합원들을 모두 정리해고 하겠다는 것이었다. 13인의 조합원 전원이 2004년에 ‘우울증을 수반한 만성 적응장애’라는 판정을 받은 산재환자들인 하이텍알씨디코리아의 노동자들은 안 해본 것 없는 8년간의 싸움 끝에 고공농성이라는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피땀으로 만들던 기타 위에 쓰인 <위장폐업 분쇄>.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일터로 돌아가는 것이다. ⓒ 작은책


두 지회장이 올라가 있는 송전탑에는 지금도 15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고 있다. 게다가 다음 주부터는 단식까지 시작할 예정이다. 노동자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싸워야만 언론의 주목을 받고, 사회의 관심을 받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10년, 20년씩 겨우 굶어죽지 않을 만큼의 임금을 받고 일하며 수백억 원대의 흑자를 회사에 안겨주고도, 하루아침에 서러운 해고자의 신분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 그들 앞에서 과연 누가 "근로기준법이 근로자를 과보호하고 있다."는 따위의 말을 할 수 있을까? 양화대교 위로 보일 듯 말 듯 펄럭거리는 ‘생존권 쟁취’ 플래카드를 보며, 누구나 자신이 흘린 땀의 가치만큼 인정받고 행복해질 수 있는 날을 간절히 소망해 본다.

△ 자전거를 타고 가던 한 시민이 둔치를 따라 메달아 둔 선전물을 읽어보고 있다. 죄 없이 죄인이 된 당신 이웃들의 이야기를 보며 무엇을 느끼실지. ⓒ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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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방을 드나드는 수상한 사람들
   은종복 / 풀무질 일꾼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내가 일하는 책방으로 사복 경찰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그자들은 내게 말을 걸지도 않고 30분 가까이 책방을 구석구석 살핀다. 그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사회실천연구소에서 내는 ‘실천’, ‘사회주의자’, ‘사회주의 노동자’, 다함께 기관지 ‘맞불’, ‘노동사회과학연구소’에서 내는 책들을 찾았다.
  난 1993년 봄부터 책방을 꾸려오고 있다. 그때는 김영삼이 대통령이었다. 그땐 이런 경찰들이 일주일에 서너 번은 왔다. 스스로 어디서 일하는지 밝히기도 했다. 책방에서 가까운 경찰서를 비롯해서 국가정보원, 군기무사 사람들도 왔다. 그자들이 사 가는 책들은 사회주의 생각이 들어 있는 책들이 많았다. 나는 책방에서 책을 파는 것이 무슨 큰 잘못이 있나 싶었다.
  그러다 난 1997년 4월 15일에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판매죄로 남영동에 있는 경찰청 대공분실에 끌려갔다. 서울구치소에서 한 달을 살았다. 그때 문제가 됐던 책들은 ‘전태일 평전’, ‘ 월간 말’, ‘철학에세이’,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같은 책들이다. 그 책들은 지금도 큰 책방에서 버젓이 팔리고 있다. 하지만 큰 책방 대표들이 잡혀 갔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날 서울에 있는 인문사회과학책방 대표들 세 사람이 한꺼번에 끌려갔다. 그 뒤로 조직 사건이 예닐곱 건 터졌다. 그렇게 공안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해 대통령에는 김대중이 뽑혔다. 김대중과 노무현이 차례로 대통령이 되면서 공안 경찰의 발걸음이 좀 뜸해졌다. 그러나 올해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다시 활개를 친다.

△ 은종복 씨가 운영하는 책방 어귀에 붙여 놓은 광우병 쇠고기 반대 포스터 ⓒ 작은책


  국가보안법은 일제강점기에 만든 치안유지법이 그 어머니다. 그 법은 일제에 맞서 싸웠던 사람들을 죽이려고 만들어졌다. 그 법을 1948년 12월 1일에 이승만이 다시 고쳐 만들었다. 올해로 국가보안법이 만들어진 지 60년이 된다. 그동안 그 법으로 죽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더러운 정권을 지키려고 만든 법이, 세상을 맑고 밝게 바꾸려는 사람들을 수없이 잡아 가두고 죽이는 일에 쓰였다.
  난 국가보안법 제7조 1항과 5항에 따라서 벌을 받았다. 내가 국가 존립, 안전, 자유 민주 기본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책을 팔았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사람들이 마르크스가 쓴 ‘공산당 선언’을 읽으면 모두 공산당원이 되어 총을 들고 이 나라를 뒤집어엎을까. 그렇게 쉽게 세상이 바뀐다면 진짜 살맛 나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럼 돈에 눈먼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가 좋다고 떠든다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더러운 세상에서 끽소리도 안 하고 살까.
  아무튼 책방 일꾼이 이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가. 아니 오히려 대운하를 만들어 자연과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하고, 백성들이 먹고 죽을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미국 소를 자기들 마음대로 들여오려는 이명박 정권이 이 나라를 구렁텅이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책방에 사복 경찰들이 들락거리며 공안 바람을 일으킨다는 기사가 지난 4월 3일치 경향 신문에 실렸다. 그 뒤로 사복 경찰 발걸음이 뜸해졌다. 그러다 이 글을 쓰는 오늘 6월 13일 낮 12시쯤 사복 경찰 세 사람이 또 왔다. 근데 그자들이 사복 경찰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그자들은 한꺼번에 들어오지 않고 따로따로 들어온다. 나가고 들어올 때 인사를 하지 않는다. 책방 구석구석을 뒤지다 사회주의 색깔이 들어 있는 책들을 열심히 본다. 사회주의 냄새가 나지 않는 책은 사지 않는다.아무튼 그날도 그자들은 5분을 사이에 두고 들어오더니 나갈 때도 그렇게 했다. 40대 중, 후반 나이다. 그자들 뒤를 몰래 따라갔더니 책방 옆 골목에서 모여서 수군덕거렸다. 그곳에는 두세 명 더 있었다. 그자들은 책방을 나가며 계단 벽에 붙여 놓은 종이 쪽지들을 한참 보았다. 그곳에는 내가 촛불 모임에 나가서 가져 온 종이들이 붙어 있다. ‘너를 심판한다 나를 연행하라’,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이명박 OUT’, ‘독재 이명박 국민 불복종’, ‘아이들아 미안하다 우리들이 지켜내마’, ‘이명박! 넌 뭐~든지 절대 하지 마’, ‘국민 심판 촛불 항쟁’ 이런 글들이 쓰여 있다.

△ 책방 어귀에 붙어 있는 포스터들 ⓒ 작은책


  난 요즘 날마다 시청에 나가 촛불을 들었다. 5월 24일 토요일 처음으로 시위대가 찻길로 나간 날부터 어제 6월 12일까지 20일째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잠이 모자라서 입술과 눈 밑에 뾰두라지가 나고 딱딱한 아스팔트 찻길을 걸어서 무릎이 시큰거리지만 마음은 맑고 밝다. 가난하지만 올곧게 사는 사람들과 세상을 바꾸는 일에 함께 나서서 참 기뻤다. 지난 6월 10일에는 한반도 남녘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이명박은 물러나라!’, ‘고시 철회! 협상 무효!’, ‘평화 시위 보장 하라!’, ‘폭력 경찰 물러가라!’, ‘민주 시민 함께 해요!’ 라고 한목소리로 외쳤다.
  바람이 세게 불어 촛불이 꺼지면 가까이 있는 낯모르는 사람에게 불을 빌려서 촛불을 다시 밝혔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비옷을 입고 우산을 받쳐 들고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애썼다. 이렇게 도시 한 가운데서 사람들은 밤을 새우며 돈에 눈먼 이명박 정권을 끌어내리는 일에 힘을 모았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곳은 해방구였다.
  내가 날마다 시청에 나가 촛불을 드는 일은 내가 다시 국가보안법으로 철창에 갇히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아니 내가 다시 국가보안법 이적표현물 판매 죄로 감옥에 갇힌다 해도 나와 함께 촛불을 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켜 주리라 믿기 때문이다. 세상을 올곧게 바꾸려는 사람들을 가두는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일에도 그이들은 촛불을 들 것이다. 민주주의는 그것을 지키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뿌리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한다. 내가 또다시 국가보안법으로 끌려가고, 그 일로 양심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국가보안법을 없애는 운동에 불을 지필 수 있다면 좋겠다.
  헌법에도 보장되었듯이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사상과 양심에 따라 살 수 있어야 한다. 먹을거리를 일구는 농사꾼과 이 땅 목숨붙이들이 사는 데 꼭 있어야 할 것을 만드는 사람들이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사회주의가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따라야 한다. 그런 세상이 와야 어른들 욕심으로 아파하고 쓰러지는 아이들이 없어지고, 온 세상 아이들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핀다. 그런 날을 앞당기는 데 내가 꾸리는 작은 책방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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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 진보의 길을 찾는 진재연 씨
   안건모 글 · 사진


 

  올해 나이 서른세 살이 된 진재연 씨는 한탄강 근처 전곡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평범했다. 고등학교 때 전교조 선생님을 만나 영향을 받은 뒤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등 평범했던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조중동에서 흔히 말하는, 배후인 전교조 선생님들은 늘 이렇게 평범한 아이들의 삶을 삐딱한(?) 길로 이끈다. 자기만 위해 사는 삶이 아니고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말이다.
  진재연 씨는 대학을 들어가자마자 자연스레 야학 동아리를 찾았다. 도원동 철거민 투쟁 현장에서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때는 1997년 노동자대투쟁 때였다. 5월 1일 노동절 때부터 집회에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최류탄이 터지는 매캐한 길에서 경찰과 맞서 싸울 때 무서우면서도 짜릿했고 희열을 느꼈다. 진재연 씨는 그렇게 자연스레 사회에 대해서 배웠다. 졸업을 한 뒤 진재연 씨는 지하철 철도 용역 노동조합에서 비정규직 조직 활동가로 일했다.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8개월 정도 일하고 나와 2004년 1월부터 사회진보연대라는 단체에서 상근을 한다.

△ 2008년 7월 10일 인터뷰 모습

  진재연 씨가 살아온 서른세 해 짧은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2006년 1월부터 평택 대추리 지킴이로 들어가 살던 때부터였다. 그 당시 대추리는 전쟁 아닌 전쟁 중이었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평택을 주한미군의 중심 기지로 합의하고 대추리와 도두리 일대  74만 평을 강제로 수용했다. 주민 100여 명은 강제 수용을 거부하며 그때까지 버텨오고 있었다. 여기에 평택 범대위를 비롯한 시민 사회단체와 학생, 노동자들이 그 대추리를 평화마을을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을 때였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남들은 무서워서 집회 한 번 참석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재연 씨는 평택 ‘지킴이’로 가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대추리는 언론에서 늘 봐서 알고 있었어요. 폭력적인 진압이 있을 거라 말들이 많았어요. 그건 무섭지 않았는데 엄마한테 내가 평택 가서 산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오는 거예요. 근데 엄마는 그곳이 어떤지 모르는 거죠. 그래서 평택을 들어갔는데 그곳의 삶은 제 삶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가 있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곳에서 대추초등학교 안에 있던 도서관 관장 일을 맡는다. 아이들과 같이 책읽기 모임도 하고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그곳에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인터뷰해 한겨레 21에 연재를 하기도 했다. 2006년 5월 4일 노무현 정부는 군과 경찰을 동원해 강제로 철거를 하기 시작했다.
  “5월 4일 아이들 운동회 날이었어요. 아이들이 학교는 당연히 못 갔죠. 도서관이 초등학교 안에 있었는데 경찰이 대추초등학교를 무너뜨리면서 창문으로 포대 자루에 책을 막 담아서 밖으로 던질 때 경찰하고 싸우면서 울기만 했어요.”
  정부는 군과 경찰 병력 1만 5천 명을 투입해 마을을 강제로 철거했다. 그 과정에서 경찰은 항의하던 시민들과 학생들을 방패로 찍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500여 명을 연행했고, 법원은 16명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다친 사람도 많았다. 강제 철거로 주민들은 결국 2007년 3월 29일부터 이주를 하기 시작했다.
  “온동네가 눈물바다였어요. 이삿짐 싸면서 울고……. 3월 24일 935일째 마지막 촛불 집회 때는 사회자가 눈물을 터뜨렸어요. 그때 주민들이 전부 울었어요.”
  진재연 씨는 그때 생각이 나는지 목이 메어 잠깐 말을 잇지 못했다.
  2007년 4월, 진재연 씨는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 진재연 씨는 ‘이랜드일반노조 월드컵분회지원대책위원회’로부터 이랜드 노동자들이 투쟁했던 이야기를 책으로 내자는 제안을 받고 김순천 씨 외 12명과 인터뷰 형식으로 책을 내는데 함께한다. 그것이 지난 6월 나온《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후마니타스)라는 책이다.

△ 2008년 7월 11일 이랜드 상암점에서 열린 이랜드 일반노조 문화제에서 파업기금을 보태기 위해 《우리의 소박한 꿈을 응원해 줘》 책을 팔고 있는 진재연 씨(오른쪽)

  살아온 삶이 짧아 별로 할 말이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진재연 씨. 노조활동가로서, 사회진보연대 회원으로서, 평택 지킴이로서 살았던 짧은 삶이었지만 사회 진보를 위해 한걸음 한걸음 내딛는 발걸음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런 작은 발걸음이 모여 이 사회가 바뀌고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 아닌가. 진재연 씨는 여전히 그 길을 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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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영화가 재미있다

   김미자/ 우리말 교사



  “한국 영화가 참 재미있고 좋아요. 난 스트레스가 쌓이면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봐요. 그러면 속이 푹 풀려서 내일부터 다시 열심히 일하자!는 그런 기분이 돼요” 하던 우리 한국어 수강생이 나한테 다가와 ‘한국 영화를 100배 즐기는 방법’이란 강연을 같이 가자고 했다.

  그래서 난 지난 6월 14일 토요일에 우메다 변두리에 있는 오사카 한국문화원까지 강연을 들으러 갔다. 강사는 일본 정부의 대신관방 심의관, 문화청 문화부 등을 역임하시고, 현재 교토조형예술대학교 교수이자 영화 평론가이신 데라와키 겐이란 분이었다.

  나는 그이를 교육 문제를 다룬 텔레비전 프로에서 몇 번이나 본 적이 있어 낯익은 감이 들어 되게 흥미스러웠다. 보아 하니 한국 영화를 꽤 잘 아시지 않는가? 이분이 이렇게 한국 영화에 도통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강연을 들어 보니까 강사가 한국 영화를 보게 된 지 그리 오래 되진 않았다. 어느 날, 그이가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갔는데 몸짱 도둑이 현관에 서 있어 숨이 넘어 갈 정도로 깜짝 놀라 뒷걸음쳤다. 조심스레 봤더니 다름 아니라 그게 바로 등신대 배용준 포스터였단다. 벌써부터 ‘한류’ 팬이 돼 정신이 빼 나간 그 집 사모님이 집 한 채를 온통 ‘한류 스타’ 사진과 포스터로 장식해 놓았단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일본 영화는 보되 한국 영화는커녕 헐리우드 영화도 보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아내가 하도 권하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따라 보게 됐단다. 그런데 말이다. 남을 잡으려다 제가 잡힌 꼴로 푹 빠져 버려 한국 영화를 거슬러 보게 돼 불과 5년도 안 됐는데도 이젠 연간 300편을 본다는 당당한 광이 됐단다. 오죽 빠졌으면 이렇게 영화를 볼 수 있을까? 그는 주로 2000년 이후의 영화를 집중적으로 봤는데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 커서 그랬다.

  그러던 2004년 1월, 역사적으로 의의 깊은 일본 문화 전면 개방을 맞이했다. 이걸 계기로 한국과 일본은 문화 레벨 교류를 통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듣건대 거기에는 한국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이었던 이창동 감독과 일본 정부 문화청 장관 가와이 하야오 씨 들의 꾸준한 노력이 컸다고 한다. 당시 일본 정부 문화청 문화부장이었던 데라와키 씨도 문화청 장관 가와이 씨를 따라 적극적으로 문화 교류를 위하여 한몫을 하게 됐다. 모든 건 부산에서 시작됐단다. 처음 방문한 나라, 처음 걷는 부산의 거리, 시내가 온통 영화제로 들끓던 광경에 감격과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이건 일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잖는가. 가뜩이나 도쿄국제영화제가 영향력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놀라움과 초조감에 빠진 그이 곁에서 한국 측은 영화제 운영에 관한 모든 프로세스를 아낌없이 보여 주었다고 한다. 그때 부산국제영화제를 시찰한 게 큰 도움이 되었고, 계속 산더미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침이 됐다고 했으며, 지금도 우의 깊게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이는 이번 강연에서 일본 사람들이 왜 한국 영화를 이처럼 보게 됐느냐를 다음과 같이 말하며 강의를 끝맺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탄생하여 본격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져 단계적이나마 일본 문화가 개방됐다는 것에서 가장 좋은 조건이 마련됐다고 했다. 아울러 2002년에는 한일 공동 개최 월드컵을 대성공으로 끝내고, 2003년에 노무현 대통령이 정권을 잡자 민주화가 성숙돼, 그것이 2004년 일본 문화 전면 개방으로 이어져 그 이후로 일본과 한국이 평화지향, 문화 존중, 인권 중시 같은 기본적 가치관을 거의 완전히 공유하게 된 데에 있다고 했다.

  강사는 그러니 두 나라 국민이 사회에 대한 같은 고민이나 같은 개혁의식을 가졌더라도 별로 이상한 현상이 아니잖는가, 더구나 몇천 년 전부터 자꾸 왕래를 해 온 이웃 나라인데 한국 영화를 보는 게 일본 영화를 보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잖는가 하고 몇 번이나 거듭 말했다.

  나는 강연을 들으면서 우리나라 유구한 역사 가운데 고작 몇십 년 동안만이 이웃 나라 일본에 의해 잘못된 관계가 돼 버린 것임을 새삼스레 생각했다. 또한 정부 차원에서 여러모로 움직인 결과 오늘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강연회 강사가 선택한 한국 영화 상위 1위부터 5위까지를 참고로 적겠다.
 

  1. 박하사탕  2. 살인의 추억  3. 오아시스  4. 나쁜 남자  5. 괴물
  난 여기서 위에서 순위 매겨진 작품을 그가 어떻게 해설했는지는 아예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 사는 사람들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고른 한국 영화 (2000년~2006년 작품)

  1.왕의 남자  2. 역도산  3. 웰컴투 동막골 4. 공동경비구역JSA 5. 오아시스 6. 너는 내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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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에 나오지 않는 노동자 이야기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두 달이 넘도록 촛불이 밝혀지고 있다. 억수와 같이 비가 쏟아져도 촛불은 꺼지지가 않는다. 시청광장을 어기적거리며 돌아다니면 유모차를 탄 아이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까지 만날 수 있다. 녹음기 마이크를 슬며시 들이대면 갖가지 사연이 흘러나온다. 서울광장은 서민들의 가슴에 응어리진 한을 풀어내고 달래는 공간이 되었다. 촛불 문화제에 가면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이런 저런 사람들도 만날 수 있다. 대전의 콜텍 조합원은 서울 본사에서 농성을 하고 있다. 이천의 테트라팩도 다국적 기업과 맞서 아직 싸우고 있다. 반가움은 잠깐이고 답답함이 가슴 가득 밀려든다. 촛불이 미처 비춰 줄 수 없는 설움과 눈물이 너무도 많아 속상할 뿐이다. 서울광장에 모인 기자들의 카메라를 보면서 참담해진 순간도 있었다. 1000일을 넘기며 싸우고 있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단식이 이제 한 달을 앞두고 있다. 이랜드 노동자들의 싸움도 1년을 훌쩍 넘었다. 지난 여름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쫓겨난 이랜드 노동자들이 농성을 했던 홈에버 상암점에는 다시 농성 천막이 들어섰다.

  비정규직법 시행 1년을 앞둔 지난 6월 25일 남대문에 있는 한국주택금융공사 앞을 찾아갔다. 와이셔츠를 입은 직장인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가슴에 매단 천에는 하얀 구멍이 뻥 뚫려 있다. 그 밑에 자그마한 글씨로 ‘비정규직의 뻥 뚫린 가슴입니다’라고 적혀 있다. 한국주택금융공사는 공공 기관이다. 서민들의 전세 자금, 연금, 학자금 들을 대출해 주는 곳이다. 5백여 명의 직원이 일을 하고 있고, 이 가운데 백여 명은 계약직 직원이다. 지난해 비정규직법 시행을 앞두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종합 대책’이 만들어졌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하라는 정책이다.

△ "사람은 일회용품이 아닙니다." 지난 6월 25일 한국주택금융공사 앞에서 시위하는 노동자들.

  계약직 직원은 보통 11개월에 한 번씩 재계약을 했다. 비정규직법 시행으로 2년이 넘은 비정규직은 이제 재계약을 하지 않고 고용을 보장받을 수 있게 되었다. 공공 기관인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직원들은 꿈에 부풀어 있었다. 비정규직법이 확대 시행되는 오는 7월에는 정규직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기 계약직이 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광주지사에서 근무하는 이재석 씨는 지난 3월에 익산센터로 옮기라는 제의를 받았다. 계약직인데 익산으로 옮겼다가 재계약이 되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고민이 되었다. 아내도 광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용이 안정되지 못한 이재석 씨에게 아내의 수입은 무시할 수 없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을 전학시키는 일도 부담이었다.

  회사에서는 걱정할 게 없다고 했다. 계약직으로 2년 이상 근무했기 때문에 오는 7월에 당연히 무기 계약직으로 전환될 테니 안심하라고 했다. 서른여덟 이재석 씨는 결심했다. 이제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없는데 뭐가 걱정이냐. 맞벌이를 하던 아내에게는 직장을 그만두라고 했다. 이제 갓 입학한 아들도 전학을 시켰다. 집도 팔고 익산으로 일터를 옮겼다. 익산을 제2의 고향으로 삼고 열심히 직장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게 4월 3일이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이재석 씨는 어김없이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익산센터 사무실로 출근을 했다. 늘 하던 대로 컴퓨터를 켜고 회사 전산망에 접속을 하였다. ‘계약 인력 운용’이라는 제목으로 부사장 이름의 공문이 올라와 있었다. 이재석 씨는 무기 계약직 전환에 대한 대책이 발표된 줄 알고 기뻐서 클릭을 했다.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공문을 보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채권추심에 근무하는 계약직 직원을 계약 해지를 한다는 공문이었다. 업무를 없애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직원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직원으로 충당한다는 것이다. 각 지사와 센터는 신규 직원에 대해서는 6개월 이하의 단기 계약직으로 뽑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한국주택금융공사 계약직 직원들은 말했다.

  “능력이 없어서 쫓겨나거나 성실하지 못해서 계약 해지되었다면 억울하지 않아요. 업무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상관없이 비정규직보호법 시행으로 2년 이상이 되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 때문에 쫓겨나는 거잖아요. 법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불안해도 11개월에 한 번씩 자동으로 계약을 갱신했는데 이게 뭡니까.”

  또한 계약직 직원들은 공공 부문 개혁의 피해자라고 말했다.

  “공공 기관 개혁을 하라고 하니 계약직을 희생양으로 삼은 거예요. 정규직을 구조 조정할 수 없으니 계약직 직원들이 정규직이나 무기 계약으로 전환되는 걸 막아 개혁을 했다고 하려는 거 아닙니까. 저희들이 하던 업무는 계속 필요합니다. 저희가 나가는 자리를 단기 계약직으로 충원한다는 게 이명박 정부의 막무가내식 공공 기관 개혁의 실상이에요.” 6월 3일 공문에는 계약 해지자 명단이 없었다. 더는 계약 갱신 없이 모두 해고라는 통보였다. 그날 밤 퇴근을 한 이재석 씨는 차마 아내에게 이달 말로 계약 해지되어 실업자가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 "정규직화 실시하라." 노동자들의 바람을 담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

  “여보, 직장에 다니지 않고 살림만 하는 것도 이제 몸에 익네.”

  아내가 된장찌개를 식탁에 올리며 말을 했다. 초등학생 아들과 다섯 살 난 딸아이가 식탁으로 달려와 숟가락을 들었다.

  “아빠 화났어?”

  딸이 아무런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아빠에게 물었다. 딸의 목소리에 이재석 씨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이재석 씨는 딸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아빠가 되고 말았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이대우 씨는 계약직 직원을 일회용품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행동이라고 분노를 했다.

  “계약직이라지만 회사에서 2년 넘게 근무해 온 직원들이 아닙니까. 최소한 한두 달 시간을 두고 해고 통보를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습니까. 모두들 집안의 가장이고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6월 3일에 달랑 전산망에 공문 한 번 올리고 그달 말에 회사를 나가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 어디 다른 일자리 알아볼 짬이라도 줘야 맞는 것 아니에요. 계약직 직원들이라지만 대부분 10년 이상 금융계에 근무한 베테랑이에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인데, 정말 자존심을 뭉개는 짓이에요.”

  이대우 씨는 평화은행에서 정규직으로 근무를 하다가 아이엠에프 때 은행들이 구조 조정되면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벽을 하루에도 몇 차례 경험을 했다. 취재를 하고 돌아서는데 계약직 직원들이 물었다. 오늘 몇몇 기자들과 방송 카메라가 왔는데 언론에서 다뤄 주겠냐고 묻는다. 얼마 전에도 공중파 방송에서 취재를 해 갔는데 갑작스레 촛불 집회 관련 내용으로 바뀌어 방영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알 수 없다고 답을 했다. 해고를 앞둔 계약직 직원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날도, 그 다음날도 텔레비전에도 신문에도 한국주택금융공사 노동자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 "비정규직 법안을 악용하는 한국주택금융공사를 규탄한다."

  나흘 뒤, 세종로 프레스센터 앞에 전경차가 8차선 도로를 가로막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관보 게재에 맞서 성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몰려 나온 날이다. 물대포가 억수처럼 쏟아졌다. 크레인까지 동원하여 경찰과 시민들의 대치 상황을 생중계하던 날이었다. 노란 비옷을 입고 물대포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이재석 씨로 보였다. 주홍빛 조끼를 입은 기륭전자 노동자도 보였다. 이랜드 노동자도 보였다.
 
얼굴에 맺힌 물기가 눈물인지 빗물인지 모르겠다. 최루액을 섞은 물대포에 맞아 생긴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울광장에는 한 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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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

   최선희/ 부천실업고등학교 교사



  작년, 재작년 1학년 담임을 하면서 다음번에는 꼭 취업부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똑같은 아이를 바라보는 담임과 취업 교사의 차이를 느껴 보고 싶었고 내 스스로 좋은 조건의 회사를 발굴하여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예전에도 아이들을 취업시킨 적은 있으나 우리 반에 한정된 주먹구구식의 취업이었다고나 할까? 하지만 올해는 1학년 전체를 취업시켜야하는, 말 그대로 취업 담당 교사였기 때문에 신입생이 들어오기 전인 2월 달부터 부지런히 움직이며 회사를 확보하려고 동분서주하였다.

마음이 급한 가운데에 생활정보신문, 기존에 재학생이 취업되어 있는 회사, 노동부 워크넷을 주로 이용하여 취업 회사를 발굴하였다. 취업 경험이 많지 않아, 일단 전화를 하여 우리 학교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들을 직원으로 써 준다고 하면 ‘아이고, 주여’ 하며 아이들을 취업시켰다. 학기 초라 취업을 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을 때여서 아이들을 써 주기만 한다면 너무나 고마운 그런 때였다.

  그러던 중에 생활정보신문을 보고 한 회사에 전화를 하니 흔쾌하게  여덟 명 정도를 고용하겠다고 하였다. “아니, 이렇게 고마울 수가… ….” 회사를 확장하면서 한 라인을 우리 학교 학생으로만 돌리겠다는 거다. 그런데 아이들이 출근하고 이틀이 지나서 여자 아이 두 명을 해고했다. “한 명은 왼손잡이고 한 명은 손이 너무 느리다.” 그리고 일주일 후 남학생 세 명과 여학생 한 명을 해고했다. “각자 제 몫을 하지 못한다.”

  마치 여덟 명을 데려다 놓고 경쟁하듯이 일을 시켜 놓고 그중에서 제일 잘 하는 놈, 돈이 되는 놈, 두 명만 남겨 놓은 듯한 생각이 들었다. 행위가 하도 괘씸해서 따졌다.

  “우리 아이들이 일한 경험이 없으니 처음부터 잘하리라는 기대는 안하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지각, 결근만 안 하게 지도해 주면 나머지는 자식 키우듯이 여유 있게 바라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설령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한 달은 지켜보고 월급은 주고 자르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랬더니 그 회사에서는 “회사가 뭐냐, 돈을 바라보고 하는 데가 아니냐? 그날 생산량을 못 맞춰 주면 같이 갈 수가 없다. 이것저것 떠나서 돈이 되지 않는 애를 어떻게 데리고 있겠느냐?”는 것이다.

  워메, 열 받는 거… …. “아니, 그래서 면접 보기 전에 우리 아이들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느냐? 지각, 결근하지 않고 성실하게 출퇴근 잘하고 어른들 말씀 잘 듣고 하면 미우나 고우나 아이들이 성에 차지 않더라도 적어도 한 달은 일해 보고 결정하기로 하지 않았느냐” 했지만, 이미 상대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겠다는 굳은 표정이었다. 이어서 마지막 남은 에이스 두 명은 근근이 잘 버티더니 한 달 만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말았다. 그 후로 이틀 만에 해고된 친구부터 한 달 만에 그만둔 친구들의 급여는 회사 측의 말도 안 되는 이유와 억지, 그리고 횡포로 그만둔 지 두 달이 다 되어서야 받을 수 있었다. 학기 초에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너무 순진하게 일 처리를 했나? 취업을 기다리는 아이들이 너무 많으니 주면 주는 대로, 이게 쓴 건지 단 건지도 모르고 넙죽넙죽 받아먹지 않았나?’

  그래서 이제는 좀 냉철해지기로 하였다. 아이들을 회사에 데려가기 전에 먼저 회사를 탐방하는데, 이제는 좀 거리를 두고 생각하려고 한다.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라고 하면 좀 거창하겠지만 어쨌든 아이들을 고용하는 사람과 일하는 사람은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하는 아이들의 관점에서 이야기하고 길고 느긋하게 봐 주기를 말씀드린다. 갈 때마다 “자식 하나 더 키운다고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린다. 자식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자식이 내 마음대로만 되지 않고 하루에도 열두 번 변한다’는 걸 알 테니까… ….

  요즘은 영화 제목 중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가 생각난다. 나는 취업부 일을 한 지 얼마 안 되고 1학년 아이들도 처음 일하는 것이어서 우리는 서로 많이 얼었다. 일자리 찾느라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느라 어떤 일에 관하여 깊고 넓게 보지 못한 면이 있을 것이고 아이들은 일을 해야 생활이 유지되는데도 정신 못 차리고 지각, 결근을 하여 어렵게 구한 회사를 하루 만에 잘린 놈, 월급 받고 바로 튀는 놈, 아예 우리 학교와 회사와의 연을 끊게 만든 놈들이 있고… …. 많은 것이 우리를 얼게 만들었다.

  그래서! 1학기 때 회사에서 두 번 이상 잘린 아그들에게 고함. 이제 우리 서로를 죽이지 말고 생기발랄하게 살아 보자. 한 학기 동안에 선생님 가슴에 못 박을 건 다 하지 않았니? 우리 2학기 때는 멋지게 부활하는 거야. 2학기 때도 1학기 때처럼 하루 만에, 일주일 만에 잘리고 온다면 선생님은 그냥 콱! 아우~. 생각만 해도 혈압 오른다. 그러니 우리 서로 웃으며 재미있게 살길 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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