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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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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3월호

생각해봅시다

생태 이야기

 

 

이맘때 딸기는 외면하고 싶다

박병상/ 인천 도시생태환경연구소 소장

 

 

최근 한 인기 있는 방송에서 어린이 주먹만큼 큰 딸기가 선보였다. 이름하여 킹스베리’. 계란만큼 큰 딸기를 보고 놀란 적 있는데, 비닐하우스와 식물 성장호르몬이 우리 농업에 등장했던 까마득한 과거의 일이다.

계란보다 훨씬 큰 킹스베리는 어떻게 재배할까? 그 방면에 견문이 없지만 우리 기술진이 개발해 최근 첫 출하했다는 거, 가격이 높아도 인기가 많다는 건 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은 까닭도 있겠지. 당도가 높다고 한다. 그에 발맞춰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식품 수출을 이끌 차세대 수출 유망 품종 5가지 품목 중의 하나로 선정했고 벌써부터 수만 달러의 수출길에 올랐다고 언론은 뿌듯해한다.

사진_ Pixabay


첫눈 내리기 전부터 과일점 좌판의 가운데를 차지하는 딸기는 5월이 제철이지만 3월이면 끝물이다. 할인 경쟁에 나서는 상인은 재고 처리 하자마자 참외를 펼쳐놓겠지. 장마 전에 즐겨 먹던 참외도 제철을 잊었다. 비닐하우스가 계절을 앞당겼지만 더 빨리 더 많이 출하하려는 농부들의 경쟁은 난방을 끌어들였다. 킹스베리는 계란 크기의 딸기보다 적정 재배 온도가 섭씨 2도 이상 높다는데, 태워야 할 석유가 늘었겠다. 꽃가루는 어떻게 수정시키나? 꿀벌은 겨울에 활동을 하지 않는데. 별걱정 다 한다. 한겨울 비닐하우스를 위한 꿀벌이 있단다. 일회용이다.

첨단을 달리는 비닐하우스는 수경재배를 채택한다. 뿌리를 붙잡는 스펀지 같은 물질에 필요한 영양분을 적시 적량 공급하는 수경재배는 흙을 퇴출시켰다. 에너지가 많이 들어가도 대량 생산하는 까닭에 출하 가격을 낮출 수 있지만 농산물의 유전자는 극단적으로 단순해졌다. 단순한 유전자가 요구하는 까다로운 재배환경을 맞춰야 소기의 품질과 생산량을 기대할 수 있으므로 농부는 투자비를 아끼기 어렵다.

요즘은 한술 더 뜬다. 얼마 전 취임한 농촌진흥청장은 스마트 농업의 보급을 선언했다. “개방의 심화, 기후변화, 고령화 등 우리 농업과 농촌은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지만,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농업 기술을 개발하고 보급해 농업인과 국민이 더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포부를 밝힌 그는 고도화된 바이오기술과 디지털이 결합한 스마트 농업 기술로 우리 농업의 혁신 동력을 만들고 국민이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는데, 그런 농업은 농부를 존중할까? 농부대신 알바를 고용하는 건 아닐까?

냉난방 자동 조절되는 최첨단 시설에서 로봇이 파종에서 재배, 수확에서 포장까지 책임지는 스마트 농업은 나이 든 농부를 거부할 것이다. 거액의 투자자는 소비자에 직배송하거나 대형마트와 계약할 테니 농촌도 외면할 게 틀림없다. 외부 환경을 차단하는 만큼 기상이변에 무심해도 무방하겠지만 유지관리에 들어가는 에너지는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온실가스 배출이 늘어나는 만큼 온실 밖의 기상이변은 한층 거세지겠지. 국민이 체감할 성과? 어떤 성과일지 감이 잡히지 않지만, 농촌진흥청은 농촌 해산을 선도하려는가?

중국 인민대학교의 원로, 원톄쥔 교수는 3농을 주장한다. 세계의 공장이 되어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이는 국가의 부를 자랑하지 않는 그는 경작할 땅이 시골에 남아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내일의 대안을 찾는다. 농부는 물론, 농촌과 상생할 수 있는 농업이어야 자급 가능한 식량을 보장한다고 강조하는데, 산업화를 부추기는 스마트 농업은 흙뿐 아니라 농부와 농촌을 배제한다. 바이오와 디지털을 번지르르하게 내세우지만 신기루다. 막대한 석유가 값싸게 뒷받침되지 않으면 바로 무너질 사상누각인데, 지구촌의 석유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낸다. 산유국이 자료를 숨겨도 퍼올리는 양보다 소비가 많은 지 10년은 족히 넘었다.

땅은 농업의 오랜 기반이다. 다양한 미생물, 지렁이와 곤충들, 온갖 식물의 뿌리가 뒤섞인 흙이 있기 때문이다. 흙은 농작물의 뿌리를 잡아 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농작물이 성장해 수확물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골고루 제공한다.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균사를 한없이 펼쳐 내는 미생물이 질소와 인을 식물이 흡수할 수 있도록 흙에 내놓으면 농작물은 미생물이 생장하는 영양분을 흘려보낸다. 그런 관계가 태곳적부터 지속되면서 흙은 우리에게 농작물을 풍요롭게 베풀었고, 농부는 땀 이상의 에너지를 허비하지 않았다. 석유를 가공한 농약과 화학비료, 석유를 태우는 농기계를 사용하기 전까지.

흙은 탄소를 잡아 준다. 미생물과 지렁이와 거미와 곤충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나무와 풀의 씨앗, 그리고 수많은 동식물이 생장하고 죽으며 남긴 탄소가 뒤섞여 있다. 농부에게 수확의 기쁨을 안기는 농작물이 흙속의 탄소를 흡수하는 건 아니다. 녹색 잎의 엽록체가 탄소동화작용으로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곡식이나 과일로 생산한다. 막대한 에너지에 의존하는 농업은 진정한 생산이 아니다. 봄에 뿌린 한 톨의 씨앗이 농민의 땀과 햇빛과 빗물을 머금으며 가을에 수십 배의 소출을 내놓는 생산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변형이다. 수확한 농작물에서 얻는 열량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 주로 석유가 낭비되지 않았나.

농기계와 화학비료로 옥수수를 수확하는 미국의 드넓은 밭은 영양분이 고갈돼 흙이 딱딱하다. 무거운 농기계로 땅을 대규모로 갈아엎는 농업은 옥수수에서 얻는 열량보다 10배 가까이 많은 석유 에너지를 들이부어야 수확이 가능하다. 맹독성 농약으로 흙이 생명력을 거의 잃었기 때문인데, 흙마저 배제하는 스마트 농업은 어떤가? 생명을 아예 품지 않는다. 투자자의 이윤을 위해 종업원을 고용하는 공장일 따름이다. 흙을 배제하므로 지속 가능하지 않다. 가혹한 식량위기를 초래한다.

엽채소와 과채소 위주의 비닐하우스와 스마트 농업이 수출을 염두에 두는 한, 식량자급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식민지로 만들려면 그 나라의 농업을 죽여야 한다!” 미국의 한 경제학자의 귀띔이었다는데, 우리나라의 식량자급률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자급률이 20퍼센트에 턱걸이하는 상황에서 수출을 장려하다니. 우리 농업정책은 위기를 증폭한다. 주로 미국에서 수입하는 밀과 옥수수 같은 곡식을 비롯해 고기와 과일도 진정한 생산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석유 가격이 오르면 수입은 한계에 부딪히고 식량주권을 잃은 국가는 종속될 것이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미국식 농업은 수확물의 대부분을 소비자의 식탁보다 산업축산의 사료, 그리고 가공식품 공장으로 보낸다. 고기와 가공식품이 아니라면 가정의 식탁에 오르는 음식은 대부분 농촌의 농부가 흙에서 생산한 농작물이다. 가공식품이 드문 국가는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일본과 중국,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발밑의 혁명의 저자 데이비드 몽고메리는 흙을 살리면 지구온난화도 어느 정도 예방하면서 내일의 식량을 견고하게 자급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곳곳의 사례를 들어 실증한다.

남북한 합해 7000만이 넘는 인구는 농부가 흙에서 생산하는 농작물로 자급할 수 있어야 내일도 생존할 수 있다. 늦기 전에 농토를 확보하면서 흙을 살려야 하는데, 스마트 농업과 비닐하우스로 수출농업을 꿈꾸는 정책은 무책임하다. 비축량이 얼마나 많은지 고갈 신호를 무시하며 여태 저렴한 석유, 그런 석유 덕분에 수입 농산물의 가격이 낮지만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부자나라의 농산물을 싸게 수입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식량 자급을 준비해야 한다. 여유가 없다. 공산품 수출로 벌어들인 외화로 많은 식량을 수입해 놓고 음식 쓰레기를 마구 버리는 만용은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다. 그래서 눈을 간지럽히는 이맘때 딸기는 외면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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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 그()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리/ 행복한책방 일산점 점장

 

 

또래에 비해 발육이 빠른 5학년이었다. 브래지어를 하는 초등학생이 아주 드문 때였기에 나는 노브라로 학교를 다녔다. 남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담임이 내 가슴께를 흘끔거리는 걸 느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을 총애로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담임은 시험지를 채점해야 한다며 나만 교실에 남으라 했다. 채점을 마친 시험지 꾸러미를 들고 담임에게 다가가자 그놈은 나를 뒤에서 안더니 만져 보자, 만져 보자하면서 내 가슴을 한참 동안 주물거렸다. 그 행위가 어떤 의미인 줄은 몰랐지만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럼에도 울음을 꾹꾹 누르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학교 가는 게 싫어진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엄마가 일대일 수영 강습을 등록해 줬다. 수영 강사 그놈은 처음엔 소심하게 만졌다.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만 만지다가 내가 반항을 안 하자 점점 대범해졌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나만 보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구역질이 났다. 참다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대충만얘기했다. 그런데 펄펄 뛸 줄 알았던 엄마가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수영을 가르치다 보면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다. 억울했다. 자세히얘기하려면 재연을 해야 했는데 그건 너무 수치스러웠다. 다시는 수영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엄마는 돈이 아깝지도 않느냐며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그놈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직도 수영을 못하는 건 순전히 그놈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한 달 가까이 집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착한 학생으로 교육받은 우리 형제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일하는 분들에게도 다녀왔습니다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그중 목수 아저씨 한 명이 오냐, 잘 갔다 왔냐하면서 내 엉덩이를 잠시 만졌다 놓았다. 툭 한 번 친 게 아니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움켜쥐었다’. 이번엔 내가 당한 일이 어떤 건지를 확실히 알 만한 나이였다. 너무 분한 나머지 경련이 일면서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저녁 밥상에서 내가 당한 일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편은 없었다. 딸 같아서, 이뻐서 그런 걸 가지고 계집애가 까탈맞게 군다.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놈보다 부모님이 더 미웠다.

스무 살 이후로도 여자로 태어난 죗값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신체적 성희롱이 드문드문 겪는 일인 데 비해 언어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일일이 맞서기도 피곤할 정도였다. 술 마시러 가자 할 때 볼일이 있어 빠진다고 하니 여자가 없으면 술맛이 나냐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항의하면 농담 가지고 뭘 그리 무섭게 덤비냐며 달래는 그들은 평소에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이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지만 매번 싸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났지만 번번이 쎄게대응하는 피곤한 여자로 살 용기도 없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의 뺨을 때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남자 선배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키가 작고 생김새도 순해 보이니까 나를 만만하게 보나 싶어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면 단단해 보여야 했다. 그 대가로 턱관절장애를 얻었다. 강해 보이려고 이를 꽉 다물고 다닌 결과다.

▲ 사진_ Prentsa Aldundia

이런 얘기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여자들은 어쩜 너나없이 그렇게 비슷한 경험이 많으냐며 놀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들은 너무 흔해 새삼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라는 여자들의 말에 놀란다. 이런 경험이 얼마나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면 더 놀라겠군. 내 경우에는, 성적(性的)으로 결벽증이 생겼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혼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니 새삼 분이 끓어오른다. 골목길에서 큰일 날 뻔했던 일, 전철에서 당했던 일 등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떠올라 더 분하다. 이럴 땐 상상으로나마 복수를 한다. 죄질이 특히 나쁜 초등 담임을 불러내야겠다. 어떻게 복수하는지는 나만 아는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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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3월호

일터탐방_ 유성기업

 

내 동생 광호가 왜 그랬을까

정인열/ <작은책> 기자

 

일은 동료와, 잠은 가족과 함께하는 것이 뭐! 잘못되었습니까?’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시위 현장에서 들고 있던 손팻말 문구다. 유성기업은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로 알려진 대표적 사업장이다. 2011년부터 시작된 투쟁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투쟁을 이기는 중이라고 평한다. 유성기업 노동자 김성민 씨와 국석호 씨를 만나 그 이유를 들어 보았다.

 

우리는 올빼미가 아니다

유성기업은 자동차 엔진에 들어가는 부품을 생산해 현대·기아자동차에 납품하는 회사다. 충북 영동과 충남 아산에 공장이 있다. 김성민 씨는 1993년 병역특례로 입사했다. 지금 그는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이하 지회) 사무장이다. 노조파괴가 발생한 8년 동안 지회장만 두 차례 했다.

국석호 씨는 1994년에 입사했다. 아버지가 다른 동생인 한광호 씨는 이듬해에 형을 따라 입사했다.

▲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사진_영화 <사수> 스틸이미지.


노동자들은 1400도가 넘는 용탕에서 쇳물을 녹였다. 금속을 깎고 돌리고 주야 12시간 맞교대로 일했다. 밤샘 노동에 매일 잔업을 하고 휴일에도 일했다. 그러다 1999년 한 동료가 야간근무를 마친 후 통근버스 안에서 숨지는 일이 발생했다.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에도 노동자 5명이 급작스런 죽음과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지회는 2009년 임금 및 단체협상에서 주간연속2교대제를 도입하여 201111일 시행하고 월급제로 전환하는 합의서를 작성한다. 시행 전까지 구체적인 내용은 회사와 협상하기로 했으나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지회는 합법적 절차를 거쳐 20115182시간 부분파업에 돌입했다. 회사는 즉시 직장폐쇄를 하고 용역 깡패 약 200명을 투입해 조합원들의 출입을 막았다. 조합원 500여 명이 아산공장 근처 비닐하우스에서 석 달을 노숙했다. 용역 깡패는 대포차로 조합원 13명을 치어 다치게 했다. 경찰은 대치 중이던 조합원들을 전원 연행했다. 조합원들은 다시 모여 622일 아산공장 진입을 시도했다. 용역은 돌을 던지고 소화기를 집어던졌다.

저쪽에서 서치라이트를 켜면 우리는 앞이 안 보이잖아요. 주먹만 한 돌이 슝슝 날아와요. 소화기 뿌리다가 막 집어던지니까 굉장히 무서웠죠. ‘소리 나면 거기 맞은 거거든.”

두개골이 함몰되고 광대뼈가 부서지는 등 심하게 다친 조합원만 6. 고작 2시간짜리 부분파업에 회사는 잔악하고 집요하게 대응했다. 창조컨설팅이 유성기업에 제출한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2011428)’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연봉 7천만 원 근로자들이 불법 파업을 하고 있다고 대국민 연설을 했다. 이 원고는 창조컨설팅이 써 준 것이었다. (연봉 7천만 원은 입사 25~30년차 노동자가 주말, 휴일, 잔업, 밤샘 노동을 해야 받을 수 있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임금이다.)

 

가학적 노무관리

직장폐쇄 후 약 두 달 만인 20117, 사측은 제2노조 설립을 주도했다. 지회가 현장에 복귀하자 사측 직원들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조합원들의 화장실 가는 시간, 전화 통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 등을 체크해 시급에서 제했다. 잔업과 특근에서 배제시키고 승진, 작업배치 등에서도 불이익을 주었다. 징계와 고소·고발도 끊임없이 했다. 가학적 노무관리였다. 지친 조합원들이 하나둘 제2노조로 빠져나갔다. 지회는 이에 반발해 2012~2014152일간 굴다리 농성, 259일간 22미터 높이 광고탑 농성을 벌였다. 유성기업 서울사무소를 오가며 천막농성을 하고 대전고법, 대전고용노동청 등 유관기관 앞에서 노숙 농성을 했다. 2노조로 넘어간 조합원 설득도 포기하지 않아, 2014년부터는 제2노조보다 지회 조합원이 더 많아졌다. 하지만 형, 동생하며 지내던 사람들이 분열되고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그 사람들 잘 먹고 잘살 때 우리는 가족이 고통받았잖아요. 그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요. 아내들끼리는 시장에서 마주치면 싸움 나고, 학교에서는 애들끼리 싸우고. 가정부터 이리 되니까 삶이 다 무너지는 거야.”

충남노동인권센터에서 조합원들의 심리 건강을 조사한 결과 43퍼센트가 우울증 고위험군으로 판명됐다. 일반인보다 6~7배 높은 수치였다. 국석호 씨와 한광호 씨도 포함됐다. 그리고 20163, 국석호 씨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저는 대전고법에서 노숙을 하고 있었어요. 누군가는 이리 될 줄 알았지만, 왜 내 동생 광호가 그랬을까? 멀쩡하던 놈이?”

 

한광호 열사

한광호 씨는 목을 맨 채 발견됐다. 평소 말수도 적고 힘든 기색을 비치지 않던 터라 국 씨는 믿을 수 없었다.

그냥 이렇게 장례 치르면 개죽음이라더라고. 노조파괴로 지금 조합원들이 다 비슷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결심을 했죠. 광호 문제를 이슈화시켜서 이 싸움 끝내야겠다고.”

한광호 열사 꽃상여를 메고 양재동을 향해 행진하는 모습. 영정을 들고 있는 이가 국석호씨다( 20166). 사진_영화 <사수> 스틸이미지.

지회는 열사 투쟁에 돌입했다. 회사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다. 시신은 냉동고에 둔 채 서울시청으로 올라와 분향소를 차리고 100리터 종량제봉투에 들어가 노숙을 시작했다. 한광호 열사가 죽은 지 90일째 되는 날, 지회는 꽃상여를 메고 현대자동차그룹 본사가 있는 서울 양재동으로 분향소를 옮겼다.

 

왜 현대자동차인가?

노조파괴의 핵심에는 현대자동차가 있기 때문이다. 증거는 이미 한광호 열사가 죽음을 택하기 두 달 전인 20161월에 밝혀졌다. 당시 은수미 국회의원은 현대자동차 최○○ 이사대우가 부하 직원에게 보낸 메일을 공개했다. 현대자동차가 유성기업 제2노조 가입 인원 목표를 주고 이를 정기적으로 점검했으며, 매주 1회 유성기업과 창조컨설팅을 본사로 불러 합동 회의를 했음이 밝혀졌다. 현대자동차는 왜 그랬을까? 김성민 사무장은 말한다.

부품사들을 일률적으로 정리하고 나서 부품을 원활하게 공급받기 위해 한 거라고 보거든요. 왜냐면 부품사들은 파업을 통해 노동권을 쟁취하는데 이런 데를 없애 버리면 현대차 입장에선 조용하다 이거예요.”

국석호 씨는 현대자동차와 유성기업의 사과를 요구하며 23일간 단식했다. 지회는 청와대까지 오체투지를 했다. 한광호 열사는 노조탄압에 따른 중증 정신질환에 의한 사망으로 산재 인정을 받았다.

▲ 현재까지도 유성기업지회는 서울 양재동 현대자동차그룹 본사 앞에서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작은책(정인열) 

 

내가 왜

국석호 씨가 서울사무소에서 노숙할 때였다. 하루는 내가 왜라는 노래가 나왔다. 자신의 상황과 딱 맞아떨어졌다.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시리고

도와주는 사람 함께하는 사람은 있지만 정말 추운 건 어쩔 수 없더라

내가 왜 세상에 농락당한 채 쌩쌩 달리는 차 소릴 들으며 잠을 자는지

내가 왜 세상에 버림받은 채 영문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귀찮은 존재가 됐는지

찬바람 부는 날 거리에서 잠들 땐 너무 춥더라 인생도 춥더라’ -꽃다지-

김성민 씨가 청와대 앞에서 노숙 농성할 때였다.

맨날 듣던 노랜데 그날따라 딱 그런 거예요. 저는 애들과 놀러 가고 싶고 가족과 저녁 먹고 싶은 평범한 사람인데 왜 이렇게 됐는가? 선택이었거든요. 자본에 굴복하고 살았으면 그걸 유지할 수 있었을 텐데 불응하고 살려니까 너무 고통스러운 거예요. 그런 생각 들 때면 힘들었어요.”

 

어우, 커피 드셔야죠

검찰, 청와대, 고용노동부, 경찰이 유성기업과 현대자동차그룹을 비호했지만 지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하나씩 이겨 나갔다. 2노조 무효 판결(20144), 유시영 대표 구속(20172, 노조파괴 혐의로 16개월 실형 선고), 창조컨설팅 심종두 전 대표와 김주목 전 전무 구속(20188, 노조파괴 혐의로 징역 12개월), 조합원 해고 무효 확정 판결(201810, 대법원), 한광호 열사를 포함한 사망 조합원 8명에 대한 보상.

임금도 일단 안 주고 보고, 해고도 일단 시키고 보고. 우리가 잘해서 이긴 게 아니라 당연한 거니까 이긴 거예요. 그냥 쌩으로 8년을 기다리라고 하면 저도 못 할 거 같아요. 우리가 뭉쳐서 하나하나 해 오다 보니 8년이 지난 거지.”

전에는 일하다 커피 한잔 먹는 거 가지고 잔소리해서 비참했어요. 지금은요, ‘어우, 커피 드셔야죠.’ 이래요. 우리가 이겨 가고 있기 때문이거든요.” 

▲ 유성기업지회 김성민 사무장(왼쪽)과 한광호 열사의 형 국석호 씨(오른쪽). 작은책(정인열) 


간절한 바람

지회의 요구는 3가지다.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어용노조 해체, 마지막으로 사태의 발단이 된 심야노동 철폐다. 그러기 위해서는 2009년 단체협약이 복원되어야 한다. 밤에는 가족과 함께 잠을 자고 싶다. 이들의 바람은 여전히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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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필명)/ 배달 대행 기사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대답을 합니다.

배달이요.”

저는 배달 대행 기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달 대행은 도시빈민들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빈민이 아닙니다. 보통은 400, 500만 원씩, 흔치는 않아도 1000만 원씩 가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노동자와 하나도 다를 것 없이, 그저 가게 밖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우리는 여전히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오토바이나 타는, 안전을 위해 헬멧을 써도 보안상의 이유로 헬멧을 벗어야 하는, 배달시키는 사람들의 편의와 위생을 위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하층민일 뿐인 듯합니다.

왜 배달을 하냐는 말에는 어쩌다 보니, 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생이었다가, 직업 군인이었다가, 족발집 사장님이었다가, 배달 기사가 되었습니다.

스무살,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은 했지만, 12년 동안 죽어라 외우고 익혔던 교과서는 전공이라는 큰 벽을 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없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학업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부사관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스무살의 여름 훈련소에서부터 11월의 임관식, 이후 약 5년간 직업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평생 군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4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고, 장기 복무가 아닌 3년의 연장 복무가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지만, 나만큼 열심히, 나보다 더 오래 노력한 사람들은 7명이나 되었습니다. 평생 군대에 말뚝을 박고자 대학을 포기했던 저는, 다시금 군 생활을 포기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5년간의 복무 끝에는 5년간 모인 적금과 퇴직금이 남았습니다. 전역 간부에게 주어진 취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는 업무에 적응할 수 없어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무작정 쉴 수만은 없어서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족발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삶고, 썰고, 배달까지 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꾸준히 손님이 찾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친구와 함께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신림동 어느 한 가게에서 족발집의 사장님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도 잘되고 배달 주문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매출이 높은 날엔 하루에 300만 원씩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장사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대출금도 갚아 나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점차 매출은 줄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돈은 겨우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동업을 제안했던 친구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하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아쉽지만 저 역시 족발집의 꿈은 그곳에서 내려놓았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대출과 작은 전세방, 오토바이 한 대 뿐이었습니다.

폐업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25살이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총을 쏘거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족발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고, 경력 또한 별거 없는 고졸 청년에게 선택지는 월급 150만 원 정도의 일자리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직장으로는 대출을 갚으며 생활을 꾸려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남아 있던 한 대의 오토바이로 장사할 때 함께했던 배달 대행업체의 기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차, 전업 배달 기사로 4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걱정하던 3000만 원의 빚은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었고, 아직 절반은 은행의 것이지만 작은 내 집도 마련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위험 부담이 높은 배달 기사보다는 안전을 찾아 회사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가 그리워 어느새 배달 기사로 돌아왔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 후유증이 남아도 어느새 익숙해진 생활은 다시금 배달을 하게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여자 친구에게도 숨겼던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천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겪었던 실패들은 이제 다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 경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만나게 되는 다양한 손님과 상점 직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배달 기사로 첫 여름, 한 대학가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학생들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으면 저렇게 배달이나 하고 다닐까?”

제 딴에는 저에게 들리지 않게 친구 귓가에 작은 소리로 얘기했겠지만, 배달 기사라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당시의 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소심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 다녔어요.”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해서 준비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처럼 저도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사회적인 인식이 부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합니다. 전에는 추운 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을 듣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꽤나 자주 추운 날씨에 배달하느라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듣습니다. 전에는 빨리오세요라고 하시던 손님들이 이제는 안전 운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줍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아졌다는,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인종을 누릅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대답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배달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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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 꿈에도 몰랐다

이현림/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보육1.2지부 대표지부장


 

나는 보육 교사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보육 교사를 시작할 무렵의 나는 아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심지어 정리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어려움을 느껴 피하거나, 조용한 구석을 찾아 들어가는 집순이 기질이 매우 강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보육 교사를? 물음표를 그리는 사람 여럿 봤다.

내가 보육 교사를 하게 된 건 교회 전도사님이 한 달만 지인의 어린이집에서 그저 아이들만 돌봐주면 된다며 간곡히 부탁한 때문이었다.

당시 나 역시 미디어의 폐해로 아이 돌봄 그까짓 거 아이들하고 행복한 미소를 띄며 아름답게 놀아 주면 되는거 아니야?’라고 감히 생각해 버렸고, 그게 화근이 되어 어린이집에 발을 들였다. 첫날, 30분 만에 9명이(4살 초과 보육 인원) 번갈아 가며 10초마다 비명을 지르며 울기 바빴고, 그 와중에 불편함을 못 견디는 아이들은 주변의 아이들을 돌아가며 물고 뜯고 맛보는(?) 실력 행사를 했다.

어흥이로 돌변한 아이 두 명을 품 안에 넣어 훈계(?)를 하고 있자니 그 옆에서 한 아이가 응가를 하고 손가락으로 만지작(벽에 안 바른 게 신의 한수였다), 또 다른 아이는 쉬야 마렵다 화장실이 급하다 소리치고, 내 품 안에 넣은 어흥이 둘은 계속 실력 행사를 노리고, 실력 행사 당한 아이들은 여전히 울고, 나도 울고.

전쟁이 나도 이 정도는 아닐만큼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다는 것, 그리고 아이들은 그렇게 예쁘지도 어른의 말을 잘 듣지도 않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고 당일 도망이 절실했으나, 나를 그 전쟁터에 소개해준 전도사님의 을 생각해서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이를 정말 악물고, 정확히 3개월만 일하고 도망가려고 했다. 다시는 어린이집 일 따위는 안 하고 싶었고, 30분간 이루어진 상황에 나를 밀어 넣은 전도사님이 너무 미웠다.

나도 내가 보육 교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아이 은서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죽어도 몰랐다. 내가 애증의 보육 교사를 하게 만든 그아이 은서, 그아이는 예쁜 얼굴의 자폐스펙트럼에 있는 여섯 살 아이였다. 누구와도 소통이 안 됐고, 언제나 같은 머리 모양에 손가락마다 붙인 밴드가 하나라도 헐거워지면 있는 힘껏 소리를 치며 불편감을 호소하던 아이였다.

청소하던 볼풀장에서 3개월만 버티자 속으로 날짜를 세고 있던 어느 날, 그아이와 나 단둘. 10초 남짓한 짧은 그 순간 그아이 은서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씽긋 웃어 주던 그 찰나. 그 찰나가 나를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마음속에 불이 확 일어났다고 표현해야 하나. ‘, 내가 잘 몰랐나 보다. 내가 정말 아이들을 몰랐나 보다. 만약 제대로 알았다면 어쩌면 더 많은 표현들로 소통할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그냥 들어 버렸다. 그리고 나는 12년째 이 일을 하고 있다.

여전히 나는 어린이집 일이 어렵다.

12년 전과 다름없이 어린이집은 교사 한 사람이 정말 많은 수의 아이들을 동시에 돌봐야 하는 환경에서 보통 기본 3가지부터 28가지의 다른 사건들이 동시다발로 일어나는 게 보통이고 이 상태가 매일 10시간씩 유지되는 현장이다. 몸이 100개였으면 좋겠다는 말이 매일 매순간 입 밖으로 튀어나온다.

전쟁 같은 점심시간, 먹는 걸 싫어하는 아이들 여럿과 사투를 벌여야 하고, 그럼에도 먹여 달라는 양육자와 먹기 싫으면 놔두라는 양육자의 의견도 들어서 적용시켜야 하고, 이런 과정에서 양육자의 요구와 아이들의 거절할 권리 또한 무시할 수 없기에 양육자 혹은 아이들을 설득해야 하는 과정까지 모두 동시간에 일어난다.

아이들이 움직이지 않는 유일한 시간인 낮잠 시간. 이 시간에는 아이들이 움직이는 상태에서는 도저히 할수 없는 일들을 처리한다. 매일같이 하지 않으면 밀려 버리는 일들을 중심으로, 각각 감사하는 기관이 요구하는 내용의 서류를 쓰고 교구들을 만들고, 청소와 정리를 한다.

보육교사가 보육노동과 별개로 매일 작성해야하는 업무들.  사진_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보육 교사는 매일같이 입주 청소 버금가는 청소로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하루의 마무리는 실력 행사한 아이와 실력 행사 당한 아이들의 부모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일. 원장과 일부 양육자들의 감정을 받아 내는 욕받이가 되기도 한다.

그날 그 은서라는 아이의 미소가 아니었으면 나는 3개월을 채우고 도망갔을 것이다. 어린이집 일이라는 건 정말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많은 것들이 요구되고 100개의 몸이 할 일을 고작 몸뚱이 하나가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은 직업이다.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르지 않은 게 현재 23만의 보육 교사들이며, 그들 또한 같은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원장의 갑질, 부모의 갑질, 행정기관의 갑질, 잠재적 아동 학대라는 편견의 갑질 속 위태로운 교사의 삶에 그나마 버팀목이 되는 것이 보육노조이다.

▲ 아동 학대 오해로 자살한 보육교사를 기리는 분향소.  사진_공공운수노조 보육지부


은서와 같은 아이들의 미소에 홀려 보육 교사라는 직업을 유지하기엔 너무 많은 어려움들이 있고, 시스템에 의해 편견에 의해 타의적으로 그 삶을 끊어 버리는 사건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다.

교사들은 말한다

누가 좀 도와주세요. 살려 주세요. 저는 아이들이 좋았을 뿐입니다.”

전 그저 아이들만 돌보면 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부모가, 원장이 싫어서 전 떠나렵니다.”

어흥이가 돼 버린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에게 이야기했지만 듣지 않으려고 해요.”

우리 원장님이 부모에게서 민원이 들어왔다고 당장 나가래요.”

넘어지는 아이를 잡다가 팔이 부러졌는데 당장 내일부터 나오지 말래요.”

아이들 장난감 만들다 손가락이 잘렸는데 다쳤다고 화를 냈어요.”

아이는 재미있게 놀았는데 상처가 생긴 줄 교사가 몰랐다면서 부모님이 무척 화를 내셨어요. 저 아동 학대로 신고당할까요?”

원장님이 임신도 순서대로 하래요.”

정말 몸이 힘들어 쉬고 싶은데, 원래 어린이집에는 방학 빼곤 쉬는 날이 없대요.”

아이가 또래보다 많이 달라서 부모님께 이야기하려고 했더니 원장님이 원아 떨어진다고 말하지 말래요

이 아우성 속에 보육 교사는 혼자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이제는 보육노조가 같이하기 위해 조금 더 단단하게 뭉쳤다. 그리고 힘 있는 걸음걸이로 은서와 같은 아이를 만나 도망갈 궁리를 접고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려고하는 교사들의 뒷배가 되어주고 있다.

어린이집 교사가 쉬워 보이는가? 그렇다면 어린이집으로 오시라! , 100명분은 할 각오를 하시고! 그 뒤엔 보육노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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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국회 앞 작은 집

/ 사진_ 하명희


 ▲ 국회 앞 작은 집  작은책(하명희)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를 빠져나와 열한 걸음을 걸으면 3인용 텐트만 한 작은 집이 있다. 이 집의 벽면은 천막이 아니라 조각 천으로 이어져 있다. 왼쪽에는 세 개의 산등에 동이 터 오고, 오른쪽에는 조각배가 떠 있는 바다가 출렁인다. 사면의 조각보 위로 삼각 지붕이 얹혀 있는데 국회의사당 정문 쪽으로 살아남은 아이라는 커다란 글자가 박음질되어 있다. 그 아래엔 바닷가 해당화일까, 커다란 꽃송이가 피어 있다. 이 집의 삼각 지붕에는 다른 집에는 없는, 매일 숫자가 바뀌는 칠판이 있다. 정문에는 머리를 빡빡 민 아이가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글자가 박힌 붉은 티셔츠를 문패처럼 달고 있다. 그 옆에는 여름에도 이곳에 이 집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는, 돌돌 말려 올라간 차양막이 있고 스티로폼으로 된 문이 있다. 문을 열면 방이다. 서너 명 앉을 수 있는 방. 그러니까 이 작은 집은 방이다. 이 방에 들어와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는 묘한 기운이 있는데, 그것은 방의 두 면에 있는 산과 바다 속에 들어온 기분이 들어서일 것이다. 산의 속, 지하철역 쪽으로는 지난가을에 입었을 법한 쑥색 점퍼가 걸려 있다. 바다의 속, 국회의사당 정면 쪽에는 형제복지원에는 3개의 병동이 있었다로 시작되는 어느 날의 신문 기사가 벽면 가득 붙어 있다.

형제복지원 생존자들의 다른 이름 '살아남은 아이' 작은책(하명희)


앞머리가 눈을 덮고 찬기에 어깨를 웅크린 그가 허리를 구부려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신발을 벗고 바닥을 덮고 있던 이불 속으로 발을 뻗었다. 그가 미리 덥혀 놓은 주전자에서 캔 커피를 꺼냈다.

이거라도 들고 있으면 조금 나아요.”

이 방에서 캔 커피는 마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유일한 온열기다. 이 이불 하나로 괜찮으냐고 물었다.

하도 길에서 살아서 이젠 뭐, 괜찮아요.”

그의 입에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누구나 들어오라는 듯 입김이 열린 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누군가 고개를 들이밀고 손님이 있었네, 하고 끼어들었다. 그는 1인시위에서 했다던 몸에 익은 목례를 하며 내게 저기 민간인 학살 투쟁위원회의 어르신이에요 하고 말했다. 다른 농성장에서는 천막 안에 잠자는 텐트가 있던데 여긴 온열 기구도 없이 어떻게 견디느냐고 물었다.

천막 농성장이 커지면 더 추워요. 작은 게 좋아요. 여긴 사람들이 신발 벗고 들어와야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힘든 얘기나 농담이나 그런 걸 나눌 수밖에 없죠. 방이니까. 사랑방이라고 해야 하나.”

그동안 이곳에서 있었던 일들을 물었다. 그는 칠판에 날짜를 지우고 더하며 긴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제야 찾아와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렇게 와 준 것만으로 고맙죠. 저쪽 한국에서 제일 큰 집(국회)에서는 아무도 안 와요. 매일 이 앞을 지나가면서도 단 한 명도 안 들어오더라고요. 1인시위를 시작한 때가 2012년이니까 6년 지났고 올해 7년째인데, 작년 1226일에도 형제복지원 특별법은 국회에서 통과되지 않았구요.”

그는 웅크린 어깨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말했다. 나는 책을 보았다고 했다. 내가 책을 꺼내자 그는 첫 페이지를 손으로 짚었다.

  ▲ "이게 나예요팔사일공삼육일팔!"  작은책(하명희)

이게 나예요. 팔사일공삼육일팔! 아홉 살 때. 어릴 때 사진은 이것뿐이에요. 팔사일공삼육일칠은 작은누나고.”

그는 이빨이 시린지 얼굴을 찡그렸다. 책을 보고 알고 있었다. 그에게 추위는 공포라는 걸. 잠깐이라도 따뜻한 곳에서 밥을 나눠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상대방의 생각을 미리 알아채는 법을 아홉 살 이후 몸에 익힌 듯 내게 먼저 밥 먹으러 가죠라고 말했다.

살아남은 아이. 우리는 그들 수용소의 생존자들을 이렇게 부른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대략은 알고 있다고 말한다. 형제복지원 생존자. 이것이 그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나 이것은 얼마나 많은 것을 가리고 있는가. 그는 밥을 씹지 않고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이빨이 아파서요. 어릴 때니까 유치가 빠지고 어른 이빨이 나오는 때였어요, 형제복지원에 붙잡혀 들어갔을 때가. 그때 관리를 못한 것도 있고, 빨리 먹어야 하니까 급하게 삼키던 것이 버릇이 된 것도 있고, 또 어떻게든 거기서 나가야 사니까 이를 악물었던 게 이렇게 되어 버렸어요.”

내가 씹기에는 무른 밥이 그에게는 딱딱한 밥이었구나. 이 책에는 그가 왜 무른 밥을 씹지 못하고 삼켜야 하는지, 왜 찬 바닥에서 자는 것이 일상이면서도 그것이 공포인지, 왜 어깨를 움츠린 채 허리를 펴지 못하고 인사를 하는지, 그의 몸에 새겨진 폭력과 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가려진 역사의 거대한 공백이 조각보의 박음질 글자처럼 새겨져 있다.

▲ 살아남은 아이-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전규찬, 박래군, 한종선/ 이리/ 2014)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개나 소나 다 글을 쓰는구먼.’ 그렇다. 한때 나는 개였고 소였다. ()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다. 그렇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 그것은 말로는 쉽지만 사실은 너무나 힘이 든다. () 나는 지금 짐승에서 사람으로 돌아가려 한다. () 그런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국가가 버렸고, 사회가 관심을 안 갖는데, 어찌 개인의 힘으로 쉽게 나올 수 있겠는가? 당신들은 진정으로 그들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길 원하는가?” 한종선, 살아남은 아이(이리, 2012) 134135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지옥을 경험한 그가 형제복지원을 나와 생존자로서 살아야 했던 세월을 사회가 몸으로 받아 적는 일이다. 그가 우리에게 던진 질문에 답을 찾는 일이다. 안영춘은 어째서 소년은 그동안 우리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수용소와 연관된 모든 이들이 퇴소 후에도 여전히 비가시적 존재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문맥과 행간에서 찾아야 한다(10)고 이 책의 발문에 적고 있다. 책이 나온 것이 2012년이니 벌써 7년이 지났다. 그사이 이 책의 소년이 던진 질문들은 그 거대한 공백을 어떻게 채웠을까. 이 책을 기획하고 생존자 한종선이 그의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격려한 전규찬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에게는 살아남은 자들의 증언의 의무, 수용소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그 증언을 귀 기울여 들어야 할 경청의 윤리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수용소에서 살아 나온 책 속의 아이가 있고, 생존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423일째 폭력의 날짜를 새기고 지우며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진심으로 사람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가?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한국에서 가장 큰 집인 국회 앞에 나는 도망가다가 잡혔습니다라는 문패를 단 작은 집이 있다. 작은 집에는 울타리가 없어 집 밖이 다 마당이다. 주소가 없어 우편물을 들고 직접 가야 한다. 작은 집은 지나는 사람이 들어와 인사를 건네거나 주변의 농성하는 사람들이 걱정을 풀어놓는 사랑방이 된다. 작은 집 마당의 큰 집에서는 작년에도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수용소의 생존자들이 1인 시위를 시작한 지 7, 국회 앞에 작은 집이 들어선 지 423일이 지났다. 그동안 국회의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이 작은 집에 신발을 벗고 들어오지 않았다.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2014나무에게서 온 편지로 제2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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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

 

우리가 없던 시간의 기록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솔직한 고백을 드립니다. 유성기업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습니다. ‘장기투쟁 사업장으로서 늘 이름이 나왔고 그래서 2014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의 방문지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저는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었어요. 2014년 그때에 밀양, 청도 주민들의 일정에 부분적으로 동행하기도 했으면서도 유성기업의 사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구미 스타케미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코오롱 해고 노동자, 씨앤앰 케이블 노동자, 기륭 노동자.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찹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긴 시간동안 절절한 사연을 안고 싸우는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의 차이는 뭉뚱그려진 채 이름으로만 구분될 뿐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러다가 이번에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만난 <사수>라는 영화 덕분에 이제야 그곳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수>라는 영화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수>를 만든 생활공동체 공룡(이하 공룡)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공룡 사람들은 미디어교육 워크숍 같은 데 가면 만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청소년들과 교육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서 함께 살아내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라 평소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공룡이 만든 영화라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 영화로 <사수>를 추천합니다.

2016년 여름,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 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회사의 노조 파괴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려 싸워 온 지 5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무장한 경비용역들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하며 감시와 차별의 일상을 살아오던 일터 동료들에게 한광호 님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다시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각오로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은 노조 파괴를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사수>는 그 시간의 기록입니다.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공룡 사람들이 유성기업을 만난 건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문이었습니다. 폭력의 기록이 담긴 피켓을 든 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웃지 않았고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고 김설해 감독은 말합니다. 김설해 감독이 들려주는 유성기업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2011518일 그들의 회사는 야간노동을 없애기로 한 노조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섭 도중 기습적으로 직장을 폐쇄합니다. 용역들이 공장 문을 막은 채 폭력을 행사하고 2000명의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싸움은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화면들이 이어집니다. 투쟁의 일상 중 하루였을 어느 날, 노동자들이 천막을 철거합니다. 그중 한 노동자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면서 인터뷰에 응해 줄 것을 청하지만 그 노동자는 나는 고생 안 했다고, 다른 사람 섭외해 주겠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피해 도망갑니다. ‘1994년 유성기업 입사라는 설명 자막과 이름이 떠도 저는 몰랐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동료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는 심정을 토로했던 그분의 얼굴이 장면이 바뀌면서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 한광호 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생전의 한광호 님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인형극을 준비하고 연습하며, 천막을 치고 걷으며, 용역의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며,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 온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에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화면들을 보게 됩니다. 쑥스러워하던 한광호 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며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멀리서 찍은 화면이 보입니다. 보통은 씬의 마무리 화면으로 쓰이는 롱샷 안 그 어딘가에 한광호 님의 모습이 있는 겁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그 순간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화면을 고르며 떠올렸을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 그리고국석호, 김성민, 김수종, 김풍년. 지금은 함께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가늠이 안 되어서 불안한 이 관계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 둘씩 펼쳐집니다. 그 사연들은 고 한광호 님의 시간과 겹쳐집니다.

떠나고 싶은 생각어떻게 하면 끝낼까 이런 생각. 심지어 극단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죠. 차로 밀어버릴까. 어디 숨어 있다가 오며는 급브레이크 잡아가지고 뭐 이런 생각. 확 들이받고 싶은(김수종)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거기에 떠나간 동료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칩니다.

나 때문에 죽은 것 같고 내가 더 나서지 못해서 죽은 것 같고. 내가 좀 더 그 자리에 서서 그 형(고 한광호 님)보다 좀더 한발 더 앞서서 아니면 옆에서 왜 못해 줬을까.”(김풍년)

김풍년 님이 들려주는 그다음 얘기에 또 충격을 받습니다. 세 살, 네 살, 많아야 여섯 살 되는 자신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아이가 피가 나는데 피 난다고 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는 김풍년 님.

영화를 보고 유성기업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참 많이 놀랬습니다. 현대와 기아자동차에 피스톤링, 실린더사이더와 같은 핵심 엔진 부품을 납품하던 이 기업의 2012년 말 기록을 보면 매출액, 당기순이익, 직원 평균 연봉 등이 대기업에 밀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창조컨설팅이라는 낯설지만 끔찍한 기업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조파괴 전문기업이래요. 이 기업이 망가뜨린 건 유성기업 만이 아니더군요. 상신브레이크, 발레오만도, 보쉬전장, 에스제이엠(SJM). 악명높은 이 기업의 배후에 현대차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창조컨설팅의 그 비인간적인 창조성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 가족들의 평화를 어떻게 깨뜨리는지 영화는 속속들이 보여 줍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무릎 꿇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비닐 천막을 치고 고공농성을 하며 유시영 대표이사의 법정구속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고 한광호 님의 장례는 치러집니다. 싸움은 진행 중이고 이분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거기 늘 공룡의 카메라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 영화 <사수스틸 이미지.


동료로서 <사수>가 지켜낸 자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용자 측 직원에게 멱살을 잡힐 뻔하는 조영은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언뜻 비칩니다. 청소년기에 보았었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 공룡의 정회원으로서 여전히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대화하던 회사측 직원이 갑자기 카메라에 달려들 때 노동자들은 얼른 몸으로 막아서며 말합니다. 우리 카메라한테 왜 그러느냐고. 노동자들의 카메라로 지내온 세월. <사수>에는 2011년부터의 그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시간을 꼭 한 번 만나 보세요. (문의: 생활공동체 공룡 043-266-4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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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세상 보기

생각해 봅시다


그 몸으로 임신할 수 있니?

박지주/ 장애여성자립생활센터 파란대표

 

 

나는 올해 48살이 되었다. 나의 장애 이야기를 조금 하자면, 초등학교 때부터 척수염을 앓았고 신경마비가 와서 중학교 2학년 중퇴의 학력으로 21살까지 재가 장애인으로 살았다. 재가 장애인이란 일 년에 집 밖을 한두 번 나갈까 말까 할 정도로 외출이 없는 장애인을 말한다. 외출하더라도 주기적이고 주도적인 사회적 관계를 맺지 못하고 하루를 주로 집에서 보내며 사회 참여에 원활하지 못한 장애인이다.

우리 엄마는 부잣집의 막내딸이었지만 모든 재산은 남자 형제에게만 상속되었고, 가난한 아버지와 결혼하여 우리는 가난을 물려받았다. 가난한 집이 그러하듯 의료·교육 환경은 열악하여 나의 장애는 잘 치료되지 못하고 휠체어에 의존한 삶이 이어졌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나는 왜 집에만 있나?’ 하는 의문을 안고, 텔레비전과 음악, 자연, 책을 친구 삼아 지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늘 사람이 그립고 친구가 그리웠다. 사람은 사회 안에서 살며 인간됨을 완성하는데, 나의 사춘기는 친구다운 친구 한 명 만들지 못한 채 흘러갔다. 그러던 중 장애인 단체의 회원 방문을 받아 운전을 배웠고, 차를 몰고 다니며 사회와 교류하고 꿈을 키워 22살의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연애를 통해 장애가 있는 내 몸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지 경험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만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자연스러운 스킨십을 하고 본능적으로 성관계에 대한 열망이 일었다. 그러나 아무런 준비 없이 시도하면서 나는 가슴 아픈 수치심을 맛보았다. 척수장애인이 성관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방광을 비우는 일이다. 그런 교육이나 지원을 받아 본 적 없이 장애가 있는 몸으로 사랑을 할 때 어려움이 발생한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의식과 욕망의 실현체인 몸이, 개인적·사회적 관계를 형성할 때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한 이해가 없을 경우 몸의 통로가 제대로 가동할 수 없다. 장애로 인한 실패의 아픔을 겪은 충격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남아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자연 안에서 깨달은 나는, 나처럼 상처받은 장애 여성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해야겠다는 의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학교 중퇴 학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독학으로 대학교 문을 두드려 드디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유학을 오게 되었다. 사회 구조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되어 여성주의적 시각으로 가난의 근본, 자본과 노동에 관한 공부를 하며 숭실대학교를 상대로 중증 장애인 교육권 투쟁도 이어 갔다. 3년여간의 소송에서 승소하여, 힘들고 어려웠지만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누구나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장애인에게도 있다는 판결에 기뻐하며, 존엄한 인격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을 영위하고 사회적 변화를 꾀하려 노력하였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비장애인 중심 사회에서, 장애가 있는 여성은 여성으로서의 존재도 부정당하기 일쑤이다. 나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생물학적 여성성을 의심받았고, 심지어 고착화된 성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장애가 있는 여성이란 이유로 결혼 제도 진입과 임신·출산도 부정당했다. 장애 여성의 재생산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질문들 앞에서 좌절하기도 했다. ‘그 몸으로 임신할 수 있니?’, ‘생리는 하니?’라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더 아이를 낳고 싶다는 욕망이 샘솟았다.

아이를 낳고 싶다는 것은, 장애 여성에게는 단순히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을 넘어 큰 삶의 선택이자 기회이며 실현이 어려운 소망을 깨고 싶은 도전이기도 했다. 임신과 출산은 금기의 영역처럼 존재하는 장애 여성에게 대한 편견을 깨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이 셋을 낳아 키우고 있다. 살면서 참 잘한 선택이고 행복한 선택이다. 그러나 아이 셋을 키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엄마의 피와 살과 영혼이 담긴 삶을 통째로 아이를 키우는데 쏟아부어야 하는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피눈물 나는 삶의 현장이다. 장애가 있는 몸은 갓 태어난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일에서부터 고통을 느끼기 시작한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지만 육아는 90퍼센트 이상이 육체노동이다. 육아의 현장에서 나의 장애가 더욱 심한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육체라는 도구가 또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자아실현의 통로이나, 장애가 있는 엄마는 아이를 맘껏 안거나 업을 수가 없다. 아이를 업지 못한다는 것은, 수시로 아이를 안아 주지 못한다는 것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가?

넘어진 아이를 두 손으로 안지 못하고, 놀이터에서 우는 아이의 안전을 지키려다가 전동휠체어가 구르고,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하는데 아이와 함께 타고 갈 구급차가 없다. 아이는 아프다고 목 놓아 울고, 엄마는 그걸 보고도 함께 병원에 가지 못하는 현실이 과연 옳은가. 장애 엄마의 장애가 장애로 다가오는 것이 인간으로서 존엄함을 유지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인가.

장애인도 사람이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본능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아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존엄함이 유지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장애 부모의 입장에서 사회적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장애를 개인적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사회가 함께 이해하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 엄마의 모성권은 양육 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실현 가능한 것이다. 비장애인의 모성권 개념에 추가적으로 반드시 들어가서 확대된 모성권 범주의 실현이 필요한 것이다. 육체노동이 90퍼센트가 넘는 육아를 장애 엄마가 홀로 고스란히 떠안아야 하는 건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이 필요하고, 그것은 동정이나 시혜가 아닌 권리로서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현재 비장애인에게 주어지는 아이돌보미 제도는 장애 부모에게 진입 기회만 제공하고 있고, 장애 부모의 특수성을 반영한 시간 확대, 자부담 폐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장애 부모가 아이를 양육할 때는 반드시 사회권적 양육받을 권리가 실현되기 위해 한걸음 나아간 장애 부모 입장의 제도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장애인 활동지원제도에도 아이가 태어나는 6개월간은 양육 활동 지원이 가능하나 그 이후에는 전무한 상황이다. 각 지자체에서 실시하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양육 관련 서비스도 낮은 수혜율과 시간을 보이고 있다.

장애 엄마가 바라는 것은 딱 하나이다. 내 장애가 장애가 되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면서 아이와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이다. 부정적인 장애가 있는 엄마가 아니라, 그냥 현상으로서 장애가 있는 엄마이고 싶고, 최대한 아이를 잘 키우고 행복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장애를 최소화할 수 있는 양육받을 권리가 장애인의 특수성을 반영한 보편적 권리로 실현되어야 한다.

장애 부모와 그 자녀를 바라보는 부정적인 편견과 사회적 시선의 개선도 필요하다. 그냥 우리의 이웃으로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로 돌아봐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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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시래기 만찬

윤혜신/ 밥 짓고 꽃밭 가꾸는 시골밥집 미당주방장, 착한 밥상 이야기저자

 

 

먹고, 입고, 자는 것 중에 (이게 살림살이인데) 가장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보면 단연코 먹는 일이 우선이다. 옷이야 서너 벌로도 살 수 있고 집이야 내 몸 눕힐 한 평만 있으면 되지만 먹는 일은 하루 세끼 꼬박꼬박 안 먹어 주면 살 수가 없다. 내가 학창 시절에 종교적인 이유로 금식이라는 걸 몇 번 해 봐서 잘 아는데 하루, 이틀, 사흘···. 이 사흘째가 되면 아주 죽을 맛이다. 살맛이 안 나면서 기운은 기운대로 쪽 빠지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첩에 금식이 끝나면 먹어야 할 음식 목록을 적는 일이다. 그러다 금식이 풀리면 보식이라고 멀건 풀띠죽 한 그릇에 동치미 한 보시기를 먹는데, 그게 뭐라고 먹고 나면 어디서 그런 힘이 샘솟는지, 기어갔다가 뛰어온다. 밥 아니 죽 한 그릇에 사람이 죽었다 살았다 한다. 올해는 그래서 먹는 이야기로 시작해 볼까 한다.

겨울이 깊어질수록 푸성귀들은 비실거리고(온실 재배) 비싸지고 제맛도 안 나니, 나는 봄부터 가으내 잘 갈무리해 두었던 먹거리 주머니들을 슬슬 풀어 본다. 마른 채소들, 마른 나물들이 제일 많다. 그중에서도 김장 때 빨랫줄에 척척 널어 말린 무청 시래기가 많으니 그걸로 별미를 만들어 보려고 가져와 삶기 시작한다.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 무기질과 비타민, 5대 영양소까지 배웠고, 요즘은 하나 더해서 6대 영양소가 섬유질이다. 시래기는 그야말로 별 영양가가 없는 거렁뱅이 음식으로 취급되다가 요즘처럼 생활습관병이 젊어서부터 생기는 영양 과잉 시대에 꼭 필요한 필수 영양 식품이 되었다. 그러니 겨우내 이 시래기를 맛나게 먹고 내장과 혈관의 나쁜 기름을 쭉쭉 씻어 내자.

정월 대보름에 먹는 나물에 시래기나물이 빠지지 않는다. 나물로 볶아 먹어도 맛나지만 나는 요즘 뻑하면 시래기를 푹 지져 먹는다. 시래기에 된장을 넉넉히 풀고 멸치와 다시마도 한쪽 넣어 물을 넉넉히 잡고 한 시간 뭉근히 끓이면 국물이 잘박하게 졸아든다. 이때 파,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을 더하고 마지막에 들깨 가루와 들기름을 넣어 간을 맞춘다. 시래기지짐 한 냄비 끓여 놓으면 당분간 반찬 걱정이 없다. 갑작스레 우리 집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도 뚝배기에 바글바글 데워 주면 게눈 감추듯이 뚝딱 먹어 치운다. ‘밥 한공기 더!’를 외치며, 어디서 이런 맛난 시래기를 먹느냐면서.

이 시래기가 또 효자인 게, 어디에 넣어도 순둥순둥 잘 어울린다. 딱히 반찬이 없을 때 숭숭 썰어 된장, 들기름, 마늘, 국간장에 주물주물 무쳐서 밥할 때 얹어 밥을 지으면 시래기밥이 된다. 여유가 있으면 그 안에 홍합도 넣고 조갯살도 굴도 넣는다. 나는 입맛이 워낙 촌스러워서 해산물보다는 멸치 서너 마리 넣고 시래기 듬뿍 올려 밥을 지어 먹는 걸 더 좋아한다. 간이 조금 싱겁다면 양념간장을 살짝 넣고 비벼도 좋다. 겨울이라 미나리를 종종 썰어 미나리양념장을 만들면 향긋하니 입맛이 돈다. 우리 집 개골창에 요즘 미나리가 한창이다. 신기하게도 날이 추워지면 미나리가 더 파랗게 올라온다. 겨울엔 상록수 빼고 파란 건 보리와 미나리다. 식당 일은 보통 2시가 넘어야 끝나니까 우리 일꾼들과는 2시에서 3시 사이에 점심을 먹는데, 그즈음엔 배가 한창 고플 때라 뭔들 맛있지 않겠냐 마는, 뜨끈하게 시래기지짐이나 시래기밥을 해서 둘러앉아 먹으면 일하면서 생기는 작은 불만들이 다 녹아 버린다.

내가 시골에서 밥집을 15년 하면서 밥집 운영의 철칙 중 하나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다이다. 그러니 우리 일꾼들의 밥 한 끼는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같이 먹자는 거다. 그래서 손님 찬보다 일꾼들 밥을 뭐 해 먹일까가 그날의 최대 관심사이기도 하다. 매일 음식을 만들어 서비스하는 일꾼들인데 스스로가 남은 거, 식은 거, 맛없는 거, 싸구려를 먹는다면 어찌 맛난 음식을 만들 수 있는가! 그래서 내가 해 준 점심을 다들 기다리고 좋아한다. 정성껏 지은 밥을 먹고 나면 시시콜콜한 불만들이 사라지고 섭섭함도 사라진다.

나도 조금 힘들었다가 일꾼들이 맛있게 먹어 주면 다시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 밥집 일꾼들은 14, 10, 6년씩 오래 일하는 편인데, 그 이유가 뭘까 생각하면 아마도 점심이 맛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맛있게 먹다 보면 이런저런 얘기가 자연스레 나오고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바쁜 여름에는 아르바이트학생을 쓰는데, 학생들 말이 여기는 밥이 맛있어서 자꾸 일하고 싶어요.’ 한다. 내 계획이 딱 맞았다!

모두들 이 시래기지짐을 먹으면서 어지간한 고기반찬보다 낫다고 한다. 시래기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음식 중에 시래기부침개가 있다. 시래기를 무르게 잘 삶아 밑간을 하고 거기에 밀가루를 넣어 반죽을 하는데, 국간장과 들기름을 약간 넣어 지지면 구수한 별미전이 된다. 생선을 조릴 때에도 밑에 시래기를 깔고 고기찜을 할 때도 시래기를 밑에 깔면 먼저 손이 가게 된다. 맛이 하나도 없는 시래기가 요리의 주인공이 된다.

여기 충청도에서는 무청을 안 버리고 그대로 소금과 고추씨를 넣어 비벼서는 아주 짜게 강짠지식으로 김치를 담갔다가 5월이 되면 꺼내서 하루 이틀 짠 기를 빼고 쌀뜨물에 들기름을 넣고 푹 지져 먹는 꺼먹지라는 게 있다. 올겨울엔 시래기 많이 말리느라 꺼먹지까지는 못했는데 돌아오는 겨울에는 꺼먹지도 한 항아리 담가 날이 더워질 때 꺼내 먹어야겠다. 나이 드니 이런 짠지같이 오래된 반찬이 좋아진다. 사람도 음식도 은근히 오래 묵은 게 구수하고 소화가 잘된다.

 

 

 

* 시래기지짐

재료: 삶은 시래기 600그램

양념: 멸치 10마리, 다시마 10x10센티미터, 된장 3큰술, 대파 1, 마늘 1큰술, 들깨 가루 3큰술, 들기름 1큰술, 고추씨 1/2큰술(청양고추 1~2)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를 깨끗이 씻어 5센티미터 길이로 잘라 냄비에 넣는다.

2. 물을 넉넉히 붓고 멸치, 다시마, 된장을 풀어 넣고 중약불에서 40분 정도 푹 끓인다.

3. , 마늘, 고추씨(고추), 들깨 가루 넣고 잘 섞어서 다시 한소끔 끓인다.

 그림_ 이동수


* 시래기밥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3

양념: 된장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들기름 1큰술,

국간장 1큰술

양념장: 간장 2큰술, 2큰술, 다진미나리 2큰술, 고춧가루 1작은술, 들기름 1작은술, 다진 마늘 1작은술

 

만들기

1. 쌀 위에 양념에 무친 시래기를 올려서 밥을 짓는다.

2. 뜸을 잘 들이고 풀 때 고루 섞는다.

3. 양념장과 곁들인다.

 

 

* 시래기전

재료: 삶은 시래기 200그램, 통밀가루 2, 11/2, 통들깨 3큰술

양념: 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만들기

1. 삶은 시래기는 종종 썰어 밑간을 한다.(국간장 1큰술, 들기름 1큰술, 다진 마늘 1작은술)

2. 밀가루에 물과 통들깨, 국간장과 들기름을 넣고 부침개 반죽을 고루 섞은 다음 밑간한 시래기를 넣고 고루 섞는다.

3. 식용유와 들기름을 반반 섞은 기름을 팬에 두르고 한 장씩 노릇하게 지져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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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이 나갔다. 만세!

최해옥/ 전업주부

 

 

나는 결혼 29년차 주부. 남편은 시사만화가다. 삼 년 전 이사를 하면서 우리 부부는 별거를 시작했다. 사이가 나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집을 한 채 구하고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예정 지역의 단독 주택은 허름하지만 제법 널찍하고 가격이 몹시 쌌다. 덕분에 남편은 독립된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남편은 활자 중독증이 있다. 그것도 중증이다. 책은 물론 글자가 쓰인 모든 종이를 허투루 하지 못한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그중에서도 책과 종이들은 만화 작업에 매우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자료라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손에 들어온 물건 중 버릴 것은 없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는 종이 신문이 다양한 정보의 원천이었다. 우리 집에는 신문이 늘 1미터 넘게 쌓여 있었다. 스크랩을 한다고 모아 두었지만 신문이 쌓이는 속도는 정리 속도를 추월했다. 좁은 집에 탑처럼 솟아 있던 신문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렸다. 참다못해 그의 외출을 틈타 몰래 갖다 버리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났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남편은, 안방을 작업실로 썼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책과 종이뭉치가 가득해서 안방에 있던 장롱에는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거실도 사정은 비슷했다. 풀지도 못한 박스 더미가 빼곡해 좁고 긴 통로만 남았다. 방이 세 개인 집에서 남편과 아들, 딸이 방을 하나씩 사용하고, 내 공간은 부엌과 통로만 남은 거실이 되었다. 베란다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짐 사이에서 잠들 때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짐을 모시고 사는 모양새였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남편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림_ 이동수(시사만화가)


이렇게 살다가 이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짐과 함께 남편이 분가해 나가자 마침내 내게도 공간이 생겼다. 나는 가장 넓은 안방을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만세!

남편의 작업실은 걸어서 3, 4분 거리에 있지만 난 드나들지 않는다. 이사 직후에 가 봤더니 마치 담배 연기로 결계를 친 듯 숨이 막혀 현관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같이 살 때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던 남편이 이제는 마음 놓고 담배를 피워 댄 탓이다. 몸의 건강에는 안 좋겠지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밥은 같이 먹지만 잠은 따로 잔다. 밤에는 깨어 있기 일쑤라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는 남편과 그렇지 않은 나는 생활 리듬이 아예 다르다. 마치 작업장에서 2교대를 하는 것처럼 내가 일어나면 그가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오후 두세 시까지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가끔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어졌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남편은 내가 한 음식을 잘 먹는다. 솜씨 없는 음식을 맛나게 먹어 주니 고마운 일이다. 가끔 그는 이런 말로 생색을 낸다.

반찬 투정 안 하고 주는 대로 잘 먹으니, 이 정도면 좋은 남편 아닌가?”

그런 거까지 하면 당신은 진작 소박맞았겠지.”

나도 상냥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해 준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지? 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남편에게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장점이 많고, 나에게는 말하지 않은 단점이 많다. 그런데도 그의 단점과 나의 장점만을 밝힌 것은 내가 펜을 쥐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글쓰는 자의 특권이 아니던가. 살아 보니 세상은 불공평하더라.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