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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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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2월호

년으로 살아가기

 

배달이요

야채죽(필명)/ 배달 대행 기사


 

딩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립니다. 곧이어 누구세요?” 하는 질문이 돌아옵니다.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같은 대답을 합니다.

배달이요.”

저는 배달 대행 기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동료 기사들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배달 대행은 도시빈민들이라는 말입니다. 돈이 없어서 빈민이 아닙니다. 보통은 400, 500만 원씩, 흔치는 않아도 1000만 원씩 가져가는 분들도 계십니다. 식당에서 음식을 서빙하는 노동자와 하나도 다를 것 없이, 그저 가게 밖에서 서빙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사회의 시선에는, 우리는 여전히 배운 것 없고 할 줄 아는 것 없어서 오토바이나 타는, 안전을 위해 헬멧을 써도 보안상의 이유로 헬멧을 벗어야 하는, 배달시키는 사람들의 편의와 위생을 위해 화물 엘리베이터를 타야 하는 하층민일 뿐인 듯합니다.

왜 배달을 하냐는 말에는 어쩌다 보니, 라는 대답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학생이었다가, 직업 군인이었다가, 족발집 사장님이었다가, 배달 기사가 되었습니다.

스무살, 어떻게든 서울에 있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은 했지만, 12년 동안 죽어라 외우고 익혔던 교과서는 전공이라는 큰 벽을 넘게 해 주지 못했습니다. 공부가 재미없고, 성적도 좋지 못했습니다. 결국 학업이 나의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부사관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스무살의 여름 훈련소에서부터 11월의 임관식, 이후 약 5년간 직업 군인으로서 살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지킨다는 사명감에 열심히, 묵묵하게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사명감만으로는 평생 군인으로 살 수 없었습니다. 4년간의 의무 복무가 끝나고, 장기 복무가 아닌 3년의 연장 복무가 결정되었습니다. 게다가 진급할 수 있는 사람은 1명뿐이었지만, 나만큼 열심히, 나보다 더 오래 노력한 사람들은 7명이나 되었습니다. 평생 군대에 말뚝을 박고자 대학을 포기했던 저는, 다시금 군 생활을 포기하고 전역을 선택하여 세상으로 나왔습니다.

5년간의 복무 끝에는 5년간 모인 적금과 퇴직금이 남았습니다. 전역 간부에게 주어진 취업의 기회도 있었지만, 사무실에 앉아서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는 업무에 적응할 수 없어 얼마 가지 못하고 그만두었습니다. 무작정 쉴 수만은 없어서 친구의 부모님이 하시는 족발집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직원 세 명이 삶고, 썰고, 배달까지 하는 작은 가게였지만 꾸준히 손님이 찾는 맛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곧 친구와 함께 돈을 모으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신림동 어느 한 가게에서 족발집의 사장님으로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장사도 잘되고 배달 주문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매출이 높은 날엔 하루에 300만 원씩 팔리기도 했습니다. 이렇게만 장사가 되면 아무 걱정 없이 대출금도 갚아 나가고 돈도 많이 벌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장사는 쉽지 않았습니다. 점차 매출은 줄어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이 나눌 수 있는 돈은 겨우 2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동업을 제안했던 친구가 먼저 포기 선언을 하고, 혼자만으로는 역부족이었기에 아쉽지만 저 역시 족발집의 꿈은 그곳에서 내려놓았습니다. 가게를 정리하고 남은 것은 3000만 원 가까이 되는 대출과 작은 전세방, 오토바이 한 대 뿐이었습니다.

폐업 이후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봤지만, 25살이지만, 배운 것이라고는 총을 쏘거나, 병사들을 지휘하거나, 족발을 만드는 방법밖에 없고, 경력 또한 별거 없는 고졸 청년에게 선택지는 월급 150만 원 정도의 일자리뿐이었습니다. 보통의 직장으로는 대출을 갚으며 생활을 꾸려 갈 수 없다는 판단에, 결국 남아 있던 한 대의 오토바이로 장사할 때 함께했던 배달 대행업체의 기사로서 근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햇수로 5년차, 전업 배달 기사로 4년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에 걱정하던 3000만 원의 빚은 1년 만에 정리할 수 있었고, 아직 절반은 은행의 것이지만 작은 내 집도 마련했습니다. 중간에 잠시 위험 부담이 높은 배달 기사보다는 안전을 찾아 회사를 다닌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높은 수입과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근무가 그리워 어느새 배달 기사로 돌아왔습니다. 큰 사고를 겪어 후유증이 남아도 어느새 익숙해진 생활은 다시금 배달을 하게 합니다.

후회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가족, 여자 친구에게도 숨겼던 배달 기사라는 직업이, 이제는 어딜 가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천직이 되었습니다. 여러 번 겪었던 실패들은 이제 다양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이 경험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 만나게 되는 다양한 손님과 상점 직원들을 상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여러 예기치 못한 상황에도 당황하지 않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줍니다.

배달 기사로 첫 여름, 한 대학가에서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던 학생들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놀았으면 저렇게 배달이나 하고 다닐까?”

제 딴에는 저에게 들리지 않게 친구 귓가에 작은 소리로 얘기했겠지만, 배달 기사라는 자신이 부끄러웠던 당시의 저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되었습니다. 그 순간에는, 소심하게 한마디 하는 것으로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 여러분이 다니는 대학교보다 더 들어가기 힘든 대학교 다녔어요.”

그분들을 다시 만나면 이제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배운 것이 없어서 배달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해서 준비하고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는 것처럼 저도 이 직업을 선택해서 일하고 있는 겁니다.”

아직은 사회적인 인식이 부족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점차 나아지는 것을 체감합니다. 전에는 추운 날 음식이 식었다고 타박을 듣기 일쑤였는데, 이제는 꽤나 자주 추운 날씨에 배달하느라 고생하셨다는 한마디를 듣습니다. 전에는 빨리오세요라고 하시던 손님들이 이제는 안전 운전하세요라는 말을 건네줍니다. 2019년 새해를 맞아 아주 조금이지만 더 나아졌다는, 앞으로는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도 초인종을 누릅니다. 누구세요?”라는 질문에 수천 번, 수만 번 했던 대답을 다시 되풀이합니다.

배달이요.”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