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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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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이 나갔다. 만세!

최해옥/ 전업주부

 

 

나는 결혼 29년차 주부. 남편은 시사만화가다. 삼 년 전 이사를 하면서 우리 부부는 별거를 시작했다. 사이가 나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집을 한 채 구하고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예정 지역의 단독 주택은 허름하지만 제법 널찍하고 가격이 몹시 쌌다. 덕분에 남편은 독립된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남편은 활자 중독증이 있다. 그것도 중증이다. 책은 물론 글자가 쓰인 모든 종이를 허투루 하지 못한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그중에서도 책과 종이들은 만화 작업에 매우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자료라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손에 들어온 물건 중 버릴 것은 없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는 종이 신문이 다양한 정보의 원천이었다. 우리 집에는 신문이 늘 1미터 넘게 쌓여 있었다. 스크랩을 한다고 모아 두었지만 신문이 쌓이는 속도는 정리 속도를 추월했다. 좁은 집에 탑처럼 솟아 있던 신문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렸다. 참다못해 그의 외출을 틈타 몰래 갖다 버리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났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남편은, 안방을 작업실로 썼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책과 종이뭉치가 가득해서 안방에 있던 장롱에는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거실도 사정은 비슷했다. 풀지도 못한 박스 더미가 빼곡해 좁고 긴 통로만 남았다. 방이 세 개인 집에서 남편과 아들, 딸이 방을 하나씩 사용하고, 내 공간은 부엌과 통로만 남은 거실이 되었다. 베란다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짐 사이에서 잠들 때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짐을 모시고 사는 모양새였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남편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림_ 이동수(시사만화가)


이렇게 살다가 이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짐과 함께 남편이 분가해 나가자 마침내 내게도 공간이 생겼다. 나는 가장 넓은 안방을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만세!

남편의 작업실은 걸어서 3, 4분 거리에 있지만 난 드나들지 않는다. 이사 직후에 가 봤더니 마치 담배 연기로 결계를 친 듯 숨이 막혀 현관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같이 살 때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던 남편이 이제는 마음 놓고 담배를 피워 댄 탓이다. 몸의 건강에는 안 좋겠지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밥은 같이 먹지만 잠은 따로 잔다. 밤에는 깨어 있기 일쑤라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는 남편과 그렇지 않은 나는 생활 리듬이 아예 다르다. 마치 작업장에서 2교대를 하는 것처럼 내가 일어나면 그가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오후 두세 시까지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가끔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어졌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남편은 내가 한 음식을 잘 먹는다. 솜씨 없는 음식을 맛나게 먹어 주니 고마운 일이다. 가끔 그는 이런 말로 생색을 낸다.

반찬 투정 안 하고 주는 대로 잘 먹으니, 이 정도면 좋은 남편 아닌가?”

그런 거까지 하면 당신은 진작 소박맞았겠지.”

나도 상냥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해 준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지? 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남편에게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장점이 많고, 나에게는 말하지 않은 단점이 많다. 그런데도 그의 단점과 나의 장점만을 밝힌 것은 내가 펜을 쥐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글쓰는 자의 특권이 아니던가. 살아 보니 세상은 불공평하더라.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