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8년 10월호
쉬엄쉬엄 가요
독립영화 이야기_ 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감독의 <사수>
우리가 없던 시간의 기록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솔직한 고백을 드립니다. 유성기업에 대해서는 자주 들었습니다. ‘장기투쟁 사업장’으로서 늘 이름이 나왔고 그래서 2014년 ‘밀양·청도 72시간 송년회’의 방문지이기도 했었죠. 하지만 저는 그동안 이름만 알고 있었어요. 2014년 그때에 밀양, 청도 주민들의 일정에 부분적으로 동행하기도 했으면서도 유성기업의 사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구미 스타케미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코오롱 해고 노동자, 씨앤앰 케이블 노동자, 기륭 노동자…. 다 열거하기에도 숨이 찹니다. 너무 많은 곳에서 너무 긴 시간동안 절절한 사연을 안고 싸우는 분들이 너무나 많아서 각자의 차이는 뭉뚱그려진 채 이름으로만 구분될 뿐이었습니다, 제게는. 그러다가 이번에 DMZ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만난 <사수>라는 영화 덕분에 이제야 그곳이 제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사수>라는 영화도 이번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수>를 만든 생활공동체 공룡(이하 공룡)에 대해서는 잘 압니다. 공룡 사람들은 미디어교육 워크숍 같은 데 가면 만나는 분들입니다. 그 분들은 청소년들과 교육 활동을 하면서 지역에서 함께 살아내고 성장하는 것에 대해 고민하는 분들이라 평소 존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거든요. 공룡이 만든 영화라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 달 영화로 <사수>를 추천합니다.
2016년 여름,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마지막 메시지를 남기고 유성기업 노동자 한광호 님이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2011년부터 시작된 회사의 노조 파괴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키려 싸워 온 지 5년이 되어 갈 무렵이었습니다. 무장한 경비용역들로부터 무차별 폭력을 당하며 감시와 차별의 일상을 살아오던 일터 동료들에게 한광호 님의 죽음은 곧 자기 자신의 일이기도 했습니다. 또다시 동료를 잃을 수 없다는 각오로 유성기업의 노동자들은 노조 파괴를 끝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싸웁니다. <사수>는 그 시간의 기록입니다.
▲ 영화 <사수> 스틸 이미지.
공룡 사람들이 유성기업을 만난 건 2011년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때문이었습니다. 폭력의 기록이 담긴 피켓을 든 채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웃지 않았고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고 김설해 감독은 말합니다. 김설해 감독이 들려주는 유성기업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2011년 5월 18일 그들의 회사는 야간노동을 없애기로 한 노조와의 약속을 어기고 교섭 도중 기습적으로 직장을 폐쇄합니다. 용역들이 공장 문을 막은 채 폭력을 행사하고 2000명의 경찰들이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쫓아냅니다. 그렇게 기나긴 싸움은 이어집니다. 처음 보는, 하지만 낯설지 않은 화면들이 이어집니다. 투쟁의 일상 중 하루였을 어느 날, 노동자들이 천막을 철거합니다. 그중 한 노동자에게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잖아요”라는 말을 하면서 인터뷰에 응해 줄 것을 청하지만 그 노동자는 나는 고생 안 했다고, 다른 사람 섭외해 주겠다고 쑥스럽게 웃으며 카메라를 피해 도망갑니다. ‘1994년 유성기업 입사’라는 설명 자막과 이름이 떠도 저는 몰랐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고공농성에 돌입한 동료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안쓰럽다”는 심정을 토로했던 그분의 얼굴이 장면이 바뀌면서 영정사진 속에서 웃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고 한광호 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은 생전의 한광호 님을 알고 있었던 거죠. 인형극을 준비하고 연습하며, 천막을 치고 걷으며, 용역의 폭력에 함께 맞서 싸우며, 5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내 온 겁니다. 그래서 영화를 두 번째로 볼 때에는 조금은 다른 마음으로 화면들을 보게 됩니다. 쑥스러워하던 한광호 님의 인터뷰가 끝난 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하며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멀리서 찍은 화면이 보입니다. 보통은 씬의 마무리 화면으로 쓰이는 롱샷 안 그 어딘가에 한광호 님의 모습이 있는 겁니다. 어제와 다름없는 일상이라고 생각했을 그 순간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화면을 고르며 떠올렸을 지나간 시간의 추억들. 그리고… 국석호, 김성민, 김수종, 김풍년. 지금은 함께 있지만 다가올 미래는 가늠이 안 되어서 불안한 이 관계들.
영화가 진행될수록 각자의 사연들이 하나 둘씩 펼쳐집니다. 그 사연들은 고 한광호 님의 시간과 겹쳐집니다.
“떠나고 싶은 생각… 어떻게 하면 끝낼까 이런 생각. 심지어 극단적인 생각들을 하게 되죠. 차로 밀어버릴까. 어디 숨어 있다가 오며는 급브레이크 잡아가지고 뭐 이런 생각. 확 들이받고 싶은”(김수종)
▲ 영화 <사수> 스틸 이미지.
거기에 떠나간 동료에 대한 미안함까지 겹칩니다.
“나 때문에 죽은 것 같고 내가 더 나서지 못해서 죽은 것 같고. 내가 좀 더 그 자리에 서서 그 형(고 한광호 님)보다 좀더 한발 더 앞서서 아니면 옆에서 왜 못해 줬을까.”(김풍년)
김풍년 님이 들려주는 그다음 얘기에 또 충격을 받습니다. 세 살, 네 살, 많아야 여섯 살 되는 자신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목을 조르고, 아이가 피가 나는데 피 난다고 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스스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는 김풍년 님.
영화를 보고 유성기업에 대해서 찾아보면서 참 많이 놀랬습니다. 현대와 기아자동차에 피스톤링, 실린더사이더와 같은 핵심 엔진 부품을 납품하던 이 기업의 2012년 말 기록을 보면 매출액, 당기순이익, 직원 평균 연봉 등이 대기업에 밀리지 않습니다. 영화를 보고 ‘창조컨설팅’이라는 낯설지만 끔찍한 기업의 이름도 알게 되었습니다. 노조파괴 전문기업이래요. 이 기업이 망가뜨린 건 유성기업 만이 아니더군요. 상신브레이크, 발레오만도, 보쉬전장, 에스제이엠(SJM)…. 악명높은 이 기업의 배후에 현대차가 있다는 사실까지 알고 나면 한숨 밖에 안 나옵니다. ‘창조컨설팅’의 그 비인간적인 창조성이 노동자들의 삶을, 그 가족들의 평화를 어떻게 깨뜨리는지 영화는 속속들이 보여 줍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무릎 꿇지 않습니다. 길거리에 비닐 천막을 치고 고공농성을 하며 유시영 대표이사의 법정구속까지 이끌어냅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고 한광호 님의 장례는 치러집니다. 싸움은 진행 중이고 이분들의 앞날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거기 늘 공룡의 카메라가 함께 있을 거라는 사실에 위안을 받습니다.
▲ 영화 <사수> 스틸 이미지.
동료로서 <사수>가 지켜낸 자리에 경의를 표합니다. 사용자 측 직원에게 멱살을 잡힐 뻔하는 조영은 감독의 모습이 화면에 언뜻 비칩니다. 청소년기에 보았었는데 이제 성인이 되어 공룡의 정회원으로서 여전히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더군요. 대화하던 회사측 직원이 갑자기 카메라에 달려들 때 노동자들은 얼른 몸으로 막아서며 말합니다. 우리 카메라한테 왜 그러느냐고. 노동자들의 카메라로 지내온 세월. <사수>에는 2011년부터의 그 모든 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 시간을 꼭 한 번 만나 보세요. (문의: 생활공동체 공룡 043-266-40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