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9년 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나는 그(놈)들이 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김경리/ 행복한책방 일산점 점장
또래에 비해 발육이 빠른 5학년이었다. 브래지어를 하는 초등학생이 아주 드문 때였기에 나는 ‘노브라’로 학교를 다녔다. 남들 시선을 끌고 싶지 않아서 그랬지만 오히려 더 눈에 띄었을 것이다. 담임이 내 가슴께를 흘끔거리는 걸 느꼈지만 그때의 나는 그 눈빛을 총애로 여겼던 것 같다.
어느 날 방과 후에 담임은 시험지를 채점해야 한다며 나만 교실에 남으라 했다. 채점을 마친 시험지 꾸러미를 들고 담임에게 다가가자 그놈은 나를 뒤에서 안더니 “만져 보자, 만져 보자” 하면서 내 가슴을 한참 동안 주물거렸다. 그 행위가 어떤 의미인 줄은 몰랐지만 너무 무서워 눈물이 나려 했다. 그럼에도 울음을 꾹꾹 누르고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 후로 학교 가는 게 싫어진 나는 자주 배가 아팠다.
중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며 엄마가 일대일 수영 강습을 등록해 줬다. 수영 강사 그놈은 처음엔 소심하게 만졌다. ‘제대로 된 자세를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다’고 우길 수 있을 만큼만 만지다가 내가 반항을 안 하자 점점 대범해졌다. 그 상황을 즐기는 듯 나만 보면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구역질이 났다. 참다못한 나는 울면서 엄마에게 ‘대충만’ 얘기했다. 그런데 펄펄 뛸 줄 알았던 엄마가 오히려 나를 나무랐다. 수영을 가르치다 보면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데 내가 너무 예민하다는 것이다. 억울했다. 더 ‘자세히’ 얘기하려면 재연을 해야 했는데 그건 너무 수치스러웠다. 다시는 수영을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우자 엄마는 돈이 아깝지도 않느냐며 등짝을 때렸다. 하지만 그놈 얼굴을 두 번 다시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직도 수영을 못하는 건 순전히 그놈 탓이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우리 집은 한 달 가까이 집수리를 하던 중이었다. 어른을 공경하는 착한 학생으로 교육받은 우리 형제들은 학교를 다녀오면 일하는 분들에게도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곤 했다. 하루는 그중 목수 아저씨 한 명이 “오냐, 잘 갔다 왔냐” 하면서 내 엉덩이를 잠시 만졌다 놓았다. 툭 한 번 친 게 아니다. 잠깐이지만 분명히 ‘움켜쥐었다’. 이번엔 내가 당한 일이 어떤 건지를 확실히 알 만한 나이였다. 너무 분한 나머지 경련이 일면서 울음이 멈추질 않았다. 결국 저녁 밥상에서 내가 당한 일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내 편은 없었다. “딸 같아서, 이뻐서 그런 걸 가지고 계집애가 까탈맞게 군다”나.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놈보다 부모님이 더 미웠다.
스무 살 이후로도 ‘여자로 태어난 죗값’을 끊임없이 치러야 했다. 신체적 성희롱이 드문드문 겪는 일인 데 비해 언어폭력은 일상적으로 일어났다. 일일이 맞서기도 피곤할 정도였다. 술 마시러 가자 할 때 볼일이 있어 빠진다고 하니 “여자가 없으면 술맛이 나냐”고 말하는 선배도 있었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항의하면 “농담 가지고 뭘 그리 무섭게 덤비냐”며 달래는 그들은 평소에 여자를 대놓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보통의 평범한 남자들이었다. 이런 일은 수시로 일어났지만 매번 싸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났지만 번번이 ‘쎄게’ 대응하는 ‘피곤한 여자’로 살 용기도 없었다.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남자 선배가 여자 선배의 뺨을 때리던 시절의 이야기다. 그 남자 선배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싸우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키가 작고 생김새도 순해 보이니까 나를 만만하게 보나 싶어 똑똑하고 야무진 여자로 보이려고 애를 썼다.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하려면 단단해 보여야 했다. 그 대가로 턱관절장애를 얻었다. 강해 보이려고 이를 꽉 다물고 다닌 결과다.
▲ 사진_ Prentsa Aldundia
이런 얘기를 하면 두 가지 반응을 보게 된다. 여자들은 “어쩜 너나없이 그렇게 비슷한 경험이 많으냐”며 놀란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런 일들은 너무 흔해 새삼 얘깃거리도 안 될 정도”라는 여자들의 말에 놀란다. 이런 경험이 얼마나 두고두고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면 더 놀라겠군. 내 경우에는, 성적(性的)으로 결벽증이 생겼고 그로 인해 결혼 생활이 힘들었다.
오랫동안 혼자 담고 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니 새삼 분이 끓어오른다. 골목길에서 큰일 날 뻔했던 일, 전철에서 당했던 일 등 미처 말하지 않은 것들까지 떠올라 더 분하다. 이럴 땐 상상으로나마 복수를 한다. 죄질이 특히 나쁜 초등 담임을 불러내야겠다. 어떻게 복수하는지는 나만 아는 비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