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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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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7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탐방_ 한국잡월드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다?


어린이·청소년 진로 길잡이 역할 할 한국잡월드,

상시·핵심업무 맡은 체험관 비정규직 강사 직접고용은 외면


정인열/ <작은책> 기자

 

 

죄송해요. 저희는 비정규직이라 명함도 없어요.”

지난 64일 청와대 앞. 이곳에서 피켓 시위 중이던 한국잡월드 직업 체험강사(이하 체험강사)들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명함을 건네자 이재희 강사가 던진 말이었다.

한국잡월드(이하 잡월드)2012어린이와 청소년의 건전한 직업관 형성에 기여할 목적으로 설립된 고용노동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잡월드는 국내외 최대 규모의 종합직업체험관으로, 청소년체험관은 42개 체험실에 66개 직업을, 어린이체험관은 41개 체험실을 갖추고 54개 직업을 소개하고 있다. 얼마 전 관람객 500만 명을 돌파했는데 이 중 어린이체험관과 청소년체험관 관람객만 472만 명으로, 잡월드의 핵심은 바로 체험관이다.

▲ 경기도 성남에 있는 한국잡월드 내 어린이체험관 ⓒ작은책(정인열)


그런데 아이들의 체험을 이끄는 강사 275명은 모두 1년마다 근로계약서를 쓰는 위탁업체 직원이다. 잡월드가 체험관 운영을 민간기업에 위탁했기 때문이다. 잡월드는 2년마다 업체를 바꾸었고, 이 때문에 체험관 노동자들은 업무는 그대로 하면서 소속 업체만 4차례 바뀌었다. 상시 지속 업무임에도 2년 이상 계약 시에는 해당 위탁업체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하기 때문이다현재 이들의 소속은 서울랜드.

“2년 후면 떠날 회사니 명함 요구도 안 하게 됐죠. 진정한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어린이들이 체험강사의 안내에 따라 피자게게 체험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매일 불특정 다수의 관람객을 상대로 수업을 하는 체험강사들은 수업 외에도 체험실 기기 점검청소비품 관리까지 도맡아 한다직접 체험관을 관람해 보니 이들이 없다면 체험관 운영은 전면 불가능할 정도로 체험강사에게 의존하는 업무는 95퍼센트 이상으로 보였다.

청소년체험관의 경우 1시간짜리 체험을 하루 5회 진행하는데수업 사이사이 20분간의 준비 및 휴식 시간이 주어진다하루 종일 서서 일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앉아서 쉬고 싶지만 화장실만 겨우 다녀오는 실정이다메이크업숍·화장품 연구소 안미경 강사가 말했다.

수업 마치고 나서 체험실 다시 세팅하고, 다음 수업 10분 전에 스탠바이하고 5분 전에는 학생들 입장을 받으니까 쉬는 시간이 부족해요. 그러니 하지정맥류나 족저근막염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피자가게 체험강사들이 다음 수업준비를 하고 있다(수업 전·후 뒷정리와 준비를 해야하므로 쉬는 시간은 사실상 없다) ⓒ작은책(정인열)


대부분의 강사들은 한국잡월드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입사 지원을 했다청소년체험단 패션디자인실 이효진 강사는 해외 유명 화장품 브랜드 직원이었다안미경 강사 역시 대학에서 관련 전공을 하고 직업상담 자격을 취득했다각자 자신만의 전문성도 살리면서 공공기관에서 진로 교육을 하고 사회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안고 일을 시작했다그런데 잡월드와는 업무 연관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위탁업체가 있었고 업체도 2년마다 바뀌었다가장 크게 실망한 점은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임금이었다.

월급명세서를 보고 기가 막혔어요금액이 어이가 없어서요.”

최저임금 수준이었다법정 최저시급보다 100원에서 200원 많았고 최저임금에 맞춰 임금이 올라갔다기본급에 식대 84,000원과 휴일 근무 시 발생하는 약간의 수당이 전부였다복리후생도 없었다체험강사들의 평균 월급은 식대와 휴일 근무(월 4회 기준수당을 포함해도 약 182만 원이마저도 입사 1년차나 6년차나 똑같다반면 잡월드 전체 인력 중 약 13퍼센트를 차지하는 정규직의 평균 월급은 약 456만 원(잡월드가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에 보고한 자료).

이렇게 체험강사들이 최저임금에 고용불안 및 소속감도 없는 환경에 처하다 보니 회의감이 들고 의욕도 저하되는 것은 사실이다특히 청소년체험관 수술실 이재희 강사는 낮아지는 자존감을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처음에는 정말 사명감을 갖고 아이들의 좋은 미래를 위해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시작했어요진로 교육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도 많이 했고요그런데 직접고용돼서 일하는 형태도 아니고콘텐츠를 내가 주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자꾸 자존감이 떨어졌어요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가장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아이들을 대할 때면 흔들리던 마음이 다시 사라진다고 체험강사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내가 왜 힘들게 이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학생들 보면 다시 잘해 주고 싶고반갑고요반복이죠하하하.”

▲ 어린이체험관 이진형 강사가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2017년 7월 정부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정부는 체험강사처럼 상시·지속적 업무는 정규직 전환을 하도록 했다이 소식을 들은 체험강사들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직접고용 또는 자회사 설립도 포함되어 있었다잡월드는 직접고용 방식을 제외한 채 자회사 설립을 결정했다이를 위해 가이드라인에 따라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의 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를 꾸리고 의결 절차를 밟았다그런데 체험강사들은 실제 내용면에서 당사자를 배제한 형식적인 협의와 의결 절차였다고 주장한다.

“10여 차례 정규직 전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1, 2, 3차 회의에 저희는 끼지도 못했고 자기들끼리 하다가 결정적으로 우리가 필요할 때만 끼워 준 거예요.”

협의회에는 전문가 컨설팅업체로 G경영컨설팅 회사가 들어왔다그리고 올 3월 초 체험강사 단체 교육에 G업체 관계자가 등장해 이런 말을 했다.

“‘직접고용 원하는 사람은 양심이 없어요여러분들 말고도 밖에서 취업 준비 열심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기 정규직 들어오려고 하는데 여러분들 때문에 못하고 있다면 사회적 공감 얻으시겠어요?’ 하고 말하는데 굉장히 모멸감을 느꼈어요저 사람이 뭔데 갑자기 나타나서 직접고용은 안 된다고 해우리를 무시하네?”

체험강사들은 직접고용이 당연하고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그러나 잡월드 사측 인사와 전문가 컨설팅 인사들은 수적 우세로 또 다른 간접고용 형태인 자회사 설립을 추진하고 기존 외주 용역인 미화주차시설관리 노동자들에게 자회사 전환 동의서를 받았다이 문제의 핵심 당사자인 체험강사들은 자신들의 의견이 묵살되자 모여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서명을 거부하고 4월 1일 노조(공공운수노조 한국잡월드분회)를 설립했다.

불시에 일어난 일이었어요막다른 길에 몰려서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겠다 해서.”

▲ 6월 4일 청와대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이재희 강사와 강선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이후 전체 체험강사 257명 중 153명이 가입했고 강사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잡월드 앞에서 집회와 피켓 시위를 시작했다그리고 휴관하는 월요일에는 관계부처인 고용노동부청와대총리관저고용노동부 성남지청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잡월드는 체험강사는 잡월드 직원이 아니라는 공문을 냈다청소년체험관 모터스포츠실 강선경 강사가 말한다.

최근에 노조 설명회 때문에 늦게까지 회사에 남은 적이 있었거든요체험실 입구 대기석에 모여 있었는데 잡월드에서 업무 끝나고 나서는 사용하지 말라는 거예요이유를 물었더니 우리는 서울랜드 직원이지 잡월드 직원은 아니니까 사용하지 말라는 공문이 내려왔어요기분 되게 나빴어요.”

2012년 설립부터 지금까지 잡월드의 핵심 업무는 직업체험관이다. 500만 관람객 중 체험강사의 지도를 받지 않은 어린이·청소년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의 꿈한국잡월드에서 찾으세요’ 라며 홍보하는 잡월드는 체험강사들이 쌓아 온 업적을 인정하지 않고 정당한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 청소년체험관 이재희 강사와 안미경 강사(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직접고용이 왜 필요하냐고요내 일이니까책임감과 애정을 갖게 되잖아요이게 잡월드를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해요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니까 좋은 세상 만들어 줘야죠.”

우리 아이들에게 심어 줘야 할 건전한 직업관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그렇기에 이들은 누구보다 잡월드의 일꾼으로 나무랄 데 없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