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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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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0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강사법 적용 이후에 생긴 일

김어진/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 서울경기인천강원지역 분회장

 

 

2학기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이맘 때쯤이면 한 학기 강의 줄거리의 서론이 지나고 본론으로 들어가기 시작했을 것이다. 얼굴도 조금씩 익어 가고 학생들의 표정도 마음에 담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내가 대학 시간강사를 시작했을 때는 늦은 결혼에, 아이까지 낳고 나서였다. 8년 동안 다섯 개 대학을 돌아다니면서 일명 보따리 장사를 전전했지만 그래도 학생들하고 강의실에서 호흡했던 그 순간은 참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학생들의 밝아지는 표정과 함께 느낌표가 공중에서 떠다니는 것 같은 순간들이었다. 그 시간을 위해 강의 준비에 몸과 마음을 다했다.

다음 학기에도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조교에게 연락이 올까전전긍긍하면서 속앓이를 했던 순간들이기도 했다. 대학 강의의 절반을 담당하면서도 연구와 강의를 안정적으로 해 나갈 수 있는 그 어떤 권리 주장도 할 수 없었다. 연구실은커녕 휴게실조차 없어서 창고에서 대기해야 했다는 얘기, 대형 강의의 경우 채점하느라 졸도 직전까지 갔다는 얘기, 부당한 것 따지면 곧바로 강의 못 받을 것이 뻔해 숨죽여 왔던 대학 시간강사들의 얘기들은 12권 전집으로도 모자라다.


강사법 적용 이후로 1년마다 계약을 하고 3년 보장이라 하니 이번 학기부터야 이런 불안감은 좀 덜해질지 모른다. ‘교원지위 보장이 대학 시간강사 신분의 안정성을 보장해 줄지도 지켜볼 대목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 공개채용 과정에서 많은 대학 시간강사들이 또 한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전임 수준의 연구 경력을 요구하는 학교가 적지 않았다. 생계형 시간강사들은 제대로 논문 쓸 시간도 여유도 없다. 대학에서 부교수가 된 친구는 최근 학기당 18학점 이상을 강의해야 했는데 그조차 논문은 방학에야 겨우 한 편 쓸까 말까 할 정도라고 한다. 자기 연구실도 있고 연구비도 쓸 수 있는 전임교원조차도 논문 쓰는 시간과 여유가 팍팍한데 생계형 대학 시간강사들은 오죽할까. 교육부가 해고 강사들을 지원하겠다며 추경예산으로 편성한 연구 지원 사업에 얼마나 많은 해고 강사들이 지원했을지도 걱정이다(교육부 통계로 해고 강사가 7500명이라는데 지원 대상은 2000명에 불과). 그런데 한 대학은 최근 3년간 등재지 논문 3편을 요구했다! 추천서를 가져오라고 요구하는 학교도 있었다.

4대 보험이 되는 다른 직장을 가지고 있어 대학들이 좋아라 하는 겸임초빙 교수를 미리 왕창 뽑아 놓는 경우도 많았다. 아예 겸임초빙을 빙자하라며 여전히 건강보험 되는지를 묻는 경우도 많았다. 공정성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말이 공채지 내정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대학이 물갈이를 하려 했는지 반백 살 넘어간 선생님들은, 특히 인문 사회 쪽에서는 낙방(공채 탈락)되는 경우도 많았다. 정말 힘든 여름이었다.

강의를 잡은 선생님들은 한숨을 돌렸지만, 3년 뒤에는 또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다.

대학 시간강사들이 모이면 다들 하는 얘기지만, 10년 가까이 대학 강의를 하면 강의 기술이나 경험에 물이 오르기 시작한다. 강의실에서 학생들 눈빛을 보면 우리는 대번에 안다. ‘, 내 말이 좀 어려웠구나!’ ‘! 이제는 알아들었다는 얘기구나!’ 그래서 한국 대학생들의 강점과 약점, 그들의 고민,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야 우리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제대로 전송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매번 새로운 연구 동향, 국제 비교 사례, 서점에서 20대들이 많이 보는 책 동향, 심지어는 청춘 개그감 등을 익히면서 스스로를 단련시켜 왔다. 박봉에, 그것도 1회용 휴지 취급해 왔던 대학이 이제는 우리에게 높은 진입 장벽을 치는 것을 우리는 지난여름에 똑똑히 목도했다. 예순이 다 된 한 대학 시간강사 대선배님은 면접까지 보라는 말에 깊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고 토로했다.

낙방한 선생님들은 왜 낙방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수시에 탈락한 수험생들과 그 부모님들의 마음을 정말 뼈저리게 공감하게 됐다는 시간강사들이 수두룩하다.

우리들이 빼곡이 적어 놓은, 우리들의 노하우가 담긴 강의계획서들을 만끽한 대학들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우리를 내쳐 놓았어도 제대로 학생들을 성심껏 가르치며 교육기관으로서 본분을 다한다면 모르겠다. 그런데 그것도 아니다. 개강 후 서울의 한 대학에서 문학 관련 과목을 가르치는 한 대학 시간강사 선생님은 너무 놀랐다며 다음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그 동안 오랫동안 그 대학에서 강의해 온 50대 선생님들은 다 잘리셨다’(나이 많은 강사들에게 적은 강사료 주고 부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 ‘전공선택 과목이었고 정원이 20명인데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났다’(교양 과목이 대폭 줄어들어서 생긴 현상), ‘한 교양 과목은 수강 인원이 300명이라고 한다’(그래서 학생들은 학기 초에 방트-방귀 터도 되냐- 인사를 한다).

나는 지난 3월 한 집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잉여인간이 아니다’. 이런 외침은 2학기에도 유효하다. 맞다. 우리는 쓸모없는 퇴물이 아니다. 우리가 힘써 만들었던 그 느낌표들이 살아 숨쉬는 그런 대학을 위해 우리는 여전히 필요한 대한민국의 대학 시간강사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한국비정규교수노동조합원이고 분노의 강사들이기를 원한다. 지금 돈벌이가 우선인 대학을 초4인 내 딸이, 우리의 아이들이 있어도 괜찮을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절망과 낙담보다 분노와 투쟁에 동그라미를 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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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1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웹툰·웹소설 작가)

 


내 몸값의 두 배를 팔아도 빚이 쌓인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쌀이나 김치를 조금만 더 얻을 수 없을까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2011년 죽기 전 이웃집에 마지막으로 남긴 쪽지 내용이다. 고인의 죽음으로 프리랜서 예술인들의 실태가 알려지자 그해 예술인들의 처우개선을 담은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됐다. 하지만 대다수 예술인 노동자들은 여전히 고 최고은 작가처럼 상시적인 생계 곤란에 처한다. <작은책>은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노동자 중 웹툰·웹소설 작가 조승우, 하신아 씨를 만나 이들이 처한 구체적 어려움에 대해 들었다. 이들은 여성 웹툰·웹소설·일러스트레이트 작가로 구성된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이하 디콘지회) 임원이기도 하다.

웹툰 작가 하신아 씨(왼쪽)와 조승우 씨(오른쪽). 김재형


일감이 없다고 잘렸어요. 월세, 생활비를 갑자기 감당하기가 어려워지는 거죠. 실업급여라도 받으면 몇 달간은 걱정하지 않고 다음 작품 준비할 수 있는데 수입이 딱 끊겨 버리니까 너무 막막한 거예요.”

조 씨는 어시스턴트로 2년간 그림을 그리다 지난 8월 에이전시(콘텐츠 유통·기획사)로부터 그만두라는 통보를 받았다. 예술인의 70퍼센트 이상이 조 씨와 같은 프리랜서로, 이들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라 고용보험이 없어 실업급여 혜택을 못 받고 있다. 퇴직금은 물론 해고 예고도 없이 하루아침에 잘리는 신세가 된다. 문재인 정부는 특고(특수고용노동자)·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을 국정운영 과제 중 하나로 선정했고 국회는 고용보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법안은 아직 계류 중이다. 이와 관련, 12개 예술인 노동조합 및 예술노동단체들로 구성된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지난 9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특고·예술인 고용보험 적용을 촉구했다.

예술인 노동자들은 수입도 적은 편이다. 조 씨의 지난 2년간 월평균 수입은 120만 원.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개한 ‘2018 예술인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예술 활동으로 벌어들인 1년 수입이 평균 1281만 원, 저임금과 고용불안 등으로 투잡을 뛰는 예술인은 42.6퍼센트에 달했다. 조 씨 역시 자신이 구상하는 작품에 몰두하고 싶지만 생계가 여의치 않다 보니 어시스턴트 일을 놓지 못한 상태다. 하신아 씨는 열일곱 살에 만화 스토리작가(줄거리 구상 및 그림 연출)로 데뷔했다가 잡지 및 대여점 시장이 붕괴되자 작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창작의 꿈을 포기하지 못해 낮에는 생계를 위한 일을 하고, 밤에는 작가 데뷔를 위해 준비했다. 그동안 인터넷, 태블릿 등 스마트 기기들의 발전으로 웹툰 시장이 급격히 성장했고 하 씨는 2013년 한 언론사의 웹툰 공모전을 통해 재데뷔했다. 하 씨를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작가들은 여전히 열악한 처지에 놓여 있다. 복잡다단한 유통 구조 속에서 웹툰 사업체들이 작가에게 불공정한 수익 분배 계약을 하기 때문이다.

웹툰 사업체는 플랫폼과 에이전시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작가는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고 작품을 공급하며, 에이전시는 네이버웹툰, 카카오페이지, 레진코믹스 같은 플랫폼들과 계약을 맺고 플랫폼은 작품을 중개한다. (예전에는 작가플랫폼 직접 계약이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작가에이전시플랫폼 계약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웹툰 사업체와 계약에서 인지도가 낮은 작가와 데뷔를 바라는 신인 작가들은 의 입장이 된다. 제도적 뒷받침도 없는 상황에서 뜯기고 또 뜯긴다. 가령 한 달 1천만 원의 매출이 났다면 작가에게 최종 지급되는 돈은 350만 원. 적지 않은 금액처럼 보이지만 작가들은 자영업자처럼 작품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훨씬 적다. 하 씨가 예를 들어 설명한다.

내 작품이 지난달에 1천만 원 매출이 났다고 쳐요. 30퍼센트는 플랫폼에서 가져가고 남은 700만 원을 에이전시와 작가가 5 5로 나눠요. 남은 350만 원에서 스토리작가, 그림작가가 3 7로 나눕니다. 저한테는 105만 원이 떨어지는 거죠.”

그림작가는 채색 어시스턴트, 배경 프로그램(또는 어시스턴트) 등 기타 프로그램 사용료, 작업실 사용료 등 부대 비용을 부담하기 때문에 실제 수입은 월 100~180만 원(작업 난이도 및 지출비에 따라 다름) 수준이다. 어시스턴트를 두지 않으면 기한 내 작품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에 추가 지출이 생긴다. 웹툰 시장이 무한 경쟁 체제에 놓이며 분량이 한정 없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신아 씨의 말이다.

“70컷은 만화책으로 12~20페이지(작가에 따라 다름)입니다. 만화책 시절에는 주간 연재를 하게 되면 12~16페이지로 정해 줬어요. 지금은 주간 12~20페이지를 풀컬러(완전 채색)로 해야 합니다. 60, 70컷 끝도 없이 요구해요. 지금은 한 회당 100컷까지도 올라갔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몸이 아파도 해야 합니다.”

과도한 분량 경쟁 속에서 웹툰 작가들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2018년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웹툰 작가 실태조사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45.3퍼센트는 하루 12시간, 주 평균 5.7일 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웹툰 스토리작가 하신아 씨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콘티(영상 연출)를 짜고 있다. 김재형

 

웹툰 작가 조승우 씨가 그림 작업을 하고 있다. 작업을 위해 사용하는 부대 프로그램 사용료 등 고정 지출도 모두 본인 부담이다. 김재형


고용불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만으로도 견디기 벅찬데 작가들의 목을 조르는 제도가 있다. 바로 누적 MG(Minimum Guarantee, 최소수익보장). 하 씨는 이를 간단히 표현했다.

내 몸값의 2배를 팔아도 빚이 쌓이는 겁니다.”

플랫폼(또는 에이전시)은 작가와 일반적으로 7 3의 비율로 수익을 분배한다. 플랫폼은 다달이 작가에게 MG200만 원을 가불한다. 이후 첫 매출이 400만 원이면 작가가 받는 돈은 ‘0’원이다. 작가에게 200만 원을 선불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600만 원(정확히 667만 원이지만 계산을 간단히 하기 위해 600만 원으로 예를 듦) 매출을 올려야 비로소 플랫폼에서 요구한 MG를 채울 수 있다.

작가들이 200만 원 받을 때 7 3이기 때문에 600만 원을 (플랫폼에) 줘야 합니다.”

문제는 600만 원의 매출을 올리지 못했을 경우 부족한 금액만큼 이월된다는 것이다. 하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내 몸값의 2배 찍었어도 기존 MG 체제에서는 그냥 멸시만 당하고 말아요. ‘작가님~ 이번 달도 MG 못 채우셨어요.’ 그런데 누적 MG는 이월됩니다. 다음 달에 800만 원을 채워야 해요. 다음 달에도 나는 400밖에 안 찍었겠죠. 1년 연재가 끝나면 2400만 원 빚이 생기는 거예요. 2차 저작권 영화화 계약을 해도 빚이 남아요. 이거 깔 때(빚 갚을 때)까지 다음 작품도 구속해요. 다른 플랫폼으로 옮겨 갈 수가 없어요.”

법으로도 보호받을 길이 없다. 실제 한 웹툰 사업체가 MG 반환을 요구하며 작가를 상대로 낸 선급금 소송에서 1심은 약 3천만 원 전액 배상 판결을 내렸다. (2017년 서울중앙지법, 이후 항소심에서 그보다 낮은 금액으로 조정) 원고료는커녕 빚만 쌓이는 형국이다. 다음 작품까지 저당 잡힌 채 작가들은 노예처럼 노동하다 결국은 매절로 모든 저작권(저작재산권)을 업체에 넘기기도 한다. ‘구름빵4400억 원 매출을 올려도 작가 수입은 2000만 원에도 못 미친 사례처럼 말이다. 불공정한 저작권 양도 방지를 위해 2015년 표준계약서가 고시되었지만 법적 강제성이 없어 사용률은 7.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2017년 디지털콘텐츠산업 유통실태조사, 정보통신산업진흥원.) 하 씨가 비판한다.

안전망이 전혀 없어요. 업체랑 나랑 계약만 하면 되는 거예요. 작가 네가 왜 서명을 했어? 좋아서 합의해 놓고 왜 그래?”

해결 방법은 노동조합이었다. 특히 임금 및 고용불안에서 남성 작가보다 훨씬 많이 피해를 본 여성 작가들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이 결성됐다. 디콘지회는 201812월 설립했지만 2016년부터 게임업계 사상검증 사태(여성주의 온라인 커뮤니티 메갈리아티셔츠를 입은 게임 성우를 업체가 전격 교체, 이를 비판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 등의 명단이 블랙리스트로 업계에 공유되고 작업에서 배제됨.) 활동을 시작으로, 2017년 레진코믹스 블랙리스트 사태(플랫폼 업체 레진코믹스의 불공정한 수익 분배를 비판한 작가들을 대표가 블랙리스트로 규정하고 해당 작가들의 작품을 메인 화면에서 배제할 것을 지시.)에서도 활발히 투쟁해 좋은 성과를 냈다. 그리고 이 연대체는 노동조합으로 이어졌다.

여성노조 디지털콘텐츠창작노동자지회 소개 일러스트 디콘지회

 

디콘지회의 요구는 크게 세 가지다. 저작권 양수자의 의무 강화 및 매출 내역을 작가에게 공개하도록 하는 저작권법 개정, 표준계약서 정립, 그리고 가장 시급한 예술인 고용보험 적용 즉각 입법.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했다는 이유로 많은 예술인들이 고통을 참아 왔지만 이제는 노동조합을 통해 말하기 시작한다.

정당한 대가만 받아도 감당이 되겠어요. 노동력에 대한 최저선을 정해서 대가를 줘야죠. 최저시급만 받아도 난 감당한다(웃음).”

두 사람은 잠도 자고 싶고 공휴일에는 좀 쉬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약속한 고용보험법 개정도 미뤄지고 있는 마당이라 한꺼번에 다 요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번에 고용보험 입법이 안 되면 저도 다른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할 거 같아요.”

조승우 씨가 담담히 말했다. 예술인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오롯이 자신의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시대는 언제쯤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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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영남대의료원

 

보호자 침대는 저절로 생긴 게 아니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민주화가 밥 먹여 주냐?”라는 물음에 반론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이에 대해 한 칼럼에서 민주화운동을 거치고 노무현 정권 말기에 이르러서는 박정희 독재정권 때 비해 군 의문사(비전투 인명손실)10분의 1 이하로 줄었다며 민주화의 성과 사례로 꼽았다(<한겨레>, 201338).

대구의 종합병원인 영남대의료원. 이곳은 박정희와 박근혜가 지배하는 곳이다. 박정희는 죽고 박근혜는 감옥에 있지만, 박근혜가 추천한 이사진들이 영남대의료원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청산하지 못한 적폐들이다. 그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 지난 71일 새벽, 두 명의 간호노동자가 의료원 본관 옥상에 올라가 농성을 시작했다. 지상 약 70미터. 이들은 보건의료노조 영남대의료원지부 해고 조합원 박문진, 송영숙 씨로 1990년대부터 의료민주화노동조건 개선투쟁을 하다가 2007년 해고돼 무려 13년째 해고자 생활을 하고 있다.

영남대의료원 본관 옥상 70미터 높이에 사람이 있다. 검정 천막이 농성장이다. 작은책(정인열)

영남대학교는 1968년 박정희가 대구대와 청구대를 강탈, 통합해 출연 자금 한푼 들이지 않고 설립했다. 박정희 사망 후 1980, 딸 박근혜가 이사장으로 부임해 영남학원 정관 1조를 개정하며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문구를 넣었다. 1987년 전국적으로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고 영남대의료원에도 노동조합이 설립됐다. 박근혜 이사장 재임 기간 부정입시 등 온갖 비리가 1988년 국정감사에서 다뤄지자 박근혜는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육부는 영남학원을 관선이사체제로 관리하며 이사들을 파견했다. 총장, 학장, 의료원장도 직선제로 선출하는 등 박근혜 없는 영남학원에는 민주화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조직을 변경하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임금인상 등 노동조건 개선뿐만 아니라 환자·보호자를 위한 선택진료제 폐지, 간호간병 통합서비스(보호자 없는 병동) 등 의료민주화 투쟁도 시작했다. 교직원 대부분(의사 제외)이 노조에 가입해 조합원 수는 약 850명으로 절반 이상이 여성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이었다. 노조 지부장 김진경 씨와 사무장 김지영 씨는 각각 1992, 1996년 입사한 간호노동자다. 당시 간호사(간호조무사)들은 미스 김, 미스 리로 불리며 교수들의 담배와 커피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결혼하면 퇴사해야 했고 생리휴가도 사용할 수 없었다. 높은 노동강도에 비해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다. 김지영 씨가 근무하던 심장내과는 응급환자가 많아 심폐소생술만 하루에 5번도 더 했다. 간호사 두 명이 54병상을 담당했다. 응급환자 처치를 하느라 다른 환자의 수액 교체가 늦어지면 화가 난 환자·보호자들로부터 폭언·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김지영 씨가 겪은 일이다.

프린터기를 던져서 머리에 맞은 적도 있었고 수액 폴대를 휘두르는 분들도 있었죠.”

노조는 병원 내 폭언·폭행 금지방안을 꾸준히 요구했고 정부는 지난 4월에야 안전한 진료환경 조성을 위한 법·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대부분 종합병원은 이와 관련한 공지를 환자·보호자에게 안내하고 있다. 인력충원도 꾸준히 요구했다. 김지영 씨가 말한다.

지금은 배로 좋아졌죠. 보통 4~5, 많게는 7명까지.”

▲ 고공농성자에게 점심 도시락과 선물로 들어온 꽃을 전달하러 옥상으로 가는 김진경(왼쪽,) 김지영(오른쪽) 씨. ⓒ작은책(정인열)

199550일 파업 투쟁을 시작으로 노조는 해마다 임단협 투쟁을 했다. 2000년대 중반까지 임금과 복지는 대구지역 병원 가운데 최고 수준으로, 대구지역 간호대 졸업생이 선망하는 일터가 됐다. 노조는 조합원만을 위한 막무가내 요구는 하지 않았다. 보호자 침대 설치, 환자·보호자 차량 무료 주차, 환자·보호자 위안 행사와 상시업무 비정규직 정규직화도 이뤄냈다. 이에 대해 김진경 지부장이 말한다.

외환위기 때는 자진 임금 동결했고요, 비정규직 처우 개선하면서 정규직 임금은 소폭만 인상했어요. 무조건 요구만 하는 게 아니라 병원 발전을 위해 노동조합이 어떻게 할 것인지 항상 고민했던 거 같아요. 병원이 발전해야 우리 행복도 같이 오니까요.”

▲ 영남대의료원 노동조합이 이뤄낸 의료민주화와 의료개혁작은책(정인열)

그러나 2006년 영남대의료원이 노무법인 창조컨설팅과 자문 계약을 맺으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당시 창조컨설팅은 이미 성애병원, 캡스, 레이크사이드CC 노동조합 등을 파괴시킨 전적이 있었지만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현장은 창조컨설팅의 계획대로 장악되기 시작했다. 사측의 일방적인 노사 합의사항 불이행, 교섭 불참 및 해태, 파업 유도, 개악안 제시, 단협 해지, 노조 간부 징계 및 해고, 조합원 탈퇴 유도. 이로 인해 2007년 김진경 씨와 김지영 씨를 비롯해 박문진, 송영숙 고공농성자까지 10명이 해고됐고 의료원은 노조에 56억 원 손해배상 청구 및 조합비, 간부 개인통장까지 가압류했다. 집회 장소인 병원 로비에 CCTV 16대를 설치하고 노조 활동을 밀착 감시했다. 조합원 탈퇴도 줄을 이었김진경 지부장이 당시를 회상했다.

탈퇴서가 내용증명으로 하루에 50, 100통까지 왔어요.”

▲ 창조컨설팅이 유성기업에 제출한 ‘노사관계 안정화 컨설팅 제안서'. 영남대의료원도 노조파괴 성공 사례로 적혀 있다.(2011년 4월 28일)

노조는 의료원 측이 조직 내 위력을 이용해 탈퇴를 종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원 교육은 노조 탈퇴가 주 내용이었고, 탈퇴하지 않는 간호사에게는 수간호사가 일을 주지 않았다. 950명이던 조합원은 현재 80명으로 줄었고 가입률은 약 3퍼센트밖에 안 된다. 노조는 의료원과 창조컨설팅을 부당노동행위로 고소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기각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9년 관선이사체제가 끝나자 이명박 정권은 박근혜에게 7인 이사 중 4인의 추천권을 주었다. 그리고 박근혜가 추천한 이사 4명이 들어왔다. 공주의 귀환이었다. 김지영 씨의 말이다.

본인(박근혜)이 주인이 아니라고는 해도 의료원장실이나 병원장실에 지금도 박정희 사진이 걸려 있어요.”

2010년 이사회는 의료원장, 총장, 학장 직선제를 폐지하고 과거로 돌아가 임명제로 변경했다. 같은 해 대법원은 해고자 10명 중 7명만 부당해고로 판결하고, 박문진, 송영숙, 곽순복 3명에 대해서는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하지만 이는 2012년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전모가 드러나기 전 판결이다. 노조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영남학원의 실질 주인인 박근혜에게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기로 하고 2011년부터 박근혜 일정을 따라다니는 그림자 투쟁을,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집 앞에서 박문진 씨가 57일간 삼천 배 투쟁을 했다. 송영숙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서울에 지하방을 얻어 2년 동안 본격적으로 광주로 강릉으로 인천으로, 제주도를 제외하고 전국을 돌며 그림자 투쟁을 전개했고, 박근혜 집 앞에서 매일 아침 1인시위를 했고, 종일 국회 앞과 서울역 1인시위와 당시 한나라당 앞 집회와 1인시위도 했습니다.” (2018426, 보건의료노조 집중 집회 발언 중)

▲ 영남대의료원 간호조무사 박문진(왼쪽), 간호사 송영숙(오른쪽) 씨가 지난 7월 1일 본관 옥상에 올라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사진 제공_ 민주노총 대구지역본부.

해고자들에게 눈길 한번 안 주던 박근혜는 2017년 탄핵, 구속됐다. 창조컨설팅 심종두 전 노무사와 김주목 전무도 노조 파괴 혐의로 지난 828일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 확정판결을 받고 감옥에 있다. 하지만 박정희-박근혜의 적폐인 영남대의료원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다. 노조는 해고자 원직 복직 및 명예회복’, ‘노조 기획 탄압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및 재발 방지’, ‘영남학원재단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다.

▲ 영남대의료원 로비 스케치. 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스님이 해고자 복직 기도회를 하고 있다. ⓒ그림_이동수


소수의 조합원만 남았지만 노조가 아무런 역할을 못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협은 계속 이어졌고 의미 있는 성과도 꽤 이뤄냈다. 2016년에는 교직원 모두 선생님으로, 2017년에는 청소, 경비 등 간접고용 노동자까지 선생님으로 호칭을 똑같이 하기로 합의했다. 청소 노동자 및 교직원 휴게실도 설치됐다. 반면 노조의 힘이 약해지면서 유급이던 생리휴가는 무급으로 바뀌었고, 2018년 고용노동부가 근로조건을 점검한 결과 연장근무, 휴게시간 미보장 등에 대해 시정 권고를 받을 정도로 노동시간이 많아지기도 했다. 그나마 노조가 있어 휴게시간 미부여 수당을 직원들에게 환원하기로 의료원과 합의했고 의료원은 20187월 교직원에게 3년치 수당을 지급했다.

노조 임단협은 조합원뿐만 아니라 전체 교직원에 적용된다. 전체 직원의 3퍼센트밖에 안 되는 조합원들의 노력과 눈물로 이룬 성과를 보자면 한홍구 교수의 말에 한 가지 주장을 더 보태야 할 것 같다. 민주화는 밥도 먹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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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9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도로공사 톨게이트 노동자

 

노조 가입해. 안 그럼 이혼할 거야

정인열/ <작은책> 기자

  

▲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6월 30일부터 고공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경부고속도로 서울톨게이트 지붕 위에서는 고공농성이 벌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톨게이트 요금수납원 약 1500명이 지난 6월 대량 해고됐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50대 여성과 장애인이다. 630, 이중 43명이 지붕 위로 올라갔고, 전국에서 모인 해고자들은 바로 옆 교통센터에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이들의 사연을 듣기 위해 지난 726일 시사만화가 이동수 씨와 함께 농성장을 찾았다.(이동수 화백은 <작은책>에 생활 만화와 삽화를 그리고 있다.)

교통센터 주변은 크고 작은 텐트들로 가득 차 난민촌을 방불케 했다. 간밤에 비바람까지 몰아쳐 젖은 옷가지들과 비품들이 널려 있었다. 현재 해고자들은 민주노총 조합원 약 600, 한국노총 조합원 약 900명이다. 이들은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도로공사를 상대로 공동투쟁과 공동교섭을 하고 있다. 천막에서 민주노총 소속 박혜숙(순천영업소), 김원표(양평영업소), 이진희(청북영업소) 씨와 한국노총 소속 김병종(고창영업소), 이원종(대소영업소) 씨와 인터뷰를 했다.

▲ 경기도 성남시 서울톨게이트 옆 교통센터에 전국 톨게이트해고자들이 모여 노숙 농성을 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들은 부스 요금수납 말고도 화물차 과적 단속 및 통행료 미납 관리, 하이패스와 전자카드 관리 등의 민원 처리를 한다. 본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의 직접고용 정규직이었다(기간제로 입사한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나면 무기계약 전환). 한국도로공사는 전국의 톨게이트 영업소를 직접 운영하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비핵심 업무 외주화명목으로 외주화를 시작했고, 2009년 이명박 정권 때 공공기관 선진화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모든 영업소가 외주화됐다. 김병종 씨와 이진희 씨가 말한다.

그때 남자 수납원들은 정규직 되고 여성 수납원만 외주화됐어요.”

외주업체 사장들은 도로공사 본부·지사 임직원 출신으로, 희망퇴직 시 남은 정년 기간만큼(보통 5~6) 수의계약을 맺어 수익을 보장받았다. 이 사실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커지자 점차 공개입찰을 통해 법인 위탁업체와 계약을 맺기 시작했지만, 지난 5월만 해도 대부분 영업소는 전직 도로공사 임직원들이 운영했다.

외주업체는 각종 비리를 저질렀다. 2013~2014년 국정감사에서 신기남 의원실이 발표한 한국도로공사 희망퇴직자 수의계약 외주운영 실태한국도로공사 정책자료집에 따르면 임직원 출신 사장들이 서류까지 조작하며 임금을 착취하고 사업비를 부당 편취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동자들에게 써야 할 피복비, 식대, 교통비는 물론 상여금과 퇴직금 및 각종 수당(시간외, 야간, 휴일근로, 연차수당 등)을 떼어먹거나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다. 근무하지도 않는 친인척 등을 직원으로 신고하고 근태기록 및 업무 일지를 조작해 인건비를 청구하기도 했다.

요금수납원들은 사장(업체)이 바뀔 때마다 고용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기 위해 기존 수납원들을 해고했기 때문이다. 장애인과 새터민을 채용하면 정부로부터 고용지원금이 나오는데, 업체 사장들은 고용지원 기간이 끝나면 해고하거나 괴롭혀서 스스로 나가도록 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인 김병종 씨가 말한다.

중증은 60만 원까지 받는데 저는 경증이라 (고용지원금이) 30만 원 될 거예요. 저희(고창영업소)14명 중 12명이 장애인이었어요. 지방으로 갈수록 장애인 비율이 높아요.”

도로공사는 이런 불법행위들을 눈감아 주거나 제대로 관리·감독하지 않았다. 신기남 의원실은 불법행위로 가져가는 이익을 업체당 한 해 4억 원으로 추산했다. 반면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에 허덕였다. 심야노동을 하며 43교대로 일했지만, 임금인상 체계가 없어 10, 20년을 일해도 신입 직원과 급여가 같았다. 많게는 하루 1천 대 차량의 수납 업무를 했고, 영업소 사무실에서 민원 등을 처리하는 주임들은 교대자가 없어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다. 특히 하이패스 차량 정보 인식 오류로 인한 미납요금을 처리하느라 초과근무를 하고도 일한 만큼 임금을 못 받았다. 고객들을 대면하거나 전화로 미납요금을 독촉하면 고객들은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난 뒤에는 근무 부실을 인정하는 경위서를 써내고 부족분은 자비로 충당했다.

이렇게 외주화 때문에 생긴 폐해는 고스란히 전국 354개 영업소 7천여 명 노동자들에게 돌아갔다. 2010년 한국노총 산하 전국톨게이트노동조합이 생기고 2015년에는 민주노총 산하 노조가 생겼다. 2013년 톨게이트 노동자들 800여 명이 먼저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고 1, 2심 법원은 각각 2015년과 2017년 노동자들이 한국도로공사의 직원이라고 판결했다.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도로공사는 직접고용 방식이 아닌 자회사 채용을 추진했다. 박혜숙 씨와 김병종 씨가 말한다.

평소에도 티타임 때마다 자회사가 좋다고 세뇌시켰어요. 자회사로 안 가면 해고한다고 협박도 했고요.”

직접고용을 희망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도로공사는 자회사 전환을 강행하고 30퍼센트 임금 인상과 기타공공기관 지정 등을 제안했다. 톨게이트 노동자 약 6500명은 자회사 전환에 동의해 지난 71일부로 자회사인 한국도로공사서비스()에 고용됐고 이를 거부한 약 1500명은 해고자로 남았다. 이들은 왜 자회사를 거부하는 걸까? 이원종 씨가 말한다.

용역업체나 자회사나 같은 거예요. 자회사도 낙찰률이 있어요. 그럼 정규직이 아니잖아요. 낙찰률이 88퍼센트면 나머지는 누구를 주는 건가요? 결국 명예퇴직자들한테 가는 구조 아닌가요?”

임금 인상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도로공사는 자회사로 전환한 노동자들의 임금을 20퍼센트 인상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이건 사실 기존 법인 위탁업체 소속 노동자들이 받던 금액이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직접고용 정규직화 요구에 대해 입사 시험도 안 친 주제에 떼를 써서 정규직원과 똑같이 대우해 달라고 한다며 비난한다.

정규직에는 일반직과 실무직이 있어요. 실무직에 도로관리, 청소, 조리원, 사무원 등이 있고요. 실무직은 일반직처럼 공채 시험을 치르지 않아요. 저희 요구는 우리를 실무직에 넣어 달라는 거예요.”

▲ 한국도로공사 교통센터 풍경 스케치. 입구에 적힌 표어와 해고노동자들의 모습이 대비된다. 이동수


현재 투쟁하는 조합원들 대부분은 최근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이다. 노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사람들이 모두 집을 떠나 청와대와 서울톨게이트를 오가며 노숙을 하고 있다. 몸과 마음은 지칠 때도 있지만 가족들의 지지와 격려가 큰 힘이 된다. 홀로 아이 셋을 키우는 이진희 씨는 특히 상황이 여의치 않다. 그녀는 스물두 살 첫째에게 동생들을 부탁하고 집을 나섰다. 자녀들에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투쟁하는 게) 엄마로서 너희들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힘이 닿는 데까지 하고 싶다고 애들에게 말했죠. 애들이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래요.”

박혜숙 씨는 오히려 남편이 적극 지지한단다. 박 씨의 남편도 민주노총 조합원이다. 예전에 그이는 남편이 노조에 참여하는 게 싫어 집회 현장까지 가서 끌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런데 자회사 전환 사태가 벌어지자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 가입해서 직접고용 하고 와. 안 그럼 이혼할 거야.”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노조는 민주노총과 달리 상급단체로부터 아무런 지원 없이 투쟁하고 있다. 자회사에도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생겼다. 한국노총은 수적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자회사를 선택했으므로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톨게이트노조는 지원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 톨게이트 비정규직 노동자 김병종, 박혜숙, 김원표, 이진희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인터뷰 도중 소나기가 내렸다. 빗속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이원종 씨가 남자들만 있었으면 벌써 집에 갔을 거예요. 여성분들이 정말 대단합니다.” 하고 말했다. 이에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이 대답했다. 상급단체 연대도 없이 홀로 투쟁하는 톨게이트노조도 대단해요. 함께 투쟁해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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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한국지엠 비정규직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와?

정인열/ <작은책> 기자 

 

▲ 한국지엠 부평공장. 작은책(정인열)


한국지엠은 생산 물량 감소를 이유로 2014~2015년 군산공장 비정규직 노동자 약 1000명을 해고했다. 정규직은 노동조합이 있어 해고를 피했다. 인력 감축이 필요한 경우 비정규직을 해고하고 그 자리에 정규직을 전환배치해 고용을 보장한다는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이를 인소싱이라고 한다.) 비정규직이 일하던 공정에는 정규직원이 들어왔다. 정규직원들은 비정규직의 편성률(생산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공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자 회사는 해고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 2~3개월간 정규직원에게 현장 업무를 가르치게 했다.

이완규 씨(40)도 인소싱으로 인해 20158월 해고됐다. 그는 2006년 군산공장 하청업체 소속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도어 라인(자동차 문)에서 일했다. 그러다 2015430, 3개월 유급 휴직 통보를 받았다. 복직 날짜는 없었다. 곧 해고된다고 생각하자 억울해서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군산비정규직지회)에 가입했다.

모범사원 상도 세 번이나 받았어요. 성실하게 일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 이유 없이 너는 비정규직이니까 나가라, 그러니까 억울한 거예요.”

2018213일 군산 및 부평공장 노동자들이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법원은 이완규 씨를 포함한 비정규직 노동자 45명이 한국지엠의 노동자라고 1심 선고를 내렸다. 해고 투쟁 3년 만에 들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하지만 같은 날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지엠이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한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공장에 돌아가겠다는 생각만으로 싸웠는데 갈 곳이 없어진다니까. 괜히 (투쟁)했나? 그때 많이 힘들었죠.”

인소싱은 2009년 부평공장에서 먼저 시작됐다. 당시 금융위기로 미국의 지엠 본사가 파산 위기에 처하자 비정규직 약 1000명이 해고됐다. 사실 비규정직이 해고된 자리에 정규직 인력을 1.5~2배 더 투입해야 공정이 돌아간다. 게다가 비정규직에게는 정규직 대비 50~70퍼센트 수준의 임금만 지급하고, 자녀의 학자금 같은 복리후생 하나 제공하지 않고, 골치 아픈 노사협상을 하지 않고도 더 많은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들을 손쉽게 해고했다. 비정규직에게는 노동삼권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부평공장 안에는 2, 3차 하청업체를 포함해 약 2500명의 비정규직이 있었다. 이영수 씨(46)와 박현상 씨(45)는 대학 시절 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비정규직의 열악한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었다. 두 사람은 2006년 부평공장에 비정규직으로 입사했다. 일하면서 기억에 남는 차별을 묻자 이영수 씨가 말했다.

주말에 지게차 타는 라인 그리는 거를 한 적이 있어요. 정규직하고 똑같이 라인을 그리는데 거기는 이십몇만 원 받아가고 우리는 십만 원도 안 되는 거야. 그당시만 해도 3배 차이가 나는 거야. 야 이거는 심각하다 느꼈죠.”

▲ 출고 직전 차량에 스프레이 건으로 왁스를 도포하는 방청(녹 방지작업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2007년 한국지엠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섞여 일하던 라인을 분리하고 모듈화를 도입하면서 일부 공정을 납품업체로 돌리려 했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를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에 반대하며 200792일 비정규직 노조(민주노총 금속노조 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를 설립했다. 발기 조합원은 30여 명이었다. 설립 일주일 만에 비정규직 노조 간부들부터 차례대로 해고되더니 조합원이 가장 많았던 하청업체 스피드월드파워도 폐업됐다. 해고자만 25. 선전전, 천막농성, 집회를 해도 복직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0071227, 박현상 씨는 해고자 복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하는 현수막을 가지고 부평구청역 CCTV 탑에 올라갔다.

그날 비가 오고 날씨가 안 좋았어. 비닐 쳐 놓고 자고 일어났는데 못 내려가게 밑에 천막이 쳐져 있는 거야.(웃음)

하루 이틀 예상하고 올라갔던 그는 65일 만에 내려왔다. 이대우 당시 지회장이 이어받아 70일을 고공농성했다. 2008117일에는 황호인 씨가 부평역 CCTV에 올라갔다. 며칠 후 또 다른 조합원 4명이 한강대교 아치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227일에는 이준삼 씨가 마포대교 외줄 농성을 했다. 정화조를 잘라 바구니 모양을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이 들어가 밧줄을 달고 다리 아래에 매달렸다. 이영수 씨와 박현상 씨가 말한다.

정화조가 플라스틱이잖아요. 그라인더로 그 위를 잘랐어. 밧줄도 혹시 끊어질까 봐 최고급 밧줄로 했는데 (진압하려고 하니까) 뛰어내려 버렸어.”

다행히 이준삼 씨는 구명조끼를 입고 있었고 수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소방구조정에 구조돼 목숨을 건졌다.

▲ 황호인, 이준삼 조합원은 지엠대우 정문 아치에서 해고자 복직을 요구하며 두 달간 고공농성을 했다(2010년 12월 1일 ~ 2011년 2월 1일). 사진 제공_한국지엠부평비정규직지회.


부평구청역에서는 고공농성이 계속됐다. 135일째 되던 20085, 지회는 해고자 22명 중 7명만 선별 복직하기로 합의하고 이대우 지회장은 내려왔다. 하지만 지회장을 비롯해 박현상, 이영수 등 핵심 간부를 포함한 15명은 복직하지 못했다. 이들은 부평공장 서문 천막 농성장에서 2년 반이 넘게 투쟁을 이어 갔다. 사태가 장기화되자 2010121일 부평공장 정문 아치 위로 황호인, 이준삼 해고자가 올라가 또다시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아래에서는 당시 지회장이었던 신현창 씨가 단식을 했다. 201121, 노사는 해고자 전원 복직에 합의했다. 2년 후인 2013년에 복직한다는 조건이었다. 신 지회장 단식 45, 고공농성 두 달이 되던 날이었다. 만족할 만한 합의는 아니었지만 일단락을 짓기로 했다. 이날 합의대로 20137월 해고자는 모두 복직됐다. 6년이 걸렸다이영수 씨가 당시 복직한 느낌을 회상했다.

돈을 버니까 좋더라.(웃음)

하지만 6년을 무임금으로 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박현상 씨가 또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영수 동지는 아직 혼자여서 버티는 거…. (웃음)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는 부양가족이 없는 싱글이라 버텼다며 웃는다. 겉으로는 가볍게 말하지만 아주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군산공장 이완규 씨는 어린 자녀 둘이 있어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다. 아내가 직장에 나가 돈을 벌지만 4인 가족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정규직 해고자들은 2년치 임금을 받고 나오기라도 했지만 비정규직은 빈손이다. 해고 후 4년 동안 쌓인 빚이 3천만 원. 그럼에도 투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녀들 때문이다.

현재 비정규직이 1200만 명 정도 된다잖아요.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은 늘어날 거거든요. 앞으로 야네들이 살아갈 세상이 보이는 거예요. 제가 지회장이니까 기자회견도 많이 하고 티비에도 나와요. 우리 와이프가 다른 건 다 좋은데 티비만 나오지마라, 전라도 말로 '거시기'하다는 거여요. 제가 와이프한테 그랬어요. 자기는 자기 '거시기'한 게 좋아 아니면 우리 자식들이 커서 비정규직으로 평생 살아가는 게 좋아? 그럼 당연히 아니래요. 그럼 자기도 좀 참아. 아빠의 투쟁으로 조금이라도 변화를 주고 싶어요. 잠깐은 불편하겠지만 계속 싸우다 보면 우리 애기들에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살 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어요.”

이완규 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박현상 씨와 이영수 씨가 박수를 치며 말한다.

이런 조합원이 있어야 되는데.(웃음)

한국지엠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영수 씨는 지난 11일부로 또 해고자가 됐다. 한국지엠이 정규직에게는 임금의 70퍼센트를 지급하며 유급휴직을 제안했지만 비정규직에게는 무급 순환휴직을 요구했다. 비정규직지회는 이를 거부했고 이영수 씨는 해고됐다. 비정규직 노조의 속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생산 물량이 없는데 무슨 해고자 복직과 정규직화 요구냐며 차가운 눈초리를 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지회의 요구는 수긍이 갈 만하다. 작년 1교대로 전환되었던 부평2공장이 조만간 다시 2교대제가 될 예정인데, 이때 정규직 600여 명, 비정규직 100여 명이 필요할 것으로 지회는 예상한다. 지회 해고자는 46(부평 38, 군산 8). 그리고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로 법원 판결도 이미 받은 상태다. 복직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될 뿐만 아니라 한국지엠은 정부로부터 8100억 원을 지원받았다. 사회적 책임도 져야 한다.

▲ 한국지엠 비정규직 노동자 이영수, 이완규, 박현상 씨(왼쪽부터). 지회는 해고자 복직 및 정규직 전환 요구를 하며 507일째 천막농성을 이어가고 있다(2019년 6월 27일). 작은책(정인열)


생계 이야기가 나오자 자연스럽게 이완규 씨와 박현상 씨의 아이들 이야기가 나왔다. 싱글인 이영수 씨는 난 담배나 피워야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박현상 씨는 네 살 된 딸이 있다. 집은 충북 진천. 딸이 두 살 때 육아휴직을 쓰고 1년 전 공장에 복귀하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는 6월부터 상경 투쟁을 하고 있다. 이완규 씨가 아이들과 통화한 이야기를 한다. “‘아빠는 왜 회사 가면 (집에) 안 와?’ 이런다니까.” 이 말에 박현상 씨가 받아쳤다. 우리 애는 아빠 우리 집에 언제 놀러 와?’ 한다니까. ‘언제 와도 아니고. 하하하하.”

두 사람은 서로 네 사정이 더 낫네 하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돌려서 표현했다. 싱글인 이영수 씨만 조용히 대화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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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8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변기 26개 닦고 엉엉 울었다

허지희/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농성하고 애도 키우는 아줌마

 

 

명동역 10번 출구 세종호텔. 이 출근길을 25년째 다닙니다. 대표전화를 받는 전화교환원으로 20, 호텔방을 청소하는 룸어텐던트로 5년 동안 근무하고 있습니다.

▲ 객실을 정돈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세종대학교 재단에서 113억 회계 비리로 퇴출되었던 주명건 전 이사장이 세종호텔 회장에 복귀하면서 복수노조, 전환배치, 구조조정, 해고 등 뉴스에서나 보던 일이 우리 회사에서 벌어졌습니다. 전화 통화량을 조사하는 회사의 행동으로 이미 교환실이 아웃소싱되거나 해체될 수 있다는 예감에 2012년 세종호텔 노동조합의 파업과 로비 점거에 참가했습니다만, 내 일자리를 지키기엔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20년 근속상을 받은 201412195, 타월을 개고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하고 쓰레기를 버리는 룸어텐던트로 발령이 났습니다. 호텔에서 장기 근속한 여직원을 청소 노동자로 발령 내는 것은 흔히 쓰는 퇴출 방법입니다. 둘째 아이의 육아휴직이 남아 있어 고민도 했지만 사표는 내일 써도 되고 다음달에 써도 되니 함께 싸우자는, 지금은 해고된 세종호텔노조 김상진 전 위원장의 말씀에 용기를 내 보기로 했습니다.

발령이 나고 처음 한 일은 교환실 유니폼을 입은 내 마지막 모습을 셀카로 찍는 일이었습니다. ‘20년을 입어 왔지만 다시는 입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뜨거워졌습니다. 마음을 굳게 먹었으나 막상 룸어텐던트의 유니폼과 앞치마를 입었을 때는 서러워 눈물도 나고 타인이 사용한 변기를 닦으려니 장갑을 껴도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2주간의 청소 교육은 타월 개는 법부터 시작했고 단 한 번 욕실 청소하는 법을 보여 주었습니다. 첫째 날에 13, 둘째 날까지 26개의 변기와 욕조, 세면대를 닦았습니다. 청소 교육 이틀 만에 어깨와 허리에 파스가 덕지덕지 붙었습니다. 퇴근길에 만난 남편과 순댓국집에서 소주만 퍼붓고 가게가 떠나가도록 엉엉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 객실 내 화장실을 청소하는 세종호텔 룸어텐던트 노동자. ⓒ작은책(정인열)


이걸 왜 해야 되는데. 흑흑. 울엄마는 이럴 줄 모르고 대학 보내고. 엉엉.”

그러나 다음 날 새벽 은행 계좌에 월급이 입금된 걸 보는 순간, 돈이다. 난 돈 벌러 회사 다니는 사람이다.” 하고 중얼거렸습니다.

돈이 나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혼자라면 오래 버틸 수 없었겠지만, 우리 팀에는 노동조합 조합원이 있어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청소 노하우도 공유하며 중고 신입 막내를 살뜰히 챙겨 주셔서 버틸 수 있었습니다. 당신들도 힘드신 거 뻔히 아는데, 내게 배정된 층에 오셔서 나 몰래 베드도 갈아 놓고 가시고, 그분들이 내게는 엄마였고 천사였습니다.

초보 룸어텐던트는 객실 타입도 잘 모르고 린넨을 봐도 싱글인지 더블인지 구분을 못해 정리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복도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간이 청소 시간보다 더 많았습니다. 사드 배치 이전의 명동은 중국인 물결이었는데, 화장품을 사서 알맹이만 슈트 케이스에 담고 제품 케이스로 방마다 두세 곳의 쓰레기 언덕을 만들었고 쓰레기통을 제외한 모든 곳에 쓰레기를 버려 댔습니다. 바닥에 던져진 콘돔을 모르고 집었다가 장갑이 엉망이 되기도 하고 얇은 와인 글라스와 8온스 컵을 씻다가 금이 간 것도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전환배치된 날 어용노조 전화교환 직원도 함께 발령이 났는데 팀장은 세종호텔 노동조합원인 내게만 이런저런 이유로 수시로 경위서를 요구했습니다. 20년 동안 교환실에서 써 본 적 없는 경위서를 룸어텐던트가 된 후에는 매달 썼을 정도였습니다. 전 직원 성과연봉제가 어용노조 위원장과 대의원 3명의 직권 조인으로 통과된 후 룸어텐던트 파트는 전에 없던 인스펙터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인스펙터는 룸어텐던트가 청소한 객실을 점검하는 사람인데 원래 인스펙터 업무는 룸어텐던트가 실수로 빠뜨린 것을 채워 주고 보완하는 일이지만 세종호텔 인스펙터의 업무는 사진과 채점입니다. 청소한 객실에서 흠을 찾아 증거로 사진을 찍어 팀장에게 매일 전송하고 객실 청소 상태를 등급으로 매겼고 팀장은 사진과 등급으로 성과연봉제 임금 삭감의 사유를 준비했습니다. 마음은 그러지 말자 생각했지만 인스펙터에게 지적당하거나 사진을 찍히고 나면 더 치밀하고 꼼꼼히 일하게 되어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병들어 갔습니다. 테니스엘보와 손목터널증후군은 룸어텐던트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병명이고, 내 경우엔 디스크가 약해 2017년에는 목디스크 수술을 받았고 나중에는 허리디스크도 함께 왔으며 어깨회전근 미세 파열을 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채점된 성과연봉제 첫해 저의 임금은 9퍼센트 삭감. 오랫동안 임금이 동결되었기에 9퍼센트 삭감된 후 월급은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갔습니다. 삭감 사유는 딥클리닝 개수 부족. 딥클리닝이란 욕실 천장 곰팡이부터 타일 줄눈까지 락스 작업을 하고, 사다리로 올라가 천장 먼지를 제거하고, 침대를 들거나 밀어 침대 아래 먼지도 제거하고, TV장과 걸레받이를 청소하는 일 등입니다. 타 호텔에서는 딥클리닝 전문 직원을 둔다는데 세종호텔에서는 룸어텐던트에게 시켰습니다.

그 딥클리닝을 하루에 한 방씩 점검받아야 하는데 내 경우는 대학 입학시험문제 출제 교수가 체크인 한 적이 4번이나 있었습니다. 대입 출제 교수가 묵는 방은 가벽을 만들어 직원조차 못 들어가는 출입금지 구역이 됩니다. 딥클리닝 자체가 불가능했음에도 회사는 그걸 임금 삭감 사유라고 내밀었습니다.

반면 어용노조 조합원 중에는 단 한 명이 3퍼센트 삭감되고 나머지는 전원 동결되어 세종호텔 노동조합과 형평성도 없고 차이가 심하게 났습니다. 타 회사의 성과연봉제는 인상되는 연봉제지만 세종호텔의 성과연봉제는, 사원은 최대 10퍼센트까지 계장 이상은 30퍼센트까지 삭감할 수 있는 악법 중의 악법입니다. 그 기준으로 세종노조 계장님 몇 분은 2년 연속 삭감당해 월급이 반토막 난 분도 있습니다.

호텔 직원들은 구조조정으로 퇴사해 나가고 팀장들의 회유와 협박에 회사가 만든 어용노조로 빠져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이제 15명의 소수 노조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오전, 오후 선전전과 매주 목요일의 집회로 9년째 투쟁을 이어 오고 있습니다. 수적으로는 열세지만 우리의 목소리를 내며 회사의 부당함을 당당히 말하는 힘이 세종노조의 저력입니다. 그 힘으로 특별감독관이 나오기도 하고 작년에는 잠시나마 교섭이 이뤄지기도 해 일부 조합원이 전환배치에서 복직하는 성과도 이뤄 낼 수 있었습니다.

사법 적폐 임종헌과 사돈이며 친이명박 적폐 판사 박성준이 사위고, 전 외교부 장관 유명환을 재단 이사장에 세워 놓은 주명건 회장의 힘은 영원할 듯했습니다. 그러나 임종헌이 구속된 이후 교육부의 세종대 감사가 실시되고 있어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시기라 판단하고 세종호텔 노동조합은 호텔 정문에서 천막농성을 시작했습니다. 김상진 전 위원장의 해고자 복직과 나의 전환배치에 대한 원직 복직과 성과연봉제 폐지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일도 힘들고 농성도 힘들지만 2015년 메르스 사태 때는 뷔페 설거지와 고기 굽기도 했고, 전화교환이든 룸어텐던트든 내 일, 나 자신의 일이기에 나를 위해 싸울 수 있습니다. 어쩌면 세종호텔에서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으나 노조와 함께 회사에 할 말 하며 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 세종호텔과 서비스연맹 노동자들이 지난 5월 세종호텔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세종호텔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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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여성가족부 아이돌보미

 

여성가족부의 기막힌 꼼수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이돌보미 고정래 씨(60)는 아침 일찍 돌봄을 요청한 이용자의 가정으로 출근했다. 네 살 아이가 있는 맞벌이 가정이었다. 아침 7시부터 9시까지 어린이집 등원 준비 및 등원을 시켜 주는 일이다. 낯가림이 심한 아이는 시리얼을 먹고 있다가 고 씨를 보고 멀리 떨어졌다. 아이 아빠는 출근하러 나갔다. 고 씨는 아이가 먹는 것을 도와주려 했지만 아이는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잠시 후 아이 아빠한테 거실에 있는 전자기기를 꺼 달라는 문자가 왔다. CCTV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에 고 씨는 기분이 언짢았다. 거의 대부분 이용자 집에 CCTV가 설치되어 있지만, 이용자가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마다 10년 경력자인 고 씨는 아직도 위축된다. 일터에 있는 아이 엄마한테는 어린이집 위치를 알려주는 문자가 왔다. 문자를 확인하려고 고 씨는 잠시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 아이 엄마는 그날 아이돌보미를 파견하는 건강가정지원센터(센터)에 아이돌보미 교체 민원을 넣었다. 고 씨가 아이 밥은 안 먹이고 휴대폰만 들여다보았다는 이유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잘리는 인생이에요. 내가 감시당하면서까지 이 일을 해야 되나?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고 씨를 비롯한 아이돌보미들은 요즘 일할 맛이 안 난다고 한다. 이용자들의 불신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 강서구 한 카페에서 고 씨와 김경인(58), 배민주(54) 씨를 만나 속사정을 들어 보았다. 이들은 모두 서울 강서·양천구 건강가정지원센터 소속 돌보미들로, 노동조합(민주노총 공공연대노동조합 아이돌봄분과) 조합원이기도 하다.

▲ 서울 강서.양천 지역 아이돌보미 배민주, 김경인, 고정래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아이돌봄 서비스는 여성가족부가 가정의 아이돌봄을 지원하여 아이의 복지 증진과 보호자의 일·가정 양립을 통한 가족 구성원의 삶의 질 향상과 양육친화적인 사회 환경을 조성(아이돌봄 서비스 홈페이지 인용)할 목적으로 2007년부터 시작됐다. 3개월~12세 아동을 둔 가정에서 시간당 9650(2019년 기준)을 내면 이용이 가능한데, 소득 기준에 따라 최대 80퍼센트까지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가족부가 관련 법령 및 행정 지침 등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내리면 단체장들은 돌봄서비스를 운영할 기관을 선정하고 지역 기관들은 돌보미를 채용해 이용자 가정에 보낸다. 아이돌보미를 연계해 주는 기관은 건강가정지원센터. 각 시군구마다 있는 센터는 여성가족부가 주관하는 다양한 가족지원 정책을 제안하고 실행하기 위해 정부와 지자체가 설치한 기관으로, 대부분 민간 위탁 운영되고 있다. 전국 아이돌보미 종사자는 2018년 기준 23천여 명이다.

원래 아이들을 좋아했어요. 아이들이 예뻐서, 손주를 돌보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했지요.”

배민주 씨와 고정래 씨가 말했다. 고정래 씨는 2009년부터, 배민주 씨와 김경인 씨는 2013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다. 그동안은 이용자가 많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급격히 일감이 줄었다. 정부가 2022년까지 아이돌보미를 3만 명으로 증원하기로 계획하며 2018년부터 인력을 대폭 채용해 돌보미들이 남아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센터는 올 11일부터 주 52시간 노동시간 시행을 핑계로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에 2시간~3시간 30분씩 돌보미를 나누어 보내는, 일명 돌보미 쪼개기를 시행했다. 이해할 수가 없는 정책이었다. 돌보미들은 주 15시간(60시간)도 채우지 못하게 되는 처지가 됐다.(60시간을 채워야 4대 보험 가입 및 주휴수당과 연차휴가가 생긴다.)

() 60시간 채울려고 이 집 저 집 땜빵을 다니고. 정말 아주 치사한 집까지 다 다녔거든요. 그래야 60시간이 채워져요.”

60시간을 채워봤자 이들이 손에 쥐는 임금은 504천 원. 직업을 유지할 수 없는 수준이다. 돌보미들은 여성가족부가 돌보미 쪼개기를 하는 이유가 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꼼수라고 본다. 근로기준법에 따라 회사는 노동자에게 4시간 근무하면 30, 8시간 근무하면 1시간 이상의 휴게 시간을 의무적으로 부여해야 하는데 휴게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 4시간이 되기 전에 다른 가정으로 보내는 것이다. 그동안 업무 특성상 아이돌보미들은 쉴 수가 없었다. 근로기준법상 권리인 휴게 시간을 사실상 박탈 당해 하루에 1시간 이상을 무급으로 일해 왔다. 노조가 아이돌보미에 한해 법령 개정하고 임금으로 보상해 줄 것을 요구하자 여성가족부는 돌보미 쪼개기로 휴게 시간 발생을 차단한 것이다.

돌보미 쪼개기때문에 아이돌보미들은 물론 종일제 서비스 이용 가정들도 큰 고충을 겪고 있다. 아이돌보미가 너무 자주 바뀌어 아이들이 돌보미들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고정래 씨가 말한다.

기존 선생님하고는 잘 놀다가도 제가 들어가면 애가 울고불고 난리에요. 애한테도 정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말 안 하고 싶고, 힘들어요.”

배민주 씨는 애착 관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최소 한 달에서 석 달이 걸린다며 정부의 탁상 행정을 비판했다.

아이를 정서적으로 학대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용자도 엄청 불만이고요.”

3~4시간을 일한 뒤 다른 가정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돌보미들의 이동 시간과 교통비도 배로 들었다. 입사할 당시에는 최저시급이 안 됐지만 교통비도 지급됐고 급여의 10퍼센트만큼 경력수당도 지급됐다. 하지만 20139월부터 교통비가 없어졌다.

거리가 좀 먼 가정은 1시간을 가야 돼요. 2시간 돌봄하고 왕복 2시간, 모두 4시간 투자해서 (2013년 당시) 1만 원을 벌려고 가는 거예요.”

시급은 법정 최저임금에 맞춰졌지만 교통비뿐만 아니라 경력수당, 활동지원금 등 각종 수당마저 삭감되자 총급여는 갈수록 줄었다. CCTV 감시, 이용자의 갑질 및 갈등에 항상 심리적 스트레스를 안고 지내다가 센터에 호소도 해 봤다.

여성가족부나 센터는 오로지 이용자 편이에요. 여성가족부에 이용자 민원이 들어가면 센터 점수가 깎이거든요. 시시비비를 가려서 이용자 갑질도 없애 줘야 하는데 무조건 이용자 편이에요.”

바뀌는 것이 없자 20179, 배민주 씨는 여성가족부에 처우 개선을 호소하는 민원을 넣었다.

“‘이 사업은 이용자를 위한 사업이지 선생님들을 위한 사업이 아닙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저희도 세금 내는 국민인데, 그리고 우리가 있어야 아이가 있는 거고 아이가 있어야 우리가 있는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냐따졌죠. 그랬더니 거기 사무관인가가 ~ . 이용자 민원 갖고도 우리 머리 폭발할 거 같으니까 전화하지 마세요한 거예요.”

배 씨는 너무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더 높은 기관인 국무총리실에 투서를 했다. 다시 여성가족부로부터 메일이 왔다.

“CCTV 있는 데는 안 가면 되고, 인권 논하지 말라는 메일을 받았어요. 생각해 보니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드는 거예요.”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자 배 씨는 인터넷으로 노동조합을 알아보았다. 광주와 울산에서 먼저 노조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었다. 광주지회에 연락해 권현숙 지회장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노조를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날부터 아이돌보미들 100명 이상에게 무작위로 연락을 했다. 10시 넘어 돌보미들을 만나고 두 달 만에 80명 넘게 조합 가입서를 받았다. 2017123, 민주노총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강서분회가 설립됐다. 현재 전국 조합원 수는 약 3500. 이들의 요구는 교통비 지급 및 급여 인상, 경조사 유급휴일 적용, 근무 연수에 따른 연차수당 반영 및 미사용 휴게 시간 보상 등이다. 그리고 여성가족부 앞에 천막을 치고 진선미 장관 면담을 요구했다. 노조는 여성가족부 담당 공무원들과 몇 차례 면담을 진행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노조에 노력하고 발전하는 방향으로 가겠다고 입장을 밝힌 상태다.

▲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조합원들이 진선미 장관과 대화를 요구하며 천막에서 기다리고 있다(2019.6.3). 사진 제공_ 공공연대노조 아이돌봄분과


열악한 처우에도 아이돌보미들은 이들만이 가질 수 있는 보람을 생각하며 지금껏 버티고 있다. 자라나는 아이와 이용자 가정의 신뢰를 받을 때가 가장 뿌듯하다. 배민주 씨가 말한다.

“3개월 아기 때 만나서 7년째 보고 있는 아이가 있어요. 애들이 저하고 떨어지기 싫어해서 그 부모님이 저 믿고 주말마다 저희 집으로 보내요. 놀고 돌아가면 애들이 그렇게 밝대요. (웃음)”

고정래 씨도 마찬가지다.

저도 18개월부터 본 애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지금까지도 보고 있어요. 저 때문에 제가 있는 곳으로 이사올 정도로. 보람 있어요.”

민감한 CCTV 설치 문제도 신뢰 속에서 풀어 갈 수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CCTV 달지 마시고 한 달만 믿고 지켜봐 주세요. 아이가 선생님한테 애착을 갖는지 안 갖는지가 CCTV보다 더 정확합니다하고 설득해요. 그래서 3년을 안 달고 했어요.”

묻지마 살인 같은 게 늘어나는 건 우리 사회가 불행한 거예요. 그런 일 없으려면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정말 맑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우리가 힘이 되어야 해요. 저희는 거기에 자부심을 갖고 있거든요. 아무리 좋은 마인드로 일을 해도 갈수록 처우가 안 좋아지고 내 급여도 없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들은 아이돌봄 사업이 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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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학교급식에서 가장 중요한 것

정명옥/ 경기 삼성초등학교 영양교사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에서 경기도교육청이 공채로 학교 영양사를 뽑는다는 소식이 보도되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던 터라, 시댁 아주버니가 그 밤중에 부리나케 달려와 얘기해 줘서 알게 됐다. 아마도 처음 있는 일이라 뉴스거리였던 모양이었다. 아기도 없는 신혼집을 한밤중에 들이닥치다니, 얼마나 다급했으면 그랬을까 싶었다. 바로 다음 날이 접수 마감일이었고 나는 마감 시간을 채 한 시간도 남겨 두지 않고 겨우 접수했다. 19895월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했던 순간이었는데 그렇게 시작한 일을 올해로 30년째 하고 있다.

학교급식은 1953년에 시작되었다. 한국전쟁 후 유네스코의 부분적 구호로 빵 무료급식을 실시하였고, 19811월 학교급식법이 제정되면서 본격화됐다. 교육활동 지원을 위해 식품위생직 영양사가 운영하다가, 2003년 지금과 같은 영양교사 제도가 도입되었다. 애초에 지원 성격으로 출발했기에 급식과 교육의 연결고리는 약했다.

학교급식에서 사람들(학생이나 선생이나 모두들)을 함부로 버리는 모습을 보면 나는 지금까지도 무뎌지지 않고 실망을 넘어 거의 분노를 느낀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집에서 밥을 먹다가 한 톨이라도 흘리면 주워서 먹어야 했다. 더군다나 음식을 남기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단체급식이 학교, 병원, 기업체 등에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음식 남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 같다. 오호 통재라~! 차라리 아이를 굶겨라라는 책도 있듯이 차라리 급식제도를 없애라~!’ 주장하고 싶을 정도이다.

학교급식은 보편성, 일회성, 주관성의 특성을 갖는다. 단체급식으로서의 보편성, 먹고 나면 서류밖에 남는 것이 없는 일회성 그리고 먹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느끼는 맛의 주관성이 그것이다. 사실 이란 레시피에 의한 과학적인 맛(절대성)이라는 것도 있지만 대개는 배가 고픈 정도(시장이 반찬)나 건강 상태(몸이 아프면 입맛이 없어진다) 등에 따라 느낌이 매우 다른 상대성이 훨씬 크다. 나에게 제일 어려운 일은 일반적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건강에 이로운 음식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먹기 좋은 학교급식, 몸에 좋은 학교급식, 약이 되는 학교급식을 추구한다.

초등학교는 1학년과 6학년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 다르다. 1학년은 학교 밥을 잘 먹는 편인데 점점 자라서 6학년 어르신이 되면 학교 밥이 맛이 없다고 노골적으로 불평을 한다.

나는 일부러 6학년 1학기 영양 수업을 학교급식의 문제점과 개선 방안이라는 주제로 진행한다. 내 수업에서는 모든 학생들이 발표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데, 분단별 발표 주제(분단 구성원 모두 각자 발표)는 학교급식의 좋은 점 이야기하기, 학교급식의 문제점 이야기하기, 앞의 분단에서 발표한 문제점을 잘 듣고 개선 방안 제시하기이다. 재미있는 것은 양심선언을 하는 친구들이 제법 출현한다는 것이다. 몸에 좋은 음식은 잘 먹지 않고, 몸에 이롭지 않은 음식은 엄청 먹어 댄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자신이 편식을 하고 있어서 그것이 문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고쳐지질 않는 것은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이 주변에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한다.

학교급식을 하려면 영양교사가 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레시피, 이를테면 파스타나 고기 요리(고기 요리는 대충 만들어도 다 맛있다고 잘 먹는다.) 등 다양한 요리법을 연구하여 식단을 구성하고, 그 레시피와 식단을 조리사와 조리실무사들이 밥상에 구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재료비가 충분해야 하는데, 예산이란 늘 부족하거나 빠듯하다. 또 조리사와 조리실무사의 요리 솜씨도 좋아야 하고 조리기구도 잘 갖추어지면 훨씬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일하는 작업자들 간의 민주적인 의사소통과 협력이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음식이 맛이 없게 만들어진다. 이건 진짜다. ‘음식은 정성이라는 옛말이 정말로 옳다. 거기에 무어라 해도 학교급식의 완성은 먹는 학생들에 달려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이 배가 고픈 상태에서 급식을 먹으러 오면 좋겠다. 그리고 애초에 건강하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가 적당히 고파야 맛을 제대로 느끼면서 달게 먹을 수 있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건강 상태가 좋은 친 구일수록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얘길 하다 보니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하는 말이 생각난다. 건강한 학생을 기르기 위해 학교급식을 하고 있는데, 건강한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맛나게 먹는다니.

작은책(정인열)

나는 하얀 위생복을 입고 1, 2, 3(우리 학교는 식당이 3개 층으로 나뉘어 있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점심을 먹는 아이들 모습을 보러 다닌다. 우리가 마련한 음식을 얼마나 먹을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지켜본다. 잘 먹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지만, 그들이 먹는 모습, 먹는 양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내가 정성을 쏟는 일이 있는데, 퇴식구에 지키고 서서 식판을 깨끗이 정리하도록 지도하는 일이다. 밥 한 톨도 식판에 붙은 채로 배출하지 않도록 호랑이 눈을 뜨고 지킨다. 식판을 깨끗이 배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지구를 살리는 최소한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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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7월호

작은책 법률 상담소

 

반지하에서 생기는 법률 분쟁

김묘희/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으로 더욱 주목받은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는 주인공 가족이 살고 있는 반지하 집이 등장합니다. 반지하 집은 빛이 잘 들지 않고, 통풍이 잘되지 않지만, 외부의 시선에 노출되어 있고, 지하이기 때문에 비가 많이 오면 화장실 하수구가 역류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속 반지하 집은 그런 단점을 현실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 영화를 본 관객 중에는 자신이 살았던 반지하 집의 추억을 떠올렸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하영 씨는 영화가 끝나면 현실의 반지하 방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화 속 리얼한 반지하 집을 보고 나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죠. 하영 씨가 반지하에서 겪었던 일은 무엇일까요.

 

하영 씨는 독립 후 첫 자취방을 알아보러 다니다가 본인 예산 안에서 가장 넓고 깨끗한 집을 발견하고 바로 계약을 했습니다. 반지하라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도배·장판이 깨끗하고 월세도 싸니까 감수할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몇 개월이 지나자 장판 밑에 물이 고이고 곰팡이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옷장 속까지 곰팡이가 펴서 몇몇 옷은 버려야 할 정도였습니다. 집주인은 하영 씨가 환기를 안 해서 생긴 문제라며 아무런 조치도 취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림_ 이동수

 

우리 법에는 집주인이 집을 빌려줄 때에는 세입자가 집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빌려주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임대인은 목적물을 임차인에게 인도하고 계약존속 중 그 사용, 수익에 필요한 상태를 유지하게 할 의무를 부담한다(민법 제623)”.

반지하 건물의 특성상 세입자의 생활 습관보다는 채광과 통풍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곰팡이 때문에 집을 집처럼 이용할 수 없다면 임대인은 당연히 수선 의무를 부담하게 됩니다. 다만, 세입자는 문제가 발생하면 바로 집주인에게 알려야 합니다. 만약 세입자가 집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집주인에게 신속히 알리지 않아 피해가 발생한다면 피해 비용 일부를 세입자가 부담하게 될 수도 있으니 주의가 필요합니다.

하영 씨의 경우, 새로 도배·장판을 하고 입주한 지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곰팡이가 생겼기 때문에, 곰팡이가 생긴 곳을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잘 기록해두었다면 집주인에게 곰팡이 제거 시공 등을 요청할 수 있었고, 수선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였다면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_ 이동수

 

사실 하영 씨는 지난여름에는 더 큰 일을 겪었습니다. 큰비가 내려 하영 씨가 살고 있는 반지하 방으로 물이 넘쳐 들어왔습니다. 집주인이 장판과 창문 쪽 벽지를 교체해 주기는 했지만, 물에 잠겨 결국 버릴 수밖에 없게 된 가재도구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법적으로 따져 보면 침수 피해로 인하여 집에 생긴 피해는 집주인이 복구해야 합니다. 민법에서는 집주인에게 수리 의무를 부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집주인의 의무는 임대 목적물인 집을 수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고, 집 안에 있는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 보상 책임까지 없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집 구조적인 하자로 인하여 가재도구에 대한 피해가 발생하였다는 점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집주인에게 그러한 피해 보상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재난지원금

국가에서 침수 피해로 인한 재난지원금을 지급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재난지원금은 재난 및 안전관리기본법에서 정한 바에 따라 침수 피해를 본 당사자에게 지급됩니다. 이 때문에 집주인이 세입자가 받은 재난지원금을 돌려달라고 하여 종종 분쟁이 발생하는데, 침수 피해를 본 세입자가 이를 돌려줄 의무는 없지만 해당 지원금은 침수 피해 복구에 사용해야 합니다.

주택 침수 피해를 입고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가 호우 피해로 인한 장판과 벽지 상태가 심하지 않다고 생각해 그대로 지내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해당 세입자가 재난지원금을 받고도 이를 침수 피해 복구를 위해 사용하지 않았다면, 계약 기간이 끝나 이사를 나가려고 할 때 집주인이 침수 피해로 인하여 하자가 발생한 장판과 벽지를 교체하라고 한다면, 재난지원금을 받은 세입자는 이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림_ 이동수

 

주택법에서는 국민이 쾌적하고 살기 좋은 생활을 하기 위하여 필요한 최저주거기준을 설정·공고하도록 정하고 있고(5조의2), 2011년 마지막으로 공고된 최저주거기준에 의하면 주택은 적절한 방음, 환기, 채광 및 난방설비를 갖추어야 하고, 자연재해로 인한 위험이 현저한 지역에 위치해서는 안 됩니다. 하영 씨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최저주거기준이 지켜졌더라면 겪지 않았을 일을 겪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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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 탐방_ 쌍용양회공업

 


어릴 적 부르던 교가, 기가 막힌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아시아의 으뜸가는 양회공장의 우렁찬 기계 소리 메아리치는~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삼화초등학교 옛 교가. 양회공장은 시멘트 생산 기업인 쌍용양회공업()(이하 쌍용양회) 동해공장을 말한다. 340만 평 부지의 단일 공장으로 그 규모는 세계 최대. 쌍용양회는 국내 시멘트 업계 1위 기업으로 동해공장에서만 연간 1150만 톤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박준철 씨(43)는 아직도 교가를 잊지 않고 부를 수 있다.

교가에도 나오고 교과서에도 실리고 그랬어요. 잊어 먹지도 않아요. 그 노래를 그리 부르고 당겼으니. 기가 막힌다.”

그가 기막혀하는 사연은 무엇일까. 박준철 씨와 그의 동료 문홍석(42), 태윤호(39) 씨를 삼화동 사무실에서 만나 공장을 둘러본 후 가까운 무릉계곡 한 음식점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준철 씨와 문홍석 씨의 아버지 역시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였다. 해마다 망상 해수욕장에 쌍용양회가 직원 가족들을 위한 천막을 치면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가곤 했다. 성인이 되고 2002년 동해공장에 취직했지만 이들은 쌍용동해중기전문()(이하 동해중기) 소속 사내 하청 노동자다. 본래 쌍용양회의 중기 업무 부서였지만 1998년 외환위기 당시 하청업체로 분사됐기 때문이다. 동해중기를 포함한 하청업체는 모두 24.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불도저, 크레인, 로더 등 8가지 장비를 조종해 시멘트 제조공정에 맞는 원료 및 연료를 운반하고 투입하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보유한 건설 기계 조종사 면허만도 8가지. 정규직원과 업무상 다른 점을 물었다.

▲ 쌍용동해중기전문 사무실 입구. 부지와 사무실 모두 쌍용양회가 무상 제공해 오다 노조가 생긴 후 임대료를 받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아까 정문에 정직원들 보셨죠? 우리하고 옷도 마크도 똑같아요. 정직원들은 현장 점검만 하고 나와서 우리한테 작업 지시를 하는 거죠. 여기 이래이래 해 주세요. 그게 다예요. 위험한 건 하청이 다 해요.”

이들은 소속 회사가 위장도급 업체라고 주장한다. 원청인 쌍용양회의 지휘·감독을 받아왔고 독자적으로 사업체를 경영할 만한 자금 조달 능력도, 전문기술도 없다는 것이다. 중장비와 사무실 및 부동산도 모두 쌍용양회 소유고, 대표이사도 쌍용양회 퇴직자다. ,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매출액은 약 38억 원인데, 노동자들은 도급비가 매출액이라고 주장한다. 동해중기의 최근 4년간 평균 영업이익도 약 2900만 원뿐이다. 노동자 36명이 검찰에 고소한 파견근로자보호등에관한법률 등 위반자료에 따르면 (동해중기) 설립 당시 기본급과 상여 등 임금성 급여는 쌍용양회의 78퍼센트 수준으로 정하기로 하였으며, 기타 복지와 성과금은 쌍용양회와 동일하게 지급하는 것으로 정하였다고 되어 있다.

처음 한동안은 쌍용양회에서 성과금 받으면 우리도 똑같이 나왔었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안 나오더라고.”

성과금이 중단된 시기는 2011. 동해중기로 이직한 쌍용양회 전적자들이 쌍용양회를 상대로 퇴직금 소송을 하고부터다.

조금 더 열심히 일하면 잘해 주겠지, 회사에서 줄 건 주겠지 생각했어요.”

36524시간 가동되는 공장에서 이들은 주야 3교대로 일했다. 이들의 안내로 둘러본 현장은 위험천만했다. 시멘트 원료를 섭씨 1450도로 가열하는 킬른이라 불리는 거대한 소성로와 회전 분쇄기, 8킬로미터 길이의 클링커(시멘트 반제품) 운송 벨트가 눈에 띄었다. 박준철 씨가 말했다.

제가 입사하고 예닐곱 명 죽었어요. 보통 벨트에 끼거나 떨어지는 사고예요. 고 김용균 씨(태안화력발전소 하청 노동자, 석탄운송설비 업무)랑 똑같아요.”

이들은 중장비로 연료를 호퍼에 밀어 넣다 빠진 적도 많다. 호퍼는 깔때기처럼 생긴 연료 투입구다.

호퍼가 되게 깊고 넓어요. 야간에는 시야 확보가 안 돼서 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탁 떨어지면 이마 박고 많이 다치죠. 혼자서 일하니까 꼭 무전기 갖고 타요.”

무전기로 다른 장비를 호출해 견인해서 겨우 나오지만 빠질 때마다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여름에는 에어컨 가동도 못 한다. 폭염 속 킬른에서 나오는 열이 더해져 엔진 과열로 장비가 터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작업장은 폐기물 저장고. 부연료로 폐기물이 반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폐타이어 사용부터다. 2000년대부터는 농촌폐비닐, 플라스틱 등 생활 쓰레기와 산업폐기물도 공장에 반입됐다. 둘러본 저장고는 쓰레기 소각장과 똑같은 악취가 진동했다. 미세한 폐비닐 조각들이 둥둥 떠다녀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5분밖에 머물지 않았는데도 목이 쾨쾨했다. 동해중기 노동자들은 저장고 작업 중 토한 적도 많다. 또 거의 대부분이 피부질환, 안과 질환, 비염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되게 적응하기 힘들었어요. 피부가 너무 가려우니까. 비염도 다들 생겼어요. 어릴 때는 없던 거죠.”

쌍용양회는 이를 순환자원 재활용’, ‘에너지 절약 및 온실가스 저감을 위한 자발적 협약의 시범 사업장이라며 환경 경영을 실천하는 기업으로 홍보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최근 쌍용양회가 유기 슬러지(하수종말처리 최종 잔재물로 유해물질 함량이 높다)까지 반입해 연간 6만 톤 소각을 계획하자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진 것. MBC강원영동 보도에 따르면 쌍용양회가 슬러지 1톤당 받는 보조금은 10만 원. 6만 톤을 모두 소각할 경우 연간 60억 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현재는 주민들의 반발로 슬러지 반입이 유예됐다.

▲ 삼화동 주민들이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걸었따. 삼화동 거리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작은책(정인열)

위험한 작업 환경과 오염물질에 노출되면서도 박준철 씨를 비롯한 중기 업무 노동자들은 최저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아 왔다. 문재인 정부 들어 최저시급이 대폭 인상되었지만 임금인상 효과는 사실상 없다. 주휴수당 등 각종 수당이 기본급에 산입되고 임금 보전도 없이 특근 시간마저 대폭 줄었기 때문이다.

쌍용양회 원청은 매출액 164백억여 원, 영업이익 24백억여 원(2015~2017년 평균)으로 막대한 이익을 쌓았지만 동해중기 하청 노동자들의 성과금을 없애더니 2017년에는 임금마저 동결했다.

원청 노조가 임금인상을 하면 우리는 그다음 해에 인상분을 소급해서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끊어 버렸어요. (동해중기) 사장한테 물어보니 하는 얘기가 양회에서 안 준대. ’. 더 이상 묻지도 말라는 거예요.”

최저임금 지급에 임금동결까지 벌어지자 노동자들은 참을 수 없었다. 노동자 36명 전원이 20181월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에 가입하고 쌍용양회지회를 설립했다. (최근에는 상급단체를 전국화학섬유식품산업노동조합으로 변경했다.) 하청업체 중 가장 먼저였다. 지회는 20186월 쌍용양회와 동해중기를 불법파견으로 검찰에 고소했다. 강릉고용노동지청은 불법파견으로 판단, 지난 322일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그동안 지회는 1인시위부터 공장 앞 집회, 시내 집회까지 쉬지 않고 투쟁했다. 강원지역 타 사업장과 연대도 적극적으로 했다. 이들은 동해공장 앞에 모든 하청은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펼침막을 걸었다.

우리만 잘 먹고 잘살라고 하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잘되면 다른 업체들도 노조할 권리는 사실상 보장되는 거고요. 제조업 자체가 사실상 정규직이거든요.”

쌍용양회지회의 영향으로 중장비 정비 업무를 하는 쌍용동해정비() 소속 하청 노동자들도 20187월 노동조합을 설립해 투쟁하고 있다.

▲ 쌍용양회 하청 노동자 태윤호, 문홍석, 박준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중기 업무 노동자들의 요구는 직접고용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이다. 원래 정규직이었기 때문에 원청 직원과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논란이 많은 쌍용양회지만 향토기업으로서 지역사회에 이바지한 점은 무시할 수 없다. 쌍용양회 동해공장 노동자들은 대부분 지역 주민들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겨울철에 쌍용양회 깃발을 꽂고 동해시 제설 작업을 다녔다. 여름철에는 해변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도 나갔고, 학교 운동장 골대도 옮겨 주었다. 이렇게 동해시민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지역 주민인 노동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정직원들도 다 저희하고 불알친구들이고 동네 이웃이에요. 뒤에 와서 진짜 잘하고 있다 응원해 주고, 우리 입장 다 이해해 주죠. 동네 주민들도 고생한다고 응원 많이 해 줘요.”

박준철 씨가 부르던 삼화초등학교 교가는 세월이 흘러 양회공장(동해공장)’ 가사가 빠진 채 바뀌었다. 삼화동 주민들과 하청 노동자들은 쌍용양회를 규탄하는 펼침막을 내걸었다. 박준철 씨가 어릴 적 선망하며 부르던 교가를 이제 와서 기가 막히다고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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