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3. 8. 13:30
월간 <작은책>/일터 이야기
<작은책> 2021년 3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벨이 울리면 1초 안에 받아라
강혜경/ 공공운수노조 국민건강보험공단고객센터지부 조합원
떨리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고, 생소한 용어로 가득한 책들로 교육을 받고, 이해 안 되는 교육임에도 매일 시험을 치고, 긴장 가득한 첫 전화를 받은 지가 벌써 9년이 되어 간다. 선배 상담사와 동석을 하며 모르는 내용이 들어올 때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뮤트 키(고객에게 내 목소리가 안 들리게 하는 전화기 조작 버튼)를 누르던 신입이 이제는 동석 시 신입 상담사를 케어하는 코칭 선배가 되었고, 고객이 부과 제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며 언성을 높이면 긴장하고 울먹이던 신입이 이제는 고객을 진정시키고 고객에게 조정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는 능숙한 상담사가 되었다. 이 두 문장으로 설명 가능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과 노력이 있었는지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벨 울림 2초입니다. 1초로 관리하세요.’라는 채팅이 걸려 오면 손가락을 잠시도 전화기 버튼에서 뗄 수 없고, 통화 종료 후 후처리 1분이 넘었다는 메시지에는 지사 이관 건을 점심시간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통화가 5분을 넘어가면 초조해지고 7분을 넘어가면 팀장의 채팅이 들어올까 불안하다.
3개월에 한 번 분기별로 공단에서 시행하는 만족도 조사 기간은 상담사에게 더욱더 힘든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추후 만족도 설문조사 시 5점 매우 만족 부탁드립니다.”로 종료 인사를 통일해야 한다. 인사를 누락할 경우 감점이 되며 상담사의 등급에 영향을 미치는 것뿐만 아니라 다음 날 출근하면 자리에 옐로카드가 붙어 있다. 옐로카드를 받고도 누락하면 ‘친절’이라는 완장을 차고서 출근 시간 누구나 오며 가며 볼 수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교육을 받았다. 5분 이상 대기한 고객들이 우리에게 겨우 연결되면 평균 2~3분 안에 만족을 시키고 바로 상담 종료를 해야 좋은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연결 대기 시간이 7~8분인 고객이 어찌 2~3분 상담에 만족할까. 그런 고객들에게는 “추후 만족도 설문조사 시 5점 매우 만족 부탁드립니다.”라는 필수 멘트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건강보험제도에 대한 불만은 곧 상담사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지며, 10~20분씩 욕을 듣고 멘탈이 너덜너덜하게 뜯겨도 이어지는 다음 전화는 벨소리 1초 안에 바로 받아 밝은 목소리로 “함께하는 건강보험 상담사”를 외쳐야 나의 등급은 유지된다.
납부 마감일이나 호주기(납부 마감일이 다가오는 주간)로 분류되는 기간은 화장실에 가는 시간도 팀장에게 보고하길 강요받고, 고객이 요청한 아웃바운드(전화를 거는 것)도 팀장의 허락이 떨어져야 가능하다. 분기별로 한 번 있는 공단 시험에는 도급 업체의 실적과 자존심이 걸린 터라 한 달에 다섯 번, 여섯 번 예비시험을 치르고 만점이 아닌 경우 재시험이 반복되며, 최종 공단 시험에서는 만점이 아닌 경우 소위 ‘역적’ 취급을 당한다. 콜이 미어터지는 현실과 코로나라는 상황까지 겹쳐 교육은 꿈도 꿀 수 없다. 중요한 제도 변경도 미어터지는 콜을 받는 도중 전체 쪽지로 받게 되고, 고객과의 상담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에 그 쪽지는 나의 머릿속에서 잊히기 일쑤다. 해당 공지를 숙지하지 못해 틀린 안내는 결국 민원으로 이어지고 관리자들은 쪽지를 숙지하지 못한 상담사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한다.
흔히 콜센터 직원을 감정노동자로 일컫는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게, 혹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일하는 사람을 말하지만 건강보험공단 콜센터에 다년간 근무하면서 내가 느낀 바는 다르다. 우리는 노동자가 아닌 기계이다. 감정을 느끼면 버틸 수 없다. 슬퍼도 안 되고 화가 나도 안 된다. 고객의 고성과 욕지거리를 들어도 “네~ 고객님 말씀 이해합니다. 저도 충분히 공감합니다.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는 멘트가 자동응답처럼 튀어나와야 버틸 수 있다. 고객들의 불만에도, 도급 업체의 비인간적인 대우에도, 공단의 무시에도 아파하면 버틸 수 없다. 9년 가까운 근무 기간에도 내가 아는 동료가 몇 안 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신입 동석을 하면 다음 날 그만두고, 팀 배정을 받으면 다음 날 그만두고, 부과 변동 시즌이 되면 그만둔다. 공단의 전산 오류나 문자 오발송으로, 잘못된 안내문으로 노발대발하는 고객들의 ‘총알받이’가 반복되면 그만두기도 한다.
얼마 전 받은 민원 중에 공단의 전산 오류로 인해 몇 년 전 이혼한 전남편의 피부양자로 등재된 고객의 항의를 받은 적이 있다. 남편의 폭력과 집착을 피해 개명까지 하고 겨우 숨어 사는데 공단의 실수 때문에 개인정보 유출과 정신적 피해를 겪었다며 법적 고소를 예고하는 전화였다. 순간 늘 기계같이 전화를 받던 나도 등줄기에 땀이 나고 공단의 실수가 한 고객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공포나 악몽이 될 수 있음을 절감했다. 이러한 심각한 민원에도 콜 타임이 길어지면 최대한 빨리 종료하라고 압박을 받는다.
‘인간에 대한 존중은 두려움에서 나온다’는 드라마의 명대사처럼 이런 우리에게도 노동조합이라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기계라고 생각한 나에게 노동자 혹은 동지라 불러 주었고 우리의 노동이 가치 있는 것임을 알려 주었다. 차별 없는 삶의 가치를 교육받았고 투쟁의 가치도 알게 되었다. 그 가치 있는 교육으로 인해 이뤄 낸 것은 벨소리 1초가 아닌 2초, 휴식 없는 노동이 아닌 오전 10분과 오후 10분의 휴식이다. 또 공단의 형식적인 업무 시험에서 벗어났으며 팀장의 허락 없이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자유와 정해진 업무 시간 외 추가 업무 시 연장근로수당을 받게 된 것이다. 누군가에겐 이 모든 것이 당연한 권리이겠지만 기계였던 우리에겐 노동자가 된 후 이뤄 낸 투쟁의 결과이다.
오늘은 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창립 후 처음 갖게 된 총파업 첫째 날이다. 처음 가 본 건강보험공단 원주본부에서 투쟁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우리의 목소리가 정말 불공정을 야기하는 것인가? 지금과 같은 업무를 하되, 도급 업체의 실적 제일주의와 비인간적 관리에서 벗어나 공단에서 직접적으로 책임지고, 고용을 보장하고, 관리 감독과 교육을 해 달라는 것이다.
1577-1000번에 전화하면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동생이니 욕설과 언어폭력은 지양해 달라는 멘트가 나온다는 고객들의 말을 들었다. 대기 시간 동안 화가 났지만 그 멘트를 들으니 상담사에게 화를 낼 수 없다는 고객도 있었다. 누군가의 엄마, 딸, 동생…. 이런 인간적인 환경에서 근무하고 싶지만 지금의 업체 간 경쟁 구도 속에서는 요원한 현실이기도 하다. “싫으면 때려치워”라는 말도 듣지만 그렇게 해서 도망치면 변화는 없을 것이다. 지금 내가 속해 있는 이 자리를 바꾸고자 하는 열망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다. 적어도 지금껏 건강보험공단을 대표해 고객 최접점에서 “함께하는 건강보험 상담사”라고 외쳐 온 나의 상담이 헛된 메아리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