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9년 8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14)
자식을 두고 갈 때 알려 줄 것들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사랑하는 나의 딸이 엄마가 있어서 너무 불행하다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이런 엄마는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합니다. 엄마는 왜 사냐고 묻습니다.
이런 순간에 맞닥뜨리면 모멸감과 낭패감, 화살이 누구를 겨냥하는지 분명한 분노의 마음에 휩싸입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진짜로 죽고 나면 무슨 일이 생길까, 미친 호기심이 일기도 합니다.
나는 평소에 딸아이한테 ‘내가 죽으면 외딴 무덤이나 발걸음하기 어려운 곳에 두지 말고, 화장해서 곱게 빻아서 예쁜 병에 담아 부엌 찬장에 두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나도 나의 부모님의 다음을 어떻게 챙길지 자신이 없는데, 우리 다음 세대들은 장례나 제사를 치러 낼 수 있을까요? 크게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이 너무 슬프고 너무 절망스러워서 삶에서 저만치 비껴 나게 두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조금씩 죽음을 향해 다가가게 되어 있는데, 마치 죽음이 생과 전혀 다른 낯선 것인 양 외면하는 모양새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지나간 사람들 사진을 보고, 손때 묻은 물건들이 그대로 언제든 닿을 곳에 있어서 죽음도 삶도 관계의 영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상태, 죽음도 ‘사라져 없음’이 아니라 그저 삶의 일부로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얼마 전, 나의 백수 생활이 자꾸 길어지고 있을 때, 딸아이가, 엄마가 돈을 못 벌고 우리가 몹시 가난해져도 밥은 굶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엄마의 친구들이 자기가 굶어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더라고요. 죽고 나면, 잠시 나의 딸을 굶어 죽게 하지 않을 나의 벗들을 하나하나 떠올려 봅니다. (한참을 계속 떠올리는 중) 흠, 좋아요. 내가 지금 당장 물려줄 재산은 하나 없어도, 내 딸아이 밥 한 끼씩 챙겨 줄 사람들은 좀 만들어 놓은 것 같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도 딸아이의 생존에는 하등 어려움이 없을 것 같네요. 조만간 약정서를 돌리겠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물론 자식을 두고 먼저 가면서 아무 준비도 없이 죽어 사라지진 않을 겁니다. 최소한 도시 아파트에서 얼른 벗어나 적당히 한적한 곳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거 같습니다. 마당이 있고, 별다른 조리가 필요 없는 오이나 당근 같은 것들을 그 자리에서 따 먹으며 살 수 있으면 걱정이 좀 덜 되겠네요. 그리고, 고기 말고 그나마 즐겨 먹는 두부로 할 수 있는 음식들 몇 가지 요리법을 좀 정리해 놔야겠습니다.
그리고 시행착오투성이여서 실패하느라 정신없던 나의 삶보다는 조금 더 편히 살아가는 노하우를 알려 줘야겠습니다. 이를테면, 최악의 남자를 피하는 법 같은 게 있겠네요. 다음 체크리스트에서 항목을 체크해서 점수를 내 보게 하는 겁니다.
□ 1. 남자 친구와 같이 밤길을 걷다가 휘파람을 부는데, ‘밤에 휘파람 불면 귀신 나온다’ 하며 못하게 한다.
□ 2. 머리를 자르고 만났더니, ‘긴 머리가 더 잘 어울린다’ 하며 아쉬워한다.
□ 3. 나에 대해서 별로 궁금해하는 게 없다. 질문을 잘 안 한다.
□ 4. 또 한편으로 나에 대해서 너무 다 알려고 한다.
□ 5. ‘사전’에 의논하지 않는다. 내 의사를 묻지 않는다.
□ 6. 또 한편으로 하나하나 일일이 다 내 눈치를 살핀다.
□ 7. 심부름을 하고 왔는데 또 나갔다 오게 할 때, ‘아까 말하지!’ 하며 눈을 부라린다.
□ 8. 어떤 물건이 좋다는 이야기를 물건값으로 말한다.
□ 9. 장난치다 다쳤을 때 갑자기 정색하며 화를 낸다. 특히 나 때문에 다쳤을 때 나를 쩔쩔매게 만든다.
□ 10. 왠지 내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를 선뜻 만들지 않게 된다.
□ 11. 전 여친을 몹시 안 좋게 말한다. 진짜 사랑이 아니었다고도 한다.
□ 12. 엄마, 아빠에게 원한이 깊다. 특히 어린 시절의 상처 이야기를 할 때 아직도 가시지 않은 적개심을 그대로 드러낸다.
□ 13. 화가 났을 때 주먹으로 문짝을 치는 일이 ‘한 번이라도’ 있다.
□ 14. ‘도저히 답톡을 할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고 말한다.
이 체크리스트는 체크할 때마다 1점씩 붙게 되는데, 그러면 점수 구간이 생기겠지요? 딸아이한테 단단히 일러두어야겠습니다. 정확하게 이 상황에서 이 말을 하게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유전자에 박혀 있는 것 같(다고 저만 믿고 있)다고요. 이 체크리스트는 무척 견고하고 엄마의 온 생을 통해 검증되고 검증된 항목이라서 단 1점이라도 나는 날에는 그 남자는 무조건 아웃이라고 말입니다.
세상에 좋은 남자는 존재하기가 쉽지 않으니, 연애는 개떡 같은 남자 찰떡 같은 남자 다 만나 보다가 이 체크리트스에서 1점이라도 나는 순간에 뻥 차 버리면 된다고. 나중에 누구랑 같이 살고 싶어지면 그게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온순하고 착하고 눈이 반짝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도 해 주어야겠네요.
(그나저나, 원래 체크리스트에 14개는 어쩐지 좀 어정쩡하니, 나머지 한 개는 여러분이 좀 채워 주시지요.)
그 밖에 일기를 쓸 때는 같은 크기의 일기장에 써 두는 게 좋다거나, 설거지하기 가장 좋은 때는 밥 먹고 난 직후라는 놀라운 사실, 나의 엄마한테서 전수받은 소울푸드, 톳두부무침의 비법 같은 것, 장을 보러 갈 때는 꼭 밥을 먹고 가야 한다는 것, 양치질을 할 때는 위턱의 왼쪽 어금니, 윗니, 위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래턱의 오른쪽 어금니, 아랫니, 아래턱의 왼쪽 어금니로 여섯 개 구역을 나눠서 한 구역씩 클리어하는 방식으로 칫솔질을 하면 놓치는 치아 없이 말끔하게 닦을 수 있다든가 하는, 온 생애를 통해 연마해 온 비기 가운데 비기들을 한 번에 하나씩 써서 집 안 구석구석에 숨겨 두어야겠습니다. 찾으면 찾는 대로 참고가 될 테고, 못 찾으면 못 찾는 대로 자기 노하우가 생길 테니까 어떻게 되든 괜찮을 거 같네요.
▲그림_ 최정규
하도 엄마 때문에 불행하고,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도대체 그 마음이 얼만큼인지 물었습니다. 지금은 한 60퍼센트라고 하네요. 다른 엄마들이 그렇듯, 나도 딸아이가 원하면 그게 뭐든 다 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말했지요.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100퍼센트가 되면 꼭 말해 달라, 그러면 반드시 죽어 주겠다”고요.
가장 최근에 죽으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딸아이가 기말고사를 망치고 걸어 온 전화 통화에서인데요. “괜찮아, 점수가 뭐가 중요해. 열심히 한 과정이 있으니까 됐지” 했더니, “과정이 뭐가 중요해, 시험은 다 점수로 말하는데! 내가 과정이 중요하지 않다는데 왜 자꾸 과정이 중요하대? 내 기분을 그렇게 못 맞춰 줘?” 하는 것이 그 사유였습니다.
빵점이면 어떠냐, 공부 같은 거 못해도 된다고 말했는데 되레 욕을 먹으니, 100점 안 맞았다고 다그치다 욕먹은 엄마들보다 내가 더 억울한 마음이 듭니다. 이 이야기를 할 때는 딸아이가 엄마가 죽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80퍼센트라고 했습니다.
이 비율이 오르내릴 때마다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맑았다 개었다 날씨도 덩달아 바뀌는 것 같습니다. 100퍼센트가 되었다고 말하기 전에 서둘러 이 글을 남겨 봅니다. 자꾸 죽으라고 하니, 죽고 나서 어떻게 될까 자꾸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모은 책은 제목을 ‘죽으란다고 진짜 죽은 중2 엄마 이야기’라고 지어 보고 싶습니다.
지난달에, 이제 중학교 3학년인 딸아이가 무척 진중한 목소리로 “엄마는, 내가 중2 때 중2병이 끝난 걸 다행으로 알아!” 그랬는데 개뿔. “넌 아직도 중2병 투병 중이거든!” 하는 말을, (차마 그녀석 면전에다가는 입도 뻥긋 못 하고) <작은책> 대나무 숲에다가 목 놓아 외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