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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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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1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은수미 시장님, 약속을 지키세요

유미라/ 민주노총 보건의료노조 성남시의료원 지부장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기 전 21년 동안 종합 병원에서 3교대 근무를 하는 간호사로 일했고 노동조합 활동도 꽤나 열심히 했었다. 탈퇴하면 승진을 시켜 주겠다는 제안을 몇 차례 받긴 했지만 탈퇴를 해서 부끄러운 관리자가 되는 것보다 당당한 조합원으로 남는 것이 더 좋았고, 간호사로 일하는 동안 내가 일하는 시간에는 안심이 된다며 출근하기를 기다려 주는 환자들이 있어 행복했다. 직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사를 하면서 병원을 그만두었고 4년 전부터 성남시의료원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성남시의료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2003년부터이다. 인하병원과 같은 산별 노조인 보건의료노조의 조합원이었던 나는 2003년 인하병원이 폐업한 후 그 조합원들이 퇴직금을 모아 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의료원이 건립되기까지 13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켜보며 함께 해 왔다. 오랜 기간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하느라 경력이 단절되고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인하병원 조합원들과, 시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성남시의료원은 없었을 것이다. 주민 발의로 시립 병원을 만들기 위해 골목길들을 누비며 가가호호 방문 서명을 받으러 다녔는데 시립병원을 만들 수 있게 도와 달라는 낯선 사람에게 선뜻 문을 열어 주며 서명에 동참해 준 시민들이 성남시의료원의 진정한 주인이다.

성남시의료원은 2004년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을 계기로 설립되었다. 사진 제공_ 공공의료성남시민행동


오늘은 2019116, 국내 최초로 주민 발의에 의해 세워지는 공공 병원인 성남시의료원의 개원 준비 일을 시작한 지 4년째가 되는 날이다. 이제 개원 준비가 아닌, 개원한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는 간호사로 일하고 싶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성남시청 앞 파란 천막에서 78일째 농성을 하고 있다. 농성을 시작하면서 나의 일상은 천막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출근 전에는 시청 앞에서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말라는 요구를 담은 피케팅을 하고 병원으로 출근해서 병동 분야의 개원 준비를 하고 있다. 병원에서 일이 끝나면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귀가하는 시간은 자정을 넘기는 날이 많고 일주일에 하루는 천막에서 숙박을 한다. 당연히 주말도 천막에서 지낸다.

성남시의료원에 노동조합이 생기면 첫 번째로 가입하겠지만 내가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노동조합 집행부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해 왔었다. 10년 남짓 노동조합 활동을 했던 시간들이 소중하고 자랑스럽지만 개인적인 일상을 많이 내려놓아야 하는 일임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고 마흔 중반을 넘기면서는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나는 성남시의료원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지부장이 되었다.

법인이 설립되고 2년이 다 되어 가도록 인사 보수 체계가 만들어지지 않아 직원들의 임금이 천차만별이었다. 의료원에 입사해서 같은 일을 하는데도 전에 다니던 직장의 연봉을 기준으로 급여를 지급했기 때문에 천만 원 이상 차이가 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병원장은 80퍼센트 이상 직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칙도 기준도 없는 무늬만 직무급인 임금 체계를 도입하려 했다. 차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불공평한 임금 체계였다. 논란이 되자 외부에서 의료원의 임금 체계에 대한 토론회가 진행되었다. 다양한 단체와 참가자들이 의료원에 노동자의 입장을 대변할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정작 노동조합의 설립 주체이고 임금 체계 합의 당사자인 직원으로서 외부의 결정에만 의지한 채 침묵하고 있는 상황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개원도 하기 전에 노동조합이 만들어진 것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렸지만 개원을 하려면 직원을 뽑아야 하고 직원을 뽑으려면 인사 보수 체계가 있어야 하는데 2년이 넘도록 만들지도 못하고 있으니 노동조합을 만들어 제대로 된 인사 보수 체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개원을 앞둔 성남시의료원 조감도. (성남시의료원 홈페이지 갈무리)


노동조합을 만들면서 시민들이 16년을 기다려 온 의료원의 정상적인 개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개원 준비를 최우선에 두고 활동하겠다고 조합원들과도 다짐했었다. 그래서 단체협약 요구안도 일반적인 신규 지부 요구안의 반도 안 되는 수준으로 축소하여 요구했다. 직원들의 복지 혜택에 대한 요구는 아예 하지도 않았다. 빨리 마무리하고 개원 준비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첫 교섭 상견례를 시작한 후 사측의 교섭 대표가 4번 교체되었고 교섭 대표가 바뀔 때마다 기존의 합의 사항이 유효하다는 것을 확인했었다. 의료원장의 공백 기간이 길어지면서 교섭도 장기화되었다. 현 의료원장이 취임하기 전까지 교섭 대표들은 합의서를 쓰지 않았어도 교섭 내용이 녹음되고 있으니 합의서와 다름없다고 기존의 합의 내용들을 이행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성남시의료원에 비정규직을 채용하지 않겠다는 것은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이 시민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한 약속이고 노사가 이미 합의한 사항이었다.

그런데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의 경영진은 약속도 합의 사항도 모두 뒤집었다. 교섭 과정에서 노동조합은 개원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조합원들에게 불리한 경력 산정 기준도 수용했고 개원 준비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일부 분야에 한시적으로 비정규직을 채용하되 기간 만료 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으로 잠정 합의했었다. 그러한 잠정 합의안을 사측이 하루 만에 휴지 조각으로 만들더니 급식, 청소 미화, 보안, 진료 보조, 환자 이송, 약무 보조, 콜센터, 운전원 등 9개 분야 238명에 대한 비정규직 채용 계획을 노동조합과 협의조차 없이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238명이면 비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해당한다.

글쓴이 유미라 지부장이 성남시청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성남시의료원지부.


잠정 합의안도 파기하고 국가 기관인 노동위원회의 조정 권고안까지 거부하면서 그동안 합의했던 노동조합 가입 범위, 인사 보수 체계도 모두 뒤집었다. 비정규직 문제는 경영권이고 인사 보수 체계는 인사권이라며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도 했다. 1년에 걸쳐 노사가 합의한 내용들을 파기하고 사측이 일방적으로 만든 인사 보수 체계를 취업 규칙에 담아 개별 직원들에게 강제 동의나 다름없는 공개 서명을 받았다. 이로 인해 3년 동안 개원 준비를 위해 고생해 온 직원들이 입사 당시 인정받았던 경력을 삭감당하는 불이익을 당했다.

노조 가입 범위에 대해 법대로 하자는데 그것도 합의 못하겠다며 조합 가입 범위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려는 것은 헌법으로 보장하는 노동 기본권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고, 시장 임기 내에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모두 전환하겠다고 하면서도 합의서는 쓸 수 없다는 것은 정규직으로 전환할 의사가 없다는 것이다. 노동 기본권조차 인정하지 않고 비정규직 없는 병원을 만들겠다던 시민과의 약속을 너무 쉽게 뒤집어 버리는 성남시와 성남시의료원 경영진의 행태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성남시청 앞에서 천막 농성을 하는 이유이다.

무더운 여름에 시작해서 단풍이 들고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불고 이제 곧 겨울이 되겠지만 오늘도 천막으로 퇴근을 한다. 세상에 비정규직으로 채용해도 괜찮은 일자리는 없다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