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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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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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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 이야기_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 보라보라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한 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한 해가 시작이 되지만 어떤 풍경들은 변함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호의 영화들처럼요. 2021년의 1월의 영화는 특별히 두 편입니다. 경북 구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해고 노동자 23명이 출연하는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 한국도로공사의 톨게이트 비정규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투쟁을 기록한 <보라보라>입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독자들에게는 특별히 더 반가울 것 같습니다. 2020년 여러 영화제들에서 공개되어 다양한 반응들을 이끌어 냈는데 소개가 좀 늦었네요. 연말에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온라인 상영회가 있었고 귀한 영화들을 보고 나니 더 많은 분들이 이 영화들을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두 영화 모두 제목들이 멋지면서도 알쏭달쏭하지요? 첫 번째 영화를 만든 김상패 감독의 말로 제목의 의미를 대신합니다.

아사히 동지들, 용균이 어머니, 1100만 비정규직 노동자 모두가 거미다. 이들이 하나의 거미줄처럼 네트워크로 엮어서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됐으면 좋겠다.”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의 일상을 쫓아가는 영화는 직접고용 투쟁을 벌이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 현대기아차 비정규직, 교육 공무직 등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만납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평등하지 않은 노동 현실을 고발합니다. 고 김용균 씨의 어머니인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도 자주 등장합니다. 김미숙 님은 비정규직이었던 아들의 사고로 투쟁에 나서면서 아사히글라스 해고 노동자들과 동지가 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김미숙 님은 고() 이한빛 씨 아버지 이용관 님, 그리고 정의당 의원들과 함께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며 국회 본청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나 무겁습니다. 제발 그만 좀 죽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김미숙 님의 절규에 불평등한 현장에서 위험한 노동을 전담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이 어른거립니다. 엔딩 크레딧에 이르게 되면 감독의 의도는 더 확실히 드러납니다. 김용균이라는 이름이 새겨졌던 화면이 점점 확대되면 해고 노동자들이 투쟁하며 만났던 비정규직 노동자들, 고 김용균 씨처럼 산재로 숨진 노동자들의 이름들로 화면이 가득 찹니다. 방금 만났던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세상에 그토록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목이 멥니다.

▲ 영화 <당신은 거미를 본 적이 있나요?> 한 장면.


두 번째 영화 <보라보라>의 주인공들은 첫 번째 영화에도 잠깐 등장했던 톨게이트 요금 수납원들입니다. 한국도로공사의 자회사 전환 고용을 거부해 해고됐던 1500명의 요금 수납원들의 이야기를 김도준, 김승화, 김미영 세 명의 감독이 만들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들이 고공농성 중인 서울톨게이트 캐노피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말하겠어라는 의지를 강하게 표명하는 것만 같아요. 등장인물과 카메라 사이에 거리감이 전혀 안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곧 밝혀집니다. 바로 동료가 동료를 찍고 있었던 겁니다. 세 명의 연출자 중 김도준 감독은 영화과 학생이고 김승화 감독, 김미영 감독은 민주연합노조 조합원입니다. 김도준 감독이 다른 사안으로 광화문 집회에 갔다가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후 캐노피 고공농성을 알고 밥을 올리는 도르래에 카메라를 올려서 촬영을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캐노피 위 촬영을 맡은 김승화 감독이 촬영을 정말 잘했더라고요. 주인공들은 우리 중의 한 사람이 찍는 것이니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속내를 털어놓았고 그것을 담는 카메라는 무척이나 안정적이라서 그분들의 시간에 몰입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영화가 탄생했습니다. 투쟁하는 일상에서 시작한 영화는 투쟁의 방향성을 둘러싼 토론과 갈등을 보여 주다가 투쟁을 평가하고 기억을 공유하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 영화 <보라보라> 한 장면.

개인적으로 참 좋았던 건 조합원들이 들려주는 인생 이력이었어요. 산업체 학교를 다니다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었다가 결국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학력을 얻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저희 언니들이 떠올랐어요. 화장품이나 책의 외판 일로 시작해서 휴게소, 대리운전, 안마방 카운터까지 다양한 직업을 거쳐 현재까지 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여성 노동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당신은 거미를 본 적 있나요?>의 주인공들도 투쟁 기간 중에 인생 이력을 들려주는데요, 그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거든요. 이분들의 이야기를 잘 모으면 불안정한 노동의 행로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좋았던 건 갈라치기를 하는 자본의 계략을 호쾌한 웃음으로 비웃으며 비정규직을 남용하지 못하게, 모두가 정규직으로 일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꿈을 거침없이 말하는 모습이었어요.

▲ 영화 <보라보라> 한 장면.

물론 이 영화에도 노동자들 사이의 갈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조합원들이 서로를 이해하면서 토론하는 모습들이 참 좋았습니다. 영화과 학생으로서 편집을 전담했을 김도준 감독이 투쟁을 거치며 개개인의 의식이 성장하고 자연스럽게 갈등이 생겨난 것이다라는 말을 했던데 맞는 말인 것 같습니다. 갈등이 파국으로 치닫는 것이 아니라 발전과 성장의 동력으로 작용하는 모습이 참 좋았습니다.

첫 번째 영화가 73, 두 번째 영화가 180분이에요. 그런데 영화를 보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답니다. 이 영화들이 극장 개봉할 것 같지는 않아요.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에서 자리를 만들어서 영화를 보고 그 투쟁의 시간들을 되짚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랜선 상영회 희망합니다. (문의: 현장을 지키는 카메라에게 힘을 010-4644-9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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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