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8년 3월호
한일수의 유감천만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한일수/ 두리 한의원 원장,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 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1월에 임상 에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잡문집을 한 권 냈는데, 그 책은 세상에 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속 출판사 창고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원고가 매우 부족했구나! 자성 대신, 요즘 책 읽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따위 시건방진 탄식을 뱉고 있었다. 낙담은 스스로 증폭한다. 책 선전으로 도배하던 페이스북도 들여다보기 민망하여 문 닫아걸고 말았다. 그렇게 글 쓰는 일로 끈 떨어지고 날개 죽지 부러져 낙담 중인 한모(韓某)에게 작은책 편집장께서 무려 연재 칼럼을 부탁하실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한모의 글쓰기는 그럭저럭 40년을 헤아린다. 비루한 글이지만 스스로 글쟁이란 자각은 하고 있고, 이런저런 지면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다. 상업지도 있었고, 문예지도 있었으며, 종이 신문도 인터넷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할 때보다 <작은책>에 기고하는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다. 기왕에 이미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보여주신 선배 필진에게 필적할 만한 글이 나올까 걱정도 크고, 무엇보다 <작은책> 독자들의 선하고 맑은 얼굴이 두렵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숱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명치께가 뻐근하고 목덜미가 당겨온다.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런 글빚을 지고야 말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을 땐 이실직고가 제일이다. 이미 앞선 두 단락으로 눈치를 채셨겠지만, 한모 글에는 무슨 심오한 의학 이론도 없고, 졸깃한 글맛도 없고, 서권기 문자향 따위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지리 궁상 같은 유감(遺憾)과 살면서 편편이 쏟아지는 유감(有感)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꼭지는 지방에 사는 중늙은이 한의사가 진료실에서 겪고 느낀 다양한 불평불만과 신변잡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어지신 독자께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빌고 또 빈다.
2.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7년 현재 한의사 면허 소지자가 2만 5천 명을 넘었음에도, 아직도 한의사라고 자기소개 하면 살짝 묘한 분위기가 있다. 호기심과 무례함이 넘치는 분들은 면전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진맥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맞춰보라는 분도 계시다. 어디가 아픈지 진맥만으로 맞추는 분이 어딘가 계시긴 할 게다. 하지만 우선 내겐 그런 실력이 없고, 맥진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장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환자가 아프다는 곳을 직접 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어떤 동작이 안 되는지 시켜 보고, 그 다음에 진맥을 하면서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아, 그건 진맥 실력이 형편없는 한모 이야기고, 다른 한의사들은 진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진맥에 대해 말하자면, 양쪽 요골동맥의 맥동으로 대체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큰비가 내린 뒤 강가에 나가보니 시뻘건 황토물이 콸콸 흐른다 치자. 그러면 “아, 옹백이골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돼지가 여러 마리 떠내려온다면 돼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싸리골에 큰일이 난 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토가 옹백이골에만 있는 건 아니겠고, 돼지 움막 한두 채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황상 아무래도 더 의심이 가는 고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말하는 증상과 진맥으로 짚어낸 장부의 이상이 들어맞으면(이것을 맥중합참 脈證合參이라고 한다. 맥과 증상이 서로 들어맞으면 순증이고 치료도 잘 되지만, 맥과 증상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역증이라 해서 난치인 경우가 많다. 임상에서는 맥을 버리고 증상을 따라야 하거나 그 반대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하기가 쉬워진다. 진맥은 한의학의 소중한 진단법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든 병을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앞에 앉는 초진 환자는 말 한마디 없이 손을 쑥 내민다. 그럼 한모는 열심히 점심 메뉴를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스트레스가 많고 피로가 쌓였군요. 회사 업무가 부담을 많이 주고 있나 봅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입맛도 별로 없으시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블라블라블라….”
진맥 중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환자 진료는 엄밀해야 한다. 의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진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환자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대체 어디가 아픈지 말씀도 하지 않고, 진맥만으로 그걸 맞히라고 하면,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진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다른 건 조금 하니까 말입니다.
3. 저도 잘 몰라요
말없이 팔만 쓱 내미는 진맥만큼 한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게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질 감별이다. 체질 의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사상 체질 의학은 동무 이제마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만 전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의사 권도원이 제창한 팔체질 의학도 주목받고 있다. 사상 의학은 한의대에서 가르치고 국가고시에도 출제되며 전문의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깊이 연구되고 있는 게 사실인데, 애석하지만 체질 감별은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쓱 쳐다보면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한의사에 따라 골도법(骨度法)으로 감별하기도 하고, 설문지를 분석하기도 하며, 성격이나 고유한 기운을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든 노력 끝에 체질을 파악하고도 체질별 한약을 써서 증상이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고서야 체질 판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처음 진찰하고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제 체질은 뭐냐고 물으시면 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대 의학이 기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단한 진단 장비와 정밀한 수술 요법이 도입되어 일반인에겐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교해 한의학은 침이나 뜸, 심지어 처방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마을에 한문 좀 읽는 분이 ≪방약합편≫ 같은 처방집을 읽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침도 놓고 뜸을 뜨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에선 적각의(赤脚醫)라 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 중에 골라 3년 동안 의학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집중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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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의학은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에 불과한 신생 의학이다. 10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강점과 남북 전쟁, 산업화 과정 등으로 우리가 이 신생 의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진단법과 처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한마디로 갈 길이 먼 학문이다. 불우하게도 한모는 사상 체질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공자가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의사면 내 체질도 쉽게 판정해 주겠지라는 믿음은 거두시는 게 좋다. 저도 젊어서는 소양인이라고 믿었는데, 나중에야 태음인인 걸 알았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