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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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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3. 7. 16:53 기획 특집

<작은책> 2018년 3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미안해요 베트남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혹시나 한국인 여행자가, 베트남어를 잘 아는 한국 여행자가 저녁 무렵에 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는 빈호아 마을을 지날 때면 이런 자장가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넌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가 그랬다. 빈호아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런 자장가를 들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한에 받쳤으면 이런 자장가를 불러 딸, 아들,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있을까.

1993년에 무작정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난 구수정은 1999년에, 베트남전쟁 기간에 일어났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99년부터 <한겨레21>에 연재를 했다. 그 때문에 한국 참전군인들로부터 압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유학 1세대, 구수정 씨는 어떤 사람일까. 파란만장한 그이의 삶과 더불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문제를 되돌아본다.

 

노동자로 살려고 했다

구수정은 1985년에 한신대에 입학했다. 당시 한신대는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았다. 전국의 수배자들이 이곳에 있었고 전국의 해고 교수들도 와 있었다. 정운영 교수, 김수행 교수, 조희연 교수 등이 있는 한신대에서 공부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했던 구수정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를 바로 보게 됐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 3학년 때 노동 현장으로 갔다.

나는 납땜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브라운관이 떠내려오면 인두로 납땜을 하는 일이다. 내가 손이 느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서 못했다. 그걸 못하면 선반에 올려야 된다. 근데 금방 선반에 쌓인다. 그럼 조장이 와서 엄청 혼을 낸다.”

그래도 잘 버티면서 납땜 일만 2년 넘게 했다. 어느 날 학생 출신이라는 게 들통이 났다. 회사는 구수정을 해고했다. 시대가 그랬다. 위장 취업 하면 감옥에도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구수정은 노조를 만들 생각도 못했고 그저 오로지 노동자로 살겠다는 마음이었다. 복직 투쟁을 며칠 하다가 포기했다.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그 무렵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된 강민호라는 친구가 감옥에서 나왔다. 강민호는 1986년 건국대 애학투(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2년으로 석방돼 학교로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정 투표함으로 문제가 되었던 구로구청 점거 투쟁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실형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다음 해 10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되어 1년 만에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구수정과 강민호는 건국대와 구로구청 사건 때 함께 있었고 같이 붙잡혀 각기 징역을 살았다.

구수정은 다시 강민호와 만나 같이 들어갈 공장을 찾았다.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수원은 안 될 것 같아 안양공단으로 갔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안양공단을 다녔지만 계속 거절을 당했다. 큰 공장에 취업 공고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도 면접을 하면 퇴짜당했다. 구수정은 걱정이 들었다. ‘쟤가 먼저 취직되고 나 혼자 남으면 어떻게 하지?’ 구수정은 강민호한테 신신당부했다. ‘절대 너 먼저 취직하면 안 된다. 알았지?’ 하고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1990328일 강민호가 반월공단 내 대붕전선에 먼저 취직이 됐다. 강민호는 어렵게 된 취직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너도 곧 될 거야.” 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구수정은 낙담했다. 혼자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암담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구수정은 집으로 들어갔다. 3년 만이었다.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스스로 공장 가겠다고, 평생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우습게 되더라. 그 비장한 각오가 너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튿날 강민호가 집을 찾아왔다. 집 앞에서 전화로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하고 말했다. 화가 난 구수정은 나가지 않았다. 강민호는 그냥 돌아갔다. 구수정은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강민호가 공장을 들어간 지 8일 만에 전선을 감는 커다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죄책감과 회한이 밀려왔다. 자기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로웠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을걸.’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집 안에 처박혀 폐인처럼 살았다. 거의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살던 구수정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선배가 어느 날 술을 사 주겠다고 나오라고 했다. 그 선배는 돌베개 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 광화문 사무실 근처로 나갔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알딸딸했다. 그런데 술을 먹다가 선배가 말했다.

, 수정아. 이 근처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사가 있는데 기자를 모집하더라. 같이 한번 가 볼래? 너 글 잘 쓰잖아.”

그래? 가 보지. .”

구수정은 술 취한 김에 객기를 부렸다. 당시 <사회평론>은 꽤 신망이 있던 월간지였다. 마침 그날이 기자 면접 보는 날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마지막 면접자를 내보낸 면접위원들이 밖이 시끌시끌하니까 나와 봤다. 그런데 구수정이라는 사람이 면접을 보겠다는 것이다.

입사 서류는 냈어요?”

그런 서류를 낼 턱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면접위원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면접이나 보고 가라고 했다. 구수정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서강대 박호성 교수 등이 면접위원이었다.

아마 내가 굉장히 꼬장을 부렸을 거다. 교수들이 앉아 있는데 젊은 애가 와서 당신들이 내 절망을 알아? 당신들이 노동을 알아?’ 하고 소리 질렀으니.”

저런 배짱이라면하는 마음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구수정이 합격했다. 3개월 수습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는데 오래지 않아 <사회평론> 잡지가 폐간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구수정은 <사회평론> 덕에 피폐했던 삶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다.

때는 1992년 선거철. 구수정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글을 잘 썼던 구수정은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구수정은 김대중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엔 차선책으로 김대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 구수정은 차선도 허락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가 너무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구수정은 소비에트연방과 동구권이 연달아 무너지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절망했다. 구수정은 사회주의를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남들처럼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챤딘반, 도서출판 친구, 1988)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사이공 괴뢰정권에게 총살을 당한 우옌 반 쵸이 이야기다. 우옌 반 쵸이의 처형 이후 해방구로 들어간 그의 젊은 부인 판 티 쿠옌이 그와 함께 보냈던 최후의 나날들을 진술했고, 남베트남의 작가 챤딘반이 글로 썼다. 하노이의 베트남 외문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도서출판 친구1988년에 번역해 출간했다. 구수정은 사형을 당할 때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우옌 반 쵸이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책 한 권. 사이공의 흰옷(도서출판 친구, 1986)을 봤다. 이 책은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한 베트남 고등학생들을 다룬 소설이다. 구수정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결심했다.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은 8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당하다가 1945년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베트남을 재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54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프랑스를 몰아내는가 했더니 이후 독선과 오만에 찬 미국이 침략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결국 미국을 몰아내고 19767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한국의 박정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쟁에 보내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구수정이 베트남을 간 때는 199312월이었다. 한국과 다시 수교를 한 지 겨우 1년 만이라 베트남에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구수정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무조건 베트남을 가서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그동안 벌어 놨던 돈을 몽땅 찾았다. 계획도 없이 비자를 받고 호치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인상, 택시가 없다. 마중 나온 사람도 없고, 연락할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낮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아, 정말 덥구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공항은 한산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린 다른 외국인들도 별로 없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가자고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돌아보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외계어 같은 베트남어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떠나갔다. 그런데 자가용으로 보이는 차 몇 대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유리창 위 조그만 종이에 택시라고 써 있었다. 무조건 탔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호텔, 호텔 했더니 운전사가 무슨 호텔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그 당시 호치민에서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렉스호텔 하나였다. 모든 요금이 외국인 차등제였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인가? 생각했다. 구수정은 호텔 밖을 나갈 염도 내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고 지리도 몰랐다.

호텔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데 카운터에서 올라왔다. 오늘이 음력 보름인데 절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가이드도 붙여 주겠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구수정은 용기를 내서 밖으로 한번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문제였다. 그 돈을 호텔방에 두고 나가기가 겁이 났다. 5성급 호텔이라는 데가 문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주말이라 금고 담당자가 없어 맡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낭에 담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데를 갔다. 절에 들어가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채만 한 향을 태우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향들이 달려 있는데 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다.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계속 나오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은 북적댔다. 옆에 가이드 팔을 잡고서 도저히 숨도 못 쉬겠으니까 빨리 나가자고 해 다시 돌아서 겨우 나왔다. 목도 아프고 눈도 아파 길거리 카페를 가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돈을 내려고 보니까 가방이 찢어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모든 걸 정리해서 왔는데.

집에서도 베트남 간다는 걸 너무너무 반대했고 둘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슨 유학을 베트남으로 가려고 하냐, 미쳤나, 여자 혼자서 거길 어떻게 가냐고 말리는 걸 뿌리치고 왔는데.”

구수정은 무작정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영사가 구수정의 손에 100달러를 쥐어 주며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지켜본 렉스호텔에서는 호텔비를 독촉하지 않고 숙소를 하나 소개해 줬다. 출장을 온 정부 관료들이 묶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에 35달러였다. 수중에 100달러밖에 없는 구수정은 그것도 부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 숙박비를 채근하지 않았다.

처음에 거길 갔는데 문을 못 열었다. 도마뱀이 문 전체를 덮고 있었다. ‘까약!’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누가 와서 문을 열어 주더라. 그런데 도마뱀은 재앙도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쥐들이 막 튀어나왔다. 베트남 쥐는 고양이만 한 것도 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집에 연락을 해서 돈을 좀 받아야 했다. 해외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중앙우체국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너무 비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전달할 수 있을까 연습까지 했는데도 86달러가 나왔다. 우체국까지 걷고 차비도 안 쓰고 밥도 물도 안 사 먹었다. 집에서 부치는 돈이 언제 올지 몰라 암담했다.

어떻게든 한국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청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한국 사람이 갈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도 가 봤다. 영사관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고 버텼지만 결국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수중에 1달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사흘 정도 굶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 되나 보다. 내일은 가야겠다. 처음으로 짐을 풀어 봤다. 내가 가지고 온 게 영어사전 한 권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 하나 가지고 왔더라. 그걸 왜 가져갔는지 잘 모르겠더라.”

처음으로 그 테이프를 들었는데 갑자기 통곡이 터졌다. 한국에서 부르던 운동가요를 들으니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울음소리가 이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공명이 되면서 내 울음소리가 울음을 자극해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아래층 수위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 수위도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챈 듯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숙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에 먹을 걸 들고 왔다. 과일은 물론 심지어는 물, , 음식 같은 것도 가져왔다.

이 사람들은 4시면 일어나니까. 미리 오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무나 와서 벨을 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과일을 가져오고 뭘 가져오고. 한 달은 먹을 게 쌓였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와서 안아 주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끊임없이 베트남어로 위로하는 거 같았다. 그때 내가 더 있어 봐야겠다. 일주일만 더 버텨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정 상무님, 정 상무님!”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어떤 한국 사람이 구수정 옆 방문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소리였다. 꿈에 그리던 한국 사람이었다.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몸이 굳어 발이 안 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갔는데 그 한국인은 이미 계단으로 내려간 뒤였다. 얼른 밖을 내다보니 차를 타려고 했다. 절박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선생님! 아저씨! 기다려요!” 하고 소리친 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온통 뿌옜다. 염치도 없이 그 차를 타고는 눈물 콧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려 보였을 거다.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얼굴은 동글동글 몸은 너무 말랐고 키도 작았다. 거기서 엉엉 울고 말도 못하고. 그분이 괜찮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한국인이 구수정을 렉스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베트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그 한국인한테 구수정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한국인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거냐, 여기에 남을 거냐고. 구수정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 한국인이 봉투를 놓고 갔다. 봉투에는 2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구수정은 나중에 그분을 만나면 드리려고,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호치민에서 옷 속에다 주머니를 만들어 늘 2천 달러를 품고 다녔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그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연말 영사관 한인의 밤행사에서 그분을 만났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구수정은 인사를 하고 돈을 건넸지만 그분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진짜 열심히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분의 모든 통역이며 계약이며 내가 다 발 벗고 나섰다. 생명의 은인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분은 사업이 망해 몇 년 뒤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두 달 만에 한국에서 소포가 왔다. 상자에 나주 배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한글을 보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울었다. 나는 문자 중독이었는데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어를 빨리 배우려고 일부러 한글로 된 책 한 권도 안 가져왔다.”

대학원을 들어가는 데 수많은 벽을 만났다. 먼저 베트남어를 배워야 했다. 호치민시 국립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어서 절차를 아는 이도 없었다. 모두들 자기가 아는 대답만 했다.

“‘너는 역사학과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 보충 학습을 해야 할 거야.’ ‘그건 어떻게 해?’ ‘역사학과에서 보충 학습을 들어.’ 보충 학습을 들었다. 끝난 뒤 시험을 보려면 어떻게 해?’ 그럼 누가 과외를 해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또 과외를 했다.”

베트남에 간 지 3년째. 19956월 입학시험이 있었다. 입학 허가 구비 서류로 한국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범죄경력조회서에서 한국 공관의 신원보증서는 물론 호치민시 외무청, ··동 인민위원회 및 공안을 돌며 신원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장 추천서, 어학당 수학 능력 인정서, 교수 2명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그래도 베트남 중앙인 하노이 교육부의 입학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구수정에게 우선 입시를 치르도록 허락해 줬다. 지원자 30명과 함께 역사학과 석사 과정 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전공이 베트남 역사 세 과목(현대사·당사·통사)이었다. 구수정은 평점 10점 만점에 9.2를 받아 수석 합격했다. 베트남어는 평점 9.9로 발군이었다. 구수정은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교육부 회신을 기다렸다. 2년 과정을 모두 수료했는데 하노이 교육부 회신은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였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구수정은 끈질겼다. 하노이 교육부를 여덟 번 찾아가 책임자를 면담했다. 결국 대학원 2년 과정을 끝내고 8개월 지난 뒤에야 입학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1997년 학기말 고사의 민속학 과목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역사학과 개설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일부 교수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었다. 담당 교수인 탄 판 교수는 위원회에서 진술했다. 구수정은 철자에 한 글자도 오자가 없었다. 구수정이 갖는 불리와 한계를 생각컨대 답안이 9.9라면 0.1을 가산해야 한다.”

구수정의 논문 주제도 벽을 만났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를 학교 당국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신청한 지 2년 만인 19999월에야 허가되었다. 논문 쓸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국립문서보관소, 국방부, 외무부 등의 자료에 접근하려면 재학증명서,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공안 서류부터 영사관, 베트남 외무부 허가서 등 구비 서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에 보내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서류도 있었다. 또다시 하노이를 여덟 번이나 다녀왔다. 쓰뜨 하동(베트남에서 가장 무섭다는 하동 사자)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러나 쓰뜨 하동도 안 되는 건 있었다. 여덟 번째 하노이 방문에서 자료 접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외무부 산하에 있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안 올 거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하고 돌아나오는데 그 직원이 슬쩍 나를 잡았다. ‘자료를 사는 건 어때?’ 하고 묻더라.”

그런 방법이 다 있냐고 물었더니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20여 쪽 되는 복사물을 400달러 정도를 주고 매수했다.

자료를 받았는데 판독이 안 되는 거다. 무슨 학살이니 하는 낱말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자료가 만들어진 게 1980년대 중후반으로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이걸 파는 사람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다 지워 버렸다."

친하게 지내던 베트남 친구한테 필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뒤 나타난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필사본을 던져 주고는 가 버렸다.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구수정은 자료를 펼쳐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그 자료는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세상에 이토록 잔인한 짓들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이! 카이! 외치는 피해자들

구수정은 학살 현장을 찾아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나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인삼차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인삼차는 고급이었다. 한국으로 넘어와 경동시장을 가서 트럭 한 대 분량의 인삼차를 산 뒤 배편으로 베트남으로 보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구수정은 뭐에 홀린 듯이 마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엔 도로도 변변찮아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마을도 많았는데 사진기에다 노트, 인삼차 등등 앞에도 배낭, 뒤에도 배낭을 메고 그 땡볕을 걸었다.

하루에 세 마을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외국인은 마을에서 못 자니까 마음이 급했다. 대도시에 숙소를 잡고 마을을 가려면 아침 4시에 호텔 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세 마을을 취재하고 마지막 마을을 나올 때쯤 되면 밤 열 시, 열한 시, 호텔 도착하면 새벽 한 시가 된다.”

구수정이 찾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30년 만에 처음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인이었다. 구수정이 마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카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고 외친다. 베트남어로 카이는 진술하겠다라는 뜻이다. 중부 지방의 사투리는 제주 방언만큼이나 어려워서 베트남 사람들끼리도 잘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수정은 그 말이 다 들렸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이, 손짓, 발짓, 몸짓이 다 말하고 있었다.

차마 믿기 어려운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불교가 국민 종교인 이 나라에서 승려 4명이 학살당한 린선사 사건을 목격했던 노스님도 그랬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 오시길래 손을 씻으라고 하는 절 의식인가 했는데 그 다음부터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손을 씻으니 새하얀 손수건을 내주고 음식을 먹으면 또 입을 닦으라고 물수건을 주시고 다 먹고 나니까 또 손을 닦으라고 새 물을 갖다주셨다. 한국군 학살 이야기를 하면서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을 이리 살뜰히 대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했다.”

가끔 술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구수정은 그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술이 눈물인 양 가슴에 슬픔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서로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내가 울면 안 되지 하고, 나도 이분들 앞에서 어떻게 울어? 하며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다. 그런데 꼭 어느 대목에선가,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죽었어하고는 왈칵, 울음이 터진다. 근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울면서 했던 얘기가 울어서 미안해였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면 할머니들이 또 아가, 아가,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피해자들은 너무 많고 구수정은 혼자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을 아주 빨리, 최대한 짧게 한다.한국군이 들어왔어. 우리를 잡았어. 총 쏘고 수류탄 던졌어, 죽었어.” 그런 이야기를 수백 명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말을 축약할수록 눈빛이나 표정은 더 강렬해진다.

어느 순간 귀가 들리지 않았다. 마을을 돌아다닌 지 스무 날이 지났을 때였다. 이젠 더 이상 못 듣겠다, 정말로 못 듣겠다 구수정은 속으로만 고함을 쳐 대고 있던 차였다.

아마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귀가 안 들렸던 것 같다. 처음으로 쉬었다. 그 참에 빈딘성박물관에 갔는데 거기서 상세히 정리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자료를 만났다.”

그러고 나니 꾀가 났다.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빈딘성의 성도 뀌년에서 가장 큰 학교 옆 문방구를 가서 노트를 수백 권 샀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 이번엔 노트를 나눠 주며 말하지 말고 적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입을 달싹일 때마다 구수정은 겁이 났다.

연필심에 혀로 침을 묻혀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꼭꼭 눌러쓰는 모습이 무슨 초등학생 시험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글눈이 밝은 사람 앞에는 까막눈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나 좀 써 줘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혹여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고 절박한 모습이었다.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 노인네들이 엉덩이를 하늘까지 올리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보는데 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지더라, 그래도 그때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사람의 이야기는 직접 들어야 했다. 구수정은 대표로 딱 두 분의 이야기만 듣겠다고 했다. 다시 또 모든 사람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었다. 그중에 누군가 우리 집은 일곱이 죽었어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린 열 명, 우리 집은 열셋, 우린 열입곱이에요 하고 아우성을 쳐 댔다. 열일곱이요?” 열셋과 열일곱의 가족을 잃었다는 피해자를 지목해 이야기를 듣는데 한 할머니가 손도 못 들고 구수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구수정은 애써 할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입을 삐죽삐죽하며 서성대고 있었다.

따라오시는 거 알았다. 봉고차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 할머니가 그 먼 거리를 계속 따라오셨다. 나는 모른 척하고 걸음도 일부러 빨리 해서 막 갔는데 마음이 오죽했겠냐. 내가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할머니도 빠르게 따라오다가 뒤돌아보면 할머니도 딱 멈춰. 이제 어떡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아, 몰라 그러고 막 가면 할머니가 또 막 쫓아와, 그러다가 봉고차까지 쫓아왔는데 아, 저 할머니 어떻게 돌아가시나 걱정이 됐다.”

봉고차에 올라탄 구수정은 빨리 출발하라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차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데 할머니가 사력을 다해 뛰면서 차를 따라왔다. 기사한테 멈추라고 했다. 창문만 내리고 할머니 왜요?” 했더니 할머니가 홱, 뒤를 돌아서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 말씀 안 하면 갈 거예요.” 하면서 또 출발했다. 그런데 차가 움직이면 할머니가 또 따라 뛰었다. 이렇게 서너 번 하다가 화가 난 구수정은 차에서 내려서 할머니한테 따졌다.

“‘할머니 말을 하라고요. 뭐하는 거냐고요.’ 왜 그렇게 머리꼭지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 땡볕을 한정 없이 걷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 이 마을들을 돌고 돌아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미안해 해야 하는 거지? 가슴 한편에 이런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삭이고 삭였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 나 죽겠다고요. 돌겠다고요.’ 이러면서 막 터진 거다. ‘말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이러면서 엄청 다그쳤는데 할머니가 난 한 명만 죽었잖아.’ 이러는 거다. 근데 그 아이가 외아들이었어, 독자였어하는데 너무 기가 막혀 되레 소리를 질러 댔다. ‘한 명만 죽었다고 왜 말을 못해? 할머니한테는 그 한 명이 전부잖아!’”

구수정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막 치면서 엉엉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할머니는 어디 가셨지? 싶어 옆을 봤더니 할머니도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는 땅을 내리치면서 울고 있었다.

저 할머니 뭐 하나 했더니 나를 따라서, 할머니도 갑자기 신발 한 짝을 벗어서 울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 마주보고서 웃음이 터졌다. 할머니 미안해, 너무 미안해.” 구수정은 웃다가 또 울음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가 따뜻하게 구수정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다 알아 내가 다 알아.’ 그 할머니 지금 살아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마 돌아가셨을 거다. 그때 연세가 많았는데.”

구수정은 그날이 가장 슬펐던 날이라고 했다.

 

학살 현장

구수정이 밝힌 한국 군인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여간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총 312853명의 따이한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중 4687명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간 중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6천 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 작전을 수행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414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된 적이 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양민의 수를 대략 5천 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수정에 따르면 정작 학살 현장의 주민들은 이 수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부가 정확한 진상 조사에 소극적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가 어떤 지역에서는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공인한 수치의 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믿기 어려운 증언이 이어졌다. 구수정이 그 당시 <한겨레21>에 전했던 한국군의 학살 만행 일부만 보면 이렇다.

“19651222, 한국군 작전 병력 2개 대대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들, 즉 민간인 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 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를 따로 나눴다.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는 군인들 노리갯감으로 썼다. 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들의 양민 학살 행위 유형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 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 넣,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최루 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는 것 등이었다."

 

창자는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렸고, 불에 타 누렇게 녹아내린 지방층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녔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1A국도를 따라 채반을 들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구수정, <한겨레21> 273)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민간인은 모두 9천여 명으로 추정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런 사건은 멀리는 1947년 제주4·3항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때 이승만 군대의 보도연맹원 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되풀이됐다. 이 모든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였다. 빨갱이면 간난아이도, 임신한 여성도, 노인도, 그렇게 죽여도 되나? 아무나 죽인 뒤 빨갱이라고 한 건 아닌가? 아니 빨갱이면 그렇게 죽여도 되나?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구수정은 19995<한겨레21>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처음 폭로했고 <한겨레21> 베트남 종단 특별 르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등으로 한국군 학살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20006272,400명의 베트남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해서 신문사의 윤전기, 사무 집기, 16만 장에 이르는 서류를 불태우고, 간부들도 감금하고, 송전을 차단해 업무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구수정은 베트남에 있었는데, 그녀의 집 골목 담벼락마다 빨갱이라는 등 욕설을 스프레이로 뿌려놓고 집 앞에 염산 통을 갖다 놓기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한국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 준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임종 전에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을 감행했다. 한겨레에서 신변 보호 요청을 했다. 공항에서는 가장 먼저 대통령이 나가는 출구로 빠져나갔고 집 입구에서부터 경찰 차벽 사이로 집에 들어갔다. 5분만 보고 나오라고 재촉해서 30분 정도 뵙고 나왔다.”

장례가 끝나고 한국 정부는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 공관은 여기 너무 위험하다고 오는 걸 꺼렸다. 국제 미아가 되는 듯했다. 그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수도원에 와 계시라고 했다. 구수정은 그곳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그 뒤 한국에서는 열네 개 시민단체가 모인다. 유시민, 한홍구, 차미경 등이 모여 베트남전진실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구수정은 베트남에 사회적 기업 아맙을 만들었고 한국에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생겼지만 베트남 문제를 구수정 혼자 붙들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모든 이들이 베트남 문제를 껴안고 10, 20년 계속 갈 수 없었다. 구수정은 버거웠다. 앞으로 혼자서 이 문제를 지고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이 문제에 손을 놔 버리면 2030년 묻혔다가 또 누군가가 다시 시작해야 될 거 같아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재단을 만들 때 맨손이었다. 구수정 자신도 재단이 쉽게 만들어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하니까 부닥쳐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100명을 적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은 분들 얼굴도 본 적 없었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전화 드리고 만날 준비도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그동안 참 많이 미안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이라도 걸어 달라고 했다. 감동이었다.”

누군가 시작하기만 바랐던 것일까. 대부분이 부채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한테는 일단 메일을 보냈다.

내가 정말 딱 할 얘기만 썼다. 왜냐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저는 한베평화재단을 만들고 있고하는 정말 몇 줄 안 되는 딱 할 말만 요약한 아주 건조한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너무너무 부드러운 답장이 왔더라. 그때 그분은 외국에 나가 계셨는데 여기는 단풍이 지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시려면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그것도 안 되면 이렇게 하시면 되고.’ 나중에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추진위원으로 동의를 해 주셨다.”

아맙,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을 만들 때 구수정 둘레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아맙을 만들 때는 어쩌겠냐 니가 하겠다는데 하면서 천만 원을 바로 낸 사람도 있다. 일주일 만에 일 억을 만들었다. 아맙은 조금 쉽게 만들었다. 그런데 공정무역을 하려면 한국에 기업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을 만들 때 또다시 7억을 모금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공동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가난한 분인데 2000만 원을 낸 분도 있다. 아시아공동네트워크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 동원해서 돈을 만든 거다. 그런데 또 한베평화재단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는 너무 부담이 됐다. 근데 어떻게 해? 돈 낸 사람한테 또 내라고 한 거지. 그분들이 또 내 주셨다.”

재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이번에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을 직접 답사해, 한국군 학살 희생자 추모 위령비, 위령관, 묘지, 학살 현장들을 안내하는 구글 지도를 만들었다. 한국 군인이 민간인을 가장 많이 학살한 중부 지역 다낭, 호이안, 하미 마을, 퐁니 퐁넛 마을은 모두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꽝남순례길 1코스는 19681~2월 호이안 인근 마을에서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청룡부대가 민간인들을 학살한 3개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다. 베트남 중부 5개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약 9천 명 이상이며 이중 꽝남성에서만 약 4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년이면 천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다낭을 간다는데 그들 중에서 몇 명이 30분 거리에 학살 지역이 있다는 걸 알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학살 현장에 있는 꽃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꽃을 산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이렇게 찾아왔던 분들이 고맙다고, 우리가 이런 곳을 한번은 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너무 쉽게 잘 다녀왔다고 인사한다. 재단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뒷이야기

한베평화재단은 옥수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건물 4층에 있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작년에 만들었는데 워낙 활발하게 활동해서 그런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구수정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만나면서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한때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다. 베트남에서 6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거두고 한국인 방문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지원도 하고 그랬는데 민간인 학살 문제가 터지자 일자리가 뚝 끊겼다. 임대료를 못 내다가 결국 전기, 수도가 다 끊어지고 집에서 쫓겨나는 경험도 했다. 한 달에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한평생 살면서 올바른 일로 인생을 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구수정 이사는 요즘 너무 바쁘다. 올해는 베트남에서 하미학살 50주기 위령제를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위령제 참배단을 모집하고 있다. 38일부터 13일까지 56일 일정이다. 하미에서만 한국군에 희생당한 민간인이 135명이나 된다. 하미학살, 빈안학살 등 해마다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내는 곳들이 있다.(따이한한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합동 제사를 지내고 마을 주민 전체가 음복을 하는 전통이 있지만 그동안 제사 비용과 음복연 비용이 없어 제사를 거르는 해가 많았다고 한다. 2018년에는 50주기 위령제를 맞는 지역들에 100만 원씩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올해 421일부터 22일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학살 피해자인 베트남인이 원고가 돼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다. 현재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만만만캠페인을 하고 있다. ‘만만만이란 만 일의 전쟁, 만 인의 희생, 만 인의 연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한테 전쟁 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한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모든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과오부터 돌아보고 베트남전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한국 참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박정희가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 범죄는, 아니 앞으로 영원히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씨. 사진_안건모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8년 3월호

한일수의 유감천만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한일수/ 두리 한의원 원장,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1월에 임상 에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잡문집을 한 권 냈는데, 그 책은 세상에 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속 출판사 창고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원고가 매우 부족했구나! 자성 대신, 요즘 책 읽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따위 시건방진 탄식을 뱉고 있었다. 낙담은 스스로 증폭한다. 책 선전으로 도배하던 페이스북도 들여다보기 민망하여 문 닫아걸고 말았다. 그렇게 글 쓰는 일로 끈 떨어지고 날개 죽지 부러져 낙담 중인 한모(韓某)에게 작은책 편집장께서 무려 연재 칼럼을 부탁하실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한모의 글쓰기는 그럭저럭 40년을 헤아린다. 비루한 글이지만 스스로 글쟁이란 자각은 하고 있고, 이런저런 지면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다. 상업지도 있었고, 문예지도 있었으며, 종이 신문도 인터넷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할 때보다 <작은책>에 기고하는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다. 기왕에 이미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보여주신 선배 필진에게 필적할 만한 글이 나올까 걱정도 크고, 무엇보다 <작은책> 독자들의 선하고 맑은 얼굴이 두렵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숱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명치께가 뻐근하고 목덜미가 당겨온다.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런 글빚을 지고야 말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을 땐 이실직고가 제일이다. 이미 앞선 두 단락으로 눈치를 채셨겠지만, 한모 글에는 무슨 심오한 의학 이론도 없고, 졸깃한 글맛도 없고, 서권기 문자향 따위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지리 궁상 같은 유감(遺憾)과 살면서 편편이 쏟아지는 유감(有感)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꼭지는 지방에 사는 중늙은이 한의사가 진료실에서 겪고 느낀 다양한 불평불만과 신변잡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어지신 독자께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빌고 또 빈다.


 

2.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7년 현재 한의사 면허 소지자가 25천 명을 넘었음에도, 아직도 한의사라고 자기소개 하면 살짝 묘한 분위기가 있다. 호기심과 무례함이 넘치는 분들은 면전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진맥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맞춰보라는 분도 계시다. 어디가 아픈지 진맥만으로 맞추는 분이 어딘가 계시긴 할 게다. 하지만 우선 내겐 그런 실력이 없고, 맥진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장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환자가 아프다는 곳을 직접 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어떤 동작이 안 되는지 시켜 보고, 그 다음에 진맥을 하면서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 그건 진맥 실력이 형편없는 한모 이야기고, 다른 한의사들은 진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진맥에 대해 말하자면, 양쪽 요골동맥의 맥동으로 대체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큰비가 내린 뒤 강가에 나가보니 시뻘건 황토물이 콸콸 흐른다 치자. 그러면 , 옹백이골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돼지가 여러 마리 떠내려온다면 돼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싸리골에 큰일이 난 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토가 옹백이골에만 있는 건 아니겠고, 돼지 움막 한두 채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황상 아무래도 더 의심이 가는 고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말하는 증상과 진맥으로 짚어낸 장부의 이상이 들어맞으면(이것을 맥중합참 脈證合參이라고 한다. 맥과 증상이 서로 들어맞으면 순증이고 치료도 잘 되지만, 맥과 증상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역증이라 해서 난치인 경우가 많다. 임상에서는 맥을 버리고 증상을 따라야 하거나 그 반대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하기가 쉬워진다. 진맥은 한의학의 소중한 진단법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든 병을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앞에 앉는 초진 환자는 말 한마디 없이 손을 쑥 내민다. 그럼 한모는 열심히 점심 메뉴를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스트레스가 많고 피로가 쌓였군요. 회사 업무가 부담을 많이 주고 있나 봅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입맛도 별로 없으시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블라블라블라.”


진맥 중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환자 진료는 엄밀해야 한다. 의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진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환자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대체 어디가 아픈지 말씀도 하지 않고, 진맥만으로 그걸 맞히라고 하면,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진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다른 건 조금 하니까 말입니다.


 

3. 저도 잘 몰라요


말없이 팔만 쓱 내미는 진맥만큼 한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게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질 감별이다. 체질 의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사상 체질 의학은 동무 이제마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만 전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의사 권도원이 제창한 팔체질 의학도 주목받고 있다. 사상 의학은 한의대에서 가르치고 국가고시에도 출제되며 전문의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깊이 연구되고 있는 게 사실인데, 애석하지만 체질 감별은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쓱 쳐다보면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한의사에 따라 골도법(骨度法)으로 감별하기도 하고, 설문지를 분석하기도 하며, 성격이나 고유한 기운을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든 노력 끝에 체질을 파악하고도 체질별 한약을 써서 증상이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고서야 체질 판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처음 진찰하고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제 체질은 뭐냐고 물으시면 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대 의학이 기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단한 진단 장비와 정밀한 수술 요법이 도입되어 일반인에겐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교해 한의학은 침이나 뜸, 심지어 처방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마을에 한문 좀 읽는 분이 방약합편같은 처방집을 읽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침도 놓고 뜸을 뜨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에선 적각의(赤脚醫)라 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 중에 골라 3년 동안 의학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집중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Pixabay

사상 의학은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에 불과한 신생 의학이다. 10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강점과 남북 전쟁, 산업화 과정 등으로 우리가 이 신생 의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진단법과 처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한마디로 갈 길이 먼 학문이다. 불우하게도 한모는 사상 체질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공자가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의사면 내 체질도 쉽게 판정해 주겠지라는 믿음은 거두시는 게 좋다. 저도 젊어서는 소양인이라고 믿었는데, 나중에야 태음인인 걸 알았다니까요?

posted by 작은책
2018. 3. 7. 11:41 알림 / 엮은이의 글

월간 <작은책>이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원하는 '2018년 우수콘텐츠잡지'에 선정되었습니다.

우수콘텐츠잡지에 선정되면 다달이 일정 부수를 문화 소외 지역 및 관련 시설에 배포한다고 합니다.

좋은 글 주신 필자님들, <작은책>을 아껴주시는 독자님들 덕분입니다. 참 고맙습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8. 3. 7. 11:16 알림 / 엮은이의 글


차례



책이 이끄는 여행

제주도를 아시나요? / 이동수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입양 가족은 예비 범죄자가 아니다 / 김지영

17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 베를린 곰과 한국의 호랑이 /  조숙현

22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대만 시장 음식 / 윤혜신

27 한일수의 유감천만 -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 한일수

32 청년으로 살아가기 - 대관령을 넘었는데 빚이 3천만 원 / 진솔아

36 이야기가 있는 사진 / 박준성

38 살아온 이야기(9) - 교도소에서 나온 엄마는 장담했다 / 이하나

44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 팔불출 사랑 / 안재성

49 교실 이야기 - 아이들과 함께한 베트남 수업 이야기 / 예영주

53 이야기가 있는 들녘 - “전수 좋지?” “전수 좋다~!” / 김진회

58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0 일터 탐방_ 인천광역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 정규직 되니 ‘아줌마’라고 안 불러요 / 정인열

66 일터에서 온 소식 - 슬픈 연구자들의 초상 / 이영이

71 작은책 법률 상담소 - 반려견 사건·사고 /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75 미안해요 베트남 / 안건모

104 이동슈의 생활 만화 / 이동수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 개헌, 어떻게 봐야 할까? / 하승수

112 여성으로 살아가기 - 나는 아빠와 이별 중이다 / 홍승은

117 ‘그때 그 사건’ 다시 보기 - 이 착한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 김형민

122 생태 이야기 - 자율 주행이라는 신기루 / 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27 책 읽고 딴 생각 - 평화의 꿈, 자본의 길 / 유동걸

130 독립영화 이야기 - 당신의 4년은 어땠나요? / 류미례

135 우리 지역 깊은 역사 - 유관순 열사의 고혼 / 정종배

140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2년 4월호

일터 이야기


* 편집자 주 :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어난 일입니다. 당시 57일간의 파업 끝에 이 글을 쓴 송근영 님을 비롯한 비정규직은 완전한 정규직 전환(직접고용 및 직군 설립)을 이끌어 냈고 모두 현장에서 지금도 일하고 있습니다. ^_^


수영 강사들의 요구

송근영/ 인천 남동구도시관리공단 국민체육센터 수영 강사


여성 수영 강사로서 어느덧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처음 수영 강습을 시작했을 땐 느끼지 못했던 증상들이 몸에 느껴진다. 몸이 자꾸 차가워져 생리통이 점점 심해지고 생리하는 날은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지만 템포를 끼고 입수를 한다. 그러고도 혹시나 하는 불안한 마음에 짬짬이 화장실에 가서 확인을 한다. 한여름에도 추워서 강습을 끝내고 나가도 에어컨은 틀지 않아도 되고, 피부는 점점 건조해진다. 여름에는 수영장 내 유해 가스가 심해져 집에 가선 심각한 병에 걸린 사람처럼 눈알이 튀어나오게 기침을 해 댄다.


그런데 이번에 이사장이 바뀌면서 강습 중에 입는 슈트(몸을 덮는 두터운 수영복)에 대한 지원이 끊겼다. 강습할 때 수영복만 입으면 됐지 무슨 슈트까지 입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슈트는 수영 강사의 필수품이다. 우리는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설명을 하며 회원들의 자세를 잡아 주기 때문에 활동량이 적다. 수영장의 수온은 운동하는 사람들의 기준에 맞춰 27~28도 사이로 유지된다. 따라서 활동량이 적은 강사들은 저체온증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보온을 위해 슈트를 입는다. 슈트는 또한 회원들과의 신체 접촉을 어느 정도 막아 준다. 수영의 특성상 몸에 걸치는 것이 별로 없고, 팔을 휘저으며 하고, 물속에서 이뤄지는 일은 타인들의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에 가끔 불쾌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슈트 예산을 삭감해 버린 것이다.

오후 근무인 나는 어린이 수업을 두 시간 연속으로 하고 저녁 식사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두 시간 동안 수업에 들어간다. 수업 중간에 한 시간의 저녁 식사 시간이 있지만 실질적인 휴식 시간을 한 시간으로 보긴 어렵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대충 털고 보면 어느덧 20분이 흘러 있다. 급하게 밥을 먹고 차 한잔 마실 시간도 없이 50분이 되면 다시 옷을 갈아입고 수업을 준비한다.

수업이 없는 시간에는 안전 근무를 한 시간 서고, 회원 상담에, 인포메이션 센터 지원에 각자 정해진 부수적인 업무와 수영장 청소 등을 한다. 그 시간을 쉬는 시간이라 생각하는 이사장은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안전 근무 한 시간 늘어나는 것이 별일이냐 하지만 체감되는 타격은 굉장히 크게 느껴진다.

강사들에게는 1인당 일 년에 15일의 연차가 있어 매달 돌아가며 연차를 쓰고 있다. 남자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예비군 훈련 등에 참가해야 한다. 빠진 사람의 안전 근무에 대체해서 근무에 들어가야 하고 강습도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미안해 연차를 못 쓰고 있다. 연말이 되면 3일만 연가 보상비가 나오고 나머지 남은 날에 대해서는 보상비가 안 나오니 빨리 연차를 쓰라고 압박이 들어온다.

대우가 좋지 않으니 강사들이 줄질이 퇴사했을 경우엔 어떠했는가. 공단이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채용 공고를 내고 면접을 보고 하는 기간 동안은 퇴직자가 담당했던 수업과 안전 근무를 들어가느라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다 지나간다. 대타를 많이 뛰는 선생님은 하루에 6시간까지도 물속에 들어가야 하고, 안전 근무까지 서다 보면 꼬박 하루를 수영장에서 보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원 관리와 상담을 위해 불가피하게 퇴근 시간을 넘기는 것이 다반사다.

안전 근무 때는 단순히 수영장에서 한 시간을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응급 상황을 대처하고 수영장 내에서 일어나는 자잘한 민원들을 처리해야 한다. 우리 센터에는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이 계셔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한번은 어르신이 가슴 정도의 높이의 물에서 빠져서 구하러 들어가기도 했다.

2012년부터 규정이 바뀌어 자유 수영 때 안전 근무자가 2명이 있어야 된다고 한다. 인원 충원을 요구했으나 이사장은 기존 강사들이 한 시간씩 더 들어가면 되는 걸 쓸데없이 요구한다며 수업 4시간에 안전 근무 2시간을 강요한다. 노동의 강도를 높일 수 없는 정당한 이유들을 대고 대직 근무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사장은 우리에게 노동 강도가 높아짐에 따른 건강원의 문제는 말도 안 된다며 입도 못 떼게 한다.

강사들이 이를 거부하자 이런 식이라면 최후통첩을 할 수밖에 없다며 센터로 직접 찾아왔다.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어떤 식으로 해결해 줄 것인지 우리가 물어도 단칼에 무시하며 해고 통보를 한다. 실질적인 업무 파악과 실태도 모른 채 수익에 눈이 멀어 거짓말만 일삼고 약속도 지키지 않고 노동 강도를 높일 것을 강요하는 이사장의 경영을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파업을 했다.

우리의 요구는, 수익성과 맞지 않는다며 일방적으로 폐지한 회원 셔틀버스를 다시 운영하는 것, 센터 내 환경미화 직원을 직접고용하는 것, 비정규직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는 것이다. 우리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남동구 구민들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 만들어진 센터에서 운영하는 셔틀버스가 수익성과는 무슨 관련이 있으며 왜 그것을 수익성의 논리로 따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또 간접고용이라는 이유만으로 새해 첫날 출근하여 센터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은 환경미화원들도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이분들을 직접고용해 용역회사가 중간에서 떼어먹는 돈 없이 월급을 고스란히 주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정규직화하라는 것은 임금을 올려 달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대우받으며 일을 하고자 위함이다. 우리는 임금을 동결하는 조건으로 정규직화를 요구하고 있다.

이 와중에도 이사장은 교섭 때마다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파업 전 오고 갔던 말들은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하며, 직원들에게 강요하거나 몰래 카메라를 찍은 것도 발뺌한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하여 이사장을 찾아간 회원에게는 여편네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며 막말을 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제출한 성명은 진짜 본인 의지로 한 것이냐며 확인 전화를 했고, 노조원들의 집에는 우리가 불법 파업을 하고 있다며 등기 우편물을 보내 가정 내 불안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다른 두 가지 합의 사항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혀 가는데 강사들의 정규직 전환 문제는 절대 물러서지 않고 있다. 우리 센터 소장님이 노조를 만들었고,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노조 활동을 한 것이 괘씸하기 때문인지 이유도 없이 무조건 안 된다고 하고 있다. 구청장이 직접 불러 합의를 보라고 했고, 우리의 요구가 인간답게 일할 수 있는 근무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것뿐인데도 우리가 결코 넘봐서는 안 될 불가침의 영역을 침범이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는 이사장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앞도 뒤도 없이 무조건 강사들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이사장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우리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점점 수위를 높여 우리의 의지와 요구를 알릴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승리는 우리의 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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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일터 이야기 / 일터 탐방_ 삼성웰스토리


출퇴근 거리만 200킬로미터, 심장이 뛴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그날은 식품위생 교육이 있던 날이었다. 식음서비스 기업 삼성웰스토리()의 직원 김창오 씨(45)는 용인시청에서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던 중 고객사로부터 온 전화를 받으려고 근처 식당 주차장에 차를 댔다. 그런데 통화를 마치려던 즈음, 불법 좌회전 차량이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그는 왼쪽 어깨를 크게 다쳤고 즉시 수술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회사는 그에게 치료를 위한 조치를 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사고 발생 해인 2015년부터 그는 인사고과 최저등급인 ‘NI’ 등급을 받았고 동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그리고 보험 사기꾼이라는 소문이 회사에 돌았다.


퇴사하라는 신호였습니다. 일하다 다쳤는데 구해 주지는 않고 필요 없으니 죽으라고 밟는 꼴이죠. 저는 퇴사를 거부했고요.”


그는 회사에 병가를 요청했으나 연차휴가를 먼저 소진하라는 답변만 들었다. 하는 수 없이 진통제로 버티며 출근했다. 성수기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수술 일정도 11월로 미뤘다. 보험사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사고 발생 두 달여 만에 보험금 지급을 중단했다. 회사에 산재 협조를 요청했지만, 사고 발생 5개월이 다 되어서야 책임자로부터 산재 신청을 하라는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114일 그는 수술실에 들어갔다. 애초 간단한 수술로 예견되었지만 시기를 놓친 탓에 세균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이 왔고 그는 38일간 중환자실에서 생사를 오갔다.


회사는 근로복지공단에 재해 사실 및 요양급여 신청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냈다. 그리고 근로복지공단은 김 씨의 산재 승인을 거절했다. 다친 부위가 사고로 인한 것이 아닌 기존 만성 변병’, 즉 퇴행성 질환이라는 것이었다. 2012년 경력직 입사 시 받았던 신체검사 때도 없던 질병이었다. 그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다. 보험사를 상대로 민사소송도 진행하고 있다.


삼성웰스토리는 위탁급식과 식자재 유통 등 식음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급식 부문 업계 1위다. 전국 6개 물류센터를 통해 6천여 개 거래처에 식자재를 공급한다. 201312월 삼성에버랜드 FC사업부에서 분사된 후에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해마다 성장했다. 2016년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17260억 원, 1082억 원으로 최근 3년 연속 영업이익 1000억 원을 돌파했다. 이 영업이익은 오로지 인건비 및 경비 절약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한다고 임원위 씨(37)는 말한다. 그는 2008년 삼성에버랜드 공채로 입사한 조리사다.


경쟁 업체 중 저희 삼성만 식품공장이 없습니다. 신규 사업을 벌이거나 설비 투자를 하지 않는데 어디서 이익을 내겠습니까?”


경영진은 수익 목표를 무조건 전년도보다 높게 잡았다. 그리고 해마다 오르는 물가와 인건비를 감당하며 이익을 내기 위해 저성과자를 일정 숫자 이상 보유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예를 들어 전체 직원이 3천 명이라고 하면 해마다 그중 10퍼센트는 무조건 NI 등급을 받습니다.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정말 피땀 흘려 노력해도 NI를 못 벗어나는 사람들이 생깁니다.”


NI는 임금도 동결된다. 퇴사시키기 위한 계획들도 실행된다.


한 사람을 타깃으로 정하면 꼬투리를 잡아서 그 사람 주변 동료들부터 포섭합니다.”


실제 영양사 A씨의 경우, 인사담당자가 동료들에게서 A 직원이 실수한 정보를 수집해 자료를 만든 후 고위직 상사가 해당 자료를 들고 A씨를 만나 퇴사를 종용했다.


“‘인사팀에서 널 자른다는 걸 내가 말렸어.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3개월 치 급여야. 서명해라고 말합니다.”


 ▲ 삼성웰스토리 김창오 씨와 임원위 씨 작은책(정인열)


이렇게 해서 인력을 줄이면 남아 있는 노동자들에게 노동강도가 전가된다. 임 씨의 경우 혼자 세 사람 몫의 일을 했고 결국 허리디스크 수술까지 받았다. 그리고 맛이 조금 떨어지거나 서비스가 나빠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영업을 하는 김 씨가 말했다.


고객들은 바로 알죠. 실제로 고객사와 재계약율이 재작년까지만 해도 90퍼센트였지만 지금은 70퍼센트로 떨어졌습니다.”


회사는 반가공 제품이나 완제품 비율도 높였다. 조리 공정을 줄이기 위해서다. 임 씨는 전문 조리사의 입장에서 재료 본연의 맛이 사라지는 급식이 안타깝다.


옛날에 비하면 음식의 질이 많이 떨어졌죠. 혼이 없어요. 예를 들어 요즘은 바로 구울 수 있는 소포장 냉동 생선을 사용해 냉동-해동-재냉동-해동을 거치죠. 그러다 보면 재료 본연의 맛을 살리지 못하고 조미료로 맛을 채우게 돼요. 고객들은 조미료의 맛에 익숙해지고 그게 맛있다고 기억을 하죠. 조리사들도 예전에 했던 공정을 잊어버려요. ‘이게 더 편하네, 이 정도 맛에도 고객들이 불만 없는데 뭐.’ 하는 거죠.”


이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저희 회사는 일반 기업과 비교도 안 되게 인사과 조직이 방대합니다. 사수-부사수-그룹장-지원그룹-신문화그룹, 노사협의회까지. 현장으로 투입돼야 할 경비들이 다 간접비로 빠지는 겁니다.”


그 결과 업계 1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노동자들의 처우는 열악해졌다. 전체 12천여 명 직원 중 9천여 명의 파견, 무기계약 노동자들이 최저시급을 받고 있다. 정규직 입사 10년 차 임 씨의 임금은 3300만 원, 경력 20년 차 김창오 씨의 임금도 4300만 원으로 경력에 비해 낮은 편이다. 에버랜드에서 삼성웰스토리로 분사하면서 경영진이 임금과 처우는 에버랜드 이상으로 해 주겠다고 약속한 것과는 너무 다른 결과였다. 에버랜드 우리사주 미배정 사건도 그랬다. 삼성웰스토리로 전적하면서 직원들이 보유했던 에버랜드 우리사주를 포기하게 됐는데, 임 씨 등 일부 직원들이 전적 동의를 거부하자 당시 지사장이 ‘5년 이내에 절대 주식 상장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고 약속했다. 직원들 전적이 완료 되자 회사는 약속과 달리 약 1년 후에 주식 상장하였고, 그 차익으로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일가는 58999억 원의 차익을 보았다. 이와 관련해 임 씨를 비롯한 웰스토리 노동자 611명이 우리사주를 배정받을 수 있는 권리를 침해당했다며 892천여만 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노사협의회는 꼭두각시 역할만 하고, 동료들이 억울하게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던 그가 노동조합을 떠올린 것은 2016년 말 촛불항쟁 때였다.


우리한테는 주식도 안 주고 상여금도 안 주고 임금도 깎으면서 어떻게 정유라한테는 돈을 줄 수가 있지?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동료 조리사 몇 명을 설득해 민주노총 금속노조에 가입, 2017412일 삼성웰스토리지회를 설립했다. 그러자 임 씨에 대한 유언비어가 돌고 따돌림이 벌어졌다.


제가 소송비를 횡령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직원들이 익명으로 소통하는 앱이 있는데 거기에 누가 ‘1인당 30만 원 걷어 인지대, 송달비 하고 5만 원이 남았는데 그걸 횡령했다고 쓴 거죠.”


소송 대표단으로 연차와 시간을 쪼개 법원을 드나든 건 임 씨였다. 패소 후에 회사가 막대한 소송비용을 물겠다고 하자 항소 포기를 조건으로 협상한 것도 임 씨였다. 임 씨는 정신적 충격을 받아 치료 중이다. 교통사고를 당한 김 씨도 용인 골프장에서 대구로, 다시 경기도 성남 본사로 강제 발령을 받았다. 출퇴근 거리만 왕복 200킬로미터. 운전을 할 때면 심장이 뛰고 식은땀이 나지만 자신을 응원해 주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노조에 가입하고 나서는 그의 말을 믿어 주는 동지가 생겨서 더욱 힘이 났다. 조합원 수는 이제 64명으로 늘었다. 한국노총 산하 노조보다 조합원 수가 많아 교섭 주도권에서 유리한 상황이다.

지난 4월 17일 삼성웰스토리 노동자들이 노조설립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_ 삼성웰스토리지회


임 씨와 김 씨는 매일 요리를 찾아 주는 고객들이 가장 고맙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파업 문화를 만들고 싶다.


그럼에도 만약 파업을 해야 한다면, 하루 8시간 파업 중 4시간은 장애인 시설이나 보육원 같은 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거죠. 그 사람들에게 우리가 잘하는 음식을 제공하고 싶어요. 누군가는 쇼하는 거라고 우리를 손가락질하겠지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한다면, ‘삼성이 하니까 파업도 다르네라는 인식을 심어 줄 수 있을 겁니다.”


삼성은 앞으로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들을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퇴사하지 않을 것이다. 포기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회사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우리가 퇴사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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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마지막 근무

박태찬교사


학교가 텅 빈 목요일 저녁 6, 자율학습 감독 교사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함께 급식으로 저녁을 먹고 왔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넓은 1층 교무실에, 형광등도 내 자리 위로 딱 한 칸만 켰다. 히터도 하나, 형광등도 하나, 드넓은 교무실에 나 혼자, 곧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러 4층 자습실에 올라가야 한다. 이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다.

선생님, 오늘 급식 순대 나온대요!”

순대를 좋아하는 한 녀석이 뒤늦게 급식을 먹으러 가면서 같이 가자고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나 먹었는데?”

! 그럼 저 재형이랑 먹을게요.”

핫바도 나오는데 하나 받을 수 있으면 내 거도 들고 와 주라.”

들고 오면서 제가 먹을 거 같은데요!”

급식실로 뛰어가는 녀석의 뜀박질 소리가 복도를 넘어 텅 빈 교무실에도 탕탕 울렸다.


월요일 아침에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교장선생님에게 통보를 받은 이후 묵직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자꾸만 명치 한가운데를 욱신욱신하게 만들었다. 내가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동기 교사 두 명이 더 교장실을 찾았고 우리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은 포장지만 다를 뿐 알맹이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내년에 우리는 이 학교에서 더 일할 수가 없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 기간제교사이다.


2018학년도부터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다.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신설, 변화되는 과목이 있는데 나는 교과 개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내가 맡고 있는 기술 교과는 1학년 과목이었는데 내년에는 1학년에 한국사와 통합 과학, 통합 사회가 새로 들어온다. 그럼 자연히 1학년 과목 중 일부 과목이 2학년이나 3학년 과목으로 올라가거나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1, 2학년들은 모두 나에게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배울 이유가 없다. 같은 경우로 내년에 미술 교과도 없어진다. 1년간, 기술과 미술이 없는 학교가 되었다. 대신 과학과 사회를 더 많이 가르친다.


어떤 교과를 희생시킬 것인가, 관리자들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고민을 몇 달 동안 하면서 내게 업무를 맡길 때 눈치만 가끔 줄 따름이었다. 나는 연구부와 홍보부의 중심 업무와 기타 잡무들을 알차게 해치워 왔다. 학교의 외부 강의가 있으면 전부 내가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도 있었고, 수당을 청구하지 않은 야간 추가 근무도 잦았다. 수업과 업무에서 결과물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나는 나 스스로 좋은 교사라는 자존감을 획득해 왔다. 교원평가의 전체적인 시스템에는 반대하지만 아이들이 서술해 놓은 평가들은 빠짐없이 읽고 반성하고, 성찰하며 더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김보경 그림_시사iN


지금 현재 1학년에 여덟 반, 2학년과 3학년에는 각각 열 개의 반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내년에는 지금의 1학년이 그대로 올라가면서 신입생도 여덟 반이 들어오기 때문에 학교 전체적으로 두 개 반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나가게 된 교사도 있다. 나와 같은 해에 들어온 영어 교과의 민 선생님이다. 업무 능력과 수업뿐만 아니라 담임으로서 학급 운영 능력을 검증해 온 훌륭한 교사이다. 민 선생님은 이미 2017년 초부터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민 선생님이 맡고 있는 반 교실에 수업하러 들어갈 때마다 학급의 자유롭고 건강하면서도 맑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같은 칭찬을 자주 하였다.


교육과정 개편이나 학급 수 감축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학교에서 나가게 되는 교사도 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해에 들어왔던 체육교사 최 선생님이다. 최 선생님은 지난 3년간 언제나 다른 교사들보다 40분 일찍 출근하여 교문 앞에 섰다. 등교지도를 도맡아 해 온 최 선생님은 지난해 예쁜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생활상담부에 있는 최 선생님 자리에는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늘 올려져 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매 순간 이 학교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불같은 생활지도 교사이자 누구보다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진짜 교사였다. 그는 학교가 4년 계약을 불편해하여 떠나게 되었다.


내년에도 체육교사는 올해와 동일한 숫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간제교사가 4년 일하게 되면 공고를 새로 내서 뽑아야 하는데 사립학교의 경우 같은 교사를 기간제로 다시 채용하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3년만 일하고 떠나는 선생님들이 많다. 얼마 전에 경기도에서 4년 일한 어느 기간제교사가 정교사가 될 욕심은 없으니 무기계약직으로라도 전환시켜 달라고 소송을 걸었고 이는 다른 학교 모두가 3년 계약 이후 계약해지를 해야 한다는 모범사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최근 영어회화 전문 강사 부당해고 관련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일 때에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이 대법원에 탄원서를 냈었다. 기간제강사 무기계약직화는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들은 노동이 아닌 교육의 관점에서공정한 교육 사회 구현에 힘을 보태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된 최 선생님에게 이 학교는 교육의 장일 뿐 아니라 교실, 운동장, 학교 구석구석이 모두 땀 흘려 일한 일터였다. 예비 교사들의 조바심과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될까 봐 겁을 내고 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하는 길에 1학년의 한 아이가 와락 나를 껴안는다.

선생님 오늘 왜 감독 안 들어오셨어요?”

2학년 감독이었어.”

왜 선생님이 2학년 감독해요? 저희 학년 수업하는 선생님 아니에요?”

맞아. 근데 원래 감독 안 하는 날인데 너희들이랑 더 있고 싶어서 야간 자율학습 바꿨어.”

우와, 밤 열 시까지 일하면 안 힘드세요?”

힘들었는데 오늘은 안 힘들 것 같았거든. 돈 벌어야지.”


그래, 몇 천 원이라도 더 벌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너희들 매점 한 번 더 데려가야지.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서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을 숨을 불어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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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1월호

일터 이야기


어느 날 갑자기 신호등이 안 보였다


정인열/ <작은책> 기자


토요일 아침, 일어나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눈도 침침했다. 단순한 몸살이라고 생각했다. 어서 출근해야 한다. 남들은 주 5일 근무라고 토요일에 쉰다지만, 그에게는 평생 남 얘기였다. 그래도 평소보다 일찍 끝나는 날이니까 몇 시간만 일하고 오면 된다는 생각에 출근을 했다. 점심때가 되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살이 심해졌다. 조퇴를 신청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횡단보도 앞에 섰다. 그런데 신호등이 안 보인다. 색깔도, 형체도. 집에 겨우 도착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었다. 


전정훈 씨. 2016116일 토요일, 그렇게 쓰러진 그 날 이후로 그는 영영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의사는 시신경염 진단을 내렸다. 그리고 시각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휴대폰 문자를 크게 확대하고 눈에 가까이 가져가면 흐릿하게 보인다. 발병 전 그의 시력은 두 눈 모두 1.0이었다. 그는 이제 서른여섯 살이다. 


"의사가 메탄올 중독이 의심된다고, 회사에 전화해서 물어봤대요. 회사는 사용한 적 없다고 했고요." 


그러나 회사의 대답과 달리 원인은 메탄올 중독이었다. 메탄올(또는 메틸알코올)은 증기 흡입 및 섭취, 피부 접촉 등 기준치 이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실명되거나 뇌 손상 및 사망에까지 이르는 독성 물질이다. 


전 씨와 담당 의사가 원인을 알게 된 것은 8개월이 지난 뒤였다. 전 씨의 친척이 언론 보도를 보고 직업병이 의심된다며 노동 상담을 권유했다. 알고 보니, 그 말고도 비슷한 작업 환경에서 똑같은 증상으로 실명되고 뇌 손상을 입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더 있었다. 모두 20대 청년들이었다. 이미 언론 보도가 여러 번 있었지만 전 씨는 이조차도 몰랐다.


"의사가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했어요. 원인을 알았으면 치료 방법도 달랐을 거라고."

 

 

전정훈 씨를 그의 집에서 만났다. 작은책(정인열)

 

그는 인천의 남동공단에 있는 'BK테크'에서 일했다. 삼성·엘지 스마트폰 부품을 만드는 3차 하청업체였다. 컴퓨터 수치제어 기계(CNC)가 금속을 깎으면 그 부위를 세척하고 열을 식히기 위해 메탄올이 대량 분사됐다. 그는 하루 12시간 7~10대의 CNC를 동시에 작동시켰고, 바로 앞에서 작업했다. 부품이 다 절삭되면 에어건으로 메탄올을 말렸다. 메탄올이 바닥나면 커다란 드럼통에 담긴 메탄올을 말통에 옮겨 담아 기계에 넣었다. 그리고 그는 넉 달 만에 실명됐다. 전 씨를 포함한 실명 피해자들의 작업 환경은 모두 같았고, 법정 노출 기준의 최소 5.5~10배 이상에 노출됐다. 회사는 그 액체가 메탄올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유해성과 위험성을 알려 줘야 하는데 지키지 않았고 안전교육도 하지 않았다. 송기 마스크를 지급해야 하는데, 일회용 마스크를 지급했다. 보호 장갑이 아닌 목장갑을 지급했다. 환기구는 없었고 보안경, 보호복, 보호 장화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법 위반인지 전 씨는 알 길이 없었다. 1차 책임자인 사장을 그는 일하면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는 파견업체와 근로 계약을 맺은 비정규직이다. 생산직은 파견이 금지된 업무다. 이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파견업체와 사장은 말하지 않았다. 그가 불법 파견 비정규직으로 일한 회사는 BK테크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생산직으로만 일했다. 그동안 8개의 직장을 다녔고, 직접고용 정규직인 경우는 단 한 번이었으며, 4대 보험에 가입된 적도 단 한 번뿐이었다. 늘 최저임금을 받았으며, 임금을 보전하기 위해 하루 12시간 넘게 일을 했고, 토요일에도 일했다.

 

 

현장에서 사용된 메탄올이 담긴 통. 노동건강연대

 

그는 왜 비정규직과 최저임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을까? 왜 산재까지 당했을까?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이었을까? 그가 살아온 삶을 들어 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부모는 그가 중학교 1학년 때 이혼했다. 어머니는 아무 예고 없이 사라졌다.

 

"가장 예민하던 때였어요. 그게 트라우마로 남은 것 같아요. 딱히 별로 되고 싶은 것도 없었어요."

 

아버지가 그와 남동생을 양육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집안 살림을 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사정에 돈을 버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학교에서 용접과 배관 기술을 배웠지만 막상 그 기술로는 취업할 곳이 없었다. 초보자는 받아 주지 않는 현실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수입만으로는 집안 경제가 빠듯했다. 특별한 기술 없이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곳은 생산직 일자리밖에 없었다. 고교 졸업 후 대우냉장고 압축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군대에 다녀온 후에는 조금 규모가 큰 자동차 부품회사에 들어갔다. 쇠파이프를 밴딩 기계 넣어서 구부리는 일이었다. 파견 비정규직이었고 3~4년을 근무했지만, 회사가 부도나서 그만두어야 했다. 그리고 친구 소개로 선박 엔진 공장에 들어갔다. 엔진을 닦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었다. 여전히 최저임금이었지만 정규직이었고 4대 보험도 가입됐다. 1~2년 일했지만, 회사가 먼 곳으로 이전해서 출퇴근이 불가능했다. 다시 파견업체를 통해 휴대폰 부품 생산업체로 이직했다. 9개월을 일하다 사람 관계가 힘들어 통신 케이블 제조 공장으로 옮겼다. 역시 파견 비정규직이었다.

 

2013년경에는 화장품 포장업체에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후 '대성컴퍼니'라는 파견업체를 통해 핸드폰 염료 공장을 들어갔다. 핸드폰 케이스를 염색통에 넣었다 빼는 작업이었다. 일한 지 7~8개월 즈음 회사는 일이 없다며 잔업부터 없애더니 결국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2015년 가을, 구직 중이던 그에게 대성컴퍼니에서 '괜찮은' 일자리가 나왔다며 연락이 왔다. 그의 시력을 앗아간 BK테크였다.

 

산업재해도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의 아버지 역시 남동공단 노동자였다. 철근 공장에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10년 전 산업재해로 사망했다. 옷이 절단기에 말려 들어가면서 팔목이 잘렸고 경추도 부러졌다. 그러나 응급조치를 제대로 받지 못해 사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대에서 산재가 끝날 줄 알았죠. 그게 저한테 올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얼굴도 몰랐던 사장은 그의 동생을 만나 합의를 종용했다.

 

"산재보험도 가입이 안 되어 있으니 합의금밖에 없다고, 자기도 피해자라고 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350만 원에 합의했다. 다행히 이후 노동건강연대를 만나 도움을 받아 산재 승인은 받았다. 피해자들은 사장을 파견법 위반으로 고소했지만, 사장은 벌금 100만 원 처벌에 그쳤다. 법정 구속도 없었다. 사장은 아직도 그에게 공식적인 사과도 진심을 담은 사죄도 하지 않았다.

 

메탄올을 사용한 휴대폰 부품 업체. 노동건강연대

  

그에게 왜 다른 직업을 알아보거나 직업 훈련을 받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러면 실명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최저임금이 지금처럼 많이 올랐더라면, 뭔가 다른 일을 생각해 볼 수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받은 최저임금으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잠자고 나면 출근해야 하니까. 계속 일해야 했으니까."

 

그렇다면 학교에서 교육을 제대로 했다면 어땠을까. 학교는 어떤 것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나.

 

"오로지 실습만 가르쳤어요. 파견업체니, 비정규직이니, 산업재해니 아무 교육이 없었죠."

 

산업안전보건법도, 산업재해와 체불임금 대처법도, 사회보험 가입 의무도 그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정보가 없던 그는 아는 한도 내에서 스스로 판단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의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생산직, 비정규직, 최저임금, 장시간 노동, 사회보험 미가입. 그는 여가 생활도 없이 최선을 다해 일만 하며 살았다. 일요일이 되어서야 밀린 잠을 잤다. 그가 실명 전 마지막으로 영화를 본 것은 2004년이다.

 

시력을 잃은 후 그가 가장 견딜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신호등 앞에서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요. 실제로 쳐다보는지 알 수는 없어요. 그런데 초록불일 때도 제가 그대로 서 있으면 쳐다보겠죠. 그냥 못 본 척했으면 좋겠는데."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인터뷰라고 했다. 인천지법 판결을 보고 언론에 나가 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제빵사가 되고 싶었어요. 공장 그만두고 나면 제빵 기술을 배우려고 했는데. 이제 다 소용없는 일이죠."

 

이 모든 것이 그의 잘못일까, 한 번 더 되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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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단 두 번의 기회

 

조숙현/ 28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작은 아들이 1997년 생입니다. 아이는 칸킨트(Kann kind)라고, 어리지만 충분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정을 받아 만6세가 되기 전에 입학을 했습니다. 독일은 보통 초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6년제인 주도 있긴 있어요. 독일은 4학년 1학기 때의 성적으로 아이의 다음 진로가 결정됩니다. 김나지움을 갈지 레알슐레를 갈지.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하우프트슐레를 갑니다. ! 지금은 하우프트슐레가 6개 주에만 있어요.

김나지움은 G8G9가 있어요. 816학기에 끝나고 918학기에 끝이 납니다. 전에는 모두 13학년까지 다니는 G9였는데 지금은 G8로 전환하는 김나지움이 꽤 생겼네요. 짧아진 학기를 마치려니 아이들은 성적표에 더 신경을 써야 해서 과외도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학원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주변에 점점 과외 학습원이 늘어나네요. 과외 비용은 시간당 8.50유로(한화11,000) 정도부터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비하면 저렴하지요?

우리 아이는 바덴 뷔텐베르크(baden wütenberg)주의 레알슐레(실과학교)를 다녔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레알슐레를 가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들어간 학교니까, 1년 정도 레알슐레를 다니고 성적이 유지된다면 김나지움으로 바꿔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지요. 아이는 학교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열심히 배워 곧잘 1점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1점이 한국의 에 해당하고 6점이 입니다.

10학년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김나지움으로 옮기려던 아이가 직업학교를 가겠다고 했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게 면담을 요청했고 아이와 저, 담임 이렇게 3자 면담을 했습니다. 독일 학교는 보통 이렇게 3자 면담을 합니다. 아이는 선생님과 제게 직업학교를 가는 게 왜 잘못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파서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대학을 가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때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직업학교에 갔습니다. 17살이 안 된 아이가 자신을 받아 줄 회사를 찾아다니며 자기소개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드디어 한 회사에 합격을 한 후에 계약서를 갖고 직업학교 등록을 했습니다.

(독일의 직업훈련 ©picture alliance / dpa)


직업학교는 3년제입니다. 직업훈련과 병행됩니다. 직업교육 첫해에는 주 4일을 학교를 가는데, 3일은 실습 교육을 받고 1일은 이론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도제 교육을 계약한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은 무보수입니다. 아이의 사장님은 열정 페이주의자였는지, 보통 다른 회사는 견습공에게 130유로 정도의 식비를 제공하는데, 그 사장님은 정말 1유로도 주지 않더군요. 더구나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주말에 도와 달라며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주말에 일을 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수영장에 가는데 아이는 땡볕에서 수영장 벽을 수리했습니다. 찬물 한 잔 안 주더라고 불평을 하더군요.

2년째는 반에서 학생들이 걸러졌습니다. 성적과 자질이 없는 학생들은 제적되고 20명이 남았습니다. 2년 차는 7일을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합니다. 그리고 3일 수업을 받습니다. 그중 1.5일은 실습, 1.5일은 이론 수업을 받습니다. 7일 계속 일, 3일 수업 이렇게 로테이션이 됩니다. 그리고 세후 520유로(한화 67만 원)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간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3년 차에도 7일 회사, 3일 수업, 7일 회사, 3일 수업입니다. 그리고 세후 570유로를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목수 견습생은 월급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이 적습니다. 하지만 3년의 도제 교육이 끝나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다른 직종보다 전망도 좋고 월급도 많이 받습니다. 견습 생활이 좀 많이 피곤한 직업입니다. 특히 제 아들처럼 1센트까지 다 따지는 사장을 만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는 중간에 회사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회사는 다른 회사에 없는 CNC 기계가 있었기에 끝까지 견뎌 냈습니다.

20세 목수 조슈아가 만든 가구. 그는 17세 전에 직업학교로 진학, 3년간 견습과 자격시험을 거쳐 목수가 되었다 (사진제공_조숙현)


2년 차에 아이는 학교 최연소로 CNC 기계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습니다. 3년 차에 목수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반에서 16명이 합격했습니다. 목수 자격증 시험은 졸업시험 같은 것입니다. 이론 시험을 본 후에 작품을 제출해서 심사위원들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작품 제작 시에 그동안 배운 기술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계 사용을 못하게 합니다. 도구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만들지 못하면 기계로도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도면 제출 이후에 승낙을 받으면 80시간 안에 그 도면 그대로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2주 정도의 시간을 받는 것이지요. 이때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옵니다. 자격증 시험은 두 번밖에 볼 수 없어요. 두 번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는 재시험 기회가 없기 때문에 3년의 시간이 허탕이 됩니다. 한 번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재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도면을 제출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1차에 제출한 것과 전혀 다른 작품이어야 합니다. 제 아이는 다행히 목수 자질이 있는지 순조롭게 모든 시험을 통과했고 지금은 당당한 목수가 됐습니다. 사장이 아이의 능력을 보고 정식 직원으로 일할 것을 권유했고 정직원 계약을 하자고 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아이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부모 때문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독일에서는 마이스터 학교를 다녀 마이스터 자격증을 받아야 자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자신처럼 마이스터가 되면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고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4대째 목수 마이스터. 저도 기대가 됩니다. 마이스터 시험도 두 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합격하겠지요? 독일 마이스터 시험은 두 번 떨어지면 동종의 시험 기회는 평생 다시 없습니다. 아직 학교도 안 갔는데 합격을 바라는 마음, 욕심만은 아니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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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작은 소설 

11월의 연극

하명희/ 소설가  나무에게서 온 편지(사회평론), 불편한 온도(2017 올해의 문제소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 기억나니?’

편지의 시작은 이랬다. 1년에 한 번 뜸금없이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편지는 매번 기억을 더듬는 문장으로 시작되곤 했다. 이번에는 어떤 소식을 담았을까. 나는 핸드폰도 없는 그녀가 지금 무슨 일을 하는지 편지를 통해 짐작해야 했다. 치유연극? 편지와 함께 들어 있는 초청장에는 아주 특별한 생의 첫 번째 연극에 당신을 초대합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생의 첫연극과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이 묘하게 겹치고 있었다. 나는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잊겠는가. 열여섯의 겨울이었는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 내리는 겨울밤, 내 눈 앞에는 불타는 가구공장이 있었다.

눈이 자살하는 거야.”

불구경을 하는 사람들 속에 서 있던 그녀가 내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불쑥 말을 걸어왔다. 눈은 불을 향해 집요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한두 송이 날리던 것이 불길이 거세질수록 더 세차게 사방에서 쏟아졌다.

눈이 자살한다고?”

내가 다음 말을 하기도 전에 그녀가 말했다.

아름다워.”

그녀의 입술이 동그라미를 그리며 입김이 새나왔다. 아름다워가 동그랗다는 것을 그녀의 입술을 보며 알게 된 날이었다. 눈발은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 떼처럼 빛나고 있었다. 곧 이어 소방차가 오고 불길은 가구공장의 물건들을 터뜨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밀치며 뒤로 물러나고 입을 막고 켁켁거리면서도 자리를 뜨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불 속에 무언가 소중한 것을 감춰놓은 것처럼 웅성거렸다.

아름다워?”

뭐가 아름답다는 걸까.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슬리퍼만 신고 있었다. 그녀의 발등으로도 눈이 떨어지고 있었다.

태우면서, 녹으면서 사라지는 거. 불을 끄기 위해 내리는 것 같지 않니? 온몸으로 불을 끄려고 사방에서 떨어지면서, 떨어지면서 사라지잖아.”

다음날부터 학교에서 그녀를 볼 때마다 우리는 우리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처럼 눈을 찡긋, 혹은 손을 슬쩍 들어 인사를 건넸다. 우리의 우정이 시작될 무렵이라. 11월의 밤은 우리가 친구가 된 비밀이 숨어 있는 것 같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내게 책을 하나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한 대목을 펼쳤다.

여기!”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눈이 자살하는 거야라는 문장이 있었다.

책에 있었던 문장이구나.”

그녀는 서울 곳곳에는 자기만 알 수 있는 증표가 심어져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을지로 3가 지하상가에는 1986년에 개업한 음반가게가 있다고도 했다.

아는 곳이니?”

그녀는 대답대신 책을 내밀었다.

읽어봐, 그러면 알게 될 거야.”

그러면서 덧붙였다.

세상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꼭 알려줘.”

나는 그녀가 준 책을 다 읽지 못했다. 당연히 세상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고등학교를 다른 학교로 배정받아 그녀와의 연락은 뜸해졌지만 그녀는 매년 11월마다 편지를 보내왔다. 언제든 만날 수 있지만 왜 그랬는지 그녀와는 만나지지 않았고 시간이 흘렀다. 그녀의 편지는 한동안 끊겼다가 몇 해 전부터는 발신지가 수녀원으로 찍혀 있었다. 편지와 같이 들어 있던 초청장을 펴보니 안양에 있는 고등학교였다. 예전에 소년원이었던 곳을 중고등학교로 인가받은 곳이라고 했다.

‘1년째 이곳에서 치유연극을 진행했어. 그런데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녀석을 발견했지. 우리가 처음 만난 그때처럼 불타버린, 사라지는 것처럼 거뭇한 그림자를 가슴 속에 품은 아이였어.’

그녀는 나도 그 아이를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했다. 1호선 전철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학교는 산자락 아래 자리 잡은 예전 교도소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신분증과 초대장을 보여주자 운동장이 보이는 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운동장에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건물 옆으로 수건들이, 백 개는 넘어 보이는 같은 색의 수건들이 건조대마다 걸려 있었다. 운동장을 지나 강당이 있는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들은 손에 피크닉 가방을 들고 있었다. 공개 만남의 자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강당 문이 열리고 입장해도 된다는 소리가 들렸다. 강당에는 백 명은 넘는 소년들이 머리를 박박 밀고 갈색 체육복을 입고 앉아 있었다. 남자들의 냄새라고 해야 할까. 동물원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가 훅 끼쳤다. 뒤쪽에서는 커피를 내리고 있는 소년이 있었다. 커피를 받기 위해 줄을 섰다. 뒤에서 보니 소년은 초를 잰 듯 정확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신맛과 진한맛 중 어떤 걸 좋아하세요?”

내 차례가 되자 소년이 물었다.

진한맛이요.”

소년은 한 손은 테이블을 밀어내고 거품에 정확히 동심원을 그리며 커피를 내렸다. 저 아이일까? 보이는 소년들마다 그녀가 말한 아이로 보였다. 커피를 들고 관객석 끝에 자리를 잡았다. 무대가 정리될 즈음 연극의 연출가가 마이크를 잡았다. 나는 그녀를 찾느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치유연극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렇지, 얘들아?”

연출가는 초대 받은 손님들이 아니라 줄지어 앉아 있는 소년들을 보며 말을 건넸다. 소년들이 박수를 치며 휘파람을 불었다. 뒤에서 보니 들어올 때 보았던 백 개의 수건이 일제히 바람에 펄럭이는 모양이었다. 관객들은 소년들의 수보다 많지 않았다. 무대 조명이 켜지고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무대에는 소년들 셋이 누워 있었다. 맨 끝 줄에 앉아 연극을 보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워 있던 아이들이 일어나 자기의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쉬지 않고 욕이 터져 나왔다. 소년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모른다는 듯 말끝마다 씨발, 좆같다로 대사를 채우고 있었다. 연출가가 이 욕들을 걸러내지 않은 것이 대단하다 느껴질 정도였다. 연극이 중반부로 갈 때까지 소년들의 가정 상황이 연출되었다. 한 아이는 매 맞는 아이였고 한 아이는 도둑질을 했다고 했다. 또 한 아이는 자기 집에 불을 질렀다고 했다. 같은 방에 있는 소년들의 사연이 하나씩 소개될 때마다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처음에는 듣기 거슬렀던 욕들이 무척 절제된 언어처럼 들리기 시작하는 거였다. 말하자면 소년들은 욕을 뱉으면서 그 상황들을 이기려고, 외면하려고, 극복해보려고 애쓰고 있었다. 다시 사이렌이 울리고, 조명이 붉은 빛으로 바뀌었다. 거칠게 욕을 내뱉던 소년이 무대를 뛰어다니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지고 있었다. 소년이 던진 것을 받은 사람들이 소리쳤다.

불이야. 불이야.”

객석에 던져진 불덩이를 따라 조명이 붉게 비쳤다. 나는 저 소년이 아닐까 짐작했다. 소년의 손에는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불이야라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 소년도 그 속에서 똑같이 외치고 있었다.

불이야, 불이야.”

붉은 조명과 사이렌이 꺼지고 무대는 정전된 듯 조용해졌다무대 아래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났다. 소년이 무대로 올라오고 뒤 이어 소년의 두 손에 수갑이 채워졌다. 연극은 거칠게 그 순간을 전달하고 있었고 소년은 무대에서 끌려 나가면서 관객들을 향해 외쳤다.

불이야, 불이야. 불이 났어요. 이제는 좀 보라고. 불이 났다고. 저기 우리 집에 불이 났단 말이야. 이제 보이나요? 불이야.”

연극이 끝나고 연출가는 이 연극의 취지를 설명했다.

저희 연극은 치유연극이라고 불립니다. 우리 배우들은 전문 연극을 배운 친구들이 아니지만, 이것은 처음이에요. 생의 첫 연극이라고 불러야겠지요.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이 한 편의 연극을 만들기 위해 이곳의 친구들과 연극에 접근해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대장놀이도 해보고 역할극도 해보고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기도 하면서 한 달 한 달을 채워나갔지요. 보신 것처럼 연결도 서투르고 여기저기 욕이 많이 들어가서 불편하셨죠?”

관객석에 있던 소년들이 뒤를 보며 낄낄대고 웃었다. 내 옆에 있던 여자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연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우리는 이 친구들이 대본을 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을 통해 토해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생의 첫 연극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렇게, 훌륭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연극으로 표현해낸 이 아이들이 대견하네요.”

박수가 터졌다.

고맙습니다. , 그럼 이제부터 반전입니다. 지금부터는 관객들이 직접 이 연극에 참여하는 겁니다. 지금 보신 장면 중에 내가 끼여들어서 역할을 해보겠다 하시는 분들은 누구든 손을 들어주세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얘기를 연극을 통해 전달해보는 겁니다. 누구부터 할까요?”

관객들은 교실에서 잠만 자는 아이를 꾸짖는 선생이 되기도 하고, 교도관이 되어 아이들의 순화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때 갈색 체육복을 입은 아이 하나가 어설프게 손을 들었다가 내렸다. 연출가는 얼른 그 소년을 불러냈다.

그렇지, 연극에 참여한 친구들 말고 여기서도 이렇게 할 말이 있는 친구들이 많을 거야. 너는 어느 장면으로 들어가고 싶니?”

고개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던 소년은 불을 지른 아이가 되어보고 싶다고 했다. 장면은 다시 붉은 조명을 받는 무대로 바뀌었다. 소년은 라이터를 들고 망설이다 라이터를 켜고 자기 얼굴을 비췄다.

나예요. 아빠. 아빠 나는 불을 지르고 싶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불을 질렀어요. 아빠가 있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았어요. 아빠, 나 하고 싶은 게 있어요.”

소년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객석도 조용해졌다. 연출가가 음악을 낮게 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소년은 불탄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 역할을 했던 소년이 누워 있는 방에 붉은 조명이 비쳤다. 소년은 망설임없이 그 옆에 조용히 누웠다. 그리고 말했다.

아빠, 나도 여기 있을래요.”

조명이 꺼지고 무대 위로 눈송이 같은 조각이 떨어졌다. 나는 뒤를 돌아 조명실을 바라보았다. 수녀복을 입은 그녀가 그곳에 있을 것 같았다. 내 옆에 있던 여자가 무대를 향해 걸어가 꽃다발을 던졌다. 객석에 있던 소년들이 휘파람이 불었다. 씨발, 좆나 멋있다. 휘파람을 부는 입술들도 동그랗게 오므려졌다. 소년은 일어나지 않고 무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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