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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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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욱/ KT노동인권센터 집행위원장


  나는 2003년 참여정부 때 해고됐다가 그해 원직 복직됐다. MB가 취임한 후 2009년 여름, KT노조가 민주노총을 탈퇴할 때 반대하는 기자회견을 한 이유로 그해 가을 인천에서 삼천포로 징계와 동시에 전보되었다. 그런데 회사가 사택을 제공하지 않아 KT삼천포지사 앞 인도에서 텐트 노숙으로 겨울을 지냈다. 노동위원회의 부당 징계 부당 전보 판정으로 2010년 봄에 원대 복귀하자마자 두 번째로 해고됐다. 지금 1년 8개월째에 접어들고 있다. 

  올가을, 국정 감사에서 이미경 의원이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삼성백혈병 산재 문제를 따지며 근거 자료로 KT사례가 제시됐다.

  2002년 12월에 치러진 KT노조 선거에 관리자(수도권강남망건설국 총무과장)가 상부의 지시를 받아 강성 후보의 당선을 저지하고 회사가 미는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밤낮으로 과로하며 술을 먹다가 2003년에 ‘간경변’으로 쓰러졌다. 결국 2005년 간 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2007년 뇌림프종에 걸려 2008년에 사망했고, 유족이 산재 신청을 제출하자 근로복지공단에서 산재 승인 뒤 유족보상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한 사건이었다. 그동안 무수한 의혹이 제기되던 KT노조 선거에 대한 회사 지배 개입(부당노동행위)이 9년이나 지나서 국정 감사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내가 노조위원장으로 출마했던 2008년 12월 선거 생각이 난다. 후보자 등록을 위한 조합원 추천 서명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회사 관리자가 31개 팀장들에게 ‘회사 측 후보자에 대한 서명은 괜찮지만 민동회(민주동지회, KT내 민주노조를 지향하는 유일한 조합원 현장 조직) 후보자의 출입이나 추천 서명은 스스로 판단하지 말고 자신에게 보고하라’는 사내 메신저를 보냈다. 이 사실이 발각돼 법원으로부터 2009년에 부당노동행위로 벌금 200만 원의 약식 명령을 받았다.

  어쩌면 9년 전에 선거 개입을 무리하게 하면서 병에 걸려 사망한 관리자나, 3년 전 선거에 지배 개입한 혐의로 벌금 200만 원을 부과받은 관리자도 자본의 지시를 관철시키면서 발생한 동일한 피해자일 뿐일 것이다. 자본은 아직도 어떤 상처도 받지 않고 끄떡없이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현대중공업 노조 선거에서 민주 후보 진영에서 회사 측의 지배 개입을 감시하도록 근로감독관의 파견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했던 사실과 후보 추천 서명지를 각 후보 선거대책본부가 합의해 공동으로 은행 금고에 임시 보관한 것(회사가 추천 조합원을 알게 되면 각종 불이익 및 압박을 가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 기아자동차에서 대리 투표 의혹이 제기되는 상황 등을 보면 이미 KT에서 회사 개입과 투개표 조작을 통한 노조 무력화 수법이 주요 사업장에 전파됐음을 알 수 있다.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저들이 권력과 자본의 힘을 총동원해 민주노조를 무력화시켰다면, 우리는 역으로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전략적 사업장에 민주노조를 세우는 것을 고민해야 한다.

  KT노조는 1994~1996년(5대 유덕상 집행부)을 제외하고 내리 5번씩이나 선거에서 민주노조가 패했다. 그 과정 속에 해외 민영화가 되었으며 10여 차례 이상의 정리 해고로 3만여 조합원들이 잘려 나갔다.

  KT노조 선거 투개표소는 전국에 489개나 퍼져 있다. 그리고 3년 전 선거에서 참관인을 배치하지 못한 투개표소는 150여 군데가 넘었다. 투개표 참관인도 세우지 못한 채로 내가 42.79퍼센트를 득표했다는 것은 사실상 민주노조의 승리를 의미한다. 참관인을 세운 투개표소에서는 민주노조 측이 대부분 압승을 했고 참관인이 없는 곳에서는 어용 세력이 몰표를 거두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삼척동자도 다 안다. 전국에 산재한 분산 투개표 제도는 통합 투개표를 시행하는 사회보험노조나 투개표소가 130여 개인 철도노조와 달리 KT가 민주노조를 세우기가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조합원의 성향 파악이 용이하고 참관인을 세우기가 어려움) 중의 하나다. 계속해서 통합 투개표 제도 도입을 요구했으나 회사가 관리하고 있는 어용 집행부는 항상 묵살했다. 여기서 결정적인 문제는 선거를 감시하는 참관인 문제이다. 10여 년간 지속된 조합원 회유와 탄압 속에 전국의 투개표소를 제대로 감시할 참관인을 조직하기란 쉽지 않은 문제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용 집행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함에도 선거를 코앞에 둔 10월 13일, 임시대의원대회를 개최해 선거관리규정을 더욱더 개악했다. 민동회 40여 명 조합원들의 출입을 경찰과 청경 그리고 구사대를 동원해 원천 봉쇄한 가운데 안건을 통과시켰다.

  조합원이라면 소속을 달리하더라도 전국의 투개표소를 참관할 수 있었던 규정을 ‘지방본부별로 제한’(예를 들어 서울 조합원이 충남이나 강원도에 투개표 참관을 할 수 없도록 함)했으며, ‘지부 선관위의 의결을 거쳐 참관인을 퇴장시킬 수 있는 규정’을 도입했고, 투표 용지도 선거인명부에 등재된 조합원 수와 동일하게 제작해야 함에도 ‘예비 투표 용지를 3퍼센트 추가로 제작’(투표 용지 바꿔치기 합법화함)하도록 했고, IT업체라는 특성과 어울리지 않게 인터넷과 통신 매체 등을 이용한 ‘어떠한 선거 운동도 금지’했으며, ‘선거 운동 기간도 기존 20일에서 15일’로 5일을 단축시켰다. 

  민주노조 진영(장현일 선본)에서는 개악된 선거관리규정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지난 11월 9일 수원지법 성남지원에 제출했다. 더불어 투개표를 감시해 달라는 청구 취지도 포함시켰다. 이러한 법률적 대응과 함께, 조합원들이 용기를 내 투개표 참관을 하도록 하는 시민 사회  연대체인 ‘KT노조 공정 선거 감시단’을 만들었다. 민주노총과 민주. 진보 정당들 그리고 민중의 힘을 비롯한 단체들이 속속 결합하고 있다. 참여 의사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는 KT노조 선거 공정 선거 감시단 상황실(02-701-0070)로 연락하면 자세한 안내를 받을 수 있다.

  2011년 올해에만, KT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14명이 자살 및 돌연사 등으로 죽었다. 그리고 낙하산 인사가 취임한 2009년 이후로 45명의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을 정도로 현장은 피폐화됐다. 얼마 전 방영된 〈PD수첩〉(10월 11일: KT인력퇴출프로그램, 11월 8일: 분신사망한 KTcs 전해남 지부장 편)은 현재 KT의 모습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기 위해 KT 내부를 민주화시키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리고 직장을 민주화시키기 위해서 노동조합부터 먼저 민주노조로 바꿔야 한다. 그래야 해외 투기 자본의 돈벌이 수단(해외 민영화 10년간 2조 4천억이 국부 유출됨)으로 전락한 KT가 다시 통신 공공성을 회복하고 국민 기업으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도 마련된다.

  많은 분들이 노조 선거 공정 선거 감시단에 참여해 죽어 가고 있는 KT 노동자들을 살려 내고, KT를 민주적이고 인간다운 직장으로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11월 14일 선거 공고가 났고, 11월 30일 하루 동안 투표가 시행될 예정이다. 적극적인 연대와 공정 선거 감시단 참여를 요청한다.
posted by 작은책

송재성/ 대전대리운전 노동조합 사무국장


  2010년 6월, 망설이고 망설이던 대리운전을 시작했습니다. 

  대리운전 노동자들은 사연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택시 기사, 공무원, 은행원, 보험 영업인 등 다양한 전, 현직을 가지고 대리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컴퓨터 프로그램 판매 및 유지 보수를 하며 10년 이상 사장님 소리를 듣다가 대리운전을 한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술을 드신 고객들은 여기저기 대리운전 회사마다 부르고, 10분 이상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빨리 가지 못하면 콜이 취소됩니다. 대전의 대리 요금은 기본이 8,000원입니다. 거의 모든 지역이 그렇기 때문에 고객에게 갈 때 택시를 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콜이 많은 시간에는 콜을 잡아 놓고 지원 차를 기다릴 시간도 없었고 2천 원을 내야 하는 지원비도 부담스러웠습니다. 거의 20년을 책상에 앉아서 하는 일을 해 왔기에 몸은 불어나고 운동이라고는 전혀 안 하다가 갑자기 대리운전을 하며 뛰어다니기 시작하니 약해진 인대가 버티지 못하고 일주일 만에 늘어나서 절룩거리며 일했습니다. 뛰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지만 가족들의 생계 때문에 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콜을 받고 절룩거리며 뛰는데 손님이 뛰지 말랍니다. 손님을 태우고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왜 그리 절룩거리냐고 묻기에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해서 그렇다고 하니, 무릎 인대가 늘어나서 그런 거라고 2주 이상 쉬어야 한다고 합니다. 손님은 병원의 의사였고 내 증상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 주며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말고 치료를 하고 그 다음에 일을 하랍니다. 하루하루 생계가 빠듯한데 2주를 쉬어야 한다니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의사 손님의 조언도 있고, 저도 너무 아팠기에 그렇게 대리운전 일주일 하고 2주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때 2주를 쉬면서, 관리비(하루 2,800원)를 안 내 보려고 “사정이 이래서 병원에 다녀야 하니 관리비를 보류 좀 하자”고 하니 콜센터에서 “안 된다”고 합니다. 처리하려면 퇴사 처리를 해야 하고, 그러면 입사할 때 냈던 보증금 10만 원을 돌려받을 수 없으니 그냥 하루 2,800원씩 39,200원을 내는 것이 더 낫다고요. 결국 저는 일을 안 한 2주의 관리비를 내고 치료를 끝내고 다시 밤거리를 뛰어다녔습니다.
 
  한 콜을 타고 다음 콜을 찍는데 보통 20~30분 정도 걸립니다. 손님한테 가는 시간을 포함하면 한 시간에 한 콜 타기도 힘들었습니다. 대리운전에 익숙해지면서, 한 회사의 콜만 타던 저는 저녁 7시부터 새벽 2시까지 7~8콜 정도를 탔습니다. 그런데 그때쯤 지원 차를 타는 다른 기사님들의 손에는 두 개의 핸드폰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어보니 한 회사의 콜만 타면 기다리는 시간들이 많아져서 두 회사의 콜을 받으며 탄다고 했습니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제 손에도 두 개의 핸드폰이 들려져 있었습니다.

  두 개 회사의 콜을 타며 콜당 25퍼센트의 수수료에 하루 5,600원씩 관리비를 내며 저녁 7시부터 새벽 6시까지 밤거리를 뛰며 버는 돈은 고작 7~8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것도 하루 종일 13~15콜 정도를 타야 나오는 수입입니다. 

  1년 정도를 대리운전을 하며 날마다 내가 탄 콜 수와 금액, 취소 벌금 건수 및 금액, 지원 차량비 등을 꼼꼼히 기록해 봤습니다. 일 년 통계를 내 보니 회사로 들어가는 금액이 내가 벌은 금액의 30퍼센트 이상이고, 또 지원 차를 탈 때마다 내는 지원비 등을 포함하면 40퍼센트에서 50퍼센트까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을 하는 건 기사인데 회사가 너무 많은 수익을 가져간다는 걸 알았습니다. 혼자서 돈이 모아지면 대리 기사들을 위한 회사를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때쯤 대전에 대리운전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거기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노조는 7월 3일 출범식을 하고 6차례에 걸친 교섭 요구 공문을 업체들에게 보냈습니다. 업체들은 공문에 반응하지 않았고,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너희는 노동자가 아니니 너희 노조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이유로 노조 간부 8명을 부당 해고했습니다. 부당 해고를 철회해 달라고 찾아가 대표자 면담을 요구한 간부들이 경찰에 업무 방해로 고소당하는 사태까지 발생했습니다. 노조는 두 차례의 파업을 했습니다. 우리는 8월 18일 하루, 그리고 10월 20일과 21일 이틀 동안 파업을 했습니다. 이런 파업을 보면서 일반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합니다. 하루 하는 파업이 파업이냐고. 하지만 하루하루 일을 하지 않으면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리고 2011년 10월 20일, 2차 파업 결의 대회 때 저는 삭발을 했습니다. 삭발을 하는 동안 동지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동지들을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습니다. 결의 대회 시작 전에 사측에서 전체 공지를 보냈습니다. 파업에 동참하면 한 달간 콜을 제한하겠다는 공지였습니다. 결의 대회를 준비하던 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400여 명 조합원 중 결의 대회 참여 인원은 고작 60여 명. 계획했던 무료콜 투쟁(파업은 하지만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무료로 집에 데려다 주는 투쟁, 콜센터와의 싸움이 우리 힘만으로는 이길 수 없기에 시민의 여론을 이끌어 내려고 처음 시도해 본 방법이었음)도 진행하기 힘든 인원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와 준 60여 명의 조합원 앞에서 삭발을 하면서 그이들을 떳떳이 볼 수가 없었습니다. 사측의 협박 때문에 눈치를 보며 참석하지 못한 조합원들에게 우리 노조가 믿음을 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그리고 그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참여해 준 용기 있는 조합원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습니다. 삭발식 내내 저는 하늘을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리운전 업계에는 많은 비리가 있습니다. 25퍼센트에 달하는 많은 수수료를 징수하면서도 회사의 경상비에 해당하는 보험료, 프로그램 사용료, 영업비, 광고비를 대리운전 노동자들에게 떠맡기고, 그것도 모자라 고객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콜 취소 벌금(요금 체계를 거리에 관계없이 동일 요금으로 책정해 놓고는, 장거리 콜을 기사들이 기피했을 때 물리는 페널티)이란 것을 만들어 2중 3중의 착취를 하고 있습니다. 보험도 같은 보험회사에 두 개씩 들고 콜을 타야 합니다(2011년 4월 22일 KBS ‘소비자 고발’). 이런 불합리한 구조를 대화로 고치고자 노조를 만들고 노동자로서의 기본 권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한민국 어디에도 우리 대리운전 노동자를 지켜 줄 법은 없었습니다. 대전광역시장에게 중재도 요청해 봤지만 관련 법규가 없는 관계로 중재를 할 수 없다는 답변만을 들었습니다. 

  노동조합을 뉴스에만 나오는 비뚤어진 시각으로 바라보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는, ‘악질 센터’를 이기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이기고 동지와 함께 짐을 지고,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김정훈/ 대우자동차판매지회 조합원


  2011년 1월 31일. 대우자동차판매주식회사는 노동조합원 전원을 포함한 정리 해고 명단을 발표했다. 예상했던 미래였지만 현실이 되지 않길 바라던 일이었다.     

  내가 입사한 1999년도는 IMF 구제 금융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시기였다. 입사하기는 어려웠고 정규직으로 들어가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 국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는 인턴 제도가 있어 3개월간의 수습 기간을 거쳐 대우자동차판매(주)의 정규직 사원이 될 수 있었다.  
  
자동차를 판매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업을 다니는 곳마다 거절을 당하기 일쑤였고, 대우 차는 죽어도 안 산다는 사람도 많았다.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차를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일터에서는 다달이 그려지는 판매 실적 그래프가 곧 인격이요, 그 사람의 모든 것이었다. 잘 파는 사람은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못 파는 사람은 인격체로서 대우를 받을 수 없었다. 사기를 당해 차량 대금을 대신 변제하는 사람도 있었고, 실적을 맞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원치도 않는 자기 차를 뽑는 사람도 있었다. 회사는 마른 수건 짜내는 격으로 친구, 친척, 지인들에게 차량 판매를 강요하고 못 견디겠으면 나가라는 식이었다. 동기들은 견디지 못하고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다.  

  나는 입사하던 해 12월에 결혼을 했다. 당시 28살이던 나는 가장이 된다는 책임감으로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구두 굽이 닳도록 열심히 일했다. 사람을 만나고 명함을 건네고 차량을 설명하고 견적을 내고 계약을 하고 출고하고 차량을 인도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힘들기도 했지만 세상을 배워 가는 과정이라 생각했고 살림이 조금씩 늘어나는 재미에 즐거웠다. 2001년 9월 첫째 딸이 태어났다. 기쁘고 행복한 시기였지만 회사는 안팎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회사는 고정급을 줄이고 변동급을 높이는 쪽으로 영업직 급여 체계를 바꾸겠다며 서명을 받기 시작했고, 이 급여 체계에 반대하면 정리 해고 하겠다고 협박했다.  2001년 12월, 노동조합은 파업에 들어갔다. 전국 각지의 조합원들이 올라와 서울의 여러 대학의 강당을 빌려 잠을 자며 6개월 동안 파업을 진행했다. 그사이 관리직들은 친분이 있는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연락을 하여 정리 해고 되기 전에 위로금을 받고 나가거나 퇴직금을 담보로 대리점을 차리면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겠다는 감언이설로 회유했다. 점점 변동급 체계에 동의하고 조합을 탈퇴하는 조합원들이 늘어났다. 대리점을 차려 소장으로 나가거나 아예 위로금을 받고 희망퇴직을 하는 조합원들도 늘어났다. 정리 해고 사태는 막았지만 조합은 반의 반 토막이 났다.  

  이때부터 사측은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고 나아가 노동조합을 말살하려는 음모를 숨기지 않고 본격적으로 나타내기 시작했다. 조합원들이 근무하는 영업소 간판을 새벽에 용역을 동원하여 몰래 뜯어 내고 집기를 옮기는가 하면 정상적으로 출퇴근하기 어려울 정도의 원거리 영업소에 발령을 냈고 그 영업소마저도 전시장도 간판도 없이 골목길 쌀가게 2층, 치킨집 3층, 슈퍼마켓 5층 등에서 근무하도록 하면서 조합원들이 판매 실적이 좋지 않다는 구실을 만들어 냈다.  

  2006년 결국 사측은 이 구실을 핑계로 회사가 적자가 난다고 하면서 직영승용판매 부문을 별도의 자회사를 만들어 떼어 내려 하였다. 자본금 1조 5천 억짜리 회사에서 10억짜리 회사로 옮기라는데 동의하는 직원이 있을 리 없었다. 비조합원들이 조합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5년 전 변동급 급여 체계에 동의하고 조합을 탈퇴했던 직원들도 많았다. 사측은 자회사 발령을 거부하는 조합원들을 무기한 대기 발령 조치했다.  

  이 과정에서 대구에 있는 최동규 조합원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조합은 사측의 무리한 자회사 발령과 대기 발령 압박이 스트레스에 의한 사망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사측의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했지만 사측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며 성의 있는 대화 요구조차 묵살했다. 조합은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사태가 해결될 때까지 시신을 본사 앞 냉동탑차에 보관하며 투쟁했다. 한여름에 조합원들이 돌아가며, 세워져 있는 냉동탑차의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차량을 관리하고 천막을 지키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측은 1년이 다 되도록 조합의 해결 요구에 응하지 않더니 어느 날 밤 느닷없이 유족을 앞세워 고인의 시신을 운구차에 실어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허탈했지만, 그동안 유족들이 겪었을 마음고생을 생각하면 그이들의 입장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측의 태도에는 정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2008년 10월 조합은 대기 발령 철회와 원직 복직을 요구하며 부평 본사 B동을 점거했다. 사측은 단전을 하고 용역을 동원해 끌어내려 했지만 1층 복도에서 촛불을 켜고 지내면서 45일을 버텼다. 조건부 합의로 나왔지만, 사 측의 합의 이행은 미뤄지고 이번엔 보직 대기가 시작됐다. 보직 대기에 이어 자택 대기까지 또다시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사측은 건설 사업에 무리한 투자를 하여 막대한 손해를 보고도 회사의 알짜배기 부동산들을 헐값에 매각하고 이름도 모르는 유령 기업에 거액의 대출 보증을 서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일삼으며 회사의 부실을 초래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외부에서 배구연맹총재라는 직함으로 저명한 기업인 행세를 하고 다녔다. 회사는 결국 법정 관리를 받게 되었고, 회사 자구 노력의 일환이라는 명목으로 인적 구조조정을 단행하면서 2011년 1월 31일, 정리 해고 명단을 발표했다.  

  조합은 또다시 본사를 점거했다. 이번에는 본동인 A동을 통째로 점거했다. 1층에 주방을 차리고, 외부에 있던 조합 사무실도 아예 5층으로 이전했다.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조합원들은 고향에서 택배로 부친 김치 맛을 보며 끝내준다고 즐거워하며 싸움의 힘겨움을 털어 내고 있다. 고향의 맛이 그립듯 가족도 그리울 것이다.  

  참여하는 조합원 수가 점점 줄어들고 손에 잡힐 듯 보였던 희망이 희미해져 보일 때도 있다. 사측에서는 자신들이 망쳐 버린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밀린 임금과 퇴직금 지급도 하지 않고 있다. 외부에서 보면 이슈가 될 만한 비정규직 투쟁도 아니고 사회적 반향을 일으킬 만한 사건도 별로 없어 보인다. 

  조합원들 얼굴을 보면 좋아할 일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 얼굴들이 밝다. 그런데 항상 웃는 얼굴의 선배님이 보여 준 핸드폰 문자에는 돈이 하나도 없어 애들 교복 살 돈도 없으니까 당장 다 때려치우고 내려오라는 내용의 문자로 가득했다.  

  이 싸움이 언제쯤 끝이 날까? 10년 전 파업에 처음 참가했을 때 3~4일 정도면 되겠지 하고 짐을 꾸린 적이 있었다. 그랬던 게 지금까지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제는 3~4년 안에만 끝나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투쟁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posted by 작은책
2011. 12. 1. 16:46 태복빌딩 꼭대기

박충길 독자님이 지난 8월에 이어서 또 편지를 보내주셨네요.




  늘 소중함이 되어주시는 <작은책>께 드립니다.
 

  지나온 시간들이 생각나는 2011년의 마지막 12월입니다.
  작은책의 사랑으로 올해도 잘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소중한 추억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기증해주신 이경원 님께 감사하고, 
  뵐 수는 없지만 항상 제 가슴속에 담고 더 열심히 살아가겠습니다.
  작은책 12월호는 고제희 님께서 기증해 주셨더라구요. 감사합니다.
  12월에는 무엇을 정리하고 새로이 계획하여야 하듯, 
  저에게도 새로운 희망이자 꿈이 되리라 믿습니다.
  한장 남은 달력, 잘 마무리하시고 
  새로이 다가오는 시간에는 더 많이 웃을 수 있고 , 
  희망 가득한 날 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올 한해 작은책으로 행복했습니다.
  사랑해요, 작은책.
  내년에도 수고해주시구요.
  항상 "화이팅"입니다.


2011년, 작은책 12월호를 감사히 받아보며
박충길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박충길 독자님, 그리고 모든 <작은책> 독자님들
항상 "화이팅"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2011. 12. 1. 11:35 둘레/글쓰기 모임

* 제주 글쓰기 모임
- 다음 모임은 언제? _ 12월 14일(수) 늦은 7시(다달이 둘째 수요일)
- 어디서? _ 제주시청 근처 견우빌딩 6층 '한내 제주'

* 창원 독자 모임 _ 조광진
  창원 독자 모임으로 이름을 바꾸고 새롭게 모임을 가진 지가 벌써 1년이 지났습니다. 저도 작년 11월에 처음 나오게 됐습니다. 꾸준히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모일 때마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을 수 있어서 기분 좋게 나오고 있습니다.  
 〈작은책〉 독자이면서 나올까 말까 고민하는 분, 모임에 나오자니 조금 뻘쭘(어색)할 것 같고 안 나오려니 너무 궁금하고 그런 분들, 대환영입니다.  반칙이 난무하는 세상살이에 지치신 분들도 환영합니다(왜냐구요? 왠지 하실 이야기가 많을 것 같아서요). 첫 만남인데 조금 어색하면 어떻습니까? 주저 마시고 나오세요.
- 다음 모임은 언제? _ 12월 14일(수) 늦은 7시(다달이 둘째 수요일)
- 어디서? _ 창원시 중앙동 101-1 경남오피스텔 203호 경남장애인자립생활센터

* 서울 글쓰기 모임 _ 지윤종
  작년 이맘때쯤 언론노조 위원장이 되고 싶다고 하면서 글을 들고 온 19살짜리(본인)가 물대포에 1인시위까지 경험한 경력자(?)로 다시 나타났다. 
  옛날 꿈이었던 철도 기관사가 되고 싶다고 지하철 4호선에 대한 글을 써 갔는데 급히 써서 그랬는지 글이 매끄럽지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이것저것 질문도 많이 받고 글쓰기에 대해 더 배울 수 있었다.
  도가니 사건에서 국가가 해결책이라고 내놓은 것이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라는 글, 옛날 은사님이 다단계에 빠져들어 실망했다는 얘기, 육아휴직에 관한 글 등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모임에서 못 뵌 이동호 님을 얼마 전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만났다.
- 다음 모임은 언제? _ 12월 17일(토) 늦은 4시(다달이 셋째 토요일)
- 어디서? _ 작은책 사무실(지하철 2, 6호선 합정역 2번 출구)

* 충남 글쓰기 모임 _ 김봉진
  최만정 님은 경찰(공권력)의 편향적인 행동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동료들의 어려움을 글로 썼고, 김효태 님은 소통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글을, 그리고 김광석 님은 건설 현장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빌딩을 짓기 위해 땀 흘린 노동자들의 애환을 표현했다. 그리고 안찬희 님은 차에 치어 죽은 고양이를 묻으며 느낀 감정을 과거의 일과 엮어 내 감동 있는 글을 써 왔다. 전종선 님은 다음에 죽은 병아리를 소재로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충남 모임 글 묶음집 이름에 다양한 의견이 나왔는데 전종선 님이 ‘우린 이렇게 산다!’라는 이름을, 최만정 님이 ‘너희 어떻게 사니?’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두 이름을 묶어 ‘우린 이렇게 산다! 너흰 어떻게 사니?’ 라는 꽤나 좋은 이름이 탄생했다.
- 다음 모임은 언제? _ 12월 20일(화) 늦은 7시(다달이 셋째 화요일)
- 어디서? _ 북카페 ‘다락’(아산시 온양중학교 정문 근처)
- 인터넷 카페 주소는? _ cafe.daum.net/withthepeople

* 부산 글쓰기 모임 _ 최영
  10월 모임은 시간이 가면서 사람이 늘어나는 모임이었습니다. 
  고깃집에서 서상욱 님의 ‘치매 그 험난한 여정’이라는 글을 읽고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4명만이 참가한 것이 안타까웠던 우리는 결국! 글쓰기 모임 회원의 가게(올드레코드)로 찾아가서 5명을 만들었습니다. 또, 박규진 님을 참가시켜(택시비가 무려 4만 5천 원이나 들었답니다.ㅋㅋ) 6명이 됐습니다. 조금이라도 참가자 수를 늘려 보려는 눈물겨운 노력에 박수를! 
  아, 그리고 밤을 샌 뒤 아침으로 닭죽을 먹고 집에 갔답니다. 다들 체력이 대단합니다, 정말.
- 다음 모임은 언제? _ 12월 21일(수) 늦은 7시(다달이 셋째 수요일)
- 어디서? _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지하철 2호선 가야역 2번 출구)
- 인터넷 카페 주소는? _ cafe.daum.net/gos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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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5. 14:57 기획 특집


'신자유주의의 꼼수, 비정규직',
윤애림(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정책위원)

12월 22일 목요일 늦은 7시, 
서교동 태복빌딩('문턱없는밥집'/'기분좋은가게' 건물) 2층 강당

수강료: 12,000원 (작은책 독자: 10,000원 / 청소년: 5,000원) 


* 윤애림 선생님이 쓴 책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노동운동』(2006, 공저)
 
* 문의 : 02-323-5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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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5. 14:43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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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4. 12:02 기획 특집




'인권이 뭐길래', 박래군(인권활동가,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11월 24일 목요일 늦은 7시, 서교동 태복빌딩(문턱없는밥집 건물) 2층 강당

수강료: 12,000원 (작은책 독자: 10,000원/ 청소년: 5,000원)


  도대체 인권이 뭘까요? 집회를 하다가 잡혀갈 때만 인권 침해를 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인권 침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갑자기 경찰이 가방을 검사하거나, 평범하게 살고 있는데 국가보안법으로 잡혀 가거나, 정당하게 집회를 했는데 공무집행방해로 구속을 당하거나 하는 일들이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언제나 현장에서 대중과 만나는 꿈을 꾸는 활동가로 살고 싶고, 기억되고 싶다”는 박래군 선생님에게 인권이 무엇인가 들어봅니다. 2012년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첫 시간입니다.

  “나는 활동가다. 그것도 인권활동가다. 그게 나의 직업이고, 정체성이다. 활동가가 아닌 내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30년 가까이 활동가로서 살아왔지만 나는 여전히 활동가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활동가로 살다가 삶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활동가는 ‘현장과 대중’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다. 우리사회에서 인권침해가 벌어진 현장은 즐비하다. 인권 문제가 없는 곳이 있겠는가. 그리고 그곳에는 인권침해로 아파하는 대중들이 있다. 그들과 같이 울고, 호흡하고, 부대끼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다.

  박래군 선생님은 현재 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평택 대추리, 용산참사 현장 같은, 인권 침해가 벌어진 현장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인권 침해를 받아 아파하는 대중과 같이 울면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박래군 선생님이 쓴 책

『새벽을 깨우는 A4 한 장』(공저),『그 삶이 내게 왔다』(공저),『아! 대추리』

* 문의 : 02-323-5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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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4. 11:06 알림 / 엮은이의 글

 



■ 엮은이의 글

  나라 주권이 넘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아주 심각한 때 이 글을 쓰게 됩니다. 한미 FTA 이야기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미국과 맺은 한미 FTA 협상안을 국회에서 비준해 주면, 3개월 내 미국에 ISD 조항의 ‘재협상을 제안하겠다’고 꼼수를 부렸습니다. ISD는 ‘투자자-국가소송제’라는 뜻의 약자입니다. 간단하게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미국 기업이 우리나라에서 수돗물 장사를 합니다. 한 달 수돗물 값이 갑자기 올라 우리 월급의 반이 됩니다. 서민들은 수돗물 사 먹을 돈을 아끼느라 빗물을 받아 놓았다가 먹기도 하고, 빨래도 합니다. 미국 기업이 장사가 안 되겠죠? 당장 우리나라 정부에 항의를 합니다. 정부는 빗물을 못 받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 기업은 우리나라에게 소송을 겁니다. 판단은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가 하지요. 그 센터가 누구 편을 들지는 불을 보듯 뻔하고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빗물조차 못 받아 쓰게 됩니다.

  소설 쓰지 말라고요? 지난 2000년에 볼리비아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미국 기업은 벡텔이라는 기업이고요. 아, 그러면 그 ISD조항을 재협상하면 된다고요? 오바마가 총 맞았나요? 그걸 해 주게? 그런데도 이명박 ‘가카’가 국회에서 한미 FTA를 일단 비준해 달라는 겁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에 그걸 비꼬는 패러디가 쏟아졌습니다. “일단 김태희를 나와 혼인시켜 달라. 3개월 안에 김태희 씨에게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말에 뒤집어졌습니다. 노회찬 전 의원은 “싫더라도 일단 당선시켜 주십시오. 대통령 취임하면 3개월 내에 재선거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비꼬았네요.

  독자님들, 가카가 하는 말은 꼼수가 아닙니다. 제가 바둑을 둬 봐서 좀 아는데, 바둑에서 나오는 꼼수는 정말 그럴듯하거든요. 가카가 하는 짓은 바둑 18급짜리가 9단한테 던지는 막수입니다. ‘씨바, 넘 유치해!’

                                                                                                                 2011년 11월 16일
                                                                                                                        안건모 올림


■ 차례


4 사진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살아가는 이야기

14 재수 없는 날 _ 상희
18 본색을 드러낸 선생님 _ 김경희
22 회갑보다 중요한 날 _ 김현주
25 공무원이 봉이냐? _ 서애련
28 축구를 그만둔 한국의 메시 _ 고경은
32 쫄다구 형님! 제 말 좀 들으세요! _ 김영도
36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 주먹이 운다│바담풍 _ 이성수
38 여성의 일과 삶 : 한 발을 디디고 거침없이 고고씽! _ 박미경
44 살아온 이야기(3) : 조금만 더 버티면 이긴다! _ 신혜진
50 와글와글 초딩 글
52 이야기가 있는 들녘 : 올해도 쌀 다 팔았습니다 _ 김성만
56 글쓰기 모임 뒷이야기

일터 이야기

58 일터 탐방 :
고기 280킬로그램 볶아 보셨어요? _ 정인열
64 일터에서 온 소식 : 3~4일 정도면 되겠지? _ 김정훈
68 일터에서 온 소식 : 용기 있는 대리운전기사 콜 ! _ 송재성
72 일터에서 온 소식 : KT를 바꿔라! _ 조태욱
76 실업 극복 희망 일기 : 난 유리 같은 여자예요 _ 최문정
80 현장 노동법 이야기 : ‘판례’를 무시하는 판사들 _ 변영철

기획 특집
혁명은 글쓰기와 함께 온다

83 강좌 _ 윤구병

103 뒷이야기 _ 이명옥

105 만화로 보는 세상 _ 이성열

세상 보기

106 생각해 봅시다 : 김진숙과 송경동 _ 박노자
110 교육 이야기 : 1정 연수 괴담기 _ 설은주
114 쉬운 경제 이야기 : 끝장토론 마지막 호소 _ 정태인
122 생태 이야기 : 우주여행은 그저 꿈일 때 아름답다 _ 박병상
126 인물 바로 보기 : 《실학파와 정다산》을 쓴 최익한 _ 송찬섭

쉬엄쉬엄 가요

131 일상 예찬 : 나는 이만하면 충분해 _ 김현진
134 영화 이야기 : 신비한 주술과 생생한 현실의 만남 _ 강성률
13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 백두대간 완주보다 더 흐뭇한 것 _ 박준성
142 아, 이 시! : 밤새 잘 기셨소 _ 오도엽
144 새로 볼 책 : 싱싱한 유기농 만화 _ 윤지은
146 돌아볼 책 : 오타쿠와 레닌 사이 _ 곽일용
148 새로 나온 책 _ 편집부
151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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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3. 10:15 기획 특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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