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8년 3월호
작은책이 만난 사람_ 구수정
미안해요 베트남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혹시나 한국인 여행자가, 베트남어를 잘 아는 한국 여행자가 저녁 무렵에 베트남 중부 지방에 있는 빈호아 마을을 지날 때면 이런 자장가를 들을지도 모른다.
“아가야, 너는 이 말을 기억하거라. 한국군들이 우리를 폭탄 구덩이에 몰아넣고 다 쏘아 죽였단다. 다 쏘아 죽였단다. 아가야, 넌 커서도 이 말을 꼭 기억하거라.”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이사가 그랬다. 빈호아 마을을 지나가다가 이런 자장가를 들었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숨이 막히고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얼마나 한에 받쳤으면 이런 자장가를 불러 딸, 아들, 손주들에게 들려주고 있을까.
1993년에 무작정 베트남으로 유학을 떠난 구수정은 1999년에, 베트남전쟁 기간에 일어났던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와 맞닥뜨리게 된다. 학살의 진실을 마주하고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1999년부터 <한겨레21>에 연재를 했다. 그 때문에 한국 참전군인들로부터 압박과 위협을 받기도 했다. 베트남 유학 1세대, 구수정 씨는 어떤 사람일까. 파란만장한 그이의 삶과 더불어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 문제를 되돌아본다.
노동자로 살려고 했다
구수정은 1985년에 한신대에 입학했다. 당시 한신대는 진보적인 교수들이 많았다. 전국의 수배자들이 이곳에 있었고 전국의 해고 교수들도 와 있었다. 정운영 교수, 김수행 교수, 조희연 교수 등이 있는 한신대에서 공부하면서 학보사 기자를 했던 구수정은 자연스럽게 한국 사회를 바로 보게 됐다.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 3학년 때 노동 현장으로 갔다.
“나는 납땜을 했다. 컨베이어 벨트에서 브라운관이 떠내려오면 인두로 납땜을 하는 일이다. 내가 손이 느려 컨베이어 벨트 속도에 맞춰서 못했다. 그걸 못하면 선반에 올려야 된다. 근데 금방 선반에 쌓인다. 그럼 조장이 와서 엄청 혼을 낸다.”
그래도 잘 버티면서 납땜 일만 2년 넘게 했다. 어느 날 학생 출신이라는 게 들통이 났다. 회사는 구수정을 해고했다. 시대가 그랬다. 위장 취업 하면 감옥에도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구수정은 노조를 만들 생각도 못했고 그저 오로지 노동자로 살겠다는 마음이었다. 복직 투쟁을 며칠 하다가 포기했다.
▲ 구수정 씨 가족 1972년에 찍은 가족사진. 맨 왼쪽이 구수정 씨다. 사진 제공_구수정
▲ 1986년 한신학보사 엠티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 사진 제공 - 구수정
▲ 1987년 위장취업 시절 동료들과 나들이 갔을 때. 왼쪽에서 둘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구수정
그 무렵 학생운동을 하다 투옥된 강민호라는 친구가 감옥에서 나왔다. 강민호는 1986년 건국대 ‘애학투(전국반외세반독재 애국학생투쟁연합)’ 사건으로 구속되어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2년으로 석방돼 학교로 돌아왔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정 투표함으로 문제가 되었던 구로구청 점거 투쟁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실형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다음 해 10월 개천절 특사로 석방되어 1년 만에 학교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구수정과 강민호는 건국대와 구로구청 사건 때 함께 있었고 같이 붙잡혀 각기 징역을 살았다.
구수정은 다시 강민호와 만나 같이 들어갈 공장을 찾았다.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어서 수원은 안 될 것 같아 안양공단으로 갔다.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자전거를 타고 안양공단을 다녔지만 계속 거절을 당했다. 큰 공장에 취업 공고가 붙어 있어서 들어가도 면접을 하면 퇴짜당했다. 구수정은 걱정이 들었다. ‘쟤가 먼저 취직되고 나 혼자 남으면 어떻게 하지?’ 구수정은 강민호한테 신신당부했다. ‘절대 너 먼저 취직하면 안 된다. 알았지?’ 하고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걱정했던 일이 터졌다. 1990년 3월 28일 강민호가 반월공단 내 대붕전선에 먼저 취직이 됐다. 강민호는 어렵게 된 취직 자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너도 곧 될 거야.” 하고 공장을 들어갔다. 구수정은 낙담했다. 혼자 취직 자리를 알아보기에는 너무 암담했다. 결국 취업을 포기하고 구수정은 집으로 들어갔다. 3년 만이었다.
“그때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내가 스스로 공장 가겠다고, 평생 노동자로 살겠다고 결심했는데 우습게 되더라. 그 비장한 각오가 너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인생이 무너지는 경험을 했다.”
그런데 이튿날 강민호가 집을 찾아왔다. 집 앞에서 전화로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가자. 내가 사줄게.” 하고 말했다. 화가 난 구수정은 나가지 않았다. 강민호는 그냥 돌아갔다. 구수정은 그날 일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강민호가 공장을 들어간 지 8일 만에 전선을 감는 커다란 기계에 빨려 들어가 죽었다. 죄책감과 회한이 밀려왔다. 자기 때문에 죽은 것 같아 괴로웠다. ‘같이 밥이나 한 끼 먹을걸.’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집 안에 처박혀 폐인처럼 살았다. 거의 반 년이 지났다.
그렇게 살던 구수정을 보고 안타까워하던 선배가 어느 날 술을 사 주겠다고 나오라고 했다. 그 선배는 돌베개 출판사를 다니고 있었다. 광화문 사무실 근처로 나갔다. 술이 몇 잔 들어가 알딸딸했다. 그런데 술을 먹다가 선배가 말했다.
“야, 수정아. 이 근처 사회평론이라는 잡지사가 있는데 기자를 모집하더라. 같이 한번 가 볼래? 너 글 잘 쓰잖아.”
“그래? 가 보지. 뭐.”
구수정은 술 취한 김에 객기를 부렸다. 당시 <사회평론>은 꽤 신망이 있던 월간지였다. 마침 그날이 기자 면접 보는 날이었다. 사무실 밖에서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마지막 면접자를 내보낸 면접위원들이 밖이 시끌시끌하니까 나와 봤다. 그런데 구수정이라는 사람이 면접을 보겠다는 것이다.
“입사 서류는 냈어요?”
그런 서류를 낼 턱이 없었다. 어이가 없었지만 면접위원들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면접이나 보고 가라고 했다. 구수정은 알딸딸한 기분으로 면접장으로 들어갔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 서강대 박호성 교수 등이 면접위원이었다.
“아마 내가 굉장히 꼬장을 부렸을 거다. 교수들이 앉아 있는데 젊은 애가 와서 ‘당신들이 내 절망을 알아? 당신들이 노동을 알아?’ 하고 소리 질렀으니.”
‘저런 배짱이라면’ 하는 마음이었을까? 어처구니없게도(?) 구수정이 합격했다. 3개월 수습을 거쳐 정식 기자가 됐는데 오래지 않아 <사회평론> 잡지가 폐간 위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구수정은 <사회평론> 덕에 피폐했던 삶에서 벗어나 사회로 나왔다.
때는 1992년 선거철. 구수정은 선배를 따라 김대중 선거 캠프로 들어갔다. 글을 잘 썼던 구수정은 연설 원고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다. 구수정은 김대중이 최선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 당시엔 차선책으로 김대중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대중은 그해 대통령 선거에 떨어졌다. 구수정은 차선도 허락되지 않는 이 한국 사회가 너무 절망스러웠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구수정은 소비에트연방과 동구권이 연달아 무너지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절망했다. 구수정은 사회주의를 제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했다. 남들처럼 러시아나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무렵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불멸의 불꽃으로 살아》(챤딘반, 도서출판 친구, 1988) 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우다 사이공 괴뢰정권에게 총살을 당한 우옌 반 쵸이 이야기다. 우옌 반 쵸이의 처형 이후 해방구로 들어간 그의 젊은 부인 판 티 쿠옌이 그와 함께 보냈던 최후의 나날들을 진술했고, 남베트남의 작가 챤딘반이 글로 썼다. 하노이의 베트남 외문출판사가 출간한 책을 ‘도서출판 친구’가 1988년에 번역해 출간했다. 구수정은 사형을 당할 때 눈가리개를 벗어던진 우옌 반 쵸이의 모습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또 다른 책 한 권. 《사이공의 흰옷》(도서출판 친구, 1986)을 봤다. 이 책은 사이공(현 호치민)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투쟁에 참여한 베트남 고등학생들을 다룬 소설이다. 구수정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결심했다. 베트남으로 떠나자.
베트남은 80년 동안 프랑스의 지배를 당하다가 1945년에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바로 이듬해 베트남을 재침략한 프랑스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54년 베트남에서 완전히 프랑스를 몰아내는가 했더니 이후 독선과 오만에 찬 미국이 침략해 또다시 싸워야 했다. 결국 미국을 몰아내고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다. 한국의 박정희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미국의 용병으로 베트남전쟁에 보내 5만 명의 목숨을 잃게 했다.
구수정이 베트남을 간 때는 1993년 12월이었다. 한국과 다시 수교를 한 지 겨우 1년 만이라 베트남에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당연히 구수정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무조건 베트남을 가서 베트남전쟁을 공부하겠다는 생각만 하고 그동안 벌어 놨던 돈을 몽땅 찾았다. 계획도 없이 비자를 받고 호치민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첫 인상, 택시가 없다. 마중 나온 사람도 없고, 연락할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낮에 도착했는데 비행기에서 내려올 때 아, 정말 덥구나.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혔다.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까.”
공항은 한산했다. 비행기를 타고 내린 다른 외국인들도 별로 없었다. 일단 공항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타고 호텔을 가자고 해야지 하고 마음먹고 돌아보니 택시가 보이지 않았다. 당혹스러웠다.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영어를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고 외계어 같은 베트남어만 들렸다. 다른 사람들이 하나둘씩 차를 타고 떠나갔다. 그런데 자가용으로 보이는 차 몇 대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다가가 봤더니 유리창 위 조그만 종이에 택시라고 써 있었다. 무조건 탔다. 말이 통하지 않았다. “호텔, 호텔” 했더니 운전사가 무슨 호텔이냐고 묻지도 않고 자신만만하게 차를 몰기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그 당시 호치민에서 외국인이 묵을 수 있는 호텔은 렉스호텔 하나였다. 모든 요금이 외국인 차등제였다. 사회주의 국가 특성인가? 생각했다. 구수정은 호텔 밖을 나갈 염도 내지 못했다. 말이 안 통하고 지리도 몰랐다.
호텔방 안에만 틀어박혀 지내는데 카운터에서 올라왔다. 오늘이 음력 보름인데 절에 가면 볼거리가 많다고 했다. 가이드도 붙여 주겠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구수정은 용기를 내서 밖으로 한번 나갈 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가져온 돈이 문제였다. 그 돈을 호텔방에 두고 나가기가 겁이 났다. 5성급 호텔이라는 데가 문이 너무 허술했기 때문이다. 호텔에서는 주말이라 금고 담당자가 없어 맡아 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배낭에 담아 갖고 다니기로 했다.
호치민에서 가장 큰 절이라는 데를 갔다. 절에 들어가니까 천장에서부터 집채만 한 향을 태우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향들이 달려 있는데 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아무것도 안 보였다. 연기 때문에 눈에서 눈물이 계속 나오고 숨도 쉴 수가 없었다. 발 디딜 수 없을 정도로 사람은 북적댔다. 옆에 가이드 팔을 잡고서 도저히 숨도 못 쉬겠으니까 빨리 나가자고 해 다시 돌아서 겨우 나왔다. 목도 아프고 눈도 아파 길거리 카페를 가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정신을 차려 돈을 내려고 보니까 가방이 찢어져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전 재산을 다 잃어버렸다. 다시는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모든 걸 정리해서 왔는데….
“집에서도 베트남 간다는 걸 너무너무 반대했고 둘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무슨 유학을 베트남으로 가려고 하냐, 미쳤나, 여자 혼자서 거길 어떻게 가냐고 말리는 걸 뿌리치고 왔는데.”
구수정은 무작정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서 만난 영사가 구수정의 손에 100달러를 쥐어 주며 무조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의 딱한 사정을 지켜본 렉스호텔에서는 호텔비를 독촉하지 않고 숙소를 하나 소개해 줬다. 출장을 온 정부 관료들이 묶는 게스트하우스였다. 하루에 35달러였다. 수중에 100달러밖에 없는 구수정은 그것도 부담이 됐다. 그런데 다행히 숙박비를 채근하지 않았다.
“처음에 거길 갔는데 문을 못 열었다. 도마뱀이 문 전체를 덮고 있었다. ‘까약!’ 비명을 질렀다. 내가 소리를 지르니까 누가 와서 문을 열어 주더라. 그런데 도마뱀은 재앙도 아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쥐들이 막 튀어나왔다. 베트남 쥐는 고양이만 한 것도 있다. 내가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구수정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집에 연락을 해서 돈을 좀 받아야 했다. 해외 전화를 할 수 있는 곳은 중앙우체국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화요금이 너무 비쌌다.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빨리 전달할 수 있을까 연습까지 했는데도 86달러가 나왔다. 우체국까지 걷고 차비도 안 쓰고 밥도 물도 안 사 먹었다. 집에서 부치는 돈이 언제 올지 몰라 암담했다.
어떻게든 한국 사람을 만나서 도움을 청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다음날부터 한국 사람이 갈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학교도 가 봤다. 영사관 앞에 가서 하루 종일 서 있어 봤다. 하지만 어디에도 한국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하루에 한 끼 정도 먹고 버텼지만 결국 돈이 다 떨어져 버렸다. 수중에 1달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 사흘 정도 굶었더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가야 되나 보다. 내일은 가야겠다. 처음으로 짐을 풀어 봤다. 내가 가지고 온 게 영어사전 한 권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 하나 가지고 왔더라. 그걸 왜 가져갔는지 잘 모르겠더라.”
처음으로 그 테이프를 들었는데 갑자기 통곡이 터졌다. 한국에서 부르던 운동가요를 들으니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다.
“나는 내 울음소리가 이렇게 무서운지 처음 알았다. 공명이 되면서 내 울음소리가 울음을 자극해 정말 세상이 떠나가라고 울었다.”
아래층 수위가 올라와서 문을 두드렸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그 수위도 어떤 상황인지 한눈에 알아챈 듯했다. 다음 날 새벽부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숙소에 있던 사람들 모두 한 사람도 빠짐없이 손에 먹을 걸 들고 왔다. 과일은 물론 심지어는 물, 죽, 음식 같은 것도 가져왔다.
“이 사람들은 4시면 일어나니까. 미리 오겠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아무나 와서 벨을 누르고 모든 사람들이 과일을 가져오고 뭘 가져오고. 한 달은 먹을 게 쌓였다.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와서 안아 주고 내가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끊임없이 베트남어로 위로하는 거 같았다. 그때 내가 ‘더 있어 봐야겠다. 일주일만 더 버텨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한 번 기적이 일어났다. 갑자기 어디선가 한국말이 들렸다.
“정 상무님, 정 상무님!”
이게 꿈인가 싶었다. 어떤 한국 사람이 구수정 옆 방문을 두드리면서 부르는 소리였다. 꿈에 그리던 한국 사람이었다. 가서 그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몸이 굳어 발이 안 떨어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뛰쳐나갔는데 그 한국인은 이미 계단으로 내려간 뒤였다. 얼른 밖을 내다보니 차를 타려고 했다. 절박했다.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선생님! 아저씨! 기다려요!” 하고 소리친 뒤 계단을 내려가는데 눈물이 앞을 가려 온통 뿌옜다. 염치도 없이 그 차를 타고는 눈물 콧물을 흘렸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때는 어려 보였을 거다. 고등학생인 줄 알았다고 했다. 얼굴은 동글동글 몸은 너무 말랐고 키도 작았다. 거기서 엉엉 울고 말도 못하고. 그분이 괜찮다고,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 한국인이 구수정을 렉스호텔로 데리고 갔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베트남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도나도 그 한국인한테 구수정이 당한 일을 설명했다. 한국인이 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거냐, 여기에 남을 거냐고. 구수정은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다고 대답했다.
그 한국인이 봉투를 놓고 갔다. 봉투에는 2천 달러가 들어 있었다. (구수정은 나중에 그분을 만나면 드리려고, 소매치기가 득시글거리는 호치민에서 옷 속에다 주머니를 만들어 늘 2천 달러를 품고 다녔다. 하지만 1년이 넘도록 그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이듬해 연말 영사관 ‘한인의 밤’ 행사에서 그분을 만났다. 베트남에서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다. 구수정은 인사를 하고 돈을 건넸지만 그분은 끝내 받지 않았다.)
“그 뒤 진짜 열심히 베트남어를 공부해서 그분의 모든 통역이며 계약이며 내가 다 발 벗고 나섰다. 생명의 은인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분은 사업이 망해 몇 년 뒤 베트남을 떠나게 된다.”
두 달 만에 한국에서 소포가 왔다. 상자에 ‘나주 배’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한글을 보는데 또 눈물이 나왔다.
“펑펑 울었다. 나는 문자 중독이었는데 베트남에 와서 처음으로 한글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베트남어를 빨리 배우려고 일부러 한글로 된 책 한 권도 안 가져왔다.”
대학원을 들어가는 데 수많은 벽을 만났다. 먼저 베트남어를 배워야 했다. 호치민시 국립대학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이 대학 인문사회과학대학 역사학과에서는 한국 유학생을 받아들인 경험이 없어서 절차를 아는 이도 없었다. 모두들 자기가 아는 대답만 했다.
“‘너는 역사학과를 졸업하지 않았으니까 보충 학습을 해야 할 거야.’ ‘그건 어떻게 해?’ ‘역사학과에서 보충 학습을 들어.’ 보충 학습을 들었다. 끝난 뒤 ‘시험을 보려면 어떻게 해?’ 그럼 누가 ‘과외를 해야 되지 않겠니?’ 그래서 또 과외를 했다.”
베트남에 간 지 3년째. 1995년 6월 입학시험이 있었다. 입학 허가 구비 서류로 한국 거주지 관할 경찰서의 범죄경력조회서에서 한국 공관의 신원보증서는 물론 호치민시 외무청, 시·군·동 인민위원회 및 공안을 돌며 신원보증서를 받아야 했다. 학교장 추천서, 어학당 수학 능력 인정서, 교수 2명의 추천서도 필요했다. 그래도 베트남 중앙인 하노이 교육부의 입학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구수정에게 우선 입시를 치르도록 허락해 줬다. 지원자 30명과 함께 역사학과 석사 과정 시험을 치렀다. 시험 과목은 전공이 베트남 역사 세 과목(현대사·당사·통사)이었다. 구수정은 평점 10점 만점에 9.2를 받아 수석 합격했다. 베트남어는 평점 9.9로 발군이었다. 구수정은 석사 과정을 공부하면서 교육부 회신을 기다렸다. 2년 과정을 모두 수료했는데 하노이 교육부 회신은 ‘입학을 허가할 수 없다’였다. 학부에서 역사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구수정은 끈질겼다. 하노이 교육부를 여덟 번 찾아가 책임자를 면담했다. 결국 대학원 2년 과정을 끝내고 8개월 지난 뒤에야 입학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녀는 1997년 학기말 고사의 민속학 과목에서 10점 만점을 받았다. 역사학과 개설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일부 교수와 학생이 이의를 제기해 교수위원회 심의에 회부되었다. 담당 교수인 탄 판 교수는 위원회에서 진술했다. “구수정은 철자에 한 글자도 오자가 없었다. 구수정이 갖는 불리와 한계를 생각컨대 답안이 9.9라면 0.1을 가산해야 한다.”
구수정의 논문 주제도 벽을 만났다. ‘한국군의 베트남전 개입 연구’라는 주제를 학교 당국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이다. 신청한 지 2년 만인 1999년 9월에야 허가되었다. 논문 쓸 자료도 구하기 힘들었다.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외국인이 국립문서보관소, 국방부, 외무부 등의 자료에 접근하려면 재학증명서, 범법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공안 서류부터 영사관, 베트남 외무부 허가서 등 구비 서류가 수도 없이 많았다. 심지어는 한국에 보내서 도장을 받아야 하는 서류도 있었다. 또다시 하노이를 여덟 번이나 다녀왔다. 쓰뜨 하동(베트남에서 가장 무섭다는 하동 사자)이라는 별명도 생겼다. 그러나 쓰뜨 하동도 안 되는 건 있었다. 여덟 번째 하노이 방문에서 자료 접근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다. 외무부 산하에 있는 직원에게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제 다시 안 올 거야. 더 이상 괴롭히지 않을게’ 하고 돌아나오는데 그 직원이 슬쩍 나를 잡았다. ‘자료를 사는 건 어때?’ 하고 묻더라.”
그런 방법이 다 있냐고 물었더니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20여 쪽 되는 복사물을 400달러 정도를 주고 매수했다.
“자료를 받았는데 판독이 안 되는 거다. 무슨 학살이니 하는 낱말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자료가 만들어진 게 1980년대 중후반으로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이걸 파는 사람이 겁이 나서 그랬는지 출처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도 다 지워 버렸다."
친하게 지내던 베트남 친구한테 필사를 부탁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았다. 한 달 뒤 나타난 친구는 아무 말도 없이 필사본을 던져 주고는 가 버렸다.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았다. 구수정은 자료를 펼쳐 보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친구가 왜 그러는지. 그 자료는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베트남 인민군대 정치국에서 나온 <전쟁범죄조사보고서-남부 베트남에서 남조선 군대의 죄악>. 세상에 이토록 잔인한 짓들을 했다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카이! 카이! 외치는 피해자들
구수정은 학살 현장을 찾아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나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인삼차가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의 인삼차는 고급이었다. 한국으로 넘어와 경동시장을 가서 트럭 한 대 분량의 인삼차를 산 뒤 배편으로 베트남으로 보냈다.
다시 베트남에 돌아온 구수정은 뭐에 홀린 듯이 마을 마을들을 찾아다녔다. 그 당시엔 도로도 변변찮아 차로 들어갈 수 없는 마을도 많았는데 사진기에다 노트, 인삼차 등등 앞에도 배낭, 뒤에도 배낭을 메고 그 땡볕을 걸었다.
“하루에 세 마을을 가겠다고 다짐했다. 외국인은 마을에서 못 자니까 마음이 급했다. 대도시에 숙소를 잡고 마을을 가려면 아침 4시에 호텔 문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종종걸음으로 세 마을을 취재하고 마지막 마을을 나올 때쯤 되면 밤 열 시, 열한 시, 호텔 도착하면 새벽 한 시가 된다.”
구수정이 찾은 대부분의 마을에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30년 만에 처음 그 마을에 들어간 한국인이었다. 구수정이 마을에 들어가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카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고 외친다. 베트남어로 카이는 ‘진술하겠다’라는 뜻이다. 중부 지방의 사투리는 제주 방언만큼이나 어려워서 베트남 사람들끼리도 잘 못 알아듣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구수정은 그 말이 다 들렸다고 한다. 그들의 눈빛이, 손짓, 발짓, 몸짓이 다 말하고 있었다.
차마 믿기 어려운 끔찍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들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지 않는다. 불교가 국민 종교인 이 나라에서 승려 4명이 학살당한 린선사 사건을 목격했던 노스님도 그랬다.
“세숫대야에 물을 떠 오시길래 손을 씻으라고 하는 절 의식인가 했는데 그 다음부터 음식을 내오기 시작한다. 손을 씻으니 새하얀 손수건을 내주고 음식을 먹으면 또 입을 닦으라고 물수건을 주시고 다 먹고 나니까 또 손을 닦으라고 새 물을 갖다주셨다. 한국군 학살 이야기를 하면서 가해자의 나라에서 온 한국인을 이리 살뜰히 대할 수 있는 건가, 내가 이런 대접을 받아도 되나 했다.”
가끔 술을 권하는 분들도 있었는데 미안한 마음에 구수정은 그 술잔을 거절하지 못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술이 눈물인 양 가슴에 슬픔이 가득 차오르곤 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서로가 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말하는 사람도 내가 울면 안 되지 하고, 나도 이분들 앞에서 어떻게 울어? 하며 입술을 앙다물고 울음을 참았다. 그런데 꼭 어느 대목에선가,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우리 엄마가 이렇게 죽었어’ 하고는 왈칵, 울음이 터진다. 근데 이분들이 하나같이 울면서 했던 얘기가 ‘울어서 미안해’였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거리면 할머니들이 또 ‘아가, 아가, 내가 안다. 내가 다 안다.’ 하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 주셨다.”
피해자들은 너무 많고 구수정은 혼자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줄 수 없었다. 그들도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래서 말을 아주 빨리, 최대한 짧게 한다. “한국군이 들어왔어. 우리를 잡았어. 총 쏘고 수류탄 던졌어, 죽었어.” 그런 이야기를 수백 명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다. 말을 축약할수록 눈빛이나 표정은 더 강렬해진다.
어느 순간 귀가 들리지 않았다. 마을을 돌아다닌 지 스무 날이 지났을 때였다. 이젠 더 이상 못 듣겠다, 정말로 못 듣겠다 구수정은 속으로만 고함을 쳐 대고 있던 차였다.
“아마 극도의 스트레스 때문에 일시적으로 귀가 안 들렸던 것 같다. 처음으로 쉬었다. 그 참에 빈딘성박물관에 갔는데 거기서 상세히 정리된 한국군 민간인 학살 자료를 만났다.”
그러고 나니 꾀가 났다. 맹호부대 주둔지였던 빈딘성의 성도 뀌년에서 가장 큰 학교 옆 문방구를 가서 노트를 수백 권 샀다. 다시 마을에 들어가 이번엔 노트를 나눠 주며 말하지 말고 적어 달라고 했다. 그들이 입을 달싹일 때마다 구수정은 겁이 났다.
연필심에 혀로 침을 묻혀서 글자 한 자 한 자를 꼭꼭 눌러쓰는 모습이 무슨 초등학생 시험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글을 모르는 이가 많았다. 글눈이 밝은 사람 앞에는 까막눈들이 길게 줄을 섰다. “나 좀 써 줘” 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혹여 제 차례가 오지 않을까 초조하고 절박한 모습이었다.
“한 시간 동안 쥐 죽은 듯이 조용해진다. 그 노인네들이 엉덩이를 하늘까지 올리고 글을 쓰는 모습을 보는데 아,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슬퍼지더라, 그래도 그때는 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몇 사람의 이야기는 직접 들어야 했다. 구수정은 대표로 딱 두 분의 이야기만 듣겠다고 했다. 다시 또 모든 사람이 카이, 카이 하며 손을 들었다. 그중에 누군가 “우리 집은 일곱이 죽었어”라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우린 열 명”, “우리 집은 열셋”, “우린 열입곱이에요” 하고 아우성을 쳐 댔다. “열일곱이요?” 열셋과 열일곱의 가족을 잃었다는 피해자를 지목해 이야기를 듣는데 한 할머니가 손도 못 들고 구수정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봐 구수정은 애써 할머니의 눈길을 피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이야기만 듣고는 서둘러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그 할머니가 입을 삐죽삐죽하며 서성대고 있었다.
“따라오시는 거 알았다. 봉고차까지는 굉장히 먼 거리였는데 할머니가 그 먼 거리를 계속 따라오셨다. 나는 모른 척하고 걸음도 일부러 빨리 해서 막 갔는데 마음이 오죽했겠냐. 내가 종종걸음으로 빨리 걸으면 할머니도 빠르게 따라오다가 뒤돌아보면 할머니도 딱 멈춰. 이제 어떡할까 잠깐 고민하다가 아, 몰라 그러고 막 가면 할머니가 또 막 쫓아와, 그러다가 봉고차까지 쫓아왔는데 아, 저 할머니 어떻게 돌아가시나 걱정이 됐다.”
봉고차에 올라탄 구수정은 빨리 출발하라고 운전사를 재촉했다. 차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하는데 할머니가 사력을 다해 뛰면서 차를 따라왔다. 기사한테 멈추라고 했다. 창문만 내리고 “할머니 왜요?” 했더니 할머니가 홱, 뒤를 돌아서더니 아무 말이 없었다. “할머니 말씀 안 하면 갈 거예요.” 하면서 또 출발했다. 그런데 차가 움직이면 할머니가 또 따라 뛰었다. 이렇게 서너 번 하다가 화가 난 구수정은 차에서 내려서 할머니한테 따졌다.
“‘할머니 말을 하라고요. 뭐하는 거냐고요.’ 왜 그렇게 머리꼭지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왜 이 땡볕을 한정 없이 걷고 있는 거지? 언제까지 이 마을들을 돌고 돌아야 하는 거지? 내가 왜 수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미안해 해야 하는 거지? 가슴 한편에 이런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동안 삭이고 삭였던 울화가 터져 나왔다. ‘할머니 나 죽겠다고요. 돌겠다고요.’ 이러면서 막 터진 거다. ‘말을 해야지, 왜 말을 못해.’ 이러면서 엄청 다그쳤는데 할머니가 ‘난 한 명만 죽었잖아.’ 이러는 거다. 근데 ‘그 아이가 외아들이었어, 독자였어’ 하는데 너무 기가 막혀 되레 소리를 질러 댔다. ‘한 명만 죽었다고 왜 말을 못해? 할머니한테는 그 한 명이 전부잖아!’”
구수정이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울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게 신발 한 짝을 벗어서 땅을 막 치면서 엉엉 한참을 울다가 갑자기 할머니는 어디 가셨지? 싶어 옆을 봤더니 할머니도 신발 한 짝을 벗어 들고는 땅을 내리치면서 울고 있었다.
“저 할머니 뭐 하나 했더니 나를 따라서, 할머니도 갑자기 신발 한 짝을 벗어서 울고 있는 거였다.”
그러다가 둘이 서로 마주보고서 웃음이 터졌다. “할머니 미안해, 너무 미안해.” 구수정은 웃다가 또 울음이 터졌다. 그때 할머니가 따뜻하게 구수정 등을 토닥거렸다. “‘내가 다 알아 내가 다 알아.’ 그 할머니 지금 살아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마 돌아가셨을 거다. 그때 연세가 많았는데….”
구수정은 그날이 가장 슬펐던 날이라고 했다.
학살 현장
구수정이 밝힌 한국 군인이 베트남 양민을 학살한 사실은 다음과 같다.
1964년부터 1973년까지 8년여간 청룡·백마·맹호부대 등 총 31만 2853명의 따이한이 베트남을 다녀갔다. 그중 4687명은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 기간 중 한국군은 모두 1170회의 대대급 이상 대규모 작전과 55만 6천 회의 소규모 부대 단위 작전을 수행했다.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은 4만 14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다. 그러나 이 밖에도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공식적인 통계로는 집계된 적이 없는 베트남 민간인들의 희생이 있었다. 베트남 문화통신부에서는 (아직 불완전한 통계라는 단서를 달고 있긴 하지만) 한국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양민의 수를 대략 5천 명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구수정에 따르면 정작 학살 현장의 주민들은 이 수치를 신뢰하지 않으며, 정부가 정확한 진상 조사에 소극적이라며 노골적인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주장하는 숫자가 어떤 지역에서는 베트남 문화통신부가 공인한 수치의 배를 넘어서기도 했다.
가는 곳마다 믿기 어려운 증언이 이어졌다. 구수정이 그 당시 <한겨레21>에 전했던 한국군의 학살 만행 일부만 보면 이렇다.
“1965년 12월 22일, 한국군 작전 병력 2개 대대가 빈딘성, 뀌년시에 있는 몇 개 마을에서 ‘깨끗이 죽이고, 깨끗이 불태우고, 깨끗이 파괴한다’는 구호 아래 12살 이하 22명의 어린이, 22명의 여성, 3명의 임산부, 70살 이상 6명의 노인들, 즉 민간인 중에서도 여성과 어린이, 노인들을 학살했다.”
“랑은 아이를 출산한 지 이틀 만에 총에 맞아 숨졌다. 그의 아이는 군홧발에 짓이겨진 채 피가 낭자한 어머니의 가슴 위에 던져져 있었다. 임신 8개월에 이른 축은 총알이 관통해 숨졌으며, 자궁이 밖으로 들어내져 있었다. 남한 병사는 한 살배기 어린아이를 업고 있던 찬도 총을 쏘아 죽였고, 아이의 머리를 잘라 땅에 내동댕이쳤으며, 남은 몸통은 여러 조각으로 잘라내 먼지구덩이에 버렸다. 그들은 또한 두 살배기 아이의 목을 꺾어 죽였고, 한 아이의 몸을 들어올려 나무에 던져 숨지게 한 뒤 불에 태웠다. 그리고는 12살 난 융의 다리를 쏘아 넘어뜨린 뒤 산 채로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한국군들이 마을에 들어가 주민을 체포하면 남자와 여자를 따로 나눴다. 남자는 총알받이로 데리고 나갔다. 여자는 군인들 노리갯감으로 썼다. 희롱하고 강간하는 것은 물론 여성들의 가장 신성한 부분에 불을 지르기도 했다.”
“한국군들의 양민 학살 행위 유형은 무차별 기관총 난사, 대량 살육, 임산부 난자 살해,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해, 가옥 불지르기 등이었고 ‘아이들의 머리를 깨뜨리거나 목을 자르고, 다리를 자르거나 사지를 절단해 불에 던져 넣’고, ‘여성들을 돌아가며 강간한 뒤 살해하고, 임산부의 배를 태아가 빠져나올 때까지 군홧발로 짓밟’고, ‘주민들을 마을의 땅굴로 몰아넣고 최루 가스를 분사해 질식사시키’는 것 등이었다."
“창자는 밖으로 튀어나와 덜렁거렸고, 불에 타 누렇게 녹아내린 지방층에는 구더기들이 기어 다녔다.”, “젖먹이까지 죽이고도 모자라 무덤조차 불도저로 밀어 버렸다.”, “1번 A국도를 따라 채반을 들고 갈기갈기 찢겨져 흩어진 살점과 뼛조각을 주우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구수정, <한겨레21> 273호)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군이 학살한 베트남 민간인은 모두 9천여 명으로 추정한다. 인간으로서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었다. 이런 사건은 멀리는 1947년 제주4·3항쟁 때 일어난 민간인 학살, 1950년에 일어난 6·25전쟁 때 이승만 군대의 보도연맹원 학살, 가깝게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되풀이됐다. 이 모든 학살에는 공통점이 있다. 빨갱이라는 이유였다. 빨갱이면 간난아이도, 임신한 여성도, 노인도, 그렇게 죽여도 되나? 아무나 죽인 뒤 빨갱이라고 한 건 아닌가? 아니 빨갱이면 그렇게 죽여도 되나?
▲ 2005년 베트남 종전 30돌을 맞이해 베트남군 전 총사령관 보응우옌잡 장군과 특별 인터뷰를 하는 구수정. 사진 제공_ 구수정
구수정은 1999년 5월 <한겨레21>에 ‘아 몸서리쳐지는 한국군’이라는 기사로 베트남전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처음 폭로했고 <한겨레21> 베트남 종단 특별 르포 ‘베트남의 원혼을 기억하라’ 등으로 한국군 학살 기사를 연이어 내보냈다. 2000년 6월 27일 2,400명의 베트남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이 한겨레신문사에 쇠파이프와 각목을 들고 난입해서 신문사의 윤전기, 사무 집기, 16만 장에 이르는 서류를 불태우고, 간부들도 감금하고, 송전을 차단해 업무를 중단시키는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구수정은 베트남에 있었는데, 그녀의 집 골목 담벼락마다 빨갱이라는 등 욕설을 스프레이로 뿌려놓고 집 앞에 염산 통을 갖다 놓기도 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한국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한국에 올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려서부터 키워 준 할머니가 위독하셔서 임종 전에 할머니를 뵈려고 귀국을 감행했다. 한겨레에서 신변 보호 요청을 했다. 공항에서는 가장 먼저 대통령이 나가는 출구로 빠져나갔고 집 입구에서부터 경찰 차벽 사이로 집에 들어갔다. 5분만 보고 나오라고 재촉해서 30분 정도 뵙고 나왔다.”
장례가 끝나고 한국 정부는 빨리 베트남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런데 베트남에 있는 한국 공관은 여기 너무 위험하다고 오는 걸 꺼렸다. 국제 미아가 되는 듯했다. 그때 프란치스코 수도회에서 연락이 왔다. ‘상황이 어려운 걸로 알고 있는데 우리 수도원에 와 계시라’고 했다. 구수정은 그곳에서 한 달가량 머물렀다.
▲ 2013년 베트남전 피해자들의 지속 가능한 자립을 도모하기 위해 베트남 사회적 기업 '아맙'과 함께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구수정이다. 사진 제공_ 구수정
한베평화재단
그 뒤 한국에서는 열네 개 시민단체가 모인다. 유시민, 한홍구, 차미경 등이 모여 베트남전진실위원회가 만들어졌다. 구수정은 베트남에 사회적 기업 ‘아맙’을 만들었고 한국에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를 만들었다.
함께하는 이들이 생겼지만 베트남 문제를 구수정 혼자 붙들고 있었던 시간이 많았다. 모든 이들이 베트남 문제를 껴안고 10년, 20년 계속 갈 수 없었다. 구수정은 버거웠다. 앞으로 혼자서 이 문제를 지고 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당장 이 문제에 손을 놔 버리면 20년 30년 묻혔다가 또 누군가가 다시 시작해야 될 거 같아서 재단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 재단을 만들 때 맨손이었다. 구수정 자신도 재단이 쉽게 만들어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어쨌든 필요하니까 부닥쳐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100명을 적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명단에 적은 분들 얼굴도 본 적 없었지만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대여섯 번 전화 드리고 만날 준비도 했다. 그런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전화를 걸자마자 ‘그동안 참 많이 미안했는데 제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이라도 걸어 달라’고 했다. 감동이었다.”
누군가 시작하기만 바랐던 것일까. 대부분이 부채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한테는 일단 메일을 보냈다.
“내가 정말 딱 할 얘기만 썼다. 왜냐면 너무 부담스러우니까. ‘저는 한베평화재단을 만들고 있고’ 하는 정말 몇 줄 안 되는 딱 할 말만 요약한 아주 건조한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너무너무 부드러운 답장이 왔더라. 그때 그분은 외국에 나가 계셨는데 ‘여기는 단풍이 지고 있습니다. 저를 만나시려면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며칠 날은 어디가 좋고 그것도 안 되면 이렇게 하시면 되고.’ 나중에 한국에 오셨을 때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추진위원으로 동의를 해 주셨다.”
아맙,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그리고 한베평화재단을 만들 때 구수정 둘레엔 많은 사람이 있었다. 처음 아맙을 만들 때는 “어쩌겠냐 니가 하겠다는데” 하면서 천만 원을 바로 낸 사람도 있다. 일주일 만에 일 억을 만들었다. 아맙은 조금 쉽게 만들었다. 그런데 공정무역을 하려면 한국에 기업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한국 기업을 만들 때 또다시 7억을 모금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공동네트워크를 만들었다.
“가난한 분인데 2000만 원을 낸 분도 있다. 아시아공동네트워크는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 모두 동원해서 돈을 만든 거다. 그런데 또 한베평화재단을 만들어야 했다. 그때는 너무 부담이 됐다. 근데 어떻게 해? 돈 낸 사람한테 또 내라고 한 거지. 그분들이 또 내 주셨다.”
재단이 만들어지고 나서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한베평화재단과 <한겨레21>은 이번에 베트남 중부 꽝남성의 약 20개 마을을 직접 답사해, 한국군 학살 희생자 추모 위령비, 위령관, 묘지, 학살 현장들을 안내하는 구글 지도를 만들었다. 한국 군인이 민간인을 가장 많이 학살한 중부 지역 다낭, 호이안, 하미 마을, 퐁니 퐁넛 마을은 모두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꽝남순례길 1코스는 1968년 1~2월 호이안 인근 마을에서 베트남전 파병 한국군 청룡부대가 민간인들을 학살한 3개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길이다. 베트남 중부 5개성(꽝남성, 꽝응아이성, 빈딘성, 푸옌성, 카인호아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희생자 수는 약 9천 명 이상이며 이중 꽝남성에서만 약 4천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년이면 천만 명이 넘는 한국 사람들이 다낭을 간다는데 그들 중에서 몇 명이 30분 거리에 학살 지역이 있다는 걸 알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학살 현장에 있는 꽃집에 사람들이 많이 와서 꽃을 산다고 그러더라. 그리고 이렇게 찾아왔던 분들이 고맙다고, 우리가 이런 곳을 한번은 가 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너무 쉽게 잘 다녀왔다고 인사한다. 재단이 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다.”
▲ 지난 2월 2일 광화문에서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벌이고 있는 구수정과 한베평화재단 회원들. 사진_ 안건모
뒷이야기
한베평화재단은 옥수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건물 4층에 있다. 한 독지가의 도움으로 보금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작년에 만들었는데 워낙 활발하게 활동해서 그런지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구수정은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를 만나면서 고충을 겪기도 했다.
“한때 베트남에 진출한 대기업에서 일하면서 경제적으로 꽤 여유가 있는 삶을 살았다. 베트남에서 6층짜리 주택을 임대해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들도 거두고 한국인 방문자들을 먹이고 재우고 지원도 하고 그랬는데 민간인 학살 문제가 터지자 일자리가 뚝 끊겼다. 임대료를 못 내다가 결국 전기, 수도가 다 끊어지고 집에서 쫓겨나는 경험도 했다. 한 달에 1달러도 벌지 못하는 세월이 제법 길었다.”
그러나 후회는 없다. 한평생 살면서 올바른 일로 인생을 걸 수 있다는 건 얼마나 행운인가!
구수정 이사는 요즘 너무 바쁘다. 올해는 베트남에서 하미학살 50주기 위령제를 한다. 한베평화재단은 위령제 참배단을 모집하고 있다. 3월 8일부터 13일까지 5박 6일 일정이다. 하미에서만 한국군에 희생당한 민간인이 135명이나 된다. 하미학살, 빈안학살 등 해마다 마을에서 한국군에 의해 한날한시에 죽은 이들을 기리는 ‘따이한 제사’를 지내는 곳들이 있다.(따이한한테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따이한 제사’라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합동 제사를 지내고 마을 주민 전체가 음복을 하는 전통이 있지만 그동안 제사 비용과 음복연 비용이 없어 제사를 거르는 해가 많았다고 한다. 2018년에는 50주기 위령제를 맞는 지역들에 100만 원씩 지원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 1968년 꽝남대학살 지도 베트남전쟁 당시 꽝남성에서 발생한 한국군 민간인 학살 피해 관련 위령비 안내 지도. 사진 - 구글지도
올해 4월 21일부터 22일에는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 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린다. 학살 피해자인 베트남인이 원고가 돼 한국 정부를 피고석에 앉히고, 학살의 책임을 묻는 법정이다. 현재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기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만만만’ 캠페인을 하고 있다. ‘만만만’이란 ‘만 일의 전쟁, 만 인의 희생, 만 인의 연대’라는 뜻이다.
우리는 미국과 일본한테 전쟁 범죄를 사죄하라고 요구한다. 미군의 노근리 학살, 일본군 성노예 문제의 모든 진상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그러려면 우리 자신의 과오부터 돌아보고 베트남전의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피해자인 한국 참전 군인들에게도 똑같이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 박정희가 저지른 일이었지만 그 책임을 국가가 져야 한다. 그리고 전쟁 범죄는, 아니 앞으로 영원히 전쟁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씨. 사진_안건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