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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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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세 번 해고 투쟁, 헛살지는 않았다

김양순/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그네틱스분회

 

 

시그네틱스는 1966년에 설립된 필립스 한국공장이었다. 시그네틱스는 반도체를 조립하는 회사다. 나는 1987년 시그네틱스 염창동 공장에 입사해서 생산3팀에서 테스트 업무를 했다. 생산3팀은 완성된 제품 중 정품과 불량품을 구분하는 작업과 출하하기 위한 포장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센츄리라는 기계를 4대 정도 작업했다. 센츄리 기계에서는 크기가 약간 큰 반도체 제품을 작업했다. 12대까지 동시에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일했던 것 같다. 센츄리에서 일하다 둘째 아들 출산 후에 몸도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부서장 지시로 로직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품이 10개씩 묶인 채로 메가진이라는 쇠에 담겨 오는 것이다. 1로트에 4~5천 개씩 한 제품으로 한 번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메가진의 무게는 3-4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수시로 이걸 들어서 작업하는 게 힘에 버거웠다. 더 쉬운 작업도 있는데 10년 이상 로직 작업한 사람과 똑같이 생산해야 한다면서 관리자가 매일 생산량을 체크해 힘들게 했다. 열심히 일했는데 비교당하는 게 힘들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테스트에서 일한 지 약 12년이 지난 상황. 테스트 기계가 파주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전할 때 함께 간다고 했는데 사람만 버림받았다. 1995년에 필립스 자본이 철수하며 국내 자본인 거평그룹에 팔았고, 거평은 부도가 났다. 워크아웃 사업장이 되었고, 산업은행이 관리하다 2000년에 영풍그룹에서 인수를 하게 됐다. 회사 주인이 바뀌는 걸 보며 사원들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상태였다. 이미 노동조합이 있었고, 단체협약도 있었다. 1999년도 단체협약을 갱신하면서는 임금인상이 조금 되더라도 공장 이전 문제와 고용안정 문제는 조합원들의 주된 관심사였고, 반드시 관철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평이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파주 탄현면에 16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도가 났다.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할 때 노조에서도 동의를 해 줬다. 왜냐면 파주 공장으로 갈 때 회사가 사람과 기계 모두 합의하에 데려간다고 했다고 노동조합에서 보고를 했다. 부도 이후 사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동결, 상여금 300만 원 반납, 호봉 승급 보류, 각종 복지 축소 등 함께 살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퇴직금 누진제 폐지이다. 1.3N(퇴직금을 근속년수×1.3만큼 지급)이던 누진제를 폐지한 것이다. 회사를 살려 고용을 보장받고자 머리를 짜내 궁리를 모색했건만, 영풍으로 인수된 이후 영풍은 안산 반월공단으로 공장 이전 일방 통보를 해 왔다. 대표이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공장 이전 문제를 노조와 함께 상의해서 잘 마무리하자고 했으나 회사는 더욱 몰아붙였다. 회사는 안산 공장 이전 이주 불가자를 모집하며 위로금 12개월분을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표를 냈다. 200여 명. 20011월부터 6월까지의 사직자다. 많은 사람들이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회사는 2001723일부로 안산 공장으로 일방적 인사 발령을 냈고,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장소는 염창동 공장이었다. 염창동 공장은 1600평 규모이다. 대형 천막이 10여 개가 쳐졌다. 파업 대오를 2개조로 나눠 12일 투쟁을 진행했다. 공장 안 기계 반출을 막기 위한 투쟁이 한 달을 넘어갈 때쯤, 89일 사측은 용역 200여 명을 고용해 우리를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기계를 빼 갔다. 그리고 해고 통보를 날려 왔다. 파업대오 160여 명 중 130명이 해고되었다. 그 전에 전 조합원 임금 가압류, 사직자 퇴직금 가압류, 전원 해고, 교섭위원 5명 전원 구속, 최초 여성 용역을 고용해 시그네틱스는 노조 탄압의 새로운 방법들을 내세우며 강하게 공격해 왔다. 그래도 부당 해고 철회시키고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투쟁이 이어졌다. 2003년에 조합원들을 생계 투쟁에 내보내며 대법원 판결 때까지 간부들이 투쟁 대오를 유지하며 투쟁을 했다. 2007년 대법원 판결이 났고, 간부들은 전원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남아 투쟁하는 간부들과 조합원이 있었다.

투쟁 이후 나는 변했다. 결혼해서도 직장을 다니고 싶었다. 시부모님과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될 때까지 함께 살다가, 지금은 두 분이 시골 가서 사신다. 1차 해고 후 염창동 공장에서 농성장 유지하며 천막 지키느라 밥도 해 먹고 공장에서 자고 들어가면, 시아버지는 바람을 핀다고 하시곤 했었다. 고집 센 시아버지라 본인이 모든 것을 다 관여하고 지시하고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콩나물값 150원이 안 맞는다고 시어머니를 쥐 잡듯 잡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그래서 집에서도 투쟁을 해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공장에서 잠을 자고 집에 들어간 날 일이 터졌다.

농성장이 없어지는 걸 막고 아침에 출근한 조합원들과 교대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시아버지가 바람 피웠다며 야단을 하시기에 그날은 참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했고 또 단 하루를 살아도 맘 편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피운 걸 보셨냐고, 왜 막말을 하시냐고, 노동조합일 동참하고 온 거라는 말을 왜 믿어 주시지 않느냐고, 억울하다고 했다. 결국은 내가 이겨서, 시아버지는 앞으로 영진이(큰아들) 엄마가 하는 일은 다 맞으니 믿고 사신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내가 하자는 대로 시부모님이 인정을 해서 의지를 많이 하고 사신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2001년 해고된 이후 6개월 동안 교리 공부를 해서 로사 (장미꽃)라는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앙이 있으면 세 번 해고를 당해도 이겨 낼 수 있도록 힘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하자면, 큰아이 영진이가 엄마가 세 번 해고되어도 계속 시그네틱스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힘들어도 끝까지 직장을 다니겠다고 한다. 2001년 복직 투쟁할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지금은 스물일곱 살로 은행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초기에는 일이 힘들어 엄청 풀 죽어 있더니 이제는 엄마가 투쟁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 보면서 첫 직장에서 힘들다고 관두지 않고 퇴직할 때까지 다니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새삼 시그네틱스 투쟁하면서 산 경험이 현재로 이어지는 인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느낀다.

시그네틱스 1차 투쟁 때 해고되어 복직 못한 29명의 징계 해고자가 있다. 18명의 간부들과 해고 이후 산업은행 규탄 투쟁에서 로비에 들어갔다고 해고된 11명의 조합원이다. 이들은 2007년 대법원에서 정당 해고라고 판결이 났다.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결을 받았지만, 2011년 안산 공장 영업 양도를 이유로 두 번째 전원 정리해고 됐다. 복직 투쟁과 소송에서 이기고 현장에 출근할 때 회사는 서울이 집인 우리에게 통근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왕복 4~5시간 걸려 출근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우린 노조 봉고차로 6시 출근과 2시 출근자를 실어 날랐다. 그때 조합원 출퇴근시키려고 1종 면허를 땄다. 다섯 명이 1종 면허로 갱신하거나 새로 면허를 따서 조합 봉고차로 출퇴근 투쟁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이 밖에도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회사의 괴롭힘은 모두 다 쓰기가 힘겹다. 그럼에도 사표를 내지 않고 버텼다. 밖에는 해고자가 복직을 바라며 투쟁하고 있었고, 복직한 우리는 사표 내고 싶을 때 사표 내고 그렇지 않으면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우리가 견디니 회사가 안산 공장을 매각하고 광명시 하안동 아파트형 공장을 얻어 출근을 시켰다. 출근하자마자 회사가 어렵다며 1년 가까이 휴업을 했다. 우린 또 불안했다. 세 번 해고되는 것 아닌가.

20169월 우려했던 대로 세 번째 정리해고를 통보받았다. 광명사업부 폐업으로 인한 전원 정리해고 통보 한 달 후 회사는 위로금을 대폭 인상했다. 조합원 13명이 사표를 냈다. 9명이 남아 투쟁하기로 했다. 사표 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했기에 두 번 해고 투쟁을 이길 수 있었으니 세 번째 복직 투쟁을 함께 안 한다고 누굴 원망할 수 있으랴. 밉고 원망스러운 건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동료들에게 기어코 위로금을 쥐어 주고 희망을 뺏어 간 시그네틱스와 영풍 자본이다. 본사인 파주 시그네틱스 공장은 1년 내내 우리가 현장에서 일하고 있든지, 해고되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든지 사람을 뽑고 있다. 파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얼마 전 914일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정을 받은 9명의 노동자들은 시그네틱스 정규직이다. 회사는 복직명령서만 보내고 휴업이라고 한다.

▲ 시그네틱스에서만 3번 해고 된 노동자들. 광화문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앞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양순 씨. 사진제공_시그네틱스분회


우린 여전히 광화문 청사 옆 천막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1차 해고자이며 그 당시에는 사무장이었고, 지금은 분회장인 윤민례 동지와 함께 시작했으니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사람들을 남기는 역사를 쓰고 싶다. 1차 해고자와 복직자의 끝을 연결하고 있는 분회장의 책임감은 모든 간부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시그네틱스 투쟁은 현재 진행형인 살아 있는 역사이다. 신규 노조가 볼 때도 끝까지 질기게 투쟁하는 모습은 동지들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투쟁이고 우리 자식들을 정리 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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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지난 호를 읽고

 

작은책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데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마는 굳이 이유를 들자면 쉽게 읽힌다는 것입니다. 수준(?)이 낮아서 가볍게 책장을 넘길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글이 마음에서 절절하게 우러나와서 그런 게 아닌가 합니다. 그러니 또 나의 일처럼 공감하게 됩니다. 마치 옛 동지를 만난 것처럼.

10월호에 실린 김수련 님의 글을 읽으면서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이 수많은 경우의 수를 배경으로 드러나는데 나는 늘 내 중심적인 사고로 바라보니 오해를 하게 되고 마침내 불신이라는 늪에 빠져 사고 자체가 딱딱하고 어느 한쪽으로만 치우치게 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작은책은 나를 일깨워 주는 죽비가 되기도 합니다. 함께 읽고 공감하고 때론 뉘우칠 수 있게 하는 작은책은 저에겐 오래된 경전입니다. 작은책과 오래도록 함께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도상록

 

작은책 10월호를 받았습니다. 젊은 우체부가 밝게 웃으며 당신 책이 왔어요! 하면서 건네주었습니다. 달마다 오는 작은 포장이 책이라고 어찌 알았는지. ^^

받자마자 앉아서 일사천리로 다 읽었습니다. 반 년 넘게 아프다는 이유로, 핑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스스로 도태되고 있다는 자괴감까지 들던 저에게 읽어야만 한다고 죽비처럼 다가온 이야기들. 세상에 나만 아픈 것도 아닌데 저는 왜 이러고 있었는지. 냉장고를 열어 냄새를 맡고 행복한 아이처럼 다시 힘을 내겠습니다! 자신이 귀여워서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것을 아는 아이처럼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다시 알아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작은책~

독일에서 조숙현

 

시대가 바뀌어서 그런지 꼭 종이책이 아니어도 요즘은 인터넷매체나 페이스북을 통해서도 좋은 글을 많이 접할 수 있게 됐어요. 저도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서 어느새 종이책은 소홀히 하게 되더라고요. 하지만 잠시만 봐야지하고 펴 본 작은책에는 SNS에서 볼 수 없는 따뜻하고 귀중한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을 꼽아 보자면 어린이해방운동입니다. 그 글을 보고 어린이를 인격체로 존중하지 않고 가르치고 보살펴야 하는 존재로만 대했던 제 모습이 떠올라 부끄러웠어요. 항공사 승무원 두 분의 글도 다 좋았습니다. 팍팍한 현장에서도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하고 똑바르게 살아가는 모습에 제 마음도 벅차오름을 느꼈어요.

백은희

posted by 작은책
2018. 10. 30. 13:42 알림 / 엮은이의 글

▲ 표지 그림_ 안지희


엮은이의 글

 

“<작은책>이 몇 호까지 나왔죠?”

마감 중에 소설가 이시백 선생님 강의가 사무실과 가까운 곳에 열려서 갔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선생님께서 제게 물으시더군요.

“1년에 열두 번, 23년하고 몇 달이 지났으니까, 280.”

정말 대단하네요. 20년 넘게 월간지가 살아남다니. <작은책>이니까 할 수 있는 겁니다.”

정말요? 에고, 고맙습니다.” 뭔가 울컥해서 말을 더 잇지 못하는데, 선생님께서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요 며칠 마감에, 신년호 기획 걱정에, 신규 독자 늘릴 방법을 찾느라 머릿속이 복잡하고 의욕이 가라앉고 있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 큰 위로가 되더라구요. ‘잘하고 있구나, 다시 기운을 내야지싶고요. ㅎㅎ.

독자님들, <작은책>25주년이 되는 2020년엔 300호 발간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둘레에 더 많은 분들이 함께 <작은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저희가 찾아가야할 곳이 있다면 알려 주시고요. <작은책>을 알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신발이 닳도록 뛰어 볼랍니다.

이번 호 일터 탐방은 성수동에서 신발을 만드는 노동자들 이야기입니다. 경력 수십 년이 넘는 장인, 그들은 스스로를 족쟁이라 부른답니다. 첫차 타고 출근해서 막차 타고 퇴근하는 제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족쟁이들이 외칩니다.

족쟁이도 노동자다!”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나혜석, 칼날을 쥔 여자 _최규화

10   엮은이의 글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친구야! 예전으로 돌아와 주면 안 되겠니? _윤정은

14   삶의 균형 _권해진

17   변태 출몰 백서 _김지영

21   엄마가 소곡주를 마시지 않은 까닭 _유내영

26   그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_전미화

31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큰 딸의 혼사 _윤혜신

35   청년으로 살아가기 서른은 행복하지 않다 _진솔아

40   이야기가 있는 사진 _이기범

42   살아온 이야기(5)

  할 말은 뭐고 못할 말은 또 뭘까요? _송추향

48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우리 집 텃밭의 역사 _안재성

53   교실 이야기 기억나는 선생님 _박태찬

57   이야기가 있는 들녘 올해 배추는 포기다 _김진회

61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4   일터 탐방_ 성수동 제화 노동자

  족쟁이들 다 뭉치자 _정인열

71   일터에서 온 소식

  세 번 해고 투쟁, 헛살지는 않았다 _김양순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취약계층에게 힘이 되는 법률홈닥터’ _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박필성

81   유기농 펑크 포크의 창시자 사이’ _안건모

102   이동슈의 생활 만화 _이동수

 

세상 보기

104   생각해 봅시다

  문재인 교육 공약을 되찾자 _윤지희

109   어린이 해방과 평화

  세계 어린이 권리 선언들 _이주영

115   여성으로 살아가기

  참은 줄 모르고 참은 말들 _홍승은

120    ‘그때 그 사건다시 보기

  재성아, 니가 거시기 혀야겠다 _김형민

125   생태 이야기

  흑산도의 공항은 정의로운가? _박병상

 

쉬엄쉬엄 가요

130   책 읽고 딴 생각

  다음 달은 좋아지겠죠? _변정수

133   독립영화 이야기

  난 너의 야동이 아니야 _류미례

138   우리말과 국어사전 짚어 보기

  돼지를 위한 변명 _박일환

142   와글와글 아이 글

144   새로 나온 책 _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2018. 10. 18. 23:05 월간 <작은책>/세상 보기

<작은책> 201810월호

세상 보기

 

자동차보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

진장원/ 한국교통대학교 교통대학원 원장

 

길을 걷다 보면 우리들에게 아주 익숙한 풍경이 하나 있다. 골목길에서 자동차가 오는 기색이 보이면 사람들은 얼른 구석으로 피해서 자동차가 먼저 지나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것이다. 심지어 횡단보도 앞에서조차 보행자는 자동차를 먼저 보내 주고 나서야 길을 건넌다. 이렇게 자동차가 우선시되는 문화는 우리 삶 속에 너무나 깊숙이 배어 있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자동차를 먼저 보내 줘야 하지?”라는 질문도 떠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가령 자동차보다는 사람이 우선이지!”라고 주장하며 먼저 길을 건너려 했다가는 당장 운전자로부터 당신! 죽고 싶어 환장했어?”라는 욕설을 듣게 될 것이다.


소위 선진국이라고 일컬어지는 미국이나 유럽은 어떨까? 한번은 필자가 미국 여행을 가서 교통신호등이 없는 교차로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려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마침 저만치에서 자동차가 다가오기에 한국에서 늘 하던 대로 자동차가 얼른 통과하기만을 기다리며 딴전 피우듯 길 건너편을 주시하고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이상한 분위기가 느껴져서 자동차를 쳐다봤더니, 그 자동차 역시 횡단보도 앞에 정지한 채 내가 길을 건너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게 무슨 상황인지 감이 안 잡혀 멍하게 있다가 운전자와 눈이 마주쳤다. 운전자는 헤이! 당신 왜 빨리 길을 안 건너고 있는 거야? 당신 때문에 나도 못 가고 있잖아라는 의미로 팔을 뻗어 어깨를 살짝 들어 올리는 미국인 특유의 몸짓을 하며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사태 파악이 돼서 손을 들고 무안하게 길을 건넜다. 그 후로도 횡단보도에서 이런 문화에 익숙해지기까지 의식적으로 자동차보다 내가 우선권이 있어!”라며 몇 번이고 스스로 다짐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잠깐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애당초 길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원래부터 자동차가 도로의 주인이었을까? 그리고 우리나라와 다른 선진국은 보행자를 대하는 태도에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걸까?

사람이 우선인지 자동차가 우선인지에 대한 관념의 차이가 가져오는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 단적인 예가 보행 중 사망사고율이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자 열 명 중 네 명 정도가 걷다가 죽은 사람이다. 반면 네덜란드와 미국은 약 한 명이다. , 우리나라가 네 배나 더 많이 보행 중에 죽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같은 선진국이지만 일본도 3.5명이나 된다. 일본이 다른 교통사고 통계는 선진국 중 으뜸 수준이지만 보행자 사고에서만큼은 후진국 수준인 이유는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일본 역시 우리나라처럼 운전자들이 보행자들을 그다지 배려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절반 정도의 운전자들만 보행자를 위해 차를 세워주었다.

그럼 서구 선진국에서도 원래부터 사람이 자동차보다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을까? 그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회가 그렇듯 약자(보행자)들이 가만히 있으면 강자(자동차)들이 알아서 보호해 주지는 않는 것 같다. 약자들이 단결해서 자신들의 걸을 수 있는 권리 즉, 보행권을 쟁취해 낸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도로교통법에는 본엘프라는 제도가 있다. 본엘프는 네덜란드말로 도로의 정원이라는 뜻인데, 이 거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동차는 보행속도보다 빨리 달리면 안 된다. 심지어 아이들이 이 거리에서 마음대로 뛰놀아도 괜찮다. 이렇게 사람과 자동차가 함께 살아가도록 법으로 규정해 놓고 있고 이걸 어기면 엄격하게 처벌한다. 이 본엘프의 유래를 알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이 잡힌다. 1970년대 초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이라는 도시의 한 동네에 공사장 트럭이 통과하기 시작해서 아이들 등하교 길이 매우 위태롭게 된 적이 있었다. 그때 참다못한 어느 주민이 자기 집 앞을 지나는 트럭이 속도를 못 내도록 화분을 내놓았고, 이걸 본 다른 주민들도 하나둘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트럭들은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며 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화분들 때문에 삭막하던 동네 길이 꽃으로 예쁘게 치장된 정원처럼 바뀌어 사람들이 도로의 정원’, 본엘프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본엘프는 다름 아닌 주민(약자)들이 자동차(강자)로부터 마을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도한 시민운동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 운동에서 영향을 받아 먼저 네덜란드 정부가 본엘프를 법제화했고, 이후 독일의 템포30, 영국의 홈존, 일본의 커뮤니티존 등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스쿨존, 실버존, 생활도로구역 등으로 도입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제도적으로는 보행자와 자동차가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았으나 사람들의 의식은 완전히 전환되지 않은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 같다.

자동차가 아닌 사람이 길의 주인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크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물리적인 시설이 제공될 필요가 있다. 본엘프에는 세 가지가 없다고 한다. 첫째는 보도와 차도를 구분하는 보도가 없다. 골목길에서만큼은 사람이 자동차를 피해 길 가장자리로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둘째는 차량 통행의 편의를 위해 중앙에 차선을 그려 놓지 않았고 길을 일부러 구불구불하게 만들어 자동차의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셋째는 횡단보도가 없다. , 본엘프 안에서 사람들은 얼마든지 아무 때나 길을 건널 권리가 있다는 것을 시설로 운전자에게 알려 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적당한 채찍이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자동차 운전자에게 너무 관대한 처벌을 하고 있다. 단적인 예가 음주운전이다. 여러분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운전자가 살인죄로 무기징역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하지만 대부분 선진국은 음주운전을 형사사건 살인죄로 엄하게 다스린다. 마찬가지로 자동차가 시속 30킬로미터 이상 속도를 내면 안 되는 본엘프에서 이를 어기고 사고를 내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 미국 운전자들이 횡단보도에서 보행자를 기다려 주는 이유 중 하나는 엄한 벌칙 때문이기도 하다. 엄격한 규칙은 처음에는 부담스럽지만 습관이 되면 곧 익숙해진다. 골목길에서 천천히 다녀 버릇하면 그 속도에 익숙해진다. 세 번째는 자동차에 대한 우리 마음이 바뀌어야 된다. 요즘 내 마음에 꼭 드는 교통안전 광고가 있다. “운전자! 당신도 차에서 내리면 보행자입니다.”라는 광고다. 맞는 말이다. 평생 운전자로서만 살아가는 사람이 지구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일반적으로 직업운전자들 외에는 하루 24시간 중 아무리 길어도 서너 시간만 운전자이고 나머지는 보행자로서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영원한 강자라도 된 양 운전하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 나에게 가장 꼴불견 운전자를 꼽아 보라고 한다면 횡단보도 정지선을 넘어와서 길 건너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하거나, 횡단보도 신호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데도 빨리 건너라는 식으로 차머리를 밀고 들어오며 위협하는 운전자, 또는 사람들이 지나가야 할 인도나 횡단보도 위에 떡하니 무단주차해 놓는 사람들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가 아직도 지도자들의 책임감(노블리스 오블리주)이 부족한 천민자본주의 사회라고 한탄한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핵심은 강자의 책임의식과 관용이다. 강자인 운전자가 약자인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충만해진다는 것은 단순한 교통문화 차원을 뛰어넘어, 우리 사회가 강자와 약자가 더불어 사는 진짜 사람 사는 맛 나는 세상이 된다는 의미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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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일터 탐방_ 대경환경()

 

그가 팬티만 입고 운전한 사연

정인열/ <작은책> 기자

 

생활쓰레기(생활폐기물) 수거차량을 운전하는 배성훈 씨(38). 그의 업무는 남들이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인 밤 930분에 시작된다. 서울 마포구의 각 가정과 상가 등에서 내놓는 생활폐기물(일반쓰레기, 음식물 쓰레기, 재활용 폐기물)5톤 수거차량에 싣고 인근 소각장에 나른다. 운전기사 한 명과 쓰레기를 포집하는 미화원 세 명이 한 조가 되어 손발을 맞춘다. 미화원은 운전기사보다 2~3시간 더 이른 저녁 7시경 각자 맡은 현장으로 출근해 골목의 쓰레기를 포집하고 수거차량이 다닐 수 있는 큰 도로가에 내놓는다. 그러면 운전기사는 포집된 쓰레기를 트럭에 상차하고 쓰레기는 회전판에 밀려 트럭 안쪽으로 들어간다.

▲ 서울 마포지역에서 폐기물 수거차량을 운전하는 배성훈 씨. 작은책(정인열)


마포구에서만 하루 발생되는 생활폐기물의 양은 456.6(2016년 서울시 통계자료). 하루만 수거를 하지 않아도 악취가 나고 거리가 더러워지기 때문에 이들은 일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6일을 일하고 토요일만 쉰다. 법정공휴일은 물론 설, 추석에도 쓰레기를 치워야 하기 때문에 명절 중 하루는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인간관계가 다 작살났죠. 쉬는 날이 하루라 아무것도 못해요.”

그는 야간노동으로 파괴된 일상을 설명했다. 아침에 퇴근 후 잠을 자려고 해도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자주 깨기 때문에 항상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린다. 생활 패턴이 남들과 달라 지인들을 만날 수도 없어 사회적 인간관계는 단절된다. 배 씨는 작업을 하기에는 주간이 오히려 낫다고 주장한다.

수거차량 20대가 마포구 지역 교통체증을 유발할까요? 오히려 낮에는 도로에 불법주차 차량이 없어 작업도 원활하고 사고 위험도 낮죠.”

야간노동은 특히 가정에 어린아이가 있는 동료들을 힘들게 한다. 쉬는 토요일 낮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나면 밤잠을 자게 되고, 일요일 낮에 다시 아이들과 놀아 주다 잠을 자지 못하고 바로 출근하는 일이 많다. 밤새 뜬눈으로 지새우고 아침에 출근하는 상황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쉬는 게 아닌 쉬는 날을 보내고 현장으로 가면 치워야 할 쓰레기는 평소보다 2.

하루 쉬고 나온 날은 12~13시간을 작업해야 돼요. 평소보다 4시간씩은 오바가 된단 말이에요.”

▲ 대경환경(마포구 위탁 환경업체) 서복석 씨가 성산동 골목을 다니며 재활용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이들은 지역 주민들에게 꼭 필요한 공공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마포구청에 직접 고용되지 않은 위탁업체 대경환경()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위탁업체로는 고려환경, 평화환경, 효성환경까지 4개 업체가 있다. 이들의 시급은 최저임금보다 410원 많은 7940. 기본급과 야간수당, 연장수당을 더하면 월 330만 원이다. 업체는 연장수당을 월 52시간으로 고정해 지급하고 있으나 배 씨가 6월 한 달간 노동조합 조합원 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장근로시간은 80시간이 넘었다. 배 씨의 주장대로라면 이들의 한 달 노동시간은 240시간이 넘는다. 이는 2016OECD가 발표한 회원국 평균 147시간보다 많은 최고 수치다.

간접고용의 문제점이 사회적으로 대두되자 20153개 관계부처(기획재정부, 행정자치부, 고용노동부)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이하 용역근로자보호지침)’을 마련하고 이들의 임금은 시중노임단가를 책정해 지급하도록 했다. 지침에 따르면 이들의 시급은 14766원이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시중노임단가의 53퍼센트밖에 안 되는 최저임금 수준이다.

환경미화원이 이렇게 궁지에 내몰리는 것은 영리를 추구하는 위탁업체가 공공업무를 대행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용역근로자보호지침을 내놔도 법적 강제성이 없어 지키지 않는 업체가 대다수다. 게다가 관리·감독을 해야 할 마포구청 청소행정과가 오히려 지침을 어기고 시중노임단가의 70퍼센트로 입찰 공고를 냈다. 그리고 관련법을 어기고 입찰 공고문을 변경해 노임단가를 더 내려서 업체가 연간 8억 원의 임금을 착복하게끔 도와준 정황도 있다.

위탁업체는 이윤을 많이 남기기 위해 인건비와 식비마저 중간 착복하고 인력 충원도 최소화한다. 늘 인력이 부족하여 노동자들은 시간에 쫓기며 일을 하니 안전 규정도 어기게 된다. 골절부터 사망사고까지 발생한 재해 건수는 연평균 613(2015~2017년 고용노동부 자료). 특히 사망자의 88퍼센트가 위탁업체 노동자였다. 배 씨 역시 지난 1월 쓰레기를 상차하다가 회전판 사이에 손이 끼어 오른쪽 손가락 3개가 골절되는 사고를 당했다.

야간에 청소하는 사람들 다 발판에 매달려서 다니잖아요. 음주 차량이 뒤에서 받아 버리거나 발 잘못 디뎌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나도 매달려 다녀요. 발판 자체가 불법 부착물인데도요. ? 이걸 떼 버리고 걸어 다니면 작업시간이 당연히 늘어나겠죠. 그러니까 암묵적으로 놔두고 있는 거예요.”

배 씨는 미화원 작업복과 장갑을 지금보다 더 많이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음식물 쓰레기와 분뇨 등 오물을 처리하다 보면 작업복과 장갑은 온갖 세균과 미생물에 오염되기 때문이다.

여름에 음식물 쓰레기 들면 구더기가 우두두둑 떨어져요. 그리고 술 취한 사람들이 꼭 쓰레기 더미 위에 토하고 오줌 싸고요. 그걸 수거차량에 넣으면 회전판이 돌면서 압축하거든요. 그런데 쓰레기가 가득 차면 터지면서 그 안에 있던 오폐수, 구더기 다 뒤집어쓰는 거예요. 저도 한번은 다 튀어서 입고 있던 옷 다 벗어서 버리고 팬티만 입고 운전했어요. 하하.”

노동환경건강연구소의 2009년 실태조사에서도, 환경미화원의 몸에서 검출된 미생물 수가 버스터미널 화장실 변기의 250배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이 가까이서 이용할 수 있는 샤워실은커녕 탈의실도 없어 주차장이나 상가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작업 후에도 근처 화장실에서 손과 얼굴을 씻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오폐물이 묻은 옷은 그대로 가정 세탁기로 들어가 그 가족의 위생마저 위협한다.

▲ 한 위탁 환경미화원이 재활용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를 분리하고 있다. 작은책(정인열)


종량제봉투에 담긴 쓰레기를 집다가 유리 같은 날카로운 물건에 손이 베이는 일도 부지기수다. 얇은 코팅 장갑 한 켤레로 3일을 써야 하니 금방 헤진다.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안전수칙 가이드에서 베임방지 장갑을 착용할 것을 권유하고 있지만 현장에는 지급되지 않고 있다.

대경환경 야간 반장은 자신과 친분이 있는 미화원에게는 좋은 구역을, 그렇지 않은 미화원에게는 계속 험한 구역을 배치하며 인사권을 휘둘렀다. 때마침 4명 인력 충원으로 한 조가 더 생겨나 조금은 작업이 수월해질 거라 기대했지만 편한 사람만 더 편해질 뿐이었다. 201711월 배 씨를 비롯한 대경환경 소속 노동자 대부분은 민주노총에 가입하고 노조를 만들었다. 배 씨는 지회장을 맡았다.

노조가 생기자 회사는 곧바로 같은 조의 노조원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하고 노조를 탈퇴하라고 회유했다. 노조에 가입한 수습 직원 4명은 3개월 수습 기간 후 모두 계약해지 하고 새 직원을 채용했다. 27명이던 노조원은 순식간에 22명으로 줄었고 지금은 8명이 버티고 있다. 지난 5월에는 기업노조가 만들어져 22명이 그 노조에 가입했다.

배성훈 씨는 노조 활동을 하고부터 하루 세 시간도 못 자고 있다. 아침에 퇴근한 후 마포구청 앞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상급단체와 노무사를 만나 자문을 구하고 담당부서인 청소행정과에는 민원을 넣는다. 지난 828일에는 유동균 마포구청장과 면담해 위탁 환경미화원 직접고용 TFT 구성을 제안했다.

▲ 배성훈 씨가 폐기물 수거 작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작은책(안건모)


현재 서울시 직영미화원 1인당 책정된 인건비는 연 6300여만 원. 노조가 마포구청장에게 제안한 자료에 따르면 위탁 환경미화원 전원을 직영으로 전환하고 임금 수준을 높여도 기존 위탁운영보다 연간 약 18억 원의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다. 절감된 예산으로 각 업체에 41조 인력을 충원하고도 남는다. 그렇게 되면 배 씨를 비롯한 그의 동료들은 보다 안전하게 일하면서 주 5일 근무도 꿈꿀 수 있게 된다.

위탁업체가 그동안 우리 뜯어먹은 거 그만하라는 거죠. 발판에 매달리지 않고 작업을 해도 원활하게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저희 목표예요.” 그는 오늘도 잠 못 자고 뛰어다닌다. 보통 사람들처럼 밤에 잠자고, 가족과 일상을 함께하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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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죽비 같은 인연

김수련/ 항공사 객실승무원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는 하루하루는 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늘을 건너 온 세상 도시들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을 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지구라는 열린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객실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을 나라와 사람들, 그들에 대해 새로운 걸 깨닫고 이해하게 해 주는 내 일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교감과 공감 덕분에 길고 고된 하늘길에서의 노동을 견디며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밀폐와 제한이다. 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면, 그 부대낌의 피로 탓일까.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상황들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극성수기가 지나고 나면 항공요금이 조금 싸진다. 휴가를 가는 여행객들은 줄어들고, 사업이나 고향 방문 목적의 승객들이 많아진다. 성수기가 끝났음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승무원들 앞에 또 다른 종류의 일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오가는 승객들 중에는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특히 우리 항공사를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인도인이다.

인도처럼 식민지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이민이 많다. 인도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계급간의 갈등이 꽤나 심각하며,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름과 성만 보아도 그들끼리는 상대가 어떤 계급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국기인 인디안항공 이용을 꺼리고 신분 계급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외국 항공사들을 애용한다는 것.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도인 승객들을 만나면 무작정 연민의 마음부터 일곤 했다. 하지만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회에 오래 살았던 이들이라 그럴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나의 연민과 공감 능력으로는 그들을 다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인도인 승객의 특징 중 하나는 타국적의 승객들에 비해 휠체어 신청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인도인들이 한 비행기에서 주문한 휠체어가 무려 50개가 넘을 때도 있다. 휠체어 승객이 몇십 명이 넘어가면 승무원이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달리 보상이 없으면서 챙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지니, 일하는 승무원 입장에서는 불평이 쌓이기 십상이다.

휠체어로 탑승하는 인도인들은 물론 대부분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충분히 걸어 다닐 나이 같은데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날 인도 뭄바이에서 현지 직원에게 물었다. 유독 많은 뭄바이행 휠체어 승객들에 대한 불평은 그 질문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직원은 답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가난하여 자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간 그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실한 영양 공급 탓에 다리근육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그들. 휠체어에 의지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들. 어쩌면 미국 이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정.

그들을 그렇게 휠체어 안에 주저앉게 만든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고단한 업무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려 했던 내가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일이 늘어나는구나, 더 고단해지겠구나, 아 힘들어, 그런 푸념만 연발하며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불평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인도로 가는 모자 승객이 우리 비행기에 탔다. 어머니의 좌석은 비즈니스였고 아들은 이코노미였다. 아들은 탑승하며 내게 부탁했다.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으니 사정을 봐 달라고. 비행기는 클래스별로 좌석이 나눠져, 다른 칸의 승객이 상위 좌석으로 맘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탑승 과정 중 보았던 아들의 표정과 태도에 감동받아 그날 담당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잠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날도 승객이 많았던 날이라, 내 일이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모자 승객이 자꾸 눈에 밟혀, 아들이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화장실 방문을 돕는 모습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나도 부지런히 다른 칸으로 오가며 아들 승객을 불러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 승객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가 돌봐 드릴 테니, 아드님은 조금 쉬시라고. 할머니는 평소 잘 못 움직이신 탓에 몸이 불어 있었고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어서 부축하고 화장실로 모셔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릴 때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깊이 감사하는 맘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눈길. 비록 능숙한 영어는 아니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를 연발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식사 때면 식욕이 없으신지 거의 안 드셔서 마음이 아팠다. 더 드시라며, 다른 거라도 챙겨 드릴까 여쭈었더니, 맙소사! 자꾸 먹고서 화장실을 자주 가면 아들과 당신을 힘들게 해서 안 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풀썩 주저앉은 나는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모자 승객은 다른 일반 승객들이 다 내리길 기다린 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할머니가 허리춤의 쌈지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5달러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팁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난 괜찮다며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기세셨다. 옆에 있던 아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꼭 잡았다.

동료들은 그날, “왜 굳이 나서서 할머니를 돌보느라 더 힘들게 일했냐며 나를 책망하듯 칭찬했다.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서로를 살뜰히 돌보고 위하는 마음을 어찌 외면한단 말인가. 서로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은 고단함도 잊게 만든다.

나는 잘 몰랐다. 아니 안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사회, 오랜 영국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자신의 권리주장에만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편견만 쌓으며 내 업무의 어려움만 증폭시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만났던 모자 승객은 자꾸 편협해지려는 나를 번쩍 일깨워 준 죽비 같은 인연이었다.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책도 뒤적이고 영화도 찾아보곤 하면서, 정작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는 일엔 게을렀던 게 아닐까.

지난달 광화문에서 열린 갑질격파 시민행동집회에서 나는 조합원의 편지로 발언대에 섰다. 항공기가 날아올라 움직이는 원리를 항공역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난 항공기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항공기 안팎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에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뭄바이로 가는 모자 승객 같은 수많은 죽비 같은 인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의 사연을 나의 세상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다시 꺼내 읽고 감동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 사진제공_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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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10. 2. 14:07 알림 / 엮은이의 글

▲ 표지 그림_ 김종도


엮은이의 글

 

이번 호를 꾸리는 중에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난 9년 동안 30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수많은 노동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던 쌍용자동차 해고 사태가 마무리되었다고 해요. 해고자 119명을 내년 상반기까지 모두 복직시키기로 노사가 합의했답니다. 타결 소식에 반갑고 마음 기쁜 한편 동시에 분하고 착잡한 마음도 드네요.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싶다는 이들의 소박한 요구가 그렇게 오랜 시간 싸워야만 얻어질 것이었나 싶어서요.

KTX 해고 여승무원들에 이어서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까지 복직 합의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수많은 노동자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서울 목동 열병합발전소 75미터 높이의 굴뚝에서는 파인텍 노동자들이 310일째 고공농성을 하고 있고요, 광화문 세종로 공원 농성장에서는 콜트콜텍 노동자들이 12년째 복직을 위한 노숙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독자님들, 곳곳에서 싸우고 있는 이분들이 지치지 않게, 질기게 싸워서 이길 수 있게, 지지와 연대 부탁드립니다.

이달에 일터에서 온 소식꼭지에는 항공사에서 일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용기 내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당당히 싸우는 그이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세요. 갑질 항공사가 아니라 국민의 항공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싸우겠다는 항공사 노동자들에게 관심과 응원 보내 주세요.

독자님들, 늘 고맙습니다. 다음 달에 뵙겠습니다.

 

 

2018918

유이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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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여보, 한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태윤호/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조 쌍용양회지부 사무국장

 

 

강원도 동해시에 사는 분이라면 쌍용양회 시멘트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단일 공장 중 세계 최대 규모 쌍용양회공업()은 시멘트업계 1위로 연간 300~400만 톤의 시멘트를 미국, 칠레, 말레이시아 등 전 세계 8곳에 수출하는 회사다.

2007년 스물일곱 살이던 나는 그해 결혼하고 겨울에 쌍용동해중기()에 입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 그리고 주변 지인분들은 모두 부러워했다. 나 역시 그랬다. 청년실업률이 점점 높아지는 시기에 젊은 나이에 지방에서 좋은 회사를 다닌다는 것은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강원도 동해는 평생직장으로 삼을 만한 일터가 별로 없다. 지방에서 빽 없고 가진 것 없는 젊은 친구들은 서울이나 경기권, 대도시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쌍용양회에 들어간 나는 내가 자란 지역에서 벗어나지 않고 제2의 인생, 나의 새 둥지를 꾸려 갔다. 어느덧 내 나이 서른여덟. 결혼하고 입사한 지 12년 차. 토끼 같은 두 딸의 아빠가 되었다. 정말 앞만 보며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IMF 이후 쌍용양회는 쌍용중기 부서를 포함한 기계, 정비, 유통 등 여러 개의 부서를 도급으로 전환시켰다. 이 내용을 입사 면접에서 알게 되었는데, 회사가 다시 안정화되면 합병될 거라고 기대하였고 다른 타 회사의 대우를 봤을 때 비교적 안정적이라 생각했다. 처음 원청 직원과 월급 차이는 78퍼센트 수준이었고 성과급 및 복리후생도 쌍용양회의 지침 그대로 적용되었다. 분사되었을 때 양회 직원으로 일하다가 넘어온 인원이 많아서 그런지 원청에서도 신경을 많이 써 주는 것 같았다.

입사 후 한 4년쯤 지났을 때 바지사장이 갑자기 원청에서 퇴직 통보가 왔다고 했다. 왜 바지사장인가 하면 연 35~40억 원의 경상 도급을 받아 오는 회사의 사장 자리에 주주총회도 거치지 않고 원청이 보내는 사람을 앉혀 처우, 복지나 직원들의 급여 및 발령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이어서 쌍용양회 북평공장 공장장(부장이사)이 중기 바지사장으로 온다고 했다. 좀 얼떨떨했다. 그전에도 이상한 점이 많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때부터 회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얼마 후 중기 반장이 도급계약에도 없는 A광산에서 비 오는 날 원청 관리자의 요청으로 작업자 두 명과 중장비를 가지고 배수로 작업을 하다가 낙석 사고로 억울하게 운명하셨다. 우린 원청의 작업 지시를 당연시했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몇 달이 흐르고 쌍용양회에 계시다 넘어오신 퇴직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분들은 쌍용양회의 입사 동기들과 퇴직금 차이가 크다는 걸 알고 소송을 했다. 한평생을 다 바치고 억울하게 회사의 고통을 공동 분담 하였는데도 그들과 평등한 대우는커녕 물질적으로 보상받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송은 1심에서 지게 된다. 원청에서 도급으로 넘어올 때 아무런 서명계약서 없이 구두로만 이어져 넘어온 것이 실수였다.

그 후폭풍이 결국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닥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또 바지사장은 원청에 의해 잘려 나가고 그보다 더한 바지사장(북평공장 공장장)이 발령을 받아서 왔다고 한다. 어이가 없다. 한번은 원청 관리자가 자신들의 작업 지시를 묵살하고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켰다 하여 바지사장이 동료에게 징계를 내렸다. 그분은 한 달 무급과 출입 정지 공문을 받고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사장, 밤에는 대리운전을 해야만 했다.

또 외부 운송업체 기사가, 우리가 하역을 제때 안 해 준다고 쌍용양회에 본사에 투서를 보내 본사에서 감사조사원이 내려와서 그 시간대 근무였던 장비 운전원을 불러 감사까지 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말에 원청 노조가 임금 협상을 하여 임금이 인상되면 우리도 똑같이 올려 줬는데, 도급이라고 끊기고 소급분도 안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

겨울에는 동해시의 도로 일대, 공장 주변, 시내, 공장 안, 원청 사원아파트 앞까지 요청 오는 제설 작업은 다 했고 여름에는 원청 직원의 피서를 위한 천막과 의자 운반까지 했다. 동해시의 초··고등학교 운동장과 바닷가 모래사장 평탄 작업 등 쌍용양회의 중장비 관련 대외 업무는 우리가 도맡아 했다. 억울한 건, 우리가 알면서도 모든 일을 다 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국가에서 발급한 건설기계 조종면허를 8개씩 가지고 있으며, 실제 그 면허에 해당하는 운전을 할 수 있는 기능직 사원들이다.

정말 역겹고 구역질이 난다. 이 악질 같은 놈들은 조금 더 벌어먹으려고 직원들 임금 줄여 지네 배 불리고, 원청에 잘 보여 어떡하면 안 잘릴까 온통 그 생각뿐인가 보다. 누군가 그랬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를 열어 연구해야 하는데 저것들은 머리를 깨 봐야 알 것 같다고.

우리는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 자본에 맞서기 위해 SNS를 뒤져 우리랑 유사한 회사를 찾아보았다. 바로 옆 동네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결국에는 노동자들이 승리한 사례를 보았다. 동해삼척지역에는 노동운동에 앞장서 그 중심에 서서 활동하는 동지들이 많았다.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지난 110일 민주노총 강원영동지역노동조합 쌍용양회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의 반대편에 섰다. 노조가 결성되기 전 가족들은 너나할 것 없이 다들 걱정했다. 어느 날 집사람이 내가 몇 날 며칠 고민하느라 잠 못 들고 밤잠을 설치는 모습을 보고는 입을 열었다.

여보, 당신이 그렇게 억울하고 직원들의 한마음 한뜻이면 한 번 해 봐. 후회하지 말고.”

이 말에 나는 눈물이 핑 돌며 마음 한구석이 아려 왔다. 다들 이런 마음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이런 일들이 생기면 가족의 적극적인 지지나 위로가 그렇게 따뜻하고 위대할 순 없을 것 같다.

▲ 쌍용양회 비정규직 노동자 태윤호 씨.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지금 우리는 쌍용양회의 불법파견 및 위장도급, 비정규직 철폐를 위해 투쟁 중이다. 노동운동의 선전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고 투쟁은 싸움이 아니라 노동자의 몸부림이며 파업은 노동자가 노동의 일손을 놓는 마지막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고 싶다. 이 글을 보는 전국의 동지들에게 우리의 진실이 전해지길 바란다. 그리고 다 한마음 한뜻으로 후회 없이 투쟁하길 바란다.

▲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거리 행진을 하는 쌍용양회지부와 강원지역 노동자들. 사진제공_쌍용양회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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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9월호

일터 이야기

 

바다의 삼성뉴텍이 그러면 쓰나

정인열/ <작은책> 기자

 

 

해남지역 해안가부터 노화도, 청산도, 보길도, 신안의 이름 없는 섬까지. 이곳 어촌 지역에는 전복 양식장 같은 수산업에 종사하는 어민들이 많다. 어민들이 소유한 작은 어선에는 집게가 달린 크레인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어민들은 이 크레인으로 전복 먹이인 다시마를 집어 양식장으로 투하하거나 무거운 가두리를 이동한다.

해남, 완도에 떠 있는 배에 달린 크레인들, 그거 다 뉴텍 거라 보시면 돼요.”

▲ 전복관리기 모형도. 사진제공_뉴텍분회

해남군청 앞 뉴텍 분회(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전남중소사업장연대노조 뉴텍분회) 천막농성장에서 김영식 씨가 말했다. 뉴텍 노동자들은 70일이 넘게 파업 중이다. 김 씨는 민주노총 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으로 뉴텍 투쟁에 결합하고 있다.

▲ 해남 옥천농공단에 있는 (주)뉴텍 전경. 작은책(정인열)

뉴텍은 1992년 광주정밀로 시작, 2004년 기업을 확장해 뉴텍을 설립하고 2005년 옥천농공단지에 입주했다. 수산물 양식장에 필요한 다목적 인양기와 전복 관리기를 개발해 관련 특허 기술들을 보유했고, 기술·경영혁신형 중소기업 인증을 받아 정부로부터 지원도 받는 유망 중소기업이다.

“‘바다의 삼성이라고 어떤 분들은 말해요.”

111년 만에 유례 없던 폭염이 찾아왔던 올여름, 노동자 7명은 뜨겁게 달구어진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파업투쟁을 했다. 조합원은 12명이지만, 이중 병역특례 복무자 5명은 회사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위험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대표이사를 포함한 전체 직원 38명 중 실제 현장노동자는 23~24. 이 중 병역특례자와 외국인노동자를 제외하면 대부분 대표이사의 가족이거나 친인척이라 파업에서 빠졌다. 파업 노동자들은 금속 자재를 가공, 조립, 용접하고 도색해 크레인을 완제품으로 만든 후 양식장 어선에 설치하고 A/S를 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왜 이 뜨거운 여름에 파업을 선택했을까. 노조는 노동강도에 비해 낮은 임금, 불합리한 임금체계, 일방적인 상여금 삭감을 이유로 들었다.

12년 차 조립 업무를 하는 김광진 씨(44)가 받는 월급은 식대를 포함해 213만 원. 여기에 매일 1시간씩 발생하는 연장근로수당을 포함하면 244만 원인데, 각종 세금을 떼고 나면 실수령액은 약 204만 원뿐이다. A/S 업무를 하는 입사 8년 차 김승규 씨(38)가 받는 월급도 실수령액 179만 원으로 적기는 마찬가지다. 노동자들은 아침 8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을 일하는데, 이들은 임금체계도 불합리하다고 주장한다. 입사 2년 차인 윤정균 씨(47)의 임금은 8년 차 김승규 씨와 10만 원도 차이 나지 않는다. 윤 씨는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책정한 임금인데, 괜히 연차 높은 동료들에게 미안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들은 조립식 건물에서 에어컨도 없이 폭염과 싸우며 일해 왔다. 절단, 용접 등 위험에 노출된 환경에서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한다. 김광진 씨가 설명한다.

쇠가 녹잖아요. 그게 1600도예요. 앉아서 용접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 회사는 안전 장비가 없어요. 그냥 앞치마예요. 용접, 그라인더(조립) 해 보면 사람이 인이 배기잖아요. 그라인더도 안 하던 사람이 하면 그 다음 날 손이 덜덜덜 떨려요. 육체적 노동이 사무직의 10배는 더 될걸요? 용접도 마찬가지고, 선반(금속 가공)은 엄청 정밀하게 쇠를 깎는데 100분의 1콤마까지 맞춰야 하는 작업을 해요. 집중력과 정밀함을 요하는 기술이 필요한 거죠.”

A/S 업무를 하는 김승규 씨는 아침 회의 후 830분에 고객이 있는 섬으로 출발한다. 그는 배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시속 100킬로미터로 운전한다. 1건이라도 더 하기 위해서다.

노화도에서만 하루 4, 5건이에요. 일주일에 4번은 점심밥을 못 먹어요. 1건이라도 더 하는 게 점심밥 먹는 것보다 나아요. 한여름에 기관방(엔진룸) 들어가서 허리도 못 펴고 작업을 하는데 쇳덩어리에 몸이 닿으면 살이 익는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거예요.”

하지만 노동자들은 회사가 자신들의 노고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고 느꼈다. 김승규 씨가 전무이사를 찾아가 업무량에 비해 임금이 너무 적다고 호소했을 때 돌아온 답변은 황당했다.

“‘야근도 안 하면서 돈이 적다고 하면 쓰나?’면서 야근을 하라는 식이었어요. 땀 흘려 일하고 회사 들어왔는데 그 상태에서 야근을 어떻게 해요? 절대 못해요.”

사실상 임금이 동결되어 온 상황에서 2017년 추석부터 상여금이 줄었다. 노동자들은 사측으로부터 사전 고지나 설명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동안 상여금 200퍼센트를 설과 추석, 여름휴가 세 번에 나누어 받았는데, 추석에 70퍼센트 받던 상여금이 50퍼센트만 지급됐다. 경영상의 이유였다는 걸 안 것은 쟁의가 벌어지자 사측이 내놓은 자료를 접한 뒤였다. 뉴텍은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매출 213798만 원에서 709983만 원으로, 영업이익은 5262만 원에서 67281만 원으로 4년 연속 성장했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매출과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201712, 노동자들은 일방적 상여금 삭감과 임금 문제에 대해 회사에 어떤 방식으로 요청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전에도 직원 대표로 일부 노동자들이 수차례 회사에 임금인상을 요구했지만 회사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 불만이 많이 쌓인 터였다.

“‘그냥 노조로 갑시다했어요.”

그리고 지난 124, 노조가 설립됐다. 노조는 임금단체협상 및 노조 인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설 상여금을 20퍼센트만 지급했다. 실무 교섭에서 노조는 상여금 400퍼센트 지급을 제시했으나 의견 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회사의 입장을 받아들여 임금인상도 보류하고 상여금도 4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기존 수준으로 양보했다. , 일방적 상여금 삭감을 막기 위해 상여금 200퍼센트 지급을 문서에 명시하도록 요구했다. 그러자 회사는 지금까지 준 것은 상여금이 아니라 성과급이었다고 주장하며 문서화를 거부했다. 성과급은 회사 임의대로 주는 비정기적인 돈이다. 뉴텍이 취업 사이트에 올린 입사 공고를 보면 성과급이 아닌 상여금 200퍼센트로 명시되어 있다.

▲ 온라인 구인구직 공고 사이트에 올라온 뉴텍 구인 공고.


봉투에 현금으로 받았어요. 우리는 입사할 때부터 10년을 200퍼센트로 받았는데. 노동청에 임금 체불 진정을 넣었지만 근거 자료가 없어서 하루아침에 성과급이라고 판단이 났죠.”

꿈쩍도 않는 사측의 태도에 교섭은 결렬됐고 결국 지난 64일 노조는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공장이 있는 옥천농공단지에서 농성하다 사태가 길어지자 지자체가 나서서 중재할 것을 요구하며 지난 86일부터는 해남군청 앞에도 천막농성장을 설치했다.

▲ 해남군청 앞 뉴텍분회 천막 농성장. 작은책(정인열)

회사가 해남군수와의 면담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반면, 해남 지역사회는 뉴텍 노동자들을 위해 행동에 나서고 있다. 뉴텍 노동자들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가 나서 대책위를 꾸렸고 뉴텍 제품을 이용하는 고객들도 응원에 나섰다. 해남 전복협회장을 비롯해 한국수산업경영인 화산지회, 송호리·갈두리·화산면·현산면·송지면 어촌계의 지지 방문이 이어졌고, 이들은 직접 회사로 가서 항의도 했다.

고객분들이 너희들 대변해서 말할란다하시면서 회사로 가서 기계가 좋아서 쓴 게 아니라 직원들이 좋아서, 직원들이 잘해서 이 기계를 쓴 거다라고 해 주셨어요.”

응원해 주는 시민들을 보면서 뉴텍 노동자들은 크게 힘을 얻는다. 이번 파업으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더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는 것도 알았다. 상여금마저 성과급이라고 주장하고 삭감한 뉴텍을 상대로 이들이 할 수 있는 건 파업뿐이었다

▲ 추성화,김영식 민주노총전남지역본부 조직국장,김승규,윤정균 씨(왼쪽부터). 작은책(정인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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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8월호

독립영화 이야기_ 이마리오 감독의 <더블랙>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류미례/ 독립영화 감독

 

영화 <더블랙> 스틸컷. 


<더블랙>이 드디어 개봉합니다. 제가 처음 이 영화를 본 건 3월 말이었습니다. 영화에 반한 저는 <작은책> 독자들에게 소개하려고 내내 개봉일을 기다려 왔습니다. 영화 보던 날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자 이마리오 감독이 영화가 곧 개봉할 거라고 했거든요. 그동안 저는 매달 마감 무렵이면 감독에게 개봉일을 묻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마냥 흐르고 기약없이 미뤄지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긴 걱정을 하던 중에 8월말 개봉 소식을 들었습니다. 드디어 소개글을 쓰게 되어서 기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사실 즐겁게 볼 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영화는 흑백 재연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선한 눈매의 한 남자가 서울역 고가도로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그리고 손에서 켜지는 라이터. 라이터에 불이 켜지는 순간 빨간 불꽃이 켜지며 화면은 컬러로 바뀝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뉴스는 그 남자가 특검 수사를 요구하며 분신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고 이남종 열사의 이야기입니다. 서울 활동을 접고 강릉으로 이주하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이마리오 감독의 마음에 이 사건은 깊은 상흔을 남깁니다. 언론에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 아무런 얘기를 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이의 기억에서 그의 죽음은 지워져 갔지만 이마리오 감독은 끝내 잊지 않았습니다. 그가 왜 죽음을 선택했는지를 알기 위해 카메라를 들었고 우리는 이제 4년 만에 그의 영화를 만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마리오 감독에게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동질감을 느낍니다. 나이도 같고 데뷔년도도 같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고 있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저야 생활고에 치여 아르바이트와 교육에 전념하느라 영화를 못 만들고 있지만 이마리오감독은 강릉에서 미디어 활동가로, 후배 감독들의 프로듀서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제가 그의 행보에서 감동했던 순간이 있습니다. 상업적 논리에서 벗어나 있는 독립영화는 공적 지원에 기댈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해의 독립영화 제작 지원 면접 심사장에서 이마리오 감독을 만났습니다. 당시 이 영화는 메멘토 모리라는 가제를 달고 제작 중이었는데 뜻밖에도 그날 이마리오 감독은 자기 영화가 아닌 후배들 영화의 프로듀서로 면접을 보러 왔더군요. 이제 막 스무 살이 되어 가는, 갓 영화를 시작하는, 어쩌면 제자였다가 이제는 동료가 된 후배 감독들을 위해 이마리오 감독은 성심성의껏 면접을 보고 강릉으로 돌아갔습니다. 마흔에서 쉰이 되어 가는 나이. 원치 않아도 중견이라 분류되고 그래서 작품을 만들 때마다 어깨가 무거워지는 시기에 후배들의 출발을 위해 자신에게 있는 가능성을 과감히 버리는 그 모습에서 크게 감동받았습니다.

그리고 2018, 동갑이자 데뷔 동기인 이마리오 감독의 이 신작을 저는 감격해 가며 만났습니다. 빼어난 영상미와 꽉 짜인 구성이 놀랍기만 합니다. 다섯 개의 챕터, 그러니까 오피스텔 607’, ‘디지털포렌식’, ‘검찰특별수사팀’, ‘더블랙’, ‘이남종이라는 소제목 아래 국정원 댓글사건부터 촛불항쟁까지를 일목요연하게 펼쳐내는 유려한 이야기 솜씨에 또 반하게 됩니다. 챕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화면, 자막 하나하나마다 공들인 흔적들을 보다 보면 그 꼼꼼함에 한숨이 나올 정도입니다. 또한 국정원 직원으로 추정되는 김 아무개 오피스텔 앞의 생생했던 현장 상황과 디지털포렌식이 진행되던 경찰서 내 CCTV 화면, 김 아무개의 휴대전화에 전송되던 국정원 심리전단 동료들의 문자 같은 것들은 이마리오 감독의 지난 4년간의 치열함을 짐작하게 합니다.

영화 <더블랙> 스틸컷.


개인적으로는 진실을 대면한 경찰들이 어떻게 할지를 두고 토론하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대선이 사흘밖에 안 남았기에 댓글사건의 수사 결과가 대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은 경찰들은 자신들의 안위와 방금 찾아낸 진실 사이에서 갈팡질팡합니다. 결국 그렇게 사건은 무마되고 박근혜는 대통령에 당선되지요. 출구조사가 발표되던 순간, 광화문에 모여 있던 관중들은 퀭한 표정으로 침묵합니다. 그 장면은 우리가 지나왔던 시간을 몸서리치며 떠올리게 해줍니다.

제목 더블랙은 블랙요원을 의미합니다. 블랙요원이란 정보기관 소속 요원 중 신분을 밝히거나 내세우지 않고 은밀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스파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스파이들은 세계평화나 적국의 정보 수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더블랙>의 스파이들은 댓글 다는 것이 일입니다. 오피스텔 607호에 거주하던 블랙요원 김 아무개의 행보에서부터 경찰과 검찰 수뇌부의 은폐 노력까지를 치밀하게 담아 내던 영화는 갑자기 재연배우의 입을 통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촛불이 그 이남종이라는 분하고 무슨 상관이죠?”

그리고 이마리오 감독이 고 이남종 님의 유서를 읽습니다.

여러분, 보이지 않으나 체감되는 공포와 결핍을 제가 가져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두려움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일어나십시오.”

다큐멘터리 감독은 영매와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나의 주인공이 아프면 나도 아픕니다. 나의 주인공이 기쁘면 나도 기쁩니다. 그리고 나의 주인공이 죽어서라도 하고 싶었던 말을 나는 나의 입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들려줍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음이 되어 그분의 말을 대신 전해 주는 감독의 목소리는 그래서 특별하고 깊습니다. 최근 기무사 쿠데타에 대한 문건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아슬아슬한 시간을 거쳐 왔는지를 새삼 압니다.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기는 하지만 사실 134일의 촛불항쟁동안 우리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고 이남종 님의 마지막 유언은 약간의 시차를 두긴 했지만 뒤늦게 실현되었습니다. 이 영화를 두려움 없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입니다. 촛불로 부패한 정권을 몰아냈기에 공포정치를 끝낼 수 있었고 비로소 우리들은 이 영화를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더블랙>8월말에 개봉합니다. 기억하는 마음으로 반갑게 맞아 주세요. (문의: 이상욱PD 010-5364-9885) 

※ 이 글이 쓰여진 시점에는 8월말 개봉예정이었으나 이마리오 감독은 8월 28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출연해 개봉 시기를 9월 중순으로 밝혔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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