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8년 11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세 번 해고 투쟁, 헛살지는 않았다
김양순/ 금속노조 경기지부 시그네틱스분회
시그네틱스는 1966년에 설립된 필립스 한국공장이었다. 시그네틱스는 반도체를 조립하는 회사다. 나는 1987년 시그네틱스 염창동 공장에 입사해서 생산3팀에서 테스트 업무를 했다. 생산3팀은 완성된 제품 중 정품과 불량품을 구분하는 작업과 출하하기 위한 포장 작업을 했다.
처음에는 ‘센츄리’라는 기계를 4대 정도 작업했다. 센츄리 기계에서는 크기가 약간 큰 반도체 제품을 작업했다. 12대까지 동시에 작업을 하느라 정신없이 일했던 것 같다. 센츄리에서 일하다 둘째 아들 출산 후에 몸도 회복이 안 된 상태에서 부서장 지시로 로직 작업을 하게 되었다. 제품이 10개씩 묶인 채로 ‘메가진’이라는 쇠에 담겨 오는 것이다. 1로트에 4~5천 개씩 한 제품으로 한 번에 작업을 마쳐야 하는 일이었다. 메가진의 무게는 3-4킬로그램 정도였는데 수시로 이걸 들어서 작업하는 게 힘에 버거웠다. 더 쉬운 작업도 있는데 10년 이상 로직 작업한 사람과 똑같이 생산해야 한다면서 관리자가 매일 생산량을 체크해 힘들게 했다. 열심히 일했는데 비교당하는 게 힘들었고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테스트에서 일한 지 약 12년이 지난 상황. 테스트 기계가 파주 공장으로 이전했다. 이전할 때 함께 간다고 했는데 사람만 버림받았다. 1995년에 필립스 자본이 철수하며 국내 자본인 거평그룹에 팔았고, 거평은 부도가 났다. 워크아웃 사업장이 되었고, 산업은행이 관리하다 2000년에 영풍그룹에서 인수를 하게 됐다. 회사 주인이 바뀌는 걸 보며 사원들은 고용에 대한 불안감이 높은 상태였다. 이미 노동조합이 있었고, 단체협약도 있었다. 1999년도 단체협약을 갱신하면서는 임금인상이 조금 되더라도 공장 이전 문제와 고용안정 문제는 조합원들의 주된 관심사였고, 반드시 관철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평이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파주 탄현면에 16000평 규모의 공장을 지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도가 났다. 염창동 공장을 담보로 할 때 노조에서도 동의를 해 줬다. 왜냐면 파주 공장으로 갈 때 회사가 사람과 기계 모두 합의하에 데려간다고 했다고 노동조합에서 보고를 했다. 부도 이후 사원들은 회사를 살리기 위해 임금동결, 상여금 300만 원 반납, 호봉 승급 보류, 각종 복지 축소 등 함께 살기 위한 노력들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퇴직금 누진제 폐지이다. 1.3N(퇴직금을 근속년수×1.3만큼 지급)이던 누진제를 폐지한 것이다. 회사를 살려 고용을 보장받고자 머리를 짜내 궁리를 모색했건만, 영풍으로 인수된 이후 영풍은 안산 반월공단으로 공장 이전 일방 통보를 해 왔다. 대표이사에게 강력하게 항의하고 공장 이전 문제를 노조와 함께 상의해서 잘 마무리하자고 했으나 회사는 더욱 몰아붙였다. 회사는 안산 공장 이전 이주 불가자를 모집하며 위로금 12개월분을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표를 냈다. 약 200여 명. 2001년 1월부터 6월까지의 사직자다. 많은 사람들이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고 답했다. 회사는 2001년 7월 23일부로 안산 공장으로 일방적 인사 발령을 냈고, 노조는 전면파업을 선언했다. 파업 장소는 염창동 공장이었다. 염창동 공장은 1600평 규모이다. 대형 천막이 10여 개가 쳐졌다. 파업 대오를 2개조로 나눠 1박 2일 투쟁을 진행했다. 공장 안 기계 반출을 막기 위한 투쟁이 한 달을 넘어갈 때쯤, 8월 9일 사측은 용역 200여 명을 고용해 우리를 폭력적으로 끌어내고 기계를 빼 갔다. 그리고 해고 통보를 날려 왔다. 파업대오 160여 명 중 130명이 해고되었다. 그 전에 전 조합원 임금 가압류, 사직자 퇴직금 가압류, 전원 해고, 교섭위원 5명 전원 구속, 최초 여성 용역을 고용해 시그네틱스는 노조 탄압의 새로운 방법들을 내세우며 강하게 공격해 왔다. 그래도 부당 해고 철회시키고 파주 공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투쟁이 이어졌다. 2003년에 조합원들을 생계 투쟁에 내보내며 대법원 판결 때까지 간부들이 투쟁 대오를 유지하며 투쟁을 했다. 2007년 대법원 판결이 났고, 간부들은 전원 해고가 정당하다는 판결을 받았다. 떠나간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전히 남아 투쟁하는 간부들과 조합원이 있었다.
투쟁 이후 나는 변했다. 결혼해서도 직장을 다니고 싶었다. 시부모님과 큰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 될 때까지 함께 살다가, 지금은 두 분이 시골 가서 사신다. 1차 해고 후 염창동 공장에서 농성장 유지하며 천막 지키느라 밥도 해 먹고 공장에서 자고 들어가면, 시아버지는 바람을 핀다고 하시곤 했었다. 고집 센 시아버지라 본인이 모든 것을 다 관여하고 지시하고 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콩나물값 150원이 안 맞는다고 시어머니를 쥐 잡듯 잡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었다. 그래서 집에서도 투쟁을 해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공장에서 잠을 자고 집에 들어간 날 일이 터졌다.
농성장이 없어지는 걸 막고 아침에 출근한 조합원들과 교대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시아버지가 바람 피웠다며 야단을 하시기에 그날은 참지 않기로 했다. 앞으로 투쟁을 계속해야 했고 또 단 하루를 살아도 맘 편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바람피운 걸 보셨냐고, 왜 막말을 하시냐고, 노동조합일 동참하고 온 거라는 말을 왜 믿어 주시지 않느냐고, 억울하다고 했다. 결국은 내가 이겨서, 시아버지는 앞으로 영진이(큰아들) 엄마가 하는 일은 다 맞으니 믿고 사신다고 했다. 그래서 현재는 내가 하자는 대로 시부모님이 인정을 해서 의지를 많이 하고 사신다.
나는 천주교 신자다. 2001년 해고된 이후 6개월 동안 교리 공부를 해서 로사 (장미꽃)라는 세례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앙이 있으면 세 번 해고를 당해도 이겨 낼 수 있도록 힘을 많이 얻을 수 있다. 최근에 있었던 일 하나를 소개하자면, 큰아이 영진이가 엄마가 세 번 해고되어도 계속 시그네틱스 다니는 것을 보고 자기도 힘들어도 끝까지 직장을 다니겠다고 한다. 2001년 복직 투쟁할 때 초등학교 3학년이었고, 지금은 스물일곱 살로 은행에 취직해서 일하고 있다. 초기에는 일이 힘들어 엄청 풀 죽어 있더니 이제는 엄마가 투쟁하고 열심히 사는 모습 보면서 첫 직장에서 힘들다고 관두지 않고 퇴직할 때까지 다니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내가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새삼 시그네틱스 투쟁하면서 산 경험이 현재로 이어지는 인생의 여정이라는 것을 느낀다.
시그네틱스 1차 투쟁 때 해고되어 복직 못한 29명의 징계 해고자가 있다. 18명의 간부들과 해고 이후 산업은행 규탄 투쟁에서 로비에 들어갔다고 해고된 11명의 조합원이다. 이들은 2007년 대법원에서 정당 해고라고 판결이 났다.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결을 받았지만, 2011년 안산 공장 영업 양도를 이유로 두 번째 전원 정리해고 됐다. 복직 투쟁과 소송에서 이기고 현장에 출근할 때 회사는 서울이 집인 우리에게 통근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왕복 4~5시간 걸려 출근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우린 노조 봉고차로 6시 출근과 2시 출근자를 실어 날랐다. 그때 조합원 출퇴근시키려고 1종 면허를 땄다. 다섯 명이 1종 면허로 갱신하거나 새로 면허를 따서 조합 봉고차로 출퇴근 투쟁을 적극적으로 했었다.
이 밖에도 우리를 쫓아내기 위한 회사의 괴롭힘은 모두 다 쓰기가 힘겹다. 그럼에도 사표를 내지 않고 버텼다. 밖에는 해고자가 복직을 바라며 투쟁하고 있었고, 복직한 우리는 사표 내고 싶을 때 사표 내고 그렇지 않으면 정년까지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우리가 견디니 회사가 안산 공장을 매각하고 광명시 하안동 아파트형 공장을 얻어 출근을 시켰다. 출근하자마자 회사가 어렵다며 1년 가까이 휴업을 했다. 우린 또 불안했다. 세 번 해고되는 것 아닌가.
2016년 9월 우려했던 대로 세 번째 정리해고를 통보받았다. 광명사업부 폐업으로 인한 전원 정리해고 통보 한 달 후 회사는 위로금을 대폭 인상했다. 조합원 13명이 사표를 냈다. 9명이 남아 투쟁하기로 했다. 사표 낸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들과 함께했기에 두 번 해고 투쟁을 이길 수 있었으니 세 번째 복직 투쟁을 함께 안 한다고 누굴 원망할 수 있으랴. 밉고 원망스러운 건 정년까지 일하고 싶다고 말했던 동료들에게 기어코 위로금을 쥐어 주고 희망을 뺏어 간 시그네틱스와 영풍 자본이다. 본사인 파주 시그네틱스 공장은 1년 내내 우리가 현장에서 일하고 있든지, 해고되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든지 사람을 뽑고 있다. 파주 시그네틱스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얼마 전 9월 14일 대법원에서 부당 해고 판정을 받은 9명의 노동자들은 시그네틱스 정규직이다. 회사는 복직명령서만 보내고 휴업이라고 한다.
▲ 시그네틱스에서만 3번 해고 된 노동자들. 광화문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앞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김양순 씨. 사진제공_시그네틱스분회
우린 여전히 광화문 청사 옆 천막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1차 해고자이며 그 당시에는 사무장이었고, 지금은 분회장인 윤민례 동지와 함께 시작했으니 끝까지 마무리 잘하고 사람들을 남기는 역사를 쓰고 싶다. 1차 해고자와 복직자의 끝을 연결하고 있는 분회장의 책임감은 모든 간부들이 지녀야 할 덕목이라 생각한다.
시그네틱스 투쟁은 현재 진행형인 살아 있는 역사이다. 신규 노조가 볼 때도 끝까지 질기게 투쟁하는 모습은 동지들에게 힘이 된다고 생각한다. 힘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올바른 투쟁이고 우리 자식들을 정리 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에서 살게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