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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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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9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교장과 수다 떨 수 있는 학교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교장과 수다를 떨 수 있는 학교, 이런 학교에 근무하는 게 내 꿈이었다. 이제 내가 교장 역할을 하고 있지만 이런 학교를 만드는 게 결코 쉽지 않더라고. 마음 같지 않아. 수다는 아무하고나 떨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수다를 떨려면 많은 게 갖춰져야 하더라고. 수다가 가능한 문화가 만들어져야 가능하더라니까. 이게 안 되면 수다가 아니라 간담회, 좌담회 또는 잘해야 토론회 수준이나 될까. 설교나 다툼이 될 수도 있고. 어떻게 해야 교직원과 교장이 수다 떨 수 있는 학교를 만들까 생각해 봤어. 실제로 그렇게 하려 노력하고 있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수다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며 찾아낸 핵심 몇 가지를 정리해 보려고.

다른 것보다 먼저 직급을 내려놓아야겠어. 교장이 아무리 편안하게 이야기하자고 말해 봐야 헛말이더라고. 시어머니가 아무리 친정 엄마처럼 생각하며 지내자고 말해 봐야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 그냥 교장이라는 건 인정하고, 우리 문화 속에서 교장이라는 낱말이 품고 있는 의미를 받아들이되 그 선에서 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버리고 떨쳐 내는 거야. 쓸데없는 권위,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목에 힘주는 권위만은 내려놓는 거지. 내가 교장으로 발령 날 때부터 내 친구가 농담처럼 하는 진담이 있어. 어디 가면 수저 먼저 놓고, 물 따르고, 차는 자기 손으로 타 먹고 그러라고. 교장 대접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이지. 특권을 누리려고도 하지 말고.

그러면서도 교장으로서 해야 할 역할을 해 나가는 데 지장이 없을 정도의 선을 지켜야 해. 권위를 얼마나 내려놓을 건지는 그 사회, 조직의 소통 문화, 의사 결정 구조 등을 살펴서 정해야 한다고 봐. 권위를 내려놓고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마저도 그 조직, 그 사회의 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잊지 않고는 있어. 이럴 때 떠오르는 말이 있어.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 내가 지금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조직과 구성원의 특성 그리고 나의 특성을 함께 살피면서 수위를 조절해야 한다는 거지. 자칫하면 아이들 포함 1250명이 사는, 학부모 포함하면 3~4천 명의 조직이 무너지는 수가 있으니까 상황에 맞게 수다를 떨며 살아야지. 하지만 조금씩 수준을 높여서 수다의 편안함을 늘이는 게 내 목표야.

두 번째로 나이를 떠나야 수다가 가능하다고 믿어. 내 나이는 지금 학교에서 어느 정도냐고? 랭킹 1! 36개월 뒤 정년퇴직이지. 나이가 지혜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마음을 주고받는데 큰 장애가 돼. '젊은 놈이 말하는 뽄새 봐.' 하거나 '너 나이 몇이야?' 하면서 민증 까자고 덤비는 사람도 있어. 나이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보장하거나 지혜의 총량을 결정하거나 인간성을 보증하지는 못하는데도 그래. 오죽하면 우리말에 존댓말이 있어서 민주주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도 있을까.

나이 먹으면 먹을수록 대접받겠다는 마음을 털어 내야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편안하게 풀어 갈 수 있고 수다가 가능하단 말이지. 외국에 나가 지내다 온 분들 가운데 이야기를 들어 보면 직책이 높고 나이가 많은 사람과 편안하게 이야기 나눈다고 하더라고. 마치 비슷한 나이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느낌이라나. 나이를 털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면 나이로 인한 외로움과 소외감에서 벗어나고 젊은이의 총명함, 추진력, 모험심과 나이 든 이의 지혜로움, 멀리 넓게 보는 눈, 많은 사람을 겪은 경험이 버무려진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너무 크게 볼 것 없고 지금 당장 서로가 조금 더 행복하지 않을까. 나이를 털어 낼 용기가 젊은이와 나이 든 이 모두에게 필요해. 나이가 주는 혜택을 미련 없이 털어 낸 채 말하려 노력하고 있기는 한데 마음같이 쉽지 않아.

마지막으로 성의 구별을 떠나야 한다고 믿어. 난 초등 교사라 평생을 여성이 더 많은 환경에서 살아왔어. 대학교 가서는 우리 반 40명 가운데 남자가 셋이었고 발령받은 뒤에는 교사 60명 가운데 남자 교사는 나 혼자일 때도 있었지. 그렇게 살아가는 게 내 삶이야. 그런데 남녀라고 선을 긋고 말을 섞지 못한다면 남자와 여자로서 갖고 있는 장단점을 보완하고 보충해서 더 나은 교육, 더 나은 삶을 만들어 가는 데 어려움이 생겨. 그냥 남녀를 떠나 사람으로, 교사로, 한계와 부족함을 갖고 있는 존재로, 가슴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고 이 세상에 유일한 특성을 갖고 있는 존재로 볼 때 존중하면서 손을 내밀어 잡아 주고 이야기하고 일을 풀어 갈 수 있다고 믿어. 어색하지만 남녀의 선을 지키면서 사람으로 만나려 노력하는 중이야.

직급, 나이, 남녀를 내려놓으면 뭐가 남을까? 사람, 인간. 그냥 사람으로 보는 거지. 직급, 나이, 남녀라는 낱말에는 어느 정도 편견이 담겨 있어. 물론 법에 정한 권한과 책임이 있는 직급의 특성을 인정하면서도 수평적으로 관계를 풀어 갈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말하는 거야. 우리 사회가 만들어 온 담장이지. 직급이라는 담장, 나이라는 담장, 남녀라는 담장. 어떤 담장은 담만 있는 게 아니라 고압선까지 쳐 놓았다는 느낌이 들어 섬뜩할 때도 있어.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이 있지. 부부, 부모 자식, 형제, 친구 등 모든 사이에는 선이 있어.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존재로서 갖고 있는 존엄성과 간직해야 할 자기만의 영역이 있어서 그것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누구도, 어떤 권력도 넘어가면 안 되지만, 그것은 직급, 나이, 남녀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이런 마음으로 만나는 걸 나는 '인간 대 인간'으로의 만남이라고 봐. 개인의 존엄성을 지키는 가운데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수다야. 나는 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선에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그런 학교 문화 속에서 살고 싶어. 아이들, 교사, 직원, 학부모, 지역 사회 구성원들과 수다를 떨되 교장으로서,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더 나은 교육 환경을 만들어 내는 그런 교장. 수다를 떤다는 것은 사람을 존중한다는 것이고 존엄성을 지켜 주는 것이며 역할에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해. 조금 더 민주화된 사회,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교육에 충실한 학교에 한 걸음 다가가는 길은 수다에서 시작된다고 믿어.

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