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이후 오만과 독선의 극치를 보여 주었던 부시 대통령이 최근 방한했다. 부시의 모습이 오히려 더욱 겸손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이명박 정부는 독재 시대를 방불케 한다. 독재 시대는 독재자만을 낳지는 않는다. 독재에 부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함께 잉태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가 만 35년을 지속했는데, 이것은 일제의 힘이 조선 민중을 압도할 만큼 거대한 것이기도 했지만 그 같은 권력을 지탱하는 충실한 부역자 즉 친일파들의 역할 또한 무시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방송국을 장악하려고 발버둥치는 것처럼 KBS 사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검찰, 경찰, 감사원, 방송통신위원회 등의 정부 기구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니 군대 빼곤 모든 방법을 쓰고 있는 것 같다. 지금 행정부와 국회를 장악한 거대 권력에 맞서 그나마 정의와 인권 그리고 민주주의를 지켜 줄 마지막 보루를 교과서에서는 사법부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활동에 대해 명예 훼손을 저지른 수구 단체 회원들에 대한 민사 2심 재판부의 판결문을 보면, 과연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런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2005년 8월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1차 명단 발표 후 사전 편찬의 의의를 왜곡하고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과 윤경로 편찬위원장 등 임원들에 대해 악의적인 비방을 일삼아 온 수구 단체 회원들에 대해 연구소 등이 제기한 민사소송 2심 선고가 지난 7월 16일 있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재판관 조용구, 김성수, 은택)는 피고들에게 연대하여 모두 2천만 원을 연구소와 임원들에게 지급하도록 판결하였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지난 2006년 11월 5일 1심에서 피고들에게 6천5백만 원의 연대 배상 책임을 물은 것에 비해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이며 오히려 피고들의 주장을 상당 부분 받아들임으로써 앞으로 수구 단체들의 악의적이고 모욕적인 인신 공격의 빌미마저 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문제가 되는 판결문 일부를 살펴보면서 반론을 해 보자.
1. 박정희 전 대통령 등 원고 법인 (민족문제연구소)이 친일 인사로 지명한 사람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로서 이들을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하게 되면 결국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부인되고, 이는 북한과 한국 내 친북 세력에 이로운 일로서 우리나라와 같이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는 분단 현실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취지의 정치적 의견 내지 논평을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건국’이라는 표현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를 ‘정부 수립’으로 이해하고 판결문을 읽더라도 정부 수립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의 친일 행적을 발표하는 것이 왜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현행 우리 헌법 전문에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라고 밝히고 있다. 즉 항일독립운동 역사를 대한민국의 정통성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친일파 청산이 왜 북한에 이로운 일인가. 오히려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잡는 일인데 대한민국에 이로운 일이 아닌가. 판사의 논리는 1948~9년 반민특위 활동 당시 반민특위 활동이 북한에 유리하다는 이승만과 친일파들의 논리와 너무도 닮아 있어 전율마저 느껴진다.
2. 원고 법인(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에 대하여 북한이 이를 적극 지지ㆍ옹호하면서 ‘친미사대 매국세력 척결운동’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 정치적으로 특정 이념이나 사관에 편향된 것이라는 비판이 있었으며, 그동안 원고들이 진보적 입장에서 정치적 주장과 활동을 해 온 여러 사정 등에 비추어 보면,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원칙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체제를 유지ㆍ수호하려는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원고 법인의 친일 인사 명단 발표가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원칙에 기초한 우리나라의 체제를 유지ㆍ수호하려는 국민들이 친일 인사 명단 발표가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은 판결문이라기보다는 마치 수준 낮은 정치인들의 논평쯤으로 보인다. 게다가 북한이 친일 인사 명단 발표에 대해 지지ㆍ옹호했으니 문제가 된다는 주장 역시 논리성을 상실한 한국판 매카시즘의 전형을 보는 듯하다. 북한이 지지하면 뭐든지 죄가 된단 말인가. 그렇다면 북한이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서 제외되지 않도록 한국 태권도계 인사들의 활동을 지지하고,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도 힘을 보탰고, 최근에는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을 한목소리로 규탄했던 것을 상기해 본다면 한국 태권도계 인사들과 동계올림픽 유치단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독도 관련 단체들도 ‘우리나라의 체제나 정통성을 부정하는 의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지 의심’을 받아야 할까.
3. 원고 법인(민족문제연구소)이 우리나라의 건국과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사를 한때 친일 행적을 보인 적이 있다거나 특정 분야에서 일정 직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로 친일 여부에 관한 학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시킴으로써 정치적 논평을 자초
학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친일 인사 명단에 포함시킴으로써 정치적 논평을 자초했다는 말 또한 어불성설이다. 어느 학문 세계건 서로 다른 입장이 있을 수 있다. 친일인명사전은 정치 행위가 아닌 학술 행위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술 행위를 진행하는 학술 단체를 찾아와 ‘친북 좌파’나 ‘김정일 하수인’이라는 표현을 동원해 공격하는 준정치 단체들의 준동을 오히려 법원이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는 차원에서 막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2심 재판부 스스로가 친일인명사전 편찬 사업을 역사적ㆍ학문적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는 공익적 활동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지극히 정치적인 사안으로 이해하고 내린 결론으로 대단히 실망스런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참여정부의 눈치를 보면서 한때 과거사 청산을 외치던 법조계가 이제는 현 정권의 입맛에 맞춰 언제 그랬냐는 듯 퇴행적인 역사 인식이 반영된 판결을 통해 다시 한번 스스로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과거사 청산이 왜 중요한지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는 사례다.
‘정치인은 정책으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말하고,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고 했기에 후세의 기록을 위해 다시 한번 해당 재판부 판사들의 이름을 적어 본다. 재판관 조용구, 김성수, 은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