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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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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3월호

한일수의 유감천만


팔만 쓱 내밀면 허준도 모릅니다

한일수/ 두리 한의원 원장, 내편 들어줘 고마워요저자

 

1. 연재를 시작하며


그러니까 세상사, 알 수 없는 일이다. 작년 11월에 임상 에세이라는 미명으로 포장한 잡문집을 한 권 냈는데, 그 책은 세상에 나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속속 출판사 창고로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원고가 매우 부족했구나! 자성 대신, 요즘 책 읽는 이가 참으로 드물구나, 따위 시건방진 탄식을 뱉고 있었다. 낙담은 스스로 증폭한다. 책 선전으로 도배하던 페이스북도 들여다보기 민망하여 문 닫아걸고 말았다. 그렇게 글 쓰는 일로 끈 떨어지고 날개 죽지 부러져 낙담 중인 한모(韓某)에게 작은책 편집장께서 무려 연재 칼럼을 부탁하실 줄이야.


고등학교 시절 문학 동아리 활동으로 시작한 한모의 글쓰기는 그럭저럭 40년을 헤아린다. 비루한 글이지만 스스로 글쟁이란 자각은 하고 있고, 이런저런 지면에 다양한 주제로 글을 쓰기도 했다. 상업지도 있었고, 문예지도 있었으며, 종이 신문도 인터넷 언론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매체에 글을 기고할 때보다 <작은책>에 기고하는 글쓰기가 어렵고 힘들다. 기왕에 이미 높은 수준의 글쓰기를 보여주신 선배 필진에게 필적할 만한 글이 나올까 걱정도 크고, 무엇보다 <작은책> 독자들의 선하고 맑은 얼굴이 두렵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께서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숱한 세월이 무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갑자기 명치께가 뻐근하고 목덜미가 당겨온다. 대체 무슨 인연으로 이런 글빚을 지고야 말았는지.


대책이 서지 않을 땐 이실직고가 제일이다. 이미 앞선 두 단락으로 눈치를 채셨겠지만, 한모 글에는 무슨 심오한 의학 이론도 없고, 졸깃한 글맛도 없고, 서권기 문자향 따위 얼씬도 하지 않는다. 그저 지지리 궁상 같은 유감(遺憾)과 살면서 편편이 쏟아지는 유감(有感)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앞으로 이 꼭지는 지방에 사는 중늙은이 한의사가 진료실에서 겪고 느낀 다양한 불평불만과 신변잡기로 채워질 예정이다. 어지신 독자께서 너그럽게 읽어주시길 빌고 또 빈다.


 

2.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2017년 현재 한의사 면허 소지자가 25천 명을 넘었음에도, 아직도 한의사라고 자기소개 하면 살짝 묘한 분위기가 있다. 호기심과 무례함이 넘치는 분들은 면전에서 팔뚝을 걷어붙이고, 진맥해서 내가 어디가 아픈지 맞춰보라는 분도 계시다. 어디가 아픈지 진맥만으로 맞추는 분이 어딘가 계시긴 할 게다. 하지만 우선 내겐 그런 실력이 없고, 맥진은 한의학의 진단법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당장 환자에게 어디가 아픈지 묻고, 환자가 아프다는 곳을 직접 보고, 어떤 소리가 나는지 듣고, 어떤 동작이 안 되는지 시켜 보고, 그 다음에 진맥을 하면서 오늘 점심은 무얼 먹을지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 그건 진맥 실력이 형편없는 한모 이야기고, 다른 한의사들은 진맥하면서 그런 생각을 하진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진맥에 대해 말하자면, 양쪽 요골동맥의 맥동으로 대체 어떻게 환자 상태를 진단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큰비가 내린 뒤 강가에 나가보니 시뻘건 황토물이 콸콸 흐른다 치자. 그러면 , 옹백이골에 무슨 문제가 생긴 모양이군.”이라고 추론할 수 있다. 돼지가 여러 마리 떠내려온다면 돼지 움막이 여러 채 있는 싸리골에 큰일이 난 거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황토가 옹백이골에만 있는 건 아니겠고, 돼지 움막 한두 채 없는 마을이 어디 있겠느냐만, 정황상 아무래도 더 의심이 가는 고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환자가 말하는 증상과 진맥으로 짚어낸 장부의 이상이 들어맞으면(이것을 맥중합참 脈證合參이라고 한다. 맥과 증상이 서로 들어맞으면 순증이고 치료도 잘 되지만, 맥과 증상이 서로 어긋나기도 한다. 그런 경우는 역증이라 해서 난치인 경우가 많다. 임상에서는 맥을 버리고 증상을 따라야 하거나 그 반대 경우도 많이 나타난다.) 병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정하기가 쉬워진다. 진맥은 한의학의 소중한 진단법 중 하나이지만, 그 자체만으로 모든 병을 짚어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도 내 앞에 앉는 초진 환자는 말 한마디 없이 손을 쑥 내민다. 그럼 한모는 열심히 점심 메뉴를 궁리하다가 이렇게 말한다.

스트레스가 많고 피로가 쌓였군요. 회사 업무가 부담을 많이 주고 있나 봅니다. 식사는 어떠세요? 입맛도 별로 없으시군요. 그럴 수밖에 없죠. 블라블라블라.”


진맥 중에 다른 생각을 한다는 말은 농담이지만, 환자 진료는 엄밀해야 한다. 의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환자 상태를 살피고 오해와 편견에서 벗어나 제대로 진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환자의 자발적인 협조가 필요하다. 아니 대체 어디가 아픈지 말씀도 하지 않고, 진맥만으로 그걸 맞히라고 하면, 제가 점쟁이도 아니고, 이게 될 일입니까? 그러니 어디가 아픈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진맥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다른 건 조금 하니까 말입니다.


 

3. 저도 잘 몰라요


말없이 팔만 쓱 내미는 진맥만큼 한의사를 당황하게 하는 게 여럿 있는데, 그중 하나가 체질 감별이다. 체질 의학은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가 많이 아는 사상 체질 의학은 동무 이제마의 독창적인 학문으로 우리나라만 전수하고 있다. 그 외에도 한의사 권도원이 제창한 팔체질 의학도 주목받고 있다. 사상 의학은 한의대에서 가르치고 국가고시에도 출제되며 전문의가 별도로 존재할 정도로 깊이 연구되고 있는 게 사실인데, 애석하지만 체질 감별은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쓱 쳐다보면 알게 되는 게 아니다. 한의사에 따라 골도법(骨度法)으로 감별하기도 하고, 설문지를 분석하기도 하며, 성격이나 고유한 기운을 파악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그런 모든 노력 끝에 체질을 파악하고도 체질별 한약을 써서 증상이 어떤 변화가 나타나는지를 보고서야 체질 판정이 끝나는 경우도 많다. 그러니 처음 진찰하고 말 몇 마디 나눈 것뿐인데, 제 체질은 뭐냐고 물으시면 답하기가 매우 곤란하지 않겠어요?


현대 의학이 기술 과학의 발전에 힘입어 대단한 진단 장비와 정밀한 수술 요법이 도입되어 일반인에겐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에 비교해 한의학은 침이나 뜸, 심지어 처방까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과거에는 의료 인력이 부족해서 마을에 한문 좀 읽는 분이 방약합편같은 처방집을 읽고 처방을 내리기도 했고,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 침도 놓고 뜸을 뜨기도 했다. 실제로 중국에선 적각의(赤脚醫)라 해서 공장이나 농장에서 근무하는 자 중에 골라 3년 동안 의학교육을 받고 현장에서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의학은 기본적으로 고도의 집중 교육이 필요한 분야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생명을 다루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Pixabay

사상 의학은 세상에 나온 지 백여 년에 불과한 신생 의학이다. 100년이란 시간이 결코 짧은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강점과 남북 전쟁, 산업화 과정 등으로 우리가 이 신생 의학을 정밀하게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더 많은 진단법과 처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야 하는 분야이고 한마디로 갈 길이 먼 학문이다. 불우하게도 한모는 사상 체질을 전공하지 않았고, 전공자가 아주 많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한의사면 내 체질도 쉽게 판정해 주겠지라는 믿음은 거두시는 게 좋다. 저도 젊어서는 소양인이라고 믿었는데, 나중에야 태음인인 걸 알았다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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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마지막 근무

박태찬교사


학교가 텅 빈 목요일 저녁 6, 자율학습 감독 교사 몇 명만 남아 있었다.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함께 급식으로 저녁을 먹고 왔다. 우리 학교에서 가장 넓은 1층 교무실에, 형광등도 내 자리 위로 딱 한 칸만 켰다. 히터도 하나, 형광등도 하나, 드넓은 교무실에 나 혼자, 곧 야간 자율학습 감독을 하러 4층 자습실에 올라가야 한다. 이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하는 야간 자율학습 감독이다.

선생님, 오늘 급식 순대 나온대요!”

순대를 좋아하는 한 녀석이 뒤늦게 급식을 먹으러 가면서 같이 가자고 교무실로 들이닥쳤다.

나 먹었는데?”

! 그럼 저 재형이랑 먹을게요.”

핫바도 나오는데 하나 받을 수 있으면 내 거도 들고 와 주라.”

들고 오면서 제가 먹을 거 같은데요!”

급식실로 뛰어가는 녀석의 뜀박질 소리가 복도를 넘어 텅 빈 교무실에도 탕탕 울렸다.


월요일 아침에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나는 아이들을 제대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으나 직접 교장선생님에게 통보를 받은 이후 묵직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자꾸만 명치 한가운데를 욱신욱신하게 만들었다. 내가 교장실에 다녀온 이후 동기 교사 두 명이 더 교장실을 찾았고 우리가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전달받은 내용은 포장지만 다를 뿐 알맹이는 모두 같은 것이었다. 내년에 우리는 이 학교에서 더 일할 수가 없게 되어서 죄송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학교에서 3년간 근무한 기간제교사이다.


2018학년도부터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된다. 개정 교육과정에 따라 신설, 변화되는 과목이 있는데 나는 교과 개편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내가 맡고 있는 기술 교과는 1학년 과목이었는데 내년에는 1학년에 한국사와 통합 과학, 통합 사회가 새로 들어온다. 그럼 자연히 1학년 과목 중 일부 과목이 2학년이나 3학년 과목으로 올라가거나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 1, 2학년들은 모두 나에게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내년에 다시 배울 이유가 없다. 같은 경우로 내년에 미술 교과도 없어진다. 1년간, 기술과 미술이 없는 학교가 되었다. 대신 과학과 사회를 더 많이 가르친다.


어떤 교과를 희생시킬 것인가, 관리자들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고민을 몇 달 동안 하면서 내게 업무를 맡길 때 눈치만 가끔 줄 따름이었다. 나는 연구부와 홍보부의 중심 업무와 기타 잡무들을 알차게 해치워 왔다. 학교의 외부 강의가 있으면 전부 내가 했다. 주말에도 출근하는 날도 있었고, 수당을 청구하지 않은 야간 추가 근무도 잦았다. 수업과 업무에서 결과물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나는 나 스스로 좋은 교사라는 자존감을 획득해 왔다. 교원평가의 전체적인 시스템에는 반대하지만 아이들이 서술해 놓은 평가들은 빠짐없이 읽고 반성하고, 성찰하며 더 좋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해 왔다.


ⓒ김보경 그림_시사iN


지금 현재 1학년에 여덟 반, 2학년과 3학년에는 각각 열 개의 반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내년에는 지금의 1학년이 그대로 올라가면서 신입생도 여덟 반이 들어오기 때문에 학교 전체적으로 두 개 반이 줄어든다. 이에 따라 나가게 된 교사도 있다. 나와 같은 해에 들어온 영어 교과의 민 선생님이다. 업무 능력과 수업뿐만 아니라 담임으로서 학급 운영 능력을 검증해 온 훌륭한 교사이다. 민 선생님은 이미 2017년 초부터 지금의 상황을 알고 있었다. 민 선생님이 맡고 있는 반 교실에 수업하러 들어갈 때마다 학급의 자유롭고 건강하면서도 맑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나뿐 아니라 다른 교사들도 같은 칭찬을 자주 하였다.


교육과정 개편이나 학급 수 감축이 아닌 다른 이유로 학교에서 나가게 되는 교사도 있다. 그 역시 나와 같은 해에 들어왔던 체육교사 최 선생님이다. 최 선생님은 지난 3년간 언제나 다른 교사들보다 40분 일찍 출근하여 교문 앞에 섰다. 등교지도를 도맡아 해 온 최 선생님은 지난해 예쁜 딸의 아버지가 되었다. 생활상담부에 있는 최 선생님 자리에는 딸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이 늘 올려져 있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매 순간 이 학교의 학생들을 지도했다. 불같은 생활지도 교사이자 누구보다 이야기를 깊이 들어주는 진짜 교사였다. 그는 학교가 4년 계약을 불편해하여 떠나게 되었다.


내년에도 체육교사는 올해와 동일한 숫자가 필요하다. 하지만 기간제교사가 4년 일하게 되면 공고를 새로 내서 뽑아야 하는데 사립학교의 경우 같은 교사를 기간제로 다시 채용하는 것을 불편해하기 때문에 3년만 일하고 떠나는 선생님들이 많다. 얼마 전에 경기도에서 4년 일한 어느 기간제교사가 정교사가 될 욕심은 없으니 무기계약직으로라도 전환시켜 달라고 소송을 걸었고 이는 다른 학교 모두가 3년 계약 이후 계약해지를 해야 한다는 모범사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최근 영어회화 전문 강사 부당해고 관련 소송이 대법원에 계류 중일 때에 중등교원 임용시험을 준비하는 예비 교사들이 대법원에 탄원서를 냈었다. 기간제강사 무기계약직화는 역차별이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들은 노동이 아닌 교육의 관점에서공정한 교육 사회 구현에 힘을 보태 달라고 하였다. 아버지가 된 최 선생님에게 이 학교는 교육의 장일 뿐 아니라 교실, 운동장, 학교 구석구석이 모두 땀 흘려 일한 일터였다. 예비 교사들의 조바심과 불안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될까 봐 겁을 내고 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하교하는 길에 1학년의 한 아이가 와락 나를 껴안는다.

선생님 오늘 왜 감독 안 들어오셨어요?”

2학년 감독이었어.”

왜 선생님이 2학년 감독해요? 저희 학년 수업하는 선생님 아니에요?”

맞아. 근데 원래 감독 안 하는 날인데 너희들이랑 더 있고 싶어서 야간 자율학습 바꿨어.”

우와, 밤 열 시까지 일하면 안 힘드세요?”

힘들었는데 오늘은 안 힘들 것 같았거든. 돈 벌어야지.”


그래, 몇 천 원이라도 더 벌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너희들 매점 한 번 더 데려가야지. 아이들과 함께 버스를 기다리면서 찬바람에 꽁꽁 언 손을 숨을 불어 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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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단 두 번의 기회

 

조숙현/ 28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작은 아들이 1997년 생입니다. 아이는 칸킨트(Kann kind)라고, 어리지만 충분히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판정을 받아 만6세가 되기 전에 입학을 했습니다. 독일은 보통 초등학교가 4년제입니다. 6년제인 주도 있긴 있어요. 독일은 4학년 1학기 때의 성적으로 아이의 다음 진로가 결정됩니다. 김나지움을 갈지 레알슐레를 갈지. 성적이 안 되는 아이들은 하우프트슐레를 갑니다. ! 지금은 하우프트슐레가 6개 주에만 있어요.

김나지움은 G8G9가 있어요. 816학기에 끝나고 918학기에 끝이 납니다. 전에는 모두 13학년까지 다니는 G9였는데 지금은 G8로 전환하는 김나지움이 꽤 생겼네요. 짧아진 학기를 마치려니 아이들은 성적표에 더 신경을 써야 해서 과외도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나라 학원 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주변에 점점 과외 학습원이 늘어나네요. 과외 비용은 시간당 8.50유로(한화11,000) 정도부터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 비하면 저렴하지요?

우리 아이는 바덴 뷔텐베르크(baden wütenberg)주의 레알슐레(실과학교)를 다녔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아 레알슐레를 가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다른 아이들보다 일찍 들어간 학교니까, 1년 정도 레알슐레를 다니고 성적이 유지된다면 김나지움으로 바꿔도 되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했지요. 아이는 학교에서 관심 있는 분야를 열심히 배워 곧잘 1점을 받았습니다. 독일은 1점이 한국의 에 해당하고 6점이 입니다.

10학년을 좋은 성적으로 마치고 김나지움으로 옮기려던 아이가 직업학교를 가겠다고 했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제게 면담을 요청했고 아이와 저, 담임 이렇게 3자 면담을 했습니다. 독일 학교는 보통 이렇게 3자 면담을 합니다. 아이는 선생님과 제게 직업학교를 가는 게 왜 잘못됐냐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파서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하기 힘들 수도 있는데 대학을 가서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기 싫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그때 백혈병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수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직업학교에 갔습니다. 17살이 안 된 아이가 자신을 받아 줄 회사를 찾아다니며 자기소개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드디어 한 회사에 합격을 한 후에 계약서를 갖고 직업학교 등록을 했습니다.

(독일의 직업훈련 ©picture alliance / dpa)


직업학교는 3년제입니다. 직업훈련과 병행됩니다. 직업교육 첫해에는 주 4일을 학교를 가는데, 3일은 실습 교육을 받고 1일은 이론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도제 교육을 계약한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했습니다. 그렇게 1년은 무보수입니다. 아이의 사장님은 열정 페이주의자였는지, 보통 다른 회사는 견습공에게 130유로 정도의 식비를 제공하는데, 그 사장님은 정말 1유로도 주지 않더군요. 더구나 미성년자인 아이에게 주말에 도와 달라며 일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독일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주말에 일을 시키는 것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수영장에 가는데 아이는 땡볕에서 수영장 벽을 수리했습니다. 찬물 한 잔 안 주더라고 불평을 하더군요.

2년째는 반에서 학생들이 걸러졌습니다. 성적과 자질이 없는 학생들은 제적되고 20명이 남았습니다. 2년 차는 7일을 회사에 가서 견습공을 합니다. 그리고 3일 수업을 받습니다. 그중 1.5일은 실습, 1.5일은 이론 수업을 받습니다. 7일 계속 일, 3일 수업 이렇게 로테이션이 됩니다. 그리고 세후 520유로(한화 67만 원)의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중간 작품을 제출했습니다. 3년 차에도 7일 회사, 3일 수업, 7일 회사, 3일 수업입니다. 그리고 세후 570유로를 받았습니다. 독일에서 목수 견습생은 월급이 다른 직종에 비해 많이 적습니다. 하지만 3년의 도제 교육이 끝나고 자격시험에 합격하면 다른 직종보다 전망도 좋고 월급도 많이 받습니다. 견습 생활이 좀 많이 피곤한 직업입니다. 특히 제 아들처럼 1센트까지 다 따지는 사장을 만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는 중간에 회사를 바꿀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 회사는 다른 회사에 없는 CNC 기계가 있었기에 끝까지 견뎌 냈습니다.

20세 목수 조슈아가 만든 가구. 그는 17세 전에 직업학교로 진학, 3년간 견습과 자격시험을 거쳐 목수가 되었다 (사진제공_조숙현)


2년 차에 아이는 학교 최연소로 CNC 기계 시험을 봤고 합격을 했습니다. 3년 차에 목수 자격증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반에서 16명이 합격했습니다. 목수 자격증 시험은 졸업시험 같은 것입니다. 이론 시험을 본 후에 작품을 제출해서 심사위원들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작품 제작 시에 그동안 배운 기술을 모두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계 사용을 못하게 합니다. 도구를 사용해 손으로 직접 만들지 못하면 기계로도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도면 제출 이후에 승낙을 받으면 80시간 안에 그 도면 그대로 손으로 작품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2주 정도의 시간을 받는 것이지요. 이때 탈락하는 학생들이 많이 나옵니다. 자격증 시험은 두 번밖에 볼 수 없어요. 두 번 시험에 떨어지면 다시는 재시험 기회가 없기 때문에 3년의 시간이 허탕이 됩니다. 한 번 시험에 떨어지면 6개월 안에 재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도면을 제출하고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1차에 제출한 것과 전혀 다른 작품이어야 합니다. 제 아이는 다행히 목수 자질이 있는지 순조롭게 모든 시험을 통과했고 지금은 당당한 목수가 됐습니다. 사장이 아이의 능력을 보고 정식 직원으로 일할 것을 권유했고 정직원 계약을 하자고 했지만, 아이는 더 이상 그 회사에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작은아이에게 참 미안한 마음이 많습니다. 혹시라도 부모 때문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독일에서는 마이스터 학교를 다녀 마이스터 자격증을 받아야 자영업을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은 아이가 자신처럼 마이스터가 되면 아들에게 사업을 넘기고 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4대째 목수 마이스터. 저도 기대가 됩니다. 마이스터 시험도 두 번의 기회밖에 없는데. 합격하겠지요? 독일 마이스터 시험은 두 번 떨어지면 동종의 시험 기회는 평생 다시 없습니다. 아직 학교도 안 갔는데 합격을 바라는 마음, 욕심만은 아니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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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독일에서 강아지 기르기


조숙현/ 28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11월이 되니 지난해 우리 곁을 떠난 개 니키가 더욱더 생각납니다. 니키는 20013월에 태어나 2016년에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6년 전, 어느 날 신문에 니키 입양 광고가 났어요.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사는 독일인이었습니다. 당시 입양할 강아지를 찾던 우리 가족은 옳다구나 싶어 신문 광고를 보자마자 그 집으로 총 출동했답니다.


독일에서는 전문 브리더에게 강아지를 살 수도 있고, 동물 보호소에서 입양을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보호소에서 입양을 하는 조건은 꽤 까다롭습니다. 보호소에 한 달 정도 가족들이 다 같이 가서 입양하고자 하는 강아지와 산책도 하고 시간을 보내면서 식구가 될 수 있는지 검증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호소 직원이 집에 찾아와 강아지를 기를 수 있는지 집 상태를 보기도 해요. 집에 정원이 없다면 대형견을 기르는 데 탈락 사유겠지요. 출근하고 나면 집에서 강아지와 함께해 줄 사람이 없는 것도 강아지를 입양하는 데 탈락 사유라고 합니다. 아무튼 꽤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저희는 여러 보호소를 탐방하던 중이었습니다. 때마침 니키 입양 광고는 정말 저희에게 행운의 기회였습니다.


세 번째 방문하던 날 니키의 입양이 확정되어 니키는 우리 집 막둥이가 됐습니다. 독일에서 강아지를 기르려면 절차도 까다롭고 비용도 많이 들어요. 강아지는 세금도 내야 합니다. 훈데슈토이어(Hundesteuer)라고 하는데, 지역마다 조금씩 달라요. 견종에 따라 다르기도 합니다. 대형견, 맹견은 세금을 많이 내야 하고, 맹견은 따로 자격 검증(?) 같은 것을 받아야 키울 수 있어요. 저는 일반 믹스견을 키웠기에 맹견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맹견은 지역에 따라 세금이 1000유로가 넘는 곳도 있다고 합니다. 니키는 일 년에 120유로의 세금을 냈습니다. 그리고 훈트패스(Hundpass)도 만들었어요. 외국에 데리고 다니려면 강아지도 여권이 있어야 합니다. 여권에는 니키 사진과 그동안 맞은 각종 예방 주사 기록이 들어 있어요. 특히 광견병 예방 주사는 의무입니다. 그리고 니키는 목 옆에 마이크로 칩을 이식했어요. 마이크로 칩은 니키를 잃어버렸을 때 쉽게 찾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귀에 번호를 문신하는 방법도 있지만 보통 칩을 이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독일에서 기르는 강아지들은 목줄에 훈데마르케(Hundemarke)라고 부르는 쇠로 만든 동그란 번호표를 달고 다닙니다. 그 지역에 등록한 세금 번호이자 일련번호입니다. 많은 지역에서 목줄과 번호표는 의무입니다. 그래서 강아지를 잃어버릴 경우, 이 훈데마르케나 마이크로칩을 스캔해서 주인을 찾아 줍니다.


제가 사는 곳은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 목줄과 리드 줄을 하지 않으면 40유로의 벌금을 냅니다. 경우에 따라 5만 유로까지 벌금이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목줄에 세금 번호표가 없어도 벌금을 내고, 배변을 치우지 않고 가도 벌금을 내야 합니다. 강아지를 기르려면 나와 주변인을 위해서 그만큼 의무도 다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독일은 동물 보호법도 강력해요. 동물 보호법 제17조 제13항을 보면 제대로 먹이지 않고 돌보지 않은 경우 징역 3년에 벌금 내야 하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됩니다. 고의로 강아지를 해하려고 하면 25천 유로의 벌금을 물리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못하게 합니다. 유기해도 마찬가지로 25천 유로의 벌금형입니다. 강아지를 훔치거나 사기로 팔거나 해도 징역형입니다. 강아지를 사랑하고 키웠던 사람으로서 동물 보호법 제17조는 정말 대찬성입니다. 더 강력해져도 좋을 법입니다.



강아지를 기르는 많은 사람들이 보험을 들기도 합니다. 저는 책임 보험을 들었습니다. 강아지가 남의 집 물건을 망가뜨렸거나 남에 집 개를 물었을 경우 등 강아지로 인한 사고에 대한 책임을 져 주는 보험이죠. 니키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적용한 적 없는 보험입니다. 다행히도 니키는 정말 얌전한 강아지였습니다. 그리고 강아지 의료 보험도 있습니다. 의료 보험에 들면 응급실, 입원, 수술, 예방 주사. 약값이 처리됩니다. 견종의 나이와 체중에 따라 보험료 책정이 달라져요. 보통 한 달에 20~30유로 정도 하고 치료비가 3000유로 이상 나오면 자가 부담 비용이 30~40유로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설마 니키가 뭐 그리 아프겠나 싶어서 안 들었는데, 나중에 땅을 치고 후회했습니다. 니키는 새끼를 한 번 낳게 한 후에 중성화 수술을 했어요. 그렇게 하는 게 건강에 좋다고 해서 했는데도 유선 종양이 생겨 한쪽 유선을 다 없애는 수술을 했는데, 나중에 다른 쪽도 문제가 생겨 또 수술했습니다. 벌레에 물린 후에 피부에 염증이 생기고 괴사한 일이 있어서 수술. 털이 긴 장모종인데 겨울이라 털을 깎아 주지 않아서 상처를 좀 늦게 봤어요. 다리를 다쳐서 엑스레이도 찍고 CT도 찍고, 16년을 길렀으니 별일이 다 있었겠지요. 아무튼 우리는 농담 삼아 너한테 소형 자동차 한 대 값이 들어갔다!”라곤 했습니다. 지금은 지인들이 강아지를 기르겠다고 하면 의료 보험 꼭 들라고 말해 줍니다.


독일에서 강아지를 기르는 일은 많은 의무와 책임이 뒤따르는 일입니다. 한 생명을 집으로 데려오는 일이니까요. 본인이 선택해서 데려온 생명이니 그 생명이 다할 때까지 책임을 져 주는 게 견주의 도리입니다.


니키의 마지막은 참 힘들었습니다. 치매가 생겨 집도 잘 못 찾고, 배변도 아무데나 하고, 마지막 몇 주는 하반신에 마비가 와서 걷는 것도 불편해졌어요. 매일 아침 수의사가 첫 환견으로 니키를 돌봐 주었습니다. 니키가 더 이상 아픔이 없는 세상으로 떠난 날, 화장을 해서 분골구에 담아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지금도 니키는 자신이 좋아하던 테이블 위에서 우리 가족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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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7월호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이발소 잔혹사


안재성/ 소설가, 경성트로이카저자



 

 

20년 전 이곳 이천에 내려왔을 때만 해도 아직 젊어 염색을 안 하니 미장원 가서 커트만 하는 게 보통이었다. 염색이 필수가 되면서 염색비 싼 이발소를 이용하게 되었는데 맨 처음 단골로 삼은 곳은 옆 동네인 우물실 마을의 작은 이발소였다.


겨우 60가구밖에 살지 않는 우물실 마을에서 혼자 이발소를 하던 아저씨는 성격 조용하고 정감 넘치는 토박이 이천 사람이었다. 논농사를 겸하고 있어 농번기면 밤에만 이발소를 열었는데, 그 집으로 포클레인 일을 가는 날이면 저녁까지 얻어먹고 머리를 깎곤 했다.


몇 년을 단골로 다니던 우물실 이발소가 문을 닫은 것은 아저씨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때부터는 설성면 면소재지의 또 다른 토박이 아저씨가 하는 이발소 단골이 되었다. 아무래도 면소재지라 손님이 제법 있다 보니 그곳에 가면 경기 남부 사람들 특유의 충청도 사투리 비슷하니 느리고 억양 없는, 편안한 대화들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다시 이발소를 옮길 때가 된 것은 역시 그 아저씨마저 노환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자꾸 아저씨라고 말하다 보니 좀 그렇다. 내가 나이가 먹다 보니 아저씨라 호칭하는 것뿐, 젊은이들에게는 곧 돌아가실 할아버지들이다.


설성면 소재지에는 이발소가 두 개였다. 아저씨가 돌아가시고 하나 남은 이발소는 경상도 출신의 오십대 노총각이 혼자 운영하고 있었는데 손님이라곤 거의 없었다. 쓰레기통 수준으로 더럽고 어질러진 데다 이발사 차림부터가 노숙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없이 십여 킬로 떨어진 장호원 읍내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피시방 옆 컴컴하고 작은 공간에서, 이번에는 진짜 할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노인 혼자 일하는 이발소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집은 반년도 드나들지 못했다. 그 양반 역시 요양원에 갔는지 사망했는지 문을 닫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날이 미장원만 번창하니 한 번 문을 닫은 이발소는 후계자가 없이 그대로 업종 변경이다. 그런데 때마침 장호원 읍내에 새로 차린 이발소가 있기에 가 보니 내 또래 남자가 중국 동포 아내와 함께 운영하고 있었다.


주인 부부는 솜씨가 좋은 데다 붙임성과 입담이 좋아서 얼마 되지 않아 모든 손님과 친구가 되었다. 부인이 중국 동포이다 보니 근방 농촌과 공장에 일하러 온 중국 동포들이 모두 몰려와 한가할 틈이 없이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 되었다. 주말이면 순서를 맡아 두고 밥을 먹고 와서도 한 시간씩 기다리는 게 예사였다.


나로서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중국동포들의 대화 때문이었다. 중국이 지하철이며 기차가 한국보다 훨씬 좋다던가, 중국 신도시는 한국보다 훨씬 크다던가 하는 이야기까지는 눈에 보이는 현실이니 할 말 없었다. 그런데 중국이 미국 공격하지 못하게 사드를 왜 들이냐 말하는 걸 보면 영락없는 중국인들이었다. 북한의 핵 생산을 걱정한다던가, 사드 설치해 봐야 아무 효과 없다고 걱정하면 모를까, 한 줌도 안 되는 약소민족께서 웬 대국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지?


자기 존재의 기준이 중국인이란 점은 미세먼지 문제에서도 나온다. 중국 쪽에서 바람이 오지 않는 날이면 한국 하늘이 예전처럼 새파란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중국의 미세먼지보다 한국의 발전소 먼지가 더 문제라고, 중국에게 책임 전가하지 말고 한국이나 잘하라는 식으로 떠드는데 은근 열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운동권들이야 미국을 미워하다 보니 사건마다 중국 편을 든다지만, 조선일보구독자에 이명박, 박근혜 광팬들에게 그네들의 모순은 해석 불가였다.


간간이 이런 일이 되풀이되니 유전자만 동포일 뿐 법적으로도 심정으로도, 경제적으로까지 중국인인 그네들이 싫어서 다른 곳에 가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갈 만한 이발소가 없어 견디던 내게 새로운 단골이 생긴 것은 작년 겨울 촛불시위 때였다.


염색만 하는 날이라 장호원까지 가기 싫어 면소재지의 총각 이발소에 꾹 참고 들어갔는데, 뜻밖에도 거기서 박근혜 탄핵등등의 포스터들을 발견한 것이다. 이발사는 자기가 며칠째 일찍 문 닫고 광화문에 시위하러 다니는 중이라며 박근혜 욕을 바가지로 퍼붓는 것이었다. 더 물을 필요도 없이 단골이 되었다.


그런데 오늘, 총각 이발소에 들어서다가 깜짝 놀랐다. 똑같은 장소, 똑같은 간판인데 실내가 너무나 훤했다. 꼭 필요한 집기 외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데다, 낯선 중년 부부가 생글생글 웃으며 맞이하는 게 아닌가. 물어보니 총각 이발사는 가게 팔고 집에 들어앉아 맨날 술만 마신단다. 새 주인 부부는 이발 솜씨도 좋고 친절하기도 했다. 촛불동지의 몰락이 안 됐지만 기분은 썩 좋았다. 이제 먼 장호원까지 갈 일은 없어졌다. 이발사 나이도 나보다는 젊어 보이니 더 이상 이발사가 바뀌는 잔혹사가 벌어지지는 않을 것 같다. 대신 손님이 바뀌겠지.


세월이 데려가는 것은 이발사만이 아니다. 뇌출혈로 쓰러지신 아버지가 꼭 네 달을 채우고 돌아가셨다. 지난주 일이다. 사지마비 상태로 눈만 뜬 상태에서 더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셨으니 다행이요, 호상이라고 다들 위로해 주었지만 겪어 보니 세상에 호상이란 건 없더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실에 들어가면 돌아 나올 때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뭔가 말을 하려고 우물거리던 그 간절한 표정이,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생생해져 혼자 있는 시간이면 자꾸만 눈물이 돈다. 설사 백수를 채우고 편안히 돌아가신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해 준 부모님의 죽음은 슬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전에 왜 삼년상을 치렀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또 한편, 한쪽에서는 가고 한쪽에서는 오는 게 인생인가 보다. 장례 치르고 사흘째 되던 날, 큰딸이 무사히 첫 아이를 낳았다. 유리창 너머로 입을 오물거리며 하품하는 갓난아이가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은 손자가 퇴원해 산후조리원으로 이동하는 날인데 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막판에 심한 기관지염을 앓았는데, 반가워하는 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어 마스크를 하지 않은 탓이다. 벌써 이 주일 넘게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이놈의 기침이 갓난아이에게 옮을까 봐 병원에 가질 못했다. 정말 안아 보고 싶었는데. 이래서 내리사랑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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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7년 10월호


안재성의 살아가는 이야기

 

전두환보다는 나중에 죽고 싶다


 

안재성소설가경성 트로이카》 저자



  

건강한 사람들을 보면 부럽다젊은 시절부터 그랬다친구들과 멀리 놀러 갔다 와서 사진을 보면 즐거운 추억보다는 걸어 다닐 때의 전신의 고통혼자만 비 맞은 듯 쏟는 진땀목숨을 건 졸음운전 같은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수년 전부터는 견딜 수가 없어 동네 앞산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노인들도 나를 휙휙 지나쳐 올라간다그나마 절반만 오르다 포기하고 내려오는 때가 대부분이다.


남의 몸 아픈 이야기 듣기 좋아할 사람도 없고가족들에게는 걱정 끼칠까 봐 입을 다물고 겉보기에 정상인처럼 살려 애썼지만몸 여기저기 끊임없는 통증이며 두통 때문에 술 한 잔 못하고 억지로 앉아 있는 게 싫어서 취재 이외의 만남은 회피하며 살아온 햇수가 이제는 헤아릴 수도 없다지인들의 부모형제 장례식에나 갈까즐거운 행사나 친목 술자리는 일체 응하지 않으니 친구들이 노는 자리에 나를 부르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치료를 위해 애를 안 쓴 것이 아니다사십이 넘어서며 신경통이 급속히 심해지면서 다닌 병원이며 한방민간요법에 대해 책을 한 권 써도 될 정도다하지만 특정 진단명이 나오질 않았다생활에 전혀 지장 없는 미미한 당뇨와 원인을 알 수 없는 높은 간 수치가 전부요나머지 기능은 튼튼하기만 하단다여기저기 바늘을 꼽고 사는 듯한 근육통만이 문제였다.


그래도 잘 버텨 오던 몸이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서너 달 전부터였다좀처럼 몸살이 낫지 않는다 싶더니 온몸의 근육이 심한 운동을 한 뒤처럼 딱딱하게 부풀어 올라 방바닥에 앉았다가 일어서려면 온몸을 비틀며 신음을 터뜨리게 되었다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없는 데다 조금만 움직이면 심장과 폐가 조여와 지하철 계단을 오르지 못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그런데도 의사들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동네 병원부터 서울 백병원까지 가 봤지만 처음 보는 병이라며 다른 과에 가 보라고 미루기만 했다예약이니 검사니 뭐니 해서 시간만 자꾸 흐르는 사이이젠 진짜 죽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사무라이 흉내였다사무라이들이 칼싸움으로 죽을 때를 대비해 악취가 나지 않도록 아침엔 김밥만 먹었다던 믿거나 말거나 전설처럼잠자다 죽을 것에 대비해 매일 밤 깔끔히 청소하고 쓰레기통 비우고 속옷까지 새 걸로 갈아입었다소원이 있다면 아침에 깨지 않는 것뿐이었다.


결론은살아났다가정의학과 의사이자 노동당 부대표이기도 한 임석영 씨가 병명을 찾아내 바로 응급실로 보내 치료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난치병이긴 하지만 불치병은 아닌아주 오래된 다발성 근육염이었다그에게는 간단한 진단이었을지 몰라도여러 달 동안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죽어 가던 내게는 임석영 씨가 생명의 은인이 되었다.


위독 상태로 응급실에 실려 온 환자 중 이렇게 빠른 회복세를 보인 경우는 처음이라는 주치의의 찬사까지 들으며 15일 만에 퇴원한 내 몸은 15킬로그램이나 빠져서 마치 늙은 청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얼굴 주름만 늘었을 뿐 탱탱하던 배가 쏙 들어가 삼십대 청년이 되었으니 말이다의사 왈, 15킬로그램은 근육이 아니라 염증이 빠져나간 거란다.


회복력이 대단하다는 말에 떠오른 것은 내가 본래는 아주 건강한 체질이었다는 사실이다고등학교 체력장 때 1천 미터 달리기는 1, 2등이었고 씨름턱걸이팔씨름 같은 것도 반에서 수위였다오늘날까지도 위장병이니 폐렴이니 장염 같은 속병은 아예 앓아 본 적이 없다진맥 본 한의사들마다 기가 엄청 센 체질이라고 했다.


어렸을 때 외가에서 양젖을 먹고 커서 서양인처럼 튼튼하다고 자랑하던 몸이 조금만 육체노동을 해도 남들보다 몇 배 빨리 지쳐 버리고 땀범벅이 되어 기진해 버리는 현상이 시작된 것은 확실히 만 스무살 되던 1980년 광주 항쟁 이후다.


겨우 5일이었다시간만으로 치면 3박 4일 정도를 24시간 내내 잠 못 자고 매를 맞았다당시 만 명도 넘는 이들이 한두 달씩 보안대에서 고생했다지만 대개 한 방에 수십 명이 수용되어 차례로 돌아가며 매를 맞았기 때문에 실제로 맞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고 들었다그런데 나는 광주 항쟁이 끝난 후에 시위를 선동하다가 수배되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다들 구속되거나 훈방되었을 때 혼자 보안대에 끌려가게 되었고그야말로 한시도 쉴 틈 없이 헌병과 보안대원들의 몽둥이주먹군홧발에 짓이겨져야 했다참 재수도 없지.


교통사고 한 번 당한 후유증도 평생을 간다는데깡패들이 누굴 집단 구타 한들 한 시간을 넘지 못할 텐데며칠 내내 발바닥부터 머리통까지 몽둥이와 주먹으로 얻어맞았으니 아래위 할 것 없이 옷에 피가 엉겨 붙어 떨어지질 않고식당에 데려갈 때는 헌병들이 들어 안아서 옮겨야 했다모든 구멍에서 피를 흘리다 못해 귀에서도 피가 나더니 청력을 상실해 난청이 되었지만 그땐 신경도 쓰지 않았다.


생전 겪어 보지 못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모욕을 이기게 한 것은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 달라고 빌거나 울지 않고 이 불의를 꼭 복수하리라고 수도 없이 다짐한 증오심이었다빌지도 않고 비명도 안 질러 더 지독스럽게 맞았는지 모르지만지금까지도 나를 지켜 온 힘일 것이다그 며칠을 잘 버텨 주었기 때문에 그해 5월이 내게는 정신적 후유증이 아닌 긍지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어쨌든 그 5월을 기점으로 내 몸이 망가진 것은 확실하다겉은 멀쩡해 보이지만 온몸의 근육과 신경에 치명적인 후유증을 안고 살게 된 것은 틀림없다이 병을 고치지 못한다 해도생에 대한 아쉬움은 없다보잘것없는 글재주에 비해 책도 실컷 썼고모험과 여행도 충분히 했고좋은 벗들과 즐거운 시간도 보냈고사랑하는 가족들과 행복도 넘치게 누렸으니 삶의 여한은 없다다만 전두환보다는 나중에 죽고 싶다. ‘전두환 찢어 죽이라는 구호를 지키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다.


오늘 퇴원해 읍내 이발소에 가던 길에 다리가 풀려 쓰러지는 바람에 무릎이 까졌다다리뿐 아니라 팔에도 힘이 없어 일어나지를 못하고 버둥대고 있으니 가게 앞에 모여 웃고 떠들던 노인들이 놀라서 일으켜 준다한동안은 어디 나다니지 말고 집으로 찾아오는 손님이나 맞을 생각에 머리칼을 바짝 깎고 거울을 보니 눈만 퀭하니 낯선 사람을 대하는 기분이다.


하지만 나는 살아날 것이다오히려 그 지독했던 근육통에서 벗어나 날씬한 몸으로 건강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지루한 병실에서 올가을 단풍으로 물든 사찰들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싶다는 꿈으로 시간을 보냈다북핵 관련 뉴스 좀 안 나오는 깊고 아름다운 산천을 걷고 싶었다저항의 돌멩이와 화염병이 있었기에타오르는 촛불이 있었기에 멋진 나라내 사랑하는 남도 땅을 마음껏 천천히 주유하고 싶었다북한 땅도 외세나 압박이 아닌우리나라와 같은 민중의 항쟁을 거쳐 스스로 아름다운 땅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


가을의 사찰 기행매년 꿈꾸지만 한 번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했던 일이다올해는 꼭 해 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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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이분 / 출판 노동자. <작은책> 편집위원


  ‘새 학기가 시작되는데 왜 내가 긴장하는 거지?’

  중학교 1학년인 작은딸 지인이가 2학기를 맞았다. 개학을 하루 앞둔 날, 왜 내 맘이 이렇게 답답해지는 걸까 생각했다. 아마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지금 담임이 있는 학교에 아이를 보내기 싫은 맘 때문이지 싶다.

  지난 3월, 작은딸이 중학교에 입학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서, 회사에서 야근을 하다가 큰딸 지윤이의 전화를 받았다.

  “엄마, 지인이한테는 내가 이런 말 했다는 거 비밀이야.”

  작은딸이 제 언니한테 그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고 한다. 자기가 하기 싫은 CA(특별활동)를 친구가 대신 신청을 했기에 담임 선생에게 다른 반으로 옮겨 달라고 했다는 거다.

  CA를 시작한 첫 주엔 아이들이 반이 맘에 안 들면 다른 반으로 옮길 수 있게 되어 있다. 그래서 ‘또래도우미반’에서 ‘악기연주반’으로 바꿔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담임 선생 왈, “너 ‘악기연주반’ 그런데 가면 날라리 돼!” 그러면서 안 바꿔 줬다고 속상해했단다. 또 하루는 아침에 머리를 감고 갔는데, 머리가 마르지 않아서 긴 머리를 풀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이 딸아이를 보더니 “너 한 번만 더 머리 푼 거 내 눈에 보이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러더란다. 다른 아이들도 머리 풀고 있는 애들이 여럿 있었는데 말이다.

  “엄마, 그래서 지인이가 학교 다니기 싫대.”

  입학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학교에 흥미를 잃다니 정말 안타까웠다. 지윤이가 덧붙인다. “내가 엄마한테 말하라고 했더니, ‘엄마가 속상해할까 봐… …. 안 그래도 엄마가 대안학교 가라고 했는데 내가 일반 학교 선택한 건데 어떻게 말해.’ 그러는 거야.”

  두 아이를 키우면서 어지간하면 학교에 찾아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딸아이한테 “죽여 버릴 거야” 하고 말한 담임이 어떤 사람인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학부모 총회 하는 날 딸아이가 다니는 학교엘 갔다.

  딸아이 책상을 찾아 앉아 있으니 학급 대표 아이가 학부모 총회 참가자 출석 체크를 한다. 아이 이름 옆에 엄마 이름을 적고 전화번호도 적는다. 긴 머리를 풀고 있다. 내 딸의 CA를 제 맘대로 신청한 바로 그 애다. 자기 엄마가 하라고 했다는 CA를 혼자 하기 싫어서 자기가 내 딸아이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신청해 버렸다는 거다. 그 애 엄마는 ‘또래도우미반’이 봉사 점수를 받을 수 있어서 신청하라고 했다고 한다. 아, 미치고 팔짝 뛸 일이다. 뭐 그런 에미가 다 있냐. 봉사는 점수 따려고 하는 것도, 강제로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다. 점수 때문이 아니라 내 딸들은 어려서부터 두루두루 단체 활동, 캠프 활동 등을 하면서 자원봉사가 생활화되어 있는 애들이다. 그런데 일부러 점수 따게 하려고 수업시간에 아이가 좋아하는 특별활동이 아니라 봉사 점수 따는 CA를 시킨단 말이야? 그리고 담임은 그걸 하지 않겠다는 딸아이에게 아이가 좋아하는 ‘악기연주반’에 가면 “너 날라리 돼!”라고 말로 폭력을 썼단 말이야?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

  담임이 학급 지도 방안을 설명하다가 갑자기 내 딸 얘기를 한다.

  “우리 반에 지인이라는 애가 있는데… ….”
 
“선생님, 제가 지인이 엄맙니다.”
 
“아, 그래요. 지인이 어머니… …. 지인이가 머리에 신경 쓰고, 교복 치마 줄여 입고, 그러다간 화장도 하게 될 거고, 화장한 뒤엔 또 더한 것도 하게 될 거예요. 지인이가 사춘기라서 그럴 거예요. 애가 다른 애들보다 성숙해서 사춘기가 빨리 왔나 봐요.”

   
기가 막혀서!!!

  “선생님, 제 딸 교복 치마 줄여 입지 않았습니다. 교복을 제 몸에 맞는 걸 사 입었을 뿐입니다.”
  
“그래요? 어느 회사 꺼요?”

  헐~. 애 엄마가 그렇다면 믿어야지 그걸 또 회사까지 확인하냐? 내가 시간이 없어서 큰딸이 제 동생과 교복을 샀던 거라 혹시나 싶어서 큰딸에게 문자를 보냈다.

  “너 지인이 교복 치마 줄였니? 어느 회사 꺼니?”

  큰딸한테 바로 답이 왔다.

  “아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엘리트 꺼야! 엄마 요새 교복 치마 다 짧게 나와. 그리구 지인이가 다리가 길어서 치마가 짧아 보이는 거야.”

  다른 날 같으면 깔깔대며 ‘다리 길어 좋겠다, 너 잘났다’고 했을 텐데 농담할 분위기가 아니다. 큰딸과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에도 담임은 계속해서 아이들 교복 얘기, 머리 얘기, 사춘기 얘기를 한다.

  “선생님, 교복은 엘리트 꺼구요, 교복을 사 준 지인이 언니가 치마를 줄인 적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누군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죠. 제가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줄이지 않았다면 애가 치마 허리를 둘둘 말아 입고 다니는지.”

  아! 기가 막힌다. 어이없다. 처음 보는 학급 엄마들 앞에서 아이를 평가하고 재단하는 담임한테 뭐라고 한마디 날려야 하는데… …. 참, 오늘 내가 찾아온 것은 담임이 우리 애한테 ‘죽여 버리겠다’고 한 말 때문이었는데, 아이 머리, 교복 치마 운운한 것 때문에 너무 기가 막혀서 내가 정작 찾아 온 얘기는 까먹고 말았다. 아, 정말 분해서 돌겠다. 설령 치마를 줄여 입었다고 치자. 그게 왜 그렇게 중요하지? 아이가 머리에 신경 쓰는 게 뭐가 문제지? 그 다음엔 어떻게 할 거라고? 화장하고 더한 것도 하게 될 거라고? 이렇게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비약해서 아이를 문제아처럼 몰아가는 담임한테 한마디 말도 못하고 있다니. 말할 기회가 없다. 보고 있는 엄마들도 많은데… ….

  담임이 계속 얘기를 한다. 자기는 교사가 천직이란다. 아버지도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셨다고, 자기 집은 교육자 집안이라고 한다. 그리고 자기는 오랫동안 생활지도부장을 해서 아이들을 잘 다룬다고 한다. 헉! 애들이 물건이냐? 잘 다루게?

  “아이들이 나를 무섭다고 하는데 나는 최대한 부드럽게 하려고 매일 노력합니다. 저를 믿어 주세요.”
  
‘그러냐? 근데 왜 내 딸과 내 말은 안 믿는 거야.’

  담임이 계속 말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첫 시험 성적이 고3까지 갑니다. 지금까지 제가 20년 넘게 봐 와서 다 알아요. 애들 모습만 딱 봐도 그 애가 몇 점짜리 애인지 알 수 있어요.”

  이 선생 말대로라면 애들은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 기를 쓰고 공부할 필요가 없겠다. 대학 입학 선발도 중 1때 시험 한 번만 보고 미리 뽑아도 되니까 말이다. 이미 앞날이 보인다면서 왜 애들을 6년 동안 그렇게 들들 볶아 드시는가 말이다.

  회사엔 오전만 쉰다고 하고 학부모 총회에 참석한 거라, 총회가 다 끝나기 전에 먼저 나와야 했다. 나오기 전에 학교에서 필요한 학부모 인원 동원에 몇 개 신청을 했다. 인원 배치가 다 돼야 총회가 빨리 끝난다고 해서 할 수 없이 ‘학교 급식 검수’, ‘학부모 시험 감독’ 두 가지를 신청했다.

  “선생님, 회사에 들어가야 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제 아이에 대해 오해하고 계신 점이 있는 것 같은데, 아이에 대한 나쁜 선입견을 버리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이없다는 듯이 웃는 웃음, 구겨진 인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싸늘한 눈빛을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꾸벅 인사하고 돌아 나왔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당장 학교를 그만두게 하리라!’ 마음먹었다. 뭐 저런 선생이 다 있냐. 애들을 물건 다루듯 하고 비인격적으로 대하고 아이와 엄마 말을 믿지도 않고, 아이의 앞날을 단정 짓고!

  회사에 들어가는 길, 큰딸에게 전화를 걸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리고 학교를 그만두게 하자고 했다. 너무 화가 나고 분하고 억울했다. 저런 선생에게 배울 게 뭐 있겠나 싶었다. 언젠가 홍세화 선생님이 하신 말씀도 생각났다. “교사는 안정된 직장인이 아니라, 비판적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 저 담임은 학교가 ‘직장’이고, 선생이 아닌 ‘직장인’이다. 문제의식도 없고, 교사로서 성찰도 없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 없고, 그냥 직장 생활 편하게 보내고 싶은 ‘아이들 관리자’인 거다. 저 선생한테 참교육을 기대하지 말자.

  그날은 빨리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다. 애들하고 얘기 좀 나누고 당장이라도 어떻게 해결을 보고 결단을 내리려고 했다. 그런데 작은딸이 이런다.

  “엄마, 그 선생님 나한테만 그런 거 아니야. 화분 담당하는 아이한테는 ‘화분에 꽃잎 하나 떨어질 때마다 너 손가락 하나씩 부러질 줄 알아.’ 그러는 거야. 그치만 1년 뒤에 운이 좋으면 좋은 선생님 만날 수도 있는데… …. 지금 막 친구들 사귀고 있는데… …. 나 학교 그만두고 싶지 않아. 그냥 견뎌 볼게. 엄마, 신경 쓰게 해서 미안해.”

  에고, 얼마나 맘이 짠하고 속이 에리던지… …. 학교 생활이 즐겁고 편안하고 행복해야 하는데, 내가 고작 해 줄 수 있는 말이 이런 거였다.

  “껀수 잡히지 마라. 복장, 수업 태도, 준비물 같은 거, 알았지?”

  세상에! 이렇게 긴장하고 학교에 다녀서야 학교 생활이 즐거울 수 있겠나!

  지난 학기에 학교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다 날려 버리자고 작정이나 한 듯이 아이는 여름방학을 신나게 재미나게 놀며 보냈다. 부천문화재단에서 주최한 ‘청소년 대중음악 캠프’에 참가한 딸은, 열흘 동안 왕복 네 시간 걸리는 길도 전혀 힘든 내색하지 않고 즐겁게 다녔다. 평소 음악을 좋아하는 딸아이는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는 ‘대중음악의 이론과 실제’를 배우면서, 그걸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고 재미있게 놀았다고 여긴다. 딸아이를 보며 ‘노는 것도 공부’라는 진리를 다시 깨닫는다. 부천까지 두 시간 버스 타고 전철 갈아타고 걸으며 길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배운 것들, 캠프에서 만난 친구들,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는 음악 전문가들 모두가 딸아이에겐 고마운 스승이다.

  방학이 끝나고 나니 아이는 부쩍 자라 있었다. 비록 수학 문제 하나, 영어 단어 한 개도 외우지 않고 방학을 보냈지만… …. 아니다! 딸아인 오디션 때 머라이어 캐리의 ‘히어로’를, 캠프 내내 자신이 선곡한 마이클 잭슨의 ‘벤’을 연습하고 녹음하며 영어 공부를 했다! ㅎㅎ.

  개학 전 날, 학교 갈 준비를 하는 딸에게 말했다.

  “지난 한 학기 잘 견뎠지? 얼마 안 남았어. 네 말대로 ‘운이 좋으면’ 내년엔 좋은 담임 만날 수 있을지 모르니까 잘 지내 보자. 뭐? 숙제 안 한 게 있어? 빨리 해,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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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쟁이 할매                                                                김영수/ 버스 노동자

  시내버스 운전을 하다 보면 별의별 승객들을 본다.

올해 8 무더운 여름날의 일이다. 그날따라 유난히 승객이 많았다. 영도대교 정류장에서 손수레를 덩치는 작은 할매가 버스 계단을 힘들게 올라온다. 60 후반으로 보이는 할매는 한눈에 봐도 짜증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로 승객 명이 타고 마지막에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올라타자 앞에 앉아 있던 서른쯤  보이는 여성이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자 처음 손수레를 들고 할매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씨발 누구는 비켜 주고 누구는 비켜 주고, 사람 가리 가메 비켜 주는 갑제!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어쩔 몰라 하다가 버스 뒤쪽으로 들어갔고, 자리를 양보 받은 불편한 할머니가 대신 대꾸했다.

“내가 몸이 아파서 그래 하요.
‘욕 할매’는 지지 않고 계속 고함을 질렀다.
“나도 아프고 거다가 짐도 들었다 아이가!

점점 버스 안이 소란스럽게 되자 뒷자리에 있던 승객이 자리를 양보해서 할매는 자리에 앉을 있었다. 이젠 조용하겠구나 생각했다.

버스가 차라서 에어컨 바람이 아주 시원하다. 근데 할매가 갑자기 창문을 연다. 그러자 후텁지근한 바람이 안으로 휙휙 불어 들어왔다. 아줌마가 조용히 말했다.

“에어컨 틀어 놨는데 창문 닫으이소.
 “씨발 여편네들이 에어컨 바람이 좋다꼬 지랄이고? 얼매나 몸에 좋은데. 알지도 못하는 것들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할매가 욕을 연발하자 모두 아무 못하고 조용히 수밖에 없었다.

종점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으며 동료들에게 조금 전에 못된 할매 얘기를 주니까 동료가 갑자기 아는 체를 했다.

“그 할매 경희어망에서 내리제?
“그걸 어째 아노?
“그랄
할매는 할매밖에 없다. 며칠 전에도 113 기사 운전하는데 모가지 잡고 흔들어 , 가게 처박을 했나.

동료의 얘기를 듣고 며칠 버스 대가 차도를 벗어나 가게를 향해 있는 것을 생각이 났다. ‘범인이 바로 할매였구나!

할매요, 내한테 시비 걸어서 고마운데, 사람들한테 제발 그라지 마소.




  작은책에서는 다달이 한 번 글쓰기 모임을 합니다.

글이란 소설가, 시인이라는 그럴 듯한 이름을 건 사람들보다 평범한 서민들이 써야 합니다. 집에서 일하는 주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입시 공부에 시달리는 학생, 늘 스트레스에 찌든 샐러리맨 노동자, 노동자보다 더 힘든 영세사업자,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은 서민들이 써서 서로서로 위안 받고, 살아가는 힘을 받는 것이야 말로 글쓰기의 진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교육의 결과는 ‘글’로서 나타납니다. 아무리 교육을 많이 받아도 ‘글’로서 표현하지 못하면 그 교육은 죽은 교육입니다. ‘글쓰기’가 아니라 ‘글짓기’나 또는 ‘논술’이라는 괴상한 교육으로 올바른 글쓰기 교육을 외면했던 우리 교육 현장에서 이제는 글쓰기의 중요성을 깨달아  글쓰기 열풍이 일고 있습니다. 하지만 글쓰기를 제대로 가르치는 곳은 없습니다.
작은책에서는 글쓰기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지만 스스로 배울 수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써 온 글을 평가하고 자기가 써 오고 고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글쓰기를 배웁니다.

글을 쓰고 싶은데 자신이 없는 분.
글을 많이 써 봤지만 잘 쓴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분.
글은 한 번도 쓰지 않았지만 남의 글은 귀신같이 보는 분.
글쓰기 취미도 없고, 글도 못 쓰는데 그냥 사람 만나는 게 좋아 뒤풀이에 참석해 술이나 마시고 싶은 분.
작은책 글쓰기 모임은 이런 분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한 번 나오면 '기냥' 평생회원이 되고, 웃다가 보면 글쓰기는 저절로 됩니다. 회비는 자기가 먹을 밥값 5천 원(+술값 5천 원)이면 됩니다.
언제- 2009년 9월 19일 토요일 4시
어디서- 작은책 사무실

서울 글쓰기 모임(다달이 셋째주 토요일)
언제- 20010년 1월 16일 토요일 늦은4시
어디서- 작은책 사무실

부산 글쓰기 모임 
언제- 2010년 1월 18일 월요일 늦은7시
어디서 - 부산 진구 가야1동 1-5 실업극복지원센터 3층
문의할 곳 : 김광열 011-568-3370 박선미 010-2827-1162, 작은책 02-323-5391


경남 글쓰기 모임
언제 - 2010년 1월 15일 금요일 늦은7시
어디서- 상남동 노동회관 201호
문의할 곳 _ 강봉수 011-557-0985 작은책 02-323-5391


작은책 서울 사무실 오시는 길 -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481-2 도서출판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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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호선 -첫 번째 방법: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왼쪽으로 도세요. 빵가게와 정비공장 사이 마포만두 골목으로 10분만 쭉 가시면(중간에 부동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버스 다니는 큰길이 나옵니다. 큰길에서 오른쪽으로(HP컴퓨터 가게를 끼고) 3분 가다 보면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 '문턱없는 밥집'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세요. (전체시간 13분)

2호선-두 번째 방법(길을 잘 못 찾으시는 분은)-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곧바로 5분 가시면 우리은행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7분 가다가 큰사거리 서교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서교교회가 나오고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이렇게 오실 때는 조금 돌지만 헤맬 걱정이 없습니다) 큰 길가에 있습니다. 1층엔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가 있습니다. (전체시간 15분)

6호선 - 1번 출구로 나오세요. 왼쪽으로 4분 가시다 보면 성산초교 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5분 가세요. HP컴퓨터 가게 지나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전체시간 10분)

 ::: 부산지하철 2호선 가야역 하차, 2번출구로 나오시거나 가야방면 버스타고 가야시장에서 내려서 서면방향으로 100m 직진 육교가 나옵니다. 육교 왼쪽 골목안으로 쏘옥~오시면 오른쪽에 5층짜리 건물이있어요. 거기 3층 부산실업극복지원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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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은 끝나지 않았다(2009년 2월호)
일터에서 온 소식

정인열/ 코스콤비정규지부 부지부장

2008년 12월 29일 파업은 475일 만에 끝이 났다. 조합원 76명 중 65명은 3개월 이내에 무기계약직 별도직군제로 고용하고, 그 밖에 11명의 고용 문제는 ‘추후’ 협의 후 합의하기로 했다. 하청 노동자들이 원청회사의 직접 고용을 투쟁을 통해 얻어 낸 이례적인 성과라고 평할 수 있다. 물론 11명(거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다)은 해결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패배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타결이 되면 그 긴 시간 동안 있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눈물이 나고 아주 감격해서 어찌할 줄 모를 것 같았다. 그러나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일까? 아니면 그 이면에 있는 냉혹한 진실 때문일까?

우리가 길바닥에서 먹고 자고 한 여의도는 소돔과 고모라같이 의인하나 없는 곳이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한 가족처럼 일했던 연봉 9300만원의 정규직 동료의 외면과 계속되는 방해는 우리를 더욱더 뼈저리게 춥게 만들었다. 1800만 원 연봉의 비정규직들은 매일 아침 팔뚝질을 하면서, 눈인사도 피하며 출근하는 정규직 동료를 바라만 봐야 했다. 거기에다 타결 막판에 정규직 이기주의를 결국 드러낸 증권선물거래소(코스콤의 원청) 노조 간부들의 반대로 전원 직접 고용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그날은 거래소 앞마당에 앉아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분신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분신도 못하고, 고공시위도 못하고, 어디 가서 한풀이도 못한 채 우리는 힘없이 그 자리를 떴다. 자기들만의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정규직 노동조합 운동이 결국 비정규직의 정당한 요구도 묵살해 버리는 현실을 겪으면서 할 말을 잃었다. ‘우리가 이렇게 싸운다 한들 세상이 바뀌려면 아직도 한참 멀었구나. 노동자가 저 모양이라면……’ 하는 절망에 또 절망이었다.

그래도 거래소와 코스콤 밖을 돌아보면 우리에게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도 않은데 노동자들이 모아 주신 성금은 지금 다시 생각해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앞으로 파업 투쟁 때보다 더 많은 과제들이 남았다. 합의서가 이행될 수 있게 11명을 포함한 전원이 하루라도 빨리 복직하게 하는 것, 임금과 업무 배치 등 노동조건을 협상하는 일,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일 등이다. 뉴스에는 타결되었다고 하나 우리는 언제 또 다시 거래소 앞에서 농성을 시작할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부에 바라는 게 있다면 상명하복 식으로 일방적 명령 전달을 받는 의사소통 구조가 아닌 모든 조합원이 자유롭게 토론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지부장은 대장이 아닌 조합원을 대표하고 조합원과 평등한 위치에 있는 그야말로 민주적인 조합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기나긴 파업 기간 중에 깨달았고 그것이 지금도 가장 절실하다. 민주적인 절차 없이 얻은 성과는 한낱 거품에 불과하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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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

고화숙/ 전국공무원노조 인천본부 문화국장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은 공무원노조 조합원이자 간부이고 현직 지부장과 지부장을 역임했던 사람들이다. 쪼코형님은 공무원이었는데 2004년 파업 투쟁 이후 파면돼서 지금은 해고자다. 박 주사님도 해고되었지만 복직돼서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신다.

두 분 다 50대고 공무원 6급 팀장이거나 이었다. 쪼코형님은 5부 스포츠에 흰머리고, 박 주사님은 2대8 가르마에 새까만 머리칼이다. 쪼코형님은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박 주사님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노조 인천본부에서 일하는 일꾼이다.

쪼코형님이라 하는 이유는 대화할 때 어느 지점에서 끊거나 정리할 때 ‘좋고’ 하신다. 발음 그대로 따면 ‘쪼코’가 돼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쪼코형님은 누구나 ‘형님’하고 부르고 싶을 만큼 친근함과, 비호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술자리에서 말의 반은 씨팔이고 양념이 좆도 혹은 개시끼들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겠다. 말투가 그런 거지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는 법도 없고 남 얘기도 잘 들어 주신다. 그래서 쪼코형님하고 만나면 즐겁다.

박 주사님은 마주 대하는 즉시 노조 지부장님보다는 주사님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확 들게 한다.

예전에 한번 ‘어떤 공무원’이라는 제목으로 작은책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박 주사님이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만큼 척 보는 즉시 ‘깐깐’ 이렇게 써 있다고나 할까.

두 분의 재미난 공통점은 노동조합 운동을 직접 하고 있으면서 ‘노동운동’에 대해서 주입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거다. 50대다우신 태도이다.

사실 난 두 분과 그런 거창한 주제로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서 어려운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좌우로 흔드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교조 선생님이 쓴 좋은 글이 하나 있어서 박 주사님한테 ‘이런 문제에 대해 공무원노조도 같이 공감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니까 읽어보기도 전에 ‘나한테 노동운동에 대해 주입하지 말라니까’ 하신다. 그래서 막 웃었다.
쪼코형님의 7년 간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도 “일반 사기업과 공무원은 다릅니다잉”이다.

물론 어떤 조직이나 일반성과 특수성은 있는 거고 노동자라고 해서 똑같을 수는 없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굳이 매번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 ‘특수성’을 강조하고 싶은 건데 ‘틀렸다거나 아니’라고 반론하지도 않는데도 매번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속으로는 ‘누가 머라나’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은 노조에 대해 맨날 흉보면서도 노조 행사 때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챙기신다는 거다.

“그 시끼들 말이야 일을 그따위로 하고 말이야.” 이게 쪼코형님 버전이고 “노조에 전망이 없어요. 공무원노조를 도대체 왜 만든 거예요. 조합원들한테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 노조가 노좁니까.” 이런 정갈한 어투가 박 주사님 버전이다. 맨날 전망이 없다면서 박 주사님은 무려 두개 지역의 지부장을 하시고 계시다. 워낙 자주 하는 말씀이니 남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그 꼴을 못 보는 정씨의 버럭 한마디.

“아니, 어르신들이 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어떻게 해야 잘될까, 이런 말씀은 안 하시고 맨날 남 탓만 하고 김 빼고 뭐지?”

보통 이분들과 나누는 대화의 장면이 이렇다.

이런 독특한 특징을 가진 두 분과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쪼코형님과 대화를 나누다 말 끝에 ‘원죄 의식’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는데 본인이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서 간만에 욕 안 하고 착잡한 표정과 말투로 “나는 괜찮은데 말이야 나 때문에 괜히 해고당한 사람들 보면 참 마음이 너무 아파”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파업 당시 지부장이었던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짠했다.

박 주사님의 걱정은 좀 다르다. 전교조는 해고 기간이 길더라도 복직돼서 현직으로 가면 일할 수 있지만 공무원은 설령 복직이 돼서 현직으로 돌아가더라도 일하기 어렵다는 거다. 일리 있는 말이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공무원 사회에 지금도 5년인데 이보다 더 긴 세월을 떨어져 있다가 들어가서 적응하는 게 단순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일수도 있겠다 싶다. 까마득한 후배들 눈치부터 부딪혀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첩첩산중이겠는가. 이런 두 분의 고민을 들으면서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공무원이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로 파업을 했다. 하루 혹은 이틀 정도 결근을 했고 그만한 일로 정부는 무려 400여 명을 공직 사회에서 내쫓았다. 대부분은 복직 판결을 받았으나 130여 명은 정말 쫓겨났다.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나 노동자인데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공무원이나 다른 게 뭘까. 공무원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겉으로 드러나 나타나는 변화보다 더 중요하게 내부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무원노동조합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과제들이 높고 많다 보니 작은 변화에 둔감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공무원 사회가 훨씬 깨끗해져 가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님 같은 분들이다.

쌀 직불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수령해 간 공무원들, 여전히 검은 뒷거래에 가담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데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의 어깨는 오늘도 무겁다. 잘못된 세상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소박한 요구가 폭력으로 돌아오는 사회, 그것도 생존권까지 박탈해 가는 잔인한 사회는 참 나쁘다. 나쁜 사회를 바꿔 보겠다고 처지는 고개와 무거운 어깨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 님같은 사람들…….

물론 지금 사회는 훨씬 더 비참한 노동자들이 즐비하다. 기륭이 그렇고 이랜드가 그렇고 인천 GM대우 비정규 노동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조금 덜 비참하다고 해서 공무원 노동자들의 해고 문제가 소홀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정부이기 때문에 솔선해서 잘못된 매듭을 푸는 모범을 보이고 이를 계기로 나쁜 자본의 횡포를 줄여 가는 건 꿈에나 불과한 일일까.

이런 마음을 담아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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