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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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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남편이 나갔다. 만세!

최해옥/ 전업주부

 

 

나는 결혼 29년차 주부. 남편은 시사만화가다. 삼 년 전 이사를 하면서 우리 부부는 별거를 시작했다. 사이가 나빠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집을 한 채 구하고도 돈이 남았기 때문이다. 재개발 예정 지역의 단독 주택은 허름하지만 제법 널찍하고 가격이 몹시 쌌다. 덕분에 남편은 독립된 작업실을 갖게 되었다.

남편은 활자 중독증이 있다. 그것도 중증이다. 책은 물론 글자가 쓰인 모든 종이를 허투루 하지 못한다. 이 세상 온갖 만물, 그중에서도 책과 종이들은 만화 작업에 매우 중요하고도 꼭 필요한 자료라는 것이 남편의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손에 들어온 물건 중 버릴 것은 없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에는 종이 신문이 다양한 정보의 원천이었다. 우리 집에는 신문이 늘 1미터 넘게 쌓여 있었다. 스크랩을 한다고 모아 두었지만 신문이 쌓이는 속도는 정리 속도를 추월했다. 좁은 집에 탑처럼 솟아 있던 신문은 툭 건드리기만 해도 무너져 내렸다. 참다못해 그의 외출을 틈타 몰래 갖다 버리면 어김없이 큰소리가 났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 남편은, 안방을 작업실로 썼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책과 종이뭉치가 가득해서 안방에 있던 장롱에는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거실도 사정은 비슷했다. 풀지도 못한 박스 더미가 빼곡해 좁고 긴 통로만 남았다. 방이 세 개인 집에서 남편과 아들, 딸이 방을 하나씩 사용하고, 내 공간은 부엌과 통로만 남은 거실이 되었다. 베란다에도 책이 쌓여 있었다. 짐 때문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고, 짐 사이에서 잠들 때면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다. 짐을 모시고 사는 모양새였지만 버릴 수가 없었다. 말을 꺼내기만 하면 남편이 화를 냈기 때문이다.

그림_ 이동수(시사만화가)


이렇게 살다가 이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짐과 함께 남편이 분가해 나가자 마침내 내게도 공간이 생겼다. 나는 가장 넓은 안방을 혼자 차지하게 되었다. 만세!

남편의 작업실은 걸어서 3, 4분 거리에 있지만 난 드나들지 않는다. 이사 직후에 가 봤더니 마치 담배 연기로 결계를 친 듯 숨이 막혀 현관문을 넘어설 수가 없었다. 같이 살 때는 방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던 남편이 이제는 마음 놓고 담배를 피워 댄 탓이다. 몸의 건강에는 안 좋겠지만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정신 건강에는 좋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밥은 같이 먹지만 잠은 따로 잔다. 밤에는 깨어 있기 일쑤라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는 남편과 그렇지 않은 나는 생활 리듬이 아예 다르다. 마치 작업장에서 2교대를 하는 것처럼 내가 일어나면 그가 잠자리에 드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려니 하다가도 오후 두세 시까지 자고 있는 남편을 보면 가끔 가슴이 답답했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어졌다. 이 또한 좋은 일이다.

남편은 내가 한 음식을 잘 먹는다. 솜씨 없는 음식을 맛나게 먹어 주니 고마운 일이다. 가끔 그는 이런 말로 생색을 낸다.

반찬 투정 안 하고 주는 대로 잘 먹으니, 이 정도면 좋은 남편 아닌가?”

그런 거까지 하면 당신은 진작 소박맞았겠지.”

나도 상냥하게 웃으며 이렇게 대꾸해 준다.

여기까지 읽으면 이런 사람과 어떻게 살지? 하는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 남편에게는 이 글에서 밝히지 않은 장점이 많고, 나에게는 말하지 않은 단점이 많다. 그런데도 그의 단점과 나의 장점만을 밝힌 것은 내가 펜을 쥐었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이야기만 하는 것은 글쓰는 자의 특권이 아니던가. 살아 보니 세상은 불공평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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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6)

내가 불쌍해 보입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요즘 텔레비전에서 양진호가 사람을 철썩철썩 때리는 걸 보는데 갑자기 내 볼때기가 저려 오는 것 같았습니다. 누가 때리면 무척 아픕니다. 너무 아파서 더는 안 맞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할 것 같지요. 빌라면 빌고, 무릎을 꿇으라면 꿇고요. 보복은 엄두도 못 냅니다. 때리는 손은 너무 크고 무서워서, 법보다, 정의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작동하거든요. 그래서 나처럼 겁이 날 만큼 맞아 본 기억이 있는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작은책>살아온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 뒤로, 여기저기서 안부 전화를 많이 받았습니다. 오래 연락이 끊겼던 이들이, 할까말까 하는 망설임을 뚫고 기꺼이 기별을 넣어 볼 엄두를 내는 까닭 역시 불쌍한 마음 때문입니다. 얼마 전 끝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아저씨가 지안이한테 이런 말을 하지요. 네가 나 왜 좋아하는지 알아? 내가 불쌍해서 그래. 불쌍하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너무 우뚝 서서 너무 빛나고 있으면, 아무리 반가워도 금세 기별 넣는 행동으로 이어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차라리 불쌍한 처지여서, 내 좋은 사람들이 겁먹지 않고 온기를 전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인 것이 참 안심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전혀 불쌍하지 않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내가 얼마나 씩씩하게 살고 있는지, 할 말 다 하고, 뻘짓 다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해 두지 않으면, 내 전화통에 불이 날지도 모르니까요.

결혼 생활을 접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때 나는 혼자 갓난쟁이를 돌볼 길이 없어 부산 본가에 아이를 맡겨 둔 채, 서울-부산 출퇴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일을 무사히 수행하고, 그때까지도 나를 힘들게 하던 아이 아빠와의 전투(?)에서 당당히 이겨 내려면 몸이 튼튼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침 사무실 근처에 수영장이 있다기에 반가운 마음에 등록을 했습니다. 나는 물을 참 좋아합니다. 물 마시는 것도 좋고, 팔 할이 물인 술도 좋고, 물속에서 노는 것도 좋고, 나이 들면 물가로 가서 살고 싶을 정도입니다. 한동안 신나게 수영을 다니다 생리 기간이 닥쳐왔습니다. 전화를 걸어 생리 기간이라, 잠깐 쉬었다가 다시 다닐게요.” 했더니 안 된답니다. 아무도 그런 까닭으로 수영장을 쉬는 사람은 없다면서요. 정히 오기 힘들면 진단서를 떼 오세요.” 나는 벌컥 화가 났습니다. 아니, 생리가 어떻게 병입니까? 그렇게는 못 하겠는데요? 제가 건강해서 생리를 하는 거니까요. 생리 기간 일주일 동안 잠깐 쉴 수 있게 안 해 주시면, , 그냥 가지요. 수영장에 가면 물에다 사람들이 눈물에, 콧물에, 침도 뱉고, 오줌도 싸고 그러는데, 생리혈 하나 더 보태는 게 이상할 것도 없겠네요.” 했더니, 그것도 안 된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 불쾌감을 준다나요? 이렇게 황당할 데가 또 있습니까?

내가 다닌 수영장은 현대 계동사옥 지하에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일반인들이 드나드는 길이랑 브이아이피(VIP)들이 드나드는 길이 아예 달랐습니다. 아마 여러 처우들도 많이 달랐겠지요. 이게 그러니까, 그저 일반인에 불과하고 여자일 뿐이라서 당하는 일이다 싶으니까 더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했습니다. 가임기 여성은 평균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를 하는데, 그 기간이 엄연함에도, 남자들과 한 달 정기권 금액이 같은 건 옳지 않다, 쿠폰제로 운영하거나, 생리 기간에 수영을 잠시 쉬었다 다시 할 수 있게 해 주거나, 같은 기간이라면 여자들 정기권 금액이 더 싸야 한다는 취지를 담아서 말입니다. 그 뒤로 지방자치단체 조례에 이 내용이 반영되어서, 공공이 운영하는 수영장에 생리할인이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이제 내가 얼마나 힘이 센지 아시겠지요?

또 있습니다. 지난해 국정농단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던 정권을 우리 손으로 내몰고 새로운 지도자로 바꾸어 냈을 즈음, 나도 ()적농단을 몰아내고 무혈혁명을 이뤄 냈더랬습니다. 딸아이 성을 엄마인 내 성으로 바꾸었거든요. 이게 무슨 혁명인가 싶겠지만, 진짜 피만 안 흘렸지, 성 하나 바꾸는 데 참 욕 많이 봤습니다.

딸아이랑 다시 같이 살게 되면서, 2의 인생이 시작된 거니까,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이름을 지어 보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이런저런 이름들이 후보로 나왔는데, 처음 우리 둘 다 흡족해한 이름이 이송이였습니다. 내 성이 씨니까, 성이랑 이름을 붙이면 송이송이’! 뭔가 좋은 기운이 송이송이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또 하나 눈에 확 들어온 이름은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마침 내가 만들던 어린이 잡지 <개똥이네 놀이터>에 느림 작가가 연재하는 덕분이와 장판이의 한뼘텃밭이라는 꼭지가 있었거든요. 딸아이랑 같이 사는 게 참 좋은 일이니, ‘네가 좋은 건 내 덕분이고, 내가 좋은 건 네 덕분이다. 이 이름만 한 게 없다싶었지요. 물론 도시내기 딸아이한테는 씨알도 안 먹혔지만, 두고두고 아쉬운 이름입니다.

내가 원래는 아이를 셋 갖고 싶었는데, 그 녀석들이 다 씨가 달랐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이 있었습니다. 이름도 다 지어 뒀거든요. 첫째가 마루. 가장 높은 봉우리이자, 가장 밑바닥을 받쳐 주는 존재라는 뜻이지요. 둘째는 지붕이. ()을 알아주는 벗()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집으로 치면 적잖이 떨어져 있으니, 셋째는 기둥이라고 지어서 마루와 지붕을 이어 주는 역할을 하게 하면 되겠다 싶었지요. 그런데 하나 낳고도 내가 이토록 헤매는 꼴을 보고 얼른 주제파악이 돼서 마루라는 이름밖에 못 쓴 겁니다. 그래, 지붕이나 기둥이 가운데 하나는 어떠냐?”고 딸아이한테 물었지요. 하지만 이 녀석, 잠시 틈도 갖지 않고 싫어!” 합니다.

결국 녀석이 하자는 대로 했는데, 친구들이 많이 불러 줘서 익숙한 지금 이름은 그대로 두고, 성만 바꾸겠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을 바꾸려고 보니, 우리가 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자의 성과 본 변경 허가 신청소송에서 이겨야 된다는데, 이게, 준비하는 서류부터 복잡합니다. 왜 성을 바꾸고 싶은지, 성을 바꿔 쓴 지는 얼마나 되었는지, 일상에서 얼마나 자리 잡았는지, 이를 왜 재판부가 허가해 주어야 하는지 들에 대한 내용을 쓰고, 필요한 증거 자료를 모아야 합니다.

가까스로 서류를 꾸며서 판사 앞에 섰더니, 내게 묻는 첫마디가 재혼하려고 그러세요?”였습니다. 엄마가 재혼해서 아이 성을 새아버지 성으로 바꾸는 게 보통인데, 재혼도 안 하면서 멀쩡한 아이 성을 엄마 성으로 바꾸는 일은 상당히 이례적이며, 아이 생부 의사가 어떤지도 확인해야 하고, 가사 조사에, 심리에 절차가 아주 복잡하다는 겁니다.

상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성 문제는 자기 결정의 권리이지 누가 허락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법적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생부 의사까지 물어야 하다니. 그 생부의 생사도 알지 못하던 나로서는 이것이 더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이를 딸아이 친구들한테 하소연하니 이 녀석들도 같이 분개하면서, ‘내 친구 이름은 송OO입니다하는 피켓을 펼쳐듭니다. 이 모습들을 사진에 담아 탄원서와 함께 준비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졸업 앨범에 OO’으로 표기해 주었고, 아이가 물건에 쓴 이름에, 일상생활에 엄마 성을 쓰고 있다는 증거 자료를 싹싹 긁어모아서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성 변경 허가 판결을 받은 것은 촛불혁명으로 새 정권이 들어서고도 석 달이 지나서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나이 마흔 넘은 육중한 몸을 얼마나 폴짝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뛸 듯이 기쁘다는 말이 있나 봅니다. 마시면 기운이 팡팡 나는 자양강장제 박카스를 잔뜩 사서 바까스로 바꿔 둘레에 돌리던 그날의 상큼함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아이 성 하나 바꾸는 데 일 년 넘게 싸웠으니, 촛불혁명보다 더 질기고 오랜 혁명이었지요.

▲ 그림_ 최정규


, 그러니까 나를 불쌍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진 걸 함부로 쓰고, 나쁜 짓 하는 놈한테는, 있는 힘 없는 힘 다해 이겨 먹으며 살았습니다. 이럴 땐 상식 없는 게 진짜 큰 무기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거든요.

이렇게 힘자랑이 길어진 것은, <작은책> 보고 걸려 온 전화 몇 통에 마음이 속절없이 따땃해져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철벽을 거두게 되는 건, 갑질과 겁박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측은해하는 마음, 다정히 헤아려 주는 마음들 때문이잖아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이 매서운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햇빛인 것처럼요.

물론 그러다 철벽이 홀라당 무너져 내리기도 합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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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1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엄마가 소곡주를 마시지 않은 까닭

유내영/ 충남 청소년노동인권센터 지킴이

 

 

휴대폰을 줘 봐라.”

왜요?”

그것 좀 떼 버리게.”

휴우.”

당진에 살고 있는 우리 가족은 설날, 추석을 나의 친정인 성남에서 보낸다. 추석 전날 저녁상을 마주하고 부모님, 남동생 부부, 조카와 모여 앉았다. 얼마 전 단톡방에서 고종사촌 언니들과 주고받았던 문자를 확인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화기애애하게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빠가 내 옆에 앉아 있는 남편에게 내가 들고 있던 휴대폰을 달라고 했다.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들고 있던 내 휴대폰 뒷면이 나와 마주 앉아 있던 아빠의 눈에 자꾸만 거슬린 모양이었다.

휴대폰 뒤쪽엔 세월호를 기억하는 노란리본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 세월호 스티커. 사진_노란리본캠페인(네이버카페)


아니, 이건 왜 떼려고요? 아빠 휴대폰이 아니라 제 거예요.”

그거 보는 게 정말 지겹고 싫다. 좀 떼어 버려라.”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붙인 건데, 아빠가 떼라 마라 왜 참견인데요?”

끝난 지가 언젠데 아직까지 붙이고 있냐?”

아직 사고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시작도 안 됐는데 뭐가 끝나요?”

세월호 타고 놀러 가다가 난 사고인데 뭘 그렇게 난리를 치는지 모르겠다.”

옆에 있던 남동생이 나선다.

놀러 가다가 난 사고는 그냥 둬도 돼요? 그리고 세월호에 탄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일정에 함께한 거예요. 학생들도 있었지만 제주도로 살러 간 가족도 있었다고요. 화물기사 아저씨도 생업 때문에 타고 있었고요. 바다에서 사고 나면 국가가 나서서 구해야 되는데 구하지도 않았다는 것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어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말을 거드니 약간 주춤한다. 아빠는 단호함이 약간 수그러진 소리로 고집스럽게, 그래도 보기 싫으니 떼란다. “보상도 많이 받았구만.” 하고 말끝을 흐리면서.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직접 만난 이야기, 대통령이 탄핵되자 인양하기 어렵다던 세월호가 올라온 것, 세월호에 갇혀 있던 학생들을 뭍으로 데려온 잠수사의 이야기, 해경이 사람들을 구하고 있지도 않으면서 했던 거짓말, 배의 진행 방향을 거짓으로 발표했던 국가, 없어진 닻, 세월호에서 나온 아이들의 손톱 이야기. 눈물을 참으면서 엄마와 남동생과 번갈아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빠가 갑자기 광주민주항쟁 이야기를 한다. 당시 광주에서 폭도들이 일으킨 사태와 다를 게 없다며, 세월호를 이용하는 세력이 나라를 어지럽힌다는 것이다.

하이고이 널뛰기는 뭐지? 연결시킬 것이 따로 있지,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할 수 있지? 말문이 막혔다.

도대체 그런 얘기는 어디서 들어요?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군사독재 철폐를 위해 시위를 한 건데, 전두환이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총으로 쏴 죽이고 때려죽이고 사진 혹시 봤어요? 직접 광주에 가 보기나 했어요?”

그들이 폭도들이었지. 폭도들 진압하려고 군대가 투입된 건데 무슨 영웅이라고 돈을 주고.”

광주에 가서 직접 당시 상황에 대해 이야기 들었느냐, 왜 당사자들의 이야기는 들어보지도 않고 확신 하냐, 그런 거짓말만 듣지 말고 다른 사람 말도 들어 봐라, 휴대폰으로 검색이라도 해 봐라.

그래도 자존심 강한 아빠는 지고 싶지 않은 눈치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우리 말에 귀 기울일 생각이 없다. 왜 가족의 말보다 남의 말을 더 믿냐고 해도 꿈적하지 않는다.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뭐라 말도 못하고 난감해하면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이 집안 가장의 사위와 며느리, 손주들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13의 대결이 수습할 수 없는 싸움으로 번지지 않게 이쯤에서 정리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빠는 내가 배 타고 놀러 가다 사고 나서 죽으면 그냥 수장시키세요. 놀러 가다 죽었으니까! 그리고 어차피 죽었는데, 왜 사고가 났는지 원인을 알 필요가 뭐 있대요. 그리고 국가 돈 축내지 않게 말도 꺼내지 말고요. 아빠는 그렇게 하세요.”

쓸데없는.” 아빠는 말을 잊지 못한다.

가족 모임을 하다 보면 자연스레 이야기가 정치로 흐른다. 정치 성향에 있어서 아빠와 나는 완전 반대편에 서 있다. 그래서 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싸움으로 번진다.

몇 년 전의 나는 70대 중반의 아빠 생각을 바꾸기 위해 설득하려고 엄청 애썼다. 그러던 어느 날 한고집 하는 내 성질이 꼭 아빠와 내가 닮았다는 것을 남편과 두 딸의 이야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남편과 딸들은 나와 아빠의 갈등 상황을 보고 있기가 힘들다면서 그만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사실 나도 아빠와의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치기도 했다. 그 뒤로 아빠하고는 되도록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정치 관련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입을 닫았고 그 자리를 피했다. 아빠도 나의 태도 변화를 눈치챘는지 언제부터인가 정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다만 엄마와의 통화로 아빠는 여전히 꼴통보수임을 확인 하고 있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광화문으로 집회를 가면 성남에서 하루 자고 내려가곤 했다. 아빠는 그런 나를 보면서 별말씀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꼴통보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가슴 아파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거짓뉴스에 노출된 아빠에게 사실을 알려 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좀 오래 이야기했다. 특히 정치 이야기를 할 때는 별말 없었던 남동생이 거들어 주어서 고마웠다.

엄마는 판문점 남북회담 때 마셨다는 면천 두견주가 어떤 맛인지 궁금해하셨다. 면천과 가까운 당진에 살고 있는 나는 추석을 맞이해서 두견주를 사 갔다. 그리고 소곡주를 좋아하는 아빠를 위해 한산에서 직배송된 소곡주도 가져갔다. 진달래꽃으로 만든 면천 두견주와 찹쌀과 누룩으로 만든 한산 소곡주를 맛보고, 평도 하고, 각자의 취향에 맞는 술을 선택해서 마셨다. 아빠는 소곡주가 더 좋다면서 두견주를 한사코 마다했다. 두견주는 맛도 안 봤으면서! 두 번 권하지 않았다.

다음 날 시댁에서 올라온 동생네와 저녁을 먹으면서 두견주와 소곡주를 꺼냈다. 전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이 한잔 받으세요하면서 아빠에게 두견주를 권하니 잔을 받는다. 아무리 문재인 정권을 싫어하지만 술을 좋아하는 아빠는 두견주의 맛이 궁금했을 것이다. 모른 척하긴 했지만 술을 받는 그 모습이 밉살맞으면서 안쓰럽기도 했다. 아빠의 눈과 귀는 도대체 어디로만 향하고 열려 있는지. 안타까웠다.

엄마는 끝까지 소곡주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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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죽비 같은 인연

김수련/ 항공사 객실승무원

 

항공사 객실승무원으로 일하는 하루하루는 늘 사람들로부터 배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늘을 건너 온 세상 도시들을 오가며 다양한 국적의 승객들을 대하는 일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지구라는 열린 도서관을 마음껏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객실승무원으로 일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을 나라와 사람들, 그들에 대해 새로운 걸 깨닫고 이해하게 해 주는 내 일이 나는 너무나 고맙다. 피부색, 언어, 종교에 상관없이 이 시대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그런 교감과 공감 덕분에 길고 고된 하늘길에서의 노동을 견디며 오랜 시간 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비행기라는 공간의 가장 큰 특징은 밀폐와 제한이다. 이 꽉 막힌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다 보면, 그 부대낌의 피로 탓일까. 이미 공감하고 이해하고 있던 상황들을 그만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한다.

극성수기가 지나고 나면 항공요금이 조금 싸진다. 휴가를 가는 여행객들은 줄어들고, 사업이나 고향 방문 목적의 승객들이 많아진다. 성수기가 끝났음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승무원들 앞에 또 다른 종류의 일이 들이닥치는 것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의 나라다. 그래서 미국을 오가는 승객들 중에는 고국을 방문하기 위해 비행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 특히 우리 항공사를 많이 이용하는 승객은 인도인이다.

인도처럼 식민지를 오래 겪은 나라들은 이민이 많다. 인도는 여전히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로 계급간의 갈등이 꽤나 심각하며, 우리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지만 이름과 성만 보아도 그들끼리는 상대가 어떤 계급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신분이 낮은 이들은 자국기인 인디안항공 이용을 꺼리고 신분 계급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외국 항공사들을 애용한다는 것.

그 얘기를 처음 듣고는 안타까운 마음에 인도인 승객들을 만나면 무작정 연민의 마음부터 일곤 했다. 하지만 신분이 철저하게 구분된 사회에 오래 살았던 이들이라 그럴까. 그들은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할 행동으로 우리를 당혹하게 했다. 나의 연민과 공감 능력으로는 그들을 다 이해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이들 인도인 승객의 특징 중 하나는 타국적의 승객들에 비해 휠체어 신청이 유독 많다는 점이다. 인천공항에서 인도 뭄바이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미국 전역에서 모인 인도인들이 한 비행기에서 주문한 휠체어가 무려 50개가 넘을 때도 있다. 휠체어 승객이 몇십 명이 넘어가면 승무원이 할 일은 몇 곱절로 늘어난다. 달리 보상이 없으면서 챙기고 신경 써야 할 일이 부쩍 많아지니, 일하는 승무원 입장에서는 불평이 쌓이기 십상이다.

휠체어로 탑승하는 인도인들은 물론 대부분 노약자들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충분히 걸어 다닐 나이 같은데도 제대로 못 걷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어느 날 인도 뭄바이에서 현지 직원에게 물었다. 유독 많은 뭄바이행 휠체어 승객들에 대한 불평은 그 질문 하나로 자취를 감췄다.

직원은 답은 예상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너무 가난하여 자국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 미국으로 간 그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부실한 영양 공급 탓에 다리근육이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며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을 챙길 여유가 없어 그리 많지 않은 나이임에도 휠체어를 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만 그들. 휠체어에 의지해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그들. 어쩌면 미국 이민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 고향 방문일 수도 있는 그들의 여정.

그들을 그렇게 휠체어 안에 주저앉게 만든 사정을 헤아리려 들지도 않은 채, 그저 고단한 업무에 대한 불평만 늘어놓으려 했던 내가 얼마나 낯 뜨거웠는지 모른다. 그저 내가 할 일이 늘어나는구나, 더 고단해지겠구나, 아 힘들어, 그런 푸념만 연발하며 그 상황을 불편해하고 불평하다니.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늙고 병들어 혼자서는 잘 움직일 수도 없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인 인도로 가는 모자 승객이 우리 비행기에 탔다. 어머니의 좌석은 비즈니스였고 아들은 이코노미였다. 아들은 탑승하며 내게 부탁했다. 자주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싶으니 사정을 봐 달라고. 비행기는 클래스별로 좌석이 나눠져, 다른 칸의 승객이 상위 좌석으로 맘껏 다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탑승 과정 중 보았던 아들의 표정과 태도에 감동받아 그날 담당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해 잠시 오갈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그날도 승객이 많았던 날이라, 내 일이 한가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 모자 승객이 자꾸 눈에 밟혀, 아들이 어머니의 식사 시중을 들고 화장실 방문을 돕는 모습을 틈틈이 지켜보았다. 할머니는 생각보다 자주 화장실을 가고 싶어 했고, 그에 따라 나도 부지런히 다른 칸으로 오가며 아들 승객을 불러오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보니 긴 여정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잠도 못자는 그 승객이 안쓰러워, 내가 먼저 제안을 했다. 서울 도착할 때까지 내가 돌봐 드릴 테니, 아드님은 조금 쉬시라고. 할머니는 평소 잘 못 움직이신 탓에 몸이 불어 있었고 인도 전통의상인 사리를 입고 있어서 부축하고 화장실로 모셔 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할머니를 도와드릴 때마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깊이 감사하는 맘으로 다정하게 건네는 눈길. 비록 능숙한 영어는 아니지만 넌 참 좋은 사람이야를 연발하던 할머니의 목소리. 그런데 식사 때면 식욕이 없으신지 거의 안 드셔서 마음이 아팠다. 더 드시라며, 다른 거라도 챙겨 드릴까 여쭈었더니, 맙소사! 자꾸 먹고서 화장실을 자주 가면 아들과 당신을 힘들게 해서 안 된다는 게 아닌가. 마음이 풀썩 주저앉은 나는 더 권할 수도 없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모자 승객은 다른 일반 승객들이 다 내리길 기다린 후에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할머니를 꼭 안아 드리며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또 만나자고 인사했다. 할머니가 허리춤의 쌈지를 뒤져 꼬깃꼬깃 접은 5달러 지폐를 내 손에 꼭 쥐어 주셨다. 승무원의 업무 특성상 팁을 받는 일은 거의 없다. 난 괜찮다며 사양했으나 할머니는 절대 돌려받지 않을 기세셨다. 옆에 있던 아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맙다 인사를 드리고 손을 꼭 잡았다.

동료들은 그날, “왜 굳이 나서서 할머니를 돌보느라 더 힘들게 일했냐며 나를 책망하듯 칭찬했다. 아들과 늙은 어머니가 서로를 살뜰히 돌보고 위하는 마음을 어찌 외면한단 말인가. 서로를 위하는 애틋한 마음은 고단함도 잊게 만든다.

나는 잘 몰랐다. 아니 안 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엄격한 신분사회, 오랜 영국 식민 지배를 겪은 나라, 미국 이민자로 살면서 자신의 권리주장에만 몰입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부족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편견만 쌓으며 내 업무의 어려움만 증폭시켜 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 만났던 모자 승객은 자꾸 편협해지려는 나를 번쩍 일깨워 준 죽비 같은 인연이었다. 한 국가와 사회에 대한 호기심에 이끌려 책도 뒤적이고 영화도 찾아보곤 하면서, 정작 그 사회의 구성원인 사람들을 보는 일엔 게을렀던 게 아닐까.

지난달 광화문에서 열린 갑질격파 시민행동집회에서 나는 조합원의 편지로 발언대에 섰다. 항공기가 날아올라 움직이는 원리를 항공역학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난 항공기를 움직이는 진짜 힘은 항공기 안팎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협력과 조화에 있지 않겠냐고 말했다. 뭄바이로 가는 모자 승객 같은 수많은 죽비 같은 인연들이 내게 그렇게 가르쳐 주었으니까. 그리고 난 그들과의 사연을 나의 세상 도서관 책장에서 항상 다시 꺼내 읽고 감동받으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니까

▲ 항공사 객실 승무원 김수련 씨. 사진제공_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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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8월호

살아온 이야기(2)


바닥을 쳤다는 걸 어떻게 압니까? 

송추향/ 한사람연구소 소장

 

얼떨결에 결혼이란 걸 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밤, 나는 어떤 남자한테 머리채를 휘어잡혔습니다.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튼튼한 줄을 그때 처음 알았네요. 머리채만 붙들리면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집 안에서 집 밖으로 하릴없이 질질 끌려다니게 됩니다. 발로 밟히고, 차이고, 주먹으로 얼골(‘얼굴의 방언(충북))이며 눈탱이며 얻어터졌습니다. 쌍년, 개 같은 년, 아니 소 같은 년, 죽일 년, 더러운 년, 아무한테나 다리를 쩍쩍 벌리는 년이라는 소리들을 같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년들이 있다니요! 그 모든 년이 그날 밤엔 오로지 나였습니다.

둘레에 있는 건 뭐든 집어서 내리찍는 통에 옆구리며 팔다리며 온몸이 널브러졌습니다. 맞은 자리가 너무 아프고, 골통이 흔들려서 눈앞이 흔들리고, 눈물 콧물 다 쏟는 가운데, 울고불고 하는 입이 다물어질 틈이 없어 침도 질질 흘립니다. 짐승처럼 완력을 쓰는 사람 앞에서는 나도 같이 짐승처럼 생존본능이 입니다. 그래서 싹싹 빌게 되지요. “잘못했어요. 잘못했습니다.” 뭐를 잘못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싹싹 빕니다. 그러면 한 대쯤 덜 맞지 않을까?

그러다 이번엔 아예 문 밖에 내몰려서 차가운 베란다 바닥에 그저 끙끙하며 벌러덩 누웠습니다. 한참을 버려져 있었는데, 너무 아파서 도망칠 생각도 못하고, 갓난쟁이 애기가 집 안에 있으니 나만 혼자 어디 갈 수도 없습니다. 옆집 남자가 난닝구만 입고 담배를 피고 있다가 후다닥 들어가 버립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더니 다시 머리채를 잡혀서 집 안으로 끌려 들어갑니다.

그 남자는 이번에는 내가 자기를 함정에 몰아넣었다고, 자기로 하여금 폭력을 행사하게 했다고 하더군요. 부엌에서 칼을 찾아와 내 가슴팍에 들이대더니 죽여 버리겠다 하다가, 아니다, 네가 나를 죽여라, 내가 당한 거니까 네가 끝내라 합니다.

9시부터 새벽 4시까지 죽도록 얻어터진 뒤였는데도, 나는 어디서 무슨 힘이 났는지, 내 손에 억지로 쥐어진 칼자루를 뿌리치고 맨발로 도망쳤습니다. 그길로 근처 경찰서로 달려갔습니다. 산발이 된 머리채와 울퉁불퉁 피멍이 든 얼골, 신발도 못 챙겨 신고 나온 내 행색을 보더니 경찰들이 무슨 일인지는 따져 묻지도 않고 그저 누가 이랬어요?” 합니다.

그런데 밤새 나를 패던 그 남자가 내 신발 두 짝을 들고서 경찰서에 들어섭니다. 그러고는 세상 다정한 목소리로 당신, 왜 그래, 신발도 안 신고. 얼른 신발 신어.” 하고 바닥에 가지런히 신발을 내려놓습니다. 나도, 경찰들도 얼골이 하얘집니다. 저 사람이 밤새 나를 팬 그 남자라니. 짧은 침묵을 깨고 경찰이 묻습니다. “아저씨가 이랬어요? 아저씨가 이 아줌마 때렸네.” 그러고는 나더러 이 아저씨 누구예요? 남편이지요? 입건할 겁니까?” 합니다.

입건할 거냐고 묻는 소리에 나는 잠시 시간이 정지된 듯 내 상식 창고를 가동시킵니다. 그런데 이 부실한 상식 창고에서는 좀처럼 뭐가 안 나옵니다. ‘입건이라는 말뜻을 못 찾아서가 아니라, 입건하면 더 큰 보복을 당하는 거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일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내가 없는 잠깐 사이에 애기를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더 큰일이니까 내가 여기서 입건이고 자시고 할 때가 아니었습니다.

입건은 모르겠고, 그냥 이 사람이 더 못 날뛰도록 잠깐만 붙들어 주세요. 집에 애기가 있어요. 얼른 가서 괜찮은지 봐야 돼요.”

내가 가장 믿었던, 같이 살기로 결정한 그 남자가 죽도록 나를 패던 그 밤, 상식이 없는 나는 저 깊은 곳에서 속절없이 또 물음이 떠오릅니다. 이 정도면 바닥을 친 거겠지? 이게 인생 가장 밑바닥이겠지? 도대체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는 거야?

나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습니다. 아빠는 보일러 기술자였는데, 말이 기술자이지 보일러를 놓는 노가다꾼이었습니다. 맨몸으로 고향을 탈출한 아빠는 배운 것도, 변변한 기술도 없어서 데모도를 하며 공사판을 떠돌다 부산에서 자리 잡았습니다. 엄마는 시골 깡촌 없는 살림에도 쌀밥 아니면 곡기 먹을 생각을 안 해서 외할아버지가 자기 몫으로 차려진 고봉밥을 부러 남겨 챙겨 준 귀한 딸이었습니다. 오로지 키와 피부만 보고 아빠와 결혼한 엄마는, 나를 가졌을 때 귤 하나를 못 살 형편이라서 길바닥에서 귤껍질을 주워 먹었다고 했습니다. 어릴 때 나는 이것이 바로 인생의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인생도 제대로 추스르기 전에 찾아온 다른 인생 때문에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을 때, 나는 이런 식으로 내몰리는 결혼이 바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도 아이 아빠가 가장 좋은 육아 파트너가 돼 줄 거라 믿고 시작한 결혼 생활에서, 그 남자가 역류성식도염에 걸렸을 때, 나는 이게 바닥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삭에 퉁퉁 부은 몸으로, 역류성식도염의 고통을 이겨 내느라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는 그 남자를 안마해 주다가, 저린 발을 번갈아 디디며 , 이건가 보다, 바닥했습니다. 역류성식도염 때문에 밥을 끊고, 음식을 끊고, 의사가 처방한 약도 가려 먹느라 한없이 야위어 가는 그 남자에게 나는 시간을 칼같이 대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을 해 먹였습니다. 한 팔에는 혹시 울까 봐 아기를 안고, 한 팔로는 죽이 눌지 않게 저으면서 주걱을 한 바퀴 돌릴 때마다 드러난 냄비 바닥을 보며 저 바닥이 내 바닥이구나했습니다.

애 낳고 몸 푸는 동안, 똥에 미역이 그대로 나온다고, 미역국도 못 먹겠다고 해서 나도 미역국을 접고 같이 멀건 죽과 감자 넣은 된장국 식단에 동참했습니다. 엄마가 남해에서 공수해 온 짙고 토실토실한 미역이 베란다에 내몰려 바싹 졸아가고 있는 걸 보면서 , 저렇게 말라 가는 게 바닥인가 봐했습니다. 너무 예민해서 햇볕이 드리워지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고, 애기가 우는 것도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라며 애기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고, 14층 아파트에서 집어던지겠다고 소리치는 남자를 보고 있느라 몸푼 지 한 달 남짓한 내 몸에서 살이 30킬로그램이나 폭삭 빠져나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이때가 바닥이었을까요?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눈앞이 뱅글뱅글 돌고 앉아도, 서도, 누워도 어지럽고, 구토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돌발성난청. 정말 딱 하룻밤 만에 거짓말처럼 오른쪽 귀가 완전히 먹어 버렸던, 이 순간이 바닥이었을까요? 어느새 늙어 버린 엄마아빠의 집으로 기어 들어가서 한없이 여린 아기와 한없이 아픈 내 몸을 추스르며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때, 잘못했다며 빌던 그 남자의 말을 한 번 더 믿어 준 것이 바닥이었을까요?

결혼하고 몇 달 동안, 닥쳐오는 모든 순간은 늘 다음 순간에게 가장 깊은 인생 밑바닥 자리를 내주는 일이 거듭되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슬그머니 화가 났다가, 에이그 가엾다 불쌍하다 이해했다가, 또 하나도 이해 안 되고 슬퍼졌다가 하면서 그 시간을 지나 보냅니다. 강물이 흘러 바다로 가듯, 어려운 시간들이 차곡차곡 흘러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인생 가장 밑바닥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고, 바닥을 쳤다는 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토록 간절하게 물을 수밖에 없는 까닭은, 바닥을 쳐야, 그제야 위로 올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추위와 깜깜한 어둠이 가장 길고 짙은 동지가 지나야 점점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언제 내 인생 저 밑바닥에 닿게 되는지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걸 알아야 그 순간이 왔을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바닥을 힘껏 굴러 벌떡 일어설 수 있을 테니까요.

인생 밑바닥, 그곳이 어디인지 얼마나 깊은지는 사람마다 다 다르겠습니다만, 그 순간은 어떻게 알아차립니까? 나한테 기가 막힌 진단법이 있습니다.

밤새 얻어터진 그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나는 한 손에 아기를 안고 한 손에는 짐가방을 들고 그 집을 나섰습니다. 그 꼴을 하고 엄마한테 갈 수는 없어서 서울에 혼자 살고 있는 친구네 원룸에 기어 들어갔지요. 친구는 출근하고 빈집에 혼자 남아 있는데, 문득 기다란 전신거울 속에서 내 얼골이 보였습니다. 그 얼골은 눈에 핏줄이 서고, 입술이 터지고, 피멍이 올라 울퉁불퉁했습니다. 어찌나 못생겼는지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가장 못생긴 얼골을 하고 있을 때, 어느새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어 있을 때! 바로 그때가 바닥을 친 순간입니다. 나는 부어올라 앙다물어지지 않는 입술 사이로 흐흐흐흐웃음이 새어 나가도록 한참을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뒤로 나는 거짓말처럼 벌떡 일어섰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넘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쭉쭉 위로만 뻗어 간 것도 아닙니다. 다만 앞으로는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더 나쁜 일로 만들지 않을 힘이 생겼지요. 그 이야기는 다음에 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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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교실 이야기


참깨반 아이들과 봄비쌤

조은영/ 김해 대진초등학교 교사


우리 학교는 김해시 외곽 진례면에 있습니다. 도시 외곽이라 하면 대개 개발이 되지 않은 한적하고 소박한 시골 마을을 떠올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크고 작은 창고형 공장, 비닐하우스, 벼농사 논들이 무분별하게 섞여 있는 농공단지 안에 들어앉은 학교입니다. 전교생이 65명입니다. 학교 둘레 비닐하우스와 크고 작은 공장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 엄마, 아빠가 많아서 학교에도 다문화가정 어린이가 40퍼센트가 넘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 만나던 첫날 봄비선생님은 아이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 반 이름을 칠판에 ㅊㄲ반 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자 대뜸 아이들 입에서 참깨라는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참깨, 참깨, 참깨반소리 내어 부르고 보니 부르기 좋고, 고소한 맛이 좋고, 앞으로 텃밭 농사를 할 우리 반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 같았습니다. 그렇게 우리 반은 참깨반이 되었습니다.

아홉 살 남학생 열 둘, 여학생 다섯, 그리고 150살이라고 소개한 봄비쌤이 함께 만납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아직 자기 생각과 하고픈 말이 많고, 친구 사이에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 날마다 친구랑 다툽니다. 아직 감정 조절이 안 되어 친구랑 다투는 아이들도 많습니다. 어젯밤 술 많이 마시고 들어온 아빠가 걱정되어 아침부터 책상에 엎드린 채 슬프다고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와 가정과 온 마을이 함께 키운다는 말이 허투루 나온 말은 아닌 듯합니다. 학교에서 날마다 다투고 울고, 미안해 괜찮아 사과하고 용서하는 일을 놀이하듯 밥 먹듯 연습합니다. 할머니는 교통사고로 거동이 불편하시고, 엄마랑 이혼한 아빠는 평소 아이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일 나가서 전화 통화가 안 되는 성이 문제는 마을 월드마트 아주머니께 전화해서 이것저것 여쭈어 보고 부탁도 합니다. 책 읽기를 좋아하고 소리 내어 읽기는 대부분 잘하지만 쓰기는 아직 서툴거나 받침이 정확하지 않은 아이가 많습니다.

아홉 살 마음사전이란 책은 감격스럽다에서 흐뭇하다까지 80개 마음 표현을 가나다순으로 소개한 책입니다. ‘좋다, 싫다, 짜증난다란 단순한 말 표현에 머물기 쉬운 아이들에게 날마다 두 낱말씩 익히게 합니다. 그날 배운 낱말은 뜻과 글자를 꼭 익히도록 하는데 감격스럽다걱정스럽다를 익히고 표정, 몸짓 연기도 하고 받아쓰기를 했을 때 일입니다. 패자부활전을 거쳐 모두 200점을 받아 5교시 피구를 했습니다. 돌봄교실을 마치고 집에 가는 성이를 운동장에서 마주쳐 모래에 아까 배운 낱말을 써 보라 했더니 여전히 잘 써서 영원히 200점이다 했더니, 이가 손을 달라 했습니다. 손 내미니 작은 두 손으로 꽉 잡아서 다쳤던 팔이 무척 아플 정도였습니다. 영원히 200점이란 말이 응원이 되고 기쁨이 된 성이도 곧 한글을 뗄 듯합니다.

2 열일곱 명과 지내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듯 합니다. 친구들이 발표 지명해 주지 않는다고 슬프다며 뒤 탁자에 나가 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아이, 자기가 원하는 팀 이름이 아니라고 운동장 저쪽으로 가 버리는 아이, 화내고 싸우고 자기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사과하지 않겠다고 고집부리는 아이, 아직은 아홉 살 인생 어린이들. 그런 아이들 속에서 선생님도 어떨 땐 같이 화내고, 큰 소리로 야단치고 돌아오는 날엔 교사로서 좌절감을 느낍니다. 아이들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 주고 읽어 주고 중재해 주는 일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교사 안의 에너지가 더 넉넉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2-겨울과 봄>에서 이치코는 말합니다. “뭔가에 실패해 나를 돌아볼 때마다 난 항상 같은 걸로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열심히 살아온 것 같은데 같은 장소에서 빙글빙글 원을 그리며 돌아온 것 같아서 좌절했어. 하지만 경험을 쌓았으니 실패를 했든 성공을 했든 같은 장소를 헤맨 건 아닐 거야. ‘이 아니라 나선을 그렸다고 생각했어. 맞은편에서 보면 같은 곳을 도는 듯 보였겠지만 조금씩은 올라갔거나 내려갔을 거야. 아니 그것보다 인간은 나선그 자체인지도 몰라. 같은 장소를 빙글빙글 돌면서도 그래도 뭔가 있을 때마다 위로도 아래로도 자랄 수 있고 옆으로도내가 그리는 원은 점차 크게 부풀어 조금씩 커지게 될 거야.”

선생님도 너덜너덜 지칠 땐 아이들에게 위로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집에 가며 한 명씩 인사 나눌 때 팔을 높이 뻗어 하이파이브를 합니다. 주말이면 어머니 나라 종교의식을 행하는 아이가 있어 그렇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니 베트남식 기도를 해 주고 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손을 부딪치고 맞잡는 힘은 대단합니다. 난개발이라고 불편스런 눈으로 바라본 간판들은 안정적이지 않은 농공단지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현실이고, 어쩌면 그렇게나마 어울려 살고 있는 우리나라의 민낯인지도 모릅니다. 이 속에서 아이들도 어른들도 조금씩 나아가고 넓어지기를 바랍니다.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 얼굴은 서로 다르지 않습니다. 누가 다문화가정 아이인지 크게 구별하기 힘들 만큼 외모도 언어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개 다문화가정의 경우 한국 아버지의 나이가 엄마보다 스무 살 넘게 많거나 장애를 가진 경우가 많고, 동남아 어머니는 주중에 밤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도 일하는 경우가 많아 돌봄이 부족하여 한글을 아직 모르는 아이도 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하여 엄마랑 둘이서 사는 아이도 많습니다. 이주여성노동자로 홀로 아이를 키우는 삶이 무척 힘들 것임에도 학부모상담 기간에 전화상담 신청을 하고 아이의 친구 관계, 수업 시간 모습 등을 꼼꼼히 물어보고 부탁하는 말은 우리나라 학부모와 다름이 전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종, 국적, 성별, 빈부, 학력 그 어떤 것에서도 차별받지 않지 않고 평등해야 함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삼사월을 보냈습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 지내며 태어난 나라, 가정, 성별 등을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갖가지 환경에서도 차별받지 않고 골고루 공공의 지원과 혜택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부풀어 큰 원을 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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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내 일당보다는 더 줘야지

이근제/ 건설노동자

 

○○건설 마트현장으로 일을 나갔다. 나는 일반공이다. 오전에 뿌레카라는 연장으로 콘크리트를 깨어 내고, 오후에는 콘크리트 타설을 하기 위해 거푸집() 작업을 했다. 거푸집 일은 목수들이 하는 일이다. 일을 끝내고 반장이 작업 확인서에 일당을 쓰면서 오늘 고생했다고 우리 소장님이 만 원 더 쓰라고 해서 더 썼어한다. 내 일당은 12~13만 원이다. ‘뿌레카 작업에 목수 일까지 했으니 당연히 내 일당보다는 더 줘야지.’

 거푸집 작업을 하는 건설현장 노동자들 작은책


목수는 기공이라고 해서 17~18만 원 받고, 뿌레카 작업은 힘든 일이라 14~15만 원은 받는다고 들었다. 인력사무소로 오면서 작업 확인서를 봤다. 만 원 더 썼다고 해서 14만 원인 줄 알았더니 13만 원이다. 12만 원을 쓰려고 했다는 말이 아닌가? 기분이 팍 상한다. 나는 관리자가 일일이 시키지 않아도 무슨 일이든 다 알아서 척척 해낸다. 그래서 자기가 일을 편하게 하려고 인력사무소에 이근제 보내 주세요요구하기도 하고, 나한테 친구야 내일 우리 현장으로 와사전 예약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대우를 해주기는커녕 덜 주려 하다니, 괘씸하기까지 하다.

하루가 지났다. 경운기 엔진을 얹어 만든 1톤 롤러로 땅을 다지는 다짐 일을 시켰다. 돌 머리에서는 사람 힘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에 힘들고, 기계를 잘 못 다루어 쑤셔 박기도 하고, 다치기도 한다고 들었다. 혹시 다치지나 않을까 싶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배워 둘 겸 일을 했다. 사고는 내지 않았지만 저녁 무렵에는 팔이 아팠다. 반장이 일당을 적으면서 말한다.

“12만 원 쓸게.”

, 12만 원?’

오늘 15만 원짜리야. 그런데 처음 이곳 와이현장에 와서 일했던 사람이 일한 시간이 얼마 안 되었다고 14만 원을 받아가서 그것이 굳어졌지만.”

…….”

작업 확인서를 봤다. 15만 원짜리라는 말까지 했건만 13만 원이다. 어제도 기분 나쁘게 하더니 오늘도……. 내가 착각 속에 빠져 사는지 모르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일을 잘한다고 생각한다. 만난 지 두어 달도 안 됐을 때부터 마트소장이 텍크와이현장에 가서 반장을 하라고 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맨날 우리 소장님을 입에 달고 사는 반장이 소장 돈 벌어 줄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건설에서 반경 300미터가량 되는 곳에 텍크’, ‘’, ‘와이’, ‘에스’, ‘마트이렇게 공장 건물 다섯 동을 짓는데 마트현장은 건설사 이름만 빌려 하는 개인 사업자다.

 경기도 시내의 한 아파트 건설 현장 작은책


기분 나쁘게 한 것이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다. 힘들지 않은 일할 때는 가끔 12만 원으로 써 주었다. 같은 건설사인 텍크와이현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13만 원을 받아 오는데 말이다. 이참에 일당 때문에 내 서운했던 감정을 내일은 말해야겠다. 같은 건설사에 일을 나오면서 나만 적게 받으면 기분이 무척 나쁘다고.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렇게 말할 수 없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이 깎일 수도 있기 때문에. 어떻게 말을 해야 가장 현명한 방법이 될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가 일을 너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내 욕심이라는 생각도 든다. 일당이 보통 12만 원이니까. 가장 서운하게 생각했던 뿌레카 작업을 하면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인력 소장한테 정확하게 알아봐야겠다. (일에 따라 일당이 대충 정해져 있다.)

아침에 현장을 배정받으면서 소장님한테 물었다.

소장님 뿌레카 작업을 하면 얼마를 받나요?”

큰 거로 하면 보통 14~15만 원 받고, 작은 거는 13~14만 원 받아요.”

나는 작은 것으로 했다. 그렇다면 내 욕심이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마트반장이 관리하는 이라는 현장에 가서 바닥 버림 콘크리트를 쳤다. 일한 시간은 대략 4시간 정도, 작업은 3시 조금 넘어 끝났다. 반장이 일당을 12만 원을 쓰겠다고 한다. 콘크리트 타설은 17만 원이다. 적어도 13만 원은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일한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그러라고 하면서 말했다.

어저께 같은 경우 15만 원짜리야.”

, 나도 마음 같아선 맨날 13만 원 써 주고 싶어. 어저께 너 있을 때 소장님이 말했잖아. 사무실에서 잡부 일당을 많이 준다는 말이 나왔다고. 나도 이거(확인서 써 주는 것) 하고 싶지 않아. 소장님이 했으면 좋겠어. …….”

나는 내가 일을 해 주는 만큼 일당을 못 받고 있다는 마음이 자꾸 든다. 한편으로는 이해를 하려고 하지만 말이다. 반장도 기분 나쁘지 않고, ‘텍크와이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도 깎아 먹지 않게 할 말을 며칠 동안 고민했다. ‘앞으로 나한테 사전 예약 하지도 말고, 인력에도 나를 찍어서 보내 달라는 말도 하지 말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좋을 거 같다. 그러면 텍크와이쪽으로 가는 사람들 일당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고도 내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반장도 알아먹을 테니까.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내일은 말을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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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6월호

청년으로 살아가기


강릉으로 힐링하러 온다는 당신에게

진솔아/ 강릉에 살고 있는 청년

 

 

, 힐링하고 싶어. 나 강릉 가도 돼?”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심심치 않게 받는 카톡이다. 인구 천 만이 넘는 메가시티에 살고 있는 친구의 입장에서 내가 살고 있는 강릉은 언제나 심신 치유가 가능한 시골 마을이다. 인구 21만의 도시(20185월 기준) 강릉은 주말이나 연휴엔 관광객들로 넘쳐 나는 곳이 되었다. 이젠 해송을 따라 걸어도 어릴 때 부모님과 한적하게 즐기던 바닷가의 망중한은 없다. 매주 금요일만 되면 도심 안에 자동차가 평소보다 훨씬 늘어나고 연휴라도 있는 달에는 사람에 치여 밖에 나갈 엄두를 내기가 쉽지 않다. 관광객이 늘어나면 지역의 경제적인 수입이 늘어나고, 따라서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고용과 창출이 늘어난다? ‘관광을 달고 있는 도시의 위정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밥 먹듯 반복하는 소리이고 지역 소시민들이 의심 없이 믿는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강릉에서 내가 사랑하는 곳 중에 하나가 경포호수이다(였다).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석호이자 바다와 닿아 있는 그곳에 서서 대관령의 준엄한 산맥들을 바라보면 강릉에서 나고 자란 최고의 시인 난설헌과 사임당의 한()이 느껴지는 쓸쓸함이 좋았다. 호수 어디를 걷다가도 동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해송을 넘어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이도 다 지나간 감상이다. 정철이 <관동별곡>에 쓴 경포대가 있는 이곳은 오래도록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 문화재와 해안지역의 생태·환경보존을 위한 각종 규제로 묶여 있었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라는 명분하에 올림픽특구개발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민간사업자들에게 개발 권한이 쥐어졌다. 각종 인·허가를 한 번에 해결해 주는 행정의 폭풍 지원하에 호텔들은 하루가 다르게 올라갔고 결국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그 풍경은 하룻밤에 수십만 원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곳으로 전락했다. 호수에서 바라보는 바다의 시야는 주변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공룡 같은 규모의 흉측한 건물로 꽉 막혔다. 속상한 마음. 나는 내가 사랑했던 호수를 그렇게 잃었다.


서울-강릉 114! 강릉에 우후죽순 늘어나는 아파트 개발업자들의 광고에 꼭 들어가는 말이다. “강릉이 올려다보는 매직 스페이스라이프, 쾌속 교통망, 명당의 자연환경!” 어느 아파트 분양 홍보책자에 쓰여 있다. 요즘 강릉에 들어서는 아파트들이 과연 시민을 위한 안정되고 쾌적한 주거공간일까? 아니, 강릉에 지어지는 말도 안 되는 가격의 아파트들은 서울에 있는 사람들의 세컨드하우스다. 이런 아파트들이 4~5억을 호가해도 금방 계약이 완료된다. 업자들은 계약금 10퍼센트만 내고 가지고 있다가 가격이 올랐을 때 팔아 버려도 앉아서 수백, 수천은 벌 수 있다고 유혹한다. 투기. 말로만 듣던 그 부동산투기의 열풍을 거리의 광고부터 평범한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강릉에서 학자금대출의 빚을 안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아가는 나와 같은 청년의 입장에서 전혀 도움이 될 게 없는 개발이다. 지역 정치인들은 집이 없는 사람들의 안정적인 주거 공급에는 관심이 없고 개발업자들과 골프를 함께 치며 이런 사업들을 구상했을 것이다. 옆 동네 속초 역시 비슷한 문제들을 안고 있다. 설악산 케이블카 반대투쟁 산행에 갔다가 봤던 어마어마한 규모의 아파트들. 다 누구를 위한 것일까? 주민등록 인구가 겨우 8만 명 정도 되는 속초 시민들을 위한 행정일까? 속초는 지난겨울 단수까지 겪었다. 가뭄도 가뭄이었겠지만 갑자기 늘어난 객식구들을 감당하기에 벅찼기 때문이리라.

이런 일련의 변화로 나와 같은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일반 시민들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집값이 오른다. 물가도 오른다. 자주 가는 사랑하는 가게들과 공간을 잃는다. 그래도 자꾸자꾸 개발이 된다. 어릴 때부터 품어 온 추억이 있는 장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탈바꿈한다. 돌아가신 아빠와의 추억이 많은 호수의 풍경을 잃었고 교통체증을 얻었다. 물론, 어떤 가게 자영업자들은 신이 날 것이다. 서울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가게들도 자꾸 생겨나고 있다. 이곳에 새로운 사업을 위해 유입되는 외부 인구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의 삶에 무슨 도움이 될까? 강릉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줄까? 지방선거를 앞두고 출마한 후보자들의 공약에 가장 많은 것이 관광개발이다. 개발을 통해 가장 많은 이득을 얻는 사람들이 정치인들과 민간사업자들이다. 나는 진심으로 강릉이 그만 개발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개발 속에서 지역에서 생겨나는 안정적인 일자리를 기대하는 청년들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생기는 일자리는 단기 아르바이트다. 아파트 분양 홍보관 같은 데서 일을 하거나 카페나 식당의 시간제 일자리 또는 리조트 청소 같은 계절적 업무들이 생겨난다. 나 역시 여름방학마다 바닷가의 고급 리조트에서 객실 청소를 했다. 물론, 모두 비정규직이다. 지역을 떠나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며 살기엔 불안하고 낮은 임금의 일자리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힐링하러 오겠다던 서울 친구들은 불편해한다. “그래도 관광객들이 가서 돈을 많이 쓰면 어쨌거나 지역에 좋은 거 아니야?” 나는 왜 이게 돈을 많이 내고 가니 그만 툴툴거리라는 말로 비꼬아 들릴까. 당신은 돈만 내고 가지 않는다. 쓰레기도 두고 가고, 교통체증도 두고 가고, 고성방가도 두고 간다. 관광객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강릉은 평창동계올림픽이라는 경제 훈풍을 타 보겠다고 더 많은 개발 사업들을 구상 중이다. 정동진의 곤돌라 사업, 중국 자본을 유치하겠다는 계획, 강릉의 해안가를 따라 케이블카를 놓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나와 친구들에게는 모두 끔찍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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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5월호

이야기가 있는 들녘


<리틀 포레스트>가 따로 없다

김진회/ 자연농 농부가 되고 싶은 일명 참참

 


홍천에서 맞이한 첫 겨울은 혹독했다. 날도 추웠거니와 경제적으로도 어려웠다. 게다가 편하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들은 다 서울에 있어 얼굴 한번 보려면 큰맘을 먹어야 했다. 모두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었지만 직접 겪어 보니 생각보다 더 추웠고, 더 외로웠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이 무색하게도 봄이 오니 거짓말처럼 많은 것이 좋아졌다. 날씨나 환경, 몸의 상태가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그저 바깥 날씨가 따뜻해지고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니 몸도 마음도 녹은 느낌이다.

겨우내 집 밖에 나가려 할 때마다 그렇게도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집 앞 슈퍼에 나가는 것도 귀찮았는데, 짝꿍이 냉이 캐 와서 파스타 해 먹잔 얘길 하자 그 길로 저 먼 밭에까지 냉이를 캐러 갔다. 나가자마자 향긋한 봄내음이라는 뻔한 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냉이는 작았고 캐 본 적이 없어 서툴렀다. 심지어는 비슷하게 생긴 다른 풀은 아닌지 헷갈리기까지 했다. 그래도 소금쟁이 님이 냉이가 많다고 알려 주셨던 그 밭에서 신나게 캐 왔다.

작년 봄에도 난생 처음 먹어 본 것이 여럿이었는데, 올봄에도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고 있다. 냉이파스타가 그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머위된장이다. 이건 일본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 나왔던 음식인데, 영화를 보면서도 저게 도대체 뭘까 가장 궁금했던 것 중 하나다. 짝꿍은 그걸 잊지 않고 이미 작년부터 머위가 나는 곳을 잘 봐 두었다고 한다. 드디어 봄을 맞아 그곳을 찾아가 보니 역시나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머윗대와 잎만 먹지만 일본에서는 머위의 수꽃을 데쳐서 된장에다 넣고 볶아 머위된장이란 걸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영화에 보면 머위된장 하나로 밥 세 그릇을 뚝딱 비우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그럴 만했다. 쌉싸름한 뒷맛이 입맛을 돋워 줬다. 물론 짝꿍이 만든 머위된장은 영화에 나온 것과는 맛이 다를 거다. 일본의 된장과 우리 된장의 맛도 분명히 다를 것이고 정확한 비율이나 레시피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만든 것도 인터넷에서 어렵사리 찾은 레시피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다. 머위꽃을 그냥 먹으면 쓴맛이 강한데, 일단 데친 뒤에 물에 오래 담가 두거나 잘 볶아야 쓴맛이 빠진다.

맛있는 머위된장을 다시 만들어 보고 싶었지만 지난번 뜯은 냇가에는 그때 한 줌 뜯은 것이 전부였다. 머위에 비해 꽃은 별로 많이 피지 않는데, 우린 머위가 더 많은 곳을 몰랐다. 어쩌나 싶었는데 혹시나 싶어 여쭤 보니 이웃 농부님 중 머위농사를 짓는 분이 계셨다. 농사를 워낙 크게 하시는 분이라 올해는 아직 머위밭에 신경을 쓰지 못하셨다는데 물론 머위꽃은 팔지 않으신단다. 위치를 알려 주셔서 찾아가 보니 밭 가득 머위꽃이 피어 있었다! 보물창고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제 혹여나 머위된장 맛이 궁금하다며 찾아오는 손님들한테도 맛을 보여 줄 수 있게 됐다. 머위꽃도 한철이라 4월 초가 지나면 찾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아쉽지만 딱 요 때만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더 소중해진다.

지난해 맛나게 먹었던 풀들도 다시 만나 어찌나 반가운지 모른다. 노랑꽃 또는 꽃나물이라 불리기도 하는 겹꽃삼잎국화와 이젠 재배하는 농가도 꽤 있는 눈개승마, 그 밖에도 파드득나물, 부추, 뱀밥, 새로 찾은 친구 원추리까지! 잊고 있던 봄나물 맛을 다시 보니 좋아하던 김치도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이렇게 온 들에 맛난 것들이 널려 있으니 맨날 봄만 계속되면 좋겠다.

이렇게 영화 같은 날만 계속되면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하다. 가을, 겨울에 먹을 것들을 위해 얼른 농사일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한다. 작년에 물이 잔뜩 고였던 고랑을 정비하고 있는데 깊게 판 고랑들을 다시 메울 흙을 퍼 올 데가 마땅치 않다. 하도 잘못 만들어서 구배를 다시 맞추는 것도 큰일이다. 밭 계획도 좀 바뀌어서 여기저기 손볼 데가 많은데 삽자루를 들 때마다 이거 이러다간 올해도 다 못하겠다 싶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 스틸이미지


우선 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해서 감자를 좀 심었다. 작년에 심어 두었던 마늘도 싹이 나왔다. 심었다는 사실조차 잠시 잊고 있었는데 파란 싹이 뚫고 나오니 참 예쁘기도 하다. 작년에 몇 개 못 따 먹었던 딸기도 절로 더 넓게 퍼졌다. 겨울에 죽은 듯 보이던 딸기 잎들이 저렇게 파릇파릇해 기세 좋게 살아난다는 게 신기하다. 딸기뿐 아니라 파드득나물, 부추 등은 다 매년 다시 심을 필요가 없는 여러해살이풀이다. 한번 심어 놓으면 몇 년이나 심는 과정 없이 가져다 먹기만 하면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 최대한 이런 풀들을 먹고 사는 쪽으로 삶을 바꾸고 싶다.

통장 잔고 고민이 깊어지던 때 개구리 님 덕에 자연농에도 관심이 있으신 읍내의 한 학원 원장님과 인연이 닿았다. 우리 사회의 교육제도와 사교육에 문제의식이 있어 그동안 과외나 학원 알바도 하지 않았는데, 농사도 짓고 다른 일도 하면서 짬을 내어 할 수 있는 일이 이 일이었다. 중학교 1학년 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게 됐는데, 어떻게 하면 비록 학원 수업이나마 단순히 시험에 나올 것들을 외우는 것보다 좀 더 나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을까 고민이다. 실은 잊어버린 것도 많고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초짜라 학원에 폐나 끼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지만 말이다.

새싹이 돋고 새로운 먹을거리도 먹고 일도 새로 시작하니 자연스레 마음가짐도 새로워진다. 이래서 예부터 그렇게 봄이 왔음을 노래했나 보다. 여기서도 다 피할 수 없는 황사와 미세먼지, 밭마다 잔뜩 쌓아 놓은 퇴비 냄새에 얼굴 찡그릴 때도 있지만 시골에 왔으니 시골에서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 봄을 만끽해야겠다.

▲ 김진회 ⓒ김진회(페이스북에서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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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8년 4월호

서울 여자 독일 아줌마로 살기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

조숙현/ 29년째 독일에 살고 있는 아줌마

 

 

창문을 열면 강 건너편 초등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함성 소리가 들립니다. 강 하나 사이에 두고 우리 집 바로 정면에 학교가 있어요. 제 아이들이 나온 초등학교입니다. 독일의 초등학교는 4년 과정이고 2년 지나 반이 갈려요. 1, 2학년이 같은 아이들이고 3학년 때 다른 아이들과 다시 섞어 반을 조성합니다. 담임 선생님도 2번 바뀌는 거죠. 큰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는 정말 힘들었어요. 반에서 유일한 동양인 아이였거든요.


유치원을 같이 다닌 친구들과 같은 학교로 입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는 학교 가는 것을 싫어했어요. 씩씩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인데 많이 울고 짜증도 내고 숫기도 없어지고. 어느 날 아이 노트를 보니 낙서를 했더라고요.

죽고 싶다. 엄마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 같다고 했는데, 왜 아이들이 아이처럼 다 같이 놀지 못하나.”

ⒸPixabay

여덟 살짜리 아이 낙서가 이랬어요. 그 낙서를 본 저는 가슴이 백만 근짜리 무게로 짓눌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아이의 담임 선생님과 면담 약속을 잡고 낙서를 보여 줬습니다. 선생님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몰랐다니. 참 쉬운 대답입니다. 한 학급이 20명에서 22명입니다. 그리고 2년 동안 같은 반 아이들이죠. 그런데 모를까요? 외면한 거겠지요. 그동안 아이들은 큰애의 가방을 빼앗고 안경을 빼앗아 냇물에 던지고 침을 뱉고 칭챙총(동양인 비하 용어)이라는 놀림말을 등 뒤에서 불렀는데 담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놀린 아이의 부모를 찾아가 그러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는데, 그 부모들 반응도 그랬습니다. 아이가 그런 건데 뭘 그렇게 난리냐고.


하지만 낙서를 본 순간 저도 더 이상 참지 못하겠더라고요. 교장 선생님을 찾아가 시정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장은 제게 어머님은 너무 감정적이라며 진정하라고 하데요. 당한 사람은 감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당한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저는 행동하겠습니다라고 했어요. 그러고나서 마을에 전단지를 돌리고 서명을 받고 학부모 회의를 요구했습니다. 마을에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있으면 무조건 찾아갔습니다. 유치원 학부모 회의도 갔습니다. 제발 집에서 다양성에 대해서 교육해 달라고. 독일인도 해외여행을 가면 외국인이 되는 거고 동네에 독일인만 사는 것도 아니지 않느냐. 유치원만 해도 여러 나라 아이들이 있는데 언제까지 아이가 그런 건데라는 대답을 할 거냐고.

ⒸPixabay


한 아버지가 그러더군요. 아이들은 안경 낀 아이도 브릴레 슐랑에(안경뱀)라고 놀리고 주근깨도 놀리고 뚱뚱한 아이도 놀리지 않냐고. 그건 결코 답이 아닙니다. 안경은 렌즈로 교정이 되고 주근깨도 없앨 수 있고 살도 뺄 수 있지만 동양인 엄마한테서 자신의 선택 없이 태어난 아이를 어떤 방법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세상의 다양함을 배우고 느껴야 차별이라는 것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요. 제발 집에서 더러운 외국인이라든지 나쁜 외국인이라는 발언부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습니다. 어른들이 무의식적으로 내뱉는 단어를 아이들이 그대로 습득해 차별을 배운 거라고요.


시장님과도 면담을 했습니다. 시장은 자신이 그 학교의 교사로 근무를 했었는데 몰랐다고, 그런 문제는 없었다고 하더군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동양인인 제 아이가 그 학교에 다니지 않았으니까요. 동양인이 학교에 입학했고 그제서야 생기기 시작한 문제인데 시장인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고 항의했습니다. 저는 그때 독일어를 잘하지 못했을 때였어요. 하지만 울고 다니는 제 아들이, 집 밖으로 나가기 싫어하는 제 아들이, 저를 보고 있기에 세상에 무서운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니 느낄 수도 없었어요. 어찌 됐든 내 아이를 다시 세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저희 집 가족 구성원은 다 외국인입니다. 보스니아 사람인 남편, 한국인인 저, 그리고 혼혈인 두 아이들. 독일 국적을 갖고 있어도 어차피 외모상 이방인인 우리들이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나부터 대항하고 문제 해결점을 찾아야 했습니다. 처음 동네로 이사 왔을 때 저보고 네가 그 일곱 개째 동양인이구나!”라고 말한 할머니께 ! 그래? 독일인은 몇 개가 사는데?”라고 대답했죠. 그리고 니 남편이 널 얼마 주고 샀냐?”고 묻는 어떤 남자에게 내가 내 남편을 샀다고, “체류 허가가 필요해서 내가 샀어. 넌 니 부인 얼마 주고 샀니?”라고 물었더니 자기 부인은 독일 여자라고 대답하더군요. 전 시치미를 뚝 떼고 ! 난 독일 남자는 다 부인을 돈 주고 사는 줄 알았네. 우리는 그냥 서로 좋으면 결혼 하는데!”라는 대답을 줬습니다.


그때는 독일에 매매혼이 한창 성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자국인과 결혼이 힘든 남자들이 매매혼을 참 많이 하던 시절이었어요. 카탈로그를 보고 여성을 고른 뒤에 돈을 지불하고 결혼하는 남자들이 각종 언론 매체를 통해 알려지던 때였습니다. 덕분에 동양인 여성이나 피부색이 검은 여성들은 왠지 팔려 온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었지요. 지금도 그리 나아진 것은 아니지만 예전처럼 대놓고 그러지는 않네요. 저부터 그런 모멸감을 느끼고 살았는데 아이들까지 그렇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싸웠고, 드디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제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도 하고 유치원에서 각 나라의 국기와 위치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에 있는 아이들의 나라말로 인사말을 써서 벽에 붙이고 다문화 교육이 시작됐습니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저는 인사하기를 가르쳤어요. 적어도 예의 없는 놈이라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에서요. 길에서 사람을 보면 구텐 탁!”을 하게 하고 쓰레기가 있으면 줍게 하고 도와주어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솔선수범을 보여 주며 길렀습니다. 제가 집에서 제 부모님께 배운 것처럼요. 빈 병에 동전을 모아서 병이 꽉 차면 기부를 하는 습관도 들여 줬습니다. 그 습관은 아이들이 성년이 된 지금도 지키고 있습니다. 운동도 열심히 시켰어요. 절대로 타인을 먼저 때리면 안 되지만 공격받았을 때 스스로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운동을 하면서 속에 담은 화도 스스로 풀어 갈 수 있고 힘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것도 배우기 때문에 아주 잘한 결정 같습니다. 그렇게 2년을 마을에서 외국인 차별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더군요. 이만하면 정말 큰일을 해 놨다! 싶었어요.


몇 년 후에 한국의 방송사에서 독일의 다문화 정책에 관한 방송 문의가 왔습니다. “옳다구나!” 싶어 우리 동네와 주변 학교를 텔레비전 방송 카메라와 함께 인터뷰하러 다녔습니다. 시장은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우리 동네는 그런 차별 문제 없이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물론 제 눈치를 엄청 보셨지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맞은편 학교 운동장에서는 아이들이 평화롭게 놀고 있습니다. 항상 저렇게, 아이들이 아이라는 가장 큰 공통점 하나로 즐겁게 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 모든 곳에 말간 얼굴의 반짝이는 눈동자로 살았던 아이들이 자라서 평화와 조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우리라는 단어가 공통분모를 가진 나뉨의 단어가 아닌 모두를 어우르는 교집합이길 바랍니다. 옛 생각을 하면서 두드리는 자판이 많이 떨렸습니다. 오래된 일이고 지금은 엄청난 친구들을 몰고 다니는 아이들인데도 어렸을 때 그 기억은 참 많이 아프네요. 글을 쓰는 엄마 손가락은 아직도 부르르 떨리는데 아이들 가슴은 그때 얼마나 아팠을까요. 그래도 모나지 않고 예의 바르고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사람으로 커 준 아이들에게 참 감사하며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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