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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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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3. 13. 13:17 기획 특집


[강사 소개]

박홍규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로서 영남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전공뿐만 아니라 인문,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영국의 진보적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를 조명한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베토벤의 삶과 음악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베토벤평전: 갈등의 삶, 초원의 예술》, 오페라를 그 시대 정치와 사회의 관점에서 살펴본 《비바 오페라》, 빈센트 반 고흐의 예술 세계를 그린 《내 친구 빈센트》 루쉰의 사상과 문학 전체를 넓은 시야에서 조망한 《자유인 루쉰》, 자유 학교를 위한 순교자로 알려진 페레의 생애를 쓴 《꽃으로도 아이를 때리지 마라》 등의 책들을 집필하였으며,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대상 저작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 등을 국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기도 하였다.



2호선 - 첫 번째 방법: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왼쪽으로 도세요. 빵 가게와 정비공장 사이 '마포만두' 골목으로 10분만 쭉 가시면(중간에 부동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버스 다니는 큰 길이 나옵니다.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HP컴퓨터' 가게를 끼고) 3분 가다 보면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 '문턱없는 밥집'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세요. (전체시간 13분)

2호선- 두 번째 방법(길을 잘 못 찾으시는 분은)-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똑바로 5분 정도 가시면 '우리은행'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7분 정도 가다가 큰 사거리 '서교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서교교회'가 나오고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이렇게 오실 때는 조금 돌지만 헤맬 걱정이 없습니다) 큰 길가에 있습니다. 1층엔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가 있습니다. (전체시간 15분)

6호선 -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오세요. 왼쪽으로 4분 가시다 보면 '성산초교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5분 가세요. 'HP컴퓨터' 가게 지나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전체시간 10분)

작은책 전화 (02)323-5391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작은책 사무실은 5층이지만 겉에서 보면 4층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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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어빵을 굽는 예수' 이적 목사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안건모




민통선에서 공부방을 하는 목사? 밤에는 횟집 주인, 낮에는 횟집에서 독거 노인 밥 주는 목사? 붕어빵을 파는 목사? 들으면 들을 수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12월 11일 5시, 횟집을 찾아갔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불광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횟집, <이적 시인의 -‘바다가 된 그대에게’ 사량도 세꼬시>라는 이름으로 된 간판이 보였다.

8평 정도 되는 가게에 탁자가 네 개,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보던 이적 목사가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적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언제 목사님이 되셨냐고 물었다.

“80년 대에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묘한 이유로’ 쫓겨나게 되죠.”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이 집권하고 계엄 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전두환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적 목사는 그 조찬기도회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담임 목사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 길로 이적 목사는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고는 전도사 생활을 접었다.
그 뒤 이적 목사는 지방 일간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80년 10월 느닷없이 삼청교육대로 억울하게 끌려 들어간다.

“산꼭대기 동네에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공원에 깡패들 득실거려 경찰 단속 손길 아쉽다” 하는 시민들 편을 드는 기사를 좀 썼을 뿐이었다.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왜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이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붕어빵을 굽고 있는 이적 목사 ⓒ 안건모


그리고 악몽 같은 4주를 보냈다.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들은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삼청근로봉사대 6개월 언도(?)를 내린다. “삼청근로봉사대를 갔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고. 밤이 되면 눈보라 몰아치고 영하 15도 회오리 바람 몰아치는 야밤중에, 팬티만 달랑 입혀 놓고, 연병장에 세워 둬, 거기다가 두 팔 두 다리 벌려 세워 놓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 가지고 와 몸에다 물을 뿌리는 거야, 물방울이 탁탁 튐과 동시에 물방울이 몸에 얼어 붙어 와, 그런 살인적 추위 상상도 못해 봤어.”

임근실이라는 사람이 2소대에서 이적 목사가 있던 3소대로 옮겨 왔다. 임근실 씨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욕도 막 했다. 불침번 서라 하면 “민간인인 내가 왜 불침번을 서냐 ”하며 반항하고 대들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인 악질 조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 친구는 매일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 친구 밤마다 불려 나가서 그 겨울에 물고문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 얼굴이 아니야. 나도 같이 물고문을 받았는데 조교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한테 ‘당신은 글쟁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살아나가서 글을 써서 자기 죽음과 삼청을 폭로해 달라’ 그러는 거야.”

그날 임근실 씨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견딜 수 없어 개집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자 조교들은 개집 구멍을 하늘로 올려놓고 찬 물을 퍼부어 댔다. 임근실 씨는 개집 안에서 요동을 쳤다. 그 뒷날 임근실 씨는 시체로 들려 나갔다.

이적 목사는 꼭 살아 나가서 삼청교육대의 만행과 그이의 죽음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사회보호법’을 만들어 이적 목사를 군 감호소로, 또 청송 감호소로 이감을 보내면서 삼청 최장기수로 만들었다. 이적 목사는 84년 4월 3년여 만에 이른바 모범수로 가출옥을 해 살아나오게 된다.
하지만 바깥도 감옥이었다. 사기꾼, 빨갱이, 깡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다. 이적 목사는 임근실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청폭로 미수 사건인 양곡상 침투사건으로 공무원자격 사칭, 공갈 등의 파렴치 죄로 조작되어 다시 8개월, 10개월,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 이적 목사가 운영하는 횟집 ⓒ 안건모


이적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인 민족문학에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는 10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삼청 실록수기《삼청교육대 정화 작전》(도서출판 전예원)을 출간한다.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혹성에 몸서리를 쳤다. 심지어 군사정권에 아부했던 조중동까지 ‘삼청교육대 사망자 사인 의혹 많다’, ‘생체실험의 수기다’, ‘한국판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과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 보내면서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그이를 만난 뒤 당내에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권을 압박한다.

이적 목사는 김대중을 대통령 만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대변인, 지역선거대책위원장, 중앙당 부위원장, 선거 연설원을 지내며 김대중을 도왔다.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 길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관변단체가 하나 생겼어, 월급은 없었는데 거기 본부장을 맡으라 그러더라고.”

취임식을 하는 날 친인척한테 받은 단체 후원금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적은 민통선에 자신이 건립했던 통일 문학관으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글 쓰러 들어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통선에 들어간 날 느닷없이 청빈한 참예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기독교가 망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며 참예수의 변혁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니냐. 내가 욕했던 거는 여의도 ㅈ목사와 같은, 한국의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미웠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 귀신 예수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 거룩한 삶을 본받아서 실천해 나간다면 나야말로 참예수의 그림자라도 되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자, 이렇게 판단한 거지.”

△ 민통선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 ⓒ 안건모


이적 목사는 신학대를 편입했다.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민통선 마을에 빈민 운동을 자원한다. 그리고 알콜중독자 자녀를 위한 아동공동체와 민통선 공부방을 만들었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고쳐 민통선 평화교회도 설립했다. 신자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헌금이 없으니 아동공동체와 공부방 운영하기가 벅찼다. 무료급식과 아동장학사업, 보육사업, 차상위계층자녀발굴보호사업, 체험학습 등 많은 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후원금 들어오는 곳은 적었다. 그래서 이적 목사는 공동체 운영하기 위해 불광천에 횟집을 차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도 공동체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구나 불광천 근처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까지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독거노인급식소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이의 목회를 좋아하는 서울 교인들과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를 만들어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교인들한테 십일조 헌금 받아서 사랑을 실천했나? 그분 스스로 대중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전도하며 평화를 외치며 박애와 사랑을 실천했단 말이야, 목사의 삶이 예수의 삶처럼 그렇게 돼야 하는 거 아녀? 그래서 내가 만분의 일이라도 그분 흉내라도 내 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렇구나. 예수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구나. 한국의 기독교를 싫어하면서 예수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적 목사를 보고 예수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적 목사가 이번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다시 책을 낸다. 《민통선 예수》라는 책이 현재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명박 장로를 비롯해 그 하수인들, 부디 그 책을 읽고 회개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멘!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 진보월간 <작은책> www.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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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24. 10:29 알림 / 엮은이의 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8  엮은이가 독자에게
    9  원고를 기다립니다
   10  작은책을 읽고
   11  따르릉! 작은책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2  곱게 자란 내가 운전을 한다    유이분
16  딸과 핸드폰    고경은
20  횡재     이근제
22  활동 보조는 ‘좋은 일’이 아니다     조호제
26   여성의 일과 삶  
      초상     안미선
30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이성수
32  살아온 이야기(3) 을호사택     황인오
38  오도엽의 일터 탐방  
      제발 일 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44  사진 한 장, 느낌 한 줄  
45  일터에서 온 소식
       목숨을 건 이 사랑을 기억하라    서해식
49   세상의 중심에서 십 대가 외친다
      고3이 그렇게 고달픈 건가요?    이예지
53  이야기가 있는 들녘  
      ‘엄마’ 같은 선생님들    김형주
기획 특집 _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진보여, 맨발로 뛰어라   조국
58  강좌
76  뒷이야기    양두승
79   만화로 보는 세상    이성열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80   안건모의 삐딱한 글쓰기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글도 쓰지 말라  
     84    깐깐선생의 글 뜯어보기   누가 누구한테 해코지를 해?    
   88   개구리박사의 다시 보는 좋은 글  여전히 위태로운 철거민들  



세상 보기
  
    92  최영주 노무사의 현장 노동법 이야기   해고된 버스 기사가 복직하는 방법      
    94  생각해 봅시다 (1)   ‘외부 세력’ 태헌 아저씨    최인기
    98  생각해 봅시다 (2)   재판정에서 잠자는 공안검사와 독재정권    하유진
   101  나라 밖 소식  점령과 봉쇄 그리고 전범 면죄부    이유경
    105  정태인의 쉬운 경제 이야기  용산 참사와 스톡홀름 신드롬    
   109  우리 밖의 우리   울타리를 걷고 사랑하는 마음    최금희
  113  인물 바로 보기    ‘비즈니스 프렌들리’에서 ‘저팬 프렌들리’로    방학진
  117  ㅋㅋㅋ 누리꾼 세상   이명박 시리즈
  118  하종강의 숙제 검사   군더더기가 필요 없는 솔직한 글      


쉬엄쉬엄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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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8  추억 따라 역사 따라  사의 찬미에서 부용산으로    박준성
  132  노동자 문화 산책  나는 인디언이다    박홍규
  136  영화 이야기   론 하워드 감독의 <프로스트 VS 닉슨>    강성률
  140  생태 이야기   봄 가뭄의 근본 해결책    박병상
  144  함께 읽고 싶은 책   앎이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김승태
  146  한 뼘 공연 소개   연극 <삽질>    최규화
  147  한 뼘 책 소개   마르크스가 들려주는 자본론 이야기    유혜림
  148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51  독자사업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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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
2009. 2. 10. 15:27 기획 특집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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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

고화숙/ 전국공무원노조 인천본부 문화국장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은 공무원노조 조합원이자 간부이고 현직 지부장과 지부장을 역임했던 사람들이다. 쪼코형님은 공무원이었는데 2004년 파업 투쟁 이후 파면돼서 지금은 해고자다. 박 주사님도 해고되었지만 복직돼서 지금은 동사무소에서 근무하신다.

두 분 다 50대고 공무원 6급 팀장이거나 이었다. 쪼코형님은 5부 스포츠에 흰머리고, 박 주사님은 2대8 가르마에 새까만 머리칼이다. 쪼코형님은 거의 매일 술을 드시고 박 주사님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공무원노조 인천본부에서 일하는 일꾼이다.

쪼코형님이라 하는 이유는 대화할 때 어느 지점에서 끊거나 정리할 때 ‘좋고’ 하신다. 발음 그대로 따면 ‘쪼코’가 돼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쪼코형님은 누구나 ‘형님’하고 부르고 싶을 만큼 친근함과, 비호감을 동시에 갖고 있다.

술자리에서 말의 반은 씨팔이고 양념이 좆도 혹은 개시끼들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은 놀랄 수도 있겠다. 말투가 그런 거지 아랫사람이라고 하대하는 법도 없고 남 얘기도 잘 들어 주신다. 그래서 쪼코형님하고 만나면 즐겁다.

박 주사님은 마주 대하는 즉시 노조 지부장님보다는 주사님 하는 게 훨씬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확 들게 한다.

예전에 한번 ‘어떤 공무원’이라는 제목으로 작은책에 글을 쓴 적이 있는데 그 주인공이 바로 박 주사님이다. 삶은 호박에 이도 안 들어갈 만큼 척 보는 즉시 ‘깐깐’ 이렇게 써 있다고나 할까.

두 분의 재미난 공통점은 노동조합 운동을 직접 하고 있으면서 ‘노동운동’에 대해서 주입하지 말라고 하신다는 거다. 50대다우신 태도이다.

사실 난 두 분과 그런 거창한 주제로 대화하고 싶은 생각이 별로 없어서 어려운 얘기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런데도 무슨 말을 하려고 하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좌우로 흔드신다.

이런 일도 있었다. 전교조 선생님이 쓴 좋은 글이 하나 있어서 박 주사님한테 ‘이런 문제에 대해 공무원노조도 같이 공감할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니까 읽어보기도 전에 ‘나한테 노동운동에 대해 주입하지 말라니까’ 하신다. 그래서 막 웃었다.
쪼코형님의 7년 간 변하지 않는 레퍼토리도 “일반 사기업과 공무원은 다릅니다잉”이다.

물론 어떤 조직이나 일반성과 특수성은 있는 거고 노동자라고 해서 똑같을 수는 없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도 굳이 매번 다르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 ‘특수성’을 강조하고 싶은 건데 ‘틀렸다거나 아니’라고 반론하지도 않는데도 매번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속으로는 ‘누가 머라나’ 하면서 웃는다.

그리고 또 하나 공통점은 노조에 대해 맨날 흉보면서도 노조 행사 때는 빠짐없이 참석하고 챙기신다는 거다.

“그 시끼들 말이야 일을 그따위로 하고 말이야.” 이게 쪼코형님 버전이고 “노조에 전망이 없어요. 공무원노조를 도대체 왜 만든 거예요. 조합원들한테 아무것도 해 줄 게 없는 노조가 노좁니까.” 이런 정갈한 어투가 박 주사님 버전이다. 맨날 전망이 없다면서 박 주사님은 무려 두개 지역의 지부장을 하시고 계시다. 워낙 자주 하는 말씀이니 남들은 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그 꼴을 못 보는 정씨의 버럭 한마디.

“아니, 어르신들이 어떻게 하면 도와줄까, 어떻게 해야 잘될까, 이런 말씀은 안 하시고 맨날 남 탓만 하고 김 빼고 뭐지?”

보통 이분들과 나누는 대화의 장면이 이렇다.

이런 독특한 특징을 가진 두 분과 깊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쪼코형님과 대화를 나누다 말 끝에 ‘원죄 의식’이란 단어가 튀어나왔는데 본인이 정말 그런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면서 간만에 욕 안 하고 착잡한 표정과 말투로 “나는 괜찮은데 말이야 나 때문에 괜히 해고당한 사람들 보면 참 마음이 너무 아파”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파업 당시 지부장이었던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짠했다.

박 주사님의 걱정은 좀 다르다. 전교조는 해고 기간이 길더라도 복직돼서 현직으로 가면 일할 수 있지만 공무원은 설령 복직이 돼서 현직으로 돌아가더라도 일하기 어렵다는 거다. 일리 있는 말이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공무원 사회에 지금도 5년인데 이보다 더 긴 세월을 떨어져 있다가 들어가서 적응하는 게 단순히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불가능일수도 있겠다 싶다. 까마득한 후배들 눈치부터 부딪혀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첩첩산중이겠는가. 이런 두 분의 고민을 들으면서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이 글을 쓴다.

공무원이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로 파업을 했다. 하루 혹은 이틀 정도 결근을 했고 그만한 일로 정부는 무려 400여 명을 공직 사회에서 내쫓았다. 대부분은 복직 판결을 받았으나 130여 명은 정말 쫓겨났다.

아비를 아비로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나 노동자인데 제대로 권한 행사를 할 수 있는 노동조합을 만들지 못하는 공무원이나 다른 게 뭘까. 공무원노동조합이 생기면서 겉으로 드러나 나타나는 변화보다 더 중요하게 내부 정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공무원노동조합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과제들이 높고 많다 보니 작은 변화에 둔감할 수도 있지만 아무튼 공무원 사회가 훨씬 깨끗해져 가고 있다는 건 확실하다. 그런 노동조합을 만들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님 같은 분들이다.

쌀 직불금을 부정한 방법으로 수령해 간 공무원들, 여전히 검은 뒷거래에 가담하고 있는 공무원들은 고개 빳빳이 들고 사는데 쪼코형님과 박 주사님의 어깨는 오늘도 무겁다. 잘못된 세상이다.

다른 것도 아니고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만들어 달라는 소박한 요구가 폭력으로 돌아오는 사회, 그것도 생존권까지 박탈해 가는 잔인한 사회는 참 나쁘다. 나쁜 사회를 바꿔 보겠다고 처지는 고개와 무거운 어깨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쪼코형님이나 박 주사 님같은 사람들…….

물론 지금 사회는 훨씬 더 비참한 노동자들이 즐비하다. 기륭이 그렇고 이랜드가 그렇고 인천 GM대우 비정규 노동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조금 덜 비참하다고 해서 공무원 노동자들의 해고 문제가 소홀해져야 할 이유는 없다. 정부이기 때문에 솔선해서 잘못된 매듭을 푸는 모범을 보이고 이를 계기로 나쁜 자본의 횡포를 줄여 가는 건 꿈에나 불과한 일일까.

이런 마음을 담아 해고된 공무원 노동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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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민들에게 살인 테러 자행한 이명박 정권 규탄한다
   용산 철거민 살인 진압 규탄 성명


  지난 1월 20일 아침, 우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 용산구에 있는 한 건물에서 농성을 하고 있던 철거민들을 경찰특공대가 과잉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너 폭발에 따른 화재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원 한 명이 숨졌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정말 우리가 21세기의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 만큼 놀랍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후안무치한 경찰의 책임 회피와 은폐 공작을 보면서, 우리는 이 안타까운 죽음에 대해 마음 아파 할 시간도 없이 다시금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지난 세기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나 있었을 법한 살인적 진압 작전과 경찰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위한 사건 조작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고 있다. 경찰이 농성을 시작한 지 세 시간 반밖에 지나지 않은 시각에 이미 경찰특공대 투입을 결정했다는 내부 문서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철거민들이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테러 행위를 했기 때문에 조기 진압을 결정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지만, 철거민들이 화염병을 손에 들기도 전에 이미 그들은 살인적 진압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은 60여 통의 시너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도 화재에 대한 대비 하나 없이 농성장을 침탈했다. 아래층으로 향하는 문을 막아둔 채 옥상으로 경찰특공대를 투입시키는 바람에 철거민들이 건물 아래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음에도 건물 아래에는 매트리스 하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경찰특공대를 태운 컨테이너가 기중기에 의해 건물 옥상으로 내려지면서 철거민들이 농성하고 있던 망루를 건드렸고 그 충격으로 인해 폭발이 일어난 것 같다고 입을 모았지만, 경찰은 철거민들이 들고 있던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났다고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경찰이 사망자들을 두 번씩 죽이고 있는 작태는 정말 치가 떨리도록 뻔뻔스럽다. 사건이 일어난 지 열두 시간도 되지 않아 유가족의 동의도 없이 시신을 부검해 놓고는,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망자가 입고 있던 옷에서는 주민등록증이 버젓이 발견되었다. 부검 결과도 발표하지 않고, 20여 명에 이르는 부상자들이 어디에 입원해 있는지, 얼마나 다쳤는지조차 밝히지 않는 경찰의 은폐 공작을 보면서 정말 사망자와 부상자들의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과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전 · 현직 경찰관 모임인 ‘무궁화클럽’의 대표조차 “이번 참사는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의 과잉 충성에서 빚어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온 국민들의 비난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가운데, 경찰과 한나라당의 뻔뻔한 언행은 끝을 모르고 계속되고 있다. 경찰특공대의 투입을 최종 승인한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는 “그래도 법질서는 중요하다”며 계속해서 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고, 한나라당 의원들은 전국철거민연합과 민주노동당을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며 ‘반국가단체’ 라는 말까지 입에 담고 있다.

  하지만 국민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제 집 한 칸 지키자던 사람들을 테러리스트로 몰아세우고, 살인 진압 명령을 내린 리모컨을 쥔 자가 누구인지. 바로 뉴타운과 개발 이익에 미친 건설 재벌과 그들의 ‘사권력’이 되어 버린 공권력이 합심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죽인 것이다. 이 나라의 권력이란 가진 자들의 이익 추구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무엇이든 처단해야 할, 진압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번 만행을 통해 국민들은 똑똑히 알게 되었다.

  경찰이 “그래도 법질서는 중요하다”며 철거민들의 목숨을 빼앗으면서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질서’는 못 가진 자들이 가진 자들의 밑에서 고분고분 빼앗기는 질서, 고분고분 쫓겨나가는 질서만을 말할 뿐이다. 하지만 그 어떤 법도 살아남을 권리에 앞서지 못한다. 한겨울 보금자리를 뺏기고 거리로 내몰린 철거민들의 살아남을 권리를 통째로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뻔뻔스러운 사건 조작과 정당성 주장을 일삼고 있는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또 다시 촛불을 들고 나선 국민들의 뜨거운 저항을 절대로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 철거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살인 진압 규탄한다!
― 살인 진압, 은폐 공작 책임자를 처벌하라!
― 노동자 민중 다 죽이는 이명박 정권 규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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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15. 10:59 기획 특집




2호선 - 첫 번째 방법: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왼쪽으로 도세요. 빵 가게와 정비공장 사이 '마포만두' 골목으로 10분만 쭉 가시면(중간에 부동산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시면 안 됩니다.) 버스 다니는 큰 길이 나옵니다. 큰 길에서 오른쪽으로('HP컴퓨터' 가게를 끼고) 3분 가다 보면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 '문턱없는 밥집' 사이에 있는 문으로 들어오세요. (전체시간 13분)

2호선- 두 번째 방법(길을 잘 못 찾으시는 분은)-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오셔서 똑바로 5분 정도 가시면 '우리은행' 사거리가 나옵니다. 거기서 왼쪽으로 7분 정도 가다가 큰 사거리 '서교가든'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바로 '서교교회'가 나오고 교회 오른쪽에 있는 건물입니다.(이렇게 오실 때는 조금 돌지만 헤맬 걱정이 없습니다) 큰 길가에 있습니다. 1층엔 '문턱없는 밥집'과 '기분좋은 가게'가 있습니다. (전체시간 15분)

6호선 - 망원역 1번 출구로 나오세요. 왼쪽으로 4분 가시다 보면 '성산초교사거리'가 나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자마자 왼쪽으로 5분 가세요. 'HP컴퓨터' 가게 지나 '기분좋은 가게'가 나옵니다.(전체시간 10분)

작은책 전화 (02)323-5391
주소-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5층
작은책 사무실은 5층이지만 겉에서 보면 4층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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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12. 26. 10:24 알림 / 엮은이의 글

 

4 사진으로 보는 사람 이야기

10 엮은이가 독자에게

11 원고를 기다립니다

12 작은책을 읽고

13 따르릉! 작은책입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불쌍한 친구  장남길

18 미안합니다  오정현

21 3년 만에 당선된 ‘운동권’ 총학생회  박재균

23 까칠한 아들 키우기  이남옥

28 나를 채찍질하는 수업  이혜숙

33 여성의 일과 삶

전화기 켜 놓으세요  유이분

38 타조알 선생의 교단 일기  이성수

40 살아온 이야기 (1) 탄광촌을 떠돌며 자란 어린 시절  황인오

46 오도엽의 일터 탐방

노동자를 노동자라 부르지 못하고

52 일터에서 온 소식 (1)

법원, 너마저도 우리를  김은경

58 일터에서 온 소식 (2)

선생님, 우리랑 같이 졸업 못해요?  정상용

62 세상의 중심에서 십대가 외친다

서울은 마을이 없다  김수민

66 이야기가 있는 들녘

난, 착하게 살고 싶을 뿐이고  이진천

 

기획 특집 _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

박정희와 이명박  진중권

 

72 강좌

86 질문과 답변

92 뒷이야기  정지선

95 만화로 보는 세상  이성열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96 안건모의 삐딱한 글쓰기

100 깐깐선생의 글 뜯어보기

104 개구리박사의 다시 읽은 좋은 글

 

세상 보기

 

108 최영주 노무사의 현장 노동법 이야기  아기도 소중했고 돈도 벌고 싶었다

111 생각해 봅시다(1)  택시 운전사가 살길  기우석

115 생각해 봅시다(2)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민경우

119 나라 밖 소식  카슈미르분쟁, 인도와 파키스탄 갈등  김재명

123 정태인의 쉬운 경제 이야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127 ㅋㅋㅋ 누리꾼 세상

128 우리 밖의 우리  또 다시 희망의 땅을 찾아서  최금희

133 인물 바로 보기  곽태영과 권중희  방학진

 

쉬엄쉬엄 가요

 

137 여민락  저 가마가 식을 때까지  김산하

143 추억 따라 역사 따라  붕어빵과 풀빵  박준성

149 노동자 문화 산책  도스토예프스키  박홍규

153 영화 이야기  미야자키 하야오의 <벼랑 위의 포뇨>  강성률

156 생태 이야기  우주복 입고 살까?  박병상

160 함께 읽고 싶은 책  고맙고 또 고마울 따름이다  김승태

162 한 뼘 책 소개  그래도 열여덟은 아름답다  유혜림

163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67 독자사업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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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살리는 병원, 노동자는 파리 목숨
오도엽의 일터 탐방

오도엽/ <작은책> 객원기자

추석을 앞둔 9월 10일 강남고속터미널 너머에 있는 강남성모병원을 찾았다. 터미널과 병원을 잇는 육교에 올라서자 웅장한 글씨가 눈을 가로막는다. ‘2009년 5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개원합니다.’ 이천억 원을 들여 짓는다는 가톨릭 대학교 서울성모병원.

강남성모병원에서 간호사와 호흡을 맞춰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파견업체를 통해서 고용된 사람들이다. 2년을 계약하고 들어왔고, 계약 기간이 지나면 당연히 나가야 한다. 계약을 그리하고 일을 시작했으니 말이다. 해고에 아무 문제가 없다. 2006년 10월 1일에 파견업체에 고용되어 2년을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으니 2008년 9월 30일에는 계약대로 집에 가서 푹 쉬면 그만이다. 법을 기계처럼 적용하면 그렇다는 말이다. 하지만 법이란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병원. 그것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이 일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파리 목숨으로 여기면 안 된다.

홍석. 그는 서른일곱이다. 가톨릭 집안에서 자란 홍석 씨는 5년 전 자신이 다니던 성당을 통해 강남성모병원에 취직을 했다. 이때는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을 맺었다. 홍석 씨는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돈보다는 환자들에게 봉사도 하고 사랑을 나눈다는 마음으로 고된 일도 흥겹게 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2006년 9월 28일, 낡아서 잘 굴러가지도 않는 침대를 힘겹게 엘리베이터에 밀어 넣으며 침대에 누운 환자를 검사실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호출기가 울렸다.

“파견업체로 가라는 거예요. 더는 병원에서 직접 고용을 할 수 없다는 거예요. 딱 3일 남겨 두고 파견업체로 가든지 아니면 출근을 하지 말든지 선택을 하라는 거예요. 정말 얼떨결에 파견업체로 간 거예요. 별 수 없잖아요. 파견업체로 가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에 나앉을 판인데, 그것도 3일 남겨 놓고 통보를 하는데 어쩌겠어요.”


△ 9월 9일 정문 앞에서 피켓을 들고 항의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비정규직 철폐하라>를 외치고 있다. ⓒ 작은책


홍석 씨만이 아니었다. 간호 보조 업무는 2002년 이전에는 모두 정규직이 담당하던 일이었다. 이 업무를 비정규직으로 고용 형태를 바꾸더니 2006년에는 파견업체로 떠민 것이다. 노동자들은 선택을 할 생각은커녕 시간의 여유도 가질 수 없었다. 시장에서 파는 채소와 다를 바 없다. 천 원에 팔리다가 해질녘에는 오백 원에 막판 떨이 신세가 되어도 그냥 이 손에서 저 손으로 팔려 나가면 그만인 존재다.

올해 서른둘인 이미경 씨도 마찬가지다. 다니던 회사가 다른 곳으로 이전을 하자 이미경 씨는 새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때 강남성모병원에서 사람을 뽑고 있었다. 3교대로 일을 한다지만 하루 8시간 근무니 해 볼 만했다. 물론 강남성모병원과 근로계약서를 썼다. 이리 큰 병원이면 안정되게 일을 할 수 있으니라 생각했다. 막상 일을 시작하니 장난이 아니다. 말이 8시간 근무지, 잠시도 숨 돌릴 겨를이 없다. 꼬박 8시간을 잔걸음으로 쉴 새 없이 뛰면서 근무를 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겨우 짬을 내서 식당으로 가 식판에 밥을 푸는 순간 호출기가 울린다. 호출기가 울리면 허기졌던 뱃속과는 달리 입맛이 싹 사라진다. 식판의 밥은 고스란히 잔반통으로 들어가기가 일쑤다. 제 시간에 근무가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늘 30분에서 한 시간은 잔업을 해야 한다. 수당도 없는데 말이다. 환자를 수술실로 옮기다가 퇴근시간이라고 나갈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자신이 담당한 환자의 일은 교대 근무자가 오더라도 자신이 끝내는 것이 마음이 놓인다. 보조 업무라 하지만 사람을, 그것도 아픈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고, 생명을 다루는 일이 아닌가. 집에 들어오면 녹초가 된다. 하루 8시간 넘게 병원 복도와 층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녔으니 집에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다. 그리고 몸이 아픈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그 긴장은 육체의 피로를 몇 곱으로 가중시킨다.


△ 9월 9일 강남성모병원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는 조합원들. ⓒ 작은책


물론 이미경 씨도 홍석 씨가 있던 자리에 2년 전에 함께 있었다.

“너무 억울했어요. 찍소리도 못하고 파견업체로 팔려 간 거잖아요. 배추 시래기처럼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그날 황당하게 파견업체로 버려진 사람들이 터미널 앞 호프집에 모여서 술을 한잔했어요. 울기도 하고 욕도 하고. 그러면서 다짐을 했죠. 이건 아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당하지 말자.”

그리고 두 해가 지나고 9월이 왔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와 배추 시래기가 된 간호 보조 업무를 하던 파견사원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한참을 성모상 앞에서 기도를 했다.

홍석 씨와 이미경 씨에게, 강남성모병원 간호 보조 업무 파견 직원들에게 “2년 계약하고 들어왔으면서 이제 와서 못 나가겠다고 하는 게 말이 되냐?”하며 손가락질할 사람 있습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 고용된 직원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강남성모병원에 고용된 사람입니까? 이들이 파견업체에서 일했습니까, 강남성모병원에서 일했습니까? 이들이 찍소리 하지 않고 나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 가라사대 하늘을 만들고 땅을 만들고 나무를 만들고 꽃을 만들었듯이, 강남성모병원 가라사대 간호 보조 업무가 정규직이 되라 하고 비정규직이 되라 하고 파견직이 되라 하면, 그 가라사대에 따라 고용의 형태가 바뀌는 것이 가톨릭의 정신입니까? 그게 생명 존중입니까? 수천억을 들여 짓는 새 병원 담벼락에 자랑스럽게 써 둔 ‘생명을 존중하는 첨단 병원’이 성모 마리아의 모습인가요? 새 병원에는 70평짜리 초호화 병실을 만든다고 하는데요, 기업 CEO들이 입원을 해서도 회의를 할 수 있는 초특급 병실을 갖춘다고 하는데요, 가톨릭에서는 돈 있는 사람만 받아들이고, 돈 없는 이들은 2년마다 해고를 묵묵히 감수하며 일하는 세상이 옳은가요?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간호부 소속 사원으로 되어있던데, 간호부의 부장님 과장님들이 수녀님이시던데, 수녀님! 당신 부서의 사원들이 시장판 배추 시래기 취급을 받고 있는데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심지어 앞장서시는 것이 당신이 믿는 신앙에 따른 행동이신가요?

그리고 추석이 지났다. 강남성모병원에 비정규노동자들이 천막을 쳤다는 소식이 들렸다. 천막이 세워진 몇 시간 뒤 강남성모병원이 용역업체 직원들을 동원해 천막을 철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병원에서 천막을 철거하는 과정에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폭행을 당했다는, 소리도 들렸다. 이런 일이 세 번이나 들려왔다.


△ 농성장 천막에 내걸린 현수막. ⓒ 작은책


9월 30일.

홍석 씨와 이미경 씨의 강남성모병원 마지막 근무하는 날 찾아갔다. 스무날 전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던 이미경 씨의 눈이 탱탱 부어 있었다. 웃을 때마다 콧잔등에 주름을 가득 지으며 까르르 자지러지던 이미경 씨는 보이지 않았다. 분홍 근무복 위에는 가을 하늘 빛깔을 가득 담은 조끼를 입었다. 결국 조끼를 입고 마는 구나. 칙칙한 청색도 뜨겁게 달궈진 붉은색도 아닌 가을 하늘빛 조끼라 마음이 조금은 놓였다. 설마 저 푸른 가을 하늘이 이들의 소박한 소망을 저버리겠는가 하는 위안을 했다.

“언제부터 로비에서 연좌 농성을 들어가셨어요?”

“연좌 농성 아니에요. 아침부터 병원 돌며 저희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로비에서 환자들과 보호자들에게 왜 저희가 이런지 호소를 하는데 무릎이 팍 꺾여 이 자리에 주저앉은 거예요. 그동안 설움이 복받쳐 올라 주저앉아 있는 거예요.”

인사팀 직원들이 다가와 설움에 복받쳐 주저앉은 이들에게 나가라며 협박을 하였고, 병원의 연락을 받은 서초경찰서는 정보과 형사를 보내 연행을 하겠다고 통보를 한다. 일어설 힘조차 없는 노동자들은 연행을 하든 말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투석을 받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온다는, 자신도 아이엠에프 때 정리해고를 당했다는 아저씨 한 분은 꼭 강남성모병원에서 계속 일을 하라며 요구르트를 건넨다. 휠체어에 링거를 달고 온 한 환자 분은 바나나 우유와 빵을 담은 하얀 비닐봉지 2개를 건네고 사라진다. 비닐봉지를 열던 박정화 조합원이 갑자기 굵은 눈물을 쏟아 내며 병원 로비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달려갔더니 손에 자그마한 쪽지 하나를 보여준다. 방금 전 우유를 건넨 환자가 봉지 안에 담아둔 쪽지다.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


△ 어느 환자가 투쟁 중인 조합원에게 건넨 음료수와 <힘내세요. 좋은 결과 있기를 기도하며 응원합니다.>가 적힌 쪽지를 보고 있다. ⓒ 작은책


이미경 씨 병동에 있던 분이라고 한다. 환자들은 안다. 이들이 얼마나 병원에서 소중한 사람인지를. 아픈 자신들에게 이들이 보여 준 헌신과 애정을 환자들은 안다. 함께 일한 간호사들도 알고, 병원 청소를 하는 용역 아줌마들도 알고, 주차 관리를 하는 용역 아저씨들도 안다. 파견 간호 보조 업무를 하는 이들이 강남성모병원 직원임을 알고, 반드시 함께 일을 해야 하는 사람임을 알고 있다. 정말 환자들의 생명 존중만큼 노동자의 생명도 존중받아야 함을 세상은 알고 있다.

약물로도 수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병이 2009년 광우병, 멜라민과 함께 온 사회를 엄습하고 있다. 비정규직,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는 사회가 무섭다. 가톨릭에서조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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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인지 집착인지
   김신애/ 가사 노동자


언젠가 어머님 일로 신랑과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시부모님이 서울에 오신 어느 날 저녁. 반찬으로 된장국을 끓여 놓았는데 외출하고 들어오신 시부모님이 동태찌개가 드시고 싶다고 했다. 시간이 벌써 6시가 가까워져 “내일 끓여 드릴게요” 했는데 싫다고 하시며 지금 끓이라고 하셨다.

주섬주섬 챙겨서 집을 나섰는데 눈물이 흘렀다. 동태를 사다가 다시 저녁을 지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신랑을 마중 나갔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던 걸까? 다른 말은 필요없다. 그저 “수고했어” 한마디면 모든 것이 평화로우련만, 이 바보 같은 신랑은 여자 맘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그래서? 해 드렸으면 된 거 아니야? 그 정도도 못해? ”

위로받고 싶은 나의 마음에 독침을 꽂는다.

“뭐야?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

그렇게 몇마디 주고받는데 어느 순간 스스로 감정이 격해진 신랑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내게 말했다.

“너한테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굶더라도 우리 부모님께는 제일 좋은걸루 해 드리고 싶어.”

여기서 너희들은 나와, 아이들 즉 처자식이다.

그 깊었던 절망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이 저렇게 절절한데, 저토록 눈물겨운데, 그곳에다 한마디 더 하면 한 대 칠 기세다. 단언하건대, 위의 언쟁에서 부모님에 대해 막말하고 큰소리치지 않았다. 아마 그랬다면 그렇게 말싸움으로만 끝나지는 않았을 터. 남편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신의 부모에 대한 좋지 않은 소리는 단, 한마디도.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분들께는 반쯤 닫아 버렸다.

낼모레면 40인 아들인데, 그 아들을 일곱 살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다. 마스크 하고 다녀라, 찬물 절대 먹지 말고 미지근하게 해서 먹어라, 머리 스타일은 이렇게 해라, 옷 색깔 맘에 안 든다, 누가 고른 거냐, 라면은 절대 먹지 말아라, 오늘 저녁에는 뭐 해 먹였느냐… …. 이젠 나에게 맡겨도 될 일들을 수시로 체크하시는 어머님. 참 힘들다.   

사랑인지 집착인지 알 수 없는 둘 사이의 묘한 감정. 그 사이에서 상처받고 아파했다가 마음을 닫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홀시어머니도 아니다. 버젓이 아버님도 곁에 계시는데, 왜 그토록 아들에게 집착하는지 그 까닭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제주도 토박이인 시부모님은 내가 결혼을 할 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했단다. 첫째, 자신의 아들이 키가 작기 때문에 커야 하고 둘째, 반드시 제주도 여자이어야 하며 셋째, 예수쟁이는 죽 ,어 ,도 싫다고 하셨다고 한다. 어쩜 그렇게 세 가지 조건에 딱 들어맞지 않는 며느리감을 구했는지 우리 신랑 재주도 참 용타. 하지만 어떻게 허락을 받아 왔다. 그때 내 나이 스물셋. 어린 거 하나는 맘에 쏙 들었다는 어머님.

첫 대면은 종로의 어느 커피숍이었다고 기억한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는 어머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으셨다. 첫눈에 탐탁지 않음을 느꼈지만 난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나만 잘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건강한 마음이었던 것 같다. 허나 돌이켜 보니 철없던 마음이었다.

그렇게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고, 출산을 하고, 장손을 낳았다.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큰아들에게서 얻은 손자이기에 각별하셨으리라, 이해해 보려 했지만, 그랬지만… ….

친정에서 산후조리를 하고 있는데 손주가 너무나 궁금하신 어머님은 15일 만에 불러들이셨다. 너무나 어렸던 24살의 초보엄마의 막막함을 다시 떠올리니 에효… ….

“찬물에 손 담그면 안 되니, 설거지는 고무장갑 꼭 끼고 해라.”

허걱! 여하튼 이런저런 모든 말씀에 군소리 없이 순종하고 밤에는 어머님 몰래 훌쩍이는 날이 잦아졌다. 그 끔찍한 신랑이 그때는 어린 아내가 안쓰러웠나 보다. 어느 날 어머님이 잔소리하실 때 약간의 눈짓을 내게 보낸 적이 있다. 니가 이해하라는 듯한 눈빛. 어머님 상처받으실까 봐 아무 말 안 하고 보낸 살짝의 눈빛. 그 효자의 맘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 작은 눈짓에 배신감을 느끼셨던 것 같다. “니들 눈에는 나는 보이지 않느냐”며 호통 치신 후 그 길로 제주도로 내려가셨다. 석 달 동안 우리의 전화도 받지 않으셨다. 결국 뚜렷한 영문도 모르고 나와 신랑은 빌었다. 8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유가 그 눈짓 때문이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짐작만 할 뿐 신랑도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이것이 정상적인 관계일까. 어쩜 이렇게 소통이 안 되는가 답답했다.

친정은 기독교 집안이다. 어릴 적부터 열심히 교회에 다녔다. 결혼 후에도 신랑은 흔쾌히 니가 원하는 것이니 다니라고 전혀 제지하지 않는다고 약속을 했다. 허나, 어머님이 오시면 갈 수가 없다. 신랑이 결혼 허락을 받을 때, 못 다니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고 한다. 미칠 것 같았다. 가고 가지 않고를 떠나서, 이런 조건이 말이 되는가? 일방적으로 어머님께 맞추고, 눈치 보고, 비밀스러워야 하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단 한마디도 부모님께 아쉬운 소리 못하는 그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는 결국, 그렇게 깊게 집착하는 어머님께 정신적으로 독립하지 못했다. 며느리에게 던지시는 인신 공격, ‘뚱뚱하다, 제주도 여자가 아니어서 알뜰하지 못하다, 좋은 대학이 아니다’ 등등 앞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어 주지 못했다. 그저 내 눈치만을 살피며 나보고만 참으라 했다. 그 깊은 상처는 아직 남아서 날 힘들게 한다. 어느 날, 그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서 내가 진지하게 물었던 적이 있었다.

“자기야,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 자기한테 미안하지만 당신은 부모에게서 정상적으로 독립하지 못한 거 같아. 어떻게 생각해?”

그 물음에 그는 시인했다. 그리고 오히려 물었다. “그러는 너는 독립했냐?” 하하. 한국의 여자들은 내 부모의 품을 떠나, 호적을 파서, 그놈(?) 하나 믿고 시집을 온다. 과감히 내가 살던 환경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감히 그가 내게, 부모에게서 독립했느냐고 묻는다. 우습다. 우스워 죽겠다.

아들. 내게도 있다. 여덟 살. 그 꼬맹이었던 것이, 성장하고 있음이 보인다. 그 마음은 부쩍 자랐다. 대화를 해 보니 알겠다. 나는 아들과 많은 대화를 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친구 문제, 학교 문제, 고민되는 것은 없는지, 학원은 힘들지 않은지. 그렇게 대화가 쌓이니 우리 아이는 생각보다 마음이 깊고 생각이 많은 아이라는 것을 저절로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아이들은 눈치가 빠르다. 어느 날 길을 걸으며 “엄마가, 할머니를 싫어하는 것 같니?” 하고 물었다.

“싫어한다기보다 음… … 좋아하는 거 같지는 않아. 외할머니한테는 잘 웃는데, 할머니한테는 잘 안 웃잖아.”

후후. 아이의 마음을 짐작했기에 물었던 것인데, 그랬는데도 마음이 아프다. 어떻게 키워야 할까. 두렵다. 내가 위에서 열거한 집착. 그 과정을 나도 밟을까 두렵다.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내 모습에서, 믿지 못하고 조마조마하는 내 모습을 보며, 나는 과연 그것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을까. 큰아이 때문에, 직장을 그만 두었다. 나는 그래도 버젓한 직장을 갖고 있었다. 큰아이 때문에 공부도 더 할 수 없었다. 큰아이 때문에, 큰아이 때문에… …. 갑자기 섬뜩해진다.

시어머니는, 아이들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밖에 모르고 살았기에 자식들을 다 결혼시키고 나니 허무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망했을지도 모르겠다. 평생을 걸고 했던 일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니 이젠 뭘 하고 살아야 하나, 암담했을 수도 있겠다.

이쯤 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지금부터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가장 큰 사랑은, 성장해서 성인이 되면 정신적으로 놓아주는 것이라 한다. 물질적, 정신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 한다. 그것을, 그 사랑을 나는 베풀 수 있을까. 놓아주는 연습을 해야 할 듯싶다. 또한 자식만을 바라보며 시간 보내지 않도록 뭔가를 배워야 하겠다. 나 스스로를 위해 투자를 해야겠다. 약간의 시간, 약간의 비용이 들더라도. 내 아이들을 온전히 놓아주고, 그저 뒤에서 기도하는 것으로 만족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내려놓는 준비를, 나를 위한 투자를 부지런히 해야 할 듯싶다.

비가 온다. 늦게까지 이불에서 부비대며 깔깔거리는 두 아이의 웃음 속에서, 오늘도 이쪽의 아들, 손주 소식이 궁금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았다 하실 시부모님을 떠올리며 갈등한다.

전화를 할까, 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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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