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통선에서 공부방을 하는 목사? 밤에는 횟집 주인, 낮에는 횟집에서 독거 노인 밥 주는 목사? 붕어빵을 파는 목사? 들으면 들을 수록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분일까. 12월 11일 5시, 횟집을 찾아갔다.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불광천 옆 주택가에 자리잡은 조그만 횟집, <이적 시인의 -‘바다가 된 그대에게’ 사량도 세꼬시>라는 이름으로 된 간판이 보였다.
8평 정도 되는 가게에 탁자가 네 개, 손님은 하나도 없었다. 책을 보던 이적 목사가 반겨 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적 목사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국의 근본주의 교회를 비판했다.
언제 목사님이 되셨냐고 물었다.
“80년 대에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묘한 이유로’ 쫓겨나게 되죠.”
1980년 2월 무렵, 전두환이 집권하고 계엄 때였다고 한다. 한국기독교 지도자들이 모여 ‘전두환의 안녕과 무궁한 발전을 위한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이적 목사는 그 조찬기도회가 잘못됐다는 내용의 설교를 했다. 담임 목사한테 지적을 받았다. 그 길로 이적 목사는 “다시는 교회로 돌아가지 않는다” 하고는 전도사 생활을 접었다.
그 뒤 이적 목사는 지방 일간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 그러다가 1980년 10월 느닷없이 삼청교육대로 억울하게 끌려 들어간다.
“산꼭대기 동네에 수돗물이 잘 안 나온다, 공원에 깡패들 득실거려 경찰 단속 손길 아쉽다” 하는 시민들 편을 드는 기사를 좀 썼을 뿐이었다.
이적 목사는 삼청교육대에서 무자비한 폭행을 당하면서 ‘하나님은 왜 정의의 반대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그이는 다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붕어빵을 굽고 있는 이적 목사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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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악몽 같은 4주를 보냈다. 풀려날 줄 알았다. 하지만 그자들은 성적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삼청근로봉사대 6개월 언도(?)를 내린다. “삼청근로봉사대를 갔는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더라고. 밤이 되면 눈보라 몰아치고 영하 15도 회오리 바람 몰아치는 야밤중에, 팬티만 달랑 입혀 놓고, 연병장에 세워 둬, 거기다가 두 팔 두 다리 벌려 세워 놓고, 그마저도 부족해서 세숫대야에다 물을 퍼 가지고 와 몸에다 물을 뿌리는 거야, 물방울이 탁탁 튐과 동시에 물방울이 몸에 얼어 붙어 와, 그런 살인적 추위 상상도 못해 봤어.”
임근실이라는 사람이 2소대에서 이적 목사가 있던 3소대로 옮겨 왔다. 임근실 씨는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바른 소리를 잘 하던 사람이었다. 전두환 욕도 막 했다. 불침번 서라 하면 “민간인인 내가 왜 불침번을 서냐 ”하며 반항하고 대들었다. 독재 정권의 하수인들인 악질 조교들이 가만 놔둘 리가 없었다.
“이 친구는 매일 개 맞듯이 맞는 거야. 이 친구 밤마다 불려 나가서 그 겨울에 물고문을 받아 살아 있는 사람 얼굴이 아니야. 나도 같이 물고문을 받았는데 조교들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나한테 ‘당신은 글쟁이라는 걸 안다. 여기서 개죽음 당하지 말고 살아나가서 글을 써서 자기 죽음과 삼청을 폭로해 달라’ 그러는 거야.”
그날 임근실 씨는 쏟아지는 몽둥이 세례를 견딜 수 없어 개집 속으로 숨어 들었다. 그러자 조교들은 개집 구멍을 하늘로 올려놓고 찬 물을 퍼부어 댔다. 임근실 씨는 개집 안에서 요동을 쳤다. 그 뒷날 임근실 씨는 시체로 들려 나갔다.
이적 목사는 꼭 살아 나가서 삼청교육대의 만행과 그이의 죽음을 알리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은 ‘사회보호법’을 만들어 이적 목사를 군 감호소로, 또 청송 감호소로 이감을 보내면서 삼청 최장기수로 만들었다. 이적 목사는 84년 4월 3년여 만에 이른바 모범수로 가출옥을 해 살아나오게 된다.
하지만 바깥도 감옥이었다. 사기꾼, 빨갱이, 깡패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채 살아야 했다. 이적 목사는 임근실의 유언을 되새기면서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려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하지만 삼청폭로 미수 사건인 양곡상 침투사건으로 공무원자격 사칭, 공갈 등의 파렴치 죄로 조작되어 다시 8개월, 10개월, 두 번이나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 이적 목사가 운영하는 횟집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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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목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인 민족문학에 삼청교육대를 폭로하는 10편의 연작시를 발표하고 뒤이어 11월 삼청 실록수기《삼청교육대 정화 작전》(도서출판 전예원)을 출간한다. 국민들은 독재정권의 잔혹성에 몸서리를 쳤다. 심지어 군사정권에 아부했던 조중동까지 ‘삼청교육대 사망자 사인 의혹 많다’, ‘생체실험의 수기다’, ‘한국판 수용소 군도의 인권 유린과 참상’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내 보내면서 군사정권을 비판했다. 당시 야당 총재였던 김대중은 그이를 만난 뒤 당내에 ‘삼청교육대 진상규명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군사정권을 압박한다.
이적 목사는 김대중을 대통령 만드는 데도 한몫을 했다. 대변인, 지역선거대책위원장, 중앙당 부위원장, 선거 연설원을 지내며 김대중을 도왔다. 결국 김대중이 대통령이 됐다. 마음만 먹으면 출세 길이 보장될 수도 있었다.
“김대중 정권 때 바다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관변단체가 하나 생겼어, 월급은 없었는데 거기 본부장을 맡으라 그러더라고.”
취임식을 하는 날 친인척한테 받은 단체 후원금 때문에 문제 아닌 문제가 생겼다. 법원에서 무죄를 주장하며 싸우면서 자신이 살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이적은 민통선에 자신이 건립했던 통일 문학관으로 머리도 식힐 겸 잠시 글 쓰러 들어갔다가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 먹는다.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민통선에 들어간 날 느닷없이 청빈한 참예수를 떠올렸기 때문이지. 그리고 그때 내가 신학교 출신이라는 게 퍼뜩 머리에 떠오르는 거야. 기독교가 망하기만 바랄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들어가서 그들과 싸우며 참예수의 변혁 운동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니냐. 내가 욕했던 거는 여의도 ㅈ목사와 같은, 한국의 잘못된 기독교 지도자들이 미웠지, 예수님을 미워할 이유는 없는 거 아니냐. 귀신 예수가 아닌, 평화와 사랑의 예수, 그 거룩한 삶을 본받아서 실천해 나간다면 나야말로 참예수의 그림자라도 되는 영광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닌가. 돌아가자, 이렇게 판단한 거지.”
△ 민통선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만든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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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목사는 신학대를 편입했다.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용강리 민통선 마을에 빈민 운동을 자원한다. 그리고 알콜중독자 자녀를 위한 아동공동체와 민통선 공부방을 만들었다. 2002년 11월이었다. 그리고 마을회관을 고쳐 민통선 평화교회도 설립했다. 신자는 해병대 군인들이었다. 헌금이 없으니 아동공동체와 공부방 운영하기가 벅찼다. 무료급식과 아동장학사업, 보육사업, 차상위계층자녀발굴보호사업, 체험학습 등 많은 사업을 벌려 놓았는데 후원금 들어오는 곳은 적었다. 그래서 이적 목사는 공동체 운영하기 위해 불광천에 횟집을 차렸다. 하지만 거기서 나오는 돈으로도 공동체와 공부방을 운영하는 것은 힘이 들었다. 더구나 불광천 근처에 사는 독거 노인들에게까지 무료 식사를 대접하는 독거노인급식소까지 만들었다. 그래서 그이의 목회를 좋아하는 서울 교인들과 사랑의 붕어빵 봉사회를 만들어 가게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하기도 했다.
“예수님이 교인들한테 십일조 헌금 받아서 사랑을 실천했나? 그분 스스로 대중들을 찾아다니면서 하나님 나라 전도하며 평화를 외치며 박애와 사랑을 실천했단 말이야, 목사의 삶이 예수의 삶처럼 그렇게 돼야 하는 거 아녀? 그래서 내가 만분의 일이라도 그분 흉내라도 내 보려고 이렇게 사는 거지.”
그렇구나. 예수란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구나. 한국의 기독교를 싫어하면서 예수가 어디 있나 하고 생각하던 필자는 이적 목사를 보고 예수는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적 목사가 이번에 운영비 마련을 위해 다시 책을 낸다. 《민통선 예수》라는 책이 현재 인쇄에 들어갔다고 한다. 이 땅에 사는 민중들을 백성으로 여기지 않는 이명박 장로를 비롯해 그 하수인들, 부디 그 책을 읽고 회개를 좀 했으면 좋겠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