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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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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시간제 댄스 강사

 

  

나는 방송 댄스, 줌바 댄스, 키즈 댄스 등등 수업을 진행하는 시간제 강사이다.

오전 수업 한 곳만 더 뚫었으면 좋겠다.’ 하는 찰나에 설날 즈음 아파트 내 피트니스센터에서 줌바 댄스 수업을 맡게 되었다. 새해부터 이게 웬일이냐며 올해 운수가 좋음을 느끼는 하루하루였다. 아직 신규 수업이라 회원은 별로 없었지만 서서히 늘려 가리라 열정을 다해 열심히 했다. 하지만 2월 초부터 기존에 하던 수업들이 하나하나 중단이 되었다. 그 이유는 바로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처음 시작되었을 때는 그저 손 잘 씻고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마스크를 꼭 쓰자 뿐이었다. 코로나19를 그냥 무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점점 확진자, 격리자 심지어 사망자가 늘어 가면서부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수업을 진행하는 센터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종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따른 주민자치 프로그램 수강료 일시적 환불 규정을 안내 드립니다라는 문자로 시작해 하루 사이에 주민센터, 문화센터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인천시, 구에 해당하는 곳들이다. 그러다 또 며칠 뒤 개인사업자인 피트니스센터도 영업을 중지했다. 졸지에 백수가 되었다.

신천지 사건이 터지면서 모든 수업이 중단되었다. 솔직히 신천지에 별 관심이 없었다. 종교에 있어서 누구를 믿고 따르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이 터지면서 조금 신경이 쏠렸다. 보는 뉴스마다 신천지 이야기가 나오고 단체 카톡에는 코로나 확진자 그리고 신천지 이야기뿐이었다. 신천지 31번 확진자가 나온 후로는 위에서 지령이 내려와 그 누구에게도 알리면 안 된다, 아무렇지 않은 척 일반 교회에 가서 코로나를 전파하라,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아무 집이나 가서 구하기 힘든 마스크를 무료 나눔을 한다 하고 바이러스를 옮겨라 등등 너무 소름이 끼쳤다. 물론 그게 실화라면 말이다. 정말 재난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또 사건이 터졌다. 천안 줌바 강사가 확진자로 나온 일이다. 나에게 있어서 포인트는 줌바 강사라는 것이다. 그냥 댄스 강사라고 해도 되는 것을 줌바 강사라고 기사가 뜬 것이다.


그래서 줌바 강사들 모임에도 비상이 걸렸다. 회원들은 천안 모임에 갔었냐 물어보기 일쑤였다. 천안에서 교육을 받았던 강사들의 명단을 보건당국에 넘기고 모두 검사를 받았단다. 확진자가 많은 대구 쪽 강사들은 아직 진행 중이지만 그 외 모든 강사들은 음성으로 나왔단다.

기자들은 기사를 올려 이슈화를 시켜야 하므로 자꾸 줌바를 엮어 글을 올리는 것 같다. 그래서 다수의 선생님들이 방송사에 항의 전화를 했다. 완전히 다 고쳐지지는 않았지만 줌바 강사에서 에어로빅 강사, 댄스 강사라고 바꾼 곳이 있었다. 아니 그런데 왜 또 에어로빅이냐! 한숨만 나온다. 확진자 강사도 많이 힘들 것이다. 너무 속상하다.

코로나19 때문에 가장 큰 일은 백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와 같은 시간제 강사들은 지금 모두 강제 백수가 되었다. 우리들은 누군가로부터 시작된 청와대 국민청원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운동 강사들도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었으면 합니다.”

주민자치센터 외 공공 기관에서 수업하는 모든 강사들의 생계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너 나 할 거 없이 서로 공유를 하며 동의를 받아 냈다. 현재는 동의자가 만 명이 훌쩍 넘어 청원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인천평생학습강사회에서도 인천시청에 휴업수당 지급요청 면담도 신청했다고 한다.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단기 알바라도 하고 싶지만 요즘 상황이 그런지라 선뜻 잡히는 곳이 없다. 내가 벌어 쓰던 용돈이 있기에 더 간절하다. 전에 일했던 피자집에 전화를 해 볼까 한다.

수업을 못 하니 몸도 굳는다. 운동을 하고 싶다. 춤을 추고 싶다. 며칠 전에는 아직 수업을 진행하는 주변 선생님 수업에 가서 돈을 내고 하루 청강을 하기도 했다. 땀도 많이 안 나고 돈이 아까웠다. 내가 수업을 하면 돈도 벌고 더욱 상쾌할 텐데 말이다. 살이 찐다. 움직임이 덜 하니 진짜 뱃살이 늘어난다. 입이 늘 심심하다. 몸도 늘어진다. 방학 중인 학생처럼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난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에게 괜히 미안하다. 눈치가 보여서 뭐 하나라도 더 챙겨 주게 된다.

문득 생각이 난다. 매일 아침 반가운 회원들이 있는 센터에 가서 맛있는 모닝 율무차 한 잔. 힘들다고 하면서 수업 시간 50분을 잘 버텨 주던 그들. 서로의 모습을 보며 깔깔대고. 수업이 끝나면 점심 먹고 차 마시며 수다 떨자는 그들. 생각이 난다. 목마르면 물을 마시듯 평범했던 일상들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되고 있는 것 같아서 가슴이 아리다. 언제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코로나19, 어서 없어져라.

에잇! 코로나 18! 꺼져

posted by 작은책
2020. 3. 25. 15:49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코로나19 확산 속도가 현저히 줄었습니다. 지난 314, ‘신규 확진자가 107, 완치된 사람들이 204이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완치자가 확진자 수를 넘어서 조금 안정이 되는 것 아니냐는 희망이 보이기도 합니다. 현재 한국 정부의 감염병 대처 방식은 세계가 주목할 정도로 잘 하는 편입니다. 신천지 신도 일부를 제외한 성숙한 시민들도 외출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구 언론은 코로나19 때문에 대구나 인천 송도가 유령도시가 돼 가고 있다는 등 과장된 뉴스를 쏟아내며 공포감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이번 <작은책> 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에는 김용심 작가가 조선 시대에 돌던 갖가지 전염병, 역병에 관련한 이야기를 썼습니다. 흉년과 역병이 한참이던 때 연산군은 구휼미를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고 하는 등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역질에 걸려 죽음을 맞았습니다. 그 역사를 보면서 수구보수당 황교안 대표나 심재철 원내대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 코로나19 대책 긴급 추경 예산을 가지고 현금 살포 포퓰리즘이라는 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면서 딴죽을 걸고 있기 때문일까요?

415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코로나19 소식에 묻혀 후보가 누군지,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어떻게 되는지, 깜깜이 선거가 되지 않을지 걱정스럽습니다. 못된 정치가들은 코로나19 못지않게 위험합니다. 누가 정말 나라를 위하고, 서민을 위하는 국회의원인지 잘 뽑아야 합니다.

 

2020317

발행인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김용심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코로나19! 에잇! 코로나18! 신혜진

18 예약 말고 즉시콜? 최숙하

22 누가 쪼잔한 건지 모르겠다 이근제

26 인도 델리 버스의 커튼 신혜정

31 부억때기 송필경

34 뱃살의 원흉 이동수와 최해옥

40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코로나19 집밥 윤혜신

46 살아온 이야기

4, 누구나 상처는 있다 김수련

52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53 시 읽고 감상하기 박영수

56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61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코로나19 덕분입니다 권해진

 

일터 이야기

65 일터 탐방_ 서울대병원

병원의 공공성을 높이는 방법 명숙

71 일터에서 온 소식

번드르르한 방송사, 속은 썩었다 김기영

77 작은책 법률 상담소

실업급여, 나도 받을 수 있다 양성우

 

작은책이 만난 사람_ 문지영

81 분리수거하면 세상이 바뀌나? 지금은유지향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이토록 장엄한 아름다움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거리두기, 최선입니까?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올려 보아 주시오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올해 4월은 잔인할까?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성과 장치는 죽음조차 개인화한다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조선의 타임캡슐, 백자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가정사에 스며 있는 베트남전쟁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19월호

세상보기

인물 바로 보기

 

이승만은 누구인가

이이화/ 역사학자

 

 

 

올해 광복절 66주년을 맞이해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새삼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한국방송공사에서 이승만의 공과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송하려는 계획을 세우자 독립운동가 유족들과 한국전쟁 피해자 유족,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자들이 이 방송 계획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면서 한국방송공사 앞에 연좌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승만을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 또는 정부 수립의 첫째 공로자로 추앙하면서, 독재자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그를 미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부정 선거에 항거해 일어난 419혁명을 부정하면서 공영방송이 이런 일을 벌이는 의도가 어디에 있나?

그동안 이승만의 평가는 거의 부정적으로 흘러왔다. 하지만 일부 세력은 그를 옹호하면서 그를 국부(國父)로 받드는 의식을 보여 주었고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고 기념관을 건립하자는 주장도 펴 왔다. 이 자리에서 다시 한번 이승만의 행적을 간단하게 더듬어 보기로 하자. 이승만의 생애는 대체로 3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겠다.

첫 시기는 청년 시절이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에 사는 몰락한 전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이경선은 양녕대군 후손이라는 이름을 달고 서울로 와서 전주 이씨 문중을 기웃거리면서 낙백의 생활을 했고 이승만도 그런 연줄로 전주 이씨들이 차린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다. 이승만은 20세 때 배재학당에 입학해 영어와 성경 공부를 하고서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이상재, 서재필 등이 벌인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해 열렬히 자주 운동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그는 황제 폐위를 주동하는 세력과 결합한 탓으로 체포되어 종신형 또는 사형 언도를 받았다. 마침내 고종의 특사로 석방되었다.

둘째 시기는 미국에서 유학을 하고 외교운동을 벌이던 시절이다. 그는 미국으로 가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학위를 그는 별처럼 평생 달고 다녔다. 그 뒤 미국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벌였는데 열렬한 미국 추종자가 되었다. 그는 1919년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교 전문가라는 것, 영어를 잘하고 박사 학위를 받았다는 것, 언변이 좋고 미국 동포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 따위가 대통령으로 추대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재정 압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자 안전지대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구미위원부 대표를 맡았다.

마지막으로는 해방이 된 뒤 고국으로 돌아와서 정부 수립운동을 벌이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 벌인 정치 활동기이다. 그는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끝내 이를 실현시키고 반공정부를 수립한 뒤 불법으로 3선 개헌을 단행하고 이어 315부정선거를 하다가 대통령직에서 쫓겨난 뒤 미국으로 망명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독재자로 군림했고 반공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공산당 박멸을 외치고 끊임없이 북진통일을 주장했다. 그리고 친일파를 등장시켜 무수히 독립지사를 탄압하고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했다.

, 나는 역사학자로서 위에서 밝힌 이승만의 삶과 행동을 평가해 보기로 한다. 그의 청년 시절은 한학을 배운 소년이 새로운 사조에 눈을 뜨고 급진적 엘리트 청년으로 성장한 모습일 것이다. 그는 충군(忠君)이라는 왕조 의식에서 벗어나 서구의 입헌군주제 또는 대통령 중심의 공화제에 눈을 떴다. 그리해 청나라에 맞서 자주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행동 의식을 보였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미국에서 유럽 사조와 제도를 배우면서 장년 시절을 보내고 임시정부의 요인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극단적 인 이론을 냈다. 일본의 실체를 인정하면서 한국을 미국의 위임 통치를 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고, 무력 투쟁 노선을 비판하면서 박용만 등이 벌인 군사 양성을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들의 독립 자금을 받으면서 외교관이란 이름으로 호텔에 거처하는 따위 호화 생활을 했으며, 전주 이씨 왕자라는 이미지를 조작하여 품위를 유지하려는 천박한 행동을 보였다. 상하이를 떠난 뒤 위험 지역에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아 일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는 늘 손가락이 마비된 것은 일제의 고문 탓이라고 말했는데 한 번도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적이 없었다. 신채호는 이승만을 두고 이완용이나 다름없는 매국노라고 비난했는데 정작 신채호는 일제에 잡혀 감옥에서 옥사했던 것이다. 또 국제연합이 조직될 무렵 그는 철저하게 공산주의자들과 대화를 거부하면서 한국 독립에 대한 그쪽의 협조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해방 공간에서 그의 행동 노선은 타협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반공을 표방한 단독 정부 수립에만 매달렸다. 그리해 미국의 환심을 사서 정권의 수장이 되었다. 단독 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친일파 출신의 경찰 군인 판검사를 끌어들여 정권의 하수인으로 부려먹었다. 그런 과정에서 온갖 불법 탈법의 독재 수법을 쓰면서 반대파 국회의원을 연금하는 따위로 민주주의 절차를 왜곡시켰다.


특히 한국전쟁 시기 한강을 폭파하고 남쪽으로 몰래 도망치면서 군사작전권을 미군에게 넘겨 자주 국가의 면모를 잃게 했으며, 휴전을 반대하면서 공허한 북진 통일만을 외쳐 냉전 체제를 공고하게 했다. 그리해 남북 관계는 극단적 대결로 치달았다.

419이후 이승만은 학생들이 반대하면…… 또는 국민이 반대하면……이라는 언사를 늘어놓으면서 마치 민주주의 왜곡이 자신의 책임이 아닌 듯이 말하고 하야했다. 그러고 나서 밤을 틈타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가 진정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다면 이화장에서 반성의 나날을 보내면서 참회의 회고록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의 인간성은 허위와 사술로 점철되어 있으면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음모꾼의 모습을 보였다. 또 그의 통치술은 철저하게 독선적이고 전제적인 수법을 구사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해 정부 수립 초기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 미국의 국부인 조지 워싱턴이나 중화민국의 국부인 손문의 행적과 비교해 보면 이해가 충분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기초로 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지향하지만 그를 반공의 화신이란 이름으로 국부라는 엉뚱한 이름을 붙일 수 있겠는가? 그는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공로자가 아니라 오히려 통일을 방해하는 인물로 앞으로 기억해야 하고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이승만의 이미지를 조작하는 의도는 새 정권의 창출을 앞두고 반통일적 보수 세력이나 친일파 잔존 세력을 결집시켜 통일 지향의 민주 세력을 꺾으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런 의도를 냉철하게 간파하면서 이승만 띄우기의 음모를 직시해야 한다. 젊은 세대들은 아직도 이승만의 실체를 잘 몰라 휩쓸리기 쉬울 것이다. 바른 역사 인식은 냉철한 비판 의식이 따라야 한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094월호

쉬엄쉬엄 가요

추억따라 역사따라

 

짱돌의 역사

박준성/ 작은책 편집위원, 역사학자

 

 

 

나뭇가지에 잎눈 꽃눈이 터질 듯 커졌다. 빨리 자란 냉이는 벌써 하얀 꽃이 피었다. 둘째 아이 학교 가는 길가 밭 군데군데 퇴비 푸대가 늘어져 있다. 어렸을 때 시골에서 농사를 좀 거들어 보았다고 봄이 되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학부모들이 학교 학습장 귀퉁이를 얻어 텃밭 농사를 짓는 데 끼었다. 산자락을 일군 땅이라 잔돌이 많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 산 쪽으로 집어 던져 보려고 서너 개를 집어 들었다. ‘도룡농이나 겨울잠에서 깨어 나오는 개구리 맞을라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고, 새싹이 맞을까 미안해서 밭둑으로 옮겼다.

지금도 부모님이 농사를 짓고 있는 시골 우리 집은 나지막한 산 중턱에 있다. 뒷문을 열면 바로 산으로 올라갈 수 있다. 집 둘레 밭은 오랫 동안 농사를 지어온 땅이라고는 하지만 때마다 잔돌을 주어 내도 계속 나왔다. 아버지는 그 돌을 가지고 밭 건너편 산으로 멀리 던지기 시합을 시켰다. 돌팔매질 놀이와 돌 치우는 일을 그렇게 가르쳐 주셨다. 잔돌 던지며 배웠던 실력이 체력장 멀리 던지기를 할 때 제대로 드러났다.

체력장을 끝으로 돌팔매질을 써 먹을 일이 별로 없을 줄 알았다. 시대가 짱돌을 들게 만들었다.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님은 19876월항쟁 이후 어떤 모임에서든 나를 소개할 때마다 퇴계로 거리에서 짱돌 들고 앞뒤로 오가던 내 모습을 이야기하셨다. 열심히 싸웠던 선수들 보기가 민망스러워 낯이 뜨거웠다.

1986년인가 1985년이었던가. 규장각에서 조교를 하고 있을 때다. 퇴근을 하는데 교문 쪽에 최루탄 가스가 자욱하다. 앞에서 조그만 여학생 둘이 작은 손으로 보도블록을 열심히 깨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안쓰러웠다. 마침 농구선수처럼 키가 장대 같은 남학생들이 옆으로 지나가다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거렸다. 눈앞에 불이 확 붙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은 광주학살의 주범인 전두환 노태우보다 그 남학생들이 더 미웠다. 땅바닥에다 패대기를 치고 싶었다. 국립대학 조교는 공무원 신분이라 화는 나도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정신없이 보도블록을 깨었다. 손이 얼얼해서 며칠 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뒤에서 보도블록을 깨서 앞으로 나르면 용감한 선수들이 앞에서 던졌다. 창원에서 강의를 하다가 최루탄을 쏘아 대도 30미터 앞에까지 다가가 물러서지 않고 던지는 선수들이 있었지요 했다. 마침 <작은책>법보다 사람을 연재하던 박훈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30미터가 아니고 5미터요!” 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멀찍이 떨어져서 짱돌을 던지다 보면 우리 편 뒤통수 맞히기 십상이었다. 그래도 앞에서 싸우던 선수들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어정쩡하게라도 서 있는 사람들이 보여야 힘이 나지 않을까 싶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6월항쟁 때 한편에서 지식인으로서 역사학자로서 이 상황을 역사적으로 분석하고 전망을 모색하여 알리는 것이 우리 몫이니 어쩌고 할 때 거리에 나가 짱돌을 들어야 한다고 맞섰다. 목소리는 컸어도 뜻은 공부하는 사람들이 될수록 현장 가까이 가서 구경해야 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해 촛불항쟁 때 밤을 새고 명박산성에 깃발을 올리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있다. 명박산성 가까이 있던 시위대 속에서 뒤를 보면서 놀러 왔나. 놀려면 놀이터에 가서 놀든지, 씨발 하는 욕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앞쪽으로 다가오지 않고 뒤에서 노래를 부르고, 영상물을 보고, 모여 앉아 토론하는 무리가 못마땅했나 보다. 앞쪽에 있다고 해도 깃발 들고 나서는 사람 있고, 전경차에 밧줄 걸고 당기는 사람 있고, 나처럼 사진 찍는다고 밧줄 한 번 당기지 않은 사람도 있고, 밧줄 당기는 사람 등 밀어 주는 사람도 있고, 목소리로 응원하는 사람도 있듯이, 뒤쪽에서 갖가지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참가하지 않는다면 앞에 있다고 힘이 날까? 강의도 버릇이 된다고 한마디 해주고 싶은 걸 참았다.

시간이 지나 6월항쟁 때 이이화 선생님 비슷한 나이가 되고 보니 선생님이 하고 싶었던 말을 짐작할 수 있겠다. 22년 전 일이니까 내가 30대 초반, 선생님이 50대 초반이었다. 이이화 선생님은 짱돌은 들지는 않았어도 빠짐없이 6월항쟁 거리에 나섰고, 깨진 보도블록 조각을 시위대 쪽으로 밀어 넣어 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런 말을 하면 남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 같으니까 나를 만났다는 말로 대신했던 것 아닐까. 제 말이 맞지 않으냐고 여쭤 보고 싶다가도 그냥 지나간다. 그런 것까지 확인하다 보면 세상사 재미가 떨어지지 않겠나.

6월항쟁 때는 보도블록을 깨서 짱돌을 만들어 썼고, 촛불항쟁 때는 짱돌 대신 촛불을 들었다면, 1960‘4월혁명시위대가 들었던 짱돌은 진짜 돌이었다. 4월혁명 때 경무대로 향하는 보도에는 자갈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경찰은 짱돌에 총으로 대응하였다. 경무대 쪽에서만 21명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이승만 정권과 자유당은 4월혁명의 직접 계기가 된 315부정 선거 반대 시위를 공산당의 배후 조종에 의한 좌익 폭동으로 몰아갔고, 심지어는 시위대가 던진 돌을 북괴에서 가져온 돌이라는 기발한보고서를 작성했다.

짱돌은 오랫동안 민중의 무기였고 놀잇감이었다. 마을 어귀나 고개 마루에 있는 성황당가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그런 곳은 초기 부족국가 시대나 통일신라 하대 호족이 곳곳에서 세력을 떨칠 때 방어하기 요긴한 길목이었다. 그냥 걷고 넘기도 힘든데 돌 가져다 쌓아 두라고 하면 모두들 입이 댓 발은 나올 것이다. 하지만 돌을 던지며 치성을 드리면 부귀다남하고 무병장수한다니까 오갈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던진 돌들이 쌓여 돌무더기가 되었다. 그렇게 쌓은 돌멩이들은 싸움이 일어나면 무기가 되었다. 사람 손때를 타야 던지기도 좋다.

홍명희가 쓴 소설 임꺽정에 돌팔매질하는 재주가 귀신 같은 석전군(石戰軍) 배돌석이가 나온다. 돌멩이로 호랑이를 때려잡기 전 배돌석이가 며칠이나 돌멩이를 던져 가며 길을 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배돌석이는 소설 쓰느라 꾸며 낸 인물만은 아니었다. 돌팔매질 잘하는 고수들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석전놀이를 할 때 영웅이었다. ‘임진왜란때는 그런 평민들로 구성된 짱돌부대가 있었고, 1894년 농민전쟁 때도 돌팔매질 잘하는 농민들을 따로 모아 만든 부대가 있었다.

짱돌에 담긴 역사와 전통은 오래되었고 책으로 써도 될 만큼 푸짐하다. 지배층이 칼과 총으로 가로막아 온 역사보다는 민중이 짱돌로 만들어 온 길이 제대로 된 역사의 길이었다. 그 길을 일이관지하며 걷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비록 역사의 장면마다 이름 석 자 뚜렷하게 남기지 못했으나 제 길을 버리지 않고 걸어온 분들이 존경스럽다.

posted by 작은책

<작은책> 20122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습니다

김훈규 / 거창 농부


 

북상댁 할매가 돌아가셨다

몇 년을 병원에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그 할매 수십 년 농민 데모판을 따라나섰던 할매다

여성 농민들 행사나 데모하러 가도 착실히 참석했던 할매다

농민회 하는 자식 도와주는 거는 이것밖에 없다며 자식보다 더 열심히 데모하러 다닌 할매다

자식이 데모 못 가면 자식 대신 해서라도 참석하신 할매다

예비군 훈련 대신 참석했다는 노모 이야기는 많이 들어 봤어도 자식 대신 데모하러 가는 할매는 처음 봤다

그 할매가 북상댁 할매다

 

한칠레 FTA 싸울 때 1년에 서울을 100번도 더 오르락거릴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국회의원 사무실 점거 농성, 단식 농성 제일 많을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농민회 제일 살판나게 잘 돌아갈 때 제일 신명나게 싸울 때

북상댁 할매 아들은 농민회장이었다

 

북상댁 할매는 그럴 때마다 회원들 만날 때마다

우리 아들, 우리 아들 많이 도와주소. 우리 아들.

단디 하소. 단디 하소. 자식 같은 농민회 회원들아, 단디 하소.”

야무치게도 당부를 하셨다

회원도 간부도 아닌 할매는 세상 돌아가는 처지를 더 빤히 알고 있었다

농민들이 농사 포기하고 자꾸 서울로 올라가는 이유를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

북상댁 할매 앓아눕고 나서 그 농민회장도 바깥출입을 끊었다

몇 년이 지나서

아직도 누워 계시려니 했는데

어제 세상을 버렸다 연락이 왔다

 

문상객도 파하고 상주도 한잔 술에 노곤한 야심한 시간에 장례식장을 찾았다

우리 엄마… 우리 엄마… 내 총각 때부터 자식 도와주는 짓이라고 데모하는 데 다 따라나서 준 우리 엄마. 도와주는 것보단 자식 걱정이 앞서 내보다 데모 더 많이 다닌 우리 엄마. 한미 FTA 싸움도 내보다 더 할 말이 많았던 우리 엄마. 그런 우리 엄마가 이제는 없소.”

 

소주잔을 사이에 두고

옛날 농민회장이 지금 농민회장 앞에서 반술 취한 넋두리를 한다

지금 농민회장은 옛날 농민회장 앞에서 고개만 끄덕인다

 

버스 타고 지독히도 서울을 오르락거리던 할매 할배들이

문디 같은 세상!”

외마디 부르짖고는 그냥… 자… 세상을 버린다

이렇게 추운 겨울은

농사일이 없어서

꿈적거릴 일이 없어서

그냥 방 안에서

보일러 끄고 전기장판만 켜고 자다가

세상을 버리는 할배 할매들이 너무 많다

기껏해야 대통령하고 비슷한 나이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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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7기 수료한 청년

 

2018, 어느 초여름 저녁. 이태원 고급 다이닝 레스토랑에서 뜀박질하며 불판을 나르는데 주머니가 웅- 하고 울렸다. 끊기기 직전 겨우 받은 연락은 대박쌤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십 년 넘게 영어학원을 해 오던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아무 소식이 없던 애제자의 근황이 무척 궁금했던 것 같다. 특유의 호탕한 말투는 그날따라 근심이 가득했다.

너 평생 고깃집 같은 데서 알바만 하고 살 거냐?”

저한테 한 달에 칠십 이만 팔천 육백 원만 주실래요? 전 그 돈이 꼭 필요하거든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것도 사회생활이다, 생각하며 꾹 참았다. 곧 찾아뵙겠다는 형식적인 인사를 한 뒤 대충 전화를 끊었다. 인생 참 뭐 같지만 한가롭게 감상에 잠길 때가 아니었다. 곧바로 오른쪽 귀에 무전기를 차고, 나는 다시 기름진 소음 속으로 들어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 보니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돈 벌기(취업)돈을 벌 수 있는 공부하기(대학)였다. 은근슬쩍 대학을 권하는 부모님의 말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올 한 해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 보겠다고 선언했다. 이제는 정해진 시간표 아래 주어진 일만 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대신 내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떠돌다, 어딘가 잠시 머무르다 우연히 누군가와 만나는 일상을 상상했다. 청년 실업이니 뭐니 말이 많지만 대학과 취업 중 무엇을 선택해도 불안하다면, 나만의 길을 선택하고 불안해도 나름 괜찮지 않을까?

이제 앞만 보고 달려갈 일만 남았다는 스무 살에, 나는 샛길로 빠져 멈춰 서 있다. 역사와 인문학 강의를 듣고, 출판 워크숍에 참가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며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일 년이 생겼다. 그렇게 홀로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주제 파악을 한 건 겨울도 채 지나기 전이었다. 듣고 싶은 강의는 이십만 원이 훌쩍 넘었고 모임이나 워크숍은 매달 참가비를 내야 했다. 부모님이 보내주는 생활비는 숙소와 밥, 교통비를 해결하면 딱 알맞게 없어졌다. 네 자릿수도 되지 않는 통장 잔고를 보며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이 곧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걸.

학력도, 경력도 없는 조무래기인 나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건 알바 앱뿐이었다. 이제 내가 하고픈 일을 하지 누가 시킨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당차게 첫걸음을 내디딘 지 불과 석 달 만에, 나는 시키는 일은 뭐든 척척 해내는 일꾼이 되었다. 투잡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날 밤 열두 시에 고깃집에서 퇴근하고 다음 날 아침 일곱 시에 빵집에 출근하는 날들로 그해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하고 싶은 걸 하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벌면 시간과 체력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지 못했다. 대신 사고 싶은 걸 사고, 먹고 싶은 걸 먹으면 인생이 그런대로 살 만했다. 나의 몸과 마음이 가는 대로 살겠다고 해 놓고서는 내 몸과 마음이 원하는 건 술이야!”라며 매일 음주가무를 즐겼다. 지갑에 구멍 난 것처럼 돈이 술술 나가면 또 악착같이 돈을 벌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 봤자 최저 시급 인생이라 월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사장님 전화를 두 번 못 받았다고 다음 날 잘리고 같이 일하던 남자 동료들이 성매매 업소에 간 걸 항의했다가 잘리는 동안, 처음에 내가 상상했던 자유롭고 빛나는 스무 살은 점점 끝나 가고 있었다.

마지막 알바였던 연남동의 카페는 바싹 태워 먹은 원두를 씹은 것처럼 쓰디쓴 기억밖에 없다. 2층짜리 매장 홀과 바를 밤늦게 혼자 쓸고 닦는 것도 버거웠는데, 자동 세척기는 컵을 넣기만 하면 깨트려서 일일이 설거지해야 했다. 그러자 매니저가 그냥 일회용 플라스틱 컵을 쓰라고 했다. 텀블러와 스테인리스 빨대를 챙겨 다니던 나로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구를 위해 플라스틱 사용을 멈춥시다!’ 외치는 사회 활동가는 못되어도 내 손으로 사람들에게 플라스틱 컵을 건네주는 건 못할 일이었다. 대신 사람을 더 뽑아 달라고 여러 번 요청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매출을 늘려야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숨이 턱 막혔다. 나는 평소 윤리적인 이유로 모든 동물성 재료를 소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알바를 할 때는 맛있는 라떼와 예쁜 골든와플을 만들어야 했다. 더 많은 사람이 사고 먹어서 더 많은 젖소와 닭이 희생되어야만, 내가 조금 편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니.

손님이 몰려 한 시간이나 마감이 늦어진 날, 지칠 대로 지쳐 펑펑 울며 애인에게 말했다. 나는 우유와 계란을 팔고 플라스틱과 비닐을 남겨서 돈을 벌고, 이제 진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학생이에요? 직장인? 둘 다 아니에요? 그럼 뭐하세요?”

대학과 취업이 전부인 사회에서 그 둘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 나는 아무것도 아닌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조차 나를 소개할 말을 몰라 그냥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하고 있어요.”라고 얼버무렸다. 남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해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그런 순간들이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사실 너도 잘 모르겠지? 하고.

이런 일상으로 이 년째 살아오고 있지만 여전히 모르겠다. 언제쯤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먹고살 궁리를 하면서 나의 몸과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 수 있는지. 소중한 것을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을 지키며 살아갈지.

나 같은 요즘 젊은 것들을 보고 한참 전에 젊음이 끝난 사람들이 혀를 쯧쯧 찬다. 젊었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하는 거라고 닥치는 대로 일단 부딪혀 보라고 한다.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맨땅에 헤딩해 보라고.

하하, 큰일 날 소리. 그러다 머리 깨지는 수가 있는데. 여러 번 시도해 보는 건 여러 번 실패해도 되는 사람이나 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한 번의 시도에 모든 걸 걸고 한 번의 실패에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는 걸 왜 모를까. 맨땅으로 자꾸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줬으면 좋겠다. 이거 쓰고 몇 번이고 시도해 보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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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3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일곱, 내 길을 간다저자

 

마스크 쓰시고 하이 파이브도 하면 안 돼요.”

개학을 앞두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 때 교감 선생님이 내게 한 말을 떠올리며 마스크 쓰고 아침맞이하러 나섰어. 답답하지만 어쩌겠어. 어제로 확진자 15, 하루 새 3명이 늘어나고 중국에서는 사망자가 하루에 수십 명 나오는 판인데 천 명이 넘는 아이들과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이 바이러스 숙주 노릇을 한다면 어째. 가능성이야 낮지만 그 가능성 때문에 방역하느라 이 난리잖아.

마스크를 쓰고 아침맞이를 하니 숨 쉬기 불편한 거야 그러려니 하지만 아이들 표정을 못 보니 답답해. 마스크로 가려도 어느 정도 누구인지는 알겠는데 누구인지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오늘 이 순간 아이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읽어야 하는데 그게 어려워 답답한 거지. 마치 아이와 나 사이를 콘크리트 벽이 막고 있는 것 같아.



아침마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아이들, 이 아이들의 모든 게 내겐 자극이야. 표정, 몸짓, 가방, 온갖 준비물, 옷 심지어 머리카락까지도. 온몸이 자극이지. 그리고 혼자 오는지 누구랑 함께 오는지도. 아침맞이를 하면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그 까닭은 바로 이런 아이들의 자극이 짧은 5초 안팎의 순간에 날 건드리기 때문이야. 아이들이 일으키는 자극 안에 담긴 많은 이야깃거리가 내 생각과 상상력을 흔들거든. 의식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것, 살면서 특히 교직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이 스멀스멀, 불쑥 솟아오르도록 건드리거든.

그런데 아이들과 나 모두가 마스크를 쓴 오늘은 이 자극이 달라. 미세먼지가 안 좋을 때도 마스크를 쓰지만 이렇게 모든 아이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온 적은 없지. 그동안의 아침맞이 때와는 달리 아이들이 내 가슴에 확 들어오질 않아. 멀리서 걸어오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벌써 아이도 나도 표정이 달라지고 마음에 물결이 이는데 코앞에 와도 그 느낌이 없다니. 어색할 정도로 다른 날보다 훨씬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웃고 말도 거는데 아이들에게서 반응이 안 와. 나도 말만 요란하지 울림이 없고. 얼굴을 마스크로 가린 것과 안 가린 게 이렇게 다르다니.

거기다 손으로 바이러스 옮길까 봐 하이 파이브를 안 하니까 그냥 안녕하세요?” 인사만 하고 휙 지나가. 인사 자세만은 하이 파이브 할 때보다 더 깍듯해. 평소에는 이렇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거든. 하지만 단지 인사를 하는 것일 뿐 그 이상의 별다른 느낌이 없어. 무덤덤하고 답답해. 예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보면 좋은 교육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건 아니다 싶어. 아이들과 나 모두의 마음에 물결이라고 할까 변화가 일어나질 않아 재미가 없어. 이런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아침맞이라면 안 하는 게 낫겠다는 마음이 드네. 시간은 안 가고 지루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하루 이틀 새 마무리될 것 같지는 않고 마스크 때문에 아이들 표정 못 읽는다고 푸념 늘어놔 봐야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싶어.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봤지만 다른 방법이 안 떠올라 우선 아이들과 눈을 맞췄어. 좀 어색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숙이고 눈을 뚫어져라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라 표정은 속여도 눈은 속일 수 없다는 말도 있잖아. 그런데 그 말도 마스크 없을 때 이야기지 헛말이더라고. 아무리 눈을 맞춰도 느낌이 예전과 달라. 예전 같으면 아이의 기운이 느껴지거든. ‘힘이 넘치네.’, ‘즐겁고 밝구나.’, ‘어쩌면 저렇게 생동생동할까?’, ‘따스하고 푸근하구나.’, ‘저 어두움을 어째.’, ‘의욕이 없네.’ 이런 감이라고 할까 느낌이 한 방에 내게 와. 느낌이 오거든.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뿌연 안갯속이라 안 보여.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내 기운을 못 느낄 거고.

안 되겠어. 아이들 상태를 읽어 내려 매달릴 게 아니라 겉에 보이는 것, 확실한 이야깃거리가 있는 아이에게만 말을 걸기로 했어. 다른 아이들에게는 살짝살짝 눈을 맞추면서 모처럼 예의를 갖춰 인사하기로 마음먹었지. 표정이나 눈빛 대신에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눈에 띄는 이야깃거리가 걸리면 목이 아프더라도 크게 말을 걸었어.

! 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구나. 어울린다.”

개학한다고 머리 깔끔하게 다듬었구나. 좋아 보인다.”

머리 누가 묶어 주셨어? 와우! 정성이 느껴져.”

운동화 새로 했네.”

오빠 동생 오누이가 패딩을 샀구나. 너무 잘 어울리고 예쁘다. 좋겠다.”

목도리가 눈에 띈다. 따스해 보여.”

오빠는 왜 안 보여?”

늘 같이 오던 친구는?”

오늘은 엄마랑 안 오고 동생 손잡고 오네. ! 이제 엄마 없이 너희 둘이 등교하기로 마음 먹었구나. 와우!”

이것도 안 되겠어. 마스크가 가로막아 목만 아프지 내 말이 아이들에게 잘 전해지지도 않아. 설령 내 말이 전해져도 말하는 순간 표정을 서로 읽지 못 하니 차라리 그냥 인사나 정성껏 하는 게 더 낫겠어. 내가 일방적으로 던지기만 하지 주고받을 수도 없는 데다가 누구에겐 말 걸고 누구는 그냥 보내는 것도 아니다 싶고. 더구나 날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눈에 띄는 것만 보고 이야기하는 거 오래 할 일은 아니야. 아이들과 학부모가 겉치장에 신경 쓰는 부작용이 생길지도 몰라. 한두 번은 몰라도 오래 쓸 방법은 아니네.

마스크 쓰고도 겉이 아니라 속을 읽고 느낄 방법을 얼른 찾아야겠어. 그래야 마음을 주고받지. 느낌과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면 아침맞이는 제대로 된 교육이라고 할 수 없지. 순식간에 서로를 느끼고 좋은 기운을 주고받을 가능성을 높이려면 얼른 마스크를 걷어 내야 하는데. 이놈의 마스크를 어쩌나. 안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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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3. 2. 14:42 알림 / 엮은이의 글

▲표지 그림_ 박소영


발행인의 글

3월호를 만드는데 반가운 소식이 들려옵니다. 영남대의료원 본관 옥상 70미터 높이에서 227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대구 영남대의료원 해고노동자 박문진 씨가 사측과 합의해서 내려왔습니다. 건강이 악화돼 107일 만에 내려왔던 송영숙 씨와 함께 해고 13년만에 원직 복직하고, 노조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게 됐습니다. 정년을 1년 남겨둔 박문진 씨는 실제 업무는 하지 않고 위로금을 받고 곧바로 퇴직하기로 했습니다.

노조 활동을 보장받는데 이렇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 사회는 언제나 바뀔까요. 그보다 더 오래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언제 내려올 수 있을까요? 강남역 사거리 CCTV철탑에서 253일째 (217일 현재) 고공농성 중인 삼성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도 지상으로 내려와서 복직하는 날이 올까요? 현재 파기환송심 재판을 받고 있는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정당한 죗값을 받아야 내려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달에 ‘<작은책>이 만난 사람은 삼표레미콘 운전사 최만선 씨입니다. 노동자이면서 차주라는 이유로 노동자가 되지 못하는 특수고용노동자, 장애등급 4급인 최만선 씨는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왔을까요. ‘부자 되기 포기를 좌우명으로 삼으니 간땡이가 부어 겁이 없어지더라’, 그래서 꼴값은 하고 살았다고 말합니다. 반어법으로 한, 그이의 말은 뜬구름 잡는 어떤 철학보다도 사유가 깊은 심오한 철학처럼 들립니다.

 

2020217

안건모 올림


목차

4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의 영원한 역적 천재 허균 이동수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살아가는 이야기

14 맨땅으로 내몰지 말고 헬멧이나 주라고 이지우

19 몸은 달라도 사랑은최숙하

23 돈 얘기가 먼저부끄러웠다 최성희

27 그림일기를 시작했다 최해옥과 이동수

33 돌모루댁의 살림살이

오곡밥과 나물 윤혜신

39 두꺼비 손글씨 김상화

40 살아온 이야기

파리 근교에서 동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수련

47 시 읽고 감상하기 신경현

50 교장 일기

이놈의 마스크를 어째 최관의

55 한의사 권해진의 살아가는 이야기

효도하는 법 권해진

59 글쓰기 모임 안내

 

일터 이야기

62 일터 탐방_ 코레일 고객상담센터

동일 유사 업무가 대체 뭐래? 명숙

68 일터에서 온 소식

현장 노동자는 감염 예방 방법을 알고 있다 이향춘

73 작은책 법률 상담소

창작자를 보호하라 김묘희

 

작은책이 만난 사람_ 최만선

77 꼴값은 하고 산다 안건모

 

96 이동슈의 생활 만화 _ 삼삼한 삶

 

세상 보기

98 옛 그림 속 여성들

이별의 순간, 한 남자와 두 여자 이종수

104 키워드로 보는 우리 사회

상상하는 자와 팔로우하는 자 고태경

110 어린이 해방과 평화

어른에게 드리는 글과 어린이날 약속 이주영

116 생태 이야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이후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살인 기업의 노동 시간은?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발걸음을 끌어당기는 분청사기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영화로 소망을 이루는 방법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왜 정치는 불평등을 악화시키는가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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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일터 이야기

일터에서 온 소식

 

 

자회사만 고집하는 한국가스공사

박인국/ 공공운수노조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지부 인천기지 지회장

 

  

한국가스공사 인천기지에 미화원으로 근무한 지 9년차가 되어 갑니다. 20175월 문재인 정권이 공공부문 비정규직 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한다는 발표가 있은 후 지금까지 한국가스공사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올바른 정규직 전환을 위해 20179월에 노동조합을 만들 당시만 해도, 희망이 보였습니다. 미화원이라고 하여 단순 미화가 아니고, 청소와 예초, 제초 작업, 집기류 이동 등 관리원에 가까운 노동을 하였습니다. 급여가 삭감되어도 말을 못했고, 소장의 갑질에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습니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흐름에 따라 노동조합에 대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국가스공사 비정규직은 전국에 본사를 포함하여 15군데가 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만 1400여 명에 달합니다. 그래서 지부를 두고 지회를 만들고 지회장, 대의원을 선출하였습니다. 대구 본사에 지회장들이 모여 비정규직 직종을 비서, 기사, 캐드 업무를 하는 파견직과 시설, 미화, 소방, 특경, 전산, 홍보 7개 직종으로 구분하고 직종 대표인 지부장을 선출하였습니다. 공공운수노조 각 지역 국장님이나 본부장님을 통하여 교육을 받고, 공공운수노조의 도움을 받아 노·사 및 전문가 컨설팅협의회(이하 노사전협의회)와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201711월에 1차 회의를 하기 전까지 비정규직 노동자분들을 상대로 노동조합 설립 취지와 노동조합이 앞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는지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설립 초기부터 별도 직군, 별도 임금, 별도 예산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한국가스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였습니다. 대학을 나오고, 시험을 치르고, 호봉을 받고, 성과금을 받는 정규직분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조합은 사전에 논의를 하고 합의를 하여 공사에 요구했지만, 공사는 자회사만을 고집하였습니다.

한국가스공사 앞 천막 농성장에 걸린 현수막.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전환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파견 직종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계약이 만료되어, 정규직 전환 대상자라는 종이 한 장 받고 퇴사하여 전환만을 기다리는 입장이 되었고, 전산 직종에 근무하시는 분들 중 일부는 전환 제외 대상이라고 해서 노동청 중앙컨설팅에 의뢰를 했더니 전환 대상자이며, 직접고용해야 된다는 답도 받았습니다. 공사 사장이 공석일 때는 사장이 없다는 핑계로, 인사이동 철에는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핑계로 지루한 싸움을 하였습니다.

20189월 처음으로 3일간 파업을 진행했지만 얻은 것 없이 끝나고 말았습니다. 12차 노사전 회의를 기점으로 공사와 전환 회의를 중지하고, 각 직종별 처우 개선을 위한 실무 협의를 진행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경우 급여 삭감 이유를 밝힐 것을 요구하고, 저희는 단순 미화가 아닌 시설 미화이기 때문에 현실성 있는 임금 설계를 요청하며, 정규직 전환 발표 후 정년퇴직 등으로 나가신 자리에 인력 충원이 안 되고 있어 충원을 요청했습니다.

공사는 순환 보직으로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동안 담당을 하는 관계로 전 담당자의 설계 취지를 확인 안 하는 것인지, 노동조합이 있음에도 아무런 개선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기존 용역업체와 계약이 만료되어 신규 입찰 과정에서 임금을 개선하였습니다. 하지만 인력 충원은 계속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관리소가 늘고, 정규직이 늘어서 더 충원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나간 자리에 충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 사측은 타 공공기관보다 많은 인력이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공공기관에 종사하는 미화 인력에 대한 조사를 하니, 단순 청소만 하는 미화고 공사와 같이 청소 업무와 조경 관리를 같이 하는 곳이 없었으며, 건물 청소의 경우도 건물관리위생협회의 기준보다 적은 인원으로 미화 작업을 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20195월에 다시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임금체계가 바뀌어 남녀 간 임금 격차가 더 벌어지고, 남자의 경우 실적급 정산이라는 수당이 생기면서 조합원들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노조에서 남녀 기본급이 상이하니 같이 맞춰 달라는 요구에는 남자의 임금이 총액으로는 많으니 문제없다고 하고, 최저임금은 통상임금으로 따지니 상여금 300퍼센트를 12개로 나누어 지급한다는 것을 월 25퍼센트 지급으로 바꾸어 통상임금에 산입되게 하는 등 사측의 만행에 더 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지부에 건의를 하여, 2019129일 대구 본사 앞에 미화 조합원의 설움을 알리는 투쟁 천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투쟁 천막 설치와 동시에 총무부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는데 이름만 없다뿐이지 자기를 욕하는 것 아니냐는 항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다리지 못하고 투쟁 천막을 쳤다는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이에 저희는 담당자 분을 욕하는 것이 아니라 사측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라 말하고, 총무부장의 빠른 결론 촉구를 하였습니다.

미화 직종의 문제는 새로운 임금 설계와 인력 충원이라는 결과를 얻었지만, 비정규직 전환 요구에 대해서 사측은 아직도 답이 없습니다. 우리 비정규직 노조는 일방적인 직고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회사안도 하나의 조건만 성립이 되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회사의 경우 모회사와 교섭을 할 수 있는 교섭권을 보장한다면 검토를 한다고 하였으며, 설립과 운영을 어떻게 할 것인지, 산업통상자원부의 자회사 운영 평가를 어떻게 치를 것인지 등을 사측에 요구하였지만 제대로 된 자료를 안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물며 직접고용시 정부의 전환 가이드라인에 나오는 권고 사항도 무시한다는 발언을 하여 15차 노사전 회의와 2번의 실무 협의를 마지막으로 중단을 하였으며, 사측의 성의 있는 자료가 나올 때까지 우리 나름의 투쟁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 지난 12일 한국가스공사 시무식 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대구 본사에서 게릴라 파업을 벌였다. 사진 제공한국가스공사비정규직지부


이에 지난 12일 본사 조합원만으로 게릴라 파업을 진행하여 2020년 시무식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2020110일 기준 투쟁 천막 33일차, 정규직 전환 요구 선전전 634일차를 보내면서 한국가스공사의 성의 있는 자세를 요청하며, 한 명의 조합원으로서 정규직 전환이 희망 고문이 안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지난 2월 10일부터 가스공자 비정규지부는 전면 파업 중입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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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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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속 여성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녀는 오지 않았다

이종수/ 미술사학자, 조선회화실록저자

 

  

이 무덤은 특별합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은 고구려의 수많은 벽화고분 가운데 묘 주인이 확실한 유일한 무덤입니다. 연대까지도 확실하죠. 408. 앞서 보았던 안악3호분의 경우, 많은 정보를 주긴 했지만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묵서명에 이름을 남긴 동수가 무덤의 주인인지 등등, 여전히 논쟁이 진행 중인 까닭에 여주인의 신분 또한 잘라 말하기가 어려웠지요.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


그런데 안악3호분으로부터 약 반세기 후, 훨씬 더 정확한 정보를 품고 있는 무덤이 만들어졌습니다. 무덤 안 벽화 사이에 남겨진 명문을 보자면, 그 내용인즉, 영락(永樂) 18, 즉 광개토대왕 시대인 408년에, 유주 자사 등등을 역임했던 진()이라는 남자가 77세까지 잘 살다가 이곳에 묻혔다는 이야기입니다. 유주 자사라면 지방 태수에 해당하는 지위이니 진의 무덤은 5세기, 고구려가 한창 잘나가던 시대의 지배층 무덤을 대변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무덤 안 가득 벽화로 장식되었으니 당연히 무덤 주인 부부의 초상화도 남아 있을 것입니다. 5세기 무렵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는 앞 시대의 안악3호분과는 달리, 무덤 주인 부부가 한 장면에 나란히 앉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무덤 안에서의 위치도 바뀌었죠. 묘주 부부 초상화를 측실에 그렸던 안악3호분과는 묘실 구조가 달라졌기 때문인데요. 측실이 사라진 5세기에 이르면 묘 주인의 초상화는 현실(玄室, 무덤방)의 북쪽 벽면에 그려집니다. 주인공들을 상석(上席)에 모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슨 일일까요. ‘덕흥리 벽화고분의 현실 북벽에는 이 홀로 앉아 있습니다. 배우자가 없었던 것일까 싶지만, 고대 사회에서 지배층 남성이 미혼 상태로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할 만한 선택지가 아닙니다. 게다가 명문 기록을 보면 자손들의 영달을 기원하는 내용이 더해져 있습니다. 진은 여느 고구려의 상류층 남성들처럼 자손을 둔, 다시 말해 기혼자였던 것입니다.

벽화의 원래 계획이 단독 초상일 리도 없습니다. 남주 혼자 벽면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니까요. 명백히 그 옆자리가 비어있지요. (선으로 모사한 그림을 보면 이 장면이 보다 선명하게 확인됩니다.) 진의 옆으로는 그를 위해 대기 중인 말 한 마리, 그리고 시중꾼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진과 나란해야 할 배우자의 자리는 비어 있고, 장방 바깥쪽으로 여주를 위해 준비해 둔 수레 하나와 시녀들이 대기 중일 뿐입니다. 진의 아내는 이 자리로 돌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덕흥리 벽화고분 묘주 초상(선 모사도).


궁금합니다. 진이 홀로 그려져야 했던 이유. 저 영원의 세상에서도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지배층 남성이 무덤에 홀로묻힌 경우가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있기는 했습니다. 그저 그런 관직도 아닌 국왕의 신분이었죠. 물론 그는 결혼을 했습니다. 다만 왕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을 뿐인데요. 문제될 것 없지요. 대부분의 부부처럼, 후일 왕비가 죽은 뒤에 합장을 하면 되니까요. 그런데 그 왕비는 남편 곁에 묻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죠. 두 번째 남편이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쪽도 국왕의 신분이었는데 두 남자는 형제 사이였답니다.

고구려의 9대 임금인 고국천왕이 승하한 것은 197. 아들은 없이, 동생들만 여럿 있는 왕이었습니다. 왕비 우씨는 고민이 깊었지요. 어떻게 왕비 자리를 더 유지할 수 있을까. 고국천왕은 첫째 동생인 발기를 후계로 골라 두었지만, 그 유지의 시행 여부는 살아 있는 왕비의 몫이었죠. 결국 왕비는 자신을 박대한 첫째 시동생 발기를 제치고, 둘째 시동생인 연우를 왕으로 세웁니다. 바로 10대 임금인 산상왕인데요. 고국천왕의 비였던 우씨는 다시 산상왕의 비가 되어 왕비의 자리를 유지해 나가지요.

흥미로운 것은 다소 무리를 해 가며 다시 왕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별다른 비난이나 저항 없이 왕비의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의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를 생각해 본다면, 그녀의 행동이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녀와 새 임금 산상왕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선 것은 권력에서 밀려난 발기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고구려의 신민들 모두 왕과 왕비를 승인했다는 얘기지요. 오히려 왕위를 차지하려 분란을 일으킨 발기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왕비의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겠지요. 그녀의 출신인 연나부, 즉 고구려의 왕비를 배출했던 부족의 힘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는 배경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집안의 권력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왕비 자리를 유지할 방법을 도모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출신 부족이 세력을 겨루어야 했던 것이 2세기 말, 고구려의 상황이었으니까요. 그리고 한 여인이 출가를 했다 할지라도, 딱 잘라서 출가외인으로 금을 긋지 않았다는 점만은 분명하지요.

물론 그렇다 해서 산상왕비의 경우가 고구려 여성의 평균적인 삶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합니다. 고구려 여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지 않았다, 뭐 그런 식의 일반화로 이해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지만 이후 조선의 여성상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그나마 조금 숨을 쉴 만한 시대라 해도 좋지 않을까, 그런 상상을 하게 해 줍니다. 산상왕비 개인의 선택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든 별개로 말입니다.

묘실 벽화 이야기를 하던 중이니만큼 죽음 후 이 왕비의 안식처가 궁금해집니다. 그녀는 죽은 뒤 어느 남편 곁에 묻혔을까요. 자신의 유언에 따라 산상왕 곁에 묻혔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남편의 뜻을 어기고 왕위 계승을 흔들었으니 고국천왕과 함께 영원의 시간을 나눈다는 건, 아무래도 낯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어쨌거나 홀로 무덤을 지키는 신세가 된 고국천왕. 저승에서도 마음이 썩 좋지 못했나 봅니다. 왕비 우씨가 산상왕 곁에 묻히게 되자, 무녀의 꿈에 나타나 큰 분노를 토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으니까요. 심지어 두 무덤 사이에 소나무를 심어 서로 보이지 않게 하라는 명령까지 내렸다고 하네요. 재혼이야 고구려가 허락한 제도이니 그렇다 쳐도, 자신을 무덤 안에 홀로 남겨 둔 왕비를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이겠죠. 왕비 없이 혼자 묻힌 고국천왕의 무덤 안에 벽화가 그려졌다면, 몹시도 외로운 묘 주인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덕흥리 벽화고분의 여주인은 어디로 간 것일까요. 어째서 이토록 장엄하게 장식된 영원의 안식처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요. 고국천왕의 왕비가 두 번째 남편인 산상왕을 따라 묻혔듯이 의 아내에게도 무언가 사연이 있었던 것이겠지요. 역사에 기록되지 못하고 묻혀 버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어 있는 여주인의 자리. 고구려 여성의 삶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을 부르는 장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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