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책> 2019년 10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절대 자식을 위해 살지 마세요
정설경/ 작은도서관 운영자
인연을 이어 오던 동네 작은도서관에서 올해부터 책임을 맡게 되었다.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도서관을 세웠고, 월세를 근근이 만드느라 자원봉사 인력에 의지하여 도서관을 가동한다.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기관 중에 대한노인회가 있는데, 여기에 소속된 시니어 봉사자 세 분이 하루 또는 이틀씩 오셔서 도서관 정리 정돈을 해 주신다. 그중엔 연세도 제일 많고, 가장 정갈하고, 스스로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이 선생님이 계신다.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소액이라도 돈을 주는 게 얼마나 큰 복지인지, 늘 나라에 감사하다’는 시니어 선생님. 팔순이 넘었는데 그 시절에 여고를 졸업하고 여대를 다녔다며, 말씀하시는 구절엔 꼭 영어 단어 하나씩을 넣어서 자신이 배운 사람이라고 티를 내신다. 그럴 때마다 귀여워서 속으로 큭큭 웃었다. 비록 취직하느라고 대학 졸업은 못했지만 명문 여대를 나온 것을 강조하신다. 그리고 못 배운(?) 주변 할머니들을 늘 흉보신다.
“5분만 말해 보면 저 할머니가 얼마나 배운 사람인지 나는 금방 알 수 있어요. 못 배운 사람은 표가 나거든요.”
어려운 시절에 남들보다 많이 배웠다는 시니어 선생님은 누가 더 많이 배운 사람인지 감별하고 품평하느라 이야기가 길다. 그런데 선생님 얼굴에 근심이 가득 찼다. 미국에 사는 딸과 카카오 보이스톡으로 통화하며 언성도 높이신다. 집엔 며느리가 있어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못한다며 도서관에 오면 와이파이도 터지겠다, 속내를 얘기하시느라 주변을 의식하지 않는다.
“내가 5천만 원 갖고 있는 줄 다 아는데 어떻게 안 주니? 전셋돈을 빼 줘야 한다는데 어떻게 안 주니?”
선생님의 딸은 ‘엄마의 마지막 남은 재산 5천만 원을 아들과 며느리한테 절대 뺏기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것 같고, 선생님은 ‘아들한테 얹혀 사는 주제에 돈이 급하다는데 어떻게 안 주고 버티냐’며 언성을 높인다.
몇 주 동안 딸과 전화를 주고받으며 근심 걱정이 가득하시더니 어느날 차분하게 말씀을 들려주신다.
“다시 태어나면 절대 이렇게 살지 않을 거예요. 자식 위하는 것도 다 소용없어요.”
마지막 남은 5천만 원을 아들한테 건네고서 상황이 종결됐나 보다. 많이 배운 할머니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푸념과 신세한탄을 듣느라 두 시간이 속절없이 간다. 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고역이지만 나이 들어 자식에게 종속된 경제적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집에 가만 있으면 누가 돈 한푼 줘요? 이렇게 나와서 뭐라도 하니까 얼마라도 받죠.”
“근데 저 이런 데 와서 일하는 거 아무도 몰라요. 누가 알면 돈독 올랐다고 욕할 거예요.”
일찍 남편과 사별했지만 ‘많이 배운 덕’에 직장 생활을 할 수 있었고, 재력도 적지 않았는데 손녀가 유학 간다고 해서 몇 번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 한푼 안 남았다고 자책하신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시니어 일자리를 얻어서 연중 10개월은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어 좋지만, 혹시 누가 알까 봐 창피하다며 조마조마해 하신다. 나도 적잖은 나이가 되니 경제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아져 이분의 푸념이 남의 일 같지 않다.
자식에게 의존하지 않으려고 평생 돈을 벌었는데 자식들을 도와줘야 할 상황에 부딪혔고, 자꾸 도와주다 보니 이젠 수중에 돈이 없다고. 시니어 일자리마저 없었으면 할머니는 구겨진 자존감을 살릴 방안도 없었을 것이다. 고령에 일할 수 있는 것도 자랑이라면 자랑일 텐데 할머니는 누가 알까 봐, 들킬까 싶어 조심조심 작은 발걸음을 옮기신다. 혹여 나이 많다고 내년엔 기회를 안 줄까 봐 도서관에 오실 때마다 인생의 회한을 자꾸 토해 내신다. 할머니의 근심에 공감하면서 나의 우울지수가 높아져 간다. ‘저 모습이 나의 미래, 우리의 나중 모습이 아닐까.’ 할머니를 보며 50대 나이의 도서관 봉사자들은 깊은 한숨을 나눴다. 우리가 노인으로 보내야 하는 시간은 최소 3, 40년인데 그 긴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야 할까.
50대인 우리들은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딱히 없다. 노인들은 복지제도라도 있지, 우리는 새로운 일을 할 수도 없고 자격이 안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단순노무직이거나 취업 구제책으로 나오는 단발성 일이다. 할 수 있는 일도 많지 않고, 그렇다고 놀기도 어쭙잖은 나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만큼 앞으로 더 살아야 한다는데 뭣을 하며 노년을 보내야 할까. 소일은 노인들에게나 해당되는 용어였는데 그 ‘소일’해야 할 시기가 우리에게 닥치고 있다. 기본소득이 보장되면 최소한의 생계는 걱정하지 않을지 몰라도 내가 주도할 ‘소일’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가 작아질 것이다. 노인으로 보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할일’이 없으면 많이 배운 노인이라도 뒷모습은 허전하다. ‘돈’까지 떨어지면 비참함으로 얼룩진다. .
“다시 태어나면 절대 자식만 위해서 살지 않을 거예요.”
많이 배웠다고 자랑하시는 할머니의 등 뒤엔 외로움도 겹쳐 있었다. 허무하게도 후회만 남은 어느 할머니에게서 노인의 시간을 걱정하게 된 나, 괜한 걱정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