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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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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5. 29. 16:37 알림 / 엮은이의 글

시사in(662호)에 <작은책> 기사가 실렸습니다. ^^


노동자의 ‘생활글’ 300번의 큰 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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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작은책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작은책 엮음, 작은책 펴냄, 2020)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서영란(가명)/ 서울 글쓰기 모임 회원

 

 

 

네가 지금 세금 받아 처먹고 앉아서 하는 일이 대체 뭐야! ? 여기 책임자 나오라 그래!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선생님, 죄송합니다. 지금 동장님이 안 계셔서요. 일단 여기 좀 앉으시고 고정하세요.”

, 됐어! 넌 됐고 동장 나오라 그래! 동장!”

내 일터인 주민센터 민원실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속사정은 이렇다. 신분증 없이 서류를 발급해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한다. 그래도 통사정을 하면 본인 확인을 철저히 한 후에 서류를 떼어 준다. 그런데 인감은 얘기가 다르다. 인감이라는 서류 자체가 워낙 재산 문제와 관련해서 많이 쓰인다. 함부로 발급했다가 사고 터져서 구상권 청구(다른 이의 빚을 갚게 된 사람이 그이에게 반환 청구를 할 수 있는데 이 경우 연대 책임이 있는 공무원에게도 배상금을 청구할 수 있다.)가 들어오면 공무원은 그야말로 인생 조지는 거다. 보험에 들었다 한들 보상 금액이 얼마 안 되니 나머지는 월급에서 까 나가야 한다. 퇴직할 때까지 갚아도 못 갚는 경우도 있다.

공무원도 그렇지만 민원인은 민원인대로 다른 사람이 인감 도용을 해서 사고가 터지면 그거 해결하느라고 생난리가 난다. 있는 사람이야 덜하겠지만 가뜩이나 없이 사는 사람들한테 돈 몇백, 몇천만 원은 엄청난 금액이다.

상황이 이러니 인감만큼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발급한다. 본인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해도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고 남의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면 반드시 위임자 신분증이 필요하다. 이건 뭐 예외고 뭐고 없다. 간혹 가다가 도장만 가지고 와서 가족이나 다른 사람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래저래 해서 안 된다고 안내를 한다. 그러면 알았다고 하고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법이 어디 있느냐고 생짜로 우기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들은 우기는 공식이 있다. 처음엔 웃으면서 한 번만 봐 달라고 한다. 그래도 안 되면 슬슬 언성을 높인다. 그것도 안 되면 회유를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 누구누구고 내가 어떤 사람이니 이번 한 번만 해 달라. 참 웃기지도 않는다. 아니, 지금 지가 누구인지가 왜 나오고 지가 아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또 왜 갖다 붙여. 끝까지 안 된다고 하면 이제는 완전히 본색을 드러낸다.

! 민원인 편의를 봐주는 게 공무원이지 네가 거기 앉아 있다고 공무원인 줄 알아? 세금으로 월급 받아먹는 주제에! 여기 책임자 누구야! ! 씨발, 동장 나오라 그래!”

도저히 이해를 하려야 할 수가 없다. 도대체 머릿속에 뭐가 들었길래 저럴까 싶다. 속이 터져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인간이 왜 저러는지 알 것도 같다. 소리 지르고 높은 사람을 찾고 해서 안 되는 걸 되게 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인 거다. 처음엔 안 된다고 해도 누구 이름 대면 다 되더라.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더라.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사회적으로 통하니까 그러는 거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앞뒤 가려서 융통성 있게 해도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엄격히 지켜야 하는 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지켜야 하는 거. 이런 사회적 합의가 없으니 저 지랄 아닌가 말이다. 올바른 사회라면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져야 하고 사회 구성원 모두 그 원칙을 준수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비록 각자 손해를 좀 볼지라도 말이다.

머릿속으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간신히 끓어오르는 부아를 참고 있는데 이놈의 인간이 아주 끝까지 간다. 때마침 등장하신 동장님한테 가서 직원 교육 똑바로 시키라고 아주 큰소리다. 그러면서 또 인감을 발급해 달라고 한다. 참 대단하다, 대단해. 으이구… ….

동장님이 부르신다. 인감을 다른 사람이 발급할 수 있냐고 물어보신다. 신분증하고 도장 지참하고 위임장 쓰시면 발급 가능하다고 수십 번도 더한 안내를 또다시 한다. 신분증 없이는 절대 안 되냐고 하신다. 당연히 안 되지. 될 거 같았으면 이 난리 피우기 전에 얼른 발급해 줘 버리지 뭐하러 이러고 있었을까. 관련 법을 가지고 오라고 하셔서 얼른 가지고 갔다.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니 동장님도 나랑 한통속이라 생각했는지, 길길이 날뛰던 민원인은 이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법이 꼭 그렇게 하라고 있는 거냐고 한다. 참 나 무슨 소리냐. 법이 그럼 지키라고 있는 거지 어기라고 있는 것인감? 물론 거지 같은 법도 많지만 인감제도는 인감 관련 사기가 하도 많아서 선량한 시민들 재산 지켜 주려고 점점 더 보호되고 강화되는 쪽으로 개정되고 있다. 사실 인감 제도가 없어져도 좋으련만 없어질 때까지는 인감 사고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대체 당신은 어찌하여 이러시는 게요. 이보시오. 제발 좀 그만하시고 돌아가시오!

결국 그 민원인은 화를 내 봤자 본인 목만 아프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끝까지 협박하며 대한민국 공무원들을 싸잡아 성토한 후 쿵쾅쿵쾅거리면서 주민센터를 떠났다.

워메, 정신없는 거. 맞아 본 적도 없는 폭격을 맞은 거 같다. 목소리는 어찌나 큰지 저런 사람들은 평소 복식 호흡에 발성 연습을 하나 보다. 무슨 연극배우 같다. 귀가 왕왕 울린다. 둘레에선 그래도 위로랍시고 저 정도 민원은 아무것도 아니야. 몇 날 며칠을 찾아오는 민원인도 있고 앞으로 공무원 생활하다 보면 더 심한 사람도 많이 만나니까 잊어버려 하고 한 술 더 뜬다. 저 정도는 애교라 이거지. 으이구, 내 팔자야. 아무래도 도를 닦든지 해야 쓰겄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민원인들은 하나둘 찾아오고 주민센터는 다시 북적댄다.

우라질 놈의 인감. 없어진다더니 그게 대체 언제냐고.’

괜히 애꿎은 인감한테 구시렁거리면서 마음을 다잡고 일에 몰두하려고 하는데 뉴스에서 공무원들이 저지른 비리 소식이 흘러나온다. 자기네끼리 몇 년 간 뇌물을 얼마를 받아먹었고 그 대가로 누구를 봐주고 관련 사업은 부실이 되고 어쩌고저쩌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도 줄줄 푸념과 욕지거리가 새어 나온다.

도대체 저런 인간들은 뭐하는 인간들이냐. 확 모가지를 잘라 버려야 돼. 삼대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니깐. 나라가 어찌 되려고 공무원들이 저 모냥인지. 아주 내가 낯 뜨거워서 어디 가서 공무원이라고 하고 다니지를 못하겠다. 몽땅 감옥에 처넣고 재산 환수를 해야 돼. 아니지, 먹은 돈의 세 배를 갚게 해야 된다니깐. 근데 뭐가 어쩌고저째? 고작 구속 수사? 씨발, 대통령 나오라 그래!”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 본문 , 작은책 2011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5:11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

이명옥/ 프리랜서 구직자

 

 

작은책과 처음 대면하던 시절 나는 백수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오락가락하는 여성 가장이었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보습학원 강사, 보험 판매원, 저소득층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인터넷 방송 진행자, 출판사, 서울시의회 의정보좌관, 장애인복지신문 총무 등이 내가 거쳐 온 일자리다. 그 사이 중학생이던 아들은 서른 살 청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일자리를 찾아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한 달에 네 꼭지의 탐방 기사를 쓰고 뉴딜 일자리를 찾아 수없이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며 살고 있다.

IMF가 터지기 전 오전 보험회사와 오후 보습학원을 오가며 내가 받은 급여는 150여만 원이었다. 3년쯤 보험회사를 다니고 나니 영업 능력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보험을 들 사람을 구할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이나 자녀 이름으로 넣은 보험도 서너 개나 됐다.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지는 식이었다. 나는 보습학원 강사만 하기로 했다. 보습학원은 장위동 시장 골목에 있었다.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 부모는 대부분 자영업자였다. IMF가 터지자 아이들은 학원부터 그만뒀다. 나는 초등학생부터 중학교 2학년까지를 맡아 가르쳤는데 학생들이 줄어들자 학원을 그만두게 됐다.

보험회사 다니며 넣었던 연금과 교육 보험 등 2천만 원을 차례로 해약해 근저당 설정으로 담보 대출된 대출금 이자를 갚으며 악몽 같은 시절을 버텼다. 이후 2002년 여성신문사 마케팅 부서에 입사해 4대 보험을 제하고 80만 원 조금 넘게 받았다. 급여를 제때에 못 받고 절반씩 받기도 했을 만큼 여성신문사의 재정은 열악했다.

2003628일 여성신문사에서 잘리고 71일부터 상계역에서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 일을 3년 정도 했다. 처음엔 청소반장과 청소하는 분들의 텃세와 출근하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서러웠는지 모른다. 아침에 김밥을 싸 가지고 와 팔던 아주머니가 주신 김밥을 먹고 체하기도 했다. 비 오는 날 신문이 비에 젖을세라 비닐에 싸서 들고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내 신세가 처량하고 서글펐다. 팀장의 갑질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심했다. 장마철 날씨처럼 수시로 성정이 바뀌고 잔소리도 심했다. 겨울철 계단을 오르내리면 사고가 날 수 있다며 일을 그만두라고 했을 때 난 끝까지 싸우며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했다.

무가지 신문 배달할 때 쓰던 카트. ⓒ이명옥.


무가지 신문을 배포하기 시작한 뒤 한 달쯤 지나 구리시의 입시 학원에 일자리가 생겼지만 나는 무가지 신문 배포를 그만두지 않았다.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 2시간 정도 일하고 꼬박꼬박 들어오는 30만 원에서 45만 원을 포기하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가지 신문 배포 도우미를 그만둔 것은 아침에 출근하는 일자리가 생긴 후였다.

2009년 삼양빈민연대에서 3년 사업으로 따낸 노동부 방과후 학습 도우미 일자리는 최저 시급에 맞춰져 있었다. 일주일에 여섯 저소득층 가정을 한 가정당 두 번씩 찾아가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우리에게 스폰서를 구하라는 요구가 덧붙여졌다. 형식상이긴 했지만 황당한 일이었다. 이명박 정권은 3년짜리 프로젝트를 2년 만에 해체시켜 나는 일자리를 잃었다. 일부는 당시 생긴 지역아동센터의 교사로 자리를 옮겼지만 나는 출판사를 다니기로 해서 지역아동센터에는 발을 들이지 않았다. 1인 출판사에 6개월 다니면서 보험 없이 150만 원을 받았다. 인터넷 방송 진행을 하면서는 첫 달은 150만 원, 이후는 4대 보험 떼고 130여만 원을 어렵게 받으며 2년 넘게 일했다. 서울시 의정 보조 3개월은 4대 보험 떼고 134만 원이었다. 장애인복지신문사는 하루에 4시간씩 주 5일을 나가기로 하고 50만 원씩 받았는데 워낙 재정이 열악해 그 돈마저 제때 못 받고 며칠이 지나서 받는 경우가 생기곤 했다. 19개월 정도 장애인복지신문사에서 알바로 일했고 이후 다시 실업자가 됐다.

선거철 선거 사무원, 학교도서관저널과 해피데이스에 자유기고가라는 이름으로 글쓰기 등 닥치는 대로 살아오면서 주변에 수많은 빚을 지며 살았다. 때론 쌀을 보내 주는 이, 김치나 마늘, 고춧가루 등을 보내 준 지인도 있다. 명절이 가까워지면 상차림에 보태라며 몇 년째 통장에 슬며시 돈을 넣어 주는 교수님도 계시다.

2020년엔 인청시청 객원기자로 한 달에 네 꼭지의 기사를 쓰기로 했다. 공공 일자리도 찾아보고 요즘 올라오는 뉴딜일자리에 부지런히 서류를 넣고 면접을 보고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유엔이 정한 기준으로 보면 나는 아직 청년이다. 하지만 일자리센터 구직난을 보면 나는 고령자다. 고령자에, 여성에, 장애인인 내게 적합한 일자리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그러나 초고령 사회에 각자 도생의 길을 걸어야 하는 나는 오늘도 서류를 넣고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비정규직 천만 시대, 청년 실업이 넘쳐 나는 시대다. 당신의 일자리는 안전한가?

3년여 세월을 취준생으로 나의 가슴을 숯덩어리로 만들었던 아들은 올해 311일자로 중소기업 공채로 입사했다. 150명 지원에 2명을 뽑았다고 한다. 대기업에 비해 연봉은 적지만 출근 자율제, 중소기업 세제 혜택, 청년키움 적금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무엇보다 팀의 분위기가 자율적이라고 만족해한다. 수천만 원의 빚이 아들의 몫으로 남아 있지만 취직 대란 시대에 정규직으로 입사한 아들이 고맙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4:1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안미선/ 작가

  


내일이면 이사를 한다. 묵은 살림을 정리하니 쓸데없는 것을 많이도 끼고 살았구나 싶다. 버릴 건 버려 널찍해진 베란다를 보며, 화분이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뒤늦게 생각한다. 비우지 못해 새것이 들어갈 수 없는 건 집이나 마음이나 같다. 이사 갈 집은 지금 집보다 좁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책도 많이 처분했다. 하지만 몇 장 끄적이다 만 일기장을 뒤적이기도 하고, 오래된 노동자협회 소식지를 넘겨 보기도 한다. 망설이다가 그건 가져가기로 한다.

앨범은 들춰 보다가 괜히 보았다 싶다. 헤어진 사람들과 세상을 떠난 사람들, 그때는 좋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결혼식 때 내 얼굴을 보니 곱다는 생각이 들면서 왜 더 즐겁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피부염을 앓은 아이의 얼굴에 새삼 안타까워하고, 갓 목욕한 아기의 맨살에서 살 냄새를 떠올리기도 한다. 오래전에 쓴 글을 읽을 때처럼 기쁨과 슬픔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지난 일은 다 잊었다고 여겼는데 묵은 상처만 들쑤신 것 같다.

나는 스무 살 때 처음 서울에 올라와서 그동안 이사를 여덟 번 했다. 학교를 다닌다고, 취업을 했다고, 결혼을 했다고 다른 동네를 전전했다. 보통 몇 년씩만 살다 이사를 했는데 지금 집에서는 8년째 살았다. 가장 오래 산 집이다. 그래서 셋집인데도 정이 들었다. 이 집에 이사 올 때 아이는 취학 전이었다. 이 집에서 초등학교 6년 시간을 보냈고, 근처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 작은책아기 낳는 날이라는 제목을 시작으로 글을 연재한 적이 있는데 그 아기가 열다섯 살이 되었다. 엄마로서 절반의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처음 이사를 왔을 때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아이가 좀 더 자랐으니, 이제 내 일도 찾고 돈도 벌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글을 쓰고 살고 싶었다.

책꽂이가 둘러싼 작은방에 틀어박혀 밤낮으로 글을 썼다. 강의가 있다면 달려갔고, 예술인 지원사업에도 참여했다. 아이는 쑥쑥 자라고 난 앞만 보고 달렸다. 이젠 책도 몇 권 펴냈고 글을 써서 산다는 이름을 그런대로 달 수 있게 되었다. 이 집에서 나는 작가가 되었다. 물론 내년에도 일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은 여전하지만.

나는 집에서 주로 일한다. 식사를 차리면서 집안일을 하면서 전화며 택배를 받으면서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다른 많은 여성들도 그렇겠지. 떠맡겨진 가사와 육아일을 해내고, 일도 척척 해치우기 위해 피나게 발버둥을 칠 것이다. 때로 엄마가 되었다가 작가가 되었다가, 누군가 나를 부를 때 순간순간 역할을 바꾸게 되지만, 나를 지켜 내고, 아이를 지켜 내고, 내 일을 지켜 내었다.

내가 글을 쓸 때, 아이는 심심하다고 소리쳐 나를 불렀다. 엄마 없다고 느닷없이 울기도 했다. 저녁에 강의를 할 땐 아이를 맡길 곳을 찾아 이웃집을 전전했다. 연말이면 몰려오는 피로와 압박에 소리를 꽥 지를 때도 있었다. 생일날, 약속 하나 없다고 내가 징징대자, 보다 못한 아이가 용돈으로 케이크를 사 와서 같이 즐겁게 박수쳤다. 가끔 친구들을 초대해 같이 밥을 먹었다. 모든 악다구니와 웃음과 부대낌이 구석구석에 스며 있다. 분주한 손을 놓고 집을 물끄러미 보게 된다. 기억은 이렇게 생생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자리는 상상이 안 된다.


코로나19 사태로 아이의 방학은 길어졌다. 내 인생에 이런 때가 또 있을까?” 학교에 안 가는 게 마냥 좋은 아이는 알사탕을 문 것처럼 즐거워한다.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내가 쏘아붙이자 아이가 놀란 표정이다. 난 입을 꾹 다문다. 집에 있어도 엄마가 일을 해야 하고 들어오는 수입이 줄고 지출은 많아져 골치를 앓는다는 걸 아이는 모른다. 그래, 몰라도 된다. 그냥 농담으로 맞장구치며 웃어넘겼다. 하지만 집안의 엄마들이 얼마나 힘들까, 일하는 엄마들이 얼마나 답답할까. 여자들이 집에서 하는 노동이 당연하게 여겨지고 배경처럼 취급되는 게 불편하다. 이러니까 앞으로도 여성의 목소리를 계속 써 내야 할 것 같다.

작은책이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나는 스물다섯 살에 무얼 했던가 생각해 봤다. 글을 쓰고 살겠다고 결심했고 사람들을 위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작은책은 그때 운 좋게 만난 친구였다. 글쓰기 모임에도 갔다. ‘정직하고 소박한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의 길을 따라갔다. 실은 소설가가 되고 싶어 국어국문학을 전공했고 문학을 꿈꾸었는데, 그건 다른 길이었다. 난 그 샛길로 들어가 지금까지 쭉 걸어왔다. 내 이야기나 사람들의 이야기로 책들을 쓰면서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말하고 쓸 수 있다작은책의 가르침을 잊은 적 없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라는 책을 최근에 냈는데, 작은책은 나에게 말을 들려준 또 다른 당신이기도 했다.

처음 글쓰기 모임에 가서 글을 꾸며 쓰면 안 된다고 구박을 듣던 사회 초년생이 이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여성과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하며 작은 결심을 지켰다. 작은책은 아프고 억압받는 목소리에 주목하며, 글을 쓰고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의 힘을 믿었다. 글 쓰는 노동자들을 키워 내었다. 스물다섯 해 동안이나 그 약속을 지켰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정말 어렵고 애썼을 것이다. 축하한다, 좀 더 이 길을 가 달라고 친구로서 부탁하고 싶다

posted by 작은책
2020. 5. 13. 14:00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일자리는 너무 많은데

제희덕/ 정년퇴직 문화재 관리자

 

 

나는 2012년 초 정년퇴직 후 과거 일하던 일들은 생각하지 않고 일하기로 했다. 상가건물 관리인, 수제품 생산업체, 김치 배달 및 방문 소독업체, 사설 미술관 주택 경비, 왕릉 안전관리원, 방문요양보호사, 장례지도사, 전통결혼예식장, 문화재 관리인 등 여러 곳에서 일을 했다.

30개 점포의 상가건물 관리인을 3년여 할 때는 4대 보험도 없고 연월차도 없고 월급 인상도 없었다. 퇴직금도 없기에 매 1년 경과 시 1개월 봉급이 없는 경우가 발생했다. 상가관리인을 하며 신문 광고를 보고 야간에 장례지도사교육원에서 3개월 이론 교육과 장례예식장 현장 실습을 하고 장례지도사 자격을 취득했다.

5인 이상이면 장례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는 학원 측의 권유로, 학원의 무상임대 계약서를 지원받고 관련 기관에서 수차례 협동조합 설립 교육을 받았다. 조합원 가입신청서, 이사들의 인감증명서, 총회 회의록, 서류 등을 준비하여 변호사 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았다. 공증 비용, 등기 비용, 구청 등록 비용, 등기상 변동 사항 발생마다 상당한 등록 비용들을 부담하고 세무서에서 법인 사업자등록증을 받았다.

조합의 복식 회계 사용에 따라 전산 회계 프로그램 사용료, 법인 세무 신고에 따른 세무사 위탁 비용 등이 발생했다. 과정마다 부담스러운 비용 발생에 대해서는 협동조합 교육 시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았다. 강사들도 직접 조합을 설립한 경험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요약하면 협동조합도 영리를 추구하는 일반 회사와 같다. 조합원과 임원들은 명칭만 있을 뿐 소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관련 지방자치단체에서 사회적기업으로 지원금을 받더라도 회계 절차와 사용 규정을 지키지 못하면 지원 기관 감사 후 지원 비용을 반납하여야 한다. 조합이 부실해지는 경우 폐업을 위한 청산과 해산 절차가 법인 설립 때만큼 까다롭다. 장례 행사 수입이 입금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 장례 행사 수요 부족, 운영비와 전담 인력 인건비 부족 등으로 총회에서 후임자를 선출한 뒤 인계했다.

김치공장에서도 일했다. 하나로마트나 동네 큰 마트에 가서 배추, , 당근, 고춧가루, 젓갈 등의 원료들을 원산지와 구입 가격이 김치 매출 가격에 적절하게 맞도록 구입했다. 김치는 주문에 따라 서울 시내 어린이집, 요양 시설, 복지관 등에 차로 배달했다. 소독 업무도 했다. 장애인 친구들과 어린이집, 초등학교, 사회복지 시설들을 방문하여 소독 장비를 메고 작업을 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으로 방문요양보호사 일도 했다. 뇌졸중 환자, 루게릭 환자 등 1~3등급 중환자들을 보호했다. 날씨가 좋을 때는 환자를 휠체어 의자에 태우고 인근 개천으로 1시간씩 산책도 했다. 환자와 동네 병원을 가거나 외출할 때 난간이 없는 통행로에 오가는 자전거와 충돌 우려 등 안전상의 어려움이 많았다. 방문요양보호사 일은 환자가 대부분 거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체력이 중요하다. 노인 세대가 증가하기 때문에 수시로 방문요양센터에서 소개하는 일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왕릉 안전관리원으로 야간에 손전등을 켜고 혼자 숲길을 순찰할 때는 멧돼지도 만나고 고라니도 만났다. 멧돼지를 만나 방어 자세로 한참 바라보다 헤어지기도 했다. 야간에 폭우가 쏟아질 때는 왕릉 봉분 잔디가 무너질까 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대형 비닐 커버를 덮어 보호했다.

문화재 관리 야간 순환 근무도 했다. 주간과 휴무일에 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부근에 있는 서울노인복지센터 부설 서울어르신취업지원센터에서 교육을 받았다. 장년 취업 기본교육, 스마트폰 교육, 지하철 택배 교육, 환경관리자 교육, 가사관리원 교육, 일반경비원 신임 교육, 반려동물 돌보미 교육, 무인주유소관리원 교육, 도슨트 교육, 치매 예방 운동 및 관리 교육 등을 수강했다. 이러한 교육들은 기간제 계약을 마치고 일자리 취업 때 도움이 됐다.

현재는 2019년 초 소방관리자 자격으로 문화재 관리인으로 1년간 기간제 근무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근무 기간이 1개월씩 연장되고 있다. 월수입은 정부에서 정해 주는 시간급으로 결정되는 최하위 임금 수준이다.

과거 부모님들이 가족들 부양과 교육을 걱정하던 때를 생각하면 건강을 유지하고 현재와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하고 일할 의지가 있으면 일자리 소개 기관에 인터넷이나 직접 방문 시 능력에 맞는 일자리를 최대한 소개해 준다.

군 복무 후 직장을 다니는 두 아들은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직장 생활이 어려워지고 있다. 청년이 된 자식들은 자립과 결혼이 늦어지고 있다. 우리 세대가 젊었을 때도 어려움이 많았지만 자식 세대들도 어려움이 많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를 극복하고 우리 세대보다 좋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갈 것으로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치아와 신체 여러 곳에 신호가 온다. 동네 병원과 큰 병원에서 정밀검사와 치료를 받아야 할 곳이 많아지고 있다. 진료비도 증가하고 있다. 건강 조심하고 몸에 무리가지 않도록 일을 조절하라는 신호로 생각한다.

인생 후반 일터에서 일하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하고자 한다. 앞으로도 나는 일하면서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어려운 일들을 이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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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9. 16:55 기획 특집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 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해 먹고삽니까?”

 


먹는 거 하나는 제대로 먹자주의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

 

 

IMF의 영향을 받지 않은 두 부류가 있다. 엄청난 부자. 그리고 엄청나게 가난한 자.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경기가 좋든 안 좋든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는 양극단의 사람들이다. 단칸방과 재래식 화장실, 바퀴벌레, 연탄으로 불을 때고, 가스레인지로 물을 데워서 겨울을 견뎠던 나에게 IMF는 먼 세상 이야기였다. 좋은 게 있다면 더 이상 나빠질 게 없기에 걱정도 불행도 없었다. 보통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돈을 열심히 버는 게 꿈이 되지만, 이왕 뭔가 바꿔 보려면 내 삶보다는 세상을 바꿔 보고 싶었다. 덕분에 나의 물질적 욕망은 똥물이 튀지 않는 화장실과 보일러와 베란다가 있는 임대아파트다. 가난이 익숙한 탓에 가난한 활동가의 삶도 딱히 대단하다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덕분에 코로나19로 인한 타격도 종종 하던 강연이 취소된 거 외에는 별 타격이 없다.

주말에 배달해서 받는 월급 70만 원과 한겨레21,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세 군데의 기고로 얻는 소득 35만 원이 내가 버는 정기적 소득이다. 105만 원으로는 조금 빠듯해, 강연과 방송 출연으로 얻는 출연료로 130~140만 원 정도를 번다. 불만이 있다면 오르지 않는 원고료지만, 길바닥에서 배달해서 얻는 하루 일당이 원고료보다 적기 때문에 글 쓰는 것만큼 가성비 좋은 알바도 없다. 평소에 생각했던 것을 마감을 만나면 끄적이면 그만이다. 세상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주목하지도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서 살다 보니 글감은 내 삶 주변에 널려 있다. 가성비를 생각해 되도록 2시간을 넘지 않고 글을 쓰려고 해서, 편집 노동자들이 고생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글쓴이 박정훈 씨. 사진_ 라이더유니온 페이스북.


생계비를 벌기 위한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나머지는 내가 하고 싶은 노조 활동에 쓰는데 이렇게 살다 보면 사람 성격이 안 좋아지기도 한다. 특히 배달 산업에 대한 인터뷰나 자문을 요청할 때 짜증을 내기도 하는데 주로 내게 묻는 사람들은 월급 받고 하는 질문이지만, 나는 공짜로 알려 주기 때문이다. 라이더유니온을 처음 만들었을 때는 1시간 동안 전화통을 붙잡고 배달 산업 구조 전체를 물어 놓고는 라이더유니온한마디 안 넣었던 기자도 있었다. 이런 무료 노동이 쌓여서 라이더유니온이 알려지고 그 덕분에 나 역시 사회적으로 알려져 강연도 하고 기고도 하게 되니 완전히 공짜는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돈인 조합원을 붙잡고 인터뷰를 하면서 한 푼도 주지 않는 몇몇 언론사의 행태는 묵과하기 힘들었다. 취재원을 사서 공적인 뉴스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저널리즘적 가치가 있을 수 있지만, 언론사가 어차피 기업의 광고로 돌아가고 발행 부수와 조회 수가 중요하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닌가. 한 시간 인터뷰에 100만 원을 주는 건 말도 안 되지만, 최소한 최저임금과 교통비를 주는 건 정보를 왜곡되게 사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물론, 돈 한 푼 안 나오는 일들을 하는 사람들과는 생각은 하지 않고 기쁜 맘으로 을 같이할 수 있다.

라이더유니온 로고. 이미지 출처_ 이더유니온 페이스북.


이렇게 쓰고 보면 참 불행하게 산다고 걱정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내일 쓸 돈을 모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 오늘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 먹는 거 하나는 제대로 먹자주의자8천 원, 1만 원짜리 밥도 아깝지 않게 먹는다. 날 아는 사람은 그렇게 먹어도 살이 찌지 않아 가성비가 떨어질 거라 여길지도 모르지만(나도 속상하다) 맛있는 밥은 그 자체로 행복이다. 요즘 고기를 끊었더니 직접 해 먹지 않으면 식비로 더 써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곤란하긴 하지만 적어도 밥 먹는 데 돈 아끼지 말자는 주의다. 김치와 밥으로 끼니를 해결하던 어린 시절의 한풀이일 수도 있겠다. 먹는 것 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돈은 월세, 그 다음으로 많이 나가는 돈이 후원금이다. 12개 단체에 매달 CMS 회비를 낸다. 내가 하지 못하는 운동에 월 1만 원이라도 후원할 수 있는 건 큰 기쁨이다. 매달 후원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문자를 보면, 안 보내 주셔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걸 빼는 것도 시민단체 상근자들에게는 일이라 그냥 놓아둔다.

욕심을 버리고 유유자적 살자는 게 아니다. 이렇게 살려면 공동체에 의존하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 집 전세금의 절반은 SH공사의 무이자 대출로 해결했다. 나머지 절반의 전세금은 청년희망통장으로 마련했다. 베란다도 없고, 10평에 불과하지만 전세금 떼일 염려 없는 임대아파트에도 당첨됐다. 임대아파트에 필요한 보증금은 공익활동가협동조합 동행에 대출 신청으로 해결할 예정이다. 근로장려세제를 비롯한 각종 복지 정책들도 프리패스다. 국민들이 내는 소중한 세금과 연대로 생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정보를 가진 사람이 복지 혜택도 받는 현실이다. 각 기관의 홈페이지에 매번 접속하고 긴 안내문을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공인인증서를 깔고,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각종 서류를 떼서 제출해야 한다. 컴퓨터도 있고 프린터도 있고 팩스도 있고 스캐너도 있고 이걸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면 쉬운 일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복지 신청을 하다가 좌절하고 포기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해야지 왜 나랏돈을 받아먹으려고 하냐, 나라가 해 준 게 뭐냐고 따져 묻는다. 여기다 대고 나라가 해 주는 게 얼마나 많은데,라고 해 봐야 소용없다. 공동체의 힘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은 공동체에 그만큼 기여하게 되어 있다. 가난한 이들이 타인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보편적 복지의 확대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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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29. 16:07 알림 / 엮은이의 글


발행인의 글

<작은책>25주년을 맞이했습니다. 199551, 노동절에 맞춰 창간한 <작은책>은 그동안 노동자들의 생활글쓰기를 선도해 왔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는 고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을 길잡이로 삼고 이 사회의 주류들이 아닌 평범한 서민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모임도 만들고 노동자들이 쓴 글을 찾아 실었습니다. 지금까지 <작은책>에 실렸던 생활글에는 서민들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이달의 책이 이끄는 여행은 하명희 작가가 어서오세요 베짱이도서관입니다(박소영, 그물코)를 읽고 느낀 이야기입니다. 이 책은 박소영 관장이 후원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어 낸 책입니다. 하명희 작가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천변을 산책합니다. 독자님들도 함께 산책하면서 감상하시기 바랍니다.

<작은책> 25주년 특집은, 인물을 인터뷰하지 않고 <작은책> 독자 25분을 무작위로 선정해 요즘 뭐 해 먹고삽니까?”라는 주제로 글을 받았습니다. 라이더유니온 위원장도 있고 농사꾼, 글 쓰는 주부, 정년퇴직하고 다시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다 버티면서 먹고살고는 있지만 요즘 모두 코로나19 때문에 더욱 힘들어졌답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로가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서 힘을 내면 좋겠습니다.

독자님들, 어제 선거 결과는 잘 보셨나요? 민주당이 압승했습니다. 세월호 막말을 일삼던 몇몇 국회의원이 낙선했네요. 오늘은 세월호 참사 6주기, 올해는 진실이 밝혀질까요?

 

2020416

발행인 안건모 올림



목차

 

책이 이끄는 여행

매화 편지-마음은 어디서 왔을까   하명희

12 발행인의 글

13 원고를 기다립니다

 

작은책 25주년 특집_ 작은책독자 25명에게 물었다.

"요즘 뭐 해 먹고삽니까?”

 

16 먹는 거 하나는 제대로 먹자주의다   박정훈

20 책방만 운영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을까?   고희라

24 너희가 와야 학교는 봄   구자숙

28 오늘 밥값 했냐?”   김영탁

32 <작은책> 때문에 귀농한 사연   도상록

36 지금도 거기 살아?”   김지영

40 돈은 없어도 가오는 있어야지   홍세화

44 12월이면 돈이 왕창(?) 쏟아집니다   류미례

48 연봉은 10분의 1로 줄었지만 도시보다 오백 배는 낫다   이재관

52 재택근무도 가능한 프리랜서   유지향

56 일자리는 너무 많은데…   제희덕

60 허울 좋은 프리랜서 반백수   이명옥

64 월급 도둑이 된 느낌이 들 때   최숙하

68 짧게 깎아 주세요, 초여름까지 버티게”   최인기

72 3만 원짜리 공립학교 강의는 쫌…   이하나

76 보통 1시쯤 일어납니다   이동수

80 어쩌다 보니 치과의사   송필경

84 애들도 없는데, 애들도 없는데”   이현림

88 온라인 개학이면 점심도 온라인으로 나오냐?”   안미선

92 정년퇴직하고 건설 현장 부소장(?)이 되는 방법   이근제

96 연봉 노출 절대 금지게다가 서약서까지?   김진회

100 저는 요즘 핑계부엌으로 먹고삽니다   송추향

104 숲해설가, 가슴은 뛰지만 독립은 글쎄…   신혜정

108 아이한테 위로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백남호

112 백만 년만에 온 부장의 문자에 절이라도 하고 싶다   최은영

 

세상 보기

116 생태 이야기

우리를 감싸는 5월의 바람   박병상

122 존버 씨의 시간들

재난, 비상근무 그리고 공무원 과로사   김영선

128 정작 모르는 유물 이야기

산수화 속으로   박찬희

134 독립영화 이야기

어디 장남도 없이 무덤을 파냐   류미례

140 책 읽고 딴 생각

왜 가장 인권적인 것이 가장 교육적인가       변정수

144 새로 나온 책   편집부

148 지난 호를 읽고

150 편집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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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세상 보기

책 읽고 딴 생각_ 혁명 노트(김규항, 알마, 2020)

 

물신 전체주의 사회

변정수/ 출판 편집자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 사회를 그 이전과 확연하게 구분하게 해 주는 단절적인 변화의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을 꼽는다면, 그건 아마도 한국전쟁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전쟁 이전 삶의 모습과 전쟁을 겪고 난 뒤 삶의 모습은 확연하게 달라졌고, 지금 사람들이 사회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의 뿌리를 더듬어 가자면 어김없이 전쟁 체험에 맞닿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동안 이제 막 사회에 나서려는 젊은이들과 긴밀하게 접촉해 오면서 이런 상식과 조금은 다른 시사점을 얻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1997년의 구제금융 사태와 그로 인해 촉발된 사회 재편은 어쩌면 한국전쟁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그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른 사회를 만들어 낸 역사적 계기가 아닐까 싶달까. 그 실체가 뭔지는 아리송한 채로도,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은 분명히 감지됐던 것이다. 하나는 대체적인 경향성에서 그 이후에 성장기를 보낸 이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 이전에 성장기를 보낸 세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 다른 하나는 기성세대는 그들대로 그 이전에 어떻게 살았었는지를 까맣게 잊었으며 이미 중년에 접어든 후속 세대는 또 그들대로 그것을 아예 상상조차 하지 못하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밀레니엄이 바뀌던 그때 한국 사회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그 변화의 성격은 여러 각도에서 살필 수 있고, 단순한 개념 틀 하나로 손쉽게 환원시킬 수도 없다. 다만 그 모든 국면을 매개할 수 있는, 그 모든 계기의 가장 깊은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을 근본적인동인이 있다면 그 실체가 무엇일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명해 줄 무슨 만능열쇠(따위가 있을 리도 없거니와)를 찾으려는 건 아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들만을 수박 겉 핥듯 좇아 봤자 헬조선이라는 비명에서 여실히 드러나듯 개탄과 냉소 말고는 남는 것이 없을 게다. 다기한 현상 이면을 꿰뚫어 통찰하는 데 나침반이 돼 줄 만한 화두가 늘 목말랐다. 그리고 김규항의 신작 혁명 노트에서 유력한 실마리 하나를 얻는다. 지식인이란 바로 이런 사회적 역할을 해 주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렷다. 저자는 지난 20년 사이에 일어난 한국 사회의 변화를 물신주의의 전면화로 설명한다. 이렇게 시야가 환하게 열리는 느낌이 도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혁명 노트(김규항알마, 2020)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지만 전근대적 농촌 공동체 습속이 많이 남아 있는, 삶과 관련된 많은 것들이 아직 상품이 아닌 사회자본주의 사회지만 사회주의 요소들이 도입되어 있는, 생활의 기본 요소들이 상품이 아니거나 상품의 속성이 덜한 사민주의 복지사회에서 물신성이 억지된다면서, 전근대 농촌 공동체에서 사람들에게 인심이나 정이 있었던 게 그들이 경제적 안정을 누렸기 때문이 아니듯 이런 사회들에서 사람들이 좀 더 인간적이고 여유로운 태도를 보인다면 그것은 흔히 말하듯 경제적 안정때문이 아니라 물신성이 적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혹은 모든 아이가 대학 입시라는 한 경로에 줄 세워져 인생의 등급이 매겨지 교육 현실은 한국 민주화가 결국 물신 전체주의 사회로 귀결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들 끄덕이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에게 자본주의를 극복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물신성을 극복한다는 뜻이고, 그런 통찰은 어느샌가 막연한 이미지로 전락해 버린 혁명에 대한 관습적인 이해를 전복해 낸다. 우리가 우리네 일상 구석구석을 파고든 데다가 심지어 내면까지 잠식해 버린 물신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혁명은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극복의 목적은 정의롭고 인간적인 경제 시스템을 만드는 게 아니라, 인간이 경제 차원을 벗어나 더 고양된 삶을 구현하는 데 있다.” 거칠게 빗대자면,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불가피하게 인간다움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건 결코 혁명이 아니며 실은 혁명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그것이야말로 왜 혁명을 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대의에 대한 배반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건설만이 아니라 실은 이행이기도 하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어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 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혁명은 인민의 자기해방이기 때문이다. 해방은 나를 억압하는 시스템 앞에 서는 일, 내가 그 안에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사실 앞에 서는 일을 바탕으로 어느 순간 더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는 결단에 이르는 과정이다. 그렇게 투쟁하는 자유인으로 거듭나는 데는, ‘더는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자각과 노예가 존재하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는 성찰이라는 두 경로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 해방의 두 경로는 투쟁으로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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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살아가는 이야기_ 교장 일기

 

늦고 싶어 늦는 아이는 없다


최관의/ 서울율현초등학교장, 열다섯, 교실이 아니어도 좋아저자

 

 

9, 정문 닫을 시간이야. 3학년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터덜터덜 걸어오는 게 보여. 눈에 보이는 아이 놔두고 문 닫는 게 매정하다 싶어 기다렸지.

문 닫는다.”

고개 들어 나를 잠깐 보는 것 같더니 다시 느릿느릿.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나.’ 하며 지각인 거 모르냐. 얼른 와라라는 말이 목구멍으로 밀고 올라오는 걸 꿀꺽 삼켰어. 잔소리한다고 지각 안 하면 맨날 잔소리하게.

아침은 먹었니?”

아뇨.”

들어가면 우유라도 미리 먹어. 담임선생님께 아침 못 먹었다고 말씀드리고.”

싫어요.”

이왕 늦은 거 천천히 올라가. 넘어질라.”

고개 숙인 채 그 걸음걸이 그대로 걸으며 하는 말에는 귀찮음과 어두움과 건조함이 느껴져. 아침맞이 때마다 아무리 아는 척해도 눈길 주지 않고 나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고개 숙이고 혼자 입을 꾹 다물고 등교하는 녀석.

지각하는 아이들만 보면 나도 모르게 불쑥 올라오는 말을 안 하도록 만들어 준 아이가 있어. 아현초등학교에서 5학년 담임할 때 만난 민선이. 민선이는 거의 날마다 지각을 했지. 수업 시작하는 9시에 오면 아주 훌륭한 거고, 1교시 중간이나 2교시, 가끔은 3, 4교시에 오기도 했는데 다행히 결석은 안 해. 우울한 얼굴에 말수는 적고 아이들과 즐겁고 맛있게 어울리지도 않아. 혼자 책 읽는 시간이 많고.


녀석이 늦을 때마다 그저 누구나 습관적으로 하는 말을 했어. 늦었구나.”, 조금 일찍 다녀라.”, 날마다 늦으면 어떻게 하니? 자리에 앉아서 얼른 수업 준비해.”, 내일부터는 조금 일찍 오도록 해 봐.” 내 표정과 말투가 좋을 리 없지. 가끔 무슨 사정이 있는지 물어보지만 민선이는 아무 말 안 했어. 그냥 늦게 자서 그런다는 말을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지. 마음을 안 연 거야.

그렇게 비슷한 하루하루를 보내던 5월 하순. 2교시 수업을 하다 우연히 창문 밖을 보니 교문으로 들어서는 민선이가 보여. 2학년 여동생 손을 잡고 쪽문으로 들어서더니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거야, 꽤 오래.

그 순간 나는 민선이가 되었어. 아무도 없는 운동장, 멀리 교실에서는 수업하는 소리만 가끔 들릴 뿐 조용하고 차분하고 엄숙한 학교. 나와 동생만 뚝 떨어져 있어. 저 학교 건물 안에 있는 아이들은 우리 둘과는 달라. 아이들과 선생님은 내게 관심도 마음도 없어. 나는 날마다 늦는 아이고 친구도 없고 옷은 꾀죄죄하게 입고 다니는 그런 아이. 그래도 나는 교실에 가야 해. 따로 갈 데가 없고 집에 있는 건 더 싫고 무섭기까지 해.

언니 손을 앞뒤로 흔들며 까부는 동생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별 감정 없이 몇 마디 던지는 민선이. 축 처지고 지치고 무거운 저 발걸음에서 또래 다른 아이들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나. 한 걸음 한 걸음이 아픔이고 슬픔이야. 집에는 어떤 사정이 있기에, 아침저녁 그리고 밤에 어떤 분위기와 흐름이 있기에 저렇게 어두운 얼굴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교에 오게 될까. 지각할 때마다 저 지친 발걸음으로 등교했을 텐데.

도대체 나는 뭘 위해 선생을 하지? 내가 사람을 본 거야, 아니면 껍데기만 보고 매달려 사는 거야. 담임으로서 민선이의 저 삶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한 채 지식이나 욱여넣고 규칙 잘 지키는 사람 만들겠다고 잔소리나 하다니. 아이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모습을 그려 놓고는 거기에 맞춰 남녀노소 교사든 아니든 누구나 습관적으로 할 수 있고 하는 잔소리나 하고.

그 뒤로 민선이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녀석은 집안 이야기를 하지 않았어. 민선이가 아침저녁으로 동생과 밥을 차려 먹는다는 것까지만 알았지. 집안의 흐름과 사는 형편은 그냥 짐작만 했고. 민선이에게 말했어. 늦어도 내게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당당하게 들어와라. 학교에 오는 것만으로도 너는 큰 공부 하는 거다. 대신 수업 흐름만은 따라가자. 늦어서 못 한 건 친구들이나 내게 물어서 해 가자. 밥을 못 먹고 올 때는 미리 우유를 먹도록 하고.

난 아이들에게 말했지. 부모님이 일찍 일하러 가셔서 민선이가 아침밥 차려 먹고 동생까지 챙겨서 온다. 어른도 힘들어하는 어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늦는 게 당연하다. 밥 먹고 동생 챙겨 학교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공부니 민선이가 늦는 거에 대해서 너무 마음들 쓰지 않도록 하자. 그리고 비슷한 어려움으로 늦는 사람은 말해 다오.

그러고는 민선이가 당당하게 늦도록 했어. 이상한 아이, 늦는 아이, 게으른 아이라는 어두움을 걷어 내고, 대신 부지런하고 책임감 강하며 손이 야무진 아이 이미지를 만들어 갔지. 아이들과 잘 어울리도록 자리 배치부터 모둠 구성, 현장 학습과 반에서의 역할 등도 신경 쓰고. 늦었다고 잔소리하는 일은 없었어. 오히려 늦게 오면 수업 중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멋지다고 했고. 그런데 지각이 늘어나는 게 아니라 줄었어. 나중에는 840분 전에 오기 시작했고 6학년 올라갈 무렵인 2월 어느 날 아침엔 내게 와서 말하기도 했어.

선생님! 오늘 우리 반에서 가장 먼저 왔어요.”

그렇게 6학년으로 올려 보냈고 그해 스승의 날에 민선이로부터 편지를 받았어.

선생님, 오학년 때 지각해도 야단치지 않고 기다려 줘서 고맙습니다.”

지각하거나 공부 못 하는 게 삶의 목표인 아이는 없다는 너무나 당연한 이치를 모르고 사는 나를 깨우쳐 준 민선이! 난 지금도 늦는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안 해. 하더라도 아이에게 맞게 하려 노력하지. 민선이가 지금은 서른 살 되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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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204월호

책이 이끄는 여행

 

조선왕조실록의 전염병과 코로나19



_ 김용심, 사진_ 정인열

 

세상이 온통 코로나 이야기다. 치명적인 전염력을 지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잠시 주춤하나 싶더니, 신천지라는 희대의 종교 단체 활약으로 확진자가 수천 명을 넘어서며 나라를 심각상태로 만들었다. 몇백 원 하던 마스크는 몇십 배가 뛰었고 거리는 온통 마스크 쓴 사람들뿐이다.

옛날에도 전염병이 돌면 이렇게 난리였을까. 조선왕조실록에는 갖가지 전염병, 역병, 여역(癘疫, 전염성 열병)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나온다. 5대 임금 문종은 나날이 번지는 전염병을 걱정하며 친히 악병을 구료하는 글을 써서 내리는데, 그 글이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

병의 초기에는 마치 불이 처음 타오르는 것과 같아서··· 타인에게 접촉만 하면 곧 전염이 확대되어 마치 불이 땔감을 얻은 것처럼 한없이 연소하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병에 걸린 사람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인적이 끊긴 섬에 몰아넣고 의복, 양곡, 약품들을 넉넉히 주어 타인에게 더 번지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문종실록195)

그 뒤에 붙인 다만 (병자들을) 빠짐없이 찾아내기란 실로 어려워서, 필연코 다 찾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재미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병을 숨기는 자들은 여전히 있는 모양이다.

사실 이번 달은 4월인 만큼 4·3항쟁 책을 들고 제주도를 다녀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하필 항공권 예매를 하려던 날, 제주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절로 손이 멈칫거렸다. 갈까 말까 주저하다 대신 떠올린 섬이 강화 교동도였다.

강화에서도 다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교동도는 오랫동안 왕족의 유배지였다. 서울과 가까우면서도 섬이라는 이점이 있어 격리와 감시가 쉬웠기 때문이다. 멀게는 고려의 희종, 강종, 우왕이, 조선 시대에는 안평대군, 영창대군, 연산군 같은 이들이 이 섬으로 유배되어 거의 이 섬에서 죽었다.

▲ 연산군 유배지. ⓒ작은책(정인열)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연산군과 전염병 이야기가 흥미롭다. 흉년과 역병이 한창이던 때, 연산군이 낙정미를 왕실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낙정미란 도정 과정에서 누락된 쌀을 뜻한다. 이에 구휼미로 내줘도 모자랄 쌀을 왕실에 바치라는 말에 간관들이 들고일어나자 연산군은 니들은 내 신하 아니냐?”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말하기를, ‘전염병이 크게 일어나니 두려워하여 덕을 닦고 살피기를 청한다하는데, 전염병은 본디 수양하여 그칠 수 있는 게 아니다. ···두려워하여 덕을 닦아 천재지변을 없애는 것은 다 옛날 성군들이나 했던 일이고··· 어진 임금이었던 요제와 탕왕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나보고 어쩌라고?”(연산군일기9215)

그리고 열흘 뒤에는 아예 알이 굵은 밭벼쌀을 100석이나 내수사에 보내라고 지시한다. 고통받는 백성들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다. 연산군이 마지막에 머문 곳이 바로 교동도다.

예전에는 배로 가야 했던 교동도는 2014년 바다와 육지를 잇는 연륙교가 생기면서 차로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다. 다리를 지나는데 창 너머로 펼쳐진 풍경에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아니, 뭐가 이리 예뻐. 드넓은 바다와 눈부신 햇살, 간드러지게 뻗어 나간 해안선이 그림처럼 눈에 박힌다.

▲ 교동도 봉소리 앞 바다. ⓒ작은책(정인열)

교동도에 도착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교동 제비집이었다. 진짜 제비집은 아니고 교동도 안내 센터를 일컫는 말인데, 문이 꽁꽁 닫혀 있었다. 예방 차원으로 일시 폐쇄한 것이다. 코로나의 여파는 이 작은 섬에도 여지없이 찾아와 있었다.

제비집 옆의 대룡시장을 구경한 뒤, 가까운 고구리 조선 시대 한증막을 가 보았다. 돌과 황토를 이용해 둥글게 쌓은 한증막은 치병과 탕욕을 위한 시설로, 70년대 초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약도, 치료도 받기 힘든 백성들은 정 아프면 이런 한증막에 와 뜨거운 열로 고달픈 몸을 달래지 않았을까.

▲ 교동도 고구리에 있는 조선시대 한증막. 돌과 황토를 쌓아 만들었다. ⓒ작은책(정인열)

중종 때에는 전염성 열병인 여역이 유행했는데, 중종 21년의 기록을 읽다 보면 지금의 질병관리본부를 보는 기분이다. 각 도의 관찰사들이 연일 임금에게 도의 상황을 보고한다.

도내에서 여역으로 죽은 사람이 460여 명입니다.”(충청도)

도내에서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총 560명입니다.”(전라도)

도내에 유행병으로 죽은 사람이 삼척 41, 양양 58, 간성 9, 고성 18명입니다.”(강원도)

그리고 뜨거운 여름 막바지에 반가운 소식이 올라온다.

전라도에 전염병이 그쳤다.”(중종실록2173)

코로나도 날씨가 더워지면 그렇게 그쳤으면 좋겠다. 새삼 바라면서 한증막을 떠나 교동읍성을 향했다. 한때는 번창했을 읍성은 지금은 남문 하나만 남아 있다. 읍성 안으로 들어가자 흔한 시골 풍경이 펼쳐진다. 길을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니 밭둑 사이로 두 개의 돌기둥이 보인다. 이제는 허물어져 사라진 옛 교동 관아의 흔적이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연산군이 한때 머물렀다는, 볼품없는 연산군 적거지가 있었다.

▲ 교동읍성 남문. 오래전 폭풍우로 무너진 것을 2017년에 새로 세웠다. ⓒ작은책(정인열)

▲ 교동 관아 부지에 남아 있는 돌기둥. 다 무너지고 기둥만 남았다. ⓒ작은책(정인열)

▲ 연산군이 머물렀다는 적거지.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작은책(정인열)

연산군은 교동도에 유배된 지 3년 만에 병에 걸린다. 담당자가 연산군이 역질로 몹시 괴로워하여 물도 마시지 못할뿐더러, 눈도 뜨지 못합니다하고 보고를 올리는데, 바로 그 이튿날인 118, 연산군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역병 걸린 백성의 구휼미를 빼돌린 죗값을 그렇게 받은 것일까.

연산과 달리 성군 세종은 역병이 돌자 먼저 나선다.

임금께서 전염병 걸린 자를 구호하지 못하고, 혹 생명을 상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사람들을 시켜서 거리를 돌아보게 하였다. 그때 소격전(昭格殿)의 종인 눈먼 여자 복덕이 아이를 안은 채 식량이 끊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이에 임금이 놀라 즉시 소격전의 책임자를 추국하고··· 복덕에게는 쌀과 콩을 한 가마니씩 주었다.”(세종실록14423)

소격전은 하늘과 별에 제사를 지내던 도교 관청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은근히 눈치를 보던 곳. 거기에 소속된 눈먼 여종이라니, 복덕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희한하게도 병은 힘없고 가난한 이들에게 더욱 혹독하게 찾아오는 듯하다.

퓰리처상 수상 작가인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고전 , , 에서 유럽인이 토착 원주민을 몰아내고 신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로 병균을 들었다.

인디언이 죽은 주된 이유는 구세계의 병원균이었다. ···만약 유럽이 다른 여러 대륙에 이 사악한 선물(전염병균)을 주지 않았다면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병균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하지만 가축을 키우며 일찍부터 면역력을 키웠던 유럽인과 달리, 청정한 지역에서 자유롭게 살던 원주민들은 그 지독한 균을 이겨 내지 못했다. 유럽의 병원균은 아메리카 원주민의 90퍼센트를 몰살시켰다.

의학과 과학이 발달한 지금, 예전과 같은 집단 떼죽음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역병이 돌면 가장 고통받는 이들은 언제나 힘없는 약자이다.

연산군 적거지 너머로 오래된 느티나무가 보인다. 마을을 지키듯 서 있는 나무는 우아하고도 웅장하다. 그 수려한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위로가 된다.

▲ 교동 읍성에 있는 오래된 느티나무. ⓒ작은책(정인열)

소격전의 노비 복덕이 생각났다. 먹을거리도, 약도, 한증막을 찾을 기력조차 없었을 눈먼 복덕은 더듬더듬 이런 수호목을 찾아 빌지 않았을까. 굶지 않기를, 병이 낫기를, 제발 아기가 건강하기를. 그 소원을 하늘과 별이 들었는지 인자한 임금 세종이 복덕을 구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비단 전염병 걸린 사람뿐만 아니라, 유리하여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도 죄다 찾아서 아뢰라.”

그들 또한 구하겠다는 의지. 정말이지 세종답다. 그러고 보면 코로나로 고통받는 이들 또한 확진된 병자들만이 아니다. 자가격리된 가족들도, 전전긍긍하는 이웃들도, 무너진 경제에 우는 소시민과 자영업자들까지···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전염병은 언젠가는 잡힌다. 하지만 병이 지나간 뒤에 피폐해진 백성의 삶은 또 다른 얘기다. 그것마저 보듬는 것이 아마도 통치의 몫이리라. 어려운 상황에서 애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실록의 한 부분을 전한다. 백성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처럼 하라.”

불은 꺼지고 삶은 여전히 계속되리니, 모두 힘을 내자!

* <작은책> 편집위원인 글쓴이는 《문체반정, 나는 이렇게 본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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