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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일하는 사람들의 글쓰기' - 진보월간 <작은책>입니다. 1995년 노동절에 창간되었습니다. http://sb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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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책> 2019년 6월호

살아가는 이야기

청년으로 살아가기

 

죽을죄를 저지른 건 아니었구나

유OO/ 촌스럽게 살고 싶은 스물일곱 살

 

 

아이를 만들었던 날, 아랫배가 아프고 피도 살짝 나왔다. 으레 달거리(월경)인 줄 알았다. 달거리할 때는 아이를 배지 않는다고 믿었기에 이때다싶었던 그와 콘돔을 끼지 않고 몸을 섞었다. 그 뒤로 두 달이 지났는데도 생리를 하지 않았다. 산부인과에 갔더니 임신 12주째였다. 의사 선생님이 그때 나왔던 피는 배란혈이라고 했다.

초음파로 배 속에 있는 덩어리를 어렴풋하게 봤다. 심장 뛰는 소리도 들었다. 놀랍고 신기했다. 혼자 좋아하지 말자고 되뇌면서도 나도 모르게 배를 감싸 쥐었다. 그새 모성애라는 게 생긴 것 같았다.

아이를 함께 만들었던 그에게 아이를 뱄다고 했다. 그는 아이를 기르기엔 아직 이르다고 했다. 맞는 말이었다. 목숨 하나를 책임지기에는 갖춰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아이를 지우기로 했다.

수술을 앞두고 그는 내 걱정을 했다. 나는 걱정하지 말라며 씩씩한 척했다. 하지만 혼자 들어갔던 수술실은 너무도 차가웠다. 세균을 없애려고 소독했을 수도 있고, 어린 목숨이 죽었던 곳이라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을 수도 있다. 차가운 수술실에서 몸 안으로 들어오는 쇠꼬챙이는 차갑다 못해 시렸다.

수술은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침대에 누워 영양제 링거를 꽂은 채 병실로 왔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너 혼자만 아파야 하는 게 속상해.” 슬퍼하는 그를 다독이려고 괜찮아라며 웃었다. 수술비는 꽤 비쌌다. 영양제, 약값까지 더해지니 백만 원 가까이 되었다. 그는 돈 걱정은 하지 말라면서 모두 자기가 내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그 앞에서는 괜찮은 척했지만 혼자 있으니 많이 힘들었다. 쿵쿵 아이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엄마가 미안해라고 생각했다가 스스로 엄마라고 여길 자격이 있나 싶어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울었다. 수술하기 전에 병원에서 아이를 지우는 게 불법이라고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무서웠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몸은 예전 같지 않았다. 힘도 없고 자주 피곤했다. 건널목을 걷다가 차에 치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이게 우울증이구나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이나 친구를 만나면 웃었다. 내 걱정을 하는 그에게도 잘 지낸다고 했다. 아무도 모르게 벌어진 일이었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살면서 겪은 가장 힘든 일이 있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야 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와 헤어졌다. 도시에서 살고 싶은 그와 달리 나는 시골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골에 내려와서 새 남자 친구도 사귀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면서 지나간 사람은 잊혀 갔지만, 아이를 지운 일은 잊히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애를 가졌다고 초음파 사진이나 영상을 SNS에 올릴 때, 영화에서 아기를 낳거나 임산부가 나오기만 해도 가슴이 무너져 내리듯 아팠다. 그때마다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꺼이꺼이 울었다.

수술하고 푹 쉬었어야 했는데 곧바로 괜찮은 척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날이 갈수록 몸은 안 좋아졌고 삼 년이 지나니 기력이 바닥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면역력이 약해져서 아토피도 생겼다. 기운을 북돋워 주는 한약을 먹고 침을 맞았다.

나는 이렇게 아픈데 그는 잘 지낼 것만 같았다. 같이 저지른 일인데 나만 죗값을 치르는 것 같아 억울했다. 수술비는 그가 냈지만, 한약값이 부담될 때는 조금 보태 달라고 해 볼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인제 와서 책임을 묻는 나에게 그가 뭐라 할 것 같았다. 그 말에 맞받아칠 자신이 없었다.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되었다. 좋게 넘어갈 일도 삐딱하게 보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공동체 식구들이나 친구들, 가족들은 그런 나를 보며 안타까워했다.

늪에 빠져 있던 내게 힘을 준 건 페미니즘 에세이 책이었다. 특히 다른 여자들이 아이를 지웠던 이야기를 보며 위로를 받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죽을죄를 지은 건 아니었구나.’ 그 솔직한 이야기들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더는 나 때문에 다른 이들이 아프지 않길 바랐다. 기력을 되찾으려고 국선도를 하고 명상하면서 마음을 비웠다. 그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으로 지운 게 아니라 잘 키울 자신이 없어서, 얼른 다음 생으로 가서 더 좋은 부모 만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이를 지우고 나서 네 번째 봄을 맞았다.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여성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자는 목소리를 많이 냈는데 드디어 받아들여진 거다. 여태 길거리에 한 번도 나가 보지 못했는데 목소리를 내 준 모든 이들에게 고마웠다.

한 국회의원이 14주까지 임신중절을 할 수 있게 낙태죄를 폐지하자는 법안을 발의했다고 했다. 석 달 가까이 아이를 밴 적이 있는, 그 아이를 지우고 죄인으로 살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다. 이제는 죄책감에 짓눌리지 않고, 잠깐이나마 내게 와 준 그 아이에게 사랑을 보내려 한다.

조금씩 용기를 내어 내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놓았다. 떳떳해지면 좀 괜찮아질까 싶었기 때문이다. 같이 살던 이모, 친한 친구, 지금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했다. 다들 그동안 고생 많았다라며 나를 다독여 주었다. 엄마에게도 말했다. 힘없는 나를 보면서 그 누구보다 걱정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많이 놀라면서도 언제, 누구랑 그랬는지’, ‘왜 이제껏 말 안 했는지다그치지 않았다. 고마운 이들을 위해서 얼른 튼튼해지고 싶었다.

올봄에 몸이 많이 좋아졌다. 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물 뜯으러 다닐 만큼 힘도 나고 피부도 좋아졌다. 기운이 생기니 하고 싶은 것도 생겼다. 첫 번째가 내 이야기를 글로 쓰는 것이었다. 혹시 나처럼 아파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사람이라도 나를 보고 힘을 얻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힘든 일을 겪었음에도 우리는 살아있고, 삶은 소중하다고 말해 주고 싶다.

posted by 작은책